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경기, 강원지역 의병 / 전기의병의 확대 / 한말 전기의병

몽유도원 2014. 1. 14. 08:32

제9권 한말 전기의병 / 제4장 전기의병의 확대

1. 경기지역 의병

2. 강원지역 의병

3. 충청지역 의병

4. 경상지역 의병

5. 호남지역 의병투쟁

6. 북한지역 의병투쟁



1. 경기지역 의병


1. 이천의병

이천의병은 단발령 공포 다음날인 1895년 12월 31일음 11월 16일 봉기하였다. 서울에 있던 김하락金河洛·구연영具然英·신용희申龍熙·김태원金泰元·조성학趙性學 등 젊은 유생들은 1월 1일 경기도 이천으로 내려가 이천 화포군 도영장 방춘식方春植을 영입하고 포군 100여 명을 포섭하여 이천의병을 결성하였다. 註1) 김하락 등은 이천의 이현梨峴에 진영을 설치하고 의병 모집에 착수했다. 구연영은 2개대의 포수를 거느리고 양근과 지평 방면에, 조성학 역시 2개대를 이끌고 광주 방면으로 떠났다. 김태원과 신용희는 안성과 음죽 방면에서 의병을 모집하였다. 그 결과 구연영·조성학·신용희는 각각 300여 명을 모집하였으며 민승천閔承天의 안성

의병과도 연합하여 이천수창의소를 결성했다. 이들은 민승천을 창의대장으로 삼고 김하락은 도지휘, 조성학은 도총, 신용희는 우군장, 구연영은 중군장, 김태원은 선봉장을 맡아 항일투쟁에 돌입하였다. 초기 단계의 편제표는 다음과 같다. 註2)



이천수창의소 지휘부 편제

창의대장 : 민승천

각군도지휘 : 김하락도총 : 조성학

좌군장 : 김귀성金龜性우군장 : 신용희

선봉장 : 김태원중군장 : 구연영

후군장 : 박주영朴周英소모 : 전귀석全貴錫

유격장 : 김경성金敬誠돌격장 : 심종만沈鍾萬

도지휘종사 : 안옥희安玉熙대장종사 : 최순룡崔順龍 김명신金明信

도총종사 : 조순희趙舜熙중군종사 : 최진엽崔鎭曄



이천창의소는 위와 같이 부대를 편성한 후 3기騎9대隊의 법에 따라 다음과 같이 전투편제를 편성하였다. 註3)



1기 1대십장 : 허봉룡許奉龍

2대십장 : 김봉학金奉學

3대십장 : 이경운李敬雲

2기 1대십장 : 이상태李相台

2대십장 : 김한룡金漢龍

3대십장 : 표금하表金河

3기 1대십장 : 문기현文奇現

2대십장 : 이준성李俊性

3대십장 : 신탁원申卓元

기총旗摠: 고기준高旗俊

1초초관 : 김순삼金順三

2초초관 : 고응선高應善

3초초관 : 권영수權榮壽

4초초관 : 홍대현洪大現

5초초관 : 김만석金萬錫

6초초관 : 한석기韓錫琪



이천의병은 1896년 1월 18일 이천의 백현에서 일본군과의 첫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때 전투상황을 김하락의『진중일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4일. 이른 아침에 조성학은 적을 맞아들여 두어 시간 동안 격전을 하다가, 갑자기 쇠북을 울리며 퇴군하여 백현으로 향해 달아나니, 적병이 고함을 치며 뒤를 따라 쫓아와 백현 아래 당도하였다. 그때 문득 대포소리가 울리며 구연영은 전면을 가로막고, 김귀성·신용희는 산 중턱으로부터 쏜살같이 내려오고 조성학은 적의 돌아갈 길을 횡단하여 사방에서 협격하니 적은 포위망 속에 빠져서 진퇴의 길이 없었다. 나는 군사를 지휘하여 엄습해 무찔러, 적병은 죽은 자가 수십 명이었고 우리 군사는 한 사람도 상한 자가 없었다. 한참 무찌르다 보니 날은 이미 저물어 초생달은 서쪽하늘에 떠 있는데 서릿바람은 뼛속을 뚫는 듯하였다. 이윽고 달은 지고 저녁 10시경이 되자, 적은 한가닥 길을 찾아서 암암리에 도망하므로 좌우의 우리 군사는 밤새도록 뒤를 쫓아 광주廣州 장항獐項장터에 도착하였는데, 바로 초닷샛날 새벽이었다. 샛별은 반짝이고 닭 울음은 여기저기 들리는데, 위 아래 행진에서는 포성이 끊어지지 않았다.


이천의병장 김하락과 『진중일기』

 

이때에 적병이 장터에서 잠간 휴식하다가 우리 군사가 쫓아오는 것을 보고 곧장 전면을 향하여 달아나므로, 뒤를 쫓아 습격하여 수십 명을 쏘아 넘어뜨리니, 많은 적이 혹은 총과 탄환을 버리고 혹은 찬 칼을 끌러 버리고 달아나므로, 쇠북을 울려 군사를 거두어 장항장터로 올라와 군사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먹였다. 註4)



이천의병은 위에서 볼 수 있듯이, 일본군수비대와 첫 전투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두었다.

이천의병은 이어 이현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치렀다. 일본군은 2월 12일 새벽 200여 명을 이끌고 이천으로 공격해 왔다. 김태원은 1초군을 거느리고 돌격전을 벌였다. 구연영 역시 1초군을 이끌고 이현 동구를 지켰고, 신용희와 심종은 각기 1초군을 거느리고 복병하고 있는 상태에서 전투가 개시되었다. 다음날 새벽까지 전투를 벌였으나, 이천의진 방향으로 눈보라가 일어 전세가 불리하였다. 결국 일본군의 공격에 의병은 패산하고 말았다.

이현전투에서 패한 김하락은 의병을 수습하였다. 그는 2월 14일 여주의 심상희를 찾아가 설득하여 군사 500여 명을 모집하여 이천으로 돌아왔다. 구연영 등도 잔여 의병들을 모집하여 도착하니 병력이 2천여 명에 달했다. 이들은 박주영을 의병대장에 추대하고 2월 28일 활동근거지를 남한산성으로 옮겼다. 남한산성에는 이미 심진원이 이끄는 광주의진이 진을 치고 있었다. 여기에 이승룡의 양근의병도 합세하였다.

연합의진의 남한산성 점령은 일제 침략군과 개화정권에 위협적이었음이 분명하다. 남한산성은 천연의 요새지였으며, 게다가 군수물자가 풍부히 저장되어 있었다. 김하락은 이때 남한산성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사방 산이 깎아지른 듯이 솟고 성첩이 견고하여 한 사람이 관문을 지키면 만명이라도 들어올 수 없는 곳이었다. 성중을 두루 살펴보니 쌓인 곡식이 산더미 같고 식염이 수백 석에 달하고 무기도 구비되어 대완기大琬器가 수십 자루, 천자포天字砲·지학포地學砲도 역시 수십 자루, 천보총千步銃이 수백 자루였고, 나머지 조총鳥銃도 수효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며 탄약 철환이 산더미 같았다. 여러 장수들은 군용이 유여한데다 진칠 곳마저 견고하여 몹시 기뻐하였다. 註5)



정부는 의병의 남한산성 점령 소식에 크게 당황하였다. 친위대 1개 중대가 대포를 끌고 남한산성으로 몰려와 사면을 포위하였다. 관군의 공격은 3월 5일부터 시작되었다. 이 전투에서 관군은 크게 패하였다. 의병은 송파 부근까지 추격하여 관군의 대포마저 빼앗았다. 註6) 정부는 강화도 지방병 300여 명을 남한산성에 증파하여 항복을 권유하였다. 다수의 일본군도 파견되었다. 의병은 며칠간의 전투에서 연이어 승리를 거두었다.

의진과 관군과 전투가 있은 후 한동안 소강상태가 지속되었다. 의병대에서는 이때 러시아공사관에 있는 군부대신 이윤용에게 3인의 밀사를 파견하여 아관파천 후 새로 조직된 친러정권의 협조를 요청하기도 하였으나 이윤용은 이들 밀사들을 체포·구금하고 말았다. 註7)

이어 정부에서는 참령 장기렴에게 1개 혼성대대의 병력을 주어 남한산성의 의병대를 공격하게 하였다. 장기렴부대는 일본군의 지원을 받으며 공격해 왔으나 의병의 반격으로 격퇴당했다. 그러나 3월 22일 후군장 박준영과 좌군장 김귀성이 관군의 꼬임에 빠져 병사들에게 술을 먹이고 성문을 열어주고 말았다. 의진은 대항하지도 못한 채 패전하고 말았다.

김하락 등은 박준영 3부자를 처단한 후 산성을 탈출하였다. 이들은 김하락을 대장에 추대하고 안동·의성·경주 등지로 이진하면서 의병활동을 계속했다. 일행은 4월 9일 여주를 경유 4월 12일 제천에 도착하여 제천의병의 환대를 받았다. 이때 의병장 유인석으로부터 제천의병에 합류할 것을 제의받고 제천의병에 합세하여 전투를 수행하기도 하였으나 다시 단양·풍기를 거쳐 4월 20일 안동에 도착하였다. 안동에서 서상열의진과 연합을 시도하였으나 상호간 전투방법의 차이로 결국 김하락의진은 의성의 금성면金城面에 있는 수정사水淨寺를 거점으로 확보하고 의병활동을 전개했다. 이때 김하락의진에서 벌인 주요 전투는 5월 14일의 청송의 성황현城隍峴전투, 5월 20일의 의성의 비봉산飛鳳山전투가 있다. 그러나 관군의 추격에 김하락은 경주로 이진하여 경주의병과 연합의진을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경주의병의 대장은 이채구李采九였다.

경주연합의진은 6월 17일 경주성을 공격·점령하였다. 그러나 대구부에서 파견된 관군과 대구주둔 일본군수비대가 경주성을 공격하여 6월 23일 결국 경주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김하락은 이후 영덕으로 이동하여 신돌석의진과 연합하였다. 7월 9일에는 안동의병의 유시연 부대와도 합진하여 영덕관아 공격을 계획했다. 7월 12일 이채구·이준구 등의 선발대를 영덕으로 출병시키고 자신은 7월 14일 조성학 등과 함께 영덕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영덕에서 관군의 불시 공격을 받기에 이르렀으며 결국 의진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김하락은 와중에 중상을 입고 “왜놈들에게 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고기 뱃속에 장사를 지내겠다.”고 강물에 투신·자결하였다. 註8) 이로서 이천의병의 항일투쟁은 종지부를 찍었으나 제천의진·안동의진·경주의진·영덕의진 등과 끊임없이 연합의진을 편성하면서 끈질긴 항일투쟁을 전개하는 등 투쟁성에서 큰 발자취를 남겼다.


2. 양근의병

양근 출신의 이승룡李承龍은 양근지역에서 의병을 이끌고 남한산성에 입성하여 항쟁하다가 관군의 꼬임에 체포되어 순국하였다. 註9) 이보다 앞서 광주 출신의 구연영이 이천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양근과 지평으로 와서 의병 300여 명을 모집하여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이천수창의소의 주력부대의 하나로 활동하였다. 이때 이승룡도 양근의 의병들을 이끌고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이승룡은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민영환을 만나 통곡하고 양근으로 돌아와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몰아내고 원수를 갚고자 하였다. 그는 ‘척왜국모보수지기斥倭國母報讎之旗’라고 쓴 기를 30여 개 만들어 세워놓고 의병을 모아 전술훈련을 시켰다. 그는 가사를 아들에게 맡기고 의병을 이끌고 서울을 향하여 2월 하순음 1월 초 경에 남한산성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그는 광주군수 박기인朴基仁을 체포하여 참하였다. 註10)김하락의 이천의병은 양근의병이 입성한 이후인 2월 28일음 1월 16일 남한산성에 입성한 것으로 보인다. 註11)

김윤식은 그의『속음청사』에서 “양근과 광주의 비도들이 남한으로 모여들어 백성들의 전곡을 거두어들이며 굳게 지킬 계획을 하여 경영병京營兵이 이들을 공격하였으나 패퇴하고 대포 1문을 잃었다. 적세는 더욱 떨쳤다 한다.” 註12)라고 하여 의병을 ‘비도’로 보는 관리의 태도를 보여주고 있지만, 남한산성에 양근의 병사들이 주력부대의 하나로 편성되어 있음을 알려준다.

양근의병은 바로 이승룡이 모집하여 이끌고 간 부대로 보인다. 즉『동경조일신문』1896년 4월 1일자3월 18일 경성 발에 의하면,



남한산성의 적수賊數는 약 1천 6백 명으로 그중에 1천명은 광주·이천·양근 등의 포군 즉 구지방병이고 그 나머지 6백 명은 광주의 농민이다. 적의 수괴는 광주의병장 심영택沈營澤, 이천의병장 박주영朴周英, 양근의병장 이석용李錫容의 3인이다. 註13)



라고 하여 남한산성의 의병 중에 광주의병과 이천의병·양근의병이 1천여 명에 달하며, 양근의병장으로 ‘이석용’을 거론하는데 이석용이 바로 ‘이승룡’으로 보인다. 당시 양근의 의병장으로 남한산성에 입성한 이로는 이승룡 외의 인물이 아직 확인이 안된다. 동경조일신문사 기자 서하통철西河通徹이 이승룡과 비슷한 발음인 이석용으로 잘못 전달한 것으로 보인다.

남한산성의 의병은 3월 22일음 2월 9일 관군과 일본군의 공격에 성을 내주고 양근 방향으로 패산했다. 이때 정황을『동경조일신문』은 다음과 같이 알려주고 있다.



원래 동지同地의 적은 광주·이천·안성·양근 등 제적諸賊이 오합烏合된 것으로 … 22일 오전 2시경에 산성의 서문에서 홀입忽入해 바로 산정山頂에 올라 성을 내려다보고 일제히 사격을 가하고 또 대성大聲하였더니 적은 예상보다 더 병기저상兵氣沮喪해 있다가 위로부터 불의의 공격을 받자 낭패하여 급히 동문에서 양근陽根, 楊根의 오기, 필자방향으로 궤주하였다. 4시반 경에는 험요무비險要無比의 남한산성은 정토군征討軍에 점거한 바가 되었다. 정토군은 적을 쫓아 30명을 생금生擒하고 동문 부근에서 20여 명을 죽이고, 다음에 생금자生擒者도 살해했다 한다. 註14)



이에 의하면, 남한산성에 웅거하고 있던 양근을 비롯한 광주·이천·안성의 의병이 3월 22일 새벽 2시경부터 관군의 공격을 받아 4시반 경에 동문을 통하여 양근 방향으로 궤주하였다. 동문의 공방전에서 20여 명이 죽었고 포로 30명도 모두 살해했다.

이승룡은 2월 하순 경에 양근의병을 이끌고 남한산성에 입성하였으며,『동경조일신문』4월 1일자 기사에 의하면, 기사 발송일인 3월 18일 현재 양근의병장으로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그가 서울의 윤모尹某로부터 내외에서 협공하자는 비밀 서신을 받고 상경하였으나 오히려 관군에 의해 체포되었다가 1896년 3월 27일음 2월 14일 남한산성에서 살해되어 순국하고 말았다. 註15)

[註 1] 유한철, 「김하락의진의 의병활동」,『한국독립운동사연구』3,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9, 3쪽. 

김하락(1846~1896)은 경북 의성 출신으로 자는 季三, 호는 海雲堂, 본관은 의성이다. 조상학은 김하락의 이종제로 경북 풍기 출신이다. 구연영은 경기도 광주 출신으로 자는 春景, 본관은 능성이다. 그의 부친은 具哲祖로 유인석의 제천의병에서 활동하였다. 김태원(1863~1933)은 서울 출신으로 자는 春伯, 호는 集義堂, 본관은 해풍이다. 문집으로 『집의당유고』가 있으며 유인석의 문인이다. ☞

[註 2] 김하락,『진중일기』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1, 1971, 586쪽). ☞

[註 3] 김하락,『진중일기』참조. ☞

[註 4] 김하락,『진중일기』 585~586쪽. ☞

[註 5] 김하락,『진중일기』 591쪽. ☞

[註 6]『동경조일신문』1896년 3월 18일자. ☞

[註 7]『동경조일신문』1896년 3월 17일자. ☞

[註 8] 김하락,『진중일기』 615쪽. ☞

[註 9] 「延安南大池水稅節目」(辛卯 光緖 17年正月 成冊). 

이승룡(1853~1896, 자 秀雲, 호 錦坡, 본관 靑海)은 靑海伯 襄烈公 李之蘭의 15대 손이다. 경기도 양근군 동종면 대곡리(현 양평읍 대흥리)에서 부친 五衛將 殷錫과 경주최씨 사이에서 4남으로 태어났다. 10세에 사서삼경을 통독하고 13세에 안동 김씨와 혼인하였다. 14세 때인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났다는 소문을 들은 그는 벽에다 ‘의병장이승룡’이라 써놓고 상경했다고 전한다. 25세 되던 1877년 무과에 급제하여 부호군의 직에 올랐으며, 1882년 임오군란시 민겸호가 살해되자 시신을 수습하여 그 아들인 민영환 집으로 호송하였다. 이 일로 민영환과 교분이 두터워졌다. 1890년에 통정대부에 올라 강령현감과 해주진관 병마절제도위에 임명되었다. 그는 그 해 2월에 강령현감으로 부임하여 延安지역의 南大池 아래에서 경작하는 주민들이 관개 문제로 민요가 일어남에 이를 해결하고 節目을 정해 수습하였다. 이승룡 관련 자료는 이 외에도 강령현감으로 재직시 기록한 「光緖 17年8月 日 本縣重記成 冊」과 「康翎縣監李承龍日記」 (1891년 5월 9일~1891년 5월 14일)를 증손 李重臣이 소장하고 있다. ☞

[註 10] 李延秊, 「康翎公諱承龍家狀」 (필사본). ☞

[註 11] 유한철, 「김하락의진의 의병활동」,『한국독립운동사연구』3, 17~18쪽. 

김하락의『진중일기』에서는 ‘1월 30일’(양력 3월 13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

[註 12] 김윤식,『속음청사』권8, 394쪽. 

“聞陽根廣州匪徒 聚于南漢 斂民錢穀 爲固守計 京營兵攻之敗退 失大砲一尊 賊勢愈張.” ☞

[註 13]『동경조일신문』1896年 4월 18일 「南漢山の賊狀」. ☞

[註 14]『동경조일신문』1896년 4월 5일 朝鮮時事 「南漢山賊徒潰走」. ☞

[註 15] 김상기, 「한말 양평에서의 의병항쟁과 의병장」,『호서사학』37, 호서사학회, 2004, 150쪽. ☞


2. 강원지역 의병


1. 춘천의병

춘천의병은 강원도 관찰부의 소재지인 춘천을 중심으로 활동한 의병을 말한다. 이 지역은 이항로의 학통을 이은 유중교柳重敎·유홍석柳弘錫·이소응李昭應 등 척사론자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어 의병봉기의 분위기는 성숙되어 있었다.

춘천의병은 춘천의 사민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춘천의 선비인 정인회는 을미사변에 분개하여 기회를 보던 중에 단발령이 공포되자 단발령에 불안해하는 군경과 비밀리에 기맥을 통하였다. 그는 군인 중에 신망이 있는 성익현成益鉉과 용력과 담력이 있는 것으로 유명한 박현성朴賢成과 뜻을 함께 하고 그들을 통하여 군인과 상인 세력을 의병에 합세했다. 춘천지역의 유림들도 이에 합세하였으니, 이소응의 종조인 이면수는 산외에서 통문을 돌렸으며, 이수춘과 민영문 역시 의병을 모집하였다. 이들은 1896년 1월 18일 춘천의 모처에서 의병을 봉기하고 춘천관찰부를 습격·점령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전유수인 민두호閔斗鎬의 생사당을 파괴하였다. 이어 인근의 농민과 보부상이 의진에 참여하여 의진이 확대 되었다. 


춘천의병장 이소응


1월 20일에는 당시 명망이 높던 이소응을 대장으로 추대하였다. 이소응은 대장에 올라 봉의산을 의진의 본부로 삼고, 제단을 쌓아 천제를 지냈다. 이어 의병의 자진 해산을 요구한 초관 박진희를 죽여 머리를 홍문위에 매달았다. 註16)

이소응은 춘천부의 공전을 군수전으로 충당하고 인근의 부호들로부터 군수품을 받아 군량으로 사용하였다. 1월 28일에는 단발하고 부임하는 신임관찰사 겸 선유사 조인승曺寅承을 가평에서 체포하여 춘천으로 압송하여 춘천부 청사 앞의 처형장 ‘개못개’에서 총살하였다. 조인승의 포살형 소식에 군부대신 조희연은 1월 31일 친위대 1개 중대를 춘천에 파견하였으며, 이어서 경군과 포병을 증파하였다. 註17)

이소응은 1월 31일 다음과 같은 「격고팔도」라는 창의격문을 발표하여 의병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였다.



지금 왜노倭奴가 창궐하여 국내의 적신이 왜노에게 붙어 아첨하여 국모를 시해하고 임금의 머리카락을 강제로 자르고 만백성을 몰아다 개나 양의 무리 속에 빠뜨려 요·순,공자·주자의 도가 땅에 떨어져 소진되기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황천상제皇天上帝는 하늘에서 크게 진노하시고 국가의 모든 군대와 만 백성들은 모두 그들을 불공대천의 원수로 생각하고 있다. 무릇 우리 곳곳에서 봉기한 충의의 장수들은 반드시 중화를 높이고 이적을 물리치고 국가를 위하여 원수를 갚고 치욕을 씻는 것을 제일의 대의로 삼아야 한다. 의병이 이르는 곳의 각영 각읍의 관장 중 만약 편리함을 꾀하여 관망하며 즉시 의병에 호응하지 않는 자와 적 편에 붙어서 군정을 방해하고 헐뜯는 자가 있으면 이들은 모두 이적과 금수의 앞잡이요, 난신과 적자의 도당이리니, 결단코 군율을 시행하여 먼저 베고 나중에 보고해도 좋다. 註18)



이소응은 이 격문에서 ‘왜노’와 적신들이 국모를 시역하고 군부의 머리를 깎은 처사에 의병을 일으켰음을 분명히 하였다. 이어서 그는 중화를 높이고 이적을 물리쳐 국가의 원수를 갚아 치욕을 씻을 것이며 의병을 방해하는 지방관은 응징할 것을 천명하였다.

춘천의병은 이즈음 고종이 보낸 밀조를 받은 것으로 알려진다. 의진은 서울 진격을 목표로 삼았다. 2월 1일 성익현 휘하의 의병 선봉대는 경춘가도의 안보역에 도착하였다. 다음날 관군이 가평에 주둔하고 있다는 소식에 더 진격하지 못하고 가평의 벌업산寶納山에 진을 쳤다. 춘천의병은 이충응이 거느리는 가평의병과 연합하여 관군과의 전투를 감행했으나 무기와 훈련부족으로 춘천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대장 이소응은 그의 종제 이진응과 이경응에게 의진을 위임한 뒤 원병을 요청하기 위해 지평으로 갔으나 오히려 맹영재에게 구속되었다. 이소응이 없는 사이에 의병은 관군의 공격을 받았다. 관군과의 전투는 2월 8일 약사현 뒷산에서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이진응이 지휘하는 의병은 패산하였고 이진응은 관군에게 포위당하자 우물에 빠져 자결하였다.

의병들은 관군이 회군한 직후, 이진응의 동생 이경응을 대장에 추대하고 의병을 다시 모아 3월 15일경에는 군세가 전보다 2배나 성했다고 한다. 춘천의병은 재차 서울로 진격하여 3월 17일에 양근에서 20리 떨어진 광진 상류에서 한강을 넘어 이천의병과의 연합작전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남한산성이 관군과 일본군에 의해 포위되고 얼마 안가 산성이 함락됨에 춘천으로 회군하였으나 관군의 공세에 5월 초에 대장 이경응과 수문장 장한두·성익현 등은 의병을 거느리고 강릉의 민용호의병에 합류하였다. 유중락·유홍석·김경달 등 가평 일대에서 유격전을 수행하던 의병들은 유인석의 제천의병에 합류하여 활동을 계속했다. 註19)


2. 민용호의 관동창의진

여주 출신의 민용호閔龍鎬 註20)는 1월 30일 평창·영월·정선지방의 포수로 의진을 구성하여 1896년 1월 17일 원주의 남쪽 30여리 떨어진 신림神林에서 이병채·송형순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 대장에 추대되었다. 민용호의진은 평창을 점령하고 1월 24일 방림에서 다음과 같은 격문을 발표하여 의병의 뜻을 밝혔다.



… 우리가 비록 산더미처럼 식량을 쌓아놓는다 하더라도 어찌 우리의 식량이 될 수 있겠으며, 비록 옥같은 자식이 있으나 어찌 우리 집안을 보전할 수 있으리요. 이미 식량이 있어도 살 수가 없으며 자식이 있어도 보전할 수가 없다면 마치 사지에서 목숨을 구하며 위태로움에서 편안함을 도모하는 것과 같다. 아버지가 자식을 부르고 형이 아우를 격려하여 기를 세워 의병을 모아 적을 치고 원수를 갚아 한편으로는 부모가 물려준 신체의 지중함을 온전히 간직해 장차 있을 끝없는 환란을 면하고자 한다. 이것이 내가 전후를 돌보지 않으며 강약을 두려워하지 않고 관동에다 의기를 세운 이유이다. 註21)



민용호는 1월 29일 강릉 진입을 눈앞에 두고 의진을 편제하였다.



의병장 : 민용호

좌군장 : 김원섭 전군장 : 강우서

우군장 : 이병채후군장 : 박한옥



민용호는 강릉에 진입하여 강릉의 토착세력을 포섭하고 경무관보 고준식을 처단하였으며, 강릉의 선비 권인규를 초빙하여 각종 포고문을 작성하여 의병의 뜻을 널리 전파하였다. 육지와 해안에 봉수장烽燧將과 망해장望海將을 두었으며, 무사청과 예빈소도 설치하였다. 또한 권익현·권명수·이경한·김윤희 등을 강원도와 함경도 각지에 소모사로 파견하여 의병 모집과 일본군 방어의 임무를 맡겼다.

민용호가 이끄는 2천여 명의 강릉의병은 원산의 일본인거류지 공격을 계획하였다. 당시 원산에는 일본인 1,400여 명이 거류하고 있었으니 공격의 주목표가 되기에 충분했다. 민용호부대는 3월 4일 강릉을 출발하여 3월 9일에는 고성군수의 영접을 받았다. 3월 11일에 통천에 도착하였으며, 3월 17일에는 원산의 길목인 선평仙坪에 진을 쳤다. 註22) 이때 민용호는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낸 것으로 보아 러시아의 지원을 요청한 것으로 보인다.


강릉의병장 민용호


조선 창의대장 閔민용호은 삼가 백배하고 아국俄國 대인大人에게 글을 올립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밝혀 살피소서. 몰래 엿들으니 귀국의 대의는 망함을 보존하고 끊어짐을 이어 약한 자를 붙들고 강한 자를 억눌러 신의가 바다 안팎에 알려졌다 하니 다른 여러 나라에서 누가 공경하고 우러르지 않겠습니다. 오로지 우리 조선이 본디 의관문물衣冠文物의 나라라고 불리어, 그 다스림은 예악과 교화로 하고 그 학문은 시서와 춘추로 하였으니 무릇 어찌 나라의 운세가 오르내리겠습니까. 또한 이 간사한 신하가 정치를 어지럽히고, 저 왜추倭酋가 틈을 엿보다 때를 타서 개화라 칭하면서 도성 안으로 들어와 소란을 피우니 그 창궐猖獗한 바를 가히 차마 말로 다 하겠습니까.

아, 슬픕니다. 작년1895 8월의 변變과 11월 16일의 화禍와 우리의 의관제도를 없앤 일과 우리의 머리털을 깎는 행위는 고금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천지신명이 어찌 크게 진노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떳떳한 의선비들이 모여 능히 스스로 창의하여 토벌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하늘이 버리지 않아 (황제가) 귀 진영에 왕림하시니 어찌 마른 고기에게 물이 되며, 마른 싹에게 비가 되지 않겠습니까. 기뻐서 손뼉 치며 뛰고 싶은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이에 감히 눈물로 고하니, 다행히 태산 같은 은혜와 하해 같은 덕택을 드리워서, 잔폐한 이 나라로 하여금 한번은 군부의 원수를 갚고, 한번은 사직을 안정하게 하여 주시기를 천만번 엎드려 바랍니다.

(1896) 2월 3일 註23)


관동창의록

 

2월 3일은 양력으로 3월 16일에 해당한다. 이로 보아 민용호는 원산 공격 직전에 러시아와 연합작전을 계획했던 것 같다. 

의병의 원산 공격 소식이 전해졌는지 원산 일대에서 주민들의 피난 소동이 일어났다. 원산수비대장 중천우수中川祐須 소좌는 정찰병과 한인 정보원을 파견하여 의병의 동태를 살폈다. 註24) 이어서 중천 소좌는 17일에 40명, 18일에 25의 수비대 병력을 연안 가도를 타고 선평으로 출동시켰다. 註25) 일본 대본영에서는 의병이 원산을 내습하기 위하여 이동한다는 급보를 전달받고 곧바로 육전대陸戰隊 병력을 실은 군함 고웅호高雄號를 파견하여 3월 16일 원산항에 입항하게 하였다. 의병이 선평에 주둔해 있다는 첩보를 받고 다음날인 3월 17일 오전에 수병 1개 소대와 야포대를 상륙시켰다. 註26)

강릉의병의 일본군과 전투는 3월 19일 선평장에서 일본군의 기습으로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의병이 선평에 주둔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더구나 진눈깨비로 의병들이 화승총을 쏠 수 없는 악천후를 이용하여 선제 공격을 감행했다. 전투에 참여한 일본군은 원산수비대와 군함 고웅호에서 파견한 육전대 등 도합 150여 명 정도로 이들이 천여 명의 의병과 격전하였다. 註27) 당시 전투 상황은 원산수비대장 중천 소좌가 대본영의 소전小田 대좌에게 올린 보고서에 자세히 나와 있다. 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註28)



보고

우리 남진파견대南進派遣隊로부터 19일 오후 6시 보낸 보고가 20일 오후1시 50분에 도착하였습니다. 보고에 의하면 19일의 정황은 다음과 같습니다. 안변에서 우회한 병사는 어제 19일 오전 3시 출발하여 신천동新泉洞을 지나 신평장新坪場의 측면으로 나가 오전 8시 서왕동西王洞 마을 끝에 도착하여 적군의 함성을 듣고 소대를 3등분하여 그 2분대를 양쪽 산 정상으로 올리고 1분대는 중앙에 위치하여 8시 40분에 전투를 시작하여 2시간을 소비하여 우리 병사는 3면을 돌파하여 10시 30분 신평장을 점령하였습니다. 우리 연안전진대沿岸前進隊는 선평장 북방의 언덕길을 올라가자 마침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진격하여 신평장에 도달하였을 때는 안변으로 우회한 병사가 이미 신평장을 점령하였으며 적

은 동쪽 산맥 회양으로 도망갔습니다. 또 흡곡歙谷 쪽으로 퇴각한 자도 적지 않습니다.

적의 총군사 1천 명

아병 사상자 없음

적의 사망자 30여 명, 포로 5명

아군은 신평장에서 명령을 기다립니다. 이상 보고합니다.

1896년 3월 20일



위 보고에서 볼 수 있듯이 선평전투는 3월 19일 오전 8시 40분부터 시작되어 10시 30분에 끝났다. 제천의병이 며칠간의 혈전을 했다면 강릉의병은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불과 2시간 만에 패퇴하고 말았다. 강릉의병은 사망자 30여 명과 5명의 포로를 남기고 회양과 흡곡으로 패주했다. 註29) 민용호는 이 전투의 상황을『관동창의록關東倡義錄』에 자세히 기록해 놓고 있는데, 이에 의하면 일본군이 총격을 하면서 돌격해 오는데 진눈깨비가 내려 화승총과 활을 쏠 수가 없었으며, 운무가 사방에 깔려 지척을 구분할 수 없어 적진으로 들어가 포로가 된 자도 있었다고 한탄하였다. 註30)

일본군 수비대장 중천우수 소좌는 3월 21일 군함 고웅호 함장인 소전 대좌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신평장에서 압수한 무기와 기타 서류가 너무 많아서 아직 조사를 완료하지 못했습니다. 또 포로 여러 명을 구금하였습니다.” 註31)라고 승전보를 올렸다. 그는 또한 이 전투에 참여한 의병

의 총수를 1천여 명으로 보고하였다. 註32)

민용호부대는 이 전투에서 패하고 강릉으로 집결하였다. 주한일본 원산 영사는 신평장에서 쫓겨난 의병이 강릉에 집결했으며, 민용호부대는 의병을 다시 모아 원산을 다시 공격할지 모른다며 의병의 활동을 본국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신평장에서 방축된 폭도는 일단 강릉에 집합하였는데, 의장 민영호閔永鎬, 閔龍鎬,이병채李秉采, 춘천인 권익형權益衡, 강릉인의 세 명은 또 다시 6백여 명의 병사를 모집하고 양양에 와서 거류지를 습격하겠다고 공언하며 현재 출발 준비를 하고 있으므로 자칫하면 가까운 시일에 원산항 부근에 내습할지 모른다. 註33)



즉 민용호는 다시 6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원산 재공격의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계획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민용호는 각 지역의 의병장에게 격문을 보내어 상호 협력할 것을 호소했다. 이에 영양의 김도현金道鉉이 6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합세하였으며, 삼척의 김헌경 의병장과도 연합하여 삼척의 삼봉산에서 전투를 치렀다. 4월 14일 치러진 이 전투에서 의병은 유리한 지형을 이용하여 항전하였으나 탄약의 고갈로 결국 오십천변으로 퇴각하고 말았다. 민용호부대는 6월 중순 양양전투에서 승리하는 등 항전을 계속하였으며, 그후 9월 9일에 고원과 영흥을 지나 9월 18일 함흥으로 들어갔다. 함흥에서 일본군과 큰 전투를 치렀으나 신무보申武涉 이하 20여 명의 전사자만 남기고 성진으로 북진하였다. 註34) 그후 그는 의병을 해산하고 김봉규金奉奎 등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 통화현通化縣 칠도구七道溝로 들어가 원세개袁世凱를 만나 청국의 원조를 요청하는 등 활동하다가 귀국했다.


3. 권인규의 강릉의병

권인규權仁圭, 1843~1899는 일본에 의해 을미사변이 자행되고 단발령이 공포되는 사태를 보고 비록 나이 들고 병들었으나 목숨 바쳐 ‘도이島夷, 섬오랑캐’를 물리칠 것을 맹서하였다. 註35) 권인규의 거의 논리는 철저한 위정척사론에 기반하고 있었다. 그는 의병을 일으키는 것을 ‘척사부정斥邪扶正’, 즉 사도를 물리치고 정도를 붙잡는 행위로 보았다.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 의병을 일으키는 행위는 의리를 실천하는 것으로 하늘의 도움으로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라면서 의병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였다. 註36)

권인규는 처음에는 민용호의진에 참여하여 의병투쟁을 전개하였다. 여주 출신인 민용호는 단발령이 내려진 직후 여주를 떠나 1895년 12월 1일 원주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그는 송형순·이병채 등과 의병을 모집하고 의병을 일으켰다. 민용호는 평창의 방림에서 격문을 발표하고 인근에서 의병을 모집하였으며 12월 18일양 2월 1일 강릉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도사 이승학李承學 등 강릉의 토착세력에게 군무첩을 내려 이들을 의병에 편입시켰다. 註37)

권인규가 민용호와 만난 것은 민용호가 강릉에 들어온 직후로 보인다. 권인규는 민용호와 만난 후에 민용호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권인규는 민용호의진에서 주로 격문 또는 포고문 등의 문서를 작성하여 의병의 당위성을 피력하였다. 민용호의진에서 나온 그는 「창의포고문」을 발표하여 민용호의진인 ‘관동9군도창의소’가 설치된 사실을 널리 알리고 의병에 참여할 것을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다.



아! 우리 5백년 대소 신민들아, 저 왜놈의 극악함은 어찌 차마 더 말할 수 있겠는가. 강산에는 아직도 2릉陵의 원수가 남아 있고, 천지에는 또 8월의 변고가 일어났으니, 설사 그놈들의 배를 쪼개고 그 놈들의 간을 씹지 못할망정 또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깎으며 그놈들의 호령을 따른 단 말이냐. 원통하고 원통하다. 註38)



권인규는 일본을 임진왜란의 원수이며, 국모를 시해한 ‘섬오랑캐’라면서 철저한 척왜론적 인식을 견지하였음을 볼 수 있다. 그는 우리가 원수를 갚지도 못했는데 또 고개를 숙이고 단발령과 같은 그들의 정책을 따를 수 없음을 분명히 밝혔다. 권인규의 이 포고문은 그가 민용호를 만난 직후인 12월 말에 발표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그가 민용호에게 보낸 편지에서



오직 타고난 양심은 일찍이 하루도 의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요즘 창의통고

문을 마련하여 네거리에 써 붙이고 대소 인민과 왕래하는 나그네들을 타일러서 의를 따르는 자의 마음을 고동시켜 격려하고 분발하게 하였는데 과연 보셨습니까? 註39)



라고 창의통고문을 사방에 써 붙였음을 밝히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다.

권인규는 1896년 설을 세고 민용호부대에 다시 참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때 관서와 관북지역의 사민들에게 의병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는 「창의통문」을 돌렸다. 여기에서 그는 강릉지역에 의병도창의소가 창설되었음을 알리고, 관북은 이성계가 왕업의 기초를 닦은 곳이요, 관서는 기자의 첫 교화를 받은 곳이라면서 이 난세를 당하여 한 번 죽어 대의를 이룰 것을 주창했다. 또한 그는



슬프다. 사람이란 죽고 사는 문제가 제일 큰 것이지만, 그러나 머리 깎고 살면 살아도 욕이요, 의를 안고 죽으면 죽어도 역시 영광이다. 하물며 여러분께서는 모두 공자 맹자를 외우고 법 받는 처지이니 몸을 죽여 인을 이룬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또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인을 이루고 의를 취하는 것이 바로 이때에 있으니 부디 힘쓰소서. 註40)



라면서 ‘살신성인’과 ‘사생취의捨生取義’의 정신으로 의병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권인규는 또한 각 항구에서 일본에 붙어서 생활하는 자들에게 「효유문」을 발표하였다. 그는 이 효유문에서 “우리 땅에 머물러 있는 왜놈은 종자도 없이 모조리 없애야 한다.” 또는 “소위 우리나라 대신으로 왜놈

의 심복이 된 자와 수령들로 백성을 협박하여 머리를 깎게 하는 자는 용서없이 처단해야 한다.”라면서 일제와 그에 붙은 부일개화파를 철저히 처단해야 할 것을 밝혔다. 아울러 그는 의병이 거리에 넘치고 있으며, 의병이 가는 길에 일제와 붙어 협력하는 자는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음을 경고하였다. 이어서 의병에 합세하여 일제를 격퇴하는데 합력할 것을 다음과 같이 부르짖었다.



오늘의 의거는 충분히 격동되어 사생을 헤아리지 않고 왜적을 쳐 없애기로 다짐한 것이니 도道마다 의병이요, 읍마다 의병이라. 의병이 있는 곳에는 하늘이 돕고 귀신이 도울 것이니 저 극악한 왜놈들은 반드시 멸망하고 말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 동포로써 왜놈을 끼고 작난하는 몸은 어찌 밝은 이 하늘아래 목숨을 보존할소냐. 너희들의 타고난 양심으로 돌아오고 우리 선왕의 끼친 은택을 생각하여 의병이 가거들랑 총부리를 거꾸로 돌리고 따라 붙어 함께 추한 무리를 쓸어버리고 영원히 이 강산을 깨끗이 하자. 아! 5백년 역사를 가진 우리 선왕의 유민들이여. 註41)



한편 권인규는 민용호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자신의 방책을 제시하여 의리에 입각한 의병 정신에 입각하여 의병투쟁을 지도해 나갈 것을 권유하였다.



① 일의 대소를 막론하고 의리로 미루어 나갈 것.

② 사람을 쓰는데 반드시 심지가 깨끗하고 충의가 돈독한 자를 택하여 소임을 맡길 것

③ 이욕利慾을 영위하는 협잡배는 일체 쓰지 말 것.

④ 재정을 마련하는데 공정한 마음으로 경중을 헤아리고 우열을 따지며 사의私意로써 후박厚薄을 두지 말 것. 註42)



그러나 민용호의병은 원산의 선평전투에서 일본군에게 참패하고 말았다.

권인규가 1896년 음력 2월 유진장 이병채에게 보낸 편지가 남아 있는데, 바로 이 선평전투 직후 보낸 것으로 보인다. 그는 편지에서 “북진의 첩보를 밤낮으로 바라고 바랐는데, 마침내 실패했다는 기별을 들으니 하늘이 의사를 돕지 아니하여 그런 것인가. 아니면 인사가 잘못되어서 그런 것인가. 책상을 치며 크게 소리치자 피눈물이 쏟아집니다.”라면서 이어서



그러나 승패는 병사의 상사니 한번의 실책으로 기운을 잃지 말고 더욱 분발하여 덕으로써 인심을 무마하고 의로써 사기를 고동시켜 뒷일을 튼튼히 하면 오늘의 한 번 실패가 후일 백전백승의 복선伏線이 될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註43)



라고 승패는 병가의 상사이니 기운을 잃지 말고 인심을 회복하여 재기를 도모하도록 격려하였다.

[註 16] 오영섭, 「춘천지역의 을미의병운동」, 『북한강 유역의 유학사상』 한림대 아시아문화연구소, 1998, 169~174쪽. ☞

[註 17] 오영섭, 「춘천지역의 을미의병운동」, 『북한강 유역의 유학사상』 187~189쪽. ☞

[註 18] 이소응, 「격고팔도」, 『습재집』 권33 ; 오영섭, 「춘천지역의 을미의병운동」,『북한강 유역의 유학사상』 189쪽. ☞

[註 19] 이구용, 「춘천의병의 항일투쟁」,『춘천항일독립운동사』 춘천문화원, 1999, 60쪽. ☞

[註 20] 민용호(1869~1922)는 경남 산청의 梧谷 출신으로 청년시절 서울과 여주로 이거하여 살았다. 자는 文賢, 호는 復齋이다. 문집으로『復齋集』이 있다. ☞

[註 21] 국사편찬위원회,『관동창의록』 1984, 7~8쪽. ☞

[註 22] 일본의 보고서에서는 仙坪을 新坪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같은 마을인 듯하다. 여기서는『관동창의록』에 표기된대로 선평으로 사용하기로 한다. ☞

[註 23] 김상기 편역, 「기밀 제20호」,『한말의병자료』2,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24쪽. ☞

[註 24] 김상기 편역, 「海參 61호」,『한말의병자료』2, 95쪽. ☞

[註 25] 김상기 편역, 「機密 제14호」,『한말의병자료』2, 104쪽. ☞

[註 26] 김상기 편역, 「海參 61호」,『한말의병자료』2, 93~95쪽. ☞

[註 27] 김상기 편역, 「公 제34호」,『한말의병자료』2, 101~102쪽. ☞

[註 28] 김상기 편역, 「海參제62호」,『한말의병자료』2, 96~97쪽. ☞

[註 29] 「在元山領事의 報告」 34) 公 제34호, 35) 機密 제14호, 63) 「筆錄書」 등 참조. 

이 자료에 의하면, 일본군의 총수를 150여 명이라고 보고하고 있다. 당시 원산수비대의 총인원은 200명 정도라고 한다(發送 제70호 참조). ☞

[註 30] 민용호,『관동창의록』 28쪽 ; 박민영, 「민용호의 강릉의병 항전에 대한 연구」,『한국민족운동사연구』5, 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 1991. ☞

[註 31] 「在元山領事의 報告」, 30) 海參 62호. ☞

[註 32] 민용호부대의 신평전투에 대하여는 박민영의『대한제국기 의병연구』 한울, 1998, 129~131쪽에 자세히 밝혀져 있다.『관동창의록』에 의하면, 이때 의병이 수십 명 사망했고, 일본군은 부상자가 ‘180여 명’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

[註 33] 김상기 편역, 「公제47호」,『한말의병자료』2, 117~118쪽. ☞

[註 34] 민용호의진의 북진 과정을 원산영사는 본국에 계속하여 보고하였다. 원산영사는 일본행상인 조직인 鷄林奬業團에서 파견한 정찰원의 복명서에 기초하여 이를 보고했다. 이는 계림장업단 단원이 단순한 행상인이 아닌 정보원 역할을 겸하였음을 알려준다. ☞

[註 35] 권인규는 헌종 9년 강릉의 草堂에서 태어났다. 초명은 獻圭이고, 자는 景行이며, 호는 東濱 또는 巢雲(또는 巢隱)이라 한다. 본관은 안동으로 추밀공파였다. 생부는 思珌였으나 동생인 極의 양자로 들어갔다. 그의 문집인『소은창의록』에는 의병과 관련있는 ‘예안창의소에 답한 통문’, ‘창의 포고문’, ‘창의 통문’, ‘관동창의소 포유문’, ‘관동창의사 효유문’, ‘서고문’ 등과 서간문인 ‘의병장 민용호에게 보낸 편지’와 ‘유진장 이병채에게 보낸 편지’등이 수록되어 있다. ☞

[註 36] 권인규, 「창의포고문」,『소은창의록』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3, 61쪽). ☞

[註 37] 박민영,『대한제국기 의병연구』 122쪽. 

이때 군무첩을 받은 강릉의 인물은 이승학·김노원·심홍택·정규섭·이승찬·최돈익·김양선·임익상·정헌중·김인수·전치운·강동오 등을 확인할 수 있다. ☞

[註 38] 권인규,『독립운동사자료집』3, 261쪽. ☞

[註 39] 권인규, 「의병장 민용호에게 보낸 편지」,『독립운동사자료집』3, 263쪽. ☞

[註 40] 권인규, 「창의통문」,『독립운동사자료집』3, 265쪽. ☞

[註 41] 권인규, 「관동창의사효유문」,『독립운동사자료집』3, 273쪽. ☞

[註 42] 권인규, 「의병장 민용호에게 보낸 편지」,『독립운동사자료집』3, 263쪽. ☞

[註 43] 권인규, 「유진장 이병채에게 보낸 편지」,『독립운동사자료집』3, 266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