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경상·충청도의 의병항쟁 / 후기의병의 확산 / 한말 후기의병

몽유도원 2014. 4. 30. 11:22

제4장 후기의병의 확산


후기의병 항쟁의 전개

강원·경기도의 의병항쟁

경상·충청도의 의병항쟁

서북지역의 의병항쟁

전라도의 의병항쟁


3. 경상·충청도의 의병항쟁


경상도 가운데 경북지방 후기의병의 활동은 1908년 교전횟수와 교전의병수에서 전국대비 약 7%내외였으며, 1909년에는 다소 증가하여 9% 정도였다. 하지만 걸출한 의병장 신돌석과 산남의진山南義陣의 활약으로 타 지역의 의병항쟁에 비해 별로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한말 의병전쟁의 흐름 속에서 본다면 경북은 후기의병에 비해 전기의병의 활동이 더 두드러진 편이었다. 이 지역은 안동으로 대표되는 양반 유생의 전통이 강했기 때문에 성리학적 사상을 고수하려 했던 전기의병에 많이 참여하였던 것이다. 註79)

그런데 후기의병의 경우 양반유생보다는 일반 평민들이 주도해 갔으며, 그 대표적 인물이 바로 신돌석 의병장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 지역

인사들은 의병항쟁의 한계를 일찍부터 자각한 후 계몽운동이나 국외 망명으로 전환하였다. 따라서 경북지방 후기의병의 활동이 타 지역에 비해 다소 저조한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이 지역의 후기의병은 크게 두 개의 계열로 구분되는 것 같다. 즉, 경북 북부지역은 신돌석 의병부대 계열이, 남부지역에서는 산남의진 계열이 의병활동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물론 충북과 강원도 지역에서 활동하는 의병부대가 경북지역을 활동영역으로 삼아 뛰어난 활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따라서 경북 지역만의 독자적 항일투쟁보다는 강원도와 충북 지역의 의진과 연계하거나 연합하여 무장투쟁을 벌이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경북지역 후기의병 항쟁을 주도한 의병장으로는 다음과 같이 거론된다. 註80) 이강년 의병부대 계통으로는 장윤덕·김상태·이춘삼·신태식·변학기 등이며, 산남의진 계통으로는 정환직·정용기 부자·최세윤·김재정·박연백 등이다. 그리고 신돌석·민긍호·성익현·이춘양·유시연·박처사·정경태 등이 이끄는 의병부대는 독자적인 활동을 벌이는 경우가 많았다. 이 가운데 성익현과 정경태 등은 강원도에서 주로 활동한 점으로 보아 민긍호 의병부대의 계열로 짐작된다.

경북 내에서 의병항쟁이 가장 치열했던 지역은 영주 봉화 영일 울진이었다. 註81) 영주와 봉화는 산이 험준하고 이강년·민긍호 의병부대가 충북 강원도를 넘나들며 싸웠기 때문이고, 울진은 일월산日月山을 중심으로 한 신돌석 의병부대의 활동무대였으며, 영일은 보현산普賢山을 중심으로 한 산남의진의 근거지였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인물 가운데 경북지역을 주된 활동근거지로 삼은 의병부대인 신돌석 의병부대와 산남의진을 구체적으로 서술할 것이다. 허위와 이강년 의병부대는 다른 지역에서 언급하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제외한다. 중소 규모의 의진을 이끌었던 의병장 중에 장윤덕은 예천출신으로 예천·상주 등지를 무대로 싸우다 순국하였다. 註82) 노병대 의병장은 상주 출신인데, 그는 김운노 송창헌 등과 거의하여 충북 보은을 주된 활동영역으로 삼아 거창·김천 등지에서 1908년 7월까지 활약하다가 체포되었다. 신태식은 이강년 의병부대의 1907년 9월 문경전투에 참여했다가 귀가한 후 단양에서 기병하였다. 그는 이강년·신돌석 의병부대와 연계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다가 1908년 겨울 체포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춘양은 봉화, 김성운은 영양, 유시연·박인화박처사는 안동, 박연백은 의성, 강진선은 청송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註83)

이와 같이 경북지역 후기의병 항쟁은 해산군인들이 의진에 참여함으로써 조직적이고 장기적인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이 지역 의병들은 지역성을 탈피하여 도간경계를 넘나들며 싸웠다는 점이 주목된다. 아울러 이들은 신분적 한계를 극복함으로써 연합의진을 결성하여 불굴의 투쟁을 전개하였다. 경북지역 후기의병의 한계도 없지 않다. 의병장과 의병 사이의 계급적 갈등, 활동영역을 둘러싼 의병부대 사이의 갈등, 열악한 무기와 훈련부족, 친일앞잡이들의 처단 등을 놓고서 그 해법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경북지역 의병들도 납세거부, 친일관료 처단, 미곡의 밀매단속, 부호재산 몰수, 빈민구제 등을 추진함으로써 민족운동상의 질적 성숙을 이루었다. 註84)

한편 경상남도의 후기의병 항쟁은 타 도에 비해 저조한 편이다. 경남은 1908년 전국대비 교전횟수에서 7.7%였으나 1909년에는 3.5%로 급감했고, 교전의병수에서는 1908년 4%에서 1909년 2.4%로 감소하였다. 이러한 수치만으로도 경상남도 후기의병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영남과 호서지역에서 활동한 의병장(이강년·신돌석·한봉수·백남규 등)

 

경상남도의 경우 1900년대 계몽운동 및 의병항쟁 등 양대 민족운동 세력이 모두 약했는데 그 배경이나 원인이 무엇인지 차후에 검토해야 할 과제라 하겠다. 그래서인지 경남 안의 출신인 문태서의 경우 출신지역을 기반삼아 활동하는 대부분의 의진과는 달리 무주 덕유산 일대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아마도 문태서는 그의 향리의 의병활동 기반이 미약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에 무주에서 활동하였을 것이다.

일제측이 파악한 바에 따르면 1907년 후반 경남의 의병활동은 지리산 인근지역인 하동·산청·삼가·의령·단성·거창·안의 등지에서 활발한 편이었다. 註85) 그러한 경우에도 대체로 전라도에서 경상도로 이동해온 영향이 큰 편이었다. 다시 말해 경남지역에서는 지리산을 근거지로 삼아 서부지역에서 미약하나마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註86)

한편 충청도의 후기의병 역시 1907년 후반 이래 해산군인들의 가담으로 활성화되었다. 충남 지역에서는 시기적으로 1907년 후반부터 1908년 2월경까지 의병활동이 집중되었는데, 주된 활동지역은 청양·신창·당진·대흥·태안·면천·아산·임천·홍산·부여·보령·남포·한산·정산·은진·노성·공주·전의·목천 등 여러 군이었다. 이후 청양·신창·보령·오천·남포·한산·임천·정산·노성·공주 제군諸郡으로 축소되었다. 註87) 그 가운데 당진지역 의병활동이 강하였다. 한편 1908년 3월 15일 당진 앞바다에 위치한 소난지도에서도 일본 순사대와 교전이 벌어졌는데, 의병장 홍원식洪元植 등 41명이 전사하고 50여 명이 바다에서 실종되었다. 註88) 이들은 경기 남부지역을 오가며 항일투쟁을 전개하는 특징을 보여준다. 이들이 경기와 충남의 도계를 쉽게 넘나들며 활동할 수 있었던 배경은 남양만과 아산만의 해로를 이용할 수 있는 지리적 근접성이 크게 작용하였다.

충북 지역에서는 한봉수 의병부대가 가장 강력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그 외에 상주의 유생 출신 노병대는 보은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보은 유생 김운노는 보은·음성에서 활동하였다. 또한 청풍 유생 김상한과 이중봉은 충주 관내에서 활동하였는데 그 가운데 이중봉은 이강년이 이끄는 호좌의진의 핵심인물로 활약하였다. 제천 중심의 호좌의진을 계승한 이강년 의병부대에 소속된 인물로는 영춘 유생 김상태와 원도상, 단양 유생 이도명 등이 있었다. 해산군인 출신으로는 조용근·김규환·김형식 등이 청주 관내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註89) 이처럼 충북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부대는 이강년 의병부대와 직간접으로 연계되어 활동했으며, 속리산을 중심으로 유격투쟁을 전개하였고, 해산군인들이 청주를 중심으로 항일전을 펼쳤다. 이들은 원주진위대의 봉기에서 영향을 받았다.


1. 이강년 의병부대

이강년李康秊은 이미 전기의병에 참여하였으며, 1907년 음력 3월에 재기의하여 후기의병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전개하였다. 註90) 여기에서는 후기의병에 해당하는 의병활동을 중심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이강년 본관은 전주이며 경북 문경에서 태어났다. 그는 무과에 급제하여 잠시 관직에 나아갔으나 갑신정변 등 정국이 어수선해지자 향리로 돌아와 은둔하며 우국의 나날을 보내었다. 註91)

그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농민군에 가담하여 활약하였으며, 전기의병 당시에는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켜 제천의 유인석 의병부대와 연계하여 활동하였다. 이때 유인석의 학문과 사상에 감화되어 평생 스승으로 섬길만큼 큰 영향을 받았다. 그후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자 그는 의병봉기를 모색하였으나 여의치 않았다. 그러던 중 전기의병 때의 동지 안성해安成海 등과 함께 1907년 4월 제천에서 재봉기하였다. 註92) 이때부터 그는 이듬해 7월 청풍 까치성鵲城 전투에서 체포될 때까지 충북·강원·경북 등지를 무대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런데 이강년이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고종이 전 판서 심상훈을 통해 밀지를 보냈다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왔다. 고종이 그에게 도체찰사都體察使를 제수하며 밀지密旨를 내려 의병들을 독려하였다는 것이다. 그럴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지만, 의병의 정당성과 권위를 행사하기 위해 밀지설을 이용하지 않았나 한다. 註93) 그는 의병활동을 전개할 때 호좌의진湖左義陣의 정통성을 계승하는데 주력함으로써 자신이 호좌의진의 의병장임을 자부하였다. 호좌의진을 주도한 유인석의 충실한 제자로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는 것이다. 註94)

1907년 8월 13일 제천으로 입성한 이강년은 음력 7월 6일자 통고문을 작성·배포하였다.


아 슬프도다. 국가가 갑오년 이후로 문득 왜적의 협박하는 바 되어 여러 차례 욕을 당하였으나 큰 원한을 씻지 못하더니 오늘의 변고에 이르렀다. 신하로서는 차마 들을 수 없고 감히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변고의 망극함이 이보다도 더한 것이 없다. 무릇 혈기있는 무리라면 누가 피눈물을 흘리고 울음을 삼키며 이 도적과 함께 살지 않겠다고 맹세하지 않으리. … 충분에 복받치는 바를 억제하지 못하여 이에 감히 피를 뿌려 먼저 창의하는 일을 깨우쳐 고하노니, 이 같이 두루 알린 후에도 혹시 명령을 어겨 일을 회피하고 게을리 하면서도 태연하여 뉘우칠 줄도 모르는 자가 있다면 왜놈의 동조자로서 주륙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註95)


국가의 원수를 갚기 위해 항일의병을 일으켰음을 천명하면서 적극적인 참여를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재봉기한 후 이강년 의병부대의 주요 편제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그가 호좌의병장으로서 여타의 의병부대와의 연합을 주도하였다. 다음의 자료가 당시의 상황을 알려준다.


(원주) 진위대가 새로 봉기하니 산포수로서 응모하는 자가 대단히 많았다. 조동교 오경묵 정대무 등의 여러 의진이 연합하여 제천에 들어오니 공이 가서 만났다. 안성해安成海를 중군으로, 이한응李漢應을 후군으로 삼았으며 공은 대장의 자리를 사양하고 군사軍師로서 일을 보았다. 註96)


위와 같이 이강년은 재봉기할 때 의병장이 아닌 군사로서 활동하면서 중군장은 안성해, 후군장은 이한응을 선임하였다. 그리고 조동교·오경묵·정대무 의진과는 연합전선을 형성하였다.

얼마후 여러 의진이 강원도 영월군 주천酒泉에 집결했을 때 다시 의병장을 누가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공이 여러 의진을 주천으로 모았는데, 김상태 등이 공을 추대하여 대장으로 삼았다. … 무리들이 모두 공에게 기대를 했으나 공의 뜻은 ‘반드시 인물과 지위를 아울러 갖춘 이가 이끌어야지 구차하게 잠시 동안 맡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었다. 마침 김상태가 4군 지역으로부터 군사를 거느리고 도착하여 힘써 권하기를, ‘만일 공이 끝내 무리의 소망을 저버린다면 청컨대 하직하고 가겠습니다’라고 하니 공이 부득이 이를 허락하고 11일에 여러 장졸의 군례를 받았다. 註97)


이때 40여 의진이 모여 연합의병부대의 대장을 선임하려 했는데, 이강년이 사양하다가 김상태의 강력한 추천으로 마지못해 대장직을 허락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은 1907년 음력 7월 11일 정식으로 출범하였다. 이강년 의병부대의 진용은 다음과 같다.


중군장 김상태金尙台

우군장 이중봉李重鳳

우선봉장 백남규白南奎

좌군장 이용로李容魯

좌선봉장 하한서河漢瑞

감군장 이세영李世榮

전군장 윤기영尹基榮


이 가운데 중군장을 맡은 김상태는 제천·청풍·단양·영춘 등 4군에서 병력을 모은 실질적인 군사책임자라 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유인석의 문인으로서 이강년과는 동학이었다. 윤기영과 이세영 역시 전기의병 당시 이강년의 휘하에서 활동했으며, 백남규·하한서·이중봉 등은 충주·단양·제천 출신이었다. 이들 중에 해산군인인 백남규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화서학파 계열의 유생들로 호좌의진의 인맥에 속한다. 註98)

이강년 의병부대는 1907년 8월 제천읍 점령을 시작으로 반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인근 지역에서 활동하는 의진들과 연합해서 일본 군경에 맞서 싸웠다. 의진간의 연합은 군사적 필요성 때문이었다. 각각의 의진들은 단독으로 일본군에게 맞설만한 전투력이 부족하였다. 그래서 이들은 유사시에는 연합하여 대응하고, 일이 없으면 독자적으로 활동하였다.

이를테면 이강년 의병부대와 민긍호 의병부대 등이 연합전선을 구축하여 충북 제천군 천남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당시 천남전투는 이강년·민긍호·윤기영·박여성·오경묵·정대무 등 여러 의진에서 약 2천명의 의병이 참여하여 4시간 이상의 혈전을 벌여 승리하였다. 이어 이들은 충주성을 공략하기로 정하였다. 당시 이강년 의병부대는 제천-청풍-충주로, 민긍호 의병부대는 제천-주포-충주로 각각 길을 나누어 충주를 향해 진군하였다. 그리하여 이강년 의진은 8월 23일 충주 인근에 도착하여 충주성을 공격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그런데 민긍호 의진은 박달재에서 일본군과 만나 치열한 혈전을 치르느라 충주성 공격에 합세할 수 없었다. 약속한 기일 안에 다른 의진이 도착하지 않자 이강년은 단독으로 충주성을 공격했으나, 일본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이강년 의병부대는 충주성 점령을 뒤로 미룬 채 단양 및 죽령을 거쳐 경북의 풍기·문경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이곳에서 이들은 일본군의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 다시 단양·영춘·청풍 등지로 진을 옮겨가며 활동하였다. 9월에 들어 이강년 의병부대는 충북 영춘에서 일본군과 교전한 후 영월로 북상하였다가 다시 영춘을 거쳐 제천으로 남하하며 산발적인 교전을 벌였다. 11월에는 죽령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인 이강년 부대는 소백산 너머의 순흥 공략에 나섰다. 이 전투에는 영해 울진 일대에서 용맹을 드날리던 신돌석申乭石 의병부대도 동참하였다. 두 부대는 순흥의 헌병분견소와 경찰서 등을 파괴한 후 각기 퇴각하였다.

그러나 이강년 의병부대가 항상 승리할 수는 없었다. 11월말 영춘 동쪽에서 일본군을 만나 접전하였으나 종사 주범순朱範淳이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이에 이강년은 일본군과의 교전을 피하면서 죽령 일대를 전전하며 도총독장 이만원, 소모장 이중봉, 선봉장 권용일 등과 함께 흩어진 병력을 모아 전열을 가다듬었다. 註99) 12월 이들은 북상길에 올랐으나 이강년이 병을 얻어 제천 부근의 임현에서 유진하다가 일본군에게 기습을 당하였다. 이 전투에서 이강년 의병부대는 이중봉 등 10여 명의 주도인물들이 체포되고 소모선봉 권용일 이하 7명이 전사하는 등 크게 패하였다. 부근의 사찰에서 요양중에 비보를 전해들은 이강년은, “내가 거의한 지 12년에 이와 같은 참패를 당한 적은 일찍이 없었다.”고 탄식하였다.

이무렵 이강년은 「재격고문再檄告文」을 작성, 사방에 배포하였다.


호좌의병장 이강년은 삼가 목욕재계하고 팔도의 의를 같이하는 장수와 의를 좇는 군사들, 의를 떨치고 나선 장사 및 여러 집사들에게 고합니다. … 나라 안의 이름있는 인사들을 돌아보면 높은 지위를 차지하여 좋은 말로 사양만 하니, 아 이것이 무슨 까닭입니까? … 또 감히 말할 것이 있습니다. … 만일 병력을 모집한다 하고, 의병을 핑계하고 군수물자를 칭하여 까닭없이 매질하고 무단히 침탈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의병이 이른다는 말만 들어도 이마를 찌푸리며 도망가 숨게 하는 것은 일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함께 쳐서 그 죄를 드러내기를 바랍니다. 군대에 재물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 스스로 마련하지 못하니 호곡戶穀 결전結錢을 쓰지 않을 수 없고, 부자와 귀한 손님들의 도움이 없을 수 없습니다. … 또 일진회와 순검이 도적에게 붙어 간첩질하는 자는 실로 말할 것이 없어 진실로 불쌍할 뿐 미워할 것조차 없습니다. … 우리 팔도의 의를 같이하는 장수와 의를 좇는 군사들, 의를 떨치는 선비들과 모든 군자들이 의기로써 일어나 의에 살고 의로 시작하여 의로 마칩시다. 註100)


이 글에서 그는 위정자의 방관적 행태, 의병을 빙자한 가의假義들의 민폐, 일진회 등 친일분자의 반성을 촉구하였다. 아울러 군수품의 후원을 간곡히 요청하는 등 당시 의병들이 직면한 어려움을 토로하면서 의병의 분발을 다짐한 것이다. 당시 이강년 의병부대가 민폐를 근절하기 위한 노력이 소개되어 있다. 註101)

그후 이강년 의병부대는 북상하여 경기도 가평에 도착할 때까지 굶주림과 눈보라를 견디며 이동하였다. 아마도 13도창의대진소의 연합전선을 형성하기 위한 북상이었을 것이다. 그는 13도창의대진소의 호서창의대장에 선임되어 있었다. 하지만 목적지 양주로의 진군은 여의치가 않았다. 계속된 행군으로 병사들의 피로가 누적되었고, 일본군의 공격으로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이들은 4월경 강원도 화천·인제를 거쳐 설악산 백담사百潭寺로 물러났다.

백담사에서 이강년은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으며, 신흥사 오세암 등을 거쳐 강릉으로 남하하였다. 이들은 경상도로 가기 위해 태백산 줄기를 따라 이들은 영주에 도착하였다. 그가 새로운 활동근거지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던 중에 일본군과 만나 간헐적인 접전이 이루어졌다. 이들은 충북 북부와 경북 북부, 강원 남부 지역을 넘나들며 일제 군경과 혈전을 거듭하였으나, 그동안 전력이 크게 소모되어 있었다.

이강년은 잔여 의병을 이끌고 당시 가장 강력한 반일투쟁을 전개하고 있는 호남지역으로 남하할 계획이었다. 註102) 그러나 호남으로의 남하

가 여의치 않자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제천 인근의 작성鵲城에서 잠시 유진하게 되었다. 이들이 잠복한 사실을 탐지한 일본군 수비대가 포위망을 압축해왔다. 7월 1일 이강년 의병부대 약 70명은 일본 군경을 맞아 최후의 일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의병장 이강년은 왼편 발목에 관통상을 입고 계곡에 은신했다가 체포되었으며, 도선봉 하한서河漢瑞 등을 비롯한 주요 간부 7명이 전사하였다. 註103) 이로써 호좌의진을 자부한 이강년 의병부대의 활동은 종식되었다. 그는 체포된 후 “무정하다 탄환이여 / 발목을 상하여 나아갈 수 없구나 / 차라리 심장에나 맞았으면 / 욕보지 않고 저승에 갈 것을”이라는 애절한 시를 남겼다.

그는 체포된 후에도 의병장으로서의 기개를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일본군의 치료를 거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제공하는 음식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는 충주-수원을 거쳐 서울로 압송되었는데, 1908년 7월 19일 재판을 받아 사형을 선고받고 10월 13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상과 같이 이강년 의병부대는 화서학파 학맥의 요람인 제천을 기반삼아 유인석이 주도한 호좌의진의 정통성을 계승한 대표적인 의진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유생중심의 의병부대가 갖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해산군인과 포수들을 받아들여 전투역량을 크게 제고시켰다. 그리하여 이들은 재봉기이후 1년여 동안 충북 북부, 경북 북부, 경기 남부, 강원도를 종횡무진하며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특히 민폐를 줄이기 위해 적극 노력한 점도 주목된다. 한편 이강년 의병장이 체포된 후 중군장 김상태가 잔여 의병들을 규합하여 백남규 등과 함께 항전을 계속하며 이강년 의병부대의 명맥을 계승하였다.


2. 신돌석 의병부대

신돌석申乭石 의병부대는 1906년 4월에 창의하여 1908년 12월까지 영해 영양을 비롯한 경북 북부, 강원도 남부, 그리고 충북 지역에 걸쳐 활동하였다. 註104) 신돌석은 전설적인 의병장답게 수많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태백산 호랑이’ 혹은 ‘신장군’으로 불리워진 그는 ‘돌석’이라는 이름에서 짐작되듯이, 대표적인 평민 출신의 의병장으로 알려져 있다. 구전은 많지만 그의 생애와 활약상을 밝혀주는 1차 자료가 거의 없다는 점은 아마도 그의 신분적 배경과 관련될 것이다. 註105)

신돌석은 경북 영해군寧海郡 출신으로, 본명은 태호泰鎬, 자는 순경舜卿이었다. 돌석은 어렸을 때의 이름이었으며, 신분은 몰락한 향리의 후예로 평민이라 할 수 있다. 註106) 하지만 그는 신분적 한계의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양반가 서당에 1년여 동안 출입하며 글을 배울 수 있었다.

신돌석은 전기의병에 참여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구체적인 활동을 알 수 없다. 다만 김하락金河洛 의진과 연합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내 해산된 것 같다. 註107) 그후 신돌석은 10여 년간 경북·강원·충북 일대를 돌아다니며 초야에 묻힌 많은 사람들과 접촉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일제의 침략과정과 그것을 걱정하는 사람들의 우려와 분노의 목소리를 보고 들을 수 있었다. 당시 그는 이강년·박상진朴尙鎭 등과 만났는데, 특히 박상진과는 교분이 두터웠다고 한다. 註108)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그는 위기에 직면한 국가의 운명을 바라보며 울분을 토로하였다. 결국 그는 1906년 4월 영해에서 수백명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다. 註109) 그는 이때 의진의 명칭을 ‘영릉寧陵’이라 짓고, 자신은 영릉의병장寧陵義兵將이 되었다. 흔히 이들을 ‘영해의진’으로 불렀던 점으로 보아 영릉은 영해를 의미한 것 같다.

신돌석 의병부대의 편제는 잘 알 수 없는데, 선봉장·중군장·후군장·소모장·집사 등의 직제를 두었다. 당시 신돌석 의병부대를 주도했던 인물 가운데 후군장 백남수, 집사 이창영·신낙선, 소모장 이춘양·이항의·김석락·한용직 등이 현재 확인된다. 이들은 대체로 유력한 가문과는 거리가 먼 평민들이 많았다. 註110) 물론 병사층은 대부분 평민이거나 그 이하의 신분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의병활동에 필요한 무기 확보에 적극적이었는데, 관아를 점령하여 보관중인 무기를 징발하거나 민가에서 수집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들은 군자금을 마련하여 군량과 의복 등 군용품을 조달했는데, 대체로 부유한 양반가로부터 징발하거나 지원을 받았다. 안동의 이상룡은 신돌석 의병부대의 막강한 전투력에 기대를 걸고 자발적으로 후원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주로 영양과 청송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울진과 삼척을 공격대상으로 삼았다. 울진과 삼척은 일본의 어장침탈을 비롯한 침략의 발판으로 건설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註111)

신돌석 의병부대는 태백산맥을 넘나들었는데, 청송·진보·영양 등 태백산맥 서쪽 지역에서 병력과 무기·물자 등을 조달한 다음 평해·울진·삼척 등 영동지역을 주된 활동영역으로 삼았다. 그러던 중 강원도와 경기도에서 활동하는 의진을 중심으로 서울진공작전이 추진되었다. 이인영과 허위·이은찬 등이 추진한 13도창의대진소의 결성에 영남지역 의진 역시 당연히 참여하라는 통문이 전달되었다. 신돌석 의병부대는 영남지역에서 가장 활발한 투쟁을 전개하고 있었으므로 영남의 대표적인 의병부대로 참여를 권유받았던 것 같다. 그로 인해 신돌석은 영남지방을 대표하는 교남창의대장嶠南倡義大將에 임명되었으나, 그의 의병부대는 서울로 북상하지 못한 채 영남 일대에서 계속 활동중이었다.

1907년 겨울을 난 신돌석 의병부대는 일월산 등지에서 전력을 보강한 다음 활동을 재개하였다. 이들은 유시연柳時淵이 인솔하는 안동의병과 긴밀한 연계를 가지면서 영남지역의 의병항전을 주도해 나갔다. 註112) 신돌석은 의병부대를 몇 개의 소규모 단위 부대로 편성하여 주로 유격전술을 구사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일제 군경의 추격을 쉽게 따돌리거나 기습공격으로 타격을 주었다.

일제 군경은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여러 차례 진압작전을 전개했으나 기대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를테면 1908년 2월 일제는 경북지방에 주둔하는 일본군 수비대를 동원하여 6개 부대로 편성, 일월산에서 대대적인 진압작전을 펼쳤다. 그러나 소부대로 나뉘어 산간벽지로 흩어진 신돌석 의병부대는 영해 방면으로 재빨리 이동하였다. 註113) 이른바 ‘토벌작전’에 실패한 일제는 신돌석 의병부대의 당시 동향을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폭도신돌석 의병부대 : 저자주는 작은 무리로 분산하여 숨어 있으므로 토벌대는 용이하게 수색단서를 얻지 못하고 행동지역 안의 각 촌락만을 면밀하게 수색하였다. 註114)


이들의 기민한 행동으로 일제의 수비대와 헌병대는 단서조차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만큼 신돌석 의병부대가 자유자재로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1908년 이후에 이들은 일월산을 근거지삼아 태백산맥을 오르내리며 눈부신 투쟁을 전개하였다.

일본군의 진압작전이 번번히 실패로 돌아가자, 일제는 신돌석 등을 회유하기 위한 공작을 펼쳤다. 예컨대 일제는 그의 부인을 위협하여 귀순을 권유하는 서한을 지참시켜 그에게 보내어 눈물로 호소케 하였다. 하지만 그는 부인을 크게 책망하며 일제의 제안을 일축하였다. 註115) 이후 신돌석 의병부대는 영덕을 비롯한 영양·울진·삼척·안동 등 경북 내륙과 동해안 일대를 오가며 활동하였다.

그런데 1908년 가을부터 신돌석 의병부대 내에서도 이탈자가 많아졌다. 일제의 회유책에 넘어가 귀순자가 크게 늘어난 것이다. 예를 들면 그해 9~10월 사이에 신돌석의 부하 53명이 귀순하였다. 註116) 나아가 의병부대를 이끌었던 주도적 인물 중에서도 귀순자가 발생하였다. 이들의 귀순은 신돌석의 권유에 의한 것으로, 그것은 후일을 도모하기 위한 대비라 할 수 있다. 부대를 해산한 뒤 신돌석은 적당한 은신처를 찾아 각지를 전전하였다. 1908년 12월 그는 영덕 눌곡에 있는 자신의 부하의 집을 찾아갔다. 하지만 그들은 일제의 현상금에 눈이 어두워 신돌석을 술에 취하게 한 뒤 무참히 살해하고 말았다. 이로써 경상도에서 가장 대표적인 신돌석 의병부대의 항일투쟁은 종식되었다. 신돌석은 경북지방 후기의병을 주도하며 장기항전을 전개하였으나 일제의 집요한 탄압으로 희생된 것이다. 그는 국내 활동이 어려워 만주로 망명할 계획이었지만 갑작스런 죽음으로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하지만 그의 부하인 한영육이 국외 망명에 성공하여 독립운동가로 전환하였음은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3. 산남의진 : 정환직-최세윤 의병부대

1) 정환직의 의병활동

산남의진山南義陣은 전후 4차례에 걸쳐 3년 동안 활동하였다. 註117) 산남의진의 1차 의병활동은 1906년 3월부터 7월까지로 정용기鄭鏞基가 주도하다가 체포되면서 중지되었다. 2차 의병활동은 1907년 4월부터 8월까지로 정용기가 석방된 후 재봉기하여 입암立巖 전투에서 패배한 때까지이다. 그리고 3차 의병활동은 1907년 9월부터 12월까지인데, 정환직鄭煥直이 아들 정용기를 대신하여 의진을 재조직하여 활동했던 시기이다. 끝으로 4차 의병활동은 1908년 2월부터 7월까지로 정환직을 계승한 최세윤崔世允이 의진을 이끌었던 시기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후기의병에 해당하는 정환직-최세윤 의병장이 이끌던 시기의 산남의진의 활동을 중심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산남의진은 영천을 중심으로 한 경북 남동부 일대에서 위세를 떨친 의병부대였다. 註118) 특히 정환직 정용기 부자, 그리고 최세윤 의병장이 항일투쟁을 전개하다가 모두 순국함으로써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경우에 해당된다. 산남의진의 제3차 편성은 정용기의 전사가 계기가 되었다. 정용기의 부친 정환직은 산남의진의 흩어진 장졸들을 수습하여 세 번째 산남의진을 조직하게 된 것이다.

정환직은 경북 영천군 자양면 검단리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연일정씨로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집하여 영천 일대에서 활약한 정세아鄭世雅의 10세손이었다. 하지만 가세가 넉넉하지 못해 그는 어려서 익힌 침술로써 생계를 유지하였다. 註119) 그후 늦은 나이에 관직에 진출했는데, 아마도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 진압에 앞장섰던 공로를 인정받은 덕분이었을 것이다.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잠시 벼슬에서 물러난 적도 있었으나, 1897년 대한제국이 성립된 뒤에 그는 태의원별입시太醫院別入侍에 임명되어 고종의 측근으로 활동하였다. 註120) 그는 1900년을 전후하여 여러 관직을 전전하다가 모함을 받아 한때 갇히기도 하였으나, 무죄로 판명되어 석방되었다. 하지만 관직생활에 회의를 느껴 사직소를 올렸으나 고종은 그에게 중추원 의관을 제수하였다. 註121) 그러던 중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그는 관직을 버리고 은둔하였다.

당시 고종은 측근을 통해 은밀한 방법으로 의병봉기를 권유하는 밀지를 전하였다. 그는 고종의 밀지를 받고서 의병봉기를 계획하게 되었다. 註122) 정환직은 먼저 그의 아들 정용기에게 의병을 일으키게 하였다. 정용기는 두차례나 의병을 일으켰지만 끝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전사하고 말았다.

아들의 전사 소식을 전해들은 정환직은 급거 귀향하여 흩어진 장졸들을 수습하였다. 그는 아들을 대신하여 의병장에 올라 이세기李世紀·우재룡禹在龍 등과 함께 산남의진을 다시 일으켰다. 그는 1907년 9월 아들의 뒤를 이어 의병장에 오른 것이다. 그는 청송 보현산普賢山 일대를 활동근거지로 삼아 장령과 종사들을 각지로 파견하여 의병을 모집케 하는 동시에 적진의 동정을 살피도록 하였다. 이어 영일의 북동대산北東大山으로 의진의 근거지를 옮긴 뒤 무기와 군량을 갖춘 다음 새로이 의진의 진용을 짰다. 당시 산남의진의 편제는 다음과 같다.


의병장 정환직

참모장 정순기

중군장 이순기

도총장 구한서

소모장 김태환

선봉장 우재룡

후봉장 박 광

좌영장 이규필

우영장 김치현

좌익장 정래의

도포장 고 찬

좌포장 김성극

우익장 백남신

연습장 김성일

군문집사 정성우 註123)


위의 인물 가운데 이순기·구한서·박광·고찬·김성극·장성우 등은 새로이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그만큼 입암전투에서 손실이 컸던 것이다.

새로이 편성된 산남의진은 1907년 9월 3일 6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청하분파소를 습격·소각하면서 의병활동을 재개하였다. 註124) 이후 이들은 청송의 보현산 일대와 영일군의 동대산 일대를 근거지로 삼아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정환직이 이끄는 산남의진은 대구·영천을 중심으로 영덕·흥해·청송·영일·경주 등지를 오가며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할수록 일제 군경의 전력은 증강되었지만 산남의진의 경우에는 불리한 요소가 늘어났다. 잦은 전투와 이동으로 의병들은 피로가 누적되었고 무기와 탄약이 점차 고갈되는 등 전력 손실이 심각해진 것이다. 이에 따라 정환직은 휘하 의병들에게 개별적으로 북상하여 관동에 집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의병들은 각자 흩어져서 상인이나 농민으로 변장하여 관동으로 출발하였다. 註125) 정환직 자신도 북상하던 도중 청하 각전角田에서 잠시 병을 치료하고 있었다. 12월 11일 이를 탐지한 일본군 수비대에 의해 그는 체포되고 말았다. 결국 그는 영천 남교南郊에서 처형되었다. 정환직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자신의 비장한 심정을 담은 절명시를 남겼다.


육신이 죽는 들 마음이 변할 소냐

의리가 중요하니 죽음은 되려 가볍구나

뒷일을 누구에게 맡겨야 할까

말없이 앉았으니 새벽이 되었구나. 註126)


2) 최세윤의 의병활동

두 명의 의병장을 잃은 산남의진은 다시 전열을 정비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관동으로 북상중이던 이들은 갈 길을 멈추고 먼저 의진을 다시 재편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산남의진을 적극 후원하면서 신병을 치료하고 있던 흥해 출신의 최세윤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최세윤은 자가 성집聖執, 이명은 세한世翰인데, 의병을 일으키기 전에는 서당 훈장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註127) 이미 정환직은 변고에 대비하여 최세윤을 후임 의병장으로 내정해 놓았었기 때문에 산남의진의 주도인물들은 그를 추대하였다.

1908년 2월 이들은 북상을 중단하고 경상도 일대에서 지구전을 펼치기로 결정하였다. 그에 걸맞게 부서 조직을 재편하였다.



의병장 최세윤

중군장 권대진

참모장 정래의

소모장 박완식

선봉장 백남신

도총장 이종곤

후봉장 최치환

좌포장 최기보

우포장 이규필

연습장 김성일

장영집사 이규상

군문집사 허서기

유격장 이세기보현산 ·우재룡팔공산·정순기북동대산·서종락주왕산· 남석구철령·임중호주사산 註128)


산남의진은 본부를 남동대산에 두었으며, 부대를 소규모로 분산시켜 활동영역내의 큰 산을 배경삼아 유격전을 전개하는데 유리하도록 부대를 개편하였다. 이는 일제 군경의 군사력 증강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처였다. 이들은 긴밀한 연계를 유지하면서 때로는 연합전선을 형성하기도 하고, 독자적으로 유격전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이들 역시 영천·경주·흥해·청하·청송·영양·청도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註129)

이들의 활동을 차단하기 위해 일제 군경의 적극적 공세와 추격 활동도 집요하였다. 결국 최세윤 의병장은 1908년 7월 장기군 용동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10년형을 선고받아 복역중 1916년 단식·순국하였다. 註130) 이어 이세기 등 산남의진의 주도인물들도 체포되거나 전사함으로써 산남의진은 와해되고 말았다.

이상과 같이 산남의진은 3대 의병장으로 계승되면서 경상북도 남동부지역을 중심으로 장기항전을 전개하였다. 산남의진은 처음에 유생 주도 의병부대의 한계를 보였으나 차츰 무장투쟁을 위주로 전환되어가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산남의진이 완전히 해산된 후 일부 생존한 의병들은 1910년대 국내 비밀결사운동에 투신하거나 국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가로 전환하였다.


4. 한봉수 의병부대

한봉수韓鳳洙 註131)는 충북 청원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일제측에 의해 흔히 한봉용韓鳳龍, 韓奉用으로, 직업은 청주진위대 상등병 출신으로 잘못 이해되어 왔다. 註132) 그런데 그는 상등병 출신의 해산군인이 아니라 일반 평민이라고 한다. 그의 판결문에는 그의 직업이 무직으로 되어 있으며 의병에 가담하기 전에는 “타면기打綿機 밟는 것을 직업”이라 기술되어 있는 점 註133)으로 보아 그는 노동자였던 것 같다.

그는 1907년 음력 8월 청주진위대 해산군인 출신 김규환金奎煥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의병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때 그는 충북 청주를 비롯하여 괴산 미원米院 등지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일본 군경과 전투를 벌이거나 군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우편 체송인을 공격하여 세금을 탈취하였다. 그는 1908년 음력 7월 청주 세교細橋 전투에서 수비대와 교전하다가 의병장 김규환과 헤어진 후에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이끌었다. 그의 의병부대는 대체로 20~30명의 소규모로 구성되었으며, 주로 화승총으로 무장하였다. 또한 이들은 흑색 한복을 착용하거나 헌병보조원 복장으로 변장하는 기술이 능숙하였다. 그에 관하여 일제는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한봉서라는 자는 다소 기략機略이 있는 자로서 부하 20~30명을 거느리고 30년식 보기병총步騎兵銃과 탄약 약간을 가지고 일찍이 청안군 세교에서 우편물을 탈취하여 1만원을 얻어 부락민에게 산포하여 신용을 얻은 다음 우편물 약탈과 재산가의 습격을 일삼아 왔으나, 교묘하게 토벌망을 벗어나 근근 여명을 보존하고 있으면서 연말경 경상북도 북부지방으로 침입하였다. 註134)


그는 1909년 중반 속리산을 거점으로 삼아 활동하다가 경북지방으로 이동하였다. 결국 그는 1910년 5월에 체포되고 말았다. 그의 의병부대는 소규모로 구성되었으며, 유격전에 능숙하였다. 그는 속리산을 거점으로 삼은 노병대와 김운노, 상주 출신의 조운식趙雲植 등과 연합하여 충북과 경북을 오가며 활동하였다. 특히 조운식 의병부대와 합진하여 조운식 총대장, 한봉수와 박한성이 부장副將이 되었다. 註135)

1909년 음력 10월 조운식과 한봉수 등은 연해주에 있던 이범윤李範允의 연락을 받고서 러시아로 이동할 계획을 세웠다. 註136) 이 시기는 안중근 의거 직후였으므로 연해주의 의병 지도부가 국내 의병들과 연계하여 새로운 전기로 삼으려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즈음 조운식이 체포되는 바람에 그러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결국 한봉수는 일제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1910년 2월경 서울로 잠적했다가 5월 귀순을 요청하였다. 그의 귀순은 후일을 도모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처였을 것이나, 일제 경찰은 5월 15일 그를 체포하여 재판에 넘겼다. 공주지방재판소 청주지부에서는 그에게 교수형을 언도하였으나 경성공소원에서는 8월 29일자로 면소免訴 조치하였다. 이른바‘합방사면령’으로 면소된 것이다. 한편 그는 1919년 4월 1~2일 이틀에 걸쳐 고향인 세교리장터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미 그는 괴산 출신의 홍명희와 같이 상경하여 청주 출신의 천도교 지도자 손병희를 만난 바 있었다. 그가 주도한 만세시위는 인근지역인 미원 만세시위에도 영향을 주었다. 결국 다시 체포된 한봉수는 보안법 위반혐의로 1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이와 같이 한봉수 의병부대는 일제 군경과의 치열한 전투, 친일세력의 처단, 군자금 모금 등으로 인해 충청북도에서 가장 대표적인 의진으로 이름을 날렸다. 국내에서 의병활동이 더욱 어려워지자, 그는 연해주의 이범윤 의병부대와 연계하여 러시아로의 이동을 도모하였다. 이는

의병에서 독립군으로 전환하는 사례로서 중요하며, 더욱이 의병장 출신의 삼일운동 주도는 독립운동의 역사적 흐름을 보여주는 주목되는 사례라 하겠다.


5. 당진의병

충청북도는 충주-제천 등 북부지역을 중심으로 의병이 성했는데, 충청남도는 아산만을 사이에 두고 경기도와 인접한 당진지역의 의병이 매우 활발하였다. 이미 당진지역에서는 을사조약이 체결된 이후부터 의병활동이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한 영향이 당진에도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당진의병은 특히 소난지도小蘭芝島를 거점으로 삼아 활동한 정주원 의병부대와 홍원식 의병부대의 활동으로 대표된다. 註137)

정주원은 당진군 출신으로 경기도 죽산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1907년 8월 경기도 죽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수원과 안성 등 경기 남부지역과 충남 당진 서산 등지를 배로 이동하면서 활동하였다. 註138) 이들의 의병활동도 다른 의병부대와 비슷한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즉 당진분파소의 습격과 같은 항일활동, 의병을 빙자한 가의假義의 민간인 침탈행위 금지 활동, 납세거부투쟁 그리고 일진회와 같은 친일세력을 처단하는 활동에 집중된 것이다.

정주원은 1908년 초 충청 경기지역의 의병들을 연합한 13진창의소十三陣倡義所의 결성을 주도하였다. 註139) 양지창의소를 비롯한 죽산·용인·원주·이천·김포·양주 창의소 등 경기·강원지역의 7개 의병부대, 정산·남포·홍산·광천·제천·충주 등 충청지역 6개 의병부대의 이름으로 반의병反義兵 세력을 경고하는 광고문을 발표하였다. 이때 정주원은 13진도총대장十三陣都總大將이라 표방하였다. 註140) 다만 이들의 연합의진이 어느 정도의 결속력을 가졌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도간 경계를 뛰어넘는 연합의진을 시도한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이들은 경기도 남부지역에서 활동하다가 일제 군경의 탄압이 심하면 충남 당진으로 이동하여 활동하였다. 이들은 당진에서 일본인 우편 체송인을 처단하거나 당진 군아를 일시 점령하는 등 당진지역 의병활동을 주도하였다. 그러던 중 정주원은 1908년 7월 충남 해미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다가 부하 이상덕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는 교수형에서 종신형으로 감형되었다가 강점 이후에 풀려났으며, 이상덕은 15년 유배형에 처해졌다. 註141)

정주원이 체포된 후 일제의 대대적인 진압으로 당진 일대의 상당수 의병들이 체포되었다. 이처럼 심각한 타격에도 불구하고 일부 부하들의 항일투쟁은 계속되었다. 경기도 수원출신의 안춘경은 정주원의 뒤를 이어 독립하여 수원 일대에서 활동하였으며, 당진 출신의 최종성崔鍾成은 당진·서산·해미 등지에서 1909년까지 활동하였다. 또한 당진출신의 하군배·정선경·심주현 등은 당진 주재소 순사들과 교전하다 1909년

5월에 체포되고 말았다. 이와 같이 정주원 의병부대는 경기도 죽산에서 봉기하여 충남 당진을 중심으로 활발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한편 1908년 3월 당진의병의 활동이 갈수록 격화되자 일제는 홍성경찰분서의 순사대를 당진으로 파견하였다. 註142) 이들을 보내어 의병의 근거지로 의심되는 소난지도를 정찰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의 상황을 전해주는 자료는 다음과 같다.


근래 당진군 대소난지도大小蘭芝島와 부근 도서에 자주 상륙하는 것을 확인함에 따라 순사 상처효팔上妻孝八 이하 일본인 순사 6명과 한인 순사 8명으로 한 부대를 조직하여 이달 13일 파견했습니다. … (15일) 오후 3시에 적의 대장 홍원식洪元植, 경기도 안성 사람으로 나이 50 정도과 선봉장 박원석朴元石, 경기도 수원 사람으로 나이 30 정도 이하 총 41명은 육상 또는 부상 후에 해상에서 죽었습니다. 기타 바다에 투신하여 행방불명인 적세는 상세히 알 수 없지만 50명 내외로, 바다 속에 숨은 자도 도저히 죽음을 면할 수 없었다면 전멸한 것으로 인정됩니다. … 부상당한 적의 말에 따르면, 모두 의병으로 양식 준비를 하고 봄에 따뜻해지기를 기다려 타 방면의 도당과 연락하여 크게 활동할 예정이었다 합니다. 註143)


이 전투에서 소난지도에 주둔중인 홍원식洪元植 의병장 등 의병 41명이 전사하였고, 약 50명이 바다에 투신하여 실종되는 등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다. 겨울 추위를 피하기 위해 일시 주둔하고 있던 홍원식 의병부대는 일본 순사대와 9시간의 격전 끝에 약 100명의 사상자와 실종자가 발생함으로써 거의 전멸하였다. 소난지도는 육지에서 9Km도 떨어지지 않은 당진군에 소속된 조그만 섬으로, 이미 중기의병 시기부

터 의병의 근거지로 활용되고 있었다.

그런데 1908년 3월 15일 소난지도 전투를 지휘한 의병장 홍원식과 선봉장 박원석은 모두 경기도 출신이었다. 일제측은 이들이 모두 사망한 것으로 파악했지만 그중 홍원식은 기사회생하여 수원으로 돌아가 1910년대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던 중 3·1운동이 발발하자 화성 제암리 교회의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부인과 함께 순국하였다. 註144) 그는 의병에서 3·1운동까지 국내 항일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한 점에서 주목된다.

이와 같이 충남 당진에서는 정주원 의병부대와 홍원식 의병부대가 크게 활약하였다. 당진의병은 지리적 이점을 최대한 활용해서 경기도 남부지역의 의병부대와 긴밀히 연합하여 활동하였다. 註145) 특히 이들은 소난지도를 근거지로 하여 충남 내포지역과 경기 남부지역을 해상으로 이동하면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일부 세력은 강점이후에도 국내 비밀결사운동과 3·1운동을 주도한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6. 기타 의병부대들

1) 서병희 의병부대

경남 동부지역인 양산 울산의 산악지대를 배경으로 서병희徐丙熙 의병부대가 활동하였다. 서병희는 경남 양산 출신으로 고향에서 의업醫業에 종사하다가 일제가 침략을 자행하자 1907년 10월 허위 의병부대에 투신하여 경기도에서 음력 12월말까지 활동하였다. 註146) 음력 12월말 경상도에 내려가 의병을 일으키라는 허위의 명령에 따라 그는 해산군인 5명을 데리고 경주로 이동하였다. 경주에서 윤정의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활동하다가 1908년 음력 5월 부대를 나누어 자신은 양산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음력 8월 이후 다시 그는 경남 산청에서 활동중인 박동희 의병부대의 부장副將과 이학로 의병부대의 향관饗官으로 활동하다가 1909년 음력 2월 독립하였다. 당시 이학로李學魯는 진주출신으로 경남창의소 참모라 표방하며 활동하였다. 註147) 이처럼 그는 윤정의·박동희·이학로 등이 이끄는 의병부대와 연합하거나 긴밀하게 연계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서병희 의병부대는 경상남도 후기의병의 대표적인 의진으로 자리잡았던 것이다.

1908년 이후 서병희 의병부대는 주로 울산·경주·양산·산청·함안·창원·진주·의령·고성 등지를 전전하며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당시 그는 주로 국내에 이주한 일본 상인·농민·어민 등을 공격하였다. 하지만 그는 일본의 강력한 탄압을 견디기 어려워지자 무기를 은닉하고서 시장의 어물상으로 변신, 잠복하려다 1909년 12월 창원에서 체포되어 순국하였다.

그가 이끈 의병부대의 편제는 다음과 같다.


장관將官 서병희

소모 이성로

도포 이춘실

파수장 이국선

연습장 김재익

수도원首徙員 이태선

집사 이운오

1초십장 이치석

차지次知 신미명

2초십장 최덕수

차지 김태옥

3초십장 정한언

차지 양재순 註148)


이와 같은 편제로 보아 이들은 제법 정연한 부서를 갖추고서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약 50명으로 구성된 부대로서 10명 내외의 3개 초哨로 편성되었다. 서병희 의병부대는 경상남도 각지를 무대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그의 의병부대는 일본세력의 구축을 목표로 삼았는데, 동양 평화를 위해 한국침략을 포기하고 귀국하라는 내용의 격문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註149)

한편, 경남 서부지역의 의병항쟁을 본격화한 의진은 김동신 의병부대라 할 수 있다. 김동신은 주로 전라도에서 활동했으나 경남 서부의 하동 거창 등지를 넘나들었다. 김동신 의병부대에 대해서는 전라도 의병항쟁에서 상세히 서술될 것이다.


2) 유시연 의병부대

유시연의 집안은 안동시 임동면 수곡에 자리잡은 전주유씨 명문가였다. 註150) 그는 전기의병에 참여하였는데, 중·후기의병 시기에도 항쟁을 계속하였다. 특히 후기의병 시기에는 임동면 사람들을 중심으로 의진을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이 의진은 1906년 봄에 결성되어 1908년 여름까지 활동하였는데, 영덕·예안·진보·영양·일월산 등지가 활동영역이었다. 이들은 신돌석·김성운·박처사 의병부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며 연합전선을 형성하였다. 그리하여 일제의 강력한 탄압에 맞서 항일투쟁을 전개한 것이다. 1908년 2월 이후 이들의 의병활동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註151) 그런데 1913년 8월 유시연은 영주시 문수면 반구시장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만주로 망명하였다가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국내로 잠입했다가 이때 체포되었다. 결국 그는 1913년 11월 사형을 선고받아 이듬해 1월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유시연의 경우 전기의병에 참여한 이래 한결같이 의병항쟁을 지속하다가 국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가로 전환한 대표적인 사례라 하겠다.


3) 박처사 의병부대

박처사는 안동군 임동면 대곡리 출신의 박인화朴仁和로 추정되는 인물로 주로 박처사로 알려져 있다. 註152) 그는 30~40명의 의병을 이끌고 영양군 순사주재소를 공격하였으며, 반자위단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을사조약이후부터 1908년 여름까지 활동한 것으로 보이는데, 신돌석·유시연 의병부대와 연합전선을 형성, 일제 군경에 대응하였다. 하지만 박처사는 1908년 5월 밀정에 의해 피살됨으로써 그의 휘하에서 활동하던 의병들은 제각각 흩어지고 말았다.


[註 79] 김희곤,『안동사람들의 항일투쟁』 지식산업사, 2007, 72~160쪽. 

이 책의 한말 의병항쟁에 관한 부분은 총 88쪽인데, 후기의병과 관련된 서술은 8쪽밖에 되지 않은 점만 보더라도 그러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경북지방 의병항쟁을 개괄적으로 다룬 주요 논저로는 김세규, 「한말 경북지방의 의병항쟁」,『경주사학』4, 동국대 국사학회, 1985 ; 영남대민족문화연구소,『경북의병사』 1990 ; 권대웅, 「정미의병기 경북 북부지역의 의병전쟁」,『지역문화연구』6, 세명대, 2007 ; 김희곤, 「경북지역 의병 연구의 성과와 과제」,『의암학연구』4, 의암학회, 2007 등이 있다. ☞

[註 80]『편집자료』;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자료집』3, 572~577쪽. ☞

[註 81] 영남대 민족문화연구소,『경북의병사』 395쪽. ☞

[註 82] 영남대 민족문화연구소,『경북의병사』 410~411쪽. ☞

[註 83] 권대웅, 「정미의병기 경북 북부지역의 의병전쟁」,『지역문화연구』6, 13~15쪽. ☞

[註 84] 김세규, 「한말 경북지방의 의병항쟁」,『경주사학』4, 102쪽. ☞

[註 85]『편집자료』;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자료집』3, 566쪽. ☞

[註 86] 홍순권, 「한말 경남 서부지역의 의병활동」,『지역사회연구』5, 1997. ☞

[註 87]『편집자료』;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자료집』3, 529쪽. ☞

[註 88] 김상기, 「1908년 당진 소난지도 의병의 항일전」,『한국근현대사연구』28, 2003, 48쪽. ☞

[註 89]『편집자료』;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자료집』3, 535~538쪽. ☞

[註 90] 이강년 의병부대에 관한 연구는 꽤 많은 편인데, 주로 참고한 논저는 다음과 같다. 

이구용, 「운강 이강년의 항일의병활동」,『강원사학』7, 강원대, 1991 ; 정제우,『구한말 의병장 이강년 연구』 인하대박사학위논문, 1992 ; 전문진, 「한말 이강년 의병부대의 조직과 활동」,『부대사학』19, 부산대사학회, 1995 ; 구완회, 「이강년 관련 문헌에 대한 비판적 검토」,『제천을미의병100돌기념학술논문집』 백산출판사, 1996 ; 정제우,『운강 이강년 의병장』 독립기념관, 1997 ; 박민영, 「운강 이강년의 생애와 사상」,『한국근현대사연구』12, 2000 ; 구완회, 「정미의병기 이강년 부대의 정체성과 의진 사이의 연합과 갈등」,『제천의병의 이념적 기반과 전개』 이회, 2002 ; 구완회, 「한말의 호좌의진과 밀지」,『한말 제천의병 연구』 선인, 2005. ☞

[註 91] 청권사,『국역 이강년전집』 1993, 111~113쪽. ☞

[註 92] 윤병석,『한말 의병장 열전』 175쪽. ☞

[註 93] 구완회,『한말 제천의병 연구』 150~156쪽. ☞

[註 94] 구완회,『한말 제천의병 연구』 124~130쪽. ☞

[註 95] 「통고문」,『운강유고』1 ; 구완회,『한말의 제천의병』 집문당, 1997, 275~276쪽에서 재인용. ☞

[註 96] 구완회,『한말 제천의병 연구』 125쪽. ☞

[註 97] 구완회,『한말 제천의병 연구』 127쪽. ☞

[註 98] 구완회,『한말 제천의병 연구』 128쪽. ☞

[註 99] 윤병석,『한말 의병장 열전』 183쪽. ☞

[註 100] 구완회,『한말의 제천의병』 309~310에서 재인용. ☞

[註 101]『대한매일신보』1908년 1월 5일 「리씨리씨」. ☞

[註 102] 구완회,『한말의 제천의병』 355쪽. ☞

[註 103] 이강년 의병부대의 군사활동은 구완회의『한말의 제천의병』제2~5장에 상세히 정리되어 있다. ☞

[註 104] 신돌석 의병장과 그 의병부대에 관한 주요 연구로는 김희곤, 「신돌석 의진의 활동과 성격」,『한국근현대사연구』19, 2001 ; 김희곤,『신돌석: 백년만의 귀향』 푸른역사, 2001 등이 있다. ☞

[註 105] 윤병석,『한말 의병장 열전』 229쪽. ☞

[註 106] 김희곤, 「신돌석 의진의 활동과 성격」,『한국근현대사연구』19, 123쪽. ☞

[註 107]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1, 289쪽 ; 김규성 역,『金河洛征討日錄』 계몽사, 1968, 50쪽. ☞

[註 108] 윤병석,『한말 의병장 열전』 231쪽. ☞

[註 109]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申將軍實記」,『자료집』3, 411쪽. ☞

[註 110] 김희곤, 「신돌석 의진의 활동과 성격」,『한국근현대사연구』19, 128~132쪽. ☞

[註 111] 김희곤, 「신돌석 의진의 활동과 성격」,『한국근현대사연구』19, 134~135쪽. ☞

[註 112] 윤병석,『한말 의병장 열전』 235쪽. ☞

[註 113]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의병항쟁사』 258쪽. ☞

[註 114]『토벌지』;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자료집』3, 738쪽. ☞

[註 115]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1, 576쪽. ☞

[註 116] 김희곤,『신돌석: 백년만의 귀향』 180쪽. ☞

[註 117] 권용배, 「산남의진(1906-1908)의 조직과 활동」,『역사교육논집』16, 경북대, 1991, 130~131쪽. ☞

[註 118] 산남의진에 대한 주요 연구로는 배용일, 「산남의진고-정환직·정용기 부자 의병장 활동을 중심으로-」,『포항실업전문대학 논문집』6, 1982 ; 배용일, 「산남의진과 최세윤 의병장」,『포항실업전문대학 논문집』7, 1983 ; 배용일, 「최세윤의병장고」,『사총』31, 1987 ; 배용일, 「산남의진고」,『한국민족운동사연구』5, 1991 ; 윤병석,『한말 의병장 열전』; 권용배, 「산남의진(1906~1908)의 조직과 활동」,『역사교육논집』16 등이다. ☞

[註 119] 윤병석,『한말 의병장 열전』 239쪽. ☞

[註 120] 송상도,『기려수필』 140쪽. ☞

[註 121] 배용일, 「산남의진고」,『한국민족운동사연구』5, 4쪽. ☞

[註 122]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山南義陣史」,『자료집』3, 381쪽. ☞

[註 123]『山南倡義誌』하, 21~22쪽 ; 권영배,「산남의진(1906~1908)의 조직과 활동」,『역사교육논집』16, 151쪽. ☞

[註 124]『편집자료』;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자료집』3, 581쪽. ☞

[註 125] 권영배, 「산남의진(1906~1908)의 조직과 활동」,『역사교육논집』16, 156쪽. ☞

[註 126] 송상도,『기려수필』 142쪽. ☞

[註 127] 배용일, 「최세윤 의병장고」,『사총』31, 52쪽. ☞

[註 128] 배용일, 「최세윤 의병장고」,『사총』31, 60쪽. ☞

[註 129] 권영배, 「산남의진(1906~1908)의 조직과 활동」,『역사교육논집』16, 161쪽. ☞

[註 130] 영남대 민족문화연구소,『경북의병사』 401쪽. ☞

[註 131] 그의 판결문에는 ‘韓奉洙’로 적혀 있다(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자료집-별집 1』 390~393쪽). ☞

[註 132] 박걸순, 「의병장 한봉수의 항일투쟁」,『한국독립운동사연구』10,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6, 263·269~270쪽. ☞

[註 133]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자료집-별집 1』 390쪽. ☞

[註 134]『토벌지』;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자료집』3, 798쪽. ☞

[註 135]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자료집-별집 1』 533~534쪽. ☞

[註 136] 박걸순, 「의병장 한봉수의 항일투쟁」, 281~288쪽. ☞

[註 137] 당진의병과 소난지도의병에 대한 주요 연구 성과는 다음과 같다. 

이인화, 「한말 당진 의병전쟁 연구」,『내포문화』14, 2002 ; 박상건,『당진지역 한말의병운동사』 소난지도의병항쟁기념사업회, 2003 ; 김상기, 「1908년 당진 소난지도 의병의 항일전」,『한국근현대사연구』28, 2004 ; 김상기, 「한말 당진 지역 의병의 항일투쟁」,『한국근현대사연구』41, 2007 ; 김상기, 「한말 정주원과 당진 의병」,『충청문화연구』창간호, 2008. ☞

[註 138] 김상기, 「한말 정주원과 당진 의병」,『충청문화연구』창간호, 4쪽. ☞

[註 139] 김상기, 「한말 정주원과 당진 의병」,『충청문화연구』창간호, 6쪽. ☞

[註 140]『편책』, 「홍비수 제122~1호」(국가기록원 소장) ; 김상기, 「한말 정주원과 당진 의병」,『충청문화연구』창간호, 7쪽에서 재인용. ☞

[註 141] 김상기, 「한말 정주원과 당진 의병」,『충청문화연구』창간호, 11·18쪽. ☞

[註 142] 김상기, 「한말 당진 지역 의병의 항일투쟁」,『한국근현대사연구』41, 18쪽. ☞

[註 143] 김상기, 「1908년 당진 소난지도 의병의 항일전」,『한국근현대사연구』28, 45~46쪽에서 재인용. ☞

[註 144] 김상기, 「1908년 당진 소난지도 의병의 항일전」,『한국근현대사연구』28, 50쪽. ☞

[註 145] 김상기, 「한말 당진 지역 의병의 항일투쟁」,『한국근현대사연구』41, 22~23쪽. ☞

[註 146]『편책』, 「경비수 제279호」·「제8208-3호」 ; 국사편찬위원회,『한국독립운동사』자료 16, 318~321·338~339쪽. ☞

[註 147]『편책』, 「고비발 제73호」 ; 국사편찬위원회,『한국독립운동사』자료 16, 325쪽. ☞

[註 148]『편책』, 「경비수 제279호」 ; 국사편찬위원회,『한국독립운동사』자료 16, 321쪽. ☞

[註 149] 국사편찬위원회, 「嶺南倡義人徐丙熙檄告于日商」,『한국독립운동사』1, 714~715쪽. ☞

[註 150] 한준호, 「안동출신 의병장 유시연(1872~1914) 연구」, 안동대석사학위논문, 2005. ☞

[註 151] 김희곤,『안동사람들의 항일투쟁』 지식산업사, 2007, 156쪽. ☞

[註 152] 김희곤,『안동사람들의 항일투쟁』 157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