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산남의진 / 영남지방의 중기의병 / 한말 중기의병

몽유도원 2014. 2. 26. 09:14

제5장 영남지방의 중기의병


산남의진

신돌석 의병

유시연 의병

김도현 의병

울진·삼척 의병


1. 산남의진


1. 산남의진의 편성

을사조약 늑결 후에 일어난 산남의진山南義陣은 경북 영천을 중심으로 경북 남동부지역, 즉 영덕·흥해·청송·청하·포항·경주 일대에서 그 위세를 크게 떨친 의진이다. 특히 이 의병을 주도했던 정환직鄭煥直, 1843~1907과 정용기鄭鏞基, 1862~1907 부자는 서로 연이어 의병장이 되어 항일전을 전개하던 중 순국한 특이한 사례를 남겼다. 아들 정용기가 먼저 의진을 이끌고 항일전을 수행하던 중 순국하게 되자, 아버지 정용기가 아들을 이어 다시 의병장이 되어 의진을 인솔하며 활약하였으나 그도 역시 순국하였던 것이다.

산남의진은 규모나 활동지역 면에서 뿐만 아니라 활동기간 면에서도 영남지방의 의병을 대표하는 의진 가운데 하나였다. 을사조약 늑결 이후인 1906년 3월에 일어난 이 의진은 영남 각지의 세력을 규합하고 몇 차례 변신을 거듭하면서 후기의병 단계인 1908년 7월까지 항일전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투쟁과정에서 산남의진은 또한 신돌석·유시연 의병 등 인접지역에서 활동하던 의진과 부단히 연계되어 상호 연합활동을 모색하였던 점도 특기할 만하다.


정환직·용기 부자 의병장의 탄생지인 

충효동의 사적비 (경북 영천시 자양면 충효리)



산남의진의 탄생 배경은 여타 의진의 경우와 다른 특징이 있다. 정환직이 의병을 일으키게 되는 결정적 계기는 그가 중추원의관으로 광무황제를 측근에서 보필하고 있던 중 의병을 일으켜 국권회복을 도모하라는 황제의 밀명을 직접 받은 것이었다.

산남의진의 산파였던 정환직은 1844년에 경북 영천군 충효동忠孝洞, 자양면 검단리의 잔반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10대조는 과거 임진왜란 때 민병을 모집하여 영천과 경주 일대에서 크게 용맹을 떨친 의병장 정세아鄭世雅, 1535~1612였다. 그는 1887년에 44살의 늦은 나이로 5품관인 서울의 북부도사北部都事에 임명되었고, 이듬해에는 금부도사에 올랐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 때 정환직은 삼남참오령三南參俉領의 직함을 갖고 삼남지방의 농민군 진압에 앞장섰고 황해도 구월산 등지에서 농민군 선무공작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러한 과정에서 정환직은 일제의 국권침탈 실상을 직시하고, 나아가 민족 주체성 회복을 통한 국권수호의 필요성을 깊이 인식하였다. 청일전쟁에서 일제가 승리한 뒤 한국 침략의 최고 하수인이 된 전권공사 대조규개大鳥圭介를 질타한 격문 「격일장대조규개檄日將大鳥圭介」를 발포하여 자주성에 기반한 한민족의 단합된 힘으로 일제 침략세력을 격퇴할 수 있다고 역설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병의뢰반대소日兵依賴反對疏」를 올려 농민군 진압에 일본군을 끌어들이려던 정부시책의 부당성을 통렬히 지적한 것이 그것이다. 註1)

정환직은 그뒤 1897년 대한제국 성립 직후 태의원太醫院 별입시別入侍에 임명된 이후 을사조약 늑결을 계기로 항일전에 투신할 때까지 중추원의관 등으로 광무황제를 측근에서 보필하게 되었다. 註2) 1899년 종묘 화재 때에는 광무황제를 업고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킨 일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며, 이후 황제는 그를 깊이 신임했다고 한다. 註3)

을사조약 늑결 이후 광무황제는 비밀리에 측근들에게 의병을 일으킬 것을 당부하는 밀조密詔를 내렸던 것으로 보인다. 이강년·고광순·노응규 등이 이때 광무황제로부터 밀조를 받았다고 전해지는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정환직도 광무황제로부터 이 무렵 중국의 고사인 ‘화천지수華泉之水’에 가탁한 ‘짐망朕望’이라는 밀지密旨를 받고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심하고 그 준비에 착수한 것으로 전해진다. 註4)

이에 정환직은 아들 정용기와 함께 거의 문제를 상의한 끝에, 자신은 그대로 서울에 머물러 있으면서 의병을 후원키로 하고 정용기가 고향 영천으로 내려가 거사를 도모하기로 방침을 세웠다. 그리고 영남지방에서 의병의 군세를 크게 떨친 뒤 서울을 향해 진공하는 것으로 향후 활동방향을 구상해 놓았다.

고향으로 내려온 정용기는 평소의 지기인 이한구李韓久와 손영각孫永珏을 비롯해 재종제인 정순기鄭純基 등과 더불어 거사계획을 확정하고 먼저 일반 주민들의 항일민족의식을 고취할 목적으로 국문으로 「권세가勸世歌」를 지어 민간에 배포하는 한편, 다수의 통문과 격문을 돌려 각지의 의병을 소모하고 의병활동에 협조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그 가운데 각지로 발포한 통문 가운데 일단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적신賊臣이 나라를 팔고 강한 이웃나라가 함부로 동맹하여 외적의 모욕이 날로 심하여 대세가 날로 기우니, 500년 문명국이 장차 공허로 돌아가고 2천만 생령이 멸절하게 될 위기가 목전에 닥쳤도다. 말과 생각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통곡하고 자결할 마음이 누군들 없을 수 있겠는가. … 우리들은 비록 용렬한 재질이지만 역량을 헤아리지 않고 장차 기울어가는 국세를 만회할 생각과 멸절되려는 백성을 구원할 생각으로 한 두 동지와 더불어 천지에 맹세하고 민간에 군사를 모으고 충정을 널리 펴노니 어느 곳이나 존비귀천을 막론하고 일시 단결하여 우리 묘당廟堂에 글을 올리고 만국에 글을 보내어 우리 태조 고황제의 옛 법도를 회복하여 위로 우리 대황제폐하의 은혜에 보답하고 아래로 도탄에 빠진 우리 2천만 형제를 구제한다면 천만 다행이라. 註5)



위 인용문의 요지는 먼저 일제의 국권침탈을 맹렬하게 성토한 뒤, 이어 일제구축과 전통 문물제도 수호, 즉 국권회복을 위해 공의公義를 일으켜 거의하게 되었다는 당위성을 천명한 데 있는 것이다.

정용기 등의 주도하에 영천 창의소가 설치되고 의병을 소모하게 되자, 영남 각지로부터 여기에 호응하여 많은 의병들이 모여들었다. 이 무렵 이한구李韓久가 청송 방면으로 가서 모군해 오고, 정순기는 영해로 가서 신돌석 의병과 연락한 후 돌아왔으며, 이규필李圭弼이 흥해로 가서 정래의鄭來儀 등을 불러오게 하는 등 인근지역의 항일세력과 연락을 취하는 한편 동지들을 규합하였다. 그리하여 1906년 3월 산남의진이 편성되고 정용기가 의병장으로 선임되기에 이르렀다. 또 본진에다 지방연락 책임자를 선임하고 각지에는 활동 책임자를 두어 각지의 민병을 소모하였을 뿐만 아니라 더욱 효과적인 항일전을 전개하려 하였다. 이처럼 출범한 산남의진의 편제와 지방연락 책임자 및 각 지역에 배치된 활동책임자 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註6)



의병장 : 정용기

중군장 : 이한구참모장: 손영각

소모장 : 정순기도총장都總將 : 이종곤李鍾崑

선봉장 : 홍구섭洪龜燮후봉장: 서종락徐鍾洛

좌영장 : 이경구李景久우영장: 김태언金泰彦

연습장 : 이규필도포장: 백남신白南信

좌익장 : 정치우鄭致宇우익장: 정래의

좌포장 : 이세기李世紀우포장: 정완성鄭完成

장영집사將營執事 : 최기보崔基輔 군문집사 : 이두규李斗圭

지방 연락책임자

이규필 백남신 정완성 최기보 최지환 정진학 정대하 이창송

각지 활동책임자 수

영천 : 5명신녕 : 6명흥해 : 4명청하 : 4명

영덕·영해 : 2명영일·장기 : 2명영양·봉화 : 2명기계 : 3명

예안·안동 : 3명비안·의성 : 2명군위·의흥 : 3명 죽장 : 3명

하양·경산 : 3명대구·현풍 : 3명청도·창녕 : 2명 진보 : 3명

울산·언양 : 3명영산·밀양 : 2명지례·고령 : 2명 청송 : 5명

인동·칠곡 : 2명김산·성주 : 2명상주·선산 : 2명 경주 : 4명



위의 편제를 통해 산남의진은 활동 대상지를 경북 전역 뿐만 아니라 밀양·창녕 등 경남 동부지방까지 걸쳐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지방연락 책임자와 각 지역 담당 활동책임자 인원이 24지역에 총 79명에 달했을 정도로 그 규모가 방대하였다. 이처럼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각지 책임자를 선임하면서 의병세력을 규합하고 활동의 폭을 넓히려 했던 것은 산남의진이 편성되기까지 그만큼 거의를 위한 준비가 치밀하게 이루어졌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위의 산남의진의 편제에 등장하는 인물 대부분은 의병장 정용기를 중심으로 거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 동안 서로 긴밀하게 연락을 취해온 동지 관계에 있었거나, 의병 활동의 전력을 가진 지사들이었다. 중군장 이한구는 경남 영일의 유생으로 정용기와는 친척처럼 동고동락했던 인물이고, 참모장 손영각은 이한구와 동향의 지우였으며, 소모장 정순기는 정용기의 재종제였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이들 네 사람은 정환직의 뜻을 받들어 각지에서 장정들을 모아 의진을 결성하는 데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인물들이다. 그리고 도총관 이종곤은 경주에서 활약하다가 합류한 인물이었으며, 선봉장 홍구섭은 과거 전기의병 때 김도화金道和가 이끌던 안동의병에서 선봉장으로 활약한 홍병태洪秉泰의 아들이었다. 또한 후봉장 서종락과 우영장 김태언은 청송에서 의병으로 활동하던 중 산남의진에 합류하였다. 연습장 이규필은 의병 소모과정에서 흥해로 파견되어 정래의 의병을 소모해온 인물이었다. 註7)

거의 당시 산남의진의 규모는 명확하지 않으나 이후 전성기에는 1,000명에 달했을 만큼 대부대였다고 전해진다. 그 성원은 대개 각지에서 소모된 농민층이 주류를 형성하였고, 그밖에 산포수와 군인·노동자·광부 등 다양한 신분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산남의진의 활동사실을 기록한 『산남창의지』



하지만, 이들 모두가 총포 등의 무기를 확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실제 전력은 크게 두드러지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註8)

산남의진은 거의 초기부터 항일전을 지속해가는 과정에서 전력 강화를 위해 특히 포군의 모집과 무기수집에 주력하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모병과정에서 포수들을 강제로 징발하였을 만큼 포수가 보유하고 있던 전력에 큰 애착을 갖고 있었다. 이세기와 백남신을 비롯해 구한서具漢書·안수원安守元·배연즙裵淵楫·장대익張大翼 등의 포수들이 거의 초기부터 활동기간 내도록 산남의진의 지휘부에 배치되어 있던 사실을 보더라도 이들이 얼마나 큰 역할과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또한 산남의진은 무기를 확보하기 위해 다른 의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관아를 습격하기도 하였다. 뒷날 정환직이 인솔한 산남의진이 신녕新寧을 습격하여 관아의 무기 400정을 확보한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註9)


2. 산남의진의 활동

1) 산남의진의 초기 활동

정용기가 거느리는 산남의진은 결성 직후 신돌석 의병의 패전 소식을 듣고 이를 구원하기 위해 급거 영해를 향해 행군하였다. 그리고 그 길목에 있던 청하읍을 일차 공격목표로 삼았다. 신돌석 의병과 산남의진은 활동과정에서 상호 협조관계를 맺고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용기 의병장은 영해를 향해 행군을 개시할 즈음 신돌석 의병을 탄압하기 위해 출동해 있던 안동진위대장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내 구국의 대의로 일어난 의병을 탄압하는 행위를 맹렬히 성토하면서 반성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을사 10월 19일 5적이 나라를 판 일을사조약, 음력 10월 21일의 오류-필자주은 누구인들 통곡하며 자결하고자 하지 않으리오. 우리 대한 인민이 자유의 방침을 깨닫지 못하고 단지 핍박의 기세만 두려워한 까닭에 분함을 머금고 고통을 참으면서 묘당廟堂의 조획調劃만 기다렸더니 지금까지 7삭이 지났으나 조용히 아무 소식이 없으니, 비록 어리석은 백성일지라도 불구대천지원수를 참기가 어려워 자주의 기초를 만회코자 하였더니 안동진위대가 영해의진을 격파하였다고 하니, 5백년 문명의 나라가 영원히 왜적의 노예가 되는 것이 옳겠는가. 각하는 대대로 향족鄕族의 후예로 깊이 천은天恩을 입은 처지에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어찌 없는가. 우리들이 떳떳한 마음으로 장차 민족이 멸망하게 된 것을 슬퍼하고 국세를 만회할 마음이 간절하여 금일 의병을 일으켰으니, 귀대貴隊에 알리지 않을 수 없도다. 우리들이 만일 나라에 다소라도 도움이 된다면 몸이 희생되더라도 진실로 원한이 없을 것이다. 註10)



즉 정용기는 위 글에서는 진위대가 의병을 탄압하는 행위를 ‘500년 문명의 나라를 영원히 왜적의 노예로 만드는’ 반민족적 행위로 규정하면서 강하게 성토하였다. 그리고 구국의 의리에 따라 공의公議를 모아 산남의진이 거의하게 된 사실을 통보하면서 결사항전의 결의를 다졌던 것이다.

그러나 청하를 향해 행군하던 산남의진이 4월 28일 경주 관내의 우각牛角, 현 영일군 신광면 우각동에 당도하였을 때, 경주 진위대장 참령 신석호申錫鎬가 정용기에서 간계를 담은 서신 한 통을 보내왔다. 서울에서 정환직으로 추측되는 대관 한 사람이 구금당하였으니,이 문제로 만나 상의하자는 것이었다.

정용기는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놀랐을 뿐만 아니라 처신에 대단히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당초 거의의 구상이 아버지 정환직으로부터 나온 이상 그 일이 중간에 누설될 경우 의진의 활동에 큰 제약이 가해질 것은 물론이며, 더욱이 그의 아버지의 신변도 크게 염려되던 상황이었다. 이에 정용기는 진위대 관군들을 따라 경주성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이것은 정용기를 체포하려던 진위대측의 함정이었다. 그는 입성 즉시 체포되었고, 얼마 뒤 대구 경무청으로 압송되었다. 註11) 이로써 산남의진은 본격적으로 활동을 개시하기도 전에 의병장이 체포되어 일시 전열이 와해되는 수난을 당하게 되었다.

한편, 의병장 정용기는 경주로 떠날 때에 혹 신상에 변고가 생길 경우에 대비하여 중군장 이한구에게 후사를 일임해 놓았다. 이에 이한구는 신돌석 의병에 연락을 취해 함께 경주를 공격하고 정용기 의병장을 구출할 것을 제의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정용기가 곧 대구로 이송되었기 때문에 경주 공격을 포기하고 전열을 재정비하였다. 이한구가 지휘할 당시 산남의진의 편제는 다음과 같다. 註12)



도총장 : 김원서金元瑞 소모장 : 정래의

선봉장 : 서종락 좌익장 : 홍구섭

우익장 : 남석인南錫仁 도포장 : 백남신

우포장 : 최기보 좌포장 : 박경화朴敬化

후포장 : 이경구 군문집사 : 최경옥崔景玉

장영집사 : 이두규



위의 편제상 지휘부 인사들은 거의 당시의 인물들이 대부분이지만, 새로 영입된 인물들도 기용되었다. 그 가운데 도총장의 중임을 맡은 김원서는 영덕에서 합류해온 인물이다. 그리고 정순기·이세기와 같은 초기 거의 때의 핵심인물들은 정용기의 석방교섭을 위해 잠시 일선에서 물러나 있었기 때문에 위의 편제에 누락되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편제를 갖추고 전열을 다시 정비한 산남의진은 중군장 이한구의 지휘하에 각지를 전전하며 항일전을 펼쳤다. 이 무렵 산남의진은 특히 신돌석 의병과 연합하기 위해 영해·영덕 일대로 이동해 있었다. 6월 1일음 윤4.10 밤에는 영덕의 강구항를 공격하여 어업을 침탈하고 있던 일본인들을 처단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 신돌석 의병도 각지에서 출동한 진위대의 집중적인 탄압을 받고 있던 상황이었으므로 연합전선을 구축하기가 곤란한 실정이었다.


산남의진의 선봉장 서종락이 사용하던 화승총



사실 산남의진이 편성되어 활동을 개시할 무렵에 인근의 영해에서는 신돌석 의병이 큰 세력을 형성하여 활약 중에 있었고, 안동 부근에는 유시연 의병이 신돌석 의병과 연락을 취하면서 활동하고 있었다. 이로써 경북 일대가 항일의병의 거점으로 부상되면서 일제는 이 일대의 의병 탄압에 부심하게 되었다. 그 결과 1906년 6월경에는 일본군 수비대 병력을 영남 동북부지방으로 집결시키는 한편, 대구·원주·경주·안동 진위대 군인들을 동원해 각지 의병탄압에 전력을 집중하였다. 그러므로 산남의진 역시 활동이 크게 위축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주장 정용기가 구금된 이래로 의진의 사기가 저상되어 있었고 그에 따라 전력도 위축되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활동을 지속할 수 없던 상황이었다. 그러므로 산남의진은 1906년 7월 하순에 이르러 일시 활동을 중지한 채 해산하고 말았다. 이한구가 이때의 정황에 대해



지금 대적이 당도하니 죽는 것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 그러나 지금 민심이 돌변하여 도리어 의병을 국가에 방해가 된다고 하니 우리들이 금일 죽게 되면 이름없이 원통하게 죽는 것이다. 또 정공정용기-필자주이 머지 않아 돌아온다고 하니 정공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다시 일어나는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겠 는가. 註13)



라고 토로한 대목을 통해서도 이 무렵 산남의진이 처했던 고단한 형세를 짐작할 수 있다.

이로써 5개월에 걸친 산남의진의 1차 거의 활동은 종료되었다. 그후 잔존 의병들은 개별적으로 혹은 소규모 부대로 각지에 흩어져 활동하다가 2차 거의 때 다시 합류하게 된다.


2) 산남의진의 재건

아들 정용기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정환직은 백방으로 주선하여 1906년 9월 대구 경무청에서 그를 석방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에 정환직은 서울에서 영천으로 내려와 아들 정용기와 중군장 이한구, 참모장 손영각, 소모장 정순기 등 핵심인물들과 함께 산남의진의 재건을 촉구하였다. 그리고 정환직은 정용기에게 이듬해 음력 5월까지 의병을 모아 태백산맥 줄기를 타고 강릉으로 북상, 전열을 정비한 다음 서울에 입성할 것을 지시해 놓았다. 이는 산남의진을 서울에 입성시켜 일제 통감부를 타도하고 매국적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정환직은 강릉에 본진을 정하고 북상해 오는 의병들을 이곳으로 영접, 인도한다는 계획하에 총포와 탄환 등의 무기 및 군량의 준비에 진력하였다. 그는 아들 정용기가 향리에서 의병을 일으키는 동안 서울의 사저를 거점으로 하여 내외 정세를 살피는 한편, 의병을 지원하는 일에 전력을 기울였다. 서울과 관동, 서북지방의 동지들을 규합하고 의병을 소모하여 영남으로 보내고, 또 서울에서 무기를 수집할 뿐만 아니라 화약 제조법 등을 가르쳐 강릉과 영남으로 분송하였다. 나아가 후일 의병이 상경할 요로要路에 붙일 격문을 준비하였으며, 군자금을 조달하여 영남으로 밀송하는 등 매우 분주한 나날을 보내었다. 이로 인해 전 가산이 소진되어 가족 모두는 부득이 하향할 수밖에 없었다. 註14)

산남의진은 1907년 4월에 이르러 재기할 수 있었다. 그 동안 주장 정용기가 옥고를 치른 끝에 발병으로 인해 거의 반년 동안 운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1907년 봄에 이르러서야 정용기를 비롯한 여러 지사들이 본격적으로 의병을 소모하는 등 산남의진의 재건에 착수하게 되었다. 먼저 남석인南錫仁과 이세기 등이 의병을 모으기 위해 청송·진보 방면으로 파견되었으나 오히려 남석인이 체포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다시 정순기와 이종곤李鍾崑이 청송으로 들어가 모군을 해오게 되었다. 또 이규필은 흥해·청하 등지에서 군사를 모집해 왔으며, 홍종섭은 경주 방면에서 군사를 모아왔다. 註15) 뿐만 아니라 각지로부터 의병이 합류해 오는 경우도 있었다. 부산·대구 방면에서는 김현극金賢極과 유화실柳花實이 화약을 운반하여 오고, 안동에서 김석정金石井이, 동해 방면에서는 임중호林中虎가, 의성에서는 박태종朴泰宗이, 경주에서는 권규섭權奎燮 등이 각기 일단의 의병을 거느리고 합류해 왔던 것이다. 註16)

정용기를 의병장으로 삼고 재기한 산남의진의 편제는 다음과 같다. 註17)



의병장 : 정용기

중군장 : 이한구 참모장 : 손영각

소모장 : 정순기 도총장 : 박태종朴泰宗

선봉장 : 홍구섭 후봉장 : 이세기

좌영장 : 권규섭 우영장 : 이규필

연습장 : 조선유趙善裕·우재룡禹在龍 도포장 : 백남신

좌익장 : 정래의 우익장 : 김성일金聖一

좌포장 : 장대익張大翼 우포장 : 김일언

유격장 : 임중호 척후장 : 정성욱鄭成郁

장영서장將營書掌 : 김진영金震榮 군문집사 : 이두규

점군검찰點軍檢察 : 안수원安守元



위의 편제는 기본적으로 산남의진의 1차 거의 때의 편제를 근간으로 하고 새로 합류한 인물들이 보강된 양상이었다. 즉 의병장 정용기를 비롯하여 중군장 이한구, 참모장 손영각, 소모장 정순기, 선봉장 홍구섭, 도포장 백남신, 군문집사 이두규 등 7명이 1차 편제시의 부서를 그대로 이어받아 핵심역할을 수행하였으며, 그밖에 다수의 인물들이 새롭게 보강되었던 것이다. 도포장 박태종은 의성지방에서 의병을 이끌고 산남의진에 합류해 온 인물이고, 우포장에 이세기가 선임된 것은 1차 거의시 우포장을 맡았던 서종락이 영덕지방에서 활동하던 중 미처 돌아오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또 1차 거의시 연습장이던 이규필이 우영장에 선임되었고, 연습장은 처음에 조선유가 맡았으나, 군대해산 후에는 대구진위대의 참교 출신으로 의진에 합류해온 우재룡이 선임되었다. 우익장을 맡은 김성일도 울산진위대 출신이었다. 대한제국 군인 출신인 우재룡과 김성일 등이 의진에 가담하여 의병의 군사훈련을 담당하게 됨으로써 산남의진의 전력이 상당히 고양될 수 있었다. 그리고 좌영장 김일언은 경주의 포수 출신으로 전력 강화에 기여할 수 있었다. 또한 1차 거의 때에 없었던 척후장·유격장 등이 새롭게 편제된 것은 전투를 수행하는 데 실질적으로 필요한 부서를 보강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註18)

이와 같이 산남의진은 조직과 편제를 일신하여 의진의 사기를 진작하는 한편, 군령을 내려 군율을 엄수하도록 하였으며, 군율을 위반하는 경우에는 이를 엄하게 다스렸다. 각지에 내린 전령에서 “갑오년 이후로 민폐가 오래라, 의병으로 이름을 삼는 자로서 까닭없이 사람을 죽이고 부녀를 겁간하며 재물을 탈취하는 자는 낱낱이 본진에 고발하라”고 한 대목도 의진의 기율을 엄격히 세우기 위한 조처였던 것이다. 註19)

이와 동시에 정용기는 광무황제에게 창의의 배경과 그 정당성을 밝히는 상소를 올렸고, 또 주민들에게 의병에 대한 후원과 협조를 호소하는 격문과 「청조문請助文」 등을 연이어 발포하였다. 먼저 의병의 거의 명분과 활동 목적을 천명하기 위해 작성된 격문의 일단을 보면 다음과 같다.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반드시 죽어야 하고 위에 근심이 있으면 아래에서는 반드시 힘써야 하는 것은 오래된 바른 길이거늘, 이제 5적이 나라를 팔아 군부가 욕을 입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큰 일은 없다. 신민된 도리로 어찌 양심에 부끄럽지 아니한가. 일찍이 나라에 일이 없을 적에는 과거나 벼슬에서 반드시 ‘모某 선정先正’ ‘모 사족士族’을 다투면서 주석柱石을 자처하더니, 지금 나라가 무너지려 하는 때에 모 선정, 모 사족은 어디에 모셨기에 이다지 아무 반응이 없는가. 열성조의 길러낸 백성이 어찌 이다지도 허무하며, 어진 조상의 가르침을 받은 자손이 어찌 이다지도 뒤가 없는가. … 500년 동안 입은 은택이 깊고도 무겁도다. 말과 생각이 이에 이르매 오장을 에이는 듯하다. 이 고시를 보는 자가 진실로 조금이라도 인심이 있다면 의당 감상의 눈물이 없지 않을 것이리라. 다행이 서로 전하고 서로 이끌어 스스로 분발코자 하거든 우리와 더불어 일을 함께 도모하자. 註20)



위 격문의 요지는 을사조약 늑결로 국가 멸망의 위기상황에서 그 동안 ‘주석柱石’으로 자처하던 권세가들이 애써 현실을 외면하는 처사를 개탄하고, 아울러 구국의 열성을 가진 지사들에게 의진에 동참해 줄 것을 호소하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장문으로 된 「청조문」에서는 단군조선 이래 중국과 더불어 한국의 역사가 문명으로 발전해온 역정歷程을 서두에 언급한 다음, “스스로의 역량을 헤아리지 않고 오직 끓어오르는 피를 억제할 수 없어 감히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바로잡고 멸절하려는 민생을 구원하고자” 거의한 실상을 알려 의병을 원조해 주기를‘2천만 형제에게 호소’ 하였다. 註21)


3) 재건 산남의진의 활동

재건된 산남의진은 1907년 10월 의병장 정용기가 전사할 때까지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경북 각지를 전전하며 활발한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註22) 정용기는 초기의 실패를 거울삼아 이번에는 영천을 중심으로 경주·청하·청송 등지에 분대를 두고 활동하였다. 그 결과 기동성과 연합작전 수행 등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해 보다 효과적인 항전을 수행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산남의진이 진용을 재편한 뒤 본격적으로 활동을 재개하는 시기는 1907년 8월 중순부터였다. 산남의진의 1차 목표는 앞서 정환직과 협의한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관동지방으로 북상하는 것이었다. 이에 북상 루트를 확보하기 위해 신돌석 의병과 연합전선 구축을 시도하는 한편, 동해안 방면으로 척후를 파견하여 북상의 길을 찾고 있었다. 그리하여 산남의진은 영해 방면으로 진출하기 위해 두 부대로 나뉘었다. 한 부대는 죽장에서 천령泉嶺을 넘었으며, 다른 한 부대는 신광神光에서 여령麗嶺을 넘어 청하를 공격하여 분파소 등을 소각하고 무기를 수거한 뒤 다시 천령으로 이동하였다. 


산남의진 기념비 (경북 영천시 창구동)



그리고 청하에서 수집한 탄약 등 무기류는 후일을 대비해 천령 산중에 비장해 두었다. 註23) 8월 25일 청하를 공격한 상황에 대해 일제는 “정환직 의병 약 300명이 청하읍을 공격하여 분파소 및 가옥 수 채를 소각하고 한인 순사 한 명을 사살”한 것으로 기록해 놓았다. 註24)

산남의진의 북상 시도는 일제 군경의 압박과 신돌석 의병과의 연합 부진, 그리고 무기와 같은 군비부족 등등의 사정으로 인해 여의치가 않았다. 이에 산남의진은 북상을 일시 보류한 채 음력 8월 초에 청송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비로 인해 중단하고 신령으로 향하였다. 이후 산남의진은 안동·의성·청송 등지를 전전하면서 의병소모와 무기수집에 심혈을 기울이는 한편, 일제 군경을 상대로 산발적인 전투를 수행하게 되었다. 특히 1907년 9월 21일음 8.14 새벽에는 신돌석 의병과 함께 청송을 공략하였다. 이때 의병이 세 부대로 나누어 매복해 있던 중 추격나온 청송수비대와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고, 의병들은 패퇴하는 적을 추강秋江 뒷산까지 추격하기도 하였다. 註25)

그뒤 산남의진은 죽장과 입암을 거쳐 9월 하순경 안국사安國寺에 일시 유진하던 산남의진은 동해안의 거점도시 가운데 하나인 포항을 공격하

려 하였으나 예상외로 수비가 삼엄하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영천으로 회군하였다. 10월 1일음 8.24 의병 척후로부터 일제 군경이 영천의 관포官砲와 함께 자양동紫陽洞으로 들어갔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되자, 의병들은 두 길로 나뉘어 적을 포위한 뒤 공격을 가해 대승을 거두었다. 註26)

이 무렵 산남의진은 무기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까닭에 항일전을 지속하는 데 큰 곤란을 겪고 있었다. 영천 공격을 모의하던 당시에 참모장 손영각이 “지금 군기가 불비하고 탄약이 고갈되었다”고 실토하면서 그 계획을 만류한 대목을 통해서도 이러한 정황을 감지할 수 있다. 註27)

이와 같이 산남의진이 영천·청하 일대를 전전하면서 수세에 몰려 있게 되자, 산남의진의 대부격이던 정환직은 서울에서 영천으로 직접 내려와 북상을 독려하였다. 이때 정용기는 부친 정환직에게 북상 기일이 어긋난 이유와 경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실토하면서 그간의 고충을 호소하였다. 註28)



지금 사졸의 실수가 800명이 되지 않고, 군기가 태반 부족하고 탄약이 항상 고갈되는 고로 한번 싸운 뒤에는 다시 산곡으로 들어가 군기를 준비해야 되는 까닭에 전진할 수 없었습니다. 저도 작년 가을 이래로 반 년 동안 신병이 있었던 까닭에 지금까지 관동으로 진출하지 못했습니다. 또 신태호신돌석-필자주와 연락하여 신태호는 수로水路, 동해안-필자주를 방어하고 저는 육로로 진출하기로 했으나, 신태호가 연해 등지에서 계속 패하여 미처 수습할 겨를이 없었고, 저도 또한 군기가 갖추어지지 않아 산곡을 전전하여 지금까지 관동으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註29)



정용기는 산남의진이 미처 북상하지 못한 이유로 군사부족과 무기열세로 인해 전투역량이 절대 부족했던 점, 그리고 연합전선을 형성하기로 약조한 신돌석 의병이 일제 군경의 강력한 탄압을 받아 활동이 크게 위축되어 있던 점 등을 들었다. 위 인용문에는 연전으로 인한 피로와 군수물자의 결핍 등으로 고단한 형세에 처해 있던 산남의진의 실상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이러한 정용기의 호소에 대해 정환직은 다음과 같은 당위성과 절급한 실정을 들어 즉시 북상할 것을 명하였다.



을사년 이후 국가의 위급존망이 경각에 달렸거늘 이때는 완完, 불완不完을 가리지 말고 나아가야 할 때이다. 따라서 북상의 계책을 세워라. 註30)



곧 정용기는 을사조약 늑결 이후 국가 위기상황이 매우 절박한 현실에서 제반 여건과 준비 정도를 고려할 여지가 없이 즉시 북상할 것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일제의 침략으로 국권이 유린되던 당시 위기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은 전국 의병의 결집된 전력으로 일제를 구축하는 것이라고 믿었고, 또 이를 위해서는 산남의진이 관동지방으로 즉시 북상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정환직의 이와 같은 계획과 신념은 그뒤 1907년 12월에 전국의병의 연합체로 결성된 십삼도창의군과 1908년 1월에 그 별동대가 펼쳤던 서울 진공작전으로 구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정환직의 재촉하에 의병장 정용기가 이끌던 산남의진은 즉시 북상길에 오르기 위해 군물 준비와 의병 모집에 착수하였다. 소모관을 각지로 파견하여 군사를 모으는 한편, 다가올 겨울철에 대비해 동복 등을 준비하기 위해 일시 보현산普賢山, 현 영천시 화북면 소재 주변의 좌우 촌락에 유진하였다. 


산남의진의 활동지역

 


이때 일제 군경은 정환직·정용기 부자의 향리인 검단檢丹, 현 영천시 충효동을 습격하여 가택에 방화하고 서책을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척후로부터 이 소식이 듣게 되자, 산남의진은 즉시 검단으로 출동하여 적을 격퇴시켰다. 註31)

의병장 정용기는 북상을 위해 종사從事들을 각지로 보내 의병 지원자를 소집케 하는 한편, 영장營將들에게는 각기 부하들을 거느리고 각지로 흩어져 군복을 준비케 한 뒤 관동지방을 향해 북상길에 오를 것을 시달하였다.

그리고 정용기는 여러 장령 이하 1백여 명을 이끌고 1907년 10월 6일음 8.29 매현梅峴, 현 영일군 죽장면 소재에 들어가 이곳에 지휘본부인 장영도소將營都所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이때 의진의 주둔지를 탐색해 낸 일본군이 입암리立巖里 후원의 험준한 암석지대를 거점으로 야음을 틈타 맹공을 가해 왔다. 


산남의진이 격전을 치른 입암전투 전적지 (경북 포항시 북구 죽장면)



이때 의진에서는 마침 임무를 마치고 귀환중이던 이세기·우재룡·김일언 등이 거느리던 일단의 의병들이 장영도소의 의병들과 함께 결사적인 항전을 전개하였으나 끝내 참패하였다. 의병장 정용기 이하 중군장 이한구, 참모장 손영각, 좌영장 권규섭 등 산남의진의 핵심인물들은 이 전투에서 모두 전사 순국하였고, 나머지 의병들도 사방으로 패산하고 말았다. 나아가 일제 군경은 의병의 거점이 되었던 입암 마을에 들어가 가옥 수십 채를 불태우고 주민들을 학살하는 등 이 일대를 초토화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하였다. 註32)

이로써 정용기가 지휘하던 산남의진의 재기활동도 종료되었다. 하지만, 산남의진은 아들 정용기 의병장의 전사 소식을 듣고 급거 귀향한 정환직에 의해 세번째로 출범하였다. 즉 정환직은 10월 중순 입암전투에서 살아남은 이세기, 우재룡 등의 간부들과 함께 의병을 다시 규합하여 산남의진을 재건한 뒤 의병장에 올라 64세의 노구를 이끌고 항일전을 선도하였던 것이다. 아들이 아버지의 유업을 계승하는 경우는 많지만, 정환직은 아들의 뒤를 이어 의병장에 올라 항일전에 투신했던 특이한 사례를 남겼다.

정환직이 이끄는 산남의진은 대구·경주·영천을 중심으로 영덕·흥해·청송·의흥·신녕 등지를 오가며 활발한 항일전을 벌였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할수록 일제 군경의 전력은 증강되어 간 데 비해, 의병측은 피로가 쌓이고 군수물자와 탄약이 점차 소모되는 등 전력이 현저히 저상되어갔다. 그러므로 시간이 지나고 전투가 거듭될수록 전반적인 전황은 점차 의병측에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註33)

이러한 상황에서 정환직은 휘하 의병에게 일정 기일내에 각자 북상길에 올라 관동지방에 집결토록 명령한 뒤 그 스스로도 북상길에 올랐다. 하지만 그는 도중 청하 각전角田, 현 영일군 죽장면 소재의 한 민가에서 병을 치료하던 중 그의 소재를 탐지한 청하 주재 일본군 수비대의 급습을 받고 12월 11일 체포되고 말았다. 註34)

정환직은 청하로부터 대구로 압송되었다. 대구에 구금되어 있는 동안에 그는 일제의 갖은 협박과 유혹을 받았지만, 그때마다 그는 자신의 곧은 절개를 굽히지 않고 적을 질타하였다. 그뒤 그는 대구에서 다시 영천으로 압송되어 1907년 12월 20일음 11.16 향년 64세를 일기로 그곳 남교南郊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죽음을 앞두고 대구 옥중에서 지은 다음 시는 올곧은 마음[心]과 정당한 의리[義]에 입각한 자신의 비장한 심경을 잘 드러내고 있다. 註35)



육신이야 죽더라도 마음만은 변치 않고 身亡心不變

의가 중하니 죽음은 오히려 가볍도다 義重死猶輕

후사를 누구에게 의탁할까 後事憑誰託

말없이 앉았으니 오경이 되었구나 無言坐五更



이상에서 보았듯이, 산남의진은 신돌석 의병과 함께 영남지방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의병이었다. 이 의진은 활동과정에서 인접한 신돌석·유시연 의병 등과 부단한 연락을 취하면서 연합전선을 형성하는 등 활동의 궤를 함께 했던 특징을 보였다. 나아가 이 의진은,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시종일관 서울진공을 위해 관동지방으로 북상하려는 시도와 노력을 경주했다는 점에서 뒤이어 전국 의병의 연합체로 결성된 십삼도창의군의 선도가 되었던 역사적 의의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의진의 잔여 의병들은 이후에도 항일전을 지속적으로 수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우재룡 등 그 인맥은 1910년 경술국치 후 대한광복회의 결성에 주도적인 세력으로 부상하는 등 영남지방의 독립운동 확산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는 점에서도 그 의의가 적지 않다.



[註 1] 배용일, 「산남의진고-정환직·정용기 부자 의병장 활동을 중심으로-」, 『논문집』 6, 포항실업전문대학, 1982, 17쪽. ☞

[註 2] 『관보』 1900년 2월 13일자. ☞

[註 3] 송상도, 『기려수필』, 국사편찬위원회, 1955, 140쪽. ☞

[註 4]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3, 381쪽. 

여기에는 「산남의진사」라는 이름으로 『山南倡義誌』(上)이 수록되어 있다. 

이 고사는 齊景公이 제후국의 군사들에게 포위되어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 車右將 逢丑父가 기지를 발휘하여 제경공을 구출하면서 한 말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광무황제가 의병을 일으킬 것을 독려하기 위해 은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

[註 5] 독립운동사편차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3, 948~949쪽. ☞

[註 6] 산남의진유사간행위원회, 『산남의진유사』, 1970, 83~84쪽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1, 351~353쪽. ☞

[註 7] 권영배, 「산남의진(1906~1908)의 조직과 활동」, 『역사교육논집』 16, 1991, 137쪽. ☞

[註 8] 『산남창의지』 하 (『한국독립운동사연구』 4,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0), 45쪽. ☞

[註 9] 배용일, 「산남의진고」, 『한국민족운동사연구』 5, 1991, 145쪽. ☞

[註 10]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3, 387~388쪽. ☞

[註 11] 산남의진유사간행위원회, 『산남의진유사』, 262쪽. ☞

[註 12] 『산남창의지』 하, 57쪽. ☞

[註 13] 『산남창의지』 하, 64쪽. ☞

[註 14] 윤병석, 『한말 의병장 열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1, 243~244쪽. ☞

[註 15] 『산남창의지』 하, 41쪽. ☞

[註 16]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1, 389쪽. ☞

[註 17] 『산남창의지』 하, 42쪽. ☞

[註 18] 권영배, 「산남의진(1906~1908)의 조직과 활동」, 『역사교육논집』 16, 143쪽. ☞

[註 19] 『산남창의지』 하, 43쪽. ☞

[註 20]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3, 393~394쪽. ☞

[註 21]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3, 394~395쪽. ☞

[註 22] 정용기가 주도한 2차 산남의진의 활동은 1907년 8월 군대강제해산 이후의 후기의병 시기까지 걸쳐 있으나 연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내용을 기술하는 것이다. ☞

[註 23] 『산남창의지』 하, 44쪽. ☞

[註 24]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3, 583쪽. ☞

[註 25] 『산남창의지』 하, 46~47쪽. ☞

[註 26] 『산남창의지』 하, 48쪽. ☞

[註 27] 『산남창의지』 하, 49쪽. ☞

[註 28] 『산남창의지』 하, 49~50쪽. ☞

[註 29] 『산남창의지』 하, 50쪽. ☞

[註 30] 『산남창의지』 하, 50쪽. ☞

[註 31] 『산남창의지』 하, 50~51쪽. ☞

[註 32] 『산남창의지』 하, 51~53쪽. ☞

[註 33] 윤병석, 『한말 의병장 열전』, 246쪽. ☞

[註 34]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말의병자료』 Ⅳ, 136쪽. ☞

[註 35] 『산남창의지』 하, 28쪽 ; 송상도, 『기려수필』, 142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