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이강년 의병 / 호서지방의 중기의병 / 한말 중기의병

몽유도원 2014. 2. 18. 10:26

3. 이강년 의병


1. 이강년의 재기노력


중기의병 가운데 비교적 늦은 시기인 1907년 5월에 충북 제천에서 이강년李康秊, 1858~1908이 안성해安成海·백남규白南奎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전기의병 때 제천의병에 유격장으로 참전한 전력이 있는 이강년은 무관인 선전관宣傳官 출신으로 군사에 밝았을 뿐만 아니라 용병술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이듬해 7월 청풍 작성鵲城, 일명 까치성전투에서 체포될 때까지 1년 3개월 동안 경상도와 강원도, 그리고 충청도 일대를 돌며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민긍호·신돌석 의병 등 인접 부대와 긴밀한 연계하에 일제 군경을 상대로 연승을 거두어 그 명성을 드날리게 되었다. 註66)

이강년은 전기의병 해산 이후 영남과 호남 각지를 전전하고 이름난 선비들과 교유하며 성리性理와 전고典故, 그리고 예악禮樂 등에 대한 토론을 통해 자기수양에 진력하였다. 또한 1899년 충주 유림에서 선사先師인


이강년 의병장


화서 이항로의 문집을 간행할 때 이강년은 여기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호남으로 가서 문집 출판의 일을 의논하였다. 그후 문집이 완간되었을 때는 문집을 가지고 평북 태천까지 올라가 그 일대의 동문들에게 배부하는 등 화서학파 공동의 사업에 헌신적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註67) 그리고 이때 흠뻑 배양된 춘추대의적 존화양이尊華攘夷 정신은 항일투쟁의 정신적 무장을 더욱 강화시켜 줌으로써 재기항전에 투신할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전기의병 해산 이후 이강년이 의병투쟁에 얼마나 강한 집착을 보였는지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통해 충분히 감지할 수 있다. 우선, 그는 1897년 스승 유인석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의병투쟁을 중단한 것을 후회하고, 나아가 의병이 중지된 시대상황을 ‘위급존망지추危急存亡之秋’의 절박한 위기상황으로 깊이 우려하였다.


국사가 날마다 잘못되고 인심이 점점 변함을 보니, 금일 의병을 중지한 화가 전보다 배나 되고 고식姑息하는 적賊이 한결같이 시비를 얼버무려서 거짓 충성의 말로써 모든 일을 제멋대로 결정하고 그럴듯한 방법으로 백성들이 지향하는 목표를 흐리게 함으로써 인심은 날이 갈수록 더욱 흩어져 지사로 하여금 진취하게 해도 다시는 여망이 없습니다. 이는 진실로 ‘위급존망지추’로 어찌 밝게 분석하여 가려내야 할 때가 아니겠습니까. 註68)

이강년은 곧 의병투쟁을 중단한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면서, 이후 국운이 기울고 민심이 퇴락한 근본적인 이유나 배경도 궁극적으로는 의병투쟁 중단에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인식은 결국 의병 재기에 대한 강렬한 집착으로 자연히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스승 유인석에 대해서도 일관되게 의병 재기의 방향으로 처신해 줄 것을 간곡히 건의하게 된다.

의병 재기에 대한 이러한 염원은 1902년 유인석에게 보낸 또 다른 서신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그해에는 유인석이 중심이 되어 과거 전기의병에 동참한 화서학파 인물들을 중심으로 그 활동내용을 기록하고 그들의 주장을 천명한 자료들을 집대성한 『소의신편昭義新編』이 간행되었다. 이 책의 간행 목적은 의병을 주창한 인물들의 위정척사·존화양이의 정신을 널리 선전, 홍보함으로써 흐트러진 민심을 바로잡고, 나아가 일제에 의해 침탈당한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항일투쟁의 정신적 바탕을 마련하는 데 있었다. 註69) 하지만 이강년은 이러한 『소의신편』 간행에 대해 일방 그 효용성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즉시 재기항전을 주창하는 입장을 견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즈음 그는 스승에게 올리는 편지에서 재기항전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이 때에 미처 거의하는 자가 만약 재거의 격서檄書를 돌린다면 비록 강약의 차이는 있으나 의리의 바름을 잃지 않지만, 『소의신편』을 간행해 격고檄告하여 서울과 나라 안에 돌려 보인다면 이 사람 저 사람 말을 좋아하는 자가 명예를 낚아 탐하지 않겠습니까. 註70)

위 인용문을 통해 볼 때, 이강년은 결국 과거 의병에 투신한 인물들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정당한 처신이 의병 재기에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소의신편』 간행과 같은 점진적인 대국민 계도작업은 여러 가지 난관이 따를 것으로 예상하고, 이보다 더 선명하고 적극적인 재기항전에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스승 유인석에게 존화양이의 대의를 직접 강설하여 민심을 격동케 할 것을 건의하고 나섰던 것이다.

의병 재기를 향한 이강년의 이와 같은 일관된 신념은 1907년 봄에 결국 그로 하여금 재기항전의 대열에 투신케 한 원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즉 이강년의 재기항전은 민족적 위기상황에서 배양된 일관된 신념에 따른 처신이었던 것이다.

한편, 이강년은 일제에 의해 유린된 국권은 오직 한민족의 자주적 역량으로만 회복해야 민족 주체성을 견지할 수 있다는, 자주적 국권수호에 대해서도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재기 이후 경상·충청·강원도 일대를 전전하며 항일전에 진력하던 그는 청나라를 비롯한 외국의 힘을 빌려 국권을 회복하자는 논의, 곧 ‘청원설請援說’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근일에 일을 논하는 자가 입을 열면 문득 외국에 구원을 청할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크게 이루지 못할 이치가 있다. 나라가 이미 왜적에게 탈취당해 군부君夫가 비록 마음이 있으나 청나라에 군사를 구걸할 수 없는 것은 이미 갑오년청일전쟁-필자주의 평양 패전이 있어 광서군신光緖君臣, 청의 군신-필자이 모두 존신尊信하지 않을 것이다. … 가령 천기天機가 자연自然하여 여러 나라가 연합 공격하여 왜적을 없앴다 하더라도, 다시 종묘사직이 위태로운 화는 실로 끊임이 없을 것이니, 우리의 위급함을 구하고 적을 토멸한 후부터는 문득 영력제가 당한 면전의 화청원국으로부터 당할 국권침탈-필자를 입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註71)

곧 이강년은 청나라를 비롯한 외국의 힘으로 국권을 회복한다는 것은 우선 현실적으로 그 실현 가능성이 희박하고, 설령 외국의 힘으로 일제를 구축했다고 하다라도, 오히려 그 외국에 의해 또 다시 국권이 침탈당하게 될 것으로 보았다. 결국 그는 한민족의 자주, 주체적 역량에 의한 국권회복만이 민족의 전도를 보장할 수 있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고, 약육강식의 제국주의 시대의 냉엄한 현실을 깊이 통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족과 국가의 현실에 대한 이와 같은 주체적 자각이 그로 하여금 의병전선에 투신, 일제 구축의 길로 나서게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註72)


2. 이강년 의병의 재기활동

이강년은 전기의병 해산 이후 재기항전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다. 그는 원래 1905년 을사조약 늑결 직후 원용팔 등과 연락을 취하면서 곧바로 재거할 계획을 세웠으나 뜻밖에 병을 얻어 즉시 거병할 수 없었다. 註73)

그뒤 이강년은 1907년 봄에 의병을 일으키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전기의병 당시 제천의병의 동료들과 의논하면서 재거 계획을 구체화시켜 갔다. 이 무렵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지평의 포군과 충주 서쪽의 총기를 확보해야 한다는 조언을 듣게 되자, 그는 지병 일대에서 모군하기 위해 그곳으로 갔다. 지평은 과거 전기의병 당시 제천의병의 모체가 된 이춘영·안승우, 그리고 김백선 등이 의병을 처음 일으켰던 곳이었고, 상동上東에는 안승우의 아들 안기영安基榮이 있었다. 


이강년 의병의 활동사실을 기록한 「창의사실기」


그리하여 이강년은 안기영의 집에 머물며 포군과 병기를 모으려고 애썼으나 여의치 않았다. 이에 그는 전기의병 때의 동지였던 안성해安成海와 함께 청풍 출신의 포군 6명을 인솔하고 원주·횡성·강릉 등지를 전전하면서 동지들을 규합하였다. 註74) 이로써 안승우는 재기항전의 기치를 올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 무렵 이강년은 횡성 봉복사鳳腹寺에 머무는 동안 신식 군사교육을 받고 안동진위대의 부위副尉로 있던 유능한 군인 백남규白南奎를 영입하였다. 이보다 앞서 전기의병 때의 동료였던 영춘 출신의 선비 김상태金尙台도 의진에 합류하였다. 이들은 이강년 의진의 핵심참모가 되어 항일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평생 동지가 되었다. 註75)

거의 직후 이강년 의병은 영춘 용소동龍沼洞, 현 단양군 가곡면 보발리에서 격전을 벌였다. 즉 이강년은 포군들을 이끌고 5월 26일음 4.15 제천 오미리五美里를 거쳐 오석烏石에서 동지 박정수朴貞洙를 만나 일제 군경의 동향을 탐지하면서 유숙한 뒤, 이튿날 갑산甲山, 단양군 어상천면 연곡리 소재과 임현任縣을 거쳐 용소동에 이르러 유진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강년 의병의 동정을 포착한 영춘의 순검과 일제 헌병들이 야습을 가해왔다. 불시에 기습공격을 받게 된 의병들은 패산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이강년 자신도 왼쪽 뺨과 팔뚝에 큰 부상을 입었기 때문에 활동을 중단한 채 영춘·청풍·연풍 등지를 전전하며 한동안 치료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註76)

그뒤 이강년 의병은 1907년 8월 원주진위대 강제해산 때 해산군인들이 의병으로 전환되고 또 다량의 무기를 의병들에게 제공하는 것을 계기로 전열을 새롭게 가다듬고 항일전을 재개하게 되었다. 이후 이강년 의병은 민긍호 및 신돌석 의병 등 인근 각지의 의병들과 부단히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1908년 7월 청풍 까치성[鵲城]전투에서 부상으로 체포될 때까지 충청·경상·강원도 등 중부지방 도처에서 일제 군경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벌이면서 그 명성을 드날리게 되었다.

[註 66] 정제우, 『운강 이강년 의병장』,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7, 66쪽. ☞

[註 67] 『雲崗先生遺稿』(필사본), 「倡義事實記」. ☞

[註 68] 이구영 편역, 『호서의병사적』, 수서원, 1993, 162~163쪽. ☞

[註 69] 박민영, 「의암 유인석의 위정척사운동」, 『의병전쟁연구』 상, 지식산업사, 1990, 277쪽 참조. ☞

[註 70] 『운강선생유고』, 「上毅菴先生」(壬寅年 2月 晦日). ☞

[註 71] 『운강선생유고』, 「答上毅菴先生」(戊申年 2月 12日). ☞

[註 72] 박민영, 「운강 이강년의 생애와 사상」, 『한국근현대사연구』 12, 한국근현대사학회, 2000, 47~51쪽. ☞

[註 73] 『운강선생유고』, 「再檄告文」, 72쪽. ☞

[註 74] 구완회, 『한말의 제천의병』, 집문당, 1997, 273쪽. ☞

[註 75] 『운강선생유고』, 「창의사실기」. ☞

[註 76] 『운강선생유고』, 「창의사실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