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호남지방의 중기의병 / 한말 중기의병

몽유도원 2014. 2. 26. 09:05

제4장 호남지방의 중기의병


최익현의 태인의병

능주의 쌍산의소

고광순 의병

백낙구의 광양의병

양한규의 남원의병


2. 능주의 쌍산의소


1. 쌍산의소의 결성

쌍산의소雙山義所는 양회일梁會一, 1856~1908 의병장의 주도하에 전남 화순군 능주에서 1906년 음력 10월부터 1907년 4월까지 활동한 의진의 호칭으로, 중기의병 시기에 호남지방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의진 가운데 하나이다. 이 의진의 활동내역을 비롯하여 의병장 행사杏史 양회일의 행적을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자료인 『행사실기杏史實記』에서 이 의진을 쌍산의소라 불렀다. 한때는 쌍산의소의 최초 집결지였던 화순군 이양면 쌍봉리 증동 마을 뒷산에서 의병의 무기 제조 유적이 발굴되어 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이 의진의 실체가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註40)

쌍산의소의 주장이었던 양회일은 능주의 명문가에서 태어나 일제침략으로 국권이 기울게 되자 이를 탄식하면서 구국의 방략을 강구했던 지사였다. 


쌍산의소의 활동사실을 기록한 『행사실기』



청일전쟁 이후 전기의병이 봉기할 당시에도 그는 기우만과 정재규 등 노사 기정진의 문인들에게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뒤 1906년에 최익현의 주도하에 태인의병이 봉기하게 되자, 양회일은 여기에 큰 충격을 받고 거의할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호남의 명문거유로 항일투쟁의 선봉에 섰던 고광순·기삼연 등과 함께 연합전선을 구축해 항일전을 공동으로 전개할 계획을 세웠다. 양회일의 이러한 전략 구상은 다음 인용문에 잘 드러나 있다.



마침내 고광순·기삼연 등 두 사람과 함께 의기와 절의를 허락하기로 도모하였다. 고광순은 칼을 차고 두 번이나 와서 현 시국의 상황에 대하여 허심탄회하게 논의하였다. 그는 이르되, 기삼연은 장성에서 의병을 일으키기로 하고 나는 광주와 창평에서 의병을 불러 모으기로 하였으니, 공양회일-필자주은 여기에서 일을 시작한즉 당연히 기삼연과 협력해 원수를 몰아내자고 하였다. 註41)



즉, 능주의 양회일과 창평의 고광순, 그리고 장성의 기삼연 등은 상호 긴밀한 연계하에 각자의 활동거점에서 의병을 규합한 뒤 연합전선을

구축함으로써 전력의 극대화를 통해 항일전을 효과적으로 전개하려 했던 것이다.

거의 준비에 착수한 양회일은 우선 각지의 동지들을 규합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양열묵梁烈默, 이병화李秉華 등과 함께 화개의 이광언李光彦, 남원의 노현재盧鉉在, 보성의 임창모林昌模, 그리고 동향의 신재의申在義·임노복任魯福·최기표崔基杓·안찬재安贊在 등이 양회일과 더불어 기맥을 상통하고 거의에 동참한 지사들이다. 또한 쌍산의소의 주모자로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던 임낙균林洛均·노응현盧應鉉·박용계朴用溪 등도 의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들이다. 이들은 대체로 능주·화순을 비롯하여 정읍·보성·남원 등지에 거주하고 있었다. 즉 쌍산의소는 양회일이 중심이 되어 능주·화순을 비롯한 정읍·보성·남원 등지의 항일지사들이 함께 편성한 의진이었던 것이다. 다만, 위의 중심인물들 가운데 경기도 여주 출신의 이광선과 박용계는 이 지방 인사가 아니었다. 註42) 자료상 이광선은 평북 정주, 혹은 경남 하동 출신이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註43)

양회일은 이들 가운데 거의 준비단계에서 특히 능주 증동의 임노복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는 능주 증동甑洞을 중심으로 의병을 훈련시킬 생각을 갖고 그곳 유지인 임노복을 찾아가 협력을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1906년 음력 10월경 양회일과 임노복이 만나 함께 거의를 협의하면서 구체적인 거사 계획이 추진될 수 있었던 것이다.

임노복은 양회일에게 인재를 규합할 것, 병기를 수집할 것, 그리고 군량미를 확보할 것 등 세 가지 의병 방략을 제시하였다. 이들은 비록 유생이었지만, 항일전 수행에 필요한 현실적 방안을 강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방안에 따라 양회일은 무기구입에 전력을 기울였고, 증동에 의병을 집결시켜 군사훈련을 시켰다.


쌍산의소의 근거지인 증동마을의 기념물 (전남 화순군 능주면)

 


 이러한 준비과정은 이후 1907년 음력 3월 초까지 계속되었고, 그 결과 증동은 의병기지로 바뀌어갔다. 해방 직후 인근 유림들이 공론으로 의병이 집결해 있던 중조산中條山을 ‘의산義山’으로, 그리고 증동을 ‘의병촌義兵村’으로 명명할 것을 주장한 사실에서도 이러한 정황을 짐작할 수 있다. 註44)

이때 집결한 의병의 구성원은 대부분 화적을 방어하기 위해 당시 능주군에서 자체적으로 편성한 방도防盜 조직에 들어있던 장년들이었다. 양회일은 당시 이 방도조직을 이끌던 최고 책임자인 도약장都約長을 맡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방도조직의 장정들을 그대로 의병세력으로 전환시킴으로써, 이들이 곧 쌍산의소의 근간을 이루는 의병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양회일은 1907년 음력 1월 중순경 인근 각지로 격문을 발송하여 인근 주민들에게 의병에 동참하고 항일전을 원조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이때는 능주의 의병과 함께 거의해 연합전선을 펴기로 사전에 약속했던 양한규의 남원의병이 음력 설날 패산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온 직후였다. 이에 앞서 1907년 1월 초에 양회일의 핵임 참모이던 양열묵은 남원으로 가서 양한규 의병장, 창평의 고광순 의병장 등과 함께 항일전의 방략을 협의한 끝에 각 지역에서 거의해 공동으로 연합전선을 구축하기로 상호 약속한 상태였다. 註45) 그러므로 양한규 의병의 패산 소식은 양회일에게 충격을 주었던 것이다.

이로써 호남지방에서는 능주와 창평·장성·남원 등지의 의병세력이 상호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공동전선을 형성한다는 커다란 전략 하에서 의병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거의 준비가 마무리되자, 양회일은 부서와 대오를 정하고 쌍산의소를 편성하였다. 이 의진의 편제 가운데 중요한 부서와 인물은 다음과 같다.



맹주의병장양회일

부 장신재의선봉장 이광선

중군장 임창모후군장노현재

도포장都砲將유병순호군장犒軍將안찬재·임노복

총 무 양열묵서 기 이병화

참 모 박중일朴重一·임상영모사謀士박용계

군의軍醫전신묵全信默



쌍산의소는 편제상 선봉 - 중군 - 후군 등 3군 중심의 체제로 편제되었다. 명문유생 중심의 의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유회군儒會軍의 편제 없이 전투부대 중심으로 편제되어 있던 점은 특기할 만하다. 나아가 이 의진에는 다른 의진에서는 그 사례를 볼 수 없는 군의軍醫가 편제되어 있

었다. 군의를 배치한 것은 이 의진이 앞으로 치열한 항일전을 전개하겠다는 강렬한 의지를 표출한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 쌍산의소의 활동

전열을 정비한 쌍산의소는 곧 항일전에 나섰다. 능주와 함께 동시다발적으로 거의하기로 한 창평·장성 등지에서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이때 거의하지 못한 채 독자적으로 활동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쌍산의소에서는 항일전을 수행하기에 앞서 의병의 구체적인 행동지침을 조목별로 제시한 「서고군중문誓告軍中文」을 발표하여 의진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군율을 엄격히 하였다.



一.군자금 3천 냥이 이미 준비되었으므로 촌민들을 절대로 침탈하지 말 것.

一.기계와 병장기는 작년 도적 방어 때 관청에서 지급받은 대포 30문, 소포 50정을 현재 각 마을에서 민포民砲들이 응용하는 중인데 모두 거두어들일 것.

一.정정당당하게 의병의 바른 이름을 우선시하고 행군시에는 주민에게 해를 끼치지 말 것.

一.선봉장·중군장·후군장 등 여러 장수는 각기 맡은 임무를 수행하고 서로 권한을 침해하지 말 것.

一.도포장은 포군을 이끌고, 보졸장步卒將은 보군을 이끌며 각기 부서를 정하여 위반하지 말 것.

一.위의 여러 사항은 각기 모두 준수하고 위반하지 말 것. 만약 위반하면 군율로 처단한다. 註46)


쌍산의소의 주둔지



위 내용의 요지는 의병들이 군자금 수집 등의 명목을 내세워 일반 주민들에게 피해를 입히지 말도록 하고 방도조직이 사용하던 화포 등의 무기를 수집해 항일전에 사용하도록 한다는 것이며, 나아가 선봉장·중군장·후군장의 역할과 임무를 서로 명확히 하고 또 포군과 보군의 구별을 확실하게 함으로써 진중의 규율을 엄격하게 세우겠다는 것이다.

쌍산의소의 향후 활동방략으로는 두 가지 주장이 제시되었다. 중군장 임창모는 본격적인 항일전을 수행하기 전에 전력강화를 위해 지리산에 들어가 먼저 군사훈련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견해에 대해 부장 신재의는 호남의 요지 광주를 공략해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역설하였다.



광주는 왜적의 숲이 되었다. 먼저 이들을 도륙하여 복심腹心을 격파한다면 나머지는 모두 바람처럼 도망가 무너질 것이다. 나는 일찍이 광주의 해산군인 가운데 잘 아는 사람이 약간 있다. 만약 이들로 하여금 내응케 한다면 가히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호랑이굴에 들어가지 않으면 호랑이를 잡을 수 없다. 註47)



즉, 신재의는 호남의 요충지인 광주를 즉시 공략하여 일본세력을 구축함으로써 민심을 격동할 수 있고 나아가 대사를 도모할 수 있을 것이

라는 주장을 폈던 것이다. 그리고 광주진위대의 해산군인들과 내응함으로써 광주를 점령할 수 있다고 그 구체적인 방안까지 제시하였다.

결국 쌍산의소는 이상의 두 가지 주장을 절충하는 가운데 활동방략을 결정하게 되었다. 즉 능주와 화순을 먼저 공격하여 일본세력을 몰아낸 뒤 동복에서 일정기간 훈련을 쌓을 계획이었다. 이에 따라 의병들은 1907년 4월 하순경 기습공격으로 능주와 화순을 일거에 점령하였다. 당시의 긴박했던 형세를 『황성신문』은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능주 및 화순 등군等郡에 비도가 창궐한다 함은 전보前報에 이미 게재했거니와 그 군수의 보고를 의거한즉 음력 3월 10일양 4.22.-필자주 어떤 사람들인지 알 수 없는 백여 명이 각자 총검을 지니고 능주군에 난입하여 야요무쌍惹擾無雙에 있던 양총을 멋대로 탈거奪去하였으며 동일에 화순군에도 의병이라 칭하는 자 백여 명이 각자 군물軍物을 지니고 본군 주사청主事廳에 먼저 들어가 타파창호打破窓戶하며 우편소의 문부文簿와 의금衣衾 등물等物을 몰수 소화燒火하고 또 경무서에 들어가 역시 문창門窓을 부수며 보좌원의 문부를 태우고 장시場市에 거류하는 일인가에 돌입하여 제반 집물什物을 몰수 소화하고 흩어져 돌아가는 길에 전주 한 개를 작벌斫伐하고 전선도 절단하였다더라. 註48) 현대어 및 윤문-필자



이 기사에 따르면 의병들은 두 부대로 나뉘어 능주와 화순을 동시에 공격하여 군아郡衙를 비롯해 주사청, 우편소, 경무서, 일본인 상가 등을 습격하였다. 또한 의병들은 여러가지 문서류와 의복 및 침구류, 일본상인의 물품 등을 불태웠고, 양총 등의 무기를 수거하였으며, 전주를 파괴하고 전선을 자르는 등 통신시설을 파괴하였던 것이다.

쌍산의소의 의병은 일본세력은 물론 친일관리들도 공격목표로 삼았다. 의병들이 군아 소재지였던 능주와 화순를 공격한 것은 그곳이 바로 친일관리와 일본세력의 거점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동시에 의병들은 전투경험을 쌓고 양총과 같은 신무기를 획득할 수 있었다. 의병들은 이와 같은 전력보강을 통해 광주를 공격하고 나아가 호남의 일제 침략세력을 구축하려 하였던 것이다. 註49) 이를 위해 의진은 ‘숲이 무성하고 골짜기가 깊으며 산천이 험한’ 동복으로 이동하여 휴식을 취하고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註50)

하지만 쌍산의소의 의병들은 광주 공격에 실패함으로써 해산하고 말았다. 의병장 양회일을 비롯한 의진의 핵심인물 6명은 체포되었고, 사상자도 다수 발생하였다. 주모자들은 모두 평리원에서 재판을 받아 의병장 양회일과 중군장 임창모는 15년형, 안찬재·유태경·신태환·이백래는 10년형을 각각 선고받고 전남 신안군 지도智島로 끌려가 고초를 겪은 뒤 1907년 12월 융희황제의 특사로 모두 풀려났다. 註51)



[註 40] 조동걸, 「쌍산의소(화순)의 의병성과 무기제조소 遺址」, 『한국독립운동사연구』 4,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0 참조. ☞

[註 41] 『杏史實記』 권3, 「행장」. ☞

[註 42] 홍영기, 『대한제국기 호남의병연구』, 200쪽. ☞

[註 43] 『관보』 1907년 7월 11일자 ; 『행사실기』 권3, 「家狀」. ☞

[註 44] 홍영기, 『대한제국기 호남의병연구』, 205쪽. ☞

[註 45] 『관보』 광무 11년 7월 15일자. ☞

[註 46] 『행사실기』 권4, 「誓告軍中文」. ☞

[註 47] 『행사실기』 권4, 「申在義」·「林昌模」. ☞

[註 48] 『황성신문』 1907년 5월 15일자. ☞

[註 49] 홍영기, 『대한제국기 호남의병연구』, 213쪽. ☞

[註 50]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3, 310쪽. ☞

[註 51] 『관보』 1907년 7월 15일 및 12월 3일자. ☞



3. 고광순 의병


구국의 성전聖戰인 의병전쟁은 우리 민족의 전력全力이 투입된 대일총력전으로 1894년 청일전쟁 이후 20여 년 동안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1907~8년간에 펼쳐진 후기의병은 명실상부한 의병전쟁의 꽃이었다. 그 후기의병의 진수는 호남의병이었으며, 호남 중에서도 전남지역이 전국의 의병전쟁을 주도하고 있었다.

곧 호남의병은 한말 의병전쟁 가운데서도 격전의 최고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큰 것이다. 전해산·심남일·안규홍·강무경·양윤숙·김태원 등등의 쟁쟁한 인물들이 한말 호남의병을 선도하던 대표적 인물들었으며, 앞에서 보았듯이 최익현의 태인의병이 호남의병 확산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선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최익현과 임병찬이 의병을 일으킨 이후 남원의 양한규, 광양의 백낙구, 그리고 창평의 고광순 등이 1907년 전반기에 일어났지만, 거의가 진압되거나 자진 해산하고 그 가운데 오직 고광순 의병만이 후기까지 활동을 지속해 나갔다. 고광순 의병은 이런 점에서 호남지역의 후기의병을 본궤도에 올려놓은 선도 의병장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고광순 의병장이 태어난 유천마을 전경 (전남 담양군 창평면)



녹천鹿川 고광순高光洵, 1848~1907은 전남 담양군 창평면昌平面 유천리柳川里에서 장흥고씨長興高氏 명문 후예로 태어났다. 창평의 남쪽 고개를 녹갈鹿渴이라 하고, 계곡물을 유천柳川이라 불렀는데, 고광순이 그 위에 거주하였던 연고로 녹천을 아호로 취했다고 한다.

고광순의 집안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충청도 금산에서 순국한 고경명高敬命·고종후高從厚·고인후高因厚 세 부자의 가문이었다. 고광순은 그 가운데서도 특히 학봉鶴峰 김인후의 봉사손奉祀孫이었으니, 태어나면서부터 절의정신에 남달리 깊이 배양되어 있었을 것이다.

유년시절부터 고광순은 재능이 탁월하였으며 매사 처신에 신중하였다. 고광순은 젊은 시절 한때 과거에도 응시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비리와 부정이 난무하던 과장科場의 실태를 목도하고 크게 실망한 나머지 그대로 귀향하고 말았다. 이때부터 그는 일제 침략세력과 권세가들로 말미암아 야기되는 혼란한 시국상황을 개탄하고 울분의 나날을 보내면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광순에게는 그가 항일전의 선봉에 서지 않을 수 없었던 여러가지 명분이 주어져 있었다. 첫째는 일제의 극심한 경제침탈을 결코 좌시할 수 없었다는 점이고, 둘째는 을사조약 늑결 후 광무황제의 밀칙이 내려와 있었다는 사실이며, 셋째는 임진왜란 때 순국한 저명한 의병장의 직손이었다는 점이다.

고광순은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국왕에게 상소를 올려 “국사를 그르친 괴수를 죽여 국법을 밝히고 나라를 망치는 왜적을 빨리 무찔러 원수

를 갚아야 한다”고 하면서 을미사변의 원흉들을 단죄할 것을 통렬하게 주창하였다. 뒤이어 단발령이 내려지자 고광순은 호남지방 유림계의 명사들인 기삼연奇參衍, 기우만 등과 함께 연락을 취하며 각 고을로 격문을 전파하면서 처음으로 의병 전선에 나서기도 하였다.

전기의병 참여 이후 고광순은 집안일은 접어둔 채 오직 의병 재기를 위해 분투하였다. 그는 명분만을 내세우기보다는 실천을 우선시하는 강직한 선비였다. “서생의 가슴 속에는 저절로 갑병이 들어있는 법이다”라고 한 그의 말을 통해서도 구국항전을 향한 그의 강렬한 의지와 대쪽같은 절의정신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1906년 6월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일어난 태인의병이 정읍을 거쳐 순창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고광순은 고제량과 함께 여기에 동참하기 위해 달려갔다. 그러나 이 때는 이미 주장 최익현 이하 참모들이 남원·전주에서 출동한 진위대에 의해 체포당하고, 의진이 해산된 뒤였다. 註52)

울분을 참지 못한 고광순은 그해 11월에 다시 광양의 백낙구, 장성의 기우만 등과 함께 구례의 중대사中大寺 註53)에 모여 의병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 날 모인 군세가 미약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백낙구를 비롯하여 종사 7명이 체포되고 말았다.

이후 고광순은 더욱 분발하여 항일전에 전력을 투입하게 되었다. 이 무렵 그는 광무황제로부터 비밀리에 의병을 독려하는 「애통조哀痛詔」를 받고 감격해 하며 토적복수를 스스로 맹약하였다. 註54) 그는 1907년 1월 24일 고제량 등의 지사들과 함께 인근지역의 장정 500명을 모아 담양군 창평면 저산猪山의 전주이씨 제각에서 드디어 의진을 결성하였다. 고광순

의병의 편제는 다음과 같았다. 註55)



의병장고광순

부 장 고제량高濟亮

선봉장고광수高光秀

좌익장 고광훈高光薰

우익장 고광채高光彩

참 모 박기덕朴基德

호군護軍 윤영기尹永淇

종사從事 신덕균申德均·조동규曺東圭



고광순 의병이 거의를 선언하고 본격적인 활동에 돌입할 무렵, 때마침 남원에서 일어난 양한규 의병장으로부터 연합작전을 벌여 남원읍을 공략하자는 요청이 왔다. 이에 고광순 의병은 양한규 의병과 합류하기 위해 즉시 남원으로 행군하였다. 하지만, 1907년 2월 고광순이 남원에 당도하였을 때는 양한규 본진이 이미 와해된 뒤였다. 그러므로 고광순 의병은 남원읍 공략을 단념하고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하는 수 없이 고광순 의병은 남원에서 순창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비홍치飛鴻峙를 넘어 창평으로 회군하고 말았다. 註56)

그후 고광순 의병은 능주의 양회일, 장성의 기삼연 등과 힘을 합해 창평·능주·동복 등지를 활동무대로 삼고 전전하였다. 특히 4월 25일에는 화순읍을 점령함으로써 주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평소 원성이 자자하던 일본인 집과 상점 10여 호를 소각시켜 버림으로써 지역 주민들이 크게 환대하였던 것이다. 


고광순 의병장이 사용하던 '불원복기'



그러나 다음날 다시 동복으로 진군한 의진은 광주에서 파견된 관군과 도마치圖馬峙에서 교전 끝에 사방으로 패산하고 말았다. 註57)

그뒤 고광순을 중심으로 한 광주 부근의 의병들은 산중에 잠복해 있으면서 기회를 보아 진격하는 등 수시로 유격전을 벌여나갔다. 특히 1907년 8월 이후로는 몰려드는 해산병을 규합하여 1,000여 명에 달하는 대규모 부대가 되어 지리산 화개동 일대를 근거지로 활발하게 항전을 지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광순과 고제량은 1907년 10월 연곡사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지만, 그 휘하에 있던 의병은 운봉·함양·순창·정읍 일대에서 항전을 계속하게 된다. 註58)

그리하여 고광순 의병장을 일제도‘호남의병의 선구자’ 혹은 ‘고충신高忠臣’이라 부르며 경탄했을 만큼 고광순 의병은 호남의병의 확산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리하여 일제는 그를 최익현·기삼연과 더불어 1906, 7년 사이에 활동했던 가장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꼽았다. 註59) 한편, 고광순의 사위인 기산도奇山度는 오적암살단과 의병으로 활약한 의사였다.



[註 52] 담양문화원, 『鹿川遺稿』, 1994, 93·102쪽. ☞

[註 53] 전남 구례군 토지면 외곡리에 있던 사찰로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다. ☞

[註 54] 담양문화원, 『녹천유고』, 93쪽. ☞

[註 55]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1, 402쪽. ☞

[註 56] 황현, 『매천야록』, 383쪽. ☞

[註 57]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1, 402쪽 ; 황현, 『매천야록』, 413쪽. ☞

[註 58]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1, 402쪽 ; 전라남도 경무과, 『전남폭도사』, 12·26~27쪽. ☞

[註 59] 전라남도 경무과, 『전남폭도사』, 8쪽. ☞



4. 백낙구의 광양의병


태인의병의 영향으로 전남 광양에 은거 중이던 전 주사 백낙구白樂九, ?~1907가 1906년 가을 구국항전의 기치를 올리며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원래 전주 사람이었으나 광양의 백운산白雲山을 중심으로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註60)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농민군을 진압하는 초토관招討官으로 활동하였다. 그 공로로 주사에 임명되었지만, 일제의 침략으로 국권이 기울어가자 사직하였고, 이후 그는 만주로 건너가 각지를 전전하였다. 하지만, 그는 안질에 걸려 귀국하였으나 영영 시력을 잃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백운산에 은거하면서 눈병을 치료하며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1905년 을사조약 늑결 소식에 큰 충격을 받은 백낙구는 실명한 상태에서도 구국을 위해 거의할 것을 결심하고 지사들을 규합하였다. 이 무렵 태인의병이 봉기했다는 소식을 듣자, 그는 여기에 합류하기 위해 북상하였다. 그러나, 도중에 최익현이 이끄는 태인의병이 해산당하게 되어 합류할 수 없었다.

그뒤 거의를 향한 집념을 버리지 않던 백낙구는 1906년 중반 기우만·고광순·이항선李恒善 등의 우국지사들과 서로 연락하면서 날짜와 장소를 협의하는 등 거의 계획을 세우고 준비를 진행하였다. 註61) 이들 지사들은 항일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군사훈련과 무기확보가 급선무라는 판단하에 일정기간 의병들에게 군사훈련을 시키기에 적합한 산중 적지를 물색하였고, 그 결과 지리산에 있는 구례 중대사에서 회합하여 의병을 일으키기로 상약하였다.

이 과정에서 백낙구는 경남 진주의 실직한 향리들을 의병에 가담시켰다. 다음 기록을 통해 그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거去 7일1906년 11월 7일-필자주 광양군에서 비도 2백여 명이 군수를 결박하고 일장一場 광경이 위급하였는데 그 근인根因인즉 금번 지방제도 개혁으로 인하여 직업을 잃은 사람들이 진주지방에서 난을 도모하고 하동을 지나 회집한 모양으로 각처를 소요케 할 세勢가 있는데 광주 경무고문부에서 보좌원 4인과 순검 4인을 파송하였다더라. 註62)



즉 지방제도 개편으로 인해 실직한 진주의 향리들은 세력을 형성하여 하동으로 이동한 뒤, 의병이 광양읍성을 점령할 때 이에 적극 가담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진주의 실직 향리들이 광양을 거쳐 백낙구 의진에 가담한 사실은 다음과 같은 일제측 자료에도 나타나고 있다.



최익현의 잔당은 끊임없이 민심을 선동 도발하고 있었는데, 동년1906년 11월 4일 본도의 유생으로서 본디 최익현을 따르는 광양군의 백낙구, 장성군의 기우만, 창평군의 고광순·이항선 등이 관제개혁으로 실직한 전 군리郡吏 등과 통모하여 구례군 중대사에 모여 총원 50여 명총기 10여 정으로써 다음날 5일에 거사, 구례로부터 광양군을 통과하여 7일 순천에 이르렀다. 註63)



위 자료는 최익현의 태인의병의 영향하에 백낙구를 비롯해 기우만·고광순 등이 거의한 사실을 알려주고, 또 백낙구 등이 ‘관제개혁으로 실직한 전 군리’를 규합한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앞의 자료를 통해서 이 군리가 곧 진주의 실직한 향리들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백낙구는 서부 경남의 중심지인 진주의 향리들을 규합하는 한편, 광양 일대의 주민들을 소모해 의진을 결성하였다. 이항선·김상기金相璣·노원집盧元執·채상순蔡相淳·유병우柳秉禹 등의 우국지사들이 당시 백낙구와 함께 거의에 참가하였던 인물들이다. 이때 백낙구는 의병장인 사령장司令長에 추대되어 이 의진을 통솔하게 되었다. 註64)

백낙구 의병 200명은 각지에서 집결하기로 미리 약속되어 있던 날짜인 1906년 11월 5일에 맞추어 구례의 중대사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함께 거의하기로 한 기우만과 고광순 등은 연락과정에서 상약한 날짜가 잘못 전달되어 미처 도착하지 않았다. 이에 광양으로 되돌아간 백낙구 의병은 11월 7일 군아郡衙를 점령하여 군수를 체포하고 무기와 군자금 등을 확보하였다. 註65)

백낙구 의병은 광양에 이어 순천을 기습 점거할 계획을 세웠으나, 여의치 않아 포기하고 대신에 삼삼오오 흩어져 구례의 약속장소에 다시 집결하기로 하고 일시 흩어졌다. 이에 의병장 백낙구는 구례로 들어갔다가 군수 송대진宋大鎭에 의해 이승조李承祖·이도순李道順·이지상李芝相·권창록權昌祿·안치명安致命·김봉구金奉九 등 종사 6명과 함께 체포되고 말았다. 註66) 


백낙구의 의병활동을 소개한 『독립신문』 기사 (1920. 5. 18)

 


이로써 백낙구 의병은 거의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와해되고 말았다.

의병장 백낙구 이하 6인의 종사들은 즉시 순천 분파소로 압송되었다. 이들 가운데 안치명과 김봉구 양인은 순천에서 탈출에 성공하였고, 나머지 인물들은 다시 광주로 이감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註67) 또 백낙구 피체 후 그와 연계되어 있던 기우만도 12월 1일 광주경무서에 일시 체포되어 심문을 받기도 하였다. 그는 백낙구를 일러 “의는 대단하나 군사가 적어 일거에 실패하였다. 사람은 비록 죽었지만 의만은 죽지 않고, 나라는 비록 망해도 의는 망하지 않을 것이다. 의가 같으면 마음이 같아, 비록 시키지 않아도 시킨 것과 같다”고 하였다고 한다.

순천에 갇혀 있을 때, 의병장 백낙구는 신문을 받는 과정에서 의병에 투신한 명분과 목적을 다음과 같이 당당하게 천명하였다.

슬프다. 오늘날 소위 대한국大韓國은 누구의 대한국인가. 과거 을미년에는 일본공사 삼포三浦가 수차 마음대로 군대를 풀어 대궐을 점거하니 만국이 이를 듣고 실색하였으며, 팔도가 원수같이 애통해 한 이래 12년이 흘렀다. 위로는 복수의 거의가 없고 아래로는 수치를 씻는 논의가 없으니 가히 나라를 위하는 사람이 있는가. 이제 이등박문伊藤博文이 더욱 모욕을 가하여 군대를 끌고 서울에 들어와 상하를 능멸하고서 자칭 통감이라 한다. 그 통統이란 것은 무엇이며 감監이란 것은 무엇인가. 우리나라 5백년 종사와 삼천리의 강토와 이천만의 동포가 이웃나라의 적신 이등박문에게 빼앗기는 바가 되었다. 입을 다물고 머리를 수그려 분함을 외쳐 보지도 못하고 죽음을 기다리는 것인가. 이에 백낙구는 스스로의 힘을 헤아리지 않고 동지를 불러 모으고 의병을 모집하여 힘껏 일본인 관리를 공격하여 국경 밖으로 내쫓고, 또한 이등박문을 사로잡아 의병장 최익현 등을 돌려받고자 하다가 시운이 불리하여 전투에 나서기도 전에 체포되었으니, 패군장이 감히 살기를 바라겠는가. 이에 사실대로 말하노라. 註68) 현대어-필자주



백낙구는 곧 일제의 국권침략을 강력히 성토하면서 통감 이등박문을 원흉으로 지목하였고, 나아가 원흉 이등박문을 체포하여 대마도에 유폐당한 최익현을 구출하려 했다는 것이다. 결국, 그는 15년형을 선고받아 1907년 5월 전남 완도군 고금도에 유배되었다가 그해 12월 융희황제의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註69) 고금도에서 돌아온 백낙구는 즉시 전북 전주로 가 다시 의병에 합류하여 항일전에 투신하였고, 1907년 말 태인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 전사 순국하고 말았다. 註70)

우국 선비인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1910이 맹인 의병장 백낙구에 대해 남긴 다음과 같은 세평은 후인들로 하여금 옷깃을 여기게 한다.

백낙구는 두 눈을 실명하였다. 전투할 때마다 가마를 타고 일본군을 추격하였고, 패할 때도 가마를 타고 도주하였다. 세 차례 잡혔는데, 결국 총을 맞아 죽었다. 광양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백낙구는 발발勃勃한 기개가 있다’고 말 한다. 註71)



[註 60] 황현, 『매천야록』, 395쪽. ☞

[註 61] 전라남도 경무과, 『전남폭도사』, 10·21·22쪽. ☞

[註 62] 『만세보』 1906년 11월 15일자. ☞

[註 63] 전라남도 경무과, 『전남폭도사』, 21~22쪽. ☞

[註 64]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1, 397쪽. ☞

[註 65] 『대한매일신보』 1906년 11월 14일자. ☞

[註 66] 『만세보』 1906년 11월 28일자 ; 『대한매일신보』 1906년 12월 5일자. ☞

[註 67] 『관보』 1907년 4월 21·23일자. ☞

[註 68] 『대한매일신보』 1906년 12월 7일자 ; 『독립신문』 1920년 5월 8일자 ; 황현, 『매천야록』, 395~396쪽. ☞

[註 69] 『관보』 1907년 5월 6일자 및 12월 3일자. ☞

[註 70] 전라남도 경무과, 『전남폭도사』, 20~23쪽 ; 황현, 『매천야록』, 395·413쪽. ☞

[註 71] 황현, 『매천야록』, 396쪽. ☞




5. 양한규의 남원의병


전북 남원에서는 양한규梁漢奎, 1844~1907가 1906년 음력 세모歲暮에 의병을 일으켰다. 양한규의 이력에 대해서는 남원의 아전 출신이라는 설과 운봉군수를 지냈다는 설이 있어 명확하지 않다. 註72) 또 그는 초계草溪의 군함郡啣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양초계梁草溪’로 불리었다. 그는 처남인 주사 박봉양朴鳳陽과 함께 1894년 10월 동학농민군이 점거하고 있던 남원성을 탈환하는 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또 최익현의 태인의병을 탄압하기 위해 남원 진위대가 순창으로 출동하게 되자, 그는 진위대 관군에게 태인의병을 공격하지 말 것을 당부하기도 하였다. 의병을 일으킬 당시 그는 61세의 고령이었다.

일제 침략으로 야기된 국운의 쇠망을 통탄하던 양한규는 1905년 을사조약 늑결에 큰 충격을 받고 거의를 결심하였다. 이에 그는 거금의 가산을 기울여 각지의 지사들을 규합하는 한편, 총포와 활·창 등의 무기를 수집하여 비장秘藏해 놓고 거의할 적기適期를 노렸다. 註73)

이때 양한규는 호남 각지의 항일지사들과 널리 연계하여 동시다발적으로 의병을 일으키려는 원대한 방략을 세웠다. 1907년 1월 초에 양한규는 남원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능주의 양열묵, 창평의 고광순 등과 회합하여 남원을 먼저 점령한 뒤 광주·나주·전주 등 주요 거점을 비롯해 각 포구를 차례로 점령하여 친일세력을 제거하고 나아가 매국대신들도 처단할 것을 협의하였다. 이처럼 양한규는 능주·창평 등 항일의병세력이 왕성하던 각지 의병세력과 연계하에 공동으로 항일전을 전개하려는 전략을 갖고 있었다. 註74)

양한규는 거사일을 1907년 2월 12일음 1906.12.30로 잡고, 이 날 밤에 일제히 모여 남원성을 점령하기로 하였다. 이 날은 음력 세모였으므로 성내의 진위대 관군들이 연말연시 휴가로 귀가하였기 때문에 경비가 매우 허술한 상태였다. 양한규 휘하의 정예의병 100명을 비롯하여 참봉 유병두柳秉斗가 거느린 의병 50명, 그리고 진사 박재홍朴在洪과 상인 양문순梁文淳 등이 각기 거느리고 있던 의병들이 남원 외곽 10리 지점의 진목정眞木亭 주막에 집결하였다. 또한 포천의 정언正言 이응천李應天도 여기에 합류하였다. 이때 모인 의병들은 양한규를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그의 지휘를 따르기로 하였다. 양한규 의병의 편제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주장이었던 양한규는 이응천과 함께 선봉을 맡았고, 학식이 풍부하던 박재홍이 서기를 맡아 군중사무를 보았던 것으로 확인된다. 註75)

양한규 의병은 13일, 곧 음력 설날 새벽에 남원성을 향해 쇄도해 들어갔고, 특별한 저항없이 무혈입성에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남원성의 4대문은 의병의 파수하에 들어가고 진위대의 무기 군수품 일체를 접수하였다. 註76) 그러나, 성을 장악한 직후, 양한규 의병은 곧 와해되고 말았다. 달아나던 적을 추격하던 중 양한규 의병장이 애석하게도 탄환을 맞아 순국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어 다음날에는 진위대 관군이 반격해 들어오자 사기가 저상된 의병은 참패를 당해 성을 탈출한 뒤 지리산 일대로 흩어지고 말았다. 이로써 양한규 의병의 활동은 종료되었다. 한편, 이 무렵 담양군 창평의 고광순 의병은 양한규 의병과 합류하기 위해 남원에 당도하였지만, 이때는 이미 양한규 본진이 와해된 뒤였기 때문으로 회군하고 말았다.

양한규 의병장의 전사 순국에 뒤이어 운봉을 근거지로 삼고 양한규 의병과 연합전선을 폈던 박봉양을 비롯해 박재홍·양문순 등의 간부들은 체포되어 전주를 거쳐 서울로 압송되고 말았다. 註77) 이들은 평리원에서 종신유배형을 선고받고 1907년 7월 홍주의병장 민종식과 함께 전남 진도에 유배되어 고초를 겪었다. 그리고 평리원 판결 때 이들과 함께 양한규 의병에 가담하였던 김백룡金伯龍은 태 80대의 처분을 받기도 하였다. 註78)



[註 72] 황현의 『매천야록』(406쪽)에서는 아전집안 출신으로, 『동학난기록 하』(512쪽)에는 군수 출신으로 각각 기록되어 있고, 송상도의 『기려수필』(112쪽)에는 ‘草溪郡事 겸 內禁衛將’의 직함을 가졌던 것으로 기록하였다. ☞

[註 73] 황현, 『매천야록』, 406쪽 ; 송상도, 『기려수필』, 112쪽. ☞

[註 74] 『관보』 광무 11년 7월 15일자. 

여기에 나오는 능주의 梁文擧는 쌍산의소 의병장 양회일의 핵심참모인 梁烈默의 자인 公擧의 오류로 인정된다. ☞

[註 75] 『관보』 광무 11년 7월 15일자. ☞

[註 76] 송상도, 『기려수필』, 112~113쪽. ☞

[註 77] 전북향토문화연구회, 『전북의병사』 하, 1992, 66쪽. ☞

[註 78] 『관보』 광무 11년 7월 16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