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서북지방의 중기의병 / 한말 중기의병

몽유도원 2014. 3. 3. 08:23

제10권 한말 중기의병 / 제6장 서북지방의 중기의병

1. 전덕원 의병

2. 우동선 의병


1. 전덕원 의병


한말 의병은 지역적으로 중, 남부지방에 집중되어 있었다. 북부지방에서는 후기의병 때에 가서야 의병의 기세가 점차 활발해지는 경향을 보여준다. 의병이 시종일관 북부지방에 비해 중, 남부지방에 집중되던 양상은 당시 사회적 여건에 비추어 자연스런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곧 19세기 후반의 시대상황에서 정치·사회·경제 등 제반 영역에 걸친 활동의 중심이 중, 남부지방이었을 뿐만 아니라 인구 역시 이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註1) 이 점을 감안하고 중기의병 시기에 북부지방에서 일어난 의병의 개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관서지방에서는 을사조약이 늑결된 직후인 1905년 12월 평북 용천 일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이 의병은 유생 전덕원全德元, 1871~1940이 박양래朴樑來·김두섭金斗燮 등의 지사들과 함께 주도하였다.

전덕원은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이를 규탄하기 위해 격문을 만들어 상경하였다. 이때 그는 경향 각지의 유생들이 이 조약을 성토, 파기하기 위해 설치한 십삼도유약소十三道儒約所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김동필金東弼을 필두로 경현수慶賢洙·이봉학李鳳學·강원형姜遠馨·이인순李麟淳·이상린李相麟·유동희柳東熙·이식李侙·현학표玄鶴表 등 신사유림들과 함께 조약 파기와 5적 처단을 요구하는 상소문을 올리는 한편, 각국 공사관에도 글을 보내 조약 무효를 주장하는 등 을사조약 반대투쟁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하지만, 김연식金璉植과 박성준朴聖俊 등이 유약소의 활동을 밀고함으로써 주모자들이 체포당하여 상소항쟁은 실패하고 말았다. 註2)

상경 투쟁 이후 용천으로 귀향한 전덕원은 평안도에서 즉시 거의하였다. 그리하여 전덕원은 계행건桂行蹇·김두섭金斗燮·박순채朴舜采·김선팔金善八·장달빈張達彬·김상욱金相旭 등 여러 지사들의 호응을 얻고, 가산을 처분하여 마련한 군자금으로 무기를 장만한 뒤 거병하였다. 그러나 이 의병은 실제 활동에 들어가기도 전에 전덕원 등 주모자들이 체포됨으로써 해산당하고 말았다. 이들 지사들은 선천·철산·의주 등지에서 고문을 받다가 한때 서간도 안동현安東縣까지 끌려가 고초를 겪은 뒤 1906년 봄에 석방되었다. 註3)

전덕원은 그후에도 항일투쟁을 중단하지 않았다. 그는 석방 후 1906년 음력 3월경 박양래와 함께 자신의 집에다 평안도 유약소를 설치하고 투쟁을 계속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선천지방에서 작폐가 우심하던 대표적인 친일매국적 한국현韓國顯을 먼저 처단하기로 하고, 거사 결행 때 사용할 무기를 구입하기 위해 압록강 너머 안동현으로 사람을 보냈다. 註4)

이 무렵 전덕원은 홍주에서 의병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여기에 가담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으나, 곧 홍주의병이 와해되고 말았기 때문에 다시 독자적인 거사를 모색하였다. 그는 의주 출신의 박영수朴永秀·

박양래와 함께 외국의 구원병을 얻어 항일전을 전개하기 위해 사방에 통문을 발송하여 지사들을 규합하려 하던 중 계획이 탄로나 의주감리서에 모두 체포되고 말았다. 그 가운데 전덕원과 박양래는 서울로 압송되어 평리원에서 재판을 받고 전덕원은 10년, 박양래는 15년형을 각각 선고받고 원주에서 일어났던 정운경 의병장 등과 함께 황해도 철도鐵島에 유배되어 고초를 겪었다. 註5) 이들은 모두 1907년 12월 융희황제의 특사로 석방되었다. 註6) 국치 후 서간도로 망명한 전덕원은 3·1운동을 계기로 각처에서 독립군단이 편성될 때 박장호 등과 함께 서간도의 대표적인 독립군 단체인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을 편성하여 독립전쟁을 전개하였다.


[註 1] 박민영, 『대한제국기 의병연구』, 한울, 1998, 9~10쪽. ☞

[註 2]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1, 568~569쪽. ☞

[註 3]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1, 568~569쪽. ☞

[註 4] 『관보』 1907년 1월 8일자. ☞

[註 5]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1, 570쪽 ; 『관보』 1907년 1월 8일, 11월 4일자 ; 애국동지원호회, 『한국독립운동사』, 1956, 58쪽. ☞

[註 6] 『관보』 1907년 12월 3일자. ☞


2. 우동선 의병


황해도에서는 신천·장연·송화·재령 등지에서 우동선禹東鮮 주도하에 김두행金斗行·조윤봉趙允奉·강만석康萬石·장동찬張東燦·고익균高益均·이진태李振台 등이 모여 을사조약을 규탄하면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들은 우동선을 정동의려대장正東義旅大將으로 추대하고 활동을 개시하였다. 우동선은 황해도 신천군 문화文和 출신으로 용맹이 뛰어나고 담력이 있었으며 전략 전술에도 능한 인물이었다. 그리하여 우동선 의병은 구월산 월정사月精寺에 근거지를 두고 일제 군경을 격파하거나 침략시설을 파괴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특히 산간지세를 이용하는 유격전으로 우세한 적군을 궁지로 몰아넣으면서 끈질긴 항쟁을 계속하였고, 1907년 하반기 이후에는 해산군인까지 가세하여 한층 강화된 전력으로 그 기세를 더욱 떨쳐갔다. 註7)

한편 유치경兪致慶과 변석현邊錫玄 등을 중심으로 한 화서학파 계열 인물들이 주축이 된 황해도 평산 일대의 거병 분위기는 1907년 9월에 박기섭朴箕燮,일명 朴正彬

을 주장으로 하는 평산의진의 편성으로 결실을 맺고 해서지방의 의병전쟁을 주도하게 된다. 이 의진에는 특히 이진룡李鎭龍·조맹선趙孟善·우병렬禹炳烈 등이 가담하여 뒷날 항일전의 폭을 심화시켜 갔다.


[註 7] 정제우, 「한말 황해도지역 의병의 항전」, 『한국독립운동사연구』 7,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3, 11~12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