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제5장 곡물수출과 방곡령, 방곡령 실시의 사례와 원인/제2권 개항 이후 일제의 침략

몽유도원 2013. 1. 11. 11:43

제5장 곡물수출과 방곡령


방곡령 실시의 사례와 원인

곡물수출의 성격


1. 방곡령 실시의 사례와 원인


방곡은 행정의 강제력으로 곡물의 역외유출을 금지하는 일종의 경제정책으로 조선 고유의 용어이다. 물론 이와 같은 예는 중국과 일본에도 존재했다. 고대중국에서는 ‘알적遏䨀’이라고 하여 타국으로 미곡의 유출을 막는 제후의 정책이 있었고, 註1) 일본도 봉건제 시기에 공납입貢納入 전이나 기근시에 영내의 곡물을 확보하기 위해 ‘진류津留’라는 경제정책을 썼다. 註2)

조선후기 이래 농민층 분화가 진행되면서 도시나 향촌지역에 곡물시장이 형성되고 지주·부농·곡물상인들이 무곡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무곡행위는 곡물유출지역에서 곡물을 구매하여 생계를 잇던 빈농이나 무전농민의 반발을 초래했다. 곡물의 유출은 그 지역의 곡가등귀를 유발했던 것이다. 더구나 흉년의 경우 유출지역내 곡물수요자의 반발은 심각했다. 이에 지방관은 관할지역내 수요곡물을 확보하고 곡가의 안정을 꾀하는 수단을 강구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사정에서 나타난 것이 곡물의 유출을 행정의 강제력으로 저지하는 방곡의 실시였다. 그러나 방곡은 원래 법전상에 규정된 것은 아니었다.

1858년 우의정 조두순趙斗淳은 방곡과 방납防納의 폐를 논의하면서 특히 방곡에 대해서는,


한 주나 한 읍에서 편벽되게 관할지역의 경계밖으로 무천貿遷하게 하지 않는 것이 어찌 법전에 적혀져 있는 것이겠습니까. 들으니 제도諸道에서 왕왕 방곡을 해서 이 때문에 상선이 빈 배로 갔다가 빈배로 돌아와서 장시의 시가가 점차 등귀함을 면할 수 없습니다. 註3) 


라고 하여 법전에 규정된 것이 아니라고 했다. 물론 흉작시 지역내의 구황책으로써 곡물의 유출을 막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긴 했으나, 註4) 각 지역의 방곡이 심해질 경우 서울의 곡가안정을 꾀할 수 없었으므로 방곡의 발생시마다 이를 금하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관할지역내 민정의 직접적 책임을 지고 있는 지방관으로서는 환곡이나 진휼기능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한 지주나 부농의 곡물유출을 막음으로써 곡가안정을 꾀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방곡은 중앙정부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지방관들에 의해 곡가안정을 위한 경제정책으로 널리 시행되고 있었다. 더구나 개항 이후 곡물수출이 증대하면서 곡물의 상품화가 더욱 진전되고 기왕의 유통구조마저 변용되고 있어 곡물의 유출과 곡가등귀는 한층 심화되었고 방곡의 발생도 필연적 추세였다.

여기서는 앞서 살펴본 일본상인의 침투에 따른 유통과정의 변화를 전제로 방곡령을 크게 세 시기로 나누어 서술하려 한다. 제1기1876~1884는 일본상인의 행상이 허용되지 않던 시기였고, 제2기1885~1894는 일본상인이 행상으로 개항 밖에서 곡물을 직접 매입하게 되는 시기였다. 제3기1895~1904는 곡물수출이 본격화하던 시기였지만 일본의 외교적 압력으로 방곡시행 자체가 어려웠다. 이렇게 나누어진 각 시기에 따라 실시의 원인이나 실시대상, 그리고 발생의 빈도수 등 제반사항이 달라진다. 따라서 시기적 구분은 방곡령의 성격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요구되는 것이며, 이를 통해 곡물유통과정에서의 일본상인과 조선인의 대립을 구체적으로 살필 수 있다. 註5)


1. 제1기(1876~1894)

〈표 10〉은 각종 사료에 산견되는 이 시기1876~1884 방곡령의 사례를 정리한 것이다. 이 중 ①의 방곡으로 말미암아 충청·황해·강원감사가 문책을 받고 있는 것과 ⑧의 경우 경기京畿·해서海西·삼남지방三南地方에 방곡이 발생하여 정부가 금칙禁飭을 내리는 것으로 미루어 ①에서 3건, ⑧의 충청·전라·경상 각도에서 각 1건씩만 일어났다고 해도 전체적으로 적어도 14건 이상이 발생되었다고 볼 수 있다.

〈표10〉1876~1884년의 방곡령 발생사례
번호발생년월발령자발생지역내용비고(出典)
1876.9·10 
1877.2·3(음력)
各地方官各地方政府가 防穀禁飭내림. 
忠淸?黃海江原 監司문책.
『日省錄』 高宗 13年 9月 2日, 10月 6日, 10月 16日10月20日, 14年 2月 20日, 3月 6日
1880.5(양력)慶尙道 地方官慶尙道釜山日本領事 항의『通商彙編』 明治14年 釜山港之部
1881.5-6(양력)慶尙監司 各邑守令경상도 각지在釜山 日本領事 항의·철폐위와같음
1882.10(음력)各 地方官各地方政府의 防穀禁飭『日省錄』, 高宗 19年 10月 12日
1883.10(음력)各 地方官各地方政府의 防穀禁飭『日省錄』, 高宗 20年 10月 12日
1884.4(음력)黃海道 鳳山·長淵府使鳳山·長淵 200石 執留大同商會 地租 甲申 4月 23日『八道四都三港日記』
1884.7(양력)德源府使元山都賈潛賣금지· 日本公使 항의『日案』 高宗 21年 勘 月 19·20日
1884.9(음력)各 地方官京畿· 海西·三南政府의 防穀禁飭『日省錄』 高宗21年9月 19日

비고 : ①·④·⑤·⑧은 방곡의 발생으로 정부내에서 논란이 있던 년월이다.


이 가운데 각지방관의 방곡으로 정부에서 논란이 된 것은 ①·④·⑤·⑧의 경우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우선 전국적으로 흉작凶作이었던 시기라는 점이다. 또 방곡으로 말미암은 곡물유통의 장애로 서울의 곡가가 등귀하기 때문에 정부가 방곡의 철폐를 지시하고 있었다. 그 한 예로 ④의 1882년 정부가 지방관의 방곡을 금했던 경우를 보면,


의정부에서 계를 올렸다. 경기도내의 농작이 흉작을 면치못해 도하都下의 시가가 점점 올라 작은 근심거리가 아닙니다. 근래 들으니 외도外道에 빈번히 방곡하는 바람에 곡물판매의 길이 두절된다 합니다. … 각도 관찰사에게 영을 내려 관하管下 각읍에 엄히 삼가하게 하고 판매를 허가하면 유통에 지장이 없을 것입니다. … 왕이 윤허했다. 註6)


라고 하여 흉작으로 서울의 곡가가 오르는데 각지방관이 방곡을 하여 곡물의 판매지로販買之路가 막힌다고 하며 철폐를 지시하고 있었다. 이러한 각 지방관에 대한 정부의 방곡금지의 지시는 개항 이전과 마찬가지로 이 경우의 방곡령이 국내의 곡물수급구조 내에서 발생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①의 경우는 대일관계로 지방관이 방곡령을 발령했다기보다는 대부분 종래의 유통구조내에서 발령한 것으로 보인다. 즉 1876년과 1877년은 개항직후로 일본상인의 진출이 급격하지도 않았고, 국내의 대흉작으로 말미암아 일본으로 곡물수출이 거의 되지 않고 오히려 일본의 곡물이 수입되고 있었으므로, 註7) 이 경우의 방곡령은 국내 유통구조내에서 발생된 것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이 가운데 충청도지역의 방곡은 다소 사정이 다르다고 본다. 1876년 방곡의 실시로 문책을 받던 충청감사 조병식趙秉式은 연해의 방곡실시는 ‘잠수지폐潛輸之弊’를 막으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고 했다. 註8) 이해 정부가 왜선의 잠매潛賣를 막으라고 충청도에 지시하던 사실을 미루어 본다면, 註9) 조병식이 막으려던 ‘잠수지폐’에 일본으로의 곡물유출이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④·⑤·⑧의 각 지방관의 방곡은 이미 살핀대로 이 단계에서는 부산항을 중심으로 곡물의 대일유출이 증가되고 있었기 때문에 적어도 부산항 중심의 새로운 곡물유통권에 포함된 경상·전라·충청·강원지방에서는 이와 관련되어 나타나는 사례도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①·④·⑤·⑧의 방곡은 종래의 곡물유통권과 개항장 중심의 새로운 유통권이 대립하는 가운데 양자 모두를 대상으로 지방관이 실시했고 전자가 보다 우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⑥의 1884년 황해도 봉산과 장연의 방곡은 그 대상이 대동상회大同商會이다. 1883년 평안도 상인을 중심으로 조직된 대동상회는 당시로서는 가장 큰 근대적 기업체라고 하지만, 註10) 1884년에는 거의 수출입무역에 종사하지 않았다. 註11) 더구나 지조地租 200석을 운반하다가 이 지방의 방곡령에 걸려 곡물을 운반정지 당한 것으로 미루어 註12) 이 방곡령은 곡물수출과 관련된 것이 아니다.

②·③의 경상도 방곡령 때는 각읍 수령이 경내의 방곡을 실시하고 감영에서는 관리를 보내어 동래 부근에서 곡물을 집류했다. 1881년 부산항 주재 일본영사 근등진서近藤眞鋤는 외무대신 정상형井上馨에게 보내는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난 달양력 1881년 5월 중순부터 조선인의 본항으로 수도輸到된 미곡이 점차 감소하고 하순에 이르러 거의 곡로穀路가 두절되는 양상이 나타나기에 탐정探偵하여 보니 양산·구포·김해 등의 지방에 대구관리가 출장하여 수곡輸穀을 차류差留하고 있었다. 작년도 이때 즈음해 같은 폐해를 받고 자못 곤란했는데 전철을 밟고 있다. 註13)



방곡령으로 집하된 미곡


그래서 5월 23일 일본영사는 동래부사 김선근金善根에게 현재의 미곡유출 저지사건은 양국간에 미협정된 것이어서 관리의 독단으로 개항장으로의 곡물유통을 막을 수 없다고 주장하며 항의했다. 註14) 이에 대하여 김선근은 양식이 궁핍한 때 각영·각읍에서 백성을 위해 지방관이 방곡을 시행하는 것은 상례常例라고 했다. 註15) 그러나 일본영사는 방곡은 바로 곡물수출을 금하는 것이라 하여 양국 상민의 무역을 관리가 막을 수 없다는 「병자수호조규」 제9관을 들어 반박하며 1880년 5월경의 방곡에 대해 언급한 후 대구관리의 곡물집류를 철폐하라고 주장했다. 註16) 그러자 김선근은 대구관리의 집곡은 ‘세곡방간稅穀防奸’을 위한 것으로 상로商路를 막으려는 의도가 아니었다고 하며, 註17) 대구의 감영에서는 항의에 따라 관리들을 철수했다. 註18) 이 시기 빈번하던 세곡의 잠매를 상기하면 ②·③의 방곡령에는 문면대로 세곡의 부정유출을 막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고 보이며, 일본영사가 언급한대로 개항장으로의 곡물유출을 저지하려는 의도도 개재되었을 것이다.

함경도 원산에서 발령된 1884년 ⑦의 방곡령은 ‘도고잠상都賈潛商’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즉 덕원부사 정현석鄭顯奭은 각사各社에 낸 전령에서 부랑무뢰배浮浪無賴輩가 요호饒戶의 돈으로 외촌外村에서 곡물을 매점하여 이利를 꾀하므로 조선인과 일본상인이 장시에서 곡물을 구입하지 못하게 되어 도고잠상都賈潛商을 금한다고 했다. 註19) 일본서리공사 도촌구嶋村久는 이에 항의하여 10~20석石의 곡물을 구입하는 것도 도고都賈라고 하여 막으니 일본상인이 곡물을 매입하지 못한다고 철폐를 주장했다. 註20) 이에 정부는 덕원부사에게 철폐를 지시하는 한편, 註21) 미개항장에서의 밀무역은 엄금하라 하고 이를 일본서리공사에게 통보했다. 註22) 덕원부사의 전령에는 도고잠상을 막는다고 하나 소량의 곡물매입까지 금지한 것과 일본공사가 항의한 것으로 미루어 원산항에서의 일본상인에 의한 곡물유출의 저지라는 의도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방곡사건의 발단은 요호의 곡물매집이다. 요호 즉 부농의 자금으로 부랑무뢰배, 곧 곡물상인들이 도가행위와 무곡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조선후기부터 계절적 지역적 곡가의 차이를 이용하여 부를 축적하던 지주·부농·곡물상인들이 개항장이라는 대규모의 곡물시장이 출현하면서 이를 대상으로 곡물의 상품화를 주도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과정에서 곡가의 등귀는 필연적인 것이었고 이에 따른 빈농이나 무전농민의 반발은 결국 지방관의 방곡 시행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이상에서 살핀 대로 이 시기의 방곡령은 크게 나누어 종래의 곡물유통구조내에서 발생된 경우와 개항장으로의 곡물반출이나 왜선의 잠매행위를 막으려는 의도에서 실시한 것으로 나눌 수 있으며 전자가 보다 우세했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에서도 그 대상은 조선의 곡물상인이었다. 앞서 살펴 본 바와 같이 1876년 8월의 「조일통상장정」에 의하면 일본상인의 곡물유출을 제한하지 못하게 되었다. 또 1884년까지 일본상인의 개항장외 행상은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그들은 산지에서 개항장에 이르는 유통과정에 직접 개입하지는 못했다. 따라서 이 시기1876~1884년의 방곡령은 그 직접적 대상이 일본상인이 아니라 조선의 곡물상인일 수밖에 없었다.

실시의 원인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우선 무곡으로 부를 축적하던 부농이나 곡물상인들이 곡물을 매집 또는 유출하여 곡가등귀를 유발하고 이 때문에 지방관이 경내境內의 곡가안정을 위하여 실시하는, 종래의 국내 곡물유통과정에서 흔히 보는 경우로 이 시기 대개의 방곡령은 이와 관련되어 있었다. 1884년 덕원부사가 곡물상인의 도고행위를 막는 것도 여기에 속한다. 그리고 개항장으로의 곡물유출을 저지하기 위한 것이 있었다. 구체적으로 1876년 충청감사 조병식의 방곡령에서 보이는 곡물의 밀무역을 막기 위한 것, 1880~1881년 경상도지역에서 개항장으로의 세곡의 부정유출을 막기 위한 것, 1884년 덕원부사의 방곡령에 내재된 원산항으로 곡물유출을 막으려는 의도가 그러하다. 그리하여 후기로 갈수록 재래의 곡물유통권과 개항장 중심의 새로운 유통권이 대립하는 가운데 곡물의 대일유출을 저지하기 위한 방곡령의 실시도 빈번해지고 있었다.


2. 제2기(1884~1894)

개항 직후의 무관세무역과 곡물의 대일유출에 따른 많은 폐단을 시정하기 위하여 조선정부는 일본과 계속적으로 접촉을 가지게 되어 마침내 1883년 7월 25일 42관에 달하는 「재조선국일본인민통상장정在朝鮮國日本人民通商章程」과 「해관규칙」을 조인하고 11월 3일음 10월 4일부터 발효하게 되었다. 註23) 이 「통상장정」의 제37관에는,


만약 조선국에 가뭄·수해·병란 등의 일이 있어 국내 양식의 결핍을 우려해 잠시 양미粮米의 수출을 금하려면 반드시 먼저 1개월 전에 지방관으로부터 일본영사관에 통보해야한다. 그 시기를 미리 항구의 일본상민에게 전시轉示하고 일체 준수해야 한다. 註24)


라고 되어 있다. 개항 이후 일본에 의한 곡물유출을 저지할 조약상의 명분이 없던 조선은 이로써 제한적이나마 법제적 장치를 가지게 되었다. 즉 한해旱害나 수재水災, 또는 병란兵亂이 있어 국내 양식의 결핍이 염려될 때 1개월 전의 사전통보로 방곡을 실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1개월 전의 사전통보라는 제한규정으로 말미암아 그 실효가 의심되어 고종도 “좀 늦지 않으냐 빠른 게 나을 것 같다得不稍晩乎 不如早圖也” 註25)고 했다.

〈표11〉방곡령으로 발생한 사건의 내용
번호발령년월발령자발령
지역
발생 
연월
방곡
집행자
발생
지역
대상 
인물
대상 
화물
발생 
사항
11885慶尙監司慶尙道      
21886.12慶尙監司慶尙道1886.12.20三浪都監守山·三浪之間河野忠次郞·古森兵助·大浦登穀物雲山에서 購買 운반정지
31887.3慶尙監司釜山等地都賈防止 위해 防穀
41887.11~1887.12慶尙監司·轉運御史慶尙道宜寧·咸安·昌寧·大邱·玄風地方官의 大豆執留와 索錢
1887.11.7守令咸安 大山村野田卯三郞大豆 19石 2斗宜寧·咸安에서 구매 운반정지
1887.11.11守令咸安 道供村梅野德治大豆 91석昌寧에서 購買 課稅
 守令大邱·玄風川上市右衛門·坂口九郞·花岡幾次郞·小宮龜助·竹山村善九郞·藤井利助·大久保德藏大豆운반정지
 守令宜寧·咸安靹田計之助大豆 80 餘石운반정지
11.27守令東萊下端一倉喜作大豆 108石압수
堀田忠三郞大豆 400石
기타大豆 500~600石
51888.1~3慶尙監司慶尙道1個月前 通報(1887.12.29刊 1888. 1.26)後 防穀
61888.7咸鏡監司咸鏡道大豆輸出禁止에 日本領事 抗議로 政府의 撤廢指示
71888.9~11慶尙監司慶尙道米豆禁出令을 在釜山 日本領事에 통보
81899.2咸鏡監咸興·定平1889.2.1守令定平 布德里中村寬治郞·龍井貞造·池本·本田 ·大庭大豆 400~500俵執留하고 課稅
91889.5~6黃海監司黃海道  虎頭浦河田直一의 고용인 日野彌三郞· 石川芳太郞大豆 2,383石1~5월 곡물매입 課稅. 日本公使의 항의로 政府의 철폐 지시
  金川助浦磯部六造大豆 2,130石
庄野嘉久 古妻保藏의고용인日野彌三郞·石川芳太郞大豆
101889.10~11咸鏡監司咸鏡道10월부터 1년간 大豆防穀을 各公館에 통보 日本公使 항의로 철폐. 
吉州 以北은 按撫使 管轄로 1890년 6월까지 계속 防穀.
1890.4守令端川·明川·吉州石井岩助大豆 250包 
1890.4守令端川江夏喜平太大豆 
   梶山新介·大塚榮四郞 等 40人大豆課稅
111890.2守令慶尙道 河東日本商人 梶山의 前貸金으로 곡물 매입하려던 金成辰 被囚
121890.3黃海監司黃海道1890.3黃州兵使鐵道土井龜太郞· 佐竹甚三米豆 6千餘石1889.10~1890.2까지 平安·黃海道서 구매 운반정지, 課稅
1890.3 黃州·鳳山美商 Townsend의 고용인 金贊奎太 700石, 米 200石운반정지
131890.3~6全羅左水使 1890.3 水營梶山嘉 一운반정지
141890.4守令慶尙道 昌寧  昌寧粟津小宮龜助之米, 太執留 課稅
151890.?~6 海南 珍島      
161890.11~12咸鏡監司咸鏡道監司요청에 高宗諭旨로 1年間 防穀하려다가 日本公使 항의로 철폐
171891.11~?各 守令京畿道
長湍· 
坡州· 
朔寧· 
漣川· 
麻田· 
積城· 
豊德 ·
1891.11長湍守令長湍仁川商民 李命根大豆 幾百石漣川에 구입·운반 정지
麻浦商民 李泰鉉大豆 750石운반정지
三湖商民 金聖文大豆 700石운반정지
 守令漣川京居 尹羲景大豆 600石운반정지
181891.11泰仁府使全羅道 泰仁  泰仁府 黃山浦入田八郞의 고용인 安岡德平· 金汝玉·李德益米豆 300包押收
191891.12咸鏡監司咸鏡道 咸興·定平      
201891.12各 邑守令慶尙道      
211892.3各 守令全羅道
光陽·興陽· 
靈光· 
求禮· 
順天· 
扶安· 
萬頃· 
羅州· 
康津
米穀 防穀에 日本公使 항의로 철폐
221892.3各 守令慶尙道
晋州· 
河東· 
泗川· 
昆陽
    米穀운반정지
231892.4各 守令黃海道
載寧· 
鳳山· 
信川· 
安岳· 
黃州
   向山茂平의 고용인 小森 等 數人穀物운반정지
241892.5守令京畿道 永平   永平縣居 安達國太 100餘包운반정지
251892.12全羅監司扶安 등 14邑政府지시로 실시 
釜山監理에게 日本領事항의 
全羅監司가 政府에 완화요청
261893.2 全州   華商 東興隆號米 1,000여俵운반정지
271893.2羅州牧使全羅道 羅州    米穀 
281893.2守令慶尙道 金海    米穀 
291893.2各 守令慶尙道      
301893.2全羅兵使全羅道 康津      
311893.2水使全羅
左水營
      
321893.2水使全羅
右水營
      
331893.2統制使慶尙道
沿海
各邑
      
341983.3長湍府使京畿道
長湍
  高浪浦林市治郞의 고용인 崔致雲大豆 1,700餘包1892년 겨울부터 長湍·漣川 ·麻田에서 구입
351893 가을古阜郡守全羅道 古阜防穀前後의 穀價差異를이용한 郡守 趙秉甲의 取利
361893.1忠淸監司忠淸道      
371893.11坡州牧使京畿道 坡州   林長太郞·山野源七大·小豆운반정지
381893.11原州守令江原道 原州   力武平八大小豆 50石운반정지
391893.11安城守令京畿道 安城   京居 安兵使米 110石 18斗秋收穀의 운반정지
401893.11各守令忠淸道
魯城· 
連山· 
林川· 
恩津· 
石城
     監官 李南洲를 파견 하여 貿穀케 함
411893.11牙山守令忠淸道 牙山   桑名市平穀物水原 牙山에서 매입 운반정지
421893.11長湍府使京畿道 長湍   力武平八穀物운반정지
431893.12~1894.3政府全國○ 仁川港 1個月( 11.6 ~ 12.6 : 음력 9.28 ~ 10.29 )後 12월 7일부터 防穀 
○ 釜山 元山港 1個月(11.1 ~ 12.1 : 음력 9.23 ~ 10.24)후 12월 2일부터 防穀 
○ 內地沿海各處防穀은 近港口之例에 따름 
○ 陸運은 許容 
○ 米만 대상 
○ 1894.3.7(음력 2.1) 解除
1893.12守令全羅道 礪山田中良助운반정지
1893.12守令京畿道 平澤 軍門浦岸本保之助米 400石운반정지
1893.12守令忠淸道 牙山西原友保穀物水原 牙山에서 매입 운반정지
1893.12守令京畿 水原 瓮浦力武平八의 고용인 松谷虎次郞米豆 1,000餘石운반정지
1893.12守令京畿道 水原筒井伊勢治穀物운반정지
1893.12守令京畿道 開城丁致純大豆 150石仁川으로 운반도중 執留
1893.12湖南
轉運御史
全羅道· 
忠淸道· 
江鏡浦
澤田總太郞· 
大野五平
米豆운반정지
1893.12守令黃海道 白川力武平八 고용인 佐藤庄九郞米豆 500餘包운반정지
1893.12守令京畿道 喬桐力武善七米豆 1,000餘石운반정지
1893.12各 守令京畿道
長湍· 
坡州· 
漣川· 
麻田
平原準雄穀物운반정지
1894.1守令忠淸道 稷山岸本保之助穀物水原 平澤에서 구매 운반정지 課稅
1894.1各 守令京畿道
朔寧· 
積城
黃海道
兎山
江原道
鐵原
平原準雄운반정지
1894.2監官京畿道 平澤 軍門浦巖本保之助米太 438石課稅
1894.2守令京畿道 長湍金森玄三穀物課稅
441894.3各 守令京畿 朔寧·漣川
江原 鐵原
   山野源七, 左近倉太大豆운반정지
451894.3各 守令京畿 麻田·長湍·坡州   村田忠三米穀운반정지
출전 : 하원호, 『 한국근대 경제사연구』, 신서원, 1997, 180~187쪽.


한편 방곡령의 발령권자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았다. 1888년 1월 경상도의 방곡령에 항의하던 일본영사 실전의문室田義文에게 동래부백겸감리사무東萊府伯兼監理事務이용식李容植은 제37관의 ‘유지방관由地方官’의 유由는 자自의 의미로 원래 지방관만 그것을 전행專行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일본영사는 정부가 곡물의 수출을 금하려 할 때 지방관에게 지시하는 것이며 지방관이 임의로 발령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註26) 종래 관습적으로 방곡을 시행하던 쪽은 지방관이었다. 중앙정부는 방곡으로 인한 서울의 곡가등귀와 관련해 오히려 이를 저지하는 입장에 서있었고 방곡을 지시할 처지가 아니었다. 이용식의 조약문 해석은 이 같은 사정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상인에 의한 곡물유출이 증가되면서 그동안 지방관의 방곡에 대하여 ‘국지대금國之大禁’ 註27)이라는 입장을 취하던 중앙정부는 지방관이 임의로 발령한 방곡령을 인정하기도 했다. 즉 1886년의 영남방곡으로 일본의 항의를 받자 조약상 국내에서의 외국인의 무곡貿穀을 금할 수 없지만, 영남지방의 계속된 흉년으로 민정이 불안하므로 지방관의 방곡 역시 철폐할 수 없다고 했다. 註28) 1887년 3월 경상도 관찰사의 방곡령에 대해서도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 김윤식金允植은 지방관의 방곡은 일종의 관습으로 조약에 저촉되긴 하나 민정이 불안하여 어쩔 수 없다고 일본공사에게 답했다. 註29) 그러나 일본측의 지방관 임의의 방곡에 대한 계속적인 항의 때문에 정부의 이 같은 입장은 고수될 수 없었다. 그래서 일본측의 항의가 있을 때마다 철폐를 지시하고 지방관이 임의로 방곡을 시행할 수 없다고 했다. 일례로 1891년 장단부사의 방곡령에 대해 철폐를 지시하는 관문에서, “통상 이래 방곡일사防穀一事는 장정에 정해진 대로 판단할 일이지 원래 각 영읍營邑에서 함부로 발령해서 막을 일이 아니다” 註30)라며 지방관이 독자적으로 방곡령을 발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완전하다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사료에 산견되는 이 시기의 방곡령을 정리하여 보면 〈표 11〉과 같다. 이밖에 각읍 수령들에 의해 실시된 군소의 방곡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표 11〉은 다소 복잡하지만 발령권자를 우선하여 정리하고 방곡령 발령지역내의 하급관리들이 과세나 운반정지하여 발생된 사건은 그 발생의 일시와 지역·집행한 하급관리·대상인명 및 화물 등 실제 내용을 세분함으로써 방곡령의 사례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도록 했다. 이 가운데 1893년 10월에서 1894년 3월 사이의 방곡령사건〈표 12〉의 36~45은 정부가 발령한 전국방곡령과 관련하여 나타나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 경우 정부가 개항장의 곡물유출만 막을 뿐 그밖의 지역에서의 방곡은 금하고 있는데도 각 지방관은 관할지역내에 독자적으로 방곡을 실시했다. 이때 방곡은 지방관들이 정부의 방곡령을 빙자하고 더구나 정부방곡령이 방곡기간을 명시하고 있기 때문에, 정부방곡 기간내에 발생된 방곡사건은 정부발령의 방곡령 하에서 일어난 것으로 보아 모두 1건으로 처리하고, 그 기간 이외의 것은 각지방관이 발령한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17의 경기 7읍·21의 전라 9읍·22의 경상 4읍·23의 황해 5읍·40의 충청 5읍·44의 경기 2읍 ·강원 1읍·45의 경기 3읍의 각읍 수령이 실시한 방곡령들을 각각의 발생건수로 잡아보면 이 시기 방곡령은 대개 74건 이상이 발생되고 있었다.

1893년의 전국방곡령을 제외한다면, 각 지역별 방곡령의 발생회수는 전라 19건, 경기 17건, 경상 16건, 황해·충청 각 7건, 함경 5건, 강원 2건의 순이다. 그런데 1890년까지는 경상도지역이 대부분이며 1891년 이후는 경기·전라·충청 등지가 가장 빈번하다. 이는 종래 부산항을 중심으로 곡물을 구입하던 일본상인들이 행상의 증가와 함께 서울 중심의 곡물유통권에까지 깊이 침투한 데서 기인한다. 1890년대 이후 인천항의 곡물수출이 부산과 버금가거나 더 많아지고 있던 사정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발령권자는 각읍 수령이 단연 우세하고 다음으로 각도 관찰사·수사水使·전운사轉運使·병사兵使의 차례가 된다.

연도별 발령 빈도수로는 1885~1886년 각 한 건이던 것이 후기로 갈수록 증가추세를 보인다. 이같은 경향은 방곡령의 발생이 풍흉과의 관련보다는 오히려 일본상인의 곡물유통과정침투와 더욱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전술했듯이 일본상인의 행상은 1887년 이후로 급증하는데 방곡령의 발생 역시 이와 일치하는 것이다.

전시기 방곡령의 실시대상이 모두 조선상인이었던 것과는 달리, 이 시기 방곡령의 대상은 거의 일본상인이다. 물론 중국상인과 미국상인 타운센트Townsend의 고용인도 각기 한 차례씩 방곡령에 저촉되는 사례가 있었다. 또 조선의 곡물상인도 관련되고 있으나 이들은 대부분 일본상인의 고용인이거나 자금전대를 받은 자, 또는 개항장으로 곡물을 유출하려는 자들이었다. 당시 방곡령의 발생의 주된 원인은 일본시장과 조선의 곡물시장간의 가격차이를 이용해 일본상인이 곡물유통과정에 침투하여오는 데 있었고, 결과적으로는 곡물의 대일유출에 대한 저항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표 11〉에서 1889년까지는 방곡령에 저촉된 일본상인의 대다수가 대두의 유출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앞서의 곡물의 대일수출액표에서 1889년까지 일본으로 수출된 곡물의 대부분이 대두였던 것과도 일치한다. 이 시기 방곡령 실시의 직접적 원인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전국적인 흉년으로 곡물의 국외유출을 막기 위한 정부의 방곡령이 한 건 실시되었다. 註31) 방곡령은 쌀만 대상곡물로 하고 있어 대두의 수출은 막지 못했고, 註32) 쌀의 경우도 외국선박을 사용하지 않는 한 국내에서의 외국인의 곡물운수는 허용하고 개항장에서의 수출만 막았다. 註33) 그런데 전국 방곡령은 수출을 금지함으로써 일본미가에 국내미가가 연동하여 등귀하는 것을 막아 전반적으로 국내곡가를 안정시키는 효과는 얻었지만, 일본상인의 국내에서의 곡물운송은 그대로 둠으로써 그들의 곡물매집을 오히려 효율적으로 만들고 말았다. 일본영사의 보고에 의하면, “아상我商은 내지각도內地各道의 방곡으로 인한 미가저락米價低落을 틈타 쌀의 매집에 따르는 손실을 구실로 싼 가격으로 매입할 수 있어 해령該令의 영향은 전혀 일반의 예상과는 다른 의외의 호황”을 가져왔다고 했다. 註34) 더구나 방곡으로 말미암아 조선상인은 곡물을 운반할 수 없게 된 데 반해 일본상인의 반출은 구애를 받지 않아 “이 때문에 한상의 업무는 일시적으로는 다소간 일본행상자의 수중에 옮겨진 상태가 되었다. … 이번 양미粮米수출 금지의 사건은 의외로 당지에서의 본방상의 상업을 내지로 확장하는 단서를 열은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처지였다. 註35) 그러므로 이 전국 방곡은 기대했던 만큼의 성과를 얻기 어려웠고, 이 전국 방곡을 전후해 각 지방관의 방곡사건이 많았던 것은 전국방곡으로는 사실상 각 지역에서 일본상인의 곡물반출을 막을 수 없었던 탓이었다. 註36)

둘째, 방곡령의 발령 때마다 지방관들은 대개 곡물유출로 인한 경내 곡물시장의 곡가등귀를 이유로 내세우고 있었다. 이는 전통적으로 방곡시행의 주된 원인이었다. 지주·부농·곡물상인이 곡물의 상품화를 주도하며 곡물을 매집하여 곡가가 높은 지역으로 무곡하고 부를 축적하던 것이나 이로 인한 곡가등귀를 막으려던 지방관의 방곡은 조선후기 이래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개항후 자금력에서 조선의 곡물상인보다 한결 나은 일상이 유통과정에 침투해 들어옴으로서 방곡 실시의 요구는 더욱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대개의 각읍 수령의 방곡은 이에 속한다.

이 시기에는 민중이 직접 방곡령의 실시를 요구하며 저항하는 사례는 사료상에 나타나지 않지만, 일본상인의 곡물유출로 말미암아 민정이 불안했던 일은 자주 있었다. 1886년 12월 경상도 방곡령 때 밀양 관하의 수산에서는 곡물을 배에 싣고 지나던 일본상인 교목미삼랑橋木彌三郞은 관리의 수세에 항의하다가 군집한 민중에게 구타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註37) 1887년 11월에서 12월에 방곡령을 실시한 경상도관찰사 이호준李鎬俊은 흉작으로 미가가 고등高騰하는 처지에 일본상인들이 각 지역에서 미두를 무천貿遷하는 바람에 곡가가 등귀하여 농민들은 종량種糧마저 준비할 수 없어 폐농의 지경이라고 했다. 註38) 또한 1889년 10월 경상도의 방곡 때 관찰사 조병식趙秉式은 일본상인이 각읍을 편행하며 콩을 매집하여 각읍촌려各邑村閭의 장시에는 두승斗升도 나오지 않아 민정이 격앙된 상태라고 했다. 註39) 또 1893년 3월 경기도 장단부사는 방곡실시의 이유를 ‘민정군애民情窘碍’라고 표현했다던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 였다. 註40)

셋째, 수세를 목적으로 실시한 방곡령을 들 수 있다. 1887년 11월에서 12월에 걸친 경상도관찰사와 전운사의 방곡령에 대하여 재부산 일본영사 실전의문은,


대구감영과 전운어사현재 마산포에 체재의 명령으로 본년 경상도는 오곡이 흉작이라 인민의 식량이 모자란다는 명분아래 한 지방에서 타 지방으로 미곡을 운수하는 것을 금하고 있으나 기실은 운반 때 세전稅錢을 징수하는 수단이다. 註41)


라고 근등진서近藤眞鋤 대리공사에게 보고했다. 이 말은 상당히 진실에 가깝다고 여겨진다. 〈표 11〉의 발생사항에 적기된 과세는 모두 방곡령 하에서 수세를 전제로 일본상인의 곡물반출을 허용한 경우이다.

1894년 충청도 은진에서 보고에 의하면, 일본상인의 반출곡물에 일체 수세하지 말라는 정부의 관문에 대해 수세는 공용을 위한 것이므로 재고해 주기를 당부했다. 註42) 그러나 1889년의 황해도와 함경도 방곡령사건 때 일본상인에게서의 수세로 말미암아 외교적 분규와 함께 거액을 배상하게 된 정부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받지 마라 일을 일으켜 후회할 일을 하지 말 것” 註43)이라고 하여 일본상인에 대한 수세를 금할 수밖에 없었다.

넷째, 곡물유출로 야기된 세납곡물의 부족에도 방곡령 실시의 한 원인이 있었다. 앞서 본 1887년 11월 마산포에 체재 중이던 전운사의 방곡령이나 1893년 12월 전라도와 충청도 강경포에서 곡물을 매집하던 일본상인 택전총태랑澤田總太郞과 대야오평大野五平이 호남전운사의 방곡령으로 운반 정지당하는 사례가 바로 그것이다. 註44)전운사의 임무가 원래 세곡의 징수와 운송에 있었음을 상기하면, 이 경우의 방곡령은 세곡의 확보를 위한 것이 틀림없다. 註45) 또 1893년 3월 일본상인 임시양치林市郞治가 고용한 조선인 최치운崔致雲이 경기도 장단·마전·연천 등지에서 태太 1,700여 포를 운반하다가 장단부사의 방곡령으로 말미암아 고랑포에서 금수禁輸당했을 때 註46) 장단부사는 경기도관찰사에게 보낸 첩정에서 방곡의 실시이유를 공납의 부족으로 민정이 불안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註47)

다섯째, 개항장을 중심으로 한 유통권의 변화 때문에 서울의 곡물유통권을 보호하기 위한 경우도 있었다. 1892년 12월 전라감사가 부안 등 12개 읍에서 ‘외국인무곡지폐外國人貿穀之弊’를 방알防遏하라는 엄칙에 따라 방곡령을 실시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부산감리에 대한 일본영사의 항의로 전라감영에서는 정부에 완화를 요청하고, 정부도 황해·함경 양도의 방곡령사건을 상기하여 즉각 철폐하도록 했다. 註48) 원래 지방관의 지역적 방곡에 대하여, 지방관이 방곡을 요청하는 몇 건의 사례〈표12〉의 5·16를 제외하고 정부가 지역적인 방곡을 지시하는 예는 사료상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 경우는 지방관이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정부가 직접 지방관에게 방곡을 지시했다. 그 이유는 앞서 본 대로 1890년에 비해 1892년에는 서울의 미가가 3배 정도로 등귀하여 서울의 곡물사정이 악화되자, 서울의 곡물수급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전라도 곡물의 국외유출을 막음으로써 서울의 곡가를 안정시키려는데 목적이 있었다고 보여진다. 즉 서울을 중심으로 한 곡물유통권을 보호하려고 방곡령의 실시를 전라감사에게 지시했던 것이다.

여섯째, 일본상인의 개항장 밖으로 행상이 증가함에 따라 조선상인의 기존상권이 위협받자 이들의 상권을 보호하려는 목적에서 실시된 사례도 있었다. 1889년 10월의 함경도 방곡령 당시 함영의 관문에는 일본상인과 부동한 조선인으로 말미암아 원산의 객주들이 조직한 원산상회소가 폐관할 지경에 이르렀다고 하며, 註49) 일본인에게 고용되어 대두를 유출시키는 선주와 사격沙格에 대해서는 효경梟警 또는 형배刑配시킬 것이라고 했다. 註50) 그래서 일본대리공사 근등진서는 본국에 보고하기를, “해該감사는 원산상회소(조선객주의 집합소)를 보호하기 위해 내지행상을 억제하고 해該회소會所와 통련通聯하여 현금 각국 상민을 제지하고 아행상我行商과 거래를 못하게 하므로 숙박과 운반에도 지장이 있다”고 했다. 註51) 이것은 개항장 객주의 상권을 보호하기 위한 지방관의 조처이지만, 이밖에 일본상인의 행상으로 상권을 위협받는 일부 지방객주의 보호를 위한 것도 있었다고 믿어진다. 즉 1890년 3월 길주목사가 성진의 객상주인 김성기金成基에게 방곡의 전령을 내린 것이나, 註52) 1891년 11월 전라도 태인에서 인천거류상인 입전팔랑入田八郞의 고용인 안강덕평安岡德平과 김여옥金汝玉·이덕익李德益이 미두를 수송하려 할 때 객주 신옥년辛玉年이 방곡이라 하여 압수한 사례는 결코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註53)

끝으로 한가지 빠뜨릴 수 없는 원인이 있다. 1888년 1월 경상감사 이호준이 1개월 전의 사전통보 후 방곡령을 실시했을 때 부산영사 실전의문은 본국의 외무차관 청목주장靑木周藏에게 보내는 보고서에서, “당 경상도는 물론 전라도 기타에 있어서도 한발과 수해 등의 징후는 조금도 없고 작년에는 제도諸道가 풍숙하여 미곡도 충분히 저적했다. 그런데도 그것을 금지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그 중에 대구감사가 미곡의 출구를 금하여 내지 미곡의 가치 하락시 모두 그것을 매집하고 해금 후 가치 상등에 이르러 그것을 매각하여 그 이윤을 얻으려는 계획에서 나온 것이라는 설이 가장 신빙할 만하다”고 했다. 註54) 사실의 진위는 가릴 수 없지만 매집곡물이 대두의 경우라면 상당한 일리가 있다. 쌀은 흉작으로 일본보다 가격이 높은 형편이었으나, 대두에 관한 한 비상한 풍작이어서 일본상인의 목적이 대부분 대두 수출에 있었으므로 가능성이 있다. 註55) 또 1894년 고부민란 발생의 직접적 원인이었던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탐학사항 중 하나가 그 전년 가을 방곡을 실시하고 미곡을 매수한 후 미가가 폭등할 때 방매하여 이익을 꾀한 것이었다고 한다. 註56) 곡가의 계절적·지역적 차이를 이용한 지방관의 방곡 행위는 사료에서 잘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감사가 지역간 가격차이를 이용해 이무移貿하던 사례가 이미 개항 이전에도 있었던 것이나, 註57) 이 시기에도 수령이나 이서층이 농민에게서 부세를 작전作錢할 때 최고의 시가로 거두고 곡가가 쌀 때 무곡하는 일이 흔했던 것으로 미루어 註58) 이 시기 방곡 중에는 앞서 일본영사가 지적한 사례가 적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뒤에서 보겠지만 지방관이 방곡을 이용해 이익을 취하는 사례는 조세금납화가 시행되는 청일전쟁 후의 단계에서 더욱 증가한다.

이상과 같이 이 시기의 방곡령은 개항 이후 전시기를 통하여 가장 많은 방곡령이 실시되며 그 실시의 원인도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당시 방곡령 실시의 원인 중 대다수가 일본상인의 개항장외 행상의 증가로 관할구역내 곡물이 심하게 유출됨으로써 곡가가 등귀하고 민정이 불안하여 지방관이 이를 막고자 실시한 것이었다. 개항 이전에도 계절적·지역적 가격차이를 이용해 지주·부농·곡물상인들이 매점하거나 무곡함으로써 지역내 곡물시장의 보호가 절실했던 처지에 이 시기 일본상인의 곡물유출이 심화되면서 재래의 유통구조마저 붕괴되고 있는 이상, 지역적 소비곡물의 부족에 대한 민중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서라도 지방관의 방곡령은 필연의 추세였다. 일본이란 외압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었던 정부가 방곡의 발생시마다 지방관들에게 철폐를 지시했지만, 경내 민정의 불안에 직접적 책임을 지고 있었던 지방관으로서는 이에 대한 유일한 대처방안은 방곡의 실시였다.


3. 제3기(1895~1904)

청일전쟁 이후 방곡령은 〈표 12〉에서 보듯이 전시기에 비해 발생건수가 줄어 18건 정도가 발생되고 있었다.

방곡령의 발령자를 살펴보면 각읍 수령이 대부분이며 관찰사의 것이 2건, 암행어사의 것이 2건, 정부가 1건이었다. 방곡령의 대상은 여전히 일본상인이 대부분이었지만, 발령지역내의 농민이 대상인 사례도 적지 않다. 발령지역으로서는 충청도와 전라도의 곡창지대가 대부분이며 함경·경상·제주도에도 한 두 차례 나타난다. 발생연도별로 보면 1895년과 1896년의 청일전쟁 직후를 제외하고 매년 두 세 건의 방곡령이 발생되고 있었다.

이처럼 방곡령의 발생이 줄어들고 있었던 근본원인은 청일전쟁 이후 일본의 정치적 압력이 증대하면서 정부가 각 지방관의 방곡령을 인정할 수 없었던 데서 찾을 수 있다. 1897년 11월 충청남도 은진을 비롯한 각 지방의 방곡실시에 대해 정부는 충청남도관찰사에게 이의 철폐를 지시하는 훈령에서,


방곡일관防穀一款은 정부에셔 각공영사各公領事와 협상야 일기日期를 정한定限고 각도각군各道各郡에 훈지訓知면 해지방관이 존훈시행이이遵訓施行而已여널 호위호경행금방胡爲乎徑行禁防야 치오약장致誤約章에 차외힐此外詰고 …. 註59)


라고 했다. 즉 방곡령은 정부가 각국 공·영사와 협의한 후 지방관에게 실시토록 하는 것이며 지방관의 독자적인 권한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1901년 정부가 발령한 전국 방곡시에는 지방관의 방곡으로 일본상인이 손해배상을 청구할 때는 지방관으로부터 책징할 것이라 하고 1889년의 함경도방곡령사건을 상기시켰다. 註60)

1901년의 전국방곡 때 정부가 일본으로부터 받은 외교적 압력은 정부의 방곡령 실시가 단지 개항장에서의 곡물유출만 저지할 뿐 실제로 방곡의 필요성이 절실했던 곡물유출지역내의 곡물시장 보호는 불가능했음을 보여준다.

〈표12〉1895~1904년의 방곡령 발생사례
번호발생연월발령자 및 
집행자
발령지역내용비교(出典)
11897.?~5.관찰사함경북도일본공사 항의로 철수『日案』건양2년5월 14,15일
21897. 4~6전남관찰사 암행어사寶城 및 각읍위와 같음『日案』 건양2년 6월 3,4일
31897. 11~2암행어(발령) 각읍수령(집행)충남 恩津·德山·九萬浦·禮山·牙山·屯浦위와 같음『日案』 광무원년 12월 4·7일
41898.1.12 경상도 固城地方隊兵丁康津 
上納船 勒奪
『독립신문』 광무 2년 3월 8일 12월 4·7일
51898 초제주목사제주도방곡이용 부정으로 농민봉기『濟州道防穀事』
61898.6~12목사제주도中山庄吉대두 매집, 운반정지『全羅南北來案』 광무 2년 10월 9일
71898.5군수충북 鎭州·『독립신문』광무 2년 6월 4일
81898.?~12군수전남 흥덕英學黨사건『重犯供草』9
91899.11군수충남북각읍·『독립신문』광무 2년 6월 4일
101900지방관제주·『皇城新聞』광무 4월 112월 7일.
111901군수대구수출곡물 매집금지『通商彙纂』 196
121901.7군수은진日商米豆 1,500~1,600석 차압『日案』 광무 5년 7월 24일, 10월 30일
131901.8~11.9정부(발령)전국1개월 전 통보 쌀에 한함『日案』 광무 5년 7월 24일, 10월 30일
함경도 각 군수함경도 각 지역쌀 이외 곡물 
방곡으로 일본항의
『日案』 광무 5년 10월 30
141902.4각 군수전라도 각 읍상납금으로 무곡『續陰晴史』하
151903.3진위대 군수江界 후창군강계진위대 
후창군수 방곡
『各府部來牒』광무 7년 3월 28일
161904.1·전남 咸平거제인 朴汝辰 곡물압『各群狀題』上 甲辰 1月 10日
171904.3군수전남 咸平日商의 항의로 배상『續陰晴史』下
181904.6군수平康독일인광산 所運米 執穀, 世昌洋行에 배상『內部案』광무8년 
6월1일·7월23일

출전 : 조선총독부, 『朝鮮に於ける內地人』, 1924, 3~5쪽.


1901년 7월 24일 외부대신 박제순朴齋純이 일본공사 임권조林權助에게 1개월 이후 방곡을 통보했을 때 註61) 일본공사는 전국의 농황을 들어 2개월 간의 방곡실시 보류를 요청했다. 註62) 또한 방곡대상 곡물도 조선측에서는 쌀을 포함한 모든 곡물을 대상으로 삼았으나, 註63) 일본의 강력한 항의에 부딪쳐 註64) 쌀만을 대상으로 했던 것이다. 註65) 뿐만 아니라 일본공사는 「재조선국일본인민통상장정」 제37관의 곡물수출금지는 외국으로 수출을 금지하는 것일 뿐 국내 매매로 인한 지역 간의 곡물이동과는 상관이 없다하고 지방관의 방곡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즉 “만약 오인하여 소위 방곡이란 것을 일반시하여 이것이 매매·운반을 금조禁阻하는 경우가 있을 때는 귀국 상민은 물론 제국상고帝國商賈의 미혹이 자심하여 상업정지의 결과가 생긴다. 오히려 매매·운반을 금조하는 것은 사실 양미의 결핍을 고한 지방이 그를 보충할 길을 잃게 되는 것이다”라며 지방관의 방곡을 금할 것을 요구했다. 註66) 8월의 전국적 방곡령 실시에 앞서 지방관의 방곡은 한발의 피해가 우려되는 지역, 특히 금강유역의 각 군에서 이미 광범하게 실시되고 있었다. 일본공사의 국내 방곡 허용요구는 바로 이 문제의 해결을 요구한 것이었다. 註67)

그래서 정부는 충남북의 관찰사에게,


차차방곡此次防穀이 비위내지판운非謂內地販運이라 불과시잠금출구不過是暫禁出口니 출구자出口者 즉유통상항구卽由通商港口 운출외국자運出外國者라 차항구此港口에셔 피항구彼港口로 운출運出함도 자붇가금自不可禁이어 황내지판운況內地販運은 수륙간水陸間에 하이저알何以沮遏이리오 각지방관이 불선약지不鮮約旨야 단칭방곡但稱防穀고 경내출운境內運出을 상욕금저尙欲禁阻니 수심개탄殊甚慨歎이라. 註68)


라는 훈령으로 지역적 방곡을 금했다. 그러나 개항장에서 곡물유출 금지만으로는 지방에서의 일본상인의 곡물매집을 저지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사실 구매곡물로 생계를 잇던 도시의 빈민이나 농촌의 임노동자층의 처지에서 가장 절실했던 문제는 지역내 곡물가격의 안정이었지 단순한 개항장에서의 곡물유출 저지가 아니었다. 1901년 대구군수가 한발의 영향으로 미가가 등귀하자 수출을 위한 매점을 금지하는 방곡을 실시했을 때 일본인도 ‘빈민구조의 일책一策’이라고 수긍하고 있었다. 註69)

그러나 정부가 일본측의 압력으로 지역적 방곡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각 지방관의 지역적 방곡실시가 어려워지고 있었다. 이에 따라 곡물유출지역에서 빈민층이 불만을 가지게 된 것은 당연했다. 1898년 2월 15일 평양민 2천여 명은 평양의 세민細民이 기아에 처해 있는데 일본상인에 의해 미곡이 적출된다며 평양군수에게 방곡령의 실시를 요구하는 한편, 일본상인의 미곡을 적재한 선박의 출범을 막았다. 그러나 평양군수나 평안도관찰사는 방곡령 실시를 거부했다. 註70) 같은 해 5월 20일 ‘평양세민平壤細民’ 80~90명은 곡가의 앙등에 반발하여 재차 관찰사에게 방곡령의 실시를 요구했다. 註71) 이러한 평양민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평안도관찰사는 방곡령을 실시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중앙정부의 지역적 방곡을 인정하지 않는 입장에서 기인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더구나 지역내 곡물의 유출이 심하여 지방관이 정부에 방곡을 요청할 때에도 정부는 들어주지 않았다. 즉 1897년 12월 황해도관찰사 김가진金嘉鎭이 외부에 낸 보고서에는 흉작인데다가 내외국 선박이 각 포구에 몰려와 고가로 곡물을 매집해 가는 것이 몇 천석이나 되어서 곡가가 등귀하고 장시에 곡물이 나오지 않아 경내 백성이 걸식하는 참상을 보고하면서 방곡령의 실시를 요구했는데 정부는 실시의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註72)

1898년 제주도방곡령사건 때에도 정부의 이 같은 입장은 마찬가지였다. 제주도방곡사건은 이 시기 방곡령 실시의 여러 가지 요인들이 복합되어 일어난 대표적 사례이므로 좀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원래 제주의 토곡土穀은 출륙出陸하지 않는 것이 상규常規였는데, 1898년 초엽 제주목사 이병휘李秉輝는 표면상으로 방곡을 엄히 시행하면서도 이면에서는 ‘수뢰암방受賂暗放’하여 민요民擾가 발생했다. 註73) 즉 이병휘는 방곡을 시행하면서도 뇌물을 받고서 “모리배牟利輩가 부지원려不知遠慮고 단사기욕但思己欲야 두태豆太를 잠재출륙潛載出陸 폐弊”를 묵인했던 것이다. 註74) 이것이 구실이 되어 같은 해 3월 1일 제주도민 수만 명이 방갑房甲, 일명 鎭社·星七을 중심으로 남학당南學黨이라 칭하고 관아를 습격하여 제주목사 이병휘와 대정군수 채구석蔡龜錫에게 중상을 입혔다. 註75) 그리하여 박용원朴用元이 찰리사察理使 겸 제주목사로 파견되어 민원에 따라 대두의 유출을 금지함으로써 민심이 수습되었다. 註76)

그뒤 부산거류 일본상인 중산장길中山庄吉이 같은 해 3월 제주도에 행상하여 성산포에서 주문희周文喜 등 조선상인 수명과 대두 매매의 계약을 맺고 총계 1,400표俵에 대한 전도금으로 1,500관문을 9명의 상인에게 지급하고 6월에 태두를 수수受授할 때 박용원은 방곡을 실시했다. 註77) 이에 중산장길은 주부산 일본경관 백석유태랑白石由太郞과 함께 와서 항의했으나 제주목사 박용원은 허가하지 않고, 註78) 정부에 대해서도 민심수습의 명목으로 불허를 요청했다. 註79) 그러나 정부는 일본공사가 항의한다하여 철폐를 지시했으며 박용원이 재차 중산장길의 무태貿太는 출급出給하나 방곡은 계속하게 해 줄 것을 요망했지만, 註80) 정부는 방곡 금지의 지령을 내렸다. 註81) 이에따라 12월 7일 박용원은 방곡철쇄防穀撤鎖의 전령을 관하 3군과 각리방곡各里坊曲에 내렸다. 註82) 그러나 이듬해 중산장길은 실손해액보다 훨씬 많은 액수의 배상을 요구했다가 박용원의 항의에 배상신청서를 정정하고 註83) 일본공사를 통해 다시 배상을 요청했다. 註84) 박용원은 손해배상액과 벌금을 물게 되자 중산장길에게 대두를 방매하던 상인들에게 배상하라고 강요했다. 註85)

이상의 제주도 방곡사례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우선 이병휘의 경우와 같이 지방관이 방곡을 이용하여 이익을 꾀하는 경우가 있었다는 것이다. 또 방곡령의 실시를 요구하는 민중의 봉기가 발생했고 이에 따라 지방관은 방곡령을 실시했지만, 일본의 압력으로 말미암아 정부는 민중봉기의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철폐를 지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방관이 민중의 요구에 의해 방곡을 실시하더라도 배상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지방관이 그 책임을 져야 했다. 따라서 지방관이 일본상인을 대상으로 방곡을 실시한다는 것은 기대하기 힘들었다. 1900년 제주의 곡물상인 김근환金根煥 등이 제주도지역에서 곡물을 매집하고 목포와 지도 등으로 운반하려고 했을 때 방곡의 실시로 출항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외국인은 무난무미無難貿米하야 출입무상出入無常하야 초무금조初無禁阻하고 유독의등곡포唯獨矣等穀包만 말유천동末由遷動하온즉 …”이라고 농부에 호소한 내용은 방곡의 대상에서 일본상인이 제외되고 있던 사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註86)

그 때문에 전시기의 방곡령이 대부분 일본상인이 대상이었던 반면, 이 시기에는 일본상인이 그 대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표에서 보듯이 적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시기 대량의 곡물유출은 민중의 반발을 사고 있어 초기의병의 항쟁때도 방곡령 실시를 요구한 일이 있으며, 註87) 활빈당도 그들의 강령에서 방곡령의 실시를 주장했다. 註88) 또 전비서승 홍종우洪鍾宇는 1898년 4월 8일 경희궁 인화문 앞에서 인민 1,000여 명과 함께 상소를 올렸는데 상소의 제1항에서 곡물의 국외유출을 금지하는 방곡령의 실시를 요청했다. 註89) 10월에도 보민회원保民會員 권명호權明浩 등이 내부에 고소하여 “근인교린통상近因交隣通商하야 미곡이 수출타방輸出他邦하오니 소이所以로 풍년지곡豊年之穀이 귀어흉년貴於凶年하와 곡가가 고등高登하온즉 … 오오억울嗷嗷抑鬱한 민정民情을 특념特念하시와 미곡을 타방他邦으로 수출치 물勿하게 영위방금永爲邦禁하와 사차민使此民으로 비보생명俾保生命하심을 망望홈”이라 했지만, 그 대답은 역시 “알적遏糴은 방금야邦禁也라 결불가인허사決不可認許事”였다. 註90)

중앙정부가 이처럼 방곡령 실시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지방관 임의의 방곡을 인정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경내 곡물유출로 인한 민정의 불안 때문에 지방관이나 암행어사에 의하여 지역적 곡물시장의 보호를 위한 방곡령이 몇 차례 나타난다. 1897년 4월 전라남도지역에 방곡령을 발령한 암행어사는 그 이유를 포구에서 적출되는 미곡이 하루에도 수천 석에 이르러 민정이 불안하기 때문이라 했다. 註91) 앞서 본 제주도민의 봉기 때 박용원이 방곡을 실시했던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방곡은 행정의 강제력으로 유통을 차단하는 행위여서 방곡하는 지역에서는 일단 곡가를 안정시킬 수 있었지만, 정부의 방곡금지정책으로 방곡을 시행하지 못한 이웃한 지역에서의 곡가를 등귀시키는 사례도 있었다. 1898년 진천군의 방곡과 죽산군의 경우가 그러했다. 註92)

당시 방곡령의 실시 원인에서 볼 수 있는 두드러진 특색의 하나는 지방관이 상납금의 전용으로써 곡물을 매집·무곡하기 위하여 방곡령을 실시했던 점이다. 1898년 12월 전남 흥덕군에서 발생한 영학당사건은 흥덕군수 임용현林鏞炫의 탐학에서 비롯되었다. 군수의 탐학사항 중 하나가 군내에서 방곡을 실시하고는 공전을 가지고 다섯 곳에서 헐가로 무미貿米하는데 매석에 시가로 15냥인 것을 13냥 5전에 사들여 차액을 착복한 것이었다. 註93) 또 1902년 4월에는 전라도의 각읍 수령들이 방곡을 실시하고 공전으로 읍의 곡식을 감가減價로 늑매勒買해 동래로 운반하고 매매함으로써 몇 갑절의 이익을 남겨 민간의 곡물매매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註94)

이 경우의 방곡은 지방관이 상인과 결탁해서 실시하는 사례도 있었다. 1897년 『독립신문』의 “무곡하는 사람들이 수령들을 끼고 방곡을 하야 곡식을 장밖에 나가지 못하게 하는고로 그 고을 안에서는 곡식금이 싼지라 무곡장사와 수령들이 그 곡식을 싸게 사서 각 포구로 내보내어 중가로 밧고 파니 …”라는 기사에서 보듯이 방곡을 무곡상인과 수령이 지역간 가격차이를 이용하는 수단으로 시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농민전쟁 단계에서 조병갑趙秉甲이 전라도 고부에서 곡물의 수확기에 방곡을 실시해 계절적 곡가 차이를 이용하는 경우는 이미 살펴본 대로지만 이 시기에 들어 이 같은 현상을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조세금납의 실시 이후 조세 납입 이전까지 지방관이 상납금을 전용할 수 있었던 데다가 대일수출로 인한 시장확대가 계절적 차이만이 아니라 지역적 가격차이를 이용할 수 있는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한 점 등이 이를 가속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한국지』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바로 이것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 이 나라의 상업유통에 관여하는 관리들은 방곡령 때 자기들의 대리인을 통해서 농민들의 잉여농산물을 싼값으로 매점하여 자기들의 창고에 저장했다. 註95)


청일전쟁 이후 일본의 압력이 강화되면서 전시기에 비해 일본상인을 대상으로 지역적 곡물시장의 보호를 위한 방곡령 실시가 줄어든 대신, 지방관들이 상납금 등의 공전을 전용하여 경내 농민을 대상으로 방곡을 실시하고 싼값으로 곡물을 사들여 무곡하고 사복을 채우는 경우가 많아졌던 것이다. 그러나 러일전쟁 이후 사실상의 식민지화와 함께 이러한 방곡령마저 소멸되고 말았다.

필자가 사료에서 찾아낸 바로는 일본상인을 대상으로 한 마지막 방곡령의 실시는 1904년 3월 전라남도 함평군수가 실시한 것이었는데, 이 사례에서 우리는 러일전쟁 이후 방곡령이 발생되지 못했던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즉 함평군의 방곡이 엄해서 동향지민도 식량을 못구해 원성이 잦던 차에 일본인 5명이 정당에 돌입하여 군수를 구타하고 조약위반의 손해배상금을 요구했다. 이에 군수는 우선 2천냥을 주었고 또 일본인이 곡물을 모두 매입해 가는 바람에 지역민은 식량조차 구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註96) 러일전쟁 도중의 일개 일본상인의 횡포가 이러했으니 이후 방곡령의 발생은 기대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국가기구가 일본의 손에 넘어가는 단계에서 방곡령의 소멸은 당연한 결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