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영동지방의 원용팔 의병 / 한말 중기의병

몽유도원 2014. 2. 3. 20:33

제2장 영동지방의 원용팔 의병


원용팔 의병의 재기


원용팔 의병의 활동


원용팔 의병의 해산과 그 영향






1. 원용팔 의병의 재기


경기, 강원도 일대는 충북지방과 더불어 전기의병 시기에 화서학파를 중심으로 의병 세력이 특히 강성하였던 지역이다. 유인석의 제천의병으로 대표되는 이들 의병은 의진 해산 후 대체로 향리에 은둔해 있으면서 재기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1905년 일제침략이 가속화되는 상황에서 재기항전에 나서 전국 의병을 선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을사조약이 늑결되기 두 달 전인 1905년 8월 중순에 일어난 원용팔元容八, 일명 元容錫, 1862~1907 의병의 경우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註1)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1792~1868의 고제高弟이던 성재省齋 유중교柳重敎의 문하에서 수학한 원용팔은 전기의병 당시에 여주 일대에서 활동하던 심상희沈相禧 의진에 참가한 뒤 제천의병의 중군장을 지내는 등 폭넓은 활동을 한 뒤 잠적해 있던 인물이었다. 註2) 




원용팔은 러일전쟁 개전 이후 일제의 침략책동이 가시화되는 상황에서 1905년 강원도 원주에서 재기하였다. 거의를 결심한 그는 원주 금마둔金馬屯에 있던 지방인사 박수창朴受昌을 방문하여 협조를 요청한 끝에 그로부터 군자금과 화포 등의 군수품을 지원받았으며, 소를 잡아 거의의 성공을 기원하는 천제를 지냈다. 이어 1905년 8월 16일음 7.16 원용팔은 원주 풍정楓亭에서 종제인 원용수元容銖, 채순묵蔡淳默, 김낙중金洛中 등 8명의 동지를 규합하였으며, 이때 박수창은 명포수인 최병덕崔炳德과 정재식鄭在植 2명을 보내 의진에 합류토록 하였다. 이에 원용팔은 이들을 좌, 우 총독장總督將으로 선임하였다. 


이와 같이 재기한 원용팔은 일제의 침략상을 성토하고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거의한 명분을 천명하기 위해 여러 격문과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위로는 광무황제에게 자신의 거의를 알리기 위해 상소를 올리는 한편, 서구 열강의 공사관과 청국 공사관에는 일제의 죄상을 성토하며 지원과 협조를 요청하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으며, 한국침략의 죄상을 성토하는 격문을 별도로 일본공사관에도 보냈다. 註3) 뿐만 아니라 일반 인민들을 대상으로는 일제의 국권침탈을 성토하고 거의의 명분과 정당성을 천명하면서 의병에 동참해 줄 것을 요청하는 「격고문檄告文」을 널리 발포하였다. 註4) 장문으로 된 「격고문」 가운데 일제침략을 격렬하게 성토한 대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산림천택을 모조리 점령하고 재정과 토지를 제 것으로 만들었으며 왕실이 불탄 것과 같다. 새둥지가 엎어졌으니, 알이 온전할 리 없다. 흙집이 이미 기울어졌으니, 가죽을 보존할 수 없는데 털을 어찌 보전할 수 있겠는가. 시랑豺狼이 우리 백성을 학대하니 악하기가 진실로 심하고, 견양犬羊이 우리의 예속을 더럽히니 차라리 죽을지언정 차마 들을 수 없도다. 사람마다 원안袁安의 탄식이요, 사람마다 채애蔡哀의 통곡소리로다. 심지어는 간악한 백성이 혈당血黨을 널리 벌여 이른바 일진회라는 것이 지독한 난적의 무리이니 만약 저들의 소위를 그대로 둔다면 반드시 나라를 없애고야 말 것이다. 또 고문顧問이라는 관작을 두고서 주현州縣의 관직을 빼앗고 전국 각지에 역당의 앞잡이들을 배열하여 온 나라를 그물질하고 우리 인민을 속박하였다. 요순우탕堯舜禹湯 제왕帝王의 전통은 마침내 그림자도 없이 끊어지고 공맹정주 성현의 학문은 멸망의 참변을 당하게 되었으니 이를 어찌하리오. 과거 조선의 전형은 복구할 수 없게 되고 소일본小日本의 모습이 되고 말 것이다. … 진실로 문을 열고 도적을 받아들인 무리가 아니라면 누구인들 저들의 고기를 먹으며 가죽을 베고 잘 마음이 없겠는가. 註5) 




곧 위 격문은 일제의 황무지개척권 요구와 일진회의 매국행위를 폭로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문정치를 자행하면서 매국관인들을 포석하고 내정을 침탈한 일제의 전방위에 걸친 국권침략의 양상을 격렬한 어조로 성토한 것이다. 그리하여 ‘제왕성현’의 한국이 ‘소일본’으로 전락하는 절대절명의 위기상황에서 전 국민이 ‘저들의 고기를 먹고 가죽을 베고 잘’생각을 하게 되었으며, 이로써 항일의병을 일으키게 되었다는 논리를 펴고 있는 것이다. 




[註 1] 원용팔 의병은 1980년대까지 을사의병의 선구 내지는 효시로 언급되어 왔었다(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1, 1971, 334쪽 ; 윤병석, 「의병의 항일전」, 『한국사』 19, 국사편찬위원회, 1984, 398쪽). ☞

[註 2] 元容正, 「卜隱」, 『昭義新編』, 국사편찬위원회, 1975, 243쪽. ☞

[註 3] 『대한매일신보』 1905년 8월 24일 「元氏陳疏」. ☞

[註 4] 원용팔이 거의시 작성한 상소·격문류와 각국공사관에 보낸 서한류는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말의병자료집』, 1989, 189~222쪽에 실려 있다. ☞

[註 5]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말의병자료집』, 200~201쪽. ☞



2. 원용팔 의병의 활동


원주에서 거의한 원용팔은 곧바로 강원도, 충청도 각지를 전전하면서 전력 확충에 들어갔다. 주천酒泉, 현 영월군 주천에 이르러서는 인근 각지에서 포군 수십 명을 모은 다음 다시 단양으로 행군하였다. 단양에서는 정운경鄭雲慶·이구영李九永·장익환張益煥·이규현李奎顯·지원영池源永 등 과거 전기의병 때의 동지나 지역유지들의 협조를 받을 수 있었다. 단양은 일찍부터 향약 조직을 통해 포군을 두어 도적을 막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 포군세력을 의병으로 흡수하여 전력을 보강할 수 있었던 것이다. 註6) 


8월 26일음 7.26에는 장졸 및 포군 30여 명과 종사 수십 명을 거느리고 영춘군으로 들어갔으며, 이곳에서 다시 외촌外村의 포군 10여 명을 모집한 뒤 이청吏廳에서 하룻밤을 유숙하였다. 이로써 영춘지역에서는 의진의 규모가 수백 명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정운경은 의진의 편제를 다음과 같이 갖추었다. 註7) 






전군장 이정의李正義 

수성장 이회승李會升 

소모장 오두갑吳斗甲 유해붕柳海鵬 조준원趙濬元 남필원南泌元 엄태간嚴泰醱 

파수장 한준○韓俊○ 조윤식趙潤植 김순익金順益 

참모종사 김태관金泰寬 채경묵蔡敬默 엄성하嚴聖河 엄기섭嚴基燮 정대억丁大檍 지규창池圭昌 지병언池秉彦 

서 기 장지환張之煥 홍범식洪範植 




원용팔의 의병활동 기록




진용의 구성에는 이처럼 원주·제천·영춘 등지의 유생들이 중심이었는데, 여기에는 전기의병에서 활동한 다수의 인물들도 확인된다. 전군장 이정의, 소모장 남필원, 참모종사 엄성하, 서기 장지환 등은 유인석이 이끌던 제천의진에서 활동하던 인사들이었다. 그러므로 이들도 원용팔과 함께 전기의병에서 중기의병으로 재기한 경우로, 원용팔의 원주의진과 전기 제천의병 양자의 관련성을 이해하는 데 좋은 사례가 된다. 그리고 일부 군인·서리 출신들로 보이는 인사들도 기용되었으며, 또 군전이나 군량·무기 등의 군수품을 지원한 인사들도 있었다. 註8) 




원용팔 의병은 이처럼 영춘에서 전열을 가다듬은 뒤 곧 영월로 이동하였다. 영월에서는 보덕사報德寺의 승려 김상의金尙儀를 승장僧將으로 임명하는 한편, 엄성하를 수성장, 김내현金乃鉉을 소모장, 박제방朴齊昉·이긍하李兢夏·정이항丁履恒을 참모로 선임하여 지역 방어체제를 갖추었다. 그리고 마차磨差, 현 영월군 북면로 다시 행군하였는데, 이곳에서도 윤덕배尹德培와 김경로金敬魯를 파수장, 김영두金盈斗와 양한용梁漢用을 교련장으로 삼았다. 이들 가운데 마차에서 교련장으로 선임된 윤덕배와 양한용은 군인[兵丁]으로서 1907년 대한제국군 강제해산 이전에 의진에 가담하여 군사교련의 책무를 담당하였던 사실은 주목되는 점이다. 원용팔은 마차에서 다시 정선으로 진출하여 이곳에서도 지역방어를 위한 편제를 갖추었다. 그리하여 엄기섭嚴基燮을 선봉장으로 삼은 것을 필두로 수성장에 김상규金尙圭, 파수장에 심경화沈景化·전명심全明心·양숙도梁叔道, 참모종사에 이상렬李象烈·정태영鄭台永·김홍근金鴻根·정병도鄭炳燾·최한섭崔漢燮 등을 선임하였던 것이다. 註9) 


이 무렵 원용팔이 이끄는 원주의진의 강성한 진세는 지방관들을 크게 위협하였다. 당시 강원도관찰사가 내부에 보고한 문건을 언론에서 보도한 내용에는 “원용팔 의병대장이 처음 영월군으로 들어갈 때는 그 규모가 포군 120~130명 정도였으나, 정선군에 이르러서는 이미 200여 명이나 되었는데, 이는 불과 며칠만에 확대된 진세였다” 註10)고 하면서 그 대책에 부심하고 있었다. 특히 원용팔 의병의 주력이 전기의병 때의 핵심전력이던 포군으로 구성되어 있던 사실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 註11) 


원용팔 의진의 중군 김낙중은 이 무렵 일진회 첩자 고영달高永達과 일본인 체신부 1명을 처단하였다. 또한 원용팔은 비밀리에 원주로 들어가 진위대 군인들과 연합전선을 구축하기로 약속한 뒤 돌아왔다. 이어 원용팔 의진은 봉평현 평창군 봉평으로 이동하여 많은 동지들을 규합하면서 진세를 강화하였다. 이곳에서는 특히 추성구秋性求·천락구千洛龜·배진환裵縉煥·추병철秋秉喆, 추성구의 아들·천후근千厚根·강윤중康潤重·강형진康亨鎭·곽재호郭載鎬·신경집辛景集 등의 동지들을 참모·종사로 영입하였던 것이다. 이어 홍천 서석에서도 원용팔은 권영섭權永燮·정장화鄭鏘和·이은상李殷相·이규원李奎元 등을 참모·종사에 임명하였다. 註12) 


원용팔 의진은 이처럼 원주에서 재기한 뒤 그 동안 단양·영월·정선·홍천 등지를 전전하면서 많은 인사들을 영입하면서 전력을 확충하는 한편, 각지로 항일의병의 기세를 확산시켜 갔다. 원용팔이 이끄는 의병은 이처럼 보강된 전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군사훈련을 강화하고 실전에 적응할 수 있도록 전열을 가다듬기 위한 기간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보가 누설됨으로써, 정부에서는 원주진위대로 하여금 원용팔 의병을 해산하도록 조처하였다. 이에 원주진위대장 김구현金龜鉉은 일진회원들을 동원하여 의진 와해공작을 벌이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많은 이탈자가 발생하여 의진의 규모는 300명으로 격감하고 말았다. 註13) 




[註 6]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말의병자료집』, 270쪽. ☞

[註 7]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말의병자료집』, 270~272쪽. ☞

[註 8] 권영배, 「구한말 元容八의 의병항쟁」, 『한국민족운동사연구』(우송조동걸선생정년기념논총 2), 나남출판, 1997, 230~231쪽. ☞

[註 9]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말의병자료집』, 272쪽. ☞

[註 10] 『대한매일신보』 1905년 9월 20일 「義兵漸熾」. ☞

[註 11] 권영배, 「구한말 원용팔의 의병항쟁」, 『한국민족운동사연구』, 232쪽. ☞

[註 12]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말의병자료집』, 274쪽. ☞

[註 13] 권영배, 「구한말 원용팔의 의병항쟁」, 『한국민족운동사연구』, 233쪽. ☞




3. 원용팔 의병의 해산과 그 영향


원용팔은 원주진위대의 의병 탄압 계략을 감지하지 못한 채 9월 24일음 8.26 홍천에서 횡성을 경유한 뒤 전날 상호 합력하기로 한 약속에 따라 원주진위대 군사와 연합하기 위해 원주 활곡活谷, 이명 弓谷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튿날 새벽 원주진위대의 공격을 받고 원용팔 의병은 종언을 고하고 말았다. 원용팔 의진이 홍천에서부터 원주 활곡으로 행군하여 패산하기까지의 과정을 강원도관찰부에 보고한 횡성군수 이용범李龍範의 다음과 같은 보고서에 당시 정황이 잘 드러나 있다. 




횡성군수 이용범이 강원도관찰부에 보낸 보고서는 다음과 같다. “본월9월24일 진시오전 7~9시 무렵 의병 근 300명이 총과 칼을 지니고 홍천 지경으로부터 갑자기 본읍횡성중으로 들어와 장터에 의진을 결성하니, 그 대장은 곧 원용팔이며 깃발의 구호는 곧 존화토적尊華討賊이라 하였다. 술로 요기한 뒤 오시11~13시 무렵 원주 활곡촌으로 향하였다. 당일 술시19~21시 무렵 원주진위대 병사 10명이 본읍에서부터 와서 의병의 간 곳을 물은 다음 곧장 활곡촌으로 갔는데 해산시켰는지 여부는 미처 알지 못한다. 길가의 촌민들은 이로 인해 놀라 흩어졌으니 참으로 민망할 노릇이었다.” 이어지는 보고서에서는 “… 사람을 보내 자세히 알아본즉 25일에 진위대 병정이 활곡에 이르러 처음에는 총을 놓고 마침내는 타일러서 의병을 해산한 뒤에는 그 대장 원용팔을 포박하여 본대로 귀환하였다”고 하였다. 註14) 현대어 윤문-필자 




원용팔이 황주 철도鐵島 유배시 남긴 「황강동유록」




이 보고서에 따르면, 원용팔 의진은 홍천 방면으로부터 횡성읍내로 이동하여 장터에다 진소를 두고 아침을 먹은 뒤 낮에 원주 활곡을 향해 행군하였으며, 그 뒤를 따라 원주진위대 군인 10명이 의병의 행방을 탐문한 뒤 그들을 추적하여 활곡으로 떠났다는 것이다. 결국 이들 진위대 군인들이 활곡에 주둔하고 있던 원용팔 의진을 공격하여 해산시키고 원용팔을 체포하여 본대로 압송해 갔다는 내용이다. 이때 원용팔을 체포한 진위대 군인들의 인솔자는 정수달鄭秀達이었으며, 원용팔은 원주진위대와 이전에 상호 연합하기로 한 약속만을 믿었기 때문에 쉽게 포박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로써 원용팔이 이끌던 원주의진의 활동은 종료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의진의 활동은 이후 을사조약 늑결로 야기된 삼남지방과 양서지방 등 항일의병의 전국적 확산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한편, 원주로 압송된 원용팔은 의사로서의 올곧은 기개를 굽히지 않았으며, 10월 7일 다시 서울 평리원으로 이송되었다. 그후 일제의 한국주차군사령부로 끌려가 사령관 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의 심문을 받았지만 이에 조금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항거하였으며 결국 경성감옥에 투옥되고 말았다. 그는 오랜 항전으로 인해 극도로 쌓인 피로와 심한 옥고를 이기지 못하고 1906년 3월 45세를 일기로 옥중 순국하고 말았다. 註15) 


1905년 9월 원용팔 의병 해산 후, 충북 단양지방에서 정운경鄭雲慶, 1861~1939을 주축으로 의병이 재기하였다. 정운경 역시 전기의병 때 제천의병의 전군장으로 활약하였던 인물로, 원주의병이 해산당하고 원용팔이 체포당했다는 소식을 듣자 이규석李圭錫·강수명姜秀明·지원영池源永·김지현金知鉉·장익환張益煥 등 동지들과 함께 항일구국의 기치를 올렸던 것이다. 장림長林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10월 6일음 9.8에는 단양읍으로 들어가 수순교首巡校·서기·향장 등을 포박하여 장림으로 데리고 가 각 면의 포수들을 규합하도록 지시하고, 종사와 포수들을 사방으로 보내 의병을 모았다. 이에 영춘·제천·청풍 등지에서 3~400명을 모을 수 있었다. 註16) 


하지만, 정운경 의병도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하기 전에 해체당하고 말았다. 의병들은 10월 11일 단양읍으로 진출하였고, 이강년에게도 사람은 보내 호응을 요청하는 등 세력 확대를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10월 13일 의병의 봉기 소식을 듣고 급히 출동한 원주진위대의 공격을 받아 의진은 와해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때 주장 정운경은 체포되어 영춘에 일시 구금되었다가 서울로 압송되었다. 註17) 뿐만 아니라 정운경 의병을 후원하던 유생 박세화朴世和도 청풍에서 체포됨으로써 구국투쟁의 꿈은 무산되었다. 그뒤 정운경은 서울로 압송되어 평리원에서 10년 유형을 선고받아, 울진·삼척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김하규·황청일 등과 함께 1906년 11월 황주의 철도鐵島로 유배당하였다. 이들은 유배지에서 온갖 고초를 겪은 뒤 1907년 12월 모두 광무황제의 특사로 방면되었다. 註18) 


원용팔과 정운경 의병 해산 후에도 인근 각지에서는 산발적인 의병 항전이 꾸준히 지속되고 있었다. 강원도 홍천에서는 박장호朴長浩가 서석면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켜 항전에 들어갔다. 가평 출신의 박장호는 당시 홍천군 생곡笙谷, 서석면 소재에 거주하고 있었다. 또한 이 시기에 양구에서는 최도환崔道煥 의병·양평·여주에서는 이범주李範疇, 죽산·안성에서는 박석여朴錫汝 의병 등이 산발적 형태로 활동하고 있었다. 註19) 






[註 14] 강원도관찰부 주사 丁元燮이 1905년 9월 28일 의정부 주사에게 보낸 공문(『각사등록』 광무 9년 9월 28일조). ☞

[註 15] 평리원검사 尹甲炳이 법부대신 李夏榮에게 올린 공문(『각사등록』 광무 10년 3월 8일조). ☞

[註 16]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1, 575쪽. ☞

[註 17] 구완회, 『한말 제천의병 연구』, 선인, 2005, 212~213쪽. ☞

[註 18]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1, 575~576쪽 ; 『관보』 1906년 11월 7일, 1907년 12월 3일자. ☞

[註 19]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1, 1971, 340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