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제6장 수출입상품가격체계의 변동과 수출입무역, 개항후기(1895~1904)의 가격체계와 수출입무역/제2권 개항 이후 일제의 침략

몽유도원 2013. 1. 14. 09:37

제6장 수출입상품가격체계의 변동과 수출입무역


개항전기(1876~1894) 상품가격체계

개항후기(1895~1904)의 가격체계와 수출입무역


2. 개항후기(1895~1904)의 가격체계와 수출입무역

1895~1904년에 이르는 시기는 전시기와 달리 수출입 상품에 큰 변화가 있었다. 수출품은 역시 쌀과 콩을 중심으로 한 농업생산물이 주종을 이루었지만, 수입 자본제 상품은 금건金巾 위주에서 일본목면·씨이팅·방적사 등 다양한 형태를 띠었다. 영국산 금건金巾의 중계무역을 놓고 일본과 청국이 대립하던 단계에서, 일본산 섬유제품이 여전히 금건金巾의 중계무역을 위주로 하는 청국을 압도하면서 조선의 면포시장을 장악해 나갔던 것이다. 일본은 목면과 같은 완제품만이 아니라 반제품半製品인 방적사도 대량으로 수출함으로써 조선의 면업생산구조를 뒤바꾸어 놓았다.

〈표 22〉·〈표 23〉·〈표 24〉는 각 개항장별로 이 시기 대표적 무역상품의 수출입가액과 단가를 엔화가격과 한전가격으로 표시한 것이다. 이 표에서 먼저 주목할 점은 씨이팅의 경우 인천항만 표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부산과 원산에도 씨이팅의 수입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양이 극히 적어 통계로 추출할 경우 단가에서 일관성을 얻기 어려워 표로는 구성하지 않았다. 청국상인이 영국과 미국제, 그리고 청국제 씨이팅을 들여오긴 했지만 대부분은 일본제품이었다. 양적인 면에서 살펴보면 생금건은 초기에는 인천이 후기로 갈수록 부산항의 양이 상대적으로 많아진다. 

〈표22〉인천 수입섬유제품과 토포의 가격대조표(1895~1904)
연도생금건방적사씨이팅
수입액 
(엔)
단가(1반당)수입액 
(엔)
단가(1반당)수입액 
(엔)
단가(1반당)
일화
(엔)
한전
(관)
일화 
(엔)
한전 
(관)
일화
(엔)
한전
(관)
1895

1896

1897

1898

1899

1900

1901

1902

1903

1904
1,503,991

945,968 

1,168,039

776,391 

649,166 

404,427 

438,312 

366,096 

474,385 

893,260
3.96 

3.91 

3.89 

3.86 

3.81 

4.07 

4.20 

1.28 

4.17 

4.41
9.16 





2.01 

2.23 

2.60 

2.95 

1.16 

4.05 

4.47
285,906 

304,622 

589,698 

934,441 

1,178,565 

1,335,317 

949,548 

798,712 

692,075 

861,044
30.32

29.66

30.82

28.04

27.67

29.74

30.96

30.45

30.74

32.82
70,18





14.60

16.24

19.02

21.73

27.53

29.84

33.3
145,775 

174,432 

456,118 

725,629 

836,138 

1,032,232

1,262,694

1,251,743

1,429,929

1,854,881
3.97 





3.63 

3.75 

3.98 

4.14 

4.12 

4.03 

4.20
9.18 

3.87 

3.56 

1.89 

2.20 

2.54 

2.91 

3.72 

3.91 

4.26
연도일본목면조선목면한전시세 
(할)
수입액 
(엔)
단가(1반당)국내이입액 
(엔)
단가(1반당)
일화
(엔)
한전
(관)
일화 
(엔)
한전 
(관)
1895

1896

1897

1898

1899

1900

1901

1902

1903

1904
185,814 

131,653 

190,634 

151,272 

117,457 

148,164 

129,102 

81,336 

100,836 

165,097
0.86 

0.86 

0.88 

0.88 

0.83 

0.84 

0.90 

0.89 

0.92 

0.94
1.99 





0.46 

0.49 

0.54 

0.63 

0.81 

0.90 

0.95
27,926 

21,074 

26,647 





101,195 

206,288 

301,304 

326,153 

413,660
1.19 

1.04 

1.17 





1.09 

1.12 

1.06 

1.02 

0.98
2.76 









0.70 

0.78 

0.96 

0.99 

0.99
4.32 





19.20 

17.04 

15.64 

14.25 

11.06 

10.30 

9.85

출전 :『通商彙纂』 각호. 

비고 : 1895년 한전시세는 1~6월간 엽전가격, 이후는 백동화시세. 1902년 생금건은 통계착오로 보임.

〈표23〉부산 수입섬유제품과 토포의 가격대조표(1895~1904)
연도일본목면조선목면한전시세 
(할)
수입액 
(엔)
단가(1반당)국내이입액 
(엔)
단가(1반당)
일화 
(엔)
한전 
(관)
일화 
(엔)
한전 
(관)
1895 

1896 

1897 

1898 

1899 

1900 

1901 

1902 

1903 

1904
179,279 

304,856 

297,363 

261,510 

253,459 



247,006 

154,490 

121,127 

287,298
0.84 

0.98 

1.05 

1.00 

0.94 

0.97 

0.95 

0.97 

1.01 

1.01
0.40 

0.47 

0.50 

0.50 

0.56 

0.58 

0.58 

0.66 

0.71 

0.67
273,609 

197,465 

95,624 

83,778 

58,016 





141,716 

142,336 

209,498
1.02 

1.14 

1.01 

1.01 

1.01 

1.01 



1.00 

1.00 

1.00
0.49 

0.55 

0.47 

0.50 

0.61 

0.60 



0.68 

0.70 

0.66
20.93 

20.77 

21.28 

20.09 

16.65 

16.74 

16.41 

14.67 

14.22 

15.10
연도생금건방적사 
수입액 
(엔)
단가(1반당)수입액 
(엔)
단가(1반당)
일화 
(엔)
한전 
(관)
일화 
(엔)
한전 
(관)
1895 

1896 

1897 

1898 

1899 

1900 

1901 

1902 

1903 

1904
506,867 

572,000 

882,362 

545,196 

601,833 



705,336 

630,118 

423,443 

677,891
3.34 

3.80 

4.02 

3.46 

3.65 

3.67 

3.98 

4.65 

4.03 

3.73
1.59 

1.83 

1.89 

1.72 

2.19 

2.19 

2.42 

3.17 

2.83 

2.47
35,874 

122,207 

142,734 

124,178 

247,401 



161,724 

152,684 

90,168 

188,800
30.12 

31.75 

38.36 

31.40 

26.96 

28.39 

31.38 

31.29 

32.91 

30.89
14.39 

15.28 

18.02 

15.63 

16.20 

16.96 

19.12 

21.33 

23.14 

20.46
출전 :『通商彙纂』 각호. 
비고 : 1900년 단가는 1~6월 평균.
〈표24〉원산 수입섬유제품과 토포의 가격대조표(1895~1904)
연도일본목면조선목면한전시세 
(할)
수입액 
(엔)
단가(1반당)국내이입액 
(엔)
단가(1반당)
일화 
(엔)
한전 
(관)
일화 
(엔)
한전 
(관)
1895 

1896 

1897 

1898 

1899 

1900 

1901 

1902 

1903 

1904
344,666 

285,373 

483,022 

386,626 

382,599 

579,484 

470,173 

387,835 

296,701 

447,419
0.86 

0.90 

1.00 

1.00 

1.00 

1.00 

1.00 

1.00 

1.00 

1.08
0.40 

0.43 

0.48 

0.50 

0.59 

0.58 

0.62 

0.69 

0.72 

0.65
256,165 

98,838 

102,486 

82,432 

76,523 

95,240 

140,280 

256,041 

261,143 

258,705
0.89 

1.00 

1.02 

1.01 

1.03 

1.00 

1.04 

1.03 

1.00 

1.01
0.41 

0.48 

0.48 

0.51 

0.61 

0.60 

0.64 

0.71 

0.72 

0.61
21.45 

20.97 

20.97 

19.89 

16.98 

17.21 

16.27 

14.46 

13.95 

16.48
연도생금건방적사 
수입액 
(엔)
단가(1반당)수입액 
(엔)
단가(1반당)
일화 
(엔)
한전 
(관)
일화 
(엔)
한전 
(관)
1895 

1896 

1897 

1898 

1899 

1900 

1901 

1902 

1903 

1904
531,396 

208,520 

327,546 

266,146 

217,004 

173,015 

423,552 

419,497 

376,835 

341,303
3.54 

3.44 

3.45 

3.26 

3.50 

3.50 

4.15 

4.21 

4.21 

4.26
1.65 

1.64 

1.64 

1.64 

2.06 

2.03 

2.55 

2.91 

3.02 

2.58
73,187 

31,940 

53,055 

60,129 

38,815 

65,302 

60,776 

56,253 

51,430 

48,773
36.12 

35.77 

36.49 

42.86 

36.04 

39.43 

38.15 

37.38 

37.65 

38.49
16.84 

17.06 

17.40 

21.55 

21.22 

22.91 

23.45 

25.85 

26.99 

23.36
출전 :『通商彙纂』 각호. 
비고 : 각종 통계에서 反과 匹이 혼용되어 기재된 사례가 많다. 특히 일본목면과 토포가 심하다. 보통 2反=1匹로 보지만 무역통계에서는 같은 단위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토포의 생산원가를 조사한 1898년의 기록에 의하면 생산자가 1필당 2엔 40전에 매각한다고 한다(『日韓通商協會報告』 31(1898.3), 46쪽). 여기서 인용한 무역통계의 단가는 필이든 반이든 모두 1엔 전후로 나타나는 것으로 미루어 통계의 필은 반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목포는 단가가 거의 2엔에 육박하고 있어 그 경우의 필은 2반으로 환산해야 할 것이다.

인천항의 생금건은 청국상인이, 부산항은 일본상인이 수입을 주도했다. 인천항의 생금건 수입감소는 씨이팅의 증가 시기와 대체로 일치한다.

방적사의 수입량은 인천·부산·원산의 순이며 인천의 수입량은 다른 지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원산은 소량이다. 수입방적사는 거의 대부분이 일본제품이며 영국·미국·인도 등의 것도 일부 포함되나 그 양은 극히 적다. 일본제품은 주로 직포용, 영국제 등은 봉쟁용縫裁用이었다. 일본목면은 방적복면紡績木綿·모조목면模造木綿 등 몇 종류의 목면으로 구성되어 수입량은 원산이 가장 많고 다음이 부산·인천의 순이다. 註7) 모든 지역에 일관되게 규정할 수는 없지만 일본목면의 수입은 초기에는 증가하다가 후기로 갈수록 감소한다. 그리고 그 시기적 변화는 인천과 원산의 토포의 이입, 부산의 토포의 이출이 감소에서 증가로 변하는 때와 반비례한다. 일본목면과 토포의 수요자층이 대체로 일치하므로 일본목면의 수입감소는 바로 토포의 이입증가라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었다.

이상의 〈표 22〉·〈표 23〉·〈표 24〉과 개항장별 곡가를 토대로 재구성하여 1895년 이후의 곡물가격에 수입 면제품의 가격을 나눈 상대가격을 정리한 것이 〈표25〉이다. 註8) 이 표는 모든 곡물과 수입면제품의 상대가격을 구하지 않고 지역적 조건에 따라 대표적 상품을 서로 대립시켜 본 것이지만, 제시되지 않은 경우도 그 경향성은 동일하다. 여기서도 전시기와 마찬가지로 곡물의 가격조건이 수입 면제품의 그것보다 나아지고 있는 현상을 볼 수 있다.

〈표25〉곡물과 수입섬유제품의 상대가격
연도콩/일본목면쌀/씨이팅쌀/生金巾
인천부산원산인천부산
1895 

1896 

1897 

1898 

1899 

1901 

1902 

1903 

1904 

1905
4.42 

4.89 

5.31 

6.01 

6.37 

5.80 

5.04 

5.29 

5.45 

7.03
2.35 

2.46 

3.08 

3.27 

4.34 

3.92 

3.19 

3.56 

4.00 

5.12
3.65 

4.77 

4.97 

5.50 

6.33 

5.82 

5.16 

5.81 

6.20 

6.68
1.46 

1.68 

2.08 

2.61 

1.86 

1.80 

1.78 

2.38 

2.48 

2.36
2.17 

1.84 

2.27 

3.50 

2.29 

2.50 

2.04 

2.01 

2.84 

3.46
출전 : 하원호, 『 한국근대경제사 연구』, 신서원, 1997. 
비고 : 콩과 쌀은 1석당 엔화가격, 일본목면·씨이팅·생금건은 1反當 엔화가격.

수출곡물의 상대가격이 수입제품보다 높아지는 조건 하에서 쌀과 콩을 중심으로 한 곡물의 상품화가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곡물수출이 증가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그리고 그것은 생산구조도 일정하게 변화시켜 갔다. 수출곡물인 미두의 경작면적 확대나 타경작지의 미작과 대두작으로의 전환은 가격체계에 대응하여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이었고 그것은 농업생산의 단작화가 진행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개항장을 중심으로 계속되는 미가등귀에 영향을 받으면서 지주층도 적극적으로 곡물수출을 주도해 나갔다. 1897년의 인천항 보고에 “경성, 기타 지방의 부호가 점차 거액의 자금을 농지의 신흥新興, 미곡의 매매, 선박의 운송 등에 투자하는 경향”이 생기는 것은 바로 이 같은 가격체계의 변화를 지주층이 적극적으로 수용해 가는 과정을 표현한 것이었고, 지주제의 강화 역시 피할 수 없는 추세였다. 註9)
〈표 26〉에서 보듯이 콩과 토포의 상대적 가격조건에서도 비교된 지역모두 콩의 가격조건이 나아진다. 콩과 면포의 가격조건 변동은 자연히 전작에서 대립하던 대두작과 면작에 변화를 가져왔다. 면화재배지의 대두작으로 전환이 바로 그것이다. 1899년 『황성신문』의 “금今에 민民이 양포洋布의 편이便易함만 기지旣知하야 여공女工의 간난艱難을 기폐旣廢하고 면전綿田에 역두易豆함이 처처處處에 개연皆然한즉 …”이라는 지적은 바로 그러한 사정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註10)
〈표26〉콩과 토포의 상대가격(콩/조선목면)
연도인천부산원산
1895 

1896 

1897 

1898 

1899 

1901 

1902 

1903 

1904 

1905
3.18 

4.06 

4.01 





4.46 

4.06 

4.46 

4.92 

6.74
1.94 

2.12 

3.22 

3.25 

4.03 

3.79 



3.45 

4.02 

5.17
3.52 

4.30 

4.88 

5.44 

6.12 

5.65 

4.97 

5.66 

6.21 

7.13
출전 : 하원호, 『 한국근대경제사 연구』, 신서원, 1997. 
비고 : 콩은 1석당 엔화가격, 조선목면은 1반당 엔화가격.

대표적 면화산지인 목포지방에서 1901년 보고에 의하면, “당지방은 저명한 면화산지로 이를 원료로 목면을 제직製織하고 해마다 타도에 수송하는 양이 거액에 달해 실로 주요한 특산물이지만, 개항후는 점차 면화작에 대신해 대소두大小豆로 하는 것이 수익이 많고 경작이 면화 만큼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어 지금은 대소두의 다액의 수출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註11) 그래서 “개항 이후는 방적사의 수입이 있어 갈수록 면화작이 불리함을 깨닫고 동시에 본품大豆의 경작을 유일한 업”으로 하게 되었던 것이다. 註12) 가격체계의 변화가 면작의 대두작으로의 전환, 그리고 대두수출 증가와 방적사수입이라는 무역과 생산구조의 변동을 가져오는 과정을 목포지방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다.
1899년의 경상도지방에서도 “근년 미두의 가격비교상 대두가 갈수록 수익이 많아져 면화지가 감소하고 두작의 경작면적이 증가하여 작년에 비해 2할 이상의 증수增收“를 보는 상황이었고, 註13) “간작하던 두작이 수익이 많음을 깨닫고 수해가 많은 연안부근은 많이 두전으로 바꾸고 또 면작이 감소하여 대두작이 증가하는 경향이 생겨 근래 현저히 대두의 출하가 증가하는데 반해 면작지는 감소하므로 가령 본년1900과 같은 흉작에는 도저히 조선의 산면産綿으로 조선산의 면직물 수요를 공급하기에 부족하게 되어 일본방적사의 판로는 장래 갈수록 유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註14) 이처럼 대두와 면포의 가격조건의 변화는 면작의 쇠퇴를 강요했고 필연적으로 면업과 이에 기반한 부농경영의 발전 전망을 흐리게 했다.
물론 면작의 대두작으로 전환이 일방적으로 관철된 것은 아니었다. 반제품인 방적사나 완제품인 면제품을 수출하던 일본은 그 원료의 안정적 공급을 위해 식민통치 이후 육지면 재배사업을 벌였지만, 그 이전에도 목포에서 원면을 수입하고 있었다. 특히 1903년에는 미국과 청국의 면화가격이 폭등해 가격의 등귀와 함께 일본으로의 수출량이 늘어나면서1902년 104,951엔, 1903년 168,421엔, “한인은 타작他作에 비해 매우 유리함을 깨닫고 34년1904에는 전년보다 약 5할의 경작면적을 늘였다고 평가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은 가격폭락으로 산출면화의 대부분은 국내에서 소비될 수밖에 없었다. 註15) 그러므로 이 사례만 가지고는 시장 확보면에서나 가격조건에서 안정된 대두에 비해 상대적으로 불안정하고 노동력도 더 많이 투입되어야 하는 면작지가 계속 증가했다고 보는 데는 무리가 있다. 1905년 목포에서 올라온 보고에도 개간지 문제와 관련해 “장래 면작이익의 증가와 함께 그 재배면적의 증가도 결코 적지 않을 것”이라 한다. 아직 이 단계에서는 면작이 늘어날 원인이 제공되지 못한 셈이다. 註16) 면작의 증가는 역시 육지면 재배강제와 관련시켜보아야 할 것이다. 註17)
농민전쟁 이후 일제에 의한 강점에 이르는 시기 면업의 발전 여부는 그동안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갑오 이전 일정하게 토포생산을 통한 부농과 소상품생산자의 성장 가능성은 확인된다. 그리고 일부 선진지역에서는 선대제 가내공업이나 부농경영의 형태를 나타내고 있던 점도 이미 실증적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 그러나 자본제 면제품의 수입이 본격화하는 시기에도 이들의 성장이 가능했던가 하는 점은 연구자간에 이론이 많다. 논점은 주로 수입방적사를 이용한 토포 생산에서의 발전 전망인데 방적사와 타면제품의 수입량의 변화에 주된 촛점을 맞추어 왔지만 시장조건과 생산조건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기도 한다. 수입량의 측정에 근거한 전자 시각보다는 생산조건이나 시장조건을 살피는 후자의 질적 관점의 연구가 역사적 사실에 좀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후자의 연구에서도 가격조건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가격조건의 변화는 생산조건과 시장조건을 밝히는 전제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이 시기 가격체계의 변화를 기초로 부농성장의 한 축이던 면업의 지속적 발전 가능성을 검토하고자 한다.
이 문제에 대한 기왕의 면업사연구과 그 논점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註18)
우선 미촌수수梶村秀樹는 토포생산의 선대제적 방식이나 부농경영이 성장하다가 청일전쟁 이후 자본제 면제품의 토포시장 침탈로 성장이 좌절되었다고 한다. 방적사의 수입으로 일시 대응하기는 하지만 1900년경부터 방적사의 수입감소와 씨이팅의 수입의 증가로 면포시장은 완전히 제국주의의 지배하에 넘어간다고 보았다. 궁도박사宮嶋博史는 1901~1903년에 걸친 방적사 수입 감소는 면화풍작 때문이며 방적사수입은 1905~1907년 사이에 절정에 달하고 발전의 좌절은 러일전쟁 후의 식민지적 지배강화 때문이었다고 해 이 시기 ‘자소작 상농층’을 비롯한 부르주아적 발전 가능성에 대해 장기적 전망을 한다. 촌상승언村上勝彦은 면제품수입의 시기적·지역적 동향을 검토한 후 경인지방과 그 배후지에는 미촌수수의 견해가 맞지만, 면업지대인 경상도와 전라도에서는 궁도박사와 같이 방적사를 이용한 방적토포의 생산이 계속되고 ‘합방’이후 비로소 쇠퇴되었다고 했다.
한편 길야성吉野誠은 촌상승언과 같이 지역적 차이를 추적하면서 시장조건과 생산공정에도 관심을 두었다. 경상도와 전라도는 전통적 면작과 면업지대로 면작·방사·직포의 3공정이 미분화된 가내 일관생산이 일반적이어서 수입사로의 원료전환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청일전쟁 이후 자본제 면제품의 침투에 따르는 시장의 축소로 상품생산 역시 축소되어 발전의 전망을 잃었다고 한다. 그러나 황해·경기·충청도는 지역내에 비면작지대인 농촌시장이 광범하게 존재해 면작과 면직업 사이에 분화가 이루어져 있어 러일전쟁까지는 수입방적사를 이용한 발전이 가능했다고 본다.
논자간에 지역적 차이에 대해서는 상반되는 견해를 보이는데 이 문제에만 한정해서 평가한다면 필자의 검토결과로는 길야성의 연구가 좀 더 사실에 가까운 것이라고 본다. 경상도지역의 면포생산의 발전이 무너졌다는데 대해 그 이후에도 경상도지역이 지속적 면포산출지로 남는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선대제나 부농경영의 계속 발전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 면작지대가 갖는 특수성, 곧 가계보완적 면포생산의 지속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또 오두환은 면작의 대두작으로 전환과 방적토포생산이 소생산자의 자기노임 착취의 증대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발전의 전망을 부인했다.
농민전쟁 이후 직접적으로 전통적 토포와 대립하고 있던 것은 일본목면이었다. 촌상승언의 연구에서는 일본목면이 토포시장을 탈취하며 수요를 확대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세탁에 강하다는 내구력에서 두 제품이 비슷했음에도 가격경쟁력 때문이었다고 한다. 둘 다 모두 농가부업의 형태로 생산되지만 일본목면은 방적사를 이용해 밧탄 직기로 생산되었다. 따라서 전통적 베틀에서 생산되는 토포에 비해 노동력이 절감되고 생산성이 높아 가격경쟁에서 우위에 설 수 있었다는 것이다. 註19) 실제로 앞서 제시된 가격대조표를 보아도 어느 지역이나 일본목면의 가격수준이 토포보다 낮다. 그 때문에 일본목면의 수요가 증가하고 전통적 토포생산지역에도 침투하고 있었다.
그러나 절대가격의 비교에서는 일본목면이 좋지만 상대가격의 추이를 살펴보면 반드시 가격경쟁력이 계속 낫다고만 할 수 없다. 〈표 27〉의 두 제품의 상대가격의 비교에서 보듯이 지역에 따라 가격조건이 정체상태이거나 후기로 갈수록 일본목면의 가격상승률이 높아져가는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같은 조건에서 일방적으로 일본목면이 조선목면을 구축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가격대조표에서 보는 것처럼 일본목면의 수입량은 후기로 갈수록 줄어드는 반면, 토포는 부산의 이출량과 인천·원산의 이입량이 초기의 축소과정을 거쳐 후기에는 증대되는 현상을 나타낸다.
〈표27〉일본목면과 토포의 상대가격일본목면/조선목면)
연도인천부산원산
1895 

1896 

1897 

1898 

1899 

1900 

1901 

1902 

1903 

1904
0.72 

0.83 

0.76 

0.99 

0.93 

0.77 

0.81 

0.84 

0.90 

0.96
0.82 

0.86 

1.04 

0.99 

0.97 

0.97 



0.97 

1.01 

1.01
0.96 

0.90 

0.98 





0.97 

0.96 

0.97 

1.00 

1.07
출전 : 〈표22〉, 〈표23〉, 〈표24〉. 
비고 : 각각 1반당 엔화가격.

물론 이 문제는 방적사 수입량이 증가하는 문제와 분리하여 생각하기 어렵다. 방적사는 면포제직에 경험이 적은 함경도지방을 제외하고 전국적으로 토포생산의 원료로 사용되었다. 註20) 방적사를 이용한 면포생산은 생산가격을 낮출 수 있었고, 이 면에서 토포의 생산이 외국면제품의 침투에 대해 일정 시기까지 버틸 수 있는 근거가 있었다. “일본화물의 수입에서 특히 주의할 점은 모제목면模製木綿이 작년1899년 이전에 비해 현저히 감퇴한 것이다. 대개 금건무역과 같이 방적사의 호황에 반비례하여 하는 것으로 면사무역의 범위가 확장되는데 따라서 목면구역의 축소는 면하기 어렵다”는 기록도 바로 이 문제를 지적한 것이다. 註21)
방적사가 가장 많이 수입되는 지역은 인천이다. 인천은 서울을 중심으로 한 광범한 면직물 유통권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수입된 방적사는 바로 배후지로 이송되어 면포생산에 조달되었다. 수송지역은 경인지방에 그치지 않고 평안·황해·충청도, 그리고 면화의 주산지인 전라도지역까지 미치고 있었다. 註22)
1900년 목포지방의 일본인의 보고에는 “근래 날줄로는 외국방적사를 사용하고 씨줄로는 자국산 수방사手紡絲를 써서 짜는 경향이 널리 행해진다. … 그들의 말로 목면으로 한필을 짠 결과는 … 방적사를 혼용할 경우 크게 이익을 얻는다. … 방적사는 사용방법이 경편해 수방사와 같이 사선絲線의 가늘고 굵기가 다르지 않아서 직출織出에 매우 신속하고 시간 소비가 적다. 결국 직녀織女의 임금은 시간이라는 점에서” 노임을 절약하고 생산비를 낮출 수 있었던 것이다. 註23) 이 때문에 방적사의 주된 수요층은 가내부업적 형태의 자급자족적 생산자보다는 상품화를 전제로 생산비를 낮추려는 선대제방식의 생산이나 부농경영에서 볼 수 있었다. 다음의 군산항 일본영사의 보고는 그러한 사정을 잘 보여준다. “당항의 본방 방적사는 모두 인천·목포에서 재수입한 것으로 … 본품을 구매하여 이를 가지고 임취자賃取者, 임금노동자-필자에게 옷감을 짜게 하는 방법을 만들어 널리 이렇게 경영한다. 근년 아방적사我紡績絲가 한국에 다액의 수입이 있는 곳은 모두 이 직공법職工法이 행해지는 것”이었다. 註24)
수입방적사를 이용한 토포생산이 계속되는 인천 배후지의 토포시장을 일본목면이 일방적으로 무너뜨리기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미촌수수는 목면보다는 1900년대 이후 씨이팅 도입이 본격화하는 과정에서 토포생산이 패퇴했다고 한다. 그는 씨이팅의 수요자를 토포 사용자와 같은 계층으로 보았다.
씨이팅의 수요층은 자료에 따라 시기적으로 다르게 파악된다. 미촌수수는 “씨이팅은 … 바탕올이 굵고 다소 거칠어 동의복冬衣服의 안감 등에 많이 사용되고 전적으로 하층사회에서 사용했다” 註25)라는 자료에 근거해서 씨이팅과 토포의 사용층이 상호 중복되고, 따라서 양제품은 대립관계를 가지고 씨이팅 수입이 본격화하면서 토포생산이 몰락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 자료는 씨이팅이 갓들어온 1890년대 전반의 초기 기록이다. 씨이팅의 공급이 확대된 1900년대 이후의 기록에 의하면, 1894년 처음 수입되어 씨이팅 수입의 단서가 되는 대표적 씨이팅 제품인 녹인금건鹿印金巾은 “영국제 금건보다 올이 굵고 모제목면模造木綿-필자보다는 올이 가늘다. 따라서 강도에서는 영국제 보다 우수하고 바탕질에서는 모제목면의 위에 있다. 즉 대체적으로 생금건은 상류사회에 적합하고 목면은 하등사회의 기호에 맞으나 녹인금건은 실로 중등사회의 호요물이다. 또 비교적 염가이므로 상류사회는 하의로 착용하고 하등사회도 역시 상의로 사용하게 되므로 본품의 수요는 여하간에 그 범위를 확대될 것으로 관찰된다“고 했다. 註26) 이 자료는 씨이팅인 녹인금건의 수요자가 토포사용자와 그대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오히려 하층사회보다는 중류계층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므로 씨이팅의 수요자가 토포수요자와 일치하여 씨이팅의 수입이 방적사를 이용한 토포생산을 일방적으로 ‘패퇴’시켰다는 미촌수수의 주장에는 무리가 있다. 후기로 갈수록 씨이팅의 품질이 나아지면서 주된 사용층도 중류계층으로 확산되었던 것 같다.
길야성의 연구에서도 씨이팅은 오히려 생금건과 같은 중류 이상의 수요자층을 놓고 경쟁하는 상황이었다고도 한다. 註27) 그러나 씨이팅은 제품의 성격상 반드시 생금건과만 대립되는 것은 아니었다. “본년1900년-필자 중에 녹인화금건鹿印和金巾, 씨이팅 제품-필자이 의외로 환영받는 것도 모제목면의 영역을 축소시키게 되었다”라는 기록은 그같은 사정을 보여준다. 註28) 씨이팅은 일본목면과도 대립했고 따라서 일본목면의 수요자와 조선토포의 수요자가 같은 점에서 일정하게 토포와도 경쟁 가능성이 있었다. 수입량이 급증하면서 토포생산에도 영향을 주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씨이팅은 판매시장이 서울이나 경인지방의 도시지역에 한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씨이팅의 시장이 제한적이라는 점은 비면작지대의 광범한 농촌을 대상으로 하던 토포시장을 씨이팅이 바로 탈취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註29)
그러나 이 시기 수입방적사에 근거한 경인지방과 그 배후지인 평안·황해·충청도의 토포생산은 생산의 기반을 수입제품에 두고 있어 발전에는 한계가 있었다. 즉 수입방적사의 가격 변동에 따라 생산비용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고, 방적사의 가격이 급등할 경우 성장이 지속성을 가지기 어려운 취약한 기반위에 있었다. 실제로 〈표 28〉의 인천지역 방적사와 토포의 상대가격 대비에서 방적사는 갈수록 토포가격보다 가격상승 속도가 빠르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더구나 “대개 방적사의 수입이 근년 현저하게 진보하여 증가해 오다가 수입이 감소된 것은 … 한화유통가격의 폭락과 면화작의 양호에 기인하는 것으로 특히 전자의 영향은 후자의 영향에 비해 한층 심하다”라는 인용문에서 보듯이 백동화남발로 인한 인플레이션 현상은 수입상품의 가격을 등귀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것이다. 註30)이 같은 원료가격의 상승은 방적사의 수입에 근거한 토포생산을 불안정하게 만들 수밖에 없었고 발전 전망 역시 제한적이고 불투명했다.
〈표28〉방적사와 토포의 상대가격(방적사/조선목면)
연도인천부산
189525.4129.40
189628.4927.85
189726.4437.98
1898  
1899  
190027.1728.24
190127.73 
190228.7831.29
190330.0432.90
190433.5430.88
출전 : 〈표22〉,〈표23〉. 
비고 : 방적사는 각각 1반당 엔화가격. 조선목면은 1반당 엔화가격.

인천항에 비해 부산항의 방적사수입이 적은 것은 부산항의 배후지인 경상도와 전라도가 인천항의 배후지처럼 비면작지대가 아닌 전통적 면작지대였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이 지역에서 생산된 토포는 전국 토포 수요의 대부분을 점하고 있었다. 그러나 갑오 이후 본격화하던 일본면제품의 침투는 이 지역의 토포생산을 위축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미 인천항을 통해 대량의 방적사가 수입되어 비면작지대에서도 토포의 생산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시장의 축소는 불가피했다. 더구나 함경도지역의 일본목면 수입 급증은 당연히 조선목면의 공급을 감소시켰고 〈표 24〉에서 보는 대로 절대량에서도 비교할 수 없는 처지였다. 함경도지역에서 사용되는 토포의 최대 공급지는 진주·의성을 비롯한 경상도와 전라도의 면작·면업지대였다. 그러므로 전통적 토포시장을 일본목면에 탈취당한 이들 지역의 토포생산은 당연히 위축되었고, 종래 면업과 면포생산에 기반한 부농경영의 성장은 이 시기 들어 상대적으로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표 24〉에서 보듯이 원산은 1900년대에 들어 후기로 갈수록 토포의 수입이 증가하고 일본목면의 수입은 줄어들고 있었다. 이 과정은 경상도나 전라도지역의 토포생산이 일본목면에 대해 새로운 저항을 하며 성장한 결과는 아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일본인의 보고에서 열거한 일본목면 수입 감소의 원인은 ① 삼남지방의 흉작으로 목면제직에 종사하는 사람이 늘어나 원산으로도 토포의 수송이 늘어난 점, ② 한전시세의 폭락으로 인한 수입제품의 가격상승, ③ 조악품이 많아 품질이 나빠진 점 등이었다. 註31) 일본목면의 품질문제는 이미 수입초기부터 제기되었으나 1893년경 신용이 회복되면서 급속히 판매시장이 확장되고 함경도시장에서 토포나 금건을 모두 구축하고 가장 판매량이 많은 면제품으로 등장했다. 註32) 그러나 수입의 증가와 함께 다시 조악품문제가 제기되었던 것이다.
한전시세의 폭락은 백동화의 남발에서 기인한다. 원래 함경도는 백동화 유통지역이 아니라 엽전통용지역이었다. 그러나 그레샴법칙은 이 지역에도 그대로 관철되면서 국내무역이 활발해질 때 악화인 백동화가 유입되어 한전시세를 낮추었고, 그래서 원산거주 일본상인은 1898년부터 여러 차례 백동화 사용을 거부하기로 결의하고 이를 회수해 경인지역으로 회송했지만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註33) 한전시세의 폭락은 수입제품의 등귀로 이어진다. 그런데 이 시기 금건의 수입원인 상해에서의 환시세도 폭락하고 있어 청국에서 수입된 금건의 한전가격은 일본제품의 가격이 오르는데 비해 상대적으로 낮아지고 있었다. 일본목면은 금건과 토포 양제품의 협공을 받고 있었던 셈이다. 일본목면의 가격경쟁력이 약화된 상태에서 종래의 면업지역인 경상도나 전라도지역에서 토포이입이 증가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이것은 전통적 토포생산업이 새로운 기술개발이나 경영방식을 도입한 결과는 아니었다. 원래부터 가계보완적 요소를 갖고 있던 토포생산이 극심한 흉작에 대응해 생산이 증가한, 기아가 강요한 상품화일 뿐이었다. 그러므로 이 시기 원산에서의 토포이입 증가를 토포생산을 통한 부농경영의 성장이 다시 자리잡았다거나 선대제적인 토포생산이 소부르주아적 발전 전망을 가질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으로 해석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기왕의 연구자는 원산항에서의 이 같은 토포 이입증가란 오직 한전시세의 하락이라는 ‘외적·우연적 요소’에 의한 것일 뿐이라고 단정한다. 註34) 그러나 한전시세의 하락은 결코 ‘우연적 요소’가 아니었다. 이 시기 봉건정권의 재정정책은 이미 당오전 남발의 경우에서도 보았듯이 재정확대를 위한 최우선책을 통화확대에 두었다. 그러므로 당오전이 폐지되고 새로이 만들어진 백동화 역시 남발과 그 결과로서의 한전시세의 폭락은 예고된 길이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토포생산에 의한 부르주아적 발전전망에 대한 기왕의 연구는 시각 자체를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 동안의 연구는 일본방적사가 대량으로 수입되는 지역에서의 토포생산의 발전은 적어도 방적사수입이 계속되는 한 가능했다는 관점에서 출발하고 있었고, 또한 생산조건이나 시장조건을 다루어도 발전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에 대해서는 깊이 있는 논의가 없었다. 그 때문에 방적사수입에 관한 한 양의 다과 측정이 연구의 주된 관심사였고 그 결과 수입방적사에 의한 소부르주아적 발전의 기반이 가지는 취약성이라는, 좀더 근원적 문제에는 관심을 보이지 못했다. 앞에서 본대로 수입방적사의 가격상승율은 계속 토포의 그것보다 높아지고 있었다. 더구나 방적사의 수입을 일본에 기대야 하는 처지여서 방사와 직포에서 새로운 기술의 도입이 없는 한 생산의 지속은 직접생산자의 노임부분을 깎아 먹거나 이윤의 축소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註35) 따라서 발전 자체가 제한적·종속적인 것이었고 진정한 의미의 부르주아적 발전 전망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註36)
한편 백동화 남발과 그 결과로서의 한전시세 폭락, 그리고 수입상품 가격의 등귀는 같은 연장선상에 있지만, 관세제도의 개선과 같은 국내시장의 보호를 위한 제도적 장치가 없는 가격등귀는 ‘조선민족산업의 발전’의 길과 거리가 먼 것이었다. 註37) 제국주의 침략 하에 있는 사회의 상품생산은 그 취약한 물적 기반으로 말미암아 국가에 의한 지원이나 국내시장의 보호없이 지속적 성장이 불가능하다. 자본제 상품과 가장 첨예하게 대립할 수밖에 없던 토포의 경우는 더욱 그러했다. 백동화 남발로 인한 한전시세 하락은 시장보호정책이 아니라 바로 이 시기 봉건정권의 궁방이나 역둔토에서의 지주제 강화나 수세의 증가라는 ‘봉건적 폭력의 수탈’ 강화와 같은 목적의 것이었다. 백동화와 같은 악화의 남발은 상인이나 생산자의 자본축적 여지를 오히려 저해할 뿐이었다. 농민전쟁 이후 더욱 강화되는 제국주의의 경제적 외압아래 새로운 기술혁신도 거의 없이 외국 방적사의 수입으로 연명하는 취약한 토포의 생산은 화폐의 교환비율에서 일시적으로 경쟁력이 생겼다고 하더라도 장기적 전망을 가질 수 없었다. 결국 토포생산에서 종래와 같은 선대제 방식의 경영과 부농경영의 성장에 의한 소부르주아적 발전은 자본제제품이 본격적으로 침투하는 농민전쟁 이후의 시기 이후에는 좌절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는 것이었다.
이상과 같이 개항기 수출입상품의 가격체계는 1890년을 전후해 수출의 주종을 차지하던 쌀과 콩의 상대가격이 수입면제품보다 높아져 갔다. 따라서 1890년대 이후 쌀과 콩을 중심으로 농업에서 단작화로의 방향은 피할 수 없는 추세였다. 그리하여 수출곡물을 중심으로 경작면적의 일정한 확대현상이 나타나고 지주층이 적극적으로 미곡의 상품화에 나서면서 지주제의 강화가 초래되었다. 면화와 전작에서 대립하던 콩의 상대가격이 면포의 그것보다 높아짐에 따라 면화작은 상대적으로 감소하고 대두작으로 전환하는 경우도 늘어갔다. 이 같은 현상은 1890년 이후 일반적 경향이 되어갔지만 본격화되는 시기는 역시 농민전쟁 이후의 단계였고 그 이전에는 가격체계의 변화를 수용한 부농의 성장 가능성도 여전히 존재했다. 그리고 이들은 봉건수탈이나 지주제 강화의 추세와 자본제 면제품의 유입으로 인한 토포생산기반의 몰락현상에 저항적일 수밖에 없었다.
농민전쟁 이후 일본은 종래 영국제 금건의 중계무역에서 벗어나 목면을 비롯한 자국산 면제품과 방적사를 수입하여 종래 부농경영의 한 축이던 토포생산을 위축시켰다. 전통적으로 면작 면업지대인 경상도나 전라도의 토포생산은 토포의 대규모 소비지였던 함경도지역을 일본목면에 탈취당하는 등 시장의 축소로 몰락하고 있었다. 반면 경인지방과 평안·황해·충청도 지역은 광범한 비면작과 비면업의 농촌시장을 배경으로 일본에서 수입한 방적사로 토포생산을 어느 정도 지속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이 지역의 토포생산 역시 수입방적사의 가격상승율이 토포가격보다 웃도는 취약한 기반위에 있어 성장은 제한적이었고 면업을 통한 부르주아적 발전 전망은 가지기 어려운 처지였다. 따라서 농민전쟁 이후 지주제의 강화와 부농경영의 위축이라는 현상은 피할 수 없는 결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