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제7장 개항 이후 민중의 존재형태와 대응, 농민층의 동향과 자본주의적 관계의 성장/제2권 개항 이후 일제의 침략

몽유도원 2013. 1. 14. 11:27

제7장 개항 이후 민중의 존재형태와 대응


농민층의 동향과 자본주의적 관계의 성장

노동자 계층의 변화


1. 농민층의 동향과 자본주의적 관계의 성장


1. 지주제 강화와 농민층의 존재형태

1862년의 임술민란 이후 봉건지배층은 농민저항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농민층 안정의 이정책釐正策을 내어놓았고, 그 방향은 ‘균부균역均賦均役’의 입장에 선 부세제도 개혁이었다. 대원군집권기의 호포제를 비롯한 각종 부세제도의 이정은 이같은 목적에서였고, 그것이 그대로 농민경제의 안정으로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지주제의 성장을 일정하게 제약하는 것이기도 했다. 註1)

부세의 도결화都結化 경향 역시 농민부담을 가중시키기는 했으나 마찬가지로 지주의 성장 역시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 과정에서 지주제는 정체되기도 했다. 註2) 지주제 정체의 한편에는 일정하게 부농의 성장 근거가 있다. 특히 개항 이후 급속히 진전하는 상품화폐경제의 변화 속에 상업적 농업으로 성장하는 계층은 바로 이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부농층이었다 註3). 상업적 농업은 주로 전작을 위주로 하므로 답작에 비해 상대적으로 수탈이 약했다. 또한 토포는 자본제 면제품, 곧 금건의 침투에도 불구하고 금건이 가지는 취약성으로 말미암아 아직 구축되지 않았고 註4), 오히려 농민전쟁 이전의 단계에서는 가격조건에서 상대적으로 좋아짐으로써 토포생산지역에서의 부농성장은 계속될 수 있었다. 수출에 의한 곡물의 상품화도 지주제의 강화가 동반되지 않는 단계에서는 부농층에 유리한 점으로 작용할 수 있었고, 실제로 이들은 곡물을 매집하고 개항장으로 반출하기도 했다 註5).

곡물수출과 관련해서 일정하게 생산력의 증진현상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시기 대두의 수출 증가와 가격등귀는 대두의 경작면적 확대로 이어졌고, 1890년대부터는 대두가 토포보다 가격조건이 나아지면서 전작田作에서 대립하던 면화작을 구축하는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또한 대두의 경작방식도 개량되고 있었다. 원산이나 경상도지역은 대두작이 전반적으로 확대되고 있었는데 대표적 면작지대인 목포에서는 “원래 전라도는 대소두의 산출이 적고 또 품질이 불량해서 도저히 비료 이상이 될 수 없었다. … 근래 당지방 한농韓農은 이들 잡곡의 경작에 크게 주의함과 동시에 품질을 개선하여 수출고는 개항이전보다 배로 늘어난 경황이다 … 한농의 경작이 갈수록 증가하고 또 경운耕耘 방법 역시 한층 개량의 실정을 드러내었다. 개항 후는 점차 면화작에 대신해 대소두로 해 수익이 많다”고 했다. 註6) 대소두의 수출이 많아진 것은 면화작의 위축말고도 경작방식의 개량과 품질개량이 주요원인이었던 것이다. 이같은 사정은 군산의 배후지인 충청도와 전라북도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註7).

인천 일본영사의 보고에 의하면 1897년 소맥小麥의 대풍작은 1885년 맥작이 대흉작일 때 일본에서 수입한 소맥을 종자로 사용한 것도 중요한 원인이라고 한다. 註8) 종자개량은 일본미종日本米種, 倭粗의 도입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부산지역은 곡물수출의 호조에 힘입어 1890년대 중반 ‘불모지를 개경開耕하고 일본미종을 파종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었고 註9), 전남 학교鶴橋와 함평지역에서 일본미종의 도입은 1890년을 전후하여 시작되었다. “전남 함평과 학교 간의 평지는 수전으로 … 타 지방과는 달리 무망종無芒種을 재배하는 곳이 10의 7~8에 달한다. 함평 군아郡衙 이원吏員의 이야기로는 대개 15년 전 일본인에게서 일본종의 벼를 얻어 시작試作한 결과가 양호해 일반에 많이 전파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註10)

전주나 영산포 부근에도 일본미종은 상당한 수준으로 경작되고 있었다. 나주부근 영산포에는 1894~1895년경 부안·만경 지방에서 전래되어 널리 퍼진 것은 1897년 이후였는데 10곳 중 2~3곳이 왜조倭粗의 재배지역이라 한다. 전주지방도 왜조의 경작면적이 넓어 10곳 중 4~5곳에 이르렀다. 수확이 많고 가격이 높아 재배면적은 넓어질 추세라고 일본영사는 보고했다. 왜조의 도입 주체는 부농 이상의 농민이었다고 생각된다. 수확량이나 품질에서는 쌀에 비해 앞서는 편이었으나 이앙 이전에 빨리 성숙하고 뿌리내림이 일러 이앙 후 착근着根에 문제가 있어 한해를 당하거나 수해를 입을 때 빨리 마르고 쉽게 넘어지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더구나 만도晩稻이기 때문에 가을의 상해霜害와 기후의 급변 때문에 가끔 결실에 장해를 받기도 했다. 이러한 약점이 왜조 경작의 보편화를 막았던 것이다. 註11) 그러므로 이 같은 위험성을 무릅쓰고 경작을 할 수 있는 쪽은 소빈농이라 보기 어렵고 부농 이상의 농민이나 경영에 적극성을 보이는 지주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된다 註12).

1890년대 이후 곡물수출의 증대는 “비로소 당국농민도 그 잉여의 미곡을 고가로 방매하고 수입화물을 염가로 매득하는 이익을 알게 되었다. 그 결과 종래 버려 두고 돌보지 않던 밭을 개발하고, 또 일가 여러 명의 배고픔을 면하는 것으로 만족했던 농부도 다소 남는 양식을 얻으려고 애쓰게 되었다”는 결과를 가져왔다. 註13) 앞서의 대두경작면적의 확대는 일반화된 현상이었지만, 미작의 경우에도 일부 진전陳田이나 황무지를 개간하고 있었다.

대규모의 개간은 많은 자금이 투자되어야 했으므로 그 주체는 역시 지주나 관료·상인·왕실이었다. 수출증가로 인한 미가등귀는 서울이나 지방의 부호가 ‘농지의 신흥新興’에 힘쓰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으로, 註14) 1900년 서울의 오평묵吳平默 등은 개간회사를 설립하고 경상도 성주·상주·대구·의흥義興 등지의 개간인허를 청했다. 註15) 1901년 강원도 원주의 이호상李鎬尙은 일본인과 함께 황무지를 개간하기 위해 농부에 청원하고 있고, 註16) 같은 해 단천의 김성중金誠中 역시 은호銀湖 등의 개간을 청원했다. 註17) 1902년 전남 영광군의 조모曹某는 일본인을 초청하여 영광군 남쪽 1리 하안 곧, 법성포法聖浦로 유입되는 강안을 개간하여 2~3개월만에 30여 정보를 개간했다고 한다. 註18) 이들의 계급적 위치는 확인할 수는 없지만 대량의 노동력과 자금이 동원되어야 하는 개간의 성격상 지주로 짐작된다.

1904년 황해도 배천군수 유기준兪起濬은 2만 량의 자금을 들여 인민을 동원하고 배천지白川池의 동서 양지兩池의 황폐한 곳을 개간해 사유지로 만들어 종래 이곳을 이용하던 인민의 불만을 사고 있었다. 그가 퇴임한 후 새로 부임한 군수는 유기준에게 개간지를 나누어 줄 것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하자 인민을 동원해 개간지를 파괴하도록 했다고 한다. 유기준은 1906년 농상공부에 청원서를 내어 개간지의 소유를 인정받았다. 註19) 러일전쟁 전후 일본의 미간지 침탈시도는 주지의 사실이지만 이에 자극되어 일부의 민간실업자와 관리들은 농광회사農鑛會社를 설치하고 개간특허를 청원하기도 했다. 註20) 전라북도에서의 균전수도均田收賭 문제도 결국은 개간에 대규모의 재원을 투자한 왕실과 실제 이 농지의 소유자이던 농민의 대립에서 야기된 사건이었다 註21).

곡가등귀는 지주층에게 새로운 개간만이 아니라 기간起墾된 토지에 대한 투자도 확대시켰다. 〈표 29〉는 개항기 토지가격의 상승율과 미가상승율을 대비한 것이다.

표29〉지가·미가·목면가의 상승률 비교
연도18871904가격상승률
구분
의성49.54.954.08.61.09배1.75배
안동22.222.232.015.01.440.68
현풍27.018.068.414.62.530.81
양산14.92.428.05.61.892.33
평균28.3911.8945.600.961.61배0.92배
구분목면목면목면
부산3.730.9511.130.992.98배1.04배

출전 : 1887년은 松田行藏, 『朝鮮國慶尙忠淸江原旅行記事』, 1904년 양산은 加藤末郞, 『韓國農業論』, 나머지는 『韓國土地農産調査報告』. 

비고 : ① 지가는 상등토지기준 반보당 엔화가격. 미는 석당, (조선)목면은 반당 엔화가격. 

② 1887년 한전시세 15할强. 1904년 양산은 14할, 나머지 18할로 환산. 

③ 1904년 현풍답, 안동의 답과 전은 평균가격. 

④ 1두락=150평.


우선 위의 표를 통해 지가 중 답가격의 상승률에 비해 미가의 상승률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인의 지가조사시 토지매입의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고 농민들이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제시했음을 감안하면, 실제의 미가상승률은 답에 비해 위의 표보다 더 높았다고 보여진다. 물론 지가가 미가의 상승율을 능가하는 경우도 있었다. 1903년 대구지방의 조사에 의하면, 1894~1995년경에는 1두락에 겨우 2~3관문으로 거래되었는데 조사를 하던 단계에서는 10관문 내외로 올랐다고 한다. 대개 3배 이상 등귀한 셈이다. 註22) 미가의 경우 부산항에서의 한전가격은 1895년 3.46관문, 1903년 8.04관문으로 2·3배 정도가 올랐다. 그러나 1903년은 계속된 흉작으로 말미암아 개항장인 부산보다 내륙지방의 가격이 더 높아 미곡이 개항장 밖으로 역류되는 현상이 나타난 해여서 실제 대구지방의 미곡가격은 훨씬 높았다고 생각된다. 註23) 작황에 따라 급격히 변동하는 농업생산물가격을 일정 시점만 분리해 지가와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하지만, 비교된 시점에서의 대구의 미가상승율은 단순가격 비교에서도 지가상승율보다 결코 낮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지만 지가상승율이 높다해도 토지에 대한 지주의 투자의욕이 감퇴될 수 없었다.

이 시기 조선의 지가는 일본과 비교해 볼 때 훨씬 낮아 토지수익률이 상대적으로 높았다. “시험적으로 이를 계산해보면 극상토지極上土地 1정보대개 25두락의 매입비를 375엔1두락 평균 15엔으로 하고 그 산액産額을 20석이라 간주하면 그 중 10석은 소작료로 당연히 받게 되고, 다시 그 매가를 1석에 6엔이라 가정하면 10석의 가액이 60엔이라 할 수 있다. 즉 그 수지를 계산하면 원가에 대한 연이익이 1할 6푼에 상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의 지주와 비교해 볼 때 약 2배의 이익이 되는 것이었고, 따라서 지가가 1903년의 수준보다 “다시 3·4배로 되는 것은 결코 공상이라고만 말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註24) 일본으로의 곡물수출이 진행되면서 미가 자체가 일본시장의 가격과 연동하여 바뀌고 아직 일본보다 토지수익률이 두 배나 되던 상황에서 비록 지가가 3배 이상 올라 미가상승율보다 높은 지역이라 하더라도 지주의 토지에 대한 투자성향은 경영합리화보다는 소유확대로 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답의 가격에 비해 전의 상승률은 상대적으로 낮다. 이는 참고로 제시한 논의 생산물인 쌀의 가격상승률보다 밭의 생산물인 목면의 가격 상승률이 낮은 것과 일치한다. 이 같은 조건은 쌀 생산을 중심으로 한 논에서의 지주제의 강화와 함께, 면업과 면포의 생산을 주요기반으로 하던 부농경영이 위축되고 있던 사정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위 지역은 주로 부산항의 유통권 내에 포함된 지역이다. 그 중에서도 부산항과 가깝고 부산항으로의 미의 반출이 상대적으로 많던 현풍과 양산은 답의 가격상승률이 다른 지역보다 곱절 가까이 높다. 이 지역의 답 가격의 상승률이 다른 지역보다 우세한 것은 곡물수출과 연결하여 생각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시기까지는 아직 지주제의 강화가 개항장에서 가까운 지역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증거로도 볼 수 있다. 실제로 지주제 연구의 성과도 개항장이 가까운 지역에서부터 지주제가 성장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지주가 매입하는 토지는 당연히 농민이 방매한 토지였다. 농민은 일본상인의 입도선매로 궁박판매를 강요당하는 데다가 결가結價의 상승으로 토지를 방매할 수밖에 없었다. 1900년에는 결가를 30냥에서 50냥, 1902년 다시 50냥에서 80냥으로 올리고 있었고, 더구나 각종 잡세의 수취로 몰락이 가속화되어 소농·빈농의 토지방매는 증가되었다. 註25)

이미 조선후기 이래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에 따라 곡물의 상품화가 촉진되었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며 개항 후 양국 간 곡가 차이로 인한 교역기회의 증대와 교역조건의 유리는 곡물의 상품화를 가속화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었다. 이 곡물수출의 주역은 당연히 지주나 관료였다. 농민전쟁 단계에서의 다음의 일본영사의 보고는 개항장 미가에 지방관이 영향을 미치고 있던 사정을 짐작하게 한다. “종래 당국 지방관은 농민에게서 미곡으로 납세 받아 그것을 관고에 저장하고 가격의 등귀를 기다려 매출하고 그에서 얻은 대가에서 서울에 정액의 상납금을 보내고 나머지 금액을 전용하는 관습이 있다. 매년 구미舊米가 점점 줄어들고 신미新米가 아직 시장에 나오기 전 미가가 등귀할 때 내지에서 수송미가 많아지는 것이 상례인데 본년 1894년은 아직 미가의 등귀도 없고 저렴함에도 불구하고 다량이 수송되어 왔을 뿐 아니라 계속 수송되는 상황이다. 이는 본년 4월 하순 전라도에서 동학당이 재봉기한 이래 도처에 관고를 약탈하는 까닭에 지방관들이 저장한 미곡을 뺏길 것을 두려워 하여 시가 여하를 살피지 않고 계속 저장미를 당항에 수송하는 때문이다.” 註26)

농민에 의한 상품화도 진행되어 갔는데 그 성격은 역시 궁박판매였다. 이 시기 농민에 의한 상품화는 우선 조세의 중압이 강요한 상품화를 들 수 있다. “1885년 부산근방에 대기근이 들어 날마다 아사자가 십수 명에 이르는 참상인 흉작인데도 불구하고 다소의 미곡수출이 있었던 것은 하민下民 등이 수세의 엄함을 두려워해 근근히 수확을 해도 매각해서 조세에 보충하는 데 원인이 있었다” 註27)는 기록에서 보듯이 이미 갑오 이전에도 조세금납화와 교역의 기회가 결합되면서 농민으로 하여금 곡물의 상품화를 강요하여 잉여생산물이나 자가소비부분까지 수출곡물화했던 것이다. 또한 농민은 전근대적 고리대자본에 예속되어 있는데다가 의복을 비롯한 필수품을 마련하기 위해서도 곡물을 상품화시키고 있었다. 이 의복의 구매는 외국상인이 수입하는 자본제 면제품이 증가함에 따라 조선목면에서 수입품으로 기호가 전환되고 있었기 때문에 토포의 가격조건은 악화되어 가고 결과적으로 수입품구입을 위한 구매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註28)

그리고 곡가등귀에 따라 가격체계가 유리해지면서 새로운 경작지를 개발하거나 앞서본 바와 같이 면작지의 대두작으로의 전환도 일어나는 등 생산이 증가한 데도 원인이 있었다. 특히 대두는 주로 농민에 의한 상품화가 주도되었던 곡물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상품화의 이익은 자가소비부분까지 판매하는 경우가 아닌 잉여생산물의 판매에서도 반드시 농민에게 돌아간 것만은 아니었고 조선의 곡물상인과 일본상인, 그리고 봉건지배계급이 농민적 잉여를 착취하는 양상을 보였다. 곡물의 판매과정에서 상인은 곡물이 수확되고 곡가가 하락할 시점에서 매입하기 때문에 곡물을 저장할 만한 여유가 없는 농민보다 우위에서 곡물을 매입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정에서 소농과 빈농의 토지방매는 자연스러운 귀결이었고, 이 시기 지주는 곡물수출로 얻은 이익을 토지에 재투자하여 소유 규모를 늘렸다.

미곡수출이 본격화하면서 지주제가 강화되어갔음은 기왕의 지주제 연구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왕실도 궁장토에서 중답주를 제거하고 그 몫을 차지하려 했고, 지대의 물납화로 미곡수출을 주도하려했다. 또 잦은 소작인의 교체로 항조를 막으려고 했다. 역둔토에서의 농민의 항조는 지주경영 강화의 결과였던 것이다. 註29)

지주제의 강화는 당연히 부농의 성장을 저해하는 것이었고 농민층 분화의 현상도 양극분화로 나타나기 어렵게 되었다. 농민전쟁을 전후해 농민층분화의 양상은 대체로 하강분해 현상을 보인다. 물론 그것은 일방적으로 관철되는 것은 아니고 일부 지역에서는 상농층이 지속되거나 오히려 성장하는 사례도 있다. 註30) 그러나 지주제의 전반적 강화과정으로 미루어 일반적 추세는 하강분해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시기 농민의 생활 상태에 대한 자료는 찾기 어렵지만 1895년경 충청도지방을 유력한 일본인의 조사가 일부 남아 있다. 궁도박사가 갑오 이후 상업적 농업을 통해 성장하여 변혁주체로 등장한다고 하는 ‘자소작상농층’의 대표적 사례인 충청도 온양 이치삼가李致三家와 이 보다는 다소 열악하지만 중등농가로 분류되던 천안 김치노가金致老家의 경우가 그것이다. 註31)

우선 이치삼은 이장으로 상등농가의 부류에 속하는데 농업외에 겸업으로 음식점을 경영하며 가족은 남자 고인雇人을 비롯하여 6명이며 농우가 1마리 있고 경작하는 논은 소작지 3정보 남짓한 정도이며 이를 도지법賭地法으로 경작하고 그 외에 자기소유의 밭 4단 5무보를 경작하고 있었다. 평균 수전에서의 수확량은 82석 8두인데 그 중 8두는 종자로, 40석은 소작료로 지출되고 실수익은 42석현미 21석이었다. 이 가운데 현미 5석 정도가 가족의 식료로 소비되어 현미 16석 정도64엔가 상품화되었다. 전작에서 나오는 맥·소맥·대두·소두 등은 자가소비용이었다. 그래서 음식점 운영에서 나오는 수입 20엔을 더하면 모두 84엔이 총수입이었다. 그런데 지출은 조세·농사비용·고인의 임금·의복비 등 모두 82엔으로 한 해에 2엔 정도가 남는 셈이었다.

김치노도 가족 수는 같으며 숙박업과 전선순졸電線巡卒을 겸하고 있었다. 그는 촌장을 맡으며 소작하는 촌유답村有畓 3단보, 양반의 묘위답과 밭 1단 8정보를 도지법으로 경작하고 있었다. 8석 2두 정도가 평균적으로 생산되는데 그중 1두는 종자, 4석은 촌유답의 소작료로 지불하고 4석 1두현미 2석 1두가 남았다. 이 중에서도 묘위답의 소작료로 현미 5두가 지출되고 나머지 1석 5두는 자가소비용이었다. 그밖에 밭에서 얻는 작물은 자가소비였으며 순졸 급료 9엔, 숙박업 수입 50엔이 현금 수입이며 이는 모두 조세 등으로 지출되었다. 앞의 이치삼가의 사례는 30~40호 중 1호 정도의 비율이었고 김치로 정도의 경영도 20호 중 1호 정도가 되는 수준이었다.

이처럼 상농이나 중농으로 지칭되던 농가의 생활 상태가 잉여 축적이 어려울 정도였으니 하층빈농은 매년 조세와 고리대에 시달리면서 고용노동으로 겨우 생계를 꾸려가야만 했다. 당시 빈농과 토지에서 완전히 소외된 농업노동자층은 농촌사회 내부에 광범하게 존재했다.

실제로 광무양안을 분석한 여러 글에서도 이같은 분해 현상은 잘 드러난다. 1900년 경기도 용인군 이동면은 토지에서 완전히 소외된 농업노동자 13%를 비롯해 900평 이하의 토지를 소유하거나 경작하는 극빈농이 51%, 900~1,500평의 빈농층이 13%, 1,500~3,000평의 중농층이 14%에 이르렀다. 註32) 모현면과 기내면은 무전농민이 각각 19.3%와 2.7%, 25負 이하의 토지를 소유한 빈농이 전체의 52.4%와 63.5%였다. 註33) 1900년 충남 온양군 일북면과 남상면은 토지를 소유하지도 않고 경작하지도 않는 농민이 각각 9.5%와 13.8%였다. 빈농은 전체의 57.7%와 70.0%였다. 註34) 이처럼 1900년 광무양안을 분석한 결과로는 임금으로 생계를 잇는 농업노동자가 전체 농촌인구의 10% 이상에 달했고, 빈농층은 50~70%에 이르렀다. 전남 구례 오미동의 경우에도 경영규모가 영세해 자경지로 가계를 잇는 농가는 분석대상 농가 34호 가운데 5~6호에 지나지 않았고, 1910년대를 전후해 오미동의 대부분 농민들은 무토지, 소토지의 상태에서 가옥을 빌려 생활하고 영세한 농지를 차경해 생계를 이었다. 집을 빌린 농가는 현물로 집세를 납부하기도 했으나 노역으로 대신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註35)

당시 농촌사회에는 광범한 빈민층이 축적되면서 소작 경쟁을 격화시키고 임금노동의 경우에도 고용의 기회가 부족해 빈민층의 이농을 강요했다. 특히 농업노동자층은 언제라도 농촌을 떠나게 될 잠재적 과잉인구였다. 그리하여 농촌에서는 지주제가 강화되는 한편, 새로운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 편입될 임금노동자층이 광범하게 형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2. 자본주의적 관계의 성장 註36)

개항과 함께 세계시장에 편입되면서 서구의 근대 문물을 받아들이려는 개화운동이 나타났고, 근대화를 위한 개화정책 역시 함께 전개되었다. 개화운동은 갑신정변으로 일시적으로 좌절되기도 했으나 사회적 생산력을 높이려는 개화정책은 정권의 담당자들에 의해 계속 진행되었다. 각종 관영 공장의 건설은 그 결과였다. 갑오 이후에는 서구의 근대적 문물을 수용하려는 의식이 보다 증대되면서 민간 상공업의 발전 역시 가져오게 되어 회사의 설립이 활발해졌다. 물론 상회사가 대부분이었지만 기선회사·은행·공장 등도 설립되고 있었다. 〈표 30〉은 1895년 이후 각종 회사의 설립상황을 표시한 것인데 특히 1905년 이후 급속한 증가가 눈에 띤다. 이 회사의 설립은 주로 관료자본과 상업자본이 주도했다. 그런데 1905년 이전에는 상회사가 전체 회사의 대다수였으나 1905년에는 광공업회사 역시 상회사의 성장만큼 급속히 증가하고 있었다.

〈표30〉조선인회사의 설립 상황
연도농림업제조업· 
광업
수산업상업운수업청부· 
토건업
금융업기타
1895  282   12
1896 3 23 1216
189711 2312710
1898    312713
189927 13824440
19003511533 432
19012314141824
190231 1623 631
1903121103 1220
190445 311 519
190568 9667244
1906213421116101481
1907583199671966
1908811 258341372
19099241205251581
1910732122613981

출전 : 전우용,『 19세기말-20세기초 한인회사연구』, 서울대박사학위논문, 1997.


그 중에서도 이미 개항 이전부터 매뉴팩쳐적 경영 형태를 보이던 광업은 개항 이후 제국주의 열강의 자원수탈 기도와 왕실의 재정확보 요구로 인해 광산에 투입되는 자금이나 노동자의 규모에서 어느 산업분야보다 성장하고 있었다. 1880년대에 들어 일본은 정화의 축적을 목적으로 조선에 설치된 일본제일은행지점 출장소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한국산 금을 매입하고자 했다. 청국의 경우에도 수입품의 대가를 금으로 바꾸어 자국으로 수송하고 있어 양국과의 교역과정에서 금의 수요가 대량으로 증가하고 있었다. 더구나 조선정부도 왕실재정의 확보를 위해 광산의 개발에 적극적이었으므로 광산개발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註37)

그런데 운산금광 등 석금광이 열강들에 의해 장악되었지만 사금업은 달랐다. 청일상에 의한 사금광 투자시도가 나타나기도 하지만 식민지가 되기까지 외국자본에 의해 지배되지 않은 몇 안 되는 수익성 있는 산업분야였다. 그러나 1905년 이후 일본자본의 생산지배가 확대되면서 조선인 자본에 의한 사금업 역시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註38) 광업은 조선후기 이래 어느 산업분야보다 자본주의적 성격의 경영형태를 띠고 있었지만 이 시기 급격한 금수출의 증가와 관련하여 더욱 강화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한편 조선후기 이래 매뉴팩쳐적 경영형태까지 보이던 제조업분야는 면포와 같이 외국의 자본재 공산품의 유입과 함께 일부 생산이 위축되어 가는 경우도 있었으나 개항장의 확대와 기선을 통한 교통의 발전, 그리고 금이나 곡물수출의 증가에 유발된 국내의 구매력 증대로 시장이 확대되고 생산이 증대함으로써 근대적 산업으로 발전되어 가는 경우도 많았다. 수입 자본재 제품과 대립이 격심하지 않던 상품의 경우 국내수요의 확대와 함께 생산이 증가하고 있었던 것은 일반적 추세였다.

이미 개항 이전부터 안성과 정주 등지에서 매뉴팩쳐적 경영형태를 보이던 놋쇠업은 이들 지역에서 개성·구례·전주·재령 등 다른 곳으로 이주하여 새로이 유기제조공장을 세우는 자가 늘어나 유기제조업이 전국적 규모로 확산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 들어 근대적 공장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1887년 이승훈李承薰이 세운 납청유기제조공장과 안성유기제조공장이 그것이다. 이들 두 공장에서는 생산공정을 분화하여 전문기술자가 각 공정을 전담하도록 하고 생산과정에서 근대적 기계를 사용하여 대량의 유기를 제조하고 있었다. 註39) 납청지역에서는 19세기 말 공장제 수공업장이 30여 개에 달하여 다양한 제품을 전문적으로 생산하였고, 이들 공장에 고용된 노동자의 호수가 600여 호에 달하는 커다란 점촌店村이 형성될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유기제조업의 확산은 경쟁의 심화를 가져와 여러 형태의 수공업적 동력장치를 도입되고 기술적 개선이 이루어지는 등 생산력 향상을 위한 노력을 수반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는 1897년 한성에 세워진 합자회사 ‘조선유기상회’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회사형식의 자본결합을 통해서 경쟁력 강화를 도모하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산 유기제품의 수입이 1889년부터 시작되면서 모두 740여 톤이 1896년까지 들어온 데다가 1900년대에 들어 본격화된 값싼 일제 도자기의 대량 수입으로 전통적 유기제조업에 큰 부담이 되었다. 일제 도자기는 싼 가격을 무기로 일반 서민가정에 손쉽게 파고들어 차츰 유기수요를 침식해갔다. 그 결과 이승훈의 ‘납청유기제조공장’도 1905년을 전후하여 점차 쇠퇴의 길로 접어드는 등 유기제조업은 일부 타격을 입긴 했지만, 전통적 유기의 기술력이나 수요자의 선호도가 여전히 높아 식민지시대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철기류의 제작은 전통적으로 농기구와 솥을 위주로 했다. 이 시기 쇠남비·쇠대야·쇠물통 등은 일본에서 수입되고 그 수량도 증대하고 있었으나 솥은 품질이 외국제품에 비해 상대적으로 좋아서 거의 수입되지 못했다. 청도군 운문면 일대의 솥계 수공업은 내구연한이 4대 100년에 이를 정도로 양질의 솥을 생산해 경상도 일대에서 소비되는 솥을 독점적으로 공급하고 있었다. 1904년 현재 이 지역에서는 연인원 248,000명이 동원되어 약 188,000관의 원철을 사용하여 약 18,000개 이상의 솥을 생산했다. 솥을 생산하는 각각의 공정은 분업적 협업에 따른 공장제 수공업적인 방식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한다. 註40)

민간 요업과 관영의 분원分院에서 조선후기이래 매뉴팩쳐적 경영이 나타나던 도자기생산은 19세기 후반에 관영이 민영으로 재편되고 민간공장도 계속 만들어지는 등 1895년 현재 비교적 큰 규모의 도자기공장은 35개였다고 한다. 註41) 물론 일본도기 특히 다기의 수입이 점차 증대되는 추세에 있었으므로 요업도 일본제품과 경쟁해야 하는 실정이었지만, 외국산 도자기는 주로 개항장과 주요 도시지역에 한정되었고 일본인의 수요도 많았다. 따라서 풍부한 원료, 값싼 노동력으로 싼 가격에 생산되어 민간에서 주로 쓰던 도자기나 옹기류 등은 수요가 줄어들지 않았다.

그래도 1900년대에 들어서면 저가의 일본산 도자기가 본격적으로 밀려들면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어 신식개량기계를 이용하여 도자기를 생산하는 공장도 나타나고 있었다. 1902년 이모에 의해 세워진 자기제조소에서는 외국인 기술자를 고용하여 새 기술로 자기를 생산하였고, 1908년에는 이승훈이 평양의 유지들과 합자하여 평양 마산동에 근대적 회사조직을 갖춘 ‘평양도자기회사’를 설립하였는데 원료의 분쇄과정에 석유발동기를 사용하는 등 기계를 생산과정에 널리 도입하였다. 한편 1900년대 초 함경도의 ‘성진공업조합’에서는 새 기술에 기초한 신식가마를 축조하여 도자기를 생산하는 등 가마의 개량도 나타나고 있었다. 1910년 일제에 의해 간행된 『조선산업지』에 의하면 1909년 현재 10여 명 이상의 노동자를 고용하거나, 생산액이 1,000원 이상인 비교적 큰 규모의 도자기공장은 53개소, 가마수는 184개였는데, 여기에 고용된 노동자, 기술자의 수는 695명, 생산액은 63,001원에 달해 오히려 증가하는 추세였다. 경남 합천군 가야면 구원동 일대에 자리잡은 ‘눈배기백자기점’ 단지는 전통적인 도자기 생산지역이었다. 1902년 세워진 민석로의 사기점은 투철한 기업가정신, 작업공정에서의 분업적 협업, 도토를 빻은 데 물레방아의 힘을 이용하는 등 신기술의 도입하고 있었다. 이 같은 결과는 새로운 시장환경에 적응해 기술의 개발로 대응한 탓이었다 註42).

제지업은 개항 이후 계속적으로 생산이 증대한 제조업 중 하나였다. 한지韓紙는 국내적 상품유통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하던 상품으로 개항장간, 미개항장간의 교역에서 뺄 수 없는 것이었지만 그 품질의 우수성이 국외에서도 인정되어 많은 양이 청국으로 수출되고 있었다. 이 시기는 일본종이가 일부 수입되기는 했지만 갑오 전후까지는 대부분 폐지류나 일본인의 수요품으로 수출량에 비하면 극히 적은 양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갑오 이후 수입량이 증가하면서 수입지輸入紙에 대한 대응으로 외국산 기계를 도입하여 생산력을 향상하려는 움직임도 일정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19세기말 양화진에는 일제 제지기계가 갖추어진 제지공장이 건설되었고, 1901년에는 대한제국 정부가 외국산 기계를 들여와 용산 전환국典圜局 내에 제지소를 설치하여 한지와 함께 양지洋紙도 생산했다. 또한 1908년 초에는 서울의 자본가 몇 명이 ‘대한제지회사’를 설립하고 자본금을 30만원으로 공덕리에 공장을 일본인 4~5인을 고빙하여 각종 종이제품을 생산하기로 결정하기도 하였다.

대체로 조선의 종이생산은 수공업적 기술에 기초하여 이루어지고 있어 수요량의 증가를 따라가기 힘든데다가 1900년대 이후 외국산 종이 수입이 양적으로 급증하고 종류도 다양화해지면서 한지를 제외한 제지업은 제대로 발전할 수 없었다. 1901년 8만원 미만이던 양지 수입액은 급격히 증가하여 1904년 30만원에 육박하고 1910년에는 70만원에 달하였다. 1910년의 수입액을 양으로 환산하면 288만근으로 1909년 조선의 연간 한지 총생산고인 약 80만근의 3~4배에 달했다. 한지는 양지와 다른 특수성으로 일본과 중국에서도 계속적인 수요로 근대적인 공업제품으로 발달하지는 못했지만 여전히 생산되고 있었다 註43).

갑오 이전까지는 면작과 토포생산을 통한 부농이나 소상품생산자의 성장 가능성이 일정하게 존재했다. 이러한 가능성은 앞서 언급한 외국산 면제품 수입의 정체 이외에도 전작田作에서 면화와 대립하고 있었던 콩의 상대가격이 토포에 비해서 낮아지고 있었다는 점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당시 국내시장에서 곡물 다음으로 많은 교역량을 차지하던 상품은 면제품이었다. 이 시기 수출품은 쌀과 콩을 중심으로 한 농업생산물이 주종을 이루었고, 수입 자본재 상품은 갑오 이전에 주로 영국제 금건이 청국과 일본에 의해 중계무역되었던 데 반해 갑오 이후에는 금건·일본목면·씨이팅·방적사 등 다양한 형태를 띠었다. 영국산 금건의 중계무역을 놓고 일본과 청국이 대립하던 단계에서, 일본산 섬유제품이 여전히 금건의 중계무역을 위주로 하는 청국을 압도하면서 조선의 면포시장을 장악해 나갔던 것이다. 일본은 목면과 같은 완제품만이 아니라 반제품인半製品인 방적사도 대량으로 수출함으로써 조선의 면업생산구조를 뒤바꾸어 놓았다.

일부 도시지역에서는 직포에 개량된 기계를 사용하는 등 새로운 시장 환경에 대응하는 경우도 있었다. 기왕의 연구에서도 광무연간에 서울을 중심으로 직물업의 발달이 어느 정도 있었음은 지적되어 왔다.

대한제국 시기에 들어서면서 근대적인 방직공업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면서 서울지역을 중심으로 직물회사의 설립이 적극 추진되었다. 1897년 안경수·서재필 등 독립협회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대조선저마제사회사大朝鮮苧麻製絲會社를 설립하였는데, 이 회사는 외국인과 합자하여 상해에 있는 비단제조소에 국내에서 생산되는 삼과 모시로 실을 만들어 수출할 목적으로 설립된 주식회사였다. 1899년에는 정변조·이헌규 등의 자본가들이 중심이 되어 한성방직고본회사漢城紡績股本會社의 설립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비슷한 시기인 1897년 안경수를 중심으로 반관반민半官半民의 대한직조공장이 추진되었고 1898년에는 김익승의 주도로 직조권업장의 설립이 기도되었다. 그러나 이 공장들은 실제의 활동은 하지 못하고 자료에 단편적으로 설립에 대 한 기록들만 남아 있다. 1900년대에 들면 방적사를 수입해 동력을 이용한 개량직기로 생산하는 직조공장이 여러 개 들어섰고 직물업이 상당히 진전되어 갔다. 1901년 백목전 상인이 설립한 한성제직회사는 국내 최초로 역직기力織機를 도입했다. 이 회사는 소폭직기小幅織機 50대와 광폭직기廣幅織機 10여 대로 하루에 70~80지를 찔 수 있었다. 이들 공장은 기계방적사를 수입해 노동집약적이고 대량 생산이 쉽지 않은 포목과 견포를 생산했다.

하지만 값싼 일본산 기계제 면포에 대응하기에는 생산력 수준이 낮았고, 자본력도 열세였다. 따라서 당시 직물회사의 생산물은 수입면포와 직접적 충돌을 피할 수 있는 제품에 집중되었다. 이들 회사의 생산품목은 기계화가 쉽지 않은 노동집약적 성격을 지닌 견제품絹製品 생산에 집중되거나, 면제품을 생산하더라도 면포가 아닌 모자·학생복·양말·갓끈·허리띠 등 직물업의 주류에서 벗어난 상품이 대부분이었고 표백·염색 등 영업종목의 다변화도 나타나고 있었다. 이러한 물품의 생산은 생산력과 자본력의 한계로 인하여 기계제 면포와의 정면대결을 피하기 위한 생존방식이었지만, 면포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의류시장에서 이들 제품의 비중은 지극히 낮았고 수입 면제품의 유입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책도 될 수가 없었다. 註44)

원래 방적업의 발달에 따라 방적과 직포과정이 분리되고 면업이 도시를 중심으로 발전하는 것은 자본주의 발전에서 일반적 과정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방적업의 발달 이후 방직업에 변화가 온 것이 아니라 수입방적사에 의존하는 형태여서 그 기반은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발전에는 한계가 있었고 대부분 소멸되어 성공적인 사례는 없었다.

실제로 이 시기에 만들어진 직물공장 중 일제시기까지 존속된 것은 1902년 김덕창이 설립한 중곡염직회사, 그후 군소 직뉴업자가 설립한 경성직뉴합명회사, 1906년 설립된 순창호 정도에 불과했다. 더욱이 전통적 생산방식 아래 방적과 직포가 미분리된 농촌의 토포생산은 방적사와 면제품의 대량수입으로 그 존립기반 자체가 위협받을 수밖에 없었고 종래의 부농경영의 한 축으로서의 면업의 발전은 기대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1905년 보호국화 이후 일본 자본은 본격적으로 조선사회에 침투해 들어 왔다. 보호국 이전에는 개항장을 중심으로 설치되어 일본인에게 생필품을 보조하는 소규모 공장이나 농업에 투자되던 자본이 조선인을 대상으로 상품을 생산하는 공업에 투자되는 양상이 두드러졌다.

〈표 31〉은 1911년 조선인과 일본인의 공장 전체를 나타낸 것이다. 이 중 가장 많았던 공장은 정미업인데 다른 업종에 비해 직공수가 일본인이 상대적으로 많다. 이는 일본으로의 곡물 수출과 직접 관련이 있다. 수출 미곡을 현미로 매입해 백미로 가공 수출하고 부가가치를 높이려는 것과 관련이 있었다. 연초제조업은 공장당 자본금과 직공수가 가장 높다. 대량의 자본이 투하되는 관계로 일본인의 소유가 대부분이었다. 정미업이 수출을 위한 가공업인데 반해 연초제조업은 수입가공업이었다. 자본금이 세 번째로 많이 투자된 직물업 역시 일본에서 방적사를 수입해 직물을 제조하는 것이었다. 

〈표31〉1911년의 공장상황
업 종공장수자본금(원)직공수생산액(원)
전체조선인
정미업751,742,1002,4221,78211,840,431
직물업17648,816659587497,104
연초제조업141,574,9687,4427,2253,104,386
인쇄업1953,320670416572,062
철공업21173,500342182236,600
요업38252,6851,452935269,652
기타요업686,178,4411,5901,0533,128,420
합계25210,613,83014,57512,18019,639,655

출전 : 조선총독부,『조선총독부통계연보』, 1913.


따라서 1910년 일제에 의한 강점이 시작된 시기까지도 조선의 공업은 무역과 연계된 것이 중심 산업이었던 셈이었다. 군소 공장의 경우 조선인 자본에 의해 운영되는 경우도 많았으나 대규모 자본은 대부분 일본인에 의해 투하된 것이었다.

당시 우리의 자본주의적 발전은 광공업이나 면업에서 일정한 발전을 보이고 있었다. 광업은 주로 국외수출을 위한 금 생산이 주종을 이루며 이의 대량유출은 조선의 정화를 유출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광업은 어느 산업분야보다 매뉴팩쳐적 경영이 발달하고 있었다. 기타 제조업도 자본제 상품의 유입에 따라 일부 타격을 입는 분야도 있으나 일반적으로 금이나 곡물수출로 인한 수요 증대에 힘입은 원격지 유통의 활성화로 생산량이 증대하였다. 제조업은 대개 농공이 미분리된 상태였지만 일부는 생산공정의 근대화를 통하여 매뉴팩쳐적 경영형태를 보이는 사례도 있었다. 그러나 수입 자본제 제품과 대립할 경우 취약한 자본과 생산과정의 전근대성으로 말미암아 언제나 몰락의 위험성을 안고 있었고, 일제의 정책에 의해 예속화되어간 금광업과 같이 일본자본에 의한 예속성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註45) 물론 후기로 갈수록 관료자본과 상업자본에 의한 조선인 회사의 설립이 증가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본자본이 생산에 직접 침투하는 단계에 이르러 공업화는 일본자본에 예속되는 자본주의적 발전의 성격을 띠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