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교육제도의 개편과 사립학교 탄압, 한국식민지화를 위한 제도 개편-제3권 통감부 설치와 한국 식민지화

몽유도원 2013. 1. 17. 13:49

제3장 한국식민지화를 위한 제도 개편


대한제국 통치조직과 지방제도 개편
교육제도의 개편과 사립학교 탄압
사법제도 개편과 의병탄압
신문지법 공포와 언론탄압

2. 교육제도의 개편과 사립학교 탄압


1. 교육법령 반포와 교육제도 개편

이등박문은 한국을 ‘시정개선’시킨다는 명분하에 가장 우선할 것으로 차관문제, 보통교육 실시, 지방 경찰력 확장 등을 꼽았다. 이는 1906년 3월 한국정부의 각부 대신들로 구성된 ‘한국시정개선에 관한 협의회이하 협의회’를 통해 추진되었다. 협의회는 1909년 12월까지 모두 97회에 걸쳐 열렸다. 이는 그의 의도대로 추진되었으며, 이미 결정된 사항은 각 대신들에게 통고·추인하는 형식이었다. 註46)

처음으로 열린 협의회에서 통감은 한국의 식민통치에 필요한 자금을 일본 흥업은행으로부터 1,000~2,000만 원을 들여와 농사개량·도로수축·배수·관개·식림과 같은 척식拓殖뿐만 아니라 ‘간이??閥?’한 교육에 집중시키겠다는 통치방침을 밝혔다. 당시 정부는 학정참여관 폐원탄幣原坦과 더불어 교육을 진작시키기 위해 교육칙어를 공포토록 주청하였으며, 또 시학관제를 신설하여 국내 교육을 시찰하고자 하였으나 자금 마련이 어려워 이를 시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통감은 ‘대한식민교육’ 방침을 내세워 우선 큰 마을에 학교를 설립하고 이에 필요한 교사 양성과 교과서 편찬에 주력하고자 교육자금으로 차관 중에서 10%정도에 해당하는 50만원을 책정하였다. 이어 50만원에 대한 수차에 걸친 논의를 통해 20만원은 기존 학교와 서울 시내의 학교 신설에, 30만원은 각 지방에 분배한다는 원칙을 세운 뒤에 폐원탄을 경질하고 통감부 서기관 표손일俵孫一에게 교육확장사무를 담당하도록 했다. 註47)


식민지교육정책 입안자 표손일


이등박문은 ‘보호교육론’을 지향했던 ‘한국교육개량안’을 수정하여, ‘보통교육을 통해 일본어로 말하고, 듣고, 읽고, 쓸 줄 아는 식민지인을 양성’하는, 즉 ‘동화주의’를 지향하며 고등교육을 철저히 배제한 ‘우민화 교육’을 실시하고자 했다. 註48)

통감부는 보통학교 체제로 이행하기 위한 준비를 하면서, 학교령을 제정·공포했다. 학교령은 학부 중진이라 할 수 있는 한국인 국장 이하 참서관·주사급들의 참석을 배제한 채, 참여관실의 일본관리들에 의해서만 입안되었다. 한국의 입장을 고려한 것이 아니라 본격적인 식민지교육체제로 넘어가려는 일본의 의도가 여실히 드러나 대한제국시기의 교육체제를 전면 부정하고 새롭게 동화교육을 위한 제도를 마련하였다. 註49)

식민교육정책의 책임자로 막중한 권한이 주어진 표손일은 1906년 4~5월경 기존 학정참여실에서 근무하던 일본인들을 모두 경질하고 광전직삼랑廣田直三郞·전중현황田中玄黃·소빈언치小彬彦治·산구일랑山口一郞 등 새로운 인물들을 기용하였다. 註50) 같은 해 8월경 표손일은 이들과 함께 식민정책에 맞는 사범학교령·고등학교령·외국어학교령·보통학교령 등의 학교령을 만들고 이와 관련된 시행규칙 등을 공포하였다. 학교령의 기본적인 원칙은 폐원탄이 작성한 ‘한국교육개량안’에 따른 것으로, 한국 학제를 ‘번욕繁縟’하다며 이를 ‘비근卑近’하게 만든 것이었다. 즉 소학교의 수업연한이 보통과 3년 고등과 2~3년으로 되어 있던 것을 4년제로 단축시켜 보통학교로, 중학교의 경우에는 심상과 4년, 고등과 3년제로 운영되던 것을 4년제의 고등학교로 변질시켰다. 이는 일본의 15년제와 비교하면 한국은 8년제로 그 절반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학제는 1911년 8월 조선교육령으로 이어졌다.

교육 목적 또한 이전과 달라졌다. 보통학교의 교육 목적을 식민정책에 순응하는 식민지인을 만들기 위해 도덕교육을 강화하는 한편, 보통교육을 의미하는 국민교육의 실시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일상생활에 필요한 보통지식과 기예技藝 즉 테크닉을 배우도록 하였다. 고등학교의 교육 목적 또한 차이를 드러냈다. 고등학교에서는 “남자에게 필요한 고등보통교육을 시施”한다고 하여, 취업이나 실용과는 관계가 없이 단지 보통교육의 다음 단계의 교육이라는 뜻만을 담고 있어 사실상 한국 교육의 최종 단계임을 보여준다.

통감부는 2학기제로 운영되던 것을 일본과 같이 3학기제로 바꿨다. 즉 제1학기는 4월 1일부터 8월 31일까지, 제2학기는 9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제3학기 1월 1일부터 3월 31일까지였다. 통감부가 1906년 8월에 학교령을 공포한 것은 2학기가 시작하는 시점에 맞추었다. 고등학교 입학 연령을 17세 이상 25세 이하에서, 이를 낮춰 12세 이상 보통학교 졸업자를 대상으로 학생을 선발하였다. 보통학교의 입학 연령 또한 만7세~만15세까지로 되어 있던 것을 만8세~만12세로 대상 폭을 좁혔다. 사범학교·외국어학교 등 중등학교의 경우는 다 마찬가지였지만, 신체검사를 실시하여 학생을 선발하였다.

통감부는 학생들을 관공립학교로 끌어들이기 위해 여러 방안을 모색하였다. 보통학교의 수업료를 면제시키는 대신에 자퇴를 못하도록 하였다. 당시 주된 산업이 농업이었던 관계로 학부모들은 노동력이 절실한 때에 수업료까지 납부해가며 자식을 교육시킬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으며, 공립학교보다는 사립학교를 선호하였기 때문이다. 중등학교 이상에서는 ‘졸업 전에 타 학교로 전학하는 자’에 대해서 퇴학시키도록 하였다. 이는 외국어학교도 마찬가지였는데, 입학생들에게는 관립학교였기 때문에 모든 숙식뿐만 아니라 일정금의 학비를 지원해주는 상황이었음에도 학생들이 중도에 그만두는 사례가 속출하였기 때문이다. 다만 졸업 후 진로가 확실하였던 한성사범학교의 경우는 예외였다. 註51) 이러한 대응책으로 통감부는 중등학생들을 제도권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교원 자격을 관공립사범학교 졸업자뿐 만 아니라 보통학교 교원과 부교원 검정시험에 합격한 자에게도 자격증을 주었다. 특별한 사정이 있을 때에는 허장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도 부교원의 대판代辦교원으로 임명할 수 있도록 하였다.

통감부는 학교의 교무와 학생의 감독권을 가지고 있던 교장 임무를 더욱 확대시켜 학교장에게 학과목을 가제加除할 수 있는 교무 책임을 주었으며, 소속 직원을 감독할 뿐만 아니라 교육상에 필요한 때에는 학생에 대해 징계를 내리거나 퇴학시킬 수 있도록 하는 권한을 부여하였다. 그뒤 1908년 1월 학교령을 개정하여 교감제를 신설하고 일본인 교감을 임명하였는데, 교감은 학교장을 보좌하며 학교장이 사고가 있을 때 그 직무를 대변하고 또 학생의 교육을 담당하도록 하여, 통감부는 교감으로서 학교 행정을 장악하여 식민지교육을 일선에서 펼쳐나가도록 했다.

결국 학교령은 한국의 입장을 고려한 것이 아니라 본격적인 식민지교육체제로 넘어가려는 일본의 의도가 여실히 드러나는 부분이다. 또한 통감부는 기존 대한제국시기의 교육체제를 전면 부정하고 새롭게 동화교육을 위한 제도를 마련한 것이기도 하였다.


2. 관공립학교의 식민교육 추진


1) 보통학교의 ‘모범교육’ 실시

통감부가 설치 직후 식민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내세운 구호가 이른바 ‘모범교육’이었다. 통감부는 ‘모범교육’의 개념과 목적에 대해서,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증진시키기 위한 교육의 근본을 세우고 스스로 솔선 경영해서 교육의 모범을 제시하며, 교수·훈련·관리에서부터 교사校舍와 기타 설비에 이르기까지 부족함이 없도록 하여 진정한 교육이 어떤 것인가를 사실로 증명하여 개혁의 기운을 유치” 註52)하는 것이라 밝혔다. 한국에서 신교육을 실시하고 있지만, ‘아직도 볼만한 성과’가 적고 ‘헛되게 많은 학과를 나열’하여 실제로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고 더욱이 사립학교는 ‘교육의 본지와 상반되는 교양을 가르치고도 전혀 반성하지 않은 상태’에 빠져있다며 ‘모범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註53) 하지만 이는 기존 학제와 차별을 부각시켜 식민교육기관인 보통학교·고등학교의 설치를 정당화하고 식민교육정책의 명분을 부여하고자 한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통감부는 관공립학교에 대한 ‘완전한 설비, 유용한 교재, 일본인 교사 배치’ 등을 통해 ‘모범교육’을 실현시키고자 했다. 먼저 이등박문은 1906년 8월 학교령 공포 이전부터 보통학교 설치에 중점을 두었다. 임시학사확장비 50만원으로 관립학교인 농상공학교·중학교·한성사범학교를 비롯하여 각종 외국어학교의 개조비 또는 기계器械·기구器具 등을 구입하고, 나머지는 지방공립학교 건설에 충당하였다.

통감부는 지방 보통학교 설립을 위해 시학관을 각 지방에 파견했다. 시학관제는 1905년 4월경 검토되다가 註54) 1906년 4월 통감부가 들어서면서 신설되었다. 시학관들은 학부 참서관이 담당하던 학사시찰, 학교 검열 혹은 한성사범학교 속성과 교과 사무 관장, 학교분쟁 조정 등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뒤 1906년 7월 ‘시학관 규칙’이 반포되면서, 시학관의 임무가 확대되었다. 註55) 특히 시학관들은 13개 관찰도에 우선 보통학교를 설치를 목적으로 각지에 파견되었다. 이를 근거로 통감부는 임시학사확장비로 13개 지방관찰도 소재지의 각 소학교의 건물을 신·개축하였다. 註56)

한편 통감부는 설치 직후에 학교령 공포 이전부터 교원 양성에 관심을 기울였다. 한성사범학교에 속성과를 설치하여 빠른 시일 내에 교원을 양성하고자, 1906년 5월경에 3개월 과정의 ‘관립한성사범학교교원 임시양성과 규칙’을 마련하고, 18~30세를 대상으로 학생 50명을 모집했다. 註57) 일어시험만으로 37명을 선발하였는데, 대부분 관립일어학교·경성학당·사립일어학교 등의 졸업자들이었다. 이는 보통학교에 일본인 교원을 배치할 계획에 따른 통역 교원의 필요에 의해 일어에 능숙한 학생들을 선발한 것으로 보인다.

1906년 9월 임시교원양성과 졸업생 31명 가운데 18명이 보통학교령에 따라 설치된 관·공립보통학교 부교원으로 임명되었다. 註58) 이들은 통감부가 1차적으로 임시학사확장비로 새롭게 신·증축된 관립 4개교와 한성부를 포함한 각 관찰도에 설치된 14개교의 지방학교에 임명되었는데, 이들은 일본인 교원의 통역을 담당하였다. 일본인 교원들은 통감부 설치 직후 중등 정도의 학교에는 1개교에 수 명씩, 보통학교에는 1개교에 1명씩 일본인 교원을 임명하고자 했다. 註59) 통감부가 본격적으로 일본인 교원을 임명하기 시작한 것은 1906년 7월 학부 촉탁 표손일俵孫一에 의해서였다. 그는 서울지역 내 각 관립소학교에 일본인 교원 1명씩을 배치하기 위해 일본인 교원 10명을 고빙하기로 하고, 우선 서울에 있던 대산일부大山一夫·서산웅조西山熊助·굴종차랑堀宗次郞 등을 관립소학교 교사로 임명하였다. 이어 공립보통학교 설치가 마무리되는 1906년 8월까지 각 관립보통학교에 일본인 교원을 1명씩 배치하기 위해, 20여 명을 추가로 고빙하였다. 註60) 당시 신청자가 쇄도하여 수백 명에 달할 정도로 일본인 교원들에게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다만 통감부는 일본인 교원의 자질 문제로 한국인들로부터 빈축을 사는 경우가 종종 일어났기 때문에 우수한 일본인 교원을 직접 선발하였다. 일본인 교원들은 일본에서 소학교 교장·시학·훈도였으며, 대부분 출신지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통감부는 일본인 교사를 주축으로 하는 ‘간이하고 실용에 적합한 교육’을 표방하는 통감부의 식민교육정책을 일선에서 실현시켜 나가도록 하였다. 註61) 일본인 교원들은 각 관·공립보통학교에서 한국인 교원의 통역을 통해 일본어·이과·산술 등을 가르쳤다.

통감부는 1차 보통학교 설치가 완료되자 2차 확장계획을 추진하였다. 1906년 11월 통감부는 3개월 과정의 제2회 한성사범학교 교원 임시양성과를 개설하고 50명을 선발했다. 통감부는 1907년 4월 28개교의 공립보통학교를 설치하고, 임시양성과 졸업생 30명 가운데 26명을 관·공립보통학교 부교원으로 임명하였다. 註62) 당시 공립보통학교가 설치된 곳은 마산·군산·목포·인천·진남포·원산 등 이사청이 설립된 지역이 포함되었다. 일본인 교원은 28명이 임명되었는데, 1906년과는 달리 학교장 출신이 많아졌다. 이는 교육뿐만 아니라 학교행정 경험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이등박문은 일본인 교원들에게 한국의 풍속을 최대한 인정하고 따를 것을 충고하면서, 미개한 한국을 보통교육을 통해 문명국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심어주며 절대로 정치에 관여하여 분란을 일으키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註63) 이는 전국 각지에서 의병 활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상황에서 반일 감정을 자극하지 말고 오로지 교육에만 전념하도록 한 것이다. 또한 한국어를 가능한 빨리 익혀 한국인들과의 거리를 좁힐 것을 주문하기도 하였다.

통감부는 임시학사확장비를 통한 보통학교의 설립과 함께 일본인 교감을 임명하여 마무리 한 뒤, 3차로 보통학교를 확장시켜 나가고자 했다. 1907년 12월 시학관 제도가 폐지되었기 때문에 학부서기관·사무관 등에게 설립 지역을 선정한 뒤에 1908년 4월경 강화·여주·온양·통영·밀양·고부·영암·선천 등 8곳으로 최종 확정하고, 평양에는 1개교를 증설하지 않고 현재 학교를 확장하기로 했다. 註64) 통감부는 이들 학교에 관립한성사범학교 본과 제9회와 임시교원 양성과 제3회 졸업 우등생들을 본과 훈도와 부훈도로 임명했다. 그리고 일본인 교원을 응시자 200여 명 중에서, 8명을 선발·임용하여 교감을 겸임토록 했다. 註65)

그 결과 1908년까지 50여 개의 관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었다. 예산은 임시학사확장비 사업 예산 53만 9천여 원의 약 74%에 이르렀다. 註66) 3차에 걸쳐 확장비를 통한 공립보통학교 설치가 일단 마무리된 이후에도 계속해서 보통학교를 설립하였다.


2) 보통학교용 교과서 편찬

1905년 6월 당시 폐원탄의 주도하에 소학교용 일본어 교과서 『일어독본』 편찬에 착수했다. 하지만 한국 내에서의 거센 반발로 별다른 진척을 보지 못하였다. 1906년 2월경에 겨우 『한일회화독본韓日會話讀本』과 『보통독본普通讀本』을 완성했을 뿐이었다. 註67) 1906년 6월경 폐원탄이 경질되고 동경고등사범학교 교수로 재직 중인 삼토충조三土忠造가 보통학교용 교과서 간행을 책임지게 되었다. 이후 관립일어학교 교사인 전중현황, 동경부東京府 시학視學으로 있던 소삼언치, 『한국견문록』을 저술한 송궁춘일랑松宮春一郞, 등을 사무관으로 임명했다. 1905년 7월부터 참여관실의 통역관으로 재직하던 상촌정기上村正己는 유임되었다. 註68) 이외에 광전직삼랑이 촉탁으로 임명되어 교과서 편찬을 담당할 참여관실이 새로운 인물들로 채워졌다.

삼토충조는 보통학교용 『일어독본』 1권의 편찬을 서둘러 신학기가 시작되는 1906년 9월에 가철假綴하여 겨우 배포하였다. 註69) 『일어독본』은 11월에 전 4권을 완성했고, 1907년 3월부터 본격적으로 배포하였다. 『일어독본』은 한국에서는 인쇄비가 너무 비싸 일본에 있는 대일본도서주식회사에서 인쇄하였다. 註70) 『일어독본』은 정교하고 미려한 삽화를 넣어 학습자의 흥미를 이끌고자 하였고, 외국어로서 일어를 일본 문화와 함께 쉽고 빠르고 정확하게 습득하도록 일상생활에서 흔히 사용되는 단어·절·문장으로 이야기를 구성하였다. 이야기는 일상생활·자연과학·새로운 문명·날씨 등의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보통학교 학도용 수신서』는 1907년 2월 학부에서 직접 편찬·발간한 것으로 총 4권 4책으로 국한문 혼용체를 사용했다. 철저한 개인처신·가정생활·사회생활을 주제로 단원이 구성되어 개인중심의 수신, 사회생활의 준법정신을 강조하고 있어 체제에 순응하는 식민지형 인간 양성을 목적에 두었다. 『보통학교용 국어독본』은 학부에서 편찬한 1907년 8월 4책으로 되어있다. 한국지도 속의 동해를 일본해라고 표기했으며,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을 다뤄 왜곡된 역사관을 심어주고자 했다.

이완용내각이 출범하면서 1907년 5월 학부대신에 취임하게 된 이재곤李載崑은 교과서 편찬과 교육확장에 주력했다. 이재곤은 보통학교용 교과서 편찬이 어느 정도 이뤄지자, 이를 널리 보급하기 위해 판매발매규정을 만들었다. 註71) 공립보통학교 혹은 사립학교에서 학부 편찬보통학교교과용 도서를 학생들에게 사용토록 하고자 하면 학부에 청원하여 인가를 받도록 했다. 이는 보통학교용 도서를 우선적으로 공립학교에 배포하기 위해 인가 규정을 두어 사립학교의 인가신청에 제한을 두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판매도서는 『국어독본』 1~4, 『일어독본』 1~4권, 『한문독본』 1~2권, 『수신서』 1~2권, 『도서임본圖書臨本』 1-2권 등 5종이었다. 註72) 하지만 보통학교 교과과정이 수신·국어·한문·일어·산술·지리역사·이과·도화圖畵·체조·수예·창가 등이었기 때문에, 산술·지리역사·이과·체조·수예·창가 등의 교과서는 아직 편찬되지 않았으며, 아직 3~4학년용 교과서는 편찬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 결과 1907년 6월 당시 1~2학년 학생들이 사용할 교과서 1만부를 인쇄하여 보급할 수 있었지만, 3~4학년용 교과서가 준비되어 있지 않아 2학년용 교과서를 사용해야만 했다.

보통학교의 교과목에 역사·지리과목이 있었지만 이를 편찬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한국인들의 반발이 적지 않자 삼토충조는 1908년 6월 관립보통학교 직원회의에서 보통학교 교과목을 과다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변명하였다. 註73) 실제 보통학교 교과목에 역사·지리 과목이 들어있었지만, 교수 시수를 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육은 이뤄지지 않았다.


3) 중등교육기관의 재편


(1) 고등학교

통감부는 ‘중학교는 수업 연한 7년을 심상 4년 고등 3년으로 나누고 고등학교라 칭하도록 한다’는 ‘한국교육개량안’에 따라서 통감부는 1906년 8월 27일 4년 과정의 ‘고등학교령’을 공포하여 기존 중학교를 폐지시켰다. 고등학교령에서는 ‘남자에 필요한 고등보통교육을 실시하고자 한다’고 규정하여, 내용상으로는 보통학교의 다음 단계이지만 중학교의 아래에 두되 최종 단계의 학교로 만들고자 한 것이다.

통감부는 고등학교와 같은 중등교육기관의 설립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모범교육’은 ‘간이와 실용’을 기본으로 했기에 통감부가 가장 중시했던 보통학교에 있어서도 ‘선량하고 실용적인 인간을 양성하는’ 데에 그 목표가 있었으며, “졸업생은 자기 부모와 같이 가업에 종사하거나 혹은 사회에 진출하여 실무에 종사하는” 것이 ‘본분’이었다. 때문에 식민지 권력이 보통학교 졸업생의 상급학교 진학에 대해 소극적 태도를 취했음을 알 수 있다. 통감부는 실제로 “극히 실용적인 고등교육을 실시할” 학교를 몇 개 설립했을 뿐이라며, 초등교육의 확장에만 중점을 두고 ‘고등교육’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거나 오히려 그 발전을 억제하는 정책을 취했다.

1907년 7월 두번째 교육확장계획은 중학교과 각종 특별학교 설립이었지만, 이등박문은 보통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을 중학교 설립으로 견고하게 하기 힘들 것이라며, 보통학교를 확장하는데 주력할 것을 지시했다. 당시 이재곤 학부대신이 평양과 대구에 중학교를 설치하는 문제를 제시했지만 이등박문은 이를 반대했다. 이등박문은 ‘보통교육에 있는 것이지 겨우 근소한 학자를 양성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독서를 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자를 많이 양산하는 것이다’라며 고등교육보다는 보통교육에 치중할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고등학교 확장은 이뤄지지 못했다. 다만, 1909년경에 평양일어학교가 평양고등학교로 재편되어 2개로 늘어났지만, 전체 보통학교 학생 수에 비하면 매우 적은 수였으며 그나마 1911년까지 고등학교는 더 이상 설립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은 각종 실업학교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2) 수원농림학교

이등박문은 1906년 4월 한국정부가 3,980환 34전의 예산을 들여 추진하고자 했던 농상공학교 시험장 건설을 중지토록 하고, 그 대신 60여 만원으로 수원에 권업모범장 설치를 지시했다. 한국정부의 주도로 농사시험장이 설치되면 한국의 농업기술체계가 발전할 것이고, 그 결과 일본이 의도하는 식량공급지로서 기능을 상실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註74)

통감부는 1906년 7월 농상공부 관제를 개정하여, 3등국으로 농업·산림·수산·목축·수렵과 잠업 및 상다桑茶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던 농광국農礦局을 농무국과 광무국과 분리하여 상무국과 함께 2등국으로 승급시켰다. 농무국은 농업과와 식산과로 나뉘었는데, 농업과에서는 농업과 농업상 토목에 관한 사항, 농산물의 충해예방 및 구제驅除와 기타 농산물에 관계한 일체 손해예방에 관한 업무를 담당토록 했다. 농무農務의 개량 발달을 위해 매주 수요일에 농상공부대신이 주재하는 농사강의회農事講義會가 개최되었다. 註75) 또한 농사개량을 연구·보급하는 종묘소1908.10·잠업시험장1906.3·면화재배채종圃1906.9·원예모범장1907.3·삼림모범장1908.3·임업사무소1908.4·잠업강습소1908.7 등도 설립되었다.

이등박문 지시에 따라 수원에 총 면적 87여 정보를 사들인 뒤, 1906년 10월 정리사업 설계를 마치고, 11월 2일 공사에 착수하여, 1907년 5월 15일에 총 경비 16만원을 들여 수원 서둔리西屯里에 권업모범장 설치를 완료하였다. 註76) 이등박문이 권업모범장을 설치하고자 한 것은 양잠·과물果物·미맥米麥·면화 등의 농법을 개량하여, 이를 모범으로 삼고 또 일본에서 농업조사차 내한하는 자본가 혹은 실업가에 소개할 방침이었다. 즉 권업모범장은 단지 한국 척식의 기초자료를 제공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설립된 것이다. 당시 일제는 일본 자본과 농민이 주체가 되어 다로다비적多勞多肥的인 일본의 명치농법을 이식 보급하여 한국농업을 장악·지배하려는 목적하에 ‘한국농업개발론’을 내세우며 이에 대한 타당성과 방법론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식방법으로 하나는 지주제에 기초한 대규모 농장을 설립하여 한국농민을 직접 장악하여 일본 농법을 적응 이식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 농민을 직접 이주시켜 이들을 통해 농법을 이식시키는 것이었다. 註77)


수원농림학교 학원모집 광고(1908.3.1)

식민농업정책은 1898년부터 1904년까지 총 4차례에 걸쳐 한국 농업실태를 조사한 가등말랑加藤末郞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가등말랑은 한국인 소작농에 의한 대규모 농업척식론을 펼치며, 소수 일본인을 10~30정보마다 1~2명 비율로 배치하여 경지 관리인으로 삼고, 이들이 소작인을 직접 장악학고 교류시켜, 농장 내에 ‘일한동맹日韓同盟’을 형성시켜 상호이익을 도모토록 하고, 일본식의 집약적 농법을 보급시키기 위해 농업모범장을 설치하고, 농업학교를 설립하여 농업교육을 강화할 것 등을 제기하였던 것이다. 註78)

통감부는 농사시험장이 준공된 이후, 학부 소관의 농상공학교의 농업과와 별도로 농림업에 필요한 교육을 시행할 목적으로 1906년 8월 27일 농상공부 소관의 농림학교 관제를 공포하여, 교장 1명, 교수 5명, 사감 1명, 교수보 2명, 서기 3명을 두도록 했다. 註79) 교장은 농무국장이 겸임토록 하고 사무는 당분간 농상공학교 직원 중에 혹은 일본 학술가를 초빙하여 임시 대리토록 했다.

1906년 9월 10일 농림학교규칙을 공포했다. 註80) 이에 따르면 본과와 연구과를 설치하는 본과는 2개년으로 연구과는 1년 과정으로 본과 졸업생 가운데 농학 혹은 임학을 전문으로 하고자 할 때 진학하도록 했다. 그리고 시의에 따라 1년 과정의 속성과를 둘 수 있도록 했다. 정원은 본과 40명으로 정하였지만, 속성과는 제한을 두지 않았다. 입학지원자는 15세 이상 30세 이하인 자로, 신체강건하며 품행이 단정한 자, 재학 중 가사家事에 관계가 없는 자로 지원자격을 두었지만, 학력과는 무관했다. 학과 과정과 매주일 교수시간은 1학년의 경우 24시간을 배정했다. 국어 과목은 개설되지 않은 반면에 일어과목이 주당 1학년은 6시간25%, 2학년은 4시간16%을 배우도록 하였다.

1906년 9월 통감부는 먼저 임학 속성과 학생 10명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관보에 게재하여 9월 24일, 농상공부 농무국장 서병숙徐丙肅에게 농림학교장을 겸임토록 했다. 그뒤 10월 1일에 통감부는 기존 학부 소관의 농상공학교의 농업과를 폐지시키는 한편, 농업과를 담당했던 적벽차랑赤壁次郞을 해고했다. 이에 농상공학교 농학과에 재학 중이던 학생들과 경성학당학생을 대상으로 농림학교에 입학시켰다. 註81)

1907년 1월 8일 농림학교는 수원군 서둔西屯 새로운 교사로 이전했다. 1907년 4월 농상공부 농무국장 정진홍鄭鎭弘이 농림학교장을 맡게 되었다. 정진홍이 농림학교장에 임명된 것은 일본에서 1897년 4월 신나천현神奈川縣 농상무성제염시험장農商務省製鹽試驗場에서 6개월 동안 견습하였고, 1900년부터 1905년까지 일본의 농공상실업을 시찰한 경험에서, 1906년 9월 권업모범장 촉탁에 기용되었고, 1907년 3월에는 농상공부 농무국장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註82)

1907년 3월 농림학교 임학 속성과 출신 12명이 배출되었다. 註83) 이들은 같은 해 4월 농상공부 임업과 임업수林業手로 수원수묘양성소水原樹苗養成所에서 근무한 뒤, 6월에 농상공부 기수로 임명되었다. 1907년 5월 농림학교는 임학 속성과 학생 12명을 모집하였다. 1907년 8월에 관립일어학교 출신 한정교韓廷敎를 농림학교 교수 겸 농림학교 사감司監에 임명했다. 註84)

1907년 12월 30일 농림학교관제를 개정하여, 교장은 농림국장이 겸임하도록 한 규정과 당분간은 본교 직원 중 혹은 일본국 학술가로 초빙하여 사무를 임시 담당하도록 규정을 삭제했다. 그리고 차관제 실시 이후 1908년 1월 1일자로 권업모범장 기감技監본전행개本田幸介에게 농림학교장을 겸임토록 하고, 권업모범장 기사 궁원충정宮原忠正·풍영진리豊永眞里 등을 농림학교 교수로 임명했다. 註85) 그 결과 권업모범장뿐만 아니라 농림학교가 완전히 일본인의 수중에 들어갔다. 

1908년 4월 1일 농림학교는 본과 학생 40명과 새롭게 수의獸醫 속성과 학생 20명을 모집하였으며, 그 전형은 만 15세 이상 30세 이하인 자에 한해, 경성외국어학교에서 일어·수학·한문 등의 시험을 실시하여 신체검사와 더불어 학생을 선발하였다. 註86) 합격한 학생들에 대해서는 매월 6원씩을 지급했다.

한편 1908년 4월 농림학교 본과 26명, 속성과 7명의 졸업생 가운데 본과생은 기수로 서임하여 목포·함흥·진주·군산·함창·평양·해주·영변·공주 등지의 농림모범장에 각 1명씩 보내고, 권업모범장에 2명, 농림학교에 1명, 농상공부 삼림국에 1명 파송하였고, 속성과 졸업생은 평양에 3명, 대구에 3명, 서울에 12명을 배당하였다. 1909년 3월 농림학교가 입학생을 본과 40명, 속성과 40명 총 80명을 선발할 때 142명이 지원하는 양상을 보였다. 註87)


(3) 공업전습소

1906년 통감부는 학부소관인 농상공부학교를 폐지하는 대신, 농상공부 소관의 농림학교와 공업전습소를 설치하고자 했다. 이등박문은 1906년 8월 농상공부 소관의 농림학교를 설치와 더불어 한국의 공업 고문으로 임명된 공학박사 평하의질平賀義美로 하여금 공업전습소안을 마련하도록 지시했다. 학교 부지로 이화동 낙산으로 정하고, 1906년 10월 서울 동서東署 이화동梨花洞에 기공하였다. 註88)

1906년 8월 감독주임 1명, 소장전임주임 1명, 기사전임주임 6명, 기수전임판임 20명, 사감주임 혹 판임 1명, 서기판임 3명을 두고자 했으나, 이에 임명된 직원들은 대개 일본인들로 채워졌다. 농상공부는 공업전습소에 고빙하는 일본인 5명의 여비·봉급·가사료조家舍料條로 1,723원을 탁지부에 청구했다. 실제 1906년 11월 발표된 1907년도 세출 예산표를 보면, 공업전습소 예산으로 30,170환이 책정되었는데, 세부적으로는 청비廳費 6,340환, 수리비 150환, 잡급 및 잡비 8,880환, 외국인 제급諸給 14,800환 등으로 대부분 일본인 교관들의 인건비로 책정되었다. 註89)

이들 일본인 교원들은 한국 공업의 전반적인 실태를 조사하여 이를 발표하거나, 각종 잡지에 글을 게재하여 통감부의 식민 공업정책을 펴나가는 데 일조했다. 대부분은 면직물을 비롯하여 제지·도자기·견직물·금속품 등 당시 한국 내의 공업 분야 대부분을 망라한 것이었다. 註90) 공업전습소는 일본인에 의해 운영되었고, 이를 통해 일제의 식민지 경영을 위한 기능인이 양성될 뿐이었다. 다만 공업전습소에는 몇몇 한인 기술자들도 있었다. 동경공업학교에 유학하여 방직기술을 배워 온 안형중安衡中은 1895년 3월 관비유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가 동경 경응의숙慶應義塾에서 1년여간 수학한 뒤, 1896년 9월 동경고등공업학교東京高等工業學校에 입학하여 2년여 동안 염직 기술을 배운 뒤, 귀국하여 1904년 7월 농상공학교 교관에 임명되었으며, 1907년 3월 공업전습소 기사로 전임되었다. 註91) 1907년 3월 공업전습소 기수로는 강재형姜在衡·홍종국洪鍾國 등이 임명되었다. 강재형은 1904년 1월 광성학교光成學校에 입학하여 일어·미술·부기·이화학·광물학·염색 등을 배운 뒤, 1907년 1월 졸업하고 같은 해 1907년 3월 공업전습소 기수로 임명되었다. 註92) 홍종국은 1904년 1월 공주사립일어학교을 거쳐, 같은 해 3월 광성실업학교이 입학하여 3년여 뒤인 1906년 12월 광성실업학교를 졸업한 뒤, 1907년 3월 관립공업전습소 기수로 임명되었다. 註93)

농림학교보다 다소 늦은 1907년 2월 1일 농상공부소관 공업전습소 관제가 공포되었다. 註94) 이에 따라 4년 과정이었던 학부 소관의 농상공학교 공업과는 농상공부 소관의 2년 과정의 공업전습소로 바뀌게 되었다. 직원은 감독공무국장 겸임 1명, 소장 전임주임 1명 그리고 학생들을 가르칠 기사전임주임 6명, 기수전임주임 20명, 학생들을 감독할 사감판임 1명, 서기주임 혹 판임 3명 등 총 31명사감은 기사·기수·서기가 겸임이나 되었다.

통감부는 1907년 공업전습소의 설치 무렵 농상공학교 공업과를 흡수한 뒤, 1907년 3월 22일 농상공학교 관제를 폐지시켜 버렸다. 註95) 공업과의 기기와 물품 모두 공업전습소로 이관되었으며, 예과 졸업식도 치러지지 않았으며 상공학교 교장이 해임되었다.

통감부가 이렇듯 격을 낮춰 전습소로 만든 것은 “정부의 지도하에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공산품을 골라 한국 자제로 하여금 그 제조법을 전습시키고 또 공업상 필수한 학술 및 응용의 초보를 교수”한다고 밝힌 바대로, 간단한 공산품 제조법을 가르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1907년 3월 1일 공포된 공업전습소 규칙에 따르면, 註96) 설치과는 근대공업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할 기계·전기 등의 과목은 제외되고, 염직색염·기직·도기陶器·磁器·금공金工·鑄工·鍛工·板金細工·목공造家·家具·응용화학應用化學, 화학제품분석·토목土木·측량·제도 등 6개 과목이 개설되었고, 보조 학과목으로 물리·화학·수학·도서 이외에 일어와 간이 영어가 포함되었을 뿐이다. 입학자격은 15세 이상 25세 이하의 공업가의 자제 또는 장래 공업의 종사할 자와 공업에 관한 직무에 종사하기를 지망이 확고한 남자를 대상으로 했다하지만, 전통 수공업적인 기술을 배우는 수준에 불과했다.

통감부는 한국의 근대공업 발전을 도모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즉 염색과는 염색을 장려하여 한국의 흰 복색을 고치고자 한 것이었으며, 도기과는 한국인이 즐겨 쓰는 도자기 공업을 일으키고 그 기초상식을 가르쳐 그들의 사역인으로 양성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금공과는 철공·단공 등의 기술을 가르쳐 농구제작 수리의 기초 상식을 전수하려는 것이었다. 또 목공과는 가구 제작 기술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으며, 토목과는 측량술을 가르쳐 토지조사사업에 필요한 하역인을 양성하기 위한 것일 뿐이었다. 통감부가 공업전습소 교육을 전담하는 학부보다는 농상공부 소관으로 둔 것은 식민통치에 필요한 교통 및 통신 분야에서 이러한 기능인을 양성해내려는 것으로써, 이는 결국 가내공업 수준의 전습소에 불과한 것이었다.

공업전습소는 1907년 3월 25일 준공에 맞춰 『관보』에 학생모집 광고를 게재하였는데, 註97) 이에 따르면 4월 1일에 50명을 선발키로 하고 다음과 같은 지원 조건을 제시했다. 첫째, 공업가 자제와 또는 장래 공업에 종사하거나 공업에 관한 직무에 종사할 뜻이 굳은 남자여야 하며 둘째, 품행이 방정하고 신체 강건한 자이어야 하며 셋째, 연령은 만 15세 이상 25세 이하로 한정했다. 시험은 국한문·일어·산술쉬운 가감승제 등으로 평가했다. 이때 실시된 제1회 입학시험에 1,200여 명이 지원할 정도로 관심이 뜨거웠다. 지원자들 가운데는 중학교 출신 15명, 관공립보통학교 출신 9명이 있었으며 그외 사립학교나 각종학교 출신자들이 지원했다. 註98) 학과 중에는 염직과 지원율이 가장 높았고 그 다음으로는 금공과와 응용화학과 지원율이 높게 나타났다.

1907년 4월 20일 개소식을 가졌는데, 소장은 일본 고등공업학교 출신인 야전충장野田忠藏을 빙용하였고, 그외 기사·기수·서기 등도 일본에서 초빙하기로 결정되었다. 4월 29일에 신입생 74명으로 수업이 시작되었다. 註99) 당시 학생들은 실습대가로 월 6원 정도의 수당을 지급받았는데, 이는 기숙사비 3원 45전을 제하고 남을 정도로 적지 않은 액수였다. 입학생들은 전원 기숙사에 입소하여 단체생활을 하였고 일본식으로 식사를 했으며, 註100) 기숙사는 온돌식으로 1실에 6명씩 모두 24개의 실室이 있었다.

1908년부터는 1년 과정의 전공과를 설치하여 본과 재학생 가운데 5명을 전공과 학생으로 선발했다. 註101) 이들은 특정한 기술을 더 배우는 한편, 관련 분야의 조사 및 시험활동에도 참여하는 등 일본인 기술자들을 보조하였다. 공통과목 가운데 일본어의 시수가 가장 많아 2년간 배웠으나, 교과목에서 가장 기초 과목이었던 산술·물리·화학 등은 1년 동안, 도화와 영어는 1학기 정도 수학하는 정도였다. 일본어를 제외한 나머지 과목들은 아주 초보적인 수준에 그치고 말았다. 교과 내용은 일본 수공기술을 중심으로 이뤄졌으며, 한국의 몇몇 특정한 재래기술을 포함시켰는데, 이는 공업 기술의 전수와 개발로 일제와 경쟁관계로 되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다. 註102)

한편 일제의 이러한 의도와는 달리 1908년 10월 공업전습소의 이화理化·염직染織·금공金工·목공木工·자기 등 5개과 재학생들은 주·야로 열심히 연구하면서, 공업연구회를 조직하고 매삭 2번씩 토론회를 개최하여 서로간의 지식을 교환하고 수당금에서 50전식 갹출하여 잡지를 발간하여 국민들로 하여금 공업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자 했다. 註103)

1909년 4월 공업전습소를 졸업한 학생들의 현황을 살펴보면, 염직과 8명, 도기과 9명, 금공과 7명, 목공과 7명, 응용화학과 3명, 토목과 12명 등 46명이었다. 註104) 초기에는 염직과 지원 학생이 가장 많았지만, 통감부의 토지조사사업 발표 이후 토목과 출신자가 많아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통감부는 1910년 경술국치를 전후로 본과 졸업생들이 의무적으로 1년 동안 전수한 사업에 종사토록 한 규정을 어기고 공업에 종사하려는 것을 꺼리게 되었다. 이렇듯 규정을 어긴 자들에게 전습 중에 급여한 수당금을 전부 혹은 일부분을 상환토록 하는 규정이 있었지만 소용이 없었던 듯하다. 당시 통감부가 공업전습소를 만들고자 하였던 이유 중의 하나는 일본 유학비를 줄이는 대신에 그 예산으로 실기에 능한 기능인을 2~3년 이내에 길러내 식민통치를 위해 필요한 업무에 종사토록 하고자 한 것이었기 때문에, 註105) 공업전습소 졸업생들의 이러한 행태에 대책을 마련해야만 했다.


(4) 선린상업학교

선린상업학교 설립은 1906년 9월 일본인 기업가 대창희팔랑大倉喜八郞이 한국에 상업학교를 설립하고자 하면서 비롯되었다. 註106) 당시 대창희팔랑은 삼택영일澁澤榮一·성야덕일랑成野德一郞·일하의웅日下義雄 등과 함께 자본금 70만원으로 서울에 수력전기회사를 설립하고자 했을 뿐만 아니라, 20만원으로 1907년 4월 구 경성학당 부지에 대창상업학교大倉商業學校를 설립할 목표로 통감부와 교섭 중에 있었다. 그런데 1906년 10월경 이등박문이 대창희팔랑에게 학교명을 ‘선린’으로 이름을 바꿀 것을 제안하면서 선린상업학교 설립은 구체화되어 갔다. 그뒤 대창희팔랑은 이등박문에게 일본 궁내성이 소유하고 있는 채권 가운데 일부를 학교 설립에 지원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註107) 이등박문은 20만원을 알선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학교 부지를 내부대신에게 물색할 것을 지시할 정도로 매우 적극적이었다.

1907년 1월 대창희팔랑은 선린상업학교 설립 기본금 10만원을 제일은행에 불입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3월 대창희팔랑은 기본금 25만원을 모아 선린상업학교 설립 인가서를 제출하고, 통감부로부터 재단법인 선린상업학교로 정식 인가를 받았다. 註108) 이에 통감부는 3월 31일부로 서울 명동에 있는 관립농상공학교를 폐지시키고, 교사와 교구를 모두 선린상업학교에 넘겨주며 기타 경상비도 보조하기로 하였다. 이에 선린상업학교는 일본 애원현립愛媛縣立 송산상업학교松山商業學校 교장 본숙가전本宿家全을 교장으로 초빙하고 교칙 제정과 기타 제반 준비가 완료된 후 4월 중순경에 개교할 예정이었다. 당시 학생은 12세 이상 보통학교 졸업생과 이와 동등한 학력이 있는 자로 간단한 일어를 할 줄 아는 자를 대상으로 4월경에 일어·한문·산술간단한 사칙·본국지지 등의 시험을 거쳐 선발할 예정이었다. 합격자에게는 매월 학자금 5원을 지급하고자 했다. 1907년 4월 통감부는 2,908환을 보조하였다. 그리고 1907년 5월 선린상업학교에 협의원으로 석흑충덕石黑忠悳·민형식閔衡植·황철黃鐵·표손일俵孫一·유성준兪星濬·대창희팔랑大倉喜八郞·고도소금치高島小金治·대창인미마大倉人米馬·입화관장立花寬藏· 조진태趙鎭泰·산구병위山口兵衛 등이 선정되었는데 7월에 학무국장 윤치오尹致旿가 협의원에 추가되었다.

그런데 선린상업학교의 개교 일자는 정확한 기록이 없어 알 수는 없지만 1907년 10월 26일 실시된 추기대운동회에서 선린상업학교 학생 장철張喆이 수상한 것이나, 1909년 11월에 1·2회 졸업생 30여 명이 모여 선린동창회를 조직한 것을 보면, 註109) 1907년 4~5월경에 학생을 모집한 뒤 개교한 것이 아닌가 한다. 다만 송산상업학교 교장 본숙가전을 초빙하려는 것은 무산된 것으로 보인다. 『재조선내지인 신사명감』에 따르면 본숙가전은 1911년 3월 한국으로 건너와 선린상업학교장이 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10년 3월 선린상업학교 교장 시원성굉市原盛宏이 각 부부원청府部院廳에 졸업생들을 취지시키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 점으로 미루어 정확한 시점은 알 수는 없지만, 이전에 시원성굉이 교장직을 맡지 않았을까 한다.

선린상업학교는 통감부로부터 1907년도에 이어 1908년 1월에 2,280환을 보조를 받았다. 註110) 1908년 2월 학원모집광고를 게재하여, 50명을 선발하는 시험을 1908년 4월 1일에 치렀는데, 응시생이 300여 명에 달했다. 당시 선린상업학교에서는 수신·일어·산술·부기·상업요항·상업실천·상업지리·상품법률·경제 등이었으며, 상업가 자제 혹은 상업에 종사할 자를 대상으로 교육시키고자 한 것이다.

1908년 4월 선린상업학교가 전 육군위생원으로 이전하기로 결정한 뒤, 군부에서 나서서 그곳에 살고 있던 주민들을 내쫓아 냈다. 또한 1908년 6월 통감부는 학부 소관 토지 67평을 선린상업학교에 무상 기부하기도 했다. 그뒤 1908년 11월 28일에 학부대신 이재곤·대창희팔랑 등이 참석한 가운데 선린상업학교 개교식이 개최되었다. 註111) 1909년 4월에는 50명을 선발하기 위해 입학시험을 치렀다. 일어·한문·산술·내국지리 등의 시험과목을 이전과 비슷했지만, 지원 자격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았다.

1910년 1월 선린상업학교는 졸업기한을 2년에서 3년으로 늘리는 한편, 각 과목을 증설하였다. 이후 1910년 2월 선린상업학교는 통감부로부터 문관임용령에 의해 인정을 받아, 본과 출신자는 졸업과 동시에 판임관에 임명될 자격이 주어졌다. 註112) 이에 정원을 100% 증원하여 100명 모집하였으며, 아울러 2~3학년도 50명씩 증원하였다. 뿐만 아니라 지원 자격도 강화하여 시험자격을 보통학교 졸업자 혹은 이와 동등 학력을 가진 자로 제한했다. 이에 1910년 3월 통감부는 각 관공사립보통학교에 통지하여, 본년 춘기 졸업생에게 선린상업학교에 응시토록 하였다. 1910년 4월 선린상업학교 출신자 반 수 이상은 각 지방 농상공은행에 취직하였다.

선린상업학교에 대해 “대창희팔랑이 완전한 상업학교를 만든 것은, 단지 조선인이 장래 실업계에서 활약 가능한 소양을 몸소 익히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반 민중의 기풍을 이용후생의 방향으로 유도하는데, 그리고 대한정책에서도 매우 커다란 역할을 담당하였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라고 평가할 정도로 註113) 통감부뿐만 아니라 경술국치 이후에도 식민통치의 기간 역할을 담당하였다.


3. 사립학교 탄압


1) ‘사립학교령’과 사립학교 통제

사립학교가 설립되던 초기에 통감부는 문명개화론에 바탕을 두고 사립학교가 친일화에 도움이 되거나, 적어도 반일의 성향을 완화시켜 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통감부는 초기에 사립학교 설립을 엄격하게 금압하지 않았다. 또한 한국인들을 교육시키는데 국비나 지방비를 들이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사립학교의 설립이 방치된 측면도 있었다. 註114) 하지만 점차 사립학교가 ‘국권회복’을 내세우며, 당시 간행된 각종 신문 및 학회지에 게재된 50여 개의 사립학교설립취지서를 보면, 적어도 절반 이상이 ‘국권회복’을 내걸고 있었다. 註115) 이는 당시의 사립학교가 교육을 통한 국권회복의 담당자 역할을 수행해갔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1907년 7월 광무황제가 강제 폐위되고 이어 정미조약 체결, 군대해산 등으로 국망國亡의 위기에 처하면서 이를 극복하려는 움직임 속에 사립학교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설립되어 갔다. 군대 해산 이후 해산 군인들 가운데는 학교 교사로 나서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註116) 이들은 항일 투쟁 위주의 교육열을 더욱 격증시켜 전국에 가득하게 하는 바탕이 되었다. 근대교육운동은 국권회복운동과 결부되면서 그 한계성에도 불구하고 항일민족교육운동으로 발전되어 갔다. 그 결과 1908년에 이르러 사립학교 수는 4,000~5,000여 개에 이를 정도로 급증하여, 1908년 관공립학교 수가 50여 개였던 점을 감안하면, 80배 이상 차이가 나는 셈이다. 註117) 사립학교의 급증은 통감부로서도 식민통치에 위협적인 부담으로 작용하게 되었고 이를 통제할 조직과 제도를 만들고 명분을 찾아야만 했다.

통감부는 1908년 8월 “사립학교의 교육내용이 불비不備하고 그 조직이 불완전하여 호말毫末도 교육기관의 실질을 갖추지 못한 것이 있고 혹은 기초가 확고하지 못하여 조흥석폐朝興夕廢하는 학교가 적지 않은데 이를 방임할 경우 유폐流弊의 파급이 가늠키 어렵다” 註118)는 이유를 내세워 ‘사립학교령’을 공포하였다. ‘사립학교령’을 통해 통감부의 뜻에 맞지 않는 학교를 없애고 교원과 교과용 도서에 대한 통제를 강화함으로써 반일 사상을 근절시키고자 한 것이다. 註119)

사립학교령은 1908년 10월 1일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사립학교를 설립하기 위해서는 학교의 목적·명칭 및 위치, 학칙, 교지校地·교사校舍의 평면도, 1년간 수지예산, 유지방법기본재산 또는 기부금에 대해서는 증빙서류를 첨부, 설립자·학교장 혹은 교원의 이력서, 교과용 도서명 등을 학부대신에게 보고한 뒤 인가를 받아야만 했다. 또한 기존 사립학교도 6개월 이내에 인가를 받도록 하였다.

1909년 4월 학부차관 표손일은 사립학교령의 마감시한이 다가오자, 각 부·도 교육주무주사 회의를 개최하고, 사립학교를 불교·기독교 등을 기조로 교육을 실시하는 종교학교와 유정담정론唯政談政論을 일삼는 이른바 정치학교 註120) 등 두 가지로 구분하고, 종교학교는 보호하되, 정치학교는 배척해야 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기독교학교는 외국인 선교사의 치외법권 문제가 있기 때문에 배척할 필요가 없으며 또한 배척해서도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다만 종교학교 가운데 사립학교령에 따라 정식 인가를 받으면 종교교육을 위한 각종 편의 및 도움을 줄 것이며, 아울러 각 학교의 수준에 따라 동등한 졸업의 학력을 인정할 것이라며 외국인 선교사들을 회유했다. 결국 기독교계 사립학교들은 정교분리 원칙을 내세우며 통감부의 요청을 수락하고, 통감부가 정한 교육과정 및 기타 지침을 받아들였다. 물론 이를 끝까지 거부한 종교학교도 적지 않았다. 註121)

당시 표손일 학부차관이 탄압하고자 했던 사립학교는 ‘정치학교’였다. 이들 학교는 학생들에게 체조 연습에 전념케 한다든가 혹은 야외연습 혹은 원정 등을 하면서 북을 치면서 대오를 지어 군사기초훈련을 하는 것을 교육의 최대 목표로, ‘폭도 난자’를 양성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註122) 이는 1909년 9월 발행한 『한국교육韓國敎育』에서도 사립학교는 “교육내용에서 조금도 개선된 것이 없고 교육과 정치를 혼동하여 불온하고 위험한 사상을 학생들에게 주입하여 소년·학생들을 잘못 인도”하기 때문에 사립학교령을 발표하였다고 한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통감부는 ‘사립학교설립인가제’를 악용하여 사립학교가 약 3,000원의 기본금을 확보하지 못하였을 경우 학교에 대한 설립인가를 불허하는 동시에 궁극적으로 학교를 폐교시켜 나갔다. 그 결과 1909년 5월 중순까지 1,824개교가 인가를 신청하였지만, 겨우 337개교만이 인가를 얻었고 930개교가 불인가 조치되어나머지는 보류 많은 사립학교들이 폐교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통감부는 1909년 7월경에 설립인가를 다소 완화하는 방향으로 급선회했다. 註123) 그 이유는 재정이 미약했던 많은 사립학교들은 인가가 비교적 수월하였던 외국인 기독교학교와 서당의 형식으로 학교를 운영해 나갔기 때문이다. 註124) 그 결과 1909년 5월 전국에 걸쳐 설립된 사립학교 수는 대략 3,000여 교에 달하는데, 그 가운데 사립학교령이 공포된 후에는 학부에 인가를 청원한 학교 수가 5월 1일 현재 1,708개교이지만, 그 가운데 698개교는 종교학교가 차지했다. 그 가운데 인가를 받은 학교수는 242개교에 불과했다. 註125)

1909년 5월 한성 및 각 지방 13도에서 사립학교 인가를 청원한 학교 가운데 기설 학교가 782곳이며, 신설학교가 307개교, 종교가 745개교 가운데 불교 6개교 등으로, 전체 1,824개교 가운데 인허를 받은 학교 수는 337개교이고, 환퇴수가 930개교, 그 나머지는 학부에서 조사 중에 있었다.

1909년 6월 사립학교는 5,000여 개에 달했다. 사립학교령에 의해 인가를 받은 학교 수는 400여 개에 불과한 실정이었다. 1909년 3월 이후 7월 하순까지 사립학교 인가 청원수는 2,056개교였다. 註126) 1909년 9월 16일에 사립학교 인허수를 조사한 즉 1,852개교로 격식에 위반되어 반환한 것이 178개교에 달했다. 1909년 11월 현재 각종학교 1,226개교, 종교학교 828개교였는데, 7개월 뒤인 1910년 5월에 조사된 바에 의하면, 각종학교가 176개 증가한 반면에, 종교학교는 오히려 6개가 줄어들었다. 그런데 1910년 7월 사립학교령에 의해 사립학교는 매년 5월 말에 각 학교 정황을 학교에 보고하라 하였지만, 이를 보고하는 학교는 단지 몇 곳에 불과하여 한성부에서는 각 사립학교에 빨리 보고할 것을 지시할 정도로 사립학교들은 통감부에 매우 반감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註127)


2) 사립학교 출신의 관직 진출 제한

통감부는 사립학교를 적절히 통제하면서도 이를 회유할 여러 방책을 마련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사립학교 졸업생 문관임용 문제였다. 이에 1908년 6월 29일 각 사립학교직원회를 개최하고 사숙私塾과 교과서, 사립학교 졸업생 문관임용 등을 논의하였으나, 이를 매듭 짓지 못해 1908년 7월 1일 다시 회의를 개최했다. 이때 각 사립학교 졸업생들의 임용 인정 건을 협의하게 되었다. 그 결과 1908년 7월 23일 통감부는 관립고등학교 또는 이외 동등으로 인정을 받은 관공사립학교에 졸업생은 무시험으로 판임관에 채용한다는 문관임용령을 공포했다. 註128)

문관임용령은 1906년 9월 공포되어 같은 해 11월 관립고등학교와 동등한 학교로 인정받은 사립학교는 부산개성학교釜山開成學校, 중학과 이상의 보성학교普成學校·휘문의숙徽文義塾 등이었다.

1908년 8월 28일 공립·사립학교인정에 관한 규정이 공포되었다. 이에 따르면, 공사립학교의 경우는 ‘학부대신이 인정한 공사립학교 졸업증서를 소지한 자’에게 판임관 임용 자격이 주어졌는데, 이와 관련된 규정을 좀 더 까다롭고 강화시켰다. 註129) 공립사립학교인정 규정에 따르면, 공·사립학교가 문관임용령 규정에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우선, ① 학교의 연혁, ② 학원정원·학년별 재적자 수·출석자 수, ③ 졸업자의 원수와 졸업 후의 상황, ④ 1개년 수지예산, ⑤ 유지방법, ⑥ 교수용 기구·기계·표본목록 등을 작성하여 학부대신에게 신청토록 했다. 그 학교 가운데 ① 개교 후 2개년 이상 경과하고 성적이 양호해야 하며, ② 관리와 유지방법이 확실하고 학과를 교수하는데 상당한 교원과 설비를 갖춰야 하며, ③ 수업연한, 입학규정, 학과과정, 매주 수업시수 등이 관립고등학교와 동등하거나 그 이상이어야 한다고 규정했다.

이에 인정을 받은 학교는 관립한성사범학교·관립한성외국어학교·관립인천일어학교·관립평양일어학교의 본과생뿐이었다. 1910년 5월에는 관립인천실업학교가 문관임용령에 추가로 인정을 받았을 정도였다. 註130) 즉 통감부로부터 문관임용령을 인정을 받은 학교는 한성사범학교·한성외국어학교·인천일어학교·평양일어학교·전법관양성소·법학교·농림학교·선린상업학교 등 뿐이었다.

1909년 사립 법률학교에서 졸업한 학생이 100여 명에 달하였지만, 그 가운데 소개를 받아 취직한 자가 10여 명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법관양성소 졸업생 70여 명 대부분은 판·검사나 서기로 임명되었다. 상업학교의 경우에도 사립학교는 졸업생을 하나도 수용하지 않아, 관립은 확장하고 사립은 구속하여 방해하는 밀계密計라 하여 일반 학계에서 불만이 적지 않았다. 다만 1910년 3월 전동 보성중학교가 고등학교 정도의 학교로 인정을 받았을 정도였다. 註131) 사립학교장을 관리로 진출시켜주겠다며 회유하였지만, 점차 공립보통학교가 경쟁력이 생기면서 제한한 것이 아닌가 한다.


3) 사립학교의 보통학교로 전환

통감부는 1908년 8월 증가하는 사립학교를 통제하기 위해 ‘사립학교령’을 공포하여 통제를 가하는 한편, 보통학교 증설에 따른 재정적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사립학교를 식민교육기관으로 예속시키고자 사립학교보조규정을 공포했다. 註132)

사립학교보조규정에 따르면, ① 보통학교령에 의하여 설립한 자 또는 보통학교의 교과과정에 준거하는 자, ② 상당한 교원 급 설비가 유有한 자, ③ 설립 후 2개년을 경經한 자단, 특별한 사정이 有한 者는 此限에 不在함, ④ 성적가량成續佳良한 자者 등에 한해 학부대신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면 예산 범위 내에서 경비를 보조하도록 한 것이다. 즉 통감부는 공립보통학교가 세워지지 않은 지역의 사립학교 가운데 건실한 학교를 골라, 일정 액수의 보조를 통해 식민교육을 펼치고자 한 것이다.

통감부로부터 보조금을 받기 위해서는 학교장이 ① 학교의 연혁, ② 학생 정원, 학년별 재적자 수, 출석자 수, ③ 졸업자 수 및 졸업 후의 상황, ④ 1년간 수지예산단, 전년도예산액 및 이에 대한 비교·증감을 명기, ⑤ 유지방법단, 기본재산 또는 기부금 등에 대해서는 자세히 기록, ⑥ 교수용 기구·기계·표본 목록 등을 작성하여 학부대신에게 신청하도록 했다. 하지만 ① 본 규정 및 학부대신의 명령에 위배한 시, ② 제 장부에 부정한 기재를 하거나 혹은 회계의 부정리한 시, ③ 3개월 이상 휴교를 할 시, ④ 학교의 성적이 불량함으로 인認한 시, ⑤ 학교를 폐지하거나 또는 학교의 폐쇄를 피명한 시 등 한 가지라도 해당할 경우 학부대신이 보조금 지급을 중지토록 했다. 보조기간은 1년 동안이며 연장도 가능토록 했으며, 보조금은 4회에 나눠 지급한다고 규정했다.

사립학교보조규정은 1908년 10월 1일부터 시행하도록 되었는데, 이때까지 학부의 인가를 받은 사립학교는 326개교 정도였다. 이에 따라 통감부는 1908년 10월 전국 중요한 지역에 사립학교 50여 곳을 선택하여 사립학교로 지정하여 보조 방침을 세웠다. 註133)

1909년 1월 18일, 학부 고등관들이 학무국에 모여 각 사립학교 보조금 지급에 관해 난상 토의를 한 결과 1909년도 지방교육보조비로 172,800환을 책정하고, 1909년 3월 15개 사립학교를 선정하고, 최고 300환에서 최저 120환까지 차등 지급되었는데, 이들 학교들은 대부분 서울에 소재하는 학교들이었다. 또한 통감부는 각도에 1개교씩 선정하여 1909년 7월부터 12월까지 매월 15원씩 보조하기로 결정하였다. 註134)

통감부는 공립보통학교 설립 계획이 어느 정도 마무리 되어가자, 공립보통학교의 재정적인 부담에서 벗어나기 위해, 1908년 8월 통감부는 기존 공립보통학교를 갑종·을종·보조지정보통학교 등으로 분리하여 관리하기 시작했다. 원래 보통학교는 관립·공립·사립 3종으로 나누고, 국고의 재정 지원을 받아 설치하는 것을 관립이라 하고, 도 혹은 부·군의 고빙으로 설치하는 것을 공립이라 칭하고, 개인이 설치하는 것을 사립 등으로 구분하였다. 註135) 하지만 사립 보통학교는 1908년 이전까지 단 한 개도 설립되지 않았다.

갑종보통학교는 지방의 기존 심상소학교 가운데 교통상 주요한 지역에 설립한 학교로, 주로 1906년 8월 보통학교령에 의해 설립되었다. 또 학교로 관립학교와 거의 동등하게 일본인과 조선인 교원이 파견되었고, 인건비 및 기타 고빙 대부분을 국고에서 보조 받는 학교를 지칭한다. 을종보통학교는 소학교령에 의해 설립되었으나 보통학교령 시행 당시 겨우 존속할 정도로 정부로부터 매달 15원의 국고 보조를 받는 경우이다. 보조지정보통학교는 사립학교 혹은 을종공립보통학교 가운데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것을 지정하여 일본인과 조선인 교원 1명이 임명되며, 이들에게 지급되는 봉급을 국고로 지원받지만, 기타 비용은 지방비로 충당하는 학교이다. 註136)

통감부는 ‘보조지정학교제’를 통해 건실한 사립학교를 사립보통학교로 전환시켜 공립화시키고자 했다. 이러한 조처는 통감부가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공립보통학교를 더 이상 확장시켜 나가기 어렵게 되면서 고육지책으로 내놓은 것이었다.

보조지정학교제에 대해 1909년 2월 통감부는 각도 관찰사에게 을종보통학교와 사립학교 가운데 보조할만한 학교를 조사·보고토록 한 뒤, 을종공립보통학교 8개교와 사립학교 23개교를 선정하여 그곳에 본과 훈도 겸 교감인 일본인 교원 각 1명과 본과 부훈도로 한국인 교원 1명을 배치하고 보조금 몇 백환씩을 보조하기로 결정했다. 註137) 한국인 교원은 일본인 교원의 통역 담당 교사였다. 통감부가 교원의 봉급을 부담하는 형식으로 이뤄진 것이다. 통감부가 추진해왔던 ‘모범교육’의 확장인 셈이며, 사립학교를 물리적인 힘을 이용하여 강제적으로 공립학교로 재편하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1909년 5월 이의를 제기하는 학교가 없어 최종적으로 이들 30개교를 확정하고 교수 2명씩을 파송하기로 결정했다.

통감부가 사립학교를 공립화 하는데 반발도 적지 않았다. 통감부의 강제적인 통고에 이를 거부하는 것도 어려웠다. 선정된 각 사립학교 임원들은 학부가 해당 학교의 소속 재단을 탈취하고자 한다든가, 학교를 방해하려 한다는 등의 우려를 표명하고 나섰다. 지방의 유지들은 정부에 학교의 재산을 빼앗기는 것이 되고, 지방민이 설립한 학교를 정부에 빼앗기는 유감천만한 일이라며 거부했다. 학부는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1909년 6월 ‘오해변명서誤解辨明書’를 제작하여 각 학교에 배포하여 이들의 반말을 무마시키고자 했다. 註138)

5월에 통감부는 선정된 각 학교의 재단과 기타 정황을 실사하기 위해 학부의 고등 관리를 5개조로 나눠 전국 각지로 파견했다. 1909년 6월에는 제2회 위원 3조를 다시 보내기로 하고 학무국 소속의 외본번길 서기관과 이완응李完應 번역관 등은 제주지방으로, 본전상길本田常吉 주사와 조한직趙漢稷 주사는 전라남도 지방, 송본정차랑松本政次郞 주사는 경주지방에 시찰하도록 했다. 註139) 이때 통감부는 일본의 군시학郡視學 혹은 고등소학교 교장 중에서 18명을 훈도로 채용하여 공립보통학교 훈도 겸 교감의 자격으로 사립학교에 근무토록 하였으며, 특별히 한인 부훈도 1명을 통역으로 대동케 하였는데, 통역 교사는 관립한성사범학교 속성과 우등졸업생 가운데 선발했다.

사립보통학교는 경술국치 전후로 전부 공립보통학교로 전환되었다. 일제가 많은 비용을 들이지 않고 손쉽게 공립보통학교를 늘려나가는 대표적인 수법이었던 것이다. 1910년도에는 사립학교 5개교와 을종보통학교 5개교 註140)를 합쳐 10개교가 보조지정학교가 되었다. 1910년 3월 졸업한 속성과 5회 졸업생들이 본과 부훈도로 임명되었다. 이들 사립보통학교 역시 경술국치 이후 전부 공립보통학교로 인가되었다. 이로써 통감부는 총 41개교의 보통학교를 총 130개로 늘렸다. 평균 2개군 당 1개교의 보통학교가 설립된 셈이다.


4) 사립학교의 재정 압박


(1) 사립학교 ‘기부금 취체법’

사립학교들은 사립학교령에 따라 인가를 받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특히 기본금 3,000환 이상을 준비하지 않으면 인가를 받을 수 없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나돌면서 이를 마련하기 위한 여러 방안들이 강구되었다. 당시 재한 일본인들이 설립한 소학교의 대부분이 기존 재산이 1,000원 미만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註141) 적지 않은 액수였다. 사립학교가 재정을 마련하는 대표적인 방법은 유지들로부터 기부금을 모으는 것이었는데, 짧은 시간에 3,000원을 마련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더욱이 1908년 8월 29일 통감부가 학부훈령 제2호를 통해, “사립학교에서 종래 기초가 될 만한 재원을 구究치 아니하고, 경솔히 그 설립을 기획하여 혹 기부금을 강청强請하여 혹 재원의 소속을 쟁爭하는 자가 매거枚擧키 불추不追하니 오히려 향학심을 저애하는 결과를 내來케 하여 장래 그 폐풍弊風을 방지하기에 노력함”이라 하여 사립학교의 기부금을 단속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상황에서는 기부금을 거두기가 더욱 어려웠다.

그렇지만 사립학교가 폐교되는 것만큼은 막아내야 하는 처지에서 유지들로부터 기부금을 받기 위해 사력을 다하였다. 이때 통감부는 사립학교 인가 기한을 2개월여 남겨 놓은 상황에서, 1909년 2월 27일 학교설립과 기타 명목의 기부금 모집을 단속한다며 기부금품취체규칙을 공포했다. 註142) 이는 사립학교령 제2조 5항 규정, 즉 사립학교 유지방법에 있어서 “기본재산 또는 기부금에 대해서는 증빙서류를 첨부”하여 학부대신의 인가를 받도록 한 규정을 강화한 것이다.

기부금품취체규칙에 따르면, 제1조 기부·기타 명의의 여하를 물론하고 금품을 모집할 경우에는, ① 모집 목적 및 방법, ② 모집 구역 및 기한, ③ 모집금품의 종류·수량 및 보관방법, ④ 사업계획, ⑤ 수지예산, ⑥ 모집할 사무소 소재지, ⑦ 모집자의 주소·직업·성명·연령, 단체의 경우에는 명칭 및 대표자의 주소·직업·성명·연령 등을 갖춰 내부대신 및 사업 주무대신에게 청원하여 허가를 얻은 후 모집토록 하였다. 제4조 폭행·협박 또는 사기의 수단으로 모집할 수 없다. 제5조 내부대신은 필요한 경우 모집을 정지·제한·금지할 수 있다. 제6조 경찰관은 모집에 관한 장부서류를 검열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제7조 이를 위반했을 경우 15환 이하의 벌금, 단체 대표자를 처벌하도록 했다. 註143)

이에 부족해진 재정으로 학교 운영에 어려움이 따르자, 정산군 청면 왕호학교旺湖學校 교감 조진원趙震元은 몽빈정夢賓亭 30여 칸을 교사로 사용하고 교비를 마련하기 위해 자기 집을 팔기도 했다. 재정 부족으로 폐교 위기에 처한 사립학교 가운데는 사찰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기도 했다. 고양군 대성학교大成學校는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자, 고령 보광사寶光寺 화주승 김교성金敎聲이 40원 가량의 학교 비품을 기부하였으며, 공주 마곡사·대법사에서는 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부근 각 사찰에 정조正租 2,500석을 거뒀으며, 순천군 송광사에서는 보명학교普明學校를 설립하였고, 선암사仙巖寺에서는 승선학교昇仙學校를 설립했다. 註144)

1909년 9월 사립학교에서는 부족한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월사금을 받기 시작했다. 전주 사립 함육학교涵育學校 학생들은 월사금을 내는 것이 당연한 의무라며 10월부터 납입하여 교비에 보충하기로 결정했다. 휘문의숙에서는 1909년 10월부터 기본금에 충용하기 위해 학생들에게 월사금을 받을 예정이었으며, 곽산에 있는 흥실학교興實學校는 이화학 기계를 구입한 뒤부터 매월 3원식 수업료를 징수했다. 註145)

통감부는 기부금취체규칙을 통해 사립학교 운영에 필요한 재정 마련을 어렵고 까다롭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를 제한할 수 있는 인가권을 남용하여 민족주의계 사립학교를 통제·탄압하였다. 보조금취체규칙 이후, 각 사립학교의 보조금이 끊겨 재정 곤란으로 폐교하는 학교가 많아지자, 서울에 있는 각 학회는 연락총회를 열고 사립학교 유지방법을 강구하였다. 註146) 특히 관할 부서가 일부 사립학교에 대해 기부금 모집 허가를 늑장 처리한다든지, 각 지방 인사들이 사립학교에 기부하고자 하면, 소관 경찰서 및 재무서 관리들이 앞장서 이를 세무상 방해라 하여 금지함으로써 일반 학교가 폐지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註147)

기호흥학회 총회에서 평의원 정영택鄭永澤이 기부금취체규칙의 문제점 해결을 위해 정부에 진술하기로 학회에 제출한 의안을 채택하자, 북부경찰서에서 당시 기호흥학회 총무였던 남궁훈南宮薰을 불러 의안을 조사하여 물의가 일기도 했다. 註148) 3월 12일에 각 학회 대표자 5명이 모여 정경학교貞慶學校에서 회의를 개최하여 대책마련에 나서, 1,000호에 1개의 학교를 설립하자는 청원서를 통감부에 제출했다. 통감부는 1개교를 유지하려면 매년 2,600원의 경비가 필요하여 매호에 2원 60전씩 거둬들여야 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어렵다며, 부유한 군에는 3개교, 소군小郡에는 2개교씩 설립하자는 수정안을 제시했다. 5개 학회 대표자들은 다시 논의하여, 매천 호에 1개교의 학교를 설립하되, 설립자는 기본금 1,000원을 기부하고, 500원으로 경상비를 충당하도록 하는 의견서를 다시 통감부에 보냈다. 하지만 통감부와 이견을 좁히고 못하고 각 학회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또한 통감부는 같은지역 내의 여러 사립학교를 1개교로 합설하면 경비를 지원하겠다고 수정 제시했지만 각 사립학교는 서로 간 합병을 꺼려 결국 폐지되는 학교가 늘어만 갔다. 더욱이 1910년 7월 이후에는 ‘기부금취체규칙’을 개정하여 통감부 총무장과 정부 각 대신이 연서해야 허가를 받을 수 있도록 강화하여 사립학교 폐지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1910년 7월 표손일은 한국주차군 헌병대장 회의석상에서 “사립학교가 ‘기부금취체규칙’에 의해 기부금 모집에 큰 타격을 입어 유지의 기초가 위태롭게 되어 결국 폐멸廢滅의 궁경窮境에 빈頻함에 이르게 되었다”고 밝힐 정도였으며, 당시 증미曾彌 통감이 소촌小村 외무대신에게 보고한 바에 의하면, “학교설립을 이유로 기부금을 걷는다는 얘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註149)고 할 정도로 사립학교는 기부금취체규칙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폐교되고 말았다.


(2) ‘지방비법’

1909년 2월 기부금품모집취체규칙에 이어 통감부는 사립학교 인가시한이 마무리될 시점인 1909년 4월 지방비법을 공포하였다. 그리고 1906년 12월 29일에 지방세규칙을 공포하여, 1907년 1월 1일부터 국가재정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식민지경영비를 지방재정으로 채우고자 했다. 註150) 지방관청의 청사 및 수리에 관한 경비와 토목 건설뿐만 아니라 식민지 교육의 육성, 식민지 농업구조의 창출 등 식민지 제반 사업을 위한 재원을 마련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지방민들의 반발로 시행되지 못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통감부가 식민정책을 추진해 나가는데 차질을 빚게 되었다. 그뒤 1909년에 한국의 지방경제수탈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지방제도를 일본식으로 개편하려는 의도로 지방비법을 발표하고 지방비 부과금을 징수하였다.

지방비법에 따르면, 제1조 지방비는 지방비에 속한 재산과 그 수입, 지방비의 지판支辦 사업에 속한 수입 및 부과금으로 충당하도록 하고, 제3조지방비에 충당할 부과금의 종류는 종래 지방에서 징수하던 세제 가운데 취하여 이를 정하되, 제4조 부과금의 과목·과율課率·납기納期 기타 부과에 관한 규정은 내부대신 혹은 탁지부대신의 인가를 받아 한성부 및 관찰사가 부령 또는 도령道令으로 이를 정하도록 했는데, 제6조 한성부윤 및 관찰사는 지방비 지판에 속하는 사업 가운데, 일부를 내부대신의 인가를 얻어야 부역夫役 및 현품現品을 부과할 수 있도록 했다.

지방비법 실시에 따라 기존 군수·면장 등은 예전 관습에 따라 시장세·고복채考卜債·호적채戶籍債 등 각종 명목의 잡세를 부과하지 못하였고, 재무감독국장의 승인을 얻은 시장관리인이 재무서로부터 발부고지서를 발급받은 뒤 시장상인에게 징수하여 재무서에 납부해야만 했다. 註151) 이렇게 거둬들인 지방비로 ① 청사의 건축 및 수선에 관한 경비, ② 토목에 관한 경비, ③ 위생·병원 구휼 및 자선에 관한 경비, ④ 권업勤業에 관한 경비, ⑤ 교육 급 학예에 관한 경비 등에 지출하도록 했다.

사립학교는 기부금뿐만 아니라 관찰사·군수 내지 학부 인가를 받아 학전學田·도선세渡船稅·시장세와 같은 공과적公課的 수입으로 설립·운영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註152) 양주군 평구학교는 경비가 적어 장시場市 우세구문牛稅口文을 경비로 보용하였는데, 양정리 봉명학교鳳明學校에서 이를 사용하려다 서로 쟁힐하기도 하였다. 시장세는 사립학교뿐만 아니라 지방 공립보통학교의 운영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1908년 7월 안성공립보통학교에서는 안성군 시장세 징수액 매월 300여 원 가운데 200원을 보조받았다.

하지만 ‘지방비법’ 실시로 충남 은진의 논산학교論山學校는 논산장에서 세전稅錢을 받아 학교 경비에 보용해 오다가, 동창학교는 시장가게, 과물전·마상전에 수세收稅하여 학교 경비에 충당해오다가 혁파되었다. 註153) 그 결과 사립학교가 주요 재원을 잃고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으며, 많은 학교가 폐교되기도 했다. 지방비는 주로 지방부과세地稅附加稅·도장세屠場稅·시장세市場稅·토지가옥소유권취득세·저당권취득세 등으로 수입되었으며, 1909년도에는 80,722환에 불과했으나, 1910년도에는 전년도 지방비와 국가보조금을 합쳐 1,309,769원에 달할 정도로 많은 액수였다.

통감부는 1910년도에 지방비로 거둬들인 세금을 토목비·위생 및 병원비· 구휼비 및 자선비·권업비·교육비 등에 지출하고자 했는데, 그 가운데 22%를 교육비에 충당하고자 했다. 통감부는 1909년 12월 각 지방 사립학교를 지방비로 보조할 방법에 대해 논의하여, 1군 내에 2~3개의 유력한 학교에 국비 및 지방비로 상당한 보조를 부여하거나 공유재산의 수입을 부여하며 혹은 기부금 모집을 허가하는 방법으로 유지토록 했다. 이에 1910년 1월 통감부는 한성부 내 주사 각 2명과 함께 한성 내 각 사립학교를 시찰하여 보조금을 지급할 학교를 물색하도록 했다. 註154)

1910년 4월 탁지부에서는 지방비 예산 중에서 교육보조비와 장려비 62,107원을 편입시켰다. 1910년 1월 평남에서는 학도장려비로 지방비 가운데 570원을 지출했으며, 한성부에서는 지방비를 현금으로 지급하지 않고 각 사립학교의 체조·산술 과목을 교수하는데 필요한 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註155) 역시 1910년 4월 전북과 경기도에서는 지방비로 학부에서 편찬한 교과서를 구입하여 도내 각 사립학교에 분급하기도 했다. 註156) 현물로도 지방비를 보조할 수 있도록 한 규정에 따른 것이다. 통감부로부터 보조금을 지급받은 사립학교는 통감부의 식민교육정책에 흡수되어 갔다.


(3) 사립학교의 향교재산 환수

향교는 조선후기부터 서원이 발달하면서 양사養士보다는 향사享祀 기능만을 유지했다. 흥선대원군과 고종이 서원철폐 후 한때 성균관·향교 등의 관학을 진흥시키려고 힘썼으나, 갑오개혁 이후 향교는 학교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하지만 향교 자체의 토지를 비롯하여 기구·직제 등은 계속 유지되었으며, 향사비도 예전과 다름없이 지급 받고 있었다.

갑오개혁 당시 관제개혁이 이뤄지면서 전통교육기관은 1894년 학무아문의 성균관 및 상교庠校·서원사무국에서 담당하도록 하였지만, 1895년 학부관제 개정시에는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았다. 다만 향교의 토지에서 나오는 결전結錢이 지방공립소학교의 경비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향교의 건물이 소학교의 건물로 이용될 만큼 소학교의 재정적 기반에 향교가 갖는 의미는 매우 컸다. 비록 향교가 교육기능을 상실하였지만, 신교육과 일정한 관련성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이러한 교육적 관련성 때문인지 1899년도부터 각 지방 향교에 공립소학교가 설립되거나 향교재원으로 학교 재정을 지원받기도 했다. 註157) 영흥군·증산군공립소학교는 향교에 설립하였고, 이외에도 옥구군은 양사재에 소학교가 설립되었다. 평안북도의 경우에는 관찰사가 관하 각군교궁향수전各郡校宮享需錢과 본부소재本部所在 전서원전前書院田의 식리息利를 취取하여 도내의 각 소학교에 일등군에 60냥씩, 2등군에 50냥씩 3~4등군에 10냥씩 살멸殺減하여 보조하였다. 철원군의 경우는 군수가 교원재토校院財土를 본군 공립소학교 이부移付하였으며, 평양군의 경우 교궁춘추석전校宮春秋釋奠 향수전享受錢 천여 냥을 공립소학교로 부속경비로 보조하였고, 김화군은 구취鳩聚한 경비가 부족하여 인허 받지 못하자 향교 식리전殖利錢 500냥과 교답校沓 20석 두락조를 보태기도 했다. 또한 1899년 4월 한국정부가 중학교 관제를 공포하면서 지방중학교는 향교에 세우도록 하기도 했다.

보수적인 유림들이 향교전답을 신교육 기관인 학교 재원으로 전용하는 것을 적극 반대하고 나섰다. 1899년 2월 충청·경상·전라 유생들이 소학교에 부付한 교토校土를 다시 교궁校宮에 복급復給하여 달라고 학부에 청원하였으며, 1899년 3월에는 내부에 품장稟狀을 올리기도 했다. 註158) 결국 향교 재산을 둘러싼 학교와 유림들의 갈등은 수그러들지 않았고 더 이상 향교에 학교가 설립되지 않았으며, 그 재원 또한 학교의 재정으로 이용되지도 못했다. 1904년 12월 중학교 전교관이었던 정영진鄭永軫과 윤주혁尹柱赫 등이 각 군 향교에 부속한 전토와 그외 촌려村閭 중 사설 서재의 학계 등 민유재民有財도 학비로 충당하고자 건의하기도 했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통감부 설치 이후 향교에 학교가 다시 설치되기 시작했다. 군수 혹은 유림들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사립학교가 향교에 설립되거나, 재정 지원을 받았다. 통감부는 1907년 이후 향교에 사립학교 설립이 활발해지고 재정을 지원하는 향교가 증가하자, 기존 향교를 관장했던 장의掌議·재임齋任 등의 직임을 없애버렸다. 그리고 1908년 10월 향교에 판임관직의 직원直員 1명을 해당 군의 유림 가운데 선임토록 하고 문묘를 지키고 서무에 종사토록 하였지만, 봉급은 지급되지 않았다. 註159)

통감부는 1909년 5월 각 향교에 향사비를 갑을병정으로 구별하여 춘추로 지출토록 하고, 학교가 설립한 향교에 대해서는 청원하면 이를 인허하되, 학교 설립청원이 없는 향교는 교토校土를 조사하여 학부로 귀속하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통감부는 객사客舍나 향교 등 공공 건물에 설립된 사립학교에 대해 이를 교사로 사용하지 못하도록는 금지시켰다. 註160) 또한 1909년 9월 직원 임명으로 종전 장의·재임 등이 자동 폐지되었는데, 이를 이행하지 않아 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자 도훈령道訓令을 공포하여 엄중히 처분을 내리겠다고 경고하였다. 註161) 향교 직원이 향교 소속 가실家室또는 재산을 교회·학회 등 기타 단체에 마음대로 차여借與 혹은 양도하는 폐가 있다며, 1910년 4월 통감부는 ‘향교재산관리규정’을 학부령으로 공포하여 지휘·감독을 강화했다.


5) 사립학교의 교과과정 탄압

교과서 검정은 1895년 3월 25일 학부관제가 반포되면서 편집국에서 교과도서의 편집·번역과 검정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게 하면서 시작되었다. 註162) 하지만 당시에는 학부 편집국에서 여러 분야의 교과서를 편찬하였기 때문에 굳이 교과서 검정에 관한 규정은 만들지는 않았다. 점차 학부에서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출판하는 교과서도서가 늘어나자, 1900년 9월 중학교 관제에서는 “중학교 각과에 교과서 학부에셔 편집 외外에는 혹 학부대신의 검정을 경經 자者”4조를 사용하도록 했으며, “관공사립 각 중학교의 교과서 학부에셔 일정一定 교과서 외에 용用치” 못하도록 했다12조. 註163)

통감부가 설치되고 1906년 8월 학교령이 공포되었지만, 교과서 편찬이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는 ‘학부대신의 인가를 경經 것으로 용用이라”했지만, 삼토충조三土忠造 참여관의 주도하에 보통학교용 교과서 편찬이 일단락되자, 1907년 7월 학부령으로 ‘학부편찬 보통학교 교과용 도서의 발행 규정’을 공포하였다. 이에 따르면, 공립보통학교 혹 사립학교에서 학부에서 편찬한 보통학교 교과용 도서를 학도에게 사용하고자 할 때에는 해당 학교장이 ① 학교규정의 학과목과 그 정도 급 수업 연한, ② 학도 총수와 교과서를 사용할 학도 학년별의 수효, ③ 교과서의 종류와 그 학년별 배정, ④ 교과서를 사용할 학과의 담임교원의 이력서 등을 갖춰 학부에 청구·인가를 받도록 했다. 註164)

통감부는 1907년 9월 각 부군에 훈칙하여 관청·사찰·사가私家등에 있는 관유官有·사유私有의 각종 서적을 일일이 조사하되 경사經史·자전子傳·문집·비사稗史·소설 등의 판을 하나도 빠짐없이 별지 양식에 적어 보고하되, 만약 9월까지 보고하지 않으면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이라며 위협까지 했다.

1908년 1월로 들어서면서 학부에서 각종 교과서를 검열한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통감부는 1908년 6월 29일 각 사립학교직원회를 개최하고 사숙과 교과서, 사립학교 졸업생 문관임용 등의 논의를 매듭짓지 못해 1908년 7월 1일 다시 회의를 개최했다. 註165) 그 결과 1908년 8월 ‘사립학교령’이 공포되면서, 사립학교에서 사용하는 교과용도서는 학부가 편찬한 것이나 또는 학부대신의 검정을 받은 것 중에서 선택하도록 했다. 다만 사립학교에서 이외의 도서를 교과용도서로 사용하고자 할 경우에는 학부대신의 인가를 받도록 하여, 인가를 받지 못했을 경우 교과서 사용을 금지토록 했다. 註166)

학정참여관 삼토충조가 사직하고 귀국한 뒤, 1908년 8월 통감부는 교과서 편찬, 검정을 위해 문학사 고목선인이 촉탁으로 임명되었다. 고목 촉탁은 가장 먼저 사립학교령 실시로 교과서 검정과 교과서 편찬을 위해 편집관 및 편집관보를 확충했다. 註167) 그뒤 학부령으로 1908년 8월 28일 ‘교과용도서검정규정’을 공포하여 교과용도서 통제를 강화시켜 나갔다. 이에 따르면, 사립학교를 적절히 통제하기 위해서는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교과서와 교육과정부터 제도적으로 마련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먼저 교과서를 발행하기 위해서는 학부대신에게 ‘인가’를 받도록 한 것을 ‘검정’을 받도록 하여 통제를 강화시켰다. 검정을 받은 후 도서의 명칭·책수·정가·목적하는 학교와 학과의 종류·도서의 내용을 변경할 경우에는 검정 효력을 상실하도록 했으며, 이를 발행할 경우에는 5환 이상 50환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했다. 註168)

교과서 검정업무는 9명으로 구성된 ‘교과서 편집 및 검정위원회’에서 담당하였다. 이들 중 6명은 한성사범학교 일인 교수들로 일본 교과서에 의한 일본식 교육이 이뤄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1908년 10월 검정위원회에서 사립학교는 각 사회에서 편찬한 교과서의 검정·보급을 청원하였지만, 이를 신속히 검정해주지 않아 수업에 차질을 빚게 되자, 교육을 방해한다는 비난 여론이 일기도 했다. 註169)

당시 출판계는 을사늑약 이후 민족의식을 일깨워주는 도서들이 붓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1908년에 발매된 도서들 가운데는 역사전기서류가 40종, 지리 및 지도서류 20종, 산술교과서류 12종, 정치 및 법률서류 19종, 실업 및 경제서류 23종, 교과 및 교육서류 48종, 어학 및 잡저가 27종, 신간소설류 23종 등이었다. 註170) 대부분 역사나 지지류와 관련된 것들이었으며, 국가적 위기에 처한 한국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세계 각국 혹은 국가를 위기에서 구한 해외 영웅들에 관련된 열전들이 활발히 출판되었다.

특히 신채호는 1907년 『이태리건국삼걸전』을 간행하면서, “학문중 최필요는 역사라. 역사를 독하여야 각국흥망各國興亡의 원리를 효해曉解할지며 역사중 최필요는 우시又是 애국자의 사적事蹟” 註171)이라 하여 역사와 애국자의 전기에 대한 연구가 중요하다고 거듭 제기했다. 또한 1908년 6월 『황성신문』에서는 역사는 ‘국민의 귀감’이라며 “아국 국민이 국가에 대하여 기념하는 사상이 전멸全滅하니 차此는 역사의 학學이 발달치 못한 고故가 아닌가”라고 하여, 역사학을 국가의 사상문제와 연결시키며 역사 저술의 간행이 필요하다고 제의했다. 또 종래 중국 역사서만 읽어 대한의 역사를 모르게 한 것은 ‘망국의 기관’이라 하여, 역사 연구·저술·출판을 국가와 민족 흥성興盛의 제일 요건이라 지적하기도 했다. 註172)

통감부는 ‘사립학교령’과 ‘교과용도서검정규정’을 공포한 뒤, 1908년 9월 15일 학부 인가제로 운영되던 ‘학부편찬교과용도서발매규정’을 개정하여, 학부대신의 허가를 받은 발매인을 통해서만 교과서를 발매토록 했다. 註173) 다만 발매인이 교과용도서를 받기 위해서는 매하대금賣下代金을 첨부하여 학부대신에게 제출하도록 했으며, 발매인이 학부대신이 인정하는 유가증권을 제공했을 때에는 6개월 이내로 매하대금을 연장해 준다고 했다. 그런데 발매인이 매회 200책 이상을 구입해야 했기 때문에 강매 수준이었는데 이들에게는 부담으로 작용했다.

‘학부편찬교과용도서발매규정’에 따라 먼저 사동 유일서관唯一書館 및 기타 지방 10여 서점에만 서적 판매권이 허가되었다. 註174) 1908년 10월 1일부터 발매를 허가받은 사람들이 관보에 게재되기 시작했다. 통감부는 학부편찬 도서 판매를 전국으로 확대시켜 나갔다. 도서 발매점은 1908년 19개소, 1909년 25개소, 1910년 11개소 등으로 모두 55개소가 허가되었다. 발매인은 계몽운동가·관리·상인·중인 등 다양하였는데, 일본인이 운영했던 곳도 12개소에 달했다.

서울·경기지역에 중점 도서발매점이 인가를 받았지만, 삼남지방 보다는 사립학교가 많이 설립된 북부지방에 분포되어 있었다. 특히 유일서관은 ‘사립학교령’ 이후, 관립학교에서 사용하는 동일한 양식의 학적부를 인쇄하여 싸게 방매할 뿐만 아니라 몇 개 학교에는 기증함으로써 지방 각 학교가 유일서관의 후의를 감사하여 일반 서적을 청구하여 큰 호황을 누렸다. 註175) 1900년 김상만서포金相萬書鋪로 서적 유통을 시작한 김상만은 이후 출판에까지 사업을 확대시켰으며, 국민교육회가 『심상소학尋常小學』을 편술하였으나 자금난으로 발행하지 못하자, 인쇄비를 부담하기도 했다. 당시 김상만이 경영하던 광학서포廣學書鋪에서는 『애국부인전』·『국민수지國民須知』·『국가학요령』·『이태리건국삼걸전』·『을지문덕』·『녀독본』·『몽견제갈량夢見諸葛亮』·『찬미가讚美歌』·『이십세기지참극제국주의二十世紀之慘劇帝國主義』 등 18종에 달하는 서적이 일제에 의해 금지처분 당했다.

학부에 교과용 도서의 검정에 관한 문의가 쇄도하자, 1908년 12월 ‘교과용도서검정’에 대해 학부에서는 편집국에서 검정내규를 마련했다. 註176) 그리고 통감부는 검정 내규에 따라 교과서 검정을 실시하여 1908년 12월에 허가 혹 불허가를 발표하였다. 이와 같이 통감부는 도서 검정이 어느 정도 일단락되자 1909년 4월 19일 각 학교령을 개정하여, 각 학교는 학부에서 편찬하였거나 학부대신의 인가를 받은 교과서만 사용토록 했던 것을 고쳐, 학부대신이 검정한 교과서도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다만 이럴 경우 학부대신의 인가를 받도록 했다. 註177)

한편 통감부는 1909년 1월 주임 편집관 2명과 판임관 대우의 편집관보를 한인과 일본인 각각 1명씩 증치시켰다. 註178) 통감부는 1909년 3월경, ‘교과서의 내용에 관 조사’ 방침을 발표했다. 교과서의 검정과 사용인가 106부 171책에 달하였는데, 대부분의 책이 조잡하며 이를 교과서로 사용하면 학생들에게 학생들의 전도前途를 오誤하고 국가에 위해를 미칠 우려가 있는 것이 적지 않다며, 교과서를 개량할 목적에서 정치적·사회적·교육적 방면의 조사방침을 제시했다.

이러한 방침에 의해 통감부가 여러 교과서를 심사한 사항 중 먼저 교육적 방면에서 나타난 것들을 제시했다. 첫째, 기사 내용에 오류와 장찬粧撰이 많다. 둘째, 재료 선택 또는 서술 방법이 적당하지 않다. 셋째, 분량 정도에 주의가 부족하다. 넷째, 편술編述의 조직이 적당치 못하다. 다섯째, 조사措辭에 주의하지 않는다. 이 가운데 둘째 사항에 대해 수신서를 예로 들면서, 초등학생들에게 효제孝悌·충신忠信·예의禮義·염치廉恥 등 인생에 필수한 도덕·근면·청결 등 일상의 실천 사항, 동시에 사회에 필요한 각종 도덕을 위주로 하되, 국가의 법률과 의무 등에 대해서는 지양하도록 했다.

사회적 방면에서는 부적당한 기사가 비교적 적다고 하면서도 다만 청년학도로 하여금 온건하고 착실한 풍습으로 나갈 수 있도록 신중을 기할 것을 주문하였다. 특이 정치적인 방면에 대해서는 ‘정치와 교육을 혼동’하지 말 것을 주문하면서 무려 9가지를 지적했다. 즉 한국의 처지를 파괴하고자 하는 정신을 선양하거나, 배일사상을 고취시켜 일본과의 친교를 저애시키고, 편협하고 잘못된 애국심을 유발시켜 학생들을 그릇되게 할 우려가 있는 것들을 기술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그러면서 통감부는 앞으로 교육적 방면은 조금은 관대히 할지라도 사회적·정치적 방면에 있어서는 매우 엄밀히 심사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교과용 도서 검정규정


즉 통감부는 이러한 내용을 담은 서적을 ‘국법에 위반하는 위험한 사적’이라 하고, ‘하루라고 그냥 두지 못할 것’이라 하여, 금지처분과 수색·압수를 통한 분서를 시사한 것이다. 이에 1909년 3월 『대한매일신보』는 논설에서, ‘한국을 멸망케 하는 학부’라고 규정하고 ‘돈견豚犬이나 노예의 사상으로 외국인이나 잘 복종하며 멸망에 함께 빠져야 마음에 쾌할’ 학부라고 통렬히 공격했다. 그리고 ‘편협한 애국심’의 조항에 대해 “나라를 사랑함이 불가하면 나라를 미워함이 가할까”라고 하는 등 각 조항에 대해 냉철히 비판했다. 註179)

이렇듯 통감부는 1909년 5월부터 출판법에 해당되는 서적을 금지처분하고 압수하여 불태워 버렸다. 이에 1909년 6월 『대한매일신보』는 책을 불사르는 분서는, “첫째 옛적 문명이 무디게 만들고, 둘째 한민족 전체를 몽매한 인물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며, 셋째 인민을 희생시키고 천하를 로운 물건으로 만들었다고 비판한 후에, 서적을 소각시킬 수 있지만, 인민의 마음’을 불사르지는 못할 것”이라며 비판했다. 또한 진사황이 ‘분서갱유’한 이후에 멸망했다는 점을 예로 들면서 일제도 한민족의 저항에 의해 곧 멸망할 것이라 했다. 1909년 7월 학부에서 교과용 도서를 압수하여 소각한 수가 4천여 부에 달했다. 註180)

그 결과 통감부의 식민정책에 동조 혹은 인정하는 도서만 인가를 받아 출판되었으며, 한국 내에서 간행되는 도서보다는 일본 서적의 수입이 증가하였다. 즉 을지문적·양만춘·김유신 등과 같은 영웅 전기문은 사라지고, 워싱턴이나 일본인 서예가 소야도풍小野道風 등 외국인에 관한 전기문들이 자리를 대신했다. 그런데 이들 도서는 학부 허가를 받은 교과용 도서 발매인에게만 판매권을 부여하여 판매상들의 권익을 보장해주었다. 註181) 그 결과 학부가 편찬한 도서의 급대給貸와 발매가 급증했다. 1909년 1월부터 6월까지 보통학교용 국어·수신·한문·일어·이과·산술·도화·습자 등의 교과서 판매가 증가하여 모두 17만 7천여 책에 달하였다. 급대는 86만 7,731책, 발매는 7만 3,240책이었는데, 전년도에 비교하여 발매수는 4만8,626책이 증가하였고, 급대수는 6만 7,516책이 증가하였다. 이에 통감부는 세입예산 가운데 ‘교과서 및 역서수입曆書收入’으로 전체의 0.2%에 해당하는 1909년 43,690환, 1910년 35,281환으로 책정할 정도였다. 註182) 통감부는 1909년 11월 ‘학부편찬교과용도서발매규정’·을 개정하여, 유가증권뿐만 아니라 토지·가옥을 담보로 50책 이하로 구입이 가능하도록 했다. 다만 발매하는데 부정한 행위를 하거나, 허가를 받은 후 6개월 이내에 책을 청구하지 않으면, 혹은 1개년간 전혀 책을 청구하지 않을 때에는 허가를 취소한다는 규정을 첨입했다. 註183) 과학과 실업 등 정치나 사상과 관련이 적은 도서들은 대부분 인가를 받았다. 하지만 시행 전에 검정을 받은 교과서라 할지라도 발행자가 시행일1908년 8월 28일로부터 90일 이내에, 매 책에 명칭·책수·정가·목적하는 학교와 아울러 학과·학원學員·학도용 또는 교원용의 구별, 발행과 검정 연월일과 해당 도서에 서명한 저·역자와 발행자의 주소·성명을 밝히도록 하고, 책 2부를 학부에 제출하도록 하였다. 이를 이행하지 않은 교과서들은 1909년 1월 검정이 취소되고 말았다. 규정공포 이후 검정출원건수 중 검정을 얻은 것은 불과 6종에 불과했다. 그런데 검정규정공포 이전에 검정을 얻어 그 효력을 인정받은 것이 7종이므로 학부검정교과용도서응 13종이었다.

교과용도서의 사용인가청원은 사립학교의 설립인가 청원에 부대해서 제출하는 것이 많아 그 수가 수 백건에 이르고 도서의 종별책수에 이르러서는 거의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사립학교령 실시 이후 1909년 5월까지 학부가 사용인가를 해 준 것은 125종이며, 인가를 하지 않은 것은 29종에 달했다. 또한 사용불인가에 속하는 것 가운데 3종의 교과용도서는 안녕질서를 방해하는 것으로 보아 발매반포까지도 금지시켰다. 註184)

안주에 있는 안흥학교安興學校는 이 지역의 유생과 양반들이 향교 자리에 세운 학교인데, 배일교육을 하고 있다고 파악한 안주경찰서는 안흥학교를 수색하여 불온도서라는 이유로 『유년필독』·『동국사략』 등 21종을 압수했다. 註185) 뿐만 아니라 1909년 2월 23일 출판법을 공포하여, 註186) 사립학교·회사·기타 단체에서 출판하는 문서·도서는 그 학교·회사·기타 단체를 대표하는 자와 발행자가 연인連印하여, 원고본을 첨부하여 지방장관한성부에서는 경시총감을 거쳐 내부대신에게 허가를 받도록 했는데, 이는 원고를 사전에 검열하겠다는 것이었다. 특히 이를 허가 받지 않고 책을 출판하는 저작자·발행자·인쇄 담당자를 처벌한다고 규정했다.

이는 사실상 일제가 출판 검열기준을 마련한 것으로 내부대신의 ‘허가’를 받지 않고, 국교를 방해하거나 정체를 변양하거나 국헌을 문란케 하며, 안녕질서를 방해하거나 혹은 풍속을 양란하는 출판물 등에 대해 엄격히 통제를 가하겠다는 것이다. 더욱이 출판법을 무시하고 출판된 문서·도서는 발매 또는 배포를 금지할 뿐만 아니라 이를 압수할 수 있도록 규정하였으며, 출판법 이전에 간행된 출판물에 대해서도 이를 적용토록 했다. 이에 따라 “배일적 저작에 종사하던 사람들도 저작물의 방침을 일변하여 물리·화학 등과 같은 저작”을 하게 되었다. 註187)

통감부는 1909년 5월 5일 내부고시 제27호를 통해 도서들을 “치안을 방해함으로 인해 출판법 제16조에 의해 출판물의 발매반포를 금지”한다고 하였다. 註188) 당시 내부대신은 출판법 시행 이전 출판한 저작물 가운데 ‘안녕질서를 방해하거나 또는 풍속을 괴란할 우려’가 있다며, 발매 반포를 금지하고 어떤 학교든지 이를 사용하지 못한다고 못 박았다.


6) 교과과정의 탄압과 각종 규제


(1) 병식체조 금지

병식체조는 1895년 근대적인 교육제도가 만들어지면서 일본의 학교체조를 받아들이면서 비롯되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1886년 각 학교령이 공포되면서 보통체조와 함께 병식체조를 정식 도입하였던 것이다. 註189) 1895년 7월 공포된 학교령 제1호 ‘한성사범학교규칙’ 제13조에 체조가 교과목으로 채택되었고 보통체조와 병식체조가 실시되었다. 또한 같은 해 8월 12일에 공포된 ‘소학교교칙대강’에는 체조과목에 대해, “최초에는 적의한 유희를 하게 하고, 점차로 보통체조를 가하되 편의한 병식체조의 일부를 수함이 가하다고 하고, 고등과에는 병식체조를 주로”한다고 규정했다.

다만 1896년 5월 영어학교 학생들은 영국 해군 관원館員에게 병식체조를 배운 뒤, 군복을 입고 고종이 머물고 있던 러시아 공사관에서 조련操練을 했다. 이어 1897년 6월에는 광무황제 앞에서 영어학교 학생들은 총을 가지고 병대 기예를 보였으며, 법어학교·아어학교 학생들은 체조를 선보여 호평을 받았다. 註190) 당시에는 체육을 담당할 교사가 없었기 때문에 무관학교 교관들이 1895년 8월 관립소학교 학생들의 체육활동을 담당했다. 1896년 5월 31일에는 훈련원에서 관립소학교 운동회는 개최하였다.

관공립학교에서 체육활동은 1898년 7월 무관학교가 경우궁에 개교되고, 1900년 1월 128명의 졸업생들이 참위로 임관하면서 가능해졌다. 이들은 무관학교 재학시절에 무술학·군제학·병기학·축성학뿐만 아니라 교련·마술馬術·체조 및 검술 등의 훈육과목을 배웠기 때문이다. 註191) 특히 체조에서는 『체조교범體操敎範』에 의해 교육이 이뤄졌는데 주로 병사들을 교육시키거나 감독할 수 있는 정도의 유연체조柔軟體操·기계체조器械體操 등을 가르쳤다. 때문에 학생들의 체육활동을 담당했던 것은 무관학교 학생 혹은 위관급 장교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899년 9월 설립된 통진군공립소학교 체조교육을 전 위관 조능현趙能顯이 담당할 정도로 병식체조는 관공립학교에서 일반적으로 이뤄졌다. 註192)

이러한 형태는 1901년 중학교와 일어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당시 학부에서는 군부에 “운동을 장차 실시할 터인데 교련하는 교사가 없으니 군부로 조회하여 교사 1~2명을 택송”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註193) 때문에 이들 학교에서도 체육시간에는 병식체조가 행해졌을 것으로 보인다.

1902년 학부대신이 원수부에 일·영·러·불·청 등 외국어학교 학생들에게 매일 오후 2시부터 30분간 체조법을 가르칠 사관 5명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註194) 이는 사립학교에도 영향을 미쳐 체조 과목이 개설되어 병식체조를 가르치게 되었다. 관공립학교와 마찬가지로 체조과목은 군위관들이 담당했다. 1898년 11월 전·현직 관료들이 뜻을 모아 새문밖 녹전골 전 경기감영 집사청執事廳에 설립된 광흥학교의 체조교사는 군위관 남순희南舜熙 등이 담당했다. 이러한 경향으로 보아 당시 설립된 사립학교 체조 교육도 군인들에 의해 병식체조가 행해졌을 것이다.

1906년 통감부가 들어서면서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1906년 8월 통감부는 한국정부가 추진해오던 학교관제나 각 학교령을 식민통치체제에 맞게 변질시켰다. 특히 통감부는 ‘보통학교’를 통한 소위 모범교육 실시를 교육정책의 가장 중요한 사업으로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먼저 ‘보통학교령 시행규칙’을 개정하면서 체조와 관련해서는 “초初에는 유희遊戱를 적의適宜케 하고 점차 규율적의 동작을 행行케 하고 보통체조를 가수加授하며, 또 협동적 유희를 작作케 하되 시의를 종從하여 체조 교수시간의 일부나 혹 교수시간 외에 적의한 호외戶外 활동을 행行”하도록 규정하여, 이전 병식체조를 없애버리고 유희·보통체조·호외운동·협동적 유희 등을 위주로 하는 체조 교과 과정으로 바꿔 나갔다. 註195)

다만 한성사범학교에서는 체조 과목에서 보통·병식 체조를 1주일에 3시간씩 수업했다. 이러한 것은 고등학교나 외국어학교에서도 마찬가지로 보통·병식체조를 가르쳤다. 註196) 병식체조가 여전히 고등학교에서 체조과목으로 채택된 것은, 소수 지도자의 호령이나 신호에 따라 집단에 질서있는 획일적 동작을 규제할 수 있고, 협소한 장소에서 비교적 단시간 내에 많은 수의 학생을 훈련시킬 수 있다는 편리성 때문이었다. 註197)

1906년 5월 관립일어학교 교관 김한규金漢奎는 군부에, 기계가 갖춰있지 않아 체조시간에 학생들이 공수빙허空手憑虛하고 있다며, 쓰지 않는 총 50병을 보내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1906년 9월 관립고등학교 교감은 군부에 보고하여 체조교사 육군 참위 안재목安載穆·정인영鄭仁永 등이 나오지 않고 있다며, 다른 체조교사를 보내 줄 것을 요청했다. 註198) 그런데 군부는 1906년 9월 각 관립어학교의 체조를 견습 위관들이 담당해오던 것을, 돌연 하사관 참교參校 2명에게 가르치도록 하였다. 이에 위관들이 하사관에게 체조를 가르치게 하면 학생들이 순종치 아니하고 교육상 방해를 끼칠 것이라며, 극렬 반대하여 결국 위관들이 체조를 계속 가르치게 되었다. 1906년 12월 관립한성고등학교 학생들은 조총을 매입하여 학도들이 이를 가지고 체조를 하기도 했다. 註199)

1907년 8월 군대 해산 이후에는 전직 무관들을 회유하기 위해 중등학교의 촉탁 체조교관으로 임명하기로 했다. 그 결과 전 무관 중에서 체조사무에 원숙한 사람을 1명씩 뽑아 학부에 통보하였다. 註200) 이에 따라 전 육군 정위 어영선魚暎善은 9월 12일 한성사범학교, 전 육군 참위 서상팔徐相八은 관립법어학교 체육교사에 촉탁되었다. 철원군 내에 있는 공사립학교에서는 체조를 가르칠 교원이 없었는데, 서울에 사는 전 정위 이범한李範漢이 공립보통학교 체조를 담당하였다. 註201)

한편 1907년 9월 통감부는 각 관립보통학교 교원들을 교동보통학교에 모아놓고 2주일 정도 체조강습회를 실시했다. 1908년 9월경에 통감부는 병식체조를 대체할 새로운 체조를 보급할 목적으로 관립한성사범학교 체조교관으로 동경고등사범학교 체조 전수과를 졸업한 전전심태랑前田甚太郞과 횡지사차랑橫地捨次郞 등을 고빙하였다. 그리고 한성사범학교에서 서울지역내 관립보통학교 교장 이하 한인 35명을 대상으로 체조 강습회를 개최했다. 註202)

통감부는 전전심태랑·횡지사차랑 등에게 1909년 2월 『학교체조 교수서』를 편찬토록 했다. 『학교체조 교수서』 서문에 따르면, “종래 많은 학교에서 체조 과목을 개설하였으나, 병식체조의 일부를 가르치는 것에 그칠 뿐 다른 것을 가르치는 것이 거의 없어, 지난번에 관립한성사범학교와 한성고등학교에 고빙한 학교체조 전공의 교수들에게, 먼저 보통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체조를 조사케 하고, 서울 소재 관립보통학교 교원을 대상으로 체조강습회를 개설하였으나 강습 기간이 짧고, 주로 보통학교 교사들을 대상으로 실시했으며, 겨우 각개연습의 일부와 연속연습의 일부에 그쳤을 뿐이다. 이에 강습한 사항을 증보하여 보통학교와 고등 정도의 학교에서 다 같이 가르칠 교과서를 편찬”한다며 편찬 목적을 밝혔다.

1909년 6월 횡지사차랑橫地捨次郞은 관립한성고등학교 학생들에게 곤봉체조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1909년 4월 풍금을 이용한 체조를 실시하고 이를 관립보통학교 학생들에게 참관시키기도 했다. 註203) 1909년 7월 각 학교령규칙을 개정하면서, 모든 관공립학교는 병식체조 과목을 빼버리고 ‘유희 및 학교체조’를 가르치도록 했다. 이와 같이 관공립학교는 통감부의 의도한 바대로 병식체조는 학교체조로 대체되어 갔다.

사립학교에서는 여전히 중등학교뿐만 아니라 초등학교에서도 병식체조가 실시되었다. 1906년 5월 흥화학교에서는 명예 체조교사로 정위 정현鄭炫, 참위 김교익金敎益 등이 정교 박경운朴慶運·부교 강춘성姜春成를 대동하고, 학생 100여 명을 양대兩隊로 나누어 병식체조를 가르쳤다. 이는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이러한 경향은 일반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1906년 7월 음성군에 설립한 학교에서는 무관학교를 졸업한 이 참위를 초빙하여 체조를 가르쳤다. 註204) 1906년 7월 풍덕군 광무학당光武學堂은 학당장 육군 노백린의 도움으로 병식체조가 실시되었으며, 졸업식에서 학생 55명이 병식체조와 애국가로 행사를 치르기도 했다고 한다. 註205) 그 결과 1906년 의주에서는 병식체조를 하기 위해 교외를 행보하던 학도와 일본군대 사이에 충돌 사태가 벌어지지도 했다.

사립학교에 병식체조가 파급되게 된 것은 1907년 7월 해산된 대한제국 군인들이 각기 고향으로 내려가 사립학교 설립운동에 참여하거나 교사가 되면서, 학교에는 군대 나팔과 북으로 된 악대가 조직되었고, 악대가 나팔을 불고 북을 두드리는 가운데 학생들은 목총을 매고 군대식 훈련을 받았던 것이다. 註206) 또한 통감부는 보통학교뿐만 아니라 다른 관공립학교도 1909년 7월 각 학교령 시행규칙을 개정하면서, 체조는 보통체조와 병식체조 대신에 ‘유희遊戱 및 학교체조’로 스웨덴 체조를 실시토록 했다. 註207) 이에 양정의숙은 숙장 엄주익의 지시에 따라 체조과를 특설하고 육군 정위 안준호安晙鎬와 참위 정규환鄭圭煥 등이 학생들을 가르쳤다. 1908년 5월 지평군에 설립된 개진학교開進學校의 체조교사로 전 참위 김세중金世中이 부임하였다. 註208)

사립학교의 병식체조 교육은 군대해산 이후 해산된 군인들이 각 사립학교 교사로 고빙되면서 더욱 강화되어 갔다. 그 결과 1908년 5월에는 의주 일본수비대와 학생간의 충돌 사건으로 4명의 학생이 부상을 입기도 했다. 또 평남 영유군의 사립 이화학교李花學校에서는 교육구국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교과과정을 나팔과喇叭科·대고과太鼓科·체조과 등 3과로 편성하였는데, 이는 무장항일운동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註209) 이와 같이 사립학교에서 실시된 병식체조는 운동을 넘어서 반일사상을 고취시키는 역할을 담당했다. 따라서 통감부는 1908년 이후 이를 적극 저지하기 시작했다. 표손일은 사립학교의 설립 동기는 여러 가지이지만, “귀착되는 것은 일본과의 보호관계를 일탈하여 독립의 열매를 얻고자 하는” 경우의 반일사상운동이고 거기에서 행해지는 교육은 “쓸데없이 비분격월悲憤激越하는 정치론을 농弄하고 편협고루한 애국심을 도발하여 나팔을 불고 북을 치는 병식체조를 하는 것을 교양의 본의와 심득단려무모心得短慮無謀의 행동을 충용의열忠勇義烈 행동으로 보는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며 사립학교 교육을 ‘사이비 교육’이라 폄하했다. 註210)

1908년 8월 26일 통감부는 칙령으로 ‘사립학교령’이 공포된 후, 사립학교령에 대한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8월 28일에 학부 훈령 제2호를 공포하여 사립학교령을 시행하게 된 목적 및 취지를 선전하였다. 註211) 사립학교에서 나팔을 불고 징과 북을 울려 세인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또는 병식체조와 호외운동에 열심하여 일반 수업을 소홀히 한다며, 이러한 것은 실로 교육의 보급을 해하고 그 본지를 그르치는 것이라며, 사립학교의 ‘폐풍’을 없앨 것을 지시했다.

1908년 10월 학부차관 표손일은 사립학교와 학회 대표자들을 모아놓고 “학교는 덕육·지육·체육을 가르치는 곳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팔을 불고, 조련을 하며, 북을 두드리는 것으로 과정을 삼는가 하면, 혹은 학교에서 학술을 가르치지 않고 날마다 야외 유희만 전념하는 자가 있다. 이러한 것은 한국 교육의 목적일 수가 없다”며 이를 중지할 것을 지시했다. 註212)

통감부는 1908년 11월 평안북도 곽산·선천·정주 등 각군 학교에서 병식체조만 연습하는 것이 교육계에 부적당이라 하여 이를 중지토록 했다. 註213) 학부도 “다수 학교의 상태를 봄에 생도에 대해 참된 교육을 행하는 유효적절한 지식 기능을 가르치는 것을 행하지 않고 쓸데없이 체조 연습을 행하는 데에 전념하고 또는 야외 연습 혹은 소풍 등을 행하는 것이며, 자주 나팔을 불고 북을 치면서 대열을 지어 행진하는 것은 학교 교육의 제일로 여겼다”고 비판하였다. 註214)

사립학교에서 병식체조 교육을 쉽사리 수그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일제의 한국침략 야욕이 강화될수록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병식체조는 인식되었다. 대성학교는 교육방침을 건전한 인격함양, 애국정신이 강고한 민족운동자 양성, 국민으로서 실력을 구비한 인재육성, 강장한 체력훈련으로 되어 있었다. 이러한 교육방침에 따라 민족정신의 고취와 강장한 체력훈련을 위해 체조가 중시되었다. 그 결과 당시 체조교사는 원래 군대 사관으로 이름을 드높였던 철혈鐵血의 정인목鄭仁穆이었는데, 그는 군대식으로 학생들을 교련했다. 눈이 쌓인 추운 겨울철에는 광야에서 체조를 시켰으며, 쇠를 녹이는 폭염 속 여름철에는 전술 강화 훈련을 하였고, 가끔씩 야간에 비상 소집령을 내려 험산 계곡에서 담력을 기르게 하였으며, ‘장하도다 우리 학도 병식행보가’를 부르며 행진하곤 했다고 한다. 註215)

이렇듯 사립학교에서 한국의 현상 타파와 국권회복을 목표로 왕성하게 나팔을 불고 북을 울리며 병식조련이나 연합운동회 등 시위적 행동을 감행하고, 교내에서 시사를 논의했기 때문에 일제는 불온한 현상이 심히 왕성하다고 파악했다. 나아가 이런 일이 가국家國을 위태한 역域으로 내몰고 있다며, 이같은 한국 민심의 추향趨嚮을 결코 그대로 둘 수 없다는 생각을 굳히고 대응책을 모색했다. 그렇지만 교육열의 발흥이 매우 왕성하였기 때문에 억압 강제를 가할 경우 오히려 민심의 분요紛擾를 더욱 양성할 것이라 우려하고, 탄압 방안을 다각도로 모색했다. 註216)

통감부는 사립학교령을 근거로 학교 인가를 불허하거나 폐교 조처를 내리기도 했다. 1909년 12월에는 일반 학계에 체육을 완전하게 한다는 명분으로 봉명학교 내에 사범체육강습소를 설치하여, 사립학교 교사들에게 체조를 교육시켰다. 그 결과 각 학교의 체조는 일정한 법식法式 없어 생리상 신체교육에 적합한 최신 체조법을 개발·보급하게 되면서 병식체조는 교과과정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註217)


(2) 창가 금지

‘창가’ 과목은 1895년 소학교령에서는 빠져있었지만, 기독계 계통의 학교에서는 찬송가 위주의 창가 교육이 이뤄지긴 했었지만, 본격적으로 사립학교에서 창가교육이 이뤄지고 있었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이후이다. 이러한 사회적인 상황에 따라 통감부는 보통학교령에 창가를 수의 과목에 포함시켰다. 하지만 창가를 가르칠 만한 교재와 교사가 없었기 때문에 실재 수업이 이뤄지지는 못하였다. 이러는 상황에서도 사립학교에서는 『심상소학창가尋常小學唱歌』1905·『신편교육창가집新編敎育唱歌集ː』1906 등의 일본 창가 교과서들이 이용되기도 했다.

그뒤 1905년 12월 을사늑약 체결 이후 자결한 민영환을 추도하거나 그의 충절을 기리는 창가들이 사립학교에서 불려지곤 했다. 1905년 12월 영어학교 학생들은 순절한 민충정공의 뜻을 받들어 국민 모두가 합심하여 자주 독립의 길을 찾아야 한다며, 각성을 촉구하는 창가를 부르기도 했다. 또한 1906년 2월 계산학교 학생들은 민충정공의 순국기념식전에서 투철한 독립정신을 일깨우는 내용의 「애도가哀悼歌」를 불렀다. 註218)

통감부 설치 이후에는 학생으로서 본분을 다해 나라를 자강시켜 나가자는 내용의 창가가 학교를 중심으로 불려지곤 했다. 1906년 6월 광화학교光華學校 학생들은 대한大韓 의무를 생각하여 세계열강들이 각축하는 지금 열심히 공부하는 것만이 자강책이요, 황은皇恩에 보답하는 길이라는 내용의 창가를 불렀으며, 1907년 10월 육영학교에서는 현하 혼몽昏夢 속에 있는 나라를 깨우기 위해, 모두가 일편단심 굳게 마음 먹고 학문 연마에 힘쓰자는 결의를 다지는 창가를 부른곤 했다. 註219) 또한 1907년 10월 공옥소학교 학생들은 나라의 동량이나 나라의 방패가 되어 우리의 국권을 지키는 일에 앞장서자는 내용의 행보가行步歌를 불렀으며, 1908년 3월 연안군 연흥학교延興學校에서는 개교식에서 학도들에게 어서 신학문을 익혀 개화하여 자유와 독립을 이룩하자는 결의를 다지는 내용의 창가를 불렀다. 1908년 3월 대동학교大東學校에서는 개교식에서 시부표책詩賦表策을 학습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 신문명 지식을 배워 우리 손으로 나라를 이끌어가야만 한다는 내용의 창가를 불렀다. 註220) 특히 대성학교에서는 매일 아침 엄숙한 조회 시간에 ‘애국가’를 부른 뒤에, 애국에 관해 훈화를 듣곤 했다 한다.

사립학교에 국권회복·애국사상을 고취하는 창가가 급속히 퍼지자, 1908년 6월 학부 차관 표손일은 전국의 관공립학교에서 유행하는 동요 현황을 조사토록 지시했다. 그래서 외본번길隈本繁吉이 2주간에 걸쳐 북부지방의 기독교학교를 시찰하였다. 그의 보고에 의하면, 소학교의 교수시간은 기도·계명誡命·성서 등에 할당되며, 나머지 시간은 보통 교과목을 배우고 있으나, 특히 창가와 체조에 할애하고 있다고 했다. 註221) 창가 가사는 찬미가가 아니라 애국가에 속하며, 체조는 운동이란 과목에 나팔과 북을 사용하여 병식훈련을 주로 한다는 것이었다.

사립학교뿐만 아니라 공립학교에서도 국권회복을 위한 창가들이 유행하고 있었다. 1909년 5월 통감부는 서울 시내 각 학교의 창가 가사 가운데 시의時宜에 타당하지 않은 어구를 삭제토록 지시했다. 註222) 이에 1909년 6월 평안도와 함경도내 각 사립학교에서 불려지던 창가 중에서 정신가精神歌와 동포경성가同胞警醒歌는 교육상에 부적당하다며 이를 금지시켰다. 1909년 7월 한성부윤 장헌식張憲植은 한성내 각 사립학교장에게 타당하지 않은 가사歌詞를 사용하는 것은 교육의 범위를 벗어난 것이라며 이를 사용하지 말 것을 주지시키고 직원·학생들에게 엄칙하도록 당부했다. 1909년 7월 전남관찰사 신응희申應熙는 도내 각 공사립학교에 애국사상을 포함한 창가를 금지할 것을 지시했다. 註223) 하지만 충남도내의 각 사립학교에서 는 이를 금지하지 않고, 오히려 『유년필독幼年必讀』 중에 게재되어 있는 「독립가」·「혈죽가」 등의 격월激越한 창가를 가르치기도 했다.

통감부는 창가를 탄압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음악적인 창가를 가르치고자 하여 창가집을 편찬·보급하고자 했다. 우선 한성사범학교 음악교사인 소출小出에게 보통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창가를 가르치도록 하였다. 한편으로는 창가를 사전에 차단시키기 위해 창가집 편찬을 서둘러 1910년 5월 『보통교육창가집』을 처음으로 간행했다. 註224) 『보통교육창가집』은 총 27과로 이뤄져 있으며, 학부가 편찬한 『국어독본』의 운문에 곡을 붙인 것이나, 서정시나 서사시, 그리고 생활이나 노동에 가사를 붙인 학도가·권학가·농부가·수학여행·공덕가·운동가·졸업식 노래 등이 실렸는데, 보통학교·사범학교·고등학교·고등여학교 등 학년이나 학급의 구분 없이 모든 학교에서 가르칠 목적으로 편찬되었다.

통감부는 『보통교육창가집』을 학교는 물론 가정에서도 구입하도록 권유하기도 했으며, 이를 보통학교에 보급하기 위해 갑종공립보통학교에 대여하였으며, 사립학교에는 설립인가 절차를 마친 학교에 배부토록 지시했다. 또한 통감부는 1910년 3월 각 관공사립학교의 창가가 통일되지 못하고, 과극 過極한 격동적 언사가 많다 하여 『창가집』을 1910년 5월에 출간하고, 창가집을 경향 각 보통학교에 1권씩 배부했다. 1910년 7월 통감부는 학부에서 편찬한 창가 교과서를 각 사립학교에 1부씩 반급·사용토록 지시하였다. 註225) 그 결과 점차 사립학교에서 애국적 내용의 창가가 사라지게 되었다.

 

(3) 연합운동회 규제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운동회가 열린 것은 1896년 5월 2일 동소문 밖 삼선평에서 영국인 교사 허치슨의 지도하에 영어학교 학생들이 화류회花柳會를 개최하면서 비롯되었다. 註226) 그뒤 1896년 5월 31일 훈련원에서 관립소학교 운동회가 개최되었는데, 이날 학부대신을 비롯한 한성판윤과 독립신문 사장 등 인사들이 참석했다. 註227) 당시 운동회에서 어떤 내용을 가지고 행사를 치렀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학생들이 애국가를 부른 뒤 운동회는 끝을 맺었다. 그뒤 관공립소학교는 매년 4~5월경에 훈련원에서 학생과 교원 1,000여 명이 모여 체조를 하고 운동회를 열었다. 1897년 4월경에는 그리고 당시 귀빈으로 참석한 학부대신 민종묵, 한성 판윤 이처연, 독립신문사 사장 등은 한국 국기의 중요성, 자주독립, 민족의식의 각성 등을 역설하여, 운동회를 통해 민족의식을 각성시키고 자주독립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에 필요한 경비는 학부에서 전담하기로 하였지만 신문에 보조금을 보내줄 것을 광고하여, 정부 관료, 군 장교, 학교 교관 등의 보조금으로 충당하거나 운동회를 참관하려는 사람들에게 입장권 1장에 1냥씩 판매하여 필요한 경비를 보조하기도 했다. 註228) 1899년 4월부터는 사립학교도 관공립학교와 더불어 연합운동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당시 연합운동회에서는 각 학교별 대항 육상경기가 주된 운동 종목이었으며, 체조시간에 주로 배웠던 병식체조 또한 운동종목 가운데 하나였다. 註229)

한편 1898년 5월에는 각 외국어학교별로 치러지던 운동회가 6개 학교가 연합해서 개최되었는데, 경기 종목은 100보·200보 경주청년부·소년부, 고도高跳, 이인삼각, 방울 맞추기 등이었으며 여흥적인 종목은 없었다. 당시 관립외국어 학교는 연합대운동회를 훈련원에서 개최하였는데, 입장권을 20전에 판매하여, 註230) 그 수익금을 빈민구호에 사용했다. 註231) 당시 외국어학교 연합운동회에서는 달리기 경주, 당나귀 경주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군사훈련 등도 실시되곤 했다. 註232)

하지만 1900년 이후 정부의 재정 부족으로 연합운동회에 필요한 경비를 지원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고, 그 결과 연합운동회는 개최되지 못하였다. 관공사립학교 연합운동회가 재개된 것은 1906년 5월 통감부 설치 이후이다. 註233) 당시 통감부는 연합운동회를 통해 모범교육의 정책을 홍보하는 수단으로 이용하고자 하였으며, 황태자·이등박문·각부 대신들이 직접 참관할 정도로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당시 연합운동회에는 각 소학교 31개교의 교장·교사·학생 4,0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훈련원에서 개최되었는데, 이날 순검 10명과 헌병 10명이 파견되어 약간 긴장된 상황 속에서 운동회가 치러졌다. 註234) 운동회는 주로 100보·200보 장애물 경주·제광提筐 경주·계산計算 경주·광도廣跳·고도高跳·기취旗取·납승拉縄 등이 각 학교 대항별로 치러졌다. 이때 인천 영화학교永化學校에서는 학생들 전원이 단발하고 총과 나팔까지 갖춰 병식체조를 선보여 우승을 차지했다. 관공립학교에서 병식체조는 학교 교과과정에 포함되어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운동회의 한 종목으로 채택되었다. 또한 외국어학교에서도 연합운동회가 재개되어 동소문 밖 봉국사에서 광도廣跳, 멀리뛰기·고도高跳, 높이뛰기·경주·인승引縄, 줄다리기·척구踢球, 축구 등 근대 스포츠 경기로 운동회를 치렀다. 註235)

1906년 이후에는 지방에서도 연합운동회가 개최되기 시작했다. 지방 사립학교는 지역 유지의 지원, 학교 찬무원들의 의연금 註236) 혹은 계몽운동 단체의 주도하에 2~3개 군의 연합운동회가 개최되었다. 당시 연합운동회는 관람하기 위해 모여든 수많은 사람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애국정신을 일깨워주는 장소로 변화되어 갔다. 곧 연합운동회는 애국가로 시작을 알렸고, 각 구국운동단체들이 애국심을 고양시키는 연설을 개최하여 민족적 일체감을 형성하고 계몽사상을 고취시키는 지역 행사로 자리를 잡아갔다.

1906년 4월 계산학교桂山學校 춘기 대운동회가 학생 80여 명이 모인 가운데 동문 밖 탑동 승방 등지에서 개최되었는데, 명예교사 육군 참위 조원희趙瑗熙·서상팔 등의 지도하에 학생들의 병식체조 연습을 선보였으며, 이외에도 달리기와 창가 경연대회가 열렸다. 인천 영화학교永化學校에서 열린 춘기운동회에서는 기예技藝나 혹은 접전接戰 등을 연극으로 연출하였다. 註237) 1906년 5월 국민교육회가 설립한 국민사범학교는 동대문 밖 영도사永道寺에서 운동회를 열고 기취旗取·경주競走·광도멀리뛰기·고도높이뛰기·각희角戱, 씨름·창가 등을 겨뤘으며 남대문 내 사립 광성학교光成學校는 홍제원 등지에서 춘계운동회를 열고 작문과 산술 경시대회를 개최했다. 註238)

지방은 연합운동회를 개최하는 경우가 많았다. 충북 음성군의 한 학교가 충주지역 학교 연합운동회에서 참가하였지만, 체조가 미비하자 무관학교를 졸업한 이 참위가 5~6일 동안 학생 30여 명을 모아놓고 운동회를 특별히 개최했다 한다. 註239) 1906년 이후에는 운동회에 운동가가 등장하여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키는 한편, 충국애국정신으로 독립주권을 회복하자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단순히 운동회를 유희로 생각하기 보다는 체력을 기르고 정신 무장을 다지는 것으로 인식한 것이다. 1906년 6월 남양군에 있는 보흥학교와 공립남양소학교가 연합운동회를 치른 후에, 군수와 학교 교감 등이 만세 삼창을 하고 운동가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註240)

당시 운동가는 체육이 문명의 기초이며, 충군애국하는 마음으로 독립주권을 공고히 하여 태극기를 오대주에 빛내보자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註241) 곧 1906년 6월에는 문무를 겸비한 학도야말로 나라의 주권을 튼튼히 하는 반석이란 점을 상기시키고, 나라와 황제폐하·태자, 그리고 학교의 만세 무궁을 위헤 우리 모두 체력을 길러한다는 운동가가 불려졌으며, 또한 1906년 10월 삼선평에서 열린 관립한성고등학교에서 불려진 운동가는 ‘성천자聖天子의 은덕으로 문명교육 받았으니 일취월장 더욱 힘써 동량기초’가 되자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 註242)

이렇듯 연합운동회가 독립의식을 고취시키고 민족의식을 고양시키는 장소로 성격이 변화되어 가자, 통감부는 1906년 10월 추계운동회부터 관공사립학교 연합운동회의 참가 대상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예로 관공사립학교 연합운동회의 참가 학교에 대해서 단발을 강요한다든가, 구국운동에 참여하는 학교를 제외시켰다. 그 결과 1907년부터는 운동회에서 병식체조가 사라졌다. 이렇듯 관사립학교연합운동회에 통감부의 간섭이 심화되자, 개별적으로 운동회를 치르거나 사립학교들이 연합하여 운동회를 개최하는 경우가 증가하였다. 곧 1906년 10월 계산학교 교장 이하 인사들은 통감부의 이러한 규제에 반발하여, 각 사립학교를 연합하여 추기연합운동회를 개최했다. 註243)

1907년 5월 2일 1500환을 들여 관·사립학교 학생 3,300여 명이 훈련원에서 연합대동회를 개최하였는데, 각부 대신들이 참석했다. 註244) 이날 고종황제는 연합운동회에 시종무관侍徒武官 어담魚潭을 보내 각 임원과 학생들을 위로하고 장려하기도 했다. 연합운동회에 참가한 수천 명의 학생들은 연합체조·각학교체조·기취旗取·구습毬拾·파구破球·이인삼각·도보경주徒步競走·기마경주 등을 겨루었다. 註245) 그런데 통감부는 각 학교의 운동가가 다르다는 이유로 군부 주사 김유탁金有鐸이 작사한 각 학교 운동가로 통일시키고자 했다. 또한 통감부는 연합운동회에 다른 각종학교에서 운동회에 참관하기 위해서는 학부로부터 허입표를 발급받도록 하고서는, 구국운동을 펼치는데 앞장섰던 상동청년회 학교에는 초대장을 발급하지 않는 등 철저히 배제시켰다. 상동청년회 학생들이 군복 같은 정복을 입고 운동시간에 체조를 가르친다는 구실이었다. 註246)

1907년에 들어서는 각 지방 사립학교 연합운동회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이는 기독교계 사립학교들이 많이 설립된 황해도·평안도의 사립학교가 서우학회 혹은 한북학회 등의 역할로 서로 유대를 갖기 용이했기 때문이다. 이후 연합운동회는 민족적 위기 상황에서 민족의식을 각성시키는 연설이 또 하나의 목적이기도 되었다.

특히 1907년 3월 평안도 각 학교 연합운동회가 관찰사 이시영李始榮, 강서군수 이우영李宇榮 등이 발기하여 개최되었다. 학생을 비롯한 참관인이 2만여 명에 달하였으며, 운동회 개최 다음날에 명륜당 앞에서 연설회를 개최하여 유원표劉元杓·이동휘李東輝·안창호安昌浩·김명제金明濟 등이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1907년 5월 황해도의 은율·안악·문화·신천·재령·봉산 등 6개군에 있는 15개 학교 학생 300여 명이 재령군 시장에 모여 개최된 연합운동회에서, ‘독립기초를 공고히 하자’는 주제로 연설회가 개최되었다. 註247)

서울에서는 1907년 4월 27일 관사립학교연합운동회와는 별개로 사립학교 17개교 1,400여 명이 훈련원에 모여 연합운동회를 개최했다. 1907년 5월에는 한북학회 회장 오상규吳相奎의 도움으로 서북학생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처음으로 연합운동회를 동소문 밖 삼선평에서 개최했다. 註248) 1907년 5월 서북연합운동회 주최로 돈화문 밖 삼선평에서 서북인 가운데 각 학교에 유학하는 학생들을 모아 운동회를 개최했다. 이때 안창호는 국권상실에 처한 나라 운명의 위급함을 지적하고, 우리나라를 침해하는 열강과 개전開戰하여 국권을 회복할 것을 주창하기도 했다. 1907년 5월 여학교에서도 각 학교가 연합하여 장춘단에서 운동회를 개최했다. 註249)

1907년 10월 광무황제가 폐위된 이후 처음 열리는 연합운동회 경기종목은 이전과 별다른 차이점은 없었으나, 통감부에서는 연합운동회에서 특별히 주의할 규칙을 정하여 참가자들의 반일감정을 사전에 차단하고자 했다. 註250) 이에 따르면, ① 운동과목을 집행하는 장내에 진입하거나 통행할 수 없다, ② 운동학부사령심판시상소 및 각 위원 처소에 진입하거나 내왕할 수 없다, ③ 회장의 허가와 접대원의 인가가 없으면 대청大廳에 진입할 수 없다, ④ 부득이한 사고로 운동장 외에 출입하는 때는 경호원의 허가를 받을 것, ⑤ 휘장은 각기 지정처에 부착하여 표식에 편리케 할 것, ⑥ 숙정肅靜을 주장하여 타인의 시청視聽을 현란케 하지 말 것, ⑦ 이상 여러 사항을 주의치 아니하는 때는 경호원의 지휘를 복종할 것 등이었다.

관공사립학교 추계연합운동회는 황태자·이등박문 등이 참석한 가운데 1907년 10월 26일에 개최되었다. 이때 광무황제는 다음과 같은 칙어를 내렸다.


짐朕이 유惟컨 운동회運動會 소년자제少年子弟의 체육장려體育奬勵을 위爲이니 정신精神을 유쾌愉快히 고 협동일치協同一致의 덕성德性을 함양涵養 양법良法이라 금일今日 훈련원訓鍊院에셔 관광사립연합운동회官公私立聯合運動會 설행設行을 문聞니 임원任員급及 학원學員등等은 공명정대公明正大 행동行動을 작作야 반다시 기其 목적目的을 달達을 신愼라. 내자시신乃玆侍臣을 유遺야 기其 실황實況을 시찰視察케 노라 짐朕이 시신侍臣의 복명復命을 대待야 양호良好 성적成績을 문聞코져 노니 유이임원惟爾任員 급及 학도學徒 등等은 열성熱誠을 용用야 국민체육國民體育의 선도자先導者가 될 모범模範을 전국全國에 시示을 기극期克히 기공其功을 완完지어다. 註251)


통감부는 융희황제의 칙령을 통해 연합운동회의 성격을 단순히 소년자제의 체육장려를 위한 것이며, 정신을 유쾌하게 하고 협동 일치의 덕성을 함양하는 양법良法이라 하여, 사립학교 운동회에서 군사훈련이나 병식체조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고자 했다.

통감부의 철저한 통제 속에서 치러진 추계연합운동회는 이전에 발생했던 여러 가지 문제점, 곧 학교의 정황이 능히 발전하지 못하여 체조 및 운동이 불완전하여 연합운동회를 개최하면서 관·공·사립을 차별하여 심판하고, 시상 등의 경우에도 불공평함이 비일비재하여 관사립학교간 융화되지 못하였고 상호 정신상 이탈하는 폐해로 상호 융화가 어려웠다. 그러나 1907년 추계 연합운동회에서는 관사립 각 학교의 정황도 전과 비교하여 확장되었으며, 학생의 기예도 대단히 진보되었다. 註252) 1907년 10월 관사립학교 연합운동회에 참석하기 위해 개성군의 개성학교 학생 100여 명이 상하의를 흑색으로 맞춰 참가하는 등 많은 변화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註253)

통감부는 1908년 봄 이후부터 연합운동회를 춘추 2회로 제한하고, 연합구역을 1개 군 혹은 한 지방에 국한시켰다. 註254) 이에 따라 1908년 5월 4일 학부고관들과 각 학교장들이 모여 운동회 절차를 협의하였는데, 학무국장 윤치오尹致旿가 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학부차관 표손일은 형식을 통일시키기 위해 치발薙髮하지 않은 학생을 강제로 삭발하지 말 것을 지시했으며, 다만 지방학교 학생들의 참가를 불허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註255) 또한 학부 인가를 받지 않은 사립학교에 대해서는, 임원·학생수·학생 신장 등을 보고한 학교에 한해서만 운동회에 참가할 수 있도록 했다. 이에 연합운동회에 참석하려던 평양의 각 학교에서는 뜻을 접어야만 했다. 또한 이를 통지 받지 못하고 상경하여 연합운동회에 참석하려했던 영유군 이화학교 학생들은 서북학생연합운동회를 훈련원에서 별도로 개최하기로 했다. 註256)

1908년 이후 지방 사립학교의 관사립학교 연합운동회 참가가 차단되면서, 지방 사립학교의 연합운동회가 계몽운동 단체의 주도로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경향을 띠기 시작했다. 1908년 4월 인천에서는 관공사립학교 연합운동회를 송림동 후원에서 개최하여, 관립일어학교, 공립보통학교, 사립 영화·인명·박문·일신학교를 비롯하여 사숙 10여 학교, 900여 명이 참가하였는데, 관람자가 3만 여명에 달하였다. 註257) 1908년 5월 28일에는 개성 만월대에서 군내 각 공사립학교 학생 890여 명이 모여, 계산計算·제등提燈·취물取物·고도高跳 등의 운동 경기를 펼쳤다. 서북학회에서는 각군에서 개최되는 연합운동회를 주도하였다. 1908년 5월 7일 안주군에서는 각 학교 50여 개교, 3,000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 연합운동회를 개최했다. 1908년 5월 평안도 연합운동회에는 147개 학교 4,400여 명이 참석할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註258) 1908년 평양에 있는 각 학교의 5,000~6,000여 명 학생들이 1만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연합운동회를 개최하였는데, 특별한 ‘적개사상敵愾思想’이 ‘활활발발活活潑潑’했다고 한다. 註259)

특히 1908년 5월 14월 강화군 내에 있는 보창학교를 비롯한 80여 개 학교와 인천 통진학교가 연합하여 개최한 운동회에서는 남녀학생 2,600여 명이 참가하였으며, 관람자는 1만여 명에 달할 정도로 대성황을 이루었다. 이날 운동회 마지막 행사로 학생들은 양 진영으로 나뉘어, 종이와 나무로 만든 대포와 총포로 모의전투를 치르는 등 군사훈련에 가까울 정도였다. 註260)

이등박문은 “최근 학교의 운동회라는 것이 각지에서 행해지고 있지만, 이러한 천박한 방법으로 애국심을 고취시키고자 하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일이다. 학교 운동회는 국가를 지키는데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 그런데 이를 장려하여 배일주의를 외치고 다니는, 어리석은 행동이 한국에 이익이 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는다. 그저 학교 학생과 일본군과 충돌을 야기시킬 뿐이다. 깊이 반성해야 할 것이다”라며 배일적인 성격의 운동회에 대해 매우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1908년 9월 통감부는 학부훈령을 공포하여 사립학교 학생들에게 단발을 강제토록 하고, 나팔을 불고 징이나 북을 울리며 행진하거나, 병식체조 및 호외운동戶外運動에 열중하고 대규모의 운동회를 개최하여 수업을 소홀히 하지 말 것을 경고했다. 1908년 9월 23일 각 사립학교 추계연합운동회가 훈련원에서 개최되었으며, 10월 4일에는 기호학교畿湖學校에서 추기운동회가 동문 밖 탑동에서 개최되었지만, 군사훈련이나 병식체조와 같은 운동 종목은 지양되었다. 반면 사백보경주四百步競走·계산경주計算競走·광도廣跳·양인삼각兩人三脚·기마경주騎馬競走·각저角觝 등 순수한 운동 경기만이 겨루어졌다. 註261)

1909년 5월 20일 의주군에서는 46개 학교, 2,000여 명의 학생들이 참가한 가운데 연합운동회를 개최하였다. 당시 관중은 만여 명에 달했다. 이때 결사대와 기마돌격으로 청홍 두 부대로 나눈 뒤, 모의 전투를 전개한 점으로 미루어 여전히 지방에서는 군사훈련과 같은 운동회가 전개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註262)

이와 같이 통감부의 훈령에도 연합운동회의 성격이 군사훈련을 방불케 할 정도로 변화되어 가자, 통감부는 1909년에 들어서는 일본군 헌병들이 각 학교 운동회를 단속하기 시작했다. 1909년 6월 22일에 평북 귀성군 7개 학교 학생, 120여 명이, 참석자 500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운동회를 개최하는데, 헌병 상등병과 보조원 2명과 주재소 순사 5명이 이를 단속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운동회가 끝날 무렵에 희명학교熙明學校 한문교사 김병조金秉祚가 교육에 관한 연설을 하는 도중에 우승열패·약육강식 등의 정치적인 발언을 하자, 순사들은 연설을 금지시키고 운동회를 중지시켜 버렸다. 註263)

1909년 9월 함남 명천군에 거주하던 이용익의 손자인 이종한李鍾漢은 자비를 들여 경성·명천·길주·성진·단천 등 각 군내 학교의 연합운동회를 개최하고자, 명천에 있는 성진학교成進學校와 군수·경찰서·재무서 등에 초대장을 발송하였으나, 관찰사는 각 학교에 훈령하여 운동회 참석을 금지시켰다. 1909년 12월 통감부는 각 지방 관공사립학교에 1910년도부터 연합운동회를 일체 폐지토록 지시했다. 註264) 다만 1910년 1월, 통감부는 1908년 사립학교령 반포와 더불어 사립학교 연합운동회에 대하여 ‘계유경고戒喩警告’하였으나, 여전히 지방에서 연합운동회가 개최되자, 관공사립학교를 막론하고 각 학교별로 운동회를 개최하되 단 하루 동안만 실시할 것을 지시했다.

표손일은 연합운동회를 ‘완연한 무장적 시위’라 단정하고 결국 1910년부터 연합운동회를 폐지시켰다. 註265) 하지만 통감부에서는 1910년 8월 25일 ‘집회취체에 관한 건’을 공포하여 정치집회 및 3인 이상의 옥외집회를 일체 금지하였으나, 경술국치 이후인 1910년 9월 교회설교와 학교체육운동회는 옥외집회금지에서 해제되었다. 註2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