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곡물수출과 방곡령
방곡령 실시의 사례와 원인
곡물수출의 성격
2. 곡물수출의 성격
1. 곡물가격의 지역간 차이의 의미
각 개항장은 각기 배후지의 성격과 그 지역의 풍흉·전통적 유통권과 관계·악화유통으로 인한 인플레이션 현상, 그리고 일본으로 곡물유출, 정치 사회적 사건 등 제반 요인과 관련하여 가격이 변동하고 있었다.
연도 | 엔화가격 | 한전가격 | 한전시세 |
1884 1885 1886 1887 1888 1889 1890 1891 1892 1893 1894 1895 1896 1897 1898 1899 1900 1901 1902 1903 1904 | 1.303 1.139 1.331 1.489 1.026 1.021 1.037 0.933 0.827 0.891 0.806 0.801 0.928 0.813 0.781 0.837 0.782 0.907 1.047 0.875 0.771 | 2.162 2.631 3.814 3.922 2.092 2.318 3.650 4.520 4.124 3.458 4.335 3.879 0.817 0.818 0.837 1.044 1.388 1.208 1.181 | 0.603 0.433 0.349 0.380 0.490 0.440 0.284 0.206 0.201 0.258 0.186 0.206 0.956 1.023 0.934 0.869 0.754 0.724 0.653 |
평균 | 0.969 | 2.537 | 0.524 |
출전 : 하원호, 『한국근대경제사연구』, 신서원, 1997.
비고 : 한전 시세 대비 중 인천은 1894년까지 당오전 시세, 1895년은 1~6월간 당오전 시세, 1898년 이후는 백동화 시세.
그 과정은 지역에 따라 다르고 따라서 상호간 가격의 격차를 나타내게 되었다. 또 이 시기는 당오전·백동화 사용지역과 엽전사용지역이 분리하여 존재하는 등 화폐의 유통권까지 달라 특히 한전으로 표시된 가격 간에는 극심한 편차를 드러내고 있었다.
각 지역의 쌀 1석의 가격을 엔화가격과 한전가격으로 대비한 경우 엔화가격에서 원산이 다른 지역보다 미가 수준이 높게 나타난다. 註97) 쌀의 생산지역을 배후지로 하지 않고 전통적으로 타지역의 미곡유통권, 특히 부산미 수출의 주요지역으로 포섭되어 있어 소비지로서의 역할을 하는 원산은 1882년에서 1894년까지 부산과 평균 0.8엔 정도의 차이를 보이며 부산항의 가격조건에 비례하여 변동하고 있었다. 이같은 항상적 부산미의 수출지역으로서 원산은 당연히 조선상인의 무곡貿穀대상지역이 될 수밖에 없었으며 일본상인이 1890년대에 들어 일본미의 수입만이 아니라 부산과 원산을 잇는 전통적 곡물유통권을 대상으로 미가의 차이를 이용하여 기선으로 부산미를 원산으로 운송하고 이익을 취하는 사례가 나타나게 됨은 이미 살펴 본 바이다.
인천지방의 미가는 개항 직후에 부산미가에 비해 높았지만 〈표 13〉에서 보듯이 1891년 이후에는 엔화가격수준이 낮아지게 되었다. 개항 직후의 높은 가격은 극심한 흉작 때문이었다. 1890년대 이후는 항상적으로 낮은 수준을 유지했다. 이는 부산항이 경상도에서 7할, 전라도에서 3할 정도의 미곡을 공급받아 경상도의 곡물이 주종을 이루던 반면, 인천항은 경인지방을 비롯하여 평안도·황해도·충청도·전라도 각지가 모두 미곡의 공급지였던 탓이다. 그리하여 이같은 가격조건과 서울중심의 유통권이 가지는 곡물의 집산지로서의 배후지적 성격으로 말미암아 인천은 쌀의 대일수출이 증가할 수밖에 없어 총쌀수출액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1890년 42.1%, 1891년 39.7%, 1892년 46.7%, 1893년 73.3%, 1894년 82.9%, 1895년 78%로 급증하여 갔던 것이다. 註98) 이러한 성장의 배경에는 당시 부산항의 배후지인 경상도지역이 흉작이었던 탓도 있다. 그래서 1896년 이후에는 오히려 부산항이 다시 주된 수출항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인천항의 수출량이 줄어드는 것은 목포·군산·진남포 등지가 개항되면서 수출량을 분점하게 된 데 더 큰 이유가 있었다. 부산의 경우 마산항의 개항이 있었지만 마산으로 집산되는 곡물은 대부분 부산으로 이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개항장 증설에 따른 수출감소가 적었던 것이다.
〈표 13〉에서 보는 대로 서로 통용화폐가 다른 한전으로 비교하지 않고 엔화가격으로 비교해 보아도 후기에도 전기에 비해 상호 가격 격차가 크게 줄어들지 않는다. 농업생산물이라는 곡물의 특수성으로 흉작 여부가 가격결정의 우선 요소여서 풍흉이 교차될 경우 가격차이는 나타나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미 일본선박의 도입 등에 따른 교통의 발달과 이를 이용한 지역간 유통도 활발해지는 가운데도 큰 변화를 보이는 않는 것은 대상지역들이 개항장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곡물의 대일수출을 주요 기능으로 하던 개항장의 성격상 국내가격에 비해 일본 미가가 보다 높을 경우 우선적인 수출선은 일본일 수밖에 없었고 국내적 가격격차를 줄이는 것은 2차적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전 가격의 변동을 살펴보면 원산과 부산은 풍흉에 따라 일정하게 가격 차이를 보이고 원산의 미가가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을 유지하지만 큰 차이없는 가격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인천지방은 개항 직후인 1883년부터 가격의 급격한 상승을 보여준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1883년 발행되기 시작하는 당오전의 인플레이션 현상에서 기인한다. 註99)당오전은 명목가치가 종래 당일전상평통보의 5배이면서도 실질가치는 2배밖에 안되는 악화였다. 註100) 이 화폐는 그 이듬해까지 대량으로 발행되었으나 악화주조에 따른 폐해로 주조가 한동안 억제되었다가 1888년부터 다시 만들어졌다. 1891년부터는 평양에서 종래 당일전 실질가치의 1/3도 못되는, 흔히 평양전이라 불리는 조악한 당일전이 대량 발행되었다. 악화남발은 유통되는 모든 조선화폐에 대한 가치를 하락시키며 격심한 인플레이션 현상을 유발했다. 〈표 13〉의 한전 시세 대비에서 인천은 1895년까지는 당오전의 시세로 표시된 것이다. 표에서 보는 대로 당일전을 주된 화폐로 사용한 부산에 비해 그 시세가 계속 내리고 있었다. 1892년경에는 조선 전역에 걸쳐 당오전·평양전·구당일전 구별없이 모두 같은 가치로 유통하게 되었다. 註101)
원래 부산과 원산은 당오전 통용지역이 아니고 전통적인 당일전 유통권지역이었다. 그러므로 이들 지역에서는 곡물유출과 관련된 미가 등귀, 그리고 당오전이 당일전에 포섭되어 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통화량의 팽창 등으로 1883년의 미가를 기준으로 한전 가격이 1894년에 2배 전후로 오르지만, 경인지역은 악화로 인한 극심한 인플레이션 현상을 보여 미가가 7배를 훨씬 넘게 상승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술한 대로 엔화가격은 오히려 경인지역이 낮아지면서 일본상인의 곡물 유출이 후기로 갈수록 부산에서 인천항으로 이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당오전의 환전 시세 하락과 7배를 넘는 미가의 상승현상은 당오전 유통지역, 특히 서울을 비롯한 도시민의 생계를 극심하게 압박하였고 곡물의 상품화 역시 촉진될 수밖에 없었다. 도시의 하급관리나 군인, 그밖의 도시의 임금노동자를 비롯한 빈민들은 화폐로 임금을 지급받고 이로서 곡물을 구입하여 생계를 이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으므로 미가의 극심한 상승과 관련하여 상당한 인구가 도시에서 식량과 연료가 싼 농촌지역으로 이동한다는 보고가 나올 정도였다. 註102) 그래서 지역내 곡물시장의 곡물가격 안정을 위하여 지역내 곡물의 유출을 저지하는 방곡령도 1890년대에 들어 주로 당오전 지역을 중심으로 실시되었다.
악화발행으로 인한 인플레이션 문제는 그 이후 다시 백동화의 발행으로 재발되었다. 백동화는 1894년의 「신식화폐발행장정新式貨幣發行章程」 이후 발행되기 시작해 이 해 9월부터 실제 사용에 들어 갔다. 註103) 그러나 본격적으로 주조·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898년부터였다. 이때 백동화가 재발행되기 시작한 이유는 당시의 재정궁핍과 관련이 있었다. 註104) 〈표 13〉의 한전 시세 중 1898년 이후 인천은 백동화 시세로 대비한 것이다. 백동화 시세는 표에서 보는 대로 부산항의 엽전 시세에 비해 계속 하락하고 있었다. 백동화는 통용가치의 하락현상이 심해 일본인의 은행에서는 한때 받기를 거절할 정도였다. 註105) 실질가치가 낮던 백동화는 그레샴법칙에 의해 엽전과 당시 통용되고 있던 일본 엔은円銀을 시장에서 구축했고, 1900년 5월 14일 조선정부는 칙령으로 백동화의 사주私鑄를 특허한 결과 더욱 조악한 악화가 남발되고 위조화가 나왔고 심지어 위조화가 외국에서 밀수입되기까지 했던 것이다. 註106) 악화 남발로 인한 실질가치의 하락은 백동화의 통용가치를 급격히 하락시켰고 계속적으로 물가 등귀를 유발했다. 그 결과 1904년에는 1898년에 비해 엔화가격으로는 큰 차이가 없었으나 한전 가격으로는 2배 이상의 등귀를 보게 되었고 부산항보다 높을 수밖에 없었다.
곡물을 수출하는 개항장에 비해 그 배후지였던 비개항장지역의 가격수준이 상대적으로 낮을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일본인의 행상이 증가하면서 가격격차는 줄어드는 실정이었다. 〈표 14〉는 1900년 초반 경상도 남부지역의 현미 1석당 가격이다. 이 표는 지역에 따라 도량형이 다른 것을 일본도량형으로 환산한 것이어서 실제와는 다소간 차이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 해 부산항 현미의 1~6월간 평균 시세는 8.33엔이었고, 수출미가는 9.17엔이었다. 표에 나타난 지역간 가격격차는 최고 2엔 이상의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대량의 곡물수요와 가격조건이 더 좋은 개항장인 부산과 마산이 인접하고 있어 미곡은 조선선박으로 개항장으로 반출되는 것이 많았다. 이 중에서도 인구 13,500여 명 중 과반이 상공업에 종사하여 도시적 성격을 띠고 일본상인의 곡물매입을 위한 행상이 많던 진주의 미가가 가장 높다. 註107) 일본인의 행상이 가장 많고 미곡의 집산지였던 진주지역의 가격수준이 부산의 가격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미 이 시기에 들어 일본상인의 행상이 치열해져 가면서 개항장외의 지역에서도 개항장 미가, 나아가 일본 미가에 상당한 정도로 근접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방명 진해 고성 통영 사천 곤양 관문 4.00 4.38 4.75 5.00 3.57 엔 6.70 7.32 7.95 8.37 5.98 지방명 하동 진주 의령 칠원 창원 관문 4.75 5.29 4.25 4.80 4.75 엔 7.95 8.85 7.11 8.04 7.95
비고 : 한전 시세는 16.74할로 환산.
지방명 | 수원남문장 | 오산장 | 둔포 | 아산곡교리 | 목천 | 청주 |
원 | 11.8 | 12.5 | 10.4 | 10 | 9 | 8.75 |
엔 | 8.88 | 9.41 | 7.83 | 7.52 | 6.77 | 6.58 |
비고 : 2元=1貫文, 한전시세는 인천항 7~9월 평균 15.05할로 환산.
연도 | 일본미가(엔) | 수출가격(엔) | 수출량(엔) |
1877 1878 1879 1880 1881 1882 1883 1884 1885 1886 1887 1888 1889 1890 1891 1892 1893 1894 1895 1896 1897 1898 1899 1900 1901 1902 1903 1904 | 5.18 5.70 7.85 9.69 9.40 7.90 6.14 5.13 5.82 5.31 4.92 4.59 5.71 8.33 7.02 7.48 7.27 8.40 9.00 9.82 11.33 11.81 9.71 10.79 11.63 12.19 13.60 13.00 | 4.00 3.51 4.18 5.30 4.99 4.90 4.84 4.56 3.99 3.61 3.33 3.39 5.62 5.82 4.90 5.12 5.40 6.51 6.05 6.92 7.99 10.57 7.50 7.91 7.55 9.29 10.18 10.38 | 474 13,193 70,635 93,288 45,077 2,721 7,464 43 3,933 3,382 27,036 6,426 13,811 349,866 371,204 195,040 68,031 150,496 305,196 906,585 1,738,331 652,402 472,321 1,145,805 1,388,783 948,008 1,037,361 313,383 |
평균 | 8.38 | 6.01 |
일본으로 강제운송되는 미곡(192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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