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제6장 수출입상품가격체계의 변동과 수출입무역, 개항전기(1876~1894) 상품가격체계/제2권 개항 이후 일제의 침략

몽유도원 2013. 1. 11. 13:48

제6장 수출입상품가격체계의 변동과 수출입무역


개항전기(1876~1894) 상품가격체계

개항후기(1895~1904)의 가격체계와 수출입무역


1. 개항전기(1876~1894) 상품가격체계


곡물수출과 관련해서 당시 상품가격체계도 바꾸어 가고 있었다. 국내의 곡물가격은 일본시장의 가격과 상호 관련하여 변동함으로써 계속 오르는 추세였고, 수출곡물의 생산은 개항 이후에도 급격한 시장의 확대가 없었던 다른 농업생산물에 비해 상대적으로 이익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농업생산도 수출곡물인 쌀과 콩을 중심으로 단작화의 경향으로 나아가는 실정이었다. 이 시기 면작의 대두작으로 전환은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그리고 미가의 계속적 등귀도 지주제에 영향을 주었다. 미가가 계속 오르는 사정에서 미곡수출을 주도하는 층은 경제적으로 이익을 얻을 수 있어 종래 정체적인 양상을 띠었던 지주제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1890년 이후 곡물수출이 본격화하면서 지주층은 곡물의 상품화에 적극 가담하고 곡물수출을 주도했다. 그 과정에서 지주제의 강화도 필연의 추세였다.

또한 국내생산 상품의 가격체계만이 바뀐 것이 아니라 수출입상품의 그것도 변동하고 있었다. 후기로 갈수록 수출곡물의 가격조건은 수입자본제 상품, 특히 자본제 면제품에 비해 가격조건이 오히려 좋아졌다. 또 수입되는 면제품과 조선의 전통적 토포는 상품의 성격상 상호 대립하고 있어 이들 상품간의 가격조건의 변화는 종래 부농경영의 한 축이던 토포생산의 계속적 발전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전제가 된다.

그래서 수출 미·대두·토포, 그리고 다양한 자본제 면제품의 상호 가격대비를 통해 가격체계가 시기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밝히고자 한다. 그 변화의 추이를 시기적으로 유형화하기 위해 1894년을 전후하여 나누어 보았다. 1894년의 농민전쟁이전과 이후는 수입면제품의 종류가 달라지는데다가 가격체계도 다르기 때문에 분리하여 설명할 수밖에 없다.

일본상인은 금건金巾 등 주로 섬유제품을 수입하여 조선시장에 판매하였고 판매된 물품의 댓가로 다시 곡물을 구매하여 일본에 수출하였다. 곧 일본상인이 한일간의 무역을 통하여 얻는 이익은 섬유제품류의 구입원가와 곡물의 일본시장에서 판매가격의 차이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청일전쟁 이전의 시기에는 이 섬유제품은 주로 영국산 면제품으로서 일본상인은 중계무역을 하고 있었다. 개항초기에는 수입 섬유제품의 양이 적어 물가의 표준이 정해져 있지 않은 데다가 무역을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상인의 기만적 폭리행위가 가능하였다. 그러나 1880년대에 들어 청국상인이 침투하면서 상해를 경유해서 수입하는 금건의 중계무역적 성격상 청국상인에 비해 가격경쟁력이 약해 일본상인의 이익은 상대적으로 줄어들고 있었다. 그런데도 일본상인이 영국산 면제품, 특히 금건을 주된 수입물품으로 삼았던 것은 이를 가지고 조선 농산품과의 교환에 사용하였던 데 그 이유가 있었다. 註1) 그러므로 조선의 곡물수출과 금건의 수입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조선의 내재적인 자본주의적 발전의 전망을 보여주던 전통적 토포의 생산도 상품의 성격상 수입되는 외국산 섬유제품과 대립하며 가격조건에 일정한 변화를 보인다.

우선 〈표 17〉을 통하여 지역간 생금건生金巾의 엔화가격을 대조하여 보면 부산이 가장 낮고, 다음 원산·인천의 순이다. 이는 통계자료의 일관성을 기하기 위해 일본에서의 수입된 가격을 기준으로 한 탓이다. 일본에서 운송되어오는 거리의 원근에서 운임이 차이가 났던 것이다. 그리고 한전가격에서는 당오전 인플레이션현상이 심하던 인천이 높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표17〉지역별 생금건 가격대조표(1880~1894)(1반당)
연도부산원산인천
엔화가격
(엔)
한전가격
(관문)
엔화가격
(엔)
한전가격
(관문)
엔화가격
(엔)
한전가격
(관문)
1880

1881

1882

1883

1884

1885

1886

1887

1888

1889

1890

1891

1892

1893

1894


3.310 

2.697 

3.174 

2.955 

2.895 

2.745 

3.009 

2.991 

3.079 

2.957 

2.942 

2.889 

2.895 

3.723


1.908 

1.355 

1.500 

1.583 

1.685 

1.799 

1.916 

1.966 

2.049 

1.527 

1.526 

1.782 

2.006 

1.981
3.306 

3.106 

3.430 

3.375 

3.418 

3.079 

3.079 

2.726 

2.953 

2.971 

3.111 

3.098 

3.123 

3.101 

3.300


1.780 

1.920 

1.961 

1.670 

1.662 

1.999 

1.759 

2.060 

2.003 

1.653 

1.653 

1.951 

2.078 

1.743






3.234 

2.744 

3.459 

3.252 



3.033 

3.031 

2.957 

3.143 

3.053 

2.895 

3.721






3.234 

2.744 

3.459 

3.252 



3.033 

3.031 

2.957 

3.143 

3.053 

2.895 

3.721
평균3.0211.7773.1111.8493.1385.921

출전 :『 通商彙編』, 『 明治官報』, 『 通商報告』, 『 通商彙纂』, 『 日韓通商協會報告』 각호에 의거 작성. 

비고 : ① 1884년 이전 통계에는 기타 金巾도 일부 포함되어 있다. 

② 인천통계 중 1883년 6월은 통계착오로 제외, 1886년은 7, 12월 제외한 평균. 1892년은 1~4월 평균. 

③ 1883년 이전은 円紙幣와 円銀의 할증률을 환산한 가격. 

④ 평균은 1883~94년간의 평균치.


〈표 18〉을 보면 조선의 전통적 토포인 목면 가격은 엔화가격에서 인천이 부산과 원산보다 낮은 가격을 보인다. 원래 원산은 부산에 집산되는 경상전라도의 목면이 이입되고 있으므로 이입가격이 부산의 이출가격보다 높은 것은 당연하다. 인천은 배후지에 면작지대는 적지만 목면의 산지를 두고 있어 비면업지대인 원산으로 가장 많이 이출하는 부산보다 이입가격에서 낮을 수 있다. 실제로 〈표 18〉의 1891년 가격은 부산의 경우 원산과 인천으로의 평균이출가격이며 인천은 부산에서의 이입가격을 표시한 것인데 인천이 부산의 이출평균가격보다 낮다. 그러나 개항장의 통계 자체가 이출입가격이므로 광범한 면업지대를 배후지에 둔 부산이 실제 가격에서는 인천보다 높았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표18〉지역별 조선목면 가격대조표(1881~1894)(1반당)
연도부산원산인천
엔화가격
(엔)
한전가격
(관문)
엔화가격
(엔)
한전가격
(관문)
엔화가격
(엔)
한전가격
(관문)
1881

1882

1883

1884

1885

1886

1887

1888

1889

1890

1891

1892

1893

1894
0.609 

0.649 

0.596 

0.410 

0.752 

0.948 

0.949 



0.999 

1.065 

1.080 

1.041 

0.998 

1.007
0.351 

0.326 

0.281 

0.220 

0.437 

0.622 

0.604 



0.665 

0.550 

0.560 

0.642 

0.692 

0.536
0.783 

0.655 

0.671 

0.495 

0.939 



1.026 

1.000 



1.056 

1.092 

1.018 

0.991 

1.003
0.449 

0.366 

0.390 

0.242 

0.507 



0.662 

0.698 

0.561 



0.583 

0.636 

0.664 

0.530




0.404 

0.472 

0.424 







0.999 



1.058 

0.969 

0.884 

1.024




0.273 

0.420 

0.570 







1.510 



2.659 

2.979 

2.377 

2.932
평균3.0211.7773.1111.8493.1385.921

출전 : 『通商彙編』, 『明治官報』, 『通商報告』, 『通商彙纂』 각호에 의거 작성. 

비고 : ① 부산 : 1886년은 5~7월, 12월 제외한 평균. 1890년은 10~12월 평균, 1892년은 3월의 자료상 통계착오를 제외한 평균. 

② 원산 : 1887년은 12월, 1888년은 1월 가격. 1891년은 6~7월 제외한 평균. 

③ 인천 : 1891년은 부산의 인천 수출가격. 

④ 1883년 이전은 円紙幣와 円銀의 할증률을 환산한 가격. 

⑤ 평균은 1883~1894년간의 평균치.


이상의 표를 토대로 부산의 수출곡물의 가격에 수입섬유제품인 생금건의 가격을 나눈 상대가격을 표시한 것이 〈표 19〉이다. 이 표는 대상이 된 전시기를 규정할 수는 없지만 1890년을 전후하여 쌀과 콩의 상대가격이 높아지고 수입면제품의 그것은 하락하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곡물과 조선목면의 상대가격을 나타내는 〈표 20〉에서도 1890년을 전후하여 곡물의 가격조건이 나아지는 현상을 보인다. 다른 지역도 표로 재구성하지 않았지만 거의 유사한 결론을 얻는다.

〈표19〉수출곡물과 수입섬유제품의 상대가격(부산)
연도쌀/生金巾콩/生金巾
1881 

1882 

1883 

1884 

1885 

1886 

1887 

1888 

1889 

1890 

1891 

1892 

1893 

1894
1.51 

1.82 

1.34 

1.26 

1.68 

1.53 

1.08 

1.10 

1.77 

1.96 

1.75 

1.86 

1.64 

2.39
0.98 

1.55 

0.51 

0.81 

1.10 

1.11 

0.75 

0.91 

1.28 

1.32 

1.36 

1.28 

1.25 

1.46
〈표20〉곡물과 토포의 상대가격(부산)
연도쌀/목면콩/목면
1881 

1882 

1883 

1884 

1885 

1886 

1887 

1888 

1889 

1890 

1891 

1892 

1893 

1894
8.20 

7.56 

7.14 

9.08 

6.46 

5.47 

3.93 



5.37 

5.39 

4.68 

5.15 

6.07 

7.79
5.34 

6.45 

2.72 

5.84 

4.23 

3.21 

2.73 



3.88 

3.64 

3.63 

3.54 

4.64 

4.76

출전 : 하원호, 『 한국근대경제사연구』. 

비고 : 콩과 쌀은 1석당 엔화가격, 生金巾과 조선목면은 1반당 엔화가격


이러한 사실은 곡물수출과 관련하여 가격체계의 변화가 곡물의 상품화를 촉진시키고 나아가 생산구조를 일정하게 변화시키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게 해준다. 대외무역과 관련하여 쌀과 콩의 상대가격이 높아지는 조건에서 토포의 생산이 상대적으로 위축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이며 농업생산이 적어도 개항장의 배후지에서는 수출과 관련된 쌀과 콩의 단작화로 진행되었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추세였다. 註2) 특히 전작으로 대두와 대립하고 있던 면포의 경우 대두가격의 상대적 상승은 원료의 생산인 면작을 위축시킬 수밖에 없었다. 1895년 “콩의 재배열은 면작에도 다소의 영향을 미쳐 종래 면작을 하던 곳도 취향을 바꾸어 콩을 파종하고 그것을 팔아 금건金巾·목면 등을 구입하는 경향이 생겨 면의 산액은 오히려 감소한다” 註3)는 일본인의 관찰은 이 같은 생산체계의 변화를 지적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유의할 점은 우리가 대상으로 삼는 농민전쟁 이전의 전시기에 이 같은 사실이 일방적으로 관철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즉 1890년 이전 시기에는 오히려 토포의 가격조건이 나아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쌀의 경우 흉작과 관련하여 토포에 비해 상대가격이 불리할 수밖에 없었지만 풍흉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고 같은 전작으로 면포와 대립하고 있던 대두의 상대가격이 1890년 이전 시기에 토포에 비해 낮아지고 있었다는 것은 전작에서 면작이 아직 우세했음을 보여준다.

한편 〈표 21〉을 통해본 생금건과 토포의 상대가격에서는 부산·인천 모두 1890년 전후까지는 생금건의 상대가격이 낮아지고 그 이후는 생금건의 가격조건이 높아져 가는 경향을 볼 수 있다. 1890년대 이전 생금건의 가격조건이 낮아지는 원인은 우선 〈표 21〉에서 보는 대로 토포의 가격이 높아진데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1884년의 생금건 통계에 기타 고가의 금건도 일부 포함되어 있어 생금건만 대상으로 한 시기보다 초기 통계의 가격은 당연히 높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생금건이 통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상 이 추세는 일반적 경향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1890년대에 들어 금건의 가격이 높아지는 것은 이 시기에 들어 곡물이 대량으로 수출되면서 수입섬유제품에 대한 구매력 창출의 결과이다. 그래서 1890년 부산에서는 금건에 대한 기호가 고급화하여 상등품의 매매가 활발하였고 하등품은 일체의 수요가 없는 실정이었다. 註4)

〈표21〉생금건生金巾과 토포土布의 상대가격(生金巾/木綿)
연도부산인천
1881 

1882 

1883 

1884 

1885 

1886 

1887 

1888 

1889 

1890 

1891 

1892 

1893 

1894
5.44 

4.16 

5.33 

7.20 

3.85 

2.89 

3.17 



3.08 

2.75 

2.67 

2.77 

2.70 

3.26





8.00 

5.81 

8.16 







3.03 



2.97 

3.15 

3.27 

3.63

출전 : 하원호, 『 한국근대경제사연구』. 

비고 : 콩과 쌀은 1석당 엔화가격, 생금건과 조선목면은 1반당 엔화가격


그런데 이러한 기호의 변화는 토포생산에도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 1893년 일본영사의 기록에는 “근년 당국當國에서 금건의 수입이 현저히 증가하여 지금은 각도에 이르는 한촌벽읍寒村僻邑이라도 모두 본품의 수요로 충족하기 이르러 목동이나 초부樵夫도 금건의 의복을 입는 실정이어서 점점 그 품격을 높이려기 때문에 근래는 조선목면의 의류를 입는 것이 오히려 보기 낫다는 경향이 생겨 그 기호가 변천하게 되면서 금건은 취약하다는 단점을 지적하는 자가 있게 되고 지방농민 중 부유한 자 중에는 자국의 면을 제조하여 수직手織목면을 짜거나 또 면화를 충분히 가지지 못한 자는 해외에서 방적사를 매수하여 수직手織의 재료로 삼는” 註5) 사례가 증가하였다고 한다. 이 인용문은 자본제 섬유제품이 결코 사치품으로서만 기능하지 않고 빈농 이하의 계급에도 침투하며 조선의 면포와 대립하고 있던 사정을 보여준다. 물론 위 인용문에서 보는 금건의 취약성토포보다 세탁에 약하다는 점은 조선에서의 면직물수요를 금건이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는 원인이 되었고 그래서 일본상인은 일본산 목면으로 이에 대처하려 하였지만, 이 시기까지는 일본목면의 수입이 많지 않았던 것은 기왕의 연구가 지적한 대로이다. 註6)

그러므로 농민전쟁 이전까지는 아직 전작에서 면작의 대두작으로 전환이 본격화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고, 따라서 면작과 토포생산을 통한 부농이나 소상품생산자의 성장 가능성은 일정하게 존재하였다. 그러나 봉건적 수탈의 강화와 금건 등 외국섬유제품의 유입에 따른 수요의 침식이 가격조건의 불리를 심화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토포생산에 종사하는 부농과 소생산품생산들이 봉건지배계급에 저항하고 외래자본주의와의 교역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당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