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징세제도의 개혁, 경제침탈과 토지수탈-제3권 통감부 설치와 한국 식민지화

몽유도원 2013. 1. 18. 11:00

제4장 경제침탈과 토지수탈


화폐정리사업

징세제도의 개혁

황무지개간과 토지수탈


2. 징세제도의 개혁

1. 외획의 폐지와 국고제도의 실시
이등박문은 한국의 통치비용은 한국에서 마련하는 것을 재정정리의 목적으로 하고 있었는데, 그가 구상하고 있던 이러한 정책은 세입을 증가시키는 것이었다. 세입을 증가시키는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기존의 세금을 올리거나 새로운 명목의 세금을 확충하는 방법이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방법 모두 반일감정이 거세던 당시의 시점에서는 적합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이등박문은 기존의 세법을 그대로 둔 채 세금을 정확하게 거두어들이는 증수방법을 구상하고 있었다.
이등박문은 1904년 9월 14일 한국으로 부임하는 목하전종태랑을 따로 만나 “한국에서 가장 필요한 시설은 세금을 정확하게 거두어들이는 일이다. 한국의 인민은 가렴주구에 시달리고 있으므로 법에 의하지 않은 세금은 불법이라는 소칙을 주청하여 얻은 후 주구를 예방하라. 다른 급한 일도 해야 하지만 이것을 급히 서둘러야 한다”고 했다. 註44) 앞에서도 살펴보았지만 이등박문이 목하전종태랑을 한국의 재정고문으로 추천한 이유는 바로 그가 일본의 손꼽히는 증세전문가였기 때문이며, 그라면 한국의 징세문제를 해결하여 증수를 도모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이등박문의 지시를 받은 재정고문 목하전종태랑은 “세법의 개정보다는 차라리 현재 세법의 시행하에 감독만 충실히 해도 증수의 효과를 볼 수 있다. … 현재 조선의 불납액은 과거 10년간 거의 매년 100~150만원에 달하는데 이것만 확실히 거두어도 증수는 기할 수 있다. 나아가 세법을 개정한다거나 토지를 정리하는 것 등은 크게 고려를 요하며 미래에 실시해야 할 문제”라 하여 註45) 세법의 정리나 토지정리 문제보다는 현행 세법하에 철저한 감독을 통해 불납액을 줄이는 방법을 강구했다.
그가 이러한 판단을 하게 된 이유는 징수관리의 부정이 징수의 가장 큰 문제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목하전종태랑은 “한국국민은 극히 정직하여 불납과 체납을 하지 않으나 지방관리가 이를 수령하여 납부하지 않으므로 이것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註46) 그러나 지방관리를 제거하는 징세기구 자체의 개혁은 당시로서는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징세를 담당하는 관리의 부정이 세입정리에 가장 큰 문제이지만, 제도의 개혁은 시기를 기다려서 서서히 해야 된다고 보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목하전종태랑은 징세기구 자체의 개혁보다는 지방의 수세를 감독하는 방안의 하나로 1905년 1월 13일 세무관의 파견을 소촌수태랑 외무대신에게 건의했다. 또한 경찰사무와 수세사무는 긴밀한 관계에 있으므로, 이 양자를 동시에 확립한다면 일정한 징세수입을 확보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 양자를 별개로 신설하는 것은 현재의 상황에서는 어려우므로 양자를 겸직하는 방안을 건의했다. 즉 13도에 경찰과 수세사무를 겸직할 수 있는 인물을 1명씩 파견하자는 것이었다. 그러한 인물로는 대장성에 속해 있으면서 군에 복무한 경험이 있는 인물이 좋겠다고 주장했다. 註47)
그러나 소촌수태랑 외무대신은 세무관 못지않게 경무관도 중시하였으므로 양자를 각각 설치하기로 했다. 註48) 목하전종태랑의 세무관 설치 건의는 두달여 후인 1905년 3월 14일 ‘요건각서’로 확정되었다. 이 각서는 동년 3월 4일 외무부에서 협의된 것으로써 그 내용은 경무관과 세무관을 동시에 각각 설치하는 것이었다. 즉 일본 외무부에서는 각도에 경무관 1명과 경부 및 순사 약간 명을 두고, 지방 세무관 역시 세무관 1명과 속원 약간 명을 두는 것을 허락한 것이다. 경무관은 경찰사무를, 세무관은 세무의 정리 및 제일은행 국고 사무의 시행을 감독하게 하였다. 즉 세무관은 세금을 거두어서 국고에 넣는 일까지 담당하게 한 것이다. 註49) 이러한 훈령에 따라 목하전종태랑은 1905년 3월 8일 13도 세무서의 설치에 관한 세부계획을 올렸다. 註50) 그 내용에 위하면 13도에 서장署長 1명과 서장을 보좌하는 주무主務 1명을 배치하고, 3개 군에 1명의 지서장支署長을 두기로 했다. 당시 군의 수가 387군이었으므로 총 129명의 지서장이 배치될 예정이었다.
한편 증세를 위해서는 세무관의 파견으로 징수를 감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전에 징수한 세금을 중앙에 모으는 조치가 필요했다. 종래 한국에는 국고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지방에서 거두어들인 세금은 비싼 운임비 즉, 태가駄價를 지불하고 중앙으로 운반해야 했다. 註51) 그러나 백동화와 엽전의 무게 때문에 태가는 상당한 비용이 들었다. 註52) 이러한 불편을 해결하기 위하여 시행한 것이 외획外劃이었다. 외획은 여러 형태가 있었지만 대개는 지방관이 거둔 결호전結戶錢, 결세와 호세을 직접 중앙정부로 상납하지 않고 상인이나 이서에게 대행시키는 방법과, 중앙 정부에서 상인 또는 내장원 등으로부터 일시적으로 자금을 차입하고 그것을 각군의 결호전으로 갚는 방식이 있었다. 외획은 상인들이 자본을 축적하는 기회가 되기도 했지만, 문제가 발생하였을 경우 세금의 상납이 늦어지거나 아예 없어질 수도 있었기 때문에 세금 누출의 큰 원인이 되고 있었다.
따라서 목하전종태랑은 세무관 파견 이전에 외획을 폐지하고 국고제도를 시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목하전종태랑은 1904년 11월 18일 탁지부 대신 민영기와 궁내부 대신 이용태에게 외획의 폐지를 통보한 후, 1905년 6월 24일 탁지부령 제5호 ‘세입세출처리순서’에 의하여 1905년 8월 15일 이후에는 아예 지불을 금지하도록 했다. 註53) 그리고 국고제도를 시행하여 국고금의 출납을 관장하는 금고를 별도로 설치했다. 이를 위하여 1904년 12월 30일 탁지부에 금고출납역을 설치하는 법적 규정을 만들었고, 註54) 1905년 1월 30일에는 금고의 운영을 제일은행에 맡기는 ‘국고금취급에 관한 계약’을 맺었다. 註55) 제일은행과 국고금취급에 관한 계약을 맺음으로써 일본 제일은행 경성지점은 한국정부의 중앙금고가 되었고, 각지의 지점 출장소를 지금고로 하여 세금을 모두 여기에 예입하게 했다. 지금고는 모두 10개소가 마련되었는데, 경성·인천·부산·군산·목포·평양·대구·진남포·원산·성진·개성 등지였다. 금고가 설치되지 않은 지역에는 우편국소에서 그 사무를 대신하게 했으며, 1909년 7월 22일 한국은행이 설치되어 인계될 때까지 제일은행은 한국의 국고금 출납사무를 장악했던 것이다. 註56)
국고제도의 설치와 함께 13도 세무관의 파견은 일본 외무성의 허락도 받고 그 세부적인 사항까지도 모두 마련되어 있었지만 세무관이나 세무서의 설치와 관련된 법령이나 칙령은 곧바로 공포되지 않았다. 같이 입안된 지방 경무고문의 설치는 이미 주본奏本으로 입안되어 1905년 6월 5일부터 속속 채용되고 있었다. 註57) 1905년 말까지 채용된 경무고문 부속직원의 수는 117명에 달했다. 註58) 세무관의 파견이 늦어진 이유는 아마도 경찰과 수세사무를 겸직할 수 있는 인물을 찾기가 어려웠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이에 목하전종태랑은 세무관 대신 지방세무를 감독할 재정고문지부財政顧問支部를 설치하고 재정고문부 소속의 일본인 재무관財務官을 파견했다.

세입 부정리의 폐두弊竇는 주로 지방에 복재伏在하고 있으므로 이것의 교정을 위해서는 지방에 재정고문지부의 설치를 요한다. 1905년 7월 평양·대구·전주에 부속 재무관을 분주시키고 주재 각도의 재정사무 일체를 조변措辨시키고 기타 각도의 재정사무는 이미 분주하고 있는 경찰고문보좌관 또는 동 보좌관보에게 시찰시킨다. 동 10월에 다시 함경북도 및 제주도에 재무관을 주재시켜서 오직 부정의 주구와 부당한 지출을 금지할 것을 노력한다. 註59)

목하전종태랑은 재정고문지부의 설치 이유를 지방세입부 정리의 폐단을 교정하기 위해서라고 했고, 7월에 평양·대구·전주에 재무관을 분재시켰다. 재무관은 각도의 재정사무 일체를 담당했고 재무관이 파견되지 않은 나머지 도는 이미 주재하고 있는 경무고문보좌관과 보좌관보로 하여금 시찰하게 했다. 그리고 10월에는 함경북도와 제주도에 재무관을 파견할 것이라고 했다. 재정고문지부의 설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 목하전종태랑은 경성에 있는 재정고문부를 본부로 하고 각 지방에 주재하는 재무관 집무지역을 지부로 칭했다. 註60)
1905년 말까지 지방에 파견된 재무관과 재무관보는 모두 13명이었으므로 註61) 모든 도에 재무관과 재부관보가 파견된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1905년 말까지 고용된 고문부 직원은 정식직원 31명과 일급자日給者 10명을 더하여 총 41명이었다. 경무고문부 직원에 비하면 3분의 1 수준에 불과한 것이었다. 7월에 설치된 평양·대구·전주재무관 3명은 모두 세무감독국 사무관 출신들이었으나 이후 임용된 재무관과 재무관보는 관직 경험이 없는 20대의 젊은 청년들이었다.


2. 관세관관제의 실시

지방에 재정고문지부를 설치하고 재무관을 파견하여 세무를 감독했지만 그리 만족할만한 징수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소수의 일본인 관리로는 세무의 감시와 감독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징수관리들의 부정부패를 막고 세입과 세출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는 징세기구의 개혁이 필수적이었다. 징세기구의 개혁은 이등박문이 통감으로 부임한 이후 급진전되었다.

징세기구의 개혁은 이등박문이 부임한 지 6개월이 지난 1906년 9월 1일부터 그 입안에 대해 논의가 이루어졌다. 징세기구 개혁에 대한 논의는 이등박문과 한국 대신들과의 회의인 ‘시정개선에 관한 협의회’이후 협의회로 약기함에서 이루어졌다. 註62) 징세법의 개정은 1906년 9월 1일 민영기 탁지부대신의 제의로 시작되었다. 민영기는 수세제도의 개정을 위해 이미 탁지부에서 새로운 관제를 기안 중에 있다고 했다. 따라서 1907년부터는 현재 군수의 손에 있는 징세업무를 세무관에게 맡길 것이라고 했다. 13도 요지에 세무관을 파견하여 오로지 수세사무에만 종사시킬 것이며, 이것은 이미 목하전종태랑 고문과 협의가 되었다고 했다. 註63)

1906년에 9월 24일 칙령 제54호로 제정된 ‘관세관관제’의 내용을 살펴보면 ‘관세관관제’는 탁지부대신 이하 세무감·세무관·세무주사로 편성되었고, 그들의 임무는 관할 구역 내의 세무 일체를 담당하게 되어 있었다.



‘관세관관제’ 개정안(1907. 6. 21)

그러므로 기존의 세금 영수인이던 군수나 이서들은 관세관이 파견됨으로 인하여 세금을 거두는 일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 또한 각군에 세무주사를 파견하여 세금영수의 일을 전담시킴으로서 행정구역의 말단까지 탁지부가 장악하게 되었다. 세무감은 13명으로 각도의 관찰사가 겸임하게 했고 세무관은 36명, 세무주사는 168명으로 규정했다. 당시 군의 수는 342개였으므로 모든 군에 세무주사가 파견된 것은 아니었다. 또한 세무감의 주재소는 세무감부, 세무관의 주재소는 세무서, 세무주사의 주재소는 세무분서로 규정했다 註64) 마지막으로 관세관에 대한 모든 일은 탁지부대신이 관장하게 되어 있었다. 註65) ‘관세관관제’는 1905년 1월에 이미 목하전종태랑이 입안하여 허락을 받았던 세무관설치계획과 거의 동일한 것이었다.

또한 10월 16일에는 칙령 60호 ‘조세징수규정’을 발포하여 군 이하의 지세수취는 면장에게 그 권한을 부여하는 제도를 확립했다. 註66) ‘조세징수규정’ 7조에 의하면 “지세 및 호세는 면장에게 납입고지서를 발행하고, 면장은 면 내의 납세다액자 5명 이상으로 임원을 정하여 협의한 후, 납세의무자에게 부과금액을 정하여 납입통지를 발부하도록 되어 있다. 또한 현금영수는 임원중에서 선정된 공전영수원公錢領收員이 하도록 했다. 이것은 지세의 부과과정과 징수과정을 완전히 분리한 조치로서, 이로써 지세수취에 대하여 군수나 이서·면장 등이 전혀 관여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이들 면장·임원·공전영수원이 이전의 군수나 이서층으로 변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들의 선임에도 특별히 주의를 기울였다. 註67) 이로써 군수와 이서층의 지세수취권을 배제하고 세무관·세무주사 - 면장·공전영수원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지세수취구조가 형성되었다.

칙령이 반포되고난 뒤 각 언론에는 세무관에 관한 기사가 연일 보도되었다. “탁지부대신 민영기씨가 신설 세무관을 시무한 숙자로 극택다 세관은 비단결호세라 산세도 측량정세하야 일체 수세한다더라” 註68)고하여, 세무관은 사무에 능숙한 자로 뽑았으며, 결세·호세·산세 등 일체의 징수사무를 담당하게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임무를 맡게 될 세무관의 시취와 교육은 재정고문이 담당했다. 註69) 관세관으로 뽑힌 사람들은 대개 고등학교 또는 관립일어학교 졸업생으로 18세 이상된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세무주사는 상당한 고학력자이며 신학문을 배운 사람들로 일어를 필수적으로 하는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註70) 이렇듯 고학력자들로 이루어진 세무주사들은 탁지부에서 1개월간 세무장정을 견습한 뒤 註71) 그후에 각지로 파견되었다. 註72) 세무관들이 1개월 동안 학습한 세무장정 또는 관세사무의 내용은 일반세무와 화폐정리에 관한 것이었다. 註73) 이렇게 교육시킨 세무관들은 모두 삭발을 하고 복장을 통일시킨 뒤에 각군에 파견하였다. 註74) 

〈표 5〉 1905~1909년 실제 세입(단위 : )
구 분19051906190719081909
조세租稅3,088,6386,524,3319,769,6229,892,9117,941,970
지세地稅2,150,9762,897,0955,472,9286,082,6125,054,815
호세戶稅81,949165,301317,183338,665283,167
항세港稅  2,402,8633,267,3872,413,167
광세鑛稅448 26,16833,48819,206
염세鹽稅  6,6269,1639,328
가옥세家屋稅    35,605
주세酒稅    48,080
연초세煙草稅    20,201
잡세雜稅5,61010,01011,79250,40658,014
기왕연도旣往年度849,6553,451,9251,532,062111,185 
소속수입所屬收入 
인지수입印紙收入 38,333123,867101,484245,561
역둔도수입驛屯賭收入     
관업수입官業收入   263,806692,809
잡수입雜收入3,924207,6721116,723169,980241,179
경상부 합계3,092,5636,770,33610,010,21210,428,1829,121,520
     4,000,000
    900,0002,000,000
     1,000,000
    317,9632,598,836
임시부 합계   1,217,9639,598,836
총계3,092,5636,770,33610,010,212
11,645,14618,720,357
출전 : 『第1回度支部統計年表』, 33~36쪽 ; 『韓國財務經過報告-제2회』, 7~10쪽 ; 『韓國財務經過報告-제4회』, 11~15쪽.


각군에 파견된 세무관들은 1906년 12월 중순경부터 징수사무를 담당했다.

‘관세관관제’는 실시된 지 2달이 조금 지나자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906년 12월 중순경 각군에 파견된 세무관들의 금고수납액이 1907년 2월 2일까지 141만여 원에 달했다. 註75) 1904년까지 1년 평균 결세액은 170여만 원에 불과했음을 감안한다면 2개월여에 걸친 징수액치고는 상당히 많은 액수였다. 이러한 세무관의 활약은 1907년도의 결세징수액이 1906년도에 비해 2배 가까이 증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조세징수에 있어서 전반적인 증가를 초래했음을 〈표 5〉가 잘 보여준다.

이렇듯 세무관들이 결세 징수에 큰 효과를 거두자 1907년 6월에 목하전종태랑은 세무관을 증설하기에 이르렀다. 註76) 세무관은 36명에서 14명을 더 증설하고 세무주사는 100여 명을 더 증설하였다. 이로써 세무주사는 전국의 각군에 파견되게 되었다.


3. 관세관관제에 대한 한국민의 저항

‘관세관관제’의 실시로 세금의 징수는 늘어났지만 세무관과 세무주사들의 징수업무로 인한 한국민의 저항이 거세게 일어났다. 우선 기존의 세금영수원이던 군수와 이서층 가운데 특히 이서층의 반발이 심했다. ‘관세관관제’가 반포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이서층들은 즉각 이에 반대하는 의사를 표명했다. 각군의 이서층들은 ‘관세관관제’의 실시에 대항하여 세금의 영수를 거절하기도 했으며 註77), 결안과 세금장부를 태워버리고 도망하는 사례도 잇달아 일어났다. 註78) 또한 이서층을 비롯한 서기·청직·사환 등이 사퇴하여 세납을 못하기도 했고, 조세장부를 인계하지 않거나 일부만 내놓아 결세의 징수에 큰 차질이 생기기도 했다. 이들이 거센 반발을 한 이유는 ‘관세관관제’의 실시가 500여 년 동안 유지되어온 이서층의 가업을 하루아침에 빼앗는 것이었음은 물론 이들의 생계를 가로막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시간이 지나 ‘관세관관제’가 실행되기에 이르자 결민과 협력하여 살인도 서슴지 않는 과격하고 구체적인 저항을 하기에 이르렀다. 註79)

이서층의 저항에 이어 농민들의 저항도 거세었는데 군수와 이서의 지세수취권이 세무관과 세무주사들에게 넘어가고, 그들의 세금이 지금고를 통해 제일은행으로 귀속되자 ‘관세관관제’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게 된 것이다. 대부분의 농민들은 기존의 징수체계인 군수에게 납부하기를 원했고, 군수의 영수증이 없으면 납세하지 않겠다고 버티기도 했다. 또한 면장의 세금영수를 거부하고 오히려 면장과 임원을 구타하기도 했으며, 일인에게 납부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관정에 납부하기를 원해 세납이 지연되기도 했다. 註80)

엽전통용지방에서는 세무주사들이 엽전으로만 결세를 징수하자 부당한 징수라며 납세거부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1906년 3월에는 경북 인동과 선산 군민이 결세 80량을 60량으로 감하여 달라고 관가를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註81) 선산군에서는 그 수가 수천 명에 달할 정도로 민의 항의가 거세었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민의 요구는 세액을 낮추어달라는 감세減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결세액의 차이가 밝혀지자, 민의 요구는 단순한 감세에서 벗어나 균세운동均勢運動으로 이어졌다. 균세운동은 백동화통용지방과 엽전통용지방의 결세액을 균등하게 해달라는 엽전통용지방민의 납세거부운동이었다. 균세운동은 시작 당시에는 전라남도 장성 인근의 군 대표가 참여하는 정도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 지역은 확장되어 전북지방까지 번졌으며, 1908년에 들어와서는 경상남북도 주민까지 합세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애국계몽단체인 호남학회湖南學會와 대한협회大韓協會의 협조, 그리고 『대한매일신보』·『황성신문』과 지방신문인 『목포신문』 등 언론의 동참으로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다.

이처럼 군수와 이서층과 농민들의 저항에 이어 엽전통용지방에서의 균세운동이 일어나자 이등박문은 ‘관세관관제’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했다. 1907년 4월 9일 이등박문은 “제군은 법령을 제정하기만 하면 일이 끝났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나는 실행을 중시한다. 지방관 중에는 법령은 엽전을 필요로 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현재 인민을 압박하여 엽전으로 납세시키고 엽전 80냥에 대해 신화 4원의 비율로 사복을 채우는 부정을 행하고 있지 않은가? 이것은 실제 감독이 잘 이행되지 않은 증거이다” 라고 하며 지방의 징세업무에 대해 감독이 잘 이루어지고 있지 않음을 비판하였다. 註82) 이것은 ‘관세관관제’ 자체에 대한 불만이었다.‘관세관관제’가 기존의 세금징수원이던 군수와 이서를 배제하기는 했지만 새로 뽑은 세무관과 세무주사는 여전히 한국인이었다. 註83) 한국측에서 볼 때 ‘관세관관제’는 거대한 지각변동과 같은 것이었지만, 일본측에서 볼 때에는 사람만 바뀌었을 뿐 세금의 징수는 여전히 한국인이 담당한 것에 불과했다. 이것은 한국인을 고용하여 재정과 관계된 금융업무를 시행하려 했던 재정고문 목하전종태랑의 재정방침에서 나온 것이었고 한국인의 반발을 우려해서였다.

그러나 이등박문은 이처럼 한국인을 중심으로 하는 징수체제는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한국의 정치를 개량하기 위해서는 한국인만으로는 도저히 완성할 수 없고, 일본인으로 하여금 이를 완성시킬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註84) 한국인을 채용하여 재정정리를 단행하고자 했던 목하전종태랑과는 처음부터 입장을 달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입장의 차이는 고문정치가 폐지되고 차관정치가 실시되자 징세기구의 개혁으로 나타났다.


4. 재무감독국관제의 시행

1907년 6월 헤이그특사사건을 계기로 초대통감인 이등박문은 7월 18일 그 책임을 물어 고종황제의 양위를 강요했다. 그리고 7월 24일에는 이완용내각과 제3차 한일협약을 체결했다. “한국정부는 통감이 추천하는 일본인을 한국관리에 임명할 것”이라는 제3차 한일협약의 규정에 따라 고문정치를 폐지하고 일본인을 한국관리로 임명하는 차관정치次官政治를 실시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거의 모든 행정조직에 일본인이 대거 등용되었고 그 결과 일본인이 한국의 행정을 장악해 나가기 시작했다. 차관정치가 실시됨에 따라 1907년 10월 재정고문은 사임하고 탁지부 차관이던 황정현태랑荒井賢太郞이 탁지부 차관이 되어 이등박문과 함께 재정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에 재정고문이 실시했던 ‘관세관관제’는 1907년 12월 13일자 칙령46호와 47호로 공포된 ‘재무감독국관제’와 ‘재무서관제’로 대체되었다. 註85) 이로써 경성경기, 강원도·평양평안남북도, 황해도·대구경상남북도, 충청북도·전주전라남북도, 충청북도·원산함경남북도 5개소에 재무감독국을 설치하여 탁지부대신 휘하에 내국세 및 지방재무를 감독하게 하고, 그 밑에 231개소의 재무서를 두어 내국세무와 재무를 담당하게 했다. 그 결과 재정고문이 담당하던 지세수취의 감독업무와 관세관이 담당하던 지세 부과업무는 재무감독국장과 재무서장으로 이어지는 지세수취구조로 변경되었다. 그리고 이들의 임무는 탁지부 차관인 황정현태랑이 직접 관할했다.

‘재무감독국관제’는 국장 5명, 사무관 10명, 주사 80명, 기수 10명을 두었으며, ‘재무서관제’는 재무관 60명과 주사 520명을 두고 기수는 재무감독국 기수가 겸임하게 했다. 각군에 파견된 재무관과 재무주사의 수는 이전의 세무관과 세무주사의 수보다 2배 가까이 증가했으며, 이들 재무관리 대부분은 한국인과 접촉하는 하부관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일본인으로 교체되었다. 이로써 일본은 한국의 재정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또한 ‘재무감독국관제’는 일본의 제도와 거의 동일한 것으로서 화폐제도와 마찬가지로 자국의 제도를 그대로 이식한 한국 식민지화의 한 과정이었다. 註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