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신문지법 공포와 언론탄압, 한국식민지화를 위한 제도 개편-제3권 통감부 설치와 한국 식민지화

몽유도원 2013. 1. 17. 16:27

제3장 한국식민지화를 위한 제도 개편


대한제국 통치조직과 지방제도 개편

교육제도의 개편과 사립학교 탄압

사법제도 개편과 의병탄압

신문지법 공포와 언론탄압


4. 신문지법 공포와 언론탄압


1. 신문지법 제정 배경

일제의 대한언론정책은 1904년 러일전쟁 발발과 더불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주한일본공사 임권조는 1904년 3월 한국 외부에 신문 취체에 관한 법률을 만들어 국내의 신문들이 일본군의 움직임을 보도하지 못하도록 요구하였다. 註293) 그럼에도 1904년 4월 7일자 『황성신문』에 「거제정보巨濟情報」란 제목하에 거제도에 상륙한 일본군의 동향 및 군사정보 관련 기사가 게재되자, 일제는 이를 명백한 군사행동을 적발한 것이며 행동의 사실여부는 잠시 두고라도 이를 기사에 게재하도록 허가함으로써 군략상 대단히 방해가 되고 있는 형편이라며 하루속히 신문검열관을 설치하고 적당한 관리를 선정하여 신문 기사 전체에 대한 정밀한 검열을 하여 엄중히 단속할 것을 요구하였다. 한국정부는 1주일이 지난 뒤에 일본측에 일본군의 동향을 게재한 황성·제국 양 사원들을 불러들여 엄중하게 금지하도록 조처하였고, 이후 별도로 담당관을 정해 모든 군략군기軍略軍機에 관계되는 사항을 정밀하게 검열해 누설되는 것을 막도록 하였다는 답신을 보냈다. 註294)

한국측의 답변에도 일제는 1904년 7월 20일에 한국주차군사령관의 명의로 집회 또는 신문이 치안에 방해된다고 인정될 때에는 이를 정지시키고 관계자를 처벌할 것과 신문에 대해서 사전 검열을 받을 것을 한국 외부에 통고하여 신문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자 했다. 註295) 일본군사령부는 1904년 8월 『제국신문』과 『황성신문』의 주무원主務員을 불러 군사상 사항의 신문게재금지와 신문사전검열을 통고하였다. 이어 1904년 10월 군사상의 보안을 이유로 ‘군정 실시에 관한 내훈內訓’을 발표하고 집회·신문·잡지·광고 등이 치안을 방해한다고 인정될 때에는 이를 해산·정지 또는 금지시킬 수 있도록 하였다. 註296) 일제는 이를 근거로 『제국신문』에 대해 ‘정간명령’을 내렸으며, 1905년 11월 「시일야방성대곡」을 게재한 『황성신문』을 정간시키고 장지연을 구속하였다.

을사늑약 이후, 일제는 ‘보안규칙’을 통해 “신문지 및 기타 인쇄물의 기사가 외교 또는 군사 기밀에 저촉되거나 또는 안녕질서를 방해하거나 또는 안정질서를 방해하는 것으로 인정될 때는 발매·반포를 금지할 수 있다”고 규정하여 국내 언론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註297)

1907년 4월 박제순내각은 ‘조도전대학토론회사건’이 『대한매일신보』에 게재되자 이를 계기로 신문규제를 제기하였으나 통감부의 반대로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통감은 일본 외무성에 이 기사에 대한 사후 대책을 요구하고 있었다. 일본 외무성은 주일영국대사를 불러 대한매일신보 사장 베델의 처리를 강력히 요구했다. 내부 경무국에서는 각 잡지사 발행인을 불러 잡지의 종류와 성질을 설명하고 이후부터 내부 경무국의 검열을 받을 것을 요구하였다. 註298)

이완용내각이 성립되자 이등박문은 한국에서 신문지조례의 제정에 대한 필요성을 역설하는 한편, 한국에서 일본인이 발행하는 신문에 대한 통제와 더불어 베델의 언론보도 태도에 대한 영국과 교섭을 언급하였다. 이어 시정개선협의회를 통해 이등박문은 신문조례를 제정하는 문제를 의제로 삼아 법률가로 조직된 법제심사회에서 토의할 것을 주문하면서 신문지법에 대한 초안을 제시하며 법 제정을 적극적으로 요구하였다. 통감부는 헤이그특사사건이 일어나자 서둘러 1907년 7월 24일 ‘신문지법’을 공포하였다. 註299)

이에 따르면 첫째, 신문발행의 허가제와 보증금 제도를 두어 새로운 신문의 출현을 억제할 수 있도록 하였다. 둘째, 발행인·편집인·인쇄인에 대해 당국의 허가를 받도록 하여 당국이 신문 종사자에 대한 ‘실사권實査權’을 갖도록 하였다. 셋째, 각 신문은 매회 발행에 앞서 발간한 신문 2부를 내부 관할관청에 납본하도록 하고, 일정한 사항에 대해서는 게재를 금하게 하여 사실상 사전검열을 가능케 하였다. 註300) 그외에 신문이 발행된 이후에도 사후 통제 장치를 마련하여, 행정처분을 통해 사안의 경중에 따라 기사 삭제, 신문발매금지, 압수 및 발행정지와 발행금지 등의 처분을 내릴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이를 어겼을 경우에는 벌금 또는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하였으며, 인쇄시설까지 몰수할 수 있었다.

신문지법에 대한 반응은 대체적으로 부정적이었다. 일반인들은 신문지법의 규제를 받지 않았던 『대한매일신보』를 신뢰하였다. 『황성신문』은 신문지법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였으나, 『제국신문』은 순응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신문지법은 영세한 한국인 발행의 신문사에 재정적인 부담을 증가시켜 신문활동을 위축시켰다. 註301)


2. 언론탄압 실태

하지만 여전히 신문지법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있던 『대한매일신보』가 문제였다. 치외법권을 지닌 외국인이 발행하는 한글신문으로 사전 검열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한매일신보』는 이러한 이점을 최대한 살려 정부의 무능과 부패, 친일정책 등과 관련된 정치문제뿐만 아니라 관리들의 비행을 폭로하곤 하였다. 일본 외무성은 베델을 추방하기 위해 통감부로 하여금 그를 영국 총영사관에 기소토록 하였다. 결국 1907년 말에 베델은 6개월의 근신처분과 함께 보증금 300파운드의 공탁 명령을 받았다. 註302) 하지만 베델의 추방은 실패하였고, 『대한매일신보』는 계속해서 반일적인 기사를 쏟아냈다.

이에 일제는 1908년 5월 신문 압수와 처분 및 집행에 관한 보다 강화된 통제규칙을 제정하여 사실상 한국 내 언론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확보하였다. 이로써 한국 내에서 발행되는 모든 신문들은 사실상 통감부의 규제 아래 놓이게 되었다. 특히 1910년 5월 이른바 ‘신문압수처분’에 관한 새로운 기준을 적용하여, 민족언론의 활동은 원천적으로 차단당하고 말았다. ‘신문지법 개정’과 동시에 통감부는 『공립신보』와 『대한매일신보』를 압수하였다.

통감부는 ‘신문지 압수 처분에 관한 건’이라는 일반 내규에 따라서 다음과 같이 행할 것을 지시하였다. 발매·반포 금지와 압수를 할 때 관보에 고시할 것, 경찰관은 외국인의 가택이나 사원·영업소에 들어가 외국인이 소지하고 있는 신문지를 압수할 것, 우편 배달의 경우 통신관리국의 통지가 있으면 경무국에서 그것을 검열하여 처분할 것, 기차의 보통화물로 지방의 판매점에 송달될 때 경무국의 압수처분이 내려지면 철도관리국에 통보하고, 관리국은 다시 각 역장에게 알리며, 기타 경찰서나 분서는 경무국의 전보 통달에 대해 압수 처분할 것, 선박의 보통화물로 소송되는 경우, 경무국의 압수 지시는 관세국에 통지하고 관세국을 거쳐 세관에 통달하며, 기타 경찰서나 분서는 경무국의 전보 통달에 의해 압수 처분을 행할 것 등이었다.

통감부는 1909년 2월 ‘출판법’을 제정하여 언론통제를 위한 이중적 장치를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제는 1910년 5월 일본의 보호를 반대하거나 암살자를 ‘의사’라고 하거나 해삼위 지역을 국권회복단체의 근거지로 삼기를 고취하는 기사에 대해 ‘압수처분’한다는 원칙을 정하는 등 국내 언론을 탄압할 법률적 정비를 마무리 하였다. 註303) 이러한 법령들은 경술국치 이후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일제는 『대한매일신보』를 매수하는 공작을 전개했다. 당시 큰 영향력을 가진 『대한매일신보』에 여러 가지 탄압을 가하였다. 특히 일제는 외교경로를 통해 발행인 배델을 1907년과 1908년 두 차례에 걸쳐 재판에 회부시켰으며, 양기탁도 국채보상의연금 횡령한 혐의를 뒤집어 씌어 재판에 회부하였으나 무죄로 석방되었다. 배델은 일제의 탄압에 맞서 싸우는 한편, 1908년 5월 발행인 명의를 영국인 만함萬咸 : Alfred Marnham에게 넘겼다. 1909년 5월 배설 사망 후, 1910년 5월 일제는 비밀리에 만함에게 700파운드를 주고 신문을 매수하였다. 『대한매일신보』는 1910년 6월 14일자부터 발행인이 이장훈李章薰으로 바뀌었다. 경술국치 직후인 1910년 8월 30일부터 ‘대한’이란 두 글자를 생략한 채 『매일신보』로 바뀌어 조선총독부 기관지로 변질되고 말았다. 註304) 『황성신문』도 1910년 8월 30일 『한성신문』으로 개제하여 발행되다가 9월 14일 폐간되기에 이르렀다.

〈이 계 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