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경제침탈과 토지수탈
화폐정리사업
징세제도의 개혁
황무지개간과 토지수탈
2. 관세관관제의 실시
지방에 재정고문지부를 설치하고 재무관을 파견하여 세무를 감독했지만 그리 만족할만한 징수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소수의 일본인 관리로는 세무의 감시와 감독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징수관리들의 부정부패를 막고 세입과 세출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는 징세기구의 개혁이 필수적이었다. 징세기구의 개혁은 이등박문이 통감으로 부임한 이후 급진전되었다.
징세기구의 개혁은 이등박문이 부임한 지 6개월이 지난 1906년 9월 1일부터 그 입안에 대해 논의가 이루어졌다. 징세기구 개혁에 대한 논의는 이등박문과 한국 대신들과의 회의인 ‘시정개선에 관한 협의회’이후 협의회로 약기함에서 이루어졌다. 註62) 징세법의 개정은 1906년 9월 1일 민영기 탁지부대신의 제의로 시작되었다. 민영기는 수세제도의 개정을 위해 이미 탁지부에서 새로운 관제를 기안 중에 있다고 했다. 따라서 1907년부터는 현재 군수의 손에 있는 징세업무를 세무관에게 맡길 것이라고 했다. 13도 요지에 세무관을 파견하여 오로지 수세사무에만 종사시킬 것이며, 이것은 이미 목하전종태랑 고문과 협의가 되었다고 했다. 註63)
1906년에 9월 24일 칙령 제54호로 제정된 ‘관세관관제’의 내용을 살펴보면 ‘관세관관제’는 탁지부대신 이하 세무감·세무관·세무주사로 편성되었고, 그들의 임무는 관할 구역 내의 세무 일체를 담당하게 되어 있었다.
‘관세관관제’ 개정안(1907. 6. 21)
그러므로 기존의 세금 영수인이던 군수나 이서들은 관세관이 파견됨으로 인하여 세금을 거두는 일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 또한 각군에 세무주사를 파견하여 세금영수의 일을 전담시킴으로서 행정구역의 말단까지 탁지부가 장악하게 되었다. 세무감은 13명으로 각도의 관찰사가 겸임하게 했고 세무관은 36명, 세무주사는 168명으로 규정했다. 당시 군의 수는 342개였으므로 모든 군에 세무주사가 파견된 것은 아니었다. 또한 세무감의 주재소는 세무감부, 세무관의 주재소는 세무서, 세무주사의 주재소는 세무분서로 규정했다 註64) 마지막으로 관세관에 대한 모든 일은 탁지부대신이 관장하게 되어 있었다. 註65) ‘관세관관제’는 1905년 1월에 이미 목하전종태랑이 입안하여 허락을 받았던 세무관설치계획과 거의 동일한 것이었다.
또한 10월 16일에는 칙령 60호 ‘조세징수규정’을 발포하여 군 이하의 지세수취는 면장에게 그 권한을 부여하는 제도를 확립했다. 註66) ‘조세징수규정’ 7조에 의하면 “지세 및 호세는 면장에게 납입고지서를 발행하고, 면장은 면 내의 납세다액자 5명 이상으로 임원을 정하여 협의한 후, 납세의무자에게 부과금액을 정하여 납입통지를 발부하도록 되어 있다. 또한 현금영수는 임원중에서 선정된 공전영수원公錢領收員이 하도록 했다. 이것은 지세의 부과과정과 징수과정을 완전히 분리한 조치로서, 이로써 지세수취에 대하여 군수나 이서·면장 등이 전혀 관여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이들 면장·임원·공전영수원이 이전의 군수나 이서층으로 변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들의 선임에도 특별히 주의를 기울였다. 註67) 이로써 군수와 이서층의 지세수취권을 배제하고 세무관·세무주사 - 면장·공전영수원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지세수취구조가 형성되었다.
칙령이 반포되고난 뒤 각 언론에는 세무관에 관한 기사가 연일 보도되었다. “탁지부대신 민영기씨가 신설 세무관을 시무한 숙자로 극택다 세관은 비단결호세라 산세도 측량정세하야 일체 수세한다더라” 註68)고하여, 세무관은 사무에 능숙한 자로 뽑았으며, 결세·호세·산세 등 일체의 징수사무를 담당하게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임무를 맡게 될 세무관의 시취와 교육은 재정고문이 담당했다. 註69) 관세관으로 뽑힌 사람들은 대개 고등학교 또는 관립일어학교 졸업생으로 18세 이상된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세무주사는 상당한 고학력자이며 신학문을 배운 사람들로 일어를 필수적으로 하는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註70) 이렇듯 고학력자들로 이루어진 세무주사들은 탁지부에서 1개월간 세무장정을 견습한 뒤 註71) 그후에 각지로 파견되었다. 註72) 세무관들이 1개월 동안 학습한 세무장정 또는 관세사무의 내용은 일반세무와 화폐정리에 관한 것이었다. 註73) 이렇게 교육시킨 세무관들은 모두 삭발을 하고 복장을 통일시킨 뒤에 각군에 파견하였다. 註74)
구 분 | 1905 | 1906 | 1907 | 1908 | 1909 |
조세租稅 | 3,088,638 | 6,524,331 | 9,769,622 | 9,892,911 | 7,941,970 |
지세地稅 | 2,150,976 | 2,897,095 | 5,472,928 | 6,082,612 | 5,054,815 |
호세戶稅 | 81,949 | 165,301 | 317,183 | 338,665 | 283,167 |
항세港稅 | 2,402,863 | 3,267,387 | 2,413,167 | ||
광세鑛稅 | 448 | 26,168 | 33,488 | 19,206 | |
염세鹽稅 | 6,626 | 9,163 | 9,328 | ||
가옥세家屋稅 | 35,605 | ||||
주세酒稅 | 48,080 | ||||
연초세煙草稅 | 20,201 | ||||
잡세雜稅 | 5,610 | 10,010 | 11,792 | 50,406 | 58,014 |
기왕연도旣往年度 | 849,655 | 3,451,925 | 1,532,062 | 111,185 | |
소속수입所屬收入 | |||||
인지수입印紙收入 | 38,333 | 123,867 | 101,484 | 245,561 | |
역둔도수입驛屯賭收入 | |||||
관업수입官業收入 | 263,806 | 692,809 | |||
잡수입雜收入 | 3,924 | 207,672 | 1116,723 | 169,980 | 241,179 |
경상부 합계 | 3,092,563 | 6,770,336 | 10,010,212 | 10,428,182 | 9,121,520 |
4,000,000 | |||||
900,000 | 2,000,000 | ||||
1,000,000 | |||||
317,963 | 2,598,836 | ||||
임시부 합계 | 1,217,963 | 9,598,836 | |||
총계 | 3,092,563 | 6,770,336 | 10,010,212 | 11,645,146 | 18,720,357 |
각군에 파견된 세무관들은 1906년 12월 중순경부터 징수사무를 담당했다.
‘관세관관제’는 실시된 지 2달이 조금 지나자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906년 12월 중순경 각군에 파견된 세무관들의 금고수납액이 1907년 2월 2일까지 141만여 원에 달했다. 註75) 1904년까지 1년 평균 결세액은 170여만 원에 불과했음을 감안한다면 2개월여에 걸친 징수액치고는 상당히 많은 액수였다. 이러한 세무관의 활약은 1907년도의 결세징수액이 1906년도에 비해 2배 가까이 증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조세징수에 있어서 전반적인 증가를 초래했음을 〈표 5〉가 잘 보여준다.
이렇듯 세무관들이 결세 징수에 큰 효과를 거두자 1907년 6월에 목하전종태랑은 세무관을 증설하기에 이르렀다. 註76) 세무관은 36명에서 14명을 더 증설하고 세무주사는 100여 명을 더 증설하였다. 이로써 세무주사는 전국의 각군에 파견되게 되었다.
3. 관세관관제에 대한 한국민의 저항
‘관세관관제’의 실시로 세금의 징수는 늘어났지만 세무관과 세무주사들의 징수업무로 인한 한국민의 저항이 거세게 일어났다. 우선 기존의 세금영수원이던 군수와 이서층 가운데 특히 이서층의 반발이 심했다. ‘관세관관제’가 반포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이서층들은 즉각 이에 반대하는 의사를 표명했다. 각군의 이서층들은 ‘관세관관제’의 실시에 대항하여 세금의 영수를 거절하기도 했으며 註77), 결안과 세금장부를 태워버리고 도망하는 사례도 잇달아 일어났다. 註78) 또한 이서층을 비롯한 서기·청직·사환 등이 사퇴하여 세납을 못하기도 했고, 조세장부를 인계하지 않거나 일부만 내놓아 결세의 징수에 큰 차질이 생기기도 했다. 이들이 거센 반발을 한 이유는 ‘관세관관제’의 실시가 500여 년 동안 유지되어온 이서층의 가업을 하루아침에 빼앗는 것이었음은 물론 이들의 생계를 가로막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시간이 지나 ‘관세관관제’가 실행되기에 이르자 결민과 협력하여 살인도 서슴지 않는 과격하고 구체적인 저항을 하기에 이르렀다. 註79)
이서층의 저항에 이어 농민들의 저항도 거세었는데 군수와 이서의 지세수취권이 세무관과 세무주사들에게 넘어가고, 그들의 세금이 지금고를 통해 제일은행으로 귀속되자 ‘관세관관제’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게 된 것이다. 대부분의 농민들은 기존의 징수체계인 군수에게 납부하기를 원했고, 군수의 영수증이 없으면 납세하지 않겠다고 버티기도 했다. 또한 면장의 세금영수를 거부하고 오히려 면장과 임원을 구타하기도 했으며, 일인에게 납부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관정에 납부하기를 원해 세납이 지연되기도 했다. 註80)
엽전통용지방에서는 세무주사들이 엽전으로만 결세를 징수하자 부당한 징수라며 납세거부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1906년 3월에는 경북 인동과 선산 군민이 결세 80량을 60량으로 감하여 달라고 관가를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註81) 선산군에서는 그 수가 수천 명에 달할 정도로 민의 항의가 거세었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민의 요구는 세액을 낮추어달라는 감세減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결세액의 차이가 밝혀지자, 민의 요구는 단순한 감세에서 벗어나 균세운동均勢運動으로 이어졌다. 균세운동은 백동화통용지방과 엽전통용지방의 결세액을 균등하게 해달라는 엽전통용지방민의 납세거부운동이었다. 균세운동은 시작 당시에는 전라남도 장성 인근의 군 대표가 참여하는 정도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 지역은 확장되어 전북지방까지 번졌으며, 1908년에 들어와서는 경상남북도 주민까지 합세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애국계몽단체인 호남학회湖南學會와 대한협회大韓協會의 협조, 그리고 『대한매일신보』·『황성신문』과 지방신문인 『목포신문』 등 언론의 동참으로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다.
이처럼 군수와 이서층과 농민들의 저항에 이어 엽전통용지방에서의 균세운동이 일어나자 이등박문은 ‘관세관관제’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했다. 1907년 4월 9일 이등박문은 “제군은 법령을 제정하기만 하면 일이 끝났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나는 실행을 중시한다. 지방관 중에는 법령은 엽전을 필요로 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현재 인민을 압박하여 엽전으로 납세시키고 엽전 80냥에 대해 신화 4원의 비율로 사복을 채우는 부정을 행하고 있지 않은가? 이것은 실제 감독이 잘 이행되지 않은 증거이다” 라고 하며 지방의 징세업무에 대해 감독이 잘 이루어지고 있지 않음을 비판하였다. 註82) 이것은 ‘관세관관제’ 자체에 대한 불만이었다.‘관세관관제’가 기존의 세금징수원이던 군수와 이서를 배제하기는 했지만 새로 뽑은 세무관과 세무주사는 여전히 한국인이었다. 註83) 한국측에서 볼 때 ‘관세관관제’는 거대한 지각변동과 같은 것이었지만, 일본측에서 볼 때에는 사람만 바뀌었을 뿐 세금의 징수는 여전히 한국인이 담당한 것에 불과했다. 이것은 한국인을 고용하여 재정과 관계된 금융업무를 시행하려 했던 재정고문 목하전종태랑의 재정방침에서 나온 것이었고 한국인의 반발을 우려해서였다.
그러나 이등박문은 이처럼 한국인을 중심으로 하는 징수체제는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한국의 정치를 개량하기 위해서는 한국인만으로는 도저히 완성할 수 없고, 일본인으로 하여금 이를 완성시킬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註84) 한국인을 채용하여 재정정리를 단행하고자 했던 목하전종태랑과는 처음부터 입장을 달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입장의 차이는 고문정치가 폐지되고 차관정치가 실시되자 징세기구의 개혁으로 나타났다.
4. 재무감독국관제의 시행
1907년 6월 헤이그특사사건을 계기로 초대통감인 이등박문은 7월 18일 그 책임을 물어 고종황제의 양위를 강요했다. 그리고 7월 24일에는 이완용내각과 제3차 한일협약을 체결했다. “한국정부는 통감이 추천하는 일본인을 한국관리에 임명할 것”이라는 제3차 한일협약의 규정에 따라 고문정치를 폐지하고 일본인을 한국관리로 임명하는 차관정치次官政治를 실시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거의 모든 행정조직에 일본인이 대거 등용되었고 그 결과 일본인이 한국의 행정을 장악해 나가기 시작했다. 차관정치가 실시됨에 따라 1907년 10월 재정고문은 사임하고 탁지부 차관이던 황정현태랑荒井賢太郞이 탁지부 차관이 되어 이등박문과 함께 재정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에 재정고문이 실시했던 ‘관세관관제’는 1907년 12월 13일자 칙령46호와 47호로 공포된 ‘재무감독국관제’와 ‘재무서관제’로 대체되었다. 註85) 이로써 경성경기, 강원도·평양평안남북도, 황해도·대구경상남북도, 충청북도·전주전라남북도, 충청북도·원산함경남북도 5개소에 재무감독국을 설치하여 탁지부대신 휘하에 내국세 및 지방재무를 감독하게 하고, 그 밑에 231개소의 재무서를 두어 내국세무와 재무를 담당하게 했다. 그 결과 재정고문이 담당하던 지세수취의 감독업무와 관세관이 담당하던 지세 부과업무는 재무감독국장과 재무서장으로 이어지는 지세수취구조로 변경되었다. 그리고 이들의 임무는 탁지부 차관인 황정현태랑이 직접 관할했다.
‘재무감독국관제’는 국장 5명, 사무관 10명, 주사 80명, 기수 10명을 두었으며, ‘재무서관제’는 재무관 60명과 주사 520명을 두고 기수는 재무감독국 기수가 겸임하게 했다. 각군에 파견된 재무관과 재무주사의 수는 이전의 세무관과 세무주사의 수보다 2배 가까이 증가했으며, 이들 재무관리 대부분은 한국인과 접촉하는 하부관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일본인으로 교체되었다. 이로써 일본은 한국의 재정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또한 ‘재무감독국관제’는 일본의 제도와 거의 동일한 것으로서 화폐제도와 마찬가지로 자국의 제도를 그대로 이식한 한국 식민지화의 한 과정이었다. 註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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