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화폐정리사업, 경제침탈과 토지수탈-제3권 통감부 설치와 한국 식민지화

몽유도원 2013. 1. 18. 04:50

제4장 경제침탈과 토지수탈


화폐정리사업

징세제도의 개혁

황무지개간과 토지수탈


1. 화폐정리사업


1. 재정고문의 파견

청일전쟁 이후 일본의 일관된 대한정책은 한국의 보호국화였다. 그러나 열강의 간섭으로 전쟁에 이겨놓고도 목적을 이루지 못한 일본은 러일전쟁 이후 조야의 강력한 한국보호국화 요구가 있었지만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똑같은 실패를 답습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를 위해 나온 정책이 바로 고문을 파견하는 것이었다. 고문을 파견하는 정책은 1904년 5월 30일의 원로회의와 31일의 내각회의를 통해서 최종적으로 확정되었는데, ‘대한방침’과 ‘대한시설강령’이 그것이다. ‘대한방침’에서는 한국을 보호국화함은 물론 장차 식민지화하겠다는 전제 아래 당면의 급무로서 정치·군사적으로는 보호의 실권을 얻고, 경제적으로는 더욱 이권의 발전을 도모한다는 기본 방향을 설정했다. 또한 ‘대한시설강령’에서는 이러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 방안을 지침으로 마련했는데 그것이 바로 재정과 외교부문에 고문관을 파견하는 것이었다. 註1)


재정고문 목하전종태랑과 그의 용빙계약서


재정고문과 외교고문의 파견이 대한방침으로 결정되었으나 사실 일본 정부가 무게를 둔 것은 재정고문이었다. 註2) 여러 권력 있는 인물이 물망에 올랐으나 註3) 최종적으로 결정된 사람은 대장성 주세국장인 목하전종태랑目賀田種太郞이었다. 그는 일본인 최초의 하버드법대 졸업생으로서 대장성 지조과장을 시작으로 횡빈세관장·주세국장 등을 역임한 당대의 대표적인 증세전문가였다. 이러한 능력을 높이 사서 그를 추천한 사람은 바로 대한정책의 주요 결정자였던 이등박문伊藤博文이었다. 註4)

이등박문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대한정책은 재정의 정리였고, 그 목적은 바로 한국의 통치자금은 한국에서 마련하는데 있었다. 이등박문은 통감으로 부임하기 직전인 1906년 1월 31일에 동경·대판·경도에 있는 각 신문사 기자를 영남판靈南坂 관사에 불러놓고 한국의 시정방침에 대해 연설했다. 註5) 이 연설에서 이등박문은 “이미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많은 일본 군대의 비용은 소액이지만, 앞으로 더 증가할 수밖에 없는 그 외의 비용을 일본국민이 부과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한국인민의 자력을 증진시켜 한국의 시정개선비는 한국인민이 부담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등박문이 한국 통치비의 마련을 한국에서 해야 된다고 주장한 이유는 당시 일본의 재정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전쟁비용 마련을 위해 증세정책이 계속되고 있었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해외에서 외채를 들여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註6) 이등박문이 증세전문가인 목하전종태랑을 재정고문으로 임명한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이등박문의 추천에 의해 재정고문으로 임명된 목하전종태랑은 1904년 9월 14일 한국재정고문으로 부임명령을 받았고, 17일 동경을 출발했다. 9월 30일 인천에 도착한 목하전종태랑은 10월 3일 임권조林權助와 함께 고종을 알현하고 13일에 고빙계약 체결을 마쳤다. 이후 목하전종태랑은 바로 업무에 착수했는데, 그는 한국의 재정정리를 화폐제도의 확립과 세출의 긴축 그리고 세입의 정리로 구분했다. 註7) 이 재정정리 가운데 가장 먼저 착수한 것이 화폐제도의 확립이었다. 註8)


2. 일본정부의 화폐정리방침

화폐정리사업은 일본 내각에서 고문정치가 입안될 당시부터 징세법의 개혁과 더불어 일관되게 제기되었다. 일본이 화폐정리사업을 한국 재정정리의 첫번째 사업으로 정한 이유는 당시 백동화의 남발로 인해 일본 경제계가 큰 타격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화폐정리의 이유를 백동화의 남발로 고통받고 있는 한국민을 구하기 위해서라고 했으나, 사실 그것은 핑계에 불과했다. 한국의 화폐상황이 문란하기는 했으나 한국민들 사이에는 별다른 불편이 없었기 때문이다. 남주전濫鑄錢과 사주전私鑄錢이 관주전官鑄錢과 구분 없이 상거래에 유통되고 있었다. 불편이 있다면 그것은 외국인과의 거래에 있었는데, 당시 한국은 일본과 상거래가 가장 많았으므로 일본이 큰 피해를 입고 있었다.

백동화의 남발로 인한 화폐가치의 하락은 1902년 말부터 현저하게 나타났고 1904년에 접어들면서부터는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심각했다. 백동화의 남발로 화폐가격이 하락하면 물가가 폭등하여 일본 상품의 구매가 줄어들고, 이로 인하여 수입도 감소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은 일본의 주요 수출국이었으므로 백동화의 남발로 인한 한국 경제의 혼란은 일본 상인과 기업가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백동화 가격의 하락을 멈추지 못한다면 일한무역이 대타격을 받게 됨은 물론이요, 일본 경제의 대공황을 초래할 수도 있다” 註9)는 의견이 팽배해 있었다. 따라서 한국의 화폐정리사업은 일본 경제를 위해 하루빨리 해결해야만 되는 시급한 문제중 하나였다.

화폐정리사업에 대한 구체적인 방침은 ‘대한시설세목’으로 정해졌다. 註10) ‘대한시설세목’은 모두 9개 항목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세 번째 항목인 재정정리는 다시 10개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10개조 중 제1조가 화폐정리에 관한 것이다.


-. 한국화폐는 제도상으로 일본화폐와 품위 및 가격에서 전연 동일하므로 현행법에 좌의 일개 조 즉, 품위 및 가격이 동일한 외국 화폐는 동국 화폐와 같이 유통해도 차질이 없음을 부가시키고 일본화폐 유통의 길을 열 것.

-. 다음으로 실지 일본화폐의 유통을 내지內地에 보급시키는 방법을 강구할 것. 이 단서로서 경의철도 공사에도 되도록 우리 화폐를 사용하고 또 경부철도 및 경의철도 요금에도 일본화폐를 사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어느 정도에서만 한국화폐를 시가로 받도록 할 것.

-. 백동화 주조를 정지시킬 것. 그리하여 지금까지 이미 발행한 동화의 처분은 재무감독으로 하여금 자세히 연구해서 그 방법을 세우게 할 것. 註11)


위의 내용을 보면 한국화폐와 일본화폐는 제도상으로도 동일하고 화폐가격도 동일하므로 현행법에 의거하여 일본화폐를 유통시키는 길을 열라고 지시하고 있다. 註12) 또한 일본화폐 유통을 확대하는 방법으로는 경의철도 공사비와 경부철도·경의철도 요금을 일본화폐로 쓰는 것을 원칙으로 하라고 지시했다. 아울러 백동화 주조를 정지시키고 이미 발행한 백동화의 처분은 재무감독으로 하여금 자세히 연구해서 방법을 세우게 하라는 것이었다. 요컨대 화폐정리사업은 일본화폐의 보급과 한국화폐의 발행정지 및 회수라는 2가지 방향으로 설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재무감독은 재정고문을 의미하므로 목하전종태랑은 한국에 부임하기 전부터 화폐정리 방침에 대해 명령 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04년 7월 8일에는 좀 더 자세한 화폐정리방침이 정해졌는데 이것은 소촌수태랑小村壽太郞 외무대신이 목하전종태랑에게 내린 별지 병호 ‘동건 내훈에 속한 시정요목’에 나와 있다. 화폐와 관련된 것은 5개 항목이다.


① 일본화폐의 유통을 공인시킬 것.

② 백동화 주조를 정지시킬 것. 그리하여 이미 발행한 백동화의 처분은 재정고문이 자세히 연구하여 그 방법을 세울 것.

③ 화폐는 일본에서 주조하고 한국 전환국을 폐쇄하며 만약 이를 열 경우에는 일본 조폐국의 출장소로 하든가 또는 그 감독하에 두고 화폐의 신용을 유지시킬 것.

④ 정부지폐는 발행하지 않을 것.

⑤ 제일은행 발행의 은행권은 당분간 현재와 같이 하고 이를 공약으로 받아 세출에 지불하고 적당한 의무를 부담시키고 재정에 이용할 것. 註13)


①과 ②는 ‘대한시설세목’의 내용과 동일하며, ③의 내용은 화폐는 일본에서 주조하고 전환국을 폐지하라는 내용이다. 만약 폐지하지 않을 경우에는 일본 조폐국의 출장소나 감독하에 두라고 했다. 말하자면 한국의 화폐주조권을 박탈하라는 것이었다. 註14) ④에서는 정부지폐는 발행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것은 ⑤의 내용과 관련이 있다. 즉 정부지폐 대신 제일은행권의 유통을 공식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요컨대 한국의 화폐제도를 개혁하면서 화폐주조권은 물론 한국지폐도 발행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이러한 훈령에 따라 실제 목하전종태랑이 행한 첫 임무는 전환국의 폐지였다. 목하전종태랑은 1904년 10월 18일부터 업무를 시작했고, 그로부터 3일 후인 21일에 전환국을 시찰했다. 시찰한 그날 목하전종태랑은 인쇄소를 제외한 나머지 부서를 없애고 직공도 모두 해고했으며, 백동화의 주조도 정지시켰다. 전환국의 폐지는 11월 28일 관보에 발표되었고, 사유는 11월 30일에 발표되었다. 註15) 전환국의 폐지와 백동화 주조를 정지시킨 목하전종태랑은 그 다음 임무인 백동화와 엽전의 처분 즉, 구화의 정리를 포함한 화폐정리방안에 대해 다음과 같은 보고를 올렸다.


① 한국의 화폐조례를 개정하여 신화를 발행하고 구화를 회수하는 소칙을 발포할 것. 소칙안은 발포 전 외무성에 회시하여 협의할 것. 구화 회수의 실행은 한국의 상태에 비추어 급격한 조치를 취하지 말 것.

② 신화폐의 품위·양목·호칭·양식은 일본화폐와 같게 할 것. 단 연호 및 국명은 편의에 따를 것.

③ 보조화폐 제조량을 제한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일본에 유입되어 일본의 이익을 해칠 것임.

④ 한국화폐의 제조는 일본 조폐국에서 하고 다른 곳에서 제조하지 않을 것.

⑤ 제일은행권을 공인하고 공사의 거래에 지장없이 통용시킬 것.

⑥ 새로 발행할 태환권은 제일은행권으로 충당할 것.

  즉 필요에 따라 한국정부에 그것을 대부하는 것이 순서인데, 그 방법에 대해서는 미리 외무성과 협의 할 것.

⑦ 화폐정리를 위해 제일은행이 한국정부에 융통해야 할 자금은 위의 대부 외에 보조화 주조에 필요한 것이 있으므로 이들 일체의 융통자금에 대해서는 한국 정부와 제일은행과 사이에 금액·이식·변제방법·해관세·내지세를 저당하는 등의 계약을 작성할 것.

⑧ 회수되는 구화의 매각 대금 및 보조화 주조 이익금은 수지를 따로 정리하여 달리 사용하지 않고 들어오는 대로 모두 제일은행 대부금의 변제에 충당할 것.

⑨ 엽전은 당분간 다소 남겨두는 것이 마땅하지만 한편으로는 교환하거나 자연 소멸되도록 할 것.

⑩ 한국정부의 수지는 간이를 요하고 예금주의로 하는 것이 마땅함.

⑪ 매각되는 구화는 바로 일본 조폐국에서 인수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구화를 따로 매각함에 있어서는 절단 또는 주궤를 요하고 그 때문에 주궤공장을 한국에 설치할 필요가 없으면 그 모두를 조폐국에 보내고 조폐국에서 주궤하여도 가할 것.

⑫ 가장 중요한 사항은 실행에 앞서 일단 일본정부와 상의 할 것. 註16)


위의 내용을 보면 크게 신화의 보급과 구화의 회수, 그리고 화폐정리 자금에 대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①에서 ⑦까지 내용은 일본정부로부터 받은 훈령에 기초한 것으로 신화의 보급에 관한 것이고, 나머지 내용은 구화의 처분에 관한 것이다. 그 내용은 엽전의 회수방법과 구화의 매각대금에 관한 것으로, 구화의 매각대금은 제일은행 대부금의 변제로 충당한다고 했다. 註17) 그리고 화폐정리의 수익금은 간이를 요하고 예금주의로 하며, 또한 매각된 구화는 대판 조폐국에서 주궤한다고 규정했다. 구화의 처분에 대한 방침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이다. 이러한 방침은 대장성과 외무성의 승인을 받았으며, 이에 기초하여 화폐조례 법안이 만들어졌다.

화폐조례 법안은 1905년 1월 17일 의정부 비밀회의에서 가결되었고 다음날인 1월 18일에 칙령 제2호 ‘화폐조례실시에 관한 건’·‘형체양목이 동일한 화폐를 무애통용권’·‘구화폐정기교환에 관한 건’으로 발포되었다. 요컨대 한국에 일본의 화폐제도를 그대로 도입하고 일본 제일은행권을 법화로 공인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것이었다. 또한 1901년의 화폐조례를 다시 시행하고, 형체와 양목이 동일한 화폐는 ‘무애통용’하기로 했는데, 이것은 한국의 화폐제도가 일본과 같은 금본위제도로 변경됨과 동시에 일본화폐가 한국에서 무제한 통용될 수 있는 것을 의미했다. 이와 같은 화폐정리법안은 1월 중순에 모두 완성되었지만 그 실시는 몇 달 뒤로 미루어졌다. 화폐정리는 신화 즉 일본화의 보급과 구화의 회수로 나누어지는데, 신화의 보급은 1905년 6월 1일부터, 구화의 회수는 7월 1일부터 시행하기로 결정되었다.


3. 구화의 정리

1) 백동화의 정리

1904년 당시 한국에는 엽전과 1894년 ‘신식화폐발행장정’에 의거하여 발행된 백동화·적동화·황동화 그리고 개항장을 중심으로 일본화폐가 유통되고 있었다. 엽전구멍이 뚫린 상평통보은 1892~1893년경 평양에서 주조된 것을 끝으로 800~1,000만 원 정도가 유통되고 있었고, 백동화는 전환국에서 발행된 것 외에도 사주私鑄와 남주濫鑄가 심하였으므로 정확한 액수는 알 수 없지만 대략 1,300만 원 정도가 유통되고 있었다. 註18) 적동화와 황동화는 그 발행액이 20~30만 원에 불과한 소량이었고 일본화폐는 140만 원 정도 유통되고 있었다. 註19) 그러므로 구화정리의 대상은 유통량이 가장 많았던 백동화와 엽전이었다. 註20)

백동화와 엽전은 유통지역이 뚜렷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백동화는 서울을 중심으로 경기도·황해도·충청도·평안도·강원도 일부 지역에서 유통되었고, 엽전은 경상도·전라도·함경도·제주 등지에서 유통되고 있었다. 즉 엽전통용지역과 백동화통용지역으로 구분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지역을 달리하여 유통되고 있던 이유는 백동화의 남발로 화폐가치가 떨어지자 엽전통용지역 사람들이 백동화의 수수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구화의 정리에 관한 법안은 1905년 1월 18자의 칙령 제4호와, 4월 3일의 훈령, 5월 16일 전훈 ‘구화교환에 관한 건’, 6월 8일의 훈령 ‘신화폐조례실시와 구백동화 환수에 관한 건’, 6월 24일의 부령 제1호와 제2호 ‘신구화폐의 교환 및 회수에 관한 실시 요령’ 등이다. 신화 보급에 대한 법안이 1905년 1월 18일에 모두 입안·발표된 것과는 달리 구화정리에 관한 법안은 여러 달에 걸쳐 입안·발표되었다. 그 내용을 보면 백동화와 엽전은 서로 다른 원칙하에 정리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백동화의 정리방법은 목하전종태랑이 전환국의 폐지를 단행한 후 화폐정리의 방침을 수립함과 동시에 만들어졌다. 백동화의 정리는 주로 교환에 의하여 단시일 내에 회수하는 방법을 택했는데, 그 특징은 형체와 양목을 감정하여 갑甲·을乙·병丙으로 등급을 나눈 뒤 신화와 교환한다는 점이다. 이 방법은 목하전종태랑이 독창적으로 고안해 낸 것이 아니라 당시 동대문과 남대문에서 통용되고 있던 방법에서 착안한 것이었다. 목하전종태랑은 부임 이후 동대문과 남대문을 자주 방문했었는데, 당시 그곳의 중국인 상점 앞에서 한국인이 백동화를 산처럼 쌓아놓고 감별하고 있었다고 한다. 대개의 것은 양화良貨로 구별했지만 정화正貨로 인정되지 않는 것들은 할인하여 팔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화와 구분이 어려운 것은 폐기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목하전종태랑에게 큰 참고가 되었다고 한다. 註21)

뿐만 아니라 “멍석에 앉아 긴 담뱃대를 물고 감정하던 사람”을 정부의 감정역鑑定役으로 채용하여 백동화를 선별하는 일을 맡겼다. 註22) 목하전종태랑은 한국인의 불만을 막기 위해 이러한 감정법을 정리 방법으로 정했다고 했으나, 실제로 이것은 한국인의 불만을 더욱 부추기는 것이었다. 이 방법은 한국인들 사이에서 행해지던 것이 아니라 외국인들 사이에서 행해지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한국인들 사이에서 백동화는 갑·을·병의 구분 없이 통용되고 있었다. 註23)

이러한 방법은 1905년 6월 24일에 발표된 부령 제1호 ‘구백동화교환에 관한 건’에 그대로 적용되었다. 모두 5개조로 이루어진 내용에 의하면 백동화의 교환은 탁지부 대신이 임명한 화폐감정역이 하며, 정화에 준하는 것은 1개에 2전錢 5리里의 비율로 신화와 교환하고, 정화에 준하지 못하는 것은 1전錢의 비율로, 그리고 화폐로 인정하기 어려운 것은 매수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정했다. 이러한 구분은 같은 날에 발표한 ‘구백동화교환처리순서’ 부령 제2호에 각각 갑·을·병으로 규정되었다. 註24)

사실 1905년 1월 18일 화폐조례에 관한 법이 발포되자 백동화를 포함한 구화의 정리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인가에 세간의 관심이 모아졌다. 그러나 6월 24일 ‘구백동화교환에 관한 건’이 발포되기 전까지 확실한 방침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악화를 소지하고 있던 대부분의 한국민은 매우 불안해하고 있었다. 더구나 한국민의 화폐는 대부분이 버려지고 일부는 몰수될 것이라는 풍문까지 나돌자, 한국 상인들은 앞 다투어 백동화를 매각하여 토지와 가옥 등을 사들이고 면포나 기타의 상품을 매입했다. 註25)

이와 대조적으로 일본인과 청국인은 오히려 양질의 백동화를 구입함으로서 화폐교환의 투기적 이익을 얻었는데, 구입한 백동화 중 양질의 것은 빛을 내고 나머지는 수도보다 위조화를 덜 조심하는 변두리 항구에다 풀었다. 註26) 뿐만 아니라 제일은행 역시 백동화 구매에 노력하여 정화만을 흡수하고 악화는 방출시켰다. 註27) 이리하여 한국인들의 수중에는 백동화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고, 있다 해도 악화가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백동화 교환이 시작된 초기에 교환을 신청한 국적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일본인이 348명, 청淸·한인韓人이 335명이었는데, 청·한인에 포함되어 있는 한국인은 소수에 불과했다. 이러한 현상은 1905년 11월 백동화 교환이 상당히 진전되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인의 교환율은 전체 교환액의 10분의 1 수준이었다. 註28)

이러한 백동화 정리의 결과 한국인들 사이에는 전황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환수된 구화는 시중에 나오지 않았고 “신화폐 발행은 현금 백동화의 유통이 과다하므로 가능하면 당분간 보조화를 발행하지 않는다는 방침” 때문에 註29) 구화의 교환은 제일은행권으로 이루어졌으나, 한국인은 제일은행권을 불신하여 배척했으므로 전황은 피할 수 없었다. 註30)

1906년 2월 15일자 『대한매일신보』의 기사에 의하면 “구화는 이미 몰수되었고 신화는 아직 유통되지 않아 한국재정이 더욱 곤란해졌는데, 만일 지금 그 방법을 강구하지 않으면 한국인의 운명을 끊는 것이며, 그 책임은 목하전종태랑 고문에게 있다”고 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돈 그림자도 보기 어려운 한국인들은 가권家券·지권地券 등을 저당하거나 팔 수밖에 없었고, 1906년에 이르러서는 파산자가 속출했다. 註31) 이는 개항 이후 새로이 성장하던 상인세력을 파산시켰고, 이후 한국의 상업자본 주도권이 일본인에게 넘어가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화폐정리사업은 한국민의 화폐재산을 3분의 1로 줄이는 결과를 낳았는데 註32) 신화와 교환이 가능한 갑과 을에 해당하는 백동화는 통화량의 1/3 수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결국 통화량의 2/3에 해당하는 병丙종 백동화는 화폐로서의 가치를 잃고 사장되었다.

백동화는 원래 1908년 11월 30일자로 통용을 금지시켰으나, 1908년 2월 초에는 이미 그 대부분이 환수되어 유통되는 것이 극히 적었다. 그러나 산간벽지나 오지에서는 교환이 쉽지 않았으므로 1909년 12월 31일까지 납부를 통해 백동화를 교환할 수 있도록 기간을 연장했다. 그러나 대부분이 교환이 개시된 1년 6개월 만에 환수되었고, 회수된 백동화는 모두 3억 8천여만 매, 액수로는 1,905만여 원에 달했다. 註33)

 

2) 엽전의 정리

엽전의 정리는 백동화와 달리 납부에 의한 장기적인 회수방침이 정해졌다. 그 이유는 첫째, 엽전은 위조된 것 없이 모두 자체의 금속가치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장기간 통용되더라도 유통계에 별다른 지장을 초래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과 둘째, 한국민이 엽전을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환이나 매수에 응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 때문이었다. 따라서 엽전은 백동화와 달리 단기적인 회수가 아니라 납부에 의한 회수라는 장기적인 방법이 적용되었다. 그런데 당시 한국인들은 엽전을 잃는 것은 국가 유일의 재보를 잃는 것으로 생각하여 납세 기타 국고금의 납부에도 엽전 대신 신화를 사용하고 있었다. 註34) 따라서 엽전의 환수는 결세와 국고금의 납부를 엽전으로 납부하게 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엽전정리가 실시되기 전인 1905년 6월 24일에 엽전으로 납부할 경우에 관한 새로운 법령이 발표되었다. 그 내용은 “엽전으로서 국고금國庫金의 납부納付에 충充 자 유有할 시時 1개에 대하야 1리厘 5모毛의 비례로 수납한 후에 입즉入卽 화폐정리부에셔 신화에 교환 것으로 함” 註35)이라는 것이었다. 위 법령은 엽전으로 납부할 경우에 한하여 엽전 1개는 신화 1리 5모의 가치로서 평가하고 수납한다는 것이다. 이전의 엽전 1개는 신화 1리에 해당했으므로 이는 엽전의 화폐가치가 50% 절상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엽전의 화폐가치가 절상된 것은 당시 엽전의 주원료인 동의 시세가 급등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의 결세는 1902년부터 1결당 80냥이었고, 1905년 1월 18일자 칙령 제4호 ‘구화폐 정기교환에 관한 건’ 제2조에 “구화 10냥은 신화 1환圜에 해당된다”고 규정하였으므로, 결세는 신화로 납부할 경우에는 8환이었고 구화로 납부할 경우에는 80냥이었다. 그런데 엽전은 환율이 50% 절상되었으므로 그 결세액은 이전보다 줄어들어 60냥이 채 되지 않아야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러한 원리가 적용되지 않았다. 이전과 같이 엽전으로는 80냥을 그대로 내고 신화로는 오히려 12환을 납부하게 한 것이다. 즉 엽전의 환율인상은 신화로 환산할 경우에만 적용된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 탁지부의 공식적인 훈령이었다는 점이다. 註36) 이러한 납세액은 물론 엽전통용지방에만 한정된 일이었다. “광무 9년1905 6월 29일에 엽전통용지방에 납세 건을 탁지부에서 발훈기를 신화로 납세할 경우에는 매 1결에 12환으로 납입케 라고 야 …” 註37)라고 하여 탁지부에서 발훈한 엽전통용지방에 납세하는 건은 신화로 납세할 경우에는 12환으로 납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엽전의 환율을 인상해 놓고도 결세는 이전과 같이 그대로 받고, 또 이를 신화로 납세할 때에만 인상된 환율로 계산한 것이다. 이와 같은 납세액의 부과를 탁지부가 정했다는 것은 엄연히 세율의 인상을 의미한다. 이는 1905년 8월 12일 제일은행 경성지점 대리인이며 금고출납역이었던 청수태길淸水泰吉이 각 출납대리인에게 발송한 통달通達에 자세히 나와 있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 엽전지방에서 납세의 방법은 종래와 같이 원元으로 그 액수을 정하고, 그 세율도 종래와 같이 한다. 또 화폐도 종래와 같이 엽전으로 납입시킨다. 

-. 엽전지방에서 엽전대신 신화로 납입할 경우에는 엽전 1매를 신화 1리 5모의 비율로 이를 환산하도록 되어 있다. 註38)


즉 엽전통용지방에서 납세는 종래와 같이 엽전으로 하며 결세액도 종래와 같이 할 것을 원칙으로 정해놓은 것이다. 그리고 신화로 납부할 경우에는 엽전 1매 당 1리 5모로 계산하여 12환을 받겠다는 것을 모든 금고출납자들에게 알렸다. 엽전의 환율을 인상해 놓고도 신화결세액을 50% 인상시킨 의도는 엽전으로 결세를 징수하기 위함이었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한국민이 환율을 잘 알지 못한다는 점을 이용한 세금계산법이었다. 그리고 엽전결세액은 그대로 둔 채 신화결세액만 올렸을 경우 신화보다는 엽전으로 납세할 것이라는 계산에서 나온 정책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엽전통용지방민들은 엽전의 환율 인상과 결세의 차이를 알게 됐으며, 각군에서는 엽전 80냥을 내는 것은 억울하므로 20냥을 감하여 달라는 민요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註39) 이에 대해 탁지부에서는 오히려 우매한 백성이 탁지부의 규칙을 오해한 것이라고 몰아부쳤다. 또한 신화의 납부는 허락하지 않고 엽전으로만 납부를 강요하기도 했다. 사실 엽전의 시가는 시중에서는 1리 5모를 훨씬 상회하고 있었으므로 시중에서 신화로 교환한 뒤 결세를 신화로 지급한다면 훨씬 적은 엽전으로도 결세납부가 가능했다. 그러나 탁지부는 신화로의 납부는 허락하지 않고 엽전으로만 납부를 강요했다. 심지어는 엽전통용지방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엽전으로 납부하게 하기도 했다. 註40) 예를 들면 함열은 전라북도에 속해 있지만 백동화가 통용되는 7개 군 가운데 하나였다. 註41)

〈표 4〉 매월 엽전환수 종류별(단위 : 円)
연월납세매수
매수금액매수금액
1905. 8     
9951,959931  931
1017    
11175,257175  175
12500,000500  500
1906. 1150,000150  150
21,543,7501,543  1,543
3753,378753  753
42,484,1372,484  2,484
51,640,0051,6404141,654
61,758,6881,75814,455 1,758
7540,210540  540
812,361,01712,361  12,361
914,68214  14
10     
11764    
124    
합계22,873,86822,84914,4591422,863

출전 : 삽택영일, 『한국화폐정리보고서』, 1909, 130~131쪽.


그러므로 백동화로 납부하는 것이 당연했지만 엽전으로 납부를 강요한 것이다. 이처럼 엽전통용지방민들로 하여금 엽전으로의 납세를 강제하고, 환율의 인상에도 불구하고 결세 80냥을 고수한 결과 엽전의 환수율은 증가했다.
그러나 엽전통용지방민들이 균세에 대한 시정 요구가 끊이지 않자 결국 1908년 6월 법률 제10호 ‘지세에 관한 건’이 제정되어 엽전통용지역과 백동화통용지역의 세율이 같아지도록 신구화 간의 교환비율이 조정되었다. 다음날에는 칙령 제41호로 엽전의 통용가격을 1매에 2리로 인상했다. 註42) 이에 따라 엽전으로의 납부가 더욱 본격화되어 1909년 11월까지 환수된 엽전은 모두 12억여 매에 금액으로는 238만여 엔에 달했다. 註43)
한국의 화폐재산을 1/3로 축소시키고 많은 한국상인을 몰락시킨 화폐정리사업은 1909년에 모두 종결되었다. 화폐정리사업을 담당한 일본 제일은행 경성지점은 한국의 국고금 취급은행으로써 사실상 한국의 중앙은행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다. 또한 일본과 동일한 화폐제도를 만들어놓고도 일본 경제에 미칠 영향을 우려해 일본과 같은 화폐 대신 제일은행권을 통용시킴으로써 식민지통화의 발행과 유통을 정착시켰다. 요컨대 화폐정리사업은 식민지적 금융기구의 정비 및 재정제도의 정비과정을 의미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