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전기의병의 사회적 기반과 이념 / 한말 전기의병

몽유도원 2014. 1. 16. 13:26

 제9권 한말 전기의병 / 제7장 전기의병의 사회적 기반과 이념

1. 의병의 참여층

2. 전기의병의 이념

3. 전기의병의 역사적 위상


1. 의병의 참여층


1. 지휘부의 구성

전기의병의 지휘부는 양반유생이 중심이나 이북지역과 일부 의진의 경우에 평민이 지휘부를 형성하기도 하였다. 전기의병의 지휘부를 봉기지역에 따라 살펴보면 〈표 5〉와 같다.


〈표 5〉전기의병 지휘부의 신분구성표
시기봉기
장소
지휘부
유생비유생불명
1894. 7안동서상철徐相轍 한인석韓麟錫 
이경재李罄載 
한수동韓守東
1895. 7상원김원교金元喬  
1895. 9유성문석봉文錫鳳(무과) 오형덕吳亨德
김문주金文柱 송도순宋道淳(문과)
  
1895.11강계 김창수金昌洙(문과)김규진金奎鎭 
김이언金利彦
1896.1이천민승천閔承天 김하락金河洛 
구연영具然英 조성학趙性學 
김태원金泰元
방춘식方春植신용희申龍熙
1.여주심상희沈相禧  
1896.1제천유인석柳麟錫 서상렬徐相烈무과
이필희李弼熙 이춘영李春永 
안승우安承禹 주용규朱庸奎 
신지수申芝秀 원규상元奎常 
원용정元容正 안성해安成海 
정운경鄭雲慶 정인설鄭寅卨 
이경기李敬器 이범직李範稷 
이원하李元廈 박주순朴胄淳 
장충식張忠植 이조승李肇承 
홍선표洪璇杓 이기진李起振 
정화용鄭華鎔
 김백선金伯善 
(포수)
1896.1춘천이소응李昭應 이진응李晉應 
이경응李敬應 정인회鄭寅會
성익환成益煥(군인)
박현성朴玄成(상인)
김경달金敬達(포군)
 
1896.1강릉민용호閔龍鎬 김원섭金元燮 
민의식閔義植 심홍택沈鴻澤 
이영찬李永燦
박한옥朴漢玉(포수)
전치운全致雲
전석영全錫永(장리)
전귀석全貴錫 
주명승朱明昇 
최문환崔文煥 
최중보崔仲甫 
최중봉崔中奉
1896.1삼척김헌경金▲{金+憲}卿  
1896.1홍주김복한金福漢(문과) 이설李偰(문과) 
안병찬安炳瓚 이세영李世永
  
1896.1안동김도화金道和 권세연權世淵 
유난영柳蘭榮
  
1896.2영양김도현金道鉉(향반) 유시연柳時淵  
1896.2문경이강년李康秊(무과)  
1896.2예안이만도李晩燾  
1896.2진주노응규盧應奎 정한용鄭漢鎔서재기徐再起(승려) 
1896.2장성기우만奇宇萬 기삼연奇參衍 
고광순高光洵
  
1896.3김산이기찬李起燦 허위許蔿 
여중룡呂中龍(향반) 여영소呂永韶
양제안梁濟安 이시좌李時佐 
강무형姜懋馨 조동석趙東奭 
윤홍채尹鴻采
  
1896.2예천박주상朴周庠  
1896.2나주이학상李鶴相 이승수李承壽김창균金蒼均 
박근욱朴根郁 
정석진鄭錫珍(이족)
 
1896.3해주 某氏 (포군 17명) 
 경주  이채구李采九
 의령이청로李淸魯  
 의성김상종金象鍾  
 청송심성지沈誠之  
 영해 신돌석申乭石 
 의주조상학趙尙學  

* 해주의병의 경우 주도자의 이름을 확인할 수 없어 ‘某氏’로 표기함.


〈표 5〉에서 볼 수 있듯이 화서학파의 인물들 특히 유중교와 유인석 계열의 유생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표 5〉에 든 유인석 등이 주도한 제천의병이 그중 대표적 의진이며 이들 중 다수는 전투 중 목숨을 잃기까지 하였다. 중군장을 역임한 이춘영·안승우, 소모장 서상렬·이범직, 참모사 주용규·홍사구(이상 6의사) 등이 바로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註1) 화서학파의 유생에 의해 주도된 또 다른 의진으로 노응규의 진주의병, 이소응의 춘천의병, 민용호의 강릉의병 등이 있다. 노응규는 경상남도 함양 출신으로 허전許傳에 이어 최익현崔益鉉의 문하에서 수학한 것으로 알려진다. 註2) 이소응은 춘천의 유생으로 유중교의 문인이다. 민용호도 박문오의 문인이니 역시 화서학파에 입문한 유생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1894년 안동에서 거의한 서상철 역시 화서학파에 해당한다. 서상철은 제천의병 소모장 서상렬과는 6촌간이 되며 유중교의 문인으로 보

인다.

유성의병의 주도층 역시 전직 관료와 재지유생들이 다수 참여하였다. 의병장 문석봉이 무과 출신으로 현감과 양호소모사를 역임한 관료 출신이며, 중군장 오형덕과 선봉장 김문주 역시 옥천과 공주 출신의 유학幼學이다. 여기에 회덕의 사족 송도순이 군향으로 참여하였다. 송도순은 송준길의 10대손으로 문과출신으로 이조참판을 역임했던 인물이다. 유성의병에는 이들 외에 진사 김종률과 영장 최진동 등이 참여하였다. 註3)

한편 홍주의병의 지휘부는 대장 김복한을 비롯하여 이설·안병찬·이세영 등이 있다. 이처럼 홍주의병에서 의병을 초모하고 봉기를 추진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 신분층은 유생들이다. 이를 다시 세분하면 전 현직 관료과 재지유생이 있다. 전자인 전직 관료에는 전 승지 김복한과 이설이 있다. 이들은 구체적인 군사활동을 추진하지는 못하였지만 중앙과 지방에서 요직을 역임한 이들로 이들의 거의는 인근 유생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받았다. 후자 집단으로는 화성에 거주하는 안병찬을 중심으로, 청양의 이세영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들은 관직 경력이 없는 재지유생들이다. 註4)

이천의병은 김도화 계열로 보이는 김하락을 위시하여 영남 유생 조성학과 구연영·김태원후에 유인석의 문인 등 관료출신 유생들과 신분이 밝혀지지 않은 신용희 등이 있다. 註5) 김산의병의 이기찬·허위와 안동의병의 김도화·권세연, 예안의병의 이만도, 영양의병의 김도현 등도 역시 양반유생들이다. 註6)

한편 지휘부 구성원 중에서 비양반유생이 있어 주목된다. 나주의병의 좌익장 김창균과 우익장 박근욱이 아전 출신으로 알려지고 있어 전기의병의 특이한 의진 중의 하나로 꼽힌다. 註7) 이는 후기 호남의병의 경우에도 양한묵이나 임병찬 등과 같이 이족 출신 의병장이 다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호남지역의 지역적 특성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평민 출신 의병장으로 제천의병의 김백선이 있다. 김백선은 경기도 지평출신으로 동학농민전쟁 때 맹영재와 함께 동학군 진압에 활약한 바 있다. 그는 이춘영의 제의에 호응하여 제천의병의 선봉장으로 참여하여 비록 군율 위반죄로 제천 삼문루에서 참형을 받았으나 상당한 공을 세운 바가 있다.

해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이들은 동학군에도 참여한 바 있는 포군들이다. 해주관찰사 이명선이 이들을 귀화시켜 포군을 조직했던 것인데,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이들은 3월 20일경 경무관을 죽이고 관찰사를 구금시키며 거의한 것이다. 이는 상원의병에도 동학농민군이 참여한 것과 관련하여 북한이라는 지역적 특성에서 가능한 현상으로 보인다. 즉 서북지방이 기호나 영남지역에 비해 유교사상과 규범의 뿌리가 약하고 따라서 사회적으로 개방적인 특성을 띄고 있는 점과 관련될 것이다. 이외에도 경주의병의 지휘부를 형성했던 인물들이 아전 출신으로 보이며, 민용호의진의 후군장 박한옥이 포수로 알려지며 註8), 승려 출신인 서재기 역시 노응규의 진주의병에 선봉장으로 큰 활약을 하였다.

지휘부의 신분별 분포를 보면 이족이나 평민이 〈표 5〉에서 13명전체 88명으로 전체의 14.7%나 차지하고 있어 초기의병장의 신분 구성에서

평민들의 점유율이 예상 외로 높은 것을 알 수 있다. 그중에 나주의병의 경우에는 현재까지 드러난 지휘부원 36명 중에서 16명이 이족으로 밝혀졌다. 註9) 이는 비양반 신분이 지휘부의 44%를 점하고 있는 예외적인 현상이다. 해주의병의 경우는 뚜렷한 인물이 나타나지는 않으나 주도자 17명 전원이 산포수 출신들이니 역시 비유생의진의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춘천의병의 경우는 성익환 등 평민들이 민두호閔斗鎬의 생사당을 부수는 등 민란의 형태로 시작한 특이한 형태이다. 여기에 춘천의병도 초기단계에 평민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함을 볼 수 있다. 또한 양반유생으로 분류는 하였을지라도 김도현·여중룡·문석봉 등과 같이 몰락한 양반 즉 향반잔반으로 생각되어지는 인물들이 다수 있다. 그리고 서상렬 등과 같이 비록 양반이라 할지라도 경제적 기반은 상당히 취약한 이들이 다수였던 것 같다. 경제적 기반 문제는 자료의 제약으로 구명하기는 어려우나 이러한 취약성은 전기의병의 전력의 약화를 초래했다고 할 수 있다.


2. 병사층의 구성

전기의병의 병사층은 일부의 유생도 포함되나 주로 평민층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그 신원을 분명히 알려주는 기록이 부족하여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지금까지 조사된 바에 의하면 병사층을 구성한 집단으로 포수砲手·보부상褓負商·지방병地方兵 같은 평민이 참여했다. 그외에 소작농민이나 소수의 청병淸兵, 그리고 잠적성이 강한 동학농민군이 참여하기도 하였다.

포수는 의병부대의 주요 전투요원이다. 의병항전에는 전투력을 갖춘 포수가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제천의병에서는 각촌에 격문을 발송하여 포수의 의병참여를 호소한 것이 눈에 띈다. 이춘영과 안승우가 지평의진을 결성하면서 먼저 김백선의 협조를 요청하였던 것은 바로 전투요원으로서 포수를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이에 따라 김백선은 포수를 거느리고 의진에 동참하였다.

이들 포수들은 여러 전투에서 실질적인 전투력으로 활약하였으며, 제천 출신 포수 서장석·엄팔용은 충주성전투에서 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또한 영춘의 권호선이 포수를 이끌고 제천의병에 합류하기도 하였다. 註10) 그러나 이처럼 중요한 전투력임에도 불구하고 유생 의병장들은 이들을 단지 용병적인 대우밖에 안했다. 그 결과 의병부대의 전투력을 제고시키는데 실패하였으며 김백선 처형과 같은 차별적 태도는 전력의 약화를 초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 신분문제를 민족문제보다 우선시하는 유생 의병의 한계가 드러난다 하겠다.

병사층을 이룬 다른 집단으로 보부상이 있다. 「의암유선생서행대략」에 “이조승이 장소將所의 영으로 보부상을 거느리고 청풍으로 갔다.”고 한 기록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註11) 이들이 직접 전투에 참여하였는지의 여부는 분명하지 않지만 이들이 서신 연락의 책임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홍주의병의 경우에도 보부상들이 참여하였다. 홍주의병 초기 단계인 1895년 11월 28일에 보부상들이 수십명의 선비들과 합류하여 홍주성에 들어왔으며 註12) 이세영이 부상들과 함께 청양군수 정인희鄭寅羲를 도운 사실이 알려지고 있다. 註13)

다음으로 전기의병에는 관군 또는 해산된 지방병도 참여하였다. 상원의병의 주요 구성원이 1895년 해산된 지방병들이었다. 註14) 제천의병에도 이들이 무기를 휴대하고 참여하였음이 기록되고 있다. 註15) 이들은 실직에 불만을 품고 있던 중 의병세력의 지원 요청에 합류한 것으로 보인다. 홍주의병의 경우에도 초기단계에는 관군이 참여하였다. 비록 3일천하로 끝나고 말았지만 서산·남양·대흥군수가 수백 명씩을 거느리고 홍주로 향하기까지 하였다. 청양군수 정인희의 경우는 청양군 내의 관군을 직접 이끌고 의병에 참여하였으며, 이승우의 변심 후 의병 지도층이 체포된 후에도 공주부 경무관 구완희가 이끄는 관군과 전투행위까지 하였다. 유성의병의 병사층 역시 주로 문석봉의 휘하에서 동학군을 진압했던 구군인들이 중심을 이룬 것으로 보인다.

홍주의병에는 소작농민도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임피현령 오영석이 집안 일꾼 백명과 군자금 만냥을 준비하여 생사를 같이 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점으로 알 수 있다. 이외에 안창식安昌植·채광묵蔡光默이 모집한 180명의 민병에는 다수의 소작농민들이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註16)

이밖에도 소수의 청병이 참여하였음이 특이하다. 여국안呂國安 등 7인이 그들이다. 이들은 제천의병이 북창에 주둔하고 있던 1896년 5월 11일 이인영에 의해 초모되어 의진에 들어왔다. 註17)

전기의병에 동학농민군의 일부가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1895년 7월 봉기한 상원의병은 평안도 상원에서 봉기하여 황해도 재령의 장수산성으로 이진하면서 인근의 동학 접주들에게 통문을 발송하여 의병에 참여할 것으로 권유하였다. 이때 황해도 일대에서 활동하던 동학 접주들이 상호 연락을 취하여 임종현 등이 동학농민 80여 명을 모아 장수산성에 입성한 것이다. 註18)

한편 1896년 3월 해주에서 봉기한 의병 주도자 17명은 전원 동학농민군들이다. 원래 산포수였던 이들이 해주관찰사에 의해 회유됐다가 이때 거의한 것이다. 이처럼 이북지역의 의병에는 동학세력이 다수 참여하여 일정한 역할을 수행하였음을 볼 수 있다. 반면에 이남지역은 일부 부대에 동학군이 참여하기는 하지만 오히려 잠적성이 강한 면을 보여준다. 유인석이 의병대장에 추대되어 먼저 의병 속에 섞여있던 ‘불순분자’ 4명을 체포 처형하였는데 그중 한명이 신처사申處士라는 자로 처형 직전에 자신이 본래 동학의 두령임을 실토하고 있다. 그리고 3월 30일 처형한 나윤달 역시 동학에 참여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제천의병의 지휘부는 철저한 척사론자들로 반동학의 입장에 섰던 인물들이었다. 평민출신인 김백선이 선봉장이었으나 그 역시 지평에서 동학군을 진압했던 맹장이었다. 그리고 유인석을 비롯한 유생들에 의해 이들이 색출되어 처형된 점으로 보아 동학교도의 참여는 봉쇄되었다. 따라서 그들의 활동은 극히 피동적인 상태일 수밖에 없었으며 관군과 일본군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숨어 들어온 성격이 강하다 하겠다.

홍주의병과 유성의병에도 동학교도의 참여 사실을 확인하기는 어렵다. 홍주의병의 지휘부를 이룬 김복한·이설·안병찬·이세영 등은 바로 유회군을 편성하여 홍주성전투를 감행했던 주역들이었다. 김홍제 역시 남포에서 유회군을 편성하여 동학군 진압에 공을 세워 정3품에 추증되었으며, 무과 출신인 황재현黃載顯 역시 보령에서 유회군을 편성하여 동학군을 진압하였다. 이와 같이 반동학의 기치 아래 뜻과 행동을 같이했던 이들이 홍주의병에 동참한 것이다. 문석봉 역시 진잠·금산·논산·보은·청산 등지에서 동학군 진압에 공을 세워 이곳 주민들에 의해 선정비까지 세워진 인물이다. 유성의병 역시 이때 문석봉의 휘하에서 동학군을 진압했던 인물들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여기에 동학교도의 참여는 사실상 기대할 수 없었다.

한편 일부의 연구자들이 황현의『매천야록』에서 “유민들이 백여 명 천여 명씩 무리를 지어 모두 의병이라 칭했으며 심지어는 동학의 여당들이 낯을 바꾸어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는 자가 반이나 되었다. 이에 잔인하고 포악하여 음탕하고 약탈하여 도적떼와 다름없는 자도 있었다.” 註19)라는 부분을 인용하면서 동학교도의 의병참여를 강조한 바 있으나, 이 부분은 호남의병을 설명하는 문장의 일부분이며, 동학군의 행패를 강조한 부분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를 가지고 의병세력에 동학교도의 참여를 강조함은 곤란할 것이다. 호남의병의 경우에 나주의병 주도자들이 동학군의 침입에 수성전을 벌여 승리했던 인물들이고, 기우만의 장성의병 역시 유생들로써 반동학의 입장이 철저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호남의병에의 동학교도 참여는 역시 희박했을 것으로 보인다.

[註 1] 김상기, 「1895-1896년 제천의병의 사상적 연원과 전개」,『한국독립운동사의 인식』 백산박성수교수화갑기념논총간행위원회, 1991. 

〈표 5〉에 든 제천의병의 지휘부 명단은 전투 수행 중에 지휘부의 구성원이 수시로 보완되어 한계를 짓기가 곤란하여 초기 편제시의 지휘부에 한정했다. 이들이야말로 제천의병의 산파역은 물론 전투수행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다하였기 때문이다. ☞

[註 2] 박민영, 「신암 노응규의 진주의병 항전연구」,『한국독립운동사의 인식』참조. ☞

[註 3] 김상기, 「문석봉의 유성의병」,『역사학보』134·135, 역사학회, 1992. ☞

[註 4] 김상기, 「1895-1896년 홍주의병의 사상적 연원과 전개」,『한국근대사논총』 윤병석교수화갑기념논총간행위원회, 1990. ☞

[註 5] 유한철, 「김하락의진의 의병활동」,『한국독립운동사연구』3,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9. ☞

[註 6] 권대웅, 「김산의진고」,『한국근대사논총』참조. ☞

[註 7] 홍영기, 「1896년 나주의병의 결성과 활동」,『한국사학논총』하, 이기백선생고희기념논총간행위원회, 1994. ☞

[註 8] 박민영, 「민용호의 강릉의병 항전에 대한 연구」,『한국민족운동사연구』5, 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 1991. ☞

[註 9] 홍영기, 「1896년 나주의병의 결성과 활동」,『한국사학논총』하 참조. ☞

[註 10] 박정수, 「下沙安公乙未倡義事實」,『독립운동사자료집』1, 391쪽. ☞

[註 11] 원용정, 「毅菴柳先生西行大略」,『독립운동사자료집』1, 210~309쪽. ☞

[註 12] 안창식,『艮湖日記』 1895년 11월 28일자. ☞

[註 13] 홍건,『乙坎日記』 1895년 12월 2일자. ☞

[註 14] 김상기, 「조선말 갑오의병전쟁의 전개와 성격」,『한국민족운동사연구』3, 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 1989. ☞

[註 15]『동경조일신문』1896년 2월 14일 「丹陽小戰」. ☞

[註 16] 임한주, 「洪陽紀事」,『惺軒先生文集』권2-記. ☞

[註 17] 박정수, 「하사안공을미창의사실」,『독립운동사자료집』1, 453~455쪽. ☞

[註 18] 김상기, 「조선말 갑오의병의 전개와 성격」,『한국민족운동사연구』3 참조. ☞

[註 19] 황현,『매천야록』권2, 건양원년 병신조. ☞


2. 전기의병의 이념

1. 국수보복론

전기의병의 거의 이념은 첫째 국수보복론에서 찾을 수 있다. 유생들은 명성왕후가 시해된 을미사변에 큰 충격을 받았다. 또한 이들은 이 시해사건을 ‘천고에 없는 강상의 대변’이라고 통분하였다. 註20) 따라서 이들은 국모를 시해한 원수를 갚는 일국수보복과 적을 물리쳐 복수하는 일은 강상을 회복하는 일이 춘추의 대의라고 여겼다. 註21) 유생들의 이러한 국수보복론은 ‘주욕신사’의 충군애국사상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유인석이



임금이 욕을 당함에 신하가 죽음은 옛 사람의 옳바른 가르침이다. 임금이 욕을 당함이 일찍이 오늘날보다 심함이 없으니 오늘날 이른바 신하가 되어 죽지 않는다면 장차 무슨 말로 천하 만세의 입을 막을 것인가. 註22)

라고 말함은 이를 잘 말해준다. 이천의병장 김하락 역시 서울에서 국모시해 소식을 듣고



이해 8월 21일 밤에 적신 유길준 정병하 조희연 장박 등이 일군을 불러 궁중에 들어와 난을 일으키고, 궐내에 들어와 우리 국모를 시해하였으니 아 지극히 통분한 일이다. 註23)



라고 통분하였으며 끝내 단발령까지 내리자 그 다음날 이천으로 내려가 거의하기에 이른 것이다. 문석봉 역시 자신의 거의가 ‘주욕신사’의 정신을 지키고, 동시에 국모의 원수를 갚고자 하였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註24) 또한 문석봉은 을미사변을 ‘국치’로 인식하였으며 신하로서 그 원수를 갚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의리라고 생각하였다. 註25) 이와 같이 전기의병은 죽음으로써 임금에 충성하고자 하는 지극한 심정을 보이고 있다. 여기에서 근왕적인 전기의병의 성격을 알 수 있다.


2. 존화양이론

둘째, 전기의병의 거의 이념은 존화양이론에서 찾을 수 있다. 존화양이론이란 위정척사론의 핵심이론으로 ‘존중화양이적尊中華攘夷狄’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화’라는 것은 주자학 중심의 중화소중화문화를 의미한다. 1894~1896년간에 전개된 갑오·을미의병의 기본이념이 존화양이론에 있었으며, 이는 나아가 개화정권에서 추진한 갑오경장의 반대논리로 작용하였다 할 수 있다.

유인석은 존화양이론을 주장한 대표적인 의병장이다. 그는 ‘토적복수討賊復讐와 존화양이尊華攘夷는 춘추제일대의春秋第一大義’ 註26)라 하여 거의의 이념으로 전술한 ‘토적복수’와 함께 ‘존화양이’를 들고 있다. 그는 중화의 명맥을 보전하여 동포들이 금수가 되는 것을 막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그의 존화양이론은 송시열에 의해 주창된 ‘소중화론’에서 근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가 작성한『우주문답』에 의하면 중국과 조선은 각기 삼황과 단군, 기자의 정통을 이어 중화와 소중화의 맥을 계승해 오다가 명이 망한 후 그 화맥이 중국에서는 없어지고 조선에만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가 말하는 ‘화’는 삼강오륜을 중심한 ‘예악전형’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註27) 따라서 주자학을 신봉하지 않는 ‘왜양’은 화를 해치는 오랑캐로서 격퇴시켜야 할 대상으로 보았다. 유인석의 이 소중화론은 우주의 중심이 화맥을 계승한 조선에 있다는 민족자존적 문화의식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유인석은 이 소중화론에서 ‘소중화’는 절대로 ‘중화’가 될 수 없다.고 인식하였다. 중국의 경우는 ‘대중화’라 하여 ‘소중화’와 구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인석의 ‘소중화론’에서는 당시 유생들의 공통된 인식이기도 하지만 단군보다는 기자를 ‘은사殷師’라 하여 더 비중을 두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에 그의 ‘소중화론’ 더 나아가 척사론의 취약점이 보인다.

한편 그는 1893년 충북 제천의 장담으로 이사하여 ‘장담서사長潭書社’를 열고 화서학파의 도맥보존과 후진양성에 힘썼다. 이곳에서 그는 문인사우들과 1894년 윤5월 2일부터 1896년 2월 거의 직전까지『사서삼경』·『근사록』·『소학』·『동몽선습』·『화서아언』·『격몽요결』등의 서적과, 주자·정자·중암·성재의 글을 내용으로 한 강회를 실시하였다. 註28) 그의 이와 같은 실천적 존화양이론은 주용규·신지수·서상렬·원용석 등 유중교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인물들은 물론 그의 문인인 안승우安承禹·이춘영 등에게 계승되어 제천의진의 형성에 정신적인 밑받침이 되었던 것이다.

안승우는 성재 유중교와 지평의 유인석과 동문인 금계錦溪 이근원李根元으로부터 학업을 닦았다. 특히 유중교로부터 화문華門의 핵심사상인 화이론을 전수받은 그는 일본의 침략과 김홍집 내각의 수립소식을 듣자 즉각적인 거의의 태도를 취하였다.

지평 출신인 이춘영은 유중교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을 기회는 없었으나, 유중교의 척사문을 성복하면서 존경하였으니 사숙문인이라 할 수 있겠다. 또한 화서문하이며 동향선배인 안승우를 대할 때마다 ‘이수의 화’일제의 침략에 대비할 방책을 논하곤 하였다. 註29) 결국 국모인 명성왕후 시해사건과 단발령 공포를 계기로 하여 그는 처와 모친에게



화이인수華夷人獸의 판가름을 당하여 바른 길을 찾아 주고자 하는 것은 실로 마음 애닲게 여기는 바입니다. 註30)



라는 말을 남기고 안승우와 함께 지평의진의 결성을 추진하였던 것이다.

존화양이론을 거의의 이념으로 내세운 의병장은 화서학파 유생들만은 아니었다. 1895~1896년간에 충청도 홍주일대에서 활동한 의병장 김복한과 이설 역시 이 이론을 실천에 옮긴 인물들이다.

김복한은 척화파의 거두인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과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의 후손이며, 더욱이 이단을 배척하는데 보다 강력한 논리를 편 한원진韓元震의 사숙문인이니 그의 존화양이론은 확고하였다고 할 수 있다. 김복한은 어려서부터『주자강목』을 즐겨 읽었다. 강목의 정신은 ‘존중화 양이적’이 중요 이념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따라 김복한은 홍주의병을 일으키기 전인 1895년 12월 2일 홍주관찰사 이승우에게 의병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면서 “당태종이 천하를 얻기 위하여 죄없는 진양령晋陽令을 베어 종묘사직에 중화의 명맥을 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김복한의 화이정신에 대한 경도는 이설이 작성한 김복한 만사에서 “만년을 내린 화이전통이 그대 한 사람에 힘입어 지켜지도다.” 註31)라고 한 대목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김복한은 그의 사상을 펼치는데 화서 이항로의 존화양이론을 채택하고 아울러 이를 널리 보급하기까지 하였다. 이 사실은 그의 말년에 해당하는 1921년에 편찬한 교재인『주변록主邊錄』의 내용으로 확인된다. 이『주변록』은 이항로(4편), 김평묵(3), 유중교(3), 최익현(2), 유인석(1), 홍재구(1), 홍재학(1) 등의 글을 중심한 대표적인 척사 상소들이 있다. 김복한은 제자들에게 이 책을 교재로 강독하였으니 간접적으로 화서학파의 학문을 전수한 셈이 되었다. 이와 같은 배타적인 자주성을 강조하는 김복한의 존화양이론은 말년까지 거의 변함없이 견지되었다. 비록 그가 1919년 3월 파리장서운동에 참여하였다고 할지라도 그의 기본적인 서양배척론은 변함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註32)

이설 역시 서세동점의 민족적 위기에 주자학을 철저히 신봉하였으며, 천주교를 포함하는 이단을 사학으로 보았다. 이설은 도맥이 공자에

서 주자로 이어졌다고 하면서 주자 이후로는 조선으로 도맥이 옮아와 조정암趙靜庵 - 이퇴계李退溪 - 이율곡李栗谷- 송우암宋尤庵 - 한남당韓南塘으로 이어졌다고 계통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남당 한원진이 말한 유석儒釋과 화이의 분별이 없어졌음을 통탄하였다. 또한 불교에 대하여는 ‘위정척사’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까지 이를 비판하였다. 그의 사상의 기조는 ‘위소중화衛小中華, 척사학斥邪學’이라고 할 수 있다. 註33)

갑오변란이 직접적 계기가 되어 봉기한 서상철의 안동의병 역시 “고종의 체통을 세우고 민족을 보전하고자” 하는 충의정신에 기반한 존화양이론에 거의의 주요 이념이 있었다고 밝혔다. 격문에서 볼 수 있듯이 서상철은 “고종이 핍박을 당하고 민족이 누란의 위기에 처함을 통분하여 전국 8도의 충의정신이 있는 양반유생은 물론 평민까지 모두 거의에 찬동하여 왜적을 물리칠 것”을 호소하였다. 註34)

이와 같이 전기의병의 이념적 기반이 된 존화양이론은 중화의 명맥을 보전하여 동포들이 금수가 되는 것을 막고자 한 것이며, 우주의 중심이 화맥을 계승한 조선에 있다는 민족자존적 문화의식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3. 개화망국론

셋째, 전기의병의 거의 이념으로 반개화론 또는 개화망국론을 들 수 있다. 개화망국론이란 개화는 곧 일본에의 예속상태로 빠지게 되니 자주권을 상실하여 망국에 이른다는 논리이다. 개화파 지식인들은 이 개화라는 말을 문명화 또는 변혁과 진보의 개념으로 파악하였다. 반면에 척사유생들에게 ‘개화’라는 용어는 오히려 ‘왜국화’ 나아가 ‘망국’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1876년 불평등조약이 강제로 체결되기 직전 유중교·김평묵 등 화서문인 50인은 「복합유생척양소」를 올렸다. 이 50인의 병자연명유소는 이항로의 병인년 상소 이후 화서학파에 의한 최초의 집단적인 정치운동으로 개국의 부당성을 항의 상소한 것이다. 이 연명유소는 김평묵이 작성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註35) 왜양일체론이 주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이에 의하면 왜는 서양의 앞잡이라는 것이며 이는 이미 왜가 서양과 결합하여 양선을 타고 양포 등 양기를 사용하고 있음을 보아 알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왜양일체론은 특히 1890년대 척사의 대상이 일본에 집중되어 나타나면서 유생들의 위정척사론은 척왜론으로 변화되었으며, 이 척왜론은 1894~1895년 이후 강력한 반개화론인 개화망국론으로 강화되었다.

제천의병장 유인석은 대표적인 개화망국론자였다. 그는 개화파들에 의한 외국과의 통상이 망국의 근원이 되었다고 논파하였다. 그리고 거의의 목적이 남의 노예가 되는 수치를 면하고자 함에 있음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아! 원통하도다. 그 누가 알았으랴. 외국과 통상한다는 꾀가 실로 망국의 근본이 될 것을, 문을 열고 도적을 받아들여 소위 세신世臣이란 것들은 달갑게 왜적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데 목숨을 바치니, 인仁을 이루려는 선비들은 남의 노예가 되는 수치를 면하자는 것이었다. 註36)

그리하여 유인석은 1894년 이래 개화파에 의한 갑오경장을 망국적 반민족적 행위로 인식하였다. 이러한 인식아래 그는 제천의진을 결성하고 친일적인 개화파 관리인 단양군수 권숙權潚과 청풍군수 서상기徐相耆, 충주관찰사 김규식金奎軾, 평창군수 엄문환嚴文煥, 그리고 천안군수 김병숙金炳肅 등을 ‘왜관찰倭觀察’ 또는 ‘왜군수’라 하며 처단하였던 것이다.

유인석의 이러한 인식은 국망 이후에도 변함이 없었다. 1914년 망명지 간도에서 저술한『우주문답』에서도 ‘개화망국론’을 개진하고 있다. 그는 망국의 근원이 수구에 있지 않고 개화에 있음을 다음과 같이 역설하고 있다.



비록 구법舊法이 나라를 망쳤다고 주장하지만 망국은 개화가 행하여진 뒤의 일이다. 말로는 개화라 했지만 그 행한 바는 국모를 시해하고 군부君父를 폐위하고 윤리와 법강을 문란하게 하고 나라를 팔아 결국 나라를 망친 것이다. 구법을 행하여 망국했다고 가정하더라도 어찌 개화해서 망국한 것만큼 심했겠는가. … 비록 수구인을 나무라지만 국모를 시해하고 군부를 폐위하며 나라를 팔고 망친 것은 모두 개화인의 소행이었고 망국을 통분하여 순절하고 거의한 것은 거개가 수구인이었다. 만일 나라안의 상하 대소인大小人이 수구인의 마음과 같이 하였더라면 나라는 혹시 망하지 않았을지 모르고 또 망했다 하더라도 그렇게 빨리 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註37)



홍주의병장 김복한을 비롯한 이설과 안창식도 개화망국론자라 할 수 있다. 김복한은 신학문에 대하여 “인심을 물에 빠뜨리고 세도를 괴패壞敗시킴이 심하고 어버이와 임금이 없고 어른과 아이의 순서가 없으며 3년상을 모시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비판하였다. 그는 애국계몽운동에 대하여도 애국을 부르짖는 자들은 국가만 알지 중화의 도를 알지 못하여 결국은 개화라는 구실하에 서양화 한다고 지적하면서, 심지어는 중국의 계몽사상가 양계초梁啓超가 공자를 비방하였다 하여 ‘머리를 자르고 배를 찢을 놈’이라고 혹평을 하고 있다. 註38) 이설은 “지금 개화를 빙자하여 우리나라를 삼키려고 획책하고 있다.” 註39)고 개화파들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서슴치 않았다. 안창식은 을미사변 전인 1895년 4월에 광천에서 의병을 일으키고자 모병활동을 구체적으로 전개했던 인물이다. 그 역시 박영효 등 개화파에 의해 의관과 문물이 바뀜을 통탄하는 반개화이념에 경도되어 있었던 것이다.

유성의병장 문석봉 역시 반개화론을 주장하였다. 문석봉은 비록 무인으로 발신하였으나 항상 문文에 뜻을 두었으며 ‘사도斯道’의 멸망을 막기 위해 고향인 현풍에 ‘영파재’를 지어 후학에게 한학을 교육했다. 註40)그는 관리로 있으면서도 정부의 개화정책에는 따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좋은 예로 그가 양호소모사로 재직 중에 옛 관복을 입었으며, 이 일로 관찰사 박제순으로 부터 질책을 당하기까지 하였다. 註41) 또한 그는 “동방에 다시 옛 의관을 회복할 길 없네” 註42)하며 개화정권의 변복령을 탄식하고 있다. 문석봉은 단발령에 대하여도 완강히 반대하였다.

1896년 2월 장성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기우만 역시 고종에게 올린 상소문에서 개화는 인륜을 무너뜨려 금수의 지경으로 몰아 넣는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진언하였다.



아! 오직 임금만이 백성에게 복을 줄 수 있고 오직 임금만이 백성에게 위엄을 가할 수 있다는데 , 그 위엄과 복이 임금에게서 나오지 아니하고 그놈의 손에서 나오게 된다면 그 놈들이 무슨 짓인들 못하겠사옵니까? 조저朝著를 변경하기로 마음 먹어도 되고, 선왕 법전法典에 손질을 해도 되고, 심지어는 국모를 시해하고 군부를 협박해도 감히 그 서슬을 거스릴 자 없으며, 상투를 베고 머리를 깎아서 당당한 예의의 나라를 이적 금수의 지경으로 몰아넣은 것은 모두 개화란 두 글자가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註43)



그는 이어서 개화란 두 글자는 난신 적자가 임금을 속이고 나라를 그르치는 간사한 꾀요, 외적을 끌어들여 자기편을 만들고 무리를 만들어 권력을 장악하여 임금의 수족을 묶는 것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이천의병장 김하락의 학문적 성격은 분명하지는 않으나 의성 출신인 점으로 보아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여진다. 그 역시 개화정권에서 추진하는 일체의 개화시책을 반대하였다. 특히 변복령과 단발령에 미쳐서는 “민심이 흉흉하여 혹은 심산으로 도망하고 혹은 배에 승선하여 바다로 가기도 하였다. … 당시 서울에 있는 지사들은 가슴을 두들기며 주먹을 비비고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였다.” 註44)라고 통분하였다.

전기의병의 주요 사례 중의 하나인 김원교의 상원의병 역시 개화망국론을 펴고 있다. 1895년 7월 장수산성을 점령하고 발표한 다음과 같은 격문에 그 내용이 잘 나타나 있다.



지금 왜놈의 소위 개화라는 것을 개화라 말할 수 있는가. 소위 개화라는 것은 문물을 열고 무리를 순화시켜 피아 서로 기쁘게 하여 본래 서로 잔해함이 없게 하는 것이거늘, … 우리나라로 하여금 임금을 없게 하고 나라를 없게 하니, 만국개화의 법이라는 것이 이런 것인가.! 이는 개화가 아니라 곧 역적의 매국함이요 왜놈들의 멸국滅國하려 함이라. 註45)



즉 격문에서 상원의병은 집권관리들의 개화정책을 ‘매국’또는 멸국 행위로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일제는 개화를 빙자하여 조선을 멸망하려 한다고 하여 일제의 침략정책을 예리하게 비판하였다.

그러나 상원의병에서 주장되는 개화망국론은 개화를 완전히 반대하고 있는 것이 아닌 듯하다. 이들은 개화를 ‘문물을 열고 무리를 순화시켜 서로 기쁘게 하여 본래 서로 잔해함이 없는 것’이라고 정의함으로써 지선한 형태로서 설명하고 있다. 즉 개화 그 자체를 배척의 대상이 아니라 현재 진정한 개화가 실행되지 못함을 지적하고 있다. 註46)


4. 대일결전론

넷째, 척왜론에 입각한 대일결전론 역시 전기의병의 주요 이념이라 할 수 있다. 척사의 대상이 일본에 집중되어 나타나면서 유생들의 위정척사론은 척왜론으로 변화되었으며, 이 척왜론은 1894~1895년 이후 대일결전론으로 강화되었으니 의병항전은 바로 대일결전론의 구현이라 할 수 있다. 즉 전기의병은 일본을 침략세력으로 단정하고 이를 격퇴시키기 위한 일본과의 전면적인 전쟁을 주장하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이 대일결전론은 전기의병의 모든 의진에서 보여주는 기본 이념이라 할 것이다.

문석봉이 1895년 2월 체포된 죄명이 ‘토왜죄’였다. 그는 이때 경무사 이윤용과 가진 공초에서 “태조 이래 5백년간 내려 온 조종사직을 어찌 쉽게 두 손을 들어 오랑캐에게 바친단 말인가.” 註47)라고 하면서 오랑캐 일본을 물리쳐 국망을 막아야 함을 피력하였다. 그는 무과에 급제한 후 관리로 근무하면서 정부에 의한 일련의 개화정책이 일본의 조종에 의해 이루어짐을 목도하였다. 특히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일본군의 위압적이고 무자비한 진압, 거기에 비해 조선정부의 나약함을 보고 그의 척왜론은 강화되었으며 급기야 국모시해를 당하여 항일의병투쟁을 전개한 것이다.

이설은 1876년 개항 이후에 척사의 대상을 일본에 집중시켜 ‘척왜론’을 주창하였다. 그는 1878년 작성한 「의상척양왜소擬上斥洋倭疏」에서 강화조약은 수호조약이 아니라 일본에 대한 ‘항복조약’이라고 이를 통박하였다. 이어서 일본군을 마땅히 물리쳐야 하며 그 이유로써 첫째 적이 우리를 무고히 억압하고 있으며, 둘째 한두 명의 신하를 제외하고 저자의 부녀자와 아이들 까지도 분노를 하고 있음을 들었다. 또한 그는 일본을 격퇴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로 우리는 ‘정正’이요 저들은 ‘사邪’이며, 우리는 순順하고 저들은 역逆하며, 우리는 주인이고 저들은 객이며, 우리는 많고 저들은 소수이며, 우리는 편하고 저들은 지쳐있다 라는 5조목을 들었다. 이와 같이 그의 위정척사론은 척사의 대상이 ‘금사학禁邪學’에서 ‘척왜斥倭’로 전환함을 볼 수 있으며, 동시에 단순한 반대의 뜻만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위와 같은 구체적인 이유들을 들면서 일본군을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그의 ‘척왜론’은 1894년

이후 급속하게 침략해 오는 일본세력에 직면하여 더욱 강화되어 갔다. 그의 ‘척왜론’은 이제 일본과 전쟁을 감행할 것을 주장하기까지로 발전했다. 1894년 6월 20일 올린 「청물배중국척절왜구소請勿背中國斥絶倭寇疏」에서 그러한 면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여기에서 그는 우리나라가 소중화의 맥을 지키기 위하여 군신상하가 맹세하여 일본과 전쟁을 감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후 그는 고향인 홍주군 결성으로 내려와 척사상소를 올리는 이외에도 척사운동의 발전적 형태인 의병투쟁에 참여하여 그의 사상을 실천에 옮겼다. 註48)

이 대일결전론은 동학농민군의 주요 이념인 척왜양창의론이 확대된 구국이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동학농민군과 이념의 공통성은 패산하였던 동학농민군으로 하여금 항일의병에 참여할 수 있게 하였다. 해주의병과 상원의병에 동학군이 참여하여 주도적인 역할을 한 점은 유교적 규범이 약한 북한지역이라는 지역적 특성 이외에 이와 같은 이념적인 공통성에서도 그 요인의 일단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제천의병에 들어 온 동학군 역시 이념적으로 척왜론에 입각하고 있다 하겠다. 그러나 제천의병과 같이 유생적 성격이 강한 의진에서 이들은 오히려 색출되어 처형을 당하고 말았다. 여기에 유생의병의 이념적 제약성이 나타난다 하겠다.

반면에 경상도의 경주·김산·진주, 그리고 전라도의 나주의병에서는 유생과 비유생 의병장이 같은 지휘부를 형성하였을지라도 신분적인 갈등을 극복하여 갔음을 볼 수 있다. 경주와 나주는 이족들에 의해 주도되었으나 사족과 갈등한 면은 드러나지 않는다. 이들은 동학농민전쟁 때부터 지역의 사족들과 연대하여 동학군의 공격을 방어했으며, 의병을 일으켜서도 사족인 이학상을 대장으로 추대하면서 사족들의 권익을 옹

호해 줬던 것이다. 김산과 진주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진주의병장 노응규는 승려인 서재기를 선봉장에 임명하여 훌륭하게 항일전을 수행하였다.

김산의병의 경우는 여러 세력이 연합한 형태로 출발하였다. 즉 선산의 허위, 상주의 이기찬, 김천의 조동석·유도섭, 그리고 여영소·여중룡·양제안 세력이 지휘부를 형성하였다. 이들은 유생이라는 공통성 외에는 학통성·혈연성·지역성 등을 공유하지 못한 점에서 상호 이질적인 면이 오히려 많았다.

그러나 유생의 처지에서 반동학의 입장에 섰던 이들이며 일제의 침략에 민족의 생존문제를 의식하여 항일의병을 조직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중룡 같은 이는 동학군한테 가재를 약탈당하고 일문이 수난을 당하기까지 하여 철저히 반동학적인 처지에 있었는가 하면, 중군장 양제안은 일본군의 격퇴를 위하여 동학군과 제휴를 계획하기까지 하는 등 항일투쟁을 전제한 친동학적인 태도도 나타난다. 註49) 이처럼 김산의병의 경우에는 이념의 차이는 별문제가 안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김산의진이 경상 감영의 관군에 보낸 효유문에서



지금 이 의거는 다만 국가를 위하고 적을 토벌하여 원수를 갚고자 하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다. 무릇 우리나라의 음식을 날로 먹는 자라 할지라도 어찌 우리 임금님의 신하가 아니라 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누가 이와 같은 마음이 없겠는가. 절대로 서로 죽이고 해치지 말도록 하라. 註50)



라 하여 투쟁의 대상을 일본과 그 추종배에 한정하여 동족간의 싸움을 막고자 했다. 이는 일본을 격퇴한다는 대의명분에서 민족이라는 구심체를 인식한 사실을 의미한다.

[註 20] 문석봉, 「與嚴鎭燮」,『의산유고』권1-書. ☞

[註 21] 유인석, 「因召命入疆至楚山陳情待罪疏」,『의암집』권4-疏. ☞

[註 22] 유인석, 「격고내외백관」,『의암집』권45-檄. ☞

[註 23] 김하락, 「진중일기」,『독립운동사자료집』1, 1970. ☞

[註 24] 문석봉, 「獄中寄兒永井」,『의산유고』권1-書. ☞

[註 25] 문석봉, 「倡義時作」,『의산유고』권1-詩. ☞

[註 26] 유인석, 「인소명입강지초산진정대죄소」,『의암집』권4-疏. ☞

[註 27] 유인석, 「西行時在旌善上疏」·「因召命入疆至楚山陳情待罪疏」,『의암집』권4-疏. ☞

[註 28] 김상기, 「조선말 갑오의병의 전개와 성격」,『한국민족운동사연구』3, 38~40쪽. ☞

[註 29] 이정규, 「槐隱李公遺事」,『恒齋集』권16-遺事. ☞

[註 30] 이정규, 「육의사열전」,『항재집』권16 참조. ☞

[註 31] 임한주, 「홍양기사」,『성헌선생문집』권2-記. ☞

[註 32] 김상기, 「김복한의 학통과 사상」,『한국사연구』88, 1995. ☞

[註 33] 김상기, 「복암 이설의 항일민족운동에 대한 고찰」,『민족문화의 제문제』 우강권태원교수정년기념논총간행위원회, 1994. ☞

[註 34] 김상기, 「조선말 갑오의병전쟁의 전개와 성격」,『한국민족운동사연구』3, 49~50쪽. ☞

[註 35] 권오영, 「김평묵의 척사론과 연명유소」,『한국학보』55, 일지사, 1989, 134~140쪽. ☞

[註 36] 유인석, 「격고내외백관」,『의암집』권45-檄. ☞

[註 37] 유인석, 「우주문답」,『의암집』권51. ☞

[註 38] 김상기, 「김복한의 학통과 사상」,『한국사연구』88 참조. ☞

[註 39] 임한주, 「洪陽紀事」,『惺軒先生文集』권2. ☞

[註 40] 문석봉, 「映波齋記」,『義山遺稿』권2-記. ☞

[註 41] 문석봉,『의산유고』권1-書. ☞

[註 42] 문석봉, 「술지」,『의산유고』권1-詩. ☞

[註 43] 기우만, 「병신소」 1,『송사문집』권2-疏. ☞

[註 44] 김하락, 「진중일기」,『독립운동사자료집』1. ☞

[註 45]『동경조일신문』1895년 10월 8일 「長壽山の亂徒」. ☞

[註 46] 이와 같은 상원의병의 개화망국론은 후기 호남의병장 심남일의 반개화론과 유사하다. 즉『심남일실기』에 의하면 “아! 옛날의 개화는 … 백성을 교화하여 풍속을 이룬다는 뜻이었는데 지금의 개화는 外夷를 끌어들여 우리 백성을 악하게 하고 적앞에 굴복하게 하는 것이다.”라 하였다. 심남일 역시 개화파의 개화라는 것은 개화의 본래의 뜻을 악용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했다. ☞

[註 47] 문석봉, 「京警務廳初招」,『義山隨錄』을미 2월 21일. ☞

[註 48] 김상기, 「복암 이설의 항일민족운동에 대한 고찰」,『우강권태원교수정년기념논총』참조. ☞

[註 49] 오세창, 「벽도 양제안의 항일구국투쟁」,『한국근대사논총』 윤병석교수화갑기념간행위원회, 1990. ☞

[註 50] 양제안,『梁碧濤濟安公實記』참조. ☞


3. 전기의병의 역사적 위상

1894년 청일전쟁을 계기로 일본군이 조선에 주둔하였고 급기야는 갑오변란을 일으켜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하였다. 갑오변란 이후 일제의 지원을 받는 개화파들에 의해서 친일내각이 성립되었고 일련의 개화정책이 추진되었다. 척사유생을 비롯한 조선인들은 갑오변란과 청일전쟁, 친일적 개화정권에 의한 시책을 민족 존망의 위기로 인식하고 무력적인 방법으로 일본 세력을 구축하고자 하였다. 그중에서 지평의 안승우, 홍주의 안창식 등은 비록 모병단계 수준에 머물렀지만, 안동의 서상철과 상원의 김원교 등은 의병을 모집하여 반개화·반침략의 의병투쟁을 전개하였다. 특히 김원교의 상원의병은 동학농민을 포용하는 민중적 성격이 드러나기도 하였다.

척사유생들은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 공포 이후 의병투쟁을 전국적으로 전개하였다. 이들 역시 갑오변란을 망국의 시작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비참한 국모의 시해소식을 접하고 일제와 친일적 개화파정권에 대하여 적개심이 솟구치지 않을 수 없었다. 개화파내각은 오히려 폐비조치를 내리는 행태를 보이자 조선인의 분노는 드디어 폭발하기에 이르렀다. 을미사변에 분개하여 봉기한 첫 의병은 문석봉의 유성의병으로 알려진다. 무과 출신인 문석봉은 1895년 9월 18일 유성장터에서 봉기하여 공주부의 관군과 와야동전투를 치렀다. 유성의병은 패하고 의병장은 관군에 체포되어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지만, 을미의병의 효시로서 이후 의병 봉기에 영향을 준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을미의병투쟁은 단발령의 공포로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단발령 공포 소식에 접한 재야 유생들은 단호한 행동을 보였다. 단발령 공포 다음날부터 이천에서 의병이 일어났으며, 연이어 춘천·강릉·제천·안동·홍주·진주·김천·나주 등 주로 남한지역을 중심으로 봉기하였다.

김하락 등 유생들은 포군을 포섭하여 민승천을 창의대장에 추대하고 이천의병을 조직하였다. 이천의병은 1896년 1월 17일 이천의 백현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광주의병을 비롯하여 심상희의 여주의병, 양근의 이승룡의병 등과 합세하여 남한산성을 점령하고 서울진공계획을 수립하는 등 전과를 올렸다. 춘천의병은 1896년 1월 춘천유생 정인회가 군인 성익환과 상인 박현성을 포섭하고 포군 400여 명과 함께 춘천관찰부를 점령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이소응을 의병장에 추대하고 신임관찰사 조인승을 체포하여 처단하고 서울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가평의 벌업산전투에서 패하고 이소응은 의진을 종제인 이진응에게 맡기고 유인석의 제천의병에 합류하였다.

유인석의 제천의병은 안승우 등 지평의 유생들이 일으킨 지평의병에서 시작된다. 안승우 등은 이필희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원주의 안창에서 지평의병을 봉기하고 원주관아를 점령하여 무장한 후 제천관아를 점령하였다. 단양에서 관군과의 전투를 치렀으나 의진은 패산하였다. 유인석은 원주에서 문인과 해산된 의병을 수습하여 대장이 되어 의진을 제천으로 이진하여 관아의 뒷산인 아사봉에 제천의병의 본영을 설치하고 반일투쟁을 지휘하였다. 제천의병은 단발을 강요한 단양군수 권숙과 청풍군수 서상기를 처형하고 2월 17일 충주성을 점령하고 관찰사 김규식을 처단하였다. 제천의병은 충주부를 중심으로 중부지역 일대를 장악하는 세력권을 형성하였다. 제천의병은 수안보의 일본병참부대를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등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으나, 5월 25일 제천의 남산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패산하였다. 그후 유인석 일행은 서행을 계속하여 압록강을 건너 통화현 오도구로 들어가 ‘척왜독립’의 기지로 정하고 재기를 준비하였다. 홍주의병은 1895년 1월 김복한 등이 홍주부 내에 창의소를 설치하고 봉기하였다. 그러나 창의한 지 하루만에 관찰사가 변심하여 의병 주도자를 체포하여 김복한 등 6명은 서울 경무청에 구속되어 옥고를 치렀다.

여주 출신의 민용호는 평창·영월 등 강원 지역의 포수로 의진을 구성하여 1896년 1월 원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민용호의진은 강릉에 들어가 강릉의 토착세력을 포섭하고 경무관 고준섭을 체포하여 처단하였다. 민용호의진은 원산의 일본인거류지 공격을 수립하고 원산으로 진격 중에 선평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접전을 치렀다. 일본군은 의병의 원산 공격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군함까지 동원하여 의병에 대한 선제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의병은 선평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고 강릉으로 회군하여 김헌경의진과 연합하여 삼봉산전투를 치르는 등 항전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공격으로 개마공원을 지나 만주로 들어가 재기를 도모하였다.

안동지역의 유생들은 단발령 공포 직후에 통문을 돌려 의병을 창의하였다. 이들은 1월 17일 안동부를 점령하였다. 안동향교에 본영을 설치하고 권세연을 대장에 추대하였다. 안동의병은 관찰사 김석중이 대구부의 진위대 병력을 이끌고 불시에 공격함으로 일시 퇴각하였다. 그러나 안동의병은 전열을 갖추어 대장에 김도화를 추대하고 안동부를 공격·재점령했다. 안동의병은 제천의병의 소모장 서상렬이 남하하자 그를 안동과 풍기를 비롯한 7읍의 연합의병장에 추대하고 함창·태봉에 있는 일본군 병참부대를 공격하였다. 태봉전투는 4일간에 걸쳐 치열하게 진행되었으나 대구에서 증파된 일본군의 공격으로 의병대는 흩어지고 안동부는 의병의 소굴이라 하여 일본군에 의해 민가 대부분이 불태워졌다. 김천에서도 김천·상주·선산지역의 유생들이 김산향교에서 의병 봉기하였다. 김산의병은 의병장에 이기찬을 추대하고 김천군의 무기를 탈취하여 무장하고 지례 등지에서 관군과 접전을 벌였다.

호남지역에서는 장성의 유생인 기우만·기삼연 등이 통문을 돌려 의병봉기를 촉구하였다. 이들은 3월 초 광주향교에 창의본부를 두고 광산회맹소를 설치하였다. 나주에서도 아전 출신인 김창규를 중심으로 의진이 결성되었는데 나주의 관속들이 의진에 가담하였으며, 해남군수 정석진의 지원까지 받았다. 나주의병은 참서관 안종수를 처단하며 의세를 떨쳤다. 광산회맹소 대장 기우만은 나주의병에 연락을 취해 연합을 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겸제가 이끄는 경군이 나주의병을 공격·해산시키고 해남군수 정석진을 체포하여 처형하였다. 정부에서는 신기선을 보내 의병 해산을 종용하자 기우만은 의병을 해산시켰다.

한편 북한지역인 함흥지방에서는 평강 출신인 최문환이 거의하여 1896년 2월 함흥부를 점령하고 참서관 목유신을 처단하고 각지에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함흥의병은 민용호의병과 연합작전을 펴 함흥부를 점령하기도 하였다. 해주에서는 포수들이 중심이 되어 의병을 일으켰다. 의주에서는 유생 조상학이 압록강을 넘나들며 의병활동을 전개하였으며, 평산과 수안의 유생들은 제천의병에 참여하였다.

전기의병의 참여층은 지휘부와 병사층에 따라 유생과 평민으로 대별되어 나타난다. 지휘부는 주로 관료 출신의 양반유생 또는 재지유생들로 구성되었다. 그중에서도 화서학파·남당학파·노사학파·한주학파 등 위정척사계열의 유생들이 중심이었다. 또한 송시열과 김상헌과 같이 척화론이나 북벌론을 주장했던 인물들과 혈연적으로 또는 학문적으로 연관이 깊은 유생들임을 알 수 있다. 이들 중 다수는 동학농민전쟁시 동학군을 진압하는데 참여했던 것으로 보여 동학농민군과 의병의 정치사상적인 차이를 실감하게 한다. 지휘부에는 나주의병이나 해주의병 처럼 유생 이외에도 이족이나 평민들도 다수 포함되었음이 확인된다. 또한 유생이라 할지라도 몰락한 양반층이 많았다. 이러한 점은 의병의 경제적 취약점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병사층에는 평민농민을 비롯하여 포수·보부상·해산군인 또는 소작농민이나 일부의 청국군, 그리고 동학농민도 참여하였다. 그러나 의병의 지휘부와 병사층간의 상호 관계는 효율적이지 못했다. 즉 전투수행 능력보다는 신분에 대한 차별적인 태도가 지나치게 강조된 결과 전력의 약화를 초래한 경우도 있었다.

전기의병의 봉기 이념으로 우선 국수보복론을 들 수 있다. 을미사변으로 일본에 의해 시해당한 명성왕후의 복수를 주요 목표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존화양이론 역시 거의의 중요 이념으로 작용하였다. 존화양이론은 송시열의 소중화론, 즉 북벌론적 사고에 기초한 강한 척사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전기의병의 위정척사론은 우주의 중심이 화맥을 계승한 조선에 있다는 민족자존적 문화의식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전기의병은 존화양이론에 입각하여 반개화론 나아가 개화망국론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배타적인 척사론의 궁극적인 목표는 왕조의 복구에 있었다. 즉 전기의병은 근왕적 내지는 충군애국적 국가관으로 일관하면서 국왕을 전제로 한 국가의 독립을 추구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전기의병은 척왜론에 입각한 대일결전론對日決戰論을 주장하였다. 유생들은 청일전쟁 이후 특히 척사의 대상이 일본으로 집중되면서 척왜론을 주장하게 되었으며, 이 척왜론은 곧 일본과의 결전을 주장하는 대일결전론으로 강화되었다. 그 결과 자신들의 이념을 실천에 옮겨 의병투쟁에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의병들은 대일결전론이라는 이념적 공통성으로 인하여 신분과 정치적인 차이를 극복하여 항일투쟁에 나설 수 있었다. 즉 외세를 물리치기 위해 민족이라는 구심체를 인식하게 됨으로써 민족모순의 문제를 극복해 나갔음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전기의병은 남한지역을 중심한 전국 각지에서 치열한 반개화·반침략 투쟁을 전개하였다. 전기의병의 무장투쟁은 위정자와 일제 침략군에게 큰 위협을 주었다. 단발령은 철회되었으며 고종은 아관파천을 단행하여 일제의 침략행위에 대한 반대의사를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아관파천 직후 김홍집·어윤중 등 개화파 관리들은 처단되었으며 침략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되던 개화정책은 비판되어 실효를 보지 못하였다. 또한 전기의병은 표면적으로 해산되었지만 제천의병과 민용호의진과 같이 끝까지 고종의 해산조칙을 거부하고 만주로 들어가 재기의 항전을 준비하기도 하였다. 또 비록 해산된 이후일지라도 이들의 일부는 영학당·활빈당 세력으로 재편되어 반개화·반침략·반봉건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다수의 의병장들은 1905년 을사늑약을 전후하여 의병의 기치를 다시 세우고 민족수호를 위한 항일투쟁을 재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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