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친일세력의 ‘보호국화’ 옹호와 발호, 일본의 병합 추진과 대한제국의 멸망-제3권 통감부 설치와 한국 식민지화

몽유도원 2013. 1. 18. 11:56

제5장 일본의 병합 추진과 대한제국의 멸망


일본의 병합론

친일세력의 ‘보호국화’ 옹호와 발호

병합조약과 대한제국의 멸망


2. 친일세력의 ‘보호국화’ 옹호와 발호

친일세력은 일제침략에 편승하는 한편 「외교권이양선언서」·「합방청원서」를 발표하는 등 매국적인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이등박문은 이들을 적절하게 회유하는 등 자신들 지배체제 내로 포섭하였다. 친일단체는 자신의 심복을 동원하여 자의적으로 조정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을사늑약 체결에 즈음하여 윤길병尹吉炳·홍긍섭洪肯燮·이용구李容九 등은 이를 지지하는데 앞장섰다. 註63) 일제에 의한 ‘한국보호국화’는 이들에게 문명사회를 건설하는 지름길이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민족지로 일컬어지는 『황성신문』 등도 문명화에 경도되어 이를 적극적으로 배척하지 않았다.
이들은 단순한 선언서 발표에만 그치지 않고 직접 일본군을 지원하는 등 러일전쟁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다. 일진회 임원들은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 군수품 수송과 군용도로 건설 등에 회원 20여만 명 이상을 동원할 정도였다. 회원 중 일부는 북진하는 일본군을 따라 간도間島까지 침투하여 러시아군이나 주민들 동태를 파악·보고하는 간첩행위를 수행하기에 이르렀다. 헤이그특사사건에 따른 광무황제 강제퇴위와 구한국군 해산은전면적인 의병전쟁 확산을 초래하였다. 의병진은 일진회원을 적으로 간주하여 직접적인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이들은 의병에 대한 무력진압과 식민지화를 획책하는 일본군 지원에 선봉적인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자위단自衛團 조직은 일진회 운영을 좌우하는 일본인 고문들에 의하여 입안·시행된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이다. 註64) 이들은 의병진 동태는 물론 군수품을 지원과 러시아군에 대한 각종 첩보까지 제공하였다. 직접 의병진에 대한 공격도 서슴지 않는 등 의병진 상호간 연합작전을 분쇄시켰다. 심지어 의병전쟁 근거지를 파괴하려는 ‘남한대토벌작전’도 일진회원들의 자발적인 원조하에 이루어졌다. 일진회 이적행위는 의병진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당시 팽배한 불신감은 의병진 전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이었다. 이처럼 국내 항일근거지 상실은 국외독립군기지 건설로 전환하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한일합병’ 이후 친일파들은 식민통치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반민족적인 행위를 노골적으로 일삼았다. 인적·물적 수탈을 자행하는 일제 지배정책은 이들에게 이른바 ‘개혁시대’로 인식되었을 뿐이다. 내선일체內鮮一體·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 등에 입각한 동화정책同化政策은 영원한 한일 양 민족 행복을 위한 조처라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註65) 본위적이고 일방적인 동화정책은 한국인에 대한 근본적인 ‘차별화’를 전제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친일세력은 이를 의도적으로 은폐하거나 무시하였다. 이들은 양 민족 결혼을 통한 상호간 불신을 해소시킬 때 한국인은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보았다. 영친왕英親王 혼례에 대한 극찬은 동화주의에 의한 민족말살정책에 스스럼없이 편승함을 의미한다. 이는 자신들이 최고 지배층으로 몸 담았던 대한제국 황실에 대한 모독이자 폭거였다.
영구불변한 한·일 양 민족 융화방안은 다양한 입장에서 모색되었다. 친일 관료·경제인·종교계 인사 등을 중심으로 조직된 일본관광시찰단은 우호적인 관계 증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註66) 이들은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나 최초 지방지인 『경남일보』 등에 목격한 일제의 발전상을 홍보하는데 앞장섰다. 註67) 1910년대 대부분 관변단체는 이러한 분위기와 목적 속에서 조직되었다. 이는 일본민단 확대·발전과 더불어 식민지배체제를 더욱 공고하게 만들었다.
상호간 사상과 감정을 서로 원만하게 소통하는 방안은 일본어보급이었다. 일본어보급은 일제강점 초기부터 중요한 교육정책으로서 추진되었다. 식민교육정책의 근간인 ‘조선교육령’은 일본어를 국어로서 규정한 반면 한글은 선택과목으로 전락시켰다. 한글은 한문과 함께 제2외국어일 뿐이었다. 이에 군청·경찰서·면사무소·헌병파견소·공립보통학교와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 등은 자발적으로 ‘국어강습회’를 설립·운영하고 나섰다. 일본어보급은 이러한 가운데 확산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맞았다. 특히 일본인의 자발적인 참여는 이와 더불어 일본식 생활양식을 한국인에게 너무나 쉽게 이식할 수 있었다. 이는 배일감정 약화와 더불어 저항의식을 약화시키는 요인이었다.

1. 러일전쟁 협력 선언
러일전쟁은 청일전쟁 연장선상인 삼국간섭三國干涉에서 비롯되었다. 청일전쟁의 전리품이나 다름없는 요동遼東을 청나라에 반환시켜준 댓가로 러시아는 동청철도東淸鐵道 부설권과 여순旅順·대련大連을 25년간 조차하는 등 만주 일대를 자신 세력권으로 편입하였다. 또한 한국에서 아관파천을 계기로 친러정권을 수립하여 각종 이권도 농단하는 등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한러은행 설치와 군사고문단 파견 등은 한반도에서 러시아 위상을 가늠하는 요인이었다. 다만 러시아는 시베리아횡단철도가 완성될 때까지 일본과 충돌을 피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웨베르Waber - 소촌각서小村覺書와 로마노프Lobanoff - 산현의정서山縣議定書 체결 등은 양국간 세력균형을 유지하려는 고육책에서 비롯되었다. 註68)
일제는 선제공격으로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1904년 2월 8일과 9일 밤 일본군은 여순과 인천 앞바다에 정박 중인 러시아군함을 격침시켰다. 일본 해군은 일방적으로 황해 제해권을 장악한 가운데 육군도 인천상륙 후 곧바로 서울을 제압하는 등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었다. 전열을 정비한 러시아군 반격도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9월 요양회전遼陽會戰은 양국 군대가 벌인 최대 혈전이었다. 일본군은 이를 기회로 북상을 계속하는 등 승기를 잡았다.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미국은 이를 중재·교섭하는데 나섰다. 강화조약 결과로 일제는 한국과 만주에 대한 독점적인 지배권을 국제사회로부터 인정받았다. 註69) 반면 미국과 영국은 각각 필리핀과 인도에서 배타적인 지배를 일본으로부터 보장받는 등 상호간 식민지배를 정당화시켰다.
한편 1904년 1월 22일 대한제국은 국외중립을 선언하는 등 전쟁 소용돌이에서 벗어나고자 노력을 기울였다. 일제는 이에 전혀 아랑곳 하지 않고 일본군을 강제로 한국에 상륙시키는 등 불법적인 침략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동년 2월 10일 러시아에 대한 선전포고와 동시에 일제는 한국정부에 ‘한일의정서’ 체결을 강요하였다. 일제는 대한제국 독립 보장과 영토보전을 운운하면서 한국을 자국 영토나 다름없이 사용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일본군은 원활한 전쟁 수행을 위한 경의선을 강제로 부설하는 동시에 서울-의주간 군용도로 건설을 한국정부에 강요하였다. 이는 한국 식민지배를 위한 정치적·군사적·외교적인 기초작업에 착수함을 의미한다. 즉 일제의 ‘한국보호국화’ 의도는 여기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일제는 러일전쟁 발발 직후 한국인은 물론 한국 내에 거주하는 외국인과 러시아군과 접촉을 금지시켰다. 이는 공포분위기 조성과 무력적인 시위로 한국인의 자발적인 협력을 끌어내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1904년 2월 28일 조선주차군 12사단장 정상井上은 ‘부로간첩俘虜間諜에 관한 군령’을 발표하는 등 신속한 대응책을 마련하였다. 주요 내용은 “한국인으로 일본군에 대한 간첩행위나 간첩행위를 도운 자는 사형에 처한다. 교전지交戰地나 작전지대에서 일본군에 위해危害를 가하거나 이러한 행위를 하는 자도 사형 또는 중형에 처한다”는 등이었다. 사단장은 외부대신 이지용李址鎔에게 한국주재 각국 공사관에게 이러한 사실 통보를 요청하였다. 또한 지방관에게도 이를 널리 고시하게 하는 등 삼엄한 군령 실시를 강요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군사시설방해자에 대한 처벌과 동등하게 적용함으로써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주요시설물이나 군수품 등도 러일전쟁 수행을 위하여 강제로 징발하는 등 사실상 한반도는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평안남도지방관의 협력방에 관한 참모총장으로부터 의뢰 건’은 이러한 실상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註70) 특히 전선이 북상하는 가운데 평안도·함경도지역에 대한 인적·물적 수탈은 훨씬 강화되었다.

일제는 일본군을 후원하거나 지원한 인사 등에 대한 서훈을 아끼지 않았다. 위문단·관전사觀戰使 등에 포상이나 은사금 하사도 한국정부에 요청하였다. ‘한국검사 윤갑병 외 105명 서훈 및 사금賜金의 건’은 이를 반증한다. 윤갑병尹甲炳은 1863년 8월 28일 서울 종로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파평으로 부친은 상화相和였다. 내부 주사로 관계에 진출한 이래 그는 통상아문 국장·정산군수·평리원 검사·봉상시 제조·함북관찰사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정산군수에서 퇴직한 후 염중모·윤시병·유학주 등과 일진회 조직에 남다른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1905년 5월 일본군 북진대北進隊에 종군하는 등 일진회 동원에 앞장섰다. 이러한 공로는 특상훈4등特賞勳四等 서보장瑞寶章 수여와 평리원 검사 발령으로 이어졌다. 그는 일제 침략에 편승한 전형적인 ‘친일관료’였다. 일제는 러일전쟁 와중에 친일인물에 대한 포상과 육성을 병행하는 등 식민지화에 박차를 가하였다.

재야인사 중 친일적인 인물도 일체 침략을 비호하고 나섰다. 정3품 경광국慶光國은 중앙 관리들에게 한중일 삼국동맹론의 정당성을 주창하기에 이르렀다. 요지는 “러시아는 교활하여 아시아를 병탄하려는 목적만이 있을 뿐이다. 이에 비하여 일본은 아시아 맹주로서 동양의 강토를 보전하는 데 의무를 다하고 있다. 그런 만큼 일본을 중심으로 3국이 제휴하여 러시아 침략을 막아내어 영원한 자유와 번영을 누리자.”라는 입장이었다. 註71) 글을 게재한 기자도 이러한 입장에 동조하는 분위기였다. 일본에 대한 우호적인 입장은 러일전쟁과 이등박문의 한국방문 등에 대한 평가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황성신문』은 러일전쟁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였다. 「한국에서 러시아와 일본 관계 논함」이라는 논설은 전쟁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러시아에게 전가하는 논리로 일관되었다. 註72) 1890년대 후반 ‘만한교환론과 한국분할론’은 러시아가 주창한 사실로 보도하는 등 사실을 왜곡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독립국인 대한제국에 대한 러시아의 이러한 주장은 무례방자한 문제로서 결코 용서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더욱이 러시아는 아관파천 이후 각종 이권을 농단함과 아울러 한반도 각지에 군사기지를 건설하는 등 우리 국권과 국체를 모욕·능멸한 침략자로서 규정하였다. 반면 일본은 의협심을 발휘하여 한국 영토보존과 독립국가로서 위신을 보호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따라서 일본군에 대한 한국 지원은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일본은 아시아 평화를 수호하는 영원한 우리의 맹방盟邦일 뿐이었다.

흉흉한 한국인 민심을 수습하는 동시에 침략을 가시화하기 위하여 내한한 이등박문에 대한 평가도 너무나 긍정적이었다. 3월 19일자 「이등대사 내한 관계」는 이와 같은 인식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註73) 청일전쟁 당시 한국을 독립국으로서 존치시킨 인물은 바로 이등박문이었다. 그는 ‘침략의 원흉’이 아닌 열강의 틈바구니 속에서 한국을 지켜낸 ‘은인’이었다. 내한 목적도 한국을 영원히 융성시킬 계획과 맞물려 있다고 하였다. 곧 한국인은 과거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여 일본을 배척하지 말고 그들의 충고를 겸허하게 받아들여 국운을 만회함으로써 유신사업에 매진할 것을 강조하고 나섰다. 일순간 잘못된 판단은 장래 한국의 불행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웠다. 일제에 의한 ‘보호국화’만이 한국민의 새로운 희망이라는 강변을 늘어놓았다.

5월 3일자 「강약의 형세는 의리와 용기에 있다」는 논설도 이러한 취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일본은 청국과 한국을 위하여 불가피하게 러일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국력은 단순히 병력 다소에 결코 있지않다. 지모智謀·용략勇略의 장단과 우열은 국력을 좌우하는 요인이다. 일본은 자국 이익을 위하여 전쟁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국제적인 공법公法과 대의大義에 따라 이를 실천함에 불과하다. 러일전쟁에서 일본 승리는 천리天理이므로 당연한 결과일 뿐이다. 독립국가를 보존·유지하기 위하여 우리는 일본에게 전적으로 의지하자는 논리였다. 약육강식·적자생존에 입각한 사회진화적 시각은 신문기자를 포함한 한국 식자층에 널리 유포되고 있었다. 註74) 한국인 상당수는 이를 만고불변인 천리天理로서 금과옥조처럼 수용하는 등 일제 침략 앞에 스스로를 무장해제 상태로 만들었다. 언론조차도 시대적인 사명을 내팽개친 채로 일제 침략을 문명 전수자로 둔갑시키는 등 심각한 ‘자기모순’에 직면하였다. 한국 식민지화 계획은 이러한 가운데 별다른 차질없이 저들의 의도대로 착착 진행시킬 수 있었다.


2. 을사늑약 찬양

러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제는 한국정부와 외국인고문협약 체결을 강요하였다. 이에 따라 재정고문 목하전종태랑目賀田種太郞와 외교고문 스티븐슨Stevens은 각각 초빙되었다. 일제는 한국정부 각 부처에 일본인 고문관 용빙傭聘을 강요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한국정부 내 실권은 이를 통하여 차례로 일제에 넘어갔다. 또한 외국에 파견된 공사관원 소환도 단행하는 등 사실상 한국을 저들의 식민지로 전락시켰다. 계태랑-태프트협정Katsra- Taft Agreement과 제2차 영일동맹은 국제사회로부터 한국을 완전히 고립시키기 위함이었다. 일제는 자국에 유리한 국제정세에 편승하여 독점적인 한국 지배 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다.

을사늑약은 한국인 의지와 전혀 상반된 일제와 친일세력간 ‘흥정’ 속에서 이루어졌다. 일제는 친일단체를 동원하여 ‘한국보호국화’ 필요성을 선전하게 하는 가운데 1905년 9월 27일 구체적인 보호국화 계획안 8개항을 결정하였다. 註75) 주요 내용은 “① 한국 외교권은 일본 수중에 넣을 것, ② 보호조약 성립 이전에 미국·영국·독일·프랑스 등으로부터 사전 양해를 구할 것, ③ 조약체결 시기는 11월 초순으로 할 것, ④ 주한공사·천황칙사·한국주차군사령관 등 3인의 협력하에 이를 추진할 것, ⑤ 한국정부 동의를 얻지 못하면 일방적으로 이를 추진할 것” 등이었다.

이에 부응하여 일진회는 1905년 11월 6일 「외교권이양선언서」를 발표함으로써 국민의 공적임을 만천하에 드러내었다. 註76) 이등박문을 전권대사로 특파한다는 소식에 접한 송병준宋秉畯은 일진회 국면전환책 일환으로 이를 활용하였다. 일진회를 배후에서 조종하던 좌뢰웅철佐瀨熊鐵로부터 송병준·이용구는 선언서 초안을 전달받았다. 제술위원인 홍긍섭은 일부 자구를 수정한 후 이를 전격 발표하였다. 주요 내용은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은 일제의 의협심 발로에서 비롯되었다. 한·일 양국 관계는 장차 어떻게 변화될 지 알 수 없으므로 외교권을 일본정부에 위임하자. 일본정부는 한국을 외부 침략세력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다. 러일전쟁시 일진회원의 일본군 지원은 이러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사심없는 행위였다. 한국의 독립 보호와 유지 강토는 일본황제의 조칙에서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우리는 일심동체로 일본과 신의로서 교류하고 성의로 동맹하여 그 지도를 받아 보호에 의거하여 국가독립을 유지함으로써 안녕 행복을 영원히 누릴 수 있다”는 망언이었다. 즉 이는 일제 침략을 칭송하는 가운데 매국으로 국가 독립을 유지한다는 궤변에 불과하였다. 곧 을사늑약 주요 내용은 일진회 주의와 강령을 그대로 수용하는 정도였다. 우리의 영원한 우방인 일본에 순순히 의탁하는 가운데 문명 진보는 자연스럽게 달성된다는 논리는 이러한 사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을사늑약을 찬양한 일진회의 송병준(좌)과 

고문 일본인 내전양평(중), 이용구(우)


일진회 매국행위는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고 이른바 ‘한일합병’ 후 해산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더욱이 이 선언서는 한국 외교권 박탈을 위한 관제官制 여론으로 활용되었다. 이등박문 등은 이를 한국정부에 제시하는 등 한국인 여론을 호도하기에 이르렀다. 일본군은 궁성을 포위하여 광무황제와 대신들에게 조약 체결을 위협·강요하였다.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이 완강하게 저항하자 일본헌병대에 구금한 후 일제는 ‘을사오적’으로 하여금 날인을 강요하여 이를 결국 관철시켰다. 이는 외형적인 표현과 달리 한국외교권을 통째로 빼앗은 폭거이자 국제적인 만행이었다.

매국매족에 대한 한국인 분노는 대대적인 항일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일제의 엄격한 검열에도 『황성신문』 주필 장지연張志淵은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으로 국민의 의분을 불러 일으켰다. 註77) 대한매일신보사를 경영하던 영국인 베델Ernest Thomas Bethell은 광무황제가 러시아·프랑스·독일 등 각국 원수에게 보낸 서한을 게재하였다. 그는 을사늑약은 광무황제가 체결하지 않았기 때문에 원천적으로 무효임을 밝혔다. 또한 지식인들은 상소와 언론투쟁을 병행하는 등 일제의 야만성을 폭로하였다. 유생들은 의병운동을 재기하는 등 전면적인 대일전을 선포하고 나섰다. 시종무관 민영환閔泳煥은 국민에게 고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이어 조병세趙秉世·홍만식洪萬植·송병선宋秉璿·이상철李相哲·이한응李漢應 등도 을사늑약 부당성에 항의한 후 분사하였다. 註78) 상인들은 철시를 단행하는 등 배일감정은 증폭되었다. 충의사는 ‘을사오적’에 대한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기에 이르렀다.

선언서는 단순한 구호에만 그치지 않았다. 친일세력은 외세를 끌어들어 자주적인 독립국가 위상을 일거에 짓밟았다. 을사늑약은 일제의 반半식민지로 전락한 한국사회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처럼 일부에 의하여 자행된 친일행위는 개인적인 불행에만 머물지 않았다. 일신의 안일을 위한 ‘단순한’ 행위조차도 역사적인 미증유의 민족사적 불행을 초래하고 말았다. 註79) 제국주의시대는 힘에 의한 강자 논리만이 정의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일제 고문정치를 국가독립 유지와 한국인 안녕·행복을 보장하는 ‘절호’의 기회라고 강변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3. 의병탄압


1) 일진회의 의병탄압

고종황제 강제 퇴위와 한국군 해산은 의병전쟁을 전면적으로 확산시키는 계기였다. 1907~1909년까지 각각 304회·1,450회·950회 달하는 충돌회수는 이를 반증한다. 주요 공격대상도 일본군·일본인과 일진회원 등이었다. 이에 통감부 촉탁인 내전양평內田良平는 일진회원으로 하여금 피해 상황과 한국인 동정을 파악·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일진회 임원진은 일제 침략을 옹호·은폐하는데 급급한 실정이었다.

이들은 의병전쟁을 약화·분열시키려는 입장에서 다양한 활동을 서슴지 않았다. 홍긍섭·한석진韓錫振·김택현金澤鉉·최영년崔永年 등은 1907년 9월 19일 「의거선언서義擧宣言書」를 발표하였다. 註80) “의병활동은 시세변화를 전혀 인식하지 못한 어리석은 자들의 소행임을 부인할 수 없다. 한국지배층은 온각 불법행위와 약탈을 일삼는 무리로서 추호의 양심조차 없는 악랄한 ‘흡혈귀’에 불과할 뿐이다. 500년 종사를 보전하고 2천만 생명을 유지할 계책은 오늘날 가장 시급한 문제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현안에 대한 방책은 전혀 없이 감정적으로 일제의 ‘우호적인’ 제안·거부는 파멸로 이끄는 지름길이 아닌가. 의병의 ‘의’는 천하 공물로 개인이 사용할 수 없는 개념인데, 무지한 의병은 사사로이 이를 전혀 거리낌 없이 사용하니 애처로움을 금치 못하겠다. 하루 속히 잘못을 반성·귀순하면, 참된 새생활은 반드시 보장되는 동시에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 만약 이를 거부하면 일진회원은 의기義旗를 들어 토벌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註81)

의병전쟁은 이들에게 시대에 역행하는 ‘부질’없는 어리석은 행위로서 간주되었다. 이는 대세에 거역하면서 사리사욕을 위한 민족을 기만하는 대죄라고 주창하고 나섰다. 그런 만큼 하루라도 빨리 지난 과오를 뉘우치고 귀순한다면, 우리는 동포로서 포용하겠다는 입장이었다. 친일행위에 대한 자가당착은 바로 여기에서 엿볼 수 있다. 적반하장賊反荷杖은 이를 두고 일컬는 의미가 아닐까.

최영년은 이러한 입장에서 의병전쟁의 부당성을 더욱 통렬하게 논박하였다. 1907년 10월 12일 「경고지방폭도문警告地方暴徒文」은 이러한 그의 생각을 반영하고 있다. 註82) “‘의’는 천하 공심公心으로 사의私意를 결코 의미하지 않는 개념이다. 그런데 지식에 몽매한 일부 무리는 시대 흐름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채 일시적인 오해로서 의병진에 투신하고 말았다. 오해를 불러온 원인은 ① 혈기에 기대어 흉기를 지니고 어떠한 목적을 관철하려 함이다. ② 병기의 날카로움과 둔함을 생각하지 않는 명예욕의 발로에서 비롯되었다. ③ 현실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무모한 만용에 가까운 행동양식이다. ④ 처자식과 조상에 대한 자기 본문을 망각한 처신 문제로서 비도匪徒에 가까운 행동을 미화하는 문제이다. 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민폐를 제공하는 원천은 바로 의병전쟁이다”라고 하였다.

더욱이 광무황제 양위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전하고 아들이 어버이를 이어받는 법도로서 하늘이 부여한 특권이다. 국가 종사를 위한 백년대계가 일부 무리의 과오로 위협을 받고 있으니 심히 우려할 바가 크다. 그러므로 각자 생업에 복귀하여 안업安業을 달성함으로써 새로운 시대에 부응한 사회질서를 회복하자”고 했다. 의병에 대한 협박과 의병진 상호간 내부 분열을 획책하는 이러한 입장은 지속적으로 표출되었다. 註83) 기관지 『국민신보』 등은 이들 주장을 여과없이 그대로 전재하였다. 한편 정부도 일제 압력에 굴복하여 의병진 해산과 귀순을 장려하였다. 1907년 10월 22일 발표된 ‘진비안민방침’은 내각과 법부에서 공포한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이다. 註84) 주요 내용은 ① 관직을 비워둔 군수는 3일 이내에 부임을 종용하되, 이에 따르지 않는 자는 해임함, ② 군수는 품계品階에 관계없이 지방을 안정시키고 진무鎭撫할 수 있는 능력자로 채용, ③ 현재 폭도가 있는 군은 군수 부임시 군사와 순사를 대동하게 함, ④ 면적의 다소에 따라 부임한 군수는 10일 이상 20일 이내에 인호작통법人戶作統法과 내지여행권규칙을 시행함, ⑤ 인민이 여행할 때는 통수統首에게 통행권을 청구한 후 돌아와 반드시 반납할 일, ⑥ 여행권이 없는 자와 있어도 행동이 수상한 자는 이장이 면장에게 보고하고 면장은 군수에게 반드시 보고할 일, ⑦ 군수는 면리장과 상의하여 백성이 가진 군물을 수합하여 훗날의 우려를 예방하되 잃어버리거나 빠뜨린 자는 징벌함, ⑧ 군수는 면리장을 단속하고 면리장은 주민들을 단속하여 비도가 들어오는 것을 방어하게 함 등이었다. 이처럼 친일 관료들은 의병을 비적이나 초적에 비유하는 등 일제의 침략적인 입장을 대변하고 있었다. 친일관료나 일진회에 대한 의병진 공격은 이러한 역사적인 연원에서 비롯되었다.

광무황제 강제퇴위와 한국군대 해산 이후 의병은 일진회원과 친일 관리 등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이에 일진회장 이용구는 일본육군대장 계태랑에게 회원들 생명과 재산 보호를 요청하였다. 나아가 1907년 11월 9일에 공포된 ‘자위단규칙’에 앞서 11월 6일 ‘자위단조직건의서’도 총리대신 이완용과 통감 이등박문에게 제출하였다. 註85) 현재 추수기를 맞아 충청도와 강원도 무고한 백성들은 의병으로 인하여 절대 기아상태에 직면하고 있다. 일진회원은 100만명으로 전국 각지에 산재하는 만큼 이들로 하여금 각면 단위로 자위단을 조직하여 이러한 무리들을 몰아냄으로써 사회적인 안정을 기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자위단의 주요 임무는 ① 타지로 떠나는 사람의 일정과 주요 활동 등을 미리 단장에게 보고, ② 사적으로 보관한 무기 매수 - 귀순하여 무기를 바치는 자는 이를 허락하고 최대한 관용을 베풀 것, ③ 군대·헌병·경찰의 뜻을 받들어 그 사무를 도와 지방 안녕을 유지할 것, ④ 주야로 순라巡邏를 실시하여 도적에 대비하는 동시에 행인을 주시할 것, ⑤ 적의 동태를 정찰하고 선동하는 무리를 정탐하여 관헌에 보고할 것, ⑥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무고한 백성들의 살아갈 방도를 강구할 것 등이었다. 회원들 보호와 아울러 직접 의병진 분열·교란은 저들의 궁극적인 목적이었다. 이는 의병진의 단순한 전력 약화뿐만 아니라 일제의 진압을 측면에서 지원하는 반민족적인 폭거나 다름없었다. 면단위로 조직된 자위단은 청장년을 강제로 가입시키는 등 많은 폐단을 초래하였다. 註86) 특히 일진회의 불법적인 행위와 친일활동은 국민적인 반발을 초래하기에 이르렀다.

‘자위단원호회 취지’는 회원간 결속을 강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註87) 1907년 11월 19일 독립관에서 거행된 발기회는 회장으로 한성부윤 장헌식張憲植을 선출하였다. 11월 21~23일까지 본부임원·지방위원과 담당 구역을 조정하는 등 일사불란한 체제도 완성되었다. 이들은 연설회·강연회를 개최하는 한편 의병들 귀순을 권유하는 각종 격문을 내걸었다. 이들에 대한 지방관의 협조·지원 등은 일본군의 강압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일진회원에 의한 불법적인 수탈이나 각종 민폐는 오히려 항일의식을 고취시키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일진회원에 대한 의병 공격은 회원들로 하여금 동요와 불안감을 가중시켰다. 12월 27일 일진회 본부는 ‘지방회원효유문첩’을 보내어 지방회원의 동요를 잠재우려고 하였다. 註88)


현재 고통은 문명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일시적인 난관에 불과하다. 2천만 동포가 행복한 삶을 살아가려면 회원 상호간 교류와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점이다. 더욱이 자위단은 정부에서 조직한 단체이지, 우리 회에서 만든 ‘사적인’ 조직은 결코 아니다. 자위단은 과거부터 존재하던 오가작통법을 시대변화에 따라 10가로 약간 변경한 자치조직에 불과하다. 그런 만큼 자위단은 일진회원만으로 조직된 단체가 아니라 우국충정에 입각한 국민적인 합의에 따라 조직된 단체임을 명심하라. 현실에 불만을 품은 일부 무리배들이 이를 유포함으로써 우리의 단결력을 저해하고 있다. 우리의 임무는 비도들을 정찰하고 인민생활의 안정화를 꾀하는 등 사회적인 행복을 추구할 뿐이다.



이용구는 통감 이등박문의 병세가 차도를 보이자 축하 서신을 보내는 등 친일행위에 앞장섰다. 1908년 3월 10일 그는 서신과 함께 자위단원호회와 관련된 문서 11부를 상신하였다. 이 글에서 통감정치는 한국의 행복일 뿐만 아니라 동양의 행복이라는 찬양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이등박문을 ‘태산북두’에 비유하는 등 세계적인 지도자로서 부각시키는데 급급하였다. 자위단 활동은 사회적인 안정을 가져온 요인이라고 자화자찬을 아끼지 않았다. 아직 일부 무리들이 소란을 일으키나 조만간 수습될 것이라고 희망적인 전망까지 부언하였다.

일진회 본부는 의병에게 희생된 회원들에 대한 추도식을 1908년 8월 8일 독립관에서 성대하게 개최하였다. 개회취지는 대회장인 이용구, 피해 회원에 대한 성명 낭독은 최동섭崔東燮·김재곤金載坤, 추도문 낭독은 부회장인 홍긍섭 등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1년간 의병진에 직접 피해를 당한 회원은 966명으로 결코 적지 않았다. 이들은 의병전쟁에 피해를 당한 회원들을 애국충정에 불타는 ‘일진혼’으로 비유하는 등 자신들 행위를 미화하였다. 자신들은 육신과 성령을 단합하여 응결한 ‘일진혼’이기에 피아의 구별이 없는 일심동체라는 강변을 서슴지 않았다. 註89) “애국정신으로 응결한 일진혼 백만 분자일진회 회원수를 의미 : 필자주는 결코 당신들 희생을 잊을 수 없다. 그런 만큼 우리는 당신들의 행적이 청사에 길이 빛나도록 합심·노력할 것을 다시 한 번 맹세한다”고 외쳤다. 추도사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천지를 굽어보는 백악白嶽이여 / 정기가 엄엄嚴嚴하도다

특별히 맞주보는 석문石門이여 / 세운 뜻이 우뚝하도다

국민을 열어 젖힌 누대여 / 문호門戶가 당당하도다

의연한 혼을 부르니 돌아오는 듯한가 / 번적번쩍 날아다니는 혼령이로다

바람이 고요한데 머리카락을 흩날리는가 / 해가 반짝반짝 마음을 비추는구나

살아서 애국할 수 없으면 / 살아도 아옥阿獄으로 떨어지는 것과 같고

죽어서 애국할 수 있으면 / 죽어도 오히려 인간세상보다 영광스럽도다

애국하는 신이시여 / 만 번 죽어도 사라지지 않는구나

애국하지 않고 사는 자이면 / 어찌 애국하다 죽은 자를 추모하겠으며

애국하지 않고 죽은 자이면 / 어찌 산자가 깊이 추도함을 알리오

백악이 무너지지 않으면 / 그 정기가 떨어지지 않을 것이고

석문이 무너지지 않으면 / 그 뜻이 어그러지지 않을 것이로다. 註90)


이처럼 일진회 임원진은 친일행위를 구국을 위한 애국행위로 묘사하는 뻔뻔스러움을 숨기지 않았다. 본말이 전도된 이들 주장은 전국민적인 반감을 초래하는 계기였다. 이에 회원들 반발과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의병전쟁 확산과 더불어 지회원 상당수 탈퇴는 이러한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2) 경찰·헌병의 의병탄압

홍주지역 의병은 을사늑약 체결을 전후로 국권회복운동 일환으로 재기에 들어갔다. 을미의병을 주도한 김복한·이설·민종식 등은 이를 주도한 인물이었다. 여러 지역에 산발적으로 전개되던 의병진은 마침내 결집하여 홍주성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한국정부는 미온적으로 대처할 뿐이었다. 대응책은 선유사宣諭使 파견을 통한 미온적인 방법으로 의병진 해산을 종용하는 수준에 불과하였다. 반면 한국식민지화에 박차를 가하던 일제는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홍주의병은 통감정치에 정면적인 도전이었기 때문이었다. 저들은 이를 조기에 차단하지 않으면, 전국적인 확산으로 한국식민지화에 중대한 차질을 초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였다.

이등박문은 항일 분위기 확산을 잠재우기 위하여 비상수단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군은 1906년 5월 31일 새벽을 기하여 홍주성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였다. 의병진 해산을 핑계로 민간인에 대한 살육과 보복은 무시무시한 수준이었다. 註91) 당시 홍주성 10리 이내는 초토화될 정도로 참혹한 광경을 연출하였다. 이러한 와중에도 일본군은 군수품을 운반하거나 의병진의 동태를 제공한 주민들에 대한 논공행상을 잊지 않았다. 친일관료에 대한 포상도 병행되었다. 이는 민·관과 민·민 상호간 불신감을 심화·조장시키는 등 식민체제를 공고화하는 밑바탕이었다.

한편 한국정부를 내세워 의병에 대한 귀순공작도 병행하였다. 이는 일진회 등 친일세력을 이용한 자위단 조직과 별개로 운영되었다. 1908년 8월 9일 순창군수가 도관찰사에게 보낸 ‘폭도 귀순자 조사의 건’은 이러한 실상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관찰사·전주수비대장·전주경찰서 경시 등은 관내를 순회하면서 의병진 참여를 저지하는 한편 의병 귀순을 권고하였다. 註92) 강제 동원에 의한 집회 참여를 거부하면, 곧바로 의병에 가담하거나 지원한 ‘불순분자’로 낙인을 찍어 지속적으로 감시를 받았다.

일부 헌병보조원은 자신의 실적을 과시하기 위하여 무고한 사람을 의병으로 둔갑시켰다. 아무튼 순회강연 결과는 순창군에서만 43명이나 귀순하는 등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註93) 이에 일제는 내부대신 박제순을 통하여 이와 같은 훈령을 각 관찰사에게 통첩하였다. 군수나 면장 등은 헌병분견소·순사주재소와 더불어 주기적인 순회강연을 통하여 의병진 내부 분열을 획책하는데 앞장섰다. 지역민의 의병진에 대한 지원 차단은 전력을 극도로 약화시킬 수 있었다. 의병진은 새로운 항쟁 근거지를 찾아 북상을 단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