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제4장 일본의 경제침략과 유통구조의 변화, 상품유통과정의 재편/제2권 개항 이후 일제의 침략

몽유도원 2013. 1. 11. 11:28

제4장 일본의 경제침략과 유통구조의 변화


대일무역의 역사적 배경

일본상인의 유통과정 침투(1876~1894)

상품유통과정의 재편(1895~1904)


3. 상품유통과정의 재편(1895~1904)

1. 일본상인의 유통과정 재편
청일전쟁 이후 곡물의 수출은 대개 대일총수출액의 80%이상을 차지하여 “한일 양국의 무역의 소장은 미곡류의 추세여하에 귀착된다”는 정도까지 이르게 되었다. 註115) 그러나 이같은 곡물의 대량유출이 이루어지는 반면, 1898년에는 청에서, 註116) 1901년에는 안남미가 수만석 인천항에 수입되는 등 註117) 적지 않은 외국미가 수입되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한국지』에서는 “일본상인들이 입도선매까지 해 가며 할 수 있는 한 모든 곡물을 서둘러 일본으로 수출해 간 탓”이라고 하여 자금의 선대에 의한 일본상인의 유통과정지배를 지적했다. 註118)
종래 부산·원산·인천을 중심으로 하던 곡물수출은 1897년 진남포·목포, 1898년 평양, 1899년 군산·마산포·성진이 개항되면서 더욱 세분되어 개항장을 통한 곡물유출이 심화되고 있었다. 註119) 진남포의 경우 쌀의 “산출 지방은 황해도 안악·재령·봉산이 가장 중요해 전액의 7할은 이 지방에서 나오는 것”이었고, 註120) 주요산지는 대부분 간행이정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註121) 1904년의 기록에는 황주도 포함시킨다. “평안도도 역시 박천·선천과 그 북방 일원의 옥야沃野가 미곡의 산지로 추수시에 이르면, 매년 당지의 본방상인이 이 지역에 출장하고 매수의 예약을 한다. 그 해와 다음해 봄부터 여름까지 해안에 면한 지방에서 점차 서해안을 따라 배로써 당지로 그 곡물을 회송한다”고 한다. 註122)
진남포는 상품유통에서 인천항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는데 기선을 이용함으로써 해로의 험지로 일컬어지는 황해도 장산곶도 자유로이 통행할 수 있어 바람이라도 있으면 운항을 못하는 조선 선박보다 훨씬 안정적으로 유통을 장악할 수 있었다. 註123)
목포는 영산강의 수운을 바탕으로 전라도지역의 유통중심지였다. 그 중 수출미는 동진미·금강미·나주미 순으로 많았다. 註124) 이중 나주미는 현미 중에 벼가 많을 경우 3할 5푼 남짓 혼합되어 시세가 항상 최저위였다. 동진미는 건조한 현미에 물을 뿌려 팽창시키고 두량을 늘리는 바람에 시세가 항상 중위였고, 금강미의 미질이 상위였다고 한다.
군산은 금강의 하구에 위치해서 충청도와 전라북도 일대의 최요지로 조선후기 이래 전국 3대 시장 중 하나이던 강경포의 유통권을 흡수했다. 註125) 군산 출하 미곡의 유통경로와 그 양은 다음과 같다. ① 수륙 양로에서 한번 강경에 모여 강경의 한상의 손에 의해 오는 것50%, ② 강경 상류의 각 포구에서 강경을 거치지 않고 직접 오는 것15%, ③ 강경 하류의 연안에 위치한 각 포구에서 오는 것15%, ④ 전주 방면에서 육로로 사람이나 말등에 실어서 오는 것15%, ⑤ 부안·만경의 양강에서 해로를 경유하여 오는 것5% 그중에서도 금강 상류 공주지방에서 오는 것이 가량佳良한 것이 많고 그 하류 강경포와 군산간의 포구에서 오는 것은 수기미水氣米라고 해서 고의로 수분을 함유한 조악품이었다고 한다. 콩의 주산지는 전라도 부강지방으로 출하량은 충청도가 많고 전라도는 적었다. 註126)
마산은 “원래 본항은 경상남도의 연해 중앙에 위치하고 동북은 삼남지방의 하나라고 하는 미곡의 생산지인 낙동강 우안右岸일대를 배후로 하고 그 가장 가까운 강안은 겨우 5~6리로 통한다. 서남은 진주지방과 전라도를 경계로 한 섬진강유역이 있는 미곡의 생산지가 마산포의 상업구역에 포함된다. 이들 지방에서 공급되는 미는 대략 10만석 내지 15만석에 달하고 이와 상응하는 잡곡이 있는 … 소위 사통오달의 땅”으로 일본인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註127) 함경도 성진은 대두가 수출품의 대종을 이루었다. 註128) “당항부근 산지의 품질로는 단천이 최량, 단천 대두는 한국중 제 1위, 다음은 명천·경성·길주이다. 그 중 길주가 다량의 산출이지만 그 결점은 세립細粒으로 간혹 흑백청색을 섞어 타산에 비해 1석에 2~3전 저렴”하다고 한다.
이 시기 일본상인의 개항장 밖으로의 행상은 구애를 받지 않고 있었다. 1894년 이후 호조발급이 일본영사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데다가 개항장이 1897년 이후 추가로 열림으로써 주요 곡물생산지는 대부분 개항장의 간행이정40km 안에 포함되어 일본상인의 곡물매입을 저애할 근거가 없었던 것이다. 1897년 부산항에서 호조를 발급받은 일본인은 138명이었는데 그 중 행상은 108명이었지만, “당항과 거래상 가장 관계가 많은 김해·마산포·창원·기장·양산·구포·삼랑은 모두 간행이정 내에 있어 특별히 통행권을 받지 않는다. 이들 각시장에 행상하는 자가 수백인으로 안다”고 한다. 오히려 간행이정 내의 행상이 호조발급자보다 많았던 것이다. 註129)
더구나 청일전쟁 이전 시기에는 각 지역에서 수세사건에 연루되어 일부 상업세를 수취 당하기도 했지만, 계속적인 일본측의 항의로 여전히 각종 잡세의 중압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조선상인과는 달리 수세에서 면제되고 있어 상권 경쟁에서도 상대적 우위에 설 수 있었다. 그 상리의 정도를 보면 한인이 취급하는 경우 수입품에서는 그 매입에서 일본 상인 때문에 몇 곱의 이익을 삭감 당하는 데다가 낙동강을 올라 올 때 다소의 과세를 징수 당하고, 또 영업중 관리들로부터 압제적 대부를 요구 당해 그 대금은 대개 떼이게 되는 손해가 있다. 수출품의 판매에 대해서는 본국상인에 비할 때 비교적 다소의 편리가 없지 않으나 이 역시 강운때 세금을 징수 당하고 부산에서 본국상인에 매도할 때 중매인의 손을 거치기 때문에 다시 그 이익이 삭감되거나 매도가격을 떼이는 결점이 있다. 이에 반해 본국상인은 수출입 모두 낙동강안의 징세에 봉착함이 없고, 또 수출품 취급자는 이를 본국으로 직접 수출하거나 상응하는 시가로서 직접 무역상에 매도하는 편의를 갖는다. 또한 그 수입품은 직접 이를 본국에서 받는데다가 영업 중 한인과 같이 일체의 박해적인 잡비를 요하지 않는다. 註130)
일본상인들 경쟁도 치열하여 부산에서는 “일소점一小店의 백미상도 내지농촌에 진입하여 서로 시세를 높여 극히 박리의 상법을 쓰는”정도였다. 註131) 또, 1904년 4월 전라북도에서 상납금으로 서울에 무곡하려던 검세관 백남신白南信은 내장원에 낸 보고서에서 “미즉작종米則昨終 일본인쟁무지치日本人爭貿之致로 택무극난擇貿極難”이라고 하여 일본상인의 경쟁적인 곡물매집현상 때문에 곡물구입이 어렵다고 했다. 註132)
일본상인은 앞 시기와 마찬가지로 곡물의 교역을 위하여 자금을 선대하고 있었다. 1899년 『독립신문』의 기사에는,

금년은 별노히 겸년도 아니엇마난 각국 샹민들이 은진군 론산 강경 량포에셔 무곡들을 대단히 하난 으로 곡가가 샹업시 고등하야… 곡식이 업셔셔 를 못하난 고로 각국 사들이 각 동리로 니면셔 과 콩갑들을 미리 몬져 논하 주고 일변 미를 로 슈운하여 내보낸더라 註133)

고 하여 외국상인들이 경쟁적인 자금선대로 곡물을 매집하는 사정을 말하고 있다. 이 경우 외국상인들은 당연히 일본상인이었을 것이다.
곡물매입을 위해 조선상인에게 자금선대를 하는 것은 이미 이 시기에는 보편화되어 있었다. 1897년 개항되는 진남포의 경우에도 개항 직후부터 곡물매입은 자금의 선대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진남포에서의 곡물매입의 방법은 통상 2가지였는데, ① 집산지인 평양 한인 객주에게 자금을 선대하여 매입을 부탁하고 석당 일정한 구전을 지불하거나, ② 바로 산지에 들어가 지방 객주 등 확실한 자에게 부탁하여 선대금을 지불하고 5俵나 10俵씩 매집하는 방법을 썼다고 한다. 註134) 집산지이든 산지이든 상인에 대한 자금의 선대는 일반적 현상이었던 것이다. 자본력이 빈약한 조선상인의 입장에서도 하주를 끌어 들이기 위해 자금이 필요했고 그 때문에 일본상인에게 자금선대를 요구하기도 했다. 註135)
물론 이 시기까지는 일본상인이 “내지에 들어가서 곡물 및 기타 당국산품의 대매매를 하지 않고, 헛되이 한인이 개항장 부근으로 가져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여전히 주요한 곡물매입방식이었다. 註136) 일본영사는 행상의 부진 이유를 다음과 같이 들었다. ① 당국내지의 도로는 험악하여 왕래운반에 비상한 출자를 요한다는 것, ② 내지의 상인·농민은 선금 또는 대월貸越을 하지 않으면 거래를 좋아하지 않아 다액의 자금을 요한다는 것, ③ 당국은 소농 뿐이기 때문에 한 곳에서 곡류룰 매집하기 곤란하다는 것, ④ 매입지에서 개항장으로 수출하는데 시일이 많이 소요되기 때문에 상기商機를 놓쳐 손해를 초래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중 ①과 ④는 교통수단의 문제여서 완전히 해소 되는 것은 철도개설 이후이다. ②와 ③은 자금력이 약한 일본상인의 경우를 지칭하는 것이어서 일반적 무역상은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 ④의 경우도 자금선대로 출하기일을 얼마든지 조절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보아 자금선대가 보편화되는 이 시기에는 자금력이 풍부한 일본무역상의 경우 행상의 부진과는 무관하게 수출곡물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당시에도 개항장객주는 일정하게 상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1890년대 말 부산의 경우에도 자금선대는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것이었지만 여전히 개항장객주가 곡물유통에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한인객주韓人客主의 손에서 매수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들 객주는 낙동강 하구의 엄포嚴浦·온안溫顔·하단下端·원동院洞2리 내지 15리의 각 요지에서 상류지방에서 내려오는 한선韓船의 적재화물積載貨物을 인수하고 당항 상인과 매매계약을 맺는다. 그 외 무역상80여 명의 점원을 각산지에 보내 매수하거나 혹은 신용있는 한상인韓商人에게 상당한 자금을 대부하고 예약하여 매수한다. 또 무역상과 한인 사이에 중매상180여 명이 있는데 이 상인은 자력으로 또는 무역상에게 자금을 빌어 항상 여러 산출지에 여행하고 매수하여 오거나 매일 거류지로 한인이 수송하여 오는 소량의 미곡을 매집하여 무역상에게 전매하는 등 그 매집방법은 여러 관례慣例나 그 대략은 이와 같다” 註137)

개항장객주의 상권유지는 청일전쟁 이전과 마찬가지로 내장원을 비롯한 관권의 비호가 그 배경에 있었다. 註138) 인천의 신상회사紳商會社, 부산항 상무회사商務會社, 客主會議所로 개칭, 목포 상객주회商客主會, 土商會社로 개칭, 군산 순흥사順興社, 紳商會社로 개칭, 진남포의 진상회사紳商會社 등 객주가 조직한 상회소가 조직되었다. 조직의 간부들이 대개 관료였고, 내장원을 비롯한 관아에 상당한 상납금을 내고 있었다.
청일전쟁 이후의 일본인의 자금선대 방식이 그 이전과 다른 점은 앞에서 본대로 입도선매가 유행한다는 것이다. 『한국토지농산조사보고』에 의하면, 경상도와 전라도의 경우 일본상인이 곡물을 직접 농가에서 구입하거나 장시에서 구매하기도 했지만, 가장 흔히 쓰이는 방법은 객주를 경유하여 농가에 미리 자금을 대여하고 매집하는 것이었다. 註139) 경기도·충청도·강원도는 객주·중매인을 통하거나 농민에게서 직접 곡물을 매입하였다. 註140) 함경도·황해도·평안도에서는 조선상인에게 금품을 대부하거나 조선인을 고용하여 산지에 보내는 방법, 객주·농촌의 중매인 또는 그 지역의 유력자를 통하여 매입하였다. 註141)
이는 여름에 한전시세가 하락할 때 대금하고 수확할 때 매수하는 방법이었는데, 부산지방 같은 곳에서는 미수확기에 일본상인들이 산지의 객주를 통하거나 직접 농가에 대부하고 가을에 쌀을 징수하면 약 20전 정도를 싸게 살 수 있었다고 한다. 註142)
농민의 입장에서도 자금선대의 필요성은 있었다. 빈농들은 수확전의 식량부족을 선대받은 자금으로 해결했던 것이다. “농가의 금융이 요하는 시기는 5월경에서 9월경에 이르는 기간으로 하작의 파종후 농번기에는 모두 금융을 요한다. … 요컨대 자가소득의 식량이 점차 감소하고 더구나 농번기가 겹쳐 자가의 경작에 바빠 다른 노동을 할 여지가 없을 경우에 주로 자가식량을 위한 금융이 필요한 것이며, 비료·농구의 구입을 위해 특별히 자금을 요하는 것은 아니다.” 註143) 이 같은 입도선매에 의한 궁박판매는 조선인 사이에서도 있어 왔지만 일본상인에 의한 것은 이 시기에 들어서였다. 그 때문에 농민들은 통상 先金을 받지 않고서는 제아무리 작은 주문이라도 받아 들이려 하지 않아 일본상인들은 항상 일정한 액수의 금액을 대부해야만 했다고 한다. 註144) 자금의 선대에 의한 일본상인의 곡물매입으로 말미암아 곡물의 상품화는 더욱 촉진되어 갔고 자금의 선대로 곡물을 매입하는 방법은 외국인의 토지소유가 공인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토지소유에 필적하는 효과를 거두었던 것이다. 註145)
이 시기 일본인들은 직접 생산에도 침투하고 있었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인의 토지소유가 급증했지만, 그 이전에도 일본인중에는 부산이나 인천 등지에 거주하며 내륙의 경지를 구입하여 조선인에게 소작을 맡기는 경우가 있었다. 註146) 그래서 1898년 10월 19일 정부는 각도 관찰사에게 외국인의 개항장 10리 이외의 점포개설과 함께 토지매입을 막으라는 훈령을 다음과 같이 내렸다.

…만근挽近에 외국인이 조약을 불수不守고 내지각처에 전토가옥을 임의구매任意購買되 초야初也에 본국인을 부동符同야 차명성권借名成卷엿다가 종즉무소고기終則無所顧忌야 자작업주自作業主고 전토에 수확며 … 자玆에 훈령니 도즉관하각군到卽管下各郡에 저저신칙這這申飭야 각국인소매전토방옥各國人所買田土房屋을 본주本主로 환퇴還退거 혹타인或他人으로 전매轉買케 며 …. 註147)

외국인의 토지매입을 막는 정부의 훈령은 1899년, 註148) 1900년, 註149)1903년 註150)에도 계속 내려지고 있었다. 초기의 경우는 대개 정주한 청국상인이 대부분이었고 각 지방관의 보고도 가옥이나 토지를 가진 외국인을 청국인이라 했지만, 1900년대 이후는 일본인도 상당한 정도로 토지를 매입하고 있었다. 더구나 러일전쟁을 전후해 일본인의 토지소유는 공공연한 것이 되어 일본인이 토지매수의 청구만 하면 조선의 관리들은 조세영수증을 교부하고 소유를 인정하는 실정이었다. 註151)
조선에서 일본인의 토지매입은 일본에 비해 이점이 많았다. 우선 일본관서지방에 비해 매매가격이 약 10분의 1밖에 안되는데다가 토지등록의 비용이 들지 않고 조세도 저렴하며 지방세부과도 없는 등 일본에서의 토지매입에 비하면 크게 유리했다. 註152) 그리하여 일본인은 현금을 지급하거나, 돈을 빌려주고 저당유실로 토지를 빼앗는 방법으로 토지를 구입했다. 이 가운데 저당유실의 방법은 자본이 적은 사람이 사용하는 예가 많은데 금리가 매우 높아 적은 자본으로 수 년 후에는 취득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례는 사료에 자주 보인다다. 예를들면 1902년 일본상인 성육태城六太는 충청도 진잠군의 조종구에게 가옥·원림·전답의 문권을 담보로 당오전 10만 냥을 5분의 변리로 빌려 주었다가 갚지 못하자 토지를 차지하려 했다. 註154) 또 1905년 전북 군산지방의 경우 상전 1두락120평에 대하여 3관문5엔 40전을 월 1할의 이자로 빌려주고 14~15엔으로 받아 갚을 능력이 없어 저당유실이 되었다고 한다. 註155)
일본인의 토지매입은 특히 삼남지방에서 심했다. 전북 군산지방에서는 1901년 일본인의 매수지가 4,000여 정보나 되었다. 註156) 1903년 일본영사의 보고에 의하면, 군산지역의 “토지가 비옥하고 특히 지가의 비율이 저렴하여 지난 봄부터 아재류인我在留人 중 농업 기타의 목적으로 토지를 매입하는 자가 점점 증가한다. 거류지 외 10한리韓里, 우리 1리이내에 있는 도전稻田·노전蘆田·전田과 산지로 본방인일본인-필자의 소유로 돌아간 것이 대략 500여 정보에 이르고 계속 증가추세이다. 올 가을에 본방인의 소유전지에서 수확할 현미의 예상고는 약 2,000석 이상에 달한다”고 했다. 註157) 그리하여 1904년의 보고에는 군산지방에서 일본인의 투자액이 40여 만원에 달했고 경지의 소재도 18군에 걸치며 군산농사조합에 가맹한 일본지주가 60여 명에 이르는 실정이었다. 註158)
이처럼 청일전쟁 이후 일본상인은 자금선대를 보편화하면서 조선의 상인조직을 흡수해가며 유통과정을 재편해 나가고 있었다. 또한 입도선매의 방식으로 농민에게 궁박판매를 강요함으로써 농민의 몰락을 가속화시켰다. 그리하여 유통의 영역을 넘어 토지에 직접 투자하는 단초를 열며 생산과정 자체를 장악하려 했던 것이다.
2. 상품화의 진전
갑오개혁 이후 조세금납화의 전면적 실시로 조세로 들어오던 곡물은 상품화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종래 서울의 곡물수요에 조달되던 조세분량 만큼의 미곡은 무곡에 의해 조달되어야 했다. 따라서 금납화 실시와 함께 미곡확보를 위한 방안이 강구되어야 했다. 금납화를 실시한 갑오정권은 이를 위해 은행 설립을 추진했으나 설립되지 못하고, 미상회사1894년와 공동회사1895년로 하여금 공전의 수납과 미곡의 무천貿遷을 담당하게 했다. 물론 공전을 이용한 무곡은 일반상인에 의해서도 이루어졌다. 註159) 이 과정에서 “군수에 대하여 그 징수한 세금을 국고에 납입하기에 앞서 직접 제3자에게 지급하라는 탁지부 대신의 명령”이 내려지게 되고 이를 외획이라 했다. 註160) 제3자는 다음에 인용하는 『독립신문』의 기사에서 보듯이 통상 ‘외획차인’으로 불리었다. 지방관은 징수한 세금을 국고에 납입하기 전에 ‘차인’이라고 칭해지는 상인들을 이용하여 상행위를 시킨 후 국고에 납입토록 함으로써 취리했다고 한다. 註161)
이 외획과 차인의 이용으로 인한 상납금의 전용과 상납지체의 현상은 재정사정을 악화시키는 한 요인이 되었다. 1898년 모 참정대신의 발언을 실은 『독립신문』의 기사는 그러한 사정을 잘 보여준다.

… 각도 각군에 결젼과 호포젼이며 기외 각항 공랍을 탁지부에 진즉 샹랍 아니고 국고가 경갈케  은 모도 외획 셔 폐단이 긴 것이라 경향간에 모리들이 방이 샤욕심으로 비긔지 계를 내여 막즁 탁지부의 샹랍공젼들을 무란히 쥬쵹고 탁지부에셔 외획 훈령을 하 가지고 각도 각군에 나려가셔 돈을 지려 즉 각군슈들은 외획된 것을 도로혀 다히 넉이고 군 공젼들을 민간에 몬져 밧아 달니 리 고 외획죠 이리뎌리 쳔 야 즉시 주지 아니고  외획을 쟈탁야 군에셔도 진즉 샹랍을 아니고 외획챠인이 셜혹 어느 고을에셔 돈을 혹 즉시 드도 뎌의 쟝들 야 경년 텰셰고 샹랍은 진즉 아니니 …. 註162)

즉 각 지방관들이 외획을 빙자하여 공전을 먼저 거두어 달리 취리만 하며 즉시 외획차인에게 지급하지 않을 뿐더러 상납도 지체한다는 것이다. 외획차인들도 상납전을 받아도 상업상의 이익만 늘일 뿐 빨리 상납하지 않았다. 지방관은 외획을 빙자하여 전용한 상납전을 주로 곡물의 매입에 사용하고, 매입한 곡물을 곡가가 높은 개항장이나 서울에 옮겨 차액을 착복했다.
1898년 초 서울의 미가가 상승해서 탁지부에서 각도 각군의 상납전중 40만원을 외획하고 외획차인에게 무곡토록 한 예가 있었다. 註163) 그러나 각 지방관과 어사들이 먼저 상납전을 받아 각처에서 무곡하고 각 항구에 보내 외국인에게 방매하면서, 외획된 공전을 주지 않는 바람에 외획차인들이 탁지부에 외획을 청부받았던 공문을 반납했다. 註164) 1898년 12월 개항장에서 멀리 떨어진 경상도 상주의 군수도 상납전을 수세해 백성들에게서 강제로 쌀을 구입하고 윤선에 실어 인천으로 도박·방매했다고 한다. 註165) 같은 해 4월에는 각 지방관이 공전으로 경강京江에 무곡하여 이익을 남기려다가 청에서 쌀 5만석이 수입되는 바람에 곡가가 떨어져 곡물을 지방의 포구로 돌려 보낸 일도 있었다. 註166)
공전을 이용한 지방관의 무곡행위는 곡창지대에서 성행했는데 그 방법은 대개 다음과 같았다. 음력 8~9월경 세금을 받을 때 문서상에는 돈으로 받은 것으로 하고 민간에서는 쌀로 거두는데 이듬해 곡식이 귀할 때의 시가로 쳐서 당시 시가보다 몇 되씩 더 붙여 백성들로 하여금 운임까지 부담하게 하고 포구로 운반했다. 또한 초가을에 수세하여 심복을 각처에 보내 공전으로 무곡하는 경우도 있었다. 註167)
지방관은 외획제도의 일종으로 “지방의 징세금에 대하여 국고에 도착한 이정里程과 송납금액에 따라 운반비를 지급하는” 註168) 태가馱價까지도 착복하고 있었다. 1898년 경상도 흥해의 군수는 공전 4만 8천여 냥중 타가로 6천여 냥을 착복했다. 註169) 이 타가의 횡령은 수세한 엽전을 개항장의 일본상인들을 통해 은화나 지폐로 바꾸고 수송비를 절감하는 방법으로 가능했다. 註170) 더구나 일본화폐와의 가계加計차이는 일본화폐로 바꾸어 상납하는 것을 부추겼다. 1898년 부산의 일본영사관의 기록에는 일본 엔은円銀의 사용을 중지하면서 교환기일전에 일본인의 은행으로 가져올 것이 다액이라고 보았지만 실제로 교환되는 것이 적었다고 한다.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들었다.

당국정부에서 은화 1엔을 500문文으로 계산하여 상납금 등으로 경성에 송금하는 것이 많은데, 지난 7월에 본방 1엔 은화를 당국의 법화法貨로 간주하는 칙령에 근거한다. 지금 이 은화로 상납하는 사정을 탐문하니, 대개 한일 양국간의 화폐매매시세는 은화 1엔에 대해 한전 487문 내외로 상납금 1관문이 필요할 때 974문 내외로써 은화 2엔을 매입하고 그것을 상납하면 1관문에 26문 내외의 이익이 남기때문에 은화로 상납하는 것이 많다. 한전으로 상납하여 경성에 운반하는 것은 막대한 운반비를 요하므로 지방관은 상납한전을 은화로 교환하고 경성으로 운송상납하는 관습이 생겼다. 그 결과 당항 부근에서 은화는 경성으로 보내어 당지방의 유통고와 저장하는 자도 크게 감소했다. 이 역시 교환기한이 다가왔음에도 불구하고 한인 중 바꾸는 자가 적은 한 원인이다 註171)

공전으로 무곡하여 사리를 꾀하는 행위에는 지방관만이 아니라 이서배 등 중간수탈계층도 가담하고 있었다. 충주의 이방 손해정은 공전으로 곡식 6,000~7,000석을 무취하며, 註172) 북청지방대 중대장은 북청군에서 이획된 공전중 2,300냥으로 원산항에 무곡하려 했다. 註173) 물론 앞서 본대로 외획차인들도 공전으로 무곡하고 상행위를 했다. 『독립신문』에 의하면, 1898년 11월 서울의 부호 모는 모 협변을 끼고 탁지부에서 각도·각군 상납전을 그 전해과 같이 외획하여 무곡하려다가 탁지부가 거부했던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註174) 외획차인은 먼저 탁지부에 공전을 상납하고 해당 지방으로 내려가 무곡활동에 종사했다. 이 경우 당해 군에서도 공전을 굴려 그 이익을 챙기기 때문에 출급을 거부하기도 했다.
상납전을 이용한 무곡행위는 곡물 유출지역의 곡가를 등귀시켜 곡물을 구입하여 생계를 이어야했던 빈민층의 반발을 야기했다. 1899년 보령군에서는 군수의 공전을 이용한 무곡으로 말미암아 그 지역의 미가가 1두斗에 엽전 1냥 5전씩 하던 것이 2냥 1전으로 상승하여 빈민층의 불만을 사고 있었다. 註175) 1898년 황해도 해주에서는 장시에 곡식이 나오지 않자, 곡물을 구입하여 살던 백성 수백명이 서울서 외획차인으로 와서 무곡하던 자 1명과 해군 부민중 무곡하여 곡물을 감추어 둔 2인을 훈련원에서 죽이려다가 관찰사 김가진이 효유하여 무곡한 곡식을 시가대로 매매토록 함으로써 무마된 일이 있었다. 註176) 1901년 개성부윤의 보고에 의하면, 상민 7명을 압송한 일로 개성상인 수백 명이 등소하면서 전민廛民 박형정朴衡正이 재령군 공전을 외획하다가 손해본 것을 무고한 사람들에게 징수하려다가 일어난 일이라고 철시투쟁을 했다고 한다. 이 경우 박형정 역시 공전을 상업자금으로 사용했다. 註177)
이처럼 외획차인의 공전을 이용한 상행위나 지방관에게서 공전을 빌어쓰는 상인들의 상행위가 만연하면서 “전일 공전公錢은 다귀이포多歸吏逋러니 금일 공전은 진귀상포盡歸商逋”라고 했던 것이다. 註178) 그런데 공전은 조선상인의 상업자본으로만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각 군수가 조세로 징수하는 엽전은 마산 혹은 부산에 가지고 가서 지폐와 교환하지만 많은 경우는 군수에게서 이 엽전을 피아彼我 상인에게 대부하고 상인은 그것으로 미곡과 기타 물품을 구입하고 매각해서 일본화폐로상당하는 시세 군수에게 갚는다. 이는 쌍방에게 주는 이익이 적지 않아 당국 조세징수시에는 신용있는 아상인은 특약하여 다액의 한전을 용이하게 유용하는 편이다. 내지행상의 길에 역시 지폐를 휴대해도 군아에서 교환하는데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註179)라는 일본측의 기록은 공전이 일본상인의 곡물매입에 사용되고 있던 실정을 보여준다.
이같은 사정에서 공전을 이용한 무곡으로 치부하려는 시도는 끊임없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고, 1898년 전판서 김종한은 이미 1895년 외획이 금지된 미상회사와 같은 이름의 회사를 만들고 전국 각군의 결전을 모두 받아 각도 주요포구에서의 조선상인과 일본상인의 무곡을 다 막고 이 회사에서만 도무都貿하려고 기도하다 『황성신문』의 비판을 받고 있었다. 註180) 이미 갑오 이전에도 관료에 의한 무곡은 개항장의 미가를 지배하는 실정이었지만, 이 시기 금납화로 인한 공전의 전용은 곡물의 상품화를 가속화시키는 것이었다. 지방관의 이러한 상납전의 전용과 유용으로 말미암아 상납지체의 현상이 심했다. 김윤식은 1902년을 전후하여 5만냥 이상 건납愆納된 각읍 수령이 80여 인이며 이들은 정부의 독촉이 심하자 일본인에게 전당을 잡히고 빌리는 바람에 멀지 않아 가사家舍와 전답이 모두 일본인의 것이 될 형편이라고 한탄했다. 註181)
탁지부는 이 같은 상납지체와 개화정책수행에 소요되는 막대한 자금으로 말미암아 재정부족현 상이 심해 왕권을 배경으로 재정규모를 극대화하고 있던 내장원으로부터 자금을 차용하고 있었다. 1903년에는 내장원의 차용액을 상환하기 위해 탁지부에서는 1903년 결호전을 경상도·전라도 지방에서 내장원에 외획했다. 註182) 그뒤 1905년 외획이 폐지될 때까지 내장원은 탁지부에서 외획을 받아 공전을 이용한 상업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 내용은 주로 무곡활동이어서 내장원의 외획 역시 미곡상품화를 진전시키는 것이었다. 註183)
갑오개혁 이후의 조세의 전면적 금납화는 곡물의 상품화를 재촉하는 원인이 되었다. 특히 외획제도의 도입으로 공전을 이용한 관료나 외획차인 등 상인의 무곡활동이 가능해지면서 그 현상은 심화되었다. 공전은 자본이 부족한 상인에게 상업자본을 조달하는 기능도 했으나 일본상인 역시 지폐와의 가계 차이를 이용해 지방관에게서 공전을 빌어 쓸 수 있었다. 1903년이후는 내장원이 외획을 통한 무곡활동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