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13도창의대진소의 결성과 서울진공작전 / 한말 후기의병

몽유도원 2014. 4. 12. 18:23

제3장 13도창의대진소의 결성과 서울진공작전


13도창의대진소의 결성

13도창의대진소의 활동과 서울진공작전


1. 13도창의대진소의 결성

군대해산은 의병항쟁의 불길을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의외의 결과를 가져왔다. 전국 각지에서 고립적이고 외로운 항일투쟁을 전개해왔던 의병들은 해산군인들의 항쟁을 통해 점차 자신감을 회복하였다. 나아가 이들은 해산군인들의 투쟁역량을 바탕으로 투쟁방안을 전혀 새롭게 전환시켜 갔다. 무엇보다 먼저 이들은 각기 고립적으로 투쟁해왔던 방법에 대한 반성이 이루어졌다. 비록 주변 지역에서 활동하는 의진들과 연합투쟁을 전개하거나 연합을 시도한 경우도 없지 않았으나 註1) 이때부터는 도의 경계를 넘어서서 의진 간의 연합이나, 연계하는 투쟁전략을 적극적으로 시도하고 있다. 아래의 자료가 그에 해당한다.



평안도 의병은 황해도 의장 박기섭과 연락하고, 황해도 의병은 장단 의병장 김수민과 연락하고, 김수민은 철원 의병장 전 참위 김규식과 연통하고, 김규식은 적성 마전 의병장 허위와 상통하고, 허위는 지평 가평 등지 의병장 이인영과 통섭하고, 이인영은 제천 등지의 이강년과 원주 등지 의장 민긍호로 상통하며 같이 모의한다 하고(저자주: 현대문으로 수정) 註2)



평안도와 황해도 그리고 경기도와 강원도 충청북도 등지에서 활동하던 박기섭·김수민·김규식·허위·이인영·이강년·민긍호 등이 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연합항쟁을 모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중부이북 지역에서 활동하던 의병부대끼리 도간道間 경계를 넘어서는 연락체계가 구축되고 있다. 이러한 연락망의 구축이 전국적으로 통일된 대규모의 의진, 즉 13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 註3)를 결성하려는 시도로 이어진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요컨대 전국 각지에서 독자적으로 활동하던 대표적인 의병부대를 하나의 통일된 체계를 갖춘 이른바 13도창의대진소의 결성으로 빛을 보게 된 것이다.

하지만 연합의진으로서의 13도창의대진소가 순조롭게 결성된 것 같지는 않다. 이러한 구상은 강원도 원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이은찬李殷瓚과 이구채李求采 혹은 이구재李九載 註4)에 의해 처음 시도되었다. 이들 두 사람은 의병을 일으켜 활동하다가 1907년 음력 7월 25일 경북 문경에서 은거중이던 이인영을 찾아갔다.

이인영李麟榮은 경기도 여주출신의 양반 유생으로 학문적 식견과 조예가 깊은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註5) 더욱이 그는 전기의병 당시 여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원주를 무대로 활동하던 중에 유인석이 이끄는 제천의병에 합류하였다. 그는 청일전쟁에 참여했다가 미처 귀국하지 못한 청나라 병사를 제천의병에 끌어들이는 등 의병소모활동 등을 전개하였으나 정부의 해산권유에 따라 귀가하였다. 註6) 그 후에도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노력하다가 가산을 탕진한 후 부모와 처자를 데리고 문경 산중에 은거하고 있던 중이었다. 이러한 사정을 알고 있던 이은찬과 이구채가 그를 의병장에 추대하기 위해 문경으로 찾아왔다. 이구채는 이미 전기의병 당시 이인영의 종사로 활동한 바 있으며, 1907년 8월 이구채 의병부대가 여주경무분견소를 기습하여 일본인 경찰을 처단하는 등 경기·강원 지역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註7) 또한 원주출신의 이은찬은 이미 전기의병 당시 원주에서 의병활동을 한 바 있던 이인영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며, 전기의병 당시 이인영 의병부대의 종사였던 이구채는 이인영의 능력을 훨씬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러한 까닭에 이은찬과 이구채는 이인영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기 위해 문경을 방문했던 것이다.

이에 이인영은 처음에는 부친의 간병을 이유로 거절하였으나 그들의 간절한 요청과 거병의 당위성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의병장 추대를 수락하였다. 註8) 당시 강원도와 경기도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의병장 이은찬과 이구채 등은 약 500명을 통솔하고 있었다. 또한 이들은 고종의 밀칙密勅이 있음을 내세우며 거병의 정당성을 호소하였던 것 같다. 註9) 이인영은 이들의 주장을 신뢰한 것으로 보이며, 그가 표현한 바와 같이‘뜻있는 선비’로서 일본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의병항쟁만이 유일한 방안으로 인식했던 것 같다.

그리하여 이인영은 문경에서 원주로 이동하여 의병원수부義兵元帥府를 설치하고 이인영은 원수元帥, 이은찬은 중군中軍을 맡았다. 註10) 강원도 원주는 이미 전기의병 당시 이인영 의병부대가 활동했던 지역인데다 이은찬의 출신지이자 활동근거지였다. 또한 원주진위대 특무정교 민긍호閔肯鎬가 진위대의 해산을 거부하고 의병으로 전환하여 활동 중이었으므로 이들 역시 원주에서 활동하기가 한결 쉬웠을 것이다. 그러한 점을 고려하여 이인영은 처음에 의병의 거점을 원주에 설치하고서 관동창의대장을 표방하였다. 註11)

당시 이인영은 사방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모집하는 한편, 전국 각지에도 의병봉기를 촉구하는 글을 보내었다. 이인영의 호소에 응하여 전국 각지에서 의병들이 몰려들었다. 그러한 배경에는 아마도 이인영이 전기의병 당시 유인석·이강년 등과 활동했던 전력前歷과 경기도 일대에서 널리 알려진 유학자였기 때문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덧붙여 그가 밀칙密勅을 받았다고 소문이 난 것도 한 몫을 하였으리라 믿어진다. 註12)

그리하여 이인영은 관동창의군關東倡義軍의 규모를 크게 확대할 수 있었다. 1907년 11월 하순 일본측에 의해 파악된 관동창의군의 편제는 다음과 같다.



(관동창의군의 편제)

관동창의대장 이인영

총독장 이구채

중군장 이은찬

좌군장 방인관

우군장 권중희

유격장 김해진

좌선봉장 정봉준

우선봉장 김병화

후군장 채상준

운량관 현이보

재무관 신창광·민춘원

좌총독장 김현복

우총독장 이귀성

진위대사령부 민긍호 註13)



위에서 볼 수 있듯이 관동창의군은 상당히 정제된 편제를 갖춘 것으로 파악된다. 그런데 관동창의군의 핵심 인물은 이인영을 비롯한 이구채와 이은찬이었던 것 같다. 이들이 의병대장과 총독장, 그리고 중군장을 맡았던 점에서 그러하다. 출신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전국 각지에서 달려와 합류한 인물도 있지만 강원도 출신들이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가운데 원주진위대 출신의 민긍호를 제외하면 비교적 거의 알려진 인물들이 많지 않다. 예컨대 평안도 운산의 광부鑛夫 출신의 방인관方仁寬은 주로 충주와 원주 등의 중부지방을 중심으로 1910년경까지 활동하였으며 註14), 정봉준鄭鳳俊은 충청도와 황해도 등지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고 관동창의군의 좌군장과 13도창의대진소의 관서창의대장을 맡았으나 그 출신지조차 알 수 없다. 註15) 그 밖에 다른 인물들은 일제측에 의해서도 거의 파악되지 않은 인물들이다.

관동창의대장에 추대된 이인영은 광무 11년190711월 15일자 연명의 경고장을 원주진위대에 전달하였다. 이 경고장에는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군대를 해산한 후 3천리 강토를 빼앗으려는 왜적을 강력히 성토하는 내용이 들어있다. 아울러 한국인 군경들에게 의병에 적극 참여하여 왜적을 함께 쫓아냄으로써 국권을 회복하고 고종을 복위시켜 동포와 더불어 태평성대를 이루자고 호소하였다.

이들의 창의 목적과 연합의진의 결성과정은 아래의 판결문에 잘 요약되어 있다.



피고는 … 항상 통감정치에 불만을 품고 있던 자이다. 융희 원년 7월 군대가 해산되고 전 황제폐하가 양위하자 요로의 대신을 매국노라 지목하여 이들을 살륙하고 새로이 자기가 신임하는 자로 정부를 조직하여 일본인은 물론 기타 외국인을 국외로 구축하는 등 당시의 정사를 변경할 목적으로 의병을 일으키기로 다짐하였다. 그리하여 이구채 이은찬 등과 공모하여 당시의 거주지인 문경에서 이들이 인솔해온 동지 및 원주에서 해산된 군인 500명으로 조직된 3진의 대장이 되어서 전기한 취지로 격문을 전국에 배포하는 한편, 의병의 명분을 정당화하기 위해 통감 및 각국 영사들에 대하여 “대일본제국이 마관조약馬關條約에 반反하는 행위가 있음”을 호소하였다. 진군하여 지평에 이르자 그의 도당이 8천명에 이르렀다. 이어 양주로 가서 동지인 허위 이강년의 무리와 합하니 그 규모가 1만 명에 달하였다. 이에 허위를 군사로 삼고 이강년 이태영 이은찬 김준수 연기우 등을 각 부장으로 삼아 스스로 총지휘자가 되었다. 도당 각자에게 무기와 군량을 출연시키고 해산군인들을 의병에 가담시켜 탄약을 만들게 해서 일거에 경성으로 들어가 그 목적을 달성하고자 수비대, 기타와 충돌하였다. 거사 이래로 약 4개월 동안 강원도 경기도의 각지에서 대소 약 38회의 전투를 거듭하였다. 註16)



이인영 등은 일제의 침략을 물리치고 친일대신을 타도하여 새로운 내각을 수립하고자 거의하였다. 아울러 거의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각국의 영사들에게 일본의 국제법 위반을 호소하였으며 전국 각지에도 격문을 보내어 연합의진의 결성에 박차를 가하였다. 마침내 이들은 전국적인 연합의진을 결성하여 일거에 서울로 진격하는 등 일본군과 약 4개월 동안 치열한 전투를 전개했다는 것이다.

이무렵 이인영은 자신의 명의로 된 「해외 동포에게 보내는 격문」(Manifesto to All Coreans in All Parts of the World)을 국외에 거주하는 동포들에게도 보내어 의병전쟁의 정당성을 천명하였다. 그의 일제에 대한 적개심과 일제 구축의 당위성을 천명한 글의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동포들이여! 우리는 함께 뭉쳐 우리의 조국을 위해 헌신하여 우리의 독립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야만적인 일본인의 잔혹한 만행과 불법행위를 전 세계에 호소해야 한다.

교활하고 잔인한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인류의 적이요, 진보의 적이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모든 일본인들과 그들의 첩자, 그들의 동맹국과 야만적인 군대를 모조리 죽이는데 힘을 다해야 한다.

광무 11년 9월 25일

대한관동창의대장 이 인 영 註17)



이인영의 관동창의군은 전국 각지, 더 나아가 해외 동포들의 지지와 후원을 얻기 위해 적극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전국적인 규모의 연합의진을 좀더 쉽게 결성하기 위해 이들은 원주에서 경기도 지평砥平으로 이동하였다. 이들은 지평에서 약 두달간 주둔하며 일본군과 수차례의 전투를 벌이는 한편 서울을 공격하기 위한 군사력 보강에 힘을 쏟았다. 그리하여 전국 각지에서 16개 의진이 합세함으로써 약 8천명의 연합의진을 형성하며 세를 과시하였다. 이들은 통감부로부터 회신을 기대하였으나 전혀 반응이 없자 그해 11월 홍천과 춘천을 거쳐 양주로 이진하였다. 이때 의병장 허위許蔿, 1854~1908를 비롯한 각지의 의병부대들이 양주로 집결함으로써 48개 의진 약 1만명의 규모로 증가하였다. 註18)

당시 이인영은“용병用兵의 요결은 고독을 피하고 일치단결하는데 있은 즉, 각 도 의병을 통일하여 둑을 무너뜨리는 기세潰堤之勢를 이루어 근기近畿 지방으로 쳐들어가면 천하는 우리의 것이 될 수는 없을지라도 한국 문제의 해결에 있어서 유리할 것이다. 註19)”라는 내용의 통문을 전국에 보내어 의병부대의 연합을 강력히 촉구하였다. 그 결과 약 1만명의 의병들이 양주에 집결한 것이다. 註20)

당시 각도의 의병장들은 연합의진의 결성에 진력한 이인영을 13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대장으로 추대하였다. 13도창의대장에 추대된 이인영은 양주에 집결한 의병장들과 상의하여 진명陣名을 정하고 각도 의병의 칭호를 부여하는 등 전국적인 연합의병부대를 편성하였다. 당시 확정된 부서는 다음과 같다.



13도 창의 총대장 이인영

전라유진소 전라창의대장 문태수 註21)

호서유진소 호서창의대장충청도 이강년

교남유진소 교남창의대장경상도 신돌석

진동유진소 진동창의대장경기도 황해도 허 위, 아장亞將 박정빈 註22)

관동유진소 관동창의대장강원도 민긍호

관서유진소 관서창의대장평안도 방인관

관북유진소 관북창의대장함경도 정봉준 註23)



전국의 의병조직을 포괄한 형태로 연합의진이 탄생한 것이다. 하지만 얼마후 13도창의대진소의 연합의병 편제를 개편할 필요성이 제기되어 1908년 1월경 이인영 등 지도부는 다음과 같이 부서를 재정비하였다.



13도창의대진소 총대장 이인영

군사장 허위

관동창의대장 민긍호

호서창의대장 이강년

교남창의대장 박정빈

진동창의대장 권중희

관서창의대장 방인관

관북창의대장 정봉준 註24)



이와 같은 개편은 영남과 호남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던 신돌석과 문태서 의병부대가 양주에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취해진 부득이한 조치였다. 註25) 이 가운데 권중희·방인관·정봉준은 관동창의군 시절부터 이인영과 연계된 인물들이다. 즉 진동창의대장 권중희는 관동창의군의 우군장, 관서창의대장 방인관은 좌군장, 관북창의대장 정봉준은 좌선봉장이었다. 관동창의군의 핵심인물이었던 총독장 이구채와 중군장 이은찬은 아마도 이인영의 핵심 막료로 활동하지 않았을까 한다. 또는 이들은 8천명의 규모를 자랑하던 관동창의대장 민긍호의 배하에 소속되어 활동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군사장 허위는 이미 경기도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까닭에 경기도 의병을 대표하면서 13창의대진소의 모든 군사활동을 통괄 지휘하였을 것이다. 그의 의진에서 아장亞將을 맡았던 박정빈을 교남창의대장에 임명한 것은 허위가 신임하는 박정빈에게 자신의 출신지인 경상도지역을 배려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보면 13도창의대진소는 강원도를 기반으로 하는 이인영 계열의 민긍호·이은찬·이구채·방인관·정봉준 등의 관동 의진과 경기도와 황해도를 무대로 활동한 허위계열의 박정빈·김준수·연기우 등의 의병부대, 그리고 충청도에서 주로 활동하던 이강년 의병부대 등이 핵심적인 전력을 구성하였다. 따라서 13도창의대진소는 강원도와 경기도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중부지방의 연합의병부대라 할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전국적인 연합의병부대로서‘13도창의대진소’라는 점을 표방한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고 생각한다. 13도창의대진소의 규모는 약 1만 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양총을 가진 해산군인들이나 기타 포군 등이 약 3천 명이었다. 註26)

[註 1] 『대한매일신보』 1907년 12월 4일 잡보 ; 홍영기, 『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202~203쪽. ☞

[註 2] 『대한매일신보』(국문판) 1907년 11월 28일 「지방소식」. ☞

[註 3] 신용하,「전국 ‘십삼도창의대진소’의 연합의병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7 ; 오영섭,「한말 13도창의대장 이인영의 생애와 활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9, 2002. ☞

[註 4] 이구채는 흔히 李九載로도 불렸으나 여기서는 이구채로 통일하겠다. 이구채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오영섭, 『고종황제와 한말의병』, 선인, 2007, 311쪽. ☞

[註 5] 오영섭, 『고종황제와 한말의병』, 299쪽. ☞

[註 6] 오영섭, 『고종황제와 한말의병』, 304~305쪽. ☞

[註 7]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하사안공을미창의사실」, 『자료집』 1, 397쪽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자료집』 3, 515·666쪽. ☞

[註 8] 국사편찬위원회, 「제1회 이인영문답조서」, 『한국독립운동사』 1, 721~722쪽. ☞

[註 9] 송상도, 『기려수필』, 국사편찬위원회, 1985, 127~128쪽. ☞

[註 10] 송상도, 『기려수필』, 128쪽. ☞

[註 11] 『대한매일신보』 1909년 7월 28일 「義兵總大將 李麟榮氏의 略史」. ☞

[註 12] 오영섭, 『고종황제와 한말의병』, 308쪽. ☞

[註 13] 『편책』, 「原秘發 제50호」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8, 157쪽. ☞

[註 14] 국사편찬위원회, 『통감부문서』 6, 1999, 75쪽. ☞

[註 15] 국가보훈처 홈페이지 나라사랑 독립유공자 참조. ☞

[註 16]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자료집-별집 1』, 372쪽. ☞

[註 17] 『일본외교문서』 41-1, 819쪽. ☞

[註 18] 국사편찬위원회, 「13도 창의대장이인영체포시말」, 『한국독립운동사』 1, 719쪽. ☞

[註 19] 『대한매일신보』 1909년 7월 29일 「義兵總大將 李麟榮氏의 略史(續)」. ☞

[註 20] 당시 양주에는 24개 혹은 48개 의진이 집결한 것으로 전해지나(『대한매일신보』 1907년 11월 14일 「義兵情形」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1, 719쪽) 몇 개의 의병부대가 집결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

[註 21] 대체로 文泰洙로 알려져 있으나, 그의 본명은 文泰瑞이다(김성진, 『항일의병장 문태서연구』, 함양문화원, 1997, 43~47쪽). ☞

[註 22] 박정빈의 본명은 朴箕燮인데, 목천군수를 역임한 관계로 ‘박목천’으로 불리기도 했다. ☞

[註 23] 국사편찬위원회, 「제3회 이인영문답조서」, 『한국독립운동사』 1, 737~738쪽. ☞

[註 24] 『대한매일신보』 1909년 7월 30일 「義兵總大將 李麟榮氏의 略史 續」. ☞

[註 25] 신용하, 「전국 ‘13도창의대진소’의 연합의병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 15~16쪽 ; 오영섭, 『고종황제와 한말의병』, 320쪽. ☞

[註 26] 국사편찬위원회, 「제3회 이인영문답조서」, 『한국독립운동사』 1, 738~740쪽. ☞


2. 13도창의대진소의 활동과 서울진공작전

13도 연합 의진은 서울 공략을 목표로 진격을 개시하였다. 이들은 11월부터 서울로 진격하여 동대문 밖 30리에서 일군과 싸워 퇴군하던 1908년 2월 초순까지 서울 근교를 무대로 두드러진 활약을 벌였다.

당시 이들의 활동에 대하여 송상도의 『기려수필騎驢隨筆』에는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의진끼리 서로 연락하여 성원을 받았으며, 각 도에 격문을 전하니 북을 치고 일어나는 원근의 응모자가 주야부절로 모여들어 모두 1만여 명이나 되었다. 그리하여 서울로 진군하여 통감부를 격파해서 협약을 취소시키고 국권을 회복코자 하였다. … 군사軍師는 그 군대를 정돈하고 진격할 준비를 갖추었다. 이에 이인영은 각도 의병으로 하여금 일제히 진군하도록 촉구하고, 몸소 3백 명을 이끌고 먼저 동대문 밖 30리에 이르렀다. 하지만 각 군이 이르지 않았는데 일본군이 먼저 쳐들어 와 서로 분전하였으나 적과 대적할 수 없어 퇴군하였다. 註27)



13도창의대진소의 본래 계획은 동대문 밖에서 전군이 집합하여 대오를 정비한 후 서울로 진격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통감부를 격파한 후 을사조약을 철회시킨 다음 국권을 회복할 의도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서울진공작전을 감행하기 이전부터 반일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전투가 1907년 11월의 경기도 삼산三山 전투와 마전麻田 전투이다. 註28) 이들이 원주에서 지평으로 이동하여 여러 의병부대가 합류함으로써 약 5천명의 규모로 증가하였다. 이들은 서울을 공격하기 위해 군수품과 군자금을 조달하고 있었는데, 이를 눈치챈 일제는 원주와 서울에 주둔중인 일본군을 동원하여 이들과 이틀 동안이나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다.

허위 의병부대에서 활동하다가 1907년 11월 지평의 연합의병부대에 합류하여 활동한 김훈金壎 註29)은 당시의 전투상황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허위 및 이인영과 행동을 같이하던 사이에 일본군과 충돌전투한 일이 수십 회인 바 그중 지평군 삼산에서 전투하였을 때는 의병의 수 약 5천명, 일본군 약 5~6백명으로 다수의 사상자를 낸 대충돌이었다. 註30)



이와 같이 삼산전투는 치열한 혈전을 벌였으나 연합의병측은 200~300명의 사상자가 나올 정도로 큰 피해를 당했다. 한편 마전전투 역시 같은 시기에 발생했는데, 마전읍을 포위한 의병 1천여 명과 일본 군경 사이에 격전을 벌였다. 註31)

비록 이들은 일본 군경과 전투과정에서 상당한 피해를 입었지만, 대소 규모의 전투를 통해 전술을 발전시키고 화력을 보완해갔다. 특히 관동창의군은 그러한 상황을 활용하여 적극적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註32) 당시 이인영은 양주로 집결할 때 원주-제천-양근-지평 등지를 거쳐 이동하면서 병력의 보강 및 전투력 향상 그리고 군수품 확보에 상당한 성과를 거둔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서울진공작전을 개시했는데, 당시 상황은 다음과 같다.



선생께서 친히 감사병敢死兵 100명을 거느리고 선두에 서서 동대문밖 30리 되는 지점에 전군이 와서 모이기를 기다려 일제히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후군後軍은 시기를 어기고 일병이 졸지에 몰려와 장시간 사격을 몹시 심하게 하니, 이때 후원군이 오지 않아서 할 수 없이 퇴진되었고, 김규식 연기우가 모두 탄환을 맞고 붙들렸다. 註33)



군사장 허위가 서울진공작전을 주도하는 과정에서 여러 연합의진간에 협조체제가 다소 미흡하여 실패하게 된 과정과 일제와의 교전 중에 김규식과 연기우가 부상을 입고 체포되었다는 것이다. 이때의 상황을 황현黃玹은 “허위와 이인영의 부하는 조수연·김규식·홍인관·이병채·장순원·오수영·김연상·황재호·이명기·연기우·고재석·박종한·윤인선·황순일·김운이·이동섭 등 모두 16인인데, 역사力士로 이름을 떨쳤다. … 의병장 허위가 붙잡혔으며, 부하 김규식도 체포되었는데 뛰어난 용맹이 있어서 압송되는 길에 포승을 끊고 몸을 솟구쳐 달아났다.” 註34)고 전하고 있다.


13도창의대진소의 서울진공작전

 

비록 위의 인용문이나 『매천야록』의 내용이 사실과는 다른 부분도 없지 않지만 당시의 분위기를 전해준다. 다시 말해 13도창의대진소 지도부는 전국에서 집결한 의병부대들과 연락이나 연합활동이 원활했던 것 같지 않다. 여러 의병부대의 연합작전이 총대장 이인영과 군사장 허위 등의 의도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먼저 공격의 최전선에 투입된 부대는 동대문밖 30리 지점까지 진격했으나, 후발 의병부대가 약속한 기일 안에 도착하지 않아 선발대가 일본군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아 결국 퇴각하게 된 것이다.

그러한 상황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군사장은 이미 군비를 신속히 정돈하여 철통같이 준비하여 한 방울의 물도 샐 틈이 없었다. 이에 모든 의진에 전령하여 일제히 진군을 재촉해서 동대문 외곽으로 나아가니 대군大軍은 장사長蛇의 세勢로 천천히 진격하게 하고 씨가 3백 명을 이끌고 선두에 서서 동대문 밖 30리 지점에 진을 치고서 전군의 집결을 기다려 일거에 경성을 공격해 쳐들어가기로 계획하였다. 하지만 전군의 래집來集은 시기를 어기고 일본군이 졸지에 공격하는지라 여러 시간을 격렬히 사격하다가 후원後援이 이르지 않아 퇴진退陣하고 말았다. 註35)(윤문-저자)



13도창의군의 본진은 천천히 서울을 향해 진격하고, 군사장 허위는 선발대 300명을 이끌고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격하였으나 후발 의병부대가 도착하기 전에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치열한 격전 끝에 퇴각하였다는 것이다.

더욱이 이 과정에서 총대장 이인영의 부친상父親喪을 당함으로써 서울진공작전을 더 이상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이인영은 1907년 음력 12월 25일1908.1.28 부친의 부음을 전해 들었는데, 註36) 전통적인 유학자인 그로서는 부친상을 치르기 위해 귀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에 그는 뒷일을 군사장 허위에 위임하는 한편 의병을 중지하라는 통문을 발송하였다. 이로써 서울진공작전은 중지되었으며,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각각의 의병부대는 본래의 활동근거지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당시 13도창의대진소의 지도부는 서울진공작전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표방하였다.



그 목적은 서울로 들어가 통감부를 타격하고 성하城下의 맹盟을 이루며 종래의 소위 신협약 등을 파기하여 대대적 활동을 기도함이라. 우선 신임하는 인물을 서울에 잠입시켜 각국 영사관을 순방하고 통문 한통씩을 전달하니 그 개략적 의도는 일본의 불의不義를 성토하고 한국의 불행한 상황을 상세히 진술하고 또 의병은 순수한 애국적인 혈단血團이니 열강도 이를 국제공법상의 전쟁단체로 인정해줄 것과 또 정의와 인도를 주장하는 국가의 동성응원同聲應援을 호소하였다. 註37)



이들은 서울로 진격하여 통감부를 점령한 후 외교적 담판을 벌이되 한국에 주재 중인 구미열강의 외교적 지원을 기대하였다. 또한 이들은‘오적칠간五賊七奸을 처단하고 의병 중에서 인물을 골라 정부를 조직’할 의도였다. 요컨대 서울진공작전은 일제 통감부의 타격, 일제와 맺은 조약의 파기, 친일정부의 축출, 의병주도의 신정부 조직 등을 목표로 추진된 것이다. 註38) 이들은 열강의 지원을 받아 국제법상 유리한 입장에서 국권회복 문제를 일제 통감부와 담판을 하려는 것이 주 목적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일제 군경의 방어선을 뚫지 못하고 말았다.

1908년 1월 13도창의대진소가 해산된 이후 경기 북부지역 의병의 투쟁도 다소 약화되었다. 그렇지만 얼마 안되어 경기지역 의진들은 전열을 가다듬었다. 1908년 중반이후에는 경기 서북부지역과 임진강 유역의 의병항쟁은 크게 확산되었다. 반면 경기 동남부 지역의 의병투쟁은 좀처럼 예전과 같은 열기를 회복하지 못했다. 註39) 이후 경기지역에서 활동한 의병부대의 활약상은 장을 달리하여 서술할 것이다.

서울진공작전이 좌절된 후 군사장 허위는 경기도 임진강 유역에 근거지를 마련하였다. 註40) 그는 조인환·권준·왕회종·김진묵·박종한·김수민·이은찬 등의 의병장들과 긴밀히 연락하며 의병부대를 재정비하였다. 그는 민폐를 근절시키는 한편, 세금을 납부하지 말 것과 미곡의 역외 반출을 금지시켰다. 가능한 주민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군수물자의 공급과 비축에 적극 노력하였다. 또한 그는 의병의 모집과 군사훈련, 무기와 화약의 구입, 서울의 정세 파악 등 제2차 서울진공작전을 준비하였다. 1908년 4월 허위는 이강년·이인영·유인석·박정빈 등 의병장들의 연명으로 전국 13도 의병의 재거를 요청하는 통문을 발송하였다. 註41) 이무렵 일제 역시 연합의진의 서울공격설을 인지하고 있었다. 허위는 경기도 지역에서 활동하는 의병부대와 긴밀하게 연계하여 먼저 한강을 이용한 물자수송을 차단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증강된 일본 군경의 압도적인 화력을 당할 수 없었다. 결국 제2차 서울진공작전은 계획에 머무르고 말았다.

한편 허위는 고종의 복위와 외교권의 반환, 통감부의 철폐 등을 명시한 32개 요구서를 통감부에 제출하였다. 註42) 그 외에도 의관제도 복구, 일본인관리 임명 금지, 통신 및 출판의 자유, 일본인 상업행위 제한, 이권침탈금지 등이 들어있었다. 註43) 이러한 내용은 연합의진이 통감부와 담판을 벌일 때 제시할 요구사항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통감부와 담판을 벌일 수 없는 상황임을 인식한 허위는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통감부에 전달하는 한편, 그러한 사실을 국내외에 널리 알림으로써 연합의진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천명한 것이라 하겠다.

이상과 같이 13도창의대진소의 서울진공작전은 실패하고 말았다. 부친상을 당해 급거 귀향하여 집상執喪 중이던 총대장 이인영은 일본군의 추적을 피해 은신해 있다가 1909년 6월 7일 체포되어 그해 9월 20일

처형되었다. 군사장 허위 역시 재차 서울진공작전을 시도하기 위해 적극 노력하였으나, 일제 군경의 압도적인 군사력을 극복하지 못한 채 1908년 6월에 체포되어 그해 10월 21일 처형당했다. 註44) 13도창의대진소의 핵심전력을 형성한 민긍호 역시 1908년 2월 27일 일본군에 체포되자, 그의 부하들이 구출작전을 전개하는 도중에 일본군에게 피살되었다. 註45) 이강년 의병장은 1908년 7월 2일 충북 청풍군 금수산에서 전투 중에 체포되어 그해 음력 9월 19일 교수형을 당하였다. 註46) 이로써 13도창의대진소의 핵심적인 지도부는 1908년부터 1909년 사이에 항일투쟁을 전개하거나 암중모색하다가 모두 순국하였다.

하지만 이들이 시도한 전국적인 연합의진과 서울진공작전은 역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고 하겠다. 먼저 13도창의대진소는 최초로 편성된 전국적인 연합의병부대라는 점이다. 당시 전국 각지의 의병부대는 대체로 독자적인 의병항쟁을 전개하였다. 분산적으로 수행하는 의병항쟁이 일제의 군사력을 분산시킨다는 장점도 없지 않지만 그러한 방법으로는 국권을 수호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러한 의병항쟁의 전략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전국적인 연합을 시도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큰 것이다. 그리하여 유격투쟁을 전개하는 각지의 의병부대들은 상호 긴밀한 연락체계를 구축하거나 연계하여 일제 군경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였다. 연합전선의 구축이나 의진간 연계 전략은 이후 자주 시도됨으로써 후기의병의 활성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다음으로 서울진공작전의 목표는 통감부와 외교적 담판을 하기 위한 군사활동이라는 점에서도 그 의의가 적지 않다. 외교적 담판을 하기 위한 의병봉기는 이미 중기의병 당시 최익현이 시도했던 전략이었다. 註47) 아마도 성리학 사상에 기반을 둔 양반 유생들은 기본적으로 무력항쟁보다는 외교적 담판을 선호했던 것 같다. 이와 함께 13도창의대진소의 지도부는 한국에 주재하는 각국 영사관에 일본의 불법성을 성토하는 통문을 보내어 외교적으로 호소한 점에서 주목된다. 위정척사론자들과는 달리 이들은 외국 세력을 한국의 동반자로서 인식한 것이다. 한국이 일본과 체결한 조약들이 국제법상으로 불법적이라는 점을 호소하였다. 아울러 이들은 일본의 군사적 침략의 야만성과 이에 굴하지 않고 자유와 정의를 지키기 위해 무장투쟁을 전개하는 의병들의 활약상을 전 세계에 알렸다.

허위가 통감부에 제시한 30여 개의 요구조건은 의병들의 근대적 인식의 전환을 보여준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일반적으로 의병항쟁을 전개하는 주도층은 고루한 사고와 보수적인 관념의 소유자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허위가 제시한 요구사항을 보면 이들이 근대적인 사고로 전환해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의 전국적 연합의진 편성과 서울진공작전의 결행은 후기의병의 발전적 측면을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전술적 한계와 연합전선의 미숙함 그리고 일본의 정치적 결단에 기대하는 인식의 한계 등은 극복해야 할 과제라 할 수 있다.

[註 27] 송상도, 『기려수필』, 127쪽. ☞

[註 28] 신용하, 「전국 ‘13도창의대진소’의 연합의병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 17~18쪽. ☞

[註 29] 경남 거창 출신의 양반 유생으로 허위의 친구였던 그는 1907년 9월 허위 의진에 가담했다가 11월에 이인영 의진에 합류하여 참모장으로 활동했으며, 1908년 3월에는 무기를 구입하기 위해 서울에 잠입했다가 체포되었다. ☞

[註 30] 『편책』, 「韓憲警 乙 제404호」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0, 129쪽. ☞

[註 31] 『편책』, 「金秘發 제117호」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8, 109~110쪽. ☞

[註 32] 김순덕, 『경기지방 의병운동 연구(1904~1911)』, 한양대박사학위논문, 2002, 37쪽. ☞

[註 33]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왕산허위선생거의사실대략」, 『자료집』 2, 241~242쪽. ☞

[註 34] 황현,『매천야록』, 452·456쪽. ☞

[註 35] 『대한매일신보』 1909년 7월 30일 「의병총대장 이인영씨의 약사 속」. ☞

[註 36] 국사편찬위원회, 「제1회 이인영문답조서」, 『한국독립운동사』 1, 722쪽. ☞

[註 37] 『대한매일신보』 1909년 7월 30일 「의병총대장 이인영씨의 약사 속」. ☞

[註 38] 신용하, 「전국 ‘13도창의대진소’의 연합의병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 20~21쪽. ☞

[註 39] 김순덕, 『경기지방 의병운동 연구(1904~1911)』, 163쪽. ☞

[註 40] 신용하, 「전국 ‘13도창의대진소’의 연합의병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 29쪽. ☞

[註 41] 『대한매일신보』 1908년 4월 30일 「雜報」. ☞

[註 42] 『대한매일신보』 1908년 5월 23일 「姑錄風說」. ☞

[註 43] 『편책』, 「警秘 제189호」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1, 8~9쪽. ☞

[註 44] 『대한매일신보』 1908년 10월 22일 「義將歸天」 ; 신용하, 「전국 ‘13도창의대진소’의 연합의병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 40~41쪽. ☞

[註 45] 『편책』, 「폭도토벌경황」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0, 42~44쪽. ☞

[註 46] 『편책』, 「이강년피포기록 1-7」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1, 743~749쪽. ☞

[註 47] 홍영기, 『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168·177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