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후기의병의 배경과 한국군의 강제 해산 / 한말 후기의병

몽유도원 2014. 4. 12. 18:15

제2장 후기의병의 배경과 한국군의 강제 해산


헤이그특사사건과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의 체결과 군대해산

서울 시위대의 항쟁

지방 진위대의 의병 봉기


1. 헤이그특사사건과 고종의 강제 퇴위

1907년 6월 일본의 불법성을 폭로하는 사건이 유럽에서 발생하였다.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평화회의에 고종이 특사를 파견하여 조선을 식민화하려는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을 폭로했던 것이다. 시시각각 뻗쳐오는 일제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한 방안을 강구하던 고종은 세계의 여론에 호소하는 이른바 외교론에 주목하였다. 마침 구미열강을 비롯한 44개국 대표 225명이 네덜란드의 헤이그에 모여 국제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회의를 개최할 예정이었다. 제2차 헤이그평화회의는 1907년 6월 25일부터 10월 18일까지 개최되었다. 고종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조선이 직면하고 있는 어려움을 국제사회에 호소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고종은 이에 앞서 을사조약의 체결에도 소극적이었으며, 그 조약을 무효화하기 위해 고문인 헐버트H.B. Hulbert를 미국 정부에 특사로 파견하여 협조를 요청한 바 있었다. 그런데 미국은 일본과 태프트-카스라 밀약을 체결하여 일본의 한국 지배를 인정하고 있었으므로 헐버트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후 고종은 의병항쟁을 은밀히 고무하기 위해 자신이 가장 신임하는 내시內侍를 전국 각지에 파견하여 의병을 일으키라는 밀명密命을 전달한 바 있으며, 애국계몽운동 계열에도 상당한 자금을 지원해 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고종은 의도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다시 한 번 외교론에 일말의 기대를 걸었다. 그는 비밀리에 제2차 헤이그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였다. 註1) 특사로는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李相卨, 전 평리원 판사 이준李儁, 전 재로한국공사관在露韓國公使館 서기관 이위종李瑋鍾 3인이 선정되었다. 이들 가운데 국내에서 활동 중이던 이준은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로 출발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활약하고 있던 이상설과 합류한 후 시베리아 철도를 이용하여 러시아의 수도인 페테르부르그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이들은 이위종을 만나 헤이그로 향하였다. 갖은 고생 끝에 이들이 헤이그에 도착한 것은 1907년 6월 25일이었다.

이들은 평화회의에 참석할 자격을 얻기 위하여 동분서주하였으나 허사였다. 조선은 이미 외교권을 박탈당한 나라인데다 일제의 방해 공작이 매우 치열하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평화회의 의장이며 러시아의 수석위원인 넬리도프를 비롯하여 미국·영국·이태리·프랑스·독일 등 당시 구미열강의 위원들에게도 면회를 요청하였으나 모두 만나주지 않았다. 어느 나라도 식민지로 전락할 위기에 처한 한국의 정치적 현실에 동정을 보이거나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 마지막 희망인 개최국 네덜란드의 외무대신에게도 회의 참석을 주선해달라고 부탁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註2)

결국, 이들은 우리의 억울함을 언론에 호소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각국 기자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기자회견을 갖고서

수 시간 동안 열변을 토하여 일제의 만행과 한국에 대한 불법적인 침략 상황을 폭로하였다. 영어와 불어에 능한 이위종이 당시 조선이 직면한 정치적 상황을 세계 각국의 기자들에게 잘 설명함으로써 각국의 언론들이 큰 관심을 보였다. 그는 또한 국제주의협회의 초청을 받아‘한국을 위한 호소’라는 주제로 연설하여 일제의 침략을 강력히 규탄하였다. 이들이 비록 본회의에는 참석하지 못하였으나, 각국 언론에 우리의 억울한 사정이 연일 보도됨으로써 국제여론의 환기에 크게 기여하였다. 註3) 일제의 침략상황을 세계의 여론에 호소하려는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한편, 이러한 소식은 즉각 일본 정부와 통감부에 전달되었다. 헤이그에 파견된 특사들의 활동이 언론을 통하여 국내외에 크게 보도되자 일제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국제적인 망신을 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가적 위신이 크게 실추되었기 때문이다. 일제는 연일 내각회의를 열어 수습책의 강구에 골몰하였다. 통감 이등박문伊藤博文은 친일내각의 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을 불러 크게 힐책하는 한편, 이번 사건의 책임을 고종이 져야 할 것이라고 협박하였다. 이등박문의 의도를 간파한 이완용은 고종을 퇴위시키기 위한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였다. 헤이그특사사건을 빌미삼아 고종의 강제퇴위를 추진한 것이다.

헤이그특사사건은 『대한매일신보』의 보도로 국내에도 알려졌다. 더욱이 특사들의 활동은 실제보다 훨씬 과장되어 보도되었다. 특히 이준의 죽음에 관해서는 와전된 내용이 많았다. 즉, 이준 등이 본회의에 참석할 수 없자, 방청석에 앉아 있다가 갑자기 연단으로 나아가 “우리는 조선 황제의 밀사로서 회의에 참석하려 하였으나 평화회의는 강자들의 회의체에 불과하다. 일제의 침략을 이렇게 해도 믿지 못하겠느냐”며 칼로 배를 가르고 자결하였다는 것이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거행된 고종의 양위식

 

물론 이준은 할복자결이 아니라‘분사憤死’로 전해진다. 일본대표의 방해로 회의장에 들어갈 수 없자, 그는 분노와 좌절로 인해‘분사’했다는 것이다. 머나먼 타국 땅에서 운명을 달리한 이준에 대해 당시 국민들은‘할복자결’로 미화한 것이 아닌가 한다. 상당수의 네덜란드인들도 이준의 장례식을 적극 도와줌으로써 그의 주검은 헤이그에 묻혔다. 헤이그평화회의 이후에도 이상설과 이위종은 구미 각국을 순회하며 일제의 불법성을 폭로함은 물론 동아시아의 영구평화를 위한 한국의 영세중립을 주장하였다. 註4)

헤이그특사의 활동으로 가장 곤경에 처한 인물은 이등박문 통감이었다. 그는 외무성에 특사의 파견이 과연 고종의 칙명에 의한 것인지를 문의하는 한편, 향후 대한정책의 방향을 제시해달라고 요청하였다. 註5) 이에 따라 일본 수상은 7월 12일 이등 통감에게 한국 내정의 전권을 장악하는 방안을 통보하였다. 첫째 한국 황제로 하여금 황태자에게 양위하게 할 것, 둘째 한국정부의 행정은 통감의 동의를 얻어 실행하게 할 것, 셋째 대신이하 중요 관리를 일본인으로 임명하거나 또는 통감의 동의를 얻어 임명하게 할 것 등이었다. 워낙 중대한 사안이었으므로 일제는 외무대신 임동林董을 한국에 파견하여 통감과 긴밀히 협의하여 처리토록 하였다.

이등박문은 이완용을 불러 “일본은 한국에 선전宣戰할 권리가 있으니, 당신이 책임을 지고 황제의 결단을 얻어내라.”고 협박하였다. 이에 이완용 등은 여러 차례 내각회의를 거듭하며 고종의 퇴위를 기정사실화하였다. 이들은 고종에게 이번 사태의 수습방안으로 을사조약문에 어새를 찍어 추인할 것, 섭정을 둘 것, 황제가 동경에 가서 사죄할 것 등을 제시하였다. 고종이 이를 거부하자, 이들은 연일 내각회의를 열어 대책을 협의하는 한편, 끈질기게 퇴위를 강요하였다. 마침내 고종은 이등 통감의 의견을 들어보겠다며 한 발짝 물러섰다. 하지만 입궐한 이등박문은 퇴위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을 피하였다. 그 문제는 조선의 국내 사정이라는 것이었다. 매국 대신들의 밤샘 강요와 협박에 시달린 고종은 퇴위하기로 결심하고서 1907년 7월 19일 오전 3시에 “슬프도다. 짐이 왕위에 오른 지 어언 44해가 지났노라. … 이에 군국軍國의 대사를 황태자로 하여금 대리케 한다.”는 내용의 조칙을 발표하였다. 고종의 퇴위가 아니라 황태자의 섭정을 인정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완용과 이등박문은 이를 양위讓位로 둔갑시켜 양위식과 즉위식을 잇따라 거행함으로써 대리가 아닌 양위를 공식화해버렸다.

당시 일제는 고종의 퇴위를 관철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살벌한 상황을 연출하였다. 고종의 거처인 경운궁(현 덕수궁)의 대한문 근처에 무장한 일본군을 배치하였다. 또한 환구단圜丘壇 앞에 1개 대대, 왜성대倭城臺에는 포병진지를 구축하여 계엄을 실시하였다. 고종황제의 퇴위를 압박하기 위한 야만적인 수단을 동원한 것이다.

한편 7월 19일 조칙이 발표되자, 수많은 시민과 유생들이 대한문 앞에 모여 통곡하였다. 이 가운데 기독교청년회 회원들은 대한문 광장에서 감동적인 연설로 시민들을 불러 모아 매국노와 일본을 성토하며 퇴위반대투쟁을 전개하였다. 일제의 경찰들이 해산을 지시하였으나, 분함을 참지 못한 시민들은 돌과 기왓장을 던지며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일제 경찰들은 총검을 휘두르며 이들을 종로 방면으로 몰아세웠다.

그런데 종로에도 수 천명의 인파가 집결하여 고종의 퇴위를 반대하는 연설회를 개최하고 있었다. 마침 대한문에서 밀려온 시민들과 합류한 이들은 대규모의 시위대로 변모하여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였다. 더욱이 시위보병 3대대에 소속된 한국군 약 100명이 이들과 합세하여 시위를 진압하는 일제 경찰과 맞서 격렬한 시가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일인 경찰과 우편집배원 수십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당시 고종을 일본에 억류할 것이라는 소문이 자자하여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이들이 시내로 쏟아져 나온 것이다. 서울·개성·평양 그리고 각 항구의 상인들도 항의의 표시로 가게문을 닫았다. 나이어린 학생들도 시위대열에 가담하였다. 또한 시위대 제2연대의 참장參將 이희두李熙斗, 참령參領 이갑李甲, 임재덕林載德 등은 양위식 거행시 매국각료들을 처단할 계획을 세웠으나 사전에 누설되는 바람에 모두 체포되어 유배형을 당하였다. 이들 뿐만 아니라 동우회同友會·국민교육회·기독교청년회 등 애국계몽운동 단체들도 퇴위반대투쟁을 전개하였다.

특히 동우회는 회장 윤이병尹履炳을 중심으로 시민들과 합세하여 날마다 투석전을 벌였다. 이들은 석고단石鼓壇에서 결사대를 조직하여 총리대신 이완용과 군부대신 이병무李秉武의 집을 습격하거나 소각하였다. 다른 결사대원들은 광화문에서 매국7적을 저격할 계획이었으나 일본군의 출동으로 실패하였다. 시민들도 자발적으로 결사대를 조직하여 일진회를 성토하는 한편 만약 황제가 일본으로 끌려간다면 기차 철로 위에 엎드려 생명을 던지겠다고 다짐하였다. 또한 일부 시민들은 일진회 기관지 국민신보사國民新報社를 습격하여 사옥과 기계를 모조리 파괴하였다. 이처럼 고종의 강제퇴위 소식에 수많은 국민들이 격렬한 반일투쟁을 벌였다. 심지어 하찮은 동물들도 반일활동에 동참한 것으로 전한다. 즉 황현黃玹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는 서울의 진고개에서 미친 개가 일본인 7명을 물어 죽였으며, 태평동에서도 삽살개가 일본 아이를 물어 죽였다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결국 이등 통감은 고종의 일본억류계획을 포기하였다. 이름없는 시민들과 군인들이 결사항전을 부르짖으며 고종퇴위반대운동을 전개한 결과라 하겠다. 이에 반해 국가의 각별한 은혜를 입은 이완용 등 친일관료들은 민족의 장래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일신一身의 영달을 추구하고자 일제와 야합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후기의병의 깃발이 다시 세워지게 되었다.


[註 1] 헤이그특사사건과 관련된 최근의 구체적인 연구는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9(2007)가 있는데, 고종퇴위를 반대하는 국내항일투쟁에 대해서는 김상기의 「고종의 헤이그특사 파견과 국내항일투쟁」을 참고할 것. ☞

[註 2] 국사편찬위원회, 『고종시대사』, 1972, 630쪽. ☞

[註 3]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1, 1970, 421~423쪽. ☞

[註 4]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43, 1999, 74쪽. ☞

[註 5] 국사편찬위원회, 『고종시대사』, 633~634쪽. ☞


2. 정미7조약의 체결과 군대해산

1907년 7월은 우리 민족에게 불행의 연속이었다. 이 달에 헤이그특사사건이 있었고, 19일에는 그것을 빌미삼아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다. 그것도 모자라 일제는 정미7조약을 체결하여 일본인 고위관리를 대거 요직에 앉혔다. 이어서 7월 31일에는 고작 1만명도 되지 않은 군대마저 강제로 해산시켰다. 눈과 귀를 막기 위한 「광무신문지법光武新聞紙法」을 시행한 것도 바로 1907년 7월이었다. 7월 한달 동안 집중적으로 국가적인 능욕을 당한 시기였다.

7월 24일 아침 이등 통감과 임권조 일본 외무대신은 이른바 정미7조약 협약안을 이완용에게 전달하였다. 註6) 이완용 내각으로 하여금 결의하도록 해서 순종의 재가를 받으라는 것이었다. 이완용 등 친일내각은 온종일 회의를 거듭하며 순종의 재가를 받아 통감부에서 한밤중에 조인하였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조 한국정부는 시정개선에 대하여 통감의 지도를 받는다.

제2조 한국정부의 법령 제정 및 중요한 행정상의 처분은 통감의 승인을 받는다.

제3조 한국의 사법 사무는 일반 행정 사무와 구별한다.

제4조 한국의 고등 관리의 임면은 통감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제5조 한국정부는 통감이 추천한 일본인을 한국 관리에 임명한다.

제6조 한국정부는 통감의 동의없이 외국인을 용빙傭聘하지 않는다.

제7조 1904년 8월 22일에 조인한 일한협약 제1항을 폐지한다. 註7)



이미 외교권을 상실한 한국의 내정까지 일본 통감이 장악하게 됨으로써 사실상의 식민지가 된 셈이다. 이때부터 통감부가 친일내각을 직접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중앙정부와 지방 행정기관에는 일본인 차관을 비롯한 수천 명의 일본인 관리들이 포진하여 모든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이른바 차관정치라 부르는 것이다.

정미7조약의 협약안보다 더욱 문제가 큰 것은 극비에 붙인 「부수각서附隨覺書」였다. 註8) 「부수각서」에는 협약을 구체적으로 실행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특히 주목되는 사항으로는 사법제도 중 삼심제三審制를 도입한다는 명분하에 일본인 판·검사를 비롯한 사법 관리의 임용과 군대해산의 방안이 포함된 점이다. 이는, 일제가 정미7조약을 통해 사법권을 포함한 내정권을 장악하고, 한국을 군대없는 국가로 전락시킴으로써 식민화의 걸림돌을 제거하기 위한 조치라 할 수 있다.

군대해산은 후기의병의 봉기에 가장 큰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註9) 이미 일제는 1905년 4월 병제개혁이란 미명하에 원수부元帥府의 해체와 아울러 군대 규모를 절반 수준인 약 8천명으로 감축시킨 바 있었다. 그리하여 2년이 지난 후 한국군은 시위 2개 연대, 지방의 주요 도시에 8개 진위대 및 기타 부대로 이루어졌는데, 총 7천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註10)

이처럼 보잘 것 없는 군사력조차 일제는 비밀리에 추진하면서 군제개혁이란 명분을 내세웠다. 「부수각서」의 제3항‘군비軍備의 정리’에



한국 육군의 현상을 보건대 교육은 불완전하고 규율도 엄명嚴明치 못하여 일조一朝 유사시를 당하여 참다운 국가의 간성으로 신뢰할 수 없다. 이것은 필경 용병주의傭兵主義를 취하기 때문에 의용봉공義勇奉公의 신념이 풍부한 연소기예年少氣銳의 장정을 모집할 수 없다는 사실과 사관士官에게 군사적 소양을 가진 자가 적다는 사실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에 있어서도 장래는 징병법徵兵法을 시행하여 정예한 군대를 양성키 위해 지금부터 그 준비에 착수하기 위해 … 현재의 군비를 정리하고자 한다. 註11)



고 있듯이, 정예한 군대를 양성하기 위해 군대를 해산시키겠다는 점을 내세웠다. 앞서 보았듯이 군인들이 고종의 강제퇴위에 반대하는 시위에 가담하여 일본 경찰에 맞서 싸우거나, 친일파 각료의 처단을 모의한 장교들의 반일활동에 주목했을 것이다.

이에 따라 전력戰力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군대일망정 일제는 식민화에 걸림돌이 될 만한 요소라고 판단하여 아예 없애버리려는 것이었다. 이등 통감은 만약의 소요사태에 대비하여 일본 정부에 군대 증파를 요청하였다. 일제는 즉각 1개 혼성여단을 파견하였다. 이등 통감은 궁궐을 경호하는 1개 대대만을 남기고 모두 해산시키겠다는 내용을 일본 정부에 알렸다.

7월 31일 일제는 이완용과 군부대신 이병무의 이름으로 군대를 해산한다는 조칙을 비밀리에 발표시켰다. 그 내용의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짐이 오직 나라일이 어려운 때를 만나 쓸데없는 예산을 절약하여 이용후생의 산업에 응용함은 시급한 과제이다. … 짐은 지금부터 군제쇄신을 도모하여 사관양성에 전력하고 후일 징병법을 발포하여 공고한 병력을 구비코자 한다. 짐이 이에 유사에 명하여 황실시위에 필요한 자를 선발하고 기타는 일시 해산하노라. 註12)



일제는 친일파 관료를 내세워‘군제를 쇄신하여 강력한 군대를 양성’하기 위해 한국군을 일시 해산하겠다는 내용으로 발표시킨 것이다. 그리고 해산을 거부한 군인들이 폭동을 일으킬 경우에는 통감이 진압임무를 맡으라는 조칙도 동시에 내려졌다. 註13) 이로써 군대 해산에 관한 모든 업무를 통감이 관할하게 되었다. 서울에 주둔중인 시위연대의 해산 절차는 군부대신이 지휘관을 소집하여 조칙을 전달하면, 각 지휘관들은 부하들에게 다시 조칙 및 포고사항을 알린 후 동행한 일본군에게 군무 일체를 넘기기로 되어 있었다. 포고 내용에는 은급금恩給金을 차등있게 지급한다거나 일부 인원은 일본군 내지 관리로 선발한다는 회유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로써 1907년 8월 1일 한국군은 그 이름조차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註 6]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1, 224쪽. ☞

[註 7]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의병항쟁사』, 1984, 178~179쪽. ☞

[註 8]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1, 229쪽. ☞

[註 9] 홍영기, 「1907년 군대해산 이후 의병들, 지방을 장악하다」, 『대한제국기 지방사람들』, 어진이, 2006. ☞

[註 10]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1, 240쪽. ☞

[註 11]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1, 237쪽. ☞

[註 12] 『舊韓國 官報』 1907년 8월 1일자 호외 참조. ☞

[註 13]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1, 243쪽. ☞


3. 서울 시위대의 항쟁

8월 1일 오전 7시 시위연대의 대대장급 이상의 장교들에게 긴급소집령이 내렸다. 이른 아침에 소집된 이들은 군부대신 이병무가 읽는 해산조칙에 이어 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 조선주차군 사령관의‘조용히 해산하라’는 위협을 들어야 했다. 부대로 복귀한 각 대대장들은 중대장을 소집하여 사병들의 무기를 반납시키고 해산식장이 마련된 훈련원으로 오전 10시까지 부하들을 인솔하라는 내용을 전달하였다.

영문도 모른 채 무기를 반납한 장병들이 훈련원에 집결할 무렵 시내 여기저기로부터 요란한 총소리를 듣게 되었다. 훈련원에 마련된 해산식장이 순식간에 술렁거렸으나, 도수훈련이라는 말에 빈손으로 모인 이들은 어떠한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이미 훈련원에는 일본군이 기관총을 위시한 총검을 꼬나들고 이들의 주위를 포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산식장에 끌려나온 군인들은 원래 계획보다 훨씬 적은 약 600명에 지나지 않았다. 대부분의 병사들이 이미 눈치를 채고서 부대를 이탈하거나 무장해제를 거부하고 폭동을 일으킨 부대에 합류했던 것이다. 결국 해산식은 예정시간을 4시간이나 지난 뒤인 오후 2시에 시작하여 한 시간여 만에 끝났다. 당시 해산식장에는 울분이 가득찬 군인들의 심사를

반영하듯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져서 더욱 뒤숭숭하였다. 해산군인들은 은사금을 지급받고서 서로 작별의 눈물을 흘리며 뿔뿔이 흩어져갔다.

박은식은 그날 시위대가 해산하는 광경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이 날은 날씨도 몹시 음산하여 궂은 비가 쉴새없이 내렸다. 아! 훈련원은 어떤 곳인가? 이 나라 5백년 동안 군인들이 무예를 훈련하던 곳이 아닌가? 오늘날의 군인들도 이곳에서 여러 해 동안 씩씩하게 무예를 연마했던 곳인데, 갑자기 이 날로써 이별을 고해야 하게 되었으니, 그 누가 이를 슬퍼하지 않겠는가! 註14)



서울 시위대를 해산한 일제는 8월 3일 수원 개성 청주를 시작으로 4일 대구, 5일 안성, 6일 공주 해주 평양, 7일 안주, 9일 광주 의주, 10일 홍주 원주, 11일 강화 문경, 13일 강릉 진남, 14일 전주, 16일 안동, 17일 울산 강진, 19일 북한산 경주, 23일 강계, 24일 함흥, 9월 2일 진주, 3일 북청을 마지막으로 지방진위대를 모두 해산시킬 예정이었다. 註15)

한편 일제가 주도면밀하게 군대해산을 강행하였으나, 그것을 눈치챈 일부 군인들은 해산 당일 강력히 저항하였다. 특히, 서울의 시위대 가운데 제1연대 제1대대와 제2연대 제1대대 장병들은 빛나는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잘 알려져 있듯이, 항쟁의 직접적 계기는 1연대 1대대장 참령 박승환朴昇煥의 자결에서 비롯되었다. 박승환은“군인이 능히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능히 충성을 다하지 못했으니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軍不能守國 臣不能盡忠 萬死無惜.”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제2연대 1대대 중대장 오의선 정위 등도 자결하였다.

또한 제2연대 1대대 남상덕 참위는“박공과 함께 죽을 사람이 누구냐.”라고 큰소리로 외치자, 모든 장병들이 일제히 “내가 죽겠습니다.”라고 하였다. 註16) 남상덕을 비롯한 장병들은 박승환 대대장의 죽음을 되새기며 무기고를 점령하고서 무기와 탄약을 지급받아 일본군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마침내 시위 제1연대 1대대 및 제2연대 1대대를 중심으로 반일투쟁에 나서게 된 것이다. 이들은 일본군의 집요한 공격을 여러 차례 막아내었으나, 탄환의 결핍과 무기의 열세를 만회하기가 쉽지 않았다. 해산군인들은 치열한 백병전을 벌인 끝에 수적 열세와 무기의 부족으로 인하여 병영을 빼앗기고 말았다. 간신히 병영을 빠져나온 이들은 지칠 줄 모르는 용기로써 일본군과 시가전을 벌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양측의 시체가 쌓여갔으며, 서울 장안은 총성이 그치질 않았다.

치열한 공방전 끝에 일본군은 미원梶原 대위를 비롯한 4명이 죽고, 한국군은 장교 13명을 포함한 57명이 전사하고 100여 명이 부상당하였다. 註17) 또는 일본군은 42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한국군은 전사 70여 명, 부상 104명, 포로 600명의 피해를 입었다고 전한다. 註18) 또한 성내외의 민가 수백호가 불에 탔으며, 해산군인을 지휘하던 남상덕도 장렬히 전사하였다. 지휘관을 잃고 탄약이 떨어진 해산군인들은 다음을 기약하며 전국 각지로 흩어졌다. 일제는 해산군인들을 찾아내느라 혈안이 되었다. 그들은 일본인 여성을 동원하여 한국인 가정집 안방까지 샅샅이 뒤져서 미처 피하지 못한 군인들을 체포하였다. 해산군인들을 수색한다는 핑계아래 일본인 여성들은 한국인 재산을 약탈하기도 하였다.

당시 상황을 『대한매일신보』에서는 아래와 같이 전하고 있다.



훈련원에서 한국군을 해산하기 위해 무장을 해제한 병졸을 소집하였다. 세계의 어느 군인인들 이러한 상황에서 무장을 해제 당함은 자신에게 가장 심한 수모인 것이다. 무장을 가진 한국군이 당연히 그러한 명령에 복종하지 않은 점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 엊그제 사상의 잔혹한 경황을 간단히 보도하면 … 한국군은 탄환이 떨어지자 일본 기관포의 잔인한 난사에 혼비백산하여 몸을 숨길 곳을 찾다가 속수무책으로 일본군의 총칼에 무자비하게 죽어갔다. 註19)



해산에 반대하는 군인들의 무장폭동이 당연한 것이라고 주장함과 동시에 일제의 무자비한 진압을 비판하고 있다.

한편 전투가 한창일 때 병원의 간호사들이 비오듯 쏟아지는 탄환을 뚫고 쓰러진 한국군 병사들을 정성껏 돌보았다. 註20) 뿐만 아니라 연동여학교蓮洞女學校 학생들은“저 동포들은 나라를 위하여 죽은 자도 있는데, 우리는 비록 여자이나 어찌 의리가 없으리오.”라고 말하며, 제중원濟衆院으로 달려가 부상한 장졸을 열심히 간호하였다. 註21) 당시 관습으로는 여자가 남자의 몸을 함부로 만진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연동여중 여학생들이 전투가 한창인 전장터에서 부상당한 군인들을 정성껏 간호했던 것이다. 해산군인들의 항일투쟁에 감동한 김명철金命哲·기인홍奇仁洪 등은 시민들로부터 돈을 거두어 싸우다 죽은 장병들의 장례를 치러주며 이들의 넋을 위로하였다.


[註 14] 박은식, 『한국통사』 제3편 49장 참조. ☞

[註 15]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1, 469~470쪽. ☞

[註 16] 황현, 『매천야록』, 국사편찬위원회, 1955, 426쪽. ☞

[註 17]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1, 253쪽. ☞

[註 18]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1, 466쪽. ☞

[註 19] 『대한매일신보』 1907년 8월 4일 「韓兵解散」. ☞

[註 20] 황현, 『매천야록』, 427쪽. ☞

[註 21] 『대한매일신보』 1907년 8월 4일 「女徒義擧」. ☞


4. 지방 진위대의 의병 봉기

서울 시위대의 항전은 하루만에 끝났으나, 그 영향은 실로 놀라울 정도였다. 지방 진위대의 해산이 일제의 의도대로 진행되지 않고 도리어 진위대의 봉기를 촉발시키는 계기로 작용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서울 시위대 장병들이 지방으로 내려가 의병에 합류 註22)함으로써 항일투쟁의 확산에 크게 기여하였다. 군대해산과 서울 시위대의 봉기 소식은 서울에서 가까운 지방 진위대에 먼저 전해졌다. 특히 일본군의 잔혹행위는 진위대 병사들을 크게 격분시켰다. 『대한매일신보』는 “일본인의 잔혹과 만행이 많았다. 죄없는 양민이 총탄에 맞았으며 붙잡힌 사람들은 학대를 받았고, 서소문안 병영에 있던 군인 1명은 20여 곳이나 칼에 찔렸다. … 특히 주목할 일은 해당 병영 부근에서 피살된 다수의 병졸 가운데에는 한 사람도 무기를 가진 자가 없었다는 점이라.”고 보도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짐으로써 지방에서도 사건의 진상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일본군 방화로 폐허가 된 마을

 

군대해산 소식은 지방의 진위대 장병들을 동요시키기에 충분하였다. 해산을 거부하고 무장봉기를 일으킨 대표적인 부대로는 원주진위대와 강화분견대를 들 수 있다. 8월 2일 원주진위대 대대장 홍유형洪裕馨이 소집명령을 받아 상경하자, 대대장 대리 김덕제金德濟와 특무정교 민긍호閔肯鎬는 비밀리에 봉기를 계획하였다. 註23) 8월 5일 이들의 지시를 받은 군인들이 무기고를 장악하여 1,200정의 소총과 약 4만발의 탄환을 확보하였다. 무기를 지급받은 병사들은 원주지역 포수 및 농민들과 합세하여 우편취급소 군아 경찰분견소를 습격하는 등 일본 군경을 물리치고 원주를 장악하였다. 이러한 소식을 듣고 여주에 주둔 중이던 병사들도 합류하였다. 당시 원주진위대의 봉기를 주도한 민긍호는 서울출생으로 진위대의 병졸로 입대하여 주로 강원도 지역에서 근무하던 중이었다. 김덕제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이들은 원주를 공격하는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낸 후 2개의 부대로 나뉘어 강원도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의병이 되었다. 김덕제는 약 600

명을 이끌고 평창 강릉 양양 지역, 민긍호는 약 1,000명을 지휘하며 충주·제천·죽산·여주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註24) 김덕제의 활동은 비교적 짧은 것으로 추정되며, 주로 민긍호의 항일투쟁을 확인할 수 있다. 민긍호는 의병부대를 소부대로 나누어 유격전을 전개하였는데, 이들은 원주와 여주읍 점령을 시작으로 홍천·횡성·제천·충주·죽산·장호원·이천 등 강원·경기·충북지방을 무대로 분전하였다. 따라서 일제는 민긍호 의병부대를 진압하기 위해 대규모 일본군을 파견했으나 진압이 여의치 않았다.

이에 일제는 1907년 9월말 의병을 해산하고 귀순하라는 내용으로 국왕의 조칙을 만들어 각도에 선유사宣諭使를 파견시켰다. 註25) 강원도 선유사 홍우석洪祐晳은 민긍호를 체포하기 위해 여러 가지 계책을 동원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10월에는 강원도 관찰사 황철黃鐵이 귀순을 권유하는 서신을 두 차례나 보냈지만 민긍호는 단호히 귀순을 거부하는 답신을 보내었다. 민긍호는 답신에서 애국충절이 넘치는 내용으로 일관하였으며 관찰사 황철의 귀순 권유를 강력히 비판하였다. 이 와중에도 민긍호 의병부대의 항일투쟁은 계속되었다. 1907년 말 이인영의 주도로 13도창의대진소를 결성할 때 그는 관동창의대장 자격으로 2천명의 의병을 이끌고 합류하였다. 그후 서울진공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민긍호는 강원도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1908년 2월말 그는 원주 박달재 부근에서 일본군경과 교전하던 중 탄환이 떨어져 체포되었다. 그의 부하들이 의병장의 구출을 시도하자 불안감을 느낀 일본군이 그를 사살함으로써 장렬히 순국하였다. 민긍호 의병부대는 7개월동안 무려 70여 차례의 전투를 감행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의 의병 활동은 해산군인들의 의병합류뿐만 아니라 후기의병의 활성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원주진위대에 이어 수원진위대 소속의 강화분견대가 봉기하였다. 註26) 8월 9일, 강화분견대는 부교副校 지홍윤·연기우, 하사 유명규 등의 주도로 봉기하였다. 강화진위대장을 지낸 이동휘의 영향을 받아 봉기한 이들은 개신교 신자들과 대한자강회 회원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이들은 전등사傳燈寺가 위치한 정족산성鼎足山城에서 병력을 규합한 후 강화읍을 들이쳐서 일진회원 출신의 군수와 일본인 경찰들을 처단하였다. 약 600명으로 전열을 정비한 이들은 갑곶진에서 일본 군경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다가 11일 강화도를 탈출하여 경기도와 황해도 지역의 의병부대에 합류하였다.

서울에서 시가전을 벌이다 지방으로 내려간 시위대 병사들은 지방에서 활동 중인 의병대열에 합류하였다. 당시 지방으로 내려간 해산군인들의 활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해진다.



가평·원주·제천 등 여러 곳에서 의병이 봉기하였는데, 이는 모두가 해산 병정이다. 서양식 총을 갖고 있고, 오랫동안 조련을 받아 규율이 있어서 일본군과 교전하면 살상을 많이 한다. 세력 또한 강대하여 그 수가 거의 4~5천명이나 된다고 한다. 註27)



해산군인들이 경기도와 강원도를 무대로 의병부대를 직접 조직하여 투쟁하거나 의병부대에 가담함으로써 전투력이 크게 신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의병부대에 근대식 무기를 제공함과 동시에 전술 및 군사훈련에 큰 도움을 주었다. 따라서 의병장이나 의병부대의 핵심 인물

로 활동하는 해산군인들이 갈수록 증가하였다. 또한 『대한매일신보』에서 “군대해산 까닭, 현금 각 지방에 의병이 일어나는 것은 군대를 해산한 까닭이라”고 한 보도한 점만 보더라도 해산군인들이 속속 의병대열에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1908~1909년 사이의 해산군인들의 활약에 대해 일제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고 있다.



강화도 한국군 병사의 일부는 황해도에 들어가 북방의병의 선구가 되었다. 7월 중순의 경성 탈영병 폭행이래 수개월 동안에 그들 일부는 이미 경성 강원 충청 경북 황해도 각지에 가득차게 되었다. 註28)



처음에 서울에서 시작한 해산군인들의 봉기가 차츰 경기 황해 강원 지역으로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해산군인들이 해당 지역의 의병부대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그렇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경기 서부와 황해도 지역은 강화도 해산군인들을 주축으로 의병항쟁의 불길을 확산시켰다. 의병장 연기우·지홍윤·유명규는 강화진위대 해산군인 출신으로 경기도 북부와 황해도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註29) 김규식·정용대 등도 해산군인 출신 의병장으로서 일본 군경에 상당한 타격을 안겨주었다. 이밖에도 홍주분견대와 안동분견대는 해산에 반대하여 집단 탈영을 시도하였으며, 진주진위대도 봉기를 계획하던 중에 적발되어 강제로 해산 당하였다. 각 도별로 해산군인들이 의병장으로 전환하여 활동한 사례가 상당수 나타난다. 봉기에 실패한 병사들의 경우에도 스스로 의병대열에 참여하여 의병항쟁을 주도해 갔다. 요컨대 후기의병의 본격적인 항일투쟁은 군대해산을 계기로 해산군인들이 의병에 적극 투신함으로써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군대해산은 후기의병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첫째 항쟁 지역의 범위가 확대되었다. 군대해산 이전에는 주로 중남부 지역에서 의병활동이 전개된 데 반해 그 이후에는 전국으로 확대된 것이다. 둘째 전술의 향상과 무기의 확충을 들 수 있다. 군사지식이 풍부한 해산군인들이 대거 의병에 가담함으로써 의병부대의 전략과 전술을 보강할 수 있었고, 더욱이 이들이 신식무기를 소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투력 향상에 크게 기여하였다. 셋째 의병부대의 구성상의 변화를 가져왔다. 군대해산 이전에 의병장들은 대체로 전직 관료이거나 양반 유생들이 많았으나 이후에는 해산군인들의 비중이 매우 높아졌다. 註30) 아울러 이들이 가담함으로써 산포수와 광부를 비롯한 노동자들의 참여가 크게 늘어났다. 그리하여 전 민족적 항일전선이 형성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즉 다양한 대중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말미암아 후기의병은 반일운동으로서의 반제적 성격뿐만 아니라 반봉건적 성격도 가미됨으로써 운동상의 성격 변화에도 영향을 주었다.

한편 일제는 후기의병의 봉기 원인을 무엇이라 했을지 궁금하다. 일제가 남긴 『폭도사편집자료暴徒史編輯資料』와 『조선폭도토벌지朝鮮暴徒討伐誌』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대체로 고종의 강제퇴위, 정미7조약의 체결, 군대해산 등을 주요 원인으로 지적하고 있다. 다만 흥미로운 것은 충청북도의 보고서에서는 그 외에 『대한매일신보』의 배일열排日熱 고취가 의병봉기에 영향을 준 것으로 파악되어 있다. 註31) 또한 함경도 경우에는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의 발효로 사냥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산포수들이 생존권을 위협받게 되자 의병에 투신했음을 언급하고 있다. 註32) 이로써 보건대 후기의병의 주요 봉기 원인은 일제 역시 동일하게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후기의병의 봉기원인은 일제의 경제적 침탈에서도 찾을 수 있다. 註33) 일반 민중들의 생존권이 위협받게 됨으로써 그로 인한 불만이 의병에 가담하게 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註34) 이를 테면 주요 항구와 도시의 번화가뿐만 아니라 삼남지방의 비옥한 토지, 그리고 연해와 도서지역의 황금어장, 산간벽지의 울창한 산림 등이 일본인들에게 급속히 잠식당하였다. 이로 인해 직간접으로 피해를 입은 농어민들이 의병항쟁에 적극 나선 것이다. 또한 1907년 9월 일제는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제정하여 한국인의 무기 소지를 금지시켰다. 이로 인해 가장 타격을 받은 사람들은 수렵을 생계수단으로 삼는 함경도와 강원도의 산포수들이었다. 이들이 무기반납을 거부하고 의병에 투신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국가 존립의 위기와 민중의 생존권조차 위협받는 절박한 상황을 깨닫게 된 한국인들이 의병에 투신하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고종의 강제퇴위가 후기의병의 봉기를 유발하는데 어느 정도 영향을 준 점은 이미 앞서 언급한 바와 같다. 이와 관련하여 후기의병 당시 고종이 적극 나서서 이른바 밀지密旨를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라고 고무했다는 주장 註35)은 다소 무리가 없지 않다. 헤이그특사사건으로 강제 퇴위당한 처지로서 일제의 감시를 받고 있던 고종이 밀지를 보냈다는 사실도 수긍하기 어려울 듯하다. 註36) 당시 일제는 고종의 밀지가 실제로 유포되었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집요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을 확인하지 못한 점만 보더라도 이른바‘고종밀지설’은 설득력이 다소 미흡하지 않을까 한다.


[註 22] 신용하, 「민긍호의병부대의 항일무장투쟁」, 『한국독립운동사연구』 4,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0, 62쪽. ☞

[註 23]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1, 254쪽. ☞

[註 24] 신용하, 「민긍호의병부대의 항일무장투쟁」, 『한국독립운동사연구』 4, 65쪽. ☞

[註 25] 신용하, 「민긍호의병부대의 항일무장투쟁」, 『한국독립운동사연구』 4, 72~78쪽. ☞

[註 26]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1, 255쪽. ☞

[註 27] 김윤식, 『續陰晴史』, 국사편찬위원회, 1960, 217쪽. ☞

[註 28] 김윤식, 『속음청사』, 269~270쪽. ☞

[註 29]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1, 478~486쪽. ☞

[註 30]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1, 389~491쪽. ☞

[註 31] 『편집자료』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자료집』 3, 534쪽. ☞

[註 32] 『토벌지』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자료집』 3, 640쪽. ☞

[註 33] 홍순권, 「의병운동의 사회경제적 배경」, 『한말 호남지역 의병운동사 연구』, 서울대출판부, 1994. ☞

[註 34] 홍영기, 『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일조각, 2005, 120~121쪽. ☞

[註 35] 오영섭, 「고종의 밀지가 한말 의병운동에 미친 영향」, 『고종황제와 한말의병』, 선인, 2007. ☞

[註 36] 구완회, 「한말의 호좌의진과 밀지」, 『내제문화』 11, 내제문화연구회, 1999 ; 구완회, 『한말 제천의병 연구』, 선인, 2005, 150~158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