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제7장 개항 이후 민중의 존재형태와 대응, 노동자 계층의 변화/제2권 개항 이후 일제의 침략

몽유도원 2013. 1. 14. 11:35

제7장 개항 이후 민중의 존재형태와 대응


농민층의 동향과 자본주의적 관계의 성장

노동자 계층의 변화


2. 노동자 계층의 변화


1. 노동자의 존재형태

농민층 분해의 결과 광범하게 존재했던 농업과잉인구 중 일부는 농촌을 떠나 도시나 개항장·광산·철도 건설공사장 등으로 흘러 들어가 자신의 노동력을 파는 임금노동자가 되었다. 그러나 농촌 외부에서 고용의 기회가 많지 않아 당시 임금노동자층은 농업노동자가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농촌사회의 각종 농업노동을 담당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농업 고용노동은 연고年雇와 일고日雇로 나누어지는데 1900년대 초 임금은 〈표 33〉와 같다. 표의 임금을 당시의 일본화폐와의 교환비율로 환산하면 연고가 받는 임금은 8엔 내지 8엔 70전이 되고 식사·담배·술값 등을 합해 약 40엔 내지 50엔 정도가 된다. 또 일고는 약 17~18전에서 25전 정도를 받게 되는 셈이다. 1900년대 초 경부선을 건설하던 철도 노동자의 임금은 20전이었다. 그러나 농업노동자의 임금은 농번기 외에는 극히 저렴하고 고용의 기회도 찾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따라서 농업노동자의 생활은 극히 열악할 수밖에 없었다 註46).

농촌을 떠난 빈민의 경우 이 시기 자본주의적 성장에 따라 근대적 노동자로 전화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들이 노동력을 팔 수 있는 고용기회는 절대적으로 부족한 실정이었다. 위에서 본 1911년 조선총독부의 통계에도 근대적 공장에 수용된 조선 노동자의 숫자는 12,180명에 불과했다.

〈표32〉1900년대 초 농업노동자의 임금
연고일고조사장소
5귀문 또는 벼 2석 5두 외에 의복 1매 지급하고 음식·술·담배·짚신제공.50문 외에 식사·술·연초를 제공경상남도 동래
7~8관문 외에 음식·의복을 지급하지만 술·담배 등은 반50~60문 내지 150문경상도 양산
7관 159문 외 의복 지급.최고 200문 외에 술값 20문을 주고 식사는 제공하지 않음. 음식을 지급할 때는 60문 정도 필요.경상도 양산
7관문 또는 벼 3석 외에 음식·의복·술 제공40문 외에 음식·술·담배 지급. 화폐로 환산하면 150문 정도로 합계 190문 지급.경상도 삼랑진
3관문 내지 5관문 외에 음식, 의복, 잡비 등 1년간 30관문 정도 지급.30문(모내기때) 외에 음식·술값·담배값으로 하루 100문 필요해 합계 130문. 수확시에는 음식 등으로 150문 필요해 합계 180문.경상도 대구
5관문 내지 7관문. 의복·음식·담배 등으로 합계 30관문 지급.60문 내지 150문. 식사·담배 등을 제공한다.전라도 군산

출전 : 『韓國農業論』, 裳華房, 1904, 162~163쪽


이러한 실정에서 1880년대에 들어와 정부의 적극적인 광산정책과 일본으로의 금 수출에 힘입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금광지역은 상당한 노동력 수요를 창출하였다. 이에 따라 토지를 떠난 많은 빈민들이 광산지역으로 몰려들었고, 농촌 소빈농들도 농한기를 이용해 사금 채취에 종사했다. 특히 흉년에는 더욱 그러했다.

실제로 이 시기 광산의 개발은 대규모화하여 1886년 영흥금광의 경우 광부가 5,000~6,000 내지 10,000명 정도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註47) 또 1888년 “개광한 곳은 모두 몇 천 명에 이를 정도로 많은 광부들이 있고 이들은 모두 의존할 곳이 없는 실업자였다.” 註48) “소위 광부들은 부상負商이나 실업자가 아니면 모두 패한여당悖漢餘黨으로서 일정한 직업이 없었다.” 註49) 1901년에 광산으로 흘러들어가는 파산 농민은 10에 2~3이나 될 정도였다고 한다. 註50)

광산노동자의 경우 덕대제 경영에 포섭되어 있었는데 덕대제 경영은 원칙적으로 덕대가 의식주를 책임지고 광산노동자가 노동력을 제공한 뒤 생산물을 나누어 갖는 분익제分益制였다. 덕대와 노동자의 수입은 생산량에 따라 좌우되었다. 그렇지만 이들의 수입은 전반적으로 형편이 없었다. 예를 들어 1890년 전후 최고의 사금광으로 일컬어지던 함경도 영흥금광도 생산량의 60~80%를 세금과 관리들의 몫으로 수탈당하고 나면, 노동자들은 겨우 먹고 잠자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註51)

덕대가 식사와 술·담배·짚신을 제공하지 않는 대신 임금을 지급하는 경우도 노동자의 수입은 극히 낮았다. 특히 덕대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잡부나 반농반노의 계절노동자는 그 임금이 더욱 낮았다. 그리고 인구가 많고 노동빈민이 축적되어 있는 남부지방과, 토지 부족으로 농업노동자로의 고용기회가 적은 함경도지방은 전반적으로 임금이 저렴하였다. 註52)그래서 전라·경상도지역은 노동자들이 겨우 먹을 것을 얻는데 만족할 정도여서 일반노동자의 250~300문보다 낮은 150~250문에도 일하였다. 함경도지역은 일반노동자의 경우 1일 30~50전이지만 광산노동자의 경우 20전 내외였다. 20전 내외일지라도 광산노동자들은 끼니 정도는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에, 노동을 사양하지 않고 열심히 일하면서 생계를 꾸려나갔다. 註53)

이에 비해 광산이 발달한 충청도·황해도·평안도는 상대적으로 임금이 높았다. 그중에서도 내장원과 외국인이 경영하던 광산은 완전한 임금제도가 성립되어 있었다. 특히 내장원이 직영하던 수안 석금광은 8명의 노동자에게 1일 2교대 12시간 노동에 1원 40전을 지급하였다. 이에 비해 외국인이 경영하던 광산의 임금은 다른 곳에 비해 저렴했을 뿐 아니라, 중국인 광부들보다 낮은 민족적 차별을 받았다. 열강은 광산이권을 침탈한 뒤 저렴한 노동력 수탈을 통해 경영상의 이익을 꾀하였던 것이다. 각 광산 임금액은 다른 지역에 비해 높은 편이었다. 그렇지만 순안 사금광을 예로 보면, 48전은 식료와 짚신 대신에 지급하는 것이며 하루 생활비에 해당되기 때문에 감토에 금이 없으면 얻는 것이 없었다. 註54) 직산 역시 1902년의 경우 최고 40전식료 지급할 경우 20전 내외을 지급하였는데, 당시 쌀값이 현미 1두서울 모말로 3승에 최고 80전이었으므로 일당 40전이면 근근히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을 정도였다. 註55)

하지만 임금은 어느 곳이든 일당으로 지급되었다. 월급이 아닌 일급의 형태는 채광에 따른 위험 부담률을 노동자에게 전가시키는 것일 뿐 아니라 안정적 생활을 불가능하게 해 노동조건을 한층 악화시키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광산이 기술조건상 겨울철과 장마철에는 채광을 못하였기 때문에, 이 기간 동안 노동자들은 임금을 받을 수 없었다.

광산노동자들의 노동강도는 매우 높았다. 아침부터 일을 하기 시작해 어두워질 때까지 일을 해야만 했고, 일부 석금광에서는 1일 2교대 12시간씩 중노동에 시달려야만 했다. 휴식시간과 공휴일도 거의 없었다. 생산도구도 열악했다. 1905년 갑산 고진동광에는 40명의 채광광부가 있었는데 이들은 폭 3척, 높이 4척, 길이 365척의 좁은 갱내에 들어가 희미한 석유등불만을 밝히고 하루 10시간 정도 일했지만 수입은 1원 내외였다. 더구나 자연통기에만 의존했기 때문에, 비가 와서 통기가 안 되는 날이면 질식사하거나 정신을 잃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註56)

광산노동자는 열악한 작업환경에서 고된 노동을 하면서도 형편없는 수입으로 살아가야만 했다. 이들의 생산 외적인 환경 역시 좋지 않았다. 반농반노가 아닌 직업적인 광부들은 가족을 거느린 경우보다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채광량이 풍부한 광산 채굴지를 따라, 혹은 광세를 피해 이곳저곳을 전전했다. 이 때문에 고용기간이 짧고 이동률이 매우 높았다. 註57) 짧게는 몇 일에서 1~2달에 불과한 경우도 허다하였다. 한 예로 평안도 순안 석암금광石巖金鑛은 1904년 6월 신혈新穴이 발견됐다는 소문이 번지자 가까이는 십리에서 멀리는 천리에서까지 운집하여 매달 광부수가 배로 늘어나 석 달 동안에 몇 백 명이 7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겨울이 닥쳐오고 새로 발견된 광맥이 다하면서 그 수가 급격히 감소하여 12월에는 1천 명 이하로 줄어들었다. 註58)

이처럼 이동성이 강하고 홀몸인 광부들로서는 안정된 가정생활을 기대할 수 없었다. 광부들이 기거하는 집은 임시로 지은 초가집이나 움막, 심지어 토굴에서 생활하였다. 광산 인근의 민가를 세내 거처하기도 하나, 이런 경우는 광부들에 대한 사회인식이 좋지 않고 채광을 둘러싼 갈등이 심했기 때문에 많지 않았다. 더욱이 한 집에 여러 명이 집단적으로 기거했기 때문에, 그들의 주거실태는 불결하고 난잡하였다. 그들의 불안정한 생활과 박탈감 등은 종종 그들을 범죄로 내몰았고, 그것은 지역주민과 충돌, 행인 약탈, 부녀자 겁탈 등으로 이어졌다. 註59) 이같은 치안부재 외에 광부들이 몰려든 지역은 물가가 폭등하고 논밭과 무덤·야산이 파헤쳐졌다. 이러한 광폐鑛弊는 일일이 예를 들 수 없을 정도로 광산 채굴지역, 주로 사금광에서 흔히 있었던 일이었다. 불안정했던 고용조건과 열악한 노동환경으로 인한 광부들의 불만이 광산채굴지역의 주민에게 폭력적으로 표현되면서 이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좋을 수가 없었고, 이 때문에 광부들은 ‘유식무항遊食無恒에 남생화욕지류濫生貨慾之類’, ‘부랑배浮浪輩’, ‘무뢰실업지도無賴失業之徒’ 등으로 불리고 있었다. 註60)

개항을 계기로 무역이 더욱 활발해지면서 개항장이 무역유통의 중심으로 자리잡게 된다. 개항장을 중심으로 한 부두에서는 화물을 싣고 내리거나 화물의 포장 등의 일에 노동력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부두를 중심으로 일정한 임노동자층이 형성 운영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농촌에서 축출된 이농인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인천·부산·원산·목포 등 개항장 중심의 부두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부두노동자는 미곡을 계량하고 포장하는 두량군, 각종 화물 운송에 종사하는 칠통군七桶軍·지게군·하륙군下陸軍 등으로 분화되어 있었고, 이러한 분화는 부두노동의 기술에 따라 요구되는 것이었다. 전반적으로 당시 부두노동은 반숙련·미숙련 노동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註61)

이들 부두노동자들은 직업적인 노동자와 비직업적 노동자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직업적인 부두노동자의 수는 전국적으로 볼 때, 1897년에 1,000여 명, 1902년에 2,000여 명, 1903년에 3,000여 명, 1906년에 5,000여 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비직업적인 부두노동자를 고려한다면 부두노동자의 수는 훨씬 많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부두노동자들의 임금은 화물의 운반거리·무게 등에 따라 차별 적용되는 능률급제이고, 미숙련노동이었기 때문에 다른 업종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매우 적은 액수였다. 1909년도 부두노동자의 1일 평균 임금은 쌀 3~4되 정도였으며, 3~4인의 식사정도가 해결될 정도였다. 노동시간은 자연 조명 하에서 작업이 가능한 아침부터 저녁까지였다. 이들은 대부분 자기 소유의 집이 없는 형편이었고 독신인 경우가 많았다.

이들 부두노동자들은 비록 생산부문의 자본가에 의해 고용되지는 않았지만 세계자본주의가 조선의 유통구조에 대하여 요구한 기능을 수행하던 개항장의 자본가에 의해 고용된 점에서 원칙적으로 자본제적 임노동자로 볼 수 있다.

철도는 산업발달을 뒷받침하는 사회간접자본으로서 근대 산업사회를 형성·발전시키는데 중요한 교통수단이다. 그러나 조선에서 철도는 제국주의의 조선 침탈을 위한 수단으로 건설됨으로써 그 과정에서 많은 물의와 저항이 잇따르게 되었던 것이며, 반일반철도反日反鐵道 운동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철도의 부설에는 부지·자재를 비롯하여 막대한 인력이 소요된다. 이중 인력은 관리직·전문기술자 등도 포함되겠지만, 대부분은 단순 작업에 필요한 노동력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 시기처럼 철도건설작업을 전적으로 인력에 의존하던 시대에는 더욱더 인력의 동원여부가 작업 진행의 관건이 되었던 것이다. 註62)

경인선 공사가 시작된 1897년 9월부터 러일전쟁 이전 시기인 1903년까지 경인선·경부선 일부구간 공사는 비교적 소규모로 진행되었다. 이때 철도공사에 소요되는 노동자들은 경인지방과 부산지방의 도시지역에서 이미 형성되어 있었던 도시노동자들만으로도 가능한 것이었다. 이들 도시 지역의 노동자들 이외에 영세농민들이 생업을 포기하고 철도 건설 노동자로 나서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경부철도 기공 전후에는 대규모 철도공사에 대한 기대 심리가 팽배하였으며, 노동자 모집 문제가 사회문제화 될 정도였다. 이에 정부에서는 ‘대한경부철도역부회사大韓京釜鐵道役夫會社’를 설립하고, 노동자 관리체계를 역부役夫, 10명→십장什長, 5명→패장牌將, 10명→총모摠募로 체계화하였다. 경부철도 공사에 고용된 노동자의 임금은 매우 낮은 수준이었으며, 일급제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보통 ‘일꾼’이라 불리는 노동자들의 하루 임금은 두세 끼 식사와 담배를 지급하는 경우 6~20전이었다. 식사 등을 전혀 제공하지 않는 경우에는 14~50전까지 지급되었다. 전문기술자인 대공大工은 식사와 술·담배가 제공되는 경우에는 20~36전까지 지급되었고, 식사 등이 제공되지 않을 경우에는 40~60전까지 지급되었다. 이러한 임금 수준은 일본인 노동자의 1/2~1/3 수준에 불과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으로 철도건설에서 노동자의 동원문제는 그 궤도를 달리하게 되었다. 즉 이제까지 고용을 통해 동원하였던 노동력이 강제 징발하게 된 것이다. 일제는 군수물자 수송의 편의를 위해 철도를 더욱 빠르게 완공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경부철도 잔여구간의 속성공사와 경의선 및 마산선 부설을 동시에 추진하였다. 일제는 이를 위해 공사지역 가까운 곳의 농민들을 우선 동원하였으며, 기존의 도시 임노동자들 또한 계속 철도 건설에 이용하였다. 경의선의 경우 러일전쟁 중에는 무임에 가까운 부역 노동이 대부분이었다가 개량 공사기에 이르러 겨우 30~40전의 일당을 받았다. 이 같은 임금액수는 당시의 5인 가족의 평균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런데 이 같은 저렴한 임금조차도 현금으로 지급하는 것이 아니라 한전증표韓錢證票 또는 군용수표軍用手標 등으로 지급 받았다. 한전증표는 임금을 일당으로 지급하고 있어 한전운반 비용을 줄이고자 한전과의 교환증표로 발행되었고, 군용수표는 일본군 주둔지에서 발행되었는데 철도노동자의 임금도 이것으로 지급되는 경우가 많았다. 한전증표의 남발은 물가앙등과 임금감소를 초래했고, 경부철도의 속성공사를 전후해 이의 통용을 정지해 휴지조각이 되고 말았다. 군용수표 역시 러일전쟁이 끝나자 태환을 금지하고 말았다. 또한 철도노동자의 동원과정에서 지방관리에 의해 임금이 건몰되기도 하고 노동조직의 편제상 중간관리자에게 임금의 일부가 공제되기도 했다. 註63)

철도노동자에 대한 극심한 노동착취는 생존 자체를 어렵게 만들었는데, 1906년 2월 한파가 몰아닥쳤을 때 거리에 널려 있던 얼어죽은 시체 중에는 철도 역부로 수개월을 사역 당한 노동자가 반수를 넘었다고 한다. 註64)

임노동자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공장노동자의 존재형태에 관해서는 자료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례가 드물다. 아직 근대적 공업이 미성숙한 상태여서 공업노동자 자체가 수적으로 적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 제조업은 일부 공업의 기계화·동력화가 추진되어 가고 있었으나, 아직 초보적인 단계에 그치고 있었다. 전반적으로 매뉴팩처의 단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제조업 중에서 가장 선두를 달리고 있는 것이 바로 방직공업이었으며, 특히 도시 서울을 중심으로 성장해가고 있었다.

이러한 방직공장에서는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었는데, 그 직공 모집 광고를 보면 다음과 같다.


본회사에서 남녀직공을 모집하는데 직기織機는 편리한 발동기發動機를 이용하여 인력을 비費하지 아니하고 직조하오며, 연숙한 자는 직기 2·3좌를 운전하며 생소한 인이라도 칠팔일만 정밀히 견습하면 매일 칠팔냥 공전은 무려히 득할 터이오 공장내에 남녀를 구별하여 혼잡치 아니하면 할터이오 유지한 인은 속히 본회사로 래문하압, 단 래왕이 불편한 인은 본회사내에 유숙도 시키고 여공은 숙소구별이 유할 터이압. 註65)


이 광고문만 가지고는 이 회사에서 고용한 노동자의 규모와 노동 조건 등을 자세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발동기를 갖추고 있었다는 점으로 보아 기계를 이용하여 직조를 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고, 숙련된 노동자는 직기 2~3대를 운전할 수 있었던 것은 직기 대수가 적지 않았음을 시사해준다. 또한 기숙사 시설을 갖추고 남녀 노동자를 따로 유숙시키고 있었던 점을 보면, 공장의 규모나 고용 노동자의 수가 그리 적지는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 방직업 등 제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임금과 노동조건 등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본인이 짠 직물의 양에 따라 공비貢費를 지급했다고 한 점으로 미루어보아 필당疋當·척당尺當으로 계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것 같다.

당시 직물업은 순조롭게 성장하지 못하고, 단명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일부 살아남은 경우에도 일본 방직자본의 압박 하에서 어느 정도 타협하면서 자신의 생존을 위해 가능한 범위 내에서 기술수준을 향상시키고 생산력도 개발해 가는 정도였다. 따라서 공장노동자의 존재 역시 불안한 형태를 띠고 있었고, 공장노동에서 노동운동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외에 도시 서울에도 임노동자층이 상당히 형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한성부 자체 내에서 배출된 자들과 상경 이농인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한 통계에 의하면 1904년 서울 주민의 10.4%가 노동자로 직업 분류되어 있으며, 1910년에는 더욱 늘어나 17.5%로 집계되어 있다. 註66) 당시 서울 주민의 상당수가 임노동자로 편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울의 임노동자층은 공장노동자로 고용되거나 철도와 도로 건설 등 각종 건설사업에 동원되었다.

1907년 4월 『대한매일신보』의 기사에는 “전도성全道誠 등이 노동권업사勞動勸業社를 창설할 뜻으로 농부에 청원하고 그 회사의 사무소를 경강 용산에 설치했는데 그 회사 내에는 별도로 병원과 식당을 두었다. 현재 노동자가 3,000명이 있는데 매일 200명이 취업한다더라”하여 노동자 취업 알선 조직이 있었다고 한다. 註67) 이 조직은 이 해 10월 평양에 지사를 설립하기도 해 지속적 활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註68) 1908년 노동회라는 조직은 “임원을 조직하되 10명을 영솔하면 십장으로, 100명을 영솔하면 사무원으로, 200명을 영솔하면 사무장으로, 500명을 영솔하면 조장으로 칭하고 증명서를 마련하여” 주며 노동자의 확보에 주력했다. 註69) 이같은 조직은 서울의 노동수요 증가의 결과였다. 하지만 이들 조직은 단순히 소개료나 회비 징수에 그치지 않고 노동자의 노임까지 착취하고 있었다. 노동회의 경우 1908년 12월 노동자 50여 명이 준천공사의 노임을 지급하지 않는다고 중부 장교長橋에 있었던 노동회의 본부로 몰려와 항의했는데 간부들이 노임을 가로챘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총재로 있던 일진회의 부의장 윤시병이 사퇴했다. 註70) 이들 도시 임노동자층은 노동자 계급의 전신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존재들이다.


2. 초기적 형태의 노동운동과 그 한계

근대적 노동자층의 형성은 전반적으로 미숙했다. 농민층의 분해현상으로 농촌사회 내부에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고 생계를 잇는 농업노동자가 광범하게 축적되고 있었지만 근대적 산업의 미성숙으로 근대적 노동자로 전화된 경우는 극히 적었다. 물론 20세기에 들어 식산흥업정책이나 일제의 자본이 생산에 투자되면서 근대적 형태의 공장이 일부 나타나지만 그 수가 적어 근대적 노동자층이 사회전반에 걸쳐 제대로 형성되지 못하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매뉴팩쳐적 경영형태를 보여주던 광업의 경우 개항 이후 금수출과 관련된 계속적인 광산 개발의 결과 광산노동자층이 급증하고 있었다. 광산노동자 중에는 계절노동자로서의 소농과 빈농도 많았으나 광산노동을 전업으로 하는 노동자층도 증가하였다. 이들의 노동조건은 여전히 전근대적인 열악한 형태였다. 외국인이 개발한 광산의 경우에도 값싼 임금을 주요한 경영방식을 택함으로써 노동조건이 열악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대외무역의 증가와 함께 개항장에 부두노동자도 출현했다. 당시 부두노동은 반숙련·미숙련노동의 상태여서 노동조건이 나쁠 수밖에 없었다. 철도 건설이 가속화되면서 철도 노동자는 증가해 갔지만 일제의 가혹한 노동착취로 노동자의 노동조건은 극히 열악했던 것이다.

이처럼 노동자의 노동조건은 전반적으로 열악한 상태였지만, 이 같은 열악한 조건을 극복하려는 노동운동은 극히 미약했다. 우선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는 노동단체 자체가 제대로 구성되어 있지 않았고 노동자의 의식 역시 전근대적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해 자본에 대립되는 노동자로서의 의식은 적었다. 열악한 노동조건을 오히려 주변 주민에 대한 행패와 약탈로 만회하려는 경우도 많았다. 특히 광산노동자의 경우 이 문제는 심각했다.

〈표 33〉은 이 시기 노동단체를 정리한 것이다. 단체 중 성진·군산·진남포 등 개항장의 노동단체는 부두노동자의 단체로 보이고 그외는 성격이 불분명하다. 대개 임금의 10분의 1 정도를 회비로 받고 있어 노동자에게는 상당한 부담이 되었다. 따라서 이 단체들은 성격상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한다기보다는 앞서 본 서울 지역의 노동권업회나 노동회와 같이 노동자의 취업을 알선하고 회비를 받는 노동착취단체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이들 조직이 근대적 공장에서 조직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매뉴팩쳐적 경영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미성숙한 공업분야에서의 노동자는 극히 제한적이었고, 노동자의 조직 역시 미약해 당시 실제로 공업노동자의 노동운동은 자료상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표33〉노동단체의 구성
창립년월일단체명소재지회원수회비
1898.5.성진본정부두성진세관 구내운반부 46명노임 수입의 일부
1899.2.15공동노동조합군산부 개복동 58370명노임수입의 2/10 1개월 
수입 28-50원
1899.4.1평양곡물두량조합염점리 3280명임금수입의 1/10
1906.6.10조선노동조합진남포부 용정리 23통 8호80명총수입의 1/10, 약500원
1907.수상조합개성 송도면 서본정 31319명 
1908.4.1신창리노동조합평남 신창리 10170명임금수입의 1/10
1908.4.8광량만노동조합용강군금곡면 우등리50명1인 수입 10원에 50전
1909.4.2노동조합함남 이원군 상동면94명1원-2원 현재 1,837원 적립
1909.10.20삼화노동조합진남포부 용정리 117180명총수입의 1/10
1910.2.7선업조합진남포부 용정리 173선부 400명1인 50전

출전 :細井肇, 『滿鮮の經營』, 1921.

 

이 시기 대표적 노동운동은 부두노동자들에 의해 전개되었다. 〈표 33〉의 노동단체 중 대표적 형태가 부두노동자의 단체이듯이 나름대로 조직화된 노동운동은 부두노동자층에서 나타났다. 개항장에서 수출입이 갈수록 증가하면서 노동자의 수 또한 증가했고, 노동자의 의식 역시 함께 고양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부두노동의 사용자측은 주로 일본인들이었다. 개항장에서 상품의 수출입을 주도하던 쪽은 주로 일본인이었고, 부두노동자들은 이들에 의해 고용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부두노동자의 운동은 단순한 경제투쟁을 넘어 반외세 정치투쟁의 성격까지 띠고 있었다.

이같은 부두노동자의 노동운동을 잘 보여주는 사례는 목포에서의 노동운동이었다. 註71) 목포 부두노동자들의 노동운동은 개항된 지 5개월만인 1898년 2월 임금지불과 청구방법을 통일하려는 일본인 자본가들의 협정에 반대해 일어났다. 부두노동자들은 동맹파업과 시위 등으로 7일간 대항했다. 같은 해 9월에도 임금인상 요구운동이 발생해 한국 및 일본상인을 대상으로 10일간 동맹파업을 벌였다. 註72)

1901년 임금인하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1월 일본노동청부업자가 일본상업회의소의 부두노동임금 인하20~30%를 인하로 인한 손해를 한국인 노동자에게 전가한 것이 발단이었다. 이 조처에 지게꾼 중에는 노동을 거부하고 부두를 떠나는 자가 많았고, 칠통군은 오히려 3~4문의 인상 요인이 있다고 하면서 화물 개당 7문의 임금을 9문으로 인상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일본인 노동청부업자가 한국인부의 고용을 금지할 것을 결정했고, 한국인 노동자는 세력이 가장 컸던 두량군의 지휘 아래 전체 부두노동자는 물론, 거류지의 일본인에 고용되었던 한국인과 급수汲水인부까지 연합해 동맹파업을 단행했다. 또 한국인 객주회가 한국노동자의 입장을 지지하고 나왔다. 이 같은 대립은 3월 3일에 해결되었다. 일본상인들은 화물의 크기를 대·중·소로 구분하고 임금을 지불할 것을 요구했지만 노동자들은 크기에 구분 없이 개당 8문씩을 지불하라고 주장했다. 결국 노동자의 요구가 관철되어 일본청부업자의 임금인하 노력을 좌절시켰고, 화물의 개당 임금도 7문에서 8문으로 인상하게 되었다. 註73)

이같은 임금투쟁은 일본자본가가 조선인 노동력이 과잉상태인 것을 이용해 임금인하조처에 반대해 전개되었다. 이것은 노동력 수요와 공급원리를 이용한 일본 자본가의 경제적 압력에 저항한 것으로 기본적으로는 노동자·자본가의 계급관계에서 파생된 저항한 것이지만 민족적 모순에 반대한 운동이기도 했다.

한편 부두노동자의 노동단체가 임금을 착취하는 중간 착취자가 됨에 따라 일어난 운동이 반십장反什長운동이다. 십장은 일거리 교섭과 노무공급 등을 담당하고 있었고, 이와 관련해 노동자로부터 임금 중의 일부를 수취하고 있었다. 또 관청으로부터 노동자에 대한 통제기능까지 부여받고 있는데다가 관청에서도 십장 임명시 예납전例納錢이나 뇌물을 받고 있어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하기보다는 중간 착취자가 될 가능성이 항상 열려 있었다. 註74)

반십장운동은 1900년 7월 원산에서 먼저 일어났다. 원산 부두노동자들은 십장의 임금 착취와 나아가 십장폐지를 주장하고 있었다. 註75) 1903년 목포에서는 부두노동자가 상납하는 십장 수취액을 둘러싸고 일어났다. 십장이 받는 것 중 관청에 상납하는 상납전의 일부를 노동자에게 전가시켰던 것이다. 8월 이에 대해 칠통군 등은 별 반발 없이 응했지만 두량군은 이를 거부했다. 그러나 이에 항의하는 노동자에 대해 십장이 일본 경찰의 도움을 빌어 구류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註76) 그러나 10월 22일 노동자들이 무안감리에게 십장들의 행패를 고발하고, 감리가 십장을 제거하고 행패를 막는 조처를 내리게 되었다. 註77)

제거된 십장들이 11월 10일 일본패日本牌 착용을 구실로 일본영사에게 귀속됨으로써 반십장운동은 곧바로 반일본패운동으로 바뀌어 갔다. 일본패 착용문제는 이미 반십장운동 이전에 일어났다. 이해 초 십장들이 기존의 노동단체이던 도중都中에서 칠통군이 감리의 지원 아래 따로 도중을 만든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일본영사와 결탁하고 일본경찰서에서 만든 거류지패居留地牌와 십장차첩什長差帖을 도입해 노동자는 물론 객주에게까지 착용할 것을 강요했다. 그래서 객주와 객주 밑의 인부를 제외한 나머지 노동자들이 거류지패, 곧 일본패를 착용하게 되었다. 註78) 그뒤 6월 십장 등이 감리서에 일본패를 반납하고 감리서가 발행한 패를 착용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11월에 감리에 의해 제거된 십장이 일본영사에 귀속되어 일본순사와 함께 새로 임명된 노동단체의 간부들의 업무를 방해하고, 일본패의 사용을 노동자에게 강요함으로써 일본패 문제가 다시 야기되었다. 註79)

부두노동자를 자신의 통제하에 두려는 일본측의 입장에서는 일본패를 착용하자는 제거된 십장과의 결탁을 피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부두노동자들은 반일본패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일본거류지에 고용된 한국인 노동자를 대상으로 동맹파업을 요구하면서 반일본패운동을 확산시키고 있었다. 이러한 노동자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곤란을 겪던 일본상인들은 패를 착용하지 않은 채 노동자를 노동시키자는 제안을 했지만, 노동자들은 이에 대해 강력히 거부했다. 註80) 이에 당황한 일본상업회의소日本商業會議所는 거류지신문을 이용한 선전활동을 개시하는 한편, 우리 상민에게 협박과 회유를 반복했다. 더구나 일본상인들은 도검으로 무장을 하고 감리에게 협상을 요구했다. 이 같은 일본 민간인의 조선 관리 협박은 외교적 문제로 비화됐다. 註81)

11월 22일 제거된 십장과 일본인들이 일본영사의 사주를 받고 감리의 지시로 무역을 다시 열기 위해 조계에 나온 부두노동자들을 구타해 조계 밖으로 내쫓았다. 다음날 감리가 일본영사와 일본경찰서의 경부를 찾아서 이 사태에 대해 항의하면서 일본패 착용 강요와 제거된 십장의 재임용이 불가함을 통보했지만, 영사와 경부는 이에 대해 욕설로 맞섰다. 註82) 사태가 이렇게 진전되자 거류지 외 곳곳에 일본인 배척의 격문이 붙여졌고 파업노동자들은 일본인과 거래를 하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당사자의 집을 불태우고, 당사자에게 폭행할 것을 주장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이탈하는 객주도 있어 12월 6일에는 부두노동자 수백 명이 해당 객주와 십장을 때리고 가옥을 파괴해 순검이 출동했다. 12월 9일에는 일본인 노동자 수십 명이 장검을 지니고 한국경찰서를 침입해 순검을 구타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註83)

이처럼 사태가 악화되자 12월 11일 일본은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군함을 파견할 것을 통보하고 12월 14일 일본군함 1척이 목포에 도착해 대포 2문을 이끌고 무장한 군인들이 상륙해 시위하자 일본 노동자 수백 명이 몽둥이나 장검을 지니고 한국의 노동자집회소를 습격해 4명의 중상자를 포함한 22명의 한국인 부상자를 내었다. 註84) 이에 대해 조선정부는 총순摠巡 1명과 순검 10명을 특파하는 등 사태 수습에 나섰고, 일본군함은 부산으로 철수했다. 그후 협상이 계속되어 12월 24일에 사판관·무안감리서리·인천세무서와 일본영사 사이에 의정서가 체결되었고, 반일본패운동의 주모자들에 대해 체포령이 내려졌다. 註85) 그리고 12월 26일 한국인 노동자가 작업을 개시하고 예전의 십장들이 체포되거나 다른 항구로 쫓겨남으로써 40여 일11.11~12.26간의 반일본패운동은 종결되었다.

반십장운동은 부두노동자의 단체의 대표자 역할을 맡고 있던 십장이 노동자의 이익 대변보다는 오히려 노동자의 착취에 앞장섬으로서 일어난 것이었다. 다시 반십장운동으로 제거된 십장과 일본측과 결탁이 반일본패운동을 야기시켰다. 따라서 반십장운동은 노동자의 의식이 상승된 결과이고 반일본패운동은 단순히 경제투쟁을 넘어 부두노동자를 그들의 예속 아래 편입시키려는 일본에 대항해 일어난 것이었다. 하지만 노동자의 조직력이 여전히 낮아 그들의 조직형태도 전근대적인 것에 머무르는 등 내부적으로 노동자의 성숙도가 낮아 운동의 형태도 자연발생적인 것이었다. 註86)

부두노동 외에 전업적 노동자가 대량으로 발생한 것은 광업분야였다. 광산지역에서 소요사태는 빈발했고, 광폐鑛弊라고 불릴 만큼 광산노동자의 문제는 심각했다. 이 경우 대부분이 노동운동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주로 광산노동자의 광산 인근 주민에 대한 행패로 인한 소요사태이거나 광산의 주도권을 둘러싼 외국인과 한국인, 한국인간의 다툼에 동원되는 것일 뿐이었다. 註87) 따라서 광산노동자에 의한 광폐는 노동운동의 범주에 넣을 수가 없다. 이처럼 광산노동자의 노동운동이 제대로 전개되지 못한 것은 광산노동자의 상당수가 계절노동자로 반농반노의 상태였고, 이동성이 강해 광산노동자 자체의 조직화가 힘들었던 탓이다. 그 때문에 이들의 노동의식의 고양은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철도는 제국주의 국가가 자본·상품·군대·이민을 침투시키고 원료·식량을 수탈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일제의 한국에서의 철도부설도 이 목적에 그대로 부합한다. 따라서 일제의 철도건설이 진행될수록 한국 내부에서의 저항도 높아져 갔다. 철도건설 노동자의 강제동원과 살인적 사역 및 일본인 노동자들의 잔악한 횡포는 연선 주민들에게 일본인에 대한 증오심과 함께 반철도의식反鐵道意識을 심어주었다. 연선 주변의 주민들이나 의병부대의 철도운행의 방해나 철도전선과 철도시설을 절단하거나 파괴하는 사례는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빈발했다. 의병이나 활빈당은 수시로 철도와 군사시설을 공격했다. 또한 주민과 의병은 철도부설에 관여했던 일본인과 부일배附日輩를 공격하는 사례도 많았다. 이에 대해 일본은 군대를 동원해 연선의 주요지역을 경비하고 철도공사를 보호했다. 나아가 철도를 파괴하는 한국인에 대해 군율로 사살하는 사례가 많아 1904년 7월부터 1906년 10월까지 2년 남짓한 기간 동안 사형 25명·감금 구류 46명·추방 2명·태형 100명 과료 74명 등 257명을 처벌했다. 註88)

철도노동자는 총칼로 무장한 일본인 감독에 의해 혹독한 사역과 극한적 노동강도에 시달렸지만, 저항은 거의 불가능했다. 노동자의 행동이 조금만 느려도 가차없이 발길질과 곤봉세례가 가해졌고, 조금이라도 저항하는 노동자들은 가차없이 처형되었다. 오히려 철도노동자의 철도연선에서의 횡포가 민란을 야기시킬 정도로 심각한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었다.

철도노동자의 저항이 일어난 사례는 경부선에서 녹도조鹿島組가 시공한 증암增岩 터널858피트 공사에서 정도였다. 이 공사현장에는 매일 300명의 한국인 노동자를 사역하면서도 하루에 5피트 정도밖에 굴착하지 못했던 난공사였다. 그래서 일본인 감독은 곤봉과 피스톨로 무장하고 한국인 노동자들을 감독했다. 이에 견디다 못한 한국인 노동자들은 폭동을 일으켜 일본인 감독들을 터널 속으로 몰아넣고 공사장을 점령한 적도 있었다. 註89) 이 사건은 혹독한 노동강도에 반발해 일어난 우발적 사건으로 조직적 노동운동은 아니었다. 따라서 철도노동자에 의해 노동운동이 일어난 사례는 현재까지의 자료에서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당시는 농민층 분해가 가속화되면서 농촌과잉인구가 퇴적되어가는 시기였지만 자본주의적 관계의 성장이 여전히 미숙한 관계로 노동자층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하였다. 물론 광무정권의 식산흥업정책이나 일본자본의 침투의 결과 근대적 공장이 나타나고 공장노동자가 출현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공장노동자의 수요는 극히 적고, 공장 역시 근대적 공장이라기보다는 매뉴팩쳐적 경영으로 운영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공장노동에서의 노동조직이 만들어진 예를 찾기가 어렵고 노동자의 의식도 미성숙해서 노동운동을 공장노동에서 찾기는 어렵다. 대량의 노동자가 발생하고 있던 곳은 일제의 제국주의적 침탈과 관련해 개항장의 부두와 철도건설에서였다. 또한 광산개발로 광산노동자 역시 급증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노동조직의 출현이나 노동의식의 성숙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철도의 경우 일제의 가혹한 노동 감독으로 노동자의 저항 자체가 거의 불가능했고, 광산노동자의 경우에도 반농반노이거나 이동성이 강해 조직화가 진행되지 못한 채 오히려 주변지역 주민과의 마찰로 사회적 문제를 야기시켰다. 조직적 노동운동은 부두노동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목포 부두노동자의 임금인하 반대운동·반십장운동·반일본패운동은 경제투쟁에서 반외세의 정치투쟁으로까지 발전하고 있었다. 하지만 부두노동자의 노동운동 역시 조직력이 낮았으며 조직형태도 전근대적이었다.

당시 노동자의 성숙도는 미숙했고, 아직 근대적 노동운동의 본격적 출현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실정이었다. 산업화가 진행되지 않은 사회적 조건의 결과였지만, 다양한 양태로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었던 임노동자층은 이후 근대적 노동자 계급의 주요 공급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