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경상지역 의병 / 전기의병의 확대 / 한말 전기의병

몽유도원 2014. 1. 14. 10:22

제9권 한말 전기의병 / 제4장 전기의병의 확대

1. 경기지역 의병

2. 강원지역 의병

3. 충청지역 의병

4. 경상지역 의병

5. 호남지역 의병투쟁

6. 북한지역 의병투쟁


4. 경상지역 의병


1. 안동의병


1) 향회 실시와 의진의 결성

을미사변의 소식이 안동일대에 전해진 것은 사건이 발생한 지 여러 날이 지난 1895년 9월초였다. 더욱이 명성왕후의 폐비조칙까지 전해지자 안동지역 유생들은 어떻게 국모를 폐한다는 말이 나올 수 있느냐면서 통곡하며 국모의 복수를 다짐하였다. 註180) 안동의병은 1895년 11월 15일 단발령이 내려지고 난 직후에 시작되었다. 안동에 단발령이 전해진 것은 11월 27일경이었다. 안동 유생들은 이 소식을 듣고 5백년 예의문물이 하루아침에 망했다고 하면서 의기를 떨치며 거의를 꾀하게 되었다. 이 움직임은 당시에 안동지역에서 대표적 서원이었던 호계서원虎溪書院과 청성서원靑城書院 그리고 경광서원鏡光書院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청성서원과 경광서원에서는 12월 1일 통문通文을 발하여 註181) “5백년 의복문물지향衣服文物之鄕에 하루아침에 단발은 불가”하다고 선언하였으며, 12월 3일 읍저邑邸에서 집회할 것과 읍저에서 모이기 전에 먼저 봉정사에서 만날 것을 통지하였다. 註182) 호계서원의 통문은 다음날 도착하였다. 호계서원의 통문에서도 12월 3일 안동향교에서 집결할 것을 알리고 있다. 註183)

12월 3일 봉정사 모임은 계획대로 추진되었다. 이날 모임에는 4, 50명 정도 참석한 것으로 보이며 이들은 안동부로 들어가 창의에 대하여 협의하였다. 이들은 다음 날 유림대회의 성격을 띄는 향회를 실시하기로 하고 일단 해산하였다. 이에 따라 12월 4일 안동부에서 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향회를 실시하였으며, 註184) 호계서원에 도소를 차리고 6일 창의할 것을 결의하였다.

12월 6일 안동부 청사 내의 삼우당에서 인근의 사민 1만여 명이 집결하였다. 이때 수좌에는 유치명의 문인인 김흥락金興洛·유지호柳止鎬·김도화金道和와 하회의 유도성柳道性·유지영柳芝榮 등 안동 유림의 대표들이 자리잡았다. 이들은 창의를 결의하고 대장에 유곡酉谷의 권세연權世淵을 추대하였다. 권세연은 12월 7일 아침 연무당에서 부장에 곽종석을 임명하는 등 의진을 편성하였는데 지휘부의 편제 상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註185)



안동의병 지휘부 편제표 1(1895. 12. 7 현재)

대장권세연

부장곽종석(미취임) 註186)

중군장유완

선봉장김옥서

우익장권용현

좌익장이운호

좌부장이의호

2) 기병과 안동부 점령

안동부는 의병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었으며, 관찰사 김석중金奭中은 신변에 위험을 느끼고 의병이 창의된 날 밤에 탈출하였다. 원래 관찰사는 의병의 움직임에 대구부에 연락을 취해 일본군의 지원을 요청한 바 있다. 그러나 의병이 봉기하고 곧이어 10여 명의 향리들이 비밀리에 자신을 포박할 것을 꾀하기까지 하자 그날 밤에 도망간 것이다. 註187)

이 시기의 안동의병의 동향을 일본의『동경조일신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안동적세 1월 25일(음 12월 11일) 경성발

안동의 적세賊勢는 실제 다수로써 만명이라 칭해지지만, 그 개요는 이미 전보로 보고한 바와 같다. 경상도의 대구에는 아병참부가 있어 영목鈴木 소좌가 약간의 수비병으로 여기에 주재하고, 기타 낙동과 충청도의 가흥可興에도 아병참부가 있기 때문에 안동의 적도는 부산 방면으로 남하할 수도, 충청도를 향해 나갈 수도 없다. 아수비병을 두려워하여 오직 안동과 그 부근에 둔집屯集하고 있다. 앞 보고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안동의 부청府廳은 적수敵手에 빠져 관찰사는 간신히 도망하였다.… 註188)



한편 관찰사는 의병진이 채 갖추어지기 전에 대구부의 관군을 이끌고 안동부의 탈환을 시도하였다. 이에 따라 20~30명의 관군이 12월 10일에 예천에 진을 치기 시작하여 13일에는 60여 명의 관군이 증원되는 등 관군의 총병력은 300여 명에 이르렀으며, 여기에 일본군 100여 명이 가담하였다. 註189) 이들은 예천군수 유인형柳仁馨의 접대를 받고, 註190) 다음날 신양과 풍산쪽을 거쳐 안동의병소를 덮쳐 안동부를 탈환코자 하였다.


안동의병 주둔 상황도

 

의병소에서 관군의 공격 소식을 접한 것은 12월 12일경이었다. 권세연權世淵은 우선 선봉장 김옥서金玉瑞에게 명령을 내려 포군 70여 명을 거느리고 예천쪽으로 향해 관군에 대응하게 하였다. 이어서 저녁 때에는 중군장 유완柳碗에게도 40~50명을 거느리고 출발케 하였다. 다음 날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여 산천을 구별할 수 없을 정도의 악천후에 우익장 권용현權用賢이 군사 60명을 이끌고 출발했으며, 14일에는 좌부장 이의호李宜鎬에게 100여 인을 거느리고 관군에 대적케 하였다. 선봉장이 거느린 의병과 관군과의 전투가 예천과 안동의 접경지대에서 처음으로 있었으나 의병은 패하고 말았다. 이에 선봉장은 잔여병을 데리고 감애에 주둔했으며, 중군장은 풍산에, 우익장은 두원에, 좌부장은 노하리에 진을 쳤다. 선봉장은 15일 새벽에 관군을 공격하였으나 일본군이 총을 쏘면서 백일령을 덮으며 진격해오자 의병은 그만 제대로 접전을 하지 못하고 사방으로 와해되고 말았다. 註191) 이때가 새벽 3~5시경이었다. 의병은 무기를 버리기도 하고 끌기도 하면서 도망하였으며 인근의 백성들마저 피난가는 상황이 되었다. 풍산에 있던 의병 역시 모두 해산하였다. 우익장과 좌부장은 송현에 합진하였으나 관군의 세력에 대처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의병을 해산시키고 말았다. 註192) 이후 의병장 권세연은 태백산중의 구마동으로 들어가 가산을 다 내어 의병을 모으고 무기를 구입하는 등 재기를 준비하였다. 註193)

관찰사가 수백 명의 관군을 거느리고 거만하게 안동부에 들어온 것은 12월 16일양 1896년 1월 30일의 일이었다. 안동부를 접수하는데 큰 힘이 되었던 대구 병정 300명은 그날로 돌아갔다. 註194) 안동부를 접수한 관찰사는 19일 의병소에 들어가 의병의 문부와 전곡을 압수하여 갔다. 註195) 26일에는 스스로 단발을 하고 주민에게도 단발을 강요하였다. 각지에 순검을 풀어 강제로 삭발시켰으며, 이로 인해 29일에는 9명이나 삭발당했다. 註196) 유곡과 해저 두 마을은 특히 심하여 골목길에 다닐 수 없었다. 또한, 정초에 사대부들이 집에서 설을 쇨 수 없을 정도였으며, 심지어 1월 3일에는 수곡의 유지호마져 단발문제로 관찰사에게 붙잡혀 형벌과 욕을 당했다. 註197)

이런 형편에 예안과 예천 등 인근의 읍에서도 의진이 편성되었다. 1월 4일양 2월 16일 선성의진이 청량산에서 일어나 이중린李中麟이 대장에 추대되었으며, 예천에서는 1월 5일 박주대朴周大가 대장에 추대되었으나 신병을 이유로 대장직을 사퇴함에 동생인 박주상朴周庠을 대장에 추대하였다. 註198) 권세연의 안동의병 역시 의진을 수습하여 안동부의 공격을 기도하였다.

관찰사는 이러한 의병의 기세에 눌려 더 이상 안동부에 있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1월 7일 순검 몇 명을 이끌고 안동을 빠져나갔다. 註199) 그러나 그는 문경에서 거의한 이강년의진에 체포되어 1월 13일양 2월 25일문경의 농암 장터현, 경북 문경시 가은면 농암리에서 처형되고 말았다. 그는 단발한 채 서울을 향해 달아나다가 마침 농암에 진을 치고 있던 이강년의진의 파수병에 의해 체포되어 효수된 것이다. 註200) 이미 김석중이 처형되기 하루 전인 12일, 선성의병장 이중린은 김석중의 목에 천금의 현상금을 걸고 체포할 것을 명령한 바 있었다. 註201)

안동의병장 권세연은 이상룡李相龍 註202)·유시연柳時淵 등과 함께 안동의병을 거느리고 관찰사가 처형된 날인 정월 13일 안동부에 무혈입성하고 안동향교에 진을 쳤다. 註203) 이날 안동의병은 김도현의 선성의병과 영천의병 등 인근의 의병들과 함께 입성한 것으로 보인다. 이날 안동부에 입성한 김도현은 이날의 감격을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다.



13일에 출진出陣해서 안동부를 향하니 서로 상거相距가 40리다. 기치旗幟는 앞에 있고 거기車騎는 뒤에 있으며 대포 소리는 우레 같으니 흥분하여 일어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산남山南에서 우러러 바라보는 선비가 얼마이며 길가에서 보는 이가 몇이던가. 경내에 들어가 산천의 형세를 보고 인물의 풍부함을 보니 참으로 15읍 중에서 제일 큰 고을이었다. 註204)



주하리에 거주하고 있던 이긍연 역시 그의『을미의병일기』에서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13일 맑음. 유생 2명을 태장면台庄面, 현 서후면 태장리 회소會所에 보냈다. 오리원五里院에 나가 의사義師를 맞았다. 위의威儀가 매우 성대했다. 군용軍容이 정숙했다. 총을 멘 자, 칼을 든 자가 수백 명 이었으며 그 나머지는 셀 수 없었다. 사방의 관중 역시 천인지 만이지 수를 셀 수 없었다. 註205)



이때 오리원을 통해 수백 명의 무장한 의병이 성대한 모습으로 들어왔는데 이때 의병을 맞이한 주민의 수를 셀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를 보아 인근 주민들의 의병에 대한 관심과 그들에 대한 기대감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주민들의 관심은 직후에 군자금을 의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6일 열린 향회에서 2천냥의 의연금이 모금된 것이다. 또한 21일 다시 성청星廳에서 향회를 열어 안동일대의 각 문중과 향교, 그리고 서원별로 의연금을 기부할 것을 약속하였다. 이날 약속한 문중의 수는 151개 문중이었으며, 여기에 40개의 기관이 참여하였으니 안동지역에서 참여하지 않은 세력이 없을 정도였다. 약속한 의연금의 총액도 무려 2만냥을 넘었으니 안동일대의 반개화·반침략적인 기세와 주민들의 의병에 대한 호응의 정도를 충분히 짐작하게 한다. 註206)


이긍연의 『을미의병일기』


각 문중별로 의연금을 배분한 현황을 살펴보면, 안동의 풍남·풍서·풍북·풍현내·서후·서선·북후·북선·동선·동후·임북·임동·임현내·임남·길안·일직·감천·내성·춘양·소천·재산 등 21개 전지역에서 문중별로 적게는 2냥에서 많게는 1천냥까지 군자금을 배분하였다. 그중에 하회유씨와 수곡의 전주유씨 문중에서 각기 1천냥씩을, 유곡의 안동권씨 문중에 1천냥을 배분하였으며, 천전의 의성김씨 문중에 800냥, 금계의 의성김씨 문중과 해저의 의성김씨 문중, 법흥의 고성이씨 문중에도 500냥씩을 배분하였다. 그리고 법전의 진주강씨 문중과 녹동의 진성이씨 문중에 400냥, 지곡의 안동권씨 문중에 300냥, 소산의 안동김씨 문중, 미동의 풍산김씨 문중, 우동의 선성이씨 문중, 황전김씨 문중, 풍정이씨 문중에 200냥씩을, 도진정씨 문중, 벌방유씨 문중, 입석권씨 문중, 두곡권씨 문중에 150냥씩을 배분하였다. 그리고 100냥씩을 배분한 문중도 춘파장씨 문중, 주촌이씨 문중, 가야김씨 문중, 감호박씨 문중, 도목배씨 문중, 사월권씨 문중, 묵계김씨 문중, 오낙김씨 문중, 소호이씨 문중, 안곡남씨 문중, 구호김씨 문중, 만운강씨 문중, 춘양홍씨 문중 등 13개 문중에 달하는 등 총 152개 문중에 11,882냥을 배분하였다.

한편 안동지역에 있는 향교를 비롯하여 각지의 서원과 사당, 심지어는 서당에까지 모두 8,980냥을 군자금으로 의연토록 하였음을 볼 수 있다. 그 결과 각 문중에 할당한 금액과 향교와 서원 등에 할당한 금액을 합하여 도합 20,867냥이나 되는 거액을 분배하였다.

이와 같이 막대한 군자금을 확보한 권세연은 1월 24일 조직을 보다 전투적인 체제로 개편하여 전투를 대비하였다.



안동의병 지휘부 편제표 2(1896. 1. 24 현재)

상장 : 권세연權世淵

도총 : 유난영柳蘭榮(河回)

부장 : 김하림金夏林(海底)

중군 : 권재호權載昊

도포장 : 오 선전吳 宣傳

좌포장 : 김金

우포장 : 유劉

서기 : 소호蘇湖이李, 미동美洞 김金, 보현甫峴 권제영權濟寧, 금계金溪 김金 註207)



새로 조직한 편제는 이전의 부장·선봉장·좌우익장 체제를 도총·도포장·좌우포장 체제로 바꾸었으며, 도포장에 선전관을 역임한 인물을 임명한 데에서 엿볼 수 있듯이 보다 전투적인 체제라 할 것이다. 또한 도총과 부총에 하회와 해저지역의 인물을 등용하고 있는 점 역시 지역으로부터 군수품을 비롯하여 실질적인 지원을 받기 위함에 그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동의병은 이어서 봉화의병, 서상렬徐相烈 의병과 연합하였다. 이처럼 안동의병에서 군자금을 모금하면서 새 진영을 갖추고 있던 차에, 1월 25일 봉화의병장 금석주琴錫柱가 포군 50여 명을 이끌고 안동에 왔으며, 1월 27일 오후에는 제천의병 소모장 서상렬이 안동의 안기에 의병 100여 명을 거느리고 나타났다. 안동의진에서는 중군장 권재호가 나가 이들을 맞이하였으며, 다음날인 28일 연무당에서 세 의진 병졸 800여명은 연합식을 하고 숫소 3마리와 쌀 20말로 음식을 준비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註208)

서상렬은 안동에 오기 전에 영서소모대장이란 이름으로 영남지역에 격문을 발표한 바 있다. 이 격문에서 그는 국가를 위하여 적을 토벌할 것을 맹세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번 거의는 아래로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머리털과 피부를 훼손시키지 않기 위해서요, 위로는 국가가 욕을 당한 치욕을 씻기 위함이라면서 모두가 ‘서사효충誓死效忠’ 하고 ‘사생취의捨生取義’할 것을 호소하였다. 또한 그는 특별히 지방의 수령들과 관병에게 귀화하면 모두 용서할 것이나, 그렇지 아니할 경우에는 ‘사시肆市’사형하여 그 시체를 사람들이 보도록 저자에 버림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註209) 서상렬은 이후 예천군수 유인형을 비롯하여 인근의 군수들을 처형하여 이를 실천하였다.

안동의병에서는 이때 의병장 권세연이 사퇴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권세연은 1월 29일양 3월 12일 40~50여 명의 향원이 참석한 가운데 삼문 밖에서 열린 향회에 단자單子를 보내 자신의 사퇴의사를 전했다. 註210) 향원들이 대장소에 들어가 사유를 묻자 권세연은 “본래 비인非人으로 연말

패한 일은 다시 말할 필요 없으나, 지금에 이르러 군무가 이루어진 모양이어 몸을 바쳐 자퇴하니 공사간에 당을 이루시오.”하고 자리를 떴다. 註211) 권세연은 자신이 대장에 추대되어 안동부를 접수한 직후였던 1895년 12월 중순경 관군과의 전투에서 패한 일을 들어 자신을 자책하고 이제 연합의진이 편성되고 기세가 성대해지자 보다 능력있는 이에게 대장직을 위임하기 위해 자진 사퇴한 것으로 보인다. 註212)

권세연의 후임으로 향원들은 구호의 김도화金道和를 선출하였다. 그리고 김진의金鎭儀·유창식柳昌植·유일우柳馹佑·권철연權徹淵 등을 보내 대장직에 오를 것을 청하게 하였다. 김도화는 30일 밤에 안동부에 들어와 대장직에 올랐다. 註213) 김도화는 당시에 호계서원의 도유사도 겸하고 있었다. 그는 유창식 등의 대장직 수락 요청에 노구를 이끌고 의병대열에 참여하고 다음과 같이 지휘부를 조직하였다. 註214)



안동의병 지휘부 편제표 3(1896. 1. 30 현재)

대장 : 김도화

지휘장 : 김흥락유도성柳道性

중군장 : 권재호權載昊

부장 : 유난영柳蘭榮

도총 : 김하림金夏林

선봉장 : 유시연

소모장 : 이충언李忠彦유창식 註215)

아장 : 최세윤崔世允



위에서 볼 수 있듯이 금계의 김흥락과 하회의 유도성이 지휘장으로 의병진에 참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김도화는 안동일대의 적극적인 지원을 기대하였던 것이다.

김도화는 체제를 정비한 후 각지에 격문을 발송하여 의병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였다. 註216) 이어서 서상렬부대와 예천에서 집결하여 연합작전을 수행하기로 하였다. 2월 7일 김도화는 의병 200여 명을 거느리고 일단 풍산에 집결하여 풍기·순흥·영천·봉화·선성, 호서의진과 함께 예천으로 향하였다. 이때 김도화는 서상렬의진을 보고 천군만마를 얻은 듯 그를 칭송하였으며, “늙은 몸 이끌고 막대기 짚고 나섰으니, … 하늘의 운세를 돌리는 일인들 어찌 못하리” 註217)라며 의기가 충만해 있었다.

3) 연합의진의 편성과 태봉전투

안동의병은 우선 태봉의 일본 병참부대를 공격의 목표로 삼고 이를 위하여 서상렬의병을 비롯한 인근의 의병들과의 연합을 시도하였다. 註218) 안동의병을 비롯하여 영남 북부지역 8읍의 의병들이 2월 9일 예천에 집결하였다.

이들 8읍 의병은 2월 13일 중국 춘추시대 제齊 환공桓公이 규구葵丘에서 맹세한 일을 모방하여 백마를 잡아 그 피를 마시며 동맹의 서약을 하였다. 그리고 다음의 다섯 가지를 맹세하고 이어서 맹약문을 작성하여 결의를 굳혔다.

맹약문

1) 역적逆賊과 당짓지 말 것

2) 중화의 제도를 바꾸지 말 것

3) 죽고 사는 것에 마음을 바꾸지 말 것

4) 딴 생각을 갖고 사적으로 행동하지 말 것

5) 적을 구경하기만 하고 진격하지 않는 행동을 하지 말것

무릇 우리 동맹이 맺어졌으니 이후 서로 언사를 좋게 하며, 한결같이 약속을 준수하여 춘추의 대의를 밝히고, 인수의 큰 구별을 판단하여 온 누리를 깨끗이 쓸어내고 왕실을 굳건하게 만들어야 한다. 만약 이 맹약을 깨뜨리는 자가 있으면 신과 인간이 모두 나서 베어 죽일 것이다. 註219)



연합의진에 참여한 안동의병은 중군장 권재호權載昊가 거느린 250여 명이었다. 註220) 서상렬이 지휘하는 제천의병은 지휘부 49명을 포함하여 100여 명에 달하는 정예의 부대였다. 註221) 금석주가 거느린 봉화의병은 53명이었다. 선성의병은 중군 김도현이 거느린 주로 예안일대 진성이씨를 중심으로 편성된 부대였다. 원래 선성의진은 중군 김석교金奭敎가 지휘하여 예천회맹에 참석하기까지 하였으나, 김석교가 사퇴하고 그 후임에 김도현이 추대된 것이다. 김도현 휘하에는 선봉장 이인화李仁和, 전방장 이중언李中彦, 참모 이빈호李彬鎬·이중엽李中燁, 종사 이장규李章奎 등을 비롯하여 300여 명이 있었다. 註222)


연합의병의 배치도

 


연합의진은 태봉을 공격하기 전에 예천군수 유인형柳仁馨을 참하여 기세를 올렸다. 유인형은 개화파 관리로 서울에서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온 경군을 접대한 죄로 처형된 것이다. 註223) 연합의진은 이어서 눈비가 오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밤을 이용하여 상주의 용궁을 향했다. 연합의진이 용궁을 거쳐 산양에 진을 친 것이 2월 15일이었다. 註224) 이때 합세한 의진은 안동의병을 비롯하여 봉화·예안·영천·순흥·풍기, 호좌의진 등 7읍의 의병이었다. 산양에 진을 친 것은 태봉에 있는 일본 병참부대를 공격하기 위함이었다. 한편 예천의병은 이날 적성赤城, 문경시 동로면 소재으로 들어가 일본군을 배후에서 고립시키고자 하였다. 註225)

연합의진에서는 16일 개전하기로 하고 태봉의 지형을 보면서 작전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각기 길을 나누어 태봉을 향하였다. 우선 안동의

병은 상주의 덕통역현, 상주군 함창읍 덕통리으로 가 유진하고, 호좌의병은 함창으로 갔다. 영천·순흥·예안의병은 함께 상주 포내촌浦內村, 현 문경시 영순면 포내리으로 가고, 풍기의병은 견교犬灘의 당교唐橋, 현 상주 함창과 문경 점촌의 접경에 위치한 작은 다리, “띠다리” 또는 “때따리”라고 함로 갔으며 봉화의병은 상주의 동산촌으로 가서 유진하였다.

연합의진과 일본군과의 전투는 15일 밤에 개시되었다. 호좌의진의 선봉장 황기룡黃起龍이 거느린 의병과 일본군과의 교전이 한밤중에 있었던 것이다. 註226) 이 전투에서 호좌의진은 패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註227) 16일양 3월 29일 아침 일찍부터 연합의진의 태봉공격이 시작되었다. 이때 의병의 총수는 일본군의 보고에 의하면 7천여 명에 달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註228)태봉에 있는 일본군의 전력은 50~100명에 불과했던 것으로 보이나, 무기는 의병에 비해 월등하게 우세했다. 일본군 진영이 있는 태봉지역의 지형은 태봉 앞에 큰 백사장이 있고, 그 앞에 큰 뚝이 있으며, 그 앞에 큰 시내가 있는데 시내의 좌우에는 산이 있었다. 산에서 태봉까지는 거의 10리에 가까웠다. 註229) 이를 그림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의병들은 태봉을 둘러싸며 공격하였다. 안동의병이 먼저 좌측 산위로 올라가 일본군 진지를 향해 천보총을 사격하여 일본군 1명을 죽이는 전공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일본군 10여 명이 백사장으로 나와 발포하였다. 총알이 비오듯 떨어져 의병대는 순식간에 7~8명이 전사하고 20여 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註230) 예안의진을 비롯하여 봉화·풍기·순흥의진은 차례로 개울을 넘어 제방까지 달려가 제방을 엄폐물로 이용하며


태봉전투 상황도

 


몸을 숨기고 공격하였다. 일본군은 가세하여 그 수가 42명에 이르렀으며 이들도 조그만 제방을 이용하여 사격을 가해왔다. 예안의병 한 명이 총에 맞았으며 註231) 예안의병은 뒤로 후퇴하여 산위로 올라가 공격하였다. 여기에서 예안의병은 김도현의 동생 김동현金東鉉이 일본군 5명을, 초장哨長 이오동李五同이 7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수립하였다. 註232) 봉화의진 역시 제방까지 5대로 나누어 엎드려 나아갔으며, 포수 엄학성嚴學成이 부상을 입고 물러났으나, 일본군 1명을 사살하였다. 이들은 일본군 13명이 돌진해 오자 일본군 2명을 사살하면서 저항하기는 했으나 봉화의진은 일본군의 공격에 무너져 산양으로 퇴각했다가 풍산으로 물러났다. 註233)

이처럼 아침부터 시작된 태봉전투는 제방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접전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제방을 일본군에 의해 빼앗기고 개울 옆의 산

위에서 대응하던 의진은 저녁 무렵 일본군의 총공격에 밀려 모두 퇴각하고 말았다. 예안의진을 지휘했던 김도현은



흑추 60여 명이 몹시 많은 것은 아니지만, 사방으로 흩어져 포를 쏘고 있으며, 우리 의병들은 도망해 달아나는 자가 얼마인지 알 수가 없다. 저녁 무렵 흑추 수백 명이 뒷산을 넘어 내려오는데, 의외의 포성이 터져 나오니 우리 의병들은 도망해 달아나는 자가 얼마인지 알 수가 없다. 註234)



라고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에 이기지 못하고 의병이 퇴각한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의병은 태봉전투에서 비록 일본군 약간을 사살하는 전과를 수립하였으나 숫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화력과 조직력의 열세로 크게 패하고 말았다. 수백명이라고 자랑하던 김도현의 예안의병은 모두 달아나고 끝까지 남은 병사는 불과 15~16명에 불과하였으며, 산양으로 후퇴했을 때는 3~4명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김도현은 밤을 타고 예안으로 들어가 대장에게 사실을 고하고 중군직을 사퇴했다. 註235) 서상렬이 지휘하는 제천의진 역시 예천으로 후퇴하였다. 이후 서상렬은 유인석의 본진이 장기렴 부대에 밀려 제천을 잃고 서북으로 이진함에 본진에 합류하여 서북로 개척의 전도가 되어 항전하다가 낭천화천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註236)

한편 안동의병은 중군장 권재호를 중심으로 분전하였으나, 화력의 열세로 후퇴하고 말았다. 처음에 개울 좌측의 산위로 올라가 사격을 가한 것은 다른 의진으로 하여금 제방까지 진격할 수 있게 한 점에서 성공

적인 작전이었다 할 수 있다. 또한 후퇴하면서 매복작전을 감행하여 일본군 15명을 사살하는 전과도 수립하였다. 그러나 큰 비가 오는 듯한 일본군의 총격에 총과 말안장까지 버리고 달아나기 바빴다. 註237) 그 결과 중군장 지휘로 안동을 떠날 때는 250명이었으나 안동에 돌아올 때는 16명에 불과하였다. 전투 중에 20여 명이 다치거나 죽었으며 나머지는 달아난 것이다. 註238)

태봉전투에서 패인은 연합의진의 일사분란한 지휘체계가 정해지지 않았던 조직상의 문제를 들 수 있다. 7읍의 의진은 뚜렷한 지휘계통이 없었으며 그 결과 조직적인 전투를 수행하기 어려웠다. 또한 화력의 열세와 훈련의 부족을 들지 않을 수 없다. 그 결과 일본군의 기총 사격에 크게 무너졌으며, 일단 무너진 다음에는 총마저 버리고 후퇴하기 바빴던 것이다.

4) 일본군의 안동부 방화

일본군은 태봉전투에서 승세를 타고 인근의 의병 진압에 나섰다. 2월 19일에는 예천에 도착하여 의병들이 없자 의병의 집에 방화하여 보복하였다. 이로 인해 부장 장석규張錫奎 형제의 집과 연계당 그리고 의병의 집 5채가 불탔다. 註239) 이날 밤에 예천의병은 적성에서 돌아왔으나 일본군은 이미 철수하여 안동으로 갔다. 예천의병은 이들을 추격하여 통양까지 갔다가 되돌아 왔다. 註240)

일본군은 2월 20일양 4월 2일 아침 일찍 풍산에 주둔하고 있던 안동의진을 기습 공격하였다. 이로 인해 의병 l명이 전사하였으며, 중군장 이

하 30여 명의 의병은 대응도 못해 보고 우동 쪽으로 패주하였다. 일본군은 안동의 송현까지 추격해 와 안동부를 의병의 소굴이라 하여 시내의 민가에 불을 질렀다. 마침 바람을 타고 불길이 온 읍을 덮쳐 안동읍 1천여호의 민가가 불타버렸다. 註241) 안동부 방화를 자행한 일본군은 후비보병 제10연대 제1대대 소속의 50여 명이었던 것으로 밝혀진다. 註242)

이러한 일본군의 만행은 안동관찰사로 임명되어 안동부에 부임하기 위해 상주 경계지점에 머물고 있던 이남규李南奎에 의해 조정에 전달되었다. 그는 자신의 관할지인 현장에서 일본군의 만행을 목도하고 바로 상소를 올려 이를 규탄하였으며, 동시에 안동관찰사의 직을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그는 상소문에서 다음과 같이 일본군의 행패와 사민의 참상을 보고하였다.



순검도피자와 일본병이 갑자기 본부에 들어와 공해를 부수고 가옥을 불지르니 수천 민호 중에 이제 한두 집도 없고, 이졸吏卒은 산곡으로 도망가고, 사민士民은 구렁에 엎어지는 참상입니다. 註243)



1906년 홍주의병에 참여하기도 한 그로서는 일본군의 이 같은 행동에 차마 정부의 관리로 부임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1907년 홍주의병의 재기를 도모하던 중 일본군에 의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가던 도중에 온양 길가에서 참살 당하였다. 註244)

예천유생 박주대 역시 그의 일기에서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

고 있다.



2월 22일, 왜군이 안동에 들어왔다. 선봉장 권權중군中軍이 패주하고 왜군이 화부花府에 직입直入하였다. 의소義所에는 한 사람도 남아있는 이가 없었다. 이로 인해 방화하여 1천여 호가 소멸됐다 한다. 註245)



한편 김도현은 안동부의 방화사건이 있기 전 안동의병의 지원 요청을 받고 50여 명을 이끌고 안동부에 가던 중에 밤이 늦어 오천 후조당에서 잤는데 그날 밤에 그는 안동부가 방화되어 불타고 있음을 목도하였다. 그리고 후일 안동의병의 부장에 임명되어 안동부에 들어갔는데, 그는 방화사건 후의 안동의 참상을 다음과 같이 알려주고 있다.



이튿날 안동부에 들어가니 과연 집 천여호가 모두 불타서 잿가루만 땅에 가득할 뿐 저자도 쓸쓸하여 그 참혹한 모습을 차마 볼 수가 없다. 註246)



안동읍 방화사건에 대하여 당시의 유일한 국내 신문였던『독립신문』에서도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다.



안동관찰사 니남규씨가 이달 스무 나흔날 군부에 보고를 하엿난대 참 의병은 대군쥬폐하께셔 션유하옵신 칙교를 보고 안돈하거니와 거즛 의병은 지금 만히 모혀 행패가 무슈하난대 비도 괴슈 셔샹열이가 여덟골 비도를 모집한거시 샴쳔여명이라 본골에 웅거하야 야료할 제 그때 도망하던검들이 여렴 집에 드러가 무례히 행실을 하니 부인들이 자기통과 손을 베고 죽은 이가 무슈한지라.

셔가가 삼쳔여 명 비도를 함창 태봉에 가셔 일본병정으로 싸홀 새 일시에 비도들이 사면으로 흣터져 셔가가 크게 패하야 례쳔과 풍기로 드러가 노략하고 도망하엿든검슈십인이 일본 병졍과 함께 본골이 불을 노화 슈쳔호가 탈새 나라 재물과 사사 재물이 다 타고 관부난 다행이 면하엿다더라. 註247)



위 기사의 내용이 의병을 ‘비도’라 표현하면서 정부측의 태도와 유사한 시각을 가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남규가 군부에 보고한 것을 토대로 하여 서상렬이 지휘하는 3천여 명의 의병이 태봉전투를 감행하였음을 전하고 있다. 그리고 의병에 쫓긴 관군이 민가에 들어가 부녀자에게 무례한 행위를 한 것과, 이들이 태봉전투에서 승리한 일본군과 함께 안동부를 방화하여 수천 호가 불탔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남규의 상소문을 받은 조정 역시 이를 일본군의 과잉 진압으로 인식하였다. 당시 외무대신이었던 이완용은 4월 26일 일본공사 소촌수태랑小村壽太郞에게 다음과 같은 공문을 보내 이를 금지시켜 줄 것을 요청하기까지 하였다.



지금 안동부관찰사金奭中, 李南奎의 誤記: 필자 보고에 의하면, 안동 예천 등지에 비류匪類가 함창咸昌의 태봉台峰에 와서 이곳의 일본병참대와 교전하여 끝내 패귀敗歸하였는데, 수일 후에 일병 50여 명이 갑자기 안동부에 들어가 민가 천여호를 소훼燒毁하였으며, 이에 젊은 이는 달아나 숨고 노약자老弱者는 이어서 엎어지니 보는 이가 측은하지 않음이 없었다고 합니다. … 무릇 비도가 일본병참을 침범해 온 자 인즉 총포로 상대하였으니 마땅히 죽어도 아깝지 않으나, 민가를 소훼함에 이르는 것은 마땅히 금하도록 명령할 것을 바랍니다. 장차 일본공사는 이를 밝히 전하고 아울러 해당 병참부에 이런 폐를 자행하지 말게 하십시오. 비

도가 귀 병참을 침범하여 교전하였다는 조사보고를 듣고 극히 놀랐습니다. 안동부가 비류들을 머물게 하고 접대하고 공급한다고 하여 갑자기 하나의 부읍府邑을 불태워 쓸어 없앴으니 어찌 옥과 돌을 같이 불사르며, 또한 어찌 이웃과의 평안한 관계를 이지러지게 하는 것입니까. 귀 공사는 이를 밝히 헤아려 각지 병참부에 재범再犯하지 말 것을 지시하길 바랍니다.

4월 26일 이완용 드림 註248)



즉 이완용은 사건이 있은 지 보름이 지난 3월 14일(양력 4월 26일) 공문을 보내어 “의병은 마땅히 죽여도 아깝지 않으나 민가를 불태우는 행위만은 금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리고 주민과 의병을 옥玉과 석石에 비유하면서 옥석을 구분하지 않고 쓸어 없애려는 것은 선린의 관계를 해치는 것이라며 각지 병참부에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지시할 것을 요청했다. 일견 강력한 요청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정의 의병에 대한 태도는 철저히 일본과 같이 ‘비류’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위 공문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은 일본군이 안동부를 불태운 것은 안동부가 “의병을 머물게 하고 접대하고 나아가 의병을 공급至安東府謂以 匪類之留接供給”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일본군이 안동부를 이른바 ‘의병의 소굴’로 인식하였으며, 그에 따라 일본군은 의병의 근거지를 소탕하고자 했다. 이로 보아 일본군의 안동부 방화는 계획적인 행위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일본군은 이에 대하여



등전藤田 대위는 부하 4분대分隊를 끌고 정찰을 위해 출영出營하여 … 4월 2일음 2월 20일

오후 3시 안동부 서방 200미터 지점에 있는 제방 아래에 도착하였을 때 비도가 시가 및 사방 산 위에서 포격을 가하였기 때문에 응전 4시간, 그 동안 피아 중간에서 일어난 불이 큰 바람을 타고 사방으로 만연한 것 註249)



이라고 하며 일본군의 방화가 아니라고 변명하였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이날 아침 일찍 일본군은 풍산에 있던 안동의병을 기습 공격하여 의병 1명을 죽이기까지 하였으며, 의병은 총 한 번 쏘지 못하고 도망하자 일본군이 송현까지 추격하여 안동부를 방화한 것이다. 註250)또한 박주대의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2월 20일 일본군의 안동부 침입 시에는 의병의 저항은 찾기 어려웠다. 註251) 따라서 태봉전투에서 패주한 의병이 안동부를 지키기 위하여 4시간에 걸친 전투를 감행했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

일본군은 안동부를 방화함에 그치지 않았다. 이들은 부중의 재물과 비단을 탈취해 갔다. 이들은 탈취한 재물을 호잠쪽으로 가지고 갔는데, 40여 인이 짐을 지고 나갔다 하니 탈취 당한 재물의 양을 짐작할 수 있겠다. 註252)

5) 의병의 재기와 해산

안동의병은 일본군이 물러난 후 의진을 다시 갖추고 재항전을 준비하였다. 이후 대장소는 신당, 도연 용담사 송천 등으로 이진하였다. 註253) 2월 30일에는 송천에서 도회를 열고 3월 초에 봉정사로 의진을 옮긴 김도화

는 춘양면에서 포군 40여 명을 의병에 흡수시켰으며, 1천여금을 군자금으로 모금하기도 하였다. 註254) 그리고 흥해의 최세윤을 좌익장으로, 영양의병장 김도현을 부장에 임명하였으며, 註255) 서상렬을 군사에, 이긍연을 종사관에 註256), 권옥연權玉淵을 부장에 임명하는 등 편제를 새롭게 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리고 이천의병과 연합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註257)

그러나 4월 초에 일본군이 봉정사의 의진을 공격하여 의진은 패산하였으며, 의병장 김도화는 노구를 이끌고 소백산 일대에서 고난의 행군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72세의 노구를 이끌고 소백산중의 곤이령을 넘으면서 지은 다음의 시에서 그의 이러한 모습이 선하게 떠오른다.



곤이령을 넘으며

세월을 지나온 나무에 비는 끝없이 내린다.

꽃이 밝음은 태고太古의 봄이로다.

선경이 이렇게 가까운데

누가 나를 싸움에 임하는 이라고 말하겠는가. 註258)



김도화는 지방의 사림들에게 「여향도사림與鄕道士林」이란 글을 보내어 지원을 요청하였으며, 특별히 하회유씨 문중에는 「여하회유씨문중」이란 글을 보내 봉정사에서 패산 이후 문을 닫고 의병과 관계를 끊고 있는 이들에게 의리정신을 들어 지원할 것을 호소하였다. 註259)

일본군들은 봉정사에 진을 치고 부중의 재산을 빼앗고 심지어는 마

을의 부녀자를 음욕하기까지 하였다. 또 소를 끌고 가 식용으로 사용하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4월 8일경 이들의 숫자는 200여 명에 달하였으며, 註260) 4월 19일에는 선유사가 말을 타고 나타났다. 이들 선유사는 이만윤李晩胤·유도상·장석룡張錫龍·정의묵鄭宜默·김근연金近淵 등 모두 5명으로 고종의 효유문을 가지고 다니면서 의병의 해산을 권유하였다. 이들이 선성으로 들어가 효유하자 선성의진은 결국 4월 29일 포수를 돌려보내고 의병을 해산하고 말았다. 註261)

안동의병은 선유사들에게 「격고문」을 보내어 “단지 두 명의 간신을 참하고 흉적을 제거했다고 말할 수 없으며, 한 명의 왜놈도 죽이지 않고 복수했다고 말할 수 없다.” 註262)라며 해산의 칙유에 따를 수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이후 영천·오천 등지를 다니면서 활동하였으나 5월 말 군수 홍필주洪弼周가 각 문중에 서찰을 보내어 의병을 파하기를 청하였다. 홍필주는 서찰에서 의병해산령을 지키지 않는 것은 위로는 국가의 죄인이요, 아래로는 조선의 죄인이라면서 의진을 파할 것을 요청했다. 註263) 그후 의병은 고종의 효유문을 받고 註264) 관군과 일본군의 쫓김을 당하며 더 이상 항전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 결과 6월 초에 안동의병은 각자 흩어져 영양·춘양이나 오천으로 들어가면서 사실상 해산되었다. 註265)

의병장 김도화는 의병을 해산한 직후 「자명소自明疏」를 올려



왕명을 빙자한 친일내각이 파견한 관군들이 선비들을 도륙해 국가의 원기元氣를 손상시켰으며 … 전하의 적자赤子로 하여금 전하의 병인兵刃앞에서 모두 죽

게 할 작정입니까. 기상氣像이 수참愁慘해서 이 원통한 부르짖음이 창천漲天합니다. 전하께서는 어찌 백성으로 하여금 이에 이르게 하십니까. 註266)



라고 울분을 토로하였다. 그리고 “돌아가 책 읽고 밭 갈며 처분의 날을 기다리겠습니다.”라며 의병해산령을 받아들였다. 이와 같이 안동의병은 부민들의 지원과 기대에도 봉정사전투 이후에는 항쟁할 전투력을 상실함에 따라 해산하고 말았지만, 다음과 같은 여러 점에서 의의가 크다.

첫째, 안동의병은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의 문인들을 비롯한 안동부 지역민들의 광범위한 참여로 성립되었다. 즉 문중은 물론 향교·서원·사당·서당 등 각 기관에서 거액의 군자금을 약속하고 의연하는 등 향촌사회의 적극적인 호응과 지원 하에 이루어졌다. 안동의병을 주도한 인물들은 비록 문약한 유생집단이었지만, 일본을 침략 세력으로 규정하였다. 개화정권도 일본의 종속집단으로 간주하고 반개화·반침략적인 의병투쟁을 전개했다.

둘째, 안동의병은 태봉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병참부대를 공격하는 등 경상도 북부지역에 대한 일본군의 간섭과 탄압의 기반을 무너뜨리고자 하였다. 또한 부산과 충주-서울간의 연결 통로로 이용되는 전략상 중요한 지점이었던 태봉지역에 대한 공격은 부산-서울간 일본군의 연결통로를 끊어 일본의 침략정책을 무력화시키려 했던 점에서 의의가 크다. 비록 태봉전투에서 패함으로 기대했던 목적을 달성할 수는 없었으나 일본군 다수를 살해하는 등 전과를 올렸다. 이는 지역민의 항일의식을 고양시켜 이후 독립운동 기반 조성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셋째, 안동의병은 관군과 전투는 물론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수행하였다. 이는 전기의병의 일부가 시위적인 성격을 띄었던 점과는 달리

안동의병이 강력한 전투의진이었음을 말해준다. 아울러 전기의병이 단지 관군과 전투만이 아닌 일본군과 전투행위가 있었음을 분명히 알려주는 점에서 안동의병이 갖는 민족사적 의의는 지대하다.

2. 김산의병

김산金山·선산善山·상주尙州 등지의 유생들은 을미사변의 소식을 듣고 이에 통분하여 상호 연락을 취해 거의를 실현시켰다. 상주의 이기찬李起燦은 목천에 거주하는 친척인 이기하李起夏와 함께 허위許蔿를 찾아가 의병을 일으킬 것을 협의하였다. 이때 허위는 이미 김산과 구성龜城지역에서 진사 조동석趙東奭·유도섭柳道燮 등과 비분강개하며 의병을 규합하고 있었다. 이기찬은 이들과 합세하여 1896년 2월 11일 군사적 요충지인 김산으로 들어가 의병근거지로 삼았다.

이곳에서는 이미 이곳의 향반 출신인 여영소呂永韶·여중룡呂中龍 등이 중심이 되어 통문을 띄우고 거의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들은 김산군수 이범창李範昌을 영입하여 관민이 합세한 의병을 조직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범창은 관찰사 이중하李重夏의 친척으로 거사를 무산시키는데 뜻이 있었으며, 거사일을 2월 22일로 늦추도록 하고서 감영으로 가버렸다. 이러한 가운데 상주·선산의 이기찬·허위 등이 의병을 이끌고 김산에 들어와 김산지역의 여영소 등이 이끄는 의병과 연합하여 3월 10일 김산향교에서 기의하였다. 註267)

이기찬은 운집한 의병들에 의하여 창의대장에 추대되었다. 이어 의진의 진용을 갖추었으니 군무도총에 조동석, 찬획에 강무형姜懋馨, 참모

장에 허위, 서기에 이시좌李時佐와 여영소, 중군에 양제안梁濟安, 선봉에 윤홍채尹鴻采를 임명하고 인근에 격문을 발송하여 국난에 처하여 모든 이가 의병대열에 나서서 국치를 설욕할 것을 천명하였다. 註268) 김산의병은 김산 장날에 읍으로 들어가 수백 명의 의병을 모집하고 김산군의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장하는 등 군세를 강화했다. 이때 전 무주부사 이탁李倬이 화약 300근을 보내주기도 하였다.

김산의진은 대구부를 공격하기 위해 군량 확충과 모병을 계속해 나가던 중 3월 14일 지례知禮에서 관군을 맞아 전투를 벌였다. 연합부대로 형성된 김산의병은 지휘체계의 미비와 전투력의 열세로 패퇴하고 말았다. 이후 의병장 이기찬을 비롯한 주력부대는 부득이 지례의 홍심동으로 들어가 진용을 재정비하였다. 김산의진은 천험의 요새인 홍심동에서 부의장에 이주필, 우익장에 이성백, 도집례에 유인목, 운량도감에 조석영을 추대하여 진용을 보강하였다. 의진은 이곳에서 전 판서 이용직李容直으로부터 정조正租 80여 석을 군량으로 지원받았다. 흩어졌던 장졸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었으며 이기찬은 이들을 훈련시켜 재기를 준비할 수 있었다. 또한 의병 중 조모曺某라는 이가 민가를 약탈함에 그를 체포·효수하여 군율을 엄정히 하였다. 이어서 영동군수 민치순閔致純에게 가렴주구의 죄를 추궁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인근의 수령들이 도망하는 자가 속출했다. 4월 5일 김산의병은 구성면 도곡천에서 경상감영의 관군과 대치하게 되었다. 이 접전에서 의병들은 괴멸하고 말았다. 의병장 이기찬은 여영소·여중용·양제안 등 지휘부를 이끌고 황간으로 들어갔다. 그후 김산의진은 속리산 아래 장내帳內에서 전투를 치렀으며, 충청도 음성에서 유인석부대에 합세하였다. 그러나 김산지역은 관군에 의해 장악되고 의병에 참여한 사람과 가문은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여영소의 경

우는 그의 집은 가산이 적몰되고 부모는 체포되었다. 여영하의 집도 화를 당했다. 양제안은 유인석의진이 패한 뒤 지례로 들어왔다가 관군의 추격을 피해 영일군 죽장면에 은거하였다. 조동석은 상주의 이교吏校에 의해 포살되기까지 하였다. 註269)

3. 경북 북부지역의 의병

1895년 8월에 명성왕후가 시해되고 11월에 단발령이 공포되자 안동과 김천 이외에도 경북의 거의 전 지역에서 반일의병운동이 일어났다. 예안에서는 이만도李晩燾를 중심으로 선성의진이 봉기하였으며, 청송에서는 심성지를 대장으로 의병이 봉기하였다. 봉화에서는 금석주를 대장으로 한 의진이 결성되었으며, 영양에서도 조승기趙承基가 의병을 결성하였다. 문경에서는 이강년이 의병을 일으켜 안동관찰사를 처단하였으며, 제천의병에 합세하여 큰 전과를 세웠다. 의성에서도 김상종金象鍾이 의병을 일으켜 의성 청송일대에서 활동하였으며, 영덕에서는 신운석申運錫과 김노헌金魯憲 등이 의병을 일으켜 김하락의 이천의병과 합세하여 항쟁하기도 하였다. 영해에서는 이수악李壽岳이 의병장이 되어 항쟁하였으며, 풍기에서는 김교명金敎明이 창의장이 되어 안동의진에 합세하여 일본군과의 항쟁에 동참하였다. 영천에서도 김우창金禹昌이 창의장이 되어 활동하였으며, 순흥에서도 홍종선洪鍾善이 창의하여 의병을 이끌고 예천회맹에 동참하여 일본군과 항쟁하였다. 예천에서는 박주상과 장석규張錫奎가 창의하여 고평전투를 치렀으며, 진보에서는 허겸許蒹이 창의장이 되어 영양의 김도현의병과 제휴하기도 하였다.

1) 김도현의 영양의병


경북지역 의병 봉기도



영양지역에서 의병 봉기를 준비한 이는 벽산 김도현이다. 김도현은 단발령 공포 후 안동에서 의병이 봉기했다는 소식을 듣고 음력 12월 9일 영양읍에 유생들과 창의를 의론하고 통문을 돌렸다. 그러나 주위의 만류로 중지하고 말았다. 그는 1896년 2월 17일음 정월 초5일 안동의진의 소모장 유시연의 권유를 받고 청량산으로 들어가 의병을 봉기하였다. 그는 봉화와 영주지역을 돌면서 의병을 모집하고 안동으로 들어갔다. 김도현은 2월 28일 안동의 영호루 앞 백사장에서 진법을 훈련하였다. 안동의진과 합진에 실패한 그는 영양으로 회군했다. 영양에는 조승기가 의병을 봉기한 상태에 있었으나 합진에 실패하였다. 김도현은 예안으로 가서 선성의진에 합세했다.

선성의진은 1896년 1월 25일 결성되었다. 대장은 이만도, 부장은 이중린李中麟이었다. 안동을 탈출했던 김석중이 경군을 이끌고 안동부를 공격함으로 안동의진이 퇴각하였는데, 이 소식을 접한 선성의진도 2월 1일 해산한 바 있다. 선성의진은 2월 16일 다시 결성되었는데, 1차의진의 부장이었던 이중린이 청량산에서 다시 거병한 것이다. 김도현은 3월에 선성의진의 중군장에 초빙되어 선성의진에 합세했다. 그는 영덕군수 부자의 목을 베고 예천회맹에 선성의진의 본진을 이끌고 참여하였다. 선성의진의 조직은 이중린 대장 밑에 중군장 김도현, 선봉장 이인화李仁和,

전방장 이중언李中彦, 참모에는 이빈호·이중엽, 종사 이장규 등이었다. 註270)

예천회맹에는 안동의병을 비롯하여 선성·풍기·순흥·영천·봉화·제천의병 등 7개 의병진이 참여했다. 이들 의병진은 3월 28일 예천의 산양에서 회맹하고 함창을 향해 출동하였다. 의진의 공격은 3월 29일 아침부터 시작되었다. 저녁까지 치열한 전투를 감행했으나 의병진은 일본군의 공격에 밀려 퇴각하고 말았다. 선성의진은 김도현과 함께 퇴각한 병사가 3~4명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4월 1일 안동의병의 구원 요청에 의병 50명을 이끌고 안동으로 갔다. 안동부는 이미 일본군의 방화로 불타고 있었다. 그는 중군장을 사퇴하고 영양으로 돌아왔다.

김도현은 강릉의병의 소모사 이호성의 권유를 받고 6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4월 하순경에 강릉으로 들어갔다. 강릉의 병장 민용호는 김도현을 선봉장에 임명하고 군사들에게 당포唐布를 주어 옷을 만들어 입도록 하였다. 김도현은 민용호의진에 합류한 후 서울에서 온 관군과 대공산성에서 일대 접전을 벌였으나 우세한 화력에 밀려 패산하였다.

김도현은 민용호의병과 함께 삼척으로 이동하여 김헌경이 이끄는 삼척의병과 연합하여 활동했다. 이때 민용호부대 편제는 대장 민용호, 선봉장 김도현, 수성장 민동식, 유진장 김헌경, 중군 최중봉·강우서·이영찬·전치운·신무섭 등으로 구성되었다. 연합의진은 5월 31일 삼척에서 관군과 큰 전투를 수행하였다. 관군의 공격으로 시작된 이날 전투에서 의병은 처음에는 유리한 지형을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세하였으나 점차 탄약이 고갈됨에 전세가 역전되어 결국 오십천변으로 밀리고 말았다. 의병은 관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으나 결국 삼척을 떠나 정선지

역으로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삼척전투에서 퇴각한 김도현은 남은 군사를 이끌고 고향인 영양으로 돌아와 검산성劍山城을 쌓고 항전을 계속하였다. 이 산성은 석성으로 성둑이 1.5㎞, 면적이 3만 5천여 평에 달하는 크기였다. 이처럼 요새를 이용하여 지구전을 감행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김도현은 각 지역의 의병 해산과 패산을 보면서 결국 총 113자루를 숨겨 후일을 기약하면서 1896년 중양절인 9월 9일양 10월 15일 영양군 청기면에서 부대를 해산하였다. 당시 심정을 그는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아, 이 한 몸으로 어찌 불공대천의 원수를 갚으리까. 천신만고 수 없는 죽을 고비를 겪고 나서 겨우 목숨을 부지하여 살고 있으나, 세상 일의 움직임을 지켜보면서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지 않는 날이 없다. 註271)

2) 의성의병

의성의병은 1896년 3월 25일 봉기하였다. 이곳 유생들은 3월 3일경에 향교에서 통문을 돌리고 3월 14일 향회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김상종이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김상종은 의병을 모집하여 3월 25일 창의한 것이다. 진용은 김상종 대장 밑에 중군장 권대직, 선봉장 김수담, 우익장 이희정, 소모장 김수욱, 관향장 김수협 등으로 조직되었다. 이들 주도층은 김상종·김회종 형제가 안동의 유학자 김흥락·김도화의 문인이니 정재학파定齋學派의 범주에 포함되는 유생들임을 알 수 있다. 김수담·김수욱·김수협 등은 모두 신안동김씨로 의성군 점곡면 서변리에 세거하는 김상종의 족숙에 해당한다.

의성의병의 관군과의 첫 전투는 4월 2일 의성읍 구봉산에서 일어났

다. 4월 1일 오후에 남쪽에서 관군이 올라온다는 소식을 들은 의진은 읍내를 뒤로 한 구봉산에 진을 치고 대비하였다. 전투는 4월 2일 새벽에 시작되었다. 이른 새벽에 관군이 의진을 공격한 것이다. 이날 전투는 오후 1시 무렵까지 계속되었다. 첫 전투는 의병측의 승리였던 것 같다. 김회종의 『병신창의실록』에서는 의병은 다행히 한 사람도 다친 사람이 없는 반면에 관군은 탄환에 맞아 죽은 자가 20여 명이었다고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진은 관군의 공격을 끝까지 막아내지는 못하였다. 註272) 점차 뒤로 밀리게 된 의진은 읍내를 포기하고 물러났다. 관군은 의성읍내의 집들을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적원일기』에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알려주고 있다.



20일(양력 4월 2일). 닭이 운뒤 본진에서 척후의 사통이 또 이르러 말하기를 의성진과 대구 병정이 구성봉 아래에서 접전하였는데, 의진이 대패하여 인민들은 피하고 적병은 곧장 성내로 들어가 관공서와 민가를 마구 소멸하여 폐허가 되었다고 하였다. 註273)



또한『적원일기』2월 25일에서는 의성읍의 800여 호 중에서 모두 불에 타고 겨우 100여 호만 남았다고 기록하고 있을 정도로 관군의 행패가 심했다.

의성의병은 5월 10일음 3월 28일에는 황산에서 대구와 군위의 관군과 전투를 치렀다. 전투 중에 큰비가 내려 화약을 쓸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의진은 이 전투에서 참패하고 김수담·김수협 등 많은 의병이 전사하였다.『병신창의실록』에 의하면, 관군이 황산에서 27인, 고무곡에서 2인


비봉산 전투도

 


도합 29인을 죽였다고 한다. 또 대장 김상종의 고향인 사촌沙村에 가서는 민가에 불을 질러 소각했다.

의성의진은 남한산성전투를 치르고 내려운 김하락의 이천의진과 연합하여 항쟁하기도 하였다. 연합의진은 5월 20일 관군 200여 명이 남쪽 산운리 쪽으로 들어온다는 보고를 받고 수정사에 본진을 구축하고 관군의 공격에 대비했다. 이천의병의 좌우익장 신용희와 김경성은 3대를 거느리고 비봉산에 매복하였으며, 조성학은 3대를 이끌고 수정동 입구에 매복하였다. 의성의진의 김두병은 2대를 인솔하고 비봉산 아래에 주둔하였으며, 중군과 김순삼은 천마봉에 매복했다. 김하락은 유격대 1대를 인솔하고 각대를 왕래하였으며, 김상종은 나머지 의병을 이끌고 남현을 지켰다. 註274)

정오경에 수정동으로 들어오는 관군과 첫 전투가 벌어졌다. 수정동에 잠복해 있던 조성학부대가 공격하여 관군을 청로역 방면으로 퇴각시켰다. 의병대는 오후에 조성학부대까지 합세하여 관군을 추격하여 전과를 세웠다. 저녁 무렵 의병대는 수정사로 회군하였다.

관군의 공격은 그로부터 5일 후인 5월 25일 아침에 시작되어 26일까지 계속되었다. 26일은 화약이 날아갈 정도로 바람이 거세게 부는 날씨였다. 의병은 화승총에 화약을 잴 수 없는 형편이었다. 김상종은 결국 헛되이 죽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서 각자 해산할 것을 명령하였다. 註275)

3) 청송의병

청송의병은 1896년 3월 12일에 봉기하였다. 이보다 앞서 안동의병의 소모장 유시연이 3월 8일음 1월 25일 포병 30여 명을 데리고 청송으로 와서 청송군 관아의 무기를 탈취하고자 하였다. 긴급히 각 면에 연락을 취해 3월 10일 향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100여 명이 참여했다. 참석자는 서효원徐孝源을 장수로 추대하였으나 모임을 이끄는 것이 익숙하지 않다면서 사양하였다. 다만 그는 여러 사람들에게 의병에 참여할 것을 다음과 같이 권유하였다.



본시 나라가 어려움에 처한 난을 당하면 의병을 일으키는 것은 당연한 도리이며, 거듭되는 격서와 통문이 겨를 없이 당도하는 지금은 앞뒤 사정을 따져서 가리고 피할 길이 없는 일이다. 의진에 참여하고 참여치 않는 사이란 충신과 역적으로 나뉘어지는 것이며 형세와 틈을 보아 뒤로 물러서는 자가 있다면 병법으로 하여금 먼저 처벌하여야 할 것이며 이렇듯 당연하고 또 위급한 일인데도 회

원으로서 한번이라도 모임에 참여치 아니한다는 것은 부모에 대한 의리를 모르는 짐승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니 옳은 일이겠는가.… 註276)



청송지역의 유생들은 3월 12일에 심성지沈誠之, 본관 청송, 자 士行, 호 小流를 대장에 추대하고 조성규와 권복규가 파록을 정했다. 심성지는 춘추대의론에 입각하여 창의의 당위성을 역설한 다음날 대장직에 올라 유시연을 돌려보냈다. 3월 15일에는 제장을 선임하고 참모와 서기를 뽑았다. 註277) 16일에는 대장기를 세우고 남천 백사장에서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17일에는 축문과 창서사昌誓詞를 지어 천지신명께 축원했다. 축문은 서효원이 지었는데, ‘국왕의 의대소가 내려진 이상 창의는 우리와 오랑캐, 사람과 짐승의 분별을 위한 춘추대의’라고 규정하였으며, 김상길이 지은 창서사에서는 ‘밀지를 받은 선비의 소임은 흉도를 섬멸하고 오랑캐를 구축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註278)

청송의진의 지도부는 심성지 등 양반유생으로 구성되었으며, 병사부는 포병 100여 명과 농민·보부상 등으로 구성되었다. 지도부는 대부분 이곳에 세거한 가문 출신으로 덕천의 청송심씨, 안덕의 함안조씨, 화목의 의성김씨, 부동의 달성서씨, 현동의 영양남씨, 부내의 파평윤씨 등이 중심이었다. 이들은 학문적으로 대체로 정재 유치명의 문인이거나 정재학파 문인들과 교유 관계를 맺고 있었다. 청송의병은 군자금을 위해 향도청鄕都廳을 설치하여 군량을 모았다. 향도청에서는 각 문중에 일정액을 분담하여 군량을 확보하고자 하였으며, 요호들로부터 자발적인 의연금을 받고자 하였다.

청송의병은 창의 후 안동의병을 비롯하여 의성의병·영덕의병 등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활동하였다. 안동의병과는 전후 10여 차례의 사통을 교환했다. 의성의병과도 3~4차례의 사통을 주고 받았다. 흥해·영덕의병과도 사통을 주고 받으며 협조체제를 형성하였다. 또한 김하락의진이 의성으로 들어온 후인 5월 13일에는 의성·청송·이천의병의 연합의진을 결성하였다. 이 연합의진은 5월 14일에 안덕면 감은리 뒷산인 성황현에서 관군과 전투를 수행하여 전과를 올렸다. 연합의진은 관군 170여 명이 대구 방면에서 청송 화목으로 들어온다는 정보를 접하고 이에 대비하였다. 구연영은 2대의 군사를 거느리고 안덕 후방에 잠복하고, 신용희는 2대의 군사를 이끌고 안덕 뒤 상봉에, 김경성은 2대의 군사를 거느리고 성황산 주봉에 매복했다. 조성학은 2대의 군사를 거느리고 성황현에 매복하고 김하락은 높은 지대에 올라가 총지휘하였다. 의성의진은 앞선 전투로 피로가 누적하여 전투에 참여하지 못했다. 청송의진은 안덕 속곡束谷으로 물러나 있었다. 전투가 개시되어 매복해 있던 의병들이 일제히 공격하자 관군은 앞산을 향해 도망쳤다. 청송의병의 중군 김대락 등이 포군 2대를 이끌고 감은리 뒷산으로 올라 전투에 합류하여 관군을 패퇴시켰다. 이때 영덕의병은 청송의병을 후원하기 위해 의병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5월 17일 의병이 이전평역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전투가 끝난 후였다. 영덕의병은 5월 18일 위로차 청송의진을 방문하고 돌아갔다. 5월 22일 청송의진에서는 우익장 권성하와 후방장 장무호 등에게 포군 3초를 이끌고 영덕의병을 후원하도록 하기도 하였다. 이들이 영덕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영덕의병이 관군이 공격을 받고 패퇴한 뒤여서 청송의병은 회군하고 말았다. 이후 청송의병은 경주성전투에도 참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註279)

4) 봉화의병

봉화의병은 1896년 음력 1월 말에 창의하여 7월 중순 경까지 봉화·안동·예천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봉화의병의 대장은 금석주琴錫柱, 1857~1921, 자 景石, 호 雲樵로 3월 8일음 1월 25일 의병을 이끌고 안동으로 들어가 안동의병 등과 연합의진을 결성했다. 안동의병과 봉화의병을 비롯한 7읍의 연합의진은 3월 20일 풍산도회를 열고 상주의 태봉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병참부대와 전투를 수행하였다. 태봉전투에 참여한 봉화의병은 대장 이하 70여 명에 달했다. 봉화의병 진용은 다음과 같다. 註280)



대장 : 금석주

중군장 : 정규철참모 : 이만홍 장성완 김상철

좌익장 : 김진규우익장 : 정영룡

군무도총 : 이현규제군문도총 : 김종대

포영장 : 박영우서기 : 유진극

종사 : 홍환욱 정석연관향 : 김진하 금보연

군문집사 : 김영주 박영희출령군관 : 윤성근 연기홍 박원석



봉화의병에는 이들 외에 포졸이 53명이 편제되어 있어 중요한 무장 세력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태봉전투는 안동의병의 활동 부분에서 자세히 언급한 대로 치열한 접전을 벌였지만 석패하고 말았다. 봉화의병의『일기』에서는 태봉전투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알려주고 있다.



16일3월 29일 아침. 포졸 50명과 여러 장관을 거느리고 함께 걸어서 산을 오

른 즉 예안 풍기 양진이 먼저 도착하여 소리를 지르고 포를 쏘고 있었다. 각 의진은 일시에 함께 나아가 혹은 산을 의지하고 혹은 천방을 의지하고 있었다. 이때 일본군 42명이 일시에 곧바로 출병하여 풍기 예안 의진이 먼저 패하여 달아나니 영천 순흥의진은 군대를 붙들고 산위에 있으면서 갑자기 나아가 싸울 뜻을 잃고 말았다. 호좌병은 15일 밤 함창에 주둔하여 접전하다가 대패하였으므로 사졸의 사망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었는데 이를 두려워 감히 나아가지 않았다. 안동 중군은 태봉의 좌측 산위에 올라 연이어 천보총을 발사하여 왜병 1명을 죽였다. 일본군 10여 명이 바로 앞에서 연이어 총을 쏘니 천지가 뒤흔리고 부상을 입은 사람 중 죽은 자가 7~8명이었다. 잠시 그 기세를 틈타 살펴본 즉 매우 위태로운 상황이어서 포졸 53명을 5대로 나누어 병참 앞 천방 아래로 직접 투입하여 잠복하도록 하였다. 포수 엄학성이 부상을 입고 물러나고 모든 군사들이 연달아 총을 쏘아 왜병 1명을 죽였다. 이때 왜병 13명이 물을 건너 돌진하므로 일진이 북을 치고 고함을 질렀다. 또 왜병 3명을 죽이니 왜진이 일시에 함께 나오므로 그 예봉을 감당하기가 불가하였다. 열읍 의진은 모두 놀라서 구할 수 없었고 50명의 군병으로 어찌 대적할 수 있겠는가. 부득이 병졸을 퇴각하니 열읍 의진은 일시에 허물어져 나뭇잎이 떨어지고 별이 흩어지듯 어지러이 흩어졌다. 장관들은 모두 말을 타고 곧장 산양으로 오니 산양은 촌락이 텅비어 한 사람도 없었다. 다만 서소모장과 모든 장관들은 흩어진 나머지 병졸들을 수합하여 모든 의진이 돌아오는 길에 주둔시켜 방어하였다. 술시戌時경에 무량戌量 경진京津의 주점에서 저녁밥을 먹고 곧장 말을 달려 풍산평에서 유숙하였다. 註281)



봉화의병은 태봉전투에서 포졸 53명을 5대로 나누어 일본군 병참 앞 천방 아래로 투입하여 왜병 4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수립하였다. 그러나 포졸 엄학성이 부상을 입었으며, 일본군의 집중 공격에 다른 의진과 함

께 퇴각했다. 봉화의병은 산양과 경진 등을 거쳐 3월 31일 봉화로 퇴각하고 진영을 재정비하였다. 우선 흩어진 의병을 다시 모으고 요호들과 각 문중에 문배전을 할당하는 등 군량 확충에 노력을 기울였다. 이후 봉화의병은 풍기·순흥·영주의병과 협조체제를 형성하면서 죽령 이남을 방어하는데 주력하였다.

4. 진주의병

진주의병은 1896년 2월 노응규에 의해 함양의 안의安義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와 함께 거의한 인물은 덕유산 기슭에 위치한 장수사長水寺의 승려인 서재기徐再起를 비롯하여 정도현鄭道玄·박준필朴準弼·최두원崔斗元·최두연崔斗淵 등 그의 문인과 임경희林景熙·성경호成慶昊 등이었다. 노응규는 서재기를 선봉장에 임명하는 등 의병진을 편성하고 2월 19일음 1월 7일저녁에 의병을 이끌고 진주성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진주향교에 들어가 성안의 동정을 살피는 한편 향후 작전계획을 수립했다. 노응규의진은 다음날 새벽 순식간에 진주성을 점령할 수 있었다. 이때 성을 지키던 순검 2명과 중방 1명은 철퇴를 맞고 사망하였으며, 관찰사 조병필과 경무관 김세진은 대구로 도피하였다. 참서관 오현익은 성을 탈출하여 삼가의 토곡까지 도주하였다가 체포되어 진주로 압송되어 효수되었다. 노응규가 의병을 봉기한 이유는 명성왕후의 시해에 대해 복수하고자 함에 있었다. 일본공사관의 보고에서 이를 분명히 알 수 있다.



그 목적이 왕비를 살해한 것이 전적으로 일인의 행위라 하여 원수 일인을 조선 국경 밖으로 구축하는 것에 있었던 까닭에 일본인과 결탁된 자 및 단발한 자를 미워하는 것이 심하였으니 지금까지 살해된 자로는 단발자 40여 명, 일본인

과 결탁된 상인 2인, 이유 없이 살해된 자도 실로 100여 명에 달한다고 한다. 註282)



진주성을 점령한 노응규는 고종에게 창의소倡義疏를 올려 “절사節士는 목숨을 경솔히 버리지 않으며, 의리를 붙잡는 것은 군자의 의무이옵기에 적개심을 이기지 못하여 의병을 일으켰다.”고 거의의 뜻을 밝혔다. 또한 그는 “석 달 안에 왜적을 축출하고 선왕의 문물과 토지를 회복할 것”을 천명하였다.

노응규의병이 진주성을 점령하자 진주부민들도 정한용鄭漢鎔을 대장으로 의병진을 결성하여 성밖에 진을 쳤다. 노응규는 성안에 초현관招賢館을 임시로 설치하고 인근에 다음의 방문榜文을 내걸었다.



1) 경륜이 뛰어난 자

2) 도략이 과인過人한 자

3) 문학에 능한 자

4) 주술籌術에 능통한 자

5) 비력臂力이 과인한 자



를 초빙하여 각 지역의 치안과 행정을 담당케 하고자 한다는 취지였다.

노응규는 한편으로 의병초모를 위해 각 면리에 전령을 보내 매 2호당 군사 1명씩을 내게 하였다. 2월 26일에는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임진왜란 때 진주 수성전에서 순절한 3장사壯士 및 의기사義妓祠에도 제사를 올려 지역 주민의 의기를 고무시켰다.

대구로 도망간 경무관 김세진은 대구진위대군을 지원받아 진주의병


진주의병장 노응규 사망통지서

 


을 진압하고자 2월 26일 대구를 출발하였다. 대구진위대군은 2월 28일 의령에 도착하여 공전을 탈취하고 주민을 강제로 부대에 편입시켰다. 관군의 이와 같은 행위에 군수는 도피하고 의령향교 인사들도 관군의 행적을 비밀리에 급히 통보해줬다. 노응규는 이 소식을 듣고 선봉장 서재기에게 별동대를 주어 출동하게 하였다 의병은 정암진에서 관군과 만나 패퇴시켰다. 그 뒤에도 대구진위대군이 일본군의 지원을 받아 현풍을 거쳐 진주로 공격해 들어왔으나 이 역시 패퇴되었다.

이와 같이 부대를 정비한 진주의병은 대구부에서 파견된 관군을 두 차례나 격파하고 다수의 전리품을 노획하는 등 의병진 사기를 더욱 고무시켰다. 노응규는 점차 활동범위를 넓혀 부산과 근접한 함안·김해일대까지 진출하여 일본군수비대와 치열한 접전을 전개하였다. 이때 의령출신의 이청로李淸魯부대도 합세하였다.

정부에서 파견된 이겸제가 이끄는 관군은 기우만의병을 진압하고 그

여세를 몰아 4월 중순경 곧바로 진주로 들어왔다. 이때 토착세력인 정한용의병대는 관군의 이간책으로 합천 삼가로 이진하고, 선봉장 서재기부대도 안의로 이진한 상태여서 성안에는 노응규가 인솔하는 소수의 의병만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겸제가 거느린 경군 500여 명과 대구진위대군은 일시에 진주성을 공격·함락하였다. 노응규는 간신히 탈출하여 삼가로 갔으나 정한용은 이미 의병을 해산한 후였다. 선봉장 서재기마저도 안의의 서리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결국 노응규는 안의의 서리들에 의해 부친과 친형이 살해당하는 아픔을 겪고 의병을 해산시키고 말았다. 註283)

[註 180] 이만도,『향산일기』 국사편찬위원회, 1985, 673쪽. ☞

[註 181] 청성서원은 안동시 풍산읍 모곡리에 소재하였으며, 퇴계의 제자인 松巖 權好文의 학덕을 기려서 1608(선조 41)년 설립되었다. 대원군때 훼철되었다가 1909년 복설되었다. 鏡光書院은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에 소재하였으며, 1569년 서당으로 시작되어 1686(숙종 12)년에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慷齋 李宗準과 敬堂 張興孝를 모셨다. ☞

[註 182] 이긍연,『을미의병일기』1895년 12월 1일조. 

박주대의 일기인『저상일월』1895년 12월 2일조에 의하면 이때 관찰사는 이를 막기 위해 일본군을 불러들여 준마를 탄 일본군 30여 명이 안동부에 들어왔다고 한다. ☞

[註 183] 이긍연,『을미의병일기』1895년 12월 2일자에 의하면 이때 호계서원의 임원으로 도유사에 도사 김도화, 재유사에 유학 金潤模였으며, 그리고 전임 임원으로는 전지평 김흥낙·유학 김상수·전도정 유지호 등이고 회원으로는 유학 金養鎭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호계서원은 안동시 임하면 임하리에 소재한 서원으로, 1575(선조 8)년 설립되어 1676(숙종2)년 사액된 서원이다. 퇴계 이황을 제향하고 서애 柳成龍과 학봉 金誠一을 배향하였다. 본래는 여강서원이었으며 대원군 서원철훼령으로 훼철되었다. 月谷面 道谷里 白蓮寺 터에 창건하였으나 1973년 수몰로 임하면으로 이건하였다. 여강서원에 대하여는 김학수의 「여강서원과 영남학통」,『조선시대의 사회와 사상』 조선사회연구회, 1998 참조. ☞

[註 184] 이긍연,『을미의병일기』1895년 12월 3일자. 

이긍연은 이날 족조인 李厚坤과 족제인 이도연과 함께 참석하였다. 이날 김도현 역시 창의를 위해 친구인 성순 권한모와 함께 의론하였다. 그러나 권한모가 주위의 형세의 어려움을 들어 창의에 난색을 표함에 김도현은 12월 9일 혼자 통문을 띄우고 거의에 들어갔다(김도현, 「벽산창의전말」,『한국독립운동사자료집』2, 1972, 16쪽). 김도현의 의병활동에 대하여는 김강수의 「한말 의병장 벽산 김도현의 의병활동」,『북악사론』2, 1990. ☞

[註 185] 이긍연,『을미의병일기』1895년 12월 7일~14일자 ; 김도현,『벽산선생창의전말』; 박주대,『저상일월』참조. 이들 외에도 서기가 선출되었으나 내용은 알 수 없다. ☞

[註 186] 박주대의『저상일월』1895년 12월 7일자에 의하면, 곽종석이 부장에 추대되었으나 유독 곽종석만이 나오지 않았다 하며 그것이 의아스러우면서 알만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

[註 187] 이긍연,『을미의병일기』1896년 1월 6일자. ☞

[註 188]『동경조일신문』1896년 2월 4일 朝鮮時事 「安東賊勢」. ☞

[註 189] 박주대,『저상일월』12월 12~14일자. 

이긍연,『을미의병일기』1895년 12월 16일자에 의하면 관찰사가 안동부를 접수한 16일 대구부 병정 300이 곧 돌아갔다고 알려주고 있다. 또 12월 19일자에 의하면 일본군 100여 명이 성문을 통과하여 宣城을 향해 나갔음을 알려주고 있다. ☞

[註 190] 안동을 공격하는데 예천이 전초기지로 사용되었으며, 예천 군수는 적극적으로 이를 지원하였다. 후일 안동부가 관군에 점령된 후 이긍연은 이를 일러 “이번 일은 대개 예천군수의 간교한 꾀에 의하여 이다.”라고 하면서, “예천군수의 죄는 奭中보다 심하다”(이긍연,『을미의병일기』1895년 12월 21일자)라고 비판하고 있다. 후일 서상렬부대에 의해 예천군수가 가장 먼저 처단된 이유를 알 것 같다. ☞

[註 191] 심성지,『적원일기』병신년 정월 19일조에 의하면, 이때 일본군이 시내로 들어와 岳寺의 상부에 있는 향교 뒤로 총을 쏘면서 돌입하였다고 한다. ☞

[註 192] 이긍연,『을미의병일기』1895년 12월 12~15일자. ☞

[註 193] 심성지,『적원일기』병신년 정월 19일조. ☞

[註 194] 김도현은 이날 의병 봉기에 관한 협의를 진행 중 안동의병이 깨진 소식을 들었다. 그날 밤에 수곡에 살던 종고모가 자기 집에 피난왔다. 김도현은 안동의진의 패함에 분하여 그날 밤 거의를 구체화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김도현,『벽산선생창의전말』 18쪽). ☞

[註 195] 박주대,『저상일월』1895년 12월 19일조. ☞

[註 196] 이긍연,『을미의병일기』1895년 12월 29일조. ☞

[註 197] 박주대,『저상일월』1896년 1월 2~3일조 ; 김도현,『벽산선생창의전말』 18쪽. ☞

[註 198] 박주대,『저상일월』1896년 1월 5일조 ; 박주대,『羅菴隨錄』. ☞

[註 199] 이긍연,『을미의병일기』1896년 1월 7일자. ☞

[註 200]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雲崗先生倡義日錄』『독립운동사자료집』1, 212~213쪽. ☞

[註 201] 이긍연,『을미의병일기』1896년 1월 12일. ☞

[註 202] 이상룡은 1894년 조부상을 당한 후, 동학군이 치성하자 살고있는 곳이 부와 가까워서 소요스럽다 하여 陶谷의 先齋로 옮겨 우거하다가 1895년 겨울에 외삼촌인 권세연이 의병장에 추대되자 “공사의 의리가 중대한데 喪制를 지키느라 집에 있을 수 없다”(權相圭, 「行狀」,『石洲遺稿』권6)하고 臨淸閣으로 돌아와 권세연의 활동을 도왔다. ☞

[註 203] 이에 대하여 “이상룡과 유창식이 孤雲寺에서 기병하여 김도화를 대장에, 유난영을 都摠에 추대하고 안동부를 공격하여 탈환했다.”고 되어 있는 기록도 있다. ☞

[註 204] 김도현,『독립운동사자료집』2, 20쪽. ☞

[註 205] 이긍연,『을미의병일기』1896년 1월 13일. ☞

[註 206] 「安東倡義所各門中配記」 (丙申 正月 日). ☞

[註 207] 이긍연,『을미의병일기』1896년 1월 24일조. 

김도현의 「벽산선생창의전말」에 의하면 위 인물들 외에 權載重이 참모로 활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2, 28쪽). ☞

[註 208] 이긍연,『을미의병일기』1896년 1월 27~28일자. ☞

[註 209] 박주대, 「嶺西召募大將徐相烈檄文」,『羅菴隨錄』4, 국사편찬위원회, 1980, 417~418쪽 ; 이긍연, 「부록」,『을미의병일기』. ☞

[註 210] 이상룡, 「義兵再擧後義將單子(代義將作 丙申)」,『석주유고후집』 석주선생기념사업회, 1996, 121~122쪽. ☞

[註 211] 이긍연,『을미의병일기』1896년 1월 29일자. ☞

[註 212] 권상규, 「遺事」,『星臺集』부록. ☞

[註 213] 이긍연,『을미의병일기』1896년 1월 29~30일자 ; 박주대,『저상일월』1896년 1월 30일자. ☞

[註 214] 이긍연,『을미의병일기』1896년 1월 29~30일. ☞

[註 215] 심성지,『적원일기』병신년 2월 17일자에 소모사 유창식의 활동이 나와 있다. ☞

[註 216] 청송의진에 김도화의 격문이 2월 6일 전해졌으나, 격문의 내용은 전해지지 않는다. ☞

[註 217] 김도화, 「贈徐相烈」,『척암선생문집』속집 1-詩. ☞

[註 218] 박주대,『저상일월』1896년 2월 5일자에 의하면, 연합의병의 준비는 예천지역에서도 추진되었다. 예천에서는 연합의진의 편성을 위하여 향교와 서당, 그리고 문중에서 의병 군자금을 분담하여 거두었는데 2월 5일 현재 7,400냥을 모금하였다. ☞

[註 219] 이정규, 「육의사열전」,『독립운동사자료집』1, 174~175쪽 ; 박정수, 「下沙安公倡義顚末」,『독립운동사자료집』1, 406쪽 ; 이긍연,『을미의병일기』1896년 2월 13일. 이 맹약문은 이정규의 「육의사열전」에 따르면 서상렬이 원용정을 시켜 작성케 하였다 한다. ☞

[註 220] 이긍연,『을미의병일기』1896년 2월 17일자. “本府中軍所率兵二百五十 還時只爲十六.” ☞

[註 221] 이긍연,『을미의병일기』1896년 1월 27일자. ☞

[註 222] 김도현,『독립운동사자료집』2, 22쪽. ☞

[註 223] 이긍연,『을미의병일기』1896년 2월 13일자. ☞

[註 224] 금석주,『일기』 丙申(1896) 2월 15일. ☞

[註 225] 이긍연,『을미의병일기』1896년 2월 13~14일자 ; 이정규, 「육의사열전」,『독립운동사자료집』1, 175쪽. ☞

[註 226] 김도현,『독립운동사자료집』2, 23쪽. ☞

[註 227] 금석주,『일기』1896년 2월 16일자. ☞

[註 228] 고려대출판부, 「4050호, 日軍의 安東民家燒却事件에 대한 解明」,『구한국외교문서(日案 3)』. ☞

[註 229] 이긍연,『을미의병일기』1896년 2월 17일자. ☞

[註 230] 금석주,『일기』1896년 2월 16일자. ☞

[註 231] 이긍연,『을미의병일기』1896년 2월 17일자. ☞

[註 232] 김도현,『독립운동사자료집』2, 23~25쪽. ☞

[註 233] 금석주,『일기』1896년 2월 16일자. ☞

[註 234] 김도현,『독립운동사자료집』2, 24쪽 ☞

[註 235] 김도현,『독립운동사자료집』2, 24~25쪽. ☞

[註 236] 이정규,『독립운동사자료집』1, 175~177쪽 ; 김상기,『한말의병연구』 207쪽. ☞

[註 237] 이긍연,『을미의병일기』1896년 2월 17일자. ☞

[註 238] 이긍연,『을미의병일기』1896년 2월 17일자. ☞

[註 239] 박주대,『저상일월』1896년 2월 19일자. ☞

[註 240] 박주대,『저상일월』1896년 2월 19~20일자. ☞

[註 241] 이긍연,『을미의병일기』1896년 2월 20일자. ☞

[註 242] 고려대출판부, 「4050호, 일군의 안동민가소각사건에 대한 해명」,『구한국외교문서(일안 3)』. ☞

[註 243] 이남규, 「辭安東觀察使疏」,『修堂集』권2-疏, 42~43쪽 ;『고종실록』권34, 건양원년 4월 28일자. ☞

[註 244] 김상기, 「수당 이남규의 학문과 홍주의병투쟁」,『조선시대의 사회와 사상』 조선사회연구회, 1998. ☞

[註 245] 박주대,『저상일월』1896년 2월 22일. 

박주대는 2월 22일자에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오기로 보인다. ☞

[註 246] 김도현,『독립운동사자료집』2, 25~28쪽. ☞

[註 247]『독립신문』건양원년 4월 30일 「잡보」. ☞

[註 248] 국사편찬위원회, 「일병의 안동부 요민유접민가소훼에 대한 단속」,『주한일본공사관기록』4, 1988 ; 고려대출판부, 「4023호, 일병의 안동부요민유접민가소훼에 대한 단속요망」,『구한국외교문서(일안 3)』. ☞

[註 249] 고려대출판부, 「4050호, 日軍의 安東民家燒却事件에 대한 解明」,『구한국외교문서(일안 3』. ☞

[註 250] 이긍연,『을미의병일기』1896년 2월 20일자. ☞

[註 251] 박주대,『저상일월』1896년 2월 22일자. ☞

[註 252] 이긍연,『을미의병일기』1896년 2월 20~21일자. ☞

[註 253] 심성지,『적원일기』1896년 2월 21~24일조. ☞

[註 254] 이긍연,『을미의병일기』1896년 3월 11일자. ☞

[註 255] 김도현,『독립운동사자료집』2, 27·36쪽. ☞

[註 256] 이긍연,『을미의병일기』1896년 4월 11일자. ☞

[註 257] 이긍연,『을미의병일기』1896년 3월 14일자 ; 김도현,『독립운동사자료집』2, 45~47쪽. ☞

[註 258] 김도화, 「踰昆鳥夷嶺」,『척암선생문집』별집1-詩. ☞

[註 259] 김도화, 「與鄕道士林」·「與河回柳氏門中」,『척암선생문집』별집 1. ☞

[註 260] 이긍연,『을미의병일기』1896년 4월 3~9일조. ☞

[註 261] 이긍연,『을미의병일기』1896년 4월 19·29일자. ☞

[註 262] 김도화, 「檄告暗行曉諭使張錫龍鄭宜默金近淵」,『척암선생문집』별집 1. ☞

[註 263] 이긍연,『을미의병일기』1896년 5월 13·28일자. ☞

[註 264] 김도화, 「諭告道內士林文」·「勅嶺南義陣」,『척암선생문집』별집 1. ☞

[註 265] 이긍연,『을미의병일기』1896년 6월 2일자. ☞

[註 266] 김도화, 「派兵後自明疏」,『척암선생문집』별집 1-疏. ☞

[註 267] 권대웅, 「김산의진고」,『한국근대사논총』 윤병석교수화갑기념논총간행위원회, 1990. ☞

[註 268] 이기찬,『지산유고』필사본) 권3 참조. ☞

[註 269] 이기찬,『지산유고』참조 ; 김상기, 「의병열전-이기찬-」,『유교신보』1995년 4월 15일자. ☞

[註 270] 김도현, 「벽산선생창의전말」,『독립운동사자료집』 2,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22쪽. ☞

[註 271] 김강수, 「한말 의병장 벽산 김도현의 의병활동」,『북악사론』2, 국민대사학회, 1990. ☞

[註 272] 김원석, 「병신창의실록을 통해본 의성의병」,『안동사학』3, 안동사학회, 1998. ☞

[註 273] 심성지,『적원일기』 1896년 2월 20일조. ☞

[註 274] 김희곤 외,『의성의 독립운동사』 의성군, 2002, 94쪽. ☞

[註 275] 김회종,『병신창의실록』; 김희곤 외,『의성의 독립운동사』 96쪽. ☞

[註 276] 심성지,『적원일기』1896년 정월 27일자. ☞

[註 277] 청송의진의 편제에 대해서는 권대웅의, 「1896년 청송의진의 조직과 활동」,『한국근현대사연구』9, 1998, 52쪽 참조. ☞

[註 278] 심성지,『적원일기』1896년 정월 29일~2월 9일자. ☞

[註 279] 심성지,『적원일기』1896년 4월 초2일~11일자 ; 김하락,『진중일지』, 602쪽 ; 권대웅, 「1896년 청송의진의 조직과 활동」,『한국근현대사연구』9, 68~73쪽. ☞

[註 280] 금석주,『일기』1896년 2월 10일 ; 김희곤 외,『봉화의 독립운동사』 55쪽. ☞

[註 281] 금석주,『일기』1896년 2월 16일 ; 김희곤 외,『봉화의 독립운동사』 65~66쪽. ☞

[註 282] 국사편찬위원회, 「진주방면에 있어서의 폭도의 정황」,『주한일본공사관기록』 5, 1988, 10쪽 ; 박민영, 「신암 노응규의 진주의병 항전 연구」,『한국근대사논총』 박성수교수화갑기념논총간행위원회, 1990, 219쪽. ☞

[註 283] 박민영, 「신암 노응규의 진주의병 항전 연구」,『한국근대사논총』 225쪽; 김상기, 「의병열전-노응규-」,『유교신보』1995년 5월 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