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전기의병의 반개화 투쟁 / 한말 전기의병

몽유도원 2014. 1. 16. 12:07

제9권 한말 전기의병 / 제5장 전기의병의 반개화 투쟁

1. 지방제도 개편반대

2. 군사제도 개편반대


1. 지방제도 개편반대


전기의병은 김홍집·박영효朴泳孝 연립내각의 행정제도 개편에 전반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친일내각의 수립 자체를 부정하고 있던 그들로서는 당연한 태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특히 지방제도의 개편에 관하여는 더욱 강한 반대입장을 표명하여 무력투쟁으로까지 발전하였다. 지방제도 개편이 중앙행정제도의 개편에 비하여 늦은 시기인 1895년 5월에 비로소 실행된 이유를 여기에서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김홍집·박영효 연립내각이 발표한 지방제도 개편의 요지는 종래의 8도제에 의한 목·부·현 제도를 폐지하고 소지역주의를 채택하여 23부 337군제를 실행하는 동시에 기존의 감영과 안무영按撫營 그리고 유수부를 폐지한 것이다. 註1)

지방제도의 개편문제는 조선후기 정약용의 개혁안에서부터 김옥균金玉均과 박영효 등의 군현통합과 지방관 임용 등에 관한 여러 주장들이 제기된 바 있다. 그러나 갑오경장의 일환으로 시행된 갑오개화파의 지방제도 개편에서는 위 주장들이 제대로 반영되었다고 볼 수 없다.

지방제도 개편작업은 내무대신 박영효가 중심이 되어 계획되었다. 그러나 일본인 내무고문 재등수일랑齋藤修一郞이 여기에 깊이 관여하여 기존의 행정구역을 지방의 사정을 헤아리지 못하고 군현을 통폐합한 것으로 알려진다. 註2) 갑오개화파에 의한 지방제도의 개편은 지방행정의 효율적인 운영과 부세조직을 정비하고자 취해진 개혁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개편을 사주한 일제의 저의는 지방세력을 대폭 축소시켜 지방을 자기들의 세력권아래에 두고자 함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타당할 것이다. 정상형井上馨이 제시한 「20개조 개혁안」 제13조에서 “지방관의 권한을 제한하여 이를 중앙정부에 수람시킬 것” 註3)이라고 명시하고 있음은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이 조치로 인하여 종래에 지방관이 장악하고 있던 병권과 재판권 그리고 경찰권은 물론 수세권마저 중앙으로 귀속되고 말았으니, 이는 개혁이란 허울속에 지방관의 기존 권력을 탈취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註4)

지방제도의 개편에 대한 지방민들의 반발은 컸다. 우선 보수적인 지방민들은 군현의 통폐합으로 인하여 인정과 풍속을 같이 하는 한 마을이라는 동질성이 없어질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통폐합과정에서 실직 또는 전직된 관리들의 불만 또한 컸다. 일본언론에서조차 상원의병이 “구관리의 실로失路와 실망失望에 분기” 註5)했다고 보도하고 있음은 이를 잘 말해준다. 거기에다가 중앙정부의 개편지시마저 지방에 제대로 하달되지도 못하였으며, 지방에 따라서는 신구제도가 혼재하여 혼란을 초래하고 심지어는 분요가 발생하는 등 폐해가 심했다. 註6)

보수유생들은 갑오개화파에 의한 지방제도 개편을 일제의 세력하에 취해진 ‘왜국화’로 파악하였다. 아울러 유생들의 반개화·반침략 의식을 더욱 고양시켜 의병투쟁을 전개·확대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유인석이 「서행시재정선상소」에서 “관제의 변혁과 주군의 혁파가 전과 같기 때문에” 註7) 고종의 의병해산령에 따를 수 없다고 항명하고 있음은 이를 말해준다.

결국 갑오개화파에 의한 지방제도의 개편은 실효를 거두지 못한 채, 1896년 8월 이른바 광무정권에 의해 구제인 도제13도제로 환원되기에 이르렀다. 이는 내무대신 박영효가 일본으로 망명한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보다도 유생을 중심한 지방민들이 의병투쟁을 통하여 이에 대한 반대투쟁을 강하게 수행한 면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註 1]『구한국관보』개국 504년 5월 28일조. ☞

[註 2]『동경조일신문』1895년 1월 23일 「地方制度の改革」. ☞

[註 3]『일본외교문서』27, 제482·489호. ☞

[註 4]『동경조일신문』1895년 4월 6일 「地方制度の改革」. ☞

[註 5]『동경조일신문』1895년 9월 25일 「地方騷亂の情勢」. ☞

[註 6]『동경조일신문』1895년 9월 22일 「地方兵の解放」. ☞

[註 7] 유인석,『소의신편』권1-疏, 국사편찬위원회, 1975. ☞


2. 군사제도 개편반대

김홍집내각은 군국기무처를 설치하여 군사제도의 개편을 단행하였다. 이에 따라 친군영체제가 군무아문으로 바뀌었으며, 군무아문 아래 훈련대와 신설대 그리고 시위대가 신설되었다. 註8)

훈련대가 설치된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1895년 1월 일본공사 정상형의 건의에 의해 서울에 제1대대와 제2대대를 설치하였으며, 4월 27일 평양에 제3대대를, 註9) 6월 16일 청주에 제4대대를 설치하여 註10) 1개연대의 편제를 갖추었다. 신설대는 1895년 윤5월 1일 설치되었다. 신설대는 구군인 중에서 건장한 장정을 택하여 편제하였다. 따라서 신설대는 구군인 구제의 일환으로 조직된 성격이 짙으며, 훈련대가 현역병이라면 신설대는 ‘후비병’으로 지위나 대우면에서 떨어졌다. 註11)

시위대는 1895년 윤5월 25일 설치되었다. 2개 대대로 편제된 시위대는 궁성호위가 주요 목적이었다. 註12) 훈련대가 일제의 압력에 의해 설치

된데 비하여 시위대는 삼국간섭으로 일제의 세력이 위축된 직후에 종래 훈련대가 맡았던 궁성호위의 임무를 대신하기 위하여 조선정부에 의해 설치된 것이다. 따라서 훈련대와 시위대는 불편한 관계에 있었으며 이 점은 을미사변에서 실증되었다. 을미사변 때 훈련대는 일본군과 합세하여 궁궐을 침입하여 시위대와 전투를 벌였다. 註13) 을미사변의 책임을 추궁당한 훈련대는 9월 13일 해체되었다. 註14)

이러한 군제 개편은 일제의 영향력하에서 시행된 측면이 강하며, 축소 개편된 성격을 띠었다. 즉 새 편제에 소속되지 않은 구군인은 모두 해산되었기 때문이다. 「신설대 편제에 관한 건」의 제2조에서 “6영 병정으로 전조의 간선에 누漏한 자는 다 해방된 줄로 인주함” 註15)이라고 명시되어 있음은 이를 말해 준다. 따라서 이와 같은 법령의 시행을 ‘군제개혁’이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강제 해산된 구군인들은 그간5개월분의 급료마저 받지 못하였다. 이들의 불만은 폭발하기 직전이었으며, 이때 몇몇 지도자들이 해산된 구군인을 상대로 서울시내 곳곳에 벽보를 붙여 7월 25일양 9월 13일 군부 아문앞에 집결할 것을 알렸다. 드디어 이날 구군인들이 군부 앞에 집결하였다. 이들은 군부대신 안경수의 뒤를 쫓아 내부아문의 문안에까지 들어가 밀린 급료의 지불을 요구하며 항의시위를 하였다. 이들의 집단적인 행동에 경무사 이윤용李允用이 100여 명의 순검을 거느리고 와서 주동자 수십 명을 포박해 갔다. 이때 내부에 들어간 구군인의 수가 200~300명 정도였으며, 문밖에도 1천여 명이 시위에 참여하였다. 註16)

임오군란을 경험한 정부에서는 해산된 군인들의 반발에 위협을 느꼈으나, 징계중심의 대책을 마련하는데 그치고 있다. 7월 30일 「군부령」 제1·2호를 발표하여 이들의 집단적 행동을 금지시킨 것이다. 제1호에 의하면 해산군인 10명 이상의 집회를 금지시키고 있다. 제2호에서는 구군인이 착용하였던 군복은 물론 탄약과 총기 그리고 식기취반기까지 모두 반납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그리고 만약 이를 보관할 경우에는 순검이 체포하여 중률로 다스릴 수 있도록 하였다. 註17)

한편 지방군제의 경우는 중앙군에 비하여 차라리 군대해산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더욱 축소되었다. 정부는 4월에 평양에, 6월에는 청주에 훈련대를 설치하였을 뿐이고 여기에 편입되지 않은 나머지 구군인은 일체 해산한 것이다. 지방군의 해산방침은 일찍이 정해 놓았던 것으로 보이며, 단지 해산의 시기만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방군의 해산은 훈련대와 신설대를 설치하여 중앙군의 개편을 시행한 후 이루어졌다. 윤5월 10일 칙령 제111호를 발표하여 “각도 외영병정外營兵丁을 일체 해방” 註18) 하는 조칙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지방군인들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감지하게 되자 불과 10일 후인 윤5월 20일 칙령 제117호를 발표하여 “해산하되 그 시기만은 무기연기한다.” 註19)는 내용으로 이를 번복하였다. 그러나 이는 지방군의 강제해산에 따른 폭동을 염려하여 취한 잠정적인 조치에 불과하였다. 註20) 결국 7월 15일양 9월 6일

칙령 제139, 제140, 제141, 제142호를 동시에 발표하여 3도 통제군과 각도의 병영·수영 그리고 각 진영과 진보를 폐지하고, 거기에 소속된 군인을 일체 해산하였다. 이는 지방군해산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동경조일신문』에서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중앙정부의 위망威望은 거의 경성 문밖을 넘어 1보步도 지방에 미칠 수 없다. 비도는 지방에 산만散滿하여 오직 폭발의 틈만을 엿본다고 하는 위급한 때를 당하여 갑자기 종래의 지방군을 해산하니, 한편으로 이를 대신할 신병제新兵制도 아직 정비되지 않았다. 만약 해방병사가 하루아침에 직업을 잃은 원한을 정부에 돌리고 혹은 목전의 기갈에 몰려 난민과 결합하여 각지에서 폭발하기에 이른다면 지금의 조선정부라는 것은 여하히 이를 진무할 것인가. … 지방병 해방은 무모한 경거輕擧이다. 註21)



즉 지방병 해산의 소식을 알리면서, 직업을 잃은 해산병들이 정부에 반기를 들 정세임을 보도한 것이다. 또한 대책도 없는 지방군의 해산은 무모한 일이라고 정부시책의 부재를 비판하고 있다. 이와 같은 예견은 1년여 후 현실화되어 나타났다. 이때 해산된 지방병들이 상원의병에 대거 참여하였다. 1895년 7월 22일 김원교 등이 상원에서 의병을 일으켜 관아를 공격할 때, 평양부에서 해산된 군인들이 포수세력과 함께 전투요원으로 크게 활약했다. 註22)

제천의병에도 해산된 지방병이 참여하였음을 알려주는 자료가 있어 주목된다.『동경조일신문』에서



적도에는 많은 관리와 지방병이 있다. 관리 중에는 구관리뿐만이 아니라 현관리도 있고, 지방병 중에는 작년에 해방된 구병舊兵 외에 현재의 지방병도 많이 섞여 있다. 이 때문에 적도의 다수는 초적草賊과 달리 많은 무기를 갖고 화승총 정도는 휴대하고 있다. 註23)



라고 하여 1895년 해산된 구군인들이 무기를 휴대하고 의병에 참여하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물론 어느 정도의 인원이 참여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들은 실직에 불만을 품고 있던 중 반개화 반침략의 기치를 든 의병항쟁에 참여한 것이다.

한편『동경조일신문』에 의하면, 이천에서 봉기하여 남한산성을 점거한 김하락의진의 구성에 대하여 “남한산성내의 적수는 약 1,600명이다. 그중 1,000여 명은 광주·이천·양근의 포군 즉 구지방병이고 나머지 600명은 광주의 농민이다.” 註24)라고 보도하여 구군인이 참여하였음을 알려준다. 남한산성은 5군영 중의 하나인 수어청이 서울의 수비를 담당하던 지역이다. 군제개편과 함께 다수의 군인이 해산되었을 것이며 이들이 김하락의진에 가담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갑오경장의 일환으로 실시된 군제개편으로 강제 해산된 구군인들이 이에 반발하여 의병에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례는 앞으로 더 밝혀져야 할 것이다. 그것은 구군인들의 행동양태의 추적과 함께 그간 명확히 밝혀지지 못했던 의병병사층의 실체 파악에도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1907년 일제 통감부에 의해 군대해산령이 내려지자 강제로 해산된 군인들이 대거 의병에 참여하여 의병항쟁을 확산시켰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註 8] 갑오경장기 군제개편에 관한 연구로는 차준회, 「한말 군제개편에 대하여」,『역사학보』22, 역사학회, 1964. ☞

[註 9]『고종실록』권33, 고종32년 4월 27일조. ☞

[註 10]『고종실록』권33, 고종32년 6월 16일조. ☞

[註 11]『구한국관보』1895년 5월 30일조. ☞

[註 12]『일성록』고종32년 윤5월 25일조. ☞

[註 13]『고종실록』권33, 고종32년 8월 20일조. 

이 전투에서 시위대는 대장 홍계훈이 전사하고 피아 19명의 사상자를 냈다. ☞

[註 14] 그 대신 「육군편제강령」을 공포하여 서울에 친위대를 평양과 전주에 진위대를 두었다』고종실록』권33, 고종 32년 9월 13일조, 칙령 제169호 「훈련대폐지건」, 제170호 「육군편제강령」 참조). ☞

[註 15]『구한국관보』1895년 5월 30일조. 

친군영에 소속되었던 군인의 수가 1만명 이상이었던 것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신설대에 편입된 군인 수는 5,118명에 불과하였다(참령 10, 정위 20, 부위 40, 삼위 40, 정교 20, 부교 160, 삼교 140, 병졸 4,800). ☞

[註 16]『동경조일신문』1895년 9월 17일 전보 「解放兵の要求」, 9월 26일 잡보 「舊六營の解放兵軍部大臣に迫る」. ☞

[註 17]『구한국관보』1895년 8월 2일 「군부령」 제1호와 제2호 ;『동경조일신문』1895년 10월 1일 잡보 「解放兵の取締」 ;『시사신보』1895년 10월 1일 잡보 「懲りて後の妙思案」. ☞

[註 18]『구한국관보』1895년 윤5월 10일조. ☞

[註 19]『구한국관보』1895년 윤5월 20일 호외. ☞

[註 20]『동경조일신문』1895년 7월 25일 잡보 「地方兵の處分」. ☞

[註 21]『동경조일신문』1895년 9월 22일 잡보 「地方兵の解放」. ☞

[註 22] 김상기, 『한말의병연구』, 일조각, 1997, 119~123쪽. ☞

[註 23]『동경조일신문』1896년 2월 14일 잡보 「丹陽小戰」. ☞

[註 24]『동경조일신문』1896년 4월 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