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황무지개간과 토지수탈, 경제침탈과 토지수탈-제3권 통감부 설치와 한국 식민지화

몽유도원 2013. 1. 18. 11:06

제4장 경제침탈과 토지수탈


화폐정리사업

징세제도의 개혁

황무지개간과 토지수탈


3. 황무지개간과 토지수탈

1. 일본의 농업이민정책과 자유도한
일본의 황무지개간권 요구와 토지수탈정책은 러일전쟁을 전후하여 본격화되었다. 두 정책의 목적은 한국 토지를 점유하여 당시 산업의 근간인 농업을 장악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동시에 일본이 직면하고 있던 농업문제와 인구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전형적인 제국주의 국가의 척식사업이었다. 물론 궁극적인 목적은 한국 인구에 버금가는 규모의 일본인을 한국에 정착시켜 일제의 한국식민화 작업을 손쉽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두 문제는 일본인의 한국이민이라는 이민정책에서부터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의 이민정책은 19세기 말 이래 급격한 자본주의 발전과정에서 야기된 농업문제와 인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일본은 명치유신 이래 계속적으로 인구가 증가하여 매년 40~50만 명의 인구가 불어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일본은 “토지는 협소하고 인구는 많은데 그 증가가 해마다 수십만을 넘어 인구를 수용할 장소가 없고, 식료는 부족함이 더욱 심하여 외국에 의존하고 있는” 註87) 상황이었다. 일본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880년 중반부터 해외 이민정책을 실시하였다. 청일전쟁 이후 한국 식민지화 정책이 확고해진 뒤부터는 한국이 일본 이주정책의 최적지로 부상하고 있었다. 註88)
일본의 한국 이민정책은 일반적인 해외이민과는 다른 산업이민, 그 중에서도 농업이민 형태를 취했다. 이를 위해 척식사업을 담당하는 일본농상무성 뿐만 아니라 각종 민간경제협회와 대판상업회의소 등지에서는 한국에 대해 광범위하고 자세한 조사를 실시했다. 註89) 특히 1904년 3월 일본 농상무성은 3만 원이란 거액의 예산을 편성하여 주구酒句 서기관을 파견하여 실지조사를 맡겼는데, 그가 올린 「한국농업조사의 건」이라는 보고서는 여러 가지 면에서 한국에서의 척식사업이 매우 유리하다는 것을 주장했다. 첫째, 한국은 이용 가능한 토지의 절반이 미경지로 방치되어 있으므로 미간지 개간이 가능하다는 것 둘째, 한국의 인구밀도가 매우 낮으므로 일본인 700만 명 정도를 이주시킬 수 있다는 것 셋째, 한국의 풍도가 일본과 거의 차이가 없으므로 일본인이 생활하는데 무리가 없을 뿐만 아니라, 토양적으로도 쌀·보리·콩 등 각종 곡물들이 잘 생산되어 일본의 식량공급지로 손색이 없다는 것 등의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註90)
이와 같이 대부분의 사전조사는 한국이 농업이민을 추진하기에 매우 적합하다는 것이었으며, 이러한 조사를 토대로 일본의 이민정책이 본격화되었다. 그러나 대규모의 이민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데에는 2가지 해결해야 되는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그 하나가 일본의 ‘이민보호법’으로 통관절차가 매우 번거롭고 여권발급에 2~5주 이상의 많은 시간이 걸려 한국이민에 장애요인이 되고 있었다. 註91) 때문에 각계각층에서는 한국척식을 목적으로 하는 도한자들에 대해 법적제한을 철폐하고 편의를 배려해 줄 것을 수차례 요구했다. 이러한 요청에 따라 1901년 11월 일본 제국회의에서는 「이민보호법중개정법률안」 註92)을 통과시켜 상민의 자유도한과 부동산점유를 인정했다. 이로써 일본인은 한국을 마치 자국을 여행하듯 여권없이 지유롭게 왕래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한국정부와 한국인의 적극적인 반대가 있어 그 실행을 늦춰왔던 일본은 1904년 러일전쟁을 이유로 완전한 자유도한自由渡韓 조치를 실현시켰다.
두번째 문제는 한국이 일본인뿐만 아니라 외국인의 토지소유를 일체 금지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당시 일본인들은 개항장을 중심으로 토지소유를 점차 확대해가고 있었지만 이것은 기본적으로 불법이었다. 그러므로 정당한 소유권을 행사할 수 없었으며, 확대에도 한계가 있었다. 토지를 자유롭게 구매하여 소유할 수 없다면 자유도한이 실현된다해도 척식사업의 궁극적 목적은 달성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문제는 한국의 보호국화가 실현되지 않은 당시로서는 실현되기 어려운 일이었다. 또한 만약 일본이 토지소유권을 획득한다면 청·영국·미국 역시 기회균등을 내세워 이를 요구할 것이기 때문에 한국을 식민지화할 목적을 갖고 있던 일본으로서는 시기상조였다. 이러한 사실은 주한일본공사인 임권조林勸助가 1904년 3월 17일 한일의정서 체결 직후 한국사정을 검토하기 위해 방문한 이등박문에게 올린 ‘대한사견개요’ 註93)에 잘 나타나 있다.

그 내용에 의하면 일본 농민이 한국에서 토지소유권을 확장하려고 건의하는 자가 많지만, 토지소유권을 허용할 경우에 실제로는 외국자본가가 농단하게 될지도 모르므로, 다만 경작 기타 지상권의 자유를 획득하게 하는 방침을 취하여 농사에 관한 일본의 이권을 부식하고 한국의 생산력을 증익하는 편이 적의하며, 혹은 한 개인의 이름으로 황무지개척권을 얻을 수 있는 호기가 있으면 실행하도록 하고, 그 경영은 일반 사인만이 전임하지 않고 일본정부가 정한 방침에 의해 이익을 일반에게 미치도록 계획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임권조의 건의에 기초하여 만들어진 것이 「대한시설강령」이었다.


2. 황무지개간권 요구배경

일본정부는 한국 척식사업에 대한 구체적인 방침을 확정했는데, 1904년 5월 말 일본 각의를 통과한 ‘대한시설강령’ 6조의 내용이 그것이다.


한국에 있어서 본방인의 기업 중 가장 유망한 것은 농업이다. 유래 한국은 농산국으로서 오로지 식량 및 원량품을 아국에 공급하고, 아방에서는 공예품을 그들에게 공급해 왔다. … 또한 한국은 토지의 면적에 비하여 인구가 적고 넉넉해 다수의 일본인을 받아들일 수 있으므로 일본 농민을 다수 한국 내지에 들어가기에 이른다면 한편으로는 우리의 초과하는 인구를 위하여 이식지를 얻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부족한 식량의 공급을 늘려 소위 일거양득이 될 것이다. 


위 내용에 의하면 일본은 한국에서 가장 유망한 사업은 농업이며, 한국의 토지와 인구가 일본에 비해 풍부하므로 일본인을 한국에 이주시켜 과잉인구 문제와 부족한 식량, 그리고 토지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려는 계획을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외국인의 토지소유가 금지된 상태에서 합법적인 방법으로 농업이민정책을 성공시킬 방안을 강구해야 했는데, 그것이 바로 황무지개간권의 요구였다.


① 관유황무지에 대하여는 일개인의 명의로서 경작 및 목축의 특허 혹은 위탁을 받아 제국정부의 관리하에 상당한 자격 있는 아방 인민으로써 이를 경영하게 할 것.

② 민유지에 대하여는 거류지에서 일리 이외일지라도 경작 또는 목축 등의 목적으로써 이를 매매 혹은 임대할 수 있게 할 것.


위의 내용은 ‘대한시설강령’ 6조의 부칙으로써 황무지개간권 획득에 대한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일본은 한국의 황무지를 관과 민 소유로 구분하여 각각 다른 방법으로 개간권을 획득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관유황무지는 일본정부가 아닌 상당한 자본가 개인의 명의로 위탁받아 경영할 것을 제안했는데, 이는 열강의 시선과 한국인의 반발을 우려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민유황무지는 거류지 안은 물론 밖에서도 그 매매 임대권을 확보하게 했는데, 이것은 결국 한국의 토지를 일본인에게 개방시키고 그 소유권을 인정케 하라는 조치였다.

‘대한시설강령’에 의거해 일본이 황무지개간권을 요구하기 시작한 것은 1904년 6월경이었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1904년 1월경에 이미 일본 대장성 관방장을 지낸 장삼등길랑長森藤吉郞을 파견하여 황무지개간권을 획득하기 위해 한국정부와의 접촉을 지시했다. 장삼등길은 왕족인 청안군 이재순, 의정부참찬 권중석權重奭 등과 차례로 만나 황무지개간권 위임계약를 체결하려 했으나, 궁내부대신 민병석의 반대로 계약은 체결되지 못했다. 이에 임권조는 동년 5월 소촌小村 외무대신에게, 황무지개간권 위임계약을 비밀리에 교섭하는 것은 시의에 맞지 않으므로 자신이 직접 나설 것을 건의했다. 註94)

임권조는 자신이 직접 수정한 계약서를 가지고 한국의 몇몇 대신들을 만나 장삼등길황을 소개하고 계약안에 대해 설명했다. 그리고 소촌小村 외무대신의 훈령에 따라 황무지개간권을 요구하는 공문과 위임계약안을 6월 6일 한국정부에 제출했다. 계약안은 총 10개조로 되어 있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전국에 산재한 토지·산림·원야·기타 일체의 황무지개간과 그 정리·개량·척식 등의 경영을 장삼등길랑에게 위임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경영을 한 후 그곳에서 농작물을 재배하여 수확하는 권리, 과수 기타의 수목을 조림하여 수용하는 권리, 목축을 하여 수익하는 권리, 혹은 어랍魚蠟을 하여 이득을 보는 등의 광범위한 행위가 포함되어 있었다. 더욱이 제7조에는 “본 계약은 경영에 착수하던 각 부에 대해 경영 완성 후 50년간을 유효로 하되 기한에 이르러 상호협의로 다시 계속 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규정되어 있다. 이것은 한국의 산림·천택·진황지의 개척권을 50년간 장기 대부하는 특허계약을 요구한 것으로, 우리 영토의 1/4이나 되는 황무지를 아무런 대가 없이 영구히 일본에 인도하라는 것과 다름없는 계약이었다. 註95)


황무지개간권 반대운동을 전개한 보안회 활동 기사


이러한 요구를 하면서 임권조 자신은 소개할 뿐 일본정부가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을 은폐하였고, 순수하게 장삼등길랑 개인이 자신의 자본으로 요구·신청한 것이라 설명했다. 또한 한국민의 반발을 우려해 이 문제를 특별 관리하여 비밀에 부칠 것을 요구했다. 임권조의 이러한 요구에 대해 이하영 외부대신은 이 문제를 주무관청인 궁내부에 통고하고 의정부회의에 회부하는 한편 고종에게 알렸다. 고종은 이 문제에 대한 속단을 피하고 그 결정을 의정부회의에 넘겼다. 그러나 그 문제에 대한 논의와 결정이 나기 전인 6월 중순경 일본의 황무지개간권 요구 사실은 일반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 소식을 접한 유학 김기우, 진사 정동명·임은교 등은 황무지계약을 반대하는 통문을 작성하여 전국 13도에 돌렸으며, 통문은 『황성신문』·『한성신보』 등에 보도되어 일반 국민에게까지 널리 알려졌다. 이에 반일감정이 크게 고조되었고, 황무지계약을 반대하는 상소문·통문·선언문·신문 논설 등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상소의 내용은 “일본인은 황무지개간을 빙자하여 한국의 전영토를 영유하려하는 것이라는 것, 실은 일본인을 한국에 식민하려는 것, 많은 일본인의 이주로 지방의 치안이 문란해질 것이라는 것, 벌채·분묘·채신·예초 등이 막혀 그와 같은 일에 종사하는 한국인이 업을 잃게 된다는 것” 등이었다. 註96)

이러한 한국민의 반대에 대해 임권조는 한국정부가 비밀유지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추궁하며 무마해 줄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더 나아가 위임계약안을 조속히 승낙하지 않으면 일본군사·경찰을 동원하여 조처하겠다며 위협을 가하기도 했다. 註97) 하지만 6월 27일 한국정부는 일본의 이러한 요구를 거절하기로 결정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으나 가장 큰 이유는 한국민의 반대가 심하다는 것이었다. 註98) 6월 29일 일본공사는 한국의 거절 이유가 타당하지 않다며 이이를 제기했고, 자본과 기술을 구비하지 못한 한국은 황무지개간을 일본인에게 맡겨야 한다며 재차 인준을 강요했다. 註99)

계속된 일본의 추궁과 위협, 그리고 강요에도 불구하고 황무지개간권 반대운동은 더욱 치열해졌다. 註100) 전직관료와 유생들의 상소와 헌의가 중심이었던 반대운동은 점차 조직적이고 투쟁적인 형태로 전환되어갔는데, 농광회사의 설립과 보안회의 활동이 그것이었다. 동년 6월 25일 전의관 홍긍섭은 회사를 설립하여 한국인에게 개척권을 주어 우리 힘으로 황무지를 개척하자는 제안을 했다. 이러한 제안들의 의해 중추원 부의장 이도재, 당례원경 김종한과 안필중·정문원·홍중섭 등의 인물이 중심이 되어 농광회사가 설립되었고, 정부는 동년 7월 11일 농광회사에 황무지개척 특허권을 주어 개척사업을 시작하게 했다.

황무지개간 철회요구를 상소와 헌의에서 대규모 집회를 통해 운동으로 확대·발전시킨 것은 보안회輔安會였다. 보안회는 1904년 7월 13일 전의관 송수만·심상진 등 조신과 유생들을 중심으로 종로 백목전도가白木廛都家에서 결성되었으며, 일본의 황무지개간권 요구가 철회될 때까지 매일 집회를 열기로 결정했다. 보안회는 전국에 통문을 발송하고 정부의 각 부서와 대관의 집까지 공함을 보내, 일본의 황무지개간 요구의 부당함과 보안회의 취지를 알렸다. 이에 대해 일본의 강한 반발과 회유, 보안회 주요 인사들의 감시와 체포·심문이 이어졌으나, 보안회는 일본의 철회가 있기 전에는 해산할 수 없다며 오히려 회원수를 더 늘려 그 수가 수천 명에 달하기도 했다. 일본은 군대까지 동원하여 외교적으로 해결하려 했지만 황무지개간권 요구를 계속 강요하면 한국민의 배일감정을 더욱 악화시킬 우려가 있다고 판단하여 동년 7월 30일 잠정적으로 이를 철회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일본의 집권여당인 정우회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특별위원을 두고 조사 논의한 후 이 요구를 스스로 철회하기로 결정했다. 이 문제로 한국인의 감정을 상하게 하면 차후 한국을 명실상부한 보호국으로 만드는데 결코 유리하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註101)


3. 토지침탈

한국인의 격렬한 반대로 일본의 황무지개간권 요구는 실패했지만 러일전쟁과 제1차 한일협약으로 한국에서 일본의 우위가 확실해지자 일본인의 이주와 토지소유는 점차 늘어났다. 한국은 법적으로 외국인에게 토지소유를 허락하지 않지만 사실상의 점유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일본은 거류민들의 불법적인 토지점유를 권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註102) 또한 한일협약으로 인해 한국은 일본의 보호국과 다를 바 없으며 토지거래가 가까운 장래에 공인받으리라는 여론이 일본 국내에 확산되면서 일본인들은 경쟁적으로 토지확보에 열을 올렸다.

이와 같은 일본인의 토지소유는 1876년 일본의 군사적 위협 아래 강제로 체결된 조일수호조규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조약은 일본인에게 치외법권과 거주권·통상권들을 보장하는 조계를 개항장 내에 마련하여 일본인의 정주를 허용함과 동시에, 부산을 비롯한 원산·인천에 개항장을 열고 일본인에게 토지와 가옥을 임차·조영할 수 있는 권리를 허용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일본인은 조계를 중심으로 사방 10리 이내에서 상업활동과 통행을 자유로이 할 수 있었다. 조일수호조규 이후 한국은 1882년의 한미통상조약을 비롯해서 같은 해의 한영조약·한독조약, 1884년의 한이조약·한러조약, 1886년의 한불수호조약 등 불평등조약을 차례로 체결했다. 그 중에서 한영조약은 영국인에게 조계지 내의 토지와 가옥을 임차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조계지 밖 10리 이내의 범위에서 토지·가옥에 대한 권리취득을 인정해 주는 것으로서, 열강이 토지소유권을 확보하는데 하나의 분수령을 이루는 조약이었다. 註103) 이 조약은 일본인의 토지잠매에 결정적 계기를 주었다.

이후 이러한 내용은 각국의 조약으로 파급되었고 점차 그 범위를 넓혀 한국 내지까지 확대되었다. 또한 이 조약의 내용을 유추 원용하여, 외국인이 가지고 있던 토지와 가옥의 매매·교환·전당이 가능하게 되었다. 더욱이 일본은 한국이 한영수호조약을 맺은 1882년에 한국과의 사이에 ‘일조수호조규속약’을 맺어, 3개의 개항장에서 일본인의 활동 범위를 조계지 밖 10리 이내에서 50리 이내로 확장하고 2년 후에는 100리 이내로 넓힌다고 규정했다. 註104) 이러한 과정을 거쳐 개항장에서는 일본인을 비롯한 많은 외국인들이 거주하며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고, 열강들은 이를 운영하기 위해 지계地契, 地券발급에 의한 부동산 등기제도를 도입했다.

지계제도는 크게 열강이 완전히 할양받아 단독 운영하는 곳과 한국정부와 공동으로 조계공사를 설치하여 운영하는 곳으로 분류되었다. 지계제도는 대체로 한국정부가 토지를 측량하여 사용권을 경매방식으로 분양한 뒤, 토지대장을 만들고 지계를 발행하여 관리했으며 제3자 대항권이 부여되었다. 또한 한영조약에서 비롯된 조계 밖 10리 밖 지역에도 지계제도가 시행되었는데, 이곳은 조계지와 달리 한국 구래의 부동산거래 관습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이 지역에서 한국인의 토지를 구매할 경우 본인이 측량하여 작성한 도면을 첨부하여 지계를 신청·발급받도록 했다. 일본은 이 제도를 바탕으로 내륙으로 토지를 확대해 나갔고, 대농장을 건설하여 안정적인 쌀 공급지를 확보해 나갔다. 註105)

조계지역 밖에서 이루어진 일본인들의 토지소유 방법으로는 잠매潛賣와 전당典當이 대표적이다. 잠매는 한국의 전통적인 토지거래 관행을 이용한 토지 매입방법으로서 일본인들이 가장 많이 이용한 방법이었다. 전통적으로 한국은 부동산매매 계약을 체결할 때 관에서 증명을 받도록 한 입안제도立案制度가 있었다. 관이 거래사실을 확인해 주는 일종의 공증제도였다. 그러나 조선중기 이후에는 수속이 번잡하다는 등의 이유로 점차 이행되지 않았다. 입안이 생략된 사문기인 매매문기의 교환만으로 거래가 종결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러한 관행은 일종의 불문법으로서 실소유자가 권리를 행사하는데 지장이 없었고, 또 민간 관행상에서도 특별한 문제없이 행해졌다. 일본인들은 이처럼 매수인의 이름보다는 문기소유 자체를 중시하는 부동산관습법에 주목했다. 한국인의 명의를 차용하거나 또는 문기에 매수인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는 방법을 사용하여 문기만 실소유자인 일본인이 갖는 형식으로 토지소유를 확대해 갔다. 註106)

전당은 부동산을 담보로 자금을 빌려주고 그 대가로 이자를 취득하는행위인데, 채무자가 돈을 갚지 못하면 전당물을 전당권자가 쉽게 차지할 수 있었다. 한국으로 진출한 일본인들은 이와 같은 관습을 악용하기 위해 전당업에 많이 진출했으며, 한국인들의 열악한 경제적 처지를 이용하여 전당을 통한 토지획득에 주력했다. 전당조건을 주로 토지의 사용권이나 수익권 등을 저당잡는 질권계약質權契約과, 매도증서나 양도증 작성을 조건으로 하는 유질계약流質契約으로 체결하여, 채무자가 변제기한을 넘기면 즉시 토지의 제권리를 차지했다. 이러한 방법은 소자본으로 비교적 넓은 토지를 매수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장래가 유망한 사업으로 일본인들에게 소개되고 있었다. 註107)

이렇듯 잠매와 전당을 통해 일본인들의 토지점유가 확대되자 상대적으로 토지와 가옥을 빼앗기는 한국인들의 피해가 속출했다. 이에 더하여 조선후기 토지의 상품화가 진전되면서 나타난 소유권 분쟁은 한국사회를 기반부터 뒤흔들었다. 소유권분쟁은 주로 사문기를 위조하여 도매盜賣하거나 투매偸賣함으로써 발생했다. 한국정부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가계제도의 도입과, 외국인의 토지소유를 금하는 법률의 제정, 근본적인 해결책으로서의 토지조사 등을 실시했다.

먼저 가계家契, 家卷제도는 가옥의 소유를 관이 공증해 주는 제도로서, 가옥을 둘러싸고 발생하는 불법적인 거래와 잠매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1893년에 수도인 한성부에서 최초로 실시되었는데, 註108) 한성부는 외국인의 거주가 많고 몰락한 농민들의 대거 유입으로 거주지문제와 관련된 분쟁이 그 어느 곳보다 심각했기 때문이다. 가옥의 주소와 종류·칸수·가격·세금 등의 내용을 기록한 가계는 2매를 작성하여 1부는 관청이 보관하고 1부는 매주買主에게 발급했다. 가계가 있어야만 가옥매매가 인정되었으므로 불법적인 가옥의 거래를 막을 수 있었고, 외국인의 가계발급 요구를 대부분 거절했으므로 외국인들의 불법적인 토지소유를 일정정도 저지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후 가계제도는 점차 각 개항장에서 실시되었고, 1906년에는 전국적인 실시를 공포하기에 이르렀다. 註109) 그러나 실제 가옥 전체의 소유권을 확정한 뒤 가계를 발급한 것이 아니라, 매주의 필요에 의해 신청할 때에만 발급했기 때문에 한계가 있었다.

가계제도의 실시와 함께 외국인의 부당한 토지소유를 금지하는 민·형법도 제정했는데, ‘전당포규칙’과 잠매자 처벌법이 그것이다. 1897년 11월 2일 법률 제1호로 발포된 전당포규칙은 토지를 비롯한 부동산을 전당할 때 주의사항과 처벌규정을 정한 법이다. 전당은 관의 허가를 받아야 하고, 전당영업은 한국인만 할 수 있고, 이를 어길 시에는 태형에 처한다는 내용의 이 법은, 일본인의 높은 고리대 착취로부터 한국인의 재산을 보호함과 동시에 일본의 전당활동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잠매자에 대한 처벌법은 1900년 4월 28일 법률 제4호 ‘의뢰외국치손국체자처단례개정건依賴外國致損國體者處斷例改正件’ 註110)으로 공포되었으며, 그 내용은 외국인에게 잠매하거나 이름을 빌려준 자는 명률 도적편 모반조에 의거하여 처단한다는 대단히 엄격한 내용의 규정이었다. 그러나 이 두가지 법률 모두 한국인에게만 해당되고 그 대책도 없어 별 효율성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토지소유권에 관한 근본적인 해결책이라 할 수 있는 토지조사도 실시했다. 한성부에서 가계제도를 실시한 지 3년 후인 1898년에 한국정부는 토지조사를 실시하기 위해 양지아문量地衙門의 설치에 관한 칙령을 공포하고 토지측량 사무를 시작했다. 註111) 광무양전사업光武量田事業이라 불리는 이 양전은 첫째, 토지소유자를 조사·확정하여 지계를 발급해 이를 국가가 직접 관리하고 둘째, 전정의 문란을 해결하여 국가재정을 확충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양전의 원칙은 종래의 양전사업과 달리 국가가 개별토지 전체를 파악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외국인이 잠매한 토지도 그 대상에 들어갔다. 따라서 이 사업이 완결되면 차명이나 무명의로 잠매한 일본인의 토지는 그 소유권을 인정받을 수 없게 되고 잠매는 제도적으로 봉쇄될 수 있었다. 또한 유명무실하던 외국인의 토지소유금지법도 지계발급이라는 제도적 장치를 통해 구체적으로 발현될 수 있었던 것이다. 註112) 이러한 양지아문의 양전사무는 1901년에 발생한 흉년으로 정부재정 확보를 위해 일시 중단되었다. 註113)

토지소유권을 국가가 직접 관리하는 일이 시급했던 한국정부는 1901년 10월 지계아문地契衙門 설치에 관한 칙령을 공포하고 註114) 다음해인 1902년부터 양전사업을 다시 재개했다. 이 사업은 국내외의 정치·경제적 사정의 악화로 소유권의 사정이 최우선이라는 판단에 따라 2가지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우선 양지아문이 이미 측량을 마친 토지에 대해서는 지계를 발급하여 소유권을 사정하고, 양지아문에서 측량하지 않은 지역에 대해서는 지계아문에서 양전사업을 시행하되 구양안을 토대로 지계를 발급하는 것이었다. 이때 행해진 관계발급사업을 광무지계사업이라고 한다. 그러나 전국적인 지계제도의 실시에는 이르지 못했다. 한국정부가 현실적으로 양전을 실시할 수 있는 태세가 정리되어 있지 않았고, 러일전쟁의 발발이라는 외적요인도 더했졌다. 또한 지계제도에 대한 일반 국민의 인식이 미숙했던 것도 지계제도가 중단된 원인의 하나였다고 지적된다. 註115) 결국 1904년 1월 8일 지계아문이 해체되면서 지계제도의 실시는 좌절되었다. 註116)

이상과 같이 광무양전지계사업은 좌절되었지만 한국정부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1905년 2월 종전의 법률 제4호를 정비하여 근대법의 틀을 갖춘 『형법대전』을 제정·공포했다. 그 내용은 그동안 부동산 거래상에서 나타난 제반문제 즉, 사기·이중매매·외국인에게 토지를 잠매한 자에 대한 처벌규정을 구체적으로 명문화한 것이었다. 이처럼 끊임없이 외국인의 토지소유를 금지하기 위한 한국정부의 노력과 정책은 토지소유권을 확보하여 식민지배의 토대를 구축하려 한 일본의 입장에서는 시급히 해결해야 될 걸림돌이었다. 이를 위해 일본은 1905년 11월 제2차 한일협약을 체결하여 이등을 초대통감으로 하는 통감정치를 실시했다. 본격적인 식민체제 구축체제인 보호국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따라서 토지제도 및 지계제도의 정비는 일본의 강압적인 지배 아래 통감으로 부임한 이등에게 맡겨졌다.

토지제도 정비에 대한 이등의 생각은 1906년 4월 19일 제5회 ‘한국시정개선에 관한 협의회’에서 드러났다. 註117) 협의회에서 토지제도를 개혁하는 문제에 대해 한국정부측은 토지제도의 정리와 세입증가의 효과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 토지소유자에게 지권을 먼저 교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그동안 한국정부가 견지해 온 지계발급사업의 일환이었다. 반면에 이등은 지권을 교부하기 전에 먼저 토지에 관한 법률을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법률을 먼저 제정하여 한국인과 외국인 토지소유권자에게 국가에 대한 의무를 명확히 하는 것이 선결이고, 그후 지권을 교부하여 등기를 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법률을 제정하는 것에 대해서도 서로 생각이 달랐는데, 한국대신측은 먼저 토지측량을 하고 법률을 제정하는 ‘선토지측량 후법률제정’을 주장했으나, 이등은 시간과 경비를 이유로 법률을 먼저 정하고 그에 기초하여 지권을 교부한 다음 매매나 양여시 측량을 하자는 ‘선법률제정 후토지측량’을 주장했다. 註118) 이와 같이 이등이 법률제정을 먼저 주장한 이유는 그때까지 한국인 명의로 소유하고 있던 일본인의 불법적인 토지소유를 구제하기 위한 법적조치가 우선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註119) 이를 위해 이등박문은 동경대학 교수이면서 일본민법전을 기초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인 매겸차랑梅謙次郞을 초빙했으며, 매겸차랑은 한국정부가 촉탁하는 형식으로 그 임무를 맡게 되었다. 註120)

처음에 이등은 매겸차랑에게 한국의 관습법에 기초하여 지권을 발급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토지법의 제정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매겸차랑은 부동사법조사회를 만들어 한국의 구관 및 제도조사에 착수했다. 그러나 1906년 7월 23일 제9회 협의회에서 이등은 갑자기 일본인의 토지거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임시적인 토지증명에 관한 규정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註121) 이에 동년 8월 26일 칙령 제65호로 ‘토지가옥증명규칙’이 공포되었다. 註122) 이 법의 핵심은 종래 외국인에게 거류지 밖 10리 이내의 토지소유를 금지해왔던 항목을 삭제하는 것으로, 외국인의 토지소유 제한을 철폐하는 것이었다. 즉 ‘토지가옥증명규칙’은 그때까지 불법이었던 일본인을 비롯한 외국인의 토지소유를 합법화한 것이다. 또한 연이어 발포된 ‘토지가옥전당집행규칙’1906년 12월 28일과 ‘토지가옥소유권증명규칙’1908년 7월 16일으로 전당권에 대한 강제집행과 증명규칙 이전에 잠매한 일본인의 토지까지 합법화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이로써 일본인의 부동산소유권과 전당권이 증명에 의해 합법화되었다.

‘토지가옥증명규칙’의 공포에 따라 이를 이용한 일본인들의 토지집적은 엄청나게 증가했다. 증명규칙을 이용한 매매·전당·소유권보존증명 등은 1910년까지 9만여 건에 달했고, 토지거래액도 1907년도에는 500만원 정도였던 것이 1910년도에는 2,100만 원을 넘어섰다. 〈표 6〉에 의하면 1910년까지 일본인이 확보한 토지의 규모는 2,254명이 86,952정보를 소유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당시 한국의 경작 가능한 토지를 230여만 정보로 추정할 때 약 30분의 1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또한 이들이 주로 토지를 매입한 곳은 전라남북도·경상남도·황해도·충청남도·경기도 등의 전주평야·나주평야·김해평야 등 곡창지대를 중심으로 한 곳으로 쌀의 상품화에 유리한 입지조건을 갖고 있는 곳이었다. 지목별로는 논이 반 이상을 차지했다. 註123)

표 6〉 1910년 지역별 일본인 토지소유면적과 인원 (단위: 정보·명)
구분경기충북충남전북전남경북경남황해강원평남평북함남함북합계
1,9971123,48416,21910,7488894,5663,852 693 15 42,585
1,511621,7592,1097,5381,4663,2817,9744755152152426,726
임야
원야
1,8691291,2551,2883,7325364,542417 74 16 13,867
기타70216163484662,333292 96 30 3,771
5,4503086,66120,25122,1052,96014,72612,53741,620162782486,952
원안1828437028438142735346761144052,254
출전 : 조선총독부, 『조선총독부통계연보』, 1912, 183~184쪽과 부록 25~39쪽.


1909년까지 일본인의 토지소유면적을 보면 30정보 이상을 소유한 지주는 135명이고, 500정보 이상을 소유한 대지주도 21명이나 되었다. 註124) 이로써 보면 증명규칙 이후 일본의 한국 토지소유는 지주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나갔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일본의 농업경영 정책은 일본인 지주의 권리를 강화하는 한편 한국인 소작농의 경작권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전개되어 나갔다. 1908년 8월 6일에 공포된 탁지부령 제278호 ‘역둔토관리규정’은 이러한 일본의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중심 내용은 소작권을 임차관계로 확정하여 양도·전당·전대를 금하고, 소작기간은 5년으로 정하며, 소작인의 의무사항을 위반할 때에는 경작권을 박탈한다는 것이었다. 일방적으로 지주에게만 유리한 이 제도로 인해 한국인 소작농은 토지에 이어 그 권리마저도 박탈당하고 말았다.
〈김 혜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