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전라도의 의병항쟁 / 후기의병의 확산 / 한말 후기의병

몽유도원 2014. 4. 30. 12:43

제4장 후기의병의 확산


후기의병 항쟁의 전개

강원·경기도의 의병항쟁

경상·충청도의 의병항쟁

서북지역의 의병항쟁

전라도의 의병항쟁


5. 전라도의 의병항쟁


전라도의 의병에 대한 중요성은 일찍부터 언급되어왔다.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의 다음과 같은 평가가 그것이다.



대체로 각 도의 의병을 말한다면 전라도가 가장 많았는데, 아직까지 그 상세한 사실을 얻을 수 없으니 후일을 기다려야 한다. 註271)



박은식의 이러한 주장은 일제 당국의 통계를 통하여 입증된 바 있다. 일제측 자료에 따르면 1908~1909년 사이에 전라도의 의병투쟁이 전국적으로 가장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1908년 전라도의 의병들은 일본 군경과 교전횟수와 교전의병수에서 전국대비 25%와 24.7%를, 1909년에는 47.2%와 60%를 차지하였다. 註272) 이처럼 호남의병은 1908~1909년 사이에 타 지역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크게 활약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전라도는 후기의병의 주무대로 알려져 왔고, 수많은 의병부

대가 전라도의 심산유곡과 외딴 섬 등 각지에서 활동하였다. 일제측이 파악한 의병장만 하더라도 셀 수 없이 많다. 예컨대 고광순·기삼연·김태원·김율·김동신·전해산·심남일·안규홍·이석용·이남규·양치원·강사과·고광수·신보현·신명선·김황국·김용구·이철형·양진여·강사문·조경환·황병학·문태서 등이 그들이다. 註273)

이들은 전라도 각지를 종횡무진하며 활약하였다. 일제측조차,



전라 충청 경상의 각도를 발섭跋涉하며, 일본인을 질시하고 만일 일본인을 보면 노유老幼를 가리지 않고 살해하며, 또 그들은 ‘일진회원은 일본에 아부하여 한국을 팔아먹는 무리’라 하여 이를 살해하는 예가 적지 않았으며, 혹은 저희들의 정보를 관헌에 보고하였다는 이유로써 인가를 불사르고 보고자를 살해하는 등 실로 횡포발호를 극하였다. 註274)



고 토로하듯이, 전라도 의병의 활동을 제어하지 못한 실정이었다. 당시 전라도 의병들이 삼남지방을 누비며 반일활동과 더불어 친일세력인 일진회와 밀정 등의 처단에 적극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전라도 의병은 “동에서 치면 서로 달아나고, 남에서 치면 북방으로 흩어지고 또 출몰상황이 대개 야간을 이용하고 때로는 대담하게도 주간에 소수의 군대 헌병을 공격하기도 한다.”며 진압의 어려움을 고백하고 있다.

이에 대응하여 일제는 1908년 이후 대규모 군사력을 동원하여 전라도 의병의 탄압에 나섰다. 그들은 1월에는 10개 부대로 진압작전을 전개한 이래 2월에는 15개의 이른바 연합토벌대, 심지어 특설순사대를 편성하여 전라도 의병의 탄압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들은 150회의 군사작

전을 자행하여 의병 756명 전사, 포로 700명, 부상 수백명의 피해가 발생했는데도 의병의 기세가 일시 꺾였다가 다시 재연되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註275)

일제측이 실토하듯이, 전라도 의병은 “어느 한 지방을 습격하려고 할 때에는 미리 일시를 기하여 실행하고, 목적을 이루면 다시 집합지와 일시를 정한 다음 몇 사람씩 분산하여 양민으로 가장, 우리의 예봉을 벗어나는 것을 상례”로 한 것처럼 유격전에 매우 능숙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전라도 의병들이 자유자재로 유격전술에 능숙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동학농민혁명 이래 농민군의 투쟁역량이 향상되었음을 의미할 것이다.



폭도들의 행동은 극히 교묘하여 백주에는 양민을 가장하고 공공연히 군청 소재지를 배회하면서 관서의 동정을 정찰하고, 만약 호기를 잡으면 곧 자객적 행동을 감행, 총기 탄약 재화를 약탈하고 혹은 허를 틈타 저격 내습하는 등 그 은현 출몰을 미리 헤아릴 수가 없었다.

또 순사주재소는 거의 전부가 습격을 당하였고, 양민을 위협하여 조세를 횡령하고, 재류 일본인 및 그 사역使役 하에 있는 조선인은 대개 폭도의 독수毒手에 목숨을 잃어 다년간 사업 경영을 포기하고 그 근거지로 퇴각하여야 하겠금 되었으므로 농업이 번성하였던 전라 양도는 이제야 바야흐로 황무지화하게 되었다. 註276)



전라도 의병들이 일제의 침탈을 저지하기 위해 침략기구와 일본인 이민자의 구축에 적극적이었으며, 행동을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유격전에 능숙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반일투쟁의 열기는 1909년까지 지속되었는데, “전라남북 양도는 전년부터 계속 소란이 그치지 않았다. 특히 남도에서 더욱 심하였다.” 註277)고 한다.

결국 일제는 1909년 9월부터 두 달 동안 전라도 의병을 완전히 섬멸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군사작전을 실시하였다.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이란 미명하에 추진되었는데, 가히 호남의병대학살사건이라 불릴 만큼 일제의 군사작전은 야만적이고 잔혹하였다. 이 작전으로 말미암아 전라도 의병은 회복 불능의 막대한 피해를 입었음은 물론이다. 전라도 의병의 뛰어난 활약상과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을 확인할 수 있는 몇몇 뛰어난 사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호남창의회맹소

1) 기삼연과 호남창의회맹소의 결성

1906년 6월에 일어났던 태인의병의 여파는 전라도 각지에 널리 퍼졌다. 특히, 유림세력이 강했던 전남 장성에서는 배일감정이 더욱 고조되면서 거의를 도모하는 움직임이 활발하였다. 註278) 의병을 일으킬 준비는 기삼연奇參衍 등이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 기삼연은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재종질로서 명문 유생이었다. 그의 자는 경로景魯, 호는 성재省齋로서 장성에서 출생했다. 그는 이미 1896년에 기우만奇宇萬이 주도했던 장성의병에 참여한 바 있으며, 1902년 5월에도 의병을 일으키려다 체포된 적이 있었다. 1903년에도 그는 ‘인통함원忍痛含寃’ 네 글자를 가슴에 새기며 오로지 거의할 궁리에만 전념하였다. 따라서 그는 의병에 뜻이 있는 동조세력을 모으기 위해 장성을 비롯한 인근 군읍郡邑의 뜻있는 인사들과 빈번히 접촉하였다. 註279) 예컨대 1906년 봄 그는 영광의 김용구金容球와 자주 만나 거의를 모색하였다. 이들은 매달 만나 거의와 관련된 문제를 협의하고 동조세력의 확대를 도모하였다. 註280)

마침내 기삼연은 장성 수연산隨緣山 석수암石水菴에서 의병을 불러 모았다. 기삼연이 주도한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 註281)에 참여한 인물들은 대체로 기정진 계열의 유생들이었다. 註282) 1907년 10월 중순 일제는 그러한 사실을 처음으로 포착하였는데, 이 의병의 규모를 30여 명으로 파악하였다. 註283) 이들은 석수암에 얼마동안 주둔하다가 전북 고창의 문수사文殊寺로 이동하였다.

10월말 이들의 규모는 약 400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註284) 갑자기 의병의 규모가 증강된 배경에는 문수사 전투에서 승리한 여세와 함께 영광의 김용구와 이영화, 나주의 김태원, 장성의 이철형, 함평의 이남규 등이 의병을 이끌고 합류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註285) 그리하여 1907년 10월 30일 호남창의회맹소가 결성되었다.

호남창의회맹소의 주요 부서部署와 주도인물들은 〈표 2〉와 같다.


〈표 2〉 호남창의회맹소의 주요 구성원 註286)

성 명직 책나이 
(1907)
신분 
(직업)
거주지학통비 고
기삼연대장56유생전남 장성蘆沙전기의병
김용구통령46유생전남 영광松沙전기의병 후원, 회맹소 계승
김엽중참모     
김봉수참모 유생전남 장성  
김익중종사56유생전남 장성蘆沙전기의병, 고창성 전사
서석구종사     
김태원선봉37유생전남 나주 분진한 후에 독자활동, 전사(1908.4)
이철형중군36유생전남 영광省齋분진후 독자활동, 귀순(1908.3)
이남규후군41유생전남 함평 분진후 독자활동, 체포 → 피살
김태수운량     
백효인총독 유생   
이영화감기32유생전남 영광 분진후 독자활동, 사망
김창복좌익     
허경화우익     
김기순포대    분진후 독자활동


〈표 2〉에서 알 수 있듯이, 첫째 호남창의회맹소의 주요 구성원들은 대부분 장성·고창·영광 등 전라도 서부지역의 양반 유생들이었다. 특히 의진의 명칭에 ‘회맹會盟’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도 여러 지역에서 참여한 4~5개의 의병부대가 하나로 통합한 데서 연유한 듯하다. 註287) 이로 인하여 훗날 의병장 기삼연의 사후에 여러 개의 독자적인 의병부대로 신속하게 전환될 수 있었다.

둘째, 호남창의회맹소의 지도부 가운데에는 기정진의 문인이거나, 노사의 손자인 기우만과 기삼연의 제자들이 적지 않았다. 결국 이들은 학문적으로 동일한 기반을 가진 세력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은 학통에 의한 결속력이 강하여 장기항쟁을 지속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셋째, 이들은 사상적으로 위정척사사상과 춘추의 의리를 중시하는 유생들이 많았다. 註288) 넷째, 호남창의회맹소는 전투를 직접 수행하는 조직과 전투를 지원하는 조직으로 크게 대별된다. 의병활동의 근간이 되는 군사조직은 통령을 비롯한 선봉장·중군장·후군장·좌익장·우익장·포대장 등으로 편제되었으며, 참모와 종사 등은 의병장의 휘하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전략과 전술을 짜는 역할을 한 듯하다. 운량運糧은 군수를 지원하는 부서이며, 총독 감기監器의 임무는 군율을 담당하는 직책이었을 것이다.


2) 호남창의회맹소의 활동

호남창의회맹소는 자신들의 거의 사실을 전국에 널리 알렸다. 이들은 고유의 인심을 지키고 전통적인 제도를 보존하기 위해 일제의 침략을 단호히 배격하겠다는 점을 천명하였다. 또한 대한제국의 주권과 천연 자원, 그리고 국민들의 생존권을 보호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켰다고 주장하였다. 이를 위해서 “풀이 바람을 따르듯” 모든 계층이 의병에 참여하거나 협조해달라고 호소하였다. 나아가 이들은 다른 지역 의병부대들과의 연대를 중시하였으며, 구미열강의 외교적 협조를 기대하였다. 특히 일본인의 처단에 현상금을 내걸었다. 요컨대 이들은 대외선린관계의 중시, 타 지역 의진과의 연대 강화 그리고 현상금 제도의 도입 등을 표방한 것이다.

또한 이들은 광고문廣告文을 발표하여 주민들이 지켜야 할 사항을 제시하였다. 註289) 곡식의 역외유출 금지, 수입품의 매매 금지, 친일파의 처단 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궁장토와 역둔토의 도조賭租를 의소義所에 바칠 것, 세금을 내지 말 것, 자위단自衛團과 일진회에 가입하지 말라고 지시하였다. 이들이 일제의 경제적 침탈의 심각성을 인식하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대체로 종래의 의병들은 주민들의 생존권 문제나 외국 상품의 폐해, 일제의 경제적 침탈 등을 언급한 경우가 별로 많지 않았다. 그런데 호남창의회맹소의 활동은 주민의 생존권을 우선시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어간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들의 이러한 주장은 훗날 호남지방의 후기의병들이 집중적으로 거론할 만큼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특히, 의병들의 납세거부 및 방곡 투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다음으로 이들은 대한매일신보사에 격서문을 보내어 자신들의 의병봉기 사실을 게재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註290) 계몽운동세력과 의병운동세력은 시국관이나 국권수호의 방략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보수적 유생이었던 이들이 계몽세력이 주도하는 언론기관을 활용하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리고 호남창의회맹소는 「포고만국문布告萬國文」을 각국 공사관에 보내어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나아가 만국공법萬國公法의 한계를 지적하면서도 각국이 교린交隣하자고 호소하였다. 이들은 성리학적 입장에서 서양의 문화를 비판하였지만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자고 주장한 것이다.

호남창의회맹소의 활동은 1907년 10월말에 시작하여 다음해 1월말까지 계속되었다. 1908년 2월 2일에 의병장 기삼연이 전북 순창에서

체포됨으로써 그를 중심으로 전개되던 의병활동은 사실상 막을 내렸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활동지역은 주로 장성·영광·담양·고창·함평·무장 등 전라도의 서부지역이었다. 또한 이들의 주된 공격 대상은 각 군읍에 상주하는 순사주재소와 우편취급소 그리고 이민온 일본인 등이었다. 그 결과 일본 재류민들과 관리들의 불안이 확산되어 철수하거나 사의를 표하는 자들이 잇따랐다. 註291)

다음으로 호남창의회맹소는 일진회원의 제거와 납세거부투쟁에 적극적이었다. 註292) 이들이 일본인을 공격하고 일진회원들을 처단하는 한편 납세거부투쟁을 주도함으로서 일본인들의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활동을 더욱 확산하기 위하여 납세거부투쟁과 세무관리와 일진회원의 처단 등을 강조하는 고시문을 자주 유포시켰다. 註293)

한편 호남창의회맹소는 상황에 따라 합진合陣과 분진分陣을 번갈아 구사하였다. 註294) 이들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실질적으로는 독자적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註295) 이를테면 기삼연은 장성·순창 지역에서, 김태원은 영광·나주·함평·무안 지역에서 각각 활동하였다. 1907년 12월 중순경 이들은 의병장과 통령을 비롯한 선봉·중군·후군 등 약 4~5개의 의병부대로 분진하였다. 이들이 합진하였을 때의 규모는 약 500명 정도였으며, 註296) 분진시 규모가 큰 의병부대는 약 200명 선을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맞서 일제는 호남창의회맹소에 대한 대대적인 진압작전을 펼쳤다. 1908년 1월 광주수비대는 10개 종대縱隊를 편성하여 호남창의회맹소의 근거지 색출에 나섰다. 註297) 당시 광주수비대는 경찰 병력과 합동으로 전라북도의 무장과 순창, 전라남도의 장성·영광·남평·나주를 거쳐 함평의 연안지역으로 의병을 압박하는 포위작전을 펼쳤다.

그러나 당시 일제의 의병진압작전은 기대한 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에 남부수비관구 사령관 항길恒吉 소장은 대구에 주둔중이던 14연대장 국지菊池 대좌로 하여금 직접 호남의병의 뿌리를 뽑으라고 명령하였다.



1월 이래 경상남도·전라남도에 있어서 폭도의 도량跳梁은 점차 활발하여져 누차 헌병 경찰 관서를 습격하고 각지의 수비대가 이를 토벌하였으나 충분한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으므로 2월 초순 남부 수비관구 사령관은 보병 제14연대장 국지菊池 대좌에게 그 지방의 토벌을 명하였다. … 207명을 사살하고 3월 7일 토벌대의 편성을 풀어 각 수비지로 귀환하였다. 註298)



남부수비관구 사령관이 예하 연대를 직접 파견하여 전라·경상도 의병의 진압을 독려하였다는 것이다. 일제의 진압작전은 2월 7일부터 약 한달 동안 계속되었다. 당시 그들은 15개 전담부대를 편성하여 전라도 서부지역에서 활동하는 호남창의회맹소 계열의 의병부대와 지리산 지역에서 활동중인 김동신金東臣 의병부대를 진압의 주된 대상으로 삼았다. 註299) 14연대 병력 외에도 일제는 조치원 기병대의 일부를 전라도에 파견하여 2월 13일부터 약 보름동안 군사작전을 펼쳤다. 기병대는 5개의 분진대分進隊로 편성되어 의병의 근거지였던 사찰이나 촌락을 목표로 정

밀 수색을 실시하였다.

이 과정에서 호남창의회맹소 계열의 여러 의병부대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당시 호남창의회맹소는 몇 개의 부대로 나뉘어 활동중이었다. 기삼연이 이끄는 본진은 겨울 추위를 피하고 설을 지내기 위하여 일시 활동을 중단할 계획이었다. 그리하여 의병장 기삼연은 본진을 이끌고 담양읍에 소재한 우편소·세무서·군아 등을 점령하여 각종 기물을 파괴한 후에 금성산성金城山城에 주둔하였다. 註300)

이들은 담양주재소의 순사대와 순창 및 광주의 수비대로 구성된 합동토벌대에 의해 기습을 당했다. 금성산성 전투에서 약 30명의 의병이 전사했으며, 부상당한 의병도 30여 명이나 되었다. 결국 기삼연은 정월 보름 이후에 다시 모이기로 약속한 뒤 자신은 순창의 구수동에 몸을 숨겼다. 1908년 2월 2일 음력 설날 기삼연은 순창 복흥의 구수동에서 금촌今村 토벌대에 의해 체포되고 말았다. 註301) 이 소식을 전해들은 선봉장 김태원은 날랜 병사 30여 명을 이끌고 광주 근교의 경양역景陽驛까지 추격하여 기삼연의 탈환을 시도하였다. 기삼연을 탈환하려는 의병들의 시도에 불안해하던 일제의 헌병대는 그를 곧바로 총살함으로써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였다. 註302) 이로써 기삼연 중심의 호남창의회맹소의 활동은 종식되었다.

한편 의병장 기삼연의 휘하에서 활동하던 김용구를 비롯한 호남창의회맹소의 지도부는 거의 붕괴 상태의 본진을 신속하게 재편하였다. 이들이 재기하는 과정을 일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본년 2월 초순부터 3월에 걸쳐 국지菊池 토벌대가 광주 부근을 소탕하여 수괴 김용구기삼연 : 저자주 이하 2백여 명을 사살하였으므로 일시 정온 상태를 유지하였으나, 적염賊焰은 곧 재연하여 전라 양도 일대에 걸쳐 소요를 야기하게 되었다. 註303)



호남창의회맹소의 지도부가 곧바로 부대를 재편하여 다시 반일투쟁에 나섰다는 것이다. 이처럼 이들이 비교적 쉽게 의병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던 배경은 호남창의회맹소가 합진과 분진이 용이한 조직체였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이들은 호남창의회맹소를 결성할 때부터 여러 개의 의병부대의 통합체로 출범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들중 일부 부대는 일제의 진압작전 기간에도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아 쉽게 재편할 수 있었다.

호남창의회맹소 계열의 활동이 전라도 전역으로 확대되자 일제는 군사작전과 회유공작을 병행하였다. 1907년 후반에 일제는 자위단을 편성하여 의병에 대한 정찰과 경계 활동을 강화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일진회가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의병을 대상으로 귀순공작을 병행함으로써 의진 내부의 분열을 부추겼다. 때로는 특정 의병부대를 와해할 목적으로 특설순사대나 전담 토벌대를 편성하여 수시로 진압작전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수많은 호남의병들이 희생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전라도 의병들은 주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1908~1909년 사이에 의병항쟁의 주역으로 활동하였다. 호남창의회맹소의 적절한 투쟁방략에 의해 의병투쟁이 장기화됨으로써 전라도는 1908~1909년에 후기의병의 중심무대가 되었던 것이다.


2. 이석용 의병부대

전라남도에서 기삼연이 호남창의회맹소를 결성하여 후기의병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면 전라북도에서 그러한 역할은 이석용李錫庸이 담당하였다. 그는 전북 임실 출신으로 호는 정재靜齋, 본관은 전주였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수학하다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룬 후 진안으로 이사하였다. 그는 충신 열사의 일화를 즐겨 들었으며, 실제 역사의 현장이었던 남한산성과 진주 촉석루 등을 찾아가 삼학사와 논개의 충렬과 기개를 음미하거나 운봉의 「황산대첩비」를 보며 구국의 기상을 길렀다. 註304) 또한 그는 연재 송병선, 송사 기우만, 면암 최익현, 간재 전우 등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1901년 면암 최익현이 그에게 현재의 가장 큰 의리로 ‘벽파개화劈破開化’를 제시해 준 점을 매우 중시하였다. 註305) 또한 그는 송병선으로부터 국가가 위급할 때에는 효보다는 충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가슴 깊이 새겼다.

1907년 고종이 강제로 퇴위하자, 그해 음력 8월 하순 그는 왜적을 물리치기 전에는 집에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하고서 부모에게 하직인사를 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 오랑캐 놈들이 도성 안에 가득차 있어 임금과 신하는 처소를 잃어버릴 지경에 이르렀사오며, 단군 기자의 베푼 풍교는 요원해지고 요순의 도학은 땅에 떨어졌사오니 무릇 혈기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어찌 역적을 토벌하고 원수를 갚을 생각이 없겠사옵니까. 다만 대의를 만천하에 펴기 원이오며, 성공하고 못하는 것은 예측할 바 아니옵니다. 註306)



그는 고종의 강제 퇴위를 비롯한 일제의 정치적 침탈을 막기 위해 의병에 나설 것임을 부모에 알리고서 죽음을 각오하고 의병의 길로 나선 것이다.

1907년 음력 8월말 그는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과 함께 진안 상이암上耳菴에서 의병을 일으키기 위한 전략을 세우고 무기를 조달하고 격문을 사방에 전하여 의병을 불러 모았다. 그는 초기에는 전투력을 확보하기 위해 주로 무기를 수습한 후 음력 9월에 진안 마이산에서 거의하였다. 이석용은 의진의 명칭을 호남창의소라고 했으며, 호남창의대장이라 자칭하였다. 註307) 당시 이석용 의병부대의 주요 진용은 다음과 같다.



대장 이석용

종사 전해산 한사국

선봉 박만화 송판구

중군 여주목 김운서

후군 임종문 김사범

총지휘 곽자의 박갑쇠 註308)



이들은 대체로 임실을 비롯한 전북의 동부지역에 거주하는 가난한 유생들이었다. 병사층은 주로 농민들과 천민들로 구성되었는데 약 300명 규모였다. 註309)

이들은 자신들이 지켜야 할 일 14개 조항과 10개 조의 의령義令을 천명하였다. 註310) 즉, 일본인 구축, 일본 상품 배격, 인물 본위 모병, 무기제조 기술자 영입, 푸른색 군복 착용, 간략한 군례軍禮, 일진회를 비롯한 친일세력 처단, 엄격한 군율 적용, 민폐 근절 등을 지키야 한다는 것과 근왕사勤王事·정명분正名分·안민심安民心·족군용足軍用·출기계出器械·정공상定功賞 등을 내걸었다. 이들은 대오를 편성한 후 곧장 진안읍을 공격하여 분파소와 우편물취급소, 일본어 통역의 가옥 등을 불사르고, 통신선을 절단하였으며 일진회 사무소의 깃발을 내리게 하였다. 아울러 이들은 군율을 엄히 하여 민폐를 끼치지 않아 주민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그후 용담에서 활동 중이던 김동신 의병부대와 합진을 논의하였으나 지휘권의 문제로 갈등을 일으켰다. 註311) 이석용은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유격전술로 대응하자고 주장한 반면, 김동신은 대규모의 의병부대로 운용할 것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결국 그러한 불화 과정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이석용 의병부대는 크게 패하였다. 선봉장 박만화가 전사하는 등 상당한 피해를 당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임실·진안·장수·운봉·남원·곡성·정읍 등 주로 전라도의 동부 산간지역을 무대로 항일투쟁을 계속하면서 구례로 이동해온 고광순 의병부대와의 연합을 모색하였다. 註312) 이들은 주로 깊은 산중의 사찰과 제각에서 주둔하였는데, 고투의 연속이었다. 당시 이석용은 “장수는 수저없이 밥을 먹고 군사는 겹옷 아닌 홑옷을 입었네”라고 표현하였다.

결국 이석용은 지리산에 들어가 의병부대를 쉬게 한 다음 다시 의진을 정비하여 정읍과 장수를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재개하였다. 1908년 봄 이들은 남원·임실·태인 등지에서 활동하던 중에 기우만 및 임병찬 등과 의병의 방략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들은 일제 군경과 항일투쟁을 전개하는 한편, 무기를 확보하기 위해 대장장이를 불러다 무기를 만들었다. 또한 이들은 탄환과 화약, 군량 등을 조달하기 위해 부유한 집안의 형편에 따라 군자금을 할당하기도 하고, 친일활동을 일삼는 일진회원의 처단에 힘을 기울였다. 간혹 부서를 재편하기도 했는데, 중군장 김운서를 부장副將, 윤명선을 중군, 김성학을 선봉, 정성현을 우포장을 삼아 포군장에 임명된 최덕일을 보좌하게 하였다. 註313)

그리하여 이들은 공전영수원 등 세금을 징수하는 사람이나 세무서 등을 공격하였으며, 의병의 동향을 보고하는 자위단 활동을 금지시켰다. 하지만 이들의 활동은 더 이상 계속하기 어려웠다. 장기항전으로 인해 의병의 전력이 크게 약화된데다 일제 군경의 탄압이 갈수록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석용은 1909년 음력 3월 후일을 기약하며 의병을 해산하였다.

1910년 8월 나라를 잃게 되자, 그는 1911년 3월 동지들과 함께 일본천황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으나 실행하지 못하였다. 註314) 그후 1912년 겨울 그는 국가를 되찾기 위해 비밀결사를 결성하였다. 이들은 중국으로 망명하여 그곳의 항일지사들과 연계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할 계획이었다. 이른바 임자밀맹단壬子密盟團은 구례의 정찬석을 비롯하여 하동·곡성 ·남원·전주·임실·진안 등의 동지 약 20명으로 구성되었다. 註315) 불행히도 그는 친구의 밀고로 1913년 음력 10월에 체포되고 말았다. 註316) 이와 같이 이석용 의병부대는 전라북도의 대표적인 후기의병으로 활동하였으며, 해산 이후에도 이석용 등은 국내에서 비밀결사를 결성하여 독립운동으로 전환하였다.

한편 그는 살인·방화·강도죄를 적용받아 재판을 받았는데, 그는 “차라리 대한의 닭이나 개가 될지언정 너희 원수의 나라 신하가 되지는 않겠다.” 註317)고 당당히 답변하였다. 또한 그는 창의록과 불망록不忘錄을 남긴 이유로써 창의록은 자신의 충분忠憤을 담아 일본에 보내려는 것이었고, 불망록은 거의 이후 도움받은 내용을 기록으로 남겨 훗날 보상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註318) 결국 그는 1914년 4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기고 교수형을 받아 순국하였다.



천고의 강상을 짊어짐은 중요하고

삼한의 해와 달은 밝게 비치는데

외로운 신하 만 번 죽어도 마음 변치 않으니

사람으로 머리 숙여 사는 것보다 훨씬 낫다네. 註319)



3. 김동신 의병부대

1907년 후반부터 전라도의 의병봉기는 본격화하였다. 앞에서 살펴본 호남창의회맹소의 활동이 큰 영향을 주었고, 그와는 별도로 호남지방의 의병봉기를 본격화하는데 크게 기여한 의병부대도 있었다. 바로 김동신金東臣과 고광순高光洵이 이끌었던 의병부대가 그것이다. 당시 일본측은,



폭도의 수괴는 김동식김동신 ; 저자주·고광순 등으로 전라남북도에 있어서 폭도의 선구자였다. 註320)



라고 파악하였다. 김동신과 고광순 등이 전라도 후기의병의 선구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김동신은 충남 회덕 출신의 한의韓醫였다. 註321) 당시 호남에서 봉기한 대표적인 의병장들은 대체로 경서나 사기에 통달한 명문 유생들이 많았다. 註322)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그는 매우 특이한 존재라 하겠다. 이에 김동신 의병부대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註323)

김동신金東臣의 집안은 15대조인 호정好正 때부터 충남 회덕군 탄동면에서 살기 시작하여 김동신이 태어날 때까지 대대로 세거하였다. 註324) 1908년 6월 그가 체포된 후 작성된 「청취서聽取書」 註325)에 의하면 그의 집안은 별로 알려지지 않은 중인中人이었고, 그는 의병에 가담하기 전에는 의업醫業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을사조약의 강제 체결 소식에 김동신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가 일제의 침략을 강력히 비판하며 의병에 나선 것이다. 註326) 그는 의병에 가담하기 위해 민종식·최익현 등과 접촉하였던 것 같다. 註327) 하지만 그가 직간접으로 관련된 의병의 봉기가 실패로 돌아가자, 그는 독자적인 거병계획을 세웠다. 더욱이 그는 민종식으로부터 받은 ‘칙지勅旨’를 소지하고 있었으므로 의병을 모집하는데 유리하였으리라 믿어진다. 또한 당시 전라도의 경우에는 최익현의 격문이 널리 유포되어 반일감정이 고조되어 있었다. 이를 계기로 전라도의 뜻있는 인사들은 여러 차례 의병봉기를 시도한 바 있었다. 註328)

이러한 상황 속에서 김동신은 의병모집에 적극 나섰다. 그가 “은거한 선비를 찾아다니고 의를 행하는 인물을 몰래 모았다” 註329)라거나, “거창·삼가·함양 등지를 두루 다니며 충지忠志의 선비를 찾아보았다” 註330)라고 한 점으로 보아 그러하다. 당시 그는 전라·경상도 지방을 돌며 의병을 모집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승지承旨라고 소개하였던 것 같다. 그로 인하여 그는 일제에 의해 승지를 참칭僭稱한 자로 파악되었다.

마침내 그는 독자적인 의병을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청취서」에



문 작년융희 원년 음력 8월 일 불명에 네가 병을 일으킨 장소는 어떤 곳이냐?

답 전라북도 정읍군 내장산중 연암사然菴寺에서 기우만 고광순과 공계共計하야 그곳에서 병을 모집하였다.

문 그때 모집한 병은 몇 명이냐?

답 80명이다. 註331)



라고 있듯이, 그는 기우만·고광순과 공모하여 1907년 음력 8월 내장산의 한 사찰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註332) 그후 그는 규합한 의병을 인솔해서 지리산으로 이동하였다. 註333) 김동신은 의병부대의 명칭을 삼남창의소三南倡義所라고 불렀으며, 스스로 삼남창의소도원수三南倡義所都元帥 또는 대한창의대장大韓倡義大將 등을 표방하였다.

김동신 의병부대의 지도부의 직책은 김동신의 『문집』 안에서도 간간히 산견된다. 그것을 종합해보면 이들의 조직은 선봉·중군·후군 등 전통적인 부대편제인 3군체제로 이루어져 있다. 다만 지도부의 구성원 개개인에 대한 구체적인 행적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그것은 김동신 의병부대가 강력한 결속력이나 지역적 기반 또는 학통을 매개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삼남창의소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충청·경상·전라도 등 3도道 출신들을 위주로 의병부대를 구성하였다. 이로 인하여 김동신은 의병부대의 명칭을 삼남창의소라고 한 것 같다. 그나마 지도부 가운데 어느 정도 행적을 알 수 있는 이들은 김재성·유종환·염기덕이다. 선봉장 김재성金在性은 김운노金雲老와 동일인으로서 충북 보은 출신인데, 주로 속리산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註334) 그리고 잠시동안 선봉장을 지낸 유종환兪宗煥은 선전관宣傳官을 지낸 전직관료였다. 註335) 그는 서울출신으로서 충청도를 거쳐 전라·경상도를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1909년 4월에 체포되었다. 그가 김동신 의병부대로부터 독립하여 의병을 불러모을 때 의조擬造된 밀칙密勅을 사용하였다는 점에서 의병장 김동신과 유사하다. 또한 중군장으로 활약한 염기덕은 양반으로서 충남 정산의 칠갑산에서 의병장에 추대되었으나 심상희 의진에 합류하여 활동하였다. 그후 다시 김동신 의병부대의 지도부로 활동하다가 김동신이 체포되자 독자적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하던 중 1909년 4월에 체포되었다. 수성장과 군량장을 각각 맡아 활동하던 정기중과 임대형은 양반 신분이었다는 사실 정도가 확인될 뿐이다. 註336) 여타의 다른 직책을 가진 김동신 의병부대의 지도부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당시 이들은 투쟁역량이 낮은데다 군기軍紀마저 확립되지 않았다. 이는 이들을 결속시켜주는 학문적 동질성이나 지역적 혈연적 기반 등이 견고하지 않았던 것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또한 이들이 단일한 의병부대라기 보다는 여러 의병부대의 연합 형태였기 때문에 결속력이 낮았으리라 짐작된다. 이에 의병장 김동신은 투쟁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였다. 註337) 그는 전라도로 이동한 강원도 해산군인들을 받아들여 전력을 보강하였다. 註338)

김동신 의병부대의 의병항쟁은 전라도에서 시작되었다. 1907년 9월 순창 우편취급소와 분파소에 대한 공격이 그 신호탄이 된 것이다. 이들은 내장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지리산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순창읍을 공격하였다. 註339) 그 후 이들은 전라도에서 경상남도 서부지역까지 활동영역을 넓혔다. 김동신 의병부대는 지리산을 근거지로 삼아 경상남도의 안의·하동·함양 등지로 활동지역을 넓혀갔다. 그는 이 과정에서 국가의 위급함과 각료의 비정秕政을 비판하고 일본인들을 몰아내자는 내용의 격문을 발송하여 주민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註340) 이들은 먼저 의병을 빙자하여 민간인의 재산을 약탈하는 자들을 근절시켰다. 그리하여 주민들로부터 적극적인 지지를 받은 것이다.

이들의 반일투쟁이 계속되자, 일제는 경남 진해에 있던 중포병대重砲兵隊까지 동원하였다.



작년1907;필자주 8월부터 12월에 이르는 기간에는 그 세력이 창궐을 극하였던 김동신이 인솔한 무리가 그 수에 있어서 가장 많아 각지를 횡행하여 흉폭이 이르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러므로 진해만 중포병소 소위는 하사 이하 20명을 거느리고 진주 경찰서 순사 3명, 순검 6명과 함께 하동군 화개상면 탑촌에 집합한 김동신을 공격할 목적으로 10월 17일 새벽 그곳에 도착하여 격전 분투 1시간에 걸쳐 부장 고광순 이하 25명을 죽이고 다수의 부상자를 냈다. 註341)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진해 중포병대와 순사대가 합동으로 출동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전투에서 고광순 이하 25명의 의병이 죽고 다수가 부상하였다. 곧이어 그들은 김동신 의병부대의 근거지였던 지리산의 문수암을 불태웠다. 김동신 의병부대가 일본군을 공격할 때 문수암이 거점으로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리산에 의병기지를 건설하려는 시도는 상당히 많았던 것 같다. 註342) 이를테면, 전남 광양의 의병들도 지리산으로 이동하였고, 전북 임실과 태인에서 각각 의병을 일으킨 강재천姜在天과 임병찬林炳瓚 등의 부하들이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심지어 청국인들까지 지리산에 의병기지의 구축을 시도하였다. 1907년 후반부터 지리산으로 근거지를 옮겨가는 의병들이 꾸준히 증가하였다.

특히, 김동신 의병부대의 경우, 지리산의 문수암文殊庵을 비롯한 각 사찰을 근거지로 삼아 활동하였다. 숙영의 편리함이나 활동상 많은 편의를 제공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지역적 연고가 미약한 김동신으로서는 험준한 산악지대에 위치한 사찰들을 근거지로 삼아 활동하는 것이 더 유리하였을 것이다.

한 겨울의 추위를 넘긴 김동신 의병부대가 활동을 재개하자, 일제는 1908년 1월부터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진안·남원·광주·구례·진주·하동 등지의 수비대와 경찰 병력을 총동원하였다. 註343) 또한 같은 해 4월에 그들은 이들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하여 변장대變裝隊를 투입하기도 하였다. 이들에 대한 진압작전이 전라도 서부지역에서 활동중인 호남창의회맹소에 대한 진압과 때를 같이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일제의 동절기 의병진압 작전은 호남의병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양대 의병부대를 궤멸시키려는 목적으로 추진된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호남창의회맹소는 의병장 기삼연을 비롯한 200여 명의 의병들이 희생되었다. 이에 반해 김동신 의병부대는 그보다는 피해가 크지 않았던 것 같다. 그것은 이들이 산악지대를 기반삼아 활동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몇 달 후 김동신은 일시 귀향했다가 대전의 순사대에 의해 1908년 6월 6일 체포되고 말았다. 註344) 당시 그는 상당량의 서류를 휴대하고 있었다. 그가 휴대한 다양한 서류 중 대부분의 문서는 김동신과 무주 출신의 유서기兪書記가 작성한 것이었다. 註345) 통문이나 왕복문은 우국지사들에게 의병을 권유하는 내용이었다. 또한 서류 중에는 주민들에게 군자금이나 물자를 징발하는 명령서, 그것을 경감해달라는 주민들의 청원서, 일제의 군대와 경찰의 동향을 의병에게 알려주는 주민들의 정탐 보고서 등이 많았다. 이로써 볼 때 의병장 김동신이 단순히 신병을 치료하기 위해 귀향했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문집』에 적었듯이 의병투쟁의 새로운 전기를 모색하기 위해 상경하던 중 불행하게도 일제의 경찰에 체포된 것이다.

당시 김동신 의병부대는 1908년 1월부터 계속된 일제의 군사작전에 의해 지리산의 근거지를 상실한 경우가 많았다. 특히 김동신이 직접 지휘하는 본진의 경우에는 지역적 연고가 취약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거듭되는 일제의 군사작전에 의해 자신들의 근거지가 자주 노출되었다. 반면에 김동신과 연합하여 활동하던 의병부대의 경우에는 대체로 지역적 기반을 토대로 활동하였다. 그런 까닭에 이들은 일제의 군사적 공세를 보다 유리하게 대응한 듯하다. 김동신은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는 방안을 강구하기 위해 상경하던 중 일시 귀향했다가 체포된 것으로 보인다.

갑자기 의병장을 잃게 된 김동신 의병부대는 일제의 계속되는 진압작전에 대한 대응책을 강구하였다.



그들은의병 ; 저자주 지리산중 인적이 없는 곳에 가옥을 구축하고 장벽을 설치하고 방책防柵을 만들고 주식을 저축하여 영구지책永久之策을 강구하고 있었으나, 6월 21일 함양 수비대는 심한 곤란을 무릅쓰고 드디어 그 근거지를 발견하여 총기 탄약을 노획하고 기타는 전부 소각하였다. 그후부터 폭도는 거의 사산하였는데 그 대부분은 경상남도 전역으로 꺼지고 일부는 전라도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註346)



지리산 깊은 산중에 집을 짓고 장벽과 방책을 설치하고서 그 안에 총기와 탄약 및 주식을 비축하여 영구적인 대책을 세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이러한 노력도 허사가 되고 말았다. 일제에 의해 발각되어 모두 불태워졌기 때문이다. 결국 이들은 경상남도와 전라도의 각처로 흩어지거나 다른 의병부대로 합류하였다. 이로써 약 1년 동안 지리산을 중심으로 반일투쟁을 이끌어 왔던 김동신 의병부대는 해산되고 말았다. 김동신 의병부대는 호남지방 후기의병의 선구적 역할을 다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활동은 장기항전 전략인 이른바 ‘의병전쟁준비론’에 의해 지리산 중심의 의병기지 건설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4. 고광순 의병부대

고광순高光洵은 호남의 명가로 알려진 장흥고씨로서 창평에서 태어났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금산에서 순절한 의병장 고경명·종후·인후 3부자의 후손으로 인후의 사손祀孫이었다. 그는 19세기 후반까지만 하더라도 참다운 선비로서의 자질을 닦고, 종가의 본분에 어긋나지 않은 삶에 충실하였다.

그러던 중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자 그의 생활에 커다란 전환이 이루어졌다. 그는 일제에 의해 자행된 명성황후시해사건과 단발령을 계기로 기우만이 주도한 장성의병에 참여한 것이 그것이다. 그는 기우만과 함께 상소문과 통문을 작성하였는데, 광주·장성·담양·순창·창평에 의병을 권유하는 통문을 보내어 장성향교의 창의와 광주회맹光州會盟에 가담할 것을 촉구하였다. 註347) 그는 전기의병이 해산된 이후에도 집안일을 제쳐두고 오직 의병을 일으킬 일념으로 영·호남으로 돌아다니며


일제의 남한대토벌작전에 의해 체포된 호남지역 의병장들

 


동지를 포섭하는데 열중하였다. 당시의 상황에 대하여 그는 “서생의 가슴속에는 저절로 갑병甲兵이 들어있는 법”이라 토로하였다. 한편 고광순의 사돈이었던 기재奇宰 역시 장성의병에 참여한 바 있으며, 기재의 아들 기산도는 고광순의 사위였다. 기산도는 이른바 을사5적 처단활동을 전개했을 뿐만 아니라 3·1운동 직후 임정의 독립자금 모금에도 기여한 바 있다.

전기의병이 일부 구성원의 반발과 아쉬움 속에 해산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의병의 불길이 식은 것은 아니었다. 1905년 11월 체결된 을사조약을 전후하여 의병의 열기가 되살아났다. 특히 면암 최익현은 호남지역 의병의 활성화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창의를 호소하는 그의 글은 전남 지역의 의병 봉기를 크게 자극하였다. 즉 고광순·백낙구·이항선李恒善·강재천姜在天·기우일奇宇日·기우만·양회일 등이 각각 창평·광양·구례·장성·곡성·능주 등에서 의병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따라서 최익현의 의병봉기는 호남의 의병기운을 일깨웠을 뿐만 아니라 의병항쟁을 고조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하지만 태인의병이 순창에서 패진하여 해산되자 고광순은 백낙구· 기우만 등과 함께 구례 중대사中大寺에 집결하여 광양·순천을 중심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註348) 또한 고광순은 1907년 2월음력 섣달그믐날에는 남원의 향리 양한규와 연합하여 남원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이를 위해 음력 12월 중순 창평 소재 저산猪山의 전주이씨 제각에서 의진을 결성하였다. 당시 고광순 의진을 주도한 인물로는 부의병장 고제량高濟亮, 선봉장 고광수高光秀·좌익장 고광훈高光薰·우익장 고광채高光彩·참모 박기덕朴基德 고광문高光文·호군 윤영기尹永淇·종사 신덕균申德均·조동규曺東圭 등이었다. 의병장 고광순을 비롯하여 창평의 고씨들이 대거 가담한 점이 주목된다. 하지만 고광순 의진이 남원에 도착하기 전에 양한규 의진이 먼저 일어났다가 패퇴함으로써 남원을 점령하려던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창평으로 돌아온 고광순은 1907년 음력 3월에 능주의 양회일, 장성의 기삼연과 의병봉기를 계획하며 창평·능주·동복 등지를 전전하였다. 註349) 이처럼 60노구의 그는 오로지 충의를 신념으로 10여 년간 고군분투하였다. 그 결과 일제조차 고광순을 ‘호남의병의 선구자’혹은‘고충신高忠臣’이라 부르며 감탄할 정도로 호남의병의 활성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리하여 일제는 그를 최익현·기삼연과 더불어 1906~1907년 사이에 가장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꼽았다. 註350)

그는 1907년 9월 의병전략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즉 화력과 훈련 면에서 압도적인 일제 군경과 맞서 싸우는 방식을 탈피하고서‘축예지계蓄銳之計 혹은 根據之計’, 다시 말해 장기항전에 대비하여 일정기간 예기銳氣를 기른 후에 전쟁을 불사한다는 전략을 수립한 것이다. 이를 위해 고광순 의병장은 국내에 항구적인 의병기지의 건설을 추진하였다. 그는 험준한 산으로 알려진 지리산 피아골을 의병의 기지로 주목하였다. 이는, 중부이북의 의병들이 이른바 북계책北計策을 추진한 것과 비교된다. 註351)

의병들이 지리산을 장기항전의 근거지로 삼으려는 시도는 1907년 중반이후에 추진되었다. 이러한 전략을 본격적으로 추진한 의병장은 바로 고광순이었다. 아래의 기록이 그러한 사실을 말해준다.



(1907. 음) 8월 11일 행군하여 구례 연곡사에 이르렀는데, 산이 험하고 골짜기가 깊었다. 동쪽으로는 화개동과 통했는데, 그곳에는 산포수가 많았다. 북쪽으로는 문수암과 통했는데, 암자는 천연의 요새였다. 연곡사를 중간기지로 삼아 장차 문수암과 화개동을 장악하여 의병을 유진시켜 예기를 기르는 계책으로 삼았다. (고광순은) 대장기를 세우고 깃발에는 ‘불원복不遠復’ 석자를 썼다. 註352)



고광순은 연곡사가 위치한 피아골을 의병의 근거지로 삼아‘머지않아 회복한다不遠復’의 기치아래‘축예지계’, 즉 예기를 기른 후 항전을 도모하겠다는 구상을 밝힌 것이다. 당시 지리산은 장기항전의 근거지로 주목받았다. 특히 전라도의 중북부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의병부대를 이끌던 고광순을 비롯한 김동신 등이 지리산에 의병의 근거지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지리산을 무대로 활동하던 의병들은, “지리산중 인적이 없는 곳에 가옥을 구축하고 장벽을 설치하고 방책을 만들고 주식을 저축하여 영구지책永久之策을 강구” 註353)했던 것이다.

이후 삼남지방에서 활동하던 의병들도 이러한 인식이 널리 확산되었던 것 같다. 즉 1908년 전반에 “하동군 북쪽 골짜기의 지리산은 의병의 소굴이 되었다” 註354)라거나, “「남소익장南騷益張」 남래인南來人의 전설을 거據한즉 전라 경상 양도에 출몰하는 의도義徒들이 지리산을 근거하고 수천여 명이 집합하야 세심치성勢甚熾盛함” 註355)이라 한 사실로 보아 그러하다. 심지어 지리산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의병부대에 청국인 왕성왕王性王을 비롯한 수백명이 참여한 특이한 경우도 발견된다. 註356) 이와 같이 1907~1908년 사이에 삼남지방의 의병들은 지리산을 훌륭한 조건을 구비한 활동무대로 인식하고 있었다. 따라서 지리산의 의병기지화는 의병장 고광순의 ‘축예지계’전략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요컨대, 고광순은 지리산을 의병기지로 삼아 장기항전의 기틀을 마련하려는 전략을 수립한 창안자라 할 수 있다.

1907년 후반 고광순은 김동신 등과 의견을 모아 지리산으로 이동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전라도에서 경상남도 서부지역까지 활동영역을 넓혔다. 다음의 기록이 그와 같은 사실을 알려준다.



본도경상남도 ; 저자주에 파급한 것은 작년1907 ; 저자주 9월 경성의 인물로서 일찍이 승지의 관직에 있었다는 김동신이라는 자가 고광순·홍영대洪永大를 손발로 삼고 전라북도를 건너 지리산에 근거를 만들고, 안의·하동·함양의 각 부락에 격서를 날려 국가의 위급을 호소하고 각료의 비정秕政을 탄핵하며 겹쳐 일인을 몰아내지 않으면 더러움을 백세에 끼친다는 창도唱導에 선동, 매혹되어 맹종하고 그 기旗 밑에 모이는 자 날로 많아지며 … 註357)


고광순과 김동신 등은 전라북도로부터 지리산을 근거지로 삼아 경상남도의 안의·하동·함양 등지로 활동지역을 넓혀가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반일투쟁이 계속되자, 일제는 경남 진해만에 있던 중포병대重砲兵隊까지 동원하여 진압에 혈안이 되었던 것이다.

당시 고광순 의병부대는 일제에 맞서 부대를 3개로 나누어 대응하였다. 즉 고광수와 윤영기에게 각각 1개 부대를 주어 경남 화개의 앞뒤 방향에서 공격하게 했으며, 자신은 고제량 등과 함께 피아골 연곡사를 근거지삼아 일제의 군경을 맞아 싸웠다. 註358) 격렬한 전투로 인해 사태가 긴박하게 돌아가자 의병장 고광순은 좌우에 말하기를 “한번 죽음으로 국가에 보답하는 것으로 내 마음은 이미 정해져 있다. 너희는 나를 염려하지 말고 각자 도모하라.”고 하였다. 이에 고제량은, “처음에 의로써 함께 일어났으며 마지막에도 의로써 함께 죽는 것인데 어찌 죽음에 임하여 홀로 면하겠는가.”라고 말하며 끝까지 싸우다가 순국하였다. 이 전투에서 고광순 이하 25명의 의병이 죽고 다수가 부상하였다. 일제는 전투가 종료된 후에 연곡사와 문수암을 소각한 후 철수하였다. 이 사찰들이 의병부대의 거점으로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고광순 의병부대의 활동은 종식되었다.

하지만 피아골에서 살아남은 고씨 일가, 즉 ‘군부軍簿’를 들고 피신한 고광순의 막내동생 광훈, 그리고 집안의 동생 광문과 광수 등이 흩어진 병사들을 수습하여 의병투쟁을 계속하였다. 이들은 지리산 주변의 구례·남원·곡성 그리고 무등산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이와 같이 고광순은 1896년초 호남의병이 봉기한 이래 지속적으로 장기간 항쟁을 주도해왔다. 그리하여 고광순 의병부대는 전라도가 한

말의병의 주무대가 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장성·나주·담양 지역에서 불을 지핀 한말의 의병항쟁은 전라도 전체로 확산됨으로써 1908~1909년에 이르러 한말 의병전쟁을 전남지역에서 주도하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 의병장 고광순은 지리산을 장기항전의 근거지로 만들기 위해 이른바 ‘축예지계蓄銳之計’의 전략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된다고 하겠다.

당시 구례에 살고 있던 매천 황현은 그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애도하였다.



연곡의 수많은 봉우리 울창하기 그지없네

나라 위해 한평생 싸우다 목숨을 바쳤도다

전장터의 말들은 흩어져 논두렁에 누웠고

까마귀 떼만이 나무 그늘에 날아와 앉아 있네

나같이 글만 아는 선비 무엇에 쓸 것인가

이름난 가문의 명성 따를 길 없다네

홀로 서풍을 향해 뜨거운 눈물 흘리니

새로 쓴 무덤이 국화 옆에 우뚝 솟았음이라



5. 김태원·김율 형제 의병부대

일본측은 1906~1907년 사이에 전라남도에서 활약한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최익현·고광순·기삼연을, 1908년에는 김태원金泰元과 김율金聿 형제를, 1908년 후반부터 1909년까지는 전해산·심남일·안규홍 등을 꼽았다. 註359) 이 가운데 김태원과 김율 의병부대는 호남창의회맹소의 분진과 그 이후의 호남의병 활성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더욱이 김태원과 김율은 친형제로서 의병에 투신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註360)

김태원과 동생 김율은 한학에 조예가 깊었으나 뚜렷한 사승관계는 잘 알 수 없다. 아마도 노사학파의 일원이 아니었을까 한다. 이들이 호남창의회맹소에 적극 가담한 사실로 보아 그러하다. 일제의 침탈이 갈수록 심화되자 이들 역시 의병을 도모할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들은 흉금을 터놓던 김돈金燉 등 동지들과 상의하였는데, 김돈은 독자적으로 의병을 일으키는 것 보다는 기삼연 의병부대와 연합하라고 종용하였다. 당시 김돈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세력이 고립되면 적을 부수기 어렵고, 힘이 합해지면 큰 일을 성취할 수 있다. 들은즉 성재가 충성되고 신의가 있어 믿을 만하다 한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우리가 명족名族에 의탁하면 진나라를 반드시 부수리라’하였는데, ‘기공은 곧 노사선생의 조카이니 지금의 명족이 아닌가’하며 기삼연의 의진에 합류할 것을 적극 권하였다. 註361)



김돈의 주장을 받아들인 김태원은 기삼연의 호남창의회맹소에 가담하기로 결심하고 동지들과 함께 장성으로 갔다. 동생 율은 나중에 합류하기로 하고 자신이 먼저 출발한 것이다. 이때가 1907년 음 9월경이었다.

김태원은 고창의 호남창의회맹소의 본진이 주둔하고 있던 문수사文殊寺에 도착하여 기삼연과 앞으로의 항일투쟁의 방략에 대해 논의하였다. 그런데 그날 밤 일본군경에게 기습을 당하고 말았다. 의병들은 크게 당황하여 어찌할 줄을 몰랐다. 그는 동요하는 의병들의 마음을 되돌려 놓

은 후 자신이 직접 앞장서서 돌담에 의지하여 침착하게 총을 쏘아댔다. 기습당한 의병이 쉽게 무너질 것이라 안이하게 생각한 일제 군경이 오히려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김태원의 재빠른 판단에 의해 문수사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것이다.

김태원의 군사적 지식과 대담성을 높이 산 기삼연은 김준을 호남창의회맹소의 선봉장에 임명하고서 군무를 맡겼다. 이후 고창읍성을 점령할 때에도 김태원은 선두에 서서 의병을 지휘하였다. 하지만 곧바로 일본군경의 역습을 받아 고창성을 내주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참모 김익중 등 적지 않은 의병들이 희생되었다.

장성 백양사 방면으로 물러난 기삼연과 김태원 등은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고 전열을 가다듬으며 새로운 전략의 수립에 고심하였다. 이들은 여러 지역에서 일시에 의병이 일어나기를 기대하였으나, 우선 그렇지 못하다는 점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또한 훈련이 되지 않은 의병을 대부대로 운용하는 것도 무모하다고 판단하였다. 아무래도 기동성이 저하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기삼연과 김태원은 의병부대를 서로 나누어 분산·활동하기로 결정하였다. 기삼연과 김태원은 군사를 나누어 활동하면서 의병의 규모를 차츰 늘려갔다. 이처럼 군비를 갖추어가던 호남창의회맹소는 영광을 공격하려다 여의치 않자, 법성포의 일본인을 공격하였다. 법성포에는 조기어장과 세곡의 운송로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상당수의 일본인들이 일찍부터 들어와 있었다. 이들을 위한 주재소와 우편취급소·상점 등이 갖추어져 있었음은 물론이다. 의병들은 이러한 시설물을 모조리 불태웠으며, 창고에 쌓여있는 곡식을 주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후 독자적인 의병부대로 활동하게 되자, 김태원은 선봉장에 조경환曺京煥, 도포장에 최동학崔東鶴, 후군장에 김옥현金玉鉉, 참모장에 유병기劉秉淇 등을 임명했다. 그리고 동생 율로 하여금 따로이 의병부대를 이끌게 하였는데, 김율 의진의 경우 선봉장은 문상린文祥麟과 후군장 윤동순尹東淳 등이었다. 당시 김율은 의병에 투신할 것을 권유받자, “대장부가 이런 세상을 당하여 거의하지 않는다면 어찌 국가에 보답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며 형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투쟁역량을 강화한 김태원·김율 의병부대는 영광·함평·나주 등 주로 전남 서부지역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전라도 일대에 이들의 명성은 크게 높아졌다. 패배한 경우도 없지 않았으나, 이들이 당시의 항일투쟁을 주도하였음은 물론이다. 따라서 일본군 광주수비대는 이들의 활동을 저지하기 위해 1908년 1월 24일부터 작전에 들어갔다. 15개 부대로 편성된 일본군 수비대가 의병활동이 크게 성한 지역을 중심으로 진압작전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담양의 무동촌茂洞村에 광주수비대가 나타났다. 당시 김태원 의병부대는 추위를 피하고 설날을 지내기 위해 담양 남면의 무동촌에 유진중이었다. 전혀 예상치 않았던 일본군 광주수비대가 갑작스럽게 출현하자, 의병들은 크게 동요하였다. 하지만 의병장 김태원은 “그대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가. 대장부 남아가 죽을지언정 불의에 굴하여서는 안된다. 또 적이 사방에서 총을 쏘는데 어찌 도망할 길이 있겠는가.”하고서 대책을 수립하였다. 즉시 포수인 강길환과 조덕관 등 의병들을 돌담의 좌우에 매복시켰다가 일시에 총을 쏘게 하였다. 결국 이들은 침착하게 대응하여 일본군 수비대를 격파하였다. 담양 무동촌전투에서 이들은 일본군 수비대 천만川滿 조장과 사병 등 2명을 죽이고 2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註362)

한편 1908년 1월말 기삼연이 이끄는 의병부대는 담양의 금성산성에 유진중,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크게 패하였다. 이 전투 직후 기삼연은 순창에 은신하였다가 붙잡히고 말았다. 의병장 기삼연이 피체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김태원은 날랜 병사 30명을 이끌고 광주 경양역 부근까지

추격했으나 허사였다. 이미 일본군이 기삼연을 광주로 이송한 뒤였던 것이다. 기삼연을 탈옥시키려는 움직임을 눈치챈 일본군은 기삼연을 정상적인 절차도 거치지 않은 채 광주천 백사장에서 총살시키고 말았다.

호남창의회맹소는 의병장을 잃었으나, 이미 분진하여 독자적인 활동을 해왔던 관계로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았다. 김태원과 김율이 이끄는 의병부대는‘호남의소湖南義所’라는 이름으로 더욱 적극적인 반일투쟁을 전개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친일파인 일진회원과 밀정, 자위단원 등을 닥치는 대로 처단하였으며, 군량미를 모금하여 곳곳에 숨겨놓기도 했다. 그리고 주민들에게는 일제에 세금을 내지 말라고 호소했다. 즉 납세거부투쟁을 유도한 것이다.

일본군은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하여 이들을 진압하는데 온힘을 기울였다. 여기에 맞서 김태원과 김율은 각 군의 군수와 주사, 자위단, 그리고 향교에 글을 수시로 보내어 의병활동의 정당성과 도움을 호소했다. 일본군의 진압과 회유가 집요해진 시기에 맞불을 놓으며 의병에 가담할 것과 도움을 요청했던 것이다.

김태원·김율 의병부대는 민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들이 주민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무엇보다도 주민들에 대한 토색을 금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의병부대의 투쟁역량을 강화하여 일본군경과의 전투에서 거의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민중의 지지를 획득할 수 있었으리라 믿어진다.

이 점과 관련하여 매천 황현黃玹은 의병장 김태원에 대하여 “기발한 전략을 많이 이용하여 1년여 동안 수백명의 일병을 죽였으며, 부하를 엄히 다스려 백성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았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일제조차 김태원을 “신출귀몰하여 군대와 경찰의 두통거리”라거나, 1908

년의 가장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김태원·김율 형제를 꼽았다. 이는, 그가 청장년 중심의 정예의 의병부대로 조직하여 “감사지졸敢死之卒” 즉 죽음을 각오한 결사대로서 활동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이들은 장성의 토천전투土泉戰鬪에서 승리하였다.



○ 장성소식

음력 2월24일양 3.26에 의병대장 김참봉 태원씨가 포군 70명을 거느리고 장성군 토물 뒷봉에 복병하고 일병과 싸우는데 처음에는 일병 3명이 죽고 1명은 도망하여 각처의 수비대에 청병請兵하여 일병 60여 명이 와서 오전 8시부터 오후 12시까지 접전하였는데 일병은 30여 명이 죽고 의병도 10여 명이 죽었고 …

4月 24日 장성 본사 통신원 註363)



위에서 보았듯이, 김태원 의병부대는 장성의 토천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파했다. 당시 의병들은 토천의 뒷산에 보루와 방어진지를 쌓은 다음 적을 유인하여 온종일 공방전을 벌인 끝에 수십명을 살상하는 전과를 거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1908년 3월 이후 김태원·김율 의병부대는 전력의 손실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예컨대 의병장 김태원은 영광 낭월산 전투에서 도포장 최동학을 잃었으며, 대곡 전투에서도 기습을 받아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이는 각 읍면마다 설치된 자위단과 각 마을별로 친일세력인 일진회원들이 의병활동을 밀고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일제의 강력한 군사작전은 수시로 전개되었으며, 3월에는 제2특설순사대까지 편성되어 의병장 김태원과 김율의 제거에 초점을 맞추어 활동하였다. 그리고 4월 19일에는 광주수비대에서 김태원 의병부대를 소탕하기 위해 8개 부대를 편성해서 15일간의 군사작전을 실시하였다. 註364)


일본군경의 어등산 작전지도



그럼에도 이들의 의기는 더욱 확고해졌다. 김태원은 “승패는 보통 일이다. 오직 마땅히 충의를 격려하여 큰 승리를 도모함이 늦지 아니하다.”라고 하며, 의병확보와 투쟁역량의 제고에 고군분투하였다. 그러던 중 동생 김율은 광주 소지방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註365) 이에 앞서 동생 김율이 이끌던 의병부대의 명부名簿가 일본 경찰에 피탈되기도 했다. 김태원은 동생 율을 구출시킬 계획을 세우던 중 허리의 통증이 심해져서 치료를 위해 광주 박산 마을 뒤의 어등산魚登山에 들어갔다. 일본군 기병대와 제2특설순사대는 김태원의 은신처를 사방에서 포위하였다. 註366) 이를 알아챈 의병장 김태원은 부하들에게 “나의 죽음은 의병을 일으킨 날에 이미 결정하였다. 다만 적을 멸하지 못하고, 장차 왜놈의 칼날에 죽게 되었으니 그것이 한이로다.”라고 말하였다. 아울러 “함께 죽는 것은 유익함이 없다. 뒷일을 힘써 도모함이 옳다.”며, 피신을 권유하였다. 결국 기어이 남겠다는 부하 김해도金海道 등과 같이 의병장 김태원은 1908년 4월 하순 순국하였다.

한편 김율 역시 형의 시신을 확인시키려는 일제 군경에 의해 어등산에 끌려가다가 총살되고 말았다. 일제는 「경시警示」라는 게시문을 각지에 붙여 김태원과 김율 의병장이 죽었다는 사실을 널리 알렸다. 그러나 주민들은 신출귀몰하던 이들이 결코 죽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형제의병장의 죽음을 선뜻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김태원 김율 의병부대가 주민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으며 활동하였음을 의미한다.

이로써 김태원과 김율 의병부대의 활동은 1908년 4월에 종식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군경은 의병장을 잃은 잔여 의병의 진압을 계속하였다. 또한 일제는 여러 지역에 은닉된 군량미와 무기를 찾아내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이들의 반일투쟁을 흠모한 조경환·전해산·심남일·오성술 등의 의병장이 등장하여 호남지역의 의병항쟁을 계승하였다. 그리하여 1908년 후반부터 1909년 사이에 전라도는 의병전쟁의 주무대가 되었다. 김태원·김율 의병장의 뛰어난 지략과 전술이 이후 의병항쟁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김태원이 동생에게 준 글로써 당시 이들의 의기가 얼마나 숭고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사랑하는 아우聿에게 주는 글

국가의 안위가 경각에 달렸거늘

의기남아가 어찌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겠는가.

온힘을 쏟아 충성을 다하는 것이 의에 마땅한 일이니

백성을 건지려는 뜻일 뿐 명예를 위하는 것은 아니라네.



6. 심남일 의병부대

심남일沈南一의 본명은 수택守澤, 자는 덕홍德弘이며, 註367) 남일南一은 그의 호이다. 그가 의병을 일으키면서 남일이라 자호自號했는데, 그는 “남일”을 전남 제일의 수장首將이라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註368) 이러한 그를 일제는 “농업 일찍이 훈장이 되었던 일이 있음. 다소 학식 있음” 註369)이라 하였는데, 실제 그는 관직을 역임한 적은 없으나 어느 정도 학식을 갖추어 서당 훈장과 향교의 교임을 지낸 함평의 유생이었다.

하지만 그는 남달리 강한 의기를 지녔던 것 같다. 시골의 이름없는 유생에 불과한 그가 자신을 돌보지 않고 오직 충의로써 일어나 3년 동안이나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당시 신문에서는 이러한 그를 대장부로서 재주가 출중한데다 병서와 중국의 협객전을 많이 읽어서 위망이 뛰어났다고 평하였다. 註370) 이러한 점들이 그가 의병에 투신하는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기삼연·김태원·김율 휘하에서 1907년 음력 9월부터 약 넉달간 활동하였다. 註371)

기삼연을 비롯한 김태원·김율 형제는 약 400~500명의 의병을 규합하여 당시 전라도에서 가장 강력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차례로 일제 군경에 의해 체포되거나 전투 중 전사하였다. 당시 심남일은 김율의 부장으로 활동하였다가 김율의 사후에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결성하여 의병장이 되었다. 註372)

1908년 3월말 김율이 일제에 체포되자, 심남일은 흩어진 의병을 불러 모아 독자적인 의병부대의 결성을 시도하였다. 그는 1908년 음력 2월부터 함평·남평·보성·장흥 등지를 돌아다니며 한두 사람씩 의병을 불러 모았다. 그리하여 그는 의병에 투신한지 반년 만에 비로소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조직하였다. 심남일 의병부대의 주요 부서는 다음과 같다.



의병장 심수택

모사장 권 택

서기 겸 모사 염원숙

모사 권영태

도집사 최유승

부집사 김덕오 박문기

선봉장 강무경 장인초

중군장 안찬재 박사화

후군장 노병우 나성화

도통장 김도숙

통장 유치선 공진숙

군량장 이세창

교도장 고견원

호군장 강달주

기군장 김치홍

금난관 전유문 註373)



심남일은 먼저 의병부대의 지휘체계와 군율을 정하였다. 註374) 의병장은 선봉장을 통제하고, 선봉장은 중군장과 후군장을 지휘하며, 중군장은 기군장과 호군장을 거느리게 하였다. 일반 병사층은 포졸·기사騎士·보졸·서사庶士 등으로 구분하였는데, 이들은 10인을 단위로 오伍로 편성되었고, 오를 통솔하는 자를 통장統將이라 하였다.

한편 이들은 단일 부대로 주로 활동하였지만, 때로는 여러 개의 의진으로 나누어 활동하였다. 당시 신문에도 이들이 부대를 분리하였다는

기사가 실려 있으며, 註375) 의병측 기록에도 “분영分營”하였다는 내용이 발견된 점 註376)으로 보아 그러하다. 심남일 의병부대의 분화는 보다 효과적인 대일투쟁의 목적아래 활동지역을 확대하고 세력의 비대화를 방지할 목적으로 추진되었다. 분화의 시기는 1909년 봄을 전후한 시기였으리라 믿어진다. 예컨대 자신의 이름으로 격문이나 광고문을 유포한 후군장 노병우, 그리고 기군장 이덕삼이 해남 등의 연해지역에서 활동한 사실 註377)로써 그렇게 짐작된다. 심남일 의병부대는 다소의 학식을 갖춘 유생과 농민 및 상인들에 의해 주도되었고, 대다수의 의병 병사층은 가난한 평민출신으로 보인다.

의병부대의 편제와 직책이 확정되자 심남일은 의병들이 지켜야 할 10개 조항을 고시하였다. 註378) 예컨대 의병의 지휘체계와 군율을 어긴 자에 대한 처벌 및 각종 민폐를 저지른 자에 대한 처벌을 특히 강조하였다. 이는 이들이 특히 주민들의 생명과 재산의 보호에 역점을 두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인지 그는 민폐를 끼치거나 군율을 어긴 자는 가혹하리만큼 엄격히 다스렸다. 일제측 기록에서도 심남일은 부하의 비행을 엄격히 다스리고, 재물의 강탈을 금지시킨 의병장이라 적고 있다. 註379)

심남일 의병부대는 일제의 침략을 저지하여 국권을 회복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들의 의병활동은 몇 가지 방향으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로 친일세력을 제거하는 활동이다. 이들은 군수·세무관 그리고 각 면의 공전영수원들이 세금 거두는 일을 계속한다면 왜적과 같은 종류로 간주할 것이라고 표방하였다. 그는 주민들에게 납세거부투쟁을 유도하였으며, 아울러 대부분 일진회원으로 구성된 자위단과 헌병보조원들도 일본세력과 함께 제거하겠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註380)

둘째로 의병을 빙자한 도적을 퇴치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의병이라 칭하고서 주민들의 재산을 강탈하는 무리를 의소義所에 곧바로 알리거나 잡아보내라고 하였다. 이른바‘가의仮義’의 준동을 막아 주민의 재산을 보호하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의병을 빙자한 도적의 퇴치에 적극적이었던 만큼 자신들의 의병활동에 대한 정당성이 부여되었을 것이고, 나아가 이들은 주민들로부터 한층 신뢰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세째로 반일투쟁활동, 즉 일본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활동하였다. 심남일 의병부대는 먼저 일본 군경이 종두種痘를 빌미삼아 무고한 한국인을 살해한다는 점을 크게 부각시켰다. 註381) 이 점은 심남일 의병부대가 배일감정을 고조시키고자 주민들의 종두에 대한 편견을 의도적으로 이용한 것 같다. 註382)

이와 함께 그들은 일본세력을 몰아내기 위하여 적극적인 무력투쟁을 전개하였다. 심남일 의병부대의 본격적인 반일투쟁은 1908년 음력 3월부터 다음해 7월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때가 바로 전라도의 의병활동이 가장 왕성한 시기였다. 이들의 활동지역은 주로 나주·함평·화순·영암·보성·장흥·강진·해남군 등이었다. 이들은 일정한 근거지를 갖지 않고서 나주-강진을 축으로 하는 전라남도의 남부지역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한편 심남일 의병부대는 일본 세력에 대항하기 위하여 전투방법의 개선뿐만 아니라 새로운 무기의 확보에도 꾸준히 노력하였다. 이들은 영암이나 장흥 등 주로 해안을 통하여 청국 상인으로부터 무기를 수입한 듯하다. 註383) 또한 이들의 주된 활동지역이면서 그의 출신지이기도 한 함평군에서 의병의 총개조소銃改造所가 일제에 발각된 사실 註384)로 보아 이러한 총개조소는 화승총을 뇌관식으로 개조하는 곳으로 짐작된다.

심남일은 각 의병부대의 독자적인 활동보다는 연대투쟁을 중시하였다. 1908년 봄 안규홍이 의병을 조직하자, 그들과 합력병진을 요청하였으며, 註385) 같은 해 8월에는 전해산과도 그러한 논의를 진행한 바 있었다. 註386) 실제로 1908년 8월 이후에 그는 안규홍·전해산·조경환 의병부대 등과 수시로 연합하며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성과는 심남일의 적극적인 노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믿어진다. 이처럼 심남일이 여러 의병부대와의 연합을 중시한 까닭은 일본군의 강력한 진압작전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여 의병투쟁을 보다 유리하게 이끌기 위함이었다. 註387)

이에 대하여 일제는 다양한 형태의 진압작전을 실시하였음은 물론이다. 먼저 1908년 10월에 영산포헌병분대의 후원 아래 일진회원들로 구성된 정찰대가 발족되어 의병진압을 목적으로 한 정찰을 실시하였다. 註388) 또한 그 해 12월 15일에는 영산포헌병분대장의 지휘아래 8개 부대가, 광주수비대에서는 3개 부대가 각각 편성되어 의병을 진압하기 위하여 동시에 출동하였다. 그리고 1909년 6월 초에도 3개월 예정으로 3개의 변장정찰대가 활동에 들어갔는데, 그들의 목적은 당시 전라도의 가장 대표적인 의병장인 심남일을 비롯한 전해산·안규홍 등의 근거지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또한 7월 중순에도 1개월 예정으로 11개 부대가 편성되었는데, 이들 역시 “주된 목적은 전해산·심남일을 죽이는데 있다.” 註389)라고 함으로써 당시 일본측이 심남일의 제거에 얼마나 힘을 기울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일본측은 의병을 완전히 진압하기 위해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였다.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南韓暴徒大討伐作戰’이 그것이다. 그러자 1909년 8월말 심남일·전해산 등 10여 명의 의병장이 강진군 모처에 모여 일본군의 군사작전에 대한 대응책을 논의한 것 같다. 註390) 이 모임은, 당시 전남지방의 대표적인 의병장들이 모여 의병부대를 해산할 것인가, 아니면 계속 투쟁할 것인가를 토의한 것으로 추측된다. 심남일은 이 모임이 있은지 얼마 후에 의병부대를 해산한 듯하다.

그런데 중군장 안찬재는 의병해산에 반대하여 임창모와 합세하여 끝까지 저항하다가 전사하였다. 註391) 심남일은 강무경과 함께 일본군의 집요한 추적을 피해 잠복해 있다가 결국 1909년 10월 9일에 모두 체포되었다. 註392) 그 이튿날인 10월 10일에‘남한폭도대토벌작전’도 일단락되었으며, 그를 체포한 일본군 제2연대 제3중대는 “전라남도 남부에 있어서 수일首一 ; 저자주이라 칭하는 거괴 심남일 및 그 부하 유수의 수괴 강무경을 포획”한 공로로 상장을 받았다. 註393)

일본측조차 “현재1908 ; 저자주 폭도 중에서 가장 교묘한 자” 註394)라고 일컬었으며, 그의 체포는 곧 호남의병의 종식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들은 1908년 초 침체에 빠진 전남지방의 의병을 재건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아울러 전남에서 활동하는 의병부대간의 연합의진 형성을 주도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심남일 의병부대는 “남일南一”, 즉 전남 제일의 의병부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7. 전해산 의병부대

전기홍全基泓은 전북 임실 출신으로 나주·영광 등 전라남도 서부지역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註395) 그의 자는 수용垂鏞이고, 자호한 해산海山에는 항일투쟁을 전개할 때 산과 바다를 누비며 활동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그는 가난한 유생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공부에 소질을 보이자, 그의 부친은 오직 학문 연마에 기대를 걸었다. 약 15년 동안 학문에 심취하였는데 인근에 수재로 소문날 정도였다. 그가 특히 탐독했던 책은 의리와 명분을 양대 지주로 하는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이었다. 또한 그가 점복卜筮에 능하여 신통한 예견력을 지녔다는 기록으로 보아 주역에도 밝았던 것 같다. 註396)

전해산은 큰 뜻을 키우고 학문을 도야하기 위해 담론을 즐겼다. 그는 유명한 학자를 찾아다녔는데, 당시 명망이 높았던 연재 송병선과 면암 최익현을 임피의 낙영당에서 만나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이 강회에서 받은 느낌을 다음과 같은 시로 표현하고 있다.



낙영樂英이라 이름하니 의리는 가볍지 않고

산을 우러러 따랐으니 원근의 정을 알겠구나

사해에 풍진이 일어 정결한 곳이 없으니

무슨 말로 제생諸生에 답할 수 있으리오 註397)



당시 한국의 암울한 상황과 의리의 중요성을 암시하고 있다.

1906년 6월 최익현과 임병찬이 전북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강회를 열고 의병을 일으키자 그 역시 가담하기 위해 찾아갔다. 하지만 무장투쟁에 미흡한 유생군들이 대다수여서 이내 귀향하고 말았다. 註398) 하지만 그는 노구의 몸으로 의병을 일으킨 최익현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얼마후 그는 임실을 중심으로 무기와 병력을 모아 진안 마이산에서 의병을 일으킨 이석용의 창의동맹단倡義同盟團에 참모로 가담하였다. 註399) 그는 1907년 겨울에 일찍부터 친분이 두터웠던 이석용과 협의를 거쳐 핵심인물로 활동하게 된 것이다. 창의동맹단은 진안과 임실을 중심으로 전주·장수·남원·순창·정읍 등 전라북도 서부 산간지역에서 활동하였다. 이들은 일제의 군경과 맞서 여러 차례 전투를 벌이며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1908년 3월 남원 사천전투에서 크게 패한 뒤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석용은 전해산에게 남쪽으로 내려가 김태원 의병부대에 합류하라고 권하였다. 이석용은 전북에서, 전해산은 김태원과 같이 전남에서 각각 의병항쟁을 확산시켜 장차 남과 북이 연합하여 일제를 몰아내려는 의도였다. 註400)

전해산이 전남으로 내려오기 전에 이미 김태원은 어등산에서 전사한 뒤였다. 그는 광주와 나주 등지에서 활동 중인 오성술·조경환을 만나 재기의 방책을 논의하였다. 그리하여 조경환 등과 함께 흩어진 의병들을 수습, 재편하였다. 그후 음력 8월에 조경환 의병부대와 분진하여 스스로 독자적인 의진을 이끌고 본격적인 의병항쟁에 나섰다.

그는 거병 동기와 의병활동의 정당성을 다음과 같이 천명하였다.



왜노는 우리나라 신민의 불구대천지원수이다. 임진의 화 또한 그러하거니와 을미 시국모弑國母는 물론이고 우리의 종사를 망치고 인류를 장차 다 죽일 것이니 누가 앉아서 그들 칼날에 죽겠는가. 만일 하늘이 이 나라를 도우고 조종이 권고眷顧하여 이 적을 소청掃淸하는 날에는 우리들은 마땅히 중흥제일공신中興第一功臣이 될 것이다. 일체 폭략暴掠을 하지 말고 힘써 나라 회복을 위해 싸우다가 죽자. 註401)



전해산은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일제의 침략을 저지하자고 호소하였다. 동시에 그는 의병부대의 명칭을 대동창의단大東倡義團이라 하고서 다음과 같이 의진의 편제를 갖추었다.



의병장 전기홍

선봉장 정원집

중군장 김원범

후군장 윤동수

호군장 박영근

도포장 이범진

척후장 임장택

도통장 김성채

참모장 임봉래

참모 이영준 김돈 김공삼 김원국 이성화 註402)



대동창의단은 김태원 의병부대의 잔여의병들이 많았는데, 전투력이 뛰어난 정원집과 같은 해산군인이나 포수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註403) 이들은 구한국 군대의 전통적인 편제를 갖추었다. 또한 일원적인 지휘계통으로 구성되었는데, 일반 병사를 지휘하는 십장什長, 십장 위에는 도십장都什長-도포都砲-선봉先鋒-의병장으로 이어지는 지휘체계를 구비한 것이다. 註404) 그리하여 대동창의단은 1908년 후반부터 의병활동을 전개하여 다음해 4월 부대를 해산할 때까지 일제 군경과 혈전을 벌였다. 전해산 의병부대는 약 300명의 규모로 전남 서부의 곡창지대인 함평·나주·무안·영광·장성·광주·고창·부안 등지를 주 무대로 활동하였다.

전해산은 전라도의 다른 의병부대와 연합전선의 구축에 노력하였다. 특히 심남일·조경환·김영엽 등이 이끄는 의병부대와 자주 연합작전을 펼쳤다. 전해산은 신속한 이동과 의병활동의 기동성을 살리기 위해 간부들로 하여금 각기 수십명의 의병을 통솔케 하였으며, 자신도 100명 전후의 부하들을 지휘하였다. 이처럼 이들은 소규모 부대로 나누어 활동을 하다가 필요할 경우에는 연합하여 합동작전을 수행하였다. 전해산 의병부대는 주로 영광 불갑산과 함평 석문산 일대를 근거지로 삼아 활동하였다. 불갑산과 석문산은 유격전에 유리한 지형적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들은 영광 불갑산전투, 장성 동화전투, 담양 한재大峙전투, 함평 월야전투 등에서 많은 전과를 올리며 전남 서부지역의 대표적인 의병부대로 활약하였다. 이들은 항일투쟁뿐만 아니라 주민 보호에 앞장섰다. 군수품을 조달할 때에도 가능한 그 댓가를 지불하였으며, 가

의假義의 퇴치, 헌병보조원의 만행, 세무관리의 행패, 일진회원의 비행 등으로부터 주민들을 적극 보호해준 것이다. 이로써 주민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음은 물론이다. 광주 대치 전투에서 전해산 의병부대에 패배한 일제는 그 화풀이로 민가에 불을 놓아 100여 호를 태워버렸다. 하지만 주민들은 의병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제 군경은 갈수록 증강되었고, 탄압 역시 강화되어갔다. 이에 전해산은 심남일·김영엽·오성술 등과 함께 호남의병의 연합조직을 결성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1908년 겨울 이들은 호남동의단湖南同義團을 탄생시켰다. 그는 호남동의단의 대장으로 추대되었는데, 그 편제는 다음과 같다.



대동의병대장 전기홍

제1진의병장 심남일

제2진의병장 박도경

제3진의병장 김영엽

제4진의병장 조대천

제5진의병장 신화산

제6진의병장 이순식

제7진의병장 이기손

제8진의병장 오성술

제9진의병장 권 택

제10진의병장 안덕봉 註405)



당시 전라도에서 활동하는 대표적인 의병부대가 모두 참여하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전라도 서부에서 동부까지 망라되었는데, 이들이 연합조직을 결성한 것은 일제의 강력한 진압작전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註406)

이들의 활동이 단연 두각을 나타내자, 일제는 전해산이 이끄는 대동창의단을 진압하기 위한 전담 토벌대를 편성하거나, 한국인 밀정과 일본

수비대, 경찰을 주축으로 하는 변장정찰대를 구성하여 산과 들을 샅샅이 뒤졌다. 1909년에 들어와 이러한 경향은 더욱 두드러졌다. 결국 전해산 의병부대는 시간이 흐를수록 활동이 크게 위축되어갔다. 특히 1909년 4월 이들은 영광 오동 및 덕흥 전투에서 잇따라 패하였다. 이로 인해 이들은 재기가 불가능한 어려운 처지에 빠지고 말았다.

결국 전해산은 남은 의병을 해산하고 후일을 도모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의병을 해산하면서 한 편의 시를 남겼는데,‘호남 삼월에 오얏꽃은 지는데 보국할 서생이 갑옷을 벗었네. 산새도 또한 사정을 알고 떠나가는 나를 밤새 부르며 돌아가지 말라 하네.’라고 하여, 비참한 심정을 토로하였다.

그는 1909년 5월 부대의 지휘권을 호군장 박영근에게 이양하고 전북 장수군의 산골에서 학동들을 가르치며 후일을 대비하고 있었다. 그는 1909년 12월 어느 변절자의 밀고로 영산포헌병대에 체포되었다. 당시 『대한매일신보』의 「전대장의 기상」에서는 그를 “공평정직하고 일호도 사사 뜻이 없는 진실한 의사”라고 평하였다. 그는 최후진술에서 일본인 재판장을 향해 “내가 죽은 후에 나의 눈을 빼어 동해東海에 걸어 두라. 너희 나라가 망하는 것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보리라.”고 말하였다. 1910년 8월 그는 사형을 선고받고 여러 동지들과 함께 대구감옥에서 순국하였다.


8. 안규홍 의병부대

안규홍安圭洪은 “세력이 한창일 때 부하가 200명을 넘었고 전해산·심남일과 나란히 폭도 거괴 중 첫째가는 인물” 註407)로서 흔히‘안계홍安桂洪’으로 잘못 알려져 있다. 註408) 위의 세 의병장 가운데 전해산은 전라남도 장성·영광을 비롯한 서부지역을 중심으로 활약하였다. 그리고 심남일은 나주·강진을 위시한 전라남도 중부지방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활동하였다. 이들은 모두 유생출신의 의병장이었다.

이에 반하여 안규홍은 가난한 농민 출신으로, 보성·순천 등 주로 동부지역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당시 전라남도 의병의 대부분이 유생출신 의병장에 의해 주도된 사실에 비추어 보면 그는 매우 특이한 존재라 할 수 있다. 註409)

안규홍은 전남 보성읍 택촌의 가난한 집안의 서얼로 태어났다. 註410) 그가 어렸을 때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자 이들은 호구를 해결하기 위해 먼 친척 박제현의 집으로 옮겼다. 그는 극빈한 가정 사정으로 인하여 어려서부터 머슴살이를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사람들에 의하여 ‘안담사리’라 불리어졌다. 담사리란 전남지방의 방언으로 나이어린 머슴을 일컫는 말이다. 註411)

하지만 그는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강직한 성품의 청년으로 성장한 것 같다.



(부군은) 타고난 성품이 강하고 정직하였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너무 강직

하다고 남에게 미움을 받을 정도였다. 그러나 점차 성장해서는 호방하고 사물에 얽매이지 않았다. 註412)



즉 그의 성품이 어려서부터 매우 강직하여 남들이 싫어할 정도였으나, 장성한 후에는 호방하여져서 남에게 매이는 바가 없었다 한다. 그는 일찍부터 의협심이 강하고 용기있는 청년으로 알려졌던 것이다.

1907년을 전후하여 전라도의 곳곳에서 의병이 크게 일어났다. 더불어 의병을 가장한 도적들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註413) 이와 관련하여 일제 군경과 일진회는 자위단自衛團을 결성하였다. 1907년 11월부터 그들은 각 군·면 단위까지 자위단을 조직한 것이다. 그리하여 1908년 2월말까지 조직이 완료된 자위단 수는 전국적으로 1,990개나 되었으며, 그 가운데 전남에는 161곳에 자위단이 설치되었다. 註414) 전국에 걸쳐 대부분의 면단위까지 조직이 완료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안규홍이 머슴을 살고 있던 보성 법화 마을에도 도적을 방비하기 위한 단체가 조직되었다.



규홍이 뜻을 품고 거사하고자 하였으나 자신의 인망이 낮아서 뜻을 펴지 못할 즈음에 도둑들이 무리를 모아 마을에 횡행하자 장정 수백인을 모아 북을 치며 도둑을 방비하였다. 註415)



마을 장정들을 구성원으로 하는 도적 방비를 위한 단체가 조직되었다는 것이다.

이 방도조직防盜組織에서 활동하던 안규홍은 평소 마음속에 품어왔던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밝혔다.



보성군 우산에 사 안씨의 집에 머슴으로 잇 사나이 잇  수십년을 근간히 고용여도 삭젼을 밧지아니고 우 신실고로 쥬인이 랑며 근동이 다 칭찬더니 거년 구월분에 졸연히 쥬인을 하직지라 만류여도 듯지 아니고 가더니 근쳐에 잇 머슴군 여명을 모집야 연셜여왈 우리가 의집의 고용이나 국민되기 일반인 나라 일이 위급  당야 농가에셔 구챠히 살니오 고 의병을 창긔야 호남 남일파와 합셰엿다더라. 註416)



안규홍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머슴들을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즉, 그는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성격의 자위단 조직을 이용하여 자신의 창의의 발판으로 이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시 그를 따르는 자들은 대부분 머슴들이거나 가난한 농민들이었다.

한편 그는 양반 유생들에게도 자신의 거사 계획을 알려서 그들의 도움을 얻고자 하였다.



사람을 시켜 비밀히 병기를 찾아들이고 유지들에게 널리 알렸다. 이듬해인 무신년 2월 드디어 기의하여 약간 명의 사람들을 모았다. 그런데 사류들은, 그가 중망이 없다 하여 함께 일을 도모하는 것을 수치로 생각하였다. 註417)



이처럼 양반 유생들의 냉담한 반응으로 인해 그는 독자적으로 의병을 일으키려는 계획을 포기해야만 하였다.

안규홍은 의병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모색하여 강원도 출신의 강성인 의병부대에 투신하였다. 당시 강성인은 강원도에서 의병활동을 하다가 전라도로 내려와 순천 부근에서 활동 중이었다. 註418) 그는 흔히 강용언으로 불려졌는데, 순천과 그 인근 지방에 제법 알려진 의병장이었다. 1908년 2월 초순경 그는 순천 조계산 향로암香爐庵에 근거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註419) 이들이 향로암을 중심으로 활동하게 된 배경은 이곳이 천험의 요새와 다름없는 암자로서 주위를 조망하기가 편리하고 물과 연료 또한 풍부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강용언 등은 듣던 바와 달리 주민들에게 적지 않은 피해를 주고 있었다. 註420) 이에 안규홍은 1908년 4월 부하들과 함께 강용언이 양민의 재물을 겁취한 자라고 하여 처단하였다. 강용언을 제거함으로써 실권을 장악한 안규홍은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그리하여 안규홍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의병부대가 탄생한 것이다.

그는 먼저 의병의 인원을 보강하기 위하여 새로운 의병을 적극적으로 모집하였다.



융희 2년 음력 1월 7일에 의병을 일으켜 최초에는 흥양·순천 등의 시장을 돌면서 국정을 알려서 점차 백 명 단위의 부하를 모았다. 註421)



전남 고흥과 순천 등의 시장을 순회하면서 그 곳에 모인 농어민과 상인들에게 국가의 위급한 상황을 설명한 후 의병에 투신할 것을 호소하

여 상당수의 의병을 확보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병 모집 방법은 대중적이라 할 수 있는데, 안규홍 의병부대의 특징의 하나라 할 수 있다.

한편 안규홍 의병부대에 새로운 사람들이 합류하였다. 註422) 서울에서 내려온 오주일이 수십명을 이끌고 안규홍 휘하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특히 오주일은 병법에 밝은 전략가로서 크게 활동하였는데, 그는 서울의 해산군인으로 믿어진다. 그가 서울에서 내려와 1908년 4월경에 합류하였고, 병법에도 밝았다는 사실 등으로 보아 그러하다.

이리하여 안규홍의 이른바‘안담사리의병’은 1908년 음력 3월경 그가 머슴살이하던 법화 마을 가까이에 위치한 동소산桐巢山에서 봉기하였다. 註423) 동시에 그는 다음과 같이 부서를 정하였다.



대장 안규홍

부장 염재보

선봉장 이관회

좌·우익장 임병국 손덕호 정기찬 장재모 송경회

난후장 안택환 소휘천

참모장 오주일 나창운

서기 임정현

운량관 박제현 註424)



이들이 평민 의병부대이지만 제법 정연한 편제를 갖추었음을 알 수 있다.

안규홍 의병부대는 활동목표와 행동강령 등을 확정하였다.



염재보가 안규홍에게 말하기를, “우리는 본래 농촌의 백성으로, 노고를 견디지 못해 죽음을 무릅쓰고 일어났다. 위로는 임금의 명령을 받들지 못하였고, 또 아래로는 세력을 나타냄도 없었다. 헛되이 먹기만 일삼고 백성들의 목숨을 구하지 않는다면 어찌 국가를 사랑하고 백성을 구하며 원수의 복수를 갚는 의리라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다시 동소산중에서 군사를 먹인 다음 명령을 내렸는데, “의병으로서 민간을 침포하는 행위를 금한다, 민간인이 밖으로 곡식을 파는 행위를 금지시킨다, 여러 명목으로 파견된 관원이 민간에 해를 끼치면 모두 잡아들인다, 무릇 마을에서 공공연히 주구를 행하는 자를 근절시킨다, (일본세력을) 창도하는 자부터 먼저 죽여서 우익을 없앤다, 왜구를 죽여서 그 새떼 같은 무리들을 제거함으로써 우리나라의 근본을 보호하고 우리나라의 명맥을 길이 보존해야 한다”고 하였다. 註425)



이들은 본래 농민들로서 상하의 지시나 도움을 받은 바 없지만, 애국구민愛國救民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의병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또한 이들은 탐학한 관리와 주구자의 근절, 친일세력의 처단, 일본인의 구축 등을 내세웠다. 특히 이들은 의병의 민간인 침탈행위를 일체 금지시킴으로써 주민 보호에 앞장섰다. 농민의병의 거의목표를 명확히 제시했다.

이들의 그러한 방침은 당시 일제측도 “엄히 부하의 비행을 단속하고, 약탈을 금하며 오로지 한국인을 선동하여 폭동의 영속, 도당의 강화”에 힘쓴다고 하여 인정하고 있다. 또한 이 점은 당시 신문에서도 확인된다.



전라남도 통신을 거한즉 보성군에 사는 담사리라 하는 안모가 의병을 많이 모집하야 그 고을 안에 두류하나 백성에게는 침범하는 일이 추호도 업다더라. 註426)



자신들의 출신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을 하면서 주민들에게는 전혀 폐를 끼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결과 안규홍 의병부대는 주민들의 지

지와 신망을 크게 얻었다.

한편 안규홍 의병부대는 크게 세 가지 방향으로 활동하였다. 첫째로 가렴주구의 관리와 탐학한 토호의 제거에 앞장섰다. 특히 이들은 세금징수원들을 주 공격 대상으로 삼았는데, 그들이 가혹한 수취를 자행함으로써 농민들의 원한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탈취한 세금은 의병의 군자금으로 충당되었기 때문에 의병들은 세무관리들을 자주 공격하여 세금을 징발하였다. 註427) 나아가 이들은 부재지주의 소작료를 빼앗아 군용금으로 충당하는 한편, 그 일부를 가난한 농민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하였다. 註428)

둘째로 이들은 일진회와 같은 친일세력의 처단과 제거에 적극적이었다. 그들이 의병의 거취를 밀고하거나, 주민들의 재물을 함부로 빼앗았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일진회원들은 일본세력의 우익을 자처하며 친일적인 행위를 자행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탐학한 관리와 토호의 제거, 그리고 친일세력의 근절만이 의병활동의 전부는 아니었다. 이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바로 일본세력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1908년 4월부터 1909년 9월까지 반일투쟁을 선도하였다. 이들은 보성·순천을 비롯한 전남 동부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일제 군경의 상황에 따라 다양한 공격형태를 구사하였다. 화력과 전투력이 뛰어난 일제 군경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지리적인 이점과 상황을 최대한 이용한 것이다.

하지만 안규홍 의병부대의 반일투쟁이 언제나 활발한 것만은 아니었다.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조직 자체가 와해될 정도로 큰 피해를 입은 경우도 있었다. 註429) 이때 안규홍을 포함한 다수의 의병들이 근거지를 떠나 남해의 섬으로 일시나마 몸을 피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패전 후 두달 만인 1908년 음력 7월에 석호산에서 흩어진 의병을 모아 재기하였다. 주민들과 심남일 의병부대의 각별한 도움이 그의 재기에 큰 힘이 되었다. 註430) 이때부터 안규홍과 심남일 사이에는 돈독한 관계가 형성되었다.

한편 일본군의 거미줄 같은 포위망이 시시각각 압축되자, 그동안 적극적인 반일투쟁을 전개해 왔던 안규홍 의병부대도 마침내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09년 9월 중순 지도부를 포함한 60여 명의 부하들이 투항하고 말았다. 註431) 결국 안규홍은 부하들에게 후일을 기약하며 해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러 의병들에게 이르기를, “본래 의병을 일으킨 것은 국가를 위하고 민생을 보호하기 위한 것인데, 천운이 일정하지 못하고 적의 세력이 이와 같으니 적은 숫자로 많은 수를 당해낼 수 없는 것은 또한 이치로서도 그러하다. 밖으로는 개미만큼의 후원도 없고, 안으로는 범이 잡아먹으려는 위급한 지경에 있다. 게다가 선량한 백성에게 해독이 미치고 있으니 나의 죄가 참으로 크다고 하겠다. 여러분들은 각자 잘 계획하여 다시 후일의 거사를 도모하라”고 하였다. 마침내 의병을 해산하였다. 註432)



안규홍이 나라를 위하고 국민을 보호하고자 의병을 일으켰으나 일본군대가 워낙 강하므로 이에 후일을 기약하고서 의병을 해산시켰다는 것이다. 그 얼마 후인 9월 하순에 그는 염재보 등과 함께 일본군에 체포되고 말았다. 註433) 안규홍 의병부대의 구성원 가운데 일부는 끝까지 싸우다 죽기도 하고, 해산을 전후하여 체포되거나 투항한 자들도 있었다. 혹은 포위망을 뚫고 만주로 탈출하여 독립군에 가담한 경우도 없지 않았다. 註434)

이와 같이 안규홍 의병부대는 안민적 의병활동을 지향한 가장 대표적인 의병부대라 할 수 있다. 그러한 배경에는 의병장 안규홍을 비롯한 대부분의 의병부대 구성원들이 바로 활동지역내 출신인데다 가난한 농민들이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9. 문태서 의병부대

문태서文泰瑞는 경남 함양 출신으로 본명은 태진泰珍, 자가 태서泰瑞, 호는 의재義齋였다. 註435) 그는 흔히 문태수로 알려져 있는데, 별칭이 10여 개가 넘었다고 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웠으며, 열일곱 나이에 전북 장수로 이사하였다.

일제의 침략이 한층 격화되자, 그는 동지들과 모여 거의를 준비하였다. 1907년 말 그는 덕유산 일대의 산포수들을 규합할 때 박춘실 등의 도움을 받아 의병부대를 결성하였다. 그는 부하들을 훈련시키고 전열을 정비한 후 무주 안성면 소재 원통사圓通寺를 근거지삼아 의병활동에 들어갔다. 의진의 명칭을 호남의병단이라 칭하고, 선봉장 박춘실, 중군장 전성범일명 전성보, 후군장 신탁광, 비서 박수문 등으로 진용을 편성하였다. 註436)

이들은 1908년 초부터 덕유산 일대에서 활동했는데, 신명선 의병부대와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일제 군경에 대응하였다. 물론 그의 의진에 포함된 박춘실·전성범·신탁광 등도 거의 독자적인 의진이나 마찬가지였다. 산악지대의 유격전술에 적합한 소규모 부대로 분산하여 활동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무주 안성安城에서 일본군 5명을 사살하는 등 큰 전과를 올리며 서전을 승리로 장식하였다. 이 전투의 승리로 그의 명성은 덕유산 일대에서 자자하였다. 이들의 의병활동이 크게 고조되자, 일제는 여러 차례 군대를 파견하였다. 그는 일본군을 기습하기에 유리한 장소에 미리 의병을 매복, 유인한 후 요격하였다.

이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승리를 거두자, 이들의 명성은 전라도뿐만 아니라 전국으로 퍼져갔다. 이에 따라 그의 의병부대의 규모가 크게 늘어났다. 심지어 강원도 원주에서 무주까지 찾아온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경남의 함양·거창, 전북의 장수·무주·진안·임실·금산 등지를 오가며 덕유산·적상산·성수산 등의 산악지대를 무대로 60여 회에 걸쳐 일제 군경을 상대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특히 문태서 의병부대의 전승 가운데 함양 안의의 장수사長水寺 전투는 특기할 만하다. 1907년 10월 초순 그는 의병 300명을 거느리고 장수사에서 매복작전을 구사하며 일제 군경 30여 명을 전멸시켰다.

1907년 후반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의병부대가 조직되어 일제 군경에 맞서 강력한 항일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하지만 고립 분산적 형태로 의병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한계가 많았다. 이에 중부지방에서 활동하던 이인영·허위·이은찬 등 의병지도자들은 의병의 투쟁역량을 극대화시켜 일본세력을 구축할 방략을 수립하였다. 그 결과 1907년 말에 전국의병의 연합부대인 13도창의대진소가 결성되었다. 이인영은 1907년 11월 전국 각지의 의병장들에게 의병을 이끌고 양주에 집결하여 서울로 진군하자는 내용의 격문을 발송하였다.

덕유산 일대에서 이름을 날리던 문태서에게도 연합의진 결성에 동참해달라는 격문이 도착했을 것이다. 이에 따라 그는 정예의병 100여 명을 선발하여 경기도 양주로 출발하였으며, 박춘실과 전성범에게 잔류한 의병들에 대한 지휘를 맡겼다. 그런데 문태서 의병부대가 13도창의대진소에 합류했는지는 분명하지가 않다. 당시 전국 각지로부터 양주에 집결한 의병의 규모는 총 48진에 1만여 명에 달하였다. 그 가운데 호남의병은 문태서가 거느린 1백 명이 거론되고 있을 뿐이다.

양주에 집결한 의병장들은 12월에 회의를 열어 13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를 결성한 다음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추대한 뒤 서울진공작전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연합의진은 전력상 한계가 많았는데, 사전에 정보가 노출된 상태여서 일제 군경이 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위가 거느린 별동대는 1908년 1월 서울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공격해 들어갔지만 무기의 열세와 탄환의 결핍으로 물러나고 말았다.

문태서는 덕유산 일대로 돌아와 새로운 분위기로 전환한 것 같다. 1908년 2월에 발표한 격문 가운데 “원수 왜적은 우리 민족을 없애려고 배로 나르고 차로 날라 바다 속에 넣으려 하니, 우리 백성이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오호라 저들이 있고 우리가 없어지든 우리가 살고 저들이 없어지든 사생을 결단해야 하니, 이 형세를 장차 어찌 하리오? 전국의 신민이 모두 창의하는 마음으로 뭉쳐 있으니, 4천년 역사와 5백년 종사, 이 어찌 소중하지 않겠는가.” 註437)라고 하며 생명을 던져 나라를 구하겠다는 결의를 다지고 있다.

1908년 2월 28일 문태서는 이종성李鍾城을 선봉으로 삼아 60명의 의병을 이끌고 일제의 무주주재소를 습격하여 상당수의 적을 사살하였다.

하지만 일제 군경의 반격을 받아 병사들은 흩어지고 문태서는 체포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처럼 절박한 상황에서도 그는 침착하게 대응하여 극적으로 탈출하였다.

이와 같이 문태서는 무주 덕유산 일대에서 신출귀몰할 정도로 뛰어난 활동을 벌이자, 그는 주민들 사이에 점차 신비화되어 갔다. 그리하여 무주 군민들은 그의 충성심을 기리는 송덕비를 건립하였다. 註438) 이 송덕비는 1909년 4월에 건립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3월에 일제 경찰이 발견하여 곧바로 철거되었다. 그 비석에는 “위국의병대장문태서지비爲國義兵大將文泰瑞之碑”의 제하에 “충성을 다해 국가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만백성을 구하며 이름을 사방에 떨쳤으니 그 공덕을 다하기 어렵네竭忠報國 下濟萬民 名振四海 難盡其德”라고 쓰여 있었다. 항일투쟁을 전개하는 와중에 의병장의 송덕비가 세워진 사례는 아마도 전무후무할 것이다. 매우 이례적인 일로서, 그만큼 문태서가 주민들의 신뢰와 전폭적 지지를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1908년 4월 10일 문태서 의병부대는 신명선 의병부대와 연합, 장수를 습격하여 주재소와 군청 등의 관공서를 방화한 뒤 무주 방면으로 철수하였다. 4월 13일 신명선 의병부대는 칠연계곡의 병막으로 이동했다가 일본군 수비대의 기습을 받아 의병장 이하 42명이 전사하는 등 거의 전멸당하고 말았다. 註439)

그럼에도 문태서 의병부대는 1908년 11월 경남 안의와 거창 등지에서 모병하여 용기와 힘을 겸비한 수십명의 의병들로 결사동맹을 맺었다. 註440) 1909년 1월에는 여러 달 동안 군사훈련을 하거나 주민들을 토색하는 도적들을 포살하는 활동을 펼쳤다. 註441) 그해 4월에도 문태서는 500여 명의 병력을 인솔하고서 금산·용담·무주 등지를 돌며 모병을 계속하였다. 註442) 이 시기에 문태서는 의병들을 이끌고 전라남도까지 순회하며 의병을 모집했던 것 같다.

그러던 10월 26일 만주의 하얼빈에서 안중근이 이등박문을 처단했다는 소식이 국내에 전해졌다. 10월 29일 이에 부응하여 국내 의병을 고무시키기 위해 문태서 의병부대 100여 명은 충북 옥천군의 경부선 철도역인 이원역伊院驛을 공격하여 역사驛舍를 비롯한 대부분의 건물을 소각하고 일본인 직원 3명을 포로로 붙잡았다. 註443) 이원역은 경부선의 조그만 역에 지나지 않지만 일제의 물자수송과 교통상 요지에 해당하므로 철도운송이 일시 마비되었다. 아울러 일제는 불온한 시국상황을 염려하여 일본군 사령관 대구보大久保 대장의 귀국을 중지하는 소동을 빚으며 이들을 진압할 대책을 협의하였다. 註444) 당시 문태서는 서울의 통감부를 공격하기 위해 3개 부대로 편성하여 제1대는 선발대, 제2대는 공격대, 제3대는 수송대로 편성하여 북상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통감부 공격이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판단하여 그는 이원역을 공격목표로 설정하였다. 이 사건은 국내외의 위축되어가는 의병항쟁을 크게 고무시키는데 기여하였다.

이후 이들은 일제 군경의 강력한 진압작전을 피해 무주·장수·거창·함양·등지를 무대로 소부대로 분산하여 산발적 유격전을 전개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악조건을 무릅쓰고 문태서는 경술국치를 전후한 시기까지 덕유산 일대에서 외롭게 싸웠다. 각지를 전전하던 그는 1911년 8월 일시 고향을 찾았다가 체포되고 말았다. 이로써 문태서 의병부대는 해산되었으며, 그는 진주를 거쳐 대구로 이송되었다가 서울로 압송되었다. 옥중에서도 그는 기개를 굽히지 않다가 1913년 2월 자결·순국하였다. 이로써 전라도 후기의병의 대표적인 의병활동은 종식되었다.


10. 의병부대

1) 오성술 의병부대

오성술吳成述은 광주 출신으로, 호는 죽파竹坡, 휘는 인수仁洙이며, 성술成述 혹은 聖述은 자이다. 그는 나주 출신의 김태원 등과 함께 호남창의회맹소에서 활동하였다. 호남창의회맹소의 대장 기삼연이 순국한 이후 그는 김태원 의병부대의 핵심참모로 활약했다. 하지만 얼마 후 김태원 역시 광주 어등산전투에서 전사·순국하였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는 흩어진 의병을 수습하여 전열을 가다듬었다. 마침 전북의 이석용 의병부대에서 활동하다가 김태원 의병장을 흠모하여 찾아온 전해산과 만나 이들은 의기투합하였다. 전해산·조경환 등과 함께 오성술은 자신이 학문에 정진했던 용진산에서 새로운 의병부대로 개편했다. 처음에는 조경환을 의병장에 추대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부대를 소규모로 나누어 각자 독립적인 의병부대를 이끌었다.

그의 의병부대는 곡창지대인 남도 땅에 침투하여 경제침탈에 앞장선 일본인 소유의 농장을 주 공격대상으로 삼았다. 당시 한국에 이주한 일본인들은 한국 농민의 토지를 빼앗아 농장을 설치하고서 미곡 수탈에 앞장섰기 때문이다. 이들은 초보적인 유격전술을 구사하면서 한층 강화

된 일본군의 탄압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였다. 또한 오성술은 필요할 때마다 전해산·심남일·안규홍 의병부대 등과 연합전선을 형성하며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다.

예를 들면 1908년 7월경 그는 전해산 의병부대와 합진하여 석문산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10월 16일 함평 대명동 전투에서도 그의 의병부대는 전해산 의병부대와 합진하여 일본군 7명을 사살하고 다수의 무기류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1909년 1월 1일에도 이들이 합동작전을 전개하여 고막원 헌병분파소를 공격했다. 연합 의병부대는 고막원 헌병분파소를 장악한 뒤 2명의 헌병 보조원을 사살하고 다수의 무기류를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3월 8일에는 나주군 남평면 거성동에서 심남일 의병부대와 합동작전을 벌여 다수의 일본군을 살상하는 큰 전과를 거두었다.

호남의병의 활약으로 일제 군경이 진퇴양난에 빠지자, 그들은 대규모의 병력을 일시에 투입하여 호남의병을 섬멸하기 위한 군사작전을 수립했다.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1909년 9~10월이 그것이다. 이 무렵그는 일본군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그는 심남일·전해산·박영근 등과 함께 대구로 압송되어 1910년 9월 대구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이와 같이 오성술 의병부대는 1907년 후반부터 약 2년간 광주·나주·담양·함평 일대를 누비며 반일투쟁을 주도하였다.


2) 조경환 의병부대

조경환曺京煥은 광산光山 출신의 유생의병장이었다. 그의 호는 대천大川, 아명은 정거丁擧, 본명은 준환準煥으로 최익현의 영향을 받아 의병에 투신하였다. 그는 1907년 음 12월에 김태원의 휘하에 들어가 좌익장으로 활동함으로써 함평읍, 창평 무동촌茂洞村, 장성 낭월산浪月山, 영광 월암산, 어등산魚登山 전투 등 수많은 전투에 참여하였다. 1908년 4월 하순 의병장 김태원이 전사하자, 그는 흩어진 의병을 수습하여 전해산과 함께 의병부대를 이끌었다. 1908년 음 7월에 이들은 일본군경의 추적을 분산시킴으로서 보다 효과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의병부대를 나누었다.

조경환 의병부대의 주요 구성원으로는 도통장 박용식朴鏞植, 선봉장 김원국金元國, 도포장 김원범金元範, 총독장摠督將 박규봉朴圭奉, 좌익장 김동수金東洙, 모사謨士 권택權澤, 일초십장一哨什長 이동언李東彦, 3초십장 원재룡元在龍, 4초십장 서경수徐景洙, 동몽집사童蒙執事 김복동金福東, 곽진일郭鎭一, 조찬성趙贊成 등이다. 이들은 100명 내외의 군세를 형성하여 전라남도 광주·함평·영광·장성·담양 등지를 무대로 활동하였다. 조경환 의병부대는 전해산·김여회金汝會·심남일沈南一 의병부대와 연합작전을 펼치기도 하였다. 1908년 음력 12월 하순, 과세過歲하기 위하여 일시적으로 대부분의 부하를 귀향시켰다. 나머지의 부하들을 이끌고 그는 광주 어등산에 주둔하다가 일본군 헌병대의 급습을 받아 그를 비롯한 20여 명이 순국하였다. 그의 뒤를 이어 선봉장 김원국이 흩어진 의병을 수습하여 항일투쟁을 이어갔다. 조경환 의병부대는 한말 호남지역 후기의병의 장기항전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후기의병의 연합항쟁을 선도한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3) 김원국·김원범 형제 의병부대

김원국金元國과 김원범은 형제 의병장이란 점에서 이채롭다. 이보다 앞서 활약했던 김태원과 김율도 형제 의병장이었다. 형인 김원국은 광주 출신으로 호는 석포石浦, 본명은 창섭昌燮이었다. 그는 1908년 음력 5월 조정인 의병부대에서 활동하였으며, 그 해 음력 8월에는 조경환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선봉장으로 활약하였다. 1909년 음력 정월 조경환 의병부대의 도포장을 맡은 동생 김원범 등이 어등산에서 전사한 후 독

립하여 100여 명의 의병을 이끌었다.

선봉장 곽진일, 중군장 오덕신, 후군장 김재연, 도포장 이교학, 호군장 조찬성 등이 김원국 의병부대의 지휘부를 형성하였다. 이들은 자산가들로부터 군자금을 징발하여 목포에서 무기구입을 시도한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이들은 김성수 집안의 소작료를 징발하여 군자금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의병장 김원국은 ‘호남의소湖南義所’의 이름으로 광주세무서에 편지를 보내어 세금을 거두지 말라고 경고하였으며, 나주 및 광주 향교에 의병에 나설 것을 촉구하는 통문을 보내기도 하였다.

이처럼 항일투쟁을 전개하던 김원국 의병장은 1909년 4월에 임곡면 오산리 전투에서 부상을 당해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그는 선봉장 곽진일에게 의병부대를 인계하고 부상을 치료하던 중 그해 6월 11일 체포되었다. 체포된 후 그는 경찰의 신문조서에서, “동생 김원범과 조카 김인조의 전사로 인해 더욱 전의를 불태우며 항일투쟁을 선도하게 되었다.”고 진술하였다. 그후 광주지방재판소를 거쳐 대구감옥에 갇혀 있다가 1910년에 옥중 순국하였다. 한편 그의 의병부대는 광주·나주·능주·함평·영광·장성·창평·담양 동복 등지로, 주로 전남 중서부 지방에서 활동하였다.

김원범金元範은 형과 마찬가지로 광주 출신이며, 1908년 후반 전해산 의병부대의 중군장을 맡았다. 그후 그는 조경환 의병부대의 도포장으로 활동하다가 1909년 음력 정월에 어등산에서 체포된 후 자결하였다. 그의 죽음으로 인해 형인 김원국은 더욱 항일의지를 불태우며 활동하였다. 이와 같이 김원국·김원범 형제는 일제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4) 양진여·양상기 부자 의병부대

양진여梁振汝와 양상기梁相基는 부자 의병장이다. 이들은 광주 출신으로, 아버지 양진여는 스스로 격문을 짓고 의병장에 추대될 정도의 학문적 기반을 갖추고 있었다. 양진여는 체포된 후 “능주의 유학자로부터 학문을 배웠으며, 공자의 도를 철저히 지켜야 한다.”고 진술한 점으로 보아 평민이라 하더라도 학문적 수준이 상당했던 것 같다. 따라서 일제측 기록에 보이는 주막업이란 그의 직업은 거병을 하기 위한 군자금 조달이나 혹은 의병을 모집하고 각종 정보를 수집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그는 1908년 음력 6월 중순 의병을 모집하는 광고를 낸 후 같은 달 하순 광주 삼각산 죽청봉에 30여 명의 의병을 불러 모았다. 당시 그는 일본인 관리의 임명 반대, 친일정부의 전복, 일본세력 구축 등을 내걸고서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이들은 300명 규모의 의진을 결성한 후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편제가 확정되면 이들은 다른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서울을 점령할 계획이었다.

이들이 광주·담양·장성 등지를 무대로 항일투쟁을 전개하자 일제는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을 실시하였다. 결국 그는 후일을 기약하며 갑향면에 잠적하였으나, 1909년 8월 하순 체포되고 말았다. 피체 후에도 양진여는 “자기 목숨은 아깝지 않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게 되어 유감”이라고 당당하게 주장하였다. 註445) 양진여는 대체로 수십명에서 100여 명 정도의 규모를 유지하였는데, 의병의 전력을 확대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의병의 전투력이 증강되면 그는 전국 각지의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서울로 올라가 일시에 친일정권을 무너뜨리고 일본세력을 물리칠 계획을 구상했던 것이다. 양진여 의병부대의 활동지역은 광주를 비롯하여 담양·창평·장성 등지로서 주로 전남의 중서부 내륙지방을 근거지삼아 활동하였다.

그의 아들 양상기梁相基는 일찍이 광주경찰서의 순사로 근무하였다. 그런데 그의 부친 양진여가 의병을 일으킬 무렵 그도 경찰서를 그만 둔 후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항일투쟁에 나섰다. 1908년 6월 그는 80여 명의 병력을 모아 광주·장성·담양·창평 등지를 무대로 활동하다가 일제의 압박에 못이겨 1909년 6월 상순 부하를 해산하였다.

그도 부친과 마찬가지로 군자금의 확보 및 친일파 관리 및 일진회원 응징,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던 중 1909년 4월 담양의 덕곡전투에서 크게 패하여 대부분의 병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후 홀로 잠행하여 국외로 망명하려다가 1909년 12월 체포되고 말았다. 그는 신문과정에서 만약 풀려난다 하더라도 다시 거의할 것임을 천명하였다. 그가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지속해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5) 황병학 의병부대

전남 동부지역의 끝자락인 광양에서도 후기의병이 일어나 반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광양지역의 후기의병은 광양 진상면 비촌飛村에서 살던 황병학黃炳學, 1876~1931의 주도로 일어났다. 그는 종숙인 황순모黃珣模, 구례의 한규순韓圭順 등과 힘을 합해 백운산을 의병의 근거지를 삼았다. 백운산의 깊은 골짜기와 험준한 산세는 의병의 유격투쟁에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다.

1908년 음력 7월 하순 백운산에 모인 약 200명 내외의 의병들은 “나라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 화액이 머리에까지 박두했으니 얼굴에 상처를 입고 살 바에는 차라리 원수를 갚고 죽는 것이 낫지 않는가.”라고 맹세하며 의병을 일으켰다. 이 자리에서 지략과 담력이 뛰어난 황병학은 의병장에 추대되었고, 황순모1873~1908는 선봉장을 맡았다. 황병학 의병부대는 주로 광양을 비롯한 전남 동부 및 경남 서부 지역의 농민이나 산포수들로 구성되었다.


전남 광양 백운산



대오를 정비하고 무기를 확보한 의병장 황병학은 먼저 망덕望德 포구를 차지한 일본세력을 쫓아내기로 했다. 당시의 상황을 일본측은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1908) 9월1일 오전 3시 비도 50명양총 3·화승총 25이 광양군 진하면 망덕리에 내습, 일인 어부 복강현인岡山縣人 각야인삼랑角野仁三郞과 그의 처 「이소」 및 장남 「아끼라明」를 총살하고 가옥을 불사른 다음 이 마을의 잡화상 고지현인高知縣人 석전경작石田耕作 집에 내습, 고용인 고교길조高橋吉助를 바다에 던져 익사케 하고 또 해안에 매어둔 일본어선을 불살랐다. 註446)



급습을 당한 일본 어부들은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으며, 일제 군경은 곧바로 황병학 의병부대의 추적에 나섰다. 그 결과 황병학 의병부대는 상당한 피해를 입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광양 옥곡원의 일본 군경을 공격하는 등 전남 동부지역 항일투쟁을 선도했다. 이 과정에서 왼다리에 관통상을 입은 황병학은 의병부대를 몇 개의 부대로 나누어 활동케 한 다음, 자신은 백운산 용신암에 은신하여 부상을 치료했다. 註447)

어느 정도 몸이 완쾌되자 황병학은 다시 항일투쟁에 나섰다. 그러나 일제는 대규모의 군경을 동원하여 진압작전을 펼치고 있었으며, 의병에 대한 회유공작도 병행했다. 의병장의 부상으로 상당수의 의병들은 크게 동요되었고, 일부는 몰래 빠져나간 경우도 없지 않았다. 더욱이 비촌 마을에 사는 황씨 일족들의 곤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즉 황씨 집성촌인 비촌마을 주민들에게 온갖 협박과 폭력을 휘둘렀으며, 황병학과 황순모의 집은 물론이고 마을 전체를 불태우기도 했다. 註448)

황병학 의병부대는 다른 길을 모색했다. 황병학은 일단 여수 묘도猫島로 잠적했다가 재기를 도모할 계획이었다. 그의 종숙 황순모와 한규순 등 몇몇 의병들은 가족들의 후환을 걱정한 나머지 귀순했다가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註449) 묘도에 잠적 중이던 황병학 의병부대도 일본 군경에 발각되어 치열한 전투 끝에 백학선 등 상당수가 희생되었다. 살아 남은 의병들은 이를 악물고 악전고투를 하다가 일제의 대규모 군사작전이 전개되던 1909년 후반에 눈물을 머금고 해산했다.

국내에 잠적하던 그는 3·1운동을 계기로 다시 독립운동전선에 나섰다. 고흥에 은거중이던 기산도奇山度와 만나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여 해외로 망명하기로 한 것이다. 註450) 기산도는 5적암살단을 결성하여 매국노 이근택을 처단하려던 우국지사였다. 註451) 황병학은 기산도와 함께 임시정부국민대회 특파위원의 자격으로 전라도의 뜻있는 인사들을 찾아다니며 군자금을 모았다. 그리하여 평안도까지 함께 올라갔으나 황병학만이 압록강을 건너는데 성공했다. 그리하여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6) 강진원 의병부대

강진원姜振遠, 姜震遠은 현재의 전남 순천시 서면에서 태어났다. 註452) 그는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는데, 註453) 아마도 그의 본명은 강진원, 자는 형오炯吾, 亨佑, 의병활동 시에는 강승우 등 몇 개의 가명을 사용한 것으로 믿어진다. 의병에 투신하기 전에 그는 연로한 어머니와 병약한 동생을 데리고 농사를 짓고 살았으나 가난을 떨치기 힘든 처지였던 것 같다. 하지만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외가인 두모리 신기 마을로 이거하여 남의 집에 서당을 개설하고서 십여 명의 제자들을 가르쳤다.

시국을 걱정하던 그는 1908년 음력 6월 순천 출신 김명거·김화삼·권덕윤·김병학과 곡성 출신의 김양화 등과 의병을 일으켰다. 이들은 1908년 음력 6월 하순 민가에서 총기를 거두는 것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들은 조계산을 근거지삼아 무기를 수리하고 의병의 규모를 확대하였다. 음력 7월 인근에서 활동중인 조규하 의병장과 만나 연합투쟁을 모색하였으며, 나주의 의병들이 그의 의병부대에 합류했다. 註454)

의병의 면모를 갖춘 이들은 음력 8월 4일 곡성 조지촌 전투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반일투쟁을 전개하였다. 註455) 당시 이들은 화기의 열세를 극복하고 나아가 대일항전을 더욱 효과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인근에서 활동 중인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활동하였다. 예컨대 1908년 9월 이들은 조규하 의병부대 등과 함께 곡성군 목사동면 평전촌에서 일본군 순사대 및 수비대와 맞서 싸우다 조규하 의병장을 비롯한 다수의 의병들이 전사하였다. 註456) 이때 조규하 의병장의 전사로 인해 조규하 휘하의 의병들은 강진원 의병부대로 통합되었다.

이때부터 시작된 반일투쟁은 그가 의병을 해산한 1909년 음력 8월까지 계속되었다. 그는 전남 동부지역, 주로 순천·곡성·여수·고흥·광양·구례 등지를 무대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일본의 침략기구 및 일본 군경을 공격대상으로 삼았다. 당시 이들은 과역시장, 동복 운월치, 쌍암 접치, 쌍암 서정, 남원 가정, 곡성 압록과 동리사 등지에서 크고 작은 전투를 치렀다.

반일투쟁 외에도 이들은 친일세력의 구축에도 앞장섰다. 예컨대, 일본어 통역이나 헌병보조원, 의병을 밀고한 자, 세무관리, 밀정 등을 처단하였다. 또한 강진원 의병장은 군율을 어긴 의병들도 엄격하게 처벌하였다. 주민들을 토색한 자, 군자금을 몰래 유용한 자, 의진을 이탈한 자, 무기를 빼돌린 자 등을 처형한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지역민들의 지지를 기반삼아 장기항전의 토대를 구축하였다.

이들은 대체로 100여 명의 규모를 유지하며 항일투쟁을 전개했는데, 1909년 음력 6월 중순 순천시 서면 색천사정索川社亭에서 기습을 받아 20명 내외로 급감하였다. 註457) 이때 생존한 의병들은 대부분 뿔뿔히 흩어졌으며, 강진원 역시 순천시 신성포에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연내도蓮內島로 피신하였다. 註458) 이후의 행적은 거의 나타나지 않은데, 이들은 1909년 9월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이 시작되기 직전에 해산된 것으로 믿어진다. 그로 인해 일본군의 대규모 군사작전 당시 그는 체포를 면하게 되었을 것이다.

한편 강진원 의병부대의 선봉장 최성재崔性裁는 순천 출신으로 처음에 조규하 의병부대에서 활동하다가 조규하 의병장이 전사하자 그 뒤를 이

은 강진원 의병부대의 선봉장으로 활동하였다. 註459) 한때 그는 강진원 의병장을 대신하여 부대를 통솔하기도 하였으나, 1909년 3월 서면 구정리 전투에서 크게 패하여 경남 남해로 잠복하였다. 그후 ‘남한폭도대토벌작전’ 기간 중에 그는 다시 육지로 나와 지리산 자락의 구례에 은둔하려다가 발각되고 말았다. 1909년 9월 그는 광주지방재판소로 호송되는 도중 일제 순사대에 의해 살해되었다. 註460)

연내도로 피신했던 강진원은 일본군의 무자비한 군사작전이 종료되자 순천으로 돌아왔다. 그는 순천의 두모리에 위치한 오성산 동굴에 은신하였다. 註461) 이때부터 10여 년 동안 장영섭을 비롯한 제자들의 도움을 받아 은밀하게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1921년 음력 7월 16일 체포되었는데, 註462) 비밀을 지키기 위하여 옥중에서 자결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와 같이 강진원은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 중에 살아남아 10여 년간 국내에 잠복하며 훗날을 도모하려 한 점에서 주목된다.


7) 이대극 의병부대

이대극李大克은 전남 영광출신으로 이름은 순식淳植, 자는 영화英華이다. 그는 1907년 김용구가 이끄는 일심계一心契 중심의 의병활동에 참여하여 영광읍 공격에 참가하였다. 그후 기삼연이 결성한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에 합류하여 감기監器의 직책을 맡았다. 기삼연이 일본군에 체포되어 피살당하자, 이대극은 독자적인 활동을 전개하면서“대극大克”이라 자호하면서, 일본을 크게 이기겠다는 의지를 표방하였다. 당시 사람들도 그를 이름보다는 별칭인 대극으로 불렀다. 당시 이대극 의병부대의 주요구성원으로는 선봉장 이백겸李伯謙, 좌익장 김남수金南洙, 우익장 김관섭金寬燮, 포장 유자성庾子成, 후군장 이화삼李化三, 모사 노화삼魯化三, 참모 봉계칠奉啓七·정진옥鄭珍玉·주현숙周賢叔·주만옥朱萬玉 등이었다.

이들은 의병의 훈련과 정예의 무기의 확보가 선결과제라고 인식하였다. 이대극은 영광의 석대산石臺山을 근거지삼아 무기의 제작에 진력하였다. 이후 이들은 영광의 불갑산과 장사산에 근거지를 형성하여 영광·함평·무장·고창 등지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전남의 중서부 지역에서 기세를 올렸다. 또한 이들은 호남창의회맹소의 선봉장인 김태원과 연합전선을 펴며 이른바 의각지세犄角之勢를 형성하였다. 이들은 대규모의 의병을 분산시켜 소수의 정예의병으로 유격전을 감행하여 일제 군경을 괴롭혔다. 그러던 중 이대극은 내분이 일어나 정대홍鄭大洪에 의해 피살되고 말았다. 이대극은 영광지역의 의병투쟁을 주도하다가 불행히도 같은 의병에게 피살된 것이다. 그로 인해 그와 함께 투쟁한 의병 병사층은 다른 부대로 옮기거나, 의진을 떠나 잠적하기도 했다. 이는 의병항쟁이 얼마나 어려운 과정에서 진행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역설적인 사례라 하겠다.


8) 기타 의병부대들

후기의병의 중심지였던 전라도에는 수많은 의병부대가 활약하였다. 모든 의병부대를 밝히기에는 역부족이므로 여기서는 간단히 주요 의병장과 그들의 활동지역을 소개하고자 한다.

전라도 의병은 장성과 광주 등 내륙지역에서 시작되어 연해 도서지역까지 확산되었다. 그 가운데 완도와 해남 등지를 무대로 활발한 투쟁을 벌인 의병장 중 황준성黃俊聖은 진안출신으로 중기의병에 가담했다가 체포되어 완도에 정배된 유배수였다. 그는 강성택·추기엽 등 의병출신 유배수들과 긴밀하게 연계하여 이 지역의 의병항쟁을 주도하였다. 이들은 해남 출신의 황두일·송병운 등과도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활동하였다. 1909년 12월에 체포된 황준성은 다음해 2월 순국하였다.

광주 출신의 금재錦齋 이기손李起巽은 일제의 주밀한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여 국외 망명한 의병장이다. 그는 광주와 나주·함평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의 포위망을 벗어나 만주와 노령 등지를 전전하며 독립운동가로서 활동하였다. 1915년 귀국한 그는 전북 금산의 대둔산 자락에 은거하여 민족정신을 고취시켰다.

광주의 김동수, 구례의 유병기·공성찬, 나주의 나성화·권택·박민홍·박사화·조정인, 함평의 박영근·모천년·이강산, 장성의 김영백, 보성의 임창모·임학규 부자, 장흥의 김영엽 등의 의병활동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기를 기대한다.

전라북도에서 활약한 의병장중 신명선申明善은 해산군인 출신으로 1907년 말부터 무주 덕유산을 근거지삼아 활동하였다. 1908년 전반까지 문태서·김동신이 이끄는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활동하다가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전사하였다. 또한 순창 출신의 신보현申甫鉉은 출신지역을 기반삼아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1909년 12월에 체포됨으로써 의병활동에 종지부를 찍었다.

순창 출신의 양춘영楊春泳은 자가 윤숙允淑으로 군주사를 역임한 인물로서 태인의병에 가담한 바 있었다. 1908년 음력 7월에 그는 독자적인 의병을 일으켜 순창 회문산을 근거지삼아 활동하였다. 그의 의병부대는 한때 200여 명의 성세를 이루기도 했는데, 당시 그의 휘하에서 중군 최산흥·우선봉·임순호 등이 활약하였다. 그는 1909년 12월 김제에서 체포되어 교수형을 언도받아 순국하였다. 아울러 고창의 박도경·유장렬, 남원의 전규문·정일국, 태인의 노한문, 익산의 이규홍, 고부의 이성화 등의 의병활동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도 필요할 것 같다.

한편 제주도에서도 후기의병의 불꽃이 타올랐다. 1909년 후반 고승천高承天을 중심으로 김만석·김선일·이중심 등이 의병을 일으킨 것이다. 고승천은 “가까운 장래에 일본인의 손에 제주 전역이 점령당하게 되니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일본인을 살해할 것”이라고 하는 격문을 비밀리에 제주 전 지역에 배포하여 거의 사실을 알려 군사를 모집하고 군수품을 조달하였다. 당시 약 300명의 병력을 규합한 그는 의진의 편성을 서둘렀다. 그러던 중 1910년 2월에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일부는 체포되어 살해되었으며, 나머지 인사들은 별다른 활동을 벌이지도 못한 채 해산하고 말았다. 하지만 외딴 섬 제주에서도 항일의병이 봉기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註 271] 박은식전서간행위원회,『박은식전서』상, 단국대출판부, 1975, 472쪽. ☞

[註 272] 국사편찬위원회,『한국독립운동사』1, 295~296쪽. ☞

[註 273]『편집자료』;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자료집』3, 546~548·555~559쪽. ☞

[註 274]『편집자료』;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자료집』3, 548쪽. ☞

[註 275]『편집자료』;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자료집』3, 560~561쪽. ☞

[註 276]『토벌지』;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자료집』3, 771~772쪽. ☞

[註 277]『토벌지』;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자료집』3, 801쪽. ☞

[註 278] 홍영기,『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224쪽. ☞

[註 279] 김용구, 「義所日記」, 『자료집』2, 1970 ; 영광향토문화연구회,『義兵實記-統領 金容球-』, 1988, 56쪽. ☞

[註 280] 강길원, 「후은 김용구의 항일투쟁」,『인문논총』 전북대 인문화학연구소, 1986, 75쪽. ☞

[註 281] 호남창의회맹소에 대한 구체적인 논고는 홍순권, 「한말 호남지역 의병 투쟁의 한 양상-기삼연의 장성 봉기와 「호남창의회맹소」를 중심으로-」,『전남문화재』3, 전라남도, 1990 ; 강길원, 「성재 기삼연의 항일투쟁」,『수촌박영석교수화갑기념 한민족독립운동사논총』 탐구당, 1992 ; 홍영기, 「한말 호남창의회맹소에 대한 일고찰」,『한국근현대사연구』21, 2002 등이다. ☞

[註 282] 홍영기,『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227쪽. ☞

[註 283] 전라남도 경무과,『전남폭도사』(이하 『폭도사』), 27쪽. ☞

[註 284] 전라남도 경무과, 『폭도사』, 28쪽. ☞

[註 285] 홍영기,『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229~230쪽. ☞

[註 286] 이 표는『奇三衍實記』『성재기선생거의록』 「義所日記」,『대한매일신보』『황성신문』『편책』과 (국사편찬위원회,『한국독립운동사』1·자료 8~19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자료집-별집 1』 등을 참고하여 작성하였다. ☞

[註 287] 홍순권,『한말 호남지역 의병운동사 연구』 103쪽. ☞

[註 288] 「貼黃」 ·「布告萬國文」,『湖南義兵將列傳』;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자료집』2, 609·614~619쪽. ☞

[註 289] 「廣告文」,『호남의병장열전』;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자료집』2, 621~623쪽. ☞

[註 290] 「대한매일신보사 여러분에게」,『호남의병장열전』;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자료집』2, 609~610쪽. ☞

[註 291] 전라남도 경무과,『폭도사』 33·35쪽 참조. ☞

[註 292]『편책』, 「光秘發 제67호」 ; 국사편찬위원회,『한국독립운동사』자료 9, 26쪽. ☞

[註 293]『편책』, 「羅秘發 제8호」·「光秘發 제156호」 ; 국사편찬위원회,『한국독립운동사』자료 8, 522~524쪽. ☞

[註 294] 「의사 김준 전수용 합전」,『호남의병장열전』;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자료집』2, 641쪽. ☞

[註 295] 홍순권,『한말 호남지역 의병운동사 연구』 103쪽. ☞

[註 296]『대한매일신보』1908년 1월 16일 「雜報」. ☞

[註 297] 전라남도 경무과,『폭도사』 34쪽 ; 국사편찬위원회,『한국독립운동사』자료 9, 33쪽. ☞

[註 298]『토벌지』; 독립운동시편찬위원회,『자료집』3, 741쪽. ☞

[註 299] 홍영기,『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250쪽. ☞

[註 300] 「報告」 제11호(1908.3.23),『內閣各道來報』제1책(內閣 편, 규장각 소장, 규 17982의 4) 참조. ☞

[註 301]『編冊』 「首魁 奇參衍逮捕狀況件」(국가기록원 소장, 문서번호 경무 88~23), 1908, 464~474쪽. ☞

[註 302] 홍영기,『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253쪽. ☞

[註 303]『토벌지』;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자료집』3, 771쪽. ☞

[註 304] 송상도,『기려수필』 133쪽 ; 강길원, 「한말 호남의병장 정재 이석용의 항일투쟁」,『원광사학』2, 원광대 사학과, 1982, 68쪽. ☞

[註 305] 송상도,『기려수필』 133쪽. ☞

[註 306] 「靜齋李錫庸倡義日錄」,『자료집』2, 1970, 512쪽. ☞

[註 307] 국사편찬위원회,『한국독립운동사』1, 652~658쪽. ☞

[註 308]『정재선생문집』 1960, 62쪽. ☞

[註 309] 강길원, 「한말 호남의병장 정재 이석용의 항일투쟁」,『원광사학』2, 70·76쪽. ☞

[註 310] 전북향토문화연구회,『전북의병사』하, 176~181쪽. ☞

[註 311] 「정재이석용창의일록」, 517~518쪽. ☞

[註 312] 「정재이석용창의일록」, 520~522쪽. ☞

[註 313] 「정재이석용창의일록」, 539~540·546~547쪽. ☞

[註 314]『정재선생문집』 63~64쪽. ☞

[註 315] 윤병석,『한말 의병장 열전』 299쪽. ☞

[註 316] 전북향토문화연구회,『전북의병사』하, 200~201쪽. ☞

[註 317] 송상도,『기려수필』 137쪽. ☞

[註 318] 「정재이석용창의일록」, 559쪽. ☞

[註 319] 순천대 박물관,『만번 죽어도 변치 않는 마음』 2009, 109쪽. ☞

[註 320]『토벌지』;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자료집』3, 703쪽. ☞

[註 321]『편책』, 「義兵將 金東臣 逮捕 및 聽取書」(이하 「청취서」) ; 국사편찬위원회,『한국독립운동사』자료 11, 227쪽 ;『편책』, 「大警秘發 37-3」(국가기록원 소장, 경무 88~26), 743쪽. ☞

[註 322] 전라남도 경무과,『폭도사』 8쪽. ☞

[註 323] 김동신 의병장과 그의 의병부대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로는 최근무, 「의병대장 김동신에 관한 연구-1906.1~1908.5 간의 의병활동을 중심으로-」,『전주교육대학 론문집』18, 전주교육대학, 1982 ; 홍영기, 「구한말 김동신 의병에 대한 일고찰」,『한국학보』 일지사, 1989 ; 홍영기, 「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제2부 제3장 제2절 참조. 이 글은 저자의 책에 실린 연구 성과를 중심으로 서술되었음을 밝힌다. ☞

[註 324]『경주김씨세보』제1책 을편, 국립 중앙도서관 소장, 청구기호 古 2518-系110-25, 충남 홍성, 1934, 1쪽. ☞

[註 325] 「청취서」는『한국독립운동사』1, 751~756쪽과 같은 책 11, 226~232쪽에 수록되어 있다. 

이 글에서는『한국독립운동사』자료 11을 주로 이용하였다. ☞

[註 326] 「金東臣判決文」,『公州地方法院 刑事判決原本』(국가기록원 소장, 문서번호 77~2773), 1908. ☞

[註 327]『편책』, 「대경비발 제37-3호」(국가기록원 소장, 경무 88~26), 1908, 743~748쪽. ☞

[註 328] 전라남도 경무과,『폭도사』 21~22쪽. ☞

[註 329]『文集』 2쪽. 

이 자료에 대한 설명은 홍영기,『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262~263쪽의 각주 106 참조. ☞

[註 330] 홍영기,『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5쪽. ☞

[註 331]『편책』, 「大警發 秘 제37호」 ; 국사편찬위원회,『한국독립운동사』자료 11, 228쪽. ☞

[註 332] 홍영기,『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271쪽의 각주 137 참조. ☞

[註 333] 홍영기,『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272쪽. ☞

[註 334]『편집자료』;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자료집』3, 537쪽. ☞

[註 335]『편책』, 「義兵將兪宗煥被擒顚末」 ; 국사편찬위원회,『한국독립운동사』1, 775~776쪽. ☞

[註 336]『문집』 13쪽. ☞

[註 337]『문집』 15쪽. ☞

[註 338] 홍영기,『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279쪽. ☞

[註 339]『편책』, 「古秘收 제1286호」 ; 국사편찬위원회,『한국독립운동사』자료 15, 754쪽. ☞

[註 340]『대한매일신보』1907년 9월 25일 「兩湖飛檄」, 10월 11일 「通文謄上」 ;『경향신문』1907년 10월 4일 「의병쟝통문」. ☞

[註 341]『편집자료』;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자료집』3, 567쪽. 

한편 일본측은 고광순을 김동신의 부장(副將)으로 잘못 파악했는데, 그것은 양자가 긴밀한 연계를 유지하면서 같은 지역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그렇게 오해했을 것이다. ☞

[註 342] 홍영기,『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288쪽. ☞

[註 343]『편책』, 「全秘收 제72-2호」·「光秘收 제115호」·「光秘發 제232호」 ; 국사편찬위원회,『한국독립운동사』자료 9, 33~34·222·238쪽. ☞

[註 344]『편책』, 「大警發 秘 제37호」 ; 국사편찬위원회,『한국독립운동사』자료 11, 227쪽. 

김동신은 청나라에 군사원조를 요청하기 위해 서울로 가던 중 집에 들렀다가 피체된 것으로 적었다(『문집』 21~22쪽). 한편 그는 체포된 후 재판 과정에서 교수형을 언도받았으나 종신형으로 감형된 후 1910년 9월 초 일제의 사면을 받아 석방되었다(『문집』 26·45쪽 ;『조선총독부관보』1910년 9월 5일자 「司法」 참조). ☞

[註 345]『편책』, 「大警發秘 제37-1호」 ; 국사편찬위원회,『한국독립운동사』자료 11, 230~231쪽. ☞

[註 346]『토벌지』;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자료집』3, 767쪽. ☞

[註 347]『鹿川遺稿』 「通告列邑文」. ☞

[註 348] 전라남도 경무과,『폭도사』 10 · 21~22쪽. ☞

[註 349]『杏史實紀』권 3, 「行狀」(안규용 찬). ☞

[註 350] 전라남도 경무과,『폭도사』 8쪽. ☞

[註 351] 유인석, 「與諸陣別紙」,『의암집』상, 592쪽. ☞

[註 352]『鹿川遺稿』 「行狀」. ☞

[註 353]『토벌지』;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자료집』3, 767쪽. ☞

[註 354] 황현,『매천야록』 479쪽. ☞

[註 355]『황성신문』1908년 4월 29일자. ☞

[註 356] 국사편찬위원회,『통감부문서』10, 296~297쪽. ☞

[註 357]『편집자료』;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자료집』3, 565~566쪽. ☞

[註 358]『녹천유고』 「行狀」 참조. ☞

[註 359] 전라남도 경무과,『폭도사』 8~9쪽. ☞

[註 360] 홍영기 편,『義重泰山-한말의병장 죽봉 김태원·청봉 김율 자료집』-1998. ☞

[註 361] 오준선, 「의사 김준·전해산 합전」,『後石遺稿』. ☞

[註 362] 전라남도 경무과,『폭도사』 35~36쪽. ☞

[註 363]『경향신문』1908년 5월 1일자. ☞

[註 364] 전라남도 경무과,『폭도사』 43쪽. ☞

[註 365] 전라남도 경무과,『폭도사』 40쪽. ☞

[註 366] 내부 경무국,『제2순사대에 관한 편책』(국사편찬위원회 소장, 1908) ;『의중태산』 277~279쪽. ☞

[註 367] 「義兵將沈南一傳」(오준선 찬),『沈南一實記』;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자료집』2, 589쪽. ☞

[註 368]『편책』, 「韓憲警乙 제1163호」 ; 국사편찬위원회,『한국독립운동사』자료 12, 325쪽. 

심남일 의병부대에 관한 연구로는 홍영기,『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제2부 제3장 제3절 심남일 의병부대가 유일하므로 그것을 중심으로 정리하였다. ☞

[註 369]『편책』, 「義兵將 姜士文 安桂洪 黃斗一 權寧會 沈南一 姜武景 取調書」 ; 국사편찬위원회,『한국독립운동사』1, 790쪽. ☞

[註 370]『대한매일신보』1909년 10월 16일 잡보 「의병장피착」. ☞

[註 371] 국사편찬위원회,『한국독립운동사』1, 790쪽. ☞

[註 372]『편책』, 「전남경비발 제2082호」 ; 국사편찬위원회,『한국독립운동사』자료 15, 817쪽. ☞

[註 373] 홍영기,『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301~302쪽. ☞

[註 374]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告示軍中文」,『자료집』2, 572쪽. ☞

[註 375]『대한매일신보』1909년 4월 13일 「남일파 분파」. ☞

[註 376] 김도숙,『南湖纂錄』 「거의일기」. ☞

[註 377] 홍영기, 「구한말 전라남도 도서지방 의병에 대한 일고찰」,『동아연구』21, 서강대 동아연구소, 1990. ☞

[註 378]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告示軍中文」,『자료집』2, 571~572쪽. ☞

[註 379] 국사편찬위원회,『한국독립운동사』1, 806쪽. ☞

[註 380]『편책』, 「韓憲警乙 제879호」 ; 국사편찬위원회,『한국독립운동사』자료 11, 400쪽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喩土倭文」「警喩各處補助員」「告示各郡面長與領員與里長」, 『자료집』2, 915~917쪽 참조. ☞

[註 381] 국사편찬위원회,『한국독립운동사』자료 10, 347쪽. ☞

[註 382] 홍영기,『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315쪽. ☞

[註 383] 국사편찬위원회,『統監府文書』 6, 148·304쪽. ☞

[註 384]『황성신문』1908년 2년 5월 10일 「地方消息一通」. ☞

[註 385]『澹山實記』 「副將廉在輔行錄」. ☞

[註 386]『全海山陣中日記(戊申年編)』9월 18일자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자료집』2, 853~854쪽. ☞

[註 387] 김의환, 「1909년의 항일의병부대의 항전」,『민족문화논총』8, 1987, 227쪽. ☞

[註 388]『편책』, 「羅警秘收 제899-1」 ; 국사편찬위원회,『한국독립운동사』자료 12, 231~236쪽. ☞

[註 389]『편책』, 「全南警秘發 제1271호」 ; 국사편찬위원회,『한국독립운동사』자료 15, 92쪽. ☞

[註 390] 홍영기,『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322쪽. ☞

[註 391] 국사편찬위원회,『한국독립운동사』자료 15, 785~786쪽. ☞

[註 392]『편책』, 「長警秘發 제95호」 ; 국사편찬위원회,『한국독립운동사』자료 15, 780쪽. 

한편 심남일과 강무경은 1910년 6월 3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그해 10월 4일에 형이 집행되었다(『조선총독부관보』第46號(1910. 10. 21) 참조). ☞

[註 393]『편책』, 「南韓暴徒大討伐實施報告」 ; 국사편찬위원회,『한국독립운동사』1, 827쪽. ☞

[註 394]『편집자료』;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자료집』3, 558쪽. ☞

[註 395] 강길원, 「해산 전수용의 항일투쟁」,『역사학보』101, 역사학회, 1984. ☞

[註 396] 윤병석,『한말 의병장 열전』 257쪽. ☞

[註 397] 송상도,『기려수필』 138쪽. ☞

[註 398] 윤병석,『한말 의병장 열전』 258쪽. ☞

[註 399] 전북향토문화연구회,『전북의병사』하, 266쪽. ☞

[註 400] 윤병석,『한말 의병장 열전』 260쪽. ☞

[註 401]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1, 594쪽. ☞

[註 402]『해산창의록』 2쪽. ☞

[註 403] 윤병석,『한말 의병장 열전』 262쪽. ☞

[註 404] 강길원, 「해산 전수용의 항일투쟁」,『역사학보』101, 29~30쪽. ☞

[註 405]『해산창의록』 2~3쪽. ☞

[註 406] 홍영기,『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321쪽. ☞

[註 407] 전라남도 경무과,『폭도사』 9·137쪽. ☞

[註 408] 국사편찬위원회,『한국독립운동사』1, 787쪽. ☞

[註 409] 안규홍 의병부대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성과로는 홍영기, 「안규홍 의병의 조직과 활동-구한말 호남의병의 일례-」,『한국학보』 일지사, 1987 ; 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의병전쟁연구』상 ; 강길원 「담산 안규홍의 항일투쟁」,『손보기박사정년기념 한국사학논총』 지식산업사, 1988 등이 있다. ☞

[註 410]『澹山實記』 「家狀」 (安鍾連 撰, 1923) 참조. ☞

[註 411] 최학근,『전라남도방언연구』 한국연구원, 1962, 27쪽 ; 김형규,『한국방언연구』서울대출판부, 1974, 62쪽. ☞

[註 412]『담산실기』 「가장」. ☞

[註 413] 전라남도 경무과,『폭도사』 8~9쪽 ;『황성신문』1908년 2월 21일 「地方消息一通」. ☞

[註 414] 홍영기,『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331쪽. ☞

[註 415]『담산실기』 「書傳後 又」(김문옥 찬) 참조. ☞

[註 416]『대한매일신보』1909년 1월 9일 「머슴군의병」. ☞

[註 417]『담산실기』 「전」. ☞

[註 418] 홍영기,『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334쪽. ☞

[註 419]『편책』 경무 88~24(국가기록원 소장), 1908, 862~866쪽. ☞

[註 420]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자료집-별집 1』 840~841쪽. ☞

[註 421]『편책』, 「義兵首魁等に關し報告の件」 ; 김정명,『조선독립운동』Ⅰ, 72쪽. ☞

[註 422] 홍영기,『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337쪽. ☞

[註 423] 홍영기,『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338쪽. ☞

[註 424]『담산실기』 「가장」. ☞

[註 425]『澹山實記』 「副將廉在輔行錄」. ☞

[註 426]『대한매일신보』1909년 5월 20일 「남도의병」. ☞

[註 427]『편책』, 「고비수 제237-2호」 ; 국사편찬위원회,『한국독립운동사』자료 13, 236~237 참조. ☞

[註 428] 홍영기,『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348쪽의 〈표 20〉 참조. ☞

[註 429]『蘆月軒遺稿』제4책, 「從弟在輔行錄」. ☞

[註 430]『담산실기』 「家狀」과『노월헌유고』제4책, 「종제재보행록」. ☞

[註 431] 전라남도 경무과,『폭도사』 136쪽. ☞

[註 432]『담산실기』 「가장」. ☞

[註 433] 전라남도 경무과,『폭도사』 137쪽. ☞

[註 434]『담산실기』 「義士柳德三行蹟」. ☞

[註 435] 김성진,『문태서연구』 함양문화원, 1999, 43쪽. ☞

[註 436] 전북향토문화연구회,『전북의병사』하, 377쪽. ☞

[註 437] 전북향토문화연구회,『전북의병사』하, 378쪽. ☞

[註 438]『편책』, 「고비수 제334호」 ; 국사편찬위원회,『한국독립운동사』자료 13, 710쪽. ☞

[註 439]『편책』, 「보병 제12여단사령부 수발 제115호」 ; 국사편찬위원회,『한국독립운동사』자료 10, 312쪽. ☞

[註 440]『대한매일신보』1908년 11월 5일 「義將結盟」. ☞

[註 441]『대한매일신보』1909년 1월 17일, 1월 30일 「義兵消息」. ☞

[註 442]『대한매일신보』1909년 4월 17일 「義將行動」. ☞

[註 443]『대한민보』1909년 10월 31일 「伊院驛放火」. ☞

[註 444]『대한민보』1909년 11월 2일 「司令官歸國中止」 ☞

[註 445] 전라남도 경무과,『폭도사』 133~134쪽. ☞

[註 446] 전라남도 경무과,『폭도사』 62쪽. ☞

[註 447] 황병선,『黃珣模義士 抗日鬪爭史』 1968, 105·151~152쪽. ☞

[註 448] 황병선,『황순모의사 항일투쟁사』 32~35·246쪽. ☞

[註 449] 황병선,『황순모의사 항일투쟁사』 254·262쪽 ; 金楠 編,『義士 黃炳學』 전광산업사, 1983, 33~34쪽. ☞

[註 450] 국회도서관,『한국민족운동사료』2, 1978, 499~501쪽. ☞

[註 451]『황성신문』1906년 2월 19일 「軍大被刺顚末」. ☞

[註 452] 민족문화협회 편찬실,『姜振遠 義兵將 略傳(이하『약전』)』 횃불사, 1981, 31쪽. ☞

[註 453] 홍영기, 「대한제국기 의병항쟁」,『순천시사-정치·사회편』 큰기획, 1997, 569쪽. ☞

[註 454] 「취웅록」, 3쪽 ; 민족문화협회 편찬실,『약전』 70~71쪽. ☞

[註 455] 홍영기, 「강진원 의병장의 생애와 활동」,『남도문화연구』12, 순천대, 2006. ☞

[註 456] 전라남도 경무과,『폭도사』 1913. ☞

[註 457]『편책』, 「전남경비발 제1470호」 ; 국사편찬위원회,『한국독립운동사』자료 15, 141쪽. ☞

[註 458] 「취웅록」, 13쪽 ; 민족문화협회 편찬실,『약전』 152~153쪽. ☞

[註 459] 「취웅록」, 13쪽 ; 민족문화협회 편찬실,『약전』 495~496쪽. ☞

[註 460] 민족문화협회 편찬실,『약전』 496쪽. ☞

[註 461] 민족문화협회 편찬실,『약전』 163쪽. ☞

[註 462] 민족문화협회 편찬실,『약전』 163~168쪽 ;『동아일보』1921년 8월 31일자 ;『조선일보』1921년 8월 31일자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