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최익현의 태인의병 / 호남지방의 중기의병 / 한말 중기의병

몽유도원 2014. 2. 26. 08:33

제4장 호남지방의 중기의병


최익현의 태인의병

능주의 쌍산의소

고광순 의병

백낙구의 광양의병

양한규의 남원의병


1. 최익현의 태인의병


1. 최익현의 의진 결성

을사조약 늑결 이후 호남지방에서 일어난 대표적인 의진이 태인의병이다.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1907이 이끌었던 태인의병은 중기의병 가운데서도 호남지방을 대표하는 의진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 의병전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가는 데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한말 개화와 외압의 격동기를 살았던 인물 가운데 최익현만큼 그 이미지가 선명하게 부각된 사람도 흔치 않다. 개항을 전후해서는 화서 이항로 학파를 상징하는 위정척사론자로서, 을사조약 늑결 이후 국망에 직면해서는 항일의병의 표상表象으로서 충군애국을 구현하는 역사적 소명을 성실하게 수행한 결과로도 생각된다. ‘500년 종사가 드디어 망하니 어찌 한번 싸우지 않겠는가. 또한 살아서 원수의 노예가 되는 것이 어찌 충의의 혼이 되는 것만 같겠는가’ 또는 ‘머리는 자를 수 있으나 머리털은 자를 수 없다’라는 등의 거두절미된 어록만으로는 최익현을 이해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근대사회로의 전환이라는 역사의 큰 조류를 역행하는 성리학적 전통질서의 재확립에 이념을 두고, 개화를 거부하고 제국주의 침략에 도전하는 위정척사론과 그를 구현하려는 항일의병으로 일관된 의지와 행동이 표출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호남의병을 선도한 면암 최익현


최익현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을사조약 늑결 이후 70세가 넘은 노구를 무릅쓰고 직접 의진을 편성하여 항일전에 투신했다는 사실에 더 큰 비중이 있다. 최익현은 을사조약 늑결에 항거하여 매국대신들인 을사5적을 처단할 것을 요구한 「청토오적소請討五賊疏」를 올리고 나아가 의병을 일으켜 국권회복을 도모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 결과 호서지방에서 민종식을 주장으로 삼아 일어났던 홍주의병과 더불어 공동항전을 구상하였던 태인의병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최익현이 항일의병을 도모하려던 구체적인 움직임은 1905년 12월 말 충남 논산군 노성의 궐리사闕里祠 註1) 집회에서 나타났다. 그는 명암明菴 신협申梜의 초청을 받고 궐리사에 가서 1906년 12월 26일음 12.1 원근의 유생 수백 명을 모아 강회를 열고 절박한 시국상황을 알리는 한편, 일치 단결하여 국권회복에 동참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때 회집한 유생들과 함께 구국투쟁에 매진할 것을 결의하고 약문約文을 작성하였는데, 그 서두를 보면 다음과 같다.



… 오도吾道를 지키고, 화맥華脈을 보존하며, 종국宗國을 보호하여 원수들을 없애버리는 여러가지 일을 가지고 대략 몇 가지 조목을 만들어 우리 전국의 사민들과 함께 힘쓰고자 한다. 부디 혼미하고 노망한 자의 말이라고 하여 폐기하지 말고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한결같은 마음으로 준행遵行하여 실효가 있게 된다면 천만다행이다. 註2)



즉 ‘오도’와 ‘화맥’과 ‘종국’을 수호하고 일제를 구축하기 위해 몇 가지 조목을 약조하여 실행하도록 맹세한다는 것이다. 이어 약문의 본문에서는 친일세력에 대한 성토와 처단, 납세 거부투쟁, 일본상품 불매운동, 연명 상소투쟁 등을 규정한 7개 항의 결의문을 제시하였다. 그리하여 연명 상소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각지의 유생들에게 2월 13일 진위振威에 집결토록 하였으나, 일제의 방해로 성사되지 못하고 말았다.

궐리사 강회에는 1896년 진주의병에 협력한 적이 있던 경남 합천의 명유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도 10여 명의 지사들과 함께 참석하기도 하였다. 곧 이때의 강회는 항일의지를 천명하면서 의병세력을 규합하기 위한 모임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는 점에서 거의의 준비단계였던 셈이다.

이어 최익현은 각지 유림지사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판서 이용원李容元·김학진金鶴鎭, 관찰사 이도재李道宰, 참판 이성렬李聖烈·이남규, 그리고 거유인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과 간재艮齋 전우田愚 등에게 편지를 보내 창의를 독려하기도 하였다.

이 무렵 호남지방에서는 전북 고창 출신의 유생 고석진高石鎭과 진안 출신의 최제학崔濟學, 그리고 전 낙안군수 임병찬 등이 의병을 도모하고 있던 중이었다. 이들은 거의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던 중 충남 정산에 있던 최익현을 호남으로 모셔와 의병장에 추대할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익현은 송병선의 순국 소식을 듣고 1906년 2월 하순경 드디어 거의를 위해 정산을 떠나 호남으로 내려갔

다. 註3) 그는 호남으로 향하면서 다음과 같은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군사가 훈련되지 못했고 무기도 이롭지 못하니 반드시 각 도, 각 군과 성세를 합쳐야만 일이 이루어질 것이니, 나는 마땅히 남으로 내려가 영, 호남을 깨워 일으켜 호서와 함께 서로 성원이 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註4)



위 인용문을 통해 최익현의 원대한 투쟁방략을 이해할 수 있다. 즉 그는 삼남의 여러 우국지사들과 연계하여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항일의병을 일으켜 상호 연합전선의 구축을 통해 항일전을 전개하려는 전략을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최익현은 곽한일과 남규진에게 영남·호남과 함께 의각 犄角의 형세가 되도록 호서지방에서 의병을 일으키도록 권유하였으며, 화서학파의 동문인 유인석에게는 남북에서 함께 호응하자는 글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영남의 문인 조재학曺在學과 이양호李養浩에게도 사람들을 모아 거사하도록 지시하는 한편, 영남 각지에 편지를 보내 거의를 독려하였다. 이처럼 원대한 전략하에 호서에서는 민종식이 의병을 도모하게 되자, 최익현은 지역적 연고가 미약했음에도 불구하고 호남으로 내려가 이 지역의 항일세력을 규합해 거의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최익현이 거의를 준비하던 당시의 정황은 최근에 발굴된다음 자료를 통해서도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송연재송병선-필자주가 등대登臺-필자주하여 또 순절한즉 선생이 들으시고 설위통곡設位痛哭-필자주 왈 제공들 순절이 장하나 그러나 사람마다 한갓 죽으면 누가 회복하리오 하시고 거의할 계책을 결단하사 문인을 보내어 이판서 용원과 김판서 학진과 이관찰 도재와 이참판 승렬 이참판 남규와 곽면우 종석과 전간재 우씨 제공에게 편지하여 상의하되 응하는 자가 없고 복합상약伏閤相約-필자주은 왜적이 탐지하고 군사를 거의 다 진위에다 두어 막는지라 문인 고석진이 고왈 태인 거하는 전 낙안군수 임병찬이가 가히 의논할 만하나이다 하니 선생이 최제학을 보내어 의논하신즉 병찬이 쫓기를 원하고 예산에 우거한 곽한일이 선생의 의향을 아는 고로 남규진으로 더불어 와서 보았고 일을 말씀함에 가히 임사任事-필자주할 만한지라 선생이 성명도장과 격서檄書-필자주와 기호旗號-필자주를 주시고 한일에게 일러 왈 충청도 일은 군에게 부탁하노라 하시고 또 참판 민종식씨가 내포에서 기병하여 장차 기를 세울지라 선생이 이르되 반드시 각 도가 일심합력하여야 서기기망庶幾期望-필자주이 있을 것이니 나는 남으로 행하여 영, 호남 양도를 고동시키리라 하시고 가묘에 하직하시고 전라도로 행차하사 임낙안 병찬에게 모군·치양置糧-필자주 등 일을 지휘하시고 영남 문인 이양호·조재학을 영남으로 보내어 각처에 상의하라 하시고 … 註5) 맞춤법 및 띄워쓰기-필자



최익현의 문인으로 의병에 동참했던 최측근 인물이 기록한 것으로 믿어지는 필자 미상의 순한글 기록 가운데 최익현이 거의를 결심한 뒤 항일전의 방략을 구체적으로 세워가는 대목을 인용한 것이다. 최익현은 송병선의 순국에 충격을 받아 거의를 결심하게 되었고, 각처의 명망지사들에게 연락을 취해 함께 거사를 도모하려 하였지만 여의치 못한 상황에서 고석진의 추천으로 임병찬과 조우하여 함께 거의를 준비 계획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민종식을 정점으로 하는 호서지방 의병과의 연계 임무는 곽한일과 남규진 양인에게 맡기고, 최익현 자신은 호남으로 내려가 거의함으로써 영남·호남 두 곳의 민심의 호응을 모두 얻어 항일의병세력을 규합하려는 전략을 세운다는 것이다. 


최익현의 행적을 순한글체로 기록한 『면암선생사실기』


나아가 영남지방의 의기를 고무시키기 위해서 이 지방 출신의 이양호와 조재학 두 문인을 파견한다는 것이다. 그 실현 가능성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이로써 볼 때 최익현의 핵심전략은 결국 호남, 영남, 호서 등 삼남지방의 의병세력이 상호 연계하여 항일전을 전개하는 데 있었다.

최익현이 의병을 일으키는 과정에서는 고석진의 추천을 받아 알게 된 둔헌遯軒 임병찬林炳瓚, 1851~1916의 역할이 매우 컸다. 당시 임병찬은 전북 태인의 종석산鍾石山 밑에 살고 있었다. 과거 동학농민군의 지도자인 김개남金開南을 체포하는 데 큰 공을 세웠던 임병찬에 대해 최익현의 문인들은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전북 옥구에서 태어나 옥구와 전주에서 향리로 재직하며 능력을 인정받았으며, 그뒤 낙안군수를 지내면서도 선정을 베풀었다. 임병찬은 이미 전기의병 당시에도 자신이 살고 있던 태인군 산내면 종성리를 무대로 무기를 수집하고 포수를 모집하는 등 거의 준비를 하던 중 피체된 적이 있던 우국지사였다. 註6)

최익현은 문인 최제학을 대동하고 임병찬을 찾아가 수일간 머물면서 거의문제를 숙의하였다. 이때 최익현은 동학농민전쟁을 치르면서 군무경험을 쌓은 임병찬에게 의병 모집에서부터 군수물자 조달, 군사훈련에 이르기까지 일체의 군무를 위임하였다. 그리고 그는 문인 이재윤李載允을 시켜 청나라로 들어가 구원병을 청하는 일을 강구토록 하였고, 오재열吳在烈에게는 군사와 무기를 모아 운봉에 머물면서 명령을 기다리도록 지시하기도 하였다. 註7)


태인의병의 핵심참모 임병찬


거의를 위한 실무를 총괄하게 된 임병찬은 각지의 의병 모집에 심혈을 기울였다. 특히 산포수를 규합하는 일에 힘을 쏟아 과거 반동학군으로 활동한 임실의 김송현金松鉉, 순창 포수 채영찬蔡永贊, 태인의 포수를 지휘하는 김우섭金禹燮 등을 포섭하여 전력을 갖추었다. 그밖에도 동학농민전쟁 때 사용하던 총검을 수선하거나 다른 지역의 포수를 가담시키고자 노력하였다. 이는 태인의병의 군사적 기반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註8)

임병찬은 또한 호남의 명유지사인 기우만奇宇萬·이항선李恒善·장제세張濟世·조안국趙安國 등과도 연락하며 거사에 대한 방책을 강구하였다. 이에 임병찬은 거의에 임하는 결의를 다지고 구체적인 거사 준비에 필요한 내용을 조목별로 제시한 통문을 작성하여 장제세·조안국·배응천裵應天 등 세 사람의 명의로 각 군의 향장鄕長·수서기首書記 및 대소 인민에게 널리 돌렸다. 통문을 발하는 명분과 목적을 천명한 서두와, 거의준비를 위하여 구체적인 행동강령을 제시한 군율·의제·규례 등 세 가지 조목 가운데 중요한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국사가 이에 이르렀으니 여러 말이 필요없다. 사람들이 모두 장량과 제갈공명이 다시 나와도 대세를 어찌할 수 없다고 한다. 우리는 통절히 느끼도다. 병가의 승패는 강약과 이둔利鈍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지혜롭고 용감한 장수가 충의로운 군졸을 거느리고 일심동력이 될 때 가히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장량이나 제갈공명과 같은 인재인들 어찌 세상에 시험한 다음에 나왔겠는가. 충분忠憤을 격동시켜 바야흐로 의병을 일으키려 한다. 군율·의제·기계·규례 등 여러 조항을 뒤에 적어 통문을 발하고 회집 장소와 일자는 추후 알리겠으니, 모든 것을 예비하여 다음 통문을 기다려라. 혹 태만 소홀히 여겨 군율을 범하고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바란다.


군율

一. 구습을 믿고 군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참한다.

一. 비밀리에 적과 내통하여 군사기밀을 누설하는 자는 참한다.

一. 적과 싸움에 임하여 겁내어 물러나는 자는 참한다.

一. 촌가를 약탈하고 부녀를 간음하는 자는 참한다.


의제

一. 상의는 황색으로 물들인다.… 하의는 각자의 태어난 천간天干에 따라 염색한다.… 전대는 청색으로 염색하고, 수건은 홍색으로 염색한다.

一. 칼·창·활·총은 있는대로 가지고 나오되, 갈고 쓸어서 빛나게 한다. … 배낭 1개백목 혹은 삼베로 쌀 2말이 들어가게 한다, 끈달린 베주머니 2벌1벌은 백미 1되를 넣고, 1벌은 빈 것으로 지참한다, 표주박 1개, 화구火具 주머니 1개火鐵, 火石, 火羽, 짚신 2켤레, 삿갓 1벌, 비옷[油衫] 1벌을 갖춘다.


규례

一. 회집하는 날 먼저 맹주를 정하고 그의 지휘를 받을 일.

一. 통문 도착 즉시 등사하여 각 면리에 두루 알려 한 사람이라도 알지 못하게 되는 폐단이 없도록 한다. 만약 오래 두어 중도에 지체한다면 이는 적당의 무리이니, 거의하는 날 먼저 그 군으로 가서 향장·수서기에게 군령어긴 죄를 물을 일.

一. 이 통문은 시도장市都長이 향청에 바칠 것. 註9)



위 인용문에도 나타나듯이, 이 통문은 각 군의 향청을 중심으로 전 지역에 전파되었다. 위 통문의 요지는 머지 않아 의진이 편성될 것이므로, 각지 향장과 수서기의 지휘하에 주민들로 하여금 이에 대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다음 지시를 기다리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 통문 가운데 하나가 3월 25일 밤 김제읍 근처 상점의 벽에 게시되었고, 그 통문을 입수한 전북관찰사 한진창韓鎭昌은 그 사실을 내부에 보고하였다. 註10)

이 통문에서 특히 중요한 사실은 유생들이 거의를 주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군율 등 네 가지로 나누어 거의와 관련되어 준비하고 추진해야 할 내용들을 구체적으로 조목조목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군율’에서 군령에 불복종하는 자, 군사기밀 누설자, 전투에서 물러서는 자, 부녀를 겁간하는 자는 참수한다고 명시한 조항이라든지, ‘의제’를 규정한 조항에서 상의를 황색으로, 하의를 각자의 생년에 따라 염색하고, 창·칼·활·총 등의 무기를 휴대하고 배낭·군량·취사도구 등의 군물을 구비하도록 명시한 대목 등은 특기할 만하다.

통문이 이처럼 구체적인 조항들을 명기한 것은 임병찬 등이 과거 동학농민전쟁 당시 농민군을 방어하던 조직을 운영했던 경험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통문의 내용이 그대로 이행되었는지의 여부는 불분명하지만, 양반 유생들이 주축이 된 의거 조직이 실제 전력을 구비할 수 있는 방향으로 준비되어 가고 있던 증좌라는 점에서 이 통문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註11)

최익현은 이 무렵 태인·진안·운봉 등지를 전전하면서 의병을 규합하는 데 필요한 인사들과 부단히 접촉하였다. 하지만, 농번기가 닥친 데다가 시일이 촉박하여 병기와 군량을 충분히 갖추기가 어려웠다. 이에 임병찬은 최익현에게 “재정이 고갈되고 농무가 한창 바쁜데 군사모집마저 또 뜻대로 되지 아니하니 가을을 기다려 거사하는 것이 어떻겠는가”라고 하여 가을로 늦추어 거의할 것을 제의하였다. 하지만, 최익현은 일의 성패와 상관없이 나라의 위기를 구하려면 지금도 시기적으로 이르지 않다고 하며 당장 강행할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에 임병찬도 결국 최익현의 주장에 동의하게 되었고, 6월 4일음 윤4.13 태인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강회를 개최하면서 거의하기로 확정하였다. 註12)

이처럼 거의 날짜를 확정하게 되자, 최익현은 5월 24일음 윤4.2 의병을 일으키는 이유와 명분을 광무황제에게 알리기 위해 다음과 같은 상소문을 지어 민영규閔泳奎로 하여금 전달케 하였다.



신은 불행히도 오늘까지 살아서 이러한 변고를 보았으니 … 오직 입궐하여 소를 올리고 폐하 앞에서 머리를 부수어 스스로 죽을 뿐입니다. 그러나 폐하가 할 수 없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으니, 공연한 헛소리로 떠드는 것은 다만 실상이 없는 글이 될 것이며, 또 인심이 아직 국가를 잊지 않음을 보았으니, 스스로 헛되이 죽는 것도 경솔한 행동이기에 참고 견디면서 약간의 동지와 함께 적의翟義·문천상文天祥이 의병을 일으킨 것과 같은 일을 계획한 지 4~5개월이 되었습니다. … 지금 계획이 다소 정해졌고 인사도 겨우 모였으니 이에 금월 13일양 6.4-필자주 전 낙안군수 신 임병찬에게 먼저 의기義旗를 세워 동지들을 장려하여 차례로 북상하게 하였습니다. 이등박문伊藤博文·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 등의 왜적들을 부르고, 각국의 공사·영사를 회동하여 담판을 열고 작년 10월의 늑약을사조약-필자주을 거두어 취소하고, 각 부에 있는 고문관을 돌려 보내고, 우리의 국권을 침탈하고 우리 생민을 해롭게 하는 전후의 모든 늑약은 모조리 만국의 공론에 회부하여, 제거할 것은 제거하고 고칠 것은 고쳐서 국가는 자주권을 잃지 않고, 생민은 어육魚肉의 화를 면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신의 소원입니다. 진실로 힘과 형세를 헤아리지 않고 함부로 민중을 움직여 강한 오랑캐를 상대로 중과부적의 처지에서 한때의 목숨을 다투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만약 하늘이 재앙을 뉘우치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들에게 짓밟히는 화를 당한다면, 신도 달게 죽음을 받아 여귀厲鬼가 되어 원수 오랑캐를 깨끗이 쓸어버릴 것을 기약하며, 저들과는 천지간에 함께 숨쉬며 살지 않을 것입니다. 註13)



위의 인용문 가운데 특기할 내용은 최익현이 의병활동을 통해 궁극적으로 달성하려던 계획은 일제 침략세력의 본거지인 서울로 북상하여 각국 공사관원들과 일제 침략기관인 통감부와 한국주차군사령부의 대표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담판을 통해 국권회복을 도모하려 했다는 점이다. 또한 이러한 외교노력을 통한 국권회복 계획은 군사력의 열세를 스스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의 소산이기도 하였다. 상소의 말미에 “진실로 힘과 형세를 헤아리지 않고 함부로 민중을 움직여 강한 오랑캐를 상대로 중과부적의 처지에서 한때의 목숨을 다투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토로한 대목을 통해서도 최익현이 일제에 비해 군사력이 절대 열세에 놓여 있던 실정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음을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최익현이 광무황제에게 올린 「창의토적소」

 


그러나 그는 이러한 계획이 실패할 경우에는 죽을 때까지 항일투쟁을 전개할 결심을 하고 있다는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밝혔다.

한편, 거사 날짜가 임박하게 되자, 최익현과 임병찬은 인근 지역으로 격문을 발송하고 또 사람을 보내 의병모집과 군기수집에 전력을 기울였다. 임병찬은 사람을 비밀리에 전주로 보내 최학엽崔學燁·유예근柳禮根에게 군호軍號를 보냈으며, 순창·담양·창평·광주 등지로도 거의 사실을 알리는 통문을 비밀리에 보냈다. 그리고 순창 출신의 양윤숙楊允淑에게는 삼방三坊 포수 채영찬 등에게 기맥을 통하게 하고, 또 서용수徐庸洙로 하여금 실전에 대비하여 총과 칼 등의 무기를 거두어 수선토록 하였다. 註14)

또 최익현은 항일전의 방략을 협의하고 거의과정에서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조선말기 대학자였던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의 손자로 호남지방 유림의 거두이며 항일세력의 중심인물이던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1916을 찾아갔다. 최익현은 문인 최제학을 대동하고 5월 30일음 윤4.8 전남 담양의 추월산에 있는 용추사龍湫寺에서 기우만과 만났다. 이 자리에는 호남 각지의 명유 50여 명이 회동하였으며, 항일전을 수행할 방책을 이들과 함께 도모하였다. 순창 출신으로 해방 후 대법원장을 지낸 김병로金炳魯도 그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註15)

전기의병 당시 장성의병을 주도한 전력前歷이 있던 기우만 역시도 이 무렵 재기항전을 준비하던 중이었다. 그는 재거를 결심하고 1906년 2월경 전남 각지의 향교와 향약소를 중심으로 면리面里까지 의병을 모집하는 통문을 돌렸다. 註16) 이로 인해 그는 2월 말 일제 헌병대에 체포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실제 감금에 이른 것 같지는 않다. 이어 3월 초 일진회에서는 기우만 등이 향약소를 기반삼아 의병을 일으키려 한다는 정보를 일제 경찰기관과 전남 관찰부에 보고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북과 전남 항일세력의 양 거두인 최익현과 기우만은 항일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연합전선을 구축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고, 이로써 양자간의 회동이 성사될 수 있었던 것이다. 註17)

이 날의 용추사 회합에서는 거의의 정당성을 천명하고 주민들의 참가를 독려하기 위한 격문을 발포하였고, 또 의병에 동참하기로 한 지사들의 연명부인 「동맹록」을 작성, 항일전 수행에 매진할 결의를 다졌다.

이때 최익현의 이름으로 발포된 격문 가운데 중요한 대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아, 저 일본 적도賊徒는 실로 우리 백세의 원수이다. 임진년 재난에 두 능묘가 입은 화를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병자년의 조약은 실로 바깥 오랑캐가 노리는 길을 매개한 것이다. 동맹할 때 바른 피가 아직 마르지도 않았는데, 협박의 환란이 뒤이어 와서 우리의 죄인을 비호해 주고, 우리의 궁궐을 짓밟고, 우리의 국모를 시해하고, 우리 임금의 머리를 깎고, 우리의 윤리강상을 괴멸하고, 우리의 의관을 찢고, 우리 대관大官을 노예로 삼고, 우리 생민을 어육으로 만들고, 우리의 전토를 점탈하고, 우리의 분묘를 파헤쳤으니, 이것으로도 오히려 부족하여 갈수록 더욱 해독을 부리고 있다. 오호라, 지난 10월의 소행을사조약-필자주은 진실로 천만고에 없었던 일이다. 하룻밤 사이에 한 쪽지의 가可자로 오백년 종묘사직이 마침내 망했으니, 천지신령이 진노하고 조종영령이 통곡하고 있다. … 변고를 당한 지 이미 몇 달이 되었는데도, 토적을 도모하는 자가 어찌 한 사람도 없단 말인가. 임금이 없어졌는데 신하만 어찌 홀로 있을 수 있을 것이며, 나라가 깨졌는데 백성만 어찌 홀로 있을 수 있겠는가. 솥 안의 고기는 곧 삶길 것이고 대들보 위의 제비는 곧 불탈 것이니, 죽음만 있을진대 어찌 한번 싸우지 않겠는가. 살아서 원수의 종이 되는 것보다 죽어서 충의의 귀신이 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 무릇 우리의 종실·세신世臣·관찰·군수·사농공상·서리·승려 모두가 일시에 함께 분기하여 마음과 힘을 합쳐 원수 오랑캐의 종자를 멸절하고 그 소굴을 불태워 역당을 진멸하여 그 머리를 매달고 그 고기를 찢어서 위태로운 형세를 편안한 형세로 바꾸고 나라의 명맥을 튼튼히 하고 비색한 끝에 태평이 와서 사람이 짐승이 되는 것을 면해야 할 것이다. 적이 강하다고 말하지 말라. 우리의 군사는 정의를 믿는다. 감히 이로써 통고하니 함께 힘쓸지어다.



용추사 회동 때 작성된 이 격문은 순천과 낙안을 비롯하여 흥양·여수·돌산·광양·장흥·보성·강진·해남·완도 등 전남 각지로 발송되었다. 최익현은 이 격문에서 먼저 임진왜란, 강화도조약 이래 일제가 국권을 유린한 실상을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이를 격렬하게 성토한 뒤, 을사조약 늑결로 인해 실질적으로 국망의 단계에 이르게 된 실정을 적나라하게 폭로하였다. 이와 같은 형세하에서 격문의 말미에서는 신분과 계급을 초월하여 전 국민이 일치단결하여 결사항전을 통해 일제를 구축해야 한다고 당위성을 역설하였고, 무도한 일제 침략세력에 비해 의병은 떳떳한 명분을 가진 정의로운 집단임을 강조하였다.

한편, 용추사 회동 때 작성된 호남 지사들의 「동맹록」에는 최익현·기우만·이재윤·고석진·최제학·임병찬 등 모두 112명이 연명하였다. 이들 대부분은 최익현과 기우만의 문인들로, 태인의병의 거의·활동 과정에 직접, 간접으로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2. 태인의병의 활동

전남 담양의 용추사에서 6월 3일 출발한 최익현 일행은 다음날 태인의 무성서원에 도착하여 강회를 열었다. 거의를 알리는 통문이 각지에 이미 전달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때 수백 명의 유생들이 무성서원에 운집해 있었다. 최익현은 강회를 마친 뒤 비통한 눈물을 흘리면서 창의에 동참할 것을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다.



왜적이 국권을 빼앗고, 역신이 화를 빚어내어 5백 년 종사와 3천 리 강토가 다 없어지게 되었으며, 군부는 우공寓公의 화를 면하지 못하고 생민은 모두 어육의 참혹한 화를 당하게 되었다. 구신舊臣인 나는 진실로 종사와 생민의 화가 여기까지 이르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 힘을 헤아리지 않고 대의를 천하에 펴고자 하니 성패와 이해는 예견할 수 없지만 내가 전심으로 나라를 위해 죽음을 생각하고 살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천지신명이 도와서라도 어찌 성공하지 못하겠는가. 註18)


태인의병의 거의擧義장소인 무성서원 (전북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최익현의 창의 선언에 동참하여 즉석에서 80여 명이 의병 대열에 합류하였다. 이로써 태인의병은 활동을 개시하였으며, 이 의병은 호남에서 을사조약 늑결 이후 최초로 봉기한 의진이 되었다. 이때 의병장 최익현은 74세의 노구를 이끌고 항일의병의 선봉에 섰다.

무성서원에서 일어난 의병이 태인 본읍으로 행군해 들어가자, 군수 손병호孫秉浩는 그 기세에 눌려 저항을 포기하고 도망쳤다. 이에 무혈로 입성한 직후 의병장 최익현은 향교로 들어가 명륜당에 좌정하고 향장과 수서기를 불러 관아의 무기를 접수하는 한편, 군사들을 모아 전력을 강화시켰다.

이와 같이 활동을 개시한 직후 최익현은 일제의 침략상을 규탄하고 그 맹성을 촉구하는 「기일본정부서寄日本政府書」를 일제 통감부에 보냈다. 창의에 즈음하여 주민들에게 포고한 격문과 황제에게 올린 상소에 뒤이어 최익현이 거의의 명분을 천명하고 일제 침략상을 성토한 중요 문건 가운데 하나이다. 장문으로 된 이 글의 서두는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다.



나라에 충성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성誠이라 하고 신을 지키고 의를 밝히는 것을 도道라고 한다. 사람으로 이 성이 없으면 반드시 죽고 나라에 이 도가 없으면 반드시 망한다. 이것은 다만 노생의 범담이 아니다. 또한 개화열국이라 할지라도 이것을 버리면 아마도 세계 안에 자립하지 못할 것이다. … 그러나, 귀국이 우리나라에 대하여 흉포를 행하는 방법은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더욱 심하여, 무엇이든 신의를 배반하였다. 전에는 ‘조선은 독립 자주의 나라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하고 있다’고 말하였는데, 지금 어찌하여 우리를 노예로 삼는가. 전에 러시아와 전쟁을 할 때, ‘한국의 독립과 토지·주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이다’ 하였는데, 지금 한국의 독립과 토지·주권을 빼앗아 가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전에는 서로 간절하게 침범하거나 시기하지 않겠다고 맹세를 하였는데, 지금 어찌하여 오로지 침탈을 일삼아서 우리 이천만 국민의 복수심을 일으키게 하여 앉을 때 동쪽을 향하지 않게 만드는가. 전에는 조약을 변경할 필요없이 영원히 신의를 지키고 화평을 유지하는 바탕으로 삼았었는데, 지금 조약을 변경하여 신의를 저버리고 화평을 깨뜨려서 하늘을 속이고 신령을 속였으며, 또 천하 열국을 속였다. 이유를 들어 증명하겠다. 註19)



최익현은 일본 정부에 보내는 이 글에서 인간의 성정性情과 국가간의 도의를 상실한 일제의 야만성을 지적한 뒤, 강화도조약 이래 일제가 한국에 대해 배신과 기만을 자행하면서 국권침탈을 일삼아 온 실상을 폭로함으로써 일제의 야만성과 침략성을 입증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일제가 그 동안 한국에서 자행한 죄상을 16가지 조목으로 나누어 낱낱이 열거하였다. 그 죄목은 갑신정변과 갑오경장을 일으켜 한국의 국기를 문란케 한 행위를 비롯해 각종 경제적 이권과 재정을 침탈한 행위, 충신·애국지사들을 탄압한 행위, 일진회 등 친일 반민족세력을 양성해 일제 침략의 압잡이로 삼은 행위, 통신기관을 장악하고 일본인을 관리로 임용한 행위 등에 이르기까지 정치·경제·사회·문화 제반 영역에 걸친 일제의 전방위적 국권침탈 행위를 맹렬하게 성토한 것이다.

이어 최익현은 이 글의 말미에서



수십 명의 동지들과 함께 죽을 각오를 하고 병든 몸으로 상경하여 이등박문伊藤博文·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 등과 한번 만나서 말하고 싶은 것을 다 말하고 죽으려고 한다. 사민士民으로 함께 죽기를 원하는 자가 또 약간 있어서, 먼저 심경을 드러내어 이 글을 만들고 귀국의 공사관에 보내어 머지않아 귀국 정부에 전달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는 다만 우리나라를 위한 계획일 뿐만 아니라 귀국을 위한 계책이며, 귀국을 위한 계책일 뿐만 아니라 또한 동양 전국全局을 위한 계책이니 살피기 바란다.



라고 하여, 황제에게 올린 상소에서도 주장하였듯이, 의병의 군사력을 배경으로 삼아 서울에 올라가 일제침략의 대표자들을 만나 담판을 통해 국권을 회복할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그리하여 이러한 전략은 곧 한국과 일본, 나아가 동양의 안녕과 평화를 담보하기 위한 계책이 된다는 점도 아울러 밝히고 있다.

최익현이 거느린 태인의병은 거의 다음날인 6월 5일 아침 일찍 정읍을 향해 행군하였다. 의병들은 30리를 행군한 끝에 정읍 한교閑橋에 이르러 점심을 먹은 다음, 곧바로 정읍 관아로 진군하였다. 정읍군수 송종면宋鍾冕이 항복하고 최익현을 영접하였기 때문에, 정읍을 점령하는 과정에서도 아무런 저항은 없었다. 이곳에서도 군총·화승·탄환 등의 무기를 확보하였을 뿐만 아니라, 100여 명의 의병을 소모하여 군세를 강화하였다.

태인의병은 정읍에서 오후에 다시 30리를 행군한 끝에 내장사로 들어가 일시 유진하였다. 이 무렵 태인의병이 거의했다는 소식을 듣고 흥덕의 유생 고석진이 김재구金在龜·강종회姜鍾會 등과 함께 전투력이 뛰어난 포군 30여 명을 거느리고 합세해 와 의진의 사기를 더욱 고무시켰다. 이때 의진의 군세는 300명에 이르렀다.

6월 6일 아침, 손종궁의 지휘하에 내장사 뜰에서 의병들을 좌익과 우익으로 나누어 잠시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이어 아침을 먹은 뒤 다시 30여 리를 행군하여 지세가 험해 천연의 요새를 이루고 있던 순창의 구암사龜岩寺로 들어가 유진하였다.

구암사에서 그날 밤을 지낸 의병들은 이튿날 첫새벽 빗속에 행군을 개시하여 정오경 순창읍으로 들어갔다. 순창읍에서는 많은 주민들과 이속들이 나와 의병들을 환영하였고, 순창군수 이건용李建鎔은 최익현 앞에 나아가 항복하였다.

이처럼 태인에서 거의한 이후 정읍을 거쳐 순창에 이르기까지 태인의병은 주민들과 관속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아무런 저항없이 행군할 수 있었다. 그동안 의진이 정읍과 순창으로 행군하는 과정은 또한 군기와 군사를 모아 전력을 강화하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순창에 도착해서도 최익현은 수성장을 불러 총포를 수집해 화력을 보강하도록 조치하였다. 뿐만 아니라 의진이 순창에 당도하였을 무렵, 전일 연락을 취해 놓았던 채영찬이 수십 명의 포군을 거느리고 합류하였고, 황균창黃均昌과 김갑술, 그리고 양윤숙 등이 역시 수십 명의 포군을 데리고 합류해 옴으로써 의진의 전력은 한층 강화되었다. 註20) 


태인의병의 진격로

 


그 동안 태인에서 공금 50원, 소총 35정, 탄환 몇 말을 모은 것을 비롯하여 정읍에서는 공금 30원, 소총 20정, 화약 100근을, 그리고 순창에서는 공금 40원, 소총 25정, 화약 10근, 탄환 몇 말을 수집함으로써 실제로 전력을 크게 보강할 수 있었다. 註21)

한편, 태인의병은 순창에 이르렀을 무렵 비로소 의진의 편제를 갖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무렵 최익현 의병장 휘하에 좌익장·우익장·선봉장·후군장·소모장·좌종사·우종사 등을 배치했다고 하는 기록으로 보아 그러하다. 그밖에도 태인의진에는 화포장·수포수首砲手·서기 등의 직책이 보이고 있는데, 이 정도 편제가 태인의병의 활동과정에서 드러나는 직책의 전부로 보인다. 그 가운데서도 직책에 따른 인명이 확인되는 경우는 선봉장에 이건용李建鎔, 순창군수, 화포장에 강종회, 수포수에 김영찬, 김갑술金甲述, 서기에 정시해鄭時海 등에 불과하다. 그밖에 임병찬을 비롯하여 김기술金箕述·유종규柳鍾奎·김재구金在龜·이동주李東柱·이용길李容吉·손종궁孫鍾弓·임상순林相淳·임병인林炳仁·송윤성宋允性·임병대林炳大·이도순李道淳·최종달崔鍾達·신인구申仁求·최제학 등이 여러 직책을 맡아 활동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것으로 믿어 진다. 註22)

태인의병은 순창에 도착한 다음날인 6월 8일에 남원 방면으로 진출하기 위해 곡성으로 행군하였다. 곡성에서는 주민 100여 명이 마중을 나와 의진을 환영하였으며, 군수 송진옥宋振玉이 최익현을 맞이하였다. 태인의병은 이곳에서도 공금 30원을 수집한 것을 비롯하여 소총 5정, 화약 13근 등의 군기를 모았다. 註23)

곡성에서 남원 방면으로 진출을 시도하던 태인의병은 남원의 방비가 예상 외로 견고하다는 첩보에 따라 길을 돌려 다시 순창으로 향하였다. 태인의병에 가세하기 위해 구암사와 백양사 두 절에 삼방三坊 포수 100여 명이 대기해 있다는 소식이 왔기 때문에 이들과 합세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의진이 도중 오산鰲山에 도착하여 유진할 무렵, 김송현金松鉉과 엄덕조嚴德祚 양인이 포군 수십 명을 거느리고 와 합세하였다. 이 무렵 의진의 군세는 600명에 이르렀을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註24)

이때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 순창군수 이건용이, 의진이 곡성으로 진출한 틈을 타서 전주관찰사 한진창韓鎭昌과 밀통하여 태인의병 탄압 방안을 강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노획문서를 통해 이러한 음모를 탐지한 최익현은 이건용을 의리로 타이르고 오히려 그를 선봉장으로 삼아 휘하에 두었다. 태인의병은 6월 10일 옥과를 지나면서 삼방포수를 영입하였고 이어 순창으로 무사히 귀환해 유진하게 되었다.

최익현이 거느리던 태인의병은 이처럼 각지를 전전하면서 군사를 소모한 결과 순창에 다시 집결하였을 무렵에는 군세가 900명에 달하였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반수가 유생이었고, 총을 휴대한 자는 겨우 300명에 지나지 않았다. 註25) 결국 외형상의 성세에 비해 실질적인 전력은 빈약한 실정이었다. 즉 거의 이후 태인의병은 군사 소모와 전력 확충에 노력하면서 주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외형상 성세를 과시하면서 기세를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태인의병의 거의 이후 호남 각지에서는 항일구국의 의기가 충천하여 도처에서 의병이 봉기하려는 형세를 보이고 있었다. 이 무렵 태인의병의 활동을 기록한 다음과 같은 대목이 그러한 분위기를 잘 드러내고 있다.



최익현이 물러나 옥과에 주둔하며 각 군에 격문을 전하자 전라북도 사민이 최익현이 거의하였음을 듣고서 앞을 다투어 날뛰지 않는 사람이 없었는데, 와서 참여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註26)



위의 기록을 통해서 보더라도, 의정부찬정을 역임하고 조야의 중망을 받고 있던 면암 최익현이 항일전의 전면에 나섰다는 사실에 호남의 민심이 크게 경도되어 있었던 것이다.



3. 태인의병의 해산

최익현을 선두로 태인의병이 을사조약 늑결 이후 고조되던 항일기세를 상징할 만큼 호남지방에서 성세를 떨치게 되자, 일제는 즉시 대응조치를 취하였다. 태인의병이 일어나 순창 방면으로 남하하자, 일제는 그 동향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태인의병이 해산한 직후인 6월 19일 일제 통감부의 총무장관인 학원정길鶴原定吉이 자국의 외무대신 임동林董 앞으로 보낸 동향 보고서에



이 달 4일 밤에 의병이라 칭하는 비도 1백여 명이 전라북도 태인군에서 일어났으며 동시에 전주·목포 사이의 전선을 절단하여 상황이 불온하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이에 앞서 홍주의 비도는 거의 전멸되었으나 그 거괴가 아직 잡히지 않았으므로 한때는 다시 재연하지 않을까 생각되었지만 전혀 예상이 벗어났습니다. 그 거괴는 작년 한일신협약의 성립에 즈음하여 목숨을 걸고 간언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우리 헌병으로부터 퇴경退京을 명령받은 전 찬정 최익현이라는 자로서, 임병찬이라는 자를 부장으로 삼아 태인에서 정읍군을 거쳐 순창군을 점령하고, 혹은 담양에 이르고 혹은 곡성에 진입하여 머지않아 광주로 남하하려는 형세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전라남도 각 군의 인심이 흉흉해졌으며 도처에서 부설浮說과 유언비어에 현혹되는 경우가 있어서 각 지역에 소재한 본국인도 또한 그들의 생업에 편히 종사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목포 이사관으로부터는 수비대의 파견을 요청해 오기에 이르렀습니다. 또 한편에서는 광주진위대

의 거동에 혹시 적과 내응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케 하는 점이 있어, 치안유지상 적절한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하여 주차군과 협의한 결과, 목포·군산 지방을 수비할 목적으로 보병 1개 중대를 광주에 주둔시키기로 결정하였습니다. 註27)



라고 한 대목을 보더라도 당시 일제가 최익현이 이끌던 태인의병의 동향에 얼마나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일제는 태인의병이 광주 방면으로 진출할 것을 대비하여 경찰, 헌병대로 하여금 경계태세에 돌입케 하는 한편, 목포·군산 방면의 방어와 거류민 보호 등을 명목으로 서울의 한국주차군사령부에서 일본군 1개 중대를 광주로 급파하기로 결정하였다. 당시 광주에 거주하던 일인들 가운데는 미리 화를 피해 목포 방면으로 피신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정도로 호남의 일본인들은 공포에 떨었다. 註28)

그리고 일제는 전주 경찰고문지부의 보좌관 가등정전可藤正典을 파견하고, 이어 전주수비대에 통보하여 소도小島 보조원을 무장시켜 한국인 순검 수명과 일제 헌병 2명, 수비대 군인 6명 등을 출동시켰다. 註29) 이들은 태인의병을 정찰할 목적으로 파견되었으나 중과부적으로 도망치고 말았다. 결국 일제는 진위대를 동원하여 태인의병을 탄압하기로 방침을 바꾸었다.

일제는 군부를 통하여 광주와 전주·안동의 진위대까지 동원하여 태인의병을 탄압케 하였다. 그리하여 6월 11일 광주관찰사 이도재李道宰는 의병 해산을 명하는 광무황제의 조칙과 관찰사 고시문을 의병장 최익현에게 보내오면서 해산을 종용하였다.

최익현은 관찰사의 해산 명령을 단호히 거절하였다. 자신의 거의 명분과 목적을 이미 광무황제에게 상소해 놓았기 때문에 황제의 직접 회신인 비답을 받기 전에 자신의 거취문제를 명령하는 것은 관찰사의 월권이라는 논리였다. 그러나 일제의 사주를 받은 정부에서는 전주관찰사 한진창에게 전북지방 진위대를 동원해 의병을 해산시키라는 훈령을 내렸다. 한진창은 전주와 남원의 진위대를 순창으로 출동시켜 태인의병을 봉쇄하면서 의병을 압박하였다. 순창읍의 북쪽인 금산錦山에는 전주진위대가, 동쪽인 대동산大同山에는 남원진위대가 각각 포진하여 읍내 관아의 객관을 중심으로 유진하고 있던 의진을 압박해 왔던 것이다.

최익현은 처음에 이들을 일제 군경으로 오인하고 즉시 전투태세에 돌입했었다. 그러나 얼마 뒤 척후병의 보고로 이들이 일제 군경이 아니라 동족인 진위대 군인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동족상잔의 비극을 피하기 위해 진위대측에 다음과 같은 간곡한 통첩을 보냈다.



우리 의병은 왜적을 이 땅에서 몰아낼 목적으로 싸울 뿐 동족 살상은 원치 않는다. 진위대도 다같은 우리 동포일진대, 우리에게 겨눈 총구를 왜적에게로 돌려 우리와 함께 왜적을 토멸하도록 하자. 그럼으로써 후세에 조국을 배반했다는 오명을 씻을 수 있으리라. 註30)



그러나 진위대측에서는 이러한 최익현의 제의를 무시하고 의병을 해산할 것을 계속 요구해 왔다. 이에 최익현은 “동족끼리 서로 박해하는 것을 원치 않으니, 너희들은 즉시 해산하라”고 하여 부득이 해산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익현과 더불어 해산하지 않고 끝까지 남은 인원이 100여 명에 이르렀다. 註31)


태인의병이 해산당한 장소인 순창객사 (순창초등학교 경내)



전주·남원 두 진위대는 11일 당일 오후 6시경 일제히 의병을 공격해 왔다. 이에 최익현은 주위를 돌아보며 “이곳이 내가 죽을 땅이다. 제군은 모두 떠나라”고 하며 지휘부가 있던 객관 연청椽廳에 그대로 눌러 앉았다. 그래도 끝까지 떠나지 않고 남은 자가 22명이었다. 중군장 정시해는 진위대의 공격으로 이때 전사 순국하고 말았다. 진위대는 의병측으로부터 아무런 저항이 없자 사격을 중지하고 지휘소를 포위한 채 그대로 밤을 지샜다.

이튿날 의병장 최익현 이하 임병찬·고석진·김기술·문달환·임현주·유종규·조우식·조영선·최제학·나기덕·이용길·유해용 등 핵심인물들인 13의사는 진위대에 체포된 뒤 14일 전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전주에서 이들은 일제 헌병대에 인계되어 18일 서울로 압송되어 헌병대사령부에 구금되기에 이르렀다. 그뒤 1906년 8월 14일음 6.25 일제의 육군이사陸軍理事로부터 최익현은 3년, 임병찬은 2년형을 선고받고 대마도에 유폐되어 옥고를 치렀고, 고석진과 최제학은 4개월 형을 받았으며, 나머지 의사들은 태형 100대를 선고받았다. 註32) 이로써 최익현의 태인의병 활동은 종료되고 말았다.

74세의 고령으로 대마도에 유폐되었던 최익현은 심한 옥고를 견디지 못하고 1907년 1월 1일 마침내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최익현의 병세가 위중하게 되자, 일제는 그의 죽음이 몰고올 파장을 예견하여 이에 철저하게 대비하고 있었다. 최익현의 유폐 감금소를 관장하고 있던 대마경비대사령관은 12월 25일자로 석본신육石本新六 육군차관에게 그의 병세를 다음과 같이 보고하면서 임종이 임박했음을 미리 알렸다.



병명은 만성기관지염 겸 폐흔충肺焮衝으로 목하 위험한 증상으로 인정되지 않으나 쇠약이 심하여 회복하기 어려울 것임. 이 사실은 이미 사단에 보고하였음. 註33)


최익현의 순국사실을 보고한 일제문건 (1907. 1. 4)



이로 보아 최익현은 최후 임종시에는 만성기관지 및 폐 질환을 앓고 있었으며, 극도의 노쇠현상으로 거의 탈진상태에 놓여 있었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최익현은 임종이 다가오자, 임병찬에게 최후의 유소遺疏를 구술하여 다음과 같은 여한을 남겼다.



신의 나이 74살이니 죽어도 무엇이 애석하겠습니까. 다만 역적을 토벌하지 못하고 원수를 갚지 못하며, 국권을 회복하지 못하고 강토를 다시 찾지 못하여 4천 년 화하정도華夏正道가 더럽혀져도 부지하지 못하고, 삼천리 강토의 선왕적자가 어육魚肉이 되어도 구원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신이 죽더라도 눈을 감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註34)



이처럼 최익현은 국권회복을 이룩하지 못한 채 이국 땅에서 죽게 된 자신의 처지를 깊이 탄식하였던 것이다. 그의 유해는 1월 5일 부산 초량에 닿았다. ‘춘추대의春秋大義 일월고충日月高忠’8자의 만장을 앞세운 그의 영구는 연도에 수많은 인파가 늘어서 애도하는 가운데 구포·성주·황간·공주를 지나 초량을 떠난 지 15일만에 정산의 본가에 도착하여 망국민의 통분 속에 노성의 무동산舞童山 기슭에 묻혔다.



4. 후기의병에 끼친 영향

태인의병은 활동기간이 10여일에 불과하고, 격전 한번 없이 해산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태인의병이 이후 전국 의병의 파급에 끼친 영향은 실로 지대하였다. 특히 태인의병 이후 호남 각지에서는 항일의병의 기세가 점차 고조되어 갔으며, 전 국민이 동참하여 구국의 성전을 전개하던 후기의병 때는 호남의병이 전국의병을 주도하게 되었던 것이다. 註35)

특히 태인의병을 이끌었던 의병장 최익현은 이후 의병이 전국적으로 파급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註36) 대마도에 끌려간 최익현 일행이 온갖 고초 끝에 순국한 사실이 전국에 널리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최익현의 장례행사에는 수만 명의 인파가 몰려들었으며, 일제는 혹시 ‘변고’가 일어나지 않을까 전전긍긍할 정도였다. 장례를 치른 지 1년 반이 지난 1908년 9월에도 최익현의 영전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그치지 않았다고 하는데, 당시 그의 묘소를 참배한 황현의 기록 가운데 조객록弔客錄이 4책이나 되었다고 증언한 사실이 그러한 정황을 말해주고있다. 註37)

당시 언론에서도 최익현의 순국을 대서특필하였다. 『황성신문』에서는 논설에 「조고찬정최익현씨弔故贊政崔益鉉氏」라는 제하에 그의 순국 사실을 알리며 “젊어서도 최익현씨며 늙어서도 또한 최익현씨요, 살아서도 또한 최익현씨며 죽어서도 또한 최익현씨로다”라고 추모하였다. 註38) 『대한매일신보』에서도 ‘우리 동방의 부자 면암 최선생’이라 찬양하였고, 그 뒤에도 수차에 걸쳐 「곡哭면암최선생문」, 「최면암소본疏本」, 「제祭면암최선생문」 등 최익현을 추모하는 글을 게재하였다. 註39)

또한 최익현이 순국한 뒤 그의 문인들을 중심으로 옥구·포천·정산·태인·곡성·함평 등지에 그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건립되어 그의 애국충혼을 기렸다. 그밖에도 해주의 화서 이항로의 영당影堂에도 배향되었으며, 문집도 간행되었다. 이와 같이 최익현 사후에 그의 영향을 받아 각지에서 그를 추모하는 한편 항일의 의기도 파급되어 갔다. 강재천·백낙구·양한규·고광순 등을 비롯하여 무수한 대소 의병장들이 최익현의 거의와 순국에 직, 간접으로 영향을 받아 항일전에 동참하였다.

강재천姜在天은 태인의병이 해산당한 뒤 여기에 자극을 받아 1906년 임실에서 의병을 일으켜 남원, 장성 등지를 무대로 활동하였다. 그는 최익현을 대마도에서 구출하고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봉기하였다고 천명하였다.


최익현의 고향에 세운 사당 채산사 (경기도 포천시 가채리)



백낙구는 1894년 동학농민전쟁 때 초토관招討官을 지내고 주사를 역임한 인물이었지만, 시력을 잃고 광양에 은거하고 있었다. 그는 태인의병에 합류하고자 하였으나, 의진이 곧 해산당하고 말아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는 얼마 뒤인 1906년 11월 전후에 광양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양한규梁漢奎 역시 태인의병의 해산에 격분하여 1907년 2월 남원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그와 인척 관계에 있던 박봉양도 운봉을 근거지로 하여 의병을 일으키려다 사전에 발각되어 일제에 체포되었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으로 유명한 고경명의 후손인 고광순은 태인의병에 합류하려던 계획이 실패한 뒤 백낙구 등과 연합해 거의를 도모하기도 하였다. 그 뒤 그는 1907년 1월 마침내 담양군 창평昌平에서 의병을 일으켜 지리산을 무대로 활발한 항일전을 벌였다.

1907년 4월에 전남 화순군 능주綾州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양회일도 태인의병의 영향을 받았다. 임실군수를 지낸 조규하趙奎夏는 고향인 순천으로 돌아와 의병을 일으켜 명성을 날렸다. 태인의병에 참여했던 양윤숙도 순창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켜 활발한 항일전을 전개한 의병장이다. 그리고 호남의 후기의병를 이끌었던 대표적인 의병장인 이석용과 전해산 등도 최익현을 사숙한 유생들이었다.

경남 하동 출신의 이광선李光先은 최익현의 뒤를 이어 의병을 일으켜 일제 군경을 상대로 항일전을 벌였다. 태인의병에 합류하려던 노응규도 최익현의 문인으로 1906년 가을 충북 황간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와 같이 최익현의 의병 봉기는 호남지방의 의병 확산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의병전쟁을 고조시키는 데 기여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매우 컸다. 곧 호남지방의 중기의병을 선도한 태인의병은 호서지방의 홍주의병과 함께 의병전쟁을 전국적으로 확산, 고조시킨 대표적 의진이었던 것이다.



[註 1] 공자의 영상을 봉안한 影堂으로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에 있다. 일명 春秋祠라고도 한다. ☞

[註 2] 최익현, 「魯城闕里祠講會時誓告條約」, 『면암집』 권16-잡저. ☞

[註 3] 최익현이 청양군 정산으로 이거한 것은 1900년 4월(음)이며, 전 참판 민종식도 이곳에 퇴거해 있었다. 그러므로 의병을 일으킬 당시에 정산에는 중기의병을 선도했던 최익현과 민종식 두 인물이 함께 거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은 홍주의병과 태인의병의 상호 관계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

[註 4] 최제학, 「면암선생창의전말」, 『독립운동사자료집』 2, 1971, 57쪽. ☞

[註 5] 필자미상, 『勉菴先生事實記』(독립기념관 소장자료, 한글 필사본, 1933년 1월). ☞

[註 6] 홍영기, 『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일조각, 2004, 161~162쪽. ☞

[註 7] 『면암집』 부록 권4, 「연보」 병오년 2월조. ☞

[註 8] 홍영기, 『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163쪽. ☞

[註 9] 임병찬, 『의병항쟁일기』, 한국인문과학원, 1986, 45~46쪽. 

여기에는 ‘군율, 의제, 기계, 규례’ 4가지 조목 가운데 ‘기계’ 조목이 누락되어 있다. 아래 각주의 『황성신문』 기사에 의거하면 원 통문에는 4가지 조목이 모두 들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註 10] 『황성신문』 1906년 4월 5일자. ☞

[註 11] 홍영기, 『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164~165쪽. ☞

[註 12] 최제학, 「면암선생창의전말」, 『독립운동사자료집』 2, 62~63쪽. ☞

[註 13] 최익현, 「倡義討賊疏」, 『면암집』 권5 ; 『면암집』 부록 권4, 「연보」 병오년 윤4월조 ; 최제학, 「면암선생창의전말」, 63쪽. 

이 상소의 작성일자는 최제학의 기록에는 5월 24일(음, 윤4월 2일)로, 『면암집』에는 6월 2일(음 윤4월 11일)로 되어 있는데, 전자는 상소문의 작성일자이고 후자는 실제로 보낸 일자를 기록한 것으로 해석된다. ☞

[註 14] 임병찬, 『의병항쟁일기』, 205쪽 ; 최제학, 「면암선생창의전말」, 『독립운동사자료집』 2, 64~65쪽. ☞

[註 15] 최제학, 「면암선생창의전말」, 『독립운동사자료집』 2, 65쪽. ☞

[註 16] 『대한매일신보』 1906년 3월 29일자. ☞

[註 17] 홍영기,『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167쪽. ☞

[註 18] 최제학, 「면암선생창의전말」, 『독립운동사자료집』 2, 75쪽 ; 『면암집』 부록 권4, 「연보」 병오년 윤4월조. ☞

[註 19] 최익현, 「奇日本政府」, 『면암집』 권16-잡저. 

여기에 이 글을 지은 시기를 5월 29일(음, 윤4월 7일)로 명기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담양 용추사에서 거의 격문을 작성할 무렵에 이 글도 함께 작성되었고, 태인에서 거의한 직후 일제 통감부로 보낸 것으로 보인다. ☞

[註 20] 최제학, 「면암선생창의전말」, 『독립운동사자료집』 2, 84~85쪽. ☞

[註 21] 임병찬, 『의병항쟁일기』, 82쪽. ☞

[註 22] 최제학, 「면암선생창의전말」, 『독립운동사자료집』 2, 85쪽 ; 『면암집』 부록 권4, 『연보』 병오년 윤4월조 참조. ☞

[註 23] 임병찬, 『의병항쟁일기』, 82쪽. ☞

[註 24] 최제학, 「면암선생창의전말」, 『독립운동사자료집』 2, 86쪽. ☞

[註 25] 임병찬, 『의병항쟁일기』, 82쪽. ☞

[註 26] 정교, 『대한계년사』 하, 국사편찬위원회, 1957, 219쪽. ☞

[註 27]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말의병자료』 Ⅲ, 93~94쪽. ☞

[註 28]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말의병자료』 Ⅲ, 72·80~81쪽. ☞

[註 29] 내부 경무국, 『顧問警察小誌』, 1910, 120~122쪽. ☞

[註 30] 『면암집』 부록 권4, 「연보」 병오년 윤4월조 ; 송상도, 『기려수필』, 국사편찬위원회, 1955, 101쪽. ☞

[註 31] 최제학, 「면암선생창의전말」, 『독립운동사자료집』 2, 89쪽. ☞

[註 32] 최제학, 「면암선생창의전말」, 『독립운동사자료집』 2, 102쪽 ; 임병찬, 「대마도일기·반구일기」, 『독립운동사자료집』 2, 130쪽. ☞

[註 33] 「肆 제1006호」(대마경비대사령관이 1906년 12월 25일 石本新六 육군차관에게 보낸 전보)(일본 방위성 방위연구소 소장). ☞

[註 34] 『면암집』 부록 권4, 「연보」 병오년 7월조. ☞

[註 35] 이일룡 역, 『한말 전남의병전투사』, 전남일보인서관, 1977, 20~23쪽. ☞

[註 36] 이 대목은 홍영기, 『대한제국기 호남의병연구』 가운데 ‘태인의병의 영향과 의의’(180~185쪽)의 주지를 수용해 정리하였음을 밝힌다. ☞

[註 37] 황현, 『매천야록』, 국사편찬위원회, 1955, 402~403쪽. ☞

[註 38] 『황성신문』 1907년 1월 14일자. ☞

[註 39] 『대한매일신보』 1907년 1월 6·12·20일자, 4월 25일자, 5월 16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