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일본의 병합론, 일본의 병합 추진과 대한제국의 멸망-제3권 통감부 설치와 한국 식민지화

몽유도원 2013. 1. 18. 11:41

제5장 일본의 병합 추진과 대한제국의 멸망


일본의 병합론

친일세력의 ‘보호국화’ 옹호와 발호

병합조약과 대한제국의 멸망


1. 일본의 병합론


1. 통감의 점진적 병합론

1904년 2월 일본은 러시아와 전쟁을 일으켜 그들이 추진했던 대륙진출정책을 표면했고, 한국병합 시나리오를 서서히 진행해 갔다. 일본은 러시아와 개전 당시 이미 한국을 병탄하려는 의도를 분명히 하고 있었다. 러일전쟁 발발 직후인 1904년 5월 일본 각의는 한국에서의 ‘정치상 및 군사상 보호의 실권을 확립하고 경제적 이권을 취득해서 착실하게 그 경영을 실행하는 것이 급무’ 註1)라는 요지의 대한방침對韓方針을 결정하였다. 이른바 보호권 확립 및 경제적 이권 획득에 관한 긴급 정책안이 수립된 것이다. 그후 러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1905년 6월 일본은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글에서 한국을 그들의 세력권 내에 편입시켜 한국을 완전히 지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며, 註2) 한국병탄 야욕을 대외적으로도 드러냈다. 일본은 러일전쟁을 통하여 한국병합 방침을 구체화해 갔던 것이다.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1905년 7월 계태랑桂太郞-태프트협정으로 미국으로부터 한국지배권을 인정받았고, 8월에는 제2차 영일동맹을 체결하여 영국으로부터, 9월에는 러시아와 맺은 포츠머스강화조약을 체결하여 외교적으로 한국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대한제국은 철저하게 국제사회로부터 고립된 ‘국제적인 미아’나 다름없었다. 국체라는 허울만 존재할 뿐 실상은 일본의 하수인에 불과한 ‘허수아비’와 같은 존재였다.

일본은 그해 11월 을사늑약 체결로 한국을 보호국화하는데 성공하였다. 을사늑약으로 한국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권을 확보한 일본은 초대 통감에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임명했다. 이등박문을 통감으로 임명한 것은 당시 일본의 한국 병합정책의 면모를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일본은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대륙진출의 꿈을 점차 실현해가고 있었는데, 당시 일본 정계에서는 한국에 대한 병합정책과 관련하여 강경론과 온건론이 대립하고 있었다. 급진적인 병합을 주장한 강경파와 점진적 병합을 주장하는 온건파는 통감부 조직을 둘러싸고 무관조직론을 주장하는 ‘무관파武官派’와 문관조직론을 주장하는 ‘문관파文官派’로 대별된다. 대한對韓 강경파, 곧 무관파들은 러일전쟁 승리의 대가로 한국을 병탄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초대 통감에 문관파인 이등박문을 임명하는 안에 반대하였다. 이들의 갈등은 이등박문이 초대 통감으로 임명된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註3)


초대 통감 이등박문과 2대 통감 증미황조


이등박문이 통감에 임명된 사실은 당시의 일본의 식민지화 방침이 급진적 병탄이 아니라 문치文治를 통한 점진적 일본화日本化라는 고도의 전략, 곧 병합으로 가기 위한 과도기적인 보호국체제에 있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당시 한국 지배정책과 관련하여 일본에서는 다양한 논리가 제기되고 있었다. 러일전쟁 중이던 1904년 9월 일본 진보당進步黨의 정객 시전랑柴田郞은 「한국의 장래韓國の將來」라는 글을 통해 당시의 대한정략對韓政略이 

① 한황의 반면론韓皇の半面論, 

② 일한대한국합병론日韓大韓國合倂論, 

③ 고문정치론顧問政治論, 

④ 보호국론保護國論, 

⑤ 한국영구중립론韓國永久中立論, 

⑥ 총독정치론總督政治論, 

⑦ 정치방기실업획취론政治放棄實業獲取論 등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일본정부가 보호국화를 대한방침으로 결정하였다고 하였다. 註4)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한국에서 단계적으로 지배권을 강화해가고 대외적으로도 한국에서의 우월권을 획득하면서 한국병합을 위한 토대를 구축해 나가는데 주력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책 실행에 적합한 인물이 현실주의론자이자 대내외 경험이 풍부한 문치파 이등박문이라고 판단이 크게 작용했다.

따라서 통감부 설치 초기 일본의 병합정책은 초대 통감 이등박문의 대한관對韓觀과 병합론을 통해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부임 초기에 한국을 성심성의껏 지도하여 독립부강을 이루도록 노력하겠다고 표명하였고, 註5) 한국에 대한 그들이 역할이 ‘한국의 영토 보전’, ‘한국 시정개선施政改善의 조언’, ‘외교권 주관’, ‘한국 왕실의 안전 보장’ 등에 있고 일본의 희망은 ‘한국을 부식扶植하고 개발하여 양국이 서로 복리를 얻는 것’에 있다고 하여, 註6) 대한정책의 방향이 한국에서의 시정개선에 있음을 강조하였다. 이등박문은 장기적인 병합 전략으로 한국에 대한 보호통치를 내세우며 점진적인 지배권 확대를 꾀했던 것이다.

그런데 1907년에 들어 이등박문은 광무황제의 독립외교활동이 드러나고 반일의병활동이 계속되자 보호정치가 한국통치의 최선의 것이 아니라고 여기기 시작하였다. 註7) 1907년 4월 9일 한국대신이 참석한 시정개선에 관한 협의회에서, 이등박문은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도 한국을 병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한국이) 금일과 같이 불온하다면 결국 한국인 스스로 멸망하게 될 것이다. 한국에서 반란이 일어난다면 일본 군대를 맞이하는 것과 같은 불행이 있을 것” 註8)이라고 하여, 물리력을 동원한 병합 가능성을 간접적으로 시사하였다. 이어서 그는 1907년 4월 13일 러일협약 교섭이 한창일 때, 외무대신 임동林董에게 “한국의 형세가 금일과 같은 추이라면 해를 넘겨 병합은 더욱 곤란하게 될 것이므로, 러시아에 한국병합 의사를 명확하게 밝혀 승낙을 받아야 한다” 註9)고 하여, 러시아로부터 한국 병합에 관한 승인을 얻는 것이 득책이라고 하였다.

보호정치가 대한정책 방침으로 최선이 아니라고 여기고 병탄을 위한 사전 정지작업에 착수한 이등박문은 광무황제의 헤이그특사 피견을 빌미로 하여 ‘정미7조약’을 강요하고 한국 내정을 장악하였다. 이 조약으로 한국정부는 시정개선에 관한 건과 중요한 행정상의 처분에 관한 건에 대해 통감의 승인을 받게 되었고, 더욱이 고등관리 임면에 관한 사항도 통감의 동의를 받도록 되었다. 그리고 통감은 일본인 관리를 한국관리로 임명할 수 있는 추천권을 갖게 됨에 따라 일본의 한국 내정 장악력을 크게 확대되었다.

이처럼 이등박문은 보호정치를 통해 병탄 기반 마련에 주력하였다. 이등박문이 통감 사무를 인계하고 한국을 출발할 당시 통감부 총무장관을 역임했던 석총영장石塚英藏에게 다음같이 언급하였다.


종래 우리들이 한국을 독립국으로 보호 확립시키고 또한 내정 개혁을 주선하여 금일까지 노력한 것은 잘못이었다. 일러전쟁 직후에 즉시 병합 실현을 도모했었더라면 도리어 일한 양민족을 위해 행복이었을 것이다. 註10)


러일전쟁 직후 한국을 병탄하지 않고 보호국체제를 채택한 것이 실수였다고 한 이등박문의 고백으로 볼 때, 그는 한국 병합정책을 추진한 건 명백하지만 병합을 실현해가는 데에 있어서는 점진적인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등박문이 당장의 병합 단행을 시기상조로 여기며 점진적인 병합을 구상했던 이유는 ‘한국의 현상現狀’, ‘열국列國과의 관계’, ‘일본의 내정內情’ 등에 대한 고려에서였다. 註11) 먼저 그는 한국 황제를 폐하고 국가를 멸망케 할 경우 양반 유생 등의 주도하에 반일운동이 격해질 것을 우려하였다. 註12) 의병의 반일봉기는 이등박문이 부임 직후부터 직면하여 해결하지 못한 과제였으며, 한국통치 의욕을 상실케 하는 요인이기도 했다. 註13) 따라서 이등박문은 그들의 통치에 대한 한국민의 저항을 무마하기 위해 먼저 그들의 도덕적 교화로써 한국을 복종케 하고 회유와 온화한 말로써 한국인을 매혹케 해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註14)

둘째, 이등박문은 병합 시도가 서구 열강의 간섭으로 실패할 수 있음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는 청일전쟁 직후의 삼국간섭이라는 외교적 패배를 경험한 바 있었기 때문에, 병합 단행의 조건으로 열강의 확실한 승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註15) 그리고 열강의 동의를 얻기 위한 가장 현명한 방법은 한국에 대해 선정善政을 베풀고 제반 기관機關을 정비하여, 병합의 기초를 확립하는데 있다고 판단하였다. 註16)

셋째, 일본의 경제적 상황을 고려하였다. 이등박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으로 일본 재정이 피폐화되었기에 당장의 병합이 가져올 막대한 비용 부담은 오히려 일본에 해害가 될 수 있다고 인식하였다. 註17) 1906년 7월 12일 시정개선에 관한 협의회에서 이등박문은 “일본이 한국을 병탄하여 거액의 경비를 소비하는 것은 어리석다” 註18)고 언급하였다. 일본 내 일부 강경파들이 고종의 헤이그특사 파견을 명분으로 삼아 병합을 강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을 때에도, 註19) 이등박문은 병합이라는 급격한 변동 조치에 소요되는 비용 부담을 고려하여 점진주의적인 병합을 생각하였다고 한다. 註20) 후에 일진회 고문 내전양평內田良平의 병합 주장에 대해, 그는 “러일전쟁 이후 악화된 재정상태에서 추가 부담은 어렵기 때문에 병합 실행은 제반 기관을 정비한 후에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하며, 자신은 병합을 위한 제반 조건 마련에 노력하고 있다” 註21)고 답변하였다. 통감부 외사국장外事局長을 역임했던 소송록小松綠은, “이등박문은 온화주의溫和主義의 정치가여서 급격한 정책에 반대하는 성격을 지녔다. 그런고로 조선 병합의 제안에 대해 반대하지 않았으면서도 병합의 시기·순서·조건 등에 대해서는 종종種種의 의론議論를 가진” 註22) 신중론자였다고 평하였다.

이처럼 그는 병합 실행에 있어 실리적인 ‘점진주의’ 노선을 추구하였고 병탄의 요건으로서 법령 제도의 점진적 잠식을 중시한 입장, 곧 ‘법령제도주의法令制度主義’·‘번문주의繁文主義’에 입각한 병합을 추구하였다. 註23) 그는 한국 국정에 관여하여 외교권 약탈뿐만 아니라 군부 폐지나 법부 폐지 등 점진적인 ‘폐지정책’과 경제적으로는 점진적인 ‘이권탈취 정책’을 취했다. 이른바 “물이 종이를 한 칸 두 칸으로 시작하여 열폭 백폭을 적시는 첨수정책添水政策”과 같은 점진주의는 그의 일관된 대한정책 노선이었다. 註24) 이등박문은 “먼저 부분적인 권리를 거두고 난 후 서서히 전권全權을 거둬들이는 방침”, 註25) 보호국체제를 완성한 후 점진적인 병합 취하는 방침을 채택하였다. 註26)

그의 병합론은 곧 일본정부의 입장이 한국병합을 급진적으로 추진하기 보다는 대내외 상황과 이해득실을 고려하여 점진적으로 추진하는데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초대 통감 이등박문이 사직하자 후임으로 부통감이던 증미황조曾禰荒助를 통감으로 승진시킨 것도 이러한 점진 정책의 연장선상에서 이뤄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일본 수상 계태랑은 한국 황실 및 정부의 실책이 초래될 때를 병합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입장이었으며, 증미황조 부통감을 이러한 일본정부의 의향에 충실한 인물로 지목하며 증미황조의 통감직 승진을 적극 지지하였다. 註27) 반면 일본 내 강경세력들은 이등박문의 ‘한인본위주의韓人本位主義’라는 회유정책이 실패하였다고 하며, 제2대 통감으로 임명된 증미황조는 한국에 대한 ‘무단주의武斷主義’ 정책을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註28)

이등박문은 통감직에서 물러날 때 한국 대신들에게 “신통감은 구래舊來의 방침에 의하여 양국의 친화를 도모하고 양국의 황실 및 인민을 위하여 진력할 것”이라고 하여, 증미황조가 자신과 일치된 정책을 취할 것임을 강조하였다. 註29) 신임 통감 증미는 이등박문이 취했던 대한정책의 연속성 유지, 곧 보호통치의 유지와 병합 기반 마련에 노력하였다. 註30) 증미황조의 점진적 병합책에 관한 근거는 계태랑과 이등박문과 밀약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등박문이 통감 사직시 계태랑 수상에게 “조선의 현상, 열국의 관계, 일본의 내정을 고려하여 명名을 버리고 실實을 채택하는 정책을 취하여 7~8년 정도 형세를 관망한 후 병합을 단행하자”고 제안하자, 계태랑이 이에 찬성하였고 증미 통감 역시 이 방침에 동의하였다고 한다. 註31) 당시 수상이었던 계태랑의 대한정책은 비교적 중립적이면서 이등박문의 입장에 가까웠다고 한다. 수상이라는 지위상의 고려에서 신중한 대외정책을 강구했던 것이다. 1909년 합방合邦 문제를 둘러싸고 산현유붕·사내정의 등의 무관파는 병합을 주장하고 이등박문·소촌록 등 문관파는 현상유지를 주장하였을 때 계태랑은 중립적이면서도 문관파의 입장에 가까웠다고 한다. 註32) 요컨대 구체적인 병합 방침이 결정되는 1909년 이전에는 일본정부를 대표하는 계태랑 수상과 통감 이등박문이 보호정치를 유지하되 한국에서의 지배력을 점진적으로 확대해가는 병합정책을 취했다고 볼 수 있다.


2. 병합방침 결정과 병합신중론

일본은 1909년이 될 때까지 일본은 언제 어떻게 한국을 병합한 것인가에 대해 명확한 방침을 결정하지 못하고 병합론만 분분한 상태였다. 註33) 그런 가운데에서도 병합을 빨리 추진해야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커져갔다. 심지어 대한 “약국이 강국에게 병탄되고 대국이 소국을 합병하는 것은 세계의 상세常勢이고, 일본이 한국을 합병하여 대륙의 교란攪亂 침략을 방어하는 정책은 3천년 전부터 이어온 국시國是” 註34)라고 하며, 한국병탄을 조속히 추진하고 이를 위한 선결과제로 통감 교체를 주장하였다. 한국병합이 시급하다고 주장하는 강경파들은 이등박문의 온건한 입장, 즉 “한국의 환심을 사서 일본의 실력을 부식하는데 우선적으로 주력하고, 병합 단행은 조건이 성숙된 후에도 늦지 않다는 입장” 註35)에 대해 크게 반발하고 있었다.

통감 교체를 주장하는 강경파들은 이등박문이 한국에 대해 무단통치를 하지 않고 문화주의에 입각하여 시정施政을 한다고 공격하였다. 註36) 일본 중의원 의원 산본제이랑山本悌二郞은 이등의 회유정책이 일본의 이원利源 개발과 일본인 이주에 장애가 되고 있으며, 배일사상을 지닌 세력들의 창궐을 부추기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비판하였다. 註37) 온건한 통감정치에 따른 배일사상의 만연과 전국적으로 전개되는 반일운동을 억제하기 위해서라도 하루라도 빨리 병합해야 한다는 주장이 득세하였다. 註38) 일진회 고문 내전양평도 일찍부터 통감 이등박문이 병합 의사가 없다고 하며 사직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1909년 1월 산현유붕·계태랑·사내정의에게 보낸 의견서에서 한국 병합이 필요불가결한 당면과제이며, 세계 열강이 일본의 한국 지배를 묵인하고 있는데도 이등박문이 신중론의 태도를 취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註39)

이와 같이 이등의 점진적인 병합책은 강경파들의 오해와 비난을 받았고, 급기야 이등의 사직으로 이어졌다. 註40) 이등의 보다 근본적인 사직 이유는 대한정책을 둘러싼 온건주의자 이등과 강경파 사이의 갈등에 있었는데, 앞서 보았듯이 이등박문은 보호통치를 통하여 일본의 실력을 한국에 부식시킨 이후 병합을 추진했고, 산현유붕·사내정의를 비롯한 강경파들은 대한정책의 근본적인 변화 즉 병합 강행을 고집하였다. 이 때문에 이등 등 온건론자와 산현유붕 등 강경론자 사이의 정치적 갈등이 계속 표출되었다. 註41) 한편 계태랑 수상은 관망론자에 가까웠다. 註42)

이처럼 일본 정계에서는 병합 강경론과 온건론으로 나뉘어져, 병합 시기뿐만 아니라 병합 방침에 대해서도 구체화하지 못한 상태였다. 대한정책의 궁극적 목표에 대해서 합방·위임통치·병합등의 주장이 제기되고 있었다. 한국통치를 합방 곧 연방제도로 할 것인가, 또는 한국 황제의 지위는 존속시켜 형식적 주권을 부여하는 대신 정무政務의 실권을 장악하는 위임통치의 형식으로 할 것인가, 또는 영국의 인도에서와 같은 식민통치 곧 완전한 형태의 영토적 병합으로 할 것인가 하는 의론이 다양하게 제기되고 있었다. 註43)

일본정부의 구체적인 병합 방침은 1909년에 들어서 구체화되었다. 병탄 여론이 점차 확산되자 일본정부는 병합 방침을 구체화하였다. 1909년 3월 외무대신 소촌수태랑小村壽太郞은 외무성 정무국장 창지철길倉知鐵吉에게 ‘대한대방침對韓大方針’을 작성하게 하고 이를 수정하여 3월 30일 계태랑 수상과 산현유붕 추밀원 의장에게 제의하여 승인을 받았다. 註44) 이때 결정된 방침은 한국을 일본 영토의 일부로 편입시키는 국권 탈취 의미의 ‘병합’이었다. 이들은 합방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과 같은 체제 註45)를 지칭하는 것이며, ‘병탄’·‘합병’과 같은 강한 어조의 용어보다는 영토 복속을 의미하면서도 과격하지 않은 용어인 ‘병합’을 공문서에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註46) 한국을 완전히 폐멸廢滅하여 제국 영토의 일부가 되는 의미가 명확하면서 동시에 그 어조가 과격하지 않은 단어인 병합이라는 문자를 공문서에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계태랑과 산현유붕은 4월 10일 이 병합 방침을 이등박문에게 제의하여 동의를 얻었다. 한국을 일본제국의 판도로 편입시키고 일본 황제가 절대통치권을 장악하며 한국민을 일본제국의 신민으로 만든다는 완전한 흡수병합안이었다. 이 안은 7월 6일 일본 각의에서 통과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09년 7월 6일 일본 각의에서 통과된 한국 병합 방침에 관한 내용

명치 42년 3월 30일 : 총리에게 제출

명치 42년 7월 6일 : 각의 결정

명치 42년 동월 동일부 : 어재가御裁可

한국병합에 관한 건

제국의 한국에 대한 정책은 우리 실력을 해반도該半島에 확립하고 그 파악把握을 엄밀히 함에 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일로전쟁日露戰爭 개시 이래 한국에 대한 우리 권력은 점차 커져 더욱이 작년 일한협약日韓協約 체결과 함께 한국에서의 시설은 크게 그 면목을 개량하였다. 비록 한국에서 우리 세력은 아직 십분 충실하게 이르지 못하고 한국 관민의 우리에 대한 관계도 역시 아직 완전이 만족할 만하지 못하였으므로 제국은 금후 더욱 한국에서의 실력을 증진시켜 그 근저를 깊이 하고 내외에 대하여 도전받지 않을 만큼의 세력을 수립하기에 노력할 것을 요要한다. 이리하여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차제此際에 제국정부에 있어 좌左의 대방침을 확립하여 이에 기초한 제반의 계획을 실행할 것을 필요로 한다.

제1. 적당한 시기에 한국 병합을 단행할 사事

한국을 병합하여 이를 제국 판도의 일부로 함은 반도에서 우리 실력을 확립할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제국이 내외의 형세에 비추어 적당한 시기에 단연斷然 병합을 실행하여 반도를 명실공히 우리 통치하에 두고, 또 한국과 제외국과의 조약관계를 소멸시킴은 제국 백년의 장계長計이다.

제2. 병합 시기가 도래할 때까지 병합 방침에 따라 충분히 보호의 실권을 거두도록 노력하고 실력 부식을 도모할 것

전항前項과 같은 병합의 대방침大方針은 이미 확정하였으나 그 적당한 시기가 도래할 때까지는 병합 방침에 따라 우리 제반諸般의 경영을 진보함으로써 반도에서 우리 실력의 확립을 기期하기를 필요必要로 한다. 註47)


이 ‘한국병합에 관한 건’의 골자는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일본 판도의 일부로 하는 병합을 단행하고 병합 시기가 올 때까지는 병합 방침을 확고히 하기 위한 정책을 수행하며, 충분히 보호의 실권을 거두고 힘써 실력 부식을 도모한다’는 것이었다. 통감통치 3년만에 병합 방침이 확정된 것이다. 그런데 병합 단행 시기에 대해서는 애매하게 ‘적당한 시기’라고 하였다. 소촌은 두 가지 이유에서 ‘적당한 시기’를 고려하였다. 첫째, 열강의 양해를 충분히 얻지 못했다고 하는 사실이었다. 일본의 만주 진출을 견제하려는 열강의 움직임이 커져 갔기 때문에, 급진적인 병합을 추진하기 위해서 반드시 열강의 반대를 제거하는 것이 선결과제였던 것이다. 둘째, 일본이 청일전쟁 이후 계속 강조해온 한국의 독립 원조와 독립 유지 약속이었다. 이와 같은 약속을 파기하고 병합을 강행하기에는 아직 충분한 관계가 성숙되지 않았다는 판단이었다. 註48) 소촌이 구상한 병합 단행의 적당한 시기란 그들의 한국 침략에 대한 열강의 묵인이 이루어지고 한국에 실력을 부식시켜 반일 기세를 근절했을 때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일본은 병합하기에 ‘적당한 시기’를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1909년 7월 30일 궁중에 친위부대만을 둔 채 한국의 군부를 폐지하였고 9월에 들어서는 반일의병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남한대토벌작전南韓大討伐作戰’을 개시하였다. 호남지방을 중심으로 전개된 의병들의 항일항전을 억제하기 위해 1909년 9월부터 두 달 동안 남한대토벌작전을 벌여 의병세력을 초토화시켰다. 註49) 10월에는 한국의 사법권을 탈취하고 ‘사법관제’· ‘감옥관제’를 발표하였다.

이와 같이 병합을 위한 기초작업이 한창이던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安重根의 이등박문 저격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일본은 서구 열강으로부터 병합 실행에 유리한 명분을 확보하게 되었고 일본 내에서도 강경한 대한정책 추진을 요구하는 적극적인 여론이 확산되어 갔다. 『대판매일신문大阪每日新聞』이 즉각적인 병합 단행을 주장하는 등 명실공히 한국을 일본령日本領으로 하여 100년의 화근을 끊어야 한다는 강경파들의 주장이 점점 커져갔다. 註50)


일진회 회원들


한편 설립 당시부터 친일주의親日主義를 노골적으로 표방했던 일진회一進會는 1909년 12월 4일 대국민합방성명서를 발표하고 한국황제·내각·통감에게 「합방 상주문·청원서」를 제출하였다. 이완용李完用 내각과 정적 관계에 있던 일진회는 대한협회大韓協會·서북학회西北學會와 제휴하는 3파연합운동을 벌여 이완용 내각을 전복하고 합방을 강청하려 하였는데, 3파연합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단독으로 합방청원을 감행하였다. 註51) 일진회의 합방청원서 제출은 일진회 고문 삼산무환杉山茂丸가 입안하고 사내정의 육군대신과 상의한 후 계태랑 수상의 허가를 얻은 후 실행에 옮겨진 것으로, 일본정부의 적극적인 의도가 개입되었다. 註52) 일진회의 합방청원서 제출로 일본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병합 논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계기를 맞았다.

이처럼 안중근 의사의 이등박문 저격과 일진회의 합방청원에 따라 병탄의 기회를 노리던 일본으로서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였다. 그럼에도 통감 증미황조의 입장은 여전히 신중하게 관망하는 입장이었다. 그는 일진회의 합방청원으로 인하여 병합 주장이 더욱 커져갔지만 보호정치라는 현상유지 방침을 고수하였다. 註53) 그는 만약 병합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시기時機와 국가 내외의 정세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註54)고 하며, 병합 단행시 발생할 한국의 전국적인 봉기 및 일본 국내의 돌발적인 상황 등을 여러 측면에서 염려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당장의 병합은 “불요불급不要不急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지고지난至苦至難의 업業”이 되며, 병합 단행은 “일본의 재정부담을 가중”시킨다고 하여 즉각적인 병합 주장을 수용하지 않았다. 註55) 증미황조는 “장래 한국인이 그들의 시정施政에 심복하는 시기時機에 이르면 자연스럽게 양국의 결합은 실현될 것이다” 註56)라고 하며 한국병합에 관하여 낙관적인 전망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대한 강경 통치가 한국민들의 반발만 거세어질 뿐 효과가 없다고 보고 일본의 통치에 대한 한국의 저항을 차단하기 위한 행정 개혁에 주력하였다. 註57)

일본 내에서는 급진적 병합론이 대세를 이루었지만, 통감 증미황조처럼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자는 신중론의 입장도 적지 않았다. 이미 한국을 식민지화한 것이나 다름없으며, 병합 준비가 착실히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일진회의 합방성명 발표에 대한 직접적인 대응을 자제하자는 주장이었다. 후에 일본 수상을 역임1914.4~1916.10하였던 대외중신大隈重信의 “한국의 외교 내치의 실권을 모두 일본이 거둬들인 금일, 합방을 운운하는 것은 어리석다. 합방은 사실상 이미 성립되었고, 단지 형식의 문제만 남았을 뿐” 註58)이기 때문에 일진회의 합방성명에 따른 분분한 의론이 불필요하다고 한 언급이 당시의 신중론의 입장을 잘 보여준다.

즉각적인 병합 단행 주장에 대한 신중론자들의 입장은 국제관계, 양국간의 경제력 차이, 반일봉기에 대한 우려에 따른 것이었다. 신중론자들은 열강이 일본의 한국 병합을 쉽게 승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우려하였고, 양국간의 경제력의 차이로 인해 병합하면 일본의 재정부담이 증가하여 오히려 일본에 불리한 결과가 초래된다고 생각하였다. 註59) 그리고 ‘사명취실捨名取實’의 입장에서, 일본은 실질적인 한국 내정 장악에 만족해야 하며, 마지막으로 병합 기도는 한국내 각 정파의 반대를 야기할 뿐만 아니라 한국민의 전국적인 봉기를 야기하여 유리할 것이 없다는 견해도 있었다. 註60)

신중론의 가장 큰 이유는 재정적인 부담 문제였다. 일본은 러일전쟁 시기 입은 경제적 피해를 복구하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막대한 경제적 비용을 감당해야 하는 병합 실행에 신중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계태랑은 1909년 초 일진회 두령 송병준宋秉畯이 합방안을 제출하면서 실행 자금 1억 원을 건의하자, 막대한 자금 소요에 따른 부담을 지적하며 합방 실행의 곤란함을 피력하였다. 註61) 대한협회 고문 대원장부大垣丈夫 역시 한국에 대한 보호통치 경비 및 건설비가 계속 증가하여 일본민의 부담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다액多額의 통치비統治費·시설경비施設經費가 드는 합방 실행은 오히려 일본 국민의 고통이 된다고 하였다. 보호통치를 착착 진행시키면 병합은 자연스럽게 취할 수 있게 되므로, 당장의 병합 실행은 일본에 불리하다고 본 것이다. 註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