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영남지방의 중기의병 / 한말 중기의병

몽유도원 2014. 3. 3. 08:20

 제10권 한말 중기의병 / 제5장 영남지방의 중기의병

1. 산남의진

2. 신돌석 의병

3. 유시연 의병

4. 김도현 의병

5. 울진·삼척 의병



3. 유시연 의병


신돌석 의병과 산남의진이 활동에 들어간 시기에 인접한 안동에서는 유시연柳時淵, 1873~1914이 의병을 일으켜 영덕·청송·영양 등지를 무대로 활동에 들어갔다. 안동시 임동면 수곡水谷 출신인 유시연은 전기의병 때 안동의병의 소모장과 선봉장을 지냈던 인물로, 전기의병 해산 이후 이현규李鉉圭·김도현金道鉉·신돌석 등의 우국지사들과 교유하며 시세를 관망하고 있었다.

유시연은 을사조약 늑결을 계기로 재기항전을 전개하였다. 뒷날 1913년에 영주에서 체포당한 후 유시연이 공판정에서 일본인 검사를 향하여,



너희 나라가 을사년 이후로 우리의 독립을 저지하고 우리의 충신을 죽이고 우리 민족을 노예로 만들더니, 마침내 우리의 종묘사직을 빈 터로 만들고 우리 임금을 가두고 우리의 고혈을 짜내고 있으니, 만국공법에 따르더라도 용서하지 못할 것이거늘, 하물며 우리나라 신민으로서는 지통하고도 원통하니 불구대천지원수가 아니겠느냐. 註79)



라고 질타한 대목에서도, 을사조약 늑결로 인해 실질적으로 나라가 망하게 된 정황을 토로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이때 받은 충격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유시연은 1906년 봄에 경주에서 영남의병대장에 추대되어 활동을 재개하였다. 하지만, 그가 재기한 시기는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그와 같이 활동하였던 영양의 조박용이 남긴 「유시연 약기」에서 1906년 2월 8일음 1.15 경주 불국사에서 3백 명이 모여 유시연을 영남의병 지휘장으로 추대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1906년 초봄에 재기한 것으로 생각된다. 註80) 또 해방 직후에 유시연의 족손 유규원柳奎元이 지은 「유의사전柳義士傳」에는 재거 당시 상황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을사년 10월에 소위 5조약이 늑결되어 온 나라가 동요하고 인심이 분개하였으니, 의사가 처음 소모장으로 장정 수백 명을 모아 한 고을을 종용하게 되자 열읍이 호응 봉기하여 각기 의병의 기치를 세우게 되었다. 병오년1906년-필자주 봄에 경주의 한 사찰에서 모두 회합하여 열읍의 대표로 모인 자가 100명이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가로되 “우리 영남의 이 거사에 통솔 책임자가 있은 연후에 부대를 정비하고 기율을 세우고 상벌을 밝게 할 수 있을 것이며 일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고 여러 사람이 의사를 ‘영남의병대장’으로 추대하였다. 註81)



여기에 따르면, 을사조약 늑결 후 유시연이 소모장이 되어 안동 일대에서 의병 수백 명을 모아 활동을 개시하게 되자, 여기에 호응하여 영남 각지에서도 의병이 일어났으며, 이와 같은 상황에서 각지 의병의 대표자 100여 명이 경주 어느 절에서 회합을 가져 영남의병의 총대장에 유시연

을 추대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황으로 미루어 유시연은 을사조약 늑결 직후부터 의병 재기를 위해 구체적인 활동에 들어갔고, 또 각지 의병들이 경주에서 회합을 갖고 영남지방 의병 연합체를 결성했을 때 그 주장으로 선임된 것으로 보인다. 즉 유시연은 이와 같은 경주회합을 계기로 본격적인 재기 항일전에 돌입하였던 것이다.

유시연 의병은 거의 후 1908년 여름까지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이 의진은 이강년 및 신돌석 의병, 그리고 인근지역에서 활동하던 의병들과 부단히 연락을 취하고 연합체계를 구축하면서 전력을 극대화하는 가운데 활동을 벌였다. 유시연 의병의 대체적인 활동무대는 안동을 중심으로 영덕·봉화·예안·진보·영양 등 경북 내륙지방에 폭넓게 걸쳐 있었다.

거의 이후 유시연 의병의 활동내용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현전하는 자료에 의거하면, 이 의진은 거의 직후 신돌석 의병과의 연합을 위해 진보·영덕 방면으로 진출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906년 6월 상순 대구진위대 정위 박두영朴斗榮이 지휘하는 관군 200명의 공격을 받아 피해를 입게 되자, 다시 안동으로 회군하였다. 이후 유시연 의병은 1907년 2월 예안분파소 공격을 시작으로 1908년 1월까지 안동 인근지역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지속적인 전투를 벌였다. 특히 예안분파소 공격 때에는 박처사朴處士 의병과 연합을 통해 분파소를 점령하고 무기를 노획하였다. 유시연과 동향인 임동 출신의 박처사는 박인화朴仁和로 추정되고 있으며, 그는 휘하에 한때 300명을 거느리고 1908년 5월 순국 때까지 예안·안동·진보·영양 등지에서 활발하게 항일전을 수행하였다. 註82)

1907년 8월 대한제국 군대 강제해산 이후에 유시연 의병은 일본군 수비대로부터 심한 탄압을 받게 되자 활동 근거지를 일월산 일대로 옮겨 투쟁을 계속하였다. 이 무렵 신돌석 의병이 일월산 방면으로 진출하였으므로, 상호 연합전선을 구축하기 위한 전략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일월산 일대가 경북 내륙지방 의병의 주요한 활동 근거지로 부상하게 되자, 일본군은 전력을 투입해 이 일대를 포위하고 대대적인 탄압작전을 전개하였다. 즉 1908년 2월 일제의 한국주차군 제1구사령관은 예천수비대를 비롯하여 영주·함창·상주·안등 등지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 병력을 동원하여 봉화에서 예안까지 남북으로 길게 전선을 형성한 뒤 일월산을 근거지로 삼고 있던 의병을 파상적으로 탄압하였던 것이다. 이때 유시연 의병은 일제 군경을 상대로 일월산 일대의 도처에서 영웅적인 투쟁을 전개하였지만, 전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채 결국 패산하고 말았다. 註83)


[註 79]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3, 217쪽. ☞

[註 80] 한준호, 「안동 출신 의병장 유시연」, 『안동사학』 11, 안동대사학회, 2007, 96쪽. ☞

[註 81]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3, 213~214쪽. ☞

[註 82] 한준호, 「안동 출신 의병장 유시연」, 『안동사학』 11, 96~97쪽. ☞

[註 83] 한준호, 「안동 출신 의병장 유시연」, 『안동사학』 11, 99~103쪽. ☞


4. 김도현 의병


경북 영양에서는 전기의병 때 활동한 벽산碧山 김도현金道鉉, 1852~1914이 재기항전의 기치를 들었다. 김도현은 1896년 10월 전기의병 활동을 종료한 뒤 향리에 은거해 있던 중 1903년 무렵 경북관찰사 이헌영李永으로부터 영양·청송·진보·영덕·영해 등 5읍 도집강都執綱을 위촉받아 이 일대에 횡행하던 화적 토벌에 진력하였다. 註84) 전기의병 해산 이후 민심이 어지러워 도처에서 영학당英學黨·남학당南學黨·서학당西學黨·동학당東學黨·활빈당活貧黨 등이 일어나 탐관오리·부호 등을 습격하였는데, 영양지역에는 특히 그 빈도가 잦았다. 김도현이 맡았던 도집강은 이와 같은 화적들을 효유 진무하고 기강을 확립하던 직책이다. 이 시절 그가 거느렸던 조직의 성원들은 얼마 뒤 재기항전을 도모할 때 곧 의병으로 전환되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이와 같은 전력을 지닌 김도현은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어 전국의 민심이 격분하게 되자, 조약 반대투쟁의 대열에 앞장섰다. 이때 그는 서울에 올라가 조약 폐기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는 한편, 열국 공사관에도 서신을 보내 국권수호를 지원해 줄 것을 호소하고 나아가 일제의 국권침탈을 맹렬히 규탄하였다. 만국공법에 따라 일제의 횡포를 누르고 한국의 국권을 원조해 줄 것을 간곡히 요청한 서한 가운데 중요한 일단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아, 저 일본이 그들의 끝없는 야욕을 채우고자 갖은 불법을 자행하여 보호의 명분을 빌어 군대를 거느리고 궁궐을 침범하고 우리 정부를 협박하여 5조약을 성립하여 우리 3천리 강토를 빼앗고 500년 종사를 뒤엎었다. … 엎드려 바라건대, 각국 공사들은 너그러운 도량으로 공법을 엄히 밝혀 저 일제의 전횡을 책하여 우리 대한의 유생을 불쌍히 여기고 42년 동안 지켜온 우리 임금의 지위를 보호하여 2천만 백성의 피맺힌 원한을 풀어주시라. 손모아 절하며 머리숙여 구구히 읍축泣祝한다. 註85)



이처럼 을사조약 반대투쟁에 앞장섰던 김도현은 서울에서 귀향하는 도중 안동에 들려 도산서원을 근거지로 일시 재거를 도모하려 하였으나 여의치 않자 영양으로 돌아왔다. 이에 귀향 즉시 그는 다시 의병의 기치를 세웠다. 즉 1906년 2월 9일음 12.27 고향에 도착한 그는 이틀만인 2월 11일음 12.29 영양읍 장터에 방문榜文을 내걸고 각 면에 통문을 돌리며 의병을 규합하였다. 그리고 미리 약속된 기일인 2월 15일, 과거 도집강 시절 휘하에 거느렸던 포군들을 주축으로 1백 명의 의병을 모아 항일전의 기치를 세웠다. 註86)

하지만, 김도현 의병은 거의와 동시에 안동진위대의 탄압을 받아 해산당하고 말았다. 거의 소식을 듣은 영양군수 이범철李範喆이 의병 해산

을 종용해오자, 김도현 의병장은 “적신이 권력을 농단하니 의리로 참아 좌시할 수 없는지라, 이곳에서 의병을 일으켜 분을 풀고자 한다. 군수는 또한 현 정부에서 보낸 관리라 그 명령을 받지 않을 수 없을 터이니 여러 말 하지 말고 어긋나는 것은 먼저 제거할 것이다”라고 하면서 군수의 해산 요구를 일축하였다. 註87)

그러자 군수는 안동진위대 관군을 동원하여 의병을 강제로 해산시켰고, 나아가 김도현 의병장도 일제 헌병과 경찰대에 체포되고 말았다. 이때 김도현에게는 도집강 시절 결납結納을 손상시켰다는 죄목까지 씌웠다. 이로써 김도현 의병은 미처 활동을 전개하기도 전에 와해되고 말았으며, 김도현은 대구감옥에 감금되었다.

김도현은 얼마 뒤 석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906년 5월 1일음 4.8자로 광무황제로부터 거의를 도모하라는 밀지密旨를 받았던 사실로 보아 그러한 정황이 짐작되기 때문이다. 註88) 이에 그는 다시 의병을 일으킬 결심으로 삼남 각지에 격문을 띄우려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끝내 항일전에 투신하지 못하고 말았다. 석방 후 밀지를 받았을 무렵 그가 작성한 격문은 다음과 같이 비분강개한 내용을 담고 있다.



간신이 국권을 농락하고 적병은 임금을 협박하여 3천리 강토의 유무가 경각에 달렸고 500년 종사의 전복이 조석간에 있으니 고금천하에 어찌 이토록 심한 일이 있겠는가. 교화를 외면한 사악한 인간이 의리를 저버리고 무리지어 오직 원수를 돕는 것을 일삼고, 법도에서 벗어난 그릇된 사람들은 때를 따라 세력에 아부하여 오직 오랑캐의 소원을 이루어주기를 도모하고 있다. … 『춘추』의 ‘비

록 패전하더라도 영광이 된다’는 의리에 입각하여 동지를 불러모아 부자형제가 대오를 편성하고 호미와 가래, 쇠스랑으로 무기를 만들어서 결단코 도적과 더불어 한 하늘 밑에 살지 않기를 맹세하였다. … 사졸을 모으고 군기를 수습하여 심력을 합쳐서 함께 대사를 도모할지어다. 일이 이루어지면 나라를 회복하여 군은君恩에 보답하는 것이요, 실패하더라도 오히려 충의지사는 될 것이다. 註89)



김도현 의병장의 순국 도해비 (경북 영덕군 영해면 대진리)

 


위 격문에서 김도현은 먼저 일제와 결탁하여 국권을 농단한 친일매국적을 맹렬하게 성토한 뒤 의리와 명분에 입각하여 성패를 떠나 함께 의병을 일으켜 결사항전을 펼칠 것을 주창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김도현의 의병정신은 결국 자결순국으로 귀결되었다. 1910년 국치 이후 그의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었다. 친상親喪을 치른 직후 김도현은 홀연히 집을 떠나 동해안으로 갔다. 그리고 그는 현재 해수욕장으로 유명한 대진 앞바다 속으로 걸어 들어가 64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 날이 1914년 12월 23일음11.7로 동짓날이었다. ‘도해자정蹈海自靖’ 전날 산수암汕水巖에서 남긴 다음 절명시에는 자신의 일생이 함축되어 있다. 註90)



오백년 선말鮮末에 태어나 我生五百末

붉은 피 전신에 어리어赤血滿空腸

중년의 항일 19년에中間十九載

터럭은 추상처럼 변했구나 鬢髮老秋霜

국망에 눈물은 마르지 않고 國亡淚未已

친상에 마음은 더욱 상한다親沒心更傷

홀로 서 있는 옛산은 푸른데 獨立故山碧

백계百計에 무일방無一方이라百計無一方

만리 먼 바다가 보고파라萬里欲觀海

7일이 양을 회복하는 동지이니 七日當復陽

희고 흰 천 장 물결이 白白千丈水

족히 내 한 몸 간직하겠구나足吾一身藏


[註 84] 『대한매일신보』 1906년 2월 14일자 ; 李晩燾, 『響山日記』, 국사편찬위원회, 1986, 849쪽. ☞

[註 85] 金道鉉, 「布告西洋各國文」 『碧山先生文集』 권1. ☞

[註 86] 김강수, 「한말 의병장 벽산 김도현의 의병활동」, 『북악사론』 2, 국민대, 1990, 233쪽. ☞

[註 87] 김강수, 「한말 의병장 벽산 김도현의 의병활동」, 『북악사론』 2, 233쪽. ☞

[註 88] 김도현, 「附 密旨」, 『벽산선생문집』 권1. ☞

[註 89] 김도현, 「擬檄告三南各郡文」 『벽산선생문집』 권1. ☞

[註 90] 김도현, 詩-「到大津汕水巖」, 『벽산선생문집』 권1 ; 「蹈海日氣」, 『벽산선생문집』 권2-부록. ☞


5. 울진·삼척 의병


1906년 봄 울진에서는 김현규金顯奎와 전 도사都事 김하규金河圭 등이 의병을 일으켰고, 삼척 일대에서는 전 연일군수 황청일黃淸一이 거의하였다. 김현규는 1906년 1월경음 김하규에게 “우리는 지금 나라를 위해 일제를 물리치려 하니 함께 군사를 모아 거의하자”고 제의한 뒤 포군을 모아 거병하였다. 또 전기의병 때 민용호가 거느리던 강릉의병에 참가한 전력이 있던 황청일은 황지에서 김성삼金成三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이들은 인근지역에서 규합한 포군들을 주축으로 신돌석 의병과 서로 호응하여 울진, 삼척 일대에서 활동하였지만, 현지로 출동한 원주진위대의 공격으로 4월 2일 패산하고 말았다.

이들 가운데 김하규와 황청일은 피체 후 서울로 압송되어 1906년 10월 평리원에서 7년 유형을 선고받고 정운경 의병장과 함께 황해도 황주의 철도鐵島에 유배되어 고초를 겪었으며, 그뒤 1907년 11월 일시 완도로 이배移配되었다가 다음달에 광무황제의 특지로 석방되었다. 註91) 하지

만, 김하규는 이후에도 항일전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으며, 특히 1906년 9월경 울진 불영사 일대에서 대규모 항일전을 준비하던 중 배신한 부하의 난동으로 불의에 순국하고 말았다. 註92)


[註 91]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1, 558~560쪽 ; 『일성록』 1906년 9월 8일, 9월 15일, 1907년 10월 23일조(이상 음력) ; 『황성신문』 1906년 7월 12일자 ; 『관보』 1906년 10월 30일, 11월 7일, 1907년 11월 4일, 12월 3일자. ☞

[註 92] 송상도, 『기려수필』, 113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