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병합조약과 대한제국의 멸망, 일본의 병합 추진과 대한제국의 멸망-제3권 통감부 설치와 한국 식민지화

몽유도원 2013. 1. 18. 12:06

제5장 일본의 병합 추진과 대한제국의 멸망


일본의 병합론

친일세력의 ‘보호국화’ 옹호와 발호

병합조약과 대한제국의 멸망


3. 병합조약과 대한제국의 멸망


1. 병합 추진 과정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안중근 의사의 이등박문 저격사건과 일진회의 합방청원서 제출로 인하여 합방 여론을 둘러싼 구체적인 주장이 한국과 일본에서 제기되었고, 특히 일본에서는 즉각적인 병합 주장 여론이 커져갔다.

병합 여론 조성에 앞장섰던 대표적인 민간단체는 ‘조선문제동지회朝鮮問題同志會’였다. 내전양평을 비롯한 흑룡회黑龍會 주요 회원들은 1909년 11월 13일 흑룡회 부설기관으로 조선문제동지회를 발기하고 근본적인 한국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조선문제동지회는 일진회가 합방성명서를 발표하자 도탄에 빠진 한국인 구출을 명분으로 한국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 곧 병합 단행을 주장하고 註94) 이러한 열성적인 병합운동은 점점 확산되어 갔다.

경성일본신문기자단은 병합을 단행함으로써 ‘동양평화 유지’, ‘양국의 행복증진’, ‘한국의 문명화’를 이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註95) 전 외무대신 임동林董은 온화한 대한정책을 버리고 한국을 병합하여 동양의 화근을 끊어야 한다고 하였으며, 『조선일일신문朝鮮日日新聞』은 병합의 기운이 무르익었으니 최후의 해결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註96) 이와 함께 일본 의회의 일부 의원들은 한국에 수많은 국비國費를 투자했음에도 별 효과가 없었음을 지적하며 재정적 부담 만회를 위해서라도 병합을 실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註97) 그리고 병합의 근거로써 ‘양국 종족種族이 혹사酷似한 점’, ‘양국 문명의 계통이 공통인 점’, ‘양국 종교 도덕의 기초가 공통인 점’, ‘양국 풍속 관습이 유사한 점’, ‘양국 국민성의 조화’ 등이 거론되었다. 註98)

이와 같이 1910년도 들어 병합과 관련한 일본 내 정파간의 갈등이 병합론의 득세로 균형을 잃게 되었고 일본의 병탄 작업은 급진전되었다. 중립적인 입장에 있던 계태랑 수상은 공식적으로 일진회 등의 합방 주장을 접수하겠다고 표명하였으며, 註99) 중의원 비밀회의에서 의원들에게 보호정치에서 보다 엄중한 통치로 방향을 선회하겠다고 언급하였다. 한국인의 자원自願에 의한 병합 추진을 염두에 두었던 계태랑 註100) 수상이 병탄 의지를 표명한 것은 드세게 일고 있던 병합론자들의 주장을 반영한 것이며, 동시에 병합 추진에 따른 한국 정계의 극렬한 반대 내지는 동요가 없을 것이라는 확신에 의한 것이었다. 註101) 


현직 육군대신 자격으로 통감에 부임하는 사내정의 일행


그리하여 일본은 한국 병탄을 위해 한국의 행정과 치안 장악을 기도하였고, 국제적으로는 열강의 승인을 받기 위한 각종 협약을 체결하였다. 병탄을 위한 구체적인 준비도 공개적·비공개적으로 착수하는 등 저들의 침략적인 의도를 드러내었다. 친일세력에 대한 지원과 아울러 항일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은 이를 반증한다.

1910년도에 들어 일본의 한국 행정 장악을 위한 움직임들이 간파되고 있었다. 통감의 중앙행정 장악과 지방행정의 통일을 이루어 이사관理事官이 완전한 지방통치 실현하려는 것, 즉 한국통치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총무장관제總務長官制를 민정장관제民政長官制로 고쳐 통감이 고문으로 관리하고, 행정 각부를 병합하여 사무처리를 간소화하며, 경찰권 인수를 통한 치안장악, 註102) 한국의 각 지방행정관청을 이사청理事廳으로 병합하여 일본인 이사관을 한국 지방장관으로 겸임케 함으로써, 장차 병합에 유리한 지방통치의 획일성을 꾀하는 것 등이 언론을 통해 기민하게 보도되었다. 註103)

일본은 한국에서 병탄을 위한 기반 구축에 몰두하면서 국제적으로는 한국병합을 승인받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1910년 1월 일본은 러시아와 협의하여 미국이 일본의 만주진출을 억제하기 위해 제기한 만주철도 중립화안을 거부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한국 문제에 관해 러시아와 공동의 인식을 갖게 되었다. 1910년 2월에는 소촌수태랑 외부대신이 한국병합 방침에 관하여 영국주재 가등加藤대사에게 통보한 글에서 “한국 통치 준비를 위해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병합을 추진 재촉할만한 사안이 없을 경우 당분간 현상유지하며 병합단행시까지는 다소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여, 다소 병합에 유보적인 입장을 밝히기도 하였다. 註104) 병합은 확실히 단행해야 하지만 그 시기에 있어서는 내외 형세에 비추어 결정해야 하며, 그 이유는 한국병합에 따른 열국과의 분쟁 혹은 갈등 조정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3월에는 각의에서 제2차 러일협약 체결 방침을 결정하였으며, 4월에는 러시아로부터, 5월에는 영국으로부터 한국병합에 대한 승인을 얻었다. 註105) 1910년 7월 4일 러시아와 ‘제2차 러일협약’을 체결하여 일본과 러시아는 만주를 분할하여 상호 권익을 확보하고 러시아는 내몽고에서, 일본은 한국에서의 세력권을 상호 인정했던 ‘제1차 일러협약1907.7.30’의 내용을 강화하였다. 특히 일본의 주러대사는 러시아 수상·대장상·외상과 회담하는 자리에서 일본의 대한제국 병합의도를 설명하고 동의를 이끌어냈다. 註106)

한국 병탄작업을 위해 일본정부의 직접적인 신호탄은 통감 교체였다. 일본정부는 1910년 5월 30일 종래 병합에 미온적인 태도로 병합 강경파들에게 원성의 대상이 되었던 증미황조를 경질하고 강경파인 사내정의 육군대신을 통감으로 겸임시켜 병합 작업을 한 단계 진전시켰다. 1910년 3월 하순 계태랑 수상은 산현유붕·사내정의로부터 증미황조 통감 해직 및 병합 단행 권고 註107)와 정부 여당인 중앙구락부中央俱樂部의 증미황조 경질과 조속한 병합 실현 등의 내용이 담긴 건의서를 받아들여, 註108) 사내정의를 신임 통감으로 임명하고 병합 실행을 본격 추진하였다. 그의 측근 중에 “한국에서 시정개선을 수행하고 한국인을 일본에 귀복歸服케 한 후에 병합을 실행하는 것이 득책”이라는 점진설漸進說을 주장하는 자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보호정치로는 한국인의 배일 기세를 완화시킬 수 없으며, 따라서 분요紛擾의 화근을 일찍 제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급진적 병합추진론자의 의견에 공감하고 병합 실행을 굳혀갔다. 註109)

통감 교체에 이어 곧바로 일본 각의에서는 병합 후에 한국에 관한 시정방침을 결정하였다.


① 조선에 당분간 헌법을 시행하지 않고, 대권大權에 의하여 통치한다.

② 총독은 천황의 직속으로 조선에서의 일체의 정무를 통괄하는 권한을 가진다.

③ 총독에게 대권의 위임에 의해 법률사항에 관한 명령을 발하는 권리를 준다. 단, 본 명령은 별도의 법령 또는 적당한 명칭을 붙인다. 註110)


6월 3일 각의에서 결정된 이 시정방침안의 골자는 병합 후 일본 헌법으로 한국을 통치하며, 천황 직예하에 총독이 한국의 정무를 통할統轄한다는 등 한국에서의 통치권 행사 근거와 총독의 위치에 관한 것이었다. 이 시정방침에서 총독이 일본 헌법에 의하지 않고 천황의 대권에 의해 조선을 통치한다고 하는, 곧 총독이 헌법에 구애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조선 통치를 감행할 수 있다는 것은 근대적 법률정신의 근간을 깨뜨리는 것이었다. 즉 조선총독은 일본 천황에게만 책임을 질 뿐이고 조선을 통치하는 데 있어 일체의 정무를 통괄하고 행정 및 사법권까지도 임의로 행사할 수 있는 무소불위의 권한을 행사하려는 것이었고, 반면 조선과 그 국민은 근대 문명국가에 존재하는 법률에 의거하여 보호받을 수 없는, 미개한 통치대상이 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외에도 시정방침에서는 한국의 정치기관 개폐改廢 건, 총독부의 회계 및 정비政費, 철도 및 통신에 관한 예산, 관세, 병합 실행에 필요한 경비, 한국의 관리 채용 건 등에 관한 방침을 결정하였다.

6월 21일 병합에 필요한 법적 준비를 위해서 척식국拓殖局을 내각에 설치하였다. 6월 24일에는 병합 단행을 위해 남은 마지막 물리적 절차로 한국 경찰권을 박탈하였다. 통감에 임명된 사내정의는 일본에 머물면서 한국의 내부대신이자 내각총리대신 임시서리를 맡고 있던 박제순과 ‘한국경찰사무韓國警察事務 위탁委託에 관한 각서覺書’를 교환하고 6월 30일 관보에 게재하였다. 이 각서의 내용은 황궁의 경찰사무를 제외한 모든 한국정부의 경찰사무를 일본정부에 위탁한다는 것이었다. 註111) 한국정부의 경찰관제를 폐지시키고 이를 일본정부에 위탁하는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일본은 병합 준비에 필요한 제도적·물리적 준비를 완벽히 갖추었다. 일본이 내세운 경찰권 인수 명분은 ‘미개한 인민을 통솔하는데 경찰권만으로는 부적합하기 때문에 헌병으로 통할한다’는 것이었다. 종래 9도 경찰서 관할구역을 폐지하고 주한헌병대駐韓憲兵隊를 13관할구역으로 편성하여 1관구管區에 헌병대 1개소를 두고 각 도에 70개소의 분대分隊를 신설하였다. 註112) 헌병은 한국 전역을 장악하여 반일운동의 기세를 원천봉쇄하였다. 이와 더불어 통감 사내정의는 기병·보병을 한국에 파견하여 병합 준비를 위한 군사력 확보를 착착 진행시켜 나갔다. 註113)

한편 1910년 5월 30일 통감으로 임명된 사내정의는 당장 한국으로 건너가지 않고 일본에 머무르면서 구체적인 병합 실행 방안을 강구하였다. 그는 비밀리에 병합준비위원회倂合準備委員會를 설치하여 한국의 국호, 황실 대우, 한국인민 통치, 병합에 필요한 총경비 등에 관한 안을 작성·심의하였다.

병합 추진에 따른 외교 관계 사항은 외무성 정무국장인 창지철길倉知鐵吉, 한국관계 사항은 통감부 외무부장인 소송록小松綠이 맡아 원안原案을 기초하고, 이를 내각서기관장 시전가문柴田家門, 법제국장관 안광반일랑安廣伴一郞, 척식국 부총재 후등신평後藤新平 등 관계자들로 구성된 병합준비위원회에서 원안을 의정議定하였다. 6월 하순에서 7월 상순까지의 회합에서 이들이 주요 의제로 삼은 것은 한국 황실에 대한 대우, 대관大官·귀족들 처분, 그리고 한국인민 통치 방침에 관한 것이었다. 한국 황제는 일본제국의 황족으로 대우하여 태공太公이라 칭하고 1년에 150만원을 지급하며, 한국의 대신 이하 공신功臣들에게는 후·백·자·남작의 작위를 수여하고 세습재산으로 15만원 이하 3만원 이상의 공채증서를 하사하는 안을 작성하였다. 또한 식민지 조선의 관리로 가능한 한 조선인을 채용하고 대신 및 내각 관리들에게는 중추원의 고문·찬의贊議·부찬의副贊議로 임명하는 안도 작성하였다. 그리고 사내정의 통감이 가장 고려했던 것은 한국인의 구제책이었다. 병합 후 한국인을 일본인과 동등하게 취급하되 빈곤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자금 마련을 위해 공채를 발행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그의 이러한 의견은 ‘조선인본위’의 정책이라는 거센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註114)

병합준비위원회는 별다른 이견 없이 초고속으로 병합방침을 구체화시켜 나갔고, 마침내 7월 7일 황실 대우, 대관 귀족 처분, 한국인민 통치방침 등 세 가지 안을 포함하여 한국의 국호, 조선인의 국제법상의 지위, 제외국의 치외법권 및 거류지 제도 철회, 한국의 채권채무 부담, 입법 사항 등 총 21개조의 ‘병합실행방법세목倂合實行方法細目’을 의정하였고, 7월 8일 각의는 정식으로 21개조 안 모두를 통과시켰다. 註115)

병합준비위원회에서 치열하게 논의했던 문제 중 하나는 병합 후 한국에 일본헌법을 시행할지의 여부였다. 사내정의는 일본과 사정이 다른 한국에 일본 헌법을 시행하는 것은 문화 정도가 뒤떨어져있는 한국인민에게 적용하는 것이 대단히 불편할 뿐만 아니라 헌법제정 정신에도 어긋난다고 하여 반대하였다. 물론 헌법 시행지역에 하등의 제한도 없으며, 한국을 제국의 판도로 편입시킨 이상 제국헌법을 시행해야 한다는 반대론도 있었다. 그러나 제국헌법을 시행해야할 이유가 없다는 의론이 대다수를 차지하였고, 특히 책임자인 통감의 의견이 존중되어 헌법 미시행설을 채용하였다. 그리하여 계태랑 수상은 7월 12일 사내정의 통감에게 보낸 통첩에서 조선에서는 당분간 헌법을 시행하지 않고 대권에 의해 통치하고, 총독은 천황의 직예直隸하에 조선에서의 일체의 정무를 통할하는 권한을 가진다는 방침을 분명히 하였다. 註116)

이처럼 병합에 관한 방침과 그 실행 세목이 결정되자 새로 통감에 임명된 사내정의는 7월 23일 병합안을 가지고 한국에 부임·병합 실행에 착수하였다. 부임 직후 그는 헌병 및 경찰을 동원하여 지방에서 소요를 억제할 태세를 갖추는 한편, 정치적 변동을 일으킬 만한 사태를 사전에 탐색하여 완벽한 경계태세를 갖추었다. 註117) 또한 병합 관련 사안에 대한 신문 검열을 엄중히 하고 시국에 저촉되는 기사의 발행을 정지시키는 등 언론을 철저히 봉쇄하였다. 이어 8월 19일 경무총장 명석원이랑明石元二郞는 “정치에 관한 집회 또는 옥외屋外에서 다수의 집합을 금지한다”는 부령部令을 내리고 위험인물에 대해서는 도서지방으로 거주를 제한하는 ‘거주제한퇴거명령住居制限退去命令’을 내려 병합 반대 소요에 대한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註118) 일본은 이렇듯 철저하고 용의주도한 통감 사내정의와 엄중한 경계망을 펼친 경무총장 명석원이랑의 활약으로 8월 22일 이렇다 할 물리적 저항 없이 병합조약안을 강제하였다. 註119)


2. 병합조약 체결과 대한제국의 멸망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일본은 투병 중이던 대한 온건론자 증미황조 대신 대한 강경론자 사내정의 육군대신을 통감에 임명하였고, 그는 병합 준비를 마치고 6월 23일 인천에 상륙·입경하였다. 註120) 이제 병탄을 위해 남은 마지막 단계는 한국과의 원활한 담판이었다. 일본은 한국 내 정치세력간의 갈등관계를 최대한 활용하여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려 하였다. 결과적으로 총리대신 이완용과 그의 오른팔이었던 농상공부대신 조중응趙重應, 그리고 이들과 정적관계에 있던 일진회의 수령 송병준을 이용하는게 주효하였다. 註121)

일본은 병합조약 성사를 위해 이완용 내각을 대신하여 송병준이 내각을 맡을 것이라는 설을 유포시켰다. 사내정의는 이완용 내각이 합방 단행에 주저할 경우에 대비해서 귀국을 서두르는 송병준을 잠시 하관下關에 머물게 함으로써 정적 이완용을 견제토록 하는 용의주도함을 보였다. 이완용이 협상에 미온적일 경우 곧바로 송병준 내각을 조직하여 병합조약을 완성한다는 계략이었다. 註122)

이재명李在明에게 저격당하여 온양에서 치료 중이던 이완용은 송병준 내각 조직설에 노심초사하며 급히 상경하여 총리대신에 복직하였다. 그리고 8월 5일 심복인 이인직李人稙으로 하여금 통감부 외사국장 소송록小松綠를 방문케 하여 병합 담판의 단서를 열었다. 註123) 이에 통감 사내정의는 소송록의 보고를 통해 이완용의 병합 의향을 확인하고 통감부 인사국장 국분상태랑國分象太郞를 이완용에게 보내어 병합 담판을 위한 교섭을 청하였다. 8월 16일 이완용과 조중응이 일본 관동關東지방에서 일어난 수해水害 위로와 한국의 정치 근황 보고를 명분으로 통감 관저를 방문함으로써 병합과 관련한 예비 협의가 진행되었다. 이때 병합안 담판은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註124)

사내정의는 이완용에게 한국병합이 선의의 목적으로 추진되기 때문에 어느 일방적인 힘의 불균형에 기인해서가 아니라 “화기애애和氣靄靄하게 달성해야 할 것”이라고 회유하고 註125) 병합은 ‘한국부액韓國扶掖 목적’, ‘한국왕실의 안전 보장’, ‘한국 관민의 복리 증진’을 위해 양국이 일체가 되는 것이라며 준비한 병합에 관한 각서를 제시하였다. 註126) 이완용은 “한국의 현상 백사百事가 헐어 무너지고 스스로 쇄신刷新할 힘이 없는 까닭에 타국에 의뢰하지 않으면 안된다. 의뢰해야 할 나라가 일본이라는 것은 세계 각국이 인정하는 바이다” 註127)라고 하며 병합을 긍정하였다. 다만 사내정의가 제시한 내용 중 국호를 ‘대한大韓’에서 옛 국호인 조선으로 하고, 황제의 칭호도 태공太公으로 하자는 부분에 이견을 제시했다. 이완용은 “주권 없는 국가 및 왕실은 단순히 형식에 불과하지만, 일반 인민의 감정을 고려한다면 자못 중대한 문제이다. 일찍이 한국이 청국淸國에 예속되었던 시대에도 국왕의 칭호를 존속했었기 때문에 왕의 칭호를 부여하여 종실宗室의 제사를 영구히 존속시킨다면 인심을 완화하는 일방편이 될 것이고 화충협동和衷協同의 정신에도 부합된다” 註128)고 하여, 국호 및 왕실의 존속을 주장하였다.

이에 사내정의는 병합이 시행된 후에 왕위가 존속할 이유와 존속해야할 하등의 필요가 없고, 왕위를 존속시키면 도리어 장래 화근이 되어 왕실을 영구히 안전하게 유지할 수 없으며, 더욱이 주권이 없는 자가 왕위를 계승한 사례도 없기 때문에 태공太公이라 칭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고집하였다. 이완용은 당장 결정하기 곤란한 사항이기 때문에 각료와 협의하겠다고 답했다. 이날 저녁 농상공부대신 조중응이 다시 통감 사저를 방문하여 한국이라는 국호 및 왕칭을 재차 희망하였다가 다시 한국을 ‘조선’으로 하되 왕칭을 보존하여 ‘조선왕’이라 칭하자는 재협상안을 내놓았다. 사내정의는 ‘조선왕’이라고 칭하는 것은 ‘조선통치자’로 오해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불가하다고 하며 국호를 ‘조선’으로 하고 ‘황제’를 이왕전하李王殿下, 태황제太皇帝’를 ‘이태왕전하李太王殿下’, ‘황태자皇太子’를 ‘왕세자전하王世子殿下’로 하자는 안을 제시하였다. 결국 이완용이 이 안을 수용하여 협상안이 타결되었다. 註129)

병합 조인에 앞장선 이완용이 국호 및 왕칭 이외에 매국의 대가로 일본에 요구한 것은, 첫째 일제 식민통치에 민심이 불복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국민들의 생활 방도에 힘쓸 것, 둘째 왕실에 대한 대우가 민심을 움직이는 커다란 변수가 됨으로 왕실을 후하게 대우할 것, 셋째 조선인이 일본인에 비해 열등의 지위에 떨어지지 않도록 교육에 관한 행정기관을 설치하여 일본인과 똑같은 교육을 실현해 달라는 것이었다. 註130) 이와 함께 이완용은 양반의 신분 보장을 요구하였다. 이완용은 강제 병탄이 대세라는 인식 하에서, 자신의 권력기반이자 사회의 주도적 위치에 있던 양반의 처우 문제에 고심하였다. 그는 온양에서 치병중일 때에도 농상공부대신 조중응으로 하여금 양반세력들이 일제의 대한정책에 동화될 수 있는 방안을 강구케 하였다. 註131) 병합으로 인하여 기득권 세력인 양반사회의 질서가 동요되지 않을까 우려하였던 것이다. 이완용의 측근인 조중응·고희준高羲駿은 병합에 따른 ‘양반 처분안處分案’을 연구하고 일본의 여론 환기에 노력하였고 註132) 이완용은 “종사생활從仕生活을 하여 온 사족가士族家들이 급후今後 나아갈 방향을 잃게 되었다”는 점에 깊은 우려를 표명하고, 생업과 직업 없는 양반 유생 및 그 자제들의 교육을 위한 “임시臨時 은사공채恩賜公債의 실시實施”를 일본에 건의하였다. 註133) 병합 이후에도 농상공農工商에 종사하는 자들의 생활은 여전할 수 있기 때문에, 종래의 기득권을 유지해왔던 사족士族들의 지위는 보장해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극소수의 양반층 및 자신의 친척을 귀족의 반열에 올려 줄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註134)

마침내 사내정의 통감은 이완용과 병합 조건으로 다음과 같은 각서를 교환하였다.


한국의 황제는 일본의 황족 예우를 받을 뿐만 아니라 현재와 동액同額의 세비歲費를 일본이 보증保証하기 때문에 장래에도 부유한 생활을 영위할 것이다. 또한 종래 황실부皇室府의 각관各官은, 그 직명은 바뀔지도 모르지만, 그 지위와 봉급은 보증한다. 각 황족은 공公·후候·백작伯爵 등의 영작榮爵을 수여 받고 그 세비도 현재보다 증가하기 때문에 십분 체면을 유지할 수 있다. 현 내각대신에게는 영작을 수여하고 상당한 은사금이 주어지며, 병합 후 신정新政에는 고문에 임명된다. 기타 친親·칙勅·주奏·판임관判任官, 원로元老, 전대前大臣 등에게도 각각의 은전恩典을 베푼다. 註135)


사내정의가 이완용의 양반 처우에 대한 조건을 충분히 만족시켜 주겠다는 약속에 따라 병합조약 협상이 원활히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이다. 註136)

병합안을 두고 사내정의와 이완용간의 타협이 이뤄진 다음날인 1910년 8월 17일 그는 이완용을 불러 병합조약 초안을 보여주었다. 이에 이완용은 병합조약안을 가지고 18일 내각에서 병합안에 대한 동의를 구하는 절차에 들어갔다. 총리대신 이완용과 농상공부대신 조중응, 내부대신 박제순朴齊純, 탁지부대신 고영희高永喜는 병합안에 찬성한 반면 학부대신 이용직李容稙이 병합안에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이완용을 이용직을 일본에 학사시찰 및 수해水害 위로를 명분으로 일본에 파견하고자 하였는데, 이용직은 이완용을 책략을 간파하고 병환중이라 칭하며 일본 특파 임무를 거절하였다. 결국 병합에 반대하던 이용직은 병합안이 논의된 어전회의의 개최 사실을 알지 못하여 참석하지 못하였다. 註137)

한편, 이완용은 황실의 병합 반대에 대한 대책으로 황제의 직접적인 재가 대신 황제의 지旨에 의해 조약에 조인하는 방법을 강구하였으며, 이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는 궁중宮中을 대표하는 궁내부대신 민병석閔丙奭과 시종원경 윤덕영尹德榮의 양해를 얻는 것이 급선무라고 여겼다. 그리하여 8월 19일 이들을 불러 시국해결을 위해 병합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 설명하였다. 8월 21일에는 사내정의가 이완용의 권유에 따라 궁내부대신 민병석, 시종원경 윤덕영을 통감 관저로 불러 병합의 본지本旨에서 실행 방법에 이르기까지 상세하게 설명하며 협조를 당부하였다. 註138) 이완용은 시종원경 윤덕영으로 하여금 병합에 따른 양국조서讓國詔書에 어보御寶를 날인하도록 사주하였으며, 윤덕영이 병합에 반대하는 순종을 협박하여 강제로 날인, 이완용을 거쳐 사내정의에게 보내짐으로써 일제의 한국 병탄 과정이 완료되었다. 註139) 병합 담판을 시작한 지 불과 6일만의 일이었다. 물론 이때의 병합조약은 황제의 어새御璽는 찍혔으나 서명이 안된 무효조약이었다. 당시 국제관례상 국제적인 조약의 효력을 얻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황제의 서명이 빠져 있었던 것이다. 註140) 불법적으로 날조된 「한국 병합에 관한 조약」 전문 8조는 다음과 같다.


제1조 : 한국황제폐하는 한국 전부에 관하는 일절의 통치권은 완전히, 영구히 일본국황제폐하에게 양여讓與한다.

제2조 : 일본국황제폐하는 전조前條에 게揭한 양여를 수락受諾하고 또 전혀全然 한국을 병합하는 것을 승낙한다.

제3조 : 일본국황제폐하는 한국황제폐하 황태자 전하, 그 후비后妃 및 후예後裔로 하여금 각기 지위에 응應하여 상당한 존칭尊稱 위엄威嚴 및 명예名譽를 향유享有케 하고 또 이를 보유保有함에 십분十分의 세비歲費를 공급할 것을 약約한다.

제4조 : 일본국황제폐하는 전조前條 이외의 한국황족 및 그 후예에 대하여 상당한 명예 및 대우를 향유케 하고 이를 유지함에 필요한 자금을 공급할 것을 허許한다.

제5조 : 일본국황제폐하는 훈공勳功이 유有한 한인韓人으로 특히 표창表彰을 위爲함에 적당하다고 인認한 자에 대하여 영작榮爵을 수授하고 또 은금恩金을 여與한다.

제6조 : 일본국정부는 전기前記 병합의 결과로 전연히 전국의 시정을 담임하고 동지에 시행할 법규를 준수하는 한인의 신체 및 재산에 대하여 십분의 보호를 여하고 또 그 복리의 증진을 도圖한다.

제7조 : 일본국정부에 성의충실誠意忠實히 신제도新制度를 존중하는 한인韓人으로 상당한 자격이 유有한 자者를 사정事情이 허許함에 한限하여 한국에 재在한 제국帝國 관리官吏로 등용登用한다.

제8조 : 본 조약은 일본국황제폐하 및 한국황제폐하의 재가裁可를 경經한 것으로 공포일로부터 이를 시행한다.

우右의 증거證據로 양국 전권위임원全權委任員은 본 조약에 기명 조인함

명치 43년 8월 22일

통감 자작 사내정의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1910년 8월 29일에 대한제국의 종말을 고하는 순종의 칙유


통감부는 병합조약이 조인된 이튿날인 8월 23일 집회취체集會取締에 관한 건을 공포하여 일체의 정치집회와 옥외 민중집회를 금지하였고, 8월 25일에는 일진회를 포함한 12개 정치단체의 해산명령을 내려 병합조약에 반대하는 세력의 활동을 봉쇄하였다. 그러면서 한국에 있는 각국의 영사에게 일본의 한국병합을 공식적으로 통고하였고, 8월 26일 산현이삼랑山縣伊三郞 부통감이 신문기자들을 불러 한국강점을 공포하였다.

8월 29일 한국 황제가 통치권을 양여하면 일본 황제가 이를 수락하고 병합한다는 ‘병합조약’이 관보 호외에 공시되었고 일본 천황은 조칙과 병합에 따른 칙령을 공포하는 한편, 이날 병합조약에 관한 순종황제의 칙유를 조작·날조하여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황제약짐왈皇帝若朕曰 짐이 부덕否德으로 간대艱大한 업業을 승承하여 임어臨御 이후로 금일에 지하도록 유신정령維新政令에 관하여 극도亟圖하고 비시備試하여 용력用力이 미상부지未嘗不至로되 유래由來로 적약積弱이 성고成痼하고 피폐疲弊가 극처極處에 도到하여 시일간時日間에 만회挽回할 시조무망施措無望하니 중야우려中夜憂慮에 선후善後할 책策이 망연茫然한지라 차此를 임任하여 지리익심支離益甚하면 종국終局에 수습收拾을 부득하기에 자저自底할진 즉 무령無寧히 대임大任을 인人에게 탁托하여 완전할 방법과 혁신革新할 공효功效를 주奏케 함만 불여不如한 고故로 짐이 어시於是에 구연瞿然히 내성內省하고 곽연廓然히 자단自斷하여 자玆에 한국의 통치권을 종전으로 친신의앙親信依仰하던 인국鄰國 대일본황제폐하大日本皇帝陛下께 양여하여 외外으로 동양의 평화를 공고鞏固케 하고 내內으로 팔역민생八域民生을 보전保全케 하노리 유이대소신민惟爾大小臣民은 국세國勢와 시의時宜를 심찰深察하여 물위번소勿爲煩擾하고 각안기업各安其業하여 일본제국문명신정日本帝國文明新政을 복종服從하여 행복을 공수共受하라. 짐의 금일 차거此擧는 이유중망爾有衆忘함이 아니라 이유중爾有衆을 구활救活하자 하는 지의至意에 단출亶出함이니 이신민爾臣民 등等은 짐의 차의此意를 극체克體하라.

융희4년 8월 29일 註141)


일본은 한국 병탄의 마지막 수순으로 한국 국호, 조선총독부 설치, 조선에서 시행할 법령, 범죄자 사면, 재정운영방침, 특허법·상표법 등의 시행에 관한 방침을 칙령으로 공포하고, 아울러 조선총독이 공포한 제령과 칙령 및 제령을 마무리하는 통감부령을 공포하여 불법적인 병합을 마무리하였다. 註142) 이로써 대한제국은 역사 속에 사라지게 되었다.

〈한 명 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