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제5장 곡물수출과 방곡령, 곡물수출의 성격/제2권 개항 이후 일제의 침략

몽유도원 2013. 1. 11. 11:51

제5장 곡물수출과 방곡령


방곡령 실시의 사례와 원인

곡물수출의 성격


2. 곡물수출의 성격


1. 곡물가격의 지역간 차이의 의미

각 개항장은 각기 배후지의 성격과 그 지역의 풍흉·전통적 유통권과 관계·악화유통으로 인한 인플레이션 현상, 그리고 일본으로 곡물유출, 정치 사회적 사건 등 제반 요인과 관련하여 가격이 변동하고 있었다.

〈표13〉인천·부산의 미가 대비
연도엔화가격한전가격한전시세
1884 

1885 

1886 

1887 

1888 

1889 

1890 

1891 

1892 

1893 

1894 

1895 

1896 

1897 

1898 

1899 

1900 

1901 

1902 

1903 

1904
1.303 

1.139 

1.331 

1.489 

1.026 

1.021 

1.037 

0.933 

0.827 

0.891 

0.806 

0.801 

0.928 

0.813 

0.781 

0.837 

0.782 

0.907 

1.047 

0.875 

0.771
2.162 

2.631 

3.814 

3.922 

2.092 

2.318 

3.650 

4.520 

4.124 

3.458 

4.335 

3.879 





0.817 

0.818 

0.837 

1.044 

1.388 

1.208 

1.181
0.603 

0.433 

0.349 

0.380 

0.490 

0.440 

0.284 

0.206 

0.201 

0.258 

0.186 

0.206 





0.956 

1.023 

0.934 

0.869 

0.754 

0.724 

0.653
평균0.9692.5370.524

출전 : 하원호, 『한국근대경제사연구』, 신서원, 1997. 

비고 : 한전 시세 대비 중 인천은 1894년까지 당오전 시세, 1895년은 1~6월간 당오전 시세, 1898년 이후는 백동화 시세.


그 과정은 지역에 따라 다르고 따라서 상호간 가격의 격차를 나타내게 되었다. 또 이 시기는 당오전·백동화 사용지역과 엽전사용지역이 분리하여 존재하는 등 화폐의 유통권까지 달라 특히 한전으로 표시된 가격 간에는 극심한 편차를 드러내고 있었다.

각 지역의 쌀 1석의 가격을 엔화가격과 한전가격으로 대비한 경우 엔화가격에서 원산이 다른 지역보다 미가 수준이 높게 나타난다. 註97) 쌀의 생산지역을 배후지로 하지 않고 전통적으로 타지역의 미곡유통권, 특히 부산미 수출의 주요지역으로 포섭되어 있어 소비지로서의 역할을 하는 원산은 1882년에서 1894년까지 부산과 평균 0.8엔 정도의 차이를 보이며 부산항의 가격조건에 비례하여 변동하고 있었다. 이같은 항상적 부산미의 수출지역으로서 원산은 당연히 조선상인의 무곡貿穀대상지역이 될 수밖에 없었으며 일본상인이 1890년대에 들어 일본미의 수입만이 아니라 부산과 원산을 잇는 전통적 곡물유통권을 대상으로 미가의 차이를 이용하여 기선으로 부산미를 원산으로 운송하고 이익을 취하는 사례가 나타나게 됨은 이미 살펴 본 바이다.

인천지방의 미가는 개항 직후에 부산미가에 비해 높았지만 〈표 13〉에서 보듯이 1891년 이후에는 엔화가격수준이 낮아지게 되었다. 개항 직후의 높은 가격은 극심한 흉작 때문이었다. 1890년대 이후는 항상적으로 낮은 수준을 유지했다. 이는 부산항이 경상도에서 7할, 전라도에서 3할 정도의 미곡을 공급받아 경상도의 곡물이 주종을 이루던 반면, 인천항은 경인지방을 비롯하여 평안도·황해도·충청도·전라도 각지가 모두 미곡의 공급지였던 탓이다. 그리하여 이같은 가격조건과 서울중심의 유통권이 가지는 곡물의 집산지로서의 배후지적 성격으로 말미암아 인천은 쌀의 대일수출이 증가할 수밖에 없어 총쌀수출액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1890년 42.1%, 1891년 39.7%, 1892년 46.7%, 1893년 73.3%, 1894년 82.9%, 1895년 78%로 급증하여 갔던 것이다. 註98) 이러한 성장의 배경에는 당시 부산항의 배후지인 경상도지역이 흉작이었던 탓도 있다. 그래서 1896년 이후에는 오히려 부산항이 다시 주된 수출항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인천항의 수출량이 줄어드는 것은 목포·군산·진남포 등지가 개항되면서 수출량을 분점하게 된 데 더 큰 이유가 있었다. 부산의 경우 마산항의 개항이 있었지만 마산으로 집산되는 곡물은 대부분 부산으로 이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개항장 증설에 따른 수출감소가 적었던 것이다.

〈표 13〉에서 보는 대로 서로 통용화폐가 다른 한전으로 비교하지 않고 엔화가격으로 비교해 보아도 후기에도 전기에 비해 상호 가격 격차가 크게 줄어들지 않는다. 농업생산물이라는 곡물의 특수성으로 흉작 여부가 가격결정의 우선 요소여서 풍흉이 교차될 경우 가격차이는 나타나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미 일본선박의 도입 등에 따른 교통의 발달과 이를 이용한 지역간 유통도 활발해지는 가운데도 큰 변화를 보이는 않는 것은 대상지역들이 개항장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곡물의 대일수출을 주요 기능으로 하던 개항장의 성격상 국내가격에 비해 일본 미가가 보다 높을 경우 우선적인 수출선은 일본일 수밖에 없었고 국내적 가격격차를 줄이는 것은 2차적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전 가격의 변동을 살펴보면 원산과 부산은 풍흉에 따라 일정하게 가격 차이를 보이고 원산의 미가가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을 유지하지만 큰 차이없는 가격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인천지방은 개항 직후인 1883년부터 가격의 급격한 상승을 보여준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1883년 발행되기 시작하는 당오전의 인플레이션 현상에서 기인한다. 註99)당오전은 명목가치가 종래 당일전상평통보의 5배이면서도 실질가치는 2배밖에 안되는 악화였다. 註100) 이 화폐는 그 이듬해까지 대량으로 발행되었으나 악화주조에 따른 폐해로 주조가 한동안 억제되었다가 1888년부터 다시 만들어졌다. 1891년부터는 평양에서 종래 당일전 실질가치의 1/3도 못되는, 흔히 평양전이라 불리는 조악한 당일전이 대량 발행되었다. 악화남발은 유통되는 모든 조선화폐에 대한 가치를 하락시키며 격심한 인플레이션 현상을 유발했다. 〈표 13〉의 한전 시세 대비에서 인천은 1895년까지는 당오전의 시세로 표시된 것이다. 표에서 보는 대로 당일전을 주된 화폐로 사용한 부산에 비해 그 시세가 계속 내리고 있었다. 1892년경에는 조선 전역에 걸쳐 당오전·평양전·구당일전 구별없이 모두 같은 가치로 유통하게 되었다. 註101)

원래 부산과 원산은 당오전 통용지역이 아니고 전통적인 당일전 유통권지역이었다. 그러므로 이들 지역에서는 곡물유출과 관련된 미가 등귀, 그리고 당오전이 당일전에 포섭되어 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통화량의 팽창 등으로 1883년의 미가를 기준으로 한전 가격이 1894년에 2배 전후로 오르지만, 경인지역은 악화로 인한 극심한 인플레이션 현상을 보여 미가가 7배를 훨씬 넘게 상승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술한 대로 엔화가격은 오히려 경인지역이 낮아지면서 일본상인의 곡물 유출이 후기로 갈수록 부산에서 인천항으로 이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당오전의 환전 시세 하락과 7배를 넘는 미가의 상승현상은 당오전 유통지역, 특히 서울을 비롯한 도시민의 생계를 극심하게 압박하였고 곡물의 상품화 역시 촉진될 수밖에 없었다. 도시의 하급관리나 군인, 그밖의 도시의 임금노동자를 비롯한 빈민들은 화폐로 임금을 지급받고 이로서 곡물을 구입하여 생계를 이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으므로 미가의 극심한 상승과 관련하여 상당한 인구가 도시에서 식량과 연료가 싼 농촌지역으로 이동한다는 보고가 나올 정도였다. 註102) 그래서 지역내 곡물시장의 곡물가격 안정을 위하여 지역내 곡물의 유출을 저지하는 방곡령도 1890년대에 들어 주로 당오전 지역을 중심으로 실시되었다.

악화발행으로 인한 인플레이션 문제는 그 이후 다시 백동화의 발행으로 재발되었다. 백동화는 1894년의 「신식화폐발행장정新式貨幣發行章程」 이후 발행되기 시작해 이 해 9월부터 실제 사용에 들어 갔다. 註103) 그러나 본격적으로 주조·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898년부터였다. 이때 백동화가 재발행되기 시작한 이유는 당시의 재정궁핍과 관련이 있었다. 註104) 〈표 13〉의 한전 시세 중 1898년 이후 인천은 백동화 시세로 대비한 것이다. 백동화 시세는 표에서 보는 대로 부산항의 엽전 시세에 비해 계속 하락하고 있었다. 백동화는 통용가치의 하락현상이 심해 일본인의 은행에서는 한때 받기를 거절할 정도였다. 註105) 실질가치가 낮던 백동화는 그레샴법칙에 의해 엽전과 당시 통용되고 있던 일본 엔은円銀을 시장에서 구축했고, 1900년 5월 14일 조선정부는 칙령으로 백동화의 사주私鑄를 특허한 결과 더욱 조악한 악화가 남발되고 위조화가 나왔고 심지어 위조화가 외국에서 밀수입되기까지 했던 것이다. 註106) 악화 남발로 인한 실질가치의 하락은 백동화의 통용가치를 급격히 하락시켰고 계속적으로 물가 등귀를 유발했다. 그 결과 1904년에는 1898년에 비해 엔화가격으로는 큰 차이가 없었으나 한전 가격으로는 2배 이상의 등귀를 보게 되었고 부산항보다 높을 수밖에 없었다.

곡물을 수출하는 개항장에 비해 그 배후지였던 비개항장지역의 가격수준이 상대적으로 낮을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일본인의 행상이 증가하면서 가격격차는 줄어드는 실정이었다. 〈표 14〉는 1900년 초반 경상도 남부지역의 현미 1석당 가격이다. 이 표는 지역에 따라 도량형이 다른 것을 일본도량형으로 환산한 것이어서 실제와는 다소간 차이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 해 부산항 현미의 1~6월간 평균 시세는 8.33엔이었고, 수출미가는 9.17엔이었다. 표에 나타난 지역간 가격격차는 최고 2엔 이상의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대량의 곡물수요와 가격조건이 더 좋은 개항장인 부산과 마산이 인접하고 있어 미곡은 조선선박으로 개항장으로 반출되는 것이 많았다. 이 중에서도 인구 13,500여 명 중 과반이 상공업에 종사하여 도시적 성격을 띠고 일본상인의 곡물매입을 위한 행상이 많던 진주의 미가가 가장 높다. 註107) 일본인의 행상이 가장 많고 미곡의 집산지였던 진주지역의 가격수준이 부산의 가격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미 이 시기에 들어 일본상인의 행상이 치열해져 가면서 개항장외의 지역에서도 개항장 미가, 나아가 일본 미가에 상당한 정도로 근접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표14〉1900년 경상도 남부지역 미가(현미 1석당)
지방명진해고성통영사천곤양
관문4.004.384.755.003.57
6.707.327.958.375.98
지방명하동진주의령칠원창원
관문4.755.294.254.804.75
7.958.857.118.047.95
출전 : 『 通商彙纂』 181, 韓國慶尙道西南部內地情況(1900.6.18, 마산). 
비고 : 한전 시세는 16.74할로 환산.
〈표15〉1900년 경상·충청지역 미가 (상백미 1석당)
지방명수원남문장오산장둔포아산곡교리목천청주
11.812.510.41098.75
8.889.417.837.526.776.58
출전 : 『通商彙纂』 187, 韓國京畿忠淸兩道農商況視察復命書(1900.12.22, 鎭南浦). 
비고 : 2元=1貫文, 한전시세는 인천항 7~9월 평균 15.05할로 환산.

한편 개항장으로의 곡물이동에 따른 가격변화를 잘 보여주는 것이 경기·충청지방에서 상백미 1석당 가격을 표시한 〈표 15〉이다. 이 표는 1900년 12월의 일본인 조사보고인데 보고가 있는 시점과 실제 조사시점 간에는 일반적으로 4~6개월 정도 차이가 난다. 조사시점을 고려해서 인천항의 가격을 살펴보면 인천 4~6월간 상백미 평균이 8.677엔, 7~9월간 평균가격이 8.672엔이었다. 註108) 수원과 오산지역이 인천 미가보다 높은 것은 이 지역의 한해旱害로 인한 흉작을 고려해야 한다.
표에서 보는 대로 일본인의 행상이 거의 없던 청주의 미가가 가장 낮다. 그런데 청주지방의 미는 대부분 목천지역으로 가고, 목천지역에 집산된 미곡은 둔포로 향한다. 둔포에서 다시 인천항으로 이송되는데 둔포와 인천에서의 객주 구문口文·포장비·운임 등 각종경비를 계산하면 0.65엔0.868元 정도이다. 따라서 인천항에서의 둔포에서 반출된 백미 가격의 시가는 8.48엔이 되어 인천항에서 일본상인이 수출하는 가격과 큰 차이가 없다. 註109) 이상의 가격은 순전히 조선상인의 무곡에 의한다고 가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실질적 가격 격차란 인천항으로 곡물을 수송하는데 드는 경비와 곡물상인의 이윤을 제외하면 거의 없는 셈이 되고 국내 각지역의 미가는 일본미가를 반영하는 개항장의 미가에 접근하는 수준이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리고 청주의 미가와 관련해 한 가지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전통적으로 청주가 비교된 지역 중에서 상대적으로 더 도시적 성격을 띠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인접 지역보다 낮다는 점이다. 이는 이 시기 미가가 국내적 요인에 의해서보다 곡물수출과 관련하여 결정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한다. 이같은 곡물의 반출과정에서 일본상인이 행상을 하거나 자국선박을 이용하면 유통경로를 줄여 좀더 많은 상업이윤을 얻을 수 있었으므로 일본상인의 행상은 계속 증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표16〉일본(大阪) 미가와 조선수출 미가의 가격대비(石當)
연도일본미가(엔)수출가격(엔)수출량(엔)
1877 

1878 

1879 

1880 

1881 

1882 

1883 

1884 

1885 

1886 

1887 

1888 

1889 

1890 

1891 

1892 

1893 

1894 

1895 

1896 

1897 

1898 

1899 

1900 

1901 

1902 

1903 

1904 
5.18 

5.70 

7.85 

9.69 

9.40 

7.90 

6.14 

5.13 

5.82 

5.31 

4.92 

4.59 

5.71 

8.33 

7.02 

7.48 

7.27 

8.40 

9.00 

9.82 

11.33 

11.81 

9.71 

10.79 

11.63 

12.19 

13.60 

13.00
4.00 

3.51 

4.18 

5.30 

4.99 

4.90 

4.84 

4.56 

3.99 

3.61 

3.33 

3.39 

5.62 

5.82 

4.90 

5.12 

5.40 

6.51 

6.05 

6.92 

7.99 

10.57 

7.50 

7.91 

7.55 

9.29 

10.18 

10.38
474 

13,193 

70,635 

93,288 

45,077 

2,721 

7,464 

43 

3,933 

3,382 

27,036 

6,426 

13,811 

349,866 

371,204 

195,040 

68,031 

150,496 

305,196 

906,585 

1,738,331 

652,402 

472,321 

1,145,805 

1,388,783 

948,008 

1,037,361 

313,383
평균8.386.01 
출전 : 일본 미가는 中澤辨次郞, 『日本價變動史』. 수출 미가는 吉野誠, 「朝鮮開國後の穀物輸入について」, 『朝鮮史硏究會論文集』 12, 1975에서 작성.

조선에서의 곡물수출은 기본적으로 양국간의 가격차이를 이용한 것이었다. 〈표 16〉은 조선미의 수출지인 일본 대판당도大阪堂島의 미가와 조선에서의 전체수출액에서 산출한 수출미가를 나타낸 것이다. 1894년까지는 일본의 미가가 조선미가의 1.46배, 1895~1904년 1.35배로 후기로 갈수록 그 차이가 줄어들며 조선의 미가도 일본미가에 접근하고 있었다. 그리고 양국미가는 개항전시기를 통해 1 석당 평균 2.37엔 정도의 차이가 있다.
물론 이 금액이 모두 일본무역상의 손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일본까지의 운송비용 역시 고려해야 한다.
1885년 전반의 자료에 의하면 인천에서 일본 대판까지 수송비용은 석당 원가 3엔에 운임 60전, 해관세 15전, 개항장외에서의 해관세 18전, 잡비 15전, 포장비 20전으로 모두 1원 18전 정도가 들었다. 註110) 1887년 12월 원산항에서는 대두 석당 원가 2엔 56전에 포장비 20전, 운임 35전, 관세 11전 등 경비가 66전이 들어 대판시장까지 운송할 때 석당 3원 22전이 되었다. 당시 대판시장의 대두가격이 3엔 50전이어서 석당 28전의 이익이 남았다고 한다. 註111) 1897년 인천에서는 “대판까지 미 1석을 운송하는 데 포장비·선적임금·해관세·운임·보험료·하환荷換할인율 기타 일체의 제 항목의 합계는 1엔 50전을 요한다고 한다.” 註112) 1902년 군산의 경우 대판까지 수송에 두량·포장·운반비·기선운임·관세 등을 합산하면 1석당 평균 2엔 20전을 요한다고 했다. 註113) 군산은 다른 지역보다 높은 비용을 지불했는데, 미가가 인천보다 상대적으로 낮아 운임지불에 따르는 실제손실은 적었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수출비용을 앞서의 비용조건을 고려하여 석당 1엔 전후로 잡으면 조선미의 수출은 1석당 1엔 정도의 이익이 남았던 것이다. 註114)
이처럼 이 시기의 미가는 개항장간, 내륙지방과 개항장간 가격에는 가격차이가 있었다. 개항장의 경우 배후지에 따라 가격차이가 났고 특히 화폐유통권이 분리되어 있는 바람에 한전으로 표시된 가격 사이에는 그 격차가 더욱 심했다. 개항장 외의 지역간에도 역시 상호간 가격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후기로 갈수록 일본상인의 행상이 증가하면서 개항장과 비개항장지역 간의 차이도 줄어들고 조선의 미가는 일본미가 수준에 상당한 정도로 접근해 갔던 것이다.

2. 대일곡물수출의 역사적 성격
일본상인에 의한 곡물수출은 일본자본주의의 내재적 요구에 의한 것이었지만, 이미 조선후기 이래 전국적으로 곡물시장이 광범하게 형성되고 있던 조선으로서는 곡물유통구조의 재편이 강요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수출이 증가함에 따라 그 영향도 심각했다. 여기서는 지금까지의 살펴본 곡물유통구조의 변화와 방곡령의 실시원인을 간단히 요약하고 곡물수출이 미친 영향을 중심으로 조선사회의 입장에서 곡물수출의 의미를 밝혀 보려고 한다.
조선후기 이래 상품화폐경제의 발전과 함께 조선사회에도 전국적으로 곡물시장이 형성되고 있었다. 지주·부농·곡물상인들은 이를 대상으로 무곡행위를 하고 부를 축적했다. 개항은 이들에게 새로운 시장을 제공했
 
다. 일본상인은 1884년 이전까지만 해도 개항장 밖으로 행상이 금지되어 있어 개항장부근이나 연해지역에서 곡물상인들과 밀무역을 함으로써 산지에서 개항장에 이르는 유통경로를 축약시키고 보다 많은 곡물을 염가로 확보하려 했다. 그 뒤 일본은 조약의 개정과 그 시행과정에서 조선측에 계속 압력을 가해 일본상인의 개항장외 침투을 강화해 갔다. 일본상인은 행상을 통해 종래 개항장객주 등 중간상인을 통하던 유통경로를 줄이며 직접 산지의 상인에게서 곡물을 매집하고 일본선박을 동원해 미개항장까지 침투하며 곡물을 매입하고 있었다. 그리고 곡물구입을 위해 산지나 개항장의 조선상인에게 자금을 선대先貸함으로써 조선상인을 예속시켜 갔다. 일본상인의 행상은 초기에는 각 포구나 장시에 존재하던 봉건적 상업세를 물기도 했지만 일본측의 항의로 점차 수세에서 면제되어 갔고, 따라서 여전히 각종 잡세의 수탈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조선상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유리한 입장에서 상권을 주도할 수 있었다.
청일전쟁 이후 목포·군산 등이 잇달아 개항장으로 열리면서 종래 부산·원산·인천을 중심으로 하던 곡물수출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새로 열린 개항장들은 배후지에 미곡산지를 두고 있어 조선의 곡물시장을 일본시장과 전면적으로 대면하게 했던 것이다. 이 시기 일본상인은 자금선대를 보편화하면서 조선의 상인조직을 흡수해가며 유통과정을 재편해 나가고 있었다. 또한 입도선매의 방식으로 농민에게 궁박판매를 강요함으로써 농민의 몰락을 가속화시켰다. 그리하여 유통의 영역을 넘어 토지에 직접 투자하는 단초를 열며 생산과정 자체를 장악하려 했던 것이다. 갑오개혁 이후의 조세의 전면적 금납화는 일본상인의 유통과정 장악과 짝해서 곡물의 상품화를 재촉하고 있었다. 특히 외획제도의 도입으로 공전을 이용한 관료나 외획차인 등 상인, 그리고 1903년 이후에는 내장원의 무곡활동이 가능해지면서 그 현상은 심화되었다.
이 같은 사정에서 곡물의 유통을 행정의 강제력으로 막는 방곡령이 발생하게 되었다. 원래 방곡은 행정의 강제력으로 시장기능을 마비시키는 전근대적 경제정책이었다. 상품화가 고도로 진전되면 소멸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시기 중앙정부가 외국미의 수입이나 전운사轉運使·검세관檢稅官 등의 무곡으로 서울지역의 곡가를 조절하는데 반해, 환곡이나 진휼이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지역의 지방관의 입장에서 선택할 수 있는 곡가안정의 방법은 방곡밖에 없었다. 따라서 개항 이후 100건 이상 발생했던 방곡은 대부분이 중앙정부의 곡물가격정책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지방관이 조선후기 이래 관습화된 정책으로 시행했던 것이었고 실시된 지역 내에서는 나름대로 곡가안정이라는 기능을 수행했다. 그리고 그 대상은 종래의 계절적·지역적 가격차이를 이용해 무곡하던 조선인 지주·부농이나 곡물상인에서 새로이 곡물유통과정에 침투하여 수출곡물의 유통을 장악하던 일본상인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결국 개항 이후의 방곡령은 중앙정부가 외압으로 국내시장을 보호하지 못하는 가운데 일제의 경제적 침탈과 직접 대면하게 된 지역적 곡물시장권의 대항이었던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이처럼 일본상인에 의한 곡물수출은 유통구조를 변용시켰고, 이에 대한 조선인의 대응으로서 방곡령사건을 유발했다. 곡물수출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에 대한 기왕의 논의는 이 관계 연구가 주로 일본학자에 의해 이루어진 탓으로 대개 일본자본주의의 발전과정에서의 의의를 평가한 것이 많았고, 조선사회의 입장에서 그 성격을 제대로 밝히지는 못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살펴본 바를 바탕으로 개항기 곡물수출의 역사적 성격을 조선사회의 입장에서 규정해보고자 한다.

일본으로 강제운송되는 미곡(1920년대)


개항기의 조선미의 산출고는 대체로 평년작 1,000만 석 전후로 잡을 수 있다. 개항기의 조선 전체 미곡 총산출량에 대해서 정확한 수치는 찾기 어렵다. 일본인의 조사에 대강의 수치를 산출한 자료가 있는데 1,500만 석, 또는 800만석 내외라고 한다. 1,500만석은 1880년대 중반 조선인이 산출한 기록이라 하고 800만 석은 1890년대 중반 일본인의 추정치다. 그 차이가 2배나 되어서 한 수치를 선택하기 어렵다. 註115) 1910년 일제강점 이후의 기록에 의하면 1910년 수확량은 10,406,000석이고, 1911년 11,568,000석, 1912년 10,865,000석 정도라고 한다. 이 중 1910년은 하계에 풍수해가 있고 병충해도 상당했다고 하고, 1911년은 7월중 호우에 의한 피해가 다소 있었지만 그뒤 천후天候가 순조로왔다고 한다. 1912년은 남한 일대에 한해·충해·수해가 있었다고 한다. 註116) 따라서 평년작은 1911년의 수치 정도일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 시기는 개항기보다 다소 생산력의 발전이 있었음을 감안하면 개항기의 전국 미생산고는 평년작으로 대개 1,000만 석 정도라고 볼 수 있다. 각도별 산출량은 “전라·경상 2도가 가장 으뜸 가는 데 그 산액이 전국 47/100에 이르고, 충청·황해·경기의 3도가 그 다음으로 40/100을 점한다. 평안·강원·함경의 삼도는 토질이 척박하고 개간되지 않은 땅이 많아 그 산출은 겨우 13/100에 불과하다”라고 한다. 註117) 기왕의 연구에 의하면 ‘합방’ 전후 상품화가 가능한 잉여가 약 42%였고, 이의 1~2할이 수출되었다고 한다. 註118)
수출이 가장 많이 되던 1897년의 수출량이 70만석 정도였다. 그러므로 아무리 많이 잡아도 전체의 7%에 불과했고, 평균 3~4% 정도였다. 상품화된 미곡을 대상으로 하면 그 비율은 1~2할 정도가 된다. 이 같은 실정에서 단순히 양적 측면만 고려한다면 곡물수출이 조선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과소평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의 사정은 달랐다.
우선 가장 중요한 점은 수출이 증가하면서 일본미가의 수준에 조선미가가 전반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개항장의 배후지에 한정되지 않고 거의 일본상인의 출입이 없는 내륙지방까지 마찬가지 현상을 나타냈다. 물론 지역적으로는 미작지대, 계급적으로는 부농 이상의 수준이 되어야 쌀을 상식常食했겠지만, 註119) 미가의 등귀는 다른 곡물의 가격이나 기타 생필품의 등귀도 함께 동반했고 결과적으로는 곡물을 구매하여 생계를 잇던 빈농이나 무전농민, 그리고 도시의 빈민에게는 몰락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註120)
일본미가의 등귀에 영향을 받아 곡가가 급등할 때는 곡물유통이 개항장으로 집중되면서 국내 곡물시장에 공급부족 현상을 보이기도 했다. 1898년 목포항의 보고에 의하면, “목하目下와 같은 미가의 등귀는 아마도 한국에서는 천고에 일찍이 없던 예로써 작년의 농황은 전년부터 계속 풍년이었다. 풍년이 이어지는 작황에서는 통상 비상하게 싼 가격으로 매매되어야 할 시절인데도 불구하고” 일본의 미가가 폭등해 1석에 14여 엔, 목포에서 현미 11여 엔이 되는 바람에 ‘미곡의 반출이 미증유의 성황’을 이루었고 ‘부읍府邑의 중인中人이상 유식신사遊食紳士’도 반미飯米에 지장이 있는 등 계속된 풍작에도 굶주림에 빠진다고 했다. 註121) 1899년 『독립신문』의 일본상인이 행상으로 곡물을 대량으로 유출하는 바람에 “흉년이 아니건만 곡가는 고등하여 실업한 백성들이 더구나 살 수가 없게 되니 이것도 또한 개화인가”하는 개화비판의 논리도 이 같은 사정에서 나온 것이었다. 註122)
양적 측면에서도 지역에 따라서는 7% 이상의 영향을 주었다. 특히 미곡의 대규모 소비지였던 서울과 대일수출의 상당부분을 담당했던 인천항은 지리적으로도 인접해 있어 인천항의 곡물수출은 서울의 곡물수급에 직접적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다.
이미 조선후기 이래 지주소작제의 진전과 부농의 성장과정에서 농촌사회내부에 영세소·빈농을 비롯하여 무전농민을 대량으로 배출했고, 이 과정에서 토지에서 축출된 몰락농민은 농촌에서 농업노동자가 되거나 유민이 되어 도시나 광산지역에 흡수되고 있었다. 토지에서 유리되어 식량자급이 불가능하게 된 이들 몰락농민은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여 곡물을 구입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노동의 댓가로 곡물을 받기도 했으나 화폐경제의 발전에 따라 화폐를 임금으로 받아 곡물을 매입하기도 했다. 이에따라 전국적으로 곡물의 출하장시가 확대되고 도시지역에는 대규모의 곡물수요가 있었다. 이러한 곡물시장을 대상으로 지주·부농·곡물상인들은 계절적·지역적 가격 차이를 이용하여 곡물을 상품화하여 갔다. 註123)
대규모의 곡물수요가 있는 곳은 역시 도시지역이었고, 특히 서울의 곡물수요는 상당량이 이들에 의한 무곡으로 충족되고 있었다. 이 시기 서울의 곡물 수요가 얼마나 되었는지 분명히 확인할 수는 없지만 이를 유추할 수 있는 사료는 몇 가지 있다.

① 1783년정조 7년의 자료에 의하면, 서울인구를 20여만으로 보고 하루에 2승씩 소비한다고 계산하면 1년에 100만석의 쌀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런데 조세로 들어오는 미곡이 모두 20만여 석 정도, 지주의 소작미가 20만석 정도여서 나머지는 60만석은 곡물상인의 무곡貿穀에 의해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註124)
② 19세기 후반 유길준의 추산에 의하면, 서울인구가 40만인데 그 중 5만의 유아를 제외하고 또 10만의 미성년소비량이 성인의 반이므로 실제로는 30만명이 하루 1승정도 소비하는 셈이라고 본다. 도합 하루에 3,000각斛 정도로 1년에 약 108만곡이었고 기타 술·떡·엿을 빚는데 사용하는 것까지 합하면 1년에 대강 150만곡 정도가 소요된다고 했다. 그리고 요록料綠·공미貢米·무곡貿穀·타打租로 각각 3개월씩 유지한다고 한다. 註125)

두 자료는 인구 통계에서 각각 ① 20만 명, ② 40만 명, 하루 소비량 ①2승, ② 1승, 그리고 1년 전체 소비량에서 ① 100만 석, ② 150만 곡의 차이를 보인다. 이 중 1년 전체 소비량은 도량형 적용의 차이일 뿐 실제량은 같다. 즉 ①의 자료는 1석=15두로 환산한 것이고, ②의 자료는 1곡=10두로 환산했으므로 두로 하면 모두 1,500만 두가 된다. 이것을 현재의 도량형으로 환산하면 얼마가 될 것인지는 정확히 추산하기는 어렵지만 갑오 전후 호조보관 도량형기의 용량이 조선 1승=일본 0.36승 정도이므로 이에 기준해 환산하면, 대개 일본석 54만석 정도가 된다. 註126)
이 가운데 각종 조세로 들어오는 것은 ①이 20만 석300만두, ②는 37만 5천 곡375만두 이라 한다. 이를 다시 일본석으로 환산하면 각각 일본석 ① 10만 8천석, ② 16만 2천석이 된다. 그런데 1890년대 중반 일본인의 조사에는 “공미貢米는 종래 서남 각도에서 경성으로 수송되는 것이 매년 35~36만 표俵, 수세미는 5두 5승으로 1표라 한다. 그 중 5승은 선가미船價米로 운송업자에게 준다”이고 일본석으로는 18~19만석 사이라고 하는데, 선가미 1/10을 제하면 대개 16~17만석이 된다. 註127) 그러므로 일단 공미에 관한 한 ②의 유길준의 추산과 일본인의 조사자료는 상당한 정도로 일치한다.
문제는 무곡인데 ①은 전체소비량의 60%, ②는 25%다. 조세금납화의 계속적 진전으로 오히려 조세미는 줄어들고 후기로 갈수록 무곡에 의해 조달되는 양이 많았으리라고 보지만 유길준의 기록은 오히려 반대로 나타난다. 실제로 갑오개혁으로 전면적 조세금납화가 취해지기 직전 중앙정부의 조세수입 총액 가운데 금납화의 비율은 약 59%에 달했다. 註128) 게다가 유길준이 구분한 요록料綠도 역시 공미, 곧 조세미에서 조달될 수밖에 없음을 감안하면 유길준의 기록은 그대로 믿기 어렵다. 따라서 ①자료와 당시 현실적 여건을 감안해 볼 때 요록과 공미가 각각 3개월씩의 소요량을 맡았기보다는 전체적으로 조세미의 수요로 3개월=25% 정도를 지탱했고, 적어도 전체 소요량의 50% 이상이 무곡에 의해 조달되었다고 추정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50% 정도로 가정하면 서울에서 무곡에 의해 조달되는 쌀의 양은 위에서 환산한 대로는 일본석 27만석, ① 자료까지 고려해 본다면 대체적인 추정량은 30만 석 전후가 된다. 1894년의 금납화 이후로는 무곡에 의존하는 양이 더욱 증가했지만 외획으로 들어오는 양도 적지 않아 많아도 30만 석을 크게 넘지 않았다고 본다.
이처럼 당시 몇 가지 자료로 추산한 서울의 곡물수요는 대략 54만 석 정도이고 이 중 무곡에 의해 조달되던 양은 30만 석 전후로 보인다.
인천항의 경우 1895년에서 1904년간의 국외수출량은, 수출이 많은 해는 30만 석, 흉작으로 수출이 예외적으로 감소하거나 전쟁 등으로 국내수요가 증가하는 해를 제외하면(1904년은 러일전쟁의 군량미로 사용) 평균적으로 15만석 정도가 수출되고 있었다 註.129) 등귀했다. 수출이 일반적으로 진행되던 해에도 상당량의 미·속粟·서黍가 국외에서 수입되고 있던 사정은 그 때문이었다. 수입곡물은 다른 지역에 이송되지 않는, 대부분 인천항의 순수입액으로 서울을 비롯한 경인지방에 방매되었다. 이 과정은 양질의 조선미 수출과 외국 잡곡의 도입이라는 형태로 나타나 이 지역에 한정해서 본다면 부분적으로는 기아수출의 양상을 나타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곡물수출은 시장의 확대를 의미한다. 시장의 확대는 상품화 주도층의 경제력을 높여 구매력을 증진시키고 나아가 상품화폐경제의 전반적 발전을 가져온다. 외국과의 무역상품으로 등장하지 않으나 국내적 상품유통에서는 중요한 상품이었던 명태와 마포의 예를 들면, 명태는 1880년대 중엽에 5만엔 정도에 불과한 원산의 이출액이 1890년대에 30만엔 내외, 마포는 1885년 6만엔대에서 1890년대 초 한때 100만엔에 가까운 수준에 이르렀다. 註130) 이 같은 유통량의 증대는 기선이라는 근대적 운송수단의 발달로 육로로 수송되던 것이 일부 이전된 탓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조선사회 내부의 상품생산과 수요가 확대되고 있었음도 함께 의미한다. 즉 대외무역 특히 곡물과 금 등의 대량수출로 전반적으로 조선사회의 상품 구매력이 증진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간작間作으로도 생산이 가능하던 대두의 수출 증대는 농민의 잉여획득의 주요 원천이었다. 註131)
대외무역의 확대로 인한 상품화폐경제의 전반적 발전과 함께 농민층에게도 잉여축적의 기회가 주어졌고, 적어도 농민전쟁 이전까지는 농민층의 성장 가능성도 실제로 존재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 농민의 존재형태는 역시 지주-소작 관계로 규정받고 있어 1890년대 이후 미곡수출이 본격화하면서 상품화는 지주나 관료가 주도해 갔고 그 과정에서의 봉건수탈과 지주제 강화는 오히려 농민의 성장을 저애하는 요인으로 등장하고 있었다. 따라서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으로 인한 잉여축적의 주도권을 놓고 봉건지주세력과 농민층은 상호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1894년의 농민전쟁은 이 같은 조건에서 잉여축적을 실현하려는 농민층의 요구가 폭발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시기 곡물수출로 대표되는 대외무역은 일본자본주의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본의 원시적 축적과 산업혁명을 도우는 셈이었다. 반면 조선사회에는 지주권력의 재강화와 농민층의 상대적 몰락으로 귀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