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노응규의 황간의병 / 호서지방의 중기의병 / 한말 중기의병

몽유도원 2014. 2. 18. 10:23

2. 노응규의 황간의병


전기의병 당시 진주의병을 이끌었던 노응규盧應奎, 1861~1907 의병장이 을사조약 늑결 이후 1907년 1월 초 충청북도 황간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노응규는 진주의병이 와해된 직후 그 여파로 고향 안의安義의 아전들에 의해 아버지와 형을 잃고 가산까지 몰수당하게 되는 큰 참변을 당하였다. 이에 그는 재기를 결심하고 가명을 쓰면서 호남지방으로 피신, 광주의 일족인 소해蘇海 노종룡盧鍾龍을 찾아가 항일지사 기우만奇宇萬 등과 함께 일그러져 가는 시국를 통탄하기도 하였다. 註52) 이어 그는 순창의 이석표李錫杓 집에서 반 년 가량 머물렀다. 註53)

노응규는 이어 1897년 여름 서울로 올라갔다. 그는 학부대신 신기선의 지우知遇를 얻어 우선 고향에 돌아가 살육당한 부형의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주선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 그 결과, 그는 직접 입궐하여 다음과 같은 「지부자현소持斧自見疏」를 올려 사면을 받아낼 수 있었다. 이에 그는 향리로 돌아와 1899년 3월음 비로소 부형을 장사지낼 수 있었다. 註54)

노응규는 이 상소에서 자신의 네 가지 죄목을 열거, 우국충정의 심정을 토로하면서 스스로 토적복수의 대의를 굳건히 다졌다.


아, 신은 나라의 원수를 갚고자 나섰다가 국수國讐는 갚지 못하고 집안에 화란만 초래했으니, 위로 임금에게 불충하고 아래로 부모에게 불효한 것이라 신의 죄가 하나입니다. 관군이 다가오던 날, 신은 비록 화살 하나 쏘지 않았으나 감히 자수하지 않고 망명 도주했는지라 신의 죄가 둘입니다. 부형이 죽었으되 아직도 성복成服하지 못해 자식된 도리를 저버렸는지라 신의 죄가 셋입니다. 옛적에 임금의 원수를 갚으려는 자는 비록 칼날을 밟고 물불에 들어간다 할지라도 이를 사양하지 않았는데, 신은 지금까지 구차히 살면서 한 가지 계책도 세움이 없이 침식과 언어를 범인과 같이 하고 있는지라 신의 죄가 넷입니다. 註55)


이후 1902년 규장각 주사에 배임되어 관인이 된 노응규는 1905년 을사조약 늑결 때까지 중추원의관·동궁시종관 등의 관직을 역임하게 되었다. 註56)

그러나 1905년 을사조약 늑결 이후 일제침탈이 가속화되자, 사환仕宦의 길을 통해 국권회복을 도모하려던 노응규는 재기항전의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그 즈음 스승인 면암 최익현도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내와 그의 재거신념을 더욱 굳게 하였다.



그대의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는 바는 내가 가히 헤아릴 수 있다. 부디 일에 임박해서는 충분히 조심하여 전후를 잘 헤아려 주선해야 한다. 진실로 후일로만 미루어 물러서도 안 되나 또 함부로 장담할 바도 아니니 십분 신중히 처신하길

바라노라. 註57)


재기항전을 결심한 노응규는 일체의 관직에서 물러나 호남의 광주로 내려갔다. 이때 광무황제는 그에게 은밀히 관찰사 인부印符와 암행어사 마패를 내려 재거를 독려하였다고 한다. 그는 서울에서부터 수종해온 족손이며 문인인 노승용盧昇容과 함께 노종룡을 찾아가 재거를 계획하였으나 일이 여의치 않아 중단하고 말았다. 註58)

1906년 6월 최익현이 태인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항일전의 기치를 들게 되자, 노응규는 여기에 합류하였다. 註59) 그러나 얼마 뒤 최익현 의진이 해산하게 되자, 그는 노승용의 향리인 경남 창녕의 이방면 용배동龍背洞으로 내려가 피신하였다.

노응규는 창녕에 은둔해 있는 몇달 동안 재기항전을 구체적으로 준비하였다. 그곳에서 여러 지사들을 규합한 뒤 황간에서 회합하였다. 그리하여 노응규를 중심으로 황간에 모인 지사들은 1907년 1월 초 드디어 충청·경상·전라 3도의 분기점인 충북 황간군 상촌면 직평稷坪, 피뜰에서 재기의 기치를 들었다. 노응규 의병장 휘하 황간의병의 편제는 아래와 같다.


의병대장 : 노응규

중 군 장 : 서은구徐殷九

선 봉 장 : 엄해윤嚴海潤

종 사 관 : 노승용盧昇容

수종隨從 : 김보운金寶雲 오자홍吳自弘


위의 편제에서 중군장에 선임된 전 참봉 서은구는 황간에 인접해 있던 경남 거창 출신의 지사로, 평소 노응규와 연락을 취하며 거사를 함께 도모했던 인물이다. 그리고 선봉장 엄해윤은 강원도 영월 출신의 한의사로, 서은구의 질병 치료차 왕래하던 중 의기투합해 합류한 지사였다. 그리고 종사관 노승용이명 盧公一은 노응규의 문인이며 족손族孫으로 창녕에서부터 스승을 수종하여 황간으로 올라왔던 인물이다. 註60)

위와 같이 부서를 정한 뒤 의병들은 화기류를 수집, 제조하여 무장을 갖추는 한편,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이영춘李永春·조장환曺章煥·이정식李貞植 등 현지 주민들도 의진에 협조하여 무기 제조와 운반 일을 돕기도 하고 군량미를 조달해 오기도 하였다. 註61)

노응규는 황간에서 재거할 때 항일전의 방향과 목표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현금 일본인이 우리나라를 압제하여 인민이 이처럼 고난을 받게 되었으니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없는지라 우리들도 역시 국민인즉 외국의 모욕을 받으니 어찌 통탄치 않으리오. 의중에 있는 지사들을 모아 서울 통감부로 함께 가서 담판하고 설담설전을 벌여 외국인을 축출하고 우리나라의 종묘사직과 생령의 안전을 기하되, 만일 뜻과 같이 되지 않으면 같이 죽어 돌아오지 않는다. 註62)

노응규는 이처럼 의병을 모아 서울로 북상하여 일제 통감부와 담판을 벌여 국권회복을 도모하려는 원대한 전략을 갖고 있었다. 비록 실현가능성이 희박한 계획이었다고 하더라도, 일제침략의 본거지인 서울 진격을 시도하려 했던 포부와 기개는 보국혈성을 지향하던 당시 의병들의 일반적 정서를 대변해 주고 있다.

이와 같이 노응규를 주축으로 일어난 황간의진의 활동상에 대해 당시 언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전 의관 노응규는 최익현의 문제門弟로서 최익현이 대마도에 피구被拘된 이후로 통분을 이기지 못해 의병을 창기倡起, 한일협약을 폐기하고 독립권을 회복코자 하여 심복 서회구徐晦九 서은구의 오류-필자주·엄해윤 등을 격기激起하여 영동·청산·옥천·보은 등지에 두루 다니면서 일경을 박해할 것을 준비하다. 註63)


위 인용문을 통해서 볼 때, 황간의병의 활동무대는 경부선 연도의 영동·청산·옥천·보은 등지로 충북 내륙지방에 걸쳐 있었다. 그리하여 황간의병은 일제 시설물 및 경부선 역사와 철도를 주요 공격대상으로 삼고 활약하는 한편, 일본군과도 교전을 벌여 척후병을 패퇴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황간의병의 활동기간은 매우 짧았다. 의병의 소재처를 파악한 충북경무서 황간분파소 소속 순검들의 간계에 의해 의병장 노응규를 비롯한 서은구·엄해윤·노승용·김보운·오자홍 등 핵심인물들이 1907년 1월 21일 일시에 체포됨으로써 의진은 자연 해산되고 말았던 것이다. 註64)


노응규 의병장의 순국사실을 알려주는 통지서

 


노응규는 피체 후 서울로 압송되어 경무청 감옥에 투옥되었다. 하지만, 그는 의사로서의 담대한 기개를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검사의 심문을 받으면서도 시종 강경한 태도로 구국항일의 대의를 역설하였고, 또 동지들이 제공하는 음식 이외에는 어떠한 관급식도 거부하였다. 그 결과 노응규는 병을 얻어 투옥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47세를 일기로 옥사, 순국하고 말았다. 註65) 또 서은구·엄해윤·노공일 등은 1907년 5월 평리원 판결에서 7년 유형을 언도받고 백령도에 유배되어 갖은 고초를 겪었다.

[註 52] 盧鍾龍, 『蘇海集』 권2, 「祭愼菴盧公應奎文」. ☞

[註 53] 盧應奎, 『愼菴先生文集』 권2, 필사본, 「關王廟告祭文」. ☞

[註 54] 許善道, 『倡義將愼菴盧應奎先生抗日鬪爭略傳』, 등사본, 1967, 24~26쪽. ☞

[註 55] 『승정원일기』 1897년 10월 2일(양 10. 27)조. ☞

[註 56] 허선도, 『창의장 신암 노응규선생 항일투쟁 약전』, 27쪽. ☞

[註 57] 盧應奎, 『愼菴先生文集』 附錄, 「答盧聖五」(乙巳年 三月). ☞

[註 58] 박민영, 「신암 노응규의 진주의병 항전 연구」, 『한국독립운동사의 인식』, 백산박성수교수화갑기념논문집, 1991 참조. ☞

[註 59] 허선도, 『창의장 신암 노응규선생 항일투쟁 약전』, 42쪽. 

이 기록에 의하면, 崔濟學의 『習齋實紀』 원문에는 무성서원 강회 때 회집자 명단(노응규 포함)이 들어 있었으나, 崔炳燮(習齋 從孫)이 편집하면서 이 부분이 누락되었다고 한다. ☞

[註 60] 『관보』 광무 11년 7월 11일자. ☞

[註 61] 허선도, 『창의장 신암 노응규선생 항일투쟁 약전』, 29~32쪽 ; 『황성신문』 광무 11년 2월 4일자 ; 『관보』 광무 11년 7월 11일자 호외. ☞

[註 62]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1, 424쪽. ☞

[註 63] 『대한매일신보』 1907년 1월 19일자. ☞

[註 64] 허선도, 『창의장 신암 노응규선생 항일투쟁 약전』, 29~32쪽 ; 『황성신문』 광무 11년 2월 4일자 ; 『관보』 광무 11년 7월 11일자 호외. ☞

[註 65] 『대한매일신보』 1907년 3월 10일자 ; 『공립신보』 1907년 4월 26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