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신돌석 의병 / 영남지방의 중기의병 / 한말 중기의병

몽유도원 2014. 2. 26. 09:22

제5장 영남지방의 중기의병


산남의진

신돌석 의병

유시연 의병

김도현 의병

울진·삼척 의병


2. 신돌석 의병


1. 신돌석의 가계와 신분

영남지방에서도 1905년 말 특히 지형적으로 활동이 유리했던 충청·경상도 접경의 산악지대를 거점으로 수십, 수백 명으로 편제한 의병들이 우체소를 습격하고 전선을 절단하는 등 항전을 벌이고 있었다. 1905년 10월 중순 200여 명의 의병이 순흥 우체소를 습격한 일과, 같은달 17일 300명의 의병이 영천 우체소를 습격한 거사 등이 이 시기 의병활동의 두드러진 예이다. 따라서 일제는 한국 진위대의 출동에만 의병 탄압을 기대하던 방침을 바꾸어 10월 하순경부터는 헌병대를 직접 투입하는 조처를 취하였다. 이와 같이 항일의병의 분위기가 점차 고조되던 상황에서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의병의 기세는 요원의 불길처럼 확산되어 갔다.

을사조약 늑결 이후 1906년 전반기에 영남지역에서 특히 활동이 두드러졌던 의진이 신돌석 의병이다. 전기의병에도 참여한 것으로 전해지는 신돌석申乭石, 1878~1908은 1906년 4월에 영해에서 1~200명의 장정을 규합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註36)


신돌석 의병장의 복원 생가 (경북 영덕군 축산면 도곡2리)



신돌석은 경북 동해안 일대를 거점으로 활약하던 의병장으로 오늘날까지 이곳 주민들에게 ‘태백산 호랑이’ 혹은 ‘신장군’으로 불리어지며 전설적으로 구전되는 인물이다. 하루에 천 리 길을 달리며 수 십 장의 구릉을 한 걸음에 뛰어넘었다는 이야기들은 모두가 그의 탁월한 용력과 강렬한 의협심이 세인의 칭송 속에 과장되어 상징적으로 표현된 결과라 하겠다. ‘돌석’이라 불린 데서도 짐작되듯이, 그는 한말 의병전쟁사에서 대표적으로 손꼽히는 ‘평민’ 의병장이다. 그의 생애와 활약상을 알려주는 직접적인 1차 자료가 영성한 것도 이러한 한미한 신분적 배경에 기인하는 것 같다. 註37)

신돌석은 1878년에 영해의 복평福坪, 현 영덕군 축산면 부곡동에서 신석주申錫柱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순경舜卿이며, 본관은 평산이다. 그의 본명은 신태호申泰鎬이고, ‘돌석’은 원래 그의 아명이었으나, 의병에 투신한 후로는 이 이름을 더욱 세상에 날리게 되었다.

신돌석은 고려 개국공신인 신숭겸申崇謙의 후예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조선조에 들어와 그의 집안은 벼슬길이 막혔고, 7대조 때부터는 드디어 동해안의 영해로 내려와 이곳에서 대대로 세거하였다고 한다. 그의 조상이 영해에 정착한 이후 신돌석 당대에 이를 때까지 200년 가량 영해지역에 세거한 셈이다.


신돌석 의병장



후손들이 전하는 이야기로는 7대조 신후종申厚宗이 진사였다고 한다. 그러나 소과小科 급제자 명부인 『사마방목司馬榜目』에 그의 이름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 사실은 확인할 수 없다. 이로 미루어 신돌석의 가문이 조선조의 지배계층인 양반관료를 배출한 집안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오히려 신돌석의 선대가 향리였다는 말이 설득력이 있다. 즉 그의 집안이 향리 신분으로 그 직책이 세습되다가 ‘읍신邑申’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읍신이라 함은 읍내에 거주하는 신씨라는 뜻도 되지만, 주로 신씨 향리 집안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의 가문이 원래는 영해지방의 향리였다는 주장에는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그뒤 신돌석의 부조父祖대에 이르러서는 향리로서 가지는 직임, 즉 직책조차 맡지 못하는 지위로 떨어진 것 같다. 신돌석의 집안을 몰락한 향리 출신이라는 의미에서 ‘잔서리殘胥吏’라고 부른 듯하다. 註38) 이 정도의 가문이라면, 결국 신돌석의 당대로 볼 때 신분상 그는 평범한 농민층으로 평민 신분에 속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신돌석의 집안이 몰락한 상태였다는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근거로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복디미’복더미, 복띠미라 불리는 그의 고향 촌락이 대체로 신분이 그리 높지 않은 사람들이 사는 작은 동네였다는 점이다. 


평해 월송정. 

신돌석 의병장이 우국시를 읊은 곳으로 전해진다.



복더미 마을에서 동쪽으로 7~800미터 떨어진 국도변 양쪽에는 커다란 양반 마을인 진성이씨와, 무안박씨 집성촌이 각각 자리잡고 있다. 도로 남서쪽에 진성이씨 양반촌이 있고, 북동쪽에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박의장의 마을이 있다. 이러한 주변의 양반 집성촌과 달리 신돌석의 생가 복더미에는 이름난 양반집이 없는 곳이다. 註39)

다른 하나는 신돌석이 양반처럼 의관을 갖추었다가 봉변을 당했다는 다음과 같은 일화에서 찾을 수 있다.



신돌석이 장가들어 갓을 쓰고 의관을 정제하여 집으로 돌아올 때, 이 모습을 본 이성화가 그의 갓을 벗겨 부수어버렸다. 봉변을 당한 신돌석은 내 스승의 동생만 아니었다면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면서 대들지 못하였다. 註40)



이러한 일화는 신돌석이 갓을 쓰고 다닐 만한 신분이 되지 못할 정도의 한미한 집안 출신이었다는 점을 짐작케 한다. 註41)

신돌석은 이처럼 한미한 평민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부친인 신석주가 건실한 가계 경영에 힘입어 가산을 어느 정도 모을 수 있었고,

나아가 신돌석을 인근 마을의 서당에 보낼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돌석은 인근 상원 마을에서 강학하던 육이당六怡堂 이중립李中立의 문하에서 기초적인 학문을 닦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註42)

그가 뒷날 평해 월송정에 올라 지었다는 우국시는 이러한 학문적 토대 위에서 가능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결국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난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상민’신분이었다고 할 수 있다.


2. 의진 결성

경북 영해지방은 일제침략에 항거하는 잠재적 정서가 복류하던 고장이었다. 개항 이후 밖으로는 일제를 비롯한 외세의 침략이 가열되고 안으로는 전통시대의 내부적 모순이 심화되어 가던 시절인 1871년에 동학운동과 민란이 혼재되어 일어난 ‘영해민란’으로 한때 온 나라의 이목이 집중되던 곳이기도 하다.

신돌석은 전기의병에도 참여한 것으로 전해져 온다. 경기도 광주·이천에서 남하한 김하락金河洛 의진과 연합해 벌였던 영덕 대격전에 참가한 것으로 보인다. 註43)

전기의병 해산 이후 신돌석은 전국 각지를 전전하면서 저명한 인물들과 지사들을 찾아다니며 후일을 기약하고 의병 재기의 기반을 다졌다. 뒷날 대한광복회를 주도했던 박상진朴尙鎭을 비롯하여 동학 교단의 지도자 손병희孫秉熙, 출중한 의병장으로 명성을 날리게 되는 민긍호閔肯鎬와 이강년李康秊 등이 이때 그가 만났던 대표적 인물들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울산의 박상진과는 형제처럼 지내며 시사를 토론하다가 침식을 잊었다고 할 만큼 의기투합한 사이가 되었다. 註44)

이 즈음 신돌석이 남긴 많은 일화를 통해 그의 우국충정과 구국항일 의식을 짐작할 수 있다. 청도지방을 지나면서 일본군들이 전선 부설작업을 하는 광경을 목격하자, 적개심을 누르지 못해 전주를 뽑아 버리고 단숨에 일본군 4, 5명을 처단하였다든지, 부산항에 정박중인 일본 선박을 그대로 뒤집었다든지 하는 이야기는 특히 유명하다. 또 이 무렵 평해의 월송정月松亭에 올라 읊었다고 전해지는 다음과 같은 우국시는 그뒤 널리 인구에 회자되기도 하였다. 註45)



누에 오른 나그네 갈 길을 잊고登樓遊子却行路

낙목이 가로 놓인 단군의 터전 탄식하네 可歎檀墟落木橫

27살 남아 이룬 일이 무엇인가 男子二七成何事

추풍에 의지하니 감개만 나는구나 暫倚秋風感慨生



을사조약 늑결 이후 전국적으로 항일투쟁이 격화되어가자 경북지방에서도 의병이 일어났다. 1906년 1월 영양에서는 김도현金道鉉이 의병을 일으켰다가 대구진위대에 의해 해산당하고 말았다. 이 무렵 신돌석도 다시 의병을 일으킬 움직임을 보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음력 3월에 들어와 영천에서 정순기가 신돌석을 만나러 온 것이 그러한 정황을 보여주고 있다. 즉 영천에서 거의하려던 정용기가 각 지역으로 의병을 모으는 소모관을 보내고, 또 투쟁방향을 논의하는 과정에 그의 재종제인 정순기를 신돌석에게 파견했던 것이다. 註46) 거의와 관련된 구체적인 움직임은 확인하기 어렵지만, 이러한 점으로 볼 때, 신돌석은 을사조약 늑결 이후 다시 의병을 일으킬 결심을 굳히고 그 준비에 착수했던 것으로 믿어진다.

당시 영해군수 경광국慶光國은 신돌석이 다시 의병을 일으키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만류하기 위해 그를 찾아왔다고 한다. 하지만, 신돌석을 만난 뒤로 그는 오히려 사람들에게 “신돌석의 의기를 누가 감히 그르다 하리오마는 단 독단으로 군사를 마음대로 취급하므로 내 이것을 제지하려 한 것 뿐이다. 그러나 그의 안광이 횃불과 같고 다리의 힘이 바다라도 뛰어넘을 듯한 용기를 가졌으니 참으로 장군이로다”라고 하여 신돌석의 인물됨을 극찬하고, 오히려 그에게 총포를 제공했을 정도라고 전해진다. 註47) 이러한 점으로 보더라도 그는 을사조약 늑결 이후 재기항전을 통한 결사보국의 신념을 굳혔음을 알 수 있다.

신돌석은 1906년 4월 6일음 3.13 의병을 일으켰다. 그가 거의한 날짜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이들 모두 공통적으로 음력 3월, 양력 4월에 일으킨 것으로 되어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사실에 근접한 것으로 보이는 『신장군실기』의 기록에 따라 4월 6일 거의한 것으로 정리하는 것이다. 註48)

이때 신돌석 의병이 거의한 장소는 그의 집에서 1백 미터 가량 떨어진 주점, 곧 김춘궁金春宮이라는 사람의 집 앞이었다. 그 주점이 바로 동해안을 거슬러 올라가는 노변에 있었으므로 이곳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리고 이때 모인 의병의 규모는 적게는 100명, 많게는 300명 정도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신돌석은 이때 의진의 명칭을 ‘영릉의병寧陵義兵’이라 불렀는데, 그 유래는 명확하지 않으나 영해寧海와 연관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리하여 신돌석은 ‘영릉의병장’이 되었다. 註49)

거의 당시 신돌석 의병의 정확한 편제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해방 직후 기록된 「창의장명록倡義將名錄」에 나타나는 직책과 주요 성원을 통해 활동 당시 편제를 짐작할 수 있다. 이를 보면 다른 지역의 의병과 마찬가지로 중군장·선봉장·좌익장·우익장·포대장·소모장·참모장 등이 기본으로 편제되어 있었고, 박수찬朴壽燦·한영육韓永育·이하현李夏鉉·신태종申泰鍾·백남수白南壽·김치헌金致憲 등이 주요 직책을 맡아 중심 역할을 수행하였다.


3. 신돌석 의병의 신분층

1906년 4월 거의한 뒤 1908년 12월 신돌석 의병장이 순국할 때까지 그의 휘하에서 활동한 의병의 규모는 일정하지 않았다. 시기와 형세에 따라 의진의 규모가 달라졌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거의 당시 ‘1~300명’정도의 규모로 활동을 시작한 이후 적을 경우에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4~500명 정도가 그의 휘하에서 직접 활동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일제 군경의 정보자료에 신돌석 의진의 규모를 300 명 정도로 파악하고 있고, 신문이나 ‘의병’ 판결문에도 대체로 300명 이내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러하다. 註50)

신돌석의 휘하에서 활동했던 참모 병사들의 신분을 확인하는 작업은 결코 쉽지 않다. 우선 참여 인물들의 면목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해

방 직후 신돌석 의병에 가담했던 인물들과 그 후손들이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창의장명록」에는 핵심인물 61명의 명단과 직책이 기록되어 있어 의진 참여자에 대한 정보를 어느 정도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이 자료는 후대의 기록으로 그 사료적 가치가 손상된 것이어서 엄정한 사료비판이 요구된다. 이러한 「창의장명록」과 함께 일제 군경의 정보자료 및 의병 판결문 등을 통해서 신돌석 의병에 참여한 인물들의 면모와 그들의 신분에 대해 개략적이나마 접근할 수 있다.

신돌석 휘하에서 활동한 참모 병사들은 대체로 당시 신돌석과 비슷한 처지와 입장에 있던 평민층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고 합리적으로 인정된다. 평민 가운데도 직업상 역시 농민이 절대 다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근거로는 우선 「창의장명록」에 기록된 인물 대부분이 중망 있고 권세 있던 양반귀족들이 아닌 농민층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명단 가운데 일부는 영해지역의 유력가문인 무안박씨·재령이씨·대흥백씨·안동권씨 등도 포함되어 있으나, 그 가문의 핵심인물이 아닌 방계인사들이었던 것으로 보여 일반 평민층으로 간주해도 무방할 듯하다.

다음으로 소모장 이항의李恒儀에 의해 모병된 경우로 의병 귀순자 판결문에 나오는 유돌이·김선돌·서석근·임두곤 등이 모두 평민으로 추정된다는 점이다. 註51) 뿐만 아니라 신돌석 의병의 귀순자 24명 가운데 신분 직업이 불명확한 4명을 제외하고 농업에 종사하던 인물이 14명으로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도 이를 뒷바침한다. 직업을 농업이라고 한 가운데는 신분을 사족士族·사인士人이라고 밝힌 3명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들은 몰락잔반으로 평민과 크게 구분되지 않는 신분층에 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귀순자 명단 가운데 양반 4명, 유생 1명, 동몽교관童夢敎官 1명 등 6명의 경우는 권세 있는 양반은 아니라 하더라도 양반 유생층으로 볼 수 있다. 註52)

다음으로 신돌석 의병에는 다른 의진의 예에서 흔히 보듯이 포수도 참여하고 있었다. 「창의장명록」에 ‘포대장砲大將’의 직책이 나타나 있는 점과 신돌석 의병에 가담해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1907년 10월 교수형 판결을 받았던 남우팔이라는 인물의 전직이 포대장으로 기록된 점 등으로 포수의 가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후기의병 시기의 경우이기는 하지만, 신돌석 의병에 참가한 인물들 가운데 해산군인이 확인되지 않고 있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1907, 8년 단계에서 활동했던 전국 대부분의 의진에는 어떤 형태로든지 해산군인이 가담하고 있었던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포수와 더불어 해산군인의 가담 정도에 따라 의진의 전력이 좌우되던 실정이었다. 탁월한 기동성을 바탕으로 산악지대를 타고 유격전을 구사하던 신돌석 의병에 해산군인의 참여 여부가 확인되지 않는 것은 의외이다. 실제로 해산군인들이 가담하지 않았는지, 또는 가담했지만 현재 자료상에는 나타나지 않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런데 평민 의병장 신돌석 휘하에 다수의 양반 유생층 및 관인이 참여해 활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신돌석 의병 귀순자 명단 가운데 나오는 양반·유생·동몽·사족 등의 신분과 직업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그 가운데 나오는 동몽은 향촌사회에서 아이들을 훈육하는 책임을 맡은 하급관리인 ‘동몽교관’으로 보인다. 또 이러한 맥락에서 신돌석 휘하에서 핵심 간부로 활동했던 여러 인물 가운데 한영육과 백남수가 특히 주목된다. 의진의 참모로 활동했던 한영육은 ‘덕릉참봉德陵參奉’으로 불리던 인물로 상당한 학식을 갖추고 있던 양반 출신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군장과 후군장을 맡았던 의진의 핵심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백남수는 전직 주사였다. 註53) 이들은 모두 하급직 관리이기는 하지만, 이를 통해서 신돌석 의병에 관리들이 가담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요컨대, 신돌석 의병은 평민 의병장 휘하에서 상층 지휘부나 하층 병사부 모두에 양반과 평민 계급이 동시에 가담해 활동하고 있던 의진이었다. 이와 같이 신돌석 의병이 양반과 평민 두 계급이 신분상의 한계를 극복하고 지휘부와 병사부 모두에 포진해 있었던 점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의병이 항일전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상하 신분상의 문제보다 국가와 민족 문제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이를 우선시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곧 일제침략으로 야기된 절박한 국가적, 민족적 위기상황 앞에서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민족 내부의 신분상 모순을 극복해야만 하는 과제가 우선적으로 요청되었고, 항일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모순이 자연스럽게 해소될 수 있었던 것이다. 나아가 신분상의 제약 극복을 통해 신돌석 의병은 전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었으며, 그만큼 일제 군경에 대해 큰 타격을 가할 수 있었다.


4. 신돌석 의병의 항일전

거의 직후 신돌석 의병은 항일전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전력을 확보하기 위해 군사소모와 무기수집, 그리고 자금모집에 착수하였다. 이러한 전력강화 활동을 위해 태백산맥을 넘어 당시 영해부의 속현이었던 영양과 진보 방면으로 즉시 이동하였다. 소모관이 된 영양 출신의 이창영李昌英을 비롯하여 그와 함께 사형판결을 받게 되는 영양 출신의 조준용趙俊容, 진보 출신의 배선한裵善翰과 윤학이尹學伊, 그리고 진보의 보부상 출신인 신낙선申洛先 등이 바로 거의 직후에 영양과 진보 일대에서 합류한 대표적인 인물들이다.54) 또 영양과 진보 일대의 양반가문이나 비교적 부유한 집안의 협조를 받아 군자금과 군수품 등을 수집하였다. 판결문상에 확인되는 것만으로도 봉기 직후인 1906년 4월 20일부터 5월 5일까지 보름 사이에 확보한 군자금이 1,656냥이었다.55)

신돌석 의병은 무기를 확보하는 일이 가장 급선무였다. 그리하여 일반 주민들이 소지하고 있던 무기류도 수집하였을 뿐만 아니라, 각지 관아를 습격하여 그곳에 보관되어 있던 무기도 확보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4월 30일 영양읍의 관아를 기습한 것이다. 신돌석 의병은 이 날 영양 관아를 습격하여 군수를 제압하고 다수의 무기를 확보하였던 것이다. 당시 『황성신문』은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크게 보도하였다.



수백 명이 각각 총포를 들고 들이닥쳐 사면으로 방포하고 순교청巡校廳으로 들어가 군수를 협박하고 행정관리를 포박하였다. 그리고서 군물고軍物庫를 부수어 총 22자루, 탄환 20발, 수철환手鐵丸 1발을 수거하고, 읍민이 도적 방비를 위해 사사로이 갖고 있던 조총화승총-필자주 35정과 화약 2근을 수거하였으며 영해로 향했다. 안동진위대에 이 소식을 알리려 하지만 의병들이 길을 막고서 수색하므로 어렵다. 註56)



즉 신돌석 의병은 영양 관아를 습격하여 무기고를 부수고 총 22정과 다수의 탄환 등을 수집하였을 뿐만 아니라 민간에서 화적을 막기 위한

방도용防盜用으로 비치해 두었던 화승총 35정과 상당량의 화약 등의 무기류를 확보하였다는 것이다.

거의 초기인 1906년 3~4월 영양과 청송 등지에서 인력과 물자를 확보하여 전력을 보강한 뒤, 신돌석 의병은 울진과 삼척을 공격대상으로 삼고 북상하였다. 특히 울진은 신돌석 의병이 활동기간 내도록 주요 공격대상지로 삼고 수차에 걸쳐 습격하였던 곳이다. 동해안의 도시 가운데 울진은 일본이 그들의 교두보를 만들 예정으로 일찍부터 발을 붙이기 시작한 곳이다. 이미 1890년대에 접어들면서 일본 어부와 수산업자들이 잠수기 어선을 동원하여 전복과 해삼 등 해산물을 쓸어가기 시작하였다. 전복 채취 잠수기를 사용하던 일본인들은 한인들에 비해 10배 이상의 어획량을 거두던 실정이었다. 그러므로 한인 어부들은 일본인들의 이러한 어업침탈에 분개해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동해안의 어장이 일본인들에 의해 장악되어가고 있고, 또한 신돌석이 울진을 주된 공격대상으로 삼은 이유가 여기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註57)

신돌석 의병은 1906년 거의 초기에 울진을 공격목표로 삼고 일차 북상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의병의 북상 정보를 파악한 울진군수 윤우영尹宇榮이 정부에 군대지원을 요청한 결과 원주진위대가 출동해 북상을 차단하였다. 註58)

그뒤 신돌석 의병은 5월 초순 울진을 다시 공략하였다. 이때 신돌석 의병이 울진에서 벌인 활동은 일본인을 공격한 것이 핵심이다. 얼마나 많은 수의 일본인을 공격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일본인 한 명을 총살한 것은 판결문을 통해 확인된다. 또 일본인이 살던 가옥을 집중적으로 파괴하고 일본인 소유의 거금 1천 5~600냥을 군자금으로 수금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신돌석 의병은 울진의 순교감巡校監 관군들과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다. 註59)

신돌석 의병은 울진을 공격할 때 도사都事 출신 김하규金夏奎가 이끄는 삼척의진과 연합전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註60) 김하규는 양반으로, 양반이 거느리던 의병과 신돌석 의병이 연합했다는 사실은 당시 조건과 상황에 비추어 상당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점이기도 하다.

1906년 5월 10일 전후 신돌석 의병은 영해지역으로 환군하였다. 이 무렵 의병들과 안동진위대에서 출동한 관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져 신돌석 의병은 한때 패전으로 수세에 몰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정황은 산남의진의 활동사실을 기록한 『산남창의지山南倡義誌』에 의병장 정용기가 “지금 신돌석이 패했다는 소식이 왔다. 신돌석과 우리의 연결은 서로 의지하고 있는 형세인데 지금 신돌석이 영해에서 패했으니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다”라고 하고 진군했다고 기록한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그러나 산남의진은 행군 도중 경주진위대의 계략에 빠져 주장 정용기는 체포되고 의진이 곤경에 처하고 말았다. 이에 산남의진에서 신돌석 의병에게 원군을 요청해 오자, 신돌석은 비록 영해에서 패전한 직후였지만 대오를 수습하여 산남의진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註61) 이러한 와중에도 신돌석 의병은 5월 25일 진보에서 우편소 송부送夫와 호송 헌병 2명을 사살하고 물자를 탈취하기도 하였다.

영해·진보 일대에서 전열을 가다듬은 신돌석 의병은 1906년 6월 울진 방면으로 재차 북상하였다. 『황성신문』에 “비도 300여 명이 본부에 돌입하여 군기고를 타파하고 군물을 창탈搶奪하며 민호民戶에 방화하여 수십 호가 피소被燒” 註62)라고 실린 기사는 이때 신돌석 의병이 울진 관아를 점령한 사실을 보도한 것이다. 이 무렵 의병의 규모가 300명 정도였다는 사실과, 울진읍을 점령한 뒤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한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이 무렵 신돌석 의병의 활동상황에 대해 정탐원을 동원해 파악한 일제의 정보문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폭도는 강원도 삼척 부근에서 봉기하고 있는 자들로서 그 수는 3~4백 명이 될 것이며, 두령은 신돌석이라고 하며 이조폭李照暴, 이전에 관리를 역임한 적이 있다고 함이라는 자가 부두령임. 신申이 이끄는 한 부대는 현재 삼척 부근에 있으며 이李는 160명의 폭도를 인솔하여 이 달6월-필자주 7일에 죽변동竹邊洞을 침략하였으며 다음날 울진을 습격하였고, 11일에는 후포리厚里捕에 출현하고 12일에 영해로 향했으나 한국병에게 격퇴당하여 현재 평해와 영해의 중간에 있는 것으로 보임.… 폭도의 반수 이상이 화기를 보유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신식 소총과 같은 것은 극히 드물며 대부분은 구식 총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함. 註63)



위 기록에 의하면, 1906년 6월 초순경 신돌석 의병은 두 부대로 나뉘어 활동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한 부대가 6월 7일에는 죽변, 8일에는 울진을 습격하였으며, 며칠 뒤인 6월 11일에는 후포 일대에 출현한 뒤 영해로 향하던 중 관군과 전투를 벌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돌석의 주력부대는 삼척 방면으로 북상하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하였다. 또 의병들은 비록 신식 총기는 많지 않았지만 구식 총기를 충분히 보유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 상당한 전력을 갖추고 있던 사실도 감지할 수 있다.

이처럼 울진 일대에서 활약하던 신돌석 의병은 북상을 계속하여 일제의 어업침탈 거점이던 장호관莊湖館, 현 삼척시 근덕면 장호동을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신돌석 의병은 일본인을 처단하거나 일본 어선들을 격파하고 그들의 가옥 40여 채를 불태우는 등 일제의 어업 침탈세력을 응징하기도 하였다. 註64)

신돌석 의병이 동해안과 경북 내륙지방을 전전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벌여나가자, 일제 통감부는 정부에 압박을 가해 관군을 출동시켜 신돌석 의병을 탄압토록 조치하였다. 통감부는 6월 9일 전국 각지의 의병투쟁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한편, 대구와 원주의 진위대를 동해안 방면으로 출동시키도록 조종하였다. 그리하여 남쪽에서는 6월 상순경 대구진위대 200명이 정위 박두영朴斗榮의 지휘하에 영덕 방면으로 출동하였고, 원주진위대 1백 명도 참령 이승칠李承七의 지휘하에 평해 방면으로 남하하였다. 이들 양 진위대는 합동작전을 펴 평해 부근에서 협공을 가하였다. 註65) 또 6월 14일 대구진위대의 부위 이교상李敎相이 25명을 거느리고 평해지방에 도착하여 의병을 공격하기도 했다. 그리고 영해의병에 대한 소문이 서울까지 파다하게 퍼져서 대구와 원주진위대가 파견될 무렵, 통감부는 지휘사 나호羅鎬를 청송에 보내고, 중대장 권후權厚를 영해에 주둔시켜 신돌석 의병을 제압하려 하였다. 註66)

그러나 신돌석 의병은 일본군과 관군의 이러한 연합공격에도 당황하지 않고 돌격전으로, 혹은 유인전으로 파상적인 공세를 효과적으로 차단해냈다. 현지로 파견된 진위대가 남긴 기록에 “그저 구축해버렸을 뿐 그 수괴를 놓쳐버렸으므로 일시적 소강을 유지”하는 정도였다는 대목을 통해서도 의병들이 관군의 대공세를 적절하게 방어해낸 정황을 읽을 수 있다. 또 신돌석 의병장이 원주진위대와 격돌하는 과정에서 그려진 다음과 같은 영웅적 활약 장면도 사실 여부를 떠나 그간의 정황을 짐작케 한다.



6월에 원주 병정 40~50명을 돌연히 만났는데 일행이 총검을 무더기로 세우고 술을 나누고 있을 때, 장군은 앉아서 한 손으로 그 묶어놓은 총검을 터럭 다루듯 가볍게 하며, 또 옛날 제갈량이 남정南征할 때 옹개雍闓를 잡았다가 놓아준 것 같은 지략을 쓰니, 원주 병정이 모두 두려워서 굴복하고 일어나지 못하였다. 註67)



1906년 6월 하순, 신돌석 의병은 산악지대와 해안선을 따라 다시 영해지방으로 회군, 영해와 영덕읍을 연이어 성공적으로 점령하였다.

신돌석 의병은 6월 26일 영해읍의 서문을 공격, 돌입하였다. 의병들의 기습 공격에 당황한 읍내의 관군은 미처 대항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황급히 남문을 빠져나와 흩어졌다. 이때 선봉장 이하현이 격정을 누르지 못해 불을 지르기 시작하자 신돌석은 “성 안의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는가. 다만 불의한 무리만을 처단하면 된다”고 하면서 이를 제지했다고 한다. 註68)

영해읍을 점령한 뒤 신돌석은 영해군수의 죄상을 성토하고 나아가 의병의 거의 명분을 천명한 다음과 같은 격문을 영해·평해 등지로 발포하였다.

본관영해군수-필자주이 애민선정하지 않은 바는 아니지만 세 가지의 큰 죄가 있다. 막중한 의병진을 효유한다고 하면서 감히 대의에 항거하니 그 죄가 하나요, 병정을 청하여 빌어다가 의병진을 치려 하니 그 죄가 둘이요, 왜학倭學을 설치하여 사람을 무도한 지경에 빠지게 하려 하니 그 죄가 셋이다. 註69)



곧 신돌석은 구국의 대의를 가진 의병에 항거한 사실 자체가 대죄인 것이며, 나아가 원군을 청해 의병을 탄압하려 한 것, 왜학, 곧 일본학문을 가르치는 행위 등이 단죄의 대상이 된다고 천명하였던 것이다.

영해읍을 점령하여 사기를 고양시킨 신돌석 의병은 다시 인접한 영덕으로 진출한 뒤 7월 초에 영덕읍을 공략하기에 이르렀다. 『황성신문』은 7월 3일 야밤에 이루어진 영덕 점령 광경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의병 100여 명이 동헌에 돌입하여 군수를 끌어내어 죄상을 논하고, 각 공해 公廨를 부수고 군물을 압수했으며, 삼공형三公兄, 아전-필자주을 붙잡아 진중으로 구인하였다. 註70)



즉 신돌석 의병은 영덕 관아를 점령한 뒤 군수를 단죄하고 관아 건물들을 파괴하였으며, 무기 등 군수물자를 확보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전들을 진중으로 끌고 갔다는 것이다.

상황이 여기에 이르자 영덕군수는 경북관찰부에 군대 파견을 요청하였고, 경북관찰사서리 김한정金漢鼎이 이 소식을 내부에 전보로 알렸다. 이에 따라 내부에서는 “군부에 알려 파병할 터이니 대구부에서도 진위대에 파병을 청하여 토벌하라”고 명하기에 이르렀다. 註71)

이후 신돌석 의병의 행적은 한동안 불분명하다가 1906년 9월 18일 영양군 순교청을 공격하면서 다시 등장하게 된다. 이어 10월 4일 신돌석 의병이 영양군 수비면 번동翻洞을 지날 때, 당시 소모장으로 이춘양李春陽이 활약했다는 기록이 확인된다. 또 11월 4일 다시 영양 순교청을 공격하는 등 신돌석 의병은 계속 영양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또 이 무렵에 다시 영해를 공격한 기록도 보인다. 『의병대장신공유사義兵大將申公遺事』에 나오는 다음 대목이 그것이다. 註72)



수비대의 병사를 물리치고 죽였으며 무기를 몰수하였다. 원구에 이르러 의장은 박재우朴載愚의 집에 머물렀으나 수비대의 병사는 감히 영해에 가지 못하였다. 성은 텅 비었고 군수 경씨경광국-필자주는 면직되어 서울로 돌아갔다. 대구관찰부-필자주는 영해에서 두 차례나 의병의 공격에 패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신돌석 의장의 용맹과 힘을 크게 두려워해서 이에 토벌대와 수비대를 총동원해 수륙으로 들어왔다. 10리 경포鯨浦에는 전선戰船이 꽉 메웠고 만경萬頃의 용평龍坪에는 포환이 비오듯 하였다. 의장은 백성의 목숨이 걱정이 되어 후퇴해서 백암산과 일월산 사이에 주둔하면서 적을 맞아 기습공격으로 물리쳤다.



즉 신돌석 의병은 영해를 공격하여 출동한 대구진위대 관군과 격전을 벌인 끝에 이들을 격퇴시켰고, 의병의 공격으로 영해읍내가 텅 비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관군의 압박이 계속되자, 신돌석 의병은 백암산과 일월산 방면으로 퇴각해 주둔한 사실도 알 수 있다.

그뒤 겨울이 다가와 날씨가 추워지자, 신돌석 의병은 1906년 11월경 일월산과 백암산·대둔산·동대산 일대로 근거지를 옮긴 뒤 일시 소강 상태에 들어갔다. 그해 말 산중으로 잠복한 영해지방 의병의 동향에 대해 “영해군에서 창궐하던 그 의병이 동협東峽으로 향했다”고 한 당시 기사도 이러한 정황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註73)

겨울을 넘긴 신돌석 의병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재개하는 시기는 1907년 4월로 보인다. 영덕군 내면 우곡동 출신인 임한조林漢祚가 4월 12일 총칼로 무장한 신돌석 의병 수백 명과 함께 영덕군 외남면 하화동下禾洞에 있던 최찰방 집에서 군자금으로 170냥을 수집했다는 기록을 통해서 그러한 정황을 확인할 수 있다. 註74) 이후 신돌석 의병은 그해 8월까지 영해·평해·영양·진보 등지를 전전하면서 일제 군경을 상대로 도처에서 영웅적인 항일전을 수행하였다. 중군장 백남수와 김치헌 등을 주축으로 주민들의 절대적인 지지 원조하에 친일파 처단에 주력하기도 하였다. 註75)

그와 같은 신돌석 의병의 항일전 가운데 특히 1907년 8월에 영양읍을 다시 공격한 것은 특기할 만하다. 註76) 8월 20일 신돌석 의병 3백 명은 영영군청 소재지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분파소를 포위하여 공격하였고, 나아가 관아까지 소각시켜 버렸던 것이다. 일제측 자료에 “보조원 3명이 방어전을 펼쳤으나 중과부적하여 간신히 퇴각하였지만 1명이 부상”한 것으로 당시 전투상황을 기록한 점을 통해서도 의병이 취한 공세를 짐작할 수 있다. 註77)

영양 습격 후 신돌석 의병은 즉시 그곳에서 철수하여 영덕을 다시 공략하기 위해 태백산맥을 넘어 행군하였다. 그리하여 의병들은 다음날인 8월 21일 영덕을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영덕 거주 일본인들은 화를 면하기 위해 사방으로 탈출하던 지경이었다.


신돌석 의병장 유허비 

(경북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



 영양과 영덕을 차례로 유린한 신돌석 의병은 동지들을 규합하면서 파죽지세를 이어 9월 초에는 삼척 방면으로 북상길에 올라 그 길목에 있는 울진을 공략하였고, 이어 9월 7일에는 장호동까지 올라가 일본 거류민들을 습격, 이들을 단죄하기에 이르렀다. 註78)

이상으로 1906년 4월 거의 이후 1907년 9월까지 신돌석 의병이 전개한 활동상의 대강을 살펴보았다. 이후에도 신돌석 의병은 간단없이 활동을 지속해 갔다. 그리하여 이강년·유시연 등의 의병과 긴밀한 협조하에 연합작전을 구사하면서 내륙 깊숙이 진출하였고, 1907년 11월 한때는 순흥까지 점령하는 등 경북 북동부지방을 전전하면서 신속한 기동력과 위력적인 유격전술을 바탕으로 활발한 항일전을 펼쳐갔다. 그뒤 신돌석은 변절한 부하 김상렬金相烈 형제에게 타살되어 1908년 11월 순국하고 말았다.


[註 36] 「申將軍實記」 (『독립운동사자료집』 3,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411쪽. ☞

[註 37] 윤병석, 『한말 의병장 열전』, 229쪽. ☞

[註 38] 김희곤, 『신돌석, 백년만의 귀향』, 푸른역사, 2001, 26~27쪽. ☞

[註 39] 김희곤, 『신돌석, 백년만의 귀향』, 27쪽. ☞

[註 40] 조동일, 『인물 전설의 의미와 기능』, 영남대 민족문화연구소, 1980, 316쪽 ; 김희곤, 『신돌석, 백년만의 귀향』, 28쪽. ☞

[註 41] 김희곤, 『신돌석, 백년만의 귀향』, 28쪽. ☞

[註 42] 김희곤, 『신돌석, 백년만의 귀향』, 32쪽. ☞

[註 43]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1, 289쪽 ; 金奎聲 譯, 『金河洛征討日錄』, 啓蒙社, 1968, 50쪽. ☞

[註 44] 김희곤, 『신돌석, 백년만의 귀향』, 49쪽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1, 574쪽. ☞

[註 45]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1, 574~575쪽. ☞

[註 46] 김희곤, 「신돌석 의진의 활동과 성격」, 『한국근현대사연구』 19, 한국근현대사학회, 2001, 124쪽. ☞

[註 47]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3, 412쪽. ☞

[註 48]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3, 411쪽. ☞

[註 49] 김희곤, 「신돌석 의진의 활동과 성격」, 『한국근현대사연구』 19, 125쪽. ☞

[註 50] 김희곤, 『신돌석, 백년만의 귀향』, 70쪽. ☞

[註 51]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별집 1』, 426쪽. ☞

[註 52] 김희곤, 『신돌석, 백년만의 귀향』, 181쪽 도표 참조. ☞

[註 53]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별집 1』, 427쪽. ☞

[註 54] 김희곤, 「신돌석 의진의 활동과 성격」, 『한국근현대사연구』 19, 131쪽. ☞

[註 55] 김희곤, 「신돌석 의진의 활동과 성격」, 『한국근현대사연구』 19, 133쪽. ☞

[註 56] 『황성신문』 1906년 5월 14일자 ; 김희곤, 『신돌석, 백년만의 귀향』, 79쪽에서 재인용. ☞

[註 57] 김희곤, 「신돌석 의진의 활동과 성격」, 『한국근현대사연구』 19, 135쪽. ☞

[註 58] 『황성신문』 1906년 5월 12일자. ☞

[註 59]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별집 1』, 426쪽. ☞

[註 60]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1, 559쪽. ☞

[註 61]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3, 390쪽. ☞

[註 62] 『황성신문』 1906년 6월 15일자. ☞

[註 63]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말의병자료』 Ⅲ, 74쪽. ☞

[註 64]‘長興館’으로 기록되어 있는 경우도 있지만(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3, 412쪽), 이 지명은 확인되지 않는다. 『신돌석장군실기』에 ‘長湖館’이라고 한 점이나 당시 여러 가지 정황에 비추어 신돌석 의병이 공격한 대상은 오늘날의 삼척 ‘장호동’으로 인정된다(김희곤, 『신돌석, 백년만의 귀향』, 89~90쪽). ☞

[註 65] 『황성신문』 1906년 5월 30일, 6월 15일, 6월 30일자 참조. ☞

[註 66] 김희곤, 『신돌석, 백년만의 귀향』, 90쪽. ☞

[註 67]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3, 412쪽. ☞

[註 68] 김희곤, 『신돌석, 백년만의 귀향』, 96~97쪽. ☞

[註 69] 『황성신문』 1906년 7월 3일자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1, 392쪽 ; 김정미, 「한말 경상도 영해지방의 의병전쟁」, 『대구사학』 42, 대구사학회, 1991, 31쪽. ☞

[註 70] 『황성신문』 1906년 7월 9일자. ☞

[註 71] 김희곤, 『신돌석, 백년만의 귀향』, 99쪽. ☞

[註 72] 김희곤, 『신돌석, 백년만의 귀향』, 101쪽. ☞

[註 73] 『황성신문』 1907년 1월 8일자. ☞

[註 74]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별집 1』, 450쪽. ☞

[註 75]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1, 392~393쪽 ; 『황성신문』 1907년 1월 5일, 2월 7일자. ☞

[註 76] 김정미, 「한말 경상도 영해지방의 의병전쟁」, 『대구사학』 42, 34쪽 참조. ☞

[註 77]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3, 583쪽. ☞

[註 78] 김희곤, 『신돌석, 백년만의 귀향』, 124~126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