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홍주의병 / 호서지방의 중기의병 / 한말 중기의병

몽유도원 2014. 2. 18. 10:21

 제10권 한말 중기의병 / 제3장 호서지방의 중기의병

1. 홍주의병

2. 노응규의 황간의병

3. 이강년 의병


1. 홍주의병

1. 홍주의병의 결성과 합천전투

호서지방에서는 의병전쟁 전기간에 걸쳐 항일전이 시종일관 활발하게 펼쳐졌다. 그 가운데서도 충북의 제천·단양·충주 일대와 충남의 홍성 일대가 그 중심지였다. 전술하였듯이 단양·제천 일대에서는 1905년 하반기에 원용팔과 정운경 등이 활동을 재개하고, 또 1907년 전반기에는 이강년이 거의함으로써 전기의병 시기 유인석을 정점으로 하였던 제천의병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었다. 한편, 홍주현 홍성 일대에서도 전기의병 시기 김복한金福漢·안병찬安炳瓚 등이 주축이 되어 활발하게 벌어졌던 항일전의 맥락을 이어, 을사조약 이후 대규모 의병이 편성되어 활동에 들어갔다.

중기의병 시기의 홍주의병은 1906년 3월 15일경 광수光水, 현 청양군 광시에서 1차 의병이 편성되면서 활동이 시작되었다. 이 시기 의병 편성의 주도적 역할을 한 인물은 이설李偰과 안병찬 등이다. 전기의병 해산 이후 은둔해 있던 이설은 을사조약 늑결 직후 김복한과 함께 상경하여 조약을 성토하고 그 폐기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오히려 경무국에 수감되어 옥고를 치루었다.

1906년 2월 석방된 이들은 고향으로 돌아와 곧바로 의병 재거를 계획하고 동지 안병찬, 을미사변 이후 청양군 정산定山에 낙향해 있던 전 참판 민종식閔宗植, 1861~1917 등과 연락하며 의진 편성에 착수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온 이설은 안병찬에게 서신을 보내 재기항전을 촉구하는 한편, 민종식에게도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내 항일전을 선도해 주도록 요구하였다.


그대는 대대로 국가 중신의 집안으로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정성을 본래 축적하신 바인데, 이같이 다사多事한 날을 만났으니 더욱 읽지 아니 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니 어떠하신가. … 그대의 마음을 치고 가슴을 두드리는 것은 우리보다 먼저 하실 것이라고 생각되오니 어찌 반드시 거듭 진달하겠는가. 다만 수십년간 지내온 변고가 무슨 일인들 신자臣子가 죽음을 바칠 날이 아니었겠는가만 금번 일에 이르러서는 비록 국군國君이 사직의 의리가 있으나 어찌 말을 하겠는가. 최근 사론士論이 분발하여 모두 그대를 영수로 모시고 일어나기를 권하려고 안병찬과 임승주林承周가 앞으로 나가서 예를 바치려고 하니, 모름지기 이들과 더불어 상의해 결정하시고 속히 거사하여 때가 늦었다는 후회를 하지 않는 것이 어떻겠는가. 일찍이 을미년의 일은 그대에게 먼저 통지하지 못한 것을 피차 지금까지 후회하고 있으니, 이것이 전감前鑑이 되지 않겠는가. 빨리 도모하면 공사公私가 심히 다행이겠다. 註1)


이처럼 이설은 안병찬·임승주와 함께 민종식에게 항일의병 대열에 참여해 이를 선도해 줄 것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이에 민종식이 의병에 참여하게 되자 거사 계획은 구체화되어 갔다. 마침내 안병찬·박창로朴昌魯·이세영李世永 등이 1906년 2월 하순 정산 천장리天庄里에 있던 민종식의 집에 모여 거사 절차를 논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이들은 약 보름간의 준비기간을 가진 뒤 3월 15일경 청양군 광시光時 장터에서 거의하였다. 註2)

이때 모인 의병의 규모는 3~600명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의병의 편제는 창의대장 민종식 휘하에 종사관 홍순대洪淳大, 중군사마中軍司馬 박윤식朴潤植, 참모관 박창로朴昌魯, 군사마軍司馬 안병찬, 유회장儒會長 유준근柳濬根, 운량관運糧官 성재한成載翰 등으로 갖추어져 있었다. 註3) 위 편제의 지도부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지만, 홍주의병에는 정재호鄭在鎬·최상집崔相集·최선재崔璇在·이상구李相龜·이세영李世永·채광묵蔡光默·이만식李晩植·이동규李東珪·민정식閔廷植·윤자홍尹滋洪 등의 유생들도 참여하고 있었다. 이들도 이세영·정재호를 제외하고는 대개 관력이 없는 재야 유생이었다. 이와 같은 거의 과정과 편제로 볼 때 홍주의병은 을미 홍주의병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으며 그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박창로·안병찬·채광묵·이세영 등의 핵심인물들이 역시 을미 홍주의병을 주도했던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註4)

한편 이설은 병석에 누워 있었기 때문에 의진에 합류할 수 없었다. 그는 홍주의병이 한창 기세를 올리던 무렵인 5월 22일음 4.29 서거하게 된다. 중병으로 신음하면서도 그는 안병찬 등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기쁨을 이기지 못해 자리에서 일어나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고 한다. 註5)


뉘집 의려가 홍주 동쪽으로 가나 誰家義旅赴洪東

그 이가 당년 목 찌른 의사라네 云是當年刎頸公

웃기 좋아하는 세인들 웃지를 마라 可笑時人休竊笑

앉아 말만 한들 무슨 공이 있으리오 座談龍肉有何功


민종식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광시에서 일어난 홍주의병은 거의와 동시에 부일매국적을 성토하고 일제의 국권침탈을 맹렬하게 성토하면서 거의의 정당성을 천명하는 통문을 각처로 발송하였다. 그 가운데 부일매국 관리들을 성토한 대목에서는 “정부에는 개 돼지 같은 놈들이 녹만 받아먹고, 궁중에는 효경梟獍같은 놈들이 서로 나아가 임금과 나라를 팔아먹고 외인에게 붙어 구차히 하루의 안일만을 꾀하고 있다”라고 하였으며, 나아가 일제의 국권침탈에 대해서는 “오늘 하나의 조약을 맺으면 내일 또 하나의 조약을 맺고, 금년에 하나의 국권을 빼앗으면 명년에 또 하나의 국권을 빼앗는다. 연해의 어업과 삼림·금광은 이미 다 빼앗아 버렸고 인사의 공사까지도 간섭하지 않는 것이 없으며 각지 역둔토도 장차 빼앗기게 되었으니 반드시 삼천리 강토를 다 빼앗아야 그만둘 것이다. 불쌍한 우리 국민들은 농사를 지으려 해도 경작할 땅이 없고, 장사를 하려 해도 점포가 없고, 공업을 하려 해도 기술을 사용할 곳이 없으니 장차 그 놈들의 노예가 되고 그 놈들의 어육이 되고 말 것이다”라고 강경한 어조로 성토하고 있다. 註6)

뿐만 아니라 서울에 주재한 각국 공사관에도 「호소문」을 보내 항일전의 명분을 밝히면서 국권회복과 일제구축에 협조와 지원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의병이 항일전에 앞서 각국 공사관에 지원과 협조를 요청하는 공문을 끊임없이 보냈던 사실을 통해서도 의병이 일제를 구축하고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국제적 지원과 협조가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깊이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홍주의병은 제대로 활동을 전개하기도 전에 해산당하고 말았다. 홍주성을 점거하기 위해 광시를 떠난 의진은 곧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의진은 홍주성의 관군도 동참해 줄 것으로 믿었지만, 홍주군수 이교석李敎奭이 의병측에 가담하기를 거절하고 성문을 굳게 닫고 말았기 때문이다. 의병들은 하는 수 없이 다시 광시로 후퇴하였다. 그리고 홍주 대신에 공주를 점거하기로 계획을 바꾸고 선발부대를 공주로 출발시켰다. 하지만, 이때는 이미 공주와 서울에서 출동한 2백 명의 군대가 청양에 도착해 있었기 때문에 공주로 진출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의병들은 청양군 화성면 합천合川으로 이동하여 일시 머물렀다. 그러나 이튿날인 3월 17일 새벽 일제 헌병경찰의 공격을 받아 안병찬·박창로·윤자홍·최선재 등 26명이 체포되고 군사들은 패산하게 되어 이로써 홍주의진은 해산하고 말았다. 註7)

홍주의병은 의진 결성 후 해산 때까지 활동기간이 불과 2~3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때 쌓은 활동경험과 실패의 교훈은 곧 이어 전개되는 홍주의병이 중기의병을 상징할 만큼 강력한 전력과 결집력을 확보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적지 않다.


2. 홍주의병의 재봉기

1) 홍주성 점령


홍주의병장 민종식


홍주의병이 합천전투에서 와해된 뒤 의병 참여자들에 대한 일제의 탄압은 혹심하였다. 의병들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각지로 흩어져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 재기를 모색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민종식 의병장은 합천에서 탈출한 뒤 전북 전주로 내려가 재기를 도모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기울였다. 이때 민종식의 처남이던 이용규가 큰 역할을 수행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합천전투에서 패한 뒤 전주·진안·용담·장수·무주 등지를 전전하면 의병을 모집하였다. 그는 여산에서 의진을 결성하고 민종식을 의병장에 다시 추대한 것이다. 註8)

이러한 과정에서 또 한 가지 특기할 점은 뒷날 호남의 저명한 의병장으로 활약하는 김동신金東臣으로부터 도움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김동신은 이전부터 호남을 자주 왕래하였고 특히 무주지역에 지인들이 많았다. 뿐만 아니라 그의 부인 박씨가 함양군 안의安義에, 소실인 전씨全氏가 장수에 거주하고 있어 이 지역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호남과 특별한 연고가 없던 민종식이 그곳에서 활동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김동신의 도움이 매우 컸던 것이다. 하지만, 민종식은 김동식과 결별하고 충청도로 귀환하였다. 즉 그는 여산에서 파월포波月浦를 지나 서천 방면으로 이동하였으며, 김동신은 무주 덕유산 자원암柴原菴을 중심으로 별도로 항일전을 추진하였기 때문이다.

민종식이 여산礪山에 집결할 때 의병 성원은 대략 30명 정도였다. 註9) 그는 이들과 함께 서천으로 이동하였고, 이곳에서 다시 300명의 의병을 모집하게 됨으로써 부대의 모습을 갖추어갔다. 이후 민종식은 이 의병을 이끌고 남포를 경유한 끝에 홍산鴻山 지치芝峙 현 부여군 내산면 지터리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민종식은 1906년 5월 11일 이상구·문석환文奭煥·정재호·이용규李容珪·김광우金光祐·조희수趙羲洙·이세영 등과 함께 의병 재기의 기치를 올리게 됨으로써 제2차 홍주의병이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註10) 이 무렵 의병의 규모는 400여 명 정도로 추산 된다. 註11)

민종식이 이끄는 홍주의병은 이후 구병동九兵洞과 문장동文章洞을 지나 5월 13일 서천읍으로 들어갔다. 서천 관아에 돌입한 의병들은 서천군수 이종석李鍾奭을 감금하고 양총 70정을 획득하였다.

이어 의진은 비인·판교를 거쳐 남포에 이르렀다. 남포에서는 공주부에서 출동한 관군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5일간이나 공방전을 벌인 끝에 의진은 남포성을 점령한 뒤 군수 서상희徐相喜를 감금시키고 병사 31명을 의진에 편입시켜 전력을 보강하였다.

이어 민종식 의병은 보령으로 이동하였다. 그곳에서는 보령군수 신석구申奭九를 통해 의병들을 소모하였고 양총과 군량미를 확보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 무렵 보령의 우국지사 유준근柳濬根이 유생 의병인 ‘유회군儒會軍’33명을 이끌고 의진에 합세해 옴으로써, 의병이 이 일대 유림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와 후원을 받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註12)


홍주의병 진격로

 

그 동안 의병들은 비인에서 남포로 이동하는 도중에 일본인 한 명을 체포하였으며, 남포 부근의 용동龍洞에서는 일본인 석공 2명을 체포하여 그 가운데 한 명을 총살하기도 하였다. 경제침탈에 앞장섰던 일본인에 대한 단죄 의지가 표출된 결과라 할 수 있다.

민종식이 이끄는 홍주의병은 이후 결성結城에 도착하여 하루를 지낸 뒤 5월 19일 홍주성 공격에 들어갔다. 의병들은 삼신당리三神堂里에서 대항하는 적을 일거에 격파하고 홍주성을 향해 쇄도해 들어갔다. 남문 성벽에 의지하여 저항을 시도하던 적군은 이내 성을 포기하고 거류 일인들과 함께 북문으로 탈출, 예산 방면으로 도주하고 말았다. 이로써 홍주성은 당일 완전히 의병의 수중에 들어갔다. 註13) 한편, 홍주성 공격에 직접 참전하였던 홍순대洪淳大가 기록한 「해암사록海菴事錄」에는 의병이 홍주성을 공략, 점거하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홍주성으로 진격하던 도중에 광천廣川 장터에 살고 있던 왜놈 6명을 사로잡았다. 4월 26일양 5.19 홍주 남산 꼭대기에 이르렀을 때의 병력은 5천명에 이르렀다. 마침 이 날은 홍주 장날이기도 하였다. 오후 4시쯤 성을 함락하려고 했으나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홍주성의 4대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우리 진영의 아주 날랜 병정 2명이 성에 들어갈 곳을 찾다가 하수구를 발견하고 그곳으로 들어가 4대문을 열었다. 드디어 홍주성을 점령하였다. 대문을 연 두 병정은 신문천申文天과 천학순千學順이었다. 의병들이 성 안에 살고 있던 왜적을 잡으려 했으나 그들은 성이 함락되기 전에 이미 달아나 버렸다. 註14)


위 기록중 광천에서 일본인 6명을 사로잡았다는 내용은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지만, 경제침탈에 종사하던 일본 민간인을 포박했던 사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홍주성 공략 당시 의병의 군세를 5천 명으로 기록한 것은 다소 과장된 숫자로 보이며, 실제로는 이보다 적었을 것으로 추산된다. 註15) 또 하수구를 통해 성 안으로 잠입하는 데 성공한 신문천과 천학순이라는 두 의병이 굳게 닫혀 있던 성문을 개방함으로써 의병들이 홍주성으로 쇄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홍주성 점령 소식이 사방으로 전해지자 이식李侙과 안항식安恒植, 그리고 윤석봉尹錫鳳·채광묵蔡光默 등의 명망지사가 합류해 오고, 한계석韓桂錫·곽한일郭韓一 등이 각각 향리에서 의병을 소모한 뒤 가세해 왔다. 그리하여 전성기인 홍주성 점령 직후 의진의 군세는 자료상 확인되는 인원수만 보더라도 총포로 무장한 의병 600명, 창을 가진 의병 300명, 그리고 유회군 300명 등 모두 1천 200명에 달하였으며, 註16) 그밖에 일반인들로 의진에 합류한 숫자도 상당수에 달하였을 것으로 쉽게 추정할 수 있다. 홍주성을 점거한 직후 이처럼 성세를 보였던 홍주의병은 다음과 같이 대규모의 편제를 갖추고 본격적인 항일전을 준비하게 되었다. 註17)


대장 : 민종식閔宗植

참모장 : 김광우金光佑 조희수趙羲洙 채광묵蔡光默

중군장 : 정재호鄭在鎬 황영수黃英秀 이세영李世永

선봉장 : 이남규李南珪 박영두朴永斗

좌익장 : 이상구李相龜

우익장 : 신현두申鉉斗

후군장 : 정해두鄭海斗

유격장 : 채경도蔡景燾 김광현金光鉉 윤상배尹相培

돌격장 : 남계원南啓元 안병림安炳琳 곽한일郭漢一

좌우소모장 : 최상집崔相集 엄순영嚴淳榮

소집장 : 지우범池禹範

소모관 : 이만식李晩植

수문장 : 최선재崔璇在

수성장 : 조병순趙炳舜

좌군관 : 윤필구尹弼求 윤병일尹炳日 홍순대洪淳大

우군관 : 이병년李秉年 이범구李範九 송순묵宋淳默

서기 : 문석환文奭煥

참모사 : 안병찬安炳瓚 박창로朴昌魯 안항식安恒植 신복균申復均 이식

운량運粮 : 박제현朴濟賢

향관餉官 : 박윤식朴潤植

유병장儒兵將 : 유준근柳濬根

유병소향관儒兵所餉官 : 민정식閔廷植


위의 홍주의병 편제는 다른 지역 의진에 비해 상당히 방대하고, 또 한 가지 직책에 다수의 인물들이 중첩 편제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 점이 특징이다. 나아가 선봉장으로 선임되어 있는 이남규 등 홍주성 점령 당시 의진에 실제 참여하지 못한 사례도 산견된다. 이러한 현상은 홍주의병이 홍주를 중심으로 충남 내포지방의 항일의병세력을 망라하는 과정에서 의진과 밀접한 연관을 가진 인물들을 흡인하기 위한 의도가 내포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한 가지 홍주의병의 특징은 의진에 참여한 유생들을 별도로 통할하는 ‘유병소’를 특설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홍주의진에 충남 내포지역의 유림세력이 대거 가담했던 증좌로도 이해할 수가 있을 것이다. 註18)

이 의진에는 앞에서 보았던 제1차 홍주의병 봉기 때 참여했던 인물들 대부분이 가담하고 있다. 의병장 민종식을 비롯해 홍순대·박윤식·안병찬·

유준근·정재호·최상집·이상구·이세영·채광묵·이용규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인적 관계를 통해서도 제1, 2차 홍주의병이 상호 연속선상에 놓여 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홍주의병에 참여한 인물들의 출신지를 보면 청양·홍주를 주축으로 예산·보령·부여·남포 등지로, 이 의진에는 충남 내포지역의 항일세력이 대거 결집된 양상을 보였다. 또 의병장 민종식이 이조참판의 관력을 가지고 있던 것을 비롯해 채광묵·박제현·박윤식이 주사였고, 남정식이 군수, 신현두가 총순 출신으로 확인된다. 그리고 무관으로는 정위 출신의 이세영과 전 오위장 최선재 등이 참여하였다.

홍주성을 점령한 직후 의병장 민종식은 광무황제에게 상주문을 올렸다. 그는 상주문에서 을사5적과 이등박문을 주륙誅戮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거의한 이유를 밝히면서 그 취지를 수용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 상주문이 광무황제에게 전달되기도 전에 홍주성은 일본군에게 함락되고 말았다. 註19)

홍주의병에 대한 광무황제의 태도는 호의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의병이 홍주성을 점령한 소식을 듣고 광무황제가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이러한 점은 확인된다.


비서감승 김승민金升旼이 아뢰기를 “최근에 들으니 홍주 등지에서 의병이 창궐한다고 합니다. 속히 선유사를 파견하여 타일러 해산시키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황제가 가로되 “의병이 이미 수의守義의 명분이 있으니 억지로 멸해서는 아니 되고 단지 타일러 물러가도록 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註20)

이는 광무황제가 홍주의병에 대한 처리방침을 지시하는 내용인 것이다. 즉 광무황제는 홍주의병의 거의 명분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태해결의 방법으로 군사력을 동원한 무력탄압이 아니라 선유사 파견을 통한 ‘효유’의 방안을 취할 것을 지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관군의 적극적 무력탄압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비해 일제는 홍주의병의 동향에 대해 예의주시하면서 부단히 정보를 수집하고 이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나섰다.


2) 홍주성 공방전

일제는 홍주성 함락 다음날부터 공주·수원·서울 등지로부터 경찰·헌병대를 출동시켜 성 안의 동정을 정탐하는 한편, 의진 와해공작에 착수하였다. 하지만, 의병측에서는 입성과 동시에 일제 군경의 공격을 예상하고 군사를 6대로 나누어 4대문과 요해지를 엄중히 수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20일부터 수차에 걸친 일제 경찰·헌병대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낼 수 있었다.

일제는 의병이 홍주성을 점령한 다음날인 5월 20일부터 공주의 암전岩田 경부가 이끄는 고문부 경찰과 수원의 헌병부대를 동원하여 성 안의 의병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의병은 굳건한 성벽을 이용하여 이들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해 내었다. 이때 일제 경찰대는 홍주성으로부터 3백 미터 가량 떨어진 언덕에서 공격하였고, 의병들은 구식대포 5문에 소총탄을 넣어 60여 발을 발사하고 소총을 무수히 난사하면서 저항하였다. 뿐만 아니라 홍주군수 이교석李敎奭도 의병을 지원하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언론은 이때 홍주의병이 구식대포 6~7문과 양총 100여 정으로 무장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도하였다. 註21)

5월 21일, 일제 경찰대에서 경부와 순검 13명이 성을 향해 사격을 가하면서 공격을 재개하였다. 의병측에서는 이때에도 대포를 쏘아 이들의 공격을 물리쳤다. 수세에 몰린 일제 경찰들은 대흥 방면으로 퇴각하였고, 이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순사 좌죽佐竹은 서울로 후송되었다.

5월 22일에는 서울 경무고문부의 동원桐原 경시를 비롯하여 21명의 경찰이 홍주로 증파되었고, 이들은 24일 공주진위대에서 파견된 관군 57명과 함께 의병을 공격하였지만, 역시 패퇴하였다. 이 날의 전투상황에 대해 경무관 장우근張宇根은 다음과 같이 상부에 보고하였다.


본월 23일 오후 1시에 예산군禮山郡으로부터 전왕前往하여 대흥군에서 유숙하고 24일 오전 11시에 홍주군에 도착한즉 적도의병-필자주가 맹렬히 장격將擊하기에 즉시 응전하여 2시간에 포화를 교환하였는데 해도該徒 4, 5명이 부상하였고 현금 전투원은 공주진위대 병정 약 30명과 일헌병 약 30명인데 세력이 적을 당하지 못해 잠시 퇴각하였더라. 註22) 현대어 윤문-필자


위의 인용문을 통해서 보더라도 24일의 공방전에서도 의병이 완승을 거둔 사실을 충분히 감지할 수 있다.

홍주성 점령 이후 이처럼 의병이 성세를 떨치게 되자, 일제는 ‘치안총책’인 이른바 통감부 경무고문 환산중준丸山重俊이 직접 홍주로 내려와 의병의 형세를 살폈을 정도로 사태를 심각하게 인식하였다. 그는 25일 밤 홍주성에 도착한 뒤 26일 헌병대와 함께 성의 주변을 둘러보고 의진의 형세를 살펴본 뒤 27일 상경한 것으로 확인된다. 註23)

일제 경무고문이 홍주성을 둘러보고 상경하던 27일 의병들은 일제 경찰들과 교전을 벌여 토방원지조土方源之助 경부와 송규석宋圭奭 총순 등을 포로로 잡았다. 이 날의 전투상황에 대해 홍주성에서 의병과 대치중이던 동원桐原 경시는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27일 오전 10시 경비지역을 정찰하기 위해 토방土方 경부와 총순에게 순사 5명을 주어 서문 밖을 향해 출발시켰는데, 오후 5시경 같은 방면에서 나는 총성을 듣고 숙영지에서 망원경으로 살펴본즉 두 세 차례의 교전 끝에 적의병-필자주이 추격해 왔으므로, 즉시 헌병 및 암전岩田 경부에게 순사를 대동시켜 응원토록 하였으나 교전은 이미 끝났고 토방 일행의 행방이 불명하여 수색중임. 순사 4명은 오늘 오후 6시에 돌아왔으나 토방 및 송 총순 1명은 현재 행방불명이므로 수색중임. 註24)


의병들은 이때 포로로 잡았던 토방원지조 경부 등 일제 경찰 3명과 일진회원 2명을 5월 29일 밤에 처단하였다. 註25)

이와 같이 기세를 떨치고 있던 홍주의병에 대한 탄압작전은 대한침략의 원흉인 이등박문伊藤博文이 직접 지휘하였다. 즉 통감 이등박문은 한국주차군사령관 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에게 직접 군대를 동원해 홍주의병을 탄압, 해산시킬 것을 명령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러일전쟁을 기화로 한국을 침략하여 주둔한 일제의 소위 한국주차군이 의병 탄압전에 본격적으로 투입되기 시작한 전투가 곧 5월 31일의 홍주성 공방전이었다.

통감 이등박문은 홍주의병 탄압에 일본군대를 동원할 수밖에 없던 상황에 대해 내각총리대신 서원사공망西園寺公望에게 1906년 5월 27일 다

음과 같이 통보하였다.


목하 한국 충청남도에서 폭도가 일어나 홍주성을 함락하고 이를 근거로 완강히 저항하므로 소수의 헌병 및 경찰관으로는 진정하기 어렵게 된 바 통감부 및 이사청 관제 제4조에 의거하여 오늘 한국주차군사령관에 대하여 병력의 사용을 명하였음. 註26)


곧 이등박문은 종래와 같은 소수의 헌병·경찰 병력으로는 대규모로 일어난 홍주의병을 탄압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5월 27일 당일로 한국주차군사령관 장곡천호도에게 군대의 투입을 명령한 사실을 내각총리대신에게 통보한 것이다. 참고로 ‘통감부 및 이사청 관제’ 제4조에는 “통감은 한국의 안녕 질서를 보지保持하기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때에는 한국수비군의 사령관에게 병력의 사용을 명할 수 있음”이라고 되어 있다.

‘충청남도에서 봉기한 폭도 진정을 위해 상당한 부대를 파견할 것’을 명령받은 한국주차군사령관은 27일 오후 서울 서대문정거장에서 대대장 전중田中 소좌의 지휘 아래 보병 2개 중대를 홍주로 급파시켰다. 이 부대는 천안에서 숙박한 다음 28일 예산을 거쳐 29일 홍주에 도착 즉시 탄압작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경성 헌병대대에서도 대위 이하 26명이 파견되었으며, 전주 수비대에서도 1개 소대병력이 가세하였다. 홍주의병 탄압을 위해 이처럼 동원된 일본군 대부대는 홍주를 향하여 쇄도하였다.

출동한 일본군의 핵심 전략은 홍주의병 대량학살이었다. 의병에 대해 피의 보복을 감행함으로써 이 무렵 전국적으로 점차 확대되어가던 의병의 기세를 억제해 보려던 심산이었다. 일본군이 홍주성에 도착한 직후인 30일 환산중준丸山重俊 경무고문이 본국에 보낸 전신에서 “홍주성은 오늘이나 내일 중으로 공격에 착수할 것임. 성의 주위를 포위해 한 사람도 도주하지 못하도록 할 계획” 註27)이라고 밝힌 대목을 통해서도 그러한 일제의 의도를 명확히 간파할 수 있다.

한편 일제 군경의 압박에 대비해 의병측에서도 나름대로 방어태세를 갖추었다. 5월 25일경부터는 편제를 일부 개편하여 중군장 이세영, 참모장 김상덕, 소모장 곽한일, 향관餉官 민정식, 선봉장 정해두, 후봉장 박영두 등으로 배치하고 윤상봉·채광묵·이상두·유준근 등을 참모사에 선임함으로써 전투대비 태세를 강화하였다. 註28) 뿐만 아니라 주민들을 동원하여 성첩을 수축하는 등 수비에 만전을 기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29일에는 곽한일과 남규진이 의병 400명을 거느리고 홍주성에 입성하였다. 홍주성이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을 응원하기 위해 합류해 온 것이다. 註29)


3) 일본군의 홍주의병 대탄압

일본군은 5월 31일 새벽에 야음을 틈타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이들은 전중 소좌의 지휘하에 30일 밤 11시에 동문으로부터 약 5백 미터 지점의 숲속에 잠복하였으며, 31일 오전 2시 반 공격을 개시하여 3시경에 기마병 폭파반이 폭약을 사용해 동문을 폭파시켰다. 이를 신호로 일본군 보병과 헌병·경찰대가 기관포를 쏘며 성문 안으로 진입하였다. 또한 제2중대 제1소대와 제4중대 제1소대는 각각 갈매지 남쪽 고지와 교동 서쪽 장애물 도로 입구에서 잠복하여 의병들의 퇴로를 차단하였다. 이때 의병측에서는 성루에서 대포를 쏘면서 대항하였으나 북문도 폭파되어 일본군이 들어왔다. 의병은 치열한 시가전을 결행하면서 방어했으나 결국 일본군의 화력에 밀려 많은 사상자를 내고 처참하게 죽어갔다. 註30)


통감부에서 홍주성 함락사실을 본국에 보고하는 전보 

(1906.5.31. 서울발)

 

일본군의 홍주성 점령 사실을 가장 먼저 통감부에 보고한 것은 서울에서 급파되어 있던 동원桐原 경시였다. 그는 일본군이 홍주성을 장악한 직후 환산중준 경무고문에게 다음과 같이 긴급 타전하 였다.


31일 오전 3시 홍주성의 동문과 북문을 폭파하고 성내에 진입하여 오전 6시에 확실하게 점령함. 수괴 민종식 이하 약 100명은 도주함. 우리측의 손해는 순검 1명이 즉사하고 병사 2명이 부상함. 포로가 120명, 시체가 60구이고 대포와 소총 다수를 포획함. 註31)


그 동안 홍주의병의 충천하는 기세에 당황하던 일제는 자국 군경이 홍주성을 일거에 격파하고 거침없이 성을 장악했다는 소식에 상당히 흥분 고무되어 있던 정황이 이 전신에 역력히 나타나 있다. 일제 군경은 이처럼 새벽 3시경 총공격을 개시한 뒤 한 시간만인 4시경 성을 점령하게 되었고 이후 6시경에는 확실하게 성을 장악하고 봉쇄, 수색작업에 들어가 31일 오전 7시경 이른바 작전을 종료하였다.

동원 경시는 위 전보에 이어 홍주성 전투상황과 그 결과에 대해 자세하게 보고서를 작성해 상부에 올렸다. 다소 장문이지만, 당시 전황을 구체적으로 짐작케 하는 이 보고서 가운데 전투상황을 기록한 내용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적도賊徒 의병-필자주가 소위 난공불락이라고 과시해온 이 홍주성도 5월 31일 총공격으로 1시간도 안 되어 마침내 함락시켰습니다. 지금 그에 관한 상보는 다음과 같습니다.


1. 5월 29일 밤에 기병 제1소대와 보병 2개 중대는 홍주성 부근에 도착하자마자 요로를 점거하고 이들을 감시함. 다음날 30일 오전, 월계촌月溪村 부근의 적을 소탕하고 성에 접근하여 기관포로 위협사격을 가함. 그날 밤 대대장은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림.

1) 적은 여전히 홍주를 점령하고 있음.

2) 헌병 및 경찰 두 부대는 일시적으로 나의 지휘하에 속함.

3) 지대支隊는 내일 새벽을 기하여 홍주성을 탈취하고자 함.

4) 제2중대의 제1소대는 갈매지葛梅芝의 남쪽 고지를 견고하게 점령하여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그렇지 못하면 폭발과 동시에 서문 밖의 가옥에 방화할 것. 제4중대에서는 하사가 지휘하는 반半 소대를 교동校洞 서쪽의 막다른 길목 입구로 보내어 그 지역 부근을 확실히 점령하고 적의 퇴로를 차단시키도록 할 것.

5) 제4중대에서는 1개 분대를 평리坪里의 북쪽 끝으로 파견하여 그 지역을

견고하게 점령시키고 적의 퇴로를 차단시키도록 할 것.

6) 이상의 제 부대는 주로 적을 생포하는 데 힘쓰고 여의치 않으면 사격할 것.

7) 기병 소대의 폭파반을 제외한 나머지는 천촌리川村里에 위치하여 홍주의 예산가도禮山街道를 감시하여 보급품을 엄호할 것.

8) 또한 나머지 모든 부대, 제2중대 제1소대, 제4중대 3분대, 기관포대, 기병소대, 폭파반, 헌병대, 경찰대는 오늘 오후 11시까지 가능한 한 발각되지 않도록 하여 홍주 동쪽 약 500미터 지점의 삼거리 부근 산림에 집합할 것.

9) 보급품은 천촌리에 있어서 오후 11시 이후에는 출발 준비를 해두어야 함.

10) 나는 오후 11시에 홍주 동쪽 약 500미터에 위치한 삼거리 지점에 있을 것임.

이상 위의 명령에 따라 각 부대는 집합 지점에 모임. 다음날 31일 오전 2시 30분, 서문 밖에서 불빛이 오르는 것을 신호로 하여 즉시 운동을 개시해서 동문에 접근하여 기병이 폭약을 가지고 성문을 파괴하는 작업을 기다림. 오전 3시 20분, 불빛이 한 차례 섬광을 번쩍이며 폭발하여 산악을 진동시키고 견고한 성문도 유감없이 파괴되었음. 선두에 선 보병은 기관포를 연발하며 돌격을 개시하고 헌병대가 이를 뒤따랐으며 우리 경찰대는 후군이 되어 칼을 뽑아 돌입하려고 하는 순간 성루에서 대포 소총이 발사되어 한꺼번에 마구 뿌리는 것과 같음. 이러한 위험을 무릅쓰고 성내로 돌진하여 남문 부근의 고지를 향함. 이때 폭발이 다시 일어나 북문 또한 기병의 손에 의해 파괴되었음. 적이 혼비백산하여 난사하는 한밤의 포성은 우리의 함성과 서로 어우러져 그 처절함은 이루 형언하기 어려움. 오전 4시에 이르러 홍주성은 확실하게 우리가 점령하기에 이름. 그렇지만 적 또한 여기저기에 흩어져 여전히 여러 곳에 잠복해 있으므로 보병은 성벽을 포위하여 그들의 도망을 봉쇄함. 또 한편으로는 그 중 한 부대를 나누어 성 밖의 각 요로를 포위하여 적의 도망에 대비함. 우리 경찰대는 헌병과 협력하여

날이 새는 것을 기다려 성 안팎으로 적에 대한 수색작업을 실시하여 오전 7시에 이르러 종료함. 註32)


이와 같이 치밀한 작전계획에 따라 일제 군경은 홍주성을 일거에 점거한 뒤 의병들을 처참하게 살육하면서 성 안을 초토화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일본군은 홍주성을 점령한 직후부터 경과보고를 수시로 하였다. 의병측의 인적 피해상황도 보고 때마다 달라지고 있는 정황으로 보아 성을 점령한 후에도 일본군대가 철수하는 6월 7~9일경까지 무자비한 탄압을 가했음을 알 수 있다. 홍주성을 점령한 다음날인 6월 1일에는 의병 60명을 살육하고, 127명을 체포한 것으로 보고하였으나, 뒤이은 6월 4일의 보고에는 희생자시신 82명, 피체 145명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6월 14일 주차군 참모장의 최종 보고에서는 희생자 83명, 피체 154명으로 정리되어 있다. 註33) 일본군은 홍주의병 탄압작전에서 구식총 9정, 포 75문, 화승총 259정, 촌전총村田銃 1정, 양총 9정, 엽총 3정 등의 구식 혹은 신식 무기류를 노획한 것으로 보고하였다. 註34)

그러나 일본군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입은 참화의 실상은 일제측 보고와는 큰 차이가 있다. 희생된 의병의 수는 적게는 80명에서 많게는 1천 명으로 자료마다 상이하게 나타난다. 홍주의병의 핵심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유병장 유준근은 그의 일기에 의병 300명이 순국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따라서 이 전투에서 최후까지 남아서 의병들을 독려하면서 분전하였던 참모장 채광묵 부자와 운량관 성재평成載平과 전태진田泰鎭·서기환徐基煥·전경호田慶浩 등을 비롯하여 300명 이상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註35)

홍주성 전투 당시 의병이 당한 참상은 위의 일제측 기록에서도 나타나듯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와 같은 실상은 홍주성 전투 직후 부임한 군수 윤시영尹始永이 기록한 다음과 같은 일기에 잘 드러나 있다.


윤4월 9일양 5. 31, 새벽에 홍주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는데 사상자가 몇 백 명인지 알 수 없으며, 사방 수십 리 지경 이내는 인적이 끊기고 잡힌 사람이 160여 명인데 모두 차례로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들으니 심히 참혹하였다. 12일양 6. 3, 성에 수십 보 가까이 가니 일본 헌병이 서서 막고 물리친다. 명함을 보이고 입성하니 안팎에 우리 백성은 하나도 없고 첩혈모인踕血冒刃이라. 먼저 객사를 봉심奉審한즉 일본군이 잡스럽게 거처하고 양초糧草를 쌓아두고 또 형을 틀고 포살하는 등 더럽기 이를 데 없었다. … 길 옆에 서서 거처를 알지 못하고 수서기首書記에게 명하여 겨우 빈 집 하나를 얻었다. 촛불을 들고 방에 들어가니 피비린내가 코를 찌르고 창과 벽 사이에 핏자국이 난자하니 이곳이 사람을 작살斫殺한 곳임을 알겠더라. 註36)


이에 따르면 홍주성 전투 직후의 상황은 의병측 사상자가 수백 명이었으며, 체포된 사람까지 피살되었고, 심지어는 밀폐된 방에서 의병이 ‘작살’당했을 만큼 참혹하였다는 것이다. 윤시영의 일기에는 위의 기록 외에도 의병 시신 83구를 매장한 사실과 또 목이 잘린 시신 15구를 찾아내어 6월 8일 매장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


홍주의병 희생자들을 합장한 홍성 구백의총


홍주성 함락시 의병장 민종식을 비롯해 일부 참모들은 성을 탈출한 뒤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윤석봉·유준근 등 간부 78명은 피체 후 서울로 압송되어 심문을 받게 되었다. 그 가운데 윤석봉 이하 69명은 석방되고, 나머지 남규진·유준근·이식·신현두·이상구·문석환·신보균·최상집·안항식 등 9명은 일본 대마도로 끌려가 유폐당하였다. 또한 중군장 이세영도 그해 6월에 체포된 뒤 서울 경무청으로 압송되어 심문을 받은 후 그해 겨울에 종신형을 선고받고 황해도 황주의 철도鐵島로 유배되었다. 註37)


3. 홍주의병의 재기항전 시도

홍주성 함락 후 살아남은 의병들은 해미·청양 등지로 분산 탈출하였다. 이들은 그후 도처에서 소규모의 의진을 다시 편성하고 항일전에 들어갔다. 먼저 민종식의 처남이던 이용규는 그해 7월에 청양군 유치杻峙에서 군사 400명을 모은 뒤 부여·노성을 지나 연산 부흥리富興里에서 일본군을 만나 교전을 벌였다. 그러나 훈련 부족과 화력의 열세로 패전하였고, 간부들은 피체·순국하고 말았다. 조병두는 중상을 입고 체포

되어 대전역에서 순국하였고, 채경도·오상준 등의 참모들은 체포된 뒤 공주부에 감금되었고, 나머지 의병들은 뿔뿔히 흩어졌다. 이때 탈출에 성공했던 중심인물 이용규는 그뒤 같은해 8월경에는 온양 석암사石岩寺에서, 그리고 9월에는 다시 공주 노동蘆洞에서 연이어 거병을 시도하였으나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註38) 이와 같이 이합집산을 거듭하면서 간헐적인 투쟁을 지속하였던 것은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극심했던 당시 상황에 기인하는 결과였으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의병들은 조직력과 기동력, 투쟁력을 발전시켜 갔다.

그뒤 이용규는 1906년 10월경 예산군 한곡閒谷, 현 대술면 상항리에 있던 수당修堂 이남규李南珪, 1855~1907의 집으로 가서 민종식 등을 만나 재기항전을 재차 도모하였다. 홍주의병의 막후 지원자였던 이남규는 1900년 비서원승을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난 뒤 향리에 퇴거해 있던, 조야의 중망을 받던 대관 출신의 인물이었다. 그는 홍주의병 패산 후에도 그 중심인물들과 부단히 연락을 취하면서 재기항전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남규는 제1차 홍주의진이 와해된 뒤 안병찬 등 핵심인물들이 공주감옥에 갇히게 되자, 이들의 석방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며, 이후 홍주의병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다. 안병찬 등이 구금된 뒤 향리에 있던 이남규는 공주관찰사 서리 곽찬郭瓚에게 두 번이나 편지를 보내 의리와 사리에 입각해 의사들의 석방을 종용하였다. 투옥 후 얼마 되지 않은 5월 5일에 안병찬이 석방되어 민종식이 이끄는 홍주의병에 참모사로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노력의 결과이기도 하다. 註39) 곽찬에게 의사들을 석방시켜 줄 것을 요구한 이남규의 편지 가운데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변란을사조약 늑결-필자주을 당한 이래로, 형곽찬-필자주이 벼슬을 그만두리라 여겼는데 그대로 부지런히 도신道臣의 일을 대리하고 있도다. … 주사主事 이붕림李鵬林 이세영을 가리키는 듯함-필자주이 자살을 기도했으나 죽지 못하고 감옥에 갇힌 몸이 되어 죽을 수도 없이 온갖 고초를 겪고 있으니, 길 가는 사람들도 모두 울분을 토하며 눈물을 흘린다. 저 간악한 오랑캐마저 역시 어쩔 도리가 없어서 우리측 경청警廳에 넘겨서 우리의 재결에 맡겼으니, 이 사람에게는 죽지 못하는 것이 진실로 불행이지만, 우리의 도리로 보면 만약 죽지 않게 할 수만 있다면 죽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가당한 일일 것이다. 부디 차가운 감옥 안에서 곤욕을 당하게 하지 말고 속히 방면되어 돌아오게 해서 형제와 처자들에게 원통한 한을 남기지 않게 한다면, 그 또한 의리를 부지하고 억울함을 풀어주는 하나의 일이 될 것이다. 註40)

안병찬安炳瓚 형이 참으로 어떤 사람인가. … 하늘이 대체 무슨 까닭에 이런 분을 진작에 그 뜻자결-필자주을 이루게 하지 못하고 이 비린내 나는 더러운 세상에 그 몸을 남겨 두어서 이처럼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계속 받게 하는지 모르겠다. 죽이고 살리는 권한이 오랑캐 놈의 손 안에 들어 있으니 형께 어떤 힘이 될 수 있는 방도가 없겠지만, 설사 있다 하더라도 원수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 또한 깨끗한 죽음을 지연시키는 데 불과하겠으니, 그 사랑하는 것이 도리어 괴롭히는 것이며 아끼는 것이 도리어 누를 끼치는 것이라, 저는 사실 말을 하고 싶지 않다. 그렇지 않고 그 감단勘斷의 권한이 형에게 있고 오랑캐에게 있지 않다면 저는 또 굳이 말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형의 마음이 곧 저의 마음이기에 그 대처함에 있어 말을 기다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註41)

위 인용문을 통해서 이남규는 지인의 관계에 있던 공주관찰사 곽찬에게 의리와 명분을 내세워 안병찬 등의 석방을 종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앞에서 보았듯이 이남규는 뒤이어 의병들이 1906년 5월 19일 홍주성을 장악하고 편제를 새롭게 하였을 때 박영두와 함께 선봉장에 이름이 올랐다. 하지만 그가 직접 홍주성에 들어가 전투에 참여하였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이 문제와 관련하여 “처음에 민종식이 이남규와 함께 거의하고자 하였다. 이남규는 단지 앉아서 힘써 주선하였으며, 끝내 홍주성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註42)고 기록한 점을 비롯하여 당시의 여러 정황으로 보아, 그가 직접 홍주성에 합류하였을 개연성은 크지 않은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종식이 의진의 편제를 정할 때 상징적 역할이나 영향을 기대하고 이남규를 선봉장으로 삼았던 것은 사실로 짐작된다. 이 점은 이남규가 홍주의병에 뜻을 같이 하여 묵시적으로 동참했던 사실을 암시해 주는 증좌이기도 하다. “이남규를 제거하지 않으면 내포지역이 편안한 날이 없을 것이라고 다투어 말하였다” 註43)고 한 일진회원의 지적도 이남규와 홍주의병간의 상호 긴밀한 연계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입장과 처지에 있었기 때문에 이남규는 홍주의병 패산 후 의병 재기를 위해 성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에 1906년 10월 이남규의 집에 이용규를 비롯하여 곽한일郭漢一 등의 의사들이 집결하였다. 이들은 예산 관아를 공격하여 활동의 근거지로 삼기로 하고 11월 20일을 거사일로 하여 민종식을 다시 대장으로 추대하기로 뜻을 모았다.

유봉재兪鳳在가 지은 이용규의 전기에서는 이남규를 주축으로 한 이러한 재거 계획에 대해


1906년 9월 보름음력-필자주께 예산 한곡에 있던 족형 전 참판 이남규의 집에 이르러 동지 민종식·곽한일·박윤식·김덕진·김운락·황영수·정회규·박창로·이만식 등 수십 명과 협의하고 꾀를 내어 다시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다. 註44)


라고 하였으며, 성덕기成德基가 지은 또 다른 이용규의 전기에서도


9월 그믐에 먼저 정장精壯 수백 명을 비밀리에 예산 근처 동리에 매복시키고 맹주 민종식과 함께 한곡의 전 참판 이남규의 집으로 달려갔다. 이들은 먼저 맹주민종식-필자주를 다른 곳에 숨겨놓고 며칠 동안 머무르면서 서로 상의하여 무리를 모아 예산을 습격하려 하였다. 註45)


고 기술하여, 이남규가 홍주의병의 재거 계획에 깊숙히 연계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처럼 민종식과 이용규 등의 홍주의병 중심인물들이 이남규의 후원하에 재기를 도모하였을 때, 그 지휘부는 대장에 민종식을 선임한 것을 필두로 중군장에 황영수와 정재호, 운량관에 박윤식, 참모에 곽한일·이용규·김덕진 등으로 편제하였다. 이들 외에도 이남규·박덕일朴德一·박창로·이세선李世善·윤병일·윤필구·조희수 등이 참여하였던 것으로 확인되는데, 이들은 대개 민종식과 관계가 돈독하였던 인물들이

었다. 註46) 이들은 거사계획을 구체화시켜 11월 20일을 기하여 예산읍을 공략한 뒤 이곳을 활동 근거지로 삼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일진회원의 밀고를 받고 출동한 일제 헌병 10여 명과 일진회원 수십 명에 의해 이남규·이충구李忠求 부자를 비롯하여 중심인물들이 모두 체포되고 말아 재거계획은 다시 수포로 돌아갔다. 이남규는 민종식을 은닉시킨 혐의로 일제 군경에게 체포되어 공주로 끌려가 한동안 갇혔다가 풀려났으며, 그의 아들 이충구는 하룻밤 사이에 세 차례나 흉형을 당했지만, 민종식의 거처를 끝내 발설하지 않았다고 한다. 註47)

그뒤 홍주를 중심으로 충청도 일대에서 강력한 항일세력이 형성되어 조직적으로 활동을 벌이게 되자, 일제는 그 정점에 있던 이남규를 결코 좌시하지 않았다. 1907년 9월 26일음 8.19, 일본 기마병 100명이 예산에 있던 그의 집을 급습하였다. 일본군이 포박하려 하자, 그는 “선비는 죽일 수는 있어도 욕보일 수는 없다可殺 不可辱”고 하며 가마에 올라 집을 나섰다.

서울로 압송해 가던 일본군은 이남규를 회유하여 그에게 귀순할 것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를 완강하게 거부하였다. 이에 일본군은 온양 평촌坪村에 이르러 이남규와 그를 따르던 장자 이충구, 그리고 노복 김응길金應吉 등을 무참히 위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註48)

한편, 이남규의 집에서 체포된 곽한일과 박윤식·정재호·황영수·박두표 등은 종신형을 선고받고 전남 신안군의 지도智島로 유배되었으며, 홍순대와 김재신은 전북 옥구군의 고군산도로 유배되었다.


홍주의병을 후원했던 이남규의 순국비 

(충남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


주장 민종식은 미리 신창군 남상면의 성우영成祐永의 집으로 대피하였다가 다시 공주 탑곡리 방면으로 피신해 있었다. 일제 경찰대는 신창에서 김덕진지도 유배과 신창규辛昌圭를 체포하여 고문한 끝에 신창규로부터 민종식의 은신처를 알게 되었고, 결국 1906년 11월 20일 주장 민종식도 체포되어 공주부로 끌려갔다. 그는 서울로 압송되어 1907년 7월 3일 교수형을 선고받았으나, 다음날 내각회의에서 종신형으로 감형되어 진도에 유배되었고, 같은해 12월 융희황제 즉위 기념으로 특별사면을 받아 석방되었다.

예산 방면에서의 이와 같은 재기노력 외에도 홍주성 실함 이후 각지로 흩어진 의병들은 부여·정산·당진 등지에서 항일전을 벌이면서 의병세력을 확산시켜 갔다. 우군관 홍순대는 1906년 11월 부여군 은산면에서 80여 명의 의병을 규합해 재기하였다. 또 남포의 성문에는 ‘의병대장 송’이라는 이름으로 친일관리인 군수 이철규李哲圭의 처단을 경고하는 방문이 나붙었다. 註49)

한편, 청양의 안병찬과 박창로, 면천의 이만식, 서산의 맹달섭, 전라도 출신의 강재천 등은 홍주성 실함 후 정산의 칠갑산 방면으로 들어가 항쟁을 계속하였다. 안병찬과 박창로는 1907년 12월 일제 헌병에 체포


민종식 의병장 '취조개요'를 보고한 

일제의 문건 (1906. 11. 30)


되었는데, 이때 박창로는 300명의 의병을 인솔하고 있었다고 한다. 홍주의병의 유격장이었던 이만식은 당진·해미·대흥·서산·부여·공주를 비롯해 경기도 안성·용인 등지까지 진출하면서 활동하였다. 맹달섭은 박창로·이만식 등과 함께 칠갑산에 근거지를 두고 활동하였는데, 1907년 1월에는 70명의 의병을 이끌고 부여군 일세촌日勢村에서 일본인 3명을 처단하였다. 이후 그는 일제 군경의 추격을 피해 경기도 죽산으로 이동하여 윤필구 의병과 합세하여 광주·용인·안성 등지에서 활동을 계속하였다. 또 홍주의병에 참여했던 청양 출신의 김동락金東洛과 김무경金武京도 홍주성 실함 후 정산·청양·부여 등지를 무대로 1909년 7월 일제 헌병에 체포될 때까지 활동을 지속하였다. 그밖에 차상길車相吉 등 15명은 홍주성에서 물러난 뒤 6월 6일 당진 소난지도로 들어가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註50)

그밖에 홍주의병에 참여했던 박우일朴禹日·맹순량孟順良·이근주·한계석 등도 충청도·전라도 일대에서 1907~1909년까지 간헐적으로 항일전을 수행하면서 의병전쟁의 파급 확산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註51)

[註 1] 복암선생기념사업회, 『국역 복암집』, 2006, 175~176쪽. ☞

[註 2] 홍주의병의 기병 날자는 기록에 따라 1906년 정월에서 3월 중순에 걸쳐 상이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확단하기 어렵다. 그 가운데 안병찬과 임승주의 기록에서 3월 중순(15, 17일)으로 되어 있으므로 이에 따른 것이다. ☞

[註 3] 송용재 편, 『홍주의병실록』, 홍주의병유족회, 1986, 307쪽. ☞

[註 4] 유한철, 「홍주성의진(1906)의 조직과 활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4,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0, 10쪽. ☞

[註 5]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2, 1971, 814쪽. ☞

[註 6] 송용재 편, 『홍주의병실록』, 483~484쪽. ☞

[註 7] 김상기, 「1906년 홍주의병의 홍주성전투」, 『한국근현대사연구』 37, 2006, 134쪽 ☞

[註 8] 김상기, 「1906년 홍주의병의 홍주성전투」, 『한국근현대사연구』 37, 136쪽 ☞

[註 9]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1, 752쪽. ☞

[註 10]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2, 329쪽. ☞

[註 11] 『황성신문』 1906년 5월 7일자. ☞

[註 12] 『황성신문』 1906년 5월 25일자 ; 송용재 편, 『홍주의병실록』, 310쪽. ☞

[註 13]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1, 356쪽 참조. ☞

[註 14] 송용재 편, 『홍주의병실록』, 310쪽 참조. ☞

[註 15] 유한철, 「홍주성의진(1906)의 조직과 활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4, 17~18쪽. ☞

[註 16] 성덕기, 「의사이용규전」, 『독립운동사자료집』 2, 335쪽. ☞

[註 17] 성덕기, 「의사이용규전」, 『독립운동사자료집』 828쪽 ; 송용재 편, 『홍주의병실록』, 323쪽. ☞

[註 18] 유한철, 「홍주성의진(1906)의 조직과 활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4, 1990. 20쪽. ☞

[註 19] 「匪賊閔宗植取調之槪要」(일본 국립공문서관 소장 『公文雜簒』 권39, 문서번호 2A-13 纂 1008) ☞

[註 20] 『고종실록』 1906년 5월 29일조 : 김상기, 「1906년 홍주의병의 홍주성전투」, 『한국근현대사연구』 37, 138쪽 ☞

[註 21]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말의병자료』 Ⅲ, 2002, 59쪽. ☞

[註 22] 『황성신문』 1906년 5월 25일자. ☞

[註 23]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말의병자료』 Ⅲ, 62쪽. ☞

[註 24]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말의병자료』 Ⅲ, 64쪽. ☞

[註 25] 김상기, 「1906년 홍주의병의 홍주성전투」, 『한국근현대사연구』 37, 141쪽. ☞

[註 26] 「韓國ニ於ケル暴徒鎭壓ノ爲兵力ヲ使用ス」(1906. 5. 27)(公文類聚/第30編/明治39年/第5卷)(일본 國立公文書館 소장) ☞

[註 27]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말의병자료』 Ⅲ, 64쪽. ☞

[註 28]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1, 359쪽. ☞

[註 29] 김상기, 「1906년 홍주의병의 홍주성전투」, 『한국근현대사연구』 37, 141쪽. ☞

[註 30] 김상기, 「1906년 홍주의병의 홍주성전투」, 『한국근현대사연구』 37, 141~142쪽. ☞

[註 31]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말의병자료』 Ⅲ, 65~66쪽. ☞

[註 32]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말의병자료』 Ⅲ, 76~77쪽. ☞

[註 33]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말의병자료』 Ⅲ, 66·68·92쪽 참조. ☞

[註 34]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말의병자료』 Ⅲ, 77쪽. ☞

[註 35] 김상기, 「1906년 홍주의병의 홍주성전투」, 『한국근현대사연구』 37, 144쪽. ☞

[註 36] 윤시영, 「洪陽日記」, 『향토연구』 11, 충남향토연구회, 1992, 22쪽. ☞

[註 37] 정운경 엮음, 「동유록」, 『독립운동사자료집』 1, 566~567쪽. ☞

[註 38] 성덕기, 「의사이용규전」, 『독립운동사자료집』 2, 332~333쪽. ☞

[註 39]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1, 348쪽. 

수당이 곽찬에게 의사들의 석방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낸 사실은 林翰周의 「洪陽記事」에도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2, 296~297쪽). ☞

[註 40] 이남규, 『수당집』 1, 민족문화추진회, 1997, 292쪽. ☞

[註 41] 이남규, 『수당집』 1, 293~294쪽. ☞

[註 42] 황현, 『매천야록』, 국사편찬위원회, 1955, 435쪽. ☞

[註 43] 황현, 『매천야록』, 436쪽. ☞

[註 44]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2, 318~319쪽. ☞

[註 45]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2, 333쪽. ☞

[註 46] 내부 경무국, 『顧問警察小誌』, 1910, 119쪽. ☞

[註 47] 『三千百日紅』, 平洲李昇馥先生八旬記, 인물연구소, 1974, 56·83~84쪽. ☞

[註 48] 박민영, 「수당 이남규의 절의와 항일투쟁」, 『만해학보』 6, 2003, 187~189쪽. 

수당 부자의 순국 지점은 현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 평촌 냇가 부근이다. 이곳에는 1987년 충청남도에서 세운 ‘修堂李南珪先生殉節碑’가 서 있다. ☞

[註 49]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2, 319쪽. ☞

[註 50] 김상기, 「1908년 당진 소난지도 의병의 항일전」, 『한국근현대사연구』 28, 2004, 40쪽 ☞

[註 51] 유한철, 「홍주성의진(1906)의 조직과 활동」, 『독립운동사자료집』 4, 30~31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