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제4장 일본의 경제침략과 유통구조의 변화, 일본상인의 유통과정 침투/제2권 개항 이후 일제의 침략

몽유도원 2013. 1. 11. 09:54

제4장 일본의 경제침략과 유통구조의 변화


대일무역의 역사적 배경

일본상인의 유통과정 침투(1876~1894)

상품유통과정의 재편(1895~1904)


2. 일본상인의 유통과정 침투(1876~1894)

1. 일본상인의 밀무역
앞에서 본 산지에서 개항장에 이르는 곡물의 유통과정은 조선후기이래의 전통적 유통조직을 계승한 것이었고 개항기 전시기를 통하여도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었지만, 일본상인이 밀무역이나 개항장 밖으로 행상을 통하여 유통과정에 침투함으로서 개항후의 유통조직은 새로이 재편되어 갔다.
조선상인을 통한 복잡한 유통과정은 수출곡물의 원가를 상승시켜 일본상인들은 이의 축소를 원했고 또한 그들은 수출곡물의 양을 증가시키고자 했으므로 자연히 밀무역을 기도하고 곡물의 구입에 직접 나서고자 했다. 뿐만 아니라 곡가가 높은 개항장으로 곡물을 반출하여 이익의 증가를 원하는 조선상인의 의도도 가세하여 밀무역이 성행했다. 개항장 밖으로의 여행이 자유로왔던 1884년 이후의 단계에서는 일본상인이 직접 유통과정에 침투하여 곡물을 매입할 수 있었지만, 그 이전에는 개항장 밖으로의 행상이 금지되어 밀무역이 될 수밖에 없었다. 註29)
곡물의 밀무역은 이미 개항이전부터 이루어지고 있었다. 1875년 9월 좌의정 이최응李最應은 왜선의 곡물 잠매행위潛買行爲를 우려하고 각지방관에게 엄금하도록 지시하고 있었다. 註30) 개항 이후 동래부근 각지역에서의 밀무역은 막기가 어려운 실정이었다. 1878년 경상좌도 암행어사 이만식李萬植은 동래부근의 곡물 잠매를 개탄하고 심지어는 공무역을 빙자하여 잠매하는 정도라고 했다. 註31) 그래서 조선측 화매자和賣者는 정부의 지시를 기다리지 말고 먼저 효경梟警할 것을 주장했다. 註32) 1879년에는 고종도 ‘잠상지폐潛商之弊’를 우려하고 동래부사 심동신沈東臣에게 금단禁斷을 당부했다. 註33) 같은 해 경상도 밀양의 선주 정두성丁斗星은 세곡미 1,004석을 임선賃船 3척에 실어 1척은 京江으로 보내고 나머지 2척은 내관萊館으로 가서 잠매하려 했다. 그중 140석을 실은 임선 1척이 천성진天城鎭에서 잡히는 바람에 잠매사실이 탄로되어 정두성은 수배 당하고 밀양부사 신석균申奭均은 이를 막지 못한 죄로 견책을 받았다. 註34) 정두성의 잠매사례는 세곡선의 잠매를 보여 주는 것으로 개항 이후 세곡선의 잠매는 빈번히 나타난다.
1880년 지평持平 최침崔琛은 삼남의 세곡을 운반하던 경강대선이 즉시 상납하지 않고 곡가가 높은 지역에 잠매한다고 했다. 註35) 또 같은 해 강진현감의 첩정에 의거한 전라감사 심이택沈履澤의 장계에는 경선주京船主가 강진현 대동미를 운송 도중에 제도諸島를 돌아 다니며 화매和賣하다가 청산도靑山島에서 붙잡혔다고 한다. 註36) 1883년 예조좌랑禮曹佐郞 김상래金尙萊는 세곡선 향주인鄕主人들이 해양에서 세곡을 암매하는 사례가 빈번하다고 했으며, 註37) 부사과副司果 최경직權景直은 세미를 잠매하고 고의로 파선시키는 선주를 효경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註38) 세곡미의 잠매는 물론 국내의 곡물시장을 대상으로 한 경우가 많았겠지만, 만연하고 있던 일본상인과 밀무역을 상기하면 일본상인이 대상인 경우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의 식자층 사이에는 일본상인에 의한 곡물의 밀무역을 개탄하는 소리가 높았다. 1880년 전정언前正言 허원식許元拭은 근래 사치가 심해지는 이유는 부상들이 곡물을 외국상인에게 잠매하고 이국異國의 완호물과 바꾸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註39) 1881년 출신出身 홍시중洪時中의 상소에서는 잠상을 적발하여 효수할 것을 주장했다. 註40)
그런데 일본상인과의 잠매행위에는 선상·객주 등의 곡물상인과 지방관과의 결탁을 결코 배제할 수 없다. 앞서의 밀양선주 정두성도 밀양부사와 밀착이 없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1880년 영의정 이최응이 연해각처의 미곡 잠매시 수뇌하고 이를 묵인하거나 죄를 씌워 빼앗는 지방관을 적발하여 보고할 것을 각 관찰사에게 지시하고 있는 사례를 보아도 잠매행위에는 지방관과 곡물상인의 결탁이 어느 정도 전제되었다고 보여진다. 註41)
이처럼 잠매행위가 성행하자 1878년 경상좌도 암행어사 이만식李萬植은 동래연강의 각항 관문에 미곡잠매를 금지하는 과조科條를 엄히 세우고 우리측 화매자를 효경梟警하는 한편, 각 화물에 세액을 정해 수세할 것을 건의하고 수세소로서 두모포豆毛浦를 제의했다. 註42) 그리하여 이 해 9월 28일음 9월 3일부터는 두모진에서 수세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두모진 수세는 외교문제로 비화해 무력을 동원한 일본의 강력한 항의 끝에 12월 16일음 12월 1일 중지되고 말았다. 註43)
행상이 보장되고 해관이 설치된 이후에도 문헌상에서는 찾기 어렵지만 해관에서의 수세를 면할 목적으로 해관을 거치지 않는 밀무역도 존재했다고 짐작된다. 일본선박에 의한 해안, 즉 미개항장에서의 잠매는 전국적인 현상이어서 중앙정부는 각 지방에 관문을 내리며 이를 저지하기에 부심했고, 註44) 1892년에는 기선을 이용하여 부산에서 인천간을 순찰하며 밀무역을 적발하려는 사례까지 있었다. 註45)
물론 일본상인만이 아니라 황해도·평안도 연안에서 청국상인의 밀무역도 적지 않았다. 1886년 평안도 연해에서의 청국선의 잠매 행위는 중앙정부의 우려를 자아내고 있었고, 註46) 1890년 3월 일본인의 보고에는 인천항의 무역이 쇠퇴하는 이유를 “청국 산동지방에서 수백의 선박이 평안·황해 양도의 해안으로 내항來港하여 몰래 금건과 양화洋貨를 팔고 그 귀로歸路에 대두와 잡곡을 적재하여 크게 당항當港의 무역을 나누는” 탓이라고 했다. 註47) 이 시기 평안도 지역에서는 청국상선이 각 지방에 분세分稅·수세水稅 등의 명목으로 지방관 등에게 세금을 내고 있어 상행위 자체가 공공연하고 청국상인도 스스로 밀상密商으로 인정하지 않을 정도였다. 註48)
개항은 국내곡물시장을 대상으로 하던 곡물상인에게 새로운 시장을 제공했다. 더구나 개항장의 가격조건이 보다 높아 세곡선의 잠매도 이를 대상으로 하는 경우가 많아졌고 유통과정을 축약함으로써 더 많은 곡물을 염가에 확보하려는 외국상인의 의도도 가세해 개항 초기부터 만연하고 있었다. 일본상인의 행상이 본격화하고 호조의 발급자체가 형식화되는 1890년 이후의 시기에는 밀무역도 줄어들 수밖에 없었지만 해관을 거치지 않으려는 밀무역은 계속 남아 있었다. 따라서 개항전기의 곡물수출은 통계상에 잡히지 않는 상당량의 곡물유출이 있었다고 본다.

2. 일본상인의 개항장 외 침투
개항 초기의 경우는 밀무역이 아닌 한 조선상인이 직접 개항장으로 곡물을 운반하고 외국상인들은 이를 매수하는 형태를 취했으나 1880년대 말경에 들어 외국상인이 직접 개항장 밖으로 행상하여 매집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일본상인의 통행이 자유로운 간행이정은 1882년 이후 종래의 10리에서 100리40km로 확장되었다. 1882년 8월 30일 제물포조약과 함께 체결된 「조일수호조규속약」 제1관에는 “원산·부산·인천 각항에서의 간행이정을 확장하여 사방 각 50리로 하고 2년 후부터는 다시 이를 각 100리로 확장한다”고 되어 있었다. 그래서 1883년 7월 25일의 「의정조선국간행이정약조議訂朝鮮國間行里程約條」에 의하여 50리로 확장되었고, 1884년 11월 29일 조인된 「조선국간행이정약조부록朝鮮國間行里程約條附錄」에 따라 100리의 간행이정 구간이 정해졌다. 註49)
간행이정의 확정과 함께 외국상인의 개항장 밖으로 여행이 가능하게 되었다. 1882년 8월 23일 조인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 제4조에는 호조護照를 휴대한 청국인에게는 행상이 인정되고 있었다. 註50) 이것에 의하여 1883년 11월 26일의 「조영수호통상조약朝英修好通商條約」이하 「영약」으로 함 제4관 6조에 조계 100리 이내는 호조없이, 100리 이외는 호조소지자에 한하여 여행이 가능하다는 규정이 이루어졌다. 이 조문은 다른 통상국에도 균점되고 말았는데 특히 일본은 최혜국조관의 규정에 따라 이 조약의 균점을 주장했다. 원래 일본과 조약은 이 규정이 없었으나 「영약」에 의해 개항장 밖으로 행상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일본외무성은 1885년 6월 23일 「조선국내지여행취체규칙朝鮮國內地旅行取締規則」을 제정 시달하여 일본인의 개항장 밖으로 여행과 행상에 대한 세부지침을 마련했다. 註51)
호조의 발급은 원래 각항의 영사가 감리를 경유하여 통리아문에서 인증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1888년 10월부터는 호조의 발급을 각항감리에게 위임하여 신청인이 감리서에 요청하면 감리가 발급하고, 1894년부터는 영사관에 감리서의 압인押印을 두어 영사가 직접 교부했다. 1893년 8월 17일에는 동일지방을 상시 왕복하는 자에 대해서는 1매의 호조로 6개월간 왕복사용이 가능하도록 해 일본상인의 행상은 거의 저지를 받지 않게 되었고 호조 역시 형식화되기에 이르렀다. 註52)
개항장 밖으로 행상은 수입품의 판로를 확장하여 조선상인의 손을 거치지 않고 판매할 수있어 일본상인의 이익을 증가시키며, 수출품의 경우는 생산자에게서 구입하거나 직접 생산자에게서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유통경로를 단축시켜 염가로 매입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으므로 일본측은 자국의 상인에 행상을 장려했다. 註53) 그리하여 인천항의 경우 1885년 호조의 발급을 받은 일본상인이 1인, 1886년 9인이던 것이 1887년에는 59인으로 급증했고, 註54) 1888년은 76인, 1889년과 1890년에는 100인을 넘게 되었다. 註55) 또한 청국상인도 대개 1888년의 단계에 이르러 행상을 확대하며 판로를 개척하고 있었다. 註56) 행상이 확대됨에 따라 지방관과 지역민과의 마찰을 막기 위해 조선정부는 1887년 「영약」에 의거한 6항의 세칙을 전국에 관문으로 내렸다. 註57)
외국상인, 특히 일본상인의 행상은 대개 곡물의 매입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으므로 행상이 증가함에 따라 곡물의 유통과정도 변화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조선의 곡물상인들이 개항장으로 곡물을 반출하고도 있었지만 일본상인은 직접 행상을 하거나 조선인 또는 일본인고용인을 시켜 포구와 산지의 객주, 그리고 지주에게서 곡물을 매입함으로써 종전의 개항장객주를 통하던 유통경로를 단축시켜 갔다. 1890년 인천의 일본 영사의 보고에 의하면, 1890년 1월부터 쌀의 “10개월간 수출고는 석수로 거의 16만석, 그 가액은 67만원의 거액이다. 이는 먼저 본방일본-필자의 곡물 흉작과 당국조선-필자에서의 비상한 풍작 때문이지만, 또 하나는 근래 재류본방상인在留本邦商人이 점원을 당국 내지에 파견하고 행상을 성행시켜 미곡 매입의 편리를 얻는데 크게 힘을 기울인 탓이다”라고 하여 행상의 증가와 곡물 수출의 증가와의 관계를 지적했다. 註58)
일본상인은 개항 초기부터 조선상인에게 자금을 선대하고 곡물을 매입하고 있었다. 『일채보관록』이란 자료에 의하면 1885년 1월에서 5월까지 부산항의 일본상인에게 부채를 지고 갚지 못해 고발 당한 조선인은 경상도와 전라도 각지에 걸쳐 있었으며 부채액은 적게는 100냥 미만에서 최고 3,500냥에 이른다. 이들의 대부분은 상업을 위해 부채를 졌는데 곡물로 환납해서 부채를 청산하는 사례도 있는 것으로 보아 곡물의 매입을 전제로 자금을 선대받은 경우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註59) 일본상인에게 자금을 빌린 조선인은 부채를 갚지 못하면 가옥과 전답을 팔 수밖에 없었고 그것마저도 없을 때는 친족들에게 족징하는 경우가 많았다. 註60) 1892년 4월 경상도 유학 이도량李道亮 등의 정단에는 20촌이나 되는 원족遠族이 쌀의 교역을 위한 자금을 일본상인에게 빌어쓰고 이를 갚지 못해 향리의 친척들이 족징族徵을 당하는 사정을 호소하고 있다. 註61) 이러한 사례는 같은 해 9월 경상도 고성, 註62) 1887년 5월 황해도 신천 註63) 등지에서도 발생하고 있었다. 또 1891년 일본상인에게 고용되었던 박대형朴大亨의 소지에는 1890년 음력10월에 일본상인이 쌀의 구입을 위하여 그를 시켜 황해도 연안의 황원중黃元中에게 2만 여냥을 선대하고 시가에 따라 쌀 100여 석을 구입했으나 시가의 하락으로 말미암아 실제로는 7천 여냥 정도의 양 밖에 되지 않아 일본상인이 박대형에게 보채報債를 독촉한다고 했다. 註64)
일본상인의 조선상인에 대한 자금선대는 곡물매집을 위한 것이 대부분이었고, 직접 행상에 나서지 않아도 안정적으로 곡물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광범하게 행해지고 있었다.부산항의 경우 갑오 이전에 일본상인에게 청산하지 않은 부채 총액은 14만 여냥이 되었다고 한다. 부채는 거의 모두 곡물매입을 위한 대부로 발생했다. 註65) 이러한 자금선대의 과정에서 조선상인은 일본상인에게 예속되어 갔다.
그러나 곡물수출이 증가하면서 일본상인과 그들에게 자금을 선대받은 조선상인과 경쟁도 치열해졌고 행상도 증가할 수밖에 없었다. 1890년 원산주재 일본영사의 보고에서는 일상의 경쟁적인 행상의 성행을 “종래 내지의 객주나 한인 중매 등에 의하여 매수했지만 시세가 스스로 각촌읍各村邑을 다니며 예약하고 실제의 거래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고 전한다. 註66)

일본 상인에게 발부한 내륙 통행허가서


1889년 10월 평안도의 평양 등지에서 곡물을 구매하려던 일본상인 토정구태랑土井龜太郞은 그곳 객주들이 평양감사의 금령禁令으로 말미암아 곡물을 거래할 수 없게 되자, 1890년 3월까지 황해도의 각지역에서 6만여 석에 달하는 다량의 곡물을 구입했다. 註67) 이같은 사례는 산지의 객주를 거치지 않고서는 일본상인의 곡물매입이 어려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1893년 경기·충청지방을 시찰한 일본인의 보고에도, “외국인 행상자는 대부분 판매를 객주에게 위탁하며, 대부 외상 판매 등은 모두 객주의 책임에 속한다 … 곡물穀物·우피牛皮 등의 매입도 모두 객주에 의뢰하며 … 일상·청상은 모두 이 방법에 의한다”라고 했다. 註68) 일본상인은 행상시에도 조선상인에게 자금을 선대했다. 특히 수확기와는 달리 출하되는 곡물이 소량이었던 시기에는 자금을 선대해야만 안정적으로 곡물을 확보할 수 있었다. 1893년 8월에서 10월 사이에 충청도 평택·계귀桂歸·원정院井·직산·군문포軍門浦 등지를 유력하며 곡물을 구입하던 인천 거류 일본상인 안본보지조岸本保之助는 그 지방의 상인에게 미곡구매를 위한 자금을 선대했다가 1893년 전국 방곡을 빙자한 지방관에게 억류되어 미곡의 반출을 못했다. 註69)
일본상인은 행상을 통하여 내륙지방에서만 곡물을 매입한 것이 아니라 해로로 아직 개항되지 않은 포구까지 진출했다. 1883년 7월 25일 조인된 「재조선국일본인민통상장정」 제32관에서는 미개항장에서의 교역을 금하고 있다. 註70) 그러나 일본은 「영약」 제4관을 들어 균점을 요구했다. 註71) 즉 「영약」에 각국인이 조선의 선박을 고선한 경우에는 개항장 외에서 교역이 가능하다고 했으므로 여기에 근거해 개항장이 아닌 포구에서의 교역도 주장했고, 조선정부는 일본의 계속되는 항의에 1888년 경부터 미개항장에서 통상도 사실상 저지하기 어려워졌다. 註72)
일본상인은 조선의 선박을 고용하여 내륙의 연강이나 연해에서 다량의 곡물을 매집했기 때문에 지방관은 선박을 집류하고 곡물의 수출을 막는 경우가 많았다. 이때 일본측의 반발이 심하여 정부로서는 매번 지방관에게 호조를 휴대한 자의 교역은 허가하라는 관문을 내렸다. 註73) 뿐만 아니라 일본상인들은 조약과는 달리 조선선박보다 한결 많은 양의 곡물을 적재할 수 있는 일본선박을 이용하기도 했다. 그래서 1893년에는 중앙정부가 세 개항장에 출입하는 조선선박에 대한 조사를 지시하며 “외국선박에 함부로 조선국기를 매단다”라고 했던 것이다. 註74)
1887년 원산에서는 조선상인이 일선을 고용하여 각처에서 행상하려는데 허가를 해주지 않자 일본영사가 「영약」 제5관 5조를 들어 항의했다고 한다. 이에 대한 조선정부의 입장은 조약상으로는 가능하지만 현금 조선의 자본이 영세하여 본지선도 고용할 수 없는 처지에 일본선박의 고용이 가능할 것인가 보고 ‘무자간민無資奸民의 망행포비지계妄行包庇之計’라고 지적했다. 註75) 문면文面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이때 정부의 견해는 일본상인이 자국의 선박으로 통상하려 하면서 표면에 조선상인을 내세웠다고 본 것 같다. 그리하여 원산감리에게 일선고용을 불허하는 관문을 내렸다. 註76)
그후에도 일본상인이 일본선박을 이용하여 내륙에서 곡물을 수출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1893년 부산 하단포下端浦의 감관 김현일金現逸은 일본고선이 각포구에 편행하여 곡물을 몰수沒輸하고 귀항하는 바람에 우리 선박이 실업의 지경에 이르렀다고 할 정도였다. 註77) 뿐만 아니라 일본상인이 일본에서 만든 조선형朝鮮形 선박을 가지고 각지역의 포구로도 침투해 갔다. 군산群山지방은 이 같은 일상의 행상으로 개항1899년되기 훨씬 이전인 1891년부터 행상이 본격화하면서 1890년대 전반에 이미 개항장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거래가 많았다고 한다. 일본 자료에서는 1890년대 초반 이 지역에서의 일본상인의 침투양상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 행상자 중에는 수만의 자금으로 부산, 인천 등에 근거지를 두고 일본조조선형선日本造朝鮮形船 400석이하 150석 정도의 선박과 대소의 조선선박 등을 띄워 연안 각포구에 매매객주를 선정하는 각 4~5명 내지 십수명의 본방인이 있었다. 잡화는 물론 각종의 면제품에서 석유·성냥·금속구 등을 막론하고 무역품을 대개 망라 진열하고 수출 제품諸品을 매입하여 매년의 매매고는 크게는 수만금에 달했다. 전라도 강경포·공포公浦·줄포茁浦·사포沙浦·삼포三浦 같은 곳은 부근의 토민土民에게는 거의 신개항장 같이 생각되어지고 있었다.” 註78)
일본상인이 사용하던 선박은 기선이나 풍범선風帆船이어서 봉선蓬船이 주종을 이루던 조선인 선박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화물을 적재하고 험로에도 지장이 없었다. 이를 이용해 일상들은 국내의 상품유통에도 침투해 들어 왔다. 원격지 유통은 조선선박도 상당부분 담당했지만, 대규모의 화물이나 가격의 등귀로 신속한 운송을 요구할 때는 조선인도 일본선박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1900년대 들어서의 자료이긴 하지만 성진항의 사례는 그러한 사정을 보여준다. “당지 상인의 관습으로 운송지의 시세가 하락해 충분한 이익을 보기 어려울 때 한범선을 사용하고 반대로 운송지의 시세가 높아 충분한 이익을 볼 수 있다고 볼 때는 가령 고가의 운임을 지불하더라도 안전하게 신속한 기선으로 운송하는 것이 상식이다.” 註79)
그래서 일본상인은 일본선박을 이용해 개항장간의 상품유통을 주도하고 앞서본 대로 연안의 포구에서 밀무역을 자행하기도 했던 것이다. 일본상인들은 일본에서의 곡가가 하락할 때 매입한 곡물을 국내 곡물시장으로 이송하고 상업적 이윤을 취득했다. 항상적으로 부산항에서 미곡을 공급받고 있던 원산항으로의 일본기선에 의한 곡물수송이 바로 그것이다. 註80)
이같은 현상은 다른 상품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고 있었다. 1889년 인천의 연안무역의 경우 미개항장에서의 미곡 운송 등은 조선상인이 장악하고 있었지만, 원격지인 부산의 곤포昆布, 원산의 명태 등의 상권은 대체로 기선을 이용한 일본상인이 담당했다. 註81) 그래서 종래 조선상인에 의해 육로를 통하여 서울로 수송되던 함경도의 명태와 마포의 상권이 해로를 이용한 일본상인에게 침식 당해 서울의 어물전상인이 손해를 입고 있는 실정이었고 1893년 일본인의 보고에 의하면 “명태어의 판매권도 점점 한상의 손을 떠나 재류외상의 손에 이행”되고 있었다고 한다. 註82) 뿐만 아니라 일본상인은 호남지방에서 목면을 서울에 반입하고 판매함으로써 백목전상인의 반발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註83)
일본상인은 각 지방의 행상시에 지방관들에 의하여 각양의 수세收稅를 강요당하고 있었다. 개항이전부터 존재하여 온 봉건적 수세체제내에서 각종 잡세는 조선상인도 마찬가지로 부담했다. 원래 법전에 규정하는 잡세는 공장工匠·좌고坐賈·행상行商·고도작어孤島釣魚·제도산은처諸道産銀處·외방무녀外方巫女 등에게서 수세하는 것이었는데 개항 이후 상품화폐경제가 확대됨에 따라 상업세로서의 성격으로 발전하고 봉건정부의 중요한 세원이 되었다. 註84) 수세의 주체는 각 아문·궁방·군영·지방관 등 거의 모든 봉권권력이 망라되어 있었고 수시로 혁파 또는 신설되었다. 특히 육로교통의 미발달로 수운이 주요한 교통수단이어서 무명잡세도 포구에 집중되었는데 수세가 가혹해 “포구가 몰락하고 민업民業이 탕잔蕩殘한다”고 할 정도였다. 註85) 중앙정부가 이의 혁파를 지시하는 사례는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註86)
그런데 일본상인의 행상이 증가하면서 이들에 대한 수세는 심한 반발을 사고 있었다. 일본측이 가장 심하게 반발한 수세는 함경도의 개항이전부터 상업세로 부과되어온 수월세手越稅와 복세卜稅였다. 수월세는 장시에서의 물품의 매매에 대한 과세로서 군용에 썼기 때문에 양향고세糧餉庫稅라고도 불리었고, 복세는 일종의 통행세였다. 註87) 1884년 함경도관찰사의 첩보에 의하면 수월세는 1871년부터 수세되었는데 이는 경사京司로 상납이나 함영신포위咸營新砲衛 300명의 급료에 충당되었다고 하며, 복세는 설읍 이후부터 수세한 것으로서 공부貢賦와 공용에 보충한 것이라고 했다. 註88) 수월세에는 경사상납京司上納을 위한 경수월세京手越稅와 함영소용咸營所用을 위한 영수월세營手越稅의 두 종류가 있었다. 註89) 1888년에는 친군영에서 함경도에 새로이 세를 부과했다가 일본의 항의에 의하여 이를 철폐하기 했다. 註90) 그러나, 정부는 수월세와 복세의 경우 이를 일본상인에게만 과세하지 않도록 하고 계속 행하도록 하는 한편, 양세의 철폐를 주장하는 일본공사에게는 수세에 대한 철폐요청은 내정간섭이라고 반박했다. 註91)
경상도의 경우에는 화물에 대한 통관세가 많았다. 러시아인의 보고에 의하면, 경상도에는 세금징수소가 17개나 있었다고 한다. 또 낙동강에는 25마일의 거리에 4개의 관문이, 부산항에는 반경 10마일의 환環을 이루는 10개의 세금징수소로 둘러져 있었다. 註92) 1892년 일본영사는 낙동강연안의 징세처로서 밀양의 삼랑三浪·수산守山·명리明里, 양산의 여수해如水海·구포龜浦南倉·물금勿禁·원동院洞·용당龍塘을 들었다. 註93) 이해 일본상인은 경상도 웅천·창원·거제·통영·고성·사천·진주·곤양·하동·남해 등 10개 읍의 수세에 항의하고 있었다. 註94) 1893년 경상도감영에 내린 관문에도 낙동강 연강각처에는 무명잡세가 심해 상민의 원성이 잦다며 영산의 임해연세臨海沿稅와 밀양의 삼랑·명리·수산세, 양산의 물금·용당세를 그 예로 들었다. 註95)
1890년에는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일본상인에 대해 과세를 하여 일본공사의 항의에 접한 정부는 일상에 대한 수세는 면징하도록 지시했다. 註96) 이때 황해도에서 수세내역을 살펴보면, 영납營納·토세土稅·관향청분管餉廳分·동분洞分·용동궁분龍洞宮分·교군분轎軍分·기로소분耆老所分·내무부분內務府分 호두포분虎頭浦分 등 각양의 잡세가 포함되어 있었다. 註97) 1888년 인천항의 보고에는 각 포구주인과 감고배들이 외국인의 운화출포시마다 영세營稅·감분官分이란 명목으로 수세를 하고 있다고 했다. 註98)
인천항의 예에서 보듯이 수세의 담당자는 주로 객주나 감관이었다. 註99)〈표 9〉는 1893년경 일본인이 조사한 중부지방의 곡물에 대한 잡세수취 내역이다. 각 포구나 장시에서 객주에게서 상품을 매매하는 과정에서 객주는 구문만이 아니라 각종 잡세도 함께 수취하고 있었다. 청일전쟁 이전 일본상인은 행상으로 곡물을 매집하거나 수입품을 판매할 때 주로 산지의 객주를 통했으므로 이 과정에서 잡세를 물 수밖에 없었지만, 註100)통과세로서의 잡세수취에 대해서는 강력한 반발을 했다.

〈표9〉중부지방의 잡세수취내역
지역상품수세내역
黃州大豆 1俵分稅 320문 (9전 6리)
沙里院米·粟·小麥 
綠選 1俵
都分 250문(7전 5리) 官洞分 30문 (9리) 
總制營刊 270문(8전 1리) 貿易分 50문(1전 5리)
大豆 1俵都分 200문(6전) 官洞分 30문(9리) 
總制營 170문(5전 1리), 무역분 50문(1전 5리)
銀波米 1俵總制營 270문(8전 1리) 都分 3백문(9전) 貿易分 
35문(1전 5모) 營分 80문(2전4리) 洞分20문(6리) 
刑所分 35문(1전 5모)
海州穀物 1俵500문(15전)
延安관한 那津浦米 1俵35문(內 20문 稅監, 10문 監官, 15문 
敢癌 5문 時亭, 5문 明禮宮)
江景穀物 1俵分稅 65문 總制營 50문 口錢 4/100
黃山米 1俵35문(內 20문 稅監, 10문 監官, 15문 
敢癌 5문時亭, 5문 明禮宮)
雜穀 1표35문 (內 20문 進上, 15문 稅監, 10문 明禮宮)
牙山浦미 1표三殿宮 55문, 總制營 20문 水稅 15-20문 
村稅 31문 이외 口錢 4分

출전 : 『通商彙纂』 1 附屬, 京畿道及忠淸道地方商況幷ニ農況視察報告(1893.10.21. 京城) ;『通商彙纂』 2 附錄, 朝鮮國中部地方商況視察(1894.1.22. 京城), 

비고 : 都分은 名官御分合, 官洞分과 貿易分은 객주의 口文.


각 지방의 수세에 대해 일본측은 「재조선국일본인민통상장정」 제18관을 내세워 해관외의 징세는 일체 못하게 되어 있다고 주장했고, 註101) 수세사건으로 인하여 일본공사의 항의가 있을 때마다 정부는 그 지방의 지방관에게 관문을 내려 일본상인에 대하여 면세해 줄 것을 지시했다. 이 때문에 조선상인 중에는 일본상인의 화물로 위장하여 수세를 피하려는 경우도 있었다. 註102) 그러므로 일본상인은 각종수세의 중압에 시달리던 조선상인보다 유리한 입장에서 상권을 장악해 갈 수 있었다.

그런데 봉건적 상업세는 봉건정부의 주요한 세원이었기 때문에 근대적 세제의 확립 이전에는 폐지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래서 재정의 수요를 보충하기 위해 수세를 목적으로 포구를 증설하거나 객주를 차정하기도 했고, 심지어 허가를 받지 않은 도고잠상에 대해서는 혁파령을 계속 내리지만 관허의 특정도고는 복설復設·차정差定했던 것이다. 註103) 특히 개항장의 경우 대량의 화물이 집산했으므로 봉건정부의 통제기도도 심했다. 더구나 일본상인이 개항장밖으로 행상을 하여 산지나 포구의 객주와 직접 거래하거나 자금을 선대하며 수출곡물의 상권을 장악해 가자 유통과정에서 상대적으로 배제되는 개항장객주도 상권의 만회를 위해 일정하게 관권의 비호를 받을 필요가 있었다. 註104)

개항장객주는 하나의 관아에 소속되어 각종 수세의 중압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1892년 부산항 객주들이 소장訴狀을 올려 근래 각진各鎭·각아문이 횡침橫侵하므로 특히 감리서의 소속으로 하여 타아문의 피해를 막아 달라고 했던 것은 그 예다. 註105) 그러나 객주가 관권과 결탁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위탁판매로써 구문수취口文收取를 하고 상업적 이익을 남기는데 관권의 비호를 받기 위해서였다. 1887년 정부는 부산항에 관문을 내려 잡세의 혁파를 지시했지만 객주의 구문에 대해서는 징세가 아니라 하여 존속을 지시했다. 註106) 개항장객주의 구문을 외국인의 입장에서는 징세의 일종으로 보아 철폐를 종용했지만 정부는 객주의 구문만은 계속 보장하고 있었다. 註107) 정부가 객주의 구문을 보장하는 이유는 구문에 대해 일정액을 상납받아 재용에 충당하려는데 있었다. 개항장에서 교역량이 증대됨에 따라 구문에 대한 정부의 수세는 재정에 큰 도움이 되었다. 註108)

개항장의 객주도 이 같은 관권을 배경으로 개항장에서 상품유통을 지배하려 했다. 1884년 인천감리 홍순학洪淳學은 인천상민에게 내린 고시에서 각양의 화물은 반드시 상회나 객주를 통할 것을 지시했다. 註109) 이것은 부산이나 원산의 경우도 마찬가지였고, 註110) 중앙정부도 “객주를 거치지 않으면 화물의 매매를 불허한다”며 객주의 상권을 보호하려 했다. 註111) 물론 이러한 기도는 각국의 반대로 실제의 시행은 어려운 처지였다. 그러나 객주의 구문에서 상납을 받는 봉건정부의 입장에서는 각국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같은 시도를 계속할 수밖에 없었고 오히려 소수의 객주에게 독점적 상권을 부여함으로써 유통과정을 통제하고 더많은 상납액을 확보하려 했다.

그래서 1889년에는 인천에서, 1890년에는 부산에서 이른바 ‘25가객주제’를 시도하게 되었다. 이것은 정부가 개항장의 객주수를 25명으로 한정하고 각읍의 화물을 각자 분장하여 구문을 수취하려는 제도였다. 註112) 1893년에도 부산에 이와 유사한 관지정객주제를 실시하려 했으나, 모두 각국공사의 항의에 부딪혀 실패하고 말았다. 註113) 부산항의 경우 ‘25가객주제’를 시도하기 전까지는 150~160명의 객주가 있었기 때문에 통제가 용이한 실정이 아니었던 것이다. 註114) 이 같은 ‘재정보용’을 위한 봉건정부의 입장과 관권의 비호로 독점적 상권을 가지려는 개항장객주의 기도는 개항 전시기를 통해 개항장에서의 조선상인이 일정하게 상권을 유지하는 근거가 되었다.

이처럼 일본은 조약의 개정과 그 시행과정에서 조선 측에 계속 압력을 가해 일본상인의 개항장 외 침투을 강화해 갔다. 간행이정의 확장으로 상업활동 영역이 확대된 데다가 호조를 휴대하면 간행이정 밖으로도 행상이 가능해져 종래 개항장객주 등 중간상인을 통하던 유통경로를 줄이며 직접 산지의 상인에게서 곡물을 매집할 수 있었다. 일본상인은 조선상인과 관계에서 자금을 선대하는 경우가 많아 조선상인의 일본상인에 대한 예속은 계속 심화되었다. 그리고 행상의 초기에는 각 포구나 장시에 존재하던 봉건적 상업세를 물기도 했지만 일본측의 항의로 수세에서 면제되어 갔고, 여전히 각종 잡세의 수탈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조선상인은 일본상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상권이 위축되고 있었다. 이 과정은 조선상인의 매판화와 몰락을 함께 강요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 일본상인은 자금선대로 곡물을 매집하기는 하지만 그 대상은 주로 상인이었고 행상을 해도 아직은 직접 생산자에게서 매입한 사례는 찾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