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호남지역 의병투쟁 / 전기의병의 확대 / 한말 전기의병

몽유도원 2014. 1. 16. 12:02

제9권 한말 전기의병 / 제4장 전기의병의 확대

1. 경기지역 의병

2. 강원지역 의병

3. 충청지역 의병

4. 경상지역 의병

5. 호남지역 의병투쟁

6. 북한지역 의병투쟁


5. 호남지역 의병투쟁

전기의병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을 때 호남의병은 비교적 늦은 시기에 봉기하였으며, 그것도 다른 지역에 비해 활발하지 못한 면이 있다. 이는 이 지역에서 1894년 동학농민전쟁기나 1907년 이후 후기의병기에 철저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던 점과 대조적인 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동학농민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척사계열의 유생 또는 항일적인 비유생층에서 전국적인 의병 봉기의 기운에 떨치고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중에서도 노사 기정진의 손자이며 노사학파의 학통을 계승한 기우만은 고향인 장성에서 기삼연·고광순 등과 거의하였다. 기우만은 동학농민전쟁을 ‘동비의 난리’라고 표현할 정도로 철저한 척사론자였다. 그는 나주에서 동학군을 물리친 것을 기념하는 토평비의 비문을 지어주었으며, 향음주례를 거행하여 향촌 사회의 주자학 질서를 강화시키고자 하였다. 기우만은 1895년 8월 을미사변의 비보를 접하고 통곡하며 짚자리에서 잠자고 창을 베개로 삼겠다면서 거의를 결심하였다. 이윽고 11월 단발령이 내리자 각지에 통문을 보내어 거의에 참여할 것을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다.
국모의 원수를 생각하면 신자臣子된 자로서 와신상담해야할 시기인데 한사람도 목욕재개하고 적을 치자고 청하는 자 없으며, 상감을 협박한 변은 바로 곧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가 죽는 날인데 내신內臣은 용감하게 나서서 업신여김을 막다가 죽은 자가 없고, 외신外臣은 서로 임금의 본의 아닌 명령을 받들어 오직 머리깎기만 독촉하고 있으니 이러고도 나라에 사람이 있다 하랴. 이같이 사람이 없기 때문에 짐승 발굽과 새 발자굽이 날로 모여들어 문명국이 변해 야만이 되어도 괴이할 것 없다는 것이다. 註284)


또한 기우만은 고종에게 상소하여 적을 토벌하고討賊 원수를 갚을 것復讐과 단발령을 환수하여 옛 법도를 회복시킬 것을 주청하였다. 기우만의 거의의 뜻은 유인석의 격문을 받고서 실천되었다. 유인석의 제천의병의 소식이 장성에 까지 도달하자 기우만 역시 각지에 격문을 띄워 의병을 일으켰다. 격문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임금께서 먼지를 무릅쓰고 계시니 시일을 천연해서는 안 된다. 역당이 목숨도 생하여 근본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했음에랴. 천안天顔의 한 방울 눈물 자국은 천만 신하의 간담이 무너져도 속죄할 수 없고, 옥지玉趾의 두어 걸음 파천 길은 억조 백성의 뼈가 가루되어도 돌이키지 못할 것이다. 註285)


기우만은 고광순·기삼연·김익중·이승학·기주현·고기주·양상태 등과 장성부 향교에서 창의하였다. 註286) 이때 기우만은 각읍의 아전과 군교들에게 통문을 보냈으니 재력과 군사력을 갖춘 이들이 우선적으로 초모의 대상이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나주부에서도 기우만의 통문을 받고 양반유생과 이족을 중심으로 거의에 적극 호응하여 1896년 2월 1일 나주향교에서 거의를 결의하였다. 다음날 이들은 사과 이승수와 유생 나경식의 추천에 의하여 이학상이 회맹의 장이 될 만하다 하여 의병장에 추대하였다. 이들은 이와 같이 거의한 후 통문을 지어 기우만에게 보내 거의의 뜻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사람마다 난신적자를 베일 의무가 있으므로 힘을 같이 하여 무찌르기를 생각했는데, 하늘이 사문斯文을 없애지 않기 위하여 어진이로 하여금 쳐서 물리치게 함이로다. 근왕勤王을 하자고 이미 으뜸으로 외쳤으니, 선비되고 누가 따라가지 않으리오. 우리나라에 인접해 있는 저 섬 오랑캐는 실로 종천終天의 원수로다. … 우러러 생각컨대 좌하左下는 대궐에 올린 소장疏章이야말로 저 호담암胡潭庵의 상소에 비해 부끄러움이 없는데 총칼을 메고 전장에 나서서 자로子路의 용맹을 떨치려 하는 구료. 피눈물 섞어 통문을 띄우니 전편이 충성을 분발케 하는 글자뿐이라. 손 씻고 받들어 읽으매 각읍이 모두 용기를 복돋웁니다. 심지어 시골 어리석은 지아비나 가장 천한 교군꾼 마부까지도 이 글월을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인정이 없는 자라 이를 것이요, 우리도 무력을 빛내고 남음이 있으니 또한 오랑캐도 낙담하리라.


이병수는 이어서


지휘하고 절제하는 것은 모두 좌하의 명령을 따르고자 하노니, 실천과 경륜에 있어서는 계획이 벌써 정해졌으리라 믿습니다. 지주砥柱같이 우뚝히 서서 진작 넘어지지 않을 태세를 갖추셨으니, 종묘사직을 편안히 하여 임금이 대궐로 돌아오시게 하기를 바랍니다. 어찌 다만 개화당만 성토하고 마오리까. 빨리 오랑캐 날뛰는 것을 밝혀야 합니다. 만 사람 앞에도 대들만한 용기가 있으니 어떠한 위력에도 굴하지 않을 것이요, 열 집 밖에 되지 않는 마을에도 반드시 충신이 있으니 성인의 말씀이 어찌 헛되겠습니까. 註287)


라 하였다. 여기에서 나주 유생들이 기우만을 대장으로 초청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사실은 또한 위의 글에서 “두령을 내는 데는 가르침을 받들어 추대할 것이요, 활과 창을 갖추어 예기를 길러서 일어서리니, 왜놈 양놈이 무슨 물건이간대 감히 침략하리오.”라고 하고 있음을 보아 분명해진다. 이들은 기우만의 명령을 따라 개화당은 물론 일본군을 물리칠 것을 천명하였다. 여기에서 나주의병이 반개화는 물론 척왜를 거의의 주요이념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기우만은 20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2월 11일 나주부로 들어갔다. 이는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나주유생들의 초청에 응한 것이다. 나주에서는 이미 서리들이 중심이 되어 이학상을 대장으로 삼은 바 있다. 이학상은 전직관료로 반동학적 입장을 견지했던 인물이다. 이때 동학 진압에 공을 세워 해주군수에 임명된 정석진과 담양군수에 임명된 민종렬이 적극적으로 호응하여 나주의병은 조직된 것이다. 이러한 나주의병의 조직에 나주부관찰사는 도피하였으나 참서관 안종수安淙洙는 거의를 저지시키고자 시도하였으나 2월 9일 나주의 아전과 군교들에게 피살된 바 있다.기우만의 나주 입성은 이러한 분위기에 나주의병들에게는 큰 힘이 되기에 충분하였으며, 이에 기우만을 총대장에 추대하기에 이르렀다. 2월 13일의 일이었다.
나주의병의 활동이 기반을 잡게 된 2월 22일 기우만은 인근에 다시 통문을 띄워 광주에 집결할 것을 통고하고 자신도 부대를 이끌고 광주로 이진하였다. 기우만은 광주향교를 본부로 하는 광산회맹소를 설치하고 의병을 초모하였다. 고향인 장성으로 향하지 않고 광주로 이진하게 된 것은 광주가 지리적으로 전남의 중심지라는 지리적 이점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로서 기우만은 광주부를, 이학상을 중심한 나주의병은 나주부를 장악하는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전주진위대 중대장 김병욱金炳旭에 의해 해남군수 정석진과 담양군수 민종렬이 체포되었다. 관군의 나주의병에 대한 처벌은 가혹하였다. 정석진이 체포되어 그해 3월 10일 현지에서 살해되었으며, 김창균金蒼均과 그의 아들 김철현金哲鉉, 그리고 영광의 향리 정상섭丁相燮도 처형되었다. 註288) 이처럼 나주의병은 관군에 의해 무참하게 진압되었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기우만은 선유사 신기선이 고종의 칙유를 전달하자 그해 4월 의병을 해산하기에 이르렀다. 황현은 기우만의 의병 해산을 정석진의 처형과 관련하여 그가 자신에 해가 올 것을 두려워하여 의병을 해산하였다고 비판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註289) 선봉장 기삼연은 이에 항거하여 장성으로 돌아가 의병의 재기를 도모하였으나 전주진위대에 체포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註 284] 기우만, 「檄文」,『松沙集』권12. ☞
[註 285] 기우만, 「檄文」,『松沙集』권12. ☞
[註 286] 지금까지 기우만이 광주향교에서 봉기한 것으로 되어있으나 위 사실로 보아 장성향교로 보인다. ☞
[註 287] 이병수, 「金城正義錄」,『독립운동사자료집』3, 1971. ☞
[註 288] 홍영기, 「1896년 나주의병의 결성과 활동」,『한국사학논총』하, 이기백고희기념논총간행위원회, 1994. ☞
[註 289] 황현,『매천야록』건양 원년 병신 정월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