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서북지역의 의병항쟁 / 후기의병의 확산 / 한말 후기의병

몽유도원 2014. 4. 30. 11:56

제4장 후기의병의 확산


후기의병 항쟁의 전개

강원·경기도의 의병항쟁

경상·충청도의 의병항쟁

서북지역의 의병항쟁

전라도의 의병항쟁


4. 서북지역의 의병항쟁


서북지역은 흔히 황해도·평안도·함경도를 지칭한다. 이 지역은 개신교가 일찍 뿌리를 내려 의병항쟁보다는 계몽운동이 크게 발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함북의 경성의병, 함남의 홍범도 의병부대 그리고 평안도의 채응언 의병부대와 황해도의 평산의병 등의 활약은 어디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혁혁한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황해도는 계몽운동뿐만 아니라 후기의병의 활동이 두드러진 지역이었다. 이처럼 양대 민족운동의 흐름이 황해도에서 꽃을 피움으로써 황해도 출신 인사들이 신민회新民會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을 것이다. 결국 일제는 양대 민족운동세력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의병탄압을 강력히 추진하는 한편, 이른바 안명근사건을 빌미삼아 황해도의 유력한 계몽운동가들을 대부분 체포하였다. 그리하여 의병항쟁과 계몽운동의 흐름을 완전히 없애버리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황해도의 양대 세력은 결코 포기하지 않고 국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선도해갔다.

한편 함경도의 후기의병은 별로 주목할만한 내용이 없을 것으로 지레 짐작할 수 있다. 일제측 통계에 따르면 전국대비 1908년 교전횟수

5.6%, 교전의병수 8.1%였으며, 1909년에는 그것마저 통계조차 없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함경도에서도 괄목할만한 의병부대가 항일투쟁을 거세게 전개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함경도의 후기의병은 주민들의 생존권과 직결된 문제에서 촉발되었다. 다름 아닌 1907년 9월에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이 공포됨으로써 포수들의 유일한 생계수단인 총기류를 소지할 수 없게 된 불만이 폭발한 것이었다. 註153) 함경도의 삼수·갑산 등지의 산악지대에 거주하는 주민들 중에는 사냥을 업으로 삼아 생계를 꾸려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일제가 의병을 억제하려는 의도로 총기류를 수거하려하자 오히려 포수를 비롯한 주민들의 의병투신을 촉발하는 계기로 작용한 것이다. 또한 함경도의 군수들은 일진회에 소속된 자들이 많았는데, 註154) 일진회원의 비리非理와 친일행위에 따른 반감이 의병항쟁에 영향을 미쳤다.

1908년 10월 일제는 함남의 유력한 의병장으로는 차도선車道善·홍범도洪範道·최동률崔東律·원기봉元基鳳·송상봉宋相鳳·윤동섭尹東涉·김정호金正浩 등을 꼽았다. 註155) 이들은 해산군인이거나 포수들이 대부분이었다. 이 중에 최동률은 북청군 안산사 출신으로 원래 진위대 병졸이었으며, 원기봉은 북청군 이곡사 출신으로 포수였다. 이들은 1907년 12월 차도선이 봉기할 때 호응하여 100여 명의 의병을 규합·봉기하였다. 최동률은 북청군 남부와 홍원군 등지에서, 원기봉은 홍원·갑산 등지를 중심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송상봉은 장진군 동상사 출신의 사냥군으로 사격에 뛰어났다. 그는 양봉익 의병부대에서 활동하던 중 양봉익이 전사하자 스스로 의병장이 되어 이명보·홍범도 등과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주로 장진군 등지를 무대로 활동하였다. 윤동섭은 강릉 출신으로 개성진위대 해산군인이었다. 그는 약 150명 내외의 의병을 거느리고 문천文川 고원高原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김정호는 영흥 출신으로 광산노동자였는데 수십명의 의병을 규합하여 정평·영흥·장진 등지에서 일진회원의 처단에 주력하였다. 차도선과 홍범도 의병부대에 대해서는 앞서 함남의 대표적 사례로 언급한 바와 같다. 이 밖에도 차도선과 연계된 태양욱·양혁진·한영준 등이 삼수·갑산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함북지방의 경우 이범윤과 긴밀히 연계하여 의병활동을 전개한 경성의병에 대해 서술하였다. 두만강의 남북에서 활동하던 연합의병은 국외 한인사회의 도움을 받아 재무장하여 국내진공작전을 감행한 과정을 경성의병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함경도를 비롯한 북부지역 의병들이 간도와 연해주로 북상도강하여 독립군으로 전환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이다. 이는 의병에서 독립군으로 전환하는 대표적인 사례에 해당하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평안도는 19세기 후반 개신교의 수용으로 계몽운동 세력이 전통적으로 강하였다. 따라서 이 지역의 의병활동은 그리 강하지 않았다. 하지만 평남·성천·양덕·삼등·강동과 평북 자산·순천·개천·강계·희천·초산 등의 지역에서 소규모의 의병부대가 활동하였다. 註156) 일제가 파악한 주요 의병부대 가운데 유생출신으로는 김관수가 주목된다. 그는 1907년 10월 이후 약 500명의 의병을 통솔하며 평안도의 덕천·맹산·개천·안주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1908년 중반부터 일제의 귀순정책으로 인해 부하들이 이탈하면서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그가 주도한 의병부대는 도독과 전·중·후군장, 소모장과 군량관 등 제법 정연한 편제를 갖추었는데, 대체로 덕천과 맹산, 개천 출신의 유생들이 지휘부를 형성한 것 같다. 이들은 평안도에서 상당히 유력한 의병부대로 활동하였으나 의병항전에 관한 자료를 찾을 수 없어 아쉽다. 註157) 그리고 해산군인 출신으로는 노희태, 출신 불명의 천영석·서광도·신응두·김문복·장응철·장정원·김필호·김창기·양봉규 등도 평안도에서 활동하였다. 註158)

그런데 평북 강계와 초산 등에서 활동한 의병들은 압록강 건너 간도를 왕래한 까닭에 일제 군경이 쉽사리 진압하기가 어려웠다. 註159) 결국 국내 사정이 악화됨으로써 이들 역시 북상도강하여 독립군으로 전환하였을 것이다. 또한 이들은 강원 북부 및 함경도 의병부대와 연계하여 일제의 탄압에 맞서 싸웠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해산군인 출신인 윤동섭, 광산노동자였던 김정호 등이었다.

이상과 같이 서북지역 의병들은 압록강과 두만강 대안의 간도와 연해주 지방 한인사회와 밀접한 연관을 맺으며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특히 이들은 무기조달과 국내 정보의 교환, 연합전선의 형성을 통한 공동대응 측면에서 상호 협조적이었다. 그리고 서북지역 의병의 상당수가 북상도강함으로써 간도와 연해주 일대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여 장기항전의 토대를 구축하는데 기여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1910년대 간도와 연해주 독립운동의 중심세력으로 성장하였다.


1. 홍범도 의병부대

1) 홍범도의 생애

홍범도洪範道, 1868~1943는 평남 평양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뒷날 의병장이 된 후에 여간汝干이라는 호를 가지게 되었으나 어려서 아버지를 여읜 후부터 머슴살이를 할 정도로 가난하였다. 註160) 삼촌 집에서 자라다가 생활이 어려워지자 꼴머슴 생활을 하던 그는 고향을 떠나 사방을 전전하였다. 이와 같이 그는 청소년 시절을 머슴살이로 보냈기 때문에 서당이나 학교를 다닐 수 없어서 글을 알지 못하였다. 그나마 여기저기 떠돌며 한자를 익히지는 못했으나 겨우 한글을 깨우칠 정도였다.

그는 평양 감영에서 사병을 모집하자 머슴살이를 벗어나기 위해 나이를 속이고 입대하였다. 육체노동으로 단련된 그는 군인으로 선발되어 3년간 복역하였다. 이때 총기를 다루거나 사격술을 배울 수 있었으며, 기본적인 군사훈련을 익혔다. 이러한 군대경험이 훗날 그가 포수생활을 하거나 의병을 일으켰을 때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당시 군대생활 역시 고역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중 군교와 시비가 붙어 그만 두게 되었다. 다시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던 그는 황해도 수안군에 있는 어느 제지소製紙所에서 일할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제지공 생활도 오래가지 못하였다. 주인이 품삯을 주지 않아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자리를 찾아 유랑하던 홍범도는 한때 금강산 신계사神溪寺에 들어가 불목하니 노릇을 하며 호구를 해결하였다. 깊은 산중의 답답함을 떨쳐버리고 다시 대처로 나와 이번에는 함남 단천으로 가서 금을 캐는 광산의 노동자로 일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삼수三水 출신의 부인과 결혼하였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1893년경에 삼수로 이거하였다. 삼수는 척박한 화전지대여서 농사만으로는 생계를 해결하기 어려워 주민 대다수가 겨울에는 사냥을 하였다. 그 역시 농사와 사냥을 겸하다가 출중한 사격술과 사냥솜씨를 인정받아 산포수대山砲手隊에 들어가 직업적인 산포수 생활로 접어들었다. 얼마 뒤 그는 가족을 데리고 북청군 안산사安山社로 이사하였다.

안산사에서 산포수조직인 안산사 포계砲契에 가입하였다. 포계는 관청으로부터 승인을 받은 합법적인 산포수 조직이었다. 산포수들은 1년중 약 5개월을 산에서 지냈는데, 산포수들의 호탕한 기질과 자유분방한 분위기가 그에게 잘 어울렸다. 註161) 그는 포계의 동료들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아 포연대장捕捐大將에 뽑혔다. 포연대장은 관리들과 교섭하여 포획물의 일정량을 세금으로 정하고 이를 납부하는 일을 하는 직책이었다. 따라서 그는 산포수들의 포획물 세금을 낮추기 위해 노력하였고, 이 과정에서 산포수들로부터 신망을 얻었다. 그는 1907년 의병에 가담할 때까지 북청을 비롯한 삼수·갑산·풍산 일대에서 산포수를 직업으로 삼아 비로소 안정된 가정생활을 할 수 있었다. 註162)

홍범도가 의병항전에 투신하게 되는 직접적인 계기는 1907년 9월 일제가 공포한 소위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銃砲及火藥類團束法」 때문이었다. 그 법에는 ‘총포 및 화약류를 판매하는 자는 관찰사의 허가를 얻어야만 한다’ 및 ‘총포 및 화약류는 경찰관서의 인가를 받아야만 소유할 수 있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한국의 민간인들이 보유한 모든 무기를 회수하고, 그 위반자는 처벌한다는 것이다. 이는 민간인의 무장을 해제시킴으로써 의병항쟁을 불가능하게 하고, 나아가 한국의 식민지화를 보다 안전하게 추진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런데 함경도의 산포수 포계는 사냥을 위한 무기를 많이 소유하고 있었다. 1907년 10월 일제의 무기류 회수반은 함경도의 산포수들을 찾아와 총기의 납부를 요구하였다. 이에 따라 일제는 각 면의 면장들로 하여금 산포수들의 무기를 회수토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홍범도를 비롯한 산포수 50~60명은 일제의 요구를 거부한 채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북청군 안평사에 집결하였다. 註163) 이때가 1907년 11월 15일었다. 이튿날 이들은 안평사 면장이자 일진회 회원인 주도익을 처단하였다. 당시 면장 중에는 일진회원이 많았는데 이들은 단발을 강요하고 총기를 가혹하게 회수하였으며 주민들의 재산을 약탈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중에 안평사 면장 주도익은 음력 9월 하순 북청군에 엽관운동을 벌여 전 면장을 몰아내고 새로이 면장이 된 자로서 주민들의 원성이 자자하였는데 이때 처단된 것이다. 註164) 그후 이들은 안산사 면장 부자와 안산면에 거주하는 일진회원 5명을 총살하는 등 일진회원의 제거에 앞장섰다.

일제는 산포수의 일진회에 대한 반발로 인식하고서 산포수들을 회유하며 총기수집을 계속 진행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북청군 36사중 안평·안산 양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회수하였다. 註165) 안평·안산 양사 역시 11월 21일 돌려줄 것이라는 일제 경찰의 기만책에 속아 총기 73정을 납부하였다. 이에 총포 영치를 거부하는 산포수들이 총기를 회수하여 북청으로 돌아가는 일제 군경을 후치령厚峙嶺에서 기습함으로써 항일의병투쟁이 시작된 것이었다. 註166) 22일 후치령 전투에서 이들은 총기영치銃器領置 군경 3명과 우편물 호송 일본군 2명 외 1명 등 6명을 죽였으며, 그 이튿날에도 이들은 북청에서 혜산진으로 가는 일본군 장교 1명과 사병 2명을 처단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25일에도 후치령에서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일본군 2개 소대에 맞서 3시간동안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는 일본군 3명 즉사, 4명이 부상을 입었고 의병 역시 20여 명이 전사할 정도로 피해가 컸다. 또한 후치령 인근의 민가 27호가 불태워졌다. 註167)

그런데 11월 15일 이후 일진회원의 처단과 일본 군경과의 전투를 주도한 인물이 누구인지 분명하지 않다. 일제측 보고에 의하면 안평사安坪社 엄방동에 사는 임창근林昌根, 70세이 후치령 전투를 지휘한 핵심인물이라는 것이다. 註168) 그와 함께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로는 후치령도감 조정국趙正國이었다. 임창근이 안평사 포계의 전 계장契長이었는데 경험이 풍부하고 신망이 있었기 때문에 후치령 전투를 지휘한 것으로 믿어진다. 하지만 그는 전투를 지휘하다 불행히도 전사하고 말았다. 당시 홍범도가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안평면은 험준한 산골짜기에 위치하였는데, 갑산·삼수·장진·강계의 주요 통로여서 산포수들이 모두 모여드는 지역이었다. 11월 16일 안평면장 주도익을 엄방동에서 납치하여 진목동에서 처단할 때에도 임창근의 역할이 컸을 것이다. 그로 인해 임창근이 후치령 전투를 비롯한 항일투쟁의 선두에 서게 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임창근이 전사함으로써 그 이후에는 안산사 포연대장인 홍범도가 산포수의병을 지휘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산포수의병은 비리의 온상이자 친일앞잡이인 일진회원의 처단과 유일한 생계수단인 총기를 빼앗아가는 일제 군경의 타도를 목표로 의병을 일으킨 것이다. 이들은 생존권을 위협하는 일제와 친일세력에 맞서 함경도의 항일투쟁을 선도하였다.


2) 산포수의병의 결성과 활동

산포수의병은 처음에 68명 7개 분대로 구성되었다.



제1분대 분대장 차도선 부독副督

홍범도 부독副督

김춘진 참독參督

김문엽 정궁正宮

제2분대 분대장 김규연

제3분대 분대장 임용락

제4분대 분대장 나현서

제5분대 분대장 김치권

제6분대 분대장 임윤석

제7분대 분대장 고응렬 註169)



이것은 산포수의병의 최초 편제의 간부진인데, 이 외에 후치령 전투에서 전사한 임창근에 대한 예우로 도독都督을 선임하지 않은 것 같다. 註170) 초기에 이들은 7개 분대 십장제什長制로 편제되었는데, 지휘부인 제1분대를 제외하고는 모두 1분대당 10명으로 구성하였다. 제1분대의 분대장은 차도선車道善인데, 그는 갑산군 일일사一日社 포계를 맡고 있는데다 홍범도보다 연장자여서 분대장을 겸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7개 분대의 의병들이 대부분 안산사와 안평사 출신들이어서 산포수의병의 실질적 지휘자는 홍범도였을 것이다.

산포수의병은 점차 광산노동자·해산군인·화전민 등의 지원자를 받아들여 1908년에는 1천여 명에 달하는 대부대가 되었다. 의병의 규모가 급증하자 이들은 구한국군의 편제를 모방하여 분대25명-소대50명-중대100~150명로 편제하였다. 또한 군무를 관장하는 별도의 부서를 두어 이를 효과적으로 운용하였다. 군율을 관장하는 도감사都監司, 이를 집행하는 군중기찰軍中機察, 군량의 보급 운반을 맡은 군량도감軍糧都監, 일군의 동정을 정탐하는 유사遊士 등이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의병부대의 지휘관으로는 의병장을 두고 그 밑에 부의병장副義兵將을 두어 조직체계를 완비하였다. 註171)

이들은 후치령 전투를 시작으로 삼수·갑산·북청·단천·혜산진 등지의 험산준령을 무대로 유격전을 펼치며 일본 군경과 맞서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당시 홍범도는 산포수의병을 실질적으로 지휘하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다. 그는 자기 이름조차 쓸 수 없었지만 뛰어난 통솔력을 발휘하여 산포수의병을 이끌었다. 의병장 유인석은 그에 대하여“족하足下는 대의를 품고 거의해 충모용략忠謀勇略으로 사람들을 신복케 하였으며, 수많은 전투에서 왜적을 토멸하여 이름이 온 나라를 진동시켰다.” 註172)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홍범도가 이끄는 산포수의병은 1908년 3월 차도선·태양욱太陽郁 등 의병 지휘부가 일제의 회유공작에 말려들어 어려움에 처하였다. 일제는 무력만으로 이들을 진압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갑산·장진 군수를 내세워 회유공작을 펼쳤다. 즉 귀순歸順할 경우에 아무런 조건없이 자유인의 신분을 보장하겠다고 회유하여 의병 사이에 갈등이 빚어졌다. 홍범도는 그것이 일제의 술수임을 간파하고 강력히 반대했으나, 차도선·태양욱 등은 이러한 제안을 수락할 의사를 피력하였다. 당시 이들은 탄약과 군량 부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홍범도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차도선·태양욱 두 사람은 귀순을 원하던 약 200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1908년 3월 17일 귀순해 버렸다. 일제 군경은 당초 약속과는 달리 귀순한 의병들의 무장을 즉시 해제시켰다. 이에 반발한 태양욱은 총살되었고, 차도선·이성택 등은 홍범도

를 유인할 목적으로 구금시켰다. 차도선 등은 6월 7일 갑산수비대를 탈출하여 자신들의 행동을 크게 후회하고 홍범도 휘하에서 항일투쟁에 전념하였다.

하지만 차도선 등의 귀순으로 홍범도 의병부대는 크게 타격을 받았다. 150여 정의 무기를 압수당했으며 지휘부 17명을 비롯한 의병 200여 명을 잃은 것이다. 당시 일제는 홍범도를 유인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의 아내와 아들 등 가족들을 구류시켜 인질로 삼는 등 잔인한 짓을 서슴치 않았다.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그는 의병부대를 재편하며 항일투쟁의 의지를 굳건히 하자, 일제에 의해 그의 가족들이 희생되고 말았다.

1908년 4~5월 홍범도는 삼수·갑산·무산·북청 일대를 직접 돌아다니면서 산포수들과 청년들을 권유하여 의병에 가담시켰다. 그리하여 홍범도 의병부대는 1908년 4월 말 500여 명으로, 5월 중순에는 650여 명으로 증가하여 새롭게 출발할 수 있었다.

홍범도 의병부대는 1908년 4월부터 항일전을 재개하였다. 그해 12월 이들은 노령 연해주로 근거지를 옮길 때까지 삼수·갑산·북청 등지를 오가며 일제 군경을 맞아 치열하게 항쟁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일진회원을 비롯한 일본앞잡이들의 처단에 적극 나섰다. 그리하여 홍범도 의병부대는 한반도 북부지방의 가장 대표적인 의병부대로 이름을 떨쳤으며, 이들은 주민들의 열렬한 지지와 협조를 받아 활동하였다. 이에 일제는 동부 및 북부 수비관구의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2개월 동안 홍범도 의병부대를 섬멸하기 위해 진압작전을 펼쳤으나 기대한 목표를 달성할 수 없었다. 이들이 소규모 부대로 나누어 유격전술을 펼치며 그들의 추적을 효과적으로 따돌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경과할수록 홍범도 의병부대의 전력이 약화되어 갔다. 특히 장기간 계속된 전투로 말미암은 탄약의 부족 때문이었다. 이는 홍범도 의병부대의 가장 큰 어려움으로 작용하였다. 1908년 7월에 접어들면서 탄약사정은 더욱 악화되어 이들은 일제 군경과의 교전을 피해 삼림 속으로 잠복하였다. 의병장 홍범도는 탄약을 포함한 무기조달을 위한 모험을 감행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1908년 12월 그는 부하들을 삼수·갑산·무산 등지의 삼림 속에 분산·잠복시킨 채 20여 명의 부하를 데리고 노령으로 이동하였다.

그는 연해주로 건너가 최재형·이범윤을 비롯한 다수의 독립운동가들과 교섭하여 무기와 탄약의 공급을 요청하였다. 註173) 한편 그는 연해주 일대의 의병부대 및 국내의 의병부대를 연계시켜 대규모의 항일전을 수행하자고 요청하였다. 그의 기대와는 달리 그러한 목적을 달성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안중근安重根·엄인섭嚴仁燮 등이 인솔하는 의병부대가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하다 일본군에 패한 뒤 연해주의 항일분위기가 침체되어 있었던 때문이었다.

결국 홍범도는 1910년 3월 일부 부하들을 거느리고 서간도의 장백현으로 망명하고 말았다. 그는 망명지에다 약 20에이커의 토지를 구입하여 부하들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군사훈련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마치 둔전병屯田兵 제도와 흡사하게 운영한 것이다. 때로는 함북 경원의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하기도 하였으며, 평안도 의병장 채응언蔡應彦과 장백부長白府에서 회동하는 등 항일투쟁을 지속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註174) 하지만 더 이상 의병부대로서의 활동은 지속될 수 없었다. 경제적 압박이 심해지자, 그는 1913년에 노령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겨갔다. 그는 노동회勞動會를 조직하여 각종 노동을 감내하며 임금의 일부를 독립운동 자금으로 비축하면서 재기의 날을 기다려야 했다.

이로써 홍범도 의병부대의 의병활동은 종료되었고, 이후 이들은 독립군으로 전환되어 갔다. 이들은 의병에서 독립군으로 전환한 대표적인 사례인 것이다. 이러한 그를 당시 민중들은 다음과 같이 흠모의 정을 노래하였다.



홍대장이 가는 길에는 일월이 명랑한데 왜적군대 가는 길에는 비가 내린다

에헹야 에헹야 에헹야 에헹야 왜적군대가 막 쓰러진다

홍범도 장군님은 동산리에서 왜적수사대 열한 놈 몰살시켰소

에헹야 에헹야 에헹야 에헹야 왜적군대가 막 쓰러진다

왜적놈이 게다짝을 물에 버리고 동래부산 넘어가는 날은 언제나 될까

에헹야 에헹야 에헹야 에헹야 왜적군대가 막 쓰러진다. 註175)


2. 경성의병

1) 경성지역 의병의 조직

경성의병은 함경남도의 산포수의병과 더불어 후기의병 당시 함경북도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의진이다. 註176) 경성鏡城은 함북의 대표적인 학향學鄕으로, 남달리 비분강개하던 우국지사들이 많았다. 註177) 더욱이 이 곳은 두만강 대안의 간도·연해주 등 중국 러시와와 국경을 마주한 교통의 요지였다. 따라서 일제는 국경 수비의 거점으로 경성을 주목하였다. 일제는 한국의 식민지화를 가정하여 경성의 나남羅南에 1907년부터 1911년까지 대규모의 군사시설을 건설하였다. 그리하여 나남에는 일본군 제19사단이 주둔함으로써 제20사단이 주둔한 서울 용산龍山과 더불어 일제 침략군의 2대 거점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註178)

또한 일제는 함경북도에 집중적으로 군용철도를 부설하였다. 이미 러일전쟁 기간에 청진-회령간 철도를 개통하였으며, 1907년에도 경성-수성輸城 철도를 부설하였다. 이리하여 1907년을 전후하여 경성으로부터 청진을 거쳐 두만강변의 회령에 이르는 군용철도가 놓인 것이다. 註179) 이는 일제의 향후 침략정책을 수행할 때 군사활동에 필요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었다.

함경북도 두만강 연변 지역을 아우르는 대규모 철도공사에 일제는 인근 주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각종 불법을 자행함으로써 지역민들의 반일감정을 촉발시켰다. 경성의병의 일원이었던 김정규金鼎奎는 자신의 『일기野史』 註180)에서 다음과 같이 당시 분위기를 전하였다.



이번 여름에 일인이 경성 동쪽에 철도를 닦아 청진에 미치고 회령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또 나남에는 산을 뚫고 골짜기를 막아 크게 병영을 건설하여 남으로는 봉의치封義峙를 뚫고 북으로는 허산동許山洞을 메우면서 대규모로 역부役夫를 모으고 있다. 그러므로 일제 관리와 군인들이 마을마다 횡행하며 채찍질을 하여 (역부들을) 몰아가니 주민이 안도하지 못하여 원성이 사방에서 일어나고 있다. 註181)

일제가 경성 나남에 군사시설을 건설하면서 주민들을 강제로 동원한 조치에 대해 원성이 자자하였음을 알 수 있다. 주민들의 일제에 대한 불만이 의병봉기의 배경으로 작용하였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註182)

경성의병은 인근 지역의 의병봉기에서 영향을 받아 일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함경남도 북청에서 봉기한 산포수의병과 연해주의병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믿어진다. 1908년 1월경 경성의 우국지사들은 은밀하게 의병을 모의하고 있었다. 이무렵 연해주 이범윤李範允의 연추창의소煙秋倡義所로부터 돌아온 김삼만金三萬이 연추 지역의 의병 상황을 전하면서 경성의 거의를 촉구하였다. 註183) 또한 같은 시기에 함남 북청에서 올라온 김명수金明水·탁여근卓汝根 등이 김정규의 집에 모여‘결의토적結義討賊’을 모의하였다는 기록을 통해서도 의병의 배경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3월 초순 갑산전투에서 북청 산포수의병이 승리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분위기가 한층 고조되었다. 註184) 이처럼 경성의병은 거의 단계에서부터 연해주의병과 북청 산포수의병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것을 계기로 활동과정에서도 상호 긴밀한 연계를 맺었다.

1908년 3월 중순부터 경성 남부의 어랑사漁浪社·명간사明澗社·주북사朱北社를 중심으로 의병을 규합하려는 움직임이 구체적으로 일어났다. 註185) 이긍식·김정규·차백심 등의 주도로 각 마을에 의병 후원을 요청하는 차첩差帖을 전달하였다. 그리하여 주북사 출신의 최경희崔瓊凞 註186)가 김준언金俊彦 註187) 등과 함께 40여 명의 의병을 모아 경성군 주을온사朱乙溫社 일대에서 충의대忠義隊라는 이름의 의병부대를 결성하여 활동을 시

작하였다. 註188)

이에 따라 경성 주둔 일제 군경은 의병의 정보를 탐문하기 위해 출동하였다. 그들은 주을온사에서 체포한 김명학金明鶴 註189)으로부터 충의안忠義案을 빼앗았다. 이 충의안을 통해 최경희를 비롯한 경성의병의 편제 및 간부 명단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충의안

총령總領 최경희주북사·임봉송주을온사

이령貳領 김룡현주북사·임학유주을온사

삼령參領 김명학주북사·강문경주을온사

사령肆領 이태영주북사·윤용극오촌사

오령伍領 김성삼주북사·김봉익오촌사

의안義案 안태곤 외 28명 註190)



충의안의 규모는 39명으로, 당시 경성의병은 일제가 40여 명으로 파악한 내용과 거의 일치한다. 위의 편제로 볼 때 총령 최경희와 임봉송은 의병부대를 총괄하는 직책으로서 의병장으로 판단되며, 그 이하 이령부터 오령까지는 단위부대를 지휘하는 간부진으로 보인다. 그런데 총령을 비롯한 각령의 책임자 모두 2인씩으로 구성되었다는 점과 주북사와 주을온사 거주자들이 의병지도부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의안에 포함된 29명은 의병 병사층일 것이다. 이 가운데 최경희와 김명학은 일본 순사대에 의해 일시 체포되었다가 의병의 구출작전으로 탈출

하였다고 한다. 註191)

한편 김정규는 경성의병의 거의 단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한 인물인‘창시거의지인創始擧義之人’과 군자금 후원자인‘출전인出錢人’으로 나누어 정리해 놓고 있다. 註192)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는 이긍식·한태교·이남기·최경희 등 10명이며, 후원자는 서상국 외 8명이었다. 그런데 경성의병은 크게 두 개의 의진으로 편제된 것 같다. 하나는 최덕준을 중심으로 한 충의대, 다른 하나는 이남기李南基를 중심으로 한 공의대共義隊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1908년 9월 이후 연합하여 함께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註193) 이 점은 1908년 10월 경성의병의 다음과 같은 편제를 통해서 확인된다.



총무 이남기

재무 서상욱

사법 이긍직

중대장 최경희 강을엽

사령관 장석회

참모장 김정규

참모원 지약준 이군심 註194)



당시 경성의병은 이남기와 장석회를 각각 총무와 사령관으로 하는 두 개의 부대 편제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최경희가 이남기 휘하의 중대

장으로 편제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여러 계통의 의병부대가 상호 연합전선을 형성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는 일제 군경의 진압작전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경성의병의 새로운 방향모색이라 할 수 있다. 註195) 한편 경성의병의 지도부는 함경북도의 유력한 집안으로 명천明川에서 살고 있는 이용익李容翊 일족의 후원을 받기 위해 노력하였다.


2) 대한협회 경성지부 및 연해주 의병과의 연합전선 

대한협회는 주지하다시피 1907년 11월 서울에서 결성된 애국계몽운동 노선을 표방한 정치단체이다. 이 단체의 회장은 남궁억南宮檍이었는데, 국가의 부강과 교육 및 산업의 발전을 활동목표로 삼았다. 따라서 이들은 무장투쟁을 전개하는 의병의 활동에 대해서는 대체로 비판적이었다. 대한협회의 각 지방 지회에서도 의병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음은 물론이다. 심지어 대한협회 단천지회의 경우에는 의병의 해산과 귀순 등을 권유하는 일제의 정책에 적극 협조하였다. 註196)

이와 달리 대한협회 경성지회는 의병들과 긴밀한 연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경성의병의 특징가운데 하나이다. 註197) 대한협회 경성지회는 이희덕李羲德을 회장으로 1907년 12월경 결성되어 경술국치 직전까지 활동하였다. 註198) 이들은 대부분 유생이었으며 중류 이상의 각 지역 유지들이 참여하여 그 규모가 260~270여 명에 달하였다. 註199) 이처럼 경성지회는 대한협회의 60여 개의 지회·분지회 가운데 가장 방대한 규모였다. 이들은 항일의식이 비교적 강한 유생들을 주축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경성의병과 자연스럽게 연계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일반 회원 중에서 의병으로 활동한 것으로 파악된 경우도 장홍두·이용욱 등 6명이나 된다. 이들 외에도 다수의 회원들이 경성의병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제측은 이들의 긴밀한 연계에 대해, “경성 읍내에서 우리의 움직임을 밀보密報하는 것은 대한협회로, 동회同會는 항상 폭도에 기맥을 통하고”있다고 파악하였다. 실제로 대한협회 경성지회에서는 지역 주민들의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한편, 의병측에 제공하기 위해 군내 각지로부터 군자금과 군량미를 모으는 일에 적극 협조하였다. 註200) 경성지회 간부들이 의병 모집, 총기 및 탄약의 구입 등을 비롯한 의병활동에 필요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활동을 벌였던 것이다. 한편 이들의 군자금 모금운동은 학교 후원의 명목으로 치밀하게 전개되기도 하였다. 그 결과 경성지회는 총 13,600원에 달하는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그리고 경성지회는 자치민단 설립의 명목으로 자금 1만여 원을 모아서 의병의 군자금으로 전달하였다. 註201) 따라서 일제는 경성의병의 군량 조달문제를 대한협회 활동과 관련지어 항상 예의주시하였다.

경성지회 회원 가운데 항일투쟁 성향이 강한 20여 명은 별도로 일심계一心契를 결성·운영하였다. 일심계는 이남기 의병장의 숙부인 이승원을 비롯하여 이군심·정기창 등이 주도하였는데, 이들이 경성지회와 경성의병을 연결시켜 주는 고리 역할을 담당하였다. 註202) 심지어 이들 중에는 경성의병의 명천전투에 직접 가담하거나 일본 군경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다가 체포되기까지 하였다. 요컨대 대한협회 경성지회는 경성의병의 군자금 조달 임무뿐만 아니라 일부는 직접 항일투쟁에 투신하거나 일본 군경에 관한 각종 정보를 제공하였다. 이와 같이 대한협회 경성지회와 경성의병은 연합전선을 구축하여 반일활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경성은 육로와 해로를 이용한 연해주와의 교통이 편리하였기 때문에 일찍부터 인적·물적 교류가 활발하였다. 의병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경성의병 역시 연해주의병과 접촉하였다. 특히 경성의병은 무기구매, 연해주의병은 국내진공작전시 연합전선의 형성에서 서로 필요성을 인식하였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연해주의병의 일원인 허우許瑀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는 1908년 4월경 경성으로 들어와 이남기가 이끄는 의병과 접촉하였다. 註203) 또한 최경희 의병부대는 무기를 구입할 목적으로 이범윤 의병부대와 연계하였다.

경성의병은 본격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우수한 성능을 지닌 신식 무기의 확보에 적극적이었다. 이들은 여러 차례 연해주로 사람을 파견하여 무기구입을 시도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는 최승두 등이 연해주에 가서 무기를 구입한 일을 들 수 있다. 그는 총기와 탄약을 구매하기 위해 연추煙秋를 여러 차례 다녀왔다. 註204) 그 결과 이들은 총기와 탄환 1만여 발을 확보하였다.

한편 경성에는 연해주에서 장석회張錫會가 지휘하는 의병부대가 들어와 활동중이었다. 이들이‘관리병管理兵’이라 불린 것으로 보아 이범윤 휘하에서 활동하던 의병일 것이다. 그리고 함북 무산에는 동의회군同義會軍 300여 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들은 최재형崔才亨이 지휘하는 의병부대로서 역시 경성의병과 연합을 모색하였다.


3) 의병활동의 전개와 북상도강 北上渡江

경성의병은 독자적인 활동을 지양하는 대신에 연합전선의 구축에 적극적이었다. 이들은 연합전성을 형성하여 함경도의 남과 북에서 일본군 19사단을 포위·구축한다는 구상이었다. 註205) 즉 경성의병은 서남쪽으로는 삼수·갑산 일대의 산포수의병, 그리고 북쪽 연해주의 이범윤 의병부대와 협동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려는 전략이었던 것이다. 나아가 이들은 평안도와 강원도 지역의 의병 세력과의 연계도 구상하고 있었다.

이들 연합의병은 북부지역 일본군의 본거지인 나남의 19사단 사령부를 주요한 공격대상으로 설정하였다. 일본군의 출동을 틈타 연합의병이 나남을 공격·점령함으로써 경성 이북을 장악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다만 이들은 단일 조직으로 활동한 것이 아니라 여러 의진의 연합항쟁이었기 때문에 의병부대별로 활동을 구분해서 정리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경성 중심의 의병활동의 개략적인 흐름을 파악하고자 한다.

경성의병의 항일투쟁의 시작은 1908년 4월 8일 주남사 대선보전투였다. 당시 이들은 35명 규모였는데 일제 순사대 10여 명과 교전을 벌인 것이다. 주남사 대선보 전투는 최덕준 휘하의 의병들이 주도하였다. 5월 23일 경성의병은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註206) 이때 일본군은 “일군日軍 100명 중 생존자가 단 한 명에 지나지 않았다.”고 할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으며, 의병 또한 6명이 전사하였다.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일제 군경은 남석동일명 남곡동에 주둔중인 의병을 기습하였는데, 이때 최경희·김명학 등이 체포되었다가 겨우 탈출하였다.

1908년 8~9월 의병이 경성읍을 공격하리라는 소문이 무성히 퍼져있었다.


경성의병의 활동 지역

 


 당시 경성의병은 가장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의병측의 정보원들이 일제 군경의 동정을 파악하며 공격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일제 군경 역시 의병의 공격에 대비하여 경계태세를 늦추지 않았다.

경성에 주둔하는 일본군 수비대의 대비가 철저하자 경성의병은 명천으로 남하하였다. 9월 3일 200여 명의 경성의병은 명천 주둔 일본군 수비대와 일진회 사무소를 급습·소각한 후 철수하였다. 註207)

당시 함경도 일진회의 반의병활동은 매우 유별났다. 그들은 의병의 동정을 파악하여 일제 군경에 정보를 제공하거나 자위단 조직에 앞장섰다. 의병 탄압의 첨병으로 두각을 나타냈는데, 그러한 상황을 예시하면 다음과 같다.



지난 8월 의병이 명천으로 진출해 적을 공격하고 일진회 사무소를 소각한 이후로 남북의 일진회원은 더욱 분원憤怨을 머금고 의병의 동정을 몰래 정탐하여 낱낱이 왜적에게 기별하기 때문에 헌병은 날마다 의병을 포박하고 그 집을 불태우니 가히 놀랍고 두렵도다. 註208)



이와 같은 일진회의 반의병활동으로 말미암아 일진회는 의병의 주요 제거대상이었다. 1907년 7월부터 다음해 5월까지 일진회원의 재산피해가 5만여 원에 달하였으며, 의병에게 피살된 일진회원이 9,260명이나 되었다. 그중 함남에서만 5,270명의 일진회원이 피살될 정도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는데 그것은 그들의 반의병활동에 기인한 것이었다. 註209)

이밖에도 경성의병은 어랑사·칠반동 등지에서 크고작은 전투를 벌였다. 뿐만 아니라 전신선의 절단과 전선주의 파괴 등과 같은 일제 통신시설의 마비에 앞장섰다. 이로 말미암아 원산-경성, 북청-경성, 그리고 명천-경성 간의 전신이 불통되었으며, 일제 스스로 “명천 이북의 전신선은 모두 절단되었으며 통신기관은 마비되었다.” 註210)고 할 만큼 커다란 혼란을 야기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경성의병의 활동은 1908년 10월을 고비로 차츰 쇠퇴하여 갔다. 이 무렵 연해주의병의 국내진공작전이 급감하였을 뿐만 아니라 홍범도 의병부대 역시 북상하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일제 군경의 의병진압작전은 1908년 후반부터 더욱 강화됨으로써 항일전을 지속하기가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였다. 당시 일제 군경은 의병으로 변장시킨 토벌대를 편성하여 의병을 색출하는데 혈안이 되어 주민들조차 극도의 공포 속에 떨어야 했다. 註211) 이에 경성의병을 주도한 인물들은 휘하 의병을 해산하기도 하고, 또는 각지로 흩어져 은신처를 찾으면서 장기항전 계획을 강구하였다. 註212) 이때 최경희·장석회 등 경성의병 지도부는 의병을 이끌고 무산茂山 방면의 험준한 산악지대로 들어가 잠복하였다.

하지만 일제 군경의 의병색출작전이 갈수록 강화되자 의병장 최경희는 10월 5일경 명간사明澗社 우동雩洞에서 90여 명의 의병을 해산하였다. 이들 중 절반 가량은 두만강을 건너 간도 방면으로 북상하였으며, 나머지는 각지로 흩어지고 말았다. 최경희는 장석회가 거느렸던 의병을 데리고 11월 말 연해주로 망명하였다. 註213) 이로써 경성의병의 활동은 종식되었다.

결국 1908년 말경 경성의병의 주요 인물들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 북상,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와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하였다. 그뒤 이들은 현지에서 항일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함으로써 의병의 활동을 발전적으로 계승하였다. 註214) 특히 경술국치를 전후한 시기에 연해주일대에서 활약한 십삼도의군十三道義軍과 성명회聲明會의 활동에 적극 동참하였다. 1910년 6월에 결성된 십삼도의군의 경우, 경성의병장 이남기가 장의군총재壯義軍總裁로, 김정규는 장의군종사壯義軍從事로 활동하였다. 또한 이남기·최경희·김정규 등은 십삼도의군의 후신인 성명회에도 가담·활동하였다.

이와 같이 경성의병은 연해주의병과 긴밀한 연계하에서 함북지역을 되찾기 위해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특히 이들은 대한협회 경성지회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다는 점에서, 또한 의병과 애국계몽운동 양대 노선이 합일되는 항일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1908년 말부터 의병들이 대거 북상도강北上渡江을 단행하여 북간도와 연해주 일대에 항일투쟁의 근거지를 건설하는데 크게 기여했다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3. 채응언 의병부대

1) 채응언의 생애

채응언蔡應彦은 이름이나 생몰연대조차 불분명한 편인데, 채응언은 1883년에 태어나 1915년에 순국하였다. 註215) 그의 출생지는 자료마다 다르게 나타나는데, 함남 안변과 고원, 강원도 통천, 평남 순천 등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의 판결문 註216)에 따르면 그의 주소는 평안남도 성천군成川郡 출신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성천군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황해도 곡산군 미야골로 이사했다고 하는데, 註217) 아마도 그렇게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지금까지 그는 해산군인 출신으로 알려져 왔다. 註218) 체포된 직후에 보도된 신문기사 중‘조선보병대 군조’ 註219) 출신이라는 내용에 근거하여‘육군 보병 부교’로 알려지게 된 듯하다. 그러나 그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조선 군대의 정교正校’설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

다. 註220) 따라서 그를 해산군인으로 볼 수 없다.

반면 일제측 자료에는 그를‘파락호破落戶의 두목으로서 도박을 전업’ 註221)했다든가, ‘농가에서 태어나 협객俠客으로 도처를 배회’했다거나 또는‘원래 농부’ 註222)였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당시 신문에 실린 아래와 같은 기사도 참고된다.



적괴 채응언은 순천군 소농가에서 성장하여 어려서부터 놀기를 좋아하고 노름을 일삼고 기운이 남보다 건장하므로 그 근처 무뢰한의 두목이 되었고 위인이 총명하므로 항상 의협한 기운이 있는 일을 하고 빈민을 이용하여 부자를 협박하는 등 폭행이 무수하더니 일한합병할 때부터 자칭 의병이라고 노름군 백수십명을 수하에 거느리고 순천읍내를 노략질한 후에 인하여 부지거처리 그 이듬달明治 : 저자주 43년 9월에 부하 백여 명을 데리고 황해도 선암동헌병분견소仙岩洞憲兵分遣所를 급습 註223)



위의 신문 기사에는 일제에 의해 편파적이고 악의적인 내용이 많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위의 내용 중에 기운이 남보다 세고 위인이 총명한데다 항상 의협적인 일을 하였다는 내용은 주목할 만하다.

의병에 투신하기 전 그는 성천의 가난한 농가에서 농사를 짓던 건장하고 용기있는 청년이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생활고에 찌든 빈농들의 이해를 대변하다가 고향을 등지게 되어 화전농을 전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그는 빈농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농민들의 이해를 대변해주는‘의협적 농민’으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2) 채응언의 의병활동

채응언이 태어나 활동하던 19세기 후반은 그야말로 격변의 시기였다. 동학농민혁명의 불길이 전국을 휩쓸었고, 한반도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전장터로 유린되었다. 물론 그는 가난한 농민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공부할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가 ‘무학無學, 문맹한 사람으로 산야에서 생장하여 견문이 없고 지식도 결핍하여 천하대세에 어둡고 천리인사天理人事에 통하지 못하나 의병을 일으켰다’ 註224)라고 말했듯이, 그는 무학자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가 남긴 격문이나 판결문의 내용을 보면 성리학적 사고가 강하게 배여 있으며, 나름대로의 역사적 안목과 세계관, 그리고 투철한 신념을 지닌 소유자였다. 註225) 그는 의병을 일으킨 후 발송한 격문에서 오상五常중에 충과 효가 우선이라고 강조하였다. 註226) 또한 판결문에서 그는 충의와 열절烈節을 조선의 특징으로 강조하면서, 고대한일관계에서 일본은 야만이고 한국은 문명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아울러 그는 근세에 이르러 일본이 왜란을 일으켜 영원히 화해할 수 없는 관계였는데, 더욱이 최근 들어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한데다 통신기관을 비롯한 경찰권과 사법권 나아가 국가의 간성인 군대까지 해산시킨 점을 강력히 규탄하였다. 그는 일본이 영국과 독일과 같은 부국강병의 국가로 인식되고, 조선은 폴란드와 이집트와 같은 쇠망의 국가로 전락된 점을 매우 안타까워하였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그는 한국의 기강해이와 정치적 부패뿐만 아니라 일제의 정치·경제적 침탈에 대하여 더욱 강력히 비판하였다. 한마디로 그는 반봉건·반침략적 인식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을사조약 및 정미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그는 의병에 나서기로 결심하였으나 독자적으로 의병을 일으키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 같다. 의병을 일으킬만한 학문적 명망이나 경제적으로 부유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1907년 음력 7월경 다른 의병부대에 투신하였다. 그가 체포된 직후의 신문기사에‘군대해산이 된 후 폭도의 틈에 들어’ 註227) 갔다거나,‘채는 명치 40년경 폭도의 거괴 김태묵金泰默의 부하가 된 이래 강원·함남·황해·평남 각도를 횡행’ 註228)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이와는 달리 판결문에,



융희 원년경 의병 대장 석유碩儒 유인석이 우리 태황제현금 이태왕 폐하의 의대조衣帶詔, 密詔를 받들고 의병을 천하에 모집한 고로 사방에서 동지들이 향응하여 혈성으로써 봉기할 무렵, 피고는 그때에 강원도 북변에서 일어난 서태순의 부하에 속하여 하늘께 맹서하고 국치國恥를 설원雪冤하기로 부하를 고무하여 독립국의 면목을 세우기로 할 것을 피로써 맹서한 뒤 각지로 돌면서 싸웠던 것이다. … 명치 40년 음력 7월경 적도 전병무全兵武의 권유에 의하여 그 무리에 참가하고 다음해 음력 3월까지 잡역에 복무하고 그 뒤에 앞서 전병무의 명령에 의해 모집한 포수 약 30명 및 전병무의 부하였던 전상모 외 1명을 피고의 부하로 하고 재물탈취를 기도하고 이래 이들을 인솔하여 총기를 휴대하고 각 지방을 횡행중



이라 하여 그가 김태묵·서태순·전병무 의병부대에 가담하였다는 것이다. 그의 판결문에 따르면, 그는 서태순 혹은 전병무 의병장의 부하로 투신하였는데, 그의 의병장이 황해도 곡산에서 일본 수비대와 교전하다가 전사하고 말았다. 서태순은 유인석으로부터 받은 군율軍律, 이른바 의병변수규칙義兵邊守規則 등 제반 서류를 받아 활동하였는데, 그러한 문서들은 서태순의 순국이후 채응언에게 인계되었다. 註229)

이와 같이 그는 유인석 계열의 의병부대에 투신하여 처음에는 잡역으로 활동하다가 점차 능력을 인정받아 소모장으로 활약하였다. 그가 격문에서 유인석의 거의를 특별히 언급하고 재판과정에서도 유인석의 거의를 높이 평가한 점으로 보아 그는 유인석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 같다. 註230) 한편 김태묵은 김진묵金溱默의 오자誤字이거나 동일인으로 추정된다. 김진묵은 왕회종王會鍾과 더불어 의병장 허위許蔿를 경기도 삭녕朔寧으로 초빙해서 13도창의대진소를 결성을 주도한 인물이다. 註231) 이들은 1907년 말 서울진공작전을 결행했는데, 이때 채응언과 김진묵이 만났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채응언은 1908년 봄부터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지휘한 것 같다. 그가 남긴 거의 유일한 격문이 이때 작성된 것으로 보아 그러하다. 격문의 말미에‘진동본진분파대장鎭東本陣分派大將 채응언蔡應彦’임을 표방하고 있다. 1907년 11월경 13도창의대진소의 결성을 주도했던 이인영은 경기·황해도를 책임맡은 의병장 허위를 처음에 진동창의대장에 선임했다가 곧이어 황해도의 진동창의대장에 권중희를 임명하였다. 그러한 명칭으로 보면 채응언은 황해도에 본진을 두고 활동하는 의병부대일 것이다.

당시 채응언과 밀접한 연계를 구축하며 활동했던 의병장 강두필姜斗弼은 진동창의장鎭東倡義將이라 표방하였다. 註232) 강두필 의병장의 행적 역시 거의 알려진 바 없지만 일제측 자료에 따르면 그는 채응언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황해도를 활동근거지로 삼게 된 배경은 그가 의병에 투신하기 전 황해도 곡산에서 생활한 것과 관련이 깊을 것이다. 아마도 그의 의병부대의 병사층은 곡산의 가난한 농민들로 구성되었을 것이다. 그로 인해 그는 황해도와 관련된 의병장으로서‘진동본진분파대장’임을 내세우지 않았을까 한다.

채응언 의병부대는 의병이 지켜야 할 군율 15개조를 천명하였다. 그 내용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1. 군물을 은닉한 자는 왜적과 더불어 참수한다.

2. 의진을 엿보아 왜적에 알린 자는 바로 참수한다.

3. 의병을 빙자하여 백성을 약탈한 자는 바로 참수한다.

4. 장수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자는 바로 참수한다.

5. 몰래 술을 마시고 떠들거나 예를 잃은 자는 바로 참수한다.

6. 적과 접전할 때 겁을 내어 후퇴한 자는 바로 참수한다.

7. 몰래 귀가한 자는 바로 참수한다.

8. 일진회원을 보고도 죽이지 않은 자는 바로 참수한다.

9. 태만하여 파발에 응하지 않은 자는 바로 참수한다.

10. 행군할 때 떠드는 자는 바로 참수한다.

11. 무기를 정제하지 않고 태만히 한 자는 바로 참수한다.

12. 파수를 볼 때 항상 시간을 지키지 않는 자는 즉시 참수한다.

13. 파수를 볼 때에는 두시간씩 교대하여 보초를 선다.

14. 사사로운 일로 서로 싸운 자는 형벌에 처한다.

15. 약속을 하고서 지키지 않은 자는 형벌에 처한다.



위와 같은 군율은 의병의 행동수칙으로 전투시 행동요령을 숙지시키고, 의병의 기강을 세우기 위한 의도로 작성되었을 것이다.

채응언은 격문을 통해 원수를 갚아 3천리 강토를 회복하자고 선언하였다. 註233) 나아가 그는 도탄에 빠진 인민을 구하고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모든 동포들이 함께 창의하는 나라가 되자고 호소하였다. 다시 말해 그는 보국구민輔國救民을 표방하면서, ‘결코 무단히 인명 재산을 탈취할 리가 없고 악의악식惡衣惡食을 달게 여기고 부하와 침식을 함께 하며 가는 곳마다 털끝만치도 범한 바가 없었다’ 註234)고 자부하였다.

그런 때문인지 그의 의병부대에 군자금을 제공하겠다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판결문에서‘각처의 인사들로부터 군자금을 스스로 원하고 기부할 것을 간청하는 것이므로, 일일이 조사하여 수령하고 관계없는 것은 군자로 충당하고 온당치 않은 재물은 사절하나, 불의不義의 재산을 가진 자에게 가서 청구하여 빈민에게 널리 나누어 주고, 피고는 1푼1리도 착복한 사실이 없다는 것은 세상이 모두 알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군자금은 기부와 악질부호의 재산을 징발하여 사용하였으며, 징발한 군수품을 빈민들에게 나누어 준 경우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1915년 7월 5일 평남 성천군 영천면 처인리에서 군자금을 조달하던 중에 발각되어 체포되고 말았다. 註235) 그 밖에도 이들은 마을 주민들로부터 짚신이나 음식 등을 제공받기도 하였다.

한편 채응언 의병부대의 규모는 대체로 최대 100명 정도의 규모였으나, 평상시에는 50명 내외였던 것 같다. 註236) 그가‘분파대장’임을 표방하

였듯이 의병 규모의 확대보다는 소수정예주의를 지향하였다. 이는 유격전술의 운용과 일제의 추적을 따돌리는 데에도 보다 유리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때로는 그가 300~400명의 병사를 거느린 경우도 있었으며, 황해도에서 이진룡·한정만·김정환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활동할 때에는 약 500명의 병력을 이루기도 하였다. 註237) 그의 부하들은 대부분 포수이거나 가난한 청장년 농민층으로, 그가 의병활동을 벌이던 지역의 주민들이었다. 註238)

채응언 의병부대의 활동이 워낙 민첩했기 때문에 일제는 ‘은현출몰이 지극히 교묘하여 수비대 및 헌병의 엄밀한 수색도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註239)고 토로한 바 있다. 일제가 채응언 의병장을 체포하기 위해 투입한 비용만 하더라도 10만원을 상회할 정도로 온갖 수단을 모두 동원했음을 알 수 있다. 註240) 결국 일제는 의병장 채응언을 비롯한 황해도 지역에서 활동하는 의병부대를 진압하기 위해 1911년 9월 하순부터 한달이상 보병 제2사단을 투입하여 대규모의 군사작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기대한 성과를 전혀 거두지 못하였다. 그만큼 이들은 소수정예의 유격전술을 효과적으로 운용하였던 것이다.

채응언 의병부대의 의병활동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이들은 반일투쟁에 적극적이었다. 특히 이들은 일제를 몰아내고 의병의 무장을 강화하는 데에 노력하였다. 이를 위해 활동지역 내의 일제 군경기관을 공격하였다. 예를 들면 1908년에는 황해도 안평순사주재소安平巡査駐在所 공격을 시작으로 수안헌병파견소遂安憲兵派遣所를 습격하

였다. 註241) 그리고 1910년 4월 28일에는 함남 안변군 영풍사 마전동순사주재소를 습격하여 일본인 순사를 총살하고 무기를 노획하였으며, 전주 23본을 절단하는 등 일제의 통신시설 파괴에도 앞장섰다. 또한 그해 6월 13일에는 황해도 선암헌병분견소를 기습하여 일본인 헌병과 헌병보조원을 사살하고 30년식 보병총 13정, 탄환 5,800발을 노획하였다. 註242) 이어 6월 22일에는 강원도 남산역南山驛·고산역高山驛 헌병분견소의 연합토벌대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는데, 당시 일제 헌병대는 2,500발의 탄약을 소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헌병보조원 2명과 일본인 헌병 1명이 피살되는 등 참패하고 말았다.

일제에 강점된 후에도 채응언 의병부대의 항일투쟁은 그치지 않았다. 1910년 9월에 강원도 이천군 광북수비대를 공격하여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다. 註243) 그는 일제가 불법적으로 병합을 했기 때문에 의병투쟁에 더욱 진력하여 국권을 회복할 생각이었음을 피력하고 있다. 한편 채응언은 일제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인근에서 활동중인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활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그는 대체로 진동창의장鎭東倡義將 강두필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반일투쟁을 전개하였다. 註244) 이와 같이 채응언 의병장은 일제강점 이후에도 뜻을 같이하던 다른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불굴의 투지를 불태웠다.

채응언 의병부대는 반일투쟁 외에도 다양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의병활동을 지속하기 위해 군자금이나 군수품 조달에 노력하였다. 그리고 일제와 내통한 자나 밀고하는 세력인 일진회원을 처단하거나 밀고한 주민들의 가옥에 방화하기도 하였다. 물론 자신의 의진에 속

한 의병을 불문하고 악행을 저지르는 경우에는 엄격히 처벌하였다. 註245) 그는 그러한 처벌에 대해 국가대사를 그르치지 않고 후환을 없애기 위한 것일 뿐 사사로운 원한으로 그러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한편 채응언의 의병활동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이 주목된다.



채응언은 어제 신문에 보도한 바와 같이 그 부하 10여 명 혹은 수십명씩 분파하여 평남지방으로 흩어져 들어가서는 성천군 화창분견소를 습격하기 위해 숙장宿將 박향원에게 17명 부하를 부여하고 자기는 약간 정예한 부하를 인솔하고 지난 18일 양덕군 화촌면에 들어가 그곳 사립학교에서 수업상황을 방관傍觀하다가 하학下學함을 기다려 자기의 부하를 지휘교련하여 그 학동으로 관람케 하고 학동의 체조를 관광한 후 서서히 퇴거하였으며 그 부하는 성천 및 각지에서 10수명씩 발견되는데 촌민에게 하등 손해를 가하지 않고 성언하기를 여등汝等은 대한제국 독립을 위하고 우리 동포를 구호하려 하는 자라 하더라더라. 註246)



채응언은 자신의 의병부대를 나누어 한 부대는 일제의 헌병분견소 공격에 투입하는 한편, 나머지 의병들을 데리고 평남 양덕군의 어느 사립학교를 방문하였다. 이들은 수업이 끝난 후 학생들에게 자신들의 군사훈련을 관람시키고, 자신들은 학생들의 체조를 구경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매우 주목되는 사실이라 하겠다. 당시 계몽운동가들은 전국에 걸쳐 수많은 신식학교를 설립하여 근대교육을 추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특히 관서 지역의 계몽운동가들이 교육구국운동을 주도하였는데, 이들은 교련과 체조 과목을 강조하였다. 이는 즉각적인 무장투쟁을 지향하는 의병들의 입장과 약간 다른 것이어서 서로 비판적이었다. 그럼에도 채응언 의병부대는 신식학교의 학생들에게 의병의 군사훈련을 보여주고, 자신들은 학생들의 체조를 관람했다는 것이다. 의병계열은 계몽운동에서 추진하는 신식교육을, 계몽계열은 의병의 군사교육을 서로 인정해준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물론 그 이전부터 그러한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지만, 가장 강력하게 항일투쟁을 전개하던 채응언 의병부대와 가장 대표적인 계몽운동을 추진하는 평안도의 교육운동세력 사이에 그러한 관계가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와 같이 채응언 의병부대는 계몽운동 계열에서 추진하는 신교육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인식하였음을 알 수 있다. 나아가 자신들이 대한제국의 독립을 위하고 우리 동포를 구하기 위해 의병투쟁에 나섰음을 강조하면서 주민들에게 전혀 피해를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보국구민적輔國救民的 의병항쟁에 나섰다는 사실을 학생들에게 크게 강조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판결문이나 일제측 자료를 보면 이들의 주된 활동지역은 강원도 이천, 함남 안변, 평남 성천, 황해도 곡산 등지였다. 그 가운데 이들은 주로 황해도 곡산군의 백년산百年山 일대를 근거지로 이용하였다. 註247) 이들은 1910년 이후에도 매년 2~3회 정도 부호들로부터 군자금을 징발하였다. 또한 이들은 1913년 6월에 황해도 곡산군 대동리 헌병분견소를 공격하여 헌병과 보조원을 처단하고 총과 탄약을 노획하였으며, 1914년에도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평원읍내까지 진출하였다. 註248) 이들이 평남·강원·황해·함경도 등 도계道界를 넘나들며 활동한 배경은 아마도 군대와 경찰의 관할구역을 역이용하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더욱이 이들은 신무기로 무장한 후 소규모의 정예 의병을 편성하여 도계를 넘나들며 게릴라전술을 구사하였기 때문에 일제 군경은 이들을 쉽사리 진압할 수 없었다.


채응언 체포기사

 


이에 맞서 일제는 채응언 의병장을 체포하기 위해 군경의 진압작전뿐만 아니라 온갖 방법을 동원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제는 거액의 현상금까지 내걸고서 채응언 의병장의 체포에 전력을 기울였다. 1914년 11월 일제 경찰은 채응언 의병장을 체포하여 경찰서에 인계하면 현상금 280원 전액을 지급하고, 그의 소재처를 알려주거나 체포에 공을 세운 자에게도 공로의 크고 작음에 따라 현상금을 나누어주겠다고 공표하였다. 註249) 현상금을 내건지 반년이 지났지만 일제는 채응언 의병장을 체포하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1915년 7월 5일 그는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평남 성천군 영천면 처인리의 부호를 찾아갔다가 성천분대 아파출장소丫坡出張所 일본 헌병 전중롱웅田中瀧雄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註250) 그는 일본 헌병과 사투를 벌이다 부상을 당해 체포된 것이다. 당시 일제는 채응언을 체포하기 위해 1914년 9월부터 평양헌병대 대교大橋 헌병대장의 직속으로 5개 수색반을 운용하였다. 1개 수색반은 헌병상등병 1명, 보조원 4명으로 편성되었다. 그런데 성과가 전혀 없는데다 예산이 부족하자 1915년 4월에 일제는 1개 수색반을 헌병 상등병 1명, 보조원 2명으로 축소 편성하여 3개 반을 운용하는 중이었다. 일제는 이들을 채응언 의병부대의 근거지로 추정되는 성천군 요파 귀인 곡창 등 세 출장소에 배속시키는 한편, 현상금도 내걸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채응언 의병장이 체포된 것이다.

이와 같이 채응언 의병장은 유인석 계열의 한 의병부대에서 잡역으로 출발하여 소모장을 거쳐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지휘하는 의병장으로 활동하였다. 결국 그는 일제의 집요한 추적끝에 1907년 음력 7월부터 1915년 7월 5일까지 만 8년 동안의 의병활동에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아마도 그는 가장 오랜 기간 투쟁한 의병장 가운데 한사람일 것이다.


3) 채응언의 옥중투쟁

의병장 채응언은 체포될 당시 전중 헌병에게‘매우 애를 썼구나’라고 말하는 등 대담하게 행동하였다. 註251) 평남 성천에 일시 구금되었던 채응언 의병장은 7월 8일 평양헌병대 본부로 이송되었다. 당시의 상황이 다음과 같이 보도되었다.



자동차로 평양헌병대본부에 도착하였는데, 이 유명한 괴물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이 골목골목에 가득하여 시중 분잡이 대단하였더라. 채응언은 엄중히 수갑을 차였는데 보기에 한 40가량쯤 되었고 갈색 헌병복으로 튼튼한 몸을 쌓으며, 사납고 겁 없고 담차고 고집 센 성질이 그 얼굴에 나타났더라. 얼굴은 포박할 때에 서로 싸운 까닭으로 난타되어 왼편 눈퉁이가 좀 상하여 거무스럼하게

부어올랐더라. 곧 유치장에 구금되었는데 반듯이 드러누운 대로 꼼짝도 아니하며 이미 운수가 다하였다 하여 태연한 모양이더라. 註252)



평양헌병대로 이송되자 시민들의 관심이 대단하였는데, 그는 격투과정에서 얼굴에 상처가 생겼지만 담대하고 용기있는 인물로서 이미 생사를 초월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채응언 의병장은 7월 9일 오후까지 음식을 거부하다가 단식을 푼 이후에 하루 2회 식사를 하며 조사를 받았으나 동료에 관해서는 일체 말하지 않았다. 註253) 일제 헌병대의 조사가 끝나자 그는 평양감옥으로 이감되었다. 그의 부하였던 임병린林炳麟 역시 그러하였다. 註254) 한편 채응언 의병장이 은닉하고 있던 무기는 총 21정, 칼 3자루, 차는 칼 11자루, 탄환 498발 등이었다고 한다. 이는 채응언 의병부대가 상당한 무장력을 갖추고 반일투쟁을 전개했음을 의미할 것이다.

채응언 의병장과 연루자 9명에 대한 공판이 1915년 8월 28일부터 진행되었다. 그는 재판과정에서 시종일관 침착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註255) 그는 마치 의적義賊과 같은 태도로 재판을 받았는데, 재판을 참관한 일본인과 한국인이 500명 이상이었다. 그는 살인·강도죄를 적용받는 것에 불복하였으며,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살을 기도하였다. 註256)

채응언 의병장에 대한 재판이 9월 21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열렸는데, 이때도 방청자가 매우 많았다. 註257) 그는 시종일관 살인·강도죄를 적용하는 점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였으나, 평양복심법원과 고등법원 역시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사형을 확정하였다. 결국 채응언 의병장

은 11월 4일 오후 2시 평양감옥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교수대에 올라갔는데 태도가 극히 태연하며 … 채응언이가 ‘나는 의병인즉 강도 살인의 죄명으로 사형을 받기는 싫다’ 하고 상고는 하였으나 사형을 면하지 못할 줄은 짐작한 모양이더라. 감방 중에 있어서도 책을 보는 등 태연하더라. 註258)



그는 사형을 당하기 직전까지도 태연함을 잃지 않았으며, 일제가 적용한 강도·살인죄를 전혀 승복하지 않았다. 이는 일제의 사법권을 부정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일제의 지배정책을 거부한 것이라 하겠다.

그는 “신은 죄를 지은 것이 아니므로 조금도 수치스러운 마음이 없으며 의를 위해 죽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註259)고 피력하였다. 또한 그는‘의병장이 되어 침식을 잊어버리고 백성을 위해 충성을 다한 책임을 절감하며 중대한 임무를 수행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나아가 당시 인민들이 애국우민愛國憂民하는 그를 적극 지지하였으며 어린 아이까지도 그를 환영했다고 자부하였다. 특히 “자기 나라를 위하고 자기 민족을 사랑하는 자를 강도·살인 기타 종종의 오명을 씌우는 법률에 불복하였으며, 생과 사는 천하의 이치이므로 위업을 성취하지 못한 것을 슬퍼할 뿐 의로써 죽는 것이 기쁘므로 추호도 여한이 없노라.”고 당당하게 말하였다. 그리하여 “위정자의 본령이 충효 두 글자에 불과하므로 구차한 법을 부당하게 적용하지 말고 내란죄로 처벌하라.”고 요구하였다. 이와 같은 의병장 채응언의 외로운 법정투쟁은 일제 당국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그것은 일제가 의병을‘폭도暴徒’, 의병장을 ‘적괴賊魁’로 간주함으로써 의병의 야만성과 불법성을 부각시키려는 의도가 작용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상과 같이 일제는 그를 체포함으로써 의병항쟁이 종식된 것으로 간주하였다. 따라서 그가 체포된 1915년은 전환기 의병의 대미에 해당하는 것이라 하겠다. 현재 한말 의병전쟁의 전환기의병이 종식되는 시기를 1914년 혹은 1915년으로 약간 다르게 이해하고 있다. 일제는 채응언의 체포를 매우 높게 평가하였다. 이러한 사실만으로도 1915년을 전환기의병의 종점으로 삼아도 좋을 것이다. 특히 채응언이‘마지막 의병장’이라는 상징성을 간과할 수 없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그의 체포 이후에는 이렇다할만한 의병활동을 찾아보기 어렵다. 아울러 그는‘마지막 의병장’답게 자신의 의병활동이 정당하였음을 일제가 교수형에 처할 때까지 계속 주장하였다. 요컨대 그는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의협적 농민과 우국지사를 거쳐 보국구민의 의병장으로 8년동안이나 일제에 맞서 투쟁하였다. 농민출신 의병장 채응언을 통해서 근대민족운동의 심화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4. 평산의병

황해도에는 이미 의병투쟁이 전개되고 있었다. 우동선禹東鮮은 황해도 문화군 출신으로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구월산을 무대로 의병을 일으켜 신천·재령·안악·은율 등지에서 1908년 후반까지 활동하였다. 그는 조윤봉趙允奉·강만석姜萬石 등 유림들에 의해 정동의려대장正東義旅大將으로 추대되었는데, 그가 용맹스러운데다 전략전술에 능한 것으로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그는 소대장에 김두행·조윤봉·장동찬·고익균·강만석·이진태 등을 선임하여 의병부대를 이끌었다.

이들의 의병활동이 거세어지자, 일제는 황해도 출신의 목사인 서상륜徐相崙을 선유위원으로 파견하여 귀순을 권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회답문을 보내었다.



내가 국민 중의 한 사람으로서 비록 지극히 완고하고 지극히 어리석지만 국세國勢가 위태로운 것을 통분하고 민생이 억압당하는 것을 억울하게 생각하니, 충의의 기운이 격동하고 온 몸에 끓어오르는 피를 억제할 수 없도다. 이래서 창의의 깃발을 들고 일어나 감히 의병이 되어 … 지금 본인은 단연 군사를 해산시키지 않고 이 서한을 각 의병진에 돌려서 모두 다 알도록 할 것이니 그리 알기 바라노라. 註260)



의병항쟁이 정당하기 때문에 해산을 거부하는 한편 모든 의병부대에도 그러한 사실을 알려 더욱 적극적으로 투쟁할 것임을 천명하였다. 우동선은 서상륜에게 보낸 글에서 과연 교인들이 신앙심이 있으며, 조국의 위험한 경우와 백성들의 곤궁한 형편을 아는지 반문하였다. 아울러 일본주차군사령관 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와 매국노 이완용李完用에게 머리를 숙이고 복종할 수 있느냐며 항변하였다.

이들은 동요하지 않고 변함없이 투쟁하다가 조윤봉과 이진대李振大 등이 전사하거나 체포되기도 했다. 1908년 10월경 의병장 우동선 역시 일본군의 총탄에 맞아 부상을 입고서 체포되었다가 탈옥하는 과정에서 일본군의 총탄을 맞고 전사·순국했다. 의병장 우동선의 순국으로 그의 의병부대도 해산되고 말았다.

한편 황해도 후기의병은 의암 유인석의 문인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화서학파의 유학자 채홍두·우병렬·박양섭 등이 평산 산두재山斗齋에 모여 전 목천군수 박기섭朴箕燮, 이명 朴正彬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註261) 이들은 1907년 9월 평산군 도평산桃坪山에 진영을 설치하고 격문을 배포하였다. “사방에서 충용지사忠勇之士가 상응하는데 서읍西邑에서는 아직 소식이 없어 이에 파병 소모하니 포수병과 군수물을 본진에 파송”하라는 통문을 각지로 발송하였다. 註262) 평산의병의 주요 편제는 다음과 같다.



의병장 박기섭

중군 우병렬 총무 박양섭

참모 정회규 신석 채홍구 서기 신필수 이창하

유격장 유달수 이진룡 유격대 서기 이범학

소모대장 이건수 소모 신재봉 변석현 이인순 오필형 조재형

중대장 심노술 김정환 한정만 인두정 변승준 신도희 신성보

중대장 서기 조도환 돌격장 김창호

군무도감 신성희 운량관 박시재



평산의병의 주요 지휘부를 구성하는 이들은 대부분 평산출신으로 화서학파 계열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註263) 이들은 유학자의 지휘하에 농민·포수·강화진위대 해산군인들이 가담하여 약 2천명의 의병들을 규합하였다. 이들을 중대단위로 편성하여 황해도 각지로 파병하였는데 장수산과 멸악산이 주요 근거지였다.

황해도 후기의병 시기의 최초 전투는 1907년 9월 곡산 시변리에서 일어났다. 경기도에서 주로 활동하는 연기우 의병부대가 곡산 시변리와 토산 등지를 공략한 후 강원도로 신속히 이동하였다. 평산의병의 돌격장 김창호 의병부대는 배천군청과 경무분견소 등을 습격해서 무기를 노획, 무장을 강화하였다. 평산의병의 무장투쟁은 주로 중군을 맡은 우병렬의 주도하에 유격장 유달수·이진룡, 중대장 심노술·김정환·한정만 등이 이끌어 간 듯하다. 원래 중군이 군사활동을 주도한 점에서 그러하거니와 우병렬이 무과에 급제하여 판관을 역임한 후 낙향 註264)해 있다가 의병에 참여한 점을 보더라도 그러하다. 한편 이진룡은 그의 사위였는데, 유격장 유달수가 전사하자 이진룡이 유격장을 맡았다. 당시 유격장 유달수는 농민출신으로 평산 온정리와 대룡리 전투를 주도하였다. 註265)

평산의병은 황해도는 물론 강원도와 경기도의 도계를 넘나들며 산악지대에 근거지를 확보한 다음 유격전술로 일본 군경을 괴롭혔다. 이들의 활동이 갈수록 왕성해지자 일제는 그해 11월에 10일 동안 4개‘토벌책응대’를 편성하여 진압작전에 전력을 다하였다. 일제의 진압작전 약도는 다음과 같다.

위의 약도에서 보이듯이 일제는 황해도 서부지역을 포위하여 교반적攪拌的 방법으로 진압작전을 전개하였다. 일제의 강력한 진압작전으로 말미암아 의병들이 크게 동요하였으며, 유생출신 가운데 대오를 이탈하는 자가 많았다. 목천군수를 역임한 박기섭은 의진을 우병렬에게 인계한 후 양주로 이동한 듯하다. 즉 그는 13도창의대진소의 황해도 책임자인 진동유진소 아장亞將으로 참여하기 위해 경기도 양주로 갔다가 다시 영남지역 책임자로 선임되어 교남창의대장을 활동하다가 고향으로 돌아갔다.


황해도 서부지역 '토벌' 계획 약도

 


그럼에도 황해도 의병부대는 세력을 곧바로 만회하였다. 1908년 4월 평산의병의 유격장을 지낸 이진룡을 중심으로 창의유격대가 편성된 것이다. 註266) 평산의병이 무장투쟁 위주로 재편된 것인데, 그 편제는 다

음과 같다.



유격대장 이진룡

제1중대장 한정만 제2중대장 최순거

제3중대장 김정환 제4중대장 신군선

제5중대장 신중빈 감찰역 이진순 註267)



이진룡은 유인석의 문인으로, 평산의병의 중군장 우병렬의 사위였다. 註268) 따라서 그는 평산의병의 중추적인 인물이었으므로, 평산의병을 새롭게 편성하는 차원에서 창의유격대를 조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이끄는 창의유격대는 평산의병을 모체로 하였지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유격전술 위주로 활동하였다. 이진룡은 직할부대와 서기 2명을 인솔하였으며, 이진룡이 직접 서울에 잠입하여 탄약을 구입해왔다. 註269) 이들은 중대별로 부대를 나누고 중대당 2개 분대를 편성하여 거의 독자적으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항일투쟁뿐만 아니라 무기 구입과 의병활동에 필요한 군자금 조달에 적극 나섰다. 활동 영역 내의 면장이나 동장·이장에게 금액을 할당하여 징발한 것이다. 창의유격대 지휘부의 중대장과 분대장은 30~35세 전후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강화진위대의 해산군인들이 휴대했던 신식 무기와 미제美製 보병총 20여 정, 엽총 7정, 화승총 5정, 권총 5정, 일본제 30년식 보병총 2정 등 성능이 좋은 무기를 보유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활발하게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는데, 예컨대 평산 온정원 헌병분견소를 습격하거나, 철로에 돌을 쌓아 기차를 탈선시키는 등의 활약을 펼쳤다.

일제 군경은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1910년 3월 수비대 경찰 헌병대의 연합으로 10개 반을 편성하여 의병 색출에 나섰으며, 11월 하순부터 약 4개월간 재령의 장수산 인근지역인 연안·배천·해주 등지를 샅샅이 뒤지는 등 장기진압작전을 전개하였다. 註270) 이때 의병 190명이 체포·희생되었다. 1911년 9월 하순에도 같은 지역에서 약 한달동안 무자비한 진압작전을 펼쳐 의병 약 250명이 체포되었다.

결국 국내 활동이 어려워진 이들은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야 했다. 이들 가운데 이진룡은 지휘권을 한정만에게 이양한 후 1911년 10월 조맹선과 함께 서간도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한정만 의병부대는 1911년에 대대적인 의병진압작전을 피해 잠시 해산·잠적하였다. 그후 1913년경 활동을 재개했다가 한정만은 1914년 2월 일본헌병에 체포되어 순국하였다. 그의 체포를 계기로 의병부대는 해산되었으며, 투쟁의지를 불태우던 의병들은 다른 의진으로 들어가거나 국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으로 이어갔다. 이진룡의 부장인 김정환 의병부대는 1914년 5월 중순 서흥 유정리전투에서 끝까지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하였다.

이상과 같이 황해도 평산의병은 1907년 9월부터 경술국치 이후까지 국내에서 장기간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처음에는 유인석의 문인들이 주도하였으나, 차츰 전투역량을 갖춘 평민들이 항일투쟁을 이끌었다. 평산의병은 소규모의 의병부대로 편성되어 긴밀한 연계와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유격전술로써 일제 군경의 공세에 적적히 대응하였다. 그리고 창의유격대의 한정만·김정환 등은 국내 의병의 최후 항전을 주도하였고, 이진룡·조명선·심노술·박장호 등은 국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가로 전환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註 153]『편집자료』;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자료집』3, 640쪽. ☞

[註 154]『편집자료』;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자료집』3, 640쪽. ☞

[註 155]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자료집』3, 641~644쪽. ☞

[註 156]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자료집』3, 628·636~638쪽. ☞

[註 157]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홈페이지(http://e-gonghun.mpva.go.kr) 「김관수」 참조. ☞

[註 158]『편집자료』;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자료집』3, 630~631·635쪽. ☞

[註 159]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자료집』3, 639쪽. ☞

[註 160] 홍범도 의병부대에 대해 주로 참고한 논저로는 신용하, 「홍범도 의병부대의 항일무장투쟁」,『한국민족운동사연구』1, 1986 ; 윤병석, 「홍범도」,『한말 의병장 열전』 독립기념관, 1991 ; 장세윤,『홍범도의 생애와 항일의병투쟁』 독립기념관, 1992 ; 장세윤,『홍범도의 생애와 독립전쟁』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7 등이다. ☞

[註 161] 장세윤,『홍범도의 생애와 독립전쟁』 55쪽. ☞

[註 162] 신용하, 「홍범도 의병부대의 항일무장투쟁」,『한국민족운동사연구』1, 36~38쪽. ☞

[註 163]『편책』, 「북청군수보고」·「보고서 제5호」 ;『한국독립운동사』자료 8, 168·176쪽. ☞

[註 164]『편책』, 「북청군수보고」 ;『한국독립운동사』자료 8, 169쪽. ☞

[註 165]『편책』, 「보고서 제5호」 ;『한국독립운동사』자료 8, 181쪽. ☞

[註 166] 신용하, 「홍범도 의병부대의 항일무장투쟁」,『한국민족운동사연구』1, 39~40쪽. ☞

[註 167]『편책』, 「秘號外」 ;『한국독립운동사』자료 8, 380쪽. ☞

[註 168]『편책』, 「秘號外」 ;『한국독립운동사』자료 8, 373쪽. ☞

[註 169]『편책』, 「경비 제165호」 ;『한국독립운동사』자료 8, 387~389쪽. ☞

[註 170] 신용하, 「홍범도 의병부대의 항일무장투쟁」,『한국민족운동사연구』1, 41쪽. ☞

[註 171] 신용하, 「홍범도 의병부대의 항일무장투쟁」,『한국민족운동사연구』1 43쪽. ☞

[註 172] 유인석,『의암집』상, 경인문화사, 1976, 369쪽. ☞

[註 173] 신용하, 「홍범도 의병부대의 항일무장투쟁」,『한국민족운동사연구』1, 164쪽. ☞

[註 174] 신용하, 「홍범도 의병부대의 항일무장투쟁」,『한국민족운동사연구』1, 70쪽. ☞

[註 175] 복정섭 황현걸 김파, 「실록 홍범도 장군」,『사회와 사상』11월호, 1988, 한길사, 266쪽. ☞

[註 176] 경성의병에 대한 유일한 연구는 박민영의『대한제국기 의병연구』의 「제2장 鏡城義兵」인데, 이 글은 그것을 바탕으로 정리되었음을 밝힌다. ☞

[註 177]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1, 673쪽. ☞

[註 178] 김정명 편,『朝鮮駐箚軍歷史』 巖南堂書店, 1967, 261~268쪽. ☞

[註 179] 김정명 편,『朝鮮駐箚軍歷史』 247쪽. ☞

[註 180] 이 자료는 김정규(金鼎奎, 1881~1953)가 1907년부터 1921년 11월까지 기록해 놓은 일기인데,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龍淵金鼎奎日記』(전3책, 1994)로 영인 출간하였다. ☞

[註 181] 김정규,『용연김정규일기(이하『일기』)상, 1907년 7월 20일조, 28쪽. ☞

[註 182] 박민영,『대한제국기 의병연구』 233쪽. ☞

[註 183] 김정규,『일기』상, 1907년 12월 25일조, 61쪽. ☞

[註 184] 김정규,『일기』상, 1908년 2월 8일조, 66쪽. ☞

[註 185] 김정규,『일기』상, 1908년 2월 11~19일조, 67~68쪽. ☞

[註 186] 최경희는 최덕준(崔德俊)과 동일 인물로 보인다(박민영,『대한제국기 의병연구』 236쪽). ☞

[註 187] 김준언과 김명학은 동일 인물로 추정된다(박민영,『대한제국기 의병연구』 239쪽). ☞

[註 188]『편집자료』;『자료집』3, 653쪽 ;『한국독립운동사』자료 12, 257쪽. ☞

[註 189] 일제측은 全明鶴으로 표기하였는데, 여기서는 박민영의 주장에 따라 김명학으로 통일하였다. ☞

[註 190]『편책』, 「鏡警發 제375호」 ;『한국독립운동사』자료 9, 585~586쪽. ☞

[註 191]『편책』, 「경비 제485호」 ;『한국독립운동사』자료 9, 554~555쪽. ☞

[註 192] 김정규,『일기』상, 1908년 6월 12일조, 143쪽. ☞

[註 193] 박민영,『대한제국기 의병연구』 241쪽. ☞

[註 194] 김정규,『일기』상, 1908년 9월 23일조, 199쪽. ☞

[註 195] 박민영,『대한제국기 의병연구』 242~244쪽. ☞

[註 196] 박민영,『대한제국기 의병연구』 245~246쪽. ☞

[註 197]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1, 1970, 673~674쪽. ☞

[註 198] 대한협회,『대한협회회보』1, 1908, 41쪽. ☞

[註 199]『편책』, 「경비발 제3호」·「고비발 제16호」 ;『한국독립운동사』자료 13, 185·196쪽. ☞

[註 200] 박민영,『대한제국기 의병연구』 250~252쪽. ☞

[註 201]『편책』, 「경비수 제167-4호」 ;『한국독립운동사』자료 16, 554쪽. ☞

[註 202]『편책』, 「警秘發 제3호」·「高秘發 제16호」 ; 박민영,『대한제국기 의병연구』 253~254쪽.. ☞

[註 203] 김정규,『일기』상, 1908년 3월 18일조, 80쪽. ☞

[註 204] 김정규,『일기』상, 1908년 6월 10일조, 140~141쪽. ☞

[註 205] 박민영,『대한제국기 의병연구』 261~262쪽. ☞

[註 206] 김정규,『일기』상, 1908년 5월 2일조, 107쪽. ☞

[註 207] 오길보,『조선근대반일의병운동사』 1988, 280쪽. ☞

[註 208] 김정규,『일기』상, 1908년 10월 20일조, 209쪽. ☞

[註 209] 황현,『매천야록』 439쪽 ;『대한매일신보』1908년 6월 16일 「一進遇害調査」 ; 홍영기,『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412~413쪽. ☞

[註 210]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 1, 1971, 674쪽. ☞

[註 211] 김정규,『일기』상, 1908년 11월 25일조, 216~217쪽. ☞

[註 212] 박민영,『대한제국기 의병연구』 273쪽. ☞

[註 213]『편책』, 「警秘收 제63호의 1」 ;『한국독립운동사』자료 13, 463~464쪽. ☞

[註 214] 박민영,『대한제국기 의병연구』 278쪽. ☞

[註 215] 홍영기, 「채응언 의병장의 생애와 활동」,『한국독립운동사연구』26, 2006, 120~121쪽. ☞

[註 216]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자료집-별집 1』 222~228쪽. 

이 글에서는 편의상 「채응언판결문」으로 약칭하겠다. ☞

[註 217] 오길보,『조선근대반일의병운동사』 259쪽. 

한편 그는 죽기 직전의 최후 진술을 통해 ‘成川군에 나의 형이 있으니 이곳에서 죽었다는 기별을 하라’고 하였다 (『매일신보』1915년 11월 6일 「絞首臺上의 蔡應彦」). 이로써 보더라도 그의 고향은 평남 성천군임을 알 수 있다. ☞

[註 218] 국가보훈처,『독립유공자공훈록』1, 1986, 941쪽. ☞

[註 219]『매일신보』1915년 7월 8일 「폭도거괴는 전멸」. ☞

[註 220]『매일신보』1915년 7월 17일 「일간압송」. ☞

[註 221]『편집자료』;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자료집』3, 603쪽. ☞

[註 222]『편책』, 「함남고비발 제41호」·「함남고비발 제4호」 ;『한국독립운동사』자료 18, 432·520쪽. ☞

[註 223]『매일신보』1914년 12월 2일 「賊魁蔡應彦」. ☞

[註 224] 「채응언판결문」, 223쪽. ☞

[註 225] 홍영기, 「채응언 의병장의 생애와 활동」,『한국독립운동사연구』26, 124쪽. ☞

[註 226]『편책』, 「鎭東本陣分派大將蔡應彦輔國倡義文」 ;『한국독립운동사』1, 669쪽. ☞

[註 227]『매일신보』1915년 7월 8일 「폭도거괴는 전멸」. ☞

[註 228]『매일신보』1915년 7월 10일 「稀世巨賊」. ☞

[註 229] 홍영기, 「채응언 의병장의 생애와 활동」,『한국독립운동사연구』26, 126쪽. ☞

[註 230] 홍영기, 「채응언 의병장의 생애와 활동」,『한국독립운동사연구』26, 127쪽. ☞

[註 231]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자료집-별집 1』 450쪽. ☞

[註 232]『편책』, 「헌기 제1015호」 ;『한국독립운동사』자료 18, 127~128쪽. ☞

[註 233]『편책』, 「진동본진분파대장채응언창의문」 ;『한국독립운동사』1, 669쪽. ☞

[註 234] 「채응언판결문」, 224쪽. ☞

[註 235]『매일신보』1915년 7월 9일 「大賊魁를 逮捕하기까지」. ☞

[註 236] 홍영기, 「채응언 의병장의 생애와 활동」,『한국독립운동사연구』26, 131쪽. ☞

[註 237]『토벌지』;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자료집』3, 670쪽. ☞

[註 238]『매일신보』1915년 8월 25일 「殘忍暴虐의 賊魁罪狀」. ☞

[註 239]『토벌지』;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자료집』3, 818쪽. ☞

[註 240]『매일신보』1915년 7월 11일 「其後의 蔡」. ☞

[註 241]『매일신보』1915년 7월 8일 「폭도거괴는 전멸」. ☞

[註 242]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자료집-별집 1』 325~326쪽. ☞

[註 243] 오길보,『조선근대반일의병운동사』 309쪽. ☞

[註 244]『대한매일신보』1910년 7월 9일 「지방소식」 ; 오길보,『조선근대반일의병운동사』 309쪽. ☞

[註 245]『매일신보』1915년 8월 25일 「잔인폭학의 적괴죄상」. ☞

[註 246]『황성신문』1910년 7월 29일 「잡보」. ☞

[註 247]『편책』, 「황경비발 제352-3호」『함남고비발 제41호』「함남고비발 제4호」 ;『한국독립운동사』자료 18, 219·432·518~520쪽. ☞

[註 248]『매일신보』1914년 12월 2일 「적괴채응언」. ☞

[註 249]『매일신보』1914년 11월 13일 「賊魁逮捕에 懸賞」. ☞

[註 250]『매일신보』1915년 7월 10일 「희세거적」. ☞

[註 251]『매일신보』1915년 7월 10일 「희세거적」. ☞

[註 252]『매일신보』1915년 7월 10일 「희세거적」. ☞

[註 253]『매일신보』1915년 7월 11일 「其後의 蔡」, 7월 14일 「殺害者가 11人」. ☞

[註 254]『매일신보』1915년 7월 28일 「可恐할 蔡의 武器」. ☞

[註 255]『매일신보』1915년 8월 29일 「賊魁의 公判」. ☞

[註 256]『매일신보』1915년 9월 15일 「蔡應彦은 自殺코자」. ☞

[註 257]『매일신보』1915년 9월 22일 「死刑確定」. ☞

[註 258]『매일신보』1915년 11월 6일 「絞首臺上의 蔡應彦」 ☞

[註 259] 「채응언판결문」, 224~227쪽. ☞

[註 260] 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의병전쟁연구』상, 지식산업사, 1990, 62~64쪽. ☞

[註 261] 정제우, 「한말 황해도지역 의병의 항전」,『한국독립운동사연구』7,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3, 12~13쪽. ☞

[註 262] 박민영, 「서북지방 정미의병의 활동과 성격」,『지역문화연구』6, 세명대 지역문화연구소, 2007, 82쪽. ☞

[註 263] 정제우, 「한말 황해도지역 의병의 항전」,『한국독립운동사연구』7, 14쪽. 

이 글은 정제우의 연구 성과를 주로 정리한 것임을 밝힌다. ☞

[註 264] 김양, 「우병렬과 이진룡의 의병운동과 항일독립운동 재조명」,『의암학연구』4, 의암학회, 2007, 48~51쪽. ☞

[註 265] 오길보,『조선근대반일의병운동사』 255쪽. ☞

[註 266] 정제우, 「이진룡의병장의 항일무장투쟁」,『한국독립운동사연구』8,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4. ☞

[註 267]『편책』, 「황경비수 제704호」 ;『한국독립운동사』자료 15, 860쪽. ☞

[註 268] 정제우, 「이진룡의병장의 항일무장투쟁」,『한국독립운동사연구』8, 74~76쪽. ☞

[註 269]『편책』, 「황경비수 제1001호」 ;『한국독립운동사』자료 18, 400~402쪽. ☞

[註 270] 정제우, 「이진룡의병장의 항일무장투쟁」,『한국독립운동사연구』8, 26~31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