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중기의병의 시대적 배경과 전국적 개황 / 한말 중기의병

몽유도원 2014. 2. 3. 20:27

제1장 중기의병의 시대적 배경과 전국적 개황


을사조약 늑결과 조약 반대투쟁


중기의병 개황






1. 을사조약 늑결과 조약 반대투쟁


1. 일제의 러일전쟁 도발과 국권침탈


전기의병이 봉기하게 된 시대적 배경은 1894년 일제가 도발한 청일전쟁이었으며,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갑오경장을 통해 내정을 간섭함으로써 야기된 변복령과 을미사변, 그리고 단발령 등의 사건이 그 계기로 작용하였다. 


전기의병이 해산된 지 10년 뒤에 중기의병이 재기하였다. 중기의병이 재기하게 된 시대적 배경은 1904년 일제가 도발한 러일전쟁이었다. 그리고 중기의병 재기의 계기가 된 것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그 여세를 몰아 실질적 국망을 의미하는 을사조약을 늑결한 데 있었다. 즉 전기의병과 청일전쟁 양자가 갖고 있는 관련성과 마찬가지로, 중기의병과 러일전쟁은 긴밀한 상관성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곧 중기의병은 러일전쟁을 배경으로 일어났고, 을사조약 늑결이 그 계기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1894년 청일전쟁 이후 한국을 병탄하는 데 가장 큰 장애물로 부상한 러시아 세력을 구축하기 위해 일제는 1904년 2월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일제는 전쟁 도발 직후에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강제로 체결함으로써 정치·군사적 간섭의 토대를 구축한 뒤, 5월 30일 자국의 각의에서 「대한방침」對韓方針·「대한시설강령」對韓施設綱領 등으로 요약되는 대한침략의 구체적 방안을 논의·결정하였다. 한일의정서가 군사전략상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대한방침」과 「대한시설강령」은 정치·외교·경제 등 군사 방면을 제외한 제반 분야에서 국권 장악을 목표로 한 것으로, 장차 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장단기 계획안이었던 것이다. 


1905년에 들어와 일제는 한국의 국방·재정권을 장악하였을 뿐만 아니라 외교권을 감독하면서 조약 체결권까지 제약을 가하였다. 일제는 그 동안 난공불락이던 여순항을 1월에 함락시키고 3월에는 봉천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전쟁에서 승기를 잡았다. 더욱이 5월에는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대마도 부근 해전에서 궤멸시켰다. 이로써 일제는 전쟁에서의 승리와 함께 한국의 병탄에 대한 자신감을 굳히게 되었다. 


한편 일제가 한국을 침략하고 식민지화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던 일제 침략군, 이른바 ‘한국주차군韓國駐箚軍’이 한국을 침공한 것은 러일전쟁에 참전할 일본군을 편성하는 과정의 일환이었다. 곧 러일전쟁 도발과 함께 ‘한국임시파견대’라는 이름하에 일본군이 한국을 침공한 것이다. 이 부대는 일본군 제12사단 예하 4개 대대를 근간으로 하여 편성되었으며, 그 사령관에는 제23여단장인 목월안강木越安綱 소장이 임명되었다. 


한국임시파견대는 동향평팔랑東鄕平八朗이 거느리는 60여 척의 일본군 연합함대와 함께 1904년 2월 6일 좌세보佐世保항을 출항하였다. 연합함대는 부산 앞바다를 지날 무렵에 러시아 전함 한 척을 공격하여 서전을 장식하였고, 목포 앞바다를 통과하면서 다시 러시아 기선 한 척을 노획하였다. 그리고 목포 부근에서 항로를 나누어 정로군征露軍은 여순旅順으로 향하고, 한국임시파견대는 인천을 향하여 북상하였다. 그리하여 한국임시파견대는 8~9일 양일간 인천에 상륙한 뒤, 보병 제46연대 제2대대와 제47연대 제2대대는 인천을 점령하여 그곳에 일시 머물고, 나머지 제14연대 제1대대와 제24연대 제2대대는 9일 오전에 목월木越 사령관의 인솔하에 서울로 침공하여 위세를 떨치기 시작하였다. 


한국임시파견대의 서울 점령은 곧 일제가 대한식민지화를 감행하려는 의지의 직접적 표출이었다. 그리하여 일본군이 서울을 점령한 당일 오후에 일본공사 임권조林權助는 광무황제를 알현하고 “이번 개전과 일본군의 서울 입성은 한국의 황실과 국토를 보호하여 한국의 독립을 영구하게 하기 위한 의거”라는 상투적인 거짓말을 상주하여 광무황제의 배일행동을 우선적으로 견제하였다. 


일본군 후속부대는 그후에도 계속 들어와 전국 각지에 주둔하면서 전토를 유린하였다. 특히 인천-서울 사이에는 일본군과 군수물자로 뒤덮였으며, 한국군 병영을 비롯해 관청과 학교, 심지어는 궁궐에 이르기까지 서울의 중요한 건물 대부분이 일본군에 수용됨으로써 공포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황현의 『매천야록』에는 국토가 일본군에 유린되던 당시 상황이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왜군이 인천에서 속속 입경入京한 자가 병사가 5만여 명이고 말이 1만여 필로서 창덕궁·문희묘文禧廟·환구단·저경궁·광제원·관리서 등을 빌려 무릇 18곳에 연이어 군영을 삼아 주둔하였으며, 서문 밖의 민가 수백 채를 사들여 헐어서 마굿간으로 삼았다. 또한 5강한강 연안에 천막을 치고 잠자리를 만들었으며, 밥짓는 연기가 수백 리에 뻗쳤다. 남쪽으로부터는 왜군이 동래를 거쳐 대구로 나아가고, 남해를 거쳐 남원으로 나아갔으며, 군산을 거쳐 전주로 나아갔다. 그리고 서로西路에는 평양·삼화, 북로北路에는 원산·성진에서 서로의 거리를 수 백 리로 하여 차차 요동으로 항하여 나아갔다. 註1) 




1904년 2월 23일 체결된 한일의정서는 이와 같은 폭압적 공포분위기하에서 강요된 것이었다. 


일제는 한국에 대한 군사적 점령을 영구화하기 위해 3월 11일자로 한국임시파견대를 한국주차군으로 고치고 그 사령부를 서울에 두었다. 제12사단 병참부에 후비병을 보충하여 영구적으로 점령할 준비를 하면서 육군소장 원구겸제原口兼濟를 초대 한국주차군사령관에 임명하였다. 그리하여 원산 주둔의 보병 제37연대 제3대대와 제12사단 병참부 및 제47연대 제1대대를 이에 예속시키는 한편 제45연대의 일부를 부산에 파견하여 한국 전토를 점령하는 제반 조치를 마쳤다. 


한국을 강점한 일본군은 먼저 이른바 치안유지를 빙자하여 한국의 경찰권을 장악하였다. 1904년 7월부터 시행한 군사경찰제가 그것이다. 군사경찰제 시행은 일제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에 저항한 한국민을 탄압한 것이 그 계기가 되었다. 


주지하다시피 일제는 1904년 6월 6일에 일본공사 임권조가 대한식민지 경영안인 「대한시설강령」의 제6항과 「대한시설세목」 제7항의 방안을 실천하기 위하여 전 국토의 4분의 1이나 되는 전국의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하였다. 한국민은 일제의 이러한 황무지 개척권 요구로 인해 러일전쟁 개전 이래 억눌려 있던 반일감정이 극도로 자극을 받아 격렬한 반대투쟁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전 국민은 집회활동을 비롯하여 상소투쟁·언론투쟁을 통하여 일제의 침략만행을 규탄하면서 황무지 개척권 요구를 철회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7월 15일부터 서울에서 소집된 보안회保安會는 민중구국운동으로 발전하였다. 


한국민의 총체적 저항에 직면한 일제는 7월 21일 일본공사를 통해 한국 정부에 대해 “일본의 군사작전상 중요한 위치를 점한 한국의 치안을 유지”한다는 명목하에 일본군이 한국의 치안을 담당한다고 일방적으로 통고하였다. 이에 일제 헌병이 보안회를 탄압하여 해산시키고 한국민의 시위운동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1919년 3·1운동 때까지 한민족 반일투쟁 탄압의 선봉에 섰던 헌병경찰제의 시초였다. 


1904년 10월에는 전국 의병 탄압의 최고 원흉 가운데 하나가 되는 육군대장 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가 대한제국의 군사권을 일임할 것을 강요하는 요지로 된 일왕의 친서를 가지고 광무황제를 협박하면서 한국주차군사령관에 부임하였다. 註2) 


이후 그는 한국에서의 군사경찰권을 더욱 강화하는 8개 조의 군령을 공포하여 한국의 경찰권을 사실상 중지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다. 특히 러시아와의 접경지역인 함경도지방에서는 일본군대가 직접 군정을 실시하면서 주민들을 억압하고 항일투쟁을 탄압하였다. 이와 같은 일제의 군사경찰제는 러일전쟁이 종료되는 1905년 하반기 이후에도 헌병 배치망이 조밀해지면서 더욱 강화되어 갔다. 전국 각지에 배치된 일제 헌병은 한국주차군과 함께 전국의 의병전쟁을 탄압하는 데 동원된 일제의 양대 전력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일제는 또한 1904년 8월 22일 한일협정서韓日協定書라 부르는 제1차 한일협약을 체결하여 소위 고문정치를 자행하였다. 곧 일제는 이 협약에 근거하여 한국의 정치·외교 분야에 고문을 배치하여 재정·외교권을 박탈·제약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1904년 10월에는 재정고문으로 일본인 목하전종태랑目賀田種太郞이 부임하였고, 12월에는 외교고문으로 미국인 스티븐스D. W. Stevens가 임명되었다. 일제는 그밖에도 정부 각 부처에 일본인 고문관의 임용을 강요하여 궁내부·군부·경찰·학부에 각각 일본인 고문을 두게 되었다. 이로써 실질적 국권은 일본인의 손으로 넘어간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어 해외 주재 공사들은 소환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2. 을사조약의 늑결


중기의병은 일제의 을사조약 늑결에 반대하여 일어났다. 일제의 일방적 강요하에 진행된 을사조약은 실질적인 국망을 의미하는 이른바 망국조약의 속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이 조약으로 인해 한국민은 큰 충격을 받고 조약반대투쟁을 거국적으로 전개하였던 것이다. 중기의병은 조약 반대투쟁의 다양한 노선 가운데서도 가장 규모가 크고 세력이 강했던 국권회복투쟁이었다. 을사조약 늑결은 일제의 대한침략정책 추진과정에서나 한민족의 항일독립운동 전개과정에서 모두 이처럼 큰 비중을 차지하고 또 엄청난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병탄의 선행조건으로 한국을 ‘보호국화’하기 위한 일제의 외교공작은 포츠머드 강화회의를 전후하여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그 결과 1905년 7월 가츠라-태프트밀약에 의해 미국의 승인을 얻은 데 이어, 8월에 제2차 영일동맹의 체결로 영국으로부터도 지지를 받아냈다. 가츠라-태프트 밀약은 러일강화회의 개최 전인 7월 말에 일본을 방문했던 미국 육군장관 태프트W. H. Taft와 일본수상 계태랑桂太郞 사이에 이루어진 비밀협정으로, 7월 31일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가 추인한 것이다. 협정의 내용은, 일본은 필리핀에 대해 하등의 침략의도를 품지 않고 미국의 지배를 확인할 것, 동아시아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미국·영국·일본 3국은 실질적으로 동맹관계를 확보할 것, 러일전쟁의 원인이 된 한국은 일본이 이를 지배할 것 등을 승인한다는 것이었다. 이로써 일제는 한국에 대한 ‘보호권’ 확보를 위한 조약체결이나 나아가 그 이상의 주권침탈 행동도 취할 수 있다는 보장을 미국으로부터 받게 되었다. 그리고 제2차 영일동맹은 그 동안 영·일 양국간의 이견조정을 거쳐 3~4차례의 수정안을 낸 끝에 “일본은 한국에서 정치·군사·경제상의 탁월한 이익을 갖기 때문에 영국은 일본이 이 이익을 옹호 증진하기 위하여 정당하고 또한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지도·감리·보호의 조치를 한국에서 행할 권리를 승인”한다는 내용으로 8월 12일 조인되었다. 註3) 


일제는 한국 ‘보호국화’ 문제에 대해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승인을 받아낸 뒤 10월 27일 각료회의에서 구체적 실행방침을 수립하고 ‘을사조약’의 초안을 작성하는 등 제반 준비를 마무리하였다. 


본국과의 협의를 위해 일시 귀국해 있던 일본공사 임권조林權助는 11월 2일 서울에 돌아와 한국주차군사령관 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와 협력하며 이등박문伊藤博文이 도착하는 즉시 조약을 늑결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매국단체 일진회로 하여금 조약에 찬성하는 선언서를 사전에 발표하게 하여 여론을 선동·조작하는 한편, 매국적 이완용 등을 사전에 매수하여 조약에 찬성하도록 하였다. 또한 일본 현지에서 도착한 증원병을 서울 요로에, 특히 궁궐 내외에 배치하여 삼엄한 경계망을 폈다. 


조약 늑결을 총지휘할 이등박문은 11월 9일 서울에 들어왔다. 그는 다음날 광무황제를 알현하여 “짐이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대사를 특파하오니 대사의 지휘를 일종一從하여 조치”하라는 일왕을 친서를 전하고 황제를 위협하였다. 이등박문은 11월 15일 광무황제를 다시 알현하여 좌우를 모두 물리치게 한 뒤 사전에 준비한 조약의 원안을 제시하며 승인을 강박하였다. 


16일에는 일본공사 임권조가 외부대신 박제순을 일본공사관으로 불러 조약을 강요하였으며, 이등박문은 조약에 찬성하도록 원로대신 심상훈과 여러 대신들을 협박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을 비롯하여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은 조약에 적극적으로 찬성하지는 않으면서도 대세상 불가피한 것으로 여겼다고 한다. 


17일에는 덕수궁 수옥헌漱玉軒에서 조약 가부를 논의하기 위한 회의가 열렸다. 이때 장곡천호도가 거느리는 일본군이 완전무장을 한 채 궁궐 안팎을 겹겹이 포위하고 있었으며, 본회의장인 궁내에도 착검한 헌병 경찰들이 다수 포진해 있었다. 오후 3시에 시작되어 밤 8시까지 계속된 이 회의에서는 조약에 찬성하는 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에 임권조는 이등박문과 장곡천호도를 다시 불러들여 대신들을 강제로 재소집하여 회의를 재개토록 하여 이튿날 오전 12시 30분까지 대신들에게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조약의 체결을 강요하였다. 이처럼 살벌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마침내 을사5적의 찬성을 받아낸 이등박문과 임권조는 황제의 윤허도 받지 않고 스스로 외부인外部印을 탈취하여 조약문에 멋대로 조인하였다. 그러므로 을사조약은 일제가 폭압적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가운데 찬성을 강요했을 뿐만 아니라 최고통치권자인 광무황제의 승인과 서명, 그리고 국쇄의 날인을 받지 않은 명백한 불법조약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불법으로 체결된 을사조약의 전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한국 정부와 일본국 정부는 양 제국을 결합하는 이해 공통의 주의를 확고하게 함을 원하여 한국의 부강지실富强之實을 인정할 수 있게 될 때까지 이 목적을 위하여 아래 조관條款을 약정함. 


제1조 일본국 정부는 재동경 외무성을 경유하여 금후에 한국이 외국에 대하는 관계와 사무를 감리·지휘함이 가하고 일본국의 외교 대표자와 영사는 외국에 있는 한국의 신민과 이익을 보호함이 가함. 


제2조 일본국 정부는 한국과 타국간에 현존하는 조약의 실행을 완수하는 책임에 당하고 한국 정부는 금후에 일본국 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아니하고 국제적 성질을 갖는 하등의 조약이나 약속을 하지 않기로 상약相約함. 


제3조 일본국 정부는 그 대표자로 하여금 한국 황제폐하의 궐하闕下에 1인의 통감統監을 두되 통감은 전적으로 외교에 관한 사항을 감리함을 위하여 서울에 주재하고 친히 한국 황제폐하를 내알內謁하는 권리를 가짐. 일본국 정부는 또한 한국의 각 개항장과 기타 일본국 정부가 필요로 인정하는 곳에 이사관理事官을 두는 권리를 갖되 이사관은 통감의 지휘하에 종래 재한 일본영사에게 속하던 일체 직권을 집행하고 아울러 본 협약의 조관을 완전히 실행하기 위하여 필요로 하는 일체 사무를 관리함이 가함. 


제4조 일본국과 한국간에 현존하는 조약과 약속은 본 협약 조관에 저촉하는 것을 제외하고 모두 그 효력을 계속하는 것으로 함. 


제5조 일본국 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을 유지함을 보증함. 


위에 의거하여 하명下名을 각 본국정부에서 상당한 위임을 받아 본 협약에 기명 조인한다. 註4) 




을사조약 늑결시 참정대신 한규설과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은 끝까지 불가를 주장하였고, 나머지 학부대신 이완용을 비롯하여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 ‘5적’은 책임을 광무황제에게 미루면서도 찬의를 표하였다. 


을사조약의 늑결로 한국은 외교권을 빼앗기고 일본의 이른바 ‘보호국’으로 전락되고 말았다. 이로 인해 한국민은 격분하였으며, 중기의병으로 떨쳐 일어나 거족적 투쟁을 전개하게 되었다. 


3. 을사조약 반대투쟁의 전개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여기에 극력 반대한 인물은 광무황제였다. 그는 조약 체결 당일 밤에 이등박문의 알현 요청시 이를 거절하면서 ‘정부대신과 협의하라’고 그 결정을 대신들에게 전가한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註5) 그러나 이후 광무황제는 1907년 7월 강제로 양위할 때까지 을사조약의 불법성과 그 효력을 무효화시키기 위해 국제 외교무대에 특사를 파견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광무황제는 을사조약이 늑결된 지 며칠 후인 11월 26일 비밀리에 청나라의 지부芝罘를 경유하여 미국 워싱턴에 체재중인 헐버트H. B. Hulbert에게 “짐은 총칼의 위협과 강요 아래 최근 한일 양국간에 체결된 소위 보호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한다. 짐은 이에 동의한 적이 없고 금후에도 결코 아니 할 것이다. 이 뜻을 미국 정부에 전달하기 바란다.”라는 전문을 보내 을사조약의 불법성을 미국에 호소하고 그 무효를 주장하였다. 註6) 그러나 일본의 정책을 지지하고 있던 당시의 미국 정부가 이와 같은 호소에 응하여 한국을 지지해 줄 리는 만무한 실정이어서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광무황제의 이러한 을사조약 무효화 투쟁은 1907년 6월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세 특사를 파견함으로써 구국외교의 극점에 이르렀다. 


을사조약의 늑결 소식을 국내 각지로 신속히 전하면서 전국의 항일투쟁을 선도한 것은 신문이었다. 당시 언론기관은 일제의 엄격한 검열에 의해 통제당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반대의 선봉에 나서서 국민여론을 환기시켰다. 특히 『황성신문』은 주필 장지연張志淵이 조약 늑결의 전말을 상세히 보도하고,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유명한 논설을 실었다. 을사5적을 맹렬히 규탄하고 전 국민의 공분을 호소한 그 논설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註7) 




낭일曩日 이등후伊藤侯가 한국에 래來하매 우아인민愚我人民이 축축상위왈逐逐相謂曰 후侯는 평일 동양삼국의 정족안녕鼎足安寧을 자담주선自擔周旋하던 인人이라 금일 내한함이 필야必也 아국我國 독립을 공고히 부식扶植할 방략을 여고勵告하리라 하여 자항지경自港至京에 관민상하가 환영함을 불승不勝하였더니 천하사天下事가 난측자難測者ㅣ 다多하도다. 천만 몽외夢外에 5조건條件이 하何로 자自하여 제출提出하였는고. 차此 조건은 비단 아한我韓이라 동양삼국의 분열하는 조점兆漸을 양출釀出함인즉 등후藤侯의 원초原初 주의主意가 하何에 재在한고. 수연雖然이나 아我 대황제폐하의 강경하신 성의聖意로 거절함을 불이不已하셨으니 해약該約의 불성립함은 상상想像컨대 이등후伊藤侯의 자지자파自知自破한 바어늘 희噫 피돈견불약彼豚犬不若한 소위 아我 정부대신자가 영리營利를 희기希顗하고 가혁假嚇을 광겁恇劫하여 준순연逡巡然 곡속연觳觫然 매국의 적賊을 감작甘作하여 사천년 강토와 오백년 종사를 타인에게 봉헌奉獻하고 이천만 생령으로 타인의 노예를 구작敺作하니 피등 돈견불약豚犬不若한 외대外大 박제순朴齊純 급及 각 대신은 족히 심책深責할 것이 무하거니와 명위참정대신자名爲參政大臣者는 정부의 수규首揆라 단이부자但以否字로 색책塞責하여 요명要名의 자資를 도圖하였던가. 김청음金淸陰의 열서곡裂書哭도 불능不能하고 정동계鄭桐溪의 인할복刃割腹도 불능하고 언연偃然 생존하여 세상에 갱립更立하니 하何 면목面目으로 강경하신 황상폐하를 갱대更對하며 하 면목으로 이천만 동포를 갱대하리오. 오호嗚呼 통의痛矣며 오호 분의憤矣라. 아我 이천만 위인노예지동포爲人奴隸之同胞여 생호生乎아 사호死乎아. 단기檀箕 이래 사천년 국민정신이 일야지간一夜之間에 졸연猝然 멸망이지호滅亡而止乎아. 통재통재痛哉痛哉라 동포아 동포아. 註8)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황성신문』 1905년 11월 20일자)




장지연은 이 논설에서 을사조약의 망국적 성격을 언급하면서 무능하고 무책임한 매국대신들을 ‘개 돼지보다 못하다豚犬不若’고 맹렬히 논박하고, “통재통재라 동포아 동포아”라고 하여 절망적 탄식으로 글을 마침으로써 이 조약으로 인해 실질적 국망을 맞이한 현실을 개탄하였다. 


『황성신문』 외에도 『제국신문』·『대한매일신보』 등도 조약 늑결의 실상과 각지 반대여론을 상세히 보도하고 그 무효화를 주장함으로써 거국적 항쟁을 선도하였다. 특히 영국인 베델E. T. Bethell이 경영하던 『대한매일신보』는 광무황제가 러시아·미국·독일·프랑스 등 열강의 원수 앞으로 보낸 서한을 게재하여 을사조약을 결코 승인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공포하였다. 


을사조약에 반대한 항일투쟁은 충분忠憤한 전, 현직 관료들과 유생들이 주도하였고, 이들은 상소를 올려 조약 무효화와 5적 처단을 주창하고 나섰다. 그 가운데 중요한 조약 반대투쟁의 실상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조약 늑결을 막기 위해 서울에 모인 전국의 유생들은 대한십삼도유약소大韓十三道儒約所를 차려놓고 조약 늑결 전에 이미 일본공사 임권조와 이등박문에게 공함을 보내어 일제의 무신無信을 규탄하고 각성을 촉구해 왔다. 이들은 조약이 늑결되자 11월 21일 광무황제에게 상소를 올려 조약 파기를 주장하였고, 이어 24일에는 전 홍문관 시강 강원형姜遠馨과 함께 다시 상소를 올려 늑약의 철회를 강력히 촉구하는 투쟁을 벌였다. 이로 인해 강원형은 경무청에 구금되어 고초를 겪은 뒤 다음해 3월 18일 석방되었다. 註9) 


뒷날 헤이그사행시 정사正使가 된 이상설李相卨은 당시 조약 처리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소집된 대신회의를 총람하는 의정부참찬의 직위에 있었으나 일본군의 저지에 의해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상설은 궁성에서 풀려나온 한규설과 함께 통곡하였다고 한다. 이후 그는 직접 광무황제에게 상소를 올려 조약을 파기하고 5적을 처단할 것을 주장하였다. 조약에는 5대신만이 서명하였을 뿐 아직 황제의 인준절차를 밟지 않았기 때문에 황제가 이를 강력히 거부하면 무효화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광무황제에게 결사순국의 결단으로 조약에 반대할 것을 주문한 그의 상소는 다음과 같다. 




대저 약관이란 인준해도 나라는 망하고 인준을 하지 않아도 나라는 또한 망합니다. 이래도 망하고 저래도 망할 바에야 차라리 ‘사직을 위해 죽는다’殉社는 뜻을 결정하고 단연코 거부하여 역대 조종祖宗이 폐하에게 맡기신 무거운 임무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註10) 




요컨대 이상설은 황제가 조약을 거절하지 못할 입장이라면 차라리 자결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대한매일신보』에서는 이 상소를 두고 옛날부터 국가위기에 신하들의 간언이 있어 왔지만 군주에게 사직을 위해 목숨을 끊어 자결할 것을 간언한 신하는 오직 이상설 뿐이라고 평하였다. 註11) 이를 전후하여 그는 다섯 차례에 걸쳐 사직상소를 올리며 일제에 항거하였으며, 마침내 12월 8일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또한 민영환이 11월 30일 조약에 항거하여 자결 순국하였을 때에도 종로 거리로 달려나와 모여든 군중 앞에서 통곡하며 말하였다. 




나도 국가에 충성치 못하여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으니 만번 죽어 마땅하다. 지금의 이 조약은 지난날의 병혁兵革과는 다른 것이다. 나라가 망했는데도 백성이 깨닫지 못하니 통곡하지 않을 수 없다. 조약이 한번 이루어짐에 나라는 망하고 인종이 이를 따라 멸종하게 될 것이다. 이제 민영환이 자결한 오늘이 우리 국민이 멸망하는 날이다. 내가 민영환 한 사람의 죽음을 위해 조상弔喪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전 국민이 멸망함을 탄식하여 우는 것이다. 註12) 




이와 같이 비분강개한 연설을 마친 이상설은 울분을 못이겨 땅에 뒹굴면서 머리를 땅바닥에 부딪쳐 자결을 시도하였다. 이때 시민들은 유혈이 낭자한 모습으로 인사불성이 된 이상설의 곁에 모여들었고, 그가 민영환을 따라 순국하였다는 흉흉한 소문이 온 도성에 퍼져 흥분과 통탄의 도가니를 이루었다. 


법부주사 안병찬安秉瓚은 11월 24일 광무황제에게 5적 처단을 요구하는 상주문을 바친 뒤 도끼를 메고 대안문大安門, 현 大漢門 앞에 엎드려 비지批旨를 기다렸다. 우비優批를 받을 경우 5적의 목을 찍으리라 다짐하고 있었지만, 도리어 경무청에 구금되고 말았다. 註13) 


경기도 가평 향리에 퇴거해 있던 원로대신 조병세趙秉世는 늑약의 변을 듣고 통곡하며 말하기를 “나라가 이미 망하였으니 내 세신世臣으로 따라 죽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고 신병을 무릅쓰고 상경하여 백관을 거느리고 5적 처단과 조약 파기를 주장하는 충절의 상소를 수차에 걸쳐 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실효를 거두지 못하게 되자, 그는 강경한 유서를 남기고 12월 1일 아편을 복용하여 자결 순국하였다. 


시종무관장 민영환閔泳煥은 조병세의 뒤를 이어 백관을 이끌고 궁내부에 들어가 조약 폐기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때 황제가 퇴거를 명하자 민영환은 “죽더라도 감히 복명할 수 없다”하고 물러서지 않았다.




조병세의 묘 (경기도 시흥시 조남동)

 



 그는 이어 황제에게 “신등이 주청한 바를 따른다면 강토를 회복하고 종사도 또한 평안해질 것이니, 만약 신등의 말이 효험이 없으면 머리를 베어 천하에 알리십시오”라고 조약 파기를 끝까지 강청하였다. 이와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국에 아무런 변화가 없게 되자, 11월 30일 새벽에 자결 순국하여 충절의 기백을 만천하에 떨쳤다. 당시 급보를 받고 달려간 시종무관 어담魚潭은 자신이 목도한 민영환의 자결순국 광경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오전 5시경에 급사로부터 작야昨夜 민씨가 자살하였다는 말을 듣고 놀라 민씨저閔氏邸로 뛰어갔다. 민씨저가 의외로 조용하기로 집 사람에게 물은즉 괴정동槐井洞의 집사 집이라 하기로 또 그리로 뛰어가다가 중도에서 가인家人들과 친척들에게 떠받들리어 본저本邸로 돌아오는 민씨의 유해를 실은 교자轎子를 만나게 되어 따라 들어갔다. 곧 교자에서 이불에 쌓인 유해를 모셔내어 침실로 옮겼다. 언뜻 얼굴을 보니 옆으로 2촌 정도의 구멍이 난 목줄기로부터 아직까지 피가 흐르고 있었고 원망하는 듯 노한 듯 부릅뜨고 있는 양쪽 눈은 처절하고도 가여웠다. 다음 오른손에 꽉 쥐고 있는 소도小刀를 풀어내고 의복을 벗기니 일자一字로 할복하고 있었다. 소도를 만져보니 손톱깎기에 쓰는 퍽 작은 칼로 깊이 찌를 수 없었기에 다시 상처 위에 좌로 우로 몇 번이나 칼질한 것 같았다. 그 증거로는 의복의 양 무릎에 좌우 손을 닦은 듯한 혈흔이 부착하여 있는데 생피가 찐덕찐덕하여 소도를 쓰기 어렵게 되자 좌우 손으로 칼을 바꿔 쥐어가며 한 손의 피를 무릎에 닦은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같이 하고도 목적을 이루지 못하자 인후를 옆으로 끊어재친 것이 아닌가? 참으로 장절壯絶한 죽엄이었다. 




이 기록을 통해서 보더라도 민영환의 순국이 얼마나 처절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어담이 ‘장절한 죽엄’이라고 표현한 민영환의 순국 광경은 그가 작은 칼로 수차 복부를 찔렀지만 미처 절명되지 않자 마침내 인후를 끊어 순절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해과정에서 유혈이 손을 적시게 되자, 무릎에 피를 닦아내며 좌우 손을 번갈아가면서 칼을 쥐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처절한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 을사조약이었던 만큼, 이 조약이 한민족에게 던진 충격은 실로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이때 민영환이 국민들에게 남긴 유서는 또한 다음과 같이 장절한 것 이었다. 




민영환과 그가 남긴 유서

 



오호라, 나라의 수치와 백성의 욕됨이 여기에까지 이르렀으니,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경쟁 중에 소멸될 것이다. 대저 살려고 하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죽을 것을 기약하면 살게 되는 것이니 여러분은 어찌 이를 모르겠는가. 영환은 그저 한번 죽는 것으로 황은에 보답하고 우리 이천만 동포형제에게 사례한다. 영환은 죽어도 죽지 않고 여러분을 지하에서 도울 것이다. 바라건대 우리 동포들은 천만배나 더 분투노력하며, 뜻과 기개를 굳건히 하고 학문을 힘쓰며 마음먹고 노력하여 우리의 자유독립을 회복한다면, 죽어서도 지하에서 웃을 것이다. 오호라, 조금도 실망하지 말지어다. 우리 이천만 동포에게 고결告訣합니다. 註14) 




그 뒤를 이어 전 참판 이명재李命宰, 학부주사 이상철李相哲·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등이 잇달아 순국하는 등 죽음으로써 조약의 부당성에 항의하는 자결항쟁이 계속되었다. 


조약 파기와 매국적 처단을 요구하는 지사들의 항쟁은 계속 이어졌다. 조야에 중망이 높던 면암 최익현을 비롯하여 면우 곽종석, 간재 전우, 한계 이승희 등 당대의 거유들이 연일 상소를 올리며 항거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최익현의 상소는 매우 강경하였고, 그는 1906년 봄에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를 올리며 노구를 이끌며 구국을 위한 거의擧義 항쟁에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상소항쟁과 순국투쟁 뿐만 아니라, 일제와 결탁해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는 데 찬동, 협조한 을사5적 등 매국관료를 성토·처단하려던 의열 투쟁도 연이어 일어났다. 


특히 전남 장성 출신의 기산도奇山度, 1878~1928가 그러한 의열투쟁에 앞장섰다. 그는 전남 장성 출신으로서, 호남창의회맹소 대장 기삼연奇參衍이 그의 작은할아버지였고, 지리산 연곡사전투에서 순국한 고광순高光珣 의병장은 그의 장인이었다. 을사조약 늑결 직후부터 매국적 처단 의거를 계획해 오던 기산도는 1906년 2월 16일 야밤에 이근철李根哲·이범석李範錫 등 동지들과 함께 을사5적 가운데 가장 원성이 높던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을 습격, 머리·어깨 등 10여 군데를 난자해 중상을 입혔다. 註15) 이 거사로 인해 도성내의 친일 매국적들은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전율하게 되었으며, 이완용 등 5적들은 밤에도 불을 켜놓고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불안에 떨었다고 한다. 을사5적 처단의거는 기산도에 뒤이어 나인영羅寅永과 오기호吳基鎬 등에 의해서도 계속적으로 전개되었다. 


이와 같이 전국의 민심이 을사조약 늑결을 계기로 격분하여 항일 적개심으로 끓어오르고, 더욱이 국망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재기하여 항일전을 전개해 나가게 되었다. 동시대에 연해주와 북간도 일대에서 활동한 저명한 학자였던 계봉우桂奉瑀가 ‘뒤바보’라는 필명으로 『독립신문』에 발표한 「의병전義兵傳」에서는 을사조약 늑결에 항거하여 자결순국하거나 의병을 일으켜 결사항전하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5조약이 되었다는 소식이 일시에 파문播聞되매 비분강개 곡읍열광哭泣熱狂 온갓 모양의 대대적 반항운동이 기起하였다. 그러자 민영환 조병세 홍만식 등 세신世臣은 차제로 자살순국하였다. 그렇게 생명을 희생할 터이면 차라리 포수인치抱羞忍恥하고 와신상담의 참담 경영을 하다가 설령 아기날도 장군의 말로가 된다든 




지 그렇지 않으면 적인敵人의 검하혼劍下魂이 되더라도 그네 자심自心에도 여한이 무無하고 수隨하여 우리 후인된 자도 만금滿衿의 누淚를 그다지 읍하泣下치 아니런만 그 결심이 차에 재在치 못함은 어쩜이뇨. 역사상 유물인 방면으로 보면 그럴 듯도 하고 또 매국노신배賣國奴臣輩에 대충對衝하여 보든지 육대반낭적肉袋飯囊的 생애로 구차 투쟁偸生한 그들과 비교하여 보든지 하면 운니雲泥의 판별이 있고 누구나 영광스러운 죽음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같은 인민으로 같은 시대 같은 경우에 처하여 어떤 이는 이렇게 죽고 어떤 이는 저렇게 죽는 것은 사생관이 제각금 수이殊異하고 그를 따라 본무本務다 하는 방면에 저절로 분기점이 생김은 사실이었다. 이때 거의한 그네들은 생生하여서는 의인義人이 되고 사死하여서는 의귀義鬼가 되라라는 그 결심 또는 ‘생시구생생차욕生是苟生生且辱 사어당사사위영死於當死死爲榮’이라는 주지主旨로써 당당한 의기義旗를 거擧한 것이었다. 註16) 현대어 윤문-필자 




계봉우는 위의 인용문에서 자결순국이나 거의항전 등 두 가지 방안을 모두 의리에 합치하는 ‘영광스러운 죽음’이라고 인정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생死生이 모두 의리를 따르고, 나아가 구차스러운 삶보다 영광스런 죽음을 지향했던 거의항전 방안이 단순한 자결순국보다 더 큰 의미가 있다고 보았다. 




[註 1] 黃玹, 『梅泉野錄』, 국사편찬위원회, 1955, 301쪽. ☞

[註 2]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말의병자료』 Ⅲ, 2002, 53~54쪽. ☞

[註 3] 윤병석, 「을사5조약의 신고찰」, 『국사관논총』 23, 국사편찬위원회, 1991, 34쪽. ☞

[註 4] 『관보』 1905년 12월 16일자. ☞

[註 5] 『대한매일신보』 1905년 11월 20일자. ☞

[註 6] 『대한매일신보』 1905년 11월 27일자, 호외. ☞

[註 7] 『황성신문』 1905년 11월 20일자. ☞

[註 8] 『황성신문』 1905년 11월 20일자. 난해한 원문을 현대문으로 옮기면 다음과같다. 

“지난번 이등 후작이 내한했을 때에 어리석은 우리 인민들은 서로 말하기를 "후작은 평소 동양 삼국의 鼎足安寧을 주선하겠노라 자처하던 사람인지라 오늘 내한함이 필경은 우리나라의 독립을 공고히 부식케 할 방책을 권고키 위한 것이리라"하여 인천항에서 서울에 이르기까지 관민상하가 환영하여 마지 않았다. 그러나 천하일 가운데 예측키 어려운 일도 많도다. 천만 꿈밖에 5조약이 어찌하여 제출되었는가. 이 조약은 비단 우리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삼국이 분열을 빚어낼 조짐인즉 그렇다면 이등후작의 본뜻이 어디에 있었던가? 그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대황제폐하의 聖意가 강경하여 거절하기를 마다 하지 않았으니 조약이 성립되지 않은 것인 줄 이등후작 스스로도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슬프도다. 저 개돼지만도 못한 소위 우리 정부의 대신이란 자들은 자기 일신의 영달과 이익이나 바라면서 위협에 겁먹어 머뭇대거나 벌벌 떨며 나라를 팔아먹는 도적이 되기를 감수했던 것이다. 아 4천년의 강토와 5백년의 사직을 남에게 들어 바치고 2천만 生靈들로 하여금 남의 노예가 되게 하였으니 저 개 돼지보다 못한 외무대신 박제순과 각 대신들이야 깊이 꾸짖을 것도 없다. 하지만 명색이 參政大臣이란 자는 정부의 수석임에도 단지 否子로써 책임을 면하여 이름거리나 장만하려 했더란 말이냐. 金淸陰처럼 통곡하며 문서를 찢지도 못했고, 鄭桐溪처럼 배를 가르지도 못해 그저 살아남고자 했으니 그 무슨 면목으로 강경하신 황제폐하를 뵈올 것이며 그 무슨 면목으로 2천만 동포와 얼굴을 맞댈 것인가. 아 원통하며 아 분하도다. 남의 노예가 된 우리 2천만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군 기자 이래 4천년 국민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홀연 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 ☞

[註 9]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1, 1965, 95~97쪽. ☞

[註 10] 윤병석, 『이상설전』, 일조각, 1984, 39쪽에서 재인용. ☞

[註 11] 『대한매일신보』 1905년 11월 24일 「讀李參贊疏」. ☞

[註 12] 『대한매일신보』 1905년 12월 1일자 ; 윤병석, 『이상설전』, 45쪽에서 재인용. ☞

[註 13]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1, 98쪽. ☞

[註 14] 황현, 『매천야록』, 356쪽; 『대한매일신보』 1905년 12월 1일자. 후자에는 유서 원문에 현토를 달아 놓았으며, 양자간에는 몇 군데 자구의 출입이 있다. 『매천야록』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嗚呼 國恥民辱 乃至於此 我人民 行將殄滅於生存競爭之中矣 夫要生者必死 期死者得生 諸公豈不諒只 泳煥徒以一死 仰報皇恩 以謝我二于萬同胞兄弟 泳煥死而不死 期助諸君於九泉之下 幸我同胞 千萬倍加奮勵堅乃志氣 勉其學問 結心戮力 以復我自由獨立 則死者當含笑於冥冥之中矣 嗚呼 少勿失望 訣告我二千萬同胞” ☞

[註 15] 김상기, 「기산도의 항일의열투쟁」, 『백범과 민족운동연구』 4, 2006. ☞

[註 16] 『독립신문』 1920년 5월 1일자. ☞



2. 중기의병 개황


1. 전기의병 해산 이후 의병 동향


1894년 청일전쟁 이후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였던 전기의병은 아관파천 직후인 1896년 봄에 그 세력이 급격히 위축되었고, 그해 가을에 이르러 활동이 거의 종료되었다. 국왕이 조칙을 내려 해산을 명하게 되자, 여기에 항거할 명분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관군이 각지로 파견되어 의진을 압박한 까닭에 더 이상 활동이 불가능해졌던 것이다. 


중기의병은 1904년부터 1907년 전반기에 걸쳐 일어나 활동한 의병을 가리킨다. 곧 이 의병은 일제의 침략전쟁인 러일전쟁을 시대적 배경으로 한일의정서 및 한일협약 등의 국권침탈 과정을 거치면서 일제의 침략정책이 강화되자 이를 계기로 활동이 시작되었고, 1905년 11월 을사조약 늑결을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본격적으로 일어났다. 이처럼 재기한 중기의병은 헤이그특사의거를 기화로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되는 1907년 7~8월간의 광무황제 강제퇴위와 대한제국군대 강제해산을 계기로 격화·고조되던 후기의병으로 계기적으로 연속되었다. 


전기의병에 참가하였던 의병들은 1896년 의진 해산 이후 개인적 입장과 처지, 그리고 신분과 성향에 따라 다양한 노선을 걸었다. 의병장 혹은 핵심참모의 경우에는 원용팔元容八·정운경鄭雲慶·이강년李康秊·노응규盧應奎·유시연柳時淵·안병찬安炳瓚·김도현金道鉉 등의 경우와 같이 중기의병으로 재기하거나 김도화金道和·김복한金福漢 등의 경우와 같이 은거하거나, 이상룡李相龍·구연영具然英의 경우에서 보듯이 일부는 계몽운동자로 변신하거나, 또 허위許蔿·민용호閔龍鎬 등의 예에서 보이듯이 관직으로 진출하는 등 그 동향이 비교적 다양하였다. 한편 전기의병에 일반 병사부로 참가하였던 농민층의 경우에는 해산 이후 1897~1904년간에 펼쳐진 농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영학당英學黨·남학당南學黨·초적草賊·화적火賊·활빈당活貧黨·동학당東學黨 등의 이름을 걸고 항쟁한 경우가 그 대표적 사례이다. 註17) 이와 같은 다양한 노선 가운데 중기의병을 이끈 선도 의병들은 대개가 전기의병 참여자들이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중기의병이 일어나 활동하게 되는 시기는 1904년 2월 러일전쟁 발발 이후부터이다. 이때부터 『황성신문』이나 『대한매일신보』 등의 신문에 의병의 활동기사가 산견되고 있다. 그리고 러일전쟁 후반기에 들어가면 ‘토왜討倭’를 목적으로 하는 의병활동이 점점 현저하게 늘어갔다. 1905년 4월 『매천야록』에서 “경기·강원·충청도 및 경북 일대에 의병이 일어났는데 모두 토왜로써 말하였다”라고 한 대목도 이러한 경향을 보여주는 증좌가 된다. 또한 강원·충북·경북지방에서 의병활동이 활발하였고, 이 지역의 중심지인 충주가 위협을 받았을 정도였다. 그 세력은 일본공사관측의 추정에 따르더라도 의병수가 죽산 2백 명, 단양 2백 70명, 청풍 1백명, 영춘 50명 규모였다. 註18) 


〈표 1〉 1905년간의 의병기사
장소 내용 보도일자
죽산, 충주50명 가량의 의병이 각리各里에서 전곡을 확보함『황성신문』5. 10.
괴산·진천·청안의병 1천명이 일어나 충주에 군대를 주둔시킴5. 15.
죽산·안성·음죽·양지의병이 각촌의 전곡을 수집함5. 16.
진천박재만朴載萬 등 70명의 의병이 읍내에 침입함5. 19.
청산의병이라 칭하는 ‘비류匪類 2백명이 주민들로부터 재물을 취함5. 22.
청안·제천의병 150명이 기마 조총으로 무장, 재물을 취함5. 24.
경기·충북각처에 ‘비류’ 의병이 창궐하므로 청주·수원진위대 파병5. 27.
충주·청주‘의비義匪’ 3백명과 접전5. 29.
죽산의병 20명이 일본 헌병대 소속 순검과 교전5. 29.
서울일진회장 윤시병尹始炳이 군부에 보낸 의병 탄압 공한5. 29.
광주廣州 의병 2백명이 부민의 재물과 총기를 탈거奪去 6. 6.
보은의병 2백명이 총기 40정과 군자금 기백냥 수집6. 8.
양근총기를 소지한 의병 45명이 일진회 공격6. 14.
지평의병이 단발자 한 명과 일진회원 9명을 포살군수 파면 6. 15,19,20.
홍천의병 4명이 일진회원을 잡아서 구타함7. 12.
원주원용팔 의병이 각국 공관에 성명서 발송『대한매일신보』8. 24.
영춘포군 30명, 종사 수십명의 의병이 포군을 모병함9. 8.
단양원용팔의 의병 격문이 단양 북면 향약소에 도착함9. 8.
충북의병의 전곡과 총검 수집 성행9. 10.
영월원주진위대에서 의병 탄압9. 13.
정선원주진위대와 일진회가 원용팔 의병 2백명을 탄압9. 20.
홍천서석면과 동면 일대에 의병 2백명 주둔9. 29.
강릉영월·정선·평창에 의병 수백명이 활동중9. 29.
영월원용팔 피체 후 잔여의병 40명이 전곡을 수집중10. 2.
영춘의병장 정운경 피체10. 18.
충청·경상의병은 동학당처럼 주문을 외움10. 18.
광희문의병 6명이 일제 헌병에 피체10. 26.
청산의병의 무리가 도처에서 결집 중임10. 27.
풍기의병 2백명이 원주진위대와 교전10. 28.
단양의병 창궐로 진위대 파병 요구10. 29.
보은의병 30~40명이 화양동 주둔10. 31.
청풍의병 50명 출현10. 31.
회인의병 40명이 이청吏廳에 유숙10. 31.
보은김동주金東周 의병 50명과 교전속리산 승군도 관군에 가세 11. 7.
영천의병 3백명이 오록동梧麓洞반가班家를 습격9월 14일 11. 11.
영천의병 150명이 읍내에 들어와 석반夕飯과 군수전 2천냥 수거함.11. 11.
영천의병 22명 내습9월 18일 11. 11.
봉화의병 4~5백명 내습11. 11.
연풍의병 2백명이 원주진위대와 교전11. 26.
조동걸, 『한국민족주의의 성립과 독립운동사연구』, 42~43쪽.

구체적으로 보면, 당시 발간되던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등의 신문에는 1905년 중에서도 5월부터 11월까지 7개월 동안에 화적·적당賊黨·민요民擾·비도匪徒·의병 등의 이름으로 나오는 의병 관련기사가 200여 건이나 실려 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의병으로 명시되어 있는 것이 다음과 같이 40여 건에 이른다. 註19) 


결국 중기의병은 전기의병 해체 이후 1904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한일의정서 등 일련의 침략정책이 강제로 시행되는 과정에서 여기에 반발하는 투쟁의 한 형태로 일어난 것이다. 이러한 의병 재기의 배경에는 위에서 언급한 여러 형태의 농민운동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주천과 단양 일대에서 일어난 원용팔과 정운경 의병을 제외하고는 을사조약 늑결 이전 단계에서 일어난 여러 의병에 대해서는 현재 명확하게 그 실체가 파악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때까지 일어난 의병은 지역이 일부에 국한되어 있고 매우 분산적이어서 그다지 두드러진 주목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중기의병이 폭넓은 지지기반 위에서 전국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1905년 11월 을사조약 늑결 이후의 일이었다. 



2. 전국 의병 개황

1) 중부지방

1905년 8월 강원도 원주에서 일어난 원용팔 의병은 그 동안 중기의병의 선구로 평가되어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 의병은 단양·영월·정선·홍천 일대를 전전하면서 상당한 세력을 규합하였으나 원주진위대에 의해 강제로 해산당하고 말았다. 중기의병 시기에 영동지방에서 일어난 대표적인 의병이었던 이 의진은 을사조약 늑결 이후 의병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데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원용팔 의병 해산 직후 이 의병과 관련되어 단양에서는 전기의병 때의 동지로 그 동안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던 정운경이 다시 거의擧義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충청남도 홍성에서는 1906년 봄에 전 참판 민종식을 주장으로 삼고 의병이 일어났다. 김복한과 안병찬 등을 주축으로 일어난 전기의병의 전통을 이어 을사조약 늑결 이후 항일의병이 재기하였던 것이다. 홍주의병은 중기의병을 상징할 만큼 규모도 컸고 또 전투도 격렬하였다. 

홍주의병은 충남 내포지역의 항일세력이 결집된 대규모 집단을 형성하고 있었다. 청양과 홍주를 중심으로 예산·부여·남포·보령 등지의 항일세력이 대거 결집된 형태였고, 청일전쟁 후 퇴거해 있던 전 참판 민종식이 이들의 주장이 되었다. 5월 19일 홍주성을 점령한 뒤 5월 31일 성이 실함될 때까지 홍주의병은 왕성한 기세를 과시하며 일제 군경의 공세를 훌륭히 차단해냈다. 

일제는 한국주차군이라 부르던 자국 군대를 동원해 홍주의병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1906년 5월 31일에 벌어진 홍주성 공방전은 중기의병 시기의 항일전 가운데 가장 격렬하게 전개된 전투로, 의병 탄압에 일본군대가 최초로 투입된 전투이기도 하였다. 홍주성 실함 후 일제는 남규진·유준근·이식 등 중심인물 9명을 대마도로 끌고가 유폐시켰다. 

한편 홍주의병은 거의 과정에서부터 해산 후 재기를 모색하는 단계에 이르기까지 내포지방의 유력인물이었던 수당 이남규가 시종일관 깊숙이 관계하고 있었다. 이남규는 1900년 비서원승을 끝으로 퇴관한 뒤 향리인 예산에서 지내고 있던, 조야의 중망을 받던 우국지사였다. 그는 홍주의병이 결성되는 과정에서 핵심인물들인 안병찬과 이설 등을 후원하였으며 의병장 민종식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특히 홍주의병이 패산한 뒤 잔여세력이 각지로 흩어져 재기항쟁을 모색할 때 구심체 역할을 수행한 인물이 바로 이남규였다. 그 다음해인 1907년 9월 일제 군경이 이남규 부자를 무참히 살해한 것은 이와 같은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기의병 시기에 호서지방에서 일어난 또 다른 의병으로 노응규가 주도한 황간의병이 있다. 노응규는 전기의병 때 진주의병의 주장으로 활약했던 전력을 갖고 있다. 그는 영남의 창녕과 거창, 호남의 광주 등지에서 지사를 모아, 중기의병 단계에서 다소 늦은 시기인 1907년 1월에 경상·충청·전라 3도의 접경지대인 충북 황간에서 항일의 기치를 올렸다. 황간의병은 경부선 연도의 영동·청산·옥천·보은 등지를 활동무대로 삼고 일제의 침략 시설물 및 경부선 역사와 철로를 주요 공격대상으로 설정했지만, 노응규를 비롯해 서은구·엄해윤·노승용 등 핵심인물들이 곧 체포됨으로써 활동이 종료되고 말았다. 

충북지방에서는 중기의병 기간에 다소 늦은 시기인 1907년 5월에 이강년이 의병을 일으켰다. 전기의병 당시 유인석의 제천의병 유격장을 지냈던 이강년은 고향 문경을 떠나 그 동안 항일세력의 기반을 구축해온 제천에서 안성해·백남규 등의 동지들과 함께 의병을 규합, 항일전의 기치를 들었던 것이다. 거의 직후 이강년 의병은 영춘 용소동龍沼洞에서 일제 헌병·경찰들의 기습공격을 받고 격전을 벌였다. 하지만 의병들은 이 전투에서 크게 패산하게 되었고, 이강년 자신은 중상을 입어 영춘·청풍 등지를 전전하면서 한동안 부상을 치료하였다. 이강년 의병은 얼마 뒤 8월에 원주진위대 강제해산 때 해산군인들이 합류해 오고 또 다량의 무기를 확보하게 됨으로써 전열을 새롭게 가다듬고 항일전을 재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의진은 민긍호 의병, 홍범도 의병과 함께 전국 각지의 단위의병 중에서 전력이 가장 뛰어나고 또 활약이 가장 두드러졌던 대표적인 의병부대가 되었다. 

2) 호남지방

호남지방의 중기의병은 태인에서 일어난 최익현 의병을 필두로 능주綾州의 쌍산의소雙山義所, 담양의 고광순 의병, 광양의 백낙구 의병, 남원의 양한규 의병 등이 전후하여 일어났다. 

최익현이 주도한 태인의병은 민종식의 홍주의병과 더불어 중기의병을 대표하는 의진이다. 의병장 최익현은 화서 이항로의 문하에서 위정척사衛正斥邪·존화양이尊華攘夷를 체인體認한 인물로, 그 동안 대원군을 탄핵하는 과정에서, 나아가 1876년 개항 논의가 분분할 때 개항불가 상소를 올려 이에 극력 반대하면서 역사의 전면에 선명하게 부각되었으며, 이후 조야의 중망이 두터웠던 인물이다. 그는 을사조약이 늑결된 직후에 5적 처단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이를 계기로 의병을 일으켜 국권회복을 도모할 것을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최익현은 1906년 12월 말에 논산군 노성의 궐리사闕里祠에서 개최한 집회에서 처음으로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구상하였다. 이때 그는 강회에 참석한 수백 명의 유생들과 함께 구국투쟁에 매진할 것을 결의한 ‘약문約文’을 만들고 친일세력 처단, 연명 상소투쟁 등 7개 항을 결의하였다. 



이와 같이 항일 무력전을 결행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 가운데서도 최익현은 상소와 격문·기서寄書 등을 통해 부단하게 의병투쟁의 정당성과 국권회복의 대의를 천명하였다. 특히 통감부를 통해 일본정부에 보내는 「기일본정부서寄日本政府書」에서 도덕성을 상실한 일제의 야만성을 지적하면서 그 동안 일제가 자행한 죄상을 모두 16개 조목으로 나누어 낱낱이 열거하였다. 

최익현은 전 낙안군수 임병찬의 충실한 조력을 받아 1906년 6월 4일 전북 태인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문인사우들을 주축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이때 그는 74세의 고령이었다. 최익현 의병은 태인과 정읍을 지나 순창에 이르기까지 주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저항없이 행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순창을 거점으로 삼고 남원 방면으로 진출하기 위해 한때 곡성으로 나아가기도 하였지만, 예상외로 저항이 심해 순창으로 회군하고 말았다. 

최익현 의병은 6월 11일 전주와 남원에서 출동한 진위대의 공격을 받고 최익현과 임병찬을 비롯하여 최후까지 남아 있던 13명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옥고를 치루었고, 그 가운데 최익현과 임병찬은 대마도로 끌려가 유폐되는 고초를 겪었다. 

최익현 의병은 홍주의병과 특히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청양군 정산이라는 한정된 지역 내에 항일의 두 거두인 최익현과 민종식이 함께 거주하고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양자의 긴밀한 관계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민종식은 호서 내포지방의 항일세력을 규합하여 홍주의병을 결성하였으며, 이 의병과 긴밀한 연계를 갖고 있던 최익현은 호남지방의 항일세력을 규합하여 태인의병을 결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최익현은 호남의 항일세력을 규합하는 과정에서는 이 지방의 유력인사들인 기우만·고광순 등과도 연계를 시도하였다. 민종식 의병이 점거하고 있던 홍주성이 일본군의 공격으로 함락되기 하루 전인 5월 30일 담양의 용추사龍湫寺에서 최익현이 기우만을 비롯해 호남 각지의 명유名儒 50여 명과 회동한 것은 이들의 지원과 협조를 기대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토대 위에서 최익현은 나아가 영남지방의 항일세력까지 의병으로 규합, 상호 연계하에 연합작전을 구사하여 항일전을 전개하려던 구상을 갖고 있었다. 조재학과 이양호 등의 문인을 이때 영남지방으로 파견했던 것도 이러한 전략을 구현하려는 의도에서였다. 결국 최익현의 항일전 구상은 삼남지방의 항일세력이 일시에 함께 일어나 전력을 극대화하고 성세를 떨쳐 일제를 압박·구축한다는 것이었다. 실현 가능성이 희박했던 이러한 계획은 곧 극도로 고단했던 당시 형세의 소산이었다. 

최익현의 태인의병 활동 이후 호남 각지에서는 이 의병과 연계되었거나 혹은 그 영향을 받아 많은 의병이 일어났다. 능주의 쌍산의소는 태인의병에 큰 영향을 받았던 양회일 의병장 주도하에 1906년 10월에 일어난 의진이다. 능주의 명문 출신이었던 양회일은 호남의 저명한 지사들인 고광순·기삼연을 비롯하여 남원의 양한규 의병장 등과 연합전선을 구축하여 항일전을 공동으로 전개할 계획을 세웠다. 양회일이 핵심참모 양열묵을 각지로 파견한 것은 이들 세력과 항일전을 공동으로 추진할 계획을 수립하기 위해서였다. 뿐만 아니라 쌍산의소에는 양회일이 중심이 되어 능주·화순 일대뿐만 아니라 남원·보성·정읍 등지의 항일지사들까지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쌍산의소는 화순을 중심으로 호남지방 각지의 항일세력이 유기적 관계를 설정하면서 공동작전을 모색하는 가운데 활동을 개시하였지만, 각지 의병세력이 상호 연계하에 활동하기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쌍산의소가 실제로 활동을 개시한 것은 1907년 4월 무렵이었다. 이 의병은 화순과 능주를 연이어 점거한 뒤 광주를 공략하기 위해 이동하던 중 일제 군경의 공격을 받아 의병장 양회일을 비롯하여 중군장 임창모 등 핵심인물들이 체포됨으로써 와해되고 말았다. 

담양군 창평의 고광순도 중기의병 시기 호남의병을 주도했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임진왜란 때 순국한 출중한 의병장이었던 고경명·고종후·고인후 세 부자의 명문가 출신이었던 그는 절의정신에 투철한 지사였다. 전기의병 당시에도 기삼연·기우만 등과 연계하여 의병투쟁에 참여하였고, 한때 최익현의 태인의병에도 가담하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고광순은 1906년 11월 광양의 백낙구, 장성의 기우만 등과 구례의 중대사中大寺에서 거의하려던 계획이 실패한 뒤, 1907년 1월 고향인 담양의 창평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거의 직후 양한규의 남원의병과 합류하기 위해 출동하였으나, 이미 남원의병이 와해된 뒤였다. 이에 고광순 의병은 창평·능주·동복 등지를 활동무대로 삼았으며, 4월 하순에는 화순을 점거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동복으로 진군한 의진은 광주에서 파견된 관군과 도마치圖馬峙에서 교전한 끝에 패산하고 말았다. 

그뒤 고광순은 지리산을 근거지로 해산병들을 모아 대부대를 형성하고 유격전을 펼치던 중 1907년 10월 일제 군경과 연곡사鷰谷寺에서 격전을 벌였지만, 패산 순국하고 말았다. 

태인의병의 영향으로 전남 광양에 은거중이던 백낙구도 1906년 가을 의병을 일으켰다. 백낙구는 실명한 상태였으나 을사조약 늑결에 분격하여 지사들과 함께 거의를 도모하였다. 특히 그는 광양으로 이동해온 경남 진주의 실직 향리들을 규합한 것이 특징이다. 백낙구는 고광순·기우만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기로 하고 1906년 11월 2백 명을 거느리고 미리 상약된 날짜에 집결장소인 중대사에 도착하였지만, 서로간에 기별된 날짜가 달라 다른 의병은 합류하지 못했다. 이에 백낙구는 순천 대신에 구례를 공략하기로 하고 잠입하던 중 종사 6명과 함께 체포됨으로써, 결국 거의 직후에 의진은 와해되고 말았다. 

남원에서는 1906년 음력 세모에 양한규가 61세의 고령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양한규는 을사조약 늑결에 격분하여 화순의 양열묵, 담양의 고광순 등과 의병을 함께 일으켜 공동으로 항일전을 전개하려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 양한규 의병은 1907년 2월 13일, 음력 설날 새벽에 남원성을 쉽게 점거하였으나, 그 직후에 바로 와해되고 말았다. 달아나던 적을 추격하던 양한규 의병장이 유탄에 맞아 순국하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박봉양·박재홍·양문순 등 핵심인물들은 피체 후 서울로 압송되었다. 

3) 영남지방

영남지방에서는 정환직·정용기 부자가 주도한 영천의 산남의진의 활동이 가장 두드러졌으며, 영해에서 일어난 신돌석 의병도 성세를 떨쳤다. 그밖에도 유시연은 안동에서, 그리고 김도현은 영양에서 각각 거의하였고, 울진과 삼척에서는 김하규와 황청일 등이 각기 항일전을 표방하고 의병을 일으켰다. 

영천의 산남의진은 규모 면에서나 활동 면에서 모두 중기의병 시기의 영남지방 의병을 대표할 만큼 그 성세가 두드러졌다. 1906년 3월에 일어난 이 의진은 몇 차례 변신을 거치면서 1908년 7월까지 거의 2년 4개월 동안 항일전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투쟁과정에서 이 의진은 또한 신돌석, 유시연 의병 등 인접 의진과 부단히 연계되어 상호 연합활동을 모색하였던 점도 특기할 만하다. 뿐만 아니라 이 의진은 편성 직후부터 서울 진공을 최종목표로 삼고 이를 위해 영동지방으로 북상을 시도한 전략상 특징도 갖고 있었다. 산남의진의 이러한 전략과 시도는 후기의병이 성세를 떨치던 1908년 1월 전국 의병세력의 연합체인 십삼도창의군이 시도한 서울진공작전의 선도가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큰 것이다. 

광무황제로부터 거의를 독려하는 밀지를 받은 것으로 전해지는 정환직은 아들 정용기로 하여금 고향 영천에서 의병을 일으키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정용기는 평소의 지기인 이한구와 손영각, 그리고 재종제인 정순기 등과 함께 인근 각지에서 군사를 모아 의병을 일으켰다. 산남의진이라 불렀던 이 의병은 청하읍을 일차 공격목표로 삼고 행군하던 중 뜻밖에도 경주진위대의 간계에 속아 의병장 정용기가 체포됨으로써 일시 혼란에 빠졌다. 이때 의진을 수습한 것은 중군장 이한구였다. 이한구는 정용기를 대신하여 산남의진을 이끌고 신돌석 의병과 연계하여 영해·영덕 일대를 전전하면서 항일전을 벌였다. 

그뒤 1906년 9월에 석방된 정용기는 다시 주장이 되어 산남의진을 이끌었고, 전열을 재정비한 뒤 1907년 4월부터 활동을 재개하였다. 재건된 산남의진은 초기의 실패를 거울삼아 영천을 중심으로 경주·청하·청송 등지에 분대를 두고 활동하였다. 그 결과 기동성과 연합작전 수행 등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더욱 효과적인 항일전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산남의진은 최종 목표인 서울진공을 위해 관동지방으로 북상을 준비하던 중 1907년 10월 영천 입암리立巖里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정용기 의병장 이하 중군장 이한구, 참모장 손영각 등 핵심인물들이 전사순국하고 나머지 의병들은 패산하고 말았다. 아들 정용기가 순국한 뒤 정환직이 64세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1907년 10월 잔여의병을 수습한 뒤 의병장에 올라 영천을 중심으로 영덕·흥해·청송 등지를 전전하면서 항일전을 벌였지만, 그해 12월 일제 군경에 의해 청하에서 체포된 직후에 그도 역시 순국하고 말았다. 

산남의진과 함께 중기의병 시기에 영남지방에서 일어난 대표적인 의진 가운데 하나가 신돌석 의병이다. 전기의병 때에도 활약한 것으로 전해지는 신돌석은 1906년 4월 영해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 의진은 ‘영릉의병’ 으로 불리었고, 신돌석은 ‘영릉의병장’이 되었다. 

신돌석의 선대는 이족吏族이었으나 그의 당대에 와서는 일반 상민과 다름없는 신분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같은 평민 의병장 휘하에는 양반 유생층 및 관인이 참여해 활동하고 있었다. 양반과 평민 두 계급이 신분상의 한계를 극복하고 지휘부와 병사부 모두에 포진해 있었던 점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일제침략으로 야기된 절박한 위기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민족 내부의 신분상 갈등과 모순을 극복해야 하는 과제가 우선적으로 요청되었고, 항일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모순이 자연스럽게 해소되어 갔던 사실을 보여주는 증좌가 되기 때문이다. 

거의 후 신돌석 의병은 영양과 청송 등지의 내륙지방을 비롯해 영해와 울진 등지의 해안가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무대를 전전하면서 도처에서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그 중에서도 1906년 6월 영해와 영덕읍을 장악하고, 이어 9월에 영양을 점거했던 활동은 특히 두드러진다. 하지만, 일제 군경의 파상적 공세에 직면하게 되고 추운 겨울이 다가오게 되자, 1906년 11월 무렵 신돌석 의병은 일월산과 백암산, 대둔산 일대로 근거지를 옮긴 뒤 일시 휴식에 들어갔으며, 1907년 봄에 활동을 재개하게 된다. 그리하여 신돌석 의병은 1908년 11월 신돌석 의병장이 순국할 때까지 영양과 영덕·순흥 등지를 비롯한 경북 내륙과 동해안 일대를 무대로 활발하게 항일전을 전개해 나갔다. 

신돌석 의병의 항일전을 전후해 안동에서는 유시연 의병이 일어나 성세를 떨쳤다. 안동 수곡水谷 출신인 유시연은 전기의병 당시 안동의진의 소모장과 선봉장을 지냈던 인물로, 1906년 초봄 경주에서 일단의 의병들에 의해 영남의병대장에 추대되어 활동을 재개하였던 것이다. 이 의진의 활동 내역은 잘 확인되지 않지만, 동향의 박처사朴處士 의병과 특히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신돌석 의병과도 유기적 관계를 갖고 연합전선을 구축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시연 의병의 활동무대는 안동을 중심으로 영덕·봉화·청송·영양 등지로 경북 내륙지방에 폭넓게 걸쳐 있었다. 그뒤 이 의병은 1907년 8월 대한제국군대 강제해산 이후 일본군 수비대의 심한 압박을 받게 되자 활동 근거지를 일월산 일대로 옮겨 투쟁을 지속하였지만, 이후 전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채 결국 패산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경북 영양에서는 김도현이 의병을 일으켰지만, 곧 해산당하고 말았다. 전기의병에 활동한 경험이 있던 김도현은 한때 영양·청송·진보·영덕·영해 등 5읍 도집강都執綱을 맡아 이 지역의 화적 방어에 노력하였다. 이에 그는 도집강 시절 휘하에 거느렸던 포군들을 주축으로 1906년 2월 15일 의병을 규합하여 영양에서 항일의 거치를 들었다. 그러나 거의 직후에 출동한 안동진위대의 탄압을 받아 이 의진은 곧 해산당하였으며, 김도현 의병장은 체포되고 말았다. 그뒤 석방된 김도현의 의병정신은 1914년 12월 동짓날 대진 앞바다에 걸어 들어가 순국한 ‘도해자정蹈海自靖’으로 승화되었다. 

영남지방에는 그밖에도 김현규·김하규 등이 울진에서 거의하고, 황청일 등은 삼척에서 의병을 일으켜 한때 성세를 떨치기도 하였지만, 일제 군경과 진위대의 탄압으로 강제 해산당하고 말았다. 

4) 북부지방

전기의병에 이어 중기의병 시기에도 북부지방에서는 여전히 의병의 활동이 중, 남부지방에 비해 현저히 미약하였다. 북부지방에서는 후기의병 단계에 가서야 의병의 기세가 점차 활발해지는 경향을 띄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경치·경제·사회 등 제반 영역에 걸친 활동이 중, 남부지방에 집중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구 역시 이 지역에 밀집되어 있던 상황에 자연히 기인한다. 



중기의병 단계에서 북부지방에서 일어난 두드러진 의진으로는 관서지방의 전덕원 의병과 해서지방의 우동선 의병 등이 있었다. 전덕원은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상경투쟁을 벌인 뒤 고향으로 돌아와 그해 12월 평북 용천에서 박양래·김두섭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의병은 본격적으로 활동을 개시하기도 전에 전덕원 등 주모자들이 체포됨으로써 해산당하고 말았다. 석방 후 전덕원은 1910년 국치 후 서간도로 망명, 3·1운동을 계기로 각처에서 독립군단이 편성될 때 박장호 등과 함께 서간도의 대표적인 독립군 단체인 대한독립단을 편성하여 독립전쟁에 앞장섰다. 

황해도에서는 신천 출신의 우동선이 을사조약 늑결 직후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김두행·조윤봉 등 함께 의병을 일으킨 동지들에 의해 ‘정동의려대장正東義旅大將’으로 추대되어 신천·장연·송화·재령 등지를 무대로 활동하였다. 우동선 의병은 구월산 월정사를 근거지로 산간지세를 이용하는 유격전으로 항일전을 전개하였고 1907년 하반기 이후에는 해산군인까지 가세하여 한층 강화된 전력으로 기세를 크게 떨쳤다. 





[註 17] 조동걸, 『한국민족주의의 성립과 독립운동사 연구』, 지식산업사, 1989, 37~40쪽. ☞
[註 18] 강재언, 「반일의병운동의 역사적 전개」, 『의병전쟁연구』 상, 지식산업사, 1990, 135쪽. ☞
[註 19] 조동걸, 『한국민족주의의 성립과 독립운동사연구』, 41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