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강원·경기도의 의병항쟁 / 후기의병의 확산 / 한말 후기의병

몽유도원 2014. 4. 30. 11:14

제4장 후기의병의 확산


후기의병 항쟁의 전개

강원·경기도의 의병항쟁

경상·충청도의 의병항쟁

서북지역의 의병항쟁

전라도의 의병항쟁


2. 강원·경기도의 의병항쟁


강원도와 경기도의 후기의병은 서로 긴밀하게 연계하거나 연합전선을 형성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울러 이들은 도간 경계를 뛰어넘어 활동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에 강원도와 경기도의 의병항쟁을 같이 다루고자 한다.

먼저 강원도 후기의병의 흐름을 간단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907년 8월이후 강원도 의병부대의 분포 양상은 다섯 지역(춘천, 원주, 금성, 울진, 강릉)으로 나누어진다. 註3) 춘천지역에서는 박선명·민긍호 의병부대, 원주지역에서는 민긍호·김치영·이강년 의병부대, 금성지역에서는 허위·김영준 의병부대, 울진지역에서는 신돌석·이강년 의병부대, 강릉지역에서는 박화남·최돈호 의병부대가 주로 활약하였다. 이 가운데 민긍호 의병부대는 춘천·원주·강릉 지역을 오가면서 단연 돋보이는 활약을 보였다. 이강년 의병부대는 원주와 울진 지역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각각의 의병부대들은 각 지역 내에서 서로 밀접한 연계를 맺으며 활동하였다. 춘천 지역의 박선명·유태석의 경우에는 화서학파 문인 유인석의 영향으로 봉기하였다. 그후 민긍호·허위·이강년·이인영 등 유력한 의병장들의 체포와 전사 등으로 말미암아 연합전선이 약화되고 의병 세력도 위축되었다.

한편 강원도 지역에서는 13도창의대진소의 결성과 관련하여 소규모 의진 간의 연합이 활발하게 추진되었다. 그만큼 강원도 의진간에 상호 유대가 긴밀했음을 말해준다. 이들은 일본군경의 추적을 피해 일정 지역에 주둔하지 않고 계속 이동하며 활동하였다. 이들은 지속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화약제조소를 설치하여 운용하였다. 이는 수많은 의병부대의 장기항전에 기여하였을 것이다.

강원도 의병부대의 활동이 거세어지자, 일제는 1908년 6~7월 사이에‘북부수비구대토벌작전’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의병 585명이 사망했으며, 200여 명이 체포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이 작전이 종료된 후 약 한 달동안 귀순자가 무려 1천여 명이나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강원도 의병활동은 급격히 위축되어갔다.

1908년 8월부터 망국 직전까지 강원도에서 활동한 의병부대는 52개 정도였다. 이 가운데 연기우·이종협·김억석·조북동·채응언·유학근 등이 비교적 규모가 큰 편으로 당시 주력 의진이었다. 장기항전을 주도한 의병장으로는 김광옥·최도환·정경태·연기우·강두필·김상태·이태영 등이었으며, 전투횟수 면에서는 김광옥·최도환·유학근·이종협·김억석·조북동 의병부대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1910년 8월 강점 직전까지 연기우·채응언·이태영·김상태 의병부대가 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국외로 망명하여 독립군으로 전환한 의병은 성익현·정경태가 확인되는 정도이다. 註4) 따라서 강원도 의병 가운데 독립군으로 전환된 경우가 그리 많지는 않다.

그런데 일제는 강원도에서 활동한 의병장들을 5개 관할 경찰서별로 파악하였다. 앞에서 다룬 의병부대를 제외하면 다음과 같다. 註5) 이를테면 춘천경찰서 관내에서는 민긍호해산군인·박선명농민·지용기전 서기·최영석유생·최천유평민·안찬옥유생·김정삼·길희정 등이다. 이들은 대체로 춘천 출신으로 화서학파 유인석의 영향을 크게 받았던 것 같다. 원주경찰서 관내에서는 오정묵전 순교겸포수·김치영농업·한상열농업 등이 활동하였다. 금성경찰서 관내에서는 연기우해산군인·황주일포수·김태희경기도 마전·조인주평안도·윤학배광부·이여정철원·김영준금성, 양반·조양서안협·이성재 등이 활약하였다. 울진경찰서 관내에서는 성익현춘천, 양반·정경태춘천, 주막업·신돌석·변학기 등이 보인다. 끝으로 강릉경찰서 관내에서는 박화남충남 은진·주광석간성·최돈호정선·김백룡고성·어득수정선·김해석강릉·금기철울진·윤기영경기 파평·성인호경북 성주 등이 활동하였다. 이와 같이 강원도에서 활동한 의병부대는 강원도 출신 의병장뿐만 아니라 경기·평안·경상·충청도 출신 의병장들이 강원도에서 활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이들이 서울진공작전을 전개한 이후부터 도계를 넘나들며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또한 양반 유생보다는 갈수록 농민이나 포수·광산노동자 등 일반 평민 출신의 의병장이 증가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경향이 후기의병의 특징으로 자리잡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리하여 강원도 후기의병은 13도창의대진소의 근간을 형성하였다. 또한 태백산맥의 산악지대는 유격전에 적합한 입지적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에 황해도와 경기도, 그리고 충북 및 경북 지역에서 활동하던 의병부대들이 강원도로 이동하여 활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편 1904년부터 1907년 8월 군대해산 이전까지 경기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지도층은 약 20명 정도로 확인되었다. 註6) 이후부터 1908년 2월까지 약 7개월 동안 의병지도층은 224명으로 파악된 바와 같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그리하여 1909년 후반까지 약 400명 내외의 의병지도층이 경기도를 무대로 활약하였다. 그후 경기지역은 1911년 초까지 의병의 활동이 간헐적으로 계속되다가 쇠퇴하였다. 다시 말해 1907년 7~8월을 고비로 경기지역 후기의병이 크게 확산되었다.

1907년 7월 경기도에서 의병을 조직하려는 움직임은 안성과 이천 등 남부지역에서 먼저 일어났다. 註7) 1907년 7월 안성 청년회장 강태현姜泰鉉이 결사대를 조직하여 일진회 안성지회 등을 습격하여 불태우는 한편 격문을 사방에 보내어 의병봉기를 촉구하였다. 그러나 강태현 등이 얼마 후 체포되었지만 용인과 진위의 의병봉기에 영향을 주었다.

이 밖에도 경기 남부지역의 이천·수원·죽산·여주 등지에서도 의병이 일어났는데, 이는 군대해산에 따른 영향이었다. 이러한 양상은 점차 경기 남동부 지역인 양근·지평·음죽·용인 등지로 확산되어 갔다. 1907년 후반부터 경기 남동부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대표적인 의병장과 그들이 활동한 지역은 다음과 같다.

조인환은 권득수와 함께 용문산의 상원사와 용문사를 근거지삼아 양근 지평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이들은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일제 군경에 공동으로 대응하기도 하고 분산투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1907년 9월 초순 조인환 의병부대가 경원京元-경의京義 가도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자, 일제는 보병 제52연대를 동원하여 이들의 진압에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일제의 진압 군경은 양근의 장수동長壽洞 연안막連安幕을 습격한 후 상원사·용문사에 비치한 의병의 군량과 군수물자를 찾아내어 불태워버렸다. 註8) 뿐만 아니라 일제는 양근읍내 민가 수백호를 불태우고 지평 용문동龍門洞의 기독교인 가옥 14호와 평민 가옥 6호를 소각하였다. 註9) 주민들이 의병에 협조해준 것에 대한 일제의 잔혹한 보복조치로 믿어진다. 이 과정에서 조인환 의병부대는 양근의 분원동分院洞에서 20여 명의 부하를 잃었다. 註10) 분원동전투 이후 의병장 조인환은 의병부대를 이탈하였다. 그러자 그 부하들은 해산군인 출신의 신창현申昌鉉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9월 하순 부대를 정비한 신창현은 일본군 보병 제52연대의 1개 소대를 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는 일제측의 이어진 공격으로 부하 27명이 전사하는 타격을 받았다. 10월경 신창현 등 의병 300여 명은 강원도 인제로 이동하여 민긍호 의병부대에 합류하여 13도 연합의진에 참여하였다. 註11) 그후 그는 강원도에서 이구채 의병부대와 합진하여 일본 군경과 10여 차례나 교전하였다. 그러나 서울진공작전이 실패한 후인 1908년 6월 18일 그는 서울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註12)

그리고 김춘수는 강원도 홍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는데, 부하 200명을 이끌고 양평을 비롯한 광주·가평·홍천 등 경기도와 강원도를 넘나들며 활동하였다. 1908년 4월 그는 부하 70~80명을 이끌고 가평·양주·홍천 등지에서 방곡령을 지시하는 한편, 각 면장과 동장들에게 군수품의 조달을 요청하였다. 이들은 주로 화약이나 화승火繩 및 탄환, 또는 짚신이나 식량 등을 요구했다. 그는 그해 4월에 가평군에서 체포되었는데, 얼마 뒤 탈옥해서 다시 활동하다가 1909년 12월 자수하였다. 註13)

한편 최태평은 부하 300명을 인솔하고서 양평을 주요 활동무대로 삼아 인근 지역을 넘나들며 활동했다. 그는 1907년 8월경 서울을 습격할 목적으로 남종면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치르기도 하였다. 최태평은 그해 12월 하순 의병항쟁을 포기하고 투항했으나, 1910년 1월 군자금 모집을 한 것으로 보아 다시 의병에 투신하여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도 군대해산시 정위였던 권중식權仲植은 양근을 근거지로 삼아 해산군인들과 산포山砲들로 구성된 의병을 조직하였다. 註14) 그는 경기관찰사에게 수원 용주사龍珠寺로 군수품을 보내라는 격문을 발송하였다. 또한 관동병영장關東兵營將 정대무丁大武가 지평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1908년 음력 정월 부대를 해산하고 귀순하자, 그 부대의 선봉장 김응서金應西가 독립하여 활동하던 중 13도 연합의진에 참여하였다. 註15) 하지만 1908년 3월 중순 그는 지평에서 체포되어 일제 헌병대에 의해 사살되고 말았다.

여주에서는 이구채·김현국·윤성필 등이 이끄는 의병부대가 우편취급소와 순사분파소를 기습하여 일본 순사대와 일본인들을 물리쳤다. 그후 이구채는 강원도 원주로 이동하여 이은찬·이인영 등과 함께 13도창의대진소의 결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여주는 명성황후의 고향으로 배일사상이 강한 지역이어서 민동식·심상옥·심상희 등이 의병을 일으켜 활동하였다.

이천 출신 김봉기와 양지 출신 임옥여는 동지를 규합하여 이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들은 이천읍내의 순사분파소와 우편취급소 등을

파괴하였는데, 광주·용인·죽산·양근 등지로 활동 영역을 넓히며 활발하게 투쟁하였다. 음죽과 장호원에서는 정봉준과 방인관 등이 이끄는 의병부대가 활동하였다. 이들은 장호원을 습격하여 일본 군경에 상당한 타격을 주었으며, 이후 관동창의군에 가담하여 13도창의대진소의 일원으로 항쟁을 이어갔다. 특히 방인관은 서울진공작전이 좌절된 후에도 1909년 후반까지 경기도 일원에서 활동하다가 강원도 원주로 이동하였다.

충남 당진 출신의 정주원鄭周源은 처음에 서용범 의병부대에 가담했다가 독립하여 경기도 안성 등 남부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그후 정주원 의병부대는 고향인 충남 당진을 비롯한 면천·서산·해미와 경기 남부의 안성·죽산 등과 남양만과 아산만에 위치한 난지도와 덕적군도 등 도서지역에 거점을 마련하여 의병활동을 활발하다가 1908년 7월 체포되었다. 註16) 정주원의 뒤를 이어 안춘경이 흩어진 의병들을 규합하여 1909년 12월까지 활약하다가 수원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이밖에도 신경춘·강한조·남상목·윤관문·윤치장·임경제·정대무·홍일초 등이 대소의 의병부대를 이끌며 경기 남동부 지역 대일항전을 주도해갔다.

군대해산은 교하·통진·풍덕·고양·김포 등 경기 서북부 지역에도 영향을 끼쳤다. 이 지역은 강화분견대 군인들의 무장봉기에 큰 영향을 받았다. 강화분견대 해산군인들은 전 강화진위대 이동휘李東暉의 영향하에 있었는데, 당시 이동휘는 강화도의 보창학교 교장·대한자강회 지회장·감리교회 권사 등으로 활동하였다. 註17) 원래 강화분견대의 해산일

은 8월 11일이었으나 이미 군인들이 크게 동요하였기 때문에 9일로 당겨 해산식을 거행하였다. 해산식이 끝난 후 전 참교 유명규劉明奎와 부교 연기우延基羽와 지홍윤池弘允 등의 주도로 50여 명이 무기고를 점령하여 수백명의 주민들과 합세하여 강화읍을 공격하였다. 이러한 소식을 전해들은 일본군 사령부는 수원진위대로 하여금 이들을 진압하도록 하였다. 주민들이 합세한 해산군인들과 수원 진위대는 갑곶 돈대 부근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으며, 이 과정에서 무기가 부족한 강화분견대 해산군인들은 김포와 통진으로 이동하여 무기를 징발하였다. 註18) 일제가 증원군을 거듭 파견하여 강화도 점령을 시도하자 600명으로 불어난 강화도 의병들은 부대를 나누어 이동하였다. 즉 지홍윤 의병부대는 해서海西 쪽으로, 연기우 의병부대는 장단으로 이동한 것이다. 이동휘는 강화도 안에서 의병을 조직하려다 체포되었으며, 유명규는 통진에서 무기를 조달하려다 체포, 총살되었고 진위대 부교였던 오윤영吳允榮과 김동수金東秀는 해산군인들을 의병으로 전환하는데 기여하였다.

한편 강화도 출신의 이능권李能權, 1853~1910은 군대해산 전까지 서울 시위대에 있다가 낙향했는데, 그가 주민들을 규합하여 의병부대를 조직하였다. 그는 대동창의진大東倡義陣이란 이름아래 여러 부대로 나누어 강화도에서 주로 활동하다가 1908년 8월 해체되었다. 그리고 황해도 해주로 이동한 지홍윤은 유인석의 제자인 박정빈朴正彬·이진룡李鎭龍 등과 연합하여 활동했으며, 연기우는 장단군 덕물포에서 대한창의존양군大韓倡義尊攘軍을 표방하며 의병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아장亞將에 제갈윤신諸葛允信, 선봉장에 연기칠延基七을 선임하여 엄정한 군율로써 의진을 이끌었다. 그는 임진강 유역에서 활동 중인 허위·김규식 등과 연합전선을 형성하

였는데, 13도창의대진소의 일원으로 서울진공작전에도 참가하였다. 그 후에도 연기우는 주로 경기도 포천·삭녕·철원·연천·마전·장단·적성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당시 신문에도 그에 관한 기사가 많은 편인데 그 중 하나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의병대장 연기우씨는 근일에 부하 40여 명을 거느리고 삭녕 적성 등 군에 종종 왕래하는데 연씨는 지혜와 용맹이 겸전하여 일 헌병과 접전하되 한 번도 패하지 아니한 고로 그 지방에 주재하는 일 헌병이 감히 범접하지 못하고 가는 곳마다 민간에 터럭만한 폐단이 없는 까닭에 인심이 안온하다더라. 註19)


이와 같이 지혜와 용맹함을 겸비한 연기우가 이끄는 의병부대는 일제 군경의 두려운 존재로 부각되었다. 특히 민폐를 끼치지 않아 주민들의 지지가 두터운 편이어서 장기항전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는 일제의 강력한 진압작전을 피하기 위해 경기도와 강원도의 접경 지역에 있는 광덕산廣德山에 산채를 만들어 근거지로 삼았다. 그는 1911년 12월 경기도 가평군 화악리에서 일본 헌병대와 교전하다가 총상을 입고 전사하였다. 註20) 이로써 강화도에서 봉기하여 주로 경기 서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연기우 의병부대의 활동이 종식되었다. 그는 경기 서북부 지역의 가장 대표적인 의병부대를 이끌었으며, 특히 안민적 의병활동이 두드러졌다.

한편 1908년 후반 경기도 장단 출신의 김수민金秀敏 의병부대가 강화도에서 두달 정도 활동하였다. 그는 연기우와 의형제를 맺고서 신식무기를 주고받으며 강력한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서울진공작전을 계획하였다. 註21) 김수민 의병부대는 경기도와 황해도를 넘나들며 활동했는데, 군기가 엄정하고 유격전에 능숙하였을 뿐만 아니라 정보수집 능력도 탁월하여 대일항전을 장기간 지속할 수 있었다. 그는 13도창의대진소의 일원으로 참여하였으며, 1909년 8월까지 활동하다가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고 말았다. 註22) 그리고 오윤영·김동수 등은 의병활동을 하다가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 밖에도 박종한은 경기도 마전과 장단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13도창의대진소에 가담하였고, 적성·양주 등지에서는 권준·왕회종·김진묵 등이 연합전선을 형성하며 대일항전을 전개하였다. 이연년은 김춘수 의병부대의 종사, 이강년의 부하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1908년 5월 유배형에 처해졌다. 그는 유배지에서 탈출하여 다시 의병에 투신하여 1910년 1월 창의원수부 참모장을 표방하며 강기동 의병부대와 연합전선을 형성하였다. 망국을 전후한 시기까지 농민출신의 이건칠·이래원·이한경, 해산군인이었던 한봉서·정원규·김광식 등이 경기도 항일투쟁의 명맥을 이어갔다.

이와 같이 경기지역 후기의병은 일제의 강력한 진압작전에 맞서 주로 유격전술을 구사하였다. 이들은 일정한 지역을 활동 근거지로 삼아 인근 의진과 연합전선을 형성하였다. 경기지역 의병들은 신식무기를 많이 보유했는데, 이는 서해를 통해 청나라 상인들로부터 무기 구매가 용이한데다 해산군인들이 근대식 무기를 지닌 채 의병에 투신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경기지역 의병 중에는 해산군인들이 비교적 많은 편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상당한 수준의 투쟁역량을 보유하고 있어서 일제 군경에 맞서 공세적 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다. 그러한 대표적인 사례가 바

로 13도창의대진소의 서울진공작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들은 주민들과 긴밀하게 연계하여 방곡령을 실시하여 미곡의 역외 유출을 방지하고 납세거부투쟁을 주도하였다. 나아가 이들은 세금이나 친일지주의 소작미 등을 탈취·징발하여 군수전으로 충당하였다. 또한 친일분자들인 일진회와 밀정 등을 단호히 응징함으로써 친일세력과 주민들의 연계를 차단하였다. 그리하여 의병과 주민들의 관계가 매우 돈독하여 주민들이 앞장서서 진압과 관련된 정보를 제공할 정도였다. 따라서 경기도 의병들은 안민적 반침략운동을 전개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1. 허위 의병부대

경북 선산 출신의 허위許蔿는 후기의병 당시 경기도를 근거지삼아 의병을 일으켰다. 이미 그는 1896년 김천에서 이기찬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참모장을 맡은 바 있었다. 註23) 이후 신기선申箕善의 추천으로 관계에 나아가 평리원 재판장, 의정부 참찬參贊을 맡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는 관료생활을 하면서도 일제의 침략에 반대하는 배일통문排日通文을 두차례나 전국에 발송하여 4개월동안 구금된 적도 있었다. 註24)

일제의 감시를 받으며 향리에서 지내던 그는 고종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을 계기로 거병을 암중모색하였다. 그러던 1907년 음력 9월 경기도에서 의병항쟁을 전개하고 있던 김진묵과 왕회종 등에 의해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경기도 일대, 특히 적성·삭녕·안협·토산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400~500명의 의병을 확보하였다. 그후 그는 김규식과 연기우·이종협·황재호 등이 이끄는 의병부대를 끌어들임으로써 연합의진의 전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註25) 김규식과 연기우 등은 부교副校를 역임한 퇴역 하사관 출신들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해산군인 출신으로 군사 경험과 지식이 풍부했던 까닭에 소규모 의병부대를 지휘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허위 의병부대에는 전투역량이 뛰어난 장교와 하사관·사병 등 해산군인들이 많이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허위는 경기도에서 활동 중인 여러 의병부대와 긴밀한 연계를 구축한 후 경기 북부지역을 중심으로 활발한 투쟁을 전개함으로써 대표적인 의병부대로 성장하였다. 이러한 점이 고려되어 그가 13도창의대진소의 군사장으로 선임되어 서울진공작전을 주도하였을 것이다.

서울진공작전이 좌절된 후 그는 임진강과 한탄강 유역을 중심무대로 의병항전을 재개하였다. 註26) 그는 조인환·권준·왕회종·김진묵·박종한·김수민·김응두 등의 의병장들과 의병을 나누어 거느리고 도처에서 유격전을 벌였던 것 같다. 하지만 허위 의병부대의 구체적인 전투 활동을 알려주는 자료는 거의 찾을 수 없다. 註27) 아마도 그의 의병부대는 전선을 절단하여 일제의 통신시설을 파괴하거나 관공서의 습격, 친일세력의 처단에 주력하였을 것이다. 또한 납세거부와 미곡의 역외 반출을 중단시켰다.

허위는 의병의 군율을 정하여 민폐가 없도록 하였고, 군수품을 조달할 때에는 군표軍票를 발행, 뒷날 보상해 줄 것을 약속하였다. 註28) 그 결과 각지의 주민들은 허위 의병부대를 적극적으로 후원함으로써 항일투쟁에 상당한 도움을 주었다. 이처럼 허위 의병부대의 활동이 경기도 일원으로 확산되어가자, 일제는 회유책을 동원하였다. 예컨대 장박張博을 보내어 의병의 해산을 권하였으며, 신기선으로 하여금 허위의 부하였던 이병채李秉埰를 보내어 투항을 권유하게 했다. 그는 그러한 제의를 단호하게 거부하고 죽을 때까지 국권회복을 위해 무력항쟁을 전개할 것이라 말하였다. 註29) 그는 부하들을 서울이나 인천 등지에 보내어 무기 구입을 여러 차례 시도하였다. 註30) 이는 그가 의병항쟁의 관건을 근대적인 무기의 확보와 직결된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의병부대를 재정비한 그는 다시 서울진공작전을 시도할 계획이었다. 1908년 4월 21일 그는 이강년·이인영·유인석·박정빈의 공동 명의로 전국 13도에 의병봉기를 촉구하는 통문을 발송하였다. 註31) 실제로는 허위가 이 통문의 발송을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다른 의병장들은 대부분 다른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무렵 그는 박노천朴魯天과 이기학李基學 등을 통하여 통감부와 교섭하기 위한 요구조건 30개조를 제출하고 통감이 이를 수락하지 않을 경우 다시 서울을 공격하겠노라고 선언하였다. 註32)


1. 태황제를 복위시켜라

2. 외교권을 반환하라

3. 통감부를 철거하라

4. 의관제도를 복구하라

5. 일본인의 서임을 시행하지 마라

6. 형벌권의 자유를 달라

7. 통신권의 자유를 달라

8. 경찰권의 자유를 달라

9. 정부조직의 자유를 달라

10. 군대시설의 자유를 달라

11. 을미 을사 정미의 국적國賊을 자유롭게 처참하게 하라.

12. 내지의 산림 천택川澤 금은동광을 침해하지 마라

13. 내지의 부동산 매매를 하지 마라

14. 항해권을 반환하라

15. 어채魚採의 이익을 침해하지 마라

16. 교육권의 자유를 달라

17. 출판권의 자유를 달라

18. 군용지를 반환하라

19. 일본인 거류지를 반환하라

20. 철도를 반환하고 물러가라

21. 학회 이외를 자유롭게 해산시켜라

22. 해관세법의 자유를 달라

23. 일본인의 상업을 제한하라

24. 일본인의 상업물품을 제한하라

25. 일본인의 상륙을 제한하라

26. 국채를 시행하지 마라

27. 인민의 손해를 배상하라

28. (일본)은행권을 시행하지 마라

29. 지방의 (일본군)병참을 철거하라

30. 현재 일본에 있는 망명객 등을 속히 잡아들여라 註33)


위의 요구서에 보이듯이 허위는 고종의 복위, 외교권의 반환, 통감부의 철수를 매우 중시하였으며, 일본의 정치·경제적 침탈 금지와 한국의 기본권 보장, 친일 정치인의 단죄 등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요구조건을 담판을 통해 관철시키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국의 식민지화를 추진하고 있던 일제가 수용할 수 없는 조건이었으며, 서울진공작전 역시 당시 의병의 역량으로는 성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허위 의병부대의 핵심적인 전력을 형성하고 있던 김규식이 무기를 구입하기 위해 인천에 잠입했다가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註34) 허위 역시 1908년 6월 11일 돈에 눈이 먼 고향 친구의 밀고로 은신처인 경기도 영평군 서면 유동에서 체포되었다. 註35)

서울로 압송된 허위는 헌병사령관 명석원이랑明石元二郞으로부터 직접 신문訊問을 받았다. 이때 그는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일제의 불법적 침략을 성토하였다. 그는 의병을 일으키게 된 동기에 대해,


일본은 말로는 한국 보호를 주창하지만 실상은 한국을 멸망시키려는 화심禍心으로 포장하고 있다. 이에 우리들이 좌시할 수 없어 목숨을 포기하고서 의병을 일으킨 것이다. 註36)


라고 하여, 의병 봉기의 원인은 일제의 침략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신문과정에서 허위의 강직한 성품과 고매한 인격을 확인한 명석원이랑은 허위를 진심으로 존경하였으며 심지어 그의 구명운동을 벌였다.

또한 헌병사령부의 신문과정에서 “의병은 누가 시켜서 한 짓이며 대장은 누구인가”라고 묻자, 그는 일본인들이 더 잘 알 것인데 나에게 하필 묻느냐고 반문하면서 “의병을 시킨 자는 이등박문이고 대장은 나”라고 답변하였다. 註37) 재판과정에서도 그는 일본인에 의한 재판이 부당하다며 재판을 거부하였다.

그뒤 허위는 9월 18일 경성공소원에서 사형을 선고를 받아 10월 21일 교수형을 당하였다. 註38) 형의 집행을 앞두고 일본 승려가 설법을 하려고 하자 그는,


충의의 귀신은 스스로 마땅히 하늘로 올라 갈 것이요, 혹 지옥에 떨어진다 하더라도 어찌 너희들의 도움을 받아서 복을 얻으랴. 註39)


라고 준엄히 말하며 승려를 물러가게 하였다. 구국의 일념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던 허위는 이렇게 순국하였다. 이와 같이 허위 의병부대는 경기지역 의병항쟁의 연합전선의 구축과 서울진공작전을 주도함으로써 경기지역 후기의병의 활성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2. 민긍호 의병부대

1907년 8월 1일 서울 시위대의 해산과 해산을 거부한 군인들의 무장봉기 소식은 순식간에 전국 각지로 퍼져나갔다. 각 진위대에서 근무하고 있던 장병들도 동요하기 시작하였는데, 지방 진위대 가운데 가장 먼저 해산을 반대하고 항일투쟁에 뛰어든 지역은 강원도의 군사요충지인 원주였다. 원주진위대의 병사들은 서울 시위대의 혈투 소식에 놀라움과 적개심을 금할 수 없었다. 병사들의 동요를 눈치챈 원주진위대 대대장 홍유형洪裕馨은 부하들을 달래었지만 역부족이었다. 마침 홍유형은 해산에 따른 제반사항을 군부로부터 시달받기 위해 상경하였다. 註40)

이에 원주진위대 특무정교特務正校 민긍호閔肯鎬는 대대장 대리를 맡고 있던 정위正尉 김덕제金悳濟와 더불어 봉기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먼저 대대장을 뒤쫓아 홍유형을 데려와 원주진위대를 지휘케 하여 서울로 쳐들어갈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를 눈치챈 홍유형은 병사들을 따돌리고 야밤에 서울로 도망치고 말았다.

이에 민긍호 등은 8월 5일 원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지방 진위대 중에 원주진위대의 해산군인들에 의한 의병항쟁이 시작된 것이다. 註41) 당시의 상황은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8월 5일 오후 2시 지나 원주진위 제5대대는 갑자기 소요를 시작하여 급격한 비상나팔로써 산병散兵을 십집拾集하였다. 동시에 마침 구력 7월 27일 원주 시일市日로써 시민도 주장周章앞을 다투어 도주하는 등 사태는 보통이 아닌 불온의 모양이 있고 곧 의병이라고 칭하는 폭도의 일단이 진위병사와 결탁하고 먼저 방인가옥에 침입, 이들을 살해하려고 한다고 하였다. 註42)


이와 같이 민긍호 등은 지역민들에게 의병봉기를 널리 알리고 의병들을 규합하기 위해 일부러 원주 장날을 이용한 것이다. 그는 비상나팔을 불어 장병들을 집결시킨 후에 의병을 일으켰음을 선언한 후 주민들 중에서 호응자를 모집하였다. 또한 그는 무기고에서 개인화기 약 1,600정과 탄환 약 4만발을 꺼내어 의병들을 무장시킨 후 대오를 편성하였다. 註43) 이후 원주진위대의 봉기는 여러 지역의 진위대 병사들이 의병을 일으키거나 해산한 군인들이 의병부대에 가담하는 계기로 작용함으로써 후기의병의 새로운 양상이 전개되었다.

당시 봉기에 가담한 사병들에게 감금당한 6명의 장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권태희權泰熙 정위는 후일 군법회의에서 현지 상황을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본인은 8월 4일에 신병身病으로 집으로 돌아가 휴양하고 있었더니, 이튿날5일 오후에 본대로부터 함성과 포성이 크게 일어나고 부하 인민들이 분답피난奔踏避亂함에 그 이유를 알아본즉 군사들이 폭동을 일으켜 장교를 구타한다 하는 고로 민가에 피신해 있다가 다음날 시민들에게 잡혀 병영에 들어가 보니 병사兵舍와 군기고軍器庫가 부서져 형체도 없고 사병은 사방에 흩어져 시민들과 합세해서 본인을 병사에 이틀 동안 감금하였다. 註44)


원주진위대의 사병들과 주민들이 합세하여 비협조적인 장교들을 감금하고 의병투쟁에 나섰다는 것이다. 이들은 민긍호를 중심으로 김덕제·손재규·한갑복 등의 지휘하에 원주 읍내의 우편취급소·군아·경찰분소 등의 관공서와 일제 침략기구를 공격하여 일본인들을 몰아내고 원주를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註45)

8월 6일에는 원주진위대의 봉기 소식을 접한 여주분견대의 병사들이‘본대에 있는 사졸들이 군대해산 사건에 연유하여 난을 일으켜 움직이고 있은즉 우리들도 생사를 같이 해야 한다’고 하면서 파견대장을 감금한 후 원주로 합류하였다. 註46) 이들의 사기가 더욱 고조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원주진위대의 의병봉기를 주도한 민긍호의 가계는 잘 알 수 없다. 아마도 서울출생으로 그의 성격은 매우 강직하고 기개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일제가 군대를 해산하려 하자 그는‘나라에 군대가 없다면 어떻게 국가라고 할 수 있느냐’며 분개하였다. 註47) 그는 1897년 진위대에 들어가 군인의 길을 걸었는데, 고성·춘천 등지의 진위대를 전전하다 1907년 해산 당시 원주진위대의 특무정교로 근무중이었다. 註48) 그는 여흥민씨였지만 집안이 가난하여 병졸로 입대해서 10여 년 동안 진위대의 고참 하사관으로 성장하였다.

한편 원주진위대의 봉기 소식을 접한 일본군 사령부는 충주경찰고문지부忠州警察顧問支部로 하여금 원주에 정찰대를 파견, 의병을 해산시키라고 명령하였다. 그리하여 충주수비대장 이궁二宮 소위는 부하 수십명을 이끌고 원주로 잠입하려 했으나 민긍호의 의병부대와 약 3시간의 교전 끝에 패퇴당하고 말았다. 註49)

이러한 상황을 보고받은 일본군 사령관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서울 주둔 보병 제47연대 제3대대장 하림下林 소좌를 지휘관으로 삼아 보병 2개 중대, 기관총 4문, 공병 1개 소대로 지대를 편성하여 원주로 급파시켰다. 그러나 이 부대가 8월 10일 원주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민긍호 의병부대가 원주를 철수한 뒤였다. 그들은 원주 부근을 샅샅히 수색해 보았으나, 의병의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었다. 당시의 상황을 그들은 다음과 같이 파악하였다.


지형에 밝은 그곳 주민들의 비호를 받고 있는 폭도의병 ; 저자주의 첩보 근무는 대단히 민활하여 교묘하게 우리 행동을 탐지한 뒤 은현출몰隱現出沒하기 때문에 지대는 원주 도착 후 그 부근 소탕에 힘썼음에도 불구하고 수일동안 조금도 얻는 바가 없었다. 註50)


일본군은 주민들의 적극적인 비호를 받으며 활동하는 민긍호 의병부대의 그림자조차 찾지 못해 매우 당황해한 것이다.

민긍호 의병부대는 인근 지역에 격문을 돌려 주민들의 호응을 호소하는 한편, 근처의 포수들을 포섭하여 전열을 새롭게 정비하였다. 그리하여 8월 8일 이들은 크게 2개의 부대로 편성한 다음 다시 유격전에 적합한 소규모 부대로 나누어 활동하였다.


김덕제는 그 일부를 이끌고 평창·강릉 방면에서 양양·간성·고성·통천·흡곡 지방에 걸쳐 도량하고, 민긍호는 전체의 수괴가 되어 수다한 소집단으로 분할하여 제천·충주·죽산·장호원·여주·홍천 등 각 지방으로 은현출몰하여 횡포를 자행하였고, 이와 부화뇌동한 무뢰한도 많아 허준·이경삼·김만군·고석이·김군필·이한창·한기석·한갑복·윤기영·이강년·김생산·변학기·조인환 등이 그 주된 자다. 註51)


민긍호는 총대장이 되어 제천-충주-홍천 연선에서 활동하고, 김덕제는 평창-강릉 연선에서 활동하였는데, 특히 민긍호는 소규모 의진들과 연계하여 강원·경기·충북·경북 지방을 넘나들며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림 소좌가 이끄는 일본군이 원주에 도착했을 때는 이들의 발자취조차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민긍호 의병부대는 당시 약 400명의 규모로 그 중에 250명은 해산군인들이었다. 註52) 나머지 의병들은 포수와 농민들이 많았을 것이다. 이들을 유격전에 유리하도록 소부대로 편성하여 거의 독자적으로 활동하게 하였다. 강원도에는 그의 휘하에서 활동하는 32개 소부대가 있음을 과시하였다. 그 중에 한 부대는 제천을 공격하기 위해 주천酒泉으로 이동하였다. 그곳에서 이들은 이강년李康秊 의병부대와 만나 연합전선을 구축하였다. 이강년은 제천 북방의 배향산拜向山에서 재기한 뒤 제천을 점령했는데, 그 무렵 민긍호 의병부대와 연합하게 된 것이다. 註53)

한편 약 200명으로 구성된 민긍호 휘하의 다른 부대는 8월 12일 여주의 경무분견소를 기습 공격하여 일본인 경찰과 그 가족들을 처단한 뒤 무기를 노획하였다. 註54) 여주에서도 의병을 모집한 다음 음죽을 거쳐 장호원에 이르렀을 때 이 부대의 규모는 1천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8월 15일 민긍호의 예하 부대 300명이 죽산을 기습하여 일본인들을 처단하였으며, 그날 밤 제천을 점령하고 있던 350명의 의병들은 수비대와 4시간 이상 교전, 충주로 격퇴시켰다. 16일에 이들은 충주수비대에서 파견한 전선보호병을 습격하여 그중 2명을 죽였다. 또한 18일에는 150여 명의 의병이 장호원에서 충주로 가던 일제 증원군을 공격하였다. 註55) 이처럼 민긍호 의병부대는 충북 북부의 제천·죽산·장호원·충주 등지와 경기 남부의 여주·이천 지역을 무대로 일본군과 맞서 치열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강원도 홍천·원주·평창·횡성 등지와 경기도 양근 지역까지 진출하여 일본군의 진압작전을 무력화시켰다. 하지만 원주에 파견된 일본군은 이들에 관한 정보를 전혀 얻을 수 없었다 註56). 그만큼 민긍호 의병부대가 유격전에 능숙하였을 뿐만 아니라 주민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제는 민긍호 의병부대를 섬멸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였다. 註57) 조선주차군사령관은 ‘장래를 고려하여 맹렬하게 응징적 토벌을 실시할 필요성을 인정’하고서 서울을 비롯한 원산·충주·대전 등지의 수비대를 동원하여 민긍호 의병부대의 진압에 전력을 기울였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제천을 의병의 근거지로 지목하여 “장래의 화근을 제거하기 위하여 촌락의 대부분을 소각해 버렸다” 註58)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 사건을 전후한 시기에 제천을 여행했던 영국의 『데일리 메일Daily Mail』지 특파원 맥켄지F.A. Mckenzie는 『한국의 독립운동Korea's Fight for Freedom』에서 그때의 참상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내가 제천에 도착한 것은 볕이 따가운 초가을이었다. 마을을 내려다 보는 언덕 위에서 펄럭이는 일장기日章旗는 눈부신 햇볕으로 선명했고 보초步哨의 총검도 햇빛에 반짝였다. 나는 말에서 내려 잿더미 위를 걸어 다녔다. 그처럼 철저하게 파괴된 것을 본 일이 없었다. 한 달 전만해도 분주하고 번창했던 도시가 지금은 새까만 먼지와 잿더미로 화해 버렸다. 벽 하나 기둥 하나 장독 하나도 온전히

남은 것이 없을 정도였다. 註59)


하지만 민긍호 의병부대의 항일의지는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일본군이 계속 증강되어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지만 오히려 충주를 점령하겠다고 호언할 정도였다.

이처럼 민긍호가 이끄는 의병부대들이 강원도와 충북뿐만 아니라 경기도까지 위협하자 일제는 선유사를 파견하여 이들을 회유하려 하였다. 당시 이 지역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가 의병항쟁의 불길이 거세게 타올랐다. 이에 따라 일제는 순종으로 하여금 의병을 해산하고 귀순하라는 조칙을 만들어 각 도에 선유사를 파견시켰다. 註60) 강원도 선유사로 파견된 홍우석洪祐晳은 조칙을 핑계삼아 민긍호를 체포할 계획을 꾸몄다. 그의 간계를 간파한 민긍호는 부하로 하여금 순종의 조칙을 받들게 하였다. 그러자 강원도관찰사 황철黃鐵이 나서서 민긍호에게 ‘의병을 일으키면 화가 되고 일본을 따르면 복을 얻는다’고 하면서 귀순을 권유하는 서신을 전달하였다. 황철의 서신을 전해 받은 민긍호는 귀순을 거부하면서 황철의 주장을 비판하는 답신을 보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들어 황철의 제안을 단호히 거부하였다.


긍호는 대대로 국은國恩을 입은 사람으로 어찌 저 오랑캐에 대해 복수하고 싶지 않겠는가. 또 (각하의) 교시敎示 중에 ‘전국의 인민이 해를 입지 않음이 없어 촌락이 불타고 남녀가 이산되는 것이 과연 누구 때문인가.’라고 하여 우리 의병에게 허물을 돌렸으나, 이는 각하가 그 지엽만을 말하고 그 근본을 말하지 않은 것이다. 저 왜놈들의 무도無道함이 없었던들 우리가 어찌 의병을 일으켰겠는가.

… 대저 의병과 왜병이 교전함에 형세는 진실로 그러하지만, 왜놈들이 무고한 마을과 읍부邑府를 송두리째 불태우는 것은 도대체 무슨 심사에서인가. 각하는 의병만 해산되면 우리 국민이 저 왜놈들의 화를 입지 않고 태평을 누릴 수 있다고 보는가. 註61)


그는 목숨을 버릴 지라도 애국충절을 다하기 위해 국권을 회복할 때까지 항일투쟁을 전개할 것임을 천명하였다. 답신의 내용을 통해 그가 얼마나 고결한 애국자이며 겨레를 위한 희생정신이 강했는지 잘 보여준다. 그후 군부에서도 원주진위대 대대장 홍우형 참령을 민긍호 의병부대를 해산시키기 위해 파견하였다. 註62) 그는 지레 겁을 먹고서 도중에 도망하고 말았다.

회유책과 병행하여 일제의 군사작전은 더욱 강화되었다. 일본군은 민긍호 의병부대의 주된 활동 근거지인 제천·충주·원주 등지를 대상으로 자주 진압작전을 펼쳤다. 그로 인하여 민긍호 의병부대의 반일투쟁이 위축될 상황이었다. 이에 민긍호 의병부대는 활동무대를 홍천을 비롯한 강원도 북부지역으로 이동하였다. 1907년 10월을 전후하여 이들은 양양·영월·홍천·통천·고성·춘천·강릉·양구 등 강원도 북부로 활동영역을 확대하였다. 註63)

이들은 9월 하순 횡성군 갑천면 소재의 봉복사鳳腹寺를 겨울 병영으로 이용하기 위해 준비 작업에 착수하였다. 註64)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탐지한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치열한 교전 끝에 이들은 50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당했다. 이에 굴하지 않고 민긍호는 홍천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원주에서 출범한 이인영 의병부대와 연합전선을 형성하며 일본군과 치열한 접전을 거듭하였다. 이무렵 그는 이인영이 주도하는 관동창의군 소속의 진위대사령부로 활동하였다. 그후 13도창의대진소의 편제를 재정비할 때 그는 관동창의대장에 임명되었다.

1908년 1월경 그는 강원도 의병을 총괄하는 관동창의대장에 선임되어 경기도 양주로 집결하라는 총대장 이인영의 요청을 받았다. 이에 발맞추어 그는 강원도 각지에 격문을 띄워 애국적인 혈전에 동참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일제 수비대가 정찰과정에서 습득한‘진위대창의사령부대장 민긍호’명의의 격문 요지는 다음과 같다.


각 면장 이장은 그 촌내村內의 장정 20세로부터 50세까지의 해당자를 소집하여 각자 10일분의 양식을 휴대케 하여 11월 25일 서울 동대문 밖 10리 되는 앞뜰에 집합시키도록 하라. 만약 이 명령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의병을 즉시 파견하여 그에 상당하는 처분을 내릴 것이다. 註65)


민긍호는 각 마을의 면장과 이장들에게 20~50세 사이의 장정들을 10일간의 식량을 지참시켜 서울 동대문 밖 10리 지점에 집결시키라고 지시하였다. 여기서 11월 15일은 음력일 것이므로, 양력 1908년 1월에 해당한다.

민긍호는 양주에 집결시킬 군사들을 모집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이무렵 민긍호 휘하의 의병부대들은 평창·영월·횡성·홍천·양구·춘천·인제·장호원 등지를 전전하며 혈전을 벌이고 있었다. 註66) 이들은 1908년 1월 양구 부근의 임당林塘에서 일본군 수비대의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


1월 2일 양구수비대장 등강藤江 소위는 폭도 1천2백~1천3백명이 임당리 부근에 집합하여 있음을 정찰하여 알고 부하 12명을 인솔, 즉일 출발 … 3일 오후 3시반경 폭도가 수개 집단으로 나뉘어 범동리 및 자작현自作峴의 동서 양단에 있는 고지를 점령하고 있음을 알고 그 측면에서 교묘하게 그것을 공격, 그 70명을 사살하고 200여 명을 부상, 이 폭도의 수괴는 민긍호·이인영·정환직·신돌석·오영환 등이었다. 註67)


민긍호 등이 이끄는 연합의진이 일본군의 공격으로 무려 70명이나 전사했다는 것이다. 결국 그는 홍천으로 내려가 의진의 재정비에 적극 노력함으로써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서울진공작전이 좌절된 이후 민긍호 의병부대는 혹한기의 불리한 여건과 근거지의 노출, 탄약의 고갈 등으로 인해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다. 이에 그는 치악산 아래 강림촌講林村에서 의병들을 잠시 쉬게 하면서 장기항전의 계책을 구상할 계획이었다. 註68) 이러한 상황을 눈치챈 순사대는 2월 27일 민긍호가 이끄는 90명의 의병들과 치열한 혈전을 벌였다. 다음날 이들은 등자치登子峙 아래 궐덕리蕨德里에서 숙영하였다. 이러한 정보를 탐지한 순사대가 29일 오전 두 방향에서 포위 공격해오자 의병들은 3시간 30분 동안 완강히 저항하였다. 註69) 순사대의 집요한 공격으로 이들 중 20명이나 전사하였으며, 나머지 의병들도 퇴각당하였다. 민긍호는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궐덕촌 민가에 잠복해 있다가 체포되고 말았다.

그날 밤 민긍호의 좌우군左右軍 50~60명은 전열을 정비하여 순사대의 숙소를 공격하여 민긍호 의병장을 탈환하려 하였다. 의병들이 ‘우리 대장 민씨여 어딘가 그 있는 곳에서 소리를 치시오’라고 외쳤다. 이에 다급해진 순사대가 민긍호를 빼앗길 것을 염려하여 그를 사살하고 말았다. 일본인들은 민긍호의 죽음을 애석해 했으며, 정성껏 장사지낸 뒤 ‘의병대장민긍호지묘義兵大將閔肯鎬之墓’라는 묘비를 세워주었다. 註70)

민긍호가 순국한 뒤 소규모의 유격부대를 지휘하였던 부하들이 각각 독립하여 의병활동을 이어갔다. 그의 부하 김현국金顯國·한상열韓相說 등이 잔여 의병들을 규합, 민긍호 의병장의 복수를 다짐하였다. 이 밖에도 정명선·유병훈·노면상·박하남·윤재옥·신순모 등이 유격전을 전개하며 항일투쟁을 주도하였다. 이상과 같이 민긍호 의병부대는 해산군인이 주축이 된 의병부대였다. 따라서 이들의 전투력은 매우 뛰어난 편이어서 유격전의 수행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한 역량을 발판삼아 그는 13도창의대진소의 관동창의대장으로 임명되었으나, 실제로 서울진공작전에는 참여하지 못하였다. 민긍호 의병부대는 강원도의 의진간에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일본군의 진압을 일정기간 무력화시켰다. 그리고 해산군인 출신 의병부대의 전투력이 얼마나 강한지를 잘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이다. 따라서 민긍호 의병부대는 강원도의 가장 대표적인 의병부대였다.


3. 이은찬의 창의원수부

이은찬은 1908년 6월 허위가 체포된 후 의병의 진로를 모색한 끝에 해외로 거점을 옮길 계획이었다. 註71) 그는 유인석이 활동하고 있던 중국

길림성吉林城을 향해 출발했지만 일이 여의치 않자 경기도로 되돌아와 흩어진 의병들을 불러 모았다. 그는 1908년 10월경 포천군 송우리松隅里에서 “각 관아를 전멸하고 우리 의군의 기세를 올리려고 한다.”고 포고하였다. 이은찬이 의병의 깃발을 다시 세운 것이다.

당시 이은찬은 의병부대의 명칭을 창의원수부倡義元帥府라 표방하였는데, 주요 구성원은 다음과 같다.


중군대장 이은찬

선봉장 김귀손

좌군장 윤인순

우군장 정용대

부장部將 박순근 임운명 강기동 이준식

참모 이종협 윤대구 이주호 엄해윤

군량장 이계복

종사從事 이사인

부관副官 장수봉


핵심적인 지휘부 3인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선봉장에 선임된 김귀손金貴孫, 본명 金潤宗은 경기도 파주 출신으로 원래는 파주군 순교巡校로 근무했었다. 註72) 그는 우국지사적 면모를 보이다가 1908년 3월부터 허위 의병부대에서 활동한 바 있던 노재훈盧在勳의 종사로 활약하였다. 노재훈은 윤인순의 지휘를 받았으므로 그 역시 윤인순의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윤인순 휘하에서 이탈하여 그를 찾아온 이은찬의 요청으로 창의원수부의 선봉장으로 활약하게 된 것이다. 그는 참모장 이계복李啓復과 10여 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항일투쟁과 친일세력의 처단, 그리고 방곡防穀 활동을 주도하였다. 당시 의병들은 활동지역내의 곡식을 타지로 반출하거나 매매하는 것을 금지시켰는데, 의병부대의 군량을 확보하기 위한 의도였다. 그의 참모장 이계복은 창의원수부의 군량장을 맡았는데, 이는 그가 이은찬이 신임하는 부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은 군량미 330석을 양주의 4개처에 은닉하고 있었다.

좌군장 윤인순尹仁淳은 경기도 양주 출신으로 일찍이 허위의 부장으로 활동하다가 허위가 체포되자 그후 독립하여 관동창의원수부 진영대장鎭營大將으로 활약하였다. 그의 휘하에는 선봉장 김종운, 참모장 홍원유 외에 노재훈 등의 부장이 있었다. 김종운과 홍원유는 서울 출신으로 해산군인들이었다. 이들과 함께 30~40명의 부하를 데리고 활동하던 윤인순은 1909년 3월 경기도 적성의 문암文岩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윤인순 의병부대의 참모장이었던 홍원유는 이한경과 더불어 윤인순 의병부대의 잔여 병력을 양분하였다. 홍원유는 적성·파주 등지를 무대로 활동했는데, 이완용의 조카 이성구를 납치하여 의병에 가담시키기도 하였다. 그는 전성서 강기동 등과 연합하여 일제의 진압작전에 대처하였다.

우군장 정용대鄭容大, 鄭用大는 경기도 적성 출신으로 원래 특무정교를 지낸 해산군인이었다. 그는 윤인순의 휘하에서 서기로 활동하다가 창의원수부의 우군장을 맡았는데, 주로 경기도 서부지역인 고양·교하·강화·김포·풍덕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30~40명의 부하를 거느렸던 그는 1909년 9월 적성헌병대에 의해 체포되어 1910년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그러자 적성 출신의 전성서가 정용대의 항일투쟁을 계승하였다. 그는 주로 양주를 중심으로 의병항쟁을 전개했는데, 강기동 의병부대와 연합하거나 독자적으로 1910년 7월경까지 활동하였다.

그리고 부장이었던 강기동姜基東은 서울 출신으로 경기도 장단長湍 고랑포古浪浦

에서 헌병보조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이때 강기동이 근무하던 장단에는 의병들이 다수 투옥되어 있었는데, 그가 몰래 탈출시켜 준 의병들이 많았다. 이 과정에서 그는 분견소에 갇혀있던 길인식 등과 함께 총과 탄환을 탈취하여 창의원수부에 투신하였다. 강기동은 헌병보조원 시절의 정보를 바탕으로 군자금을 모금하는 방법을 제공하는 등의 공로로 창의원수부의 부장으로 활동하였다. 1909년 3월 이은찬이 서울 용산에서 체포되자 그는 남학서南鶴瑞·오수영吳壽泳·임명달任明達 등과 함께 격문을 배포하며 항일투쟁을 끝까지 전개할 것임을 맹세하였다. 그는 이은찬의 뒤를 이어 창의원수부 중군장을 표방하며 연기우 의병부대와 함께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경기지역 항일투쟁을 주도하였다.

연기우는 해산군인 출신으로 강화도 진위대鎭衛隊에서 근무하다 의병을 일으켜 경기 서부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의병장이었다. 강기동과 연기우는 이미 현상금이 걸린 사람들로서 밀정들에게 노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부대를 소수 정예부대로 편성하였다. 당시 강기동 의병부대의 좌군장 전성서田聖瑞·강두필姜斗弼 등과 함께 주로 경기도 양주와 포천, 심지어 강원도 등지를 넘나들었다. 이에 맞서 이들을 진압하려는 일제의 집요한 추적이 계속되었다. 결국 강기동은 부하들을 해산한 후 북간도로 망명하기 위해 원산으로 갔다가 1911년 2월에 체포되고 말았다. 그후 그는 일제의 재판을 받은 후 서울 용산에서 순국하였다. 註73)

이은찬은 창의원수부의 이름아래 위에서 열거한 지휘부와 함께 연합전선을 형성하였다. 이들은 연합하여 대일항쟁을 전개하거나, 군수품을 조달하는 활동을 벌이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각기 의진을 분산하여 운용하기도 하였다. 일제의 기록에는 의복과 군량·신발·군자금 등을 징발하는 활동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들은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일제 군경과의 전투에도 적극적이었다. 이들은 파주 천현면 후발리에서 순사대와 3시간여 동안 교전한 적도 있으며, 서파동· 퇴계원·장거리·축산리 전투 등 창의원수부의 기습적이고 신출귀몰한 공격에 대해 일본 군경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동향을 파악하느라 부산을 떨었다. 註74)

이에 따라 일제는 포천과 양주 등지에 군대를 증파하여 진압작전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금회 폐하는 맹추위에도 불구하고 또 통감에게 속아 행행함은 두려움 때문이다. 통감은 일본인의 흉한으로 하여금 폐하를 시해시켜 우리 대한국을 멸망케 할 계획일 것으로 우리 의병은 일본인을 모두 배척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기회에 우리 국민은 모두 의병이 되어 경성에 침입, 통감을 위시한 일본군대 및 경찰관을 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 차제에 결사대를 조직해서 경성으로 잠행시켜 일본인의 고관 저택에 폭탄을 투척, 살해하겠다. 註75)


이처럼 이들은 서울로 쳐들어가 일제의 침략기관과 일본인 고위관리의 구축을 표방하였다. 이들은 의병활동의 일환으로 결사대를 조직하여 의열투쟁을 전개할 계획임을 공공연히 밝힘으로써 일제 당국을 긴장시켰다.

또한 이들은 주민들을 대상으로 의병 모집에 노력하였으며, 헌병보조원이나 한인 순사들을 의병으로 포섭하기 위해 고시문을 배포하였다.


「순검巡檢과 보조원補助員에게 고시함」

무릇 우리 국민된 자는 왜적을 소탕하고 국가를 멸망으로부터 구제하고 백성의 복리를 꾀하지 않으면 안될 것을 아는가. … 너희들은 과거의 허물을 반성하고 정의에 대하여 모두 함께 서로 경계하고 의논하여 각기 왜적을 베고 그 머리를 바치면 그 죄를 용서할 뿐 아니라 후한 상을 내릴 것이요, 또 군기와 탄약을 가지고 오면 상을 주어 그 노고를 사례할 것이며, 군사의 기밀을 탐지하여 보고하면 그 죄를 용서할 것이다. 註76)


위의 고시문은 윤인순의 이름으로 1909년 2월 순검에게는 한문, 보조원에게는 한글로 배포했다. 당시 이은찬은 격문이나 고시문을 배포할 때 항상 좌(우)군장을 맡고 있던 윤인순의 명의로 하였다. 註77) 이 과정에서 창의원수부의 이은찬과 윤인순 등의 의병부대는 두배 이상 증가했으며 전투횟수도 급격히 증가하였다. 아마도 이무렵 앞서 소개한 헌병보조원 출신인 강기동이 이은찬 의병부대에 투신했을 것이다.

이처럼 증강된 창의원수부는 1909년 2월 25일 좌군장 윤인순의 출생지로서 활동근거지인 양주군 적석면 돌압산乭壓山에 주둔하고 있다가 일본 연합 순사대와 조우하여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다. 이들의 막강한 화력과 전술에 밀려 순사대는 양주읍으로 도주하고 말았다. 당시 창의원수부의 의병들은 신식무기와 대포를 소유하고 있어서 화력 면에서도 일본 군경에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일제 군경의 대대적인 진압작전이 날로 강화되었고 창의원수부의 탄환 부족으로 인하여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또한 일제는 의병과 주민들의 유대를 강력히 차단하였으며, 의병 근거지로 지목된 마을을 초토화시키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결국 창의원수부의 연합의진은 소부대로 분산하여 잠적하거나 타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돌압산 전투 상황도

 

1909년 3월 좌군장 윤인순은 수비대와 교전중 전사하기에 이르렀다. 이은찬 역시 더 이상 의병활동이 어려워지자 간도로 망명할 계획이었으나, 이를 탐지한 밀정들의 덫에 걸려 서울 용산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이은찬은 옥중에서 다음과 같은 시로 국권회복을 이루지 못한 안타까움을 달래었다.


오얏나무 가지 하나로 배를 만들어

창생을 건지고자 해변에 띄웠는데

조그마한 공도 이루지 못하고 먼저 물에 빠졌으니

누가 동양낙토의 만년을 기약하리오.


그가 주도한 창의원수부는 가능한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노력한 결과 전투과정에서도 주민들의 적극적 협조에 힘입은 바가 컸다. 일제

는 그와 주민들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파악하였다.


국가적 지상志想을 갖고 항상 정의를 표방하며 민심을 수렴하였다. … 되도록 인민에게 고통을 주지 않음으로써 부하의 폭도의병 : 저자주는 물론 지방의 인민도 그 덕을 감사하고 이은찬을 부르기를 대장 또는 각하의 칭호로써 완미한 사인士人은 기뻐 그를 영접하고 그 행동을 비밀로 할 뿐 아니라 혹은 보초가 되어 그 주위를 경계하고 혹은 밀정이 되어 관헌의 행동을 통고함과 같이 오히려 당연히 진력해야 할 의무라고 오해하여 그 행동을 후원 註78)


이은찬의 활동근거지에 사는 주민들이 그의 덕에 감사하고 의병활동에 적극 협조한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활동구역 내에 방곡防穀 명령을 하달하여 거부하는 마름들은 단호히 처단하였다. 또한 그는 납세거부투쟁, 밀정이나 일진회·자위단 등 친일분자의 처단 등에도 적극적이었다. 요컨대 그의 안민적安民的 의병활동이 주민들의 지지를 획득하는데 크게 기여했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창의원수부는 1907년 후반 강원도 원주에서 조직된 이후 1908년 후반이래 경기도 북부지역을 중심으로 광범한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반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은찬을 이어 강기동이 창의원수부를 계승하여 1910년 전후까지 활동했으나 국내에서는 도저히 활동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어 북간도로 활동무대를 옮기려다 그만 좌절되고 말았다. 그러나 국내에서 국외로 이동하여 독립전쟁으로 전환하려는 의병들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註 3] 유한철, 「1907~1910년 강원도 의병진과 활동」,『한국독립운동사연구』5,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1, 149쪽. ☞

[註 4] 유한철, 「1907~1910년 강원도 의병진과 활동」,『한국독립운동사연구』5, 169쪽. ☞

[註 5]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자료집』3, 586~589·598~600·602~604·609~610·617~619쪽. ☞

[註 6] 김순덕,『경기지방 의병운동 연구(1904~1911)』 15~16쪽. ☞

[註 7] 김순덕, 「후기의병운동」,『경기도항일독립운동사』 1995, 64쪽. 

경기도 후기의병을 다룬 글은 김순덕의 「경기지방 의병의 조직과 활동(1907~1911년)」,『역사연구』1, 구로역사연구소, 1992)이 있으나 여기서는 최근 성과인『경기도항일독립운동사』에 수록된 글을 주로 참고하였다. ☞

[註 8]『대한매일신보』1907년 8월 29일 「無處不義」. ☞

[註 9]『대한매일신보』1907년 11월 6일 「地方情形」. ☞

[註 10]『대한매일신보』1907년 9월 22일 「地方消息」. ☞

[註 11]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자료집-별집 1』 1974, 68~69쪽. ☞

[註 12]『황성신문』1908년 6월 26일 「偶捉兩魁」. ☞

[註 13] 김순덕,『경기지방 의병운동 연구(1904~1911)』 42쪽의 각주 174 참조. ☞

[註 14] 뒤바보, 「의병전」,『독립신문』1920년 5월 11일. ☞

[註 15]『대한매일신보』1907년 11월 14일 「義兵情形」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자료집-별집 1』 117~118쪽. ☞

[註 16] 김상기, 「한말 당진 지역 의병의 항일투쟁」,『한국근현대사연구』41, 한국근현대사학회, 2007, 13쪽. ☞

[註 17] 최취수, 「1910년 전후 강화지역 의병운동의 성격」,『한국민족운동사연구』2, 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 1988, 63쪽. ☞

[註 18] 최취수, 「1910년 전후 강화지역 의병운동의 성격」,『한국민족운동사연구』2, 65~66쪽. 

이후 강화도 의병에 관한 내용은 최취수의 논문을 주로 참고하였다. ☞

[註 19]『대한매일신보』1910년 2월 24일 「거룩한 의병대장」. ☞

[註 20]『매일신보』1911년 12월 28일 「延基羽 射殺」. ☞

[註 21] 김순덕,『경기지방 의병운동 연구(1904~1911)』 139쪽. ☞

[註 22]『대한매일신보』1909년 8월 15일 「義將取調」 ;『대한민보』1909년 8월 17일 「口供如流」. ☞

[註 23] 신용하, 「허위의 의병활동」,『나라사랑』27, 외솔회, 1977 ; 이구용, 「한말 의병사상 허위의 항쟁」,『나라사랑』27. ☞

[註 24] 신용하, 「허위의 의병활동」,『나라사랑』27, 57~60쪽. ☞

[註 25] 김의환,『항일의병장열전』 142~143쪽. ☞

[註 26] 윤병석,『한말 의병장 열전』 223쪽. ☞

[註 27] 김순덕, 「후기의병운동」,『경기도항일독립운동사』 114쪽. ☞

[註 28]『토벌지』;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자료집』3, 727쪽. ☞

[註 29] 신용하, 「허위의 의병활동」,『나라사랑』27, 66쪽. ☞

[註 30]『대한매일신보』1908년 7월 10일 「飛去何處」. ☞

[註 31]『대한매일신보』1908년 4월 30일 「義將發通」. ☞

[註 32] 김순덕, 「후기의병운동」,『경기도항일독립운동사』 115쪽. ☞

[註 33]『편책』, 「경비 제189호」 ; 국사편찬위원회,『한국독립운동사』자료 11, 8~9쪽. ☞

[註 34]『대한매일신보』1908년 7월 30일 「飛去何處」. ☞

[註 35]『대한매일신보』1908년 7월 9일 「人固未易知」·「呂朴狼狽」 ;『황성신문』1908년 6월 19일자. 

한편 허위의 체포날짜는 허위의 판결문에서는 5월 14일,『明石元二郞』상, 原書房, 1970, 427~428쪽)에는 5월 24일로 서술된 경우도 있으나, 여러 자료를 종합해보면 6월 11일에 체포된 것이 정확한 것 같다. ☞

[註 36]『명석원이랑』 430쪽. ☞

[註 37]『대한매일신보』1908년 7월 9일 「許氏供辭」. ☞

[註 38]『대한매일신보』1908년 10월 22일 「義將歸天」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자료집-별집 1』 450~451쪽. ☞

[註 39]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旺山許蔿先生擧義事實大略」,『자료집』2, 245쪽. ☞

[註 40]『토벌지』;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자료집』3, 685쪽. ☞

[註 41] 신용하, 「민긍호의병부대의 항일무장투쟁」,『한국독립운동사연구』4,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0. ☞

[註 42]『편책』, 「조난시말서」 ; 국사편찬위원회,『한국독립운동사』자료 8, 35쪽. ☞

[註 43] 신용하, 「민긍호의병부대의 항일무장투쟁」,『한국독립운동사연구』4, 63쪽. ☞

[註 44]『구한국 관보』제3877호, 융희 원년 9월 21일자 ; 윤병석,『한말 의병장 열전』 146~147쪽에서 재인용. ☞

[註 45] 김의환,『항일의병장열전』 151쪽. ☞

[註 46] 신용하, 「민긍호의병부대의 항일무장투쟁」,『한국독립운동사연구』4, 64쪽. ☞

[註 47] 송상도,『기려수필』 121~122쪽. ☞

[註 48] 신용하, 「민긍호의병부대의 항일무장투쟁」,『한국독립운동사연구』4, 64쪽. ☞

[註 49]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자료집』3, 597·685~686쪽. ☞

[註 50]『토벌지』;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자료집』3, 687~688쪽. ☞

[註 51]『토벌지』;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자료집』3, 687쪽. ☞

[註 52]『편책』, 「경비 제58호」 ; 국사편찬위원회,『한국독립운동사』자료 8, 122쪽. ☞

[註 53]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의병항쟁사』 203~205쪽. ☞

[註 54] 신용하, 「민긍호의병부대의 항일무장투쟁」,『한국독립운동사연구』4, 66쪽. ☞

[註 55]『토벌지』;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자료집』3, 690쪽. ☞

[註 56]『토벌지』;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자료집』3, 688쪽. ☞

[註 57] 민긍호 의병에 대한 일제의 대응에 대해서는 신주백, 「정미의병 당시 일본군의 원주의병에 대한 탄압작전」,『의암학연구』3, 의암학회, 2006을 참고할 것. ☞

[註 58]『토벌지』;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자료집』3, 691쪽. ☞

[註 59] F. A. Mckenzie(이광린 역),『한국의 독립운동』 일조각, 1969, 112쪽. ☞

[註 60] 신용하, 「민긍호의병부대의 항일무장투쟁」,『한국독립운동사연구』4, 72~73쪽. ☞

[註 61] 국사편찬위원회,『한국독립운동사』자료 8, 115쪽. ☞

[註 62]『대한매일신보』1907년 8월 22일 「洪씨逃走」. ☞

[註 63] 신용하, 「민긍호의병부대의 항일무장투쟁」,『한국독립운동사연구』4, 78~85쪽. ☞

[註 64]『토벌지』;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자료집』3, 696쪽. ☞

[註 65]『편책』, 「보고서」 ; 국사편찬위원회,『한국독립운동사』자료 8, 103쪽. ☞

[註 66] 신용하, 「민긍호의병부대의 항일무장투쟁」,『한국독립운동사연구』4, 91~95쪽. ☞

[註 67]『토벌지』;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자료집』3, 733쪽. ☞

[註 68] 송상도,『기려수필』 122쪽. ☞

[註 69]『편책』, 「폭도토벌경황 제42호」 ; 국사편찬위원회,『한국독립운동사』자료 10, 42~43쪽. ☞

[註 70] 황현,『매천야록』 448쪽 ; 송상도,『기려수필』 122쪽. ☞

[註 71] 김도훈, 「한말 이은찬의 연합의병운동과 창의원수부의 활동」,『북악사론』5, 국민대, 1998, 164쪽. ☞

[註 72]『편책』, 「楊秘發 제89호」 ; 국사편찬위원회,『한국독립운동사』자료 12, 566~567쪽. ☞

[註 73] 김도훈, 「한말 강기동의 의병활동과 그 성격」,『군사』35, 전사편찬위원회, 1997. ☞

[註 74] 김도훈, 「한말 이은찬의 연합의병운동과 창의원수부의 활동」,『북악사론』5, 173쪽. ☞

[註 75]『편책』, 「양비발 제38-8호」·「고비수 제632-1호」 ; 국사편찬위원회,『한국독립운동사』자료 13, 268·271쪽. ☞

[註 76]『편책』, 「발 제3호」·「경경비수 제323-1호」 ;『한국독립운동사』자료 13, 291~294쪽. ☞

[註 77] 김도훈, 「한말 이은찬의 연합의병운동과 창의원수부의 활동」,『북악사론』5, 178~179쪽. ☞

[註 78] 국사편찬위원회,『한국독립운동사』자료 14, 263~264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