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제4장 일본의 경제침략과 유통구조의 변화, 대일무역의 역사적 배경/제2권 개항 이후 일제의 침략

몽유도원 2013. 1. 11. 09:47

제4장 일본의 경제침략과 유통구조의 변화


대일무역의 역사적 배경

일본상인의 유통과정 침투(1876~1894)

상품유통과정의 재편(1895~1904)


1. 대일무역의 역사적 배경


개항후 곡물수출이 증대하면서 종래 국내시장을 대상으로 하던 곡물유통구조는 바뀌어 갈 수밖에 없었다. 개항초기는 일본상인이 직접 개항장밖으로 나와 곡물을 구입할 수가 없었지만 1880년 후반이후 개항장밖으로의 일본인 행상이 본격화함에 따라 곡물수출도 일본상인이 주도해 갔다. 일본상인은 개항장이나 산지, 포구의 객주에게 자금을 선대하고 곡물을 구입해갔고 1895년 청일전쟁 이후의 단계에서는 입도선매의 방식으로 농민에게서 직접 구입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종래의 국내 곡물수급구조가 교란됨으로써 곡물유출지역에서는 지방관이 방곡령을 실시하고 곡물의 유출을 막으려고 했다.

이 장에서는 이 시기 일본으로의 곡물수출의 배경과 일본상인이 수출곡물을 확보하기 위해 유통과정에 침투하고 나아가 유통과정 자체를 바꾸어 가는 과정을 살피려 한다.

먼저 수출입무역의 구조와 관련해서 개항장에서의 곡물수출과정과 수출의 배경을 개관했다. 그리고 일본상인의 곡물유통과정 침투를 청일전쟁을 전후해서 두 시기로 나누어 보았다. 물론 개항초기 일본상인의 개항장 밖으로의 행상이 금지되어 있던 시기와 1880년대 후반이후 행상이 본 격화하는 시기도 구분이 가능하다. 청일전쟁이전의 일본상인의 곡물유통과정 침투는 밀무역과 합법적 행상의 두 가지 양상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개항초기의 경우 개항장외 침투는 전적으로 밀무역의 형태를 띠고 있어 이 시기는 밀무역에 포함시켜 서술했다. 행상이 인정된 시기에도 해관세를 내지 않으려는 밀무역형태도 있었다. 또 이 같은 일본상인의 행상으로 곡물유통의 상권을 잃거나 일상에 종속되는 조선상인의 동태도 보았다. 청일전쟁이후는 기왕의 부산·인천·원산의 3개항장 외에도 목포·군산·진남포·마산·성진 등이 추가로 개항됨으로써 곡물수출은 국내 각 산지에서 바로 일본시장과 연결되었고 곡물유통과정도 수출을 중심으로 전면적으로 재편되어 갔다. 일본상인을 상인에게 자금을 선대하여 곡물의 유통을 지배할 뿐 아니라 농민에게까지 입도선매立稻先買로 구입하거나 직접 농업생산을 위한 경지 구입에 나서는 등 생산과정에도 침투하고 있었다. 또 갑오개혁 이후의 조세금납화로 인한 곡물상품화의 과정도 볼 것이다. 금납화는 세납곡물의 상품화를 촉진시키고 곡가가 높은 개항장으로의 곡물유출을 증대시킴으로써 유통과정이 개항장 중심으로 재편하게 되는 한 요인이 되었다.

1876년 8월 24일음력 7월 6일 체결된 「조일통상장정朝日通商章程」에는 제 6칙則에 곡물의 수출입을 허용하는 규정이 있었다. 註1) 일본측은 이에 의하여 개항장에서의 곡물수출을 꾀했고 1883년 「재조선국일본인민통상장정在朝鮮國日本人民通商章程」 체결로 제한적이나마 방곡령을 발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기 전까지 조선으로서는 이를 저지할 아무런 법제적 장치를 가지지 못했다. 그러나 이 방곡령도 1개월 전의 사전통보라는 제한규정이 부기되어 실제로 곡물수출의 방지에는 미흡했다. 따라서 일본의 곡물수출은 조약상으로는 거의 저애를 받지 않고 있었던 셈이었고, 일본자본주의의 발달과 함께 곡물수요가 증가하면서 수출도 증대하고 있었다.

1876~1904년까지 곡물의 대일수출액을 정리하여 보면 〈표 9〉와 같다. 총수출액 중에서 곡물이 차지하는 비율은 1870년대 말 60~70%까지 급증하다가 1880년대에 들어 계속된 흉작과 임오군란·갑신정변 등의 영향으로 10~20%대로 줄었다. 1880년대 후반 콩수출의 계속적 증가로 총수출액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점차 증가했고, 1890년대에 들어서부터는 수출이 본격화해 흉작인 몇 개년을 제외하고 수출액에서 차지하는 구성비가 80% 이상을 차지하는 해가 많았다. 쌀은 개항 직후는 흉작으로 수출액이 적었고 1879년부터 수출이 급증했다. 1880년대도 계속된 흉작으로 수출이 부진하다가 1890년대에 들어 급격한 수출증가를 보이는 등 작물의 성격상 풍흉에 직접적 영향을 받고 있었다.

〈표8〉穀物의 對日輸出額 構成比(1877~1894)
연도총수출액(B+C)/A*100
價額(B)B/A*100價額(C)C/A*100
단위%%%
1877

1878

1879

1880

1881

1882

1883

1884

1885

1886

1887

1888

1889

1890

1891

1892

1893

1894

1895

1896

1897

1898

1899

1900

1901

1902

1903

1904
58,759 

181,469 

612,174 

1,256,225

2,230,296

1,768,619

1,656,078

884,060 

388,023 

504,225 

804,996 

867,058 

1,233,841

3,550,478

3,366,344

2,443,739

1,698,116

2,311,215

2,366,427

4,396,346

8,090,039

4,522,963

4,205,382

7,232,416

7,402,116

6,549,646

7,596,624

5,697,371
1,959 

50,600 

358,812 

729,706 

381,283 

21,011 

45,625 

196 

15,691 

12,193 

90,071 

21,810 

77,578 

2,037,868

1,820,319

998,519 

367,165 

979,292 

305,196 

2,509,343

5,556,700

2,759,046

1,417,842

3,625,629

4,195,309

3,524,619

4,224,721

1,300,790
3.3 

27.9 

58.6 

58.1 

17.1 

1.2 

2.8 

0.0 

4.0 

2.4 

11.2 

2.5 

6.3 

57.4 

54.1 

40.9 

21.6 

42.4 

31.2 

57.1 

68.7 

61.0 

33.7 

50.1 

56.6 

53.8 

55.6 

22.8
4,155 

25,323 

99,123 

119,307 

196,695 

311,325 

293,955 

100,705 

28,884 

51,733 

335,415 

471,541 

645,429 

1,005,156

913,939 

797,884 

628,324 

506,888 

923,695 

1,277,071

1,710,211

1,124,048

1,974,863

2,368,545

1,881,014

1,735,945

1,528,834

2,399,513
7.1 

14.0 

16.2 

9.5 

8.8 

17.6 

17.8 

11.4 

7.4 

10.3 

41.7 

54.4 

52.3 

28.3 

27.1 

32.7 

37.0 

21.9 

39.0 

29.0 

21.1 

24.9 

47.0 

32.7 

25.5 

27.8 

20.1 

42.1
10.4 

41.8 

74.8 

67.6 

25.9 

18.8 

20.5 

11.4 

11.5 

12.7 

52.9 

56.9 

58.6 

85.7 

81.2 

73.5 

58.6 

64.3 

70.3 

86.1 

89.8 

85.9 

80.7 

82.9 

82.1 

81.6 

75.7 

64.9
출전 : 총수출액은 梶村秀樹, 『 朝鮮における資本主義の形成と展開』, 龍溪書舍, 1977, 22~26쪽에 의함. 1885~1893년간 쌀과 콩의 수출액은 光緖11年~19年 『 朝鮮通商三關貿易冊』 각년판, 나머지는 吉野誠, 「朝鮮開國後の穀物輸出について」, 『 朝鮮史硏究會論文集』 15, 1975.


그런데 쌀이 풍흉에 극심한 영향을 받는데 비하여 콩은 기후조건에 큰 영향을 받지 않았고 일본에서의 수요가 증가하여 계속적으로 수출량도 많아지고 있었다. 원래 일본인은 콩을 간장과 조미료의 원료로 사용하여 생산량이 적지 않았으나, 조선산의 콩이 값싸고 품질이 비교적 좋아서 공급을 조선에 의존하고 매년 콩밭을 뽕밭으로 하는 자가 많아 지는 등 콩의 생산량이 줄어 들고 있었다. 註2) 반면, 조선인의 입장에서는 무역을 통한 대두의 이익이 높았기 때문에 후기로 갈수록 콩의 재배면적을 넓히고 있었다. 註3) 그 때문에 콩의 수출은 개항 전시기를 통하여 계속적 증대를 보이고 가격도 꾸준히 상승하는 추세였다.

〈표 8〉에서 보는 대로 총수출액 중 콩이 차지하는 구성비는 해에 따라서는 쌀보다 클 때도 많아 청일전쟁이후 무역의 성격을 규정한 ‘미면교환체제米綿交換體制’란 용어를 그대로 따르기 어렵게 만든다. 원래 ‘미면교환체제’의 발상이 ‘판신阪神지방 노동자의 주식으로서 조선미, 이 지역 자본제 수출품으로서의 면제품’이라는 일본자본주의의 발전과 관련해 출발한 데다가 궁극적으로 식민지화에 의한 ‘농업식민원료산지화’에 촛점을 맞춘 것이다. 따라서 양국간 무역의 복잡성을 지나치게 일본자본주의 입장에서 단순화해 버렸다는 지적을 면할 수 없다. 註4)


개항 후 변모된 부산항의 모습


곡물수출은 우선 양국간 가격의 차이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개항 당시만 하여도 조선의 미가는 일본에 비하여 1/3 정도의 수준이었다고 한다. 註5) 그러나 수출이 본격화하면서 이 같은 가격격차는 줄어들고 있었다. 1881년 부산·대판大阪·하관下關지방의 1~6월간 석당 평균 미가는 부산이 6엔 90전, 대판 8엔 96전, 하관 8엔 63전이었다. 註6) 부산의 미가에 비하여 일본시장의 미가는 대개 2엔 정도의 차이가 난다. 개항 전시기를 통하여서도 양국간에는 평균 2엔 이상의 차이가 나며, 수출비용을 석당 1엔 전후로 잡으면 조선쌀의 수출로 일본상인들이 남기는 이익은 1석당 1엔 정도였던 것이다. 註7)

그러나 수출이 반드시 양국간의 곡가 차이에서만 가능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양국간 수출입상품의 교역과정에서도 기인한다.

개항초기에 일본상인은 섬유제품 등을 수입하여 수입원가에 비해 엄청난 폭리를 취하며 조선시장에 판매했고, 註8) 1884년 이전까지는 관세마저 면제 받고 있었다. 하지만 임오군란 이후 청국상인이 조선에 진출해 오면서 사정은 다소 바뀌어 갔다. 일본상인은 청일전쟁 이전 단계까지 주로 영국산 섬유제품을 상해에서 일본을 경유하여 매입하고 조선에 수출하는 중계무역을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상해에서 조선에 바로 수입하는 청국상인과 경쟁에서 가격면에서도 열세일 수밖에 없었고, 또한 일본상인들은 주로 수입품을 현금이 아닌 하환荷換으로 수입하고 있어 은행에 대한 이자지불부담이 컸다. 그 때문에 수입품에 이자부담을 전가하여 가격을 높이는데다가 이의 부담을 줄이려면 빠른 시일 안에 팔아 버려야 했으므로 큰 이윤을 남길 수 없었다. 註9) 더구나 개항초기와는 달리 후기로 갈수록 수입되는 섬유제품, 특히 금건金巾의 경우 하등품이 많아 이익이 박약했다. 註10)

이같은 사정에서 일본상인이 섬유제품류를 수입했던 것은 단순히 수입품의 판매를 통한 이윤의 획득보다 그것을 판매한 댓가로 곡물을 매집하여 수출하려는데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註11) 즉 섬유제품류의 구입원가와 곡물의 일본시장에서 판매가격의 차이에서 이익을 내는 것이었던 것이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 면제품이 들어와 영국제 금건을 구축하면서부터는 수입품에서 얻는 이윤도 커졌지만 섬유제품의 댓가가 다시 곡물의 구입비용으로 사용되는 것은 여전했다. 다음 장에서 보겠지만 수출곡물의 상대가격이 수입면제품보다 높아 곡물수출은 계속 이익이 되었던 것이다.

청일전쟁 이전까지는 일본화폐가 조선인 사이에 아직 전면적으로 사용되지 않고 있어 일본상인은 판매된 수입품의 댓가를 조선의 화폐韓錢로 받고 이것을 가지고 다시 곡물을 구매했다. 註12) 1890년대에 들어 일본화폐의 사용범위는 확대되는 경향에 있었다. 다음의 두 자료는 그러한 사실을 잘 보여 준다.


A. 일본화폐는 아직 통용되지 않지만 경상도의 대구, 전라도의 전주 같은 대시부大市府에서는 용이하게 한전과 교환할 수 있다. 또 전라도 충청도의 경계에 있는 강경江景은 상선이 몰리는 곳으로 서울에 왕복하는 관리 상인 등이 모두 길을 이곳을 택해 항상 일본지폐와 교환하기 때문에 이곳의 객주는 평상시에 일본지폐를 저장하는 자가 많다고 한다. 일본은화銀貨는 어떤 지방에서도 애용되어 부유한 집은 특히 한전을 팔아 일본 은화를 교환하여 저장하는 자가 있다고 한다. 요컨대 일본통화는 작년까지는 신용이 후하지는 않았으나 본년에 이르러 크게 유통구역을 확장한다(『명치관보』 2536(1891.12.11) 慶尙全羅二道農商況).


B.일본지폐는 당지부산-필자 근방의 조선인간에 유통구역이 차제에 신장되는 경향이 있다. 이는 대개 당국에는 경편한 화폐가 없고 또 어음의 편리가 아직 열리지 않아 원지遠地에 수송하는 화폐로서 혹은 저장하는 것으로도 고유의 소동화小銅貨만으로는 그 불편이 적지 않지만 일본화폐와 지폐는 이러한 점에서 매우 편리하기 때문이다(『명치관보』 2553(1892.1.7) 釜山港貿易景況(10월중)).


그러나 위의 자료는 축장수단으로, 또는 운송의 편리를 위해 사용된 것으로 아직 일반적인 상행위에까지 일본화폐가 널리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1894년 「신식화폐발행장정新式貨幣發行章程」 이후 일본화폐의 유통이 공식적으로 인정되었지만, 일반적 상행위에는 역시 한전이 교환수단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한전은 수입품과 수출품의 교역과정에서 차액을 내는데 주요한 수단이었다. 註13) 조선화폐와 일본화폐와의 비율을 ‘한전상장韓錢上場’ ‘한전시세韓錢時勢’이라고 하는데 한전 1관문貫文, 1,000문=10냥에 일화 2엔을 20할割이라고 하고 그 비율은 일본상인이 조선에서 상거래를 위하여 필요한 한전 수급량이나 한전의 실질가치에 의해 크기가 바뀌었다.

이 시기 한전을 매개로 한일 양국간 무역의 메카니즘을 정리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註14)


곡물의 풍작(흉작) -〉곡물수출의 증가(감소) -〉한전수요의 증가(감소) -〉한전시세 등귀(하락) -〉수입자본제상품의 가격하락(등귀) -〉무역의 증가(침체)


물론 곡물수출의 규정적 요인은 곡물의 성격상 역시 작황이었고 교역의 과정에서도 곡물수출의 증대가 무역량의 확대와 일본상인의 상업이윤을 증가시키지만, 이 가운데 매개하는 한전시세의 등락 또한 수출입품의 가격을 바꾸어 무역전반에 큰 영향을 주는 변수였다. 이 때문에 일본상인은 한전시세를 지배하려 했고 한전 자체가 상품화되어 개항장간 무역에서 빼놓을 수 없는 품목이 되기도 했다. 특히 개항초기에는 수입품과 곡물 사이에 매개하는 한전의 시세를 조작하여 이익을 취하고 곡물을 수출하는 경우도 있었다. 註15)

일본상인이 개항장에서 곡물을 매집하여 수출하기 이전까지의 과정에는 여러 상인조직이 관계되어 있었다. 1883년까지 일본상인은 조약상 조계 10리4km 밖으로 여행이 금지되었고, 註16) 1885년에 가서야 개항장 밖으로 행상이 가능해졌다. 그래서 개항초기 개항장의 일본상인과 생산지 사이의 유통과정에는 항상 중개상인이 매개하고 있었다. 개항장의 일본상인중 양국상품을 수출입하는 자를 무역상이라 하고 양국상인 사이에서 매매를 주도하는 자를 중매상이라고 했다. 무역상은 대개 중매상에게 곡물의 구입을 위탁하는 경우가 많았다. 註17) 일본상인이 일차적으로 접촉하는 조선상인은 개항장의 객주였다. 개항장으로 유입되는 곡물은 보부상 등의 행상에 의하여 운반되기도 하나 소량일 수밖에 없었고, 대부분의 곡물은 선상에 의하여 선박으로 운송되었다. 註18) 개항장으로 상품을 운반하는 상인들은 주로 개항장객주를 통하여 일본상인들과 접촉하고 있었다. 註19)

개항장객주가 곡물을 구입하기까지의 과정도 상당히 복잡했다. 도로의 미발달로 곡물은 주로 생산지의 포구에 집적되어 개항장으로 옮겨졌다. 포구가 가까운 지역의 농민들은 포구에서 매집기능을 담당하는 객주에게 생산물을 넘겼지만, 註20) 농민이 생산한 곡물은 주로 거간이나 매집상 등 중매를 통하여 산지나 포구의 객주와 직접 연결되었다. 註21) 지주의 소작미는 객주를 통하여 방매되고 있었으나, 직접 선상을 통하여 개항장으로 수출하기도 했다. 註22) 곡물을 매집한 객주는 선상이나 행상을 거쳐서 곡물을 개항장으로 운반하게 했다.

주지하듯이 이 같은 조선미의 수출은 일본에서 자본주의 발전의 중심지였던 판신지방에 집중되어, 공장노동자용의 값싼 미곡을 공급함으로써 일본자본주의의 형성·발전에 기초를 제공했다. 그런데 개항초기의 경우 일본은 조선의 값싼 쌀을 수입하는 반면에 일본의 쌀을 고가로 런던의 미곡시장을 비롯한 유럽과 호주시장에 수출했다. 이 과정은 일본국내의 지주에게는 고미가를, 자본가에게는 저임금정책을 보장하여 일본자본주의의 본원적 축적에 기여하는 것이었다. 註23) 그러므로 당시 일본의 쌀소비 총량에서 점하는 조선쌀의 비중이 낮았지만 결코 그 의미를 낮게 평가를 할 수는 없다.

또 후기로 갈수록 일본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라 일본내의 임노동자층이 보편화되면서 조선미는 공장노동자의 수요충당에 그치지 않고 일본의 곡물시장 전체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에 수입되고 있던 안남미安南米 등에 비해 조선미는 품질이 월등하여 일본인의 기호에 적합했고, 정미방식만 개선한다면 일본미와 결코 다를 바 없었다. 註24) 앞서 본 1890년대 이후의 급격한 쌀수출의 증가는 기본적으로 일본의 흉작과 조선의 풍작에 근거한 것이지만, 조선미의 우수성도 이에 일조하고 있었다. 註25) 1890년대 이후 일본상인은 현미로 수출하는 경향이 증대하여 갔다. 부산항의 경우 1892년 후반이후 거류지의 일본인들이 매입한 현미를 도정하여 ‘개량현미改良玄米’로 만들어 일본에 수출함으로서 부가가치를 높이고 있었고, 註26) 인천항에서는 1891년부터 쌀의 수출통계가 백미와 현미로 나누어지며 현미의 수출이 점점 증가하는 현상이 나타나 1892년을 즈음하여 수출미중 현미가 4할을 차지하는 실정이었다. 註27) 수출된 현미는 일본에서 다시 도정을 거쳐 일본의 곡물시장에 방매되었다.

이처럼 개항기의 곡물수출은 양국간의 가격조건과 수출입상품의 상대적 가격차이에서 가능할 수 있었고, 궁극적으로는 일본자본주의의 형성과 발전을 도우는 것이었다. 물론 조선측으로서도 수출상품으로서 가장 중요한 품목이었지만, 쌀을 미롯한 주식의 수출로 인한 영향은 심각한 사회적 문제를 야기했다. 註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