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충청지역 의병 / 전기의병의 확대 / 한말 전기의병

몽유도원 2014. 1. 14. 08:43

제9권 한말 전기의병 / 제4장 전기의병의 확대

1. 경기지역 의병

2. 강원지역 의병

3. 충청지역 의병

4. 경상지역 의병

5. 호남지역 의병투쟁

6. 북한지역 의병투쟁


3. 충청지역 의병


1. 제천의병


1) 장담 향음례와 지평의진의 결성

1894년 6월의 갑오변란 후 부일개화파들에 의해 정권이 장악되어 ‘경장’이란 이름하에 일련의 개화정책이 펼쳐졌다. 정치·경제의 개혁은 물론 복제까지 변개하자 유생들은 “당당한 예의의 나라 소중화가 하루아침에 소일본으로 변하였다.”고 한탄했다. 1895년 3월 칙령 제67호로 공포된 을미변복령일명 흑색령에 의해 복색마저 백색에서 흑색으로 변하게 되자 유생들은 이를 곧 ‘오랑캐화’로 인식하여 조선의 자주성을 해치는 문화망국 행위로 파악하였다. 이에 대한 반발은 거세었다. 유인석이 을미변복령 공포 후 “4천년 화하정맥과 2천년 공맹대도와 조선 5백년 예악전형과 가가 수십세 관상법도가 여기서 단절되었다.” 註44)라고 비판하고 있음은 대표적 예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서구 제국주의 세력의 동점하에 일본제국주의 침략과 그에 영합한 개화파 관리들에 의한 일련의 개화정책을 망국행위로 단정한 보수유림들은 대응책을 수립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호좌유림의 대표로 화서華西-중암重菴-성재省齋로 이어지는 화서학파의 도맥을 승계한 의암 유인석은 제자들에게 향음례를 거행할 것을 명하였다. 註45) 그리하여 음력 5월 15일 제천 장담의 장담서사에서 향음례를 실시하기에 이르렀다. 이정규의『종의록』에 의하면 이때 각처에서 모인 자가 5~600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틀에 걸쳐 진행된 향음례의 분위기는 매우 진지하고 무거웠던 것으로 보인다. 5월 16일 대강례를 거행하는데 마침 관리가 새로 제정한 문패와 명령장을 갖고 오자 이를 찢고 불태웠다는 기록으로도 이때의 분위기를 충분히 짐작하게 한다. 註46) 또한 이 향음례에서 시국에 대처하기 위한 방안이 논의되었을 것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1895년 8월 명성왕후가 시해되고, 이어서 11월에 단발령이 공포되었다. 유인석은 문인들을 제천의 장담에 소집하였다. 유인석은 “장수란 전고戰鼓아래 죽고, 마부란 말고삐 아래 죽는 것이니, 선왕의 도를 지키다 죽는 것이 선비의 상사常事다.”라고 울면서 말하고 변란에 처하여 3가지 방책이 있음을 가르쳐 주었다. 이것이 ‘도해蹈海’·‘자정自靖’·‘거의擧義’의 처변삼사이다. 유인석은 상중이어 이 중에 ‘도해’의 길을 택하고 제자들에게 각자 태도를 정하라고 하였다.

이때 안승우는 ‘거의’의 의사를 분명히 하였다. 안승우1865~1896는 지평출신으로 화서문인인 이근원·유중교로부터 학업을 닦았다. 그중에서도 그는 특히 유중교의 영향을 크게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부친 안종응의 명으로 유중교를 배알하고


제천의 자양영당

 

사정邪正과 화이인수華夷人獸의 구별을 듣고 심신心身이 멍하여 살 길을 구한 것 같고 침식을 잊기에 이르렀다. 註47)



라고 소회를 피력한 점에서도 그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유중교로부터 화서학파의 핵심사상인 화이론을 전수받은 그는 일본의 침략에 직면하자 즉각적인 거의의 태도를 취하였다. 1894년 여름 일본군이 경상도지역을 거쳐 서울로 향한다는 소식을 듣고 7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이에 대항하고자 한 것이다. 비록 이 모병이 의병투쟁으로 까지 발전하지는 못하였으나 이를 통해 그의 대일항전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註48) 그는 유인석의 처변삼사의 가르침을 받고 자신의 확고한 의지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가장 적의한 방법은 의병을 일으키는 것이니, 만약 하늘의 재앙을 뉘우친다면 이 도를 붙잡을 수 있고 이 나라를 보존할 수 있을 것이며, 만일 이렇게 되지 못하더라도 역시 대의의 소리를 떨쳐 만세로 하여금 대의가 어디 있다는 것을 알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승우承禹 제가 비록 못생겼지만 삼가 뜻 있는 이들과 더불어 명령을 받들어 계획해 보겠습니다. 註49)



한편 이때 여주의 곡수에서 거주하다가 단발령의 소문을 들은 이춘영1869~1896은 고향인 지평으로 가서 선배인 안승우의 집에 갔다. 이춘영은 유중교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을 기회는 없었으나 그의 척사문을 성복하면서 존경하였으며 고향 선배인 안승우를 대할 때마다 ‘이수夷獸의 화禍’에 대비할 방책을 논하곤 했다. 마침 안승우는 제천에 가 있어 부친인 퇴앙 안종응에게 대책을 물었다. 안종응 역시 동지 몇 사람과 함께 무기 10여 자루를 만들고 ‘적인賊人’이 머리 깎으러 오면 죽이고 죽으려 하고 있었다. 그는 이춘영에게



모두 죽음 뿐이로되, 어찌 일을 하지 않고 죽을 것이냐. 지금 듣건대 포군 영수領首 김백선金伯先이 지평에 가서 맹영재에게 거의할 것을 청한 즉 맹영재가 뜻이 없어하자, 김백선이 분노하여 욕을 하며 총을 부수고 귀가하여 칼을 갈고 적이 오기를 기다린다고 하니 이 기회를 잃지 말고 그대는 급히 가 보아라. 註50)


의병사시말


라고 김백선 역시 뜻이 있음을 알리고 그를 만날 것을 권하였다. 지평의 포군장 김백선 역시 단발령이 공포되고 11월 23일에 단발을 강행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평군에는 600명의 포군이 있었는데, 이는 모두가 김백선의 공이었다. 김백선은 11월 21일 군수 맹영재를 찾아가 함께 거의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맹영재는 “하늘 운수요, 임금의 명이니 순종할 따름이다.”라고 반대하였다. 김백선은



자초自初 양포養砲한 뜻즌 정히 오늘날을 당하여 쓰려함이라. 이 천만고에 없는 대변을 당하고 임의 거느린 군사가 있으니 엇지 참아 금수의 꾀에 빠질까부냐. 우흐로 국수國讐를 갑고 아래로 인륜을 보존하미 이졔 한번의 잇시니 원큰대 익히 생각하라. 註51)



라고 말함에도 맹영재가 뜻을 돌리지 않자,



동학東學을 치고 벼슬 어든 거시 네게 영화가 되느냐. 영화로 알거든 하여보라. 수연雖然이나 조양調養한 포군은 다 나의 극력하여 모은 바니 네 군사는 아니요. 당당한 충의예 무리라. 엇지 네게 맛겨 도적을 돕게 하겠나냐. 註52)



라 하고 군안軍案을 빼앗아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군사軍士는 있으나 주인 없는 것이 한이로다.”라며 경내를 돌아다녔다. 안종응은 김백선의 이러한 행적을 알고 있었으며 이춘영이 오자 이를 전해주고 급히 김백선을 만나게 한 것이다. 이춘영이 김백선을 찾아간 것은 그날 밤이었다. 둘은 의기가 투합되어 거의에 관한 협의를 진행하였다. 김백선이 군사를 책임지고 이춘영이 재물을 책임지기로 하고 26일에 거의하기로 약속했다.

이춘영은 집에 돌아와 사당에 들어가 조상에 하직하고 모친과 영결하였다. 그리고 아내에게 다음과 같이 이별을 고했다.



나는 지금 사람이 되느냐, 짐승이 되느냐 하는 판가름을 당하여 바른 길을 찾아 죽고자 하는 것을 실로 마음을 달게 여기는 바다. 다만 차마 못할 일은 늙으신 어머니가 계시는데 끝내 봉양을 못해 드리는 그것이니 원컨대 그대는 아무쪼록 내 뜻을 받아서 내가 살아 있지 않다 생각하지 말고 정성과 공경을 다하여 나의 지하의 넋을 위안해 달라. 註53)



이춘영은 한편으로는 가사를 조카에게 맡기도, 한편으로는 장담에 가 있는 안승우에게 글을 보내어 거병의 일을 알렸다. 안종응 역시 아들에게 기별을 보내 지평으로 불러 올렸다. 이춘영은 김백선과 약속한 11월 26일 원주 안창의 만수암으로 갔다. 만수암에서는 도사 김응수가 음식과 군수軍需에 쓸 재물을 준비하고 군사에게 먹이려고 소를 잡고 음식을 준비하였다. 김백선도 포군을 인솔하고 왔다. 이춘영이 장대를 세우고 단에 올라 호령하니 의병이 박수로 화답했다. 이때 일을『의병사시말』은 다음과 같이 자세히 알려준다.



(춘영이)수隻手로 지팡이 짚고 곳 안창을 가 그 악부岳父 김도사金都事응수의 집에 가 그 온 뜻즐 말하고 또 젼곡을 내여 군수軍需의 쓸 일을 말하니 응수가 또한 재산을 모와 쓸 줄을 아니 가히 뜻이 잇는 사람이로다. 개연蓋然히 대경대희大慶大喜하여 왈, “아세가 과연 이러한 큰 뜻이 있더냐”, 이예 만수암의 드러가 소를 잡고 술을 거르고 가마를 굽고 밥을 지여 호군지물犒軍之物을 안배하고 기다리더니, 백슨伯先이 과연 그날 군사를 거느리고 왓는지라. 춘영이 이예 장대를 세워 긔를 삼고 칼을 집고 단의 올라 맹세를 짓고 무리를 경계하여 그 절제를 밧게 하고 호령을 한번 내리매 개개箇箇이 손벽을 쳐 의를 품은 장사라. 천지가 감림監臨하고 귀신이 재방하니 과연 천하만고의 무등한 승거가 아니냐. 註54)



위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이춘영은 장인인 도사 김응수와 미리 연락을 취했음을 알 수 있다. 김응수는 음식과 재물을 준비하고 의병 봉기에 적극적인 지원을 한 것이다. 註55) 안승우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유인석의 부름을 받고 제천의 장담에서 대책을 논의하던 중이었다. 그러한 중에 이춘영의 거병을 알리는 서신은 그의 뜻을 더욱 분명히 하기에 충분하였다.

「하사안공을미창의사실」에 의하면, “11월 갑자일(28일)에 공안승우이 이춘영과 함께 지평 고을 군사들로써 창의의 깃발을 원주 안창에서 들었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안승우가 합류한 후인 11월 28일 이춘영·김백선과 함께 창의를 선포한 것으로 보인다. 註56)

지평에서 의병이 거사했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인근의 주민들은 단발령 후 감히 먼저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가 지평의병의 거사 소식에 크게 반겼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하사안공을미창의사실」에서는



지평고을에서 군사가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는 마치 추운 겨울에 따뜻한 봄을 맞는 듯이 반가워했다. 이때 인심이 흉흉하여 집을 버리고, 양식을 싸가지고 산골로 도망가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제천 북쪽에서 의병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비로소 안정되었다.



라고 당시의 상황을 적고 있다. 물론 의병 당사자의 기록이라 아전인수식의 서술일 수도 있으나, 의병의 당위성의 일단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에 따라 안창의 의병 본부에 “매일 100여 명씩 따라 붙었다”라고 하듯이 의병의 세력은 나날이 불어났다.

안승우는 동문인 이범직李範稷, 1868~1896, 호 釣隱, 본관 전주·신지수申芝洙1854~?, 자 靈三, 본관 평산·원철상1877~?, 호 荷汀, 본관 원주 등에게 연락하여 의병 대열에 동참하게 하는 등 의병의 지휘부를 강화하였다. 이범직 역시 유인석의 처변삼사를 듣고, “자정을 하려고 하여도 보전하기 어려울 것이니 차라리 무슨 일을 하다가 사세에 쫓기면 죽을 뿐이다.”라며 안승우와 함께 ‘거의’하기로 한 지사였다. 註57)

지평의병은 우선 원주관아에 들어갔다. 이때 의병의 군세는 지평의 포군 600여 명을 포함하여 1천여 명에 달하였다. 註58) 원주군수 이병화는 충주로 도망갔으며, 충주관찰사는 정부에 원병을 요청했다. 정부는 1월 19일 내부협판 유세남을 파견하는 동시에 친위대 1개 중대를 원주로 출병시켰다. 註59) 일본의 가흥 병참수비대에서도 1월 17일 당일로 5명의 정찰병을 원주로 파견하였다. 註60)

지평의병의 원주관아 점령은 을미의병 초기 단계에서 얻은 쾌거로 이후 춘천·안동 등 각지에서 의병을 일으키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지평의병은 친위대의 출병 소식을 듣고 원주를 떠나 제천을 향했다. 지평의병은 12월 3일양 1896년 1월 12일 제천에 무혈입성하였다. 註61)군수 김익진金益珍은 의병의 기세에 눌려 의진이 관문에 들어설 즈음 빠져나와 도망갔다. 안승우가 군수 방에 들어가니 아직 촛불이 꺼지기도 전이었다고 한다. 註62)

제천을 점령하자 안승우의 동문들이 합세하였다. 서상렬·이필희·오인영·배시강 등이 그중에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거의를 계획하였으나 유인석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던 중 안승우와 이춘영의 거의 소식을 듣고 동참하였다. 註63) 이들이 합세한 뒤 지평의병은 대장에 이필희1857~1900, 호는 實谷, 본관 덕수를 추대하고 다음과 같은 편제를 갖추고 본격적인 항전에 돌입하였다. 註64)



대장 : 이필희군사 : 서상렬

중군 : 이춘영선봉 : 김백선

군무도유사 : 안승우서기 : 원용정

참모 : 이필근



지평의병은 이때 격문을 발표하였다. 격문 제목은 「격고팔도열읍檄告八道列邑」으로 ‘광서光緖 21년 을미 초3일 충청좌도 제천군의병장 이필희 근격謹檄’으로 되어 있다. 註65)이들은 격문에서



마침내 갑오년 유월 이십일 밤에 이르러 우리나라 삼천리 강토가 없어진 셈이다. 종묘 사직은 위기일발인데 송나라 이약수李若水가 흠종欽宗을 껴안은 일을 실행할 자가 누구며, 당나라 안진경처럼 의병 모집하는 것을 보지 못했으니, 옛날 고구려가 하구려로 된 것도 오히려 수치라 이르는데 하물며 지금 당당한 정통의 나라가 소일본이 된단 말인가. 아! 통탄할 일이다. … 진실로 위급 존망의 때라. 각자가 다 거적자리를 깔고 방패를 베개삼아 물불을 가리지 않고 아무리 어렵고 위태로운 곳이라도 뛰어들어 기어코 망해가는 나라와 천하의 도의를 다시 만들어 일월이 다시 밝아지면 어찌 한나라에 대한 공로만이겠는가. 실로 만세에 말이 있을 것이다. 註66)



라면서 전국의 충의지사는 과감히 일어나 의병에 합세하여 삼천리 강토를 회복할 것을 호소하였다.


2) 단양전투

지평의병은 12월 5일양 1896년 1월 19일 단양으로 들어갔다. 단양이 험준하여 제천보다 방어하기가 유리하다고 색각하였으며, 또 한편으로는 군수 권숙權潚이 수암 권상하의 후손으로 의병에 참여할 것을 권하기 위해서였다. 서상렬이 권숙을 달래었으나, 권숙은 오히려 “한위공韓魏公의 손자중에 주탁胄侂도 있었으니 우리 조상을 들어 말할 것이 없다.”라고 반대의 뜻을 분명히 하였다. 할 수 없이 권숙을 옥에 가두었다.

지평의병은 친위대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안승우는 12월 7일 1개 지병枝兵을 거느리고 제천으로 돌아왔다. 정화용鄭華鎔은 보병 10여 명을 거느리고 강나루를 파수하였다. 의병의 첫 전투는 단양의 장회협에서 12월 8일양 1월 22일에 벌어졌다. 장회촌의 이장이 적이 쳐들어 옴을 전달해 주었다. 이필희는 장회협의 서북쪽인 장림長林으로 진을 옮기고, 이범직은 남쪽 7리되는 유교楡橋를 파수하였다. 註67) 중군장 이춘영은 60명의 포군을 거느리고 험지에 매복을 하고 대기하였다. 과연 친위대 1개 중대가 이춘영이 매복한 곳으로 들어왔다. 의병은 일제히 총격을 가하였다. 친위대는 사상자 10여 명을 버리고 도주하였다. 의병은 승세를 타고 북쪽으로 수십리를 추격하였다. 친위대는 짐수레를 모두 버리고 도주하였다. 의병도 한 명이 전사하고 여러 명이 부상을 입었다. 註68) 이 단양의 전투에 대하여 일본공사 소촌小村은 양력 1월 27일 본국의 외무대신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원주 폭도의 상황을 정찰하기 위해 강관에서 파견한 자의 보고에 의하면, 폭도는 지평에서 발단되었으며, 그 거두도 역시 지평의 이춘영이라 합니다. 춘영은 단발령에 격앙하여 군에 있는 포군사병을 말함 수백 명을 규합하여 원주로 나아가 관찰부 청사와 군청을 습격하여 무기를 모두 약탈했습니다. 폭도는 원주에서 3~4일 체류하다가 이달 18일 그 일부는 평창을 지나 경상도로, 또 일부는 제천을 지나 경상도로 향했습니다. 이들이 안동의 폭도와 회합하려 한다고 합니다. … 친위대 1개 중대가 지난 22일 단양 부근에서 약 200명의 폭도와 충돌했습니다. 적은 고지를 근거로 삼아 자못 맹렬히 방어했습니다. 한 시간 정도 격렬하게 싸운 후에 친위대는 일시 퇴각했습니다. 제천을 지나 안동으로 향하고 있던 일부가 도중에 충돌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註69)



지평의병은 단양의 장회에서 친위대와의 제1차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지평의병은 삼삼오오 흩어지면서 의진이 갑자기 와해되었다. 친위대가 다시 공격할 것을 염려하던 중에 안동에서 의병이 크게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안동의병과 합세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註70)다음날인 9일 풍기에 들어가 의병을 초모하였으나 호응해 오는 이가 없었다. 장충식의 일기에 의하면, 이날 대장 이필희와 서기 원용정이 단신으로 안동으로 향했다고 한다 註71). 그러나 이정규의『종의록』을 보면, 군사들의 마음이 갑자기 변하여 대장을 해치고자 하므로 이필희는 가만히 도피하고 군사들도 모두 흩어졌다는 것이다. 註72) 이로 보아 의병 내부에 어떤 문제가 있었던 듯하고 이필희는 단신으로 안동으로 향했던 것으로 보인다. 의병은 각기 흩어졌다. 장충식은 이때 서상렬과 함께 행동했는데, 그의 일기에 의하면, 서상렬은 이필근·장충식 등과 서쪽으로 가 대사를 회복하려고 소백산을 넘어 순흥이 바라보이는 곳에 가는데 마침 이춘영이 포군과 함께 순흥을 향하고 있음을 보고 합류하였다는 것이다. 이후부터 서상렬과 이춘영이 이끄는 의병은 행동을 같이 할 수 있었다. 이들은 12월 10일 순흥에 들어가 진을 쳤다. 12일에는 순흥 군수가 소를 잡아 의병을 대접하였다. 이날 의병들은 이춘영을 대장에 추대했다.

이춘영이 이끄는 의병은 13일에 일본군의 습격 소식을 듣고 순흥을 떠나 14일에 소천시점小川市店에서 유숙하고 15일에 마추령馬芻嶺을 넘어 의풍義豊에 도착하였다. 이때 신지수를 만나 동행했다. 16일에 영춘에 들어가 군수 신긍휴申兢休의 정중한 대접을 받았다. 17일은 춘성春城에서 유숙하고 18일 영월에 도착하였다.

한편 제천에 유진하여 단양의 장회협전투에 참전할 수 없었던 안승우는 단양의 승전보를 듣고 크게 고무되었다. 그러나 도망갔던 제천군수 김익진이 관군을 이끌고 제천에 들어왔다. 안승우는 부득이 지곡芝谷으로 이진하였다가 그날 밤에 주천酒泉으로 이진하였다. 13일에는 평창으로 들어가 의병을 모집하고 무기를 수집하였다. 16일에 방림芳林에서 유진하고, 17일에는 진부로 들어갔다. 이처럼 강원도 일대를 이진한 것은 민용호부대와 합세하기 위해서였으나 민용호는 계속 피하였다. 이는 민용호가 안승우의 포군을 일부 끌어들였으며, 이를 토대로 독자적으로 활동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이 문제로 안승우와 민용호와의 사이가 벌어졌으며, 후에 제천의병과 민용호의진의 연합이 이루어질 수 없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안승우도 서상렬·이춘영부대보다 이틀 뒤인 12월 20일 영월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미 와 있던 이춘영·서상렬과 함께 스승인 유인석을 의병장에 추대하였다.

지평의 단양전투와 영월로의 퇴군소식을 들은 유인석은 요동행을 포기하고 가족을 피신시킨 뒤 제자들을 안승우와 서상렬에게 보내 영월로 모이게 하였다. 그리고 주용규 등과 함께 영월로 들어가 제자들에 의해 총대장에 추대되었다. 유인석은 상복을 평복으로 바꾸어 입고 아사봉의 대장소에서 일을 보며 재능에 따라 여러 장수들에게 각각의 책임을 맡겼는데 지평의병의 이춘영·안승우·김백선이 각각 중군장·전군장·선봉장에 임명되는 등 지평의병의 체제를 그대로 유지함을 볼 수 있다. 이로 보아 제천의병의 초기 조직은 지평의병의 군사력에 의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지평의병은 단양전투에서 패산되고 말았으나 다음과 같은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우선 지평의병은 전기의병의 대표적인 척사의병이다. 지평의병은 갑오변란·을미사변, 변복령·단발령 공포 그리고 청일전쟁의 발발과 같은 정치사회적인 요인으로 봉기하였으며, 동시에 화서학파의 철저한 화이론華夷論에 기반하였다.

또한 지평의병은 인근지역의 의병봉기에 큰 영향을 주었다. 경기지방에서 봉기한 지평의병은 강원지방, 이어서 충북지방으로까지 활동 범위를 넓혀 갔다. 그 결과 춘천과 단양에서 의병 봉기가 준비되었으며, 단양에서는 의병이 도착하자 횃불을 들고 환영하였으며 장충식을 비롯한 일단이 의병에 합류하기까지 하였다. 또한 지평의병의 활동은 요동지방으로 망명의 길을 떠나려고 준비하고 있던 유인석으로 하여금 짐을

풀고 상복을 벗고 의병장의 중책을 맡게 하였다. 유인석이 이끈 제천의병의 전과와 파급 효과로 보아 이러한 점에서 지평의병의 의의는 강조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다.

그러나 지평의병은 이필희·이춘영·안승우 등의 지휘부와 김백선의 포군 간에 원만한 관계가 이루어지지 못했던 한계도 발견된다. 장회협 승전 이후 포군들이 대장인 이필희를 기피했던 사건도 일어났다. 그 결과 갑자기 부대가 와해되는 사태가 있기도 했다. 이는 지평의병의 지휘편제에 약간의 문제가 있었음을 알게 해 준다.


3) 제천의병의 결성

유인석은 지평의진의 패산 소식을 듣고 만주로 들어가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문인들에게 ‘급한 편지’를 띄워 영월로 집결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패산한 군사들이 점차 집결하고 신지수도 군사를 초모하여 달려옴에 1896년 1월 28일음 12월 15일 유인석을 총대장으로 하는 제천의병이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유인석은 상복을 평복으로 바꾸어 입고 아사봉의 대장소에서 일을 보며 재능에 따라 여러 장수들에게 다음과 같이 각각의 책임을 맡겼다. 註73)



총대장 : 유인석

중군장 : 이춘영전군장 : 안승우

후군장 : 신지수선봉장 : 김백선

조련장 : 안성해참모 : 박주순

사객 : 장충식종사 : 이조승 홍선표 이기진 정화용

이와 같은 편제를 갖춘 뒤 유인석은 전국에 격문을 띄워 대일항전의 뜻을 밝히고 전국민의 궐기를 호소하였다. 그는 격문에서 소중화의 조선이 왜의 침략과 이를 방조한 개화파 관리들의 ‘개문납적’으로 금수의 지경에 떨어지게 되었다고 밝힌 뒤 일제의 무력 침략의 전초가 된 갑오변란으로부터 조선은 망한 바나 다름없으나 그를 이어 국모시해와 단발의 화가 계속됨에 각도의 충의지사는 과감히 일어나 거의에 참여할 것을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다.



무릇 각도의 충의지사는 다 같이 성조聖朝에서 길러낸 인물이다. 환난을 피하는 일이 죽음보다 심함이 없으니 망하기를 기다림보다 토벌함이 나을 것이다. … 여기서 감히 먼저 일어난 처지에 이렇게 포고하는 것이다. 위로 공경으로부터 아래로 신민에 이르기까지 그 누가 절박한 마음이 없을 것이랴. 이야말로 참으로 존망의 시기이니 각자가 거적자리에서 자고 창을 베개 삼으며 또한 모두 끓는 물에라도 들어가고 불에라도 뛰어들어서 이 나라의 재조再造를 기약하고 천일天日을 다시 밝게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글을 보내어 효유하는 것이 이후에 혹시라도 영을 어기고 도망가거나 태만히 하는 사람이 있다며 이것은 곧 역적의 무리와 같으므로 단연 군사를 먼저 옮겨 토벌할 것이니 각자 명심하여 후회하는 일 없게 하고 적은 성의나마 다하여 함께 대의를 펴가야 할 것이다. 註74)



의병진은 주로 동일한 지역과 학통 그리고 혈통의 배경하에 결성되었던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따라서 의병진간의 통합은 위의 성격을 충족하여야 가능하기 때문에 용이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인석이 위와 같은 격문을 전국민에게 발표하자 원근의 유생들은 각기 민병을 거느리고 동참해 왔다.


제천의병장 유인석


유인석은 총대장에 추대되어 의진을 편제한 후 그날 밤 전군종사 선달 신이백辛二白, 辛處士과 맹영재의 부하로 의병에 참여한 이민오李敏五, 그리고 신원이 확실치 않은 최진사·박주사를 참수하였다. 이들이 의진안에서 병사들의 사기를 저해하였기 때문이었다. 註75) 이와 같이 군율을 강화하고 기강을 확립한 유인석은 2월 11일음 12월 28일 의진을 영월에서 제천으로 옮겼다. 이즈음 의병의 총수는 약 천4~5백 명 정도였다고 한다. 유인석은 기존 의병의 지휘체계에 다음의 인원을 보강하였다. 註76)



서기 : 이병회李秉會

종사 : 조석증趙奭增주영섭朱永燮이세희李世熙홍사구洪思九



제천의병을 확대 개편한 유인석은 2월 15일음 1월 3일 친일관리로 단발을 강요했던 단양군수 권숙과 청풍군수 서상기徐相耆를 체포 처형하였다. 註77) 이 사건은 척사계열 유생과 개화관리간의 첨예한 대립의 결과로 나타난 동족간의 불행한 사건의 일례라 할 수 있다.


4) 충주성 점령과 연합의진의 결성

1896년 2월 16일 제천의병은 충주성 공격을 개시하였다. 충주 지역은 내륙교통의 중심지이며 군사적 요새이기 때문에 선점할 필요가 있었다. 의병진은 원서에서 하루를 묶었다. 이때 전승지 우기정禹驥鼎, 뒤에 좌군장에 임명됨과 평창의 이원하李元廈, 뒤에 중군아장에 임명됨가 민군 3,000여 명을, 전승지 이호승李鎬承, 뒤에 전어수령으로 임명됨이 민군 500여 명을 모집하여 참여하였다. 註78) 당시 의병의 총수는 1만명 이상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註79)

2월 17일음 1월 5일 남한강 상류인 북창나루를 얼음위로 건너 충주성을 공격하였다. 당시 충주성에는 경군 400여 명과 지방진위대 500여 명 그리고 200여 명의 일본수비대가 있었다. 그러나 제천출신의 포수 서장석과 엄팔용이 미리 성내에 잠입, 관군과 내통하여 성문을 열어 놓았기 때문에 큰 피해없이 충주성을 함락하였으며 관찰사 김규식을 체포 처단하기에 이르렀다. 註80) 제천의병의 충주성 점령은 전기의병에서 최대의 전과로 평가되며 이후 각지에서 의병봉기를 고무시키는데 큰 자극이 되었다. 충주성에 입성한 유인석 의병장은 「격고내외백관檄告內外百官」이란 격문을 포고하여 벼슬아치들이 강상의 큰 변이 극단에 이르러도 무사안일한 자세를 보이고 있음을 힐난한 뒤 충의 정신에 입각하여 지난날의 과오를 뉘우치고 의병에 동참할 것을 다음과 같이 촉구하였다.



… 아, 지금은 과연 어떤 시기인가. 비록 눈 어둡고 귀먹고 다리를 저는 사람이라도 이를 갈고 팔을 휘두르지 않는 자 없는데 유독 녹을 먹는 벼슬아치만이 죽은 듯이 들은 척도 아니하며 전혀 용기가 없으니 이들이 어찌 모두 흉적과 서로 결탁해서만 그렇겠는가. 아마도 의리에 어둡지 않으면 반드시 화복禍福에 동요된 때문이리라. … 적의 도당이 두려워서 움츠리고 있다면 이는 비록 제 몸을 유지하고 처자는 두려워서 형세를 살펴 향배를 결정하는자가 과연 다 제 몸을 유지하고 처자를 보전하겠는가. 설혹 유지하고 보전했다 할지라도 백세를 두고 엄한 꾸지람을 어찌하겠는가. 의리가 정당한 길이 뚜렷이 있으므로 삶이 죽음보다 욕된 것이 있고, 죽음이 삶보다 영화로움이 있는 것이며, 화복이란 스스로 일정한 분수가 있으므로 죽음을 고수하는 자가 반드시 다 죽는 것도 아니다. 삶을 꾀하는 자가 반드시 다 사는 것도 아니다. 註81)



한편 충주성 함락 후 유인석은 소모장 이범직을 호서지역에 파견하여 천안군수 김병숙金炳肅을 처단하고 선유사 신기선을 잡아 가두었다. 당시 단발을 혹독하게 강요한 자 중에 천안의 김병숙을 지목하였다. 註82) 유인석은 각처의 의진에 연락을 취하여 합세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원근 지방의 의병들이 충주성으로 모여들어 제천의병은 중부지역의 의진을 규합한 연합의진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제천의병에 참여한 세력을 보면 이문흠李文欽, 호 장진이 단양포수 수백 명을, 신태홍申泰洪은 호서의 군사 수백 명을 모집하여 왔다. 의당 박세화朴世和는 문인 윤응선尹膺善, 1854~1924을 보내어 돕도록 하였다. 그외에도 윤정섭尹正燮·윤양섭尹陽燮 형제, 심한수沈漢洙·임호任鎬·신영춘申永春·신영휴申永休·김병수金炳遂 등이 와서 도왔다. 註83) 이때 진잠에 거주하던 의병장 문석봉에게도 합세를 요청하였다. 註84)

이후 제천의병은 수안보와 가흥충주의 북쪽 13km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의 격퇴를 주요 목표로 삼아 작전을 펼쳤다. 첫 전투에서 일군을 격퇴시키기도 하였으며 註85) 2월 23일에는 500여 명의 의병이 수안보의 일본군수비대를 공격하는 등 군세를 떨쳤다. 註86) 그러나 2월 26일음 1월 15일 수안보의 일군 병참부대를 공격하던 중군장 이춘영이 전사하고 이어 2월 28일 충주성 공방전에서는 주용규가 전사하는 등 의병측에서 큰 손실을 입었다. 註87)

이와 같은 관군과 일본군의 파상적인 공격에 직면하자 후군장 신지수는 무기와 전술이 뛰어난 적을 맞이하여 한 곳만 지키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며 유격전을 펼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또한 일본군과 관군을 분리시키는 방안을 제시했다. 그는 이를 위하여 임금과 직접 접촉할 수 있는 당로자를 움직여 임금의 영단을 얻어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따라 종사 이조승의 형인 이주승이 서울로 파견되었다. 이주승으로 하여금 의병에 대해 비교적 호의적이라고 판단되었던 유기환兪箕煥·민영기閔泳綺·조동희趙東熙·이도재李道宰 등과 접촉케 하였다. 이는 의병이 비도가 아님을 임금께 상달하여 관군이 의병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註88)

한편 가홍과 수안보의 일본군은 3월 2일 충주성을 다시 공격해 왔다. 일본군은 의병의 강력한 대항으로 2장 이상의 높은 벽으로 둘러쌓인 견고한 성곽을 넘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註89) 그러나 충주성에 본진을 둔 제천의병은 일본군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다. 제천의병은 2월 17일 충주성을 점령한 이후 이문흠이 단양포수 수백 명을 모집하여 오는 등 인근의 세력이 합세하여 병력은 크게 증강되어 1천여 명 이상의 병력에 대포 4문을 가지고 있었다. 註90)

일본군의 충주성 공격은 치밀한 정보 활동을 거쳐 실행되었다. 부산수비대장 이진야伊津野 소좌는 충주성 공격을 위하여 인근의 병력을 가흥과 수안보에 집결시켰다. 2월 28일 헌병대를 가흥수비대에 집결시켰으며, 註91) 3월 2일에는 문경수비대의 적원荻原 중위 이하 25명과 장강長岡군조軍曹 이하 9명을 수안보로 출동시켰다. 이어서 가흥수비대장 삼택三宅에게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귀관貴官은 가흥 부근에 있는 각 중대수비대를 위해 약간을 남김의 병력을 동원하여 전력을 다해 일거에 충주의 적을 격양擊攘할 것을 바람. 註92)



충주성 공격은 3월 2일부터 시작되었다. 이날 아침 5시에 본다本多 소위와 주정酒井 소위는 부대를 이끌고 충주성 공격을 위한 정찰대로 출동하였다. 이들이 충주성에서 서쪽으로 10리 떨어진 곳에 도착했을 때 의병이 방어 시설을 갖추고 대비하고 있어 1시간 반 정도 전투가 있었다. 의병이 성내로 들어가 응전하자 일본군은 쉽게 공격을 못하고 가흥으로 회군하였다. 註93)

일본군은 3월 3일 다시 출동하였다. 밤 12시에 가흥을 출발하여 다음날인 4일 아침 6시부터 충주성 공격을 개시했다. 이날 전투의 상황에 대하여 전중田中 대위는 다음과 같이 자세히 보고하였다. 註94)



충주 전중 대위 보고(3월 6일 오전 8시 10분착)

오늘(3월 4일) 오전 6시 30분 제1중대의 제3소대 및 적원 중위 인솔의 40명은 본관의 지휘에 속하여 서남문을, 제1중대의 1소대와 제2,제3중대의 24명은 삼택 대위가 이를 인솔하여 동북문을 향해 각 부대가 동시에 공격을 시작하였습니다. 본관은 9시 10분 제1소대와 제3소대의 일부를 거느리고 서문을 돌파했습니다. 적은 성벽을 의지하여 교묘히 사격을 하여 광전廣田 군조와 병졸 4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성벽에 도달할 여러 방법을 다하여 점령하려 하였지만, 견고하고 또 총안銃眼을 만들어 쉴새없이 사격을 하여 끝내 목적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10시 20분 우선 퇴각하고 오늘밤은 각 부대가 충주성을 포위하고 노영露營하였습니다. 현재로는 보병만으로는 일거에 격퇴할 수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3월 4일 오후 10시 30분



위 보고에 의하면, 일본군의 충주성 공격에는 후비보병 제10연대 제1대대의 제1중대를 중심으로 한 중대 병력이 동원된 것으로 보인다. 가흥수비대장 삼택 대위는 제1중대의 제3소대와 제2, 3중대에서 차출된 24명을 인솔하여 성의 동북문을, 전중 대위 註95)는 제1중대 제3소대와 문경수비대에서 파견된 적원 중위가 인솔하는 40명을 인솔하고 서남문을 공격하였다. 이들은 3월 4일 아침 6시 30분에 공격을 개시하였는데, 의병의 항전으로 하루종일 격전하였으나 오히려 광전 군조 등 부상자만 발생하였다. 결국 밤 10시가 되어 성을 포위하고 성밖에서 노영하였다.

다음날 충주성 공격은 또 진행되었고 결국 밤 11시에 충주성은 일본군에 의해 함락되고 말았다. 이틀 간의 치열한 공방전 끝에 의병은 성을 내주고 청풍과 단양 방면으로 패주하고 말았다. 전중 대위의 보고에 의하면, 의병이 사체 30여 구를 남기고 퇴각했다고 한다. 반면에 일본군은 2명의 중상자를 포함하여 모두 9명의 부상자만 냈다고 보고하였다. 註96)

일본군은 전리품으로 쌀 약 100석, 탄환 370상자1상자에는 圓彈 3되가 들어감, 화약 약 100관貫, 대포 5문, 소총火繩筒 300여 정, 창 700본, 칼 50, 우마 12두를 보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의병은 오랜 기간 싸울 수 있는 식량과 탄약을 비축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註97) 그러나 일본군의 스나이더 소총이나 촌전村田,소총무라다·연발총과 같은 월등한 화력에 견뎌내지 못했다. 註98)

제천으로 이진한 유인석은 이춘영의 후임으로 안승우를 중군장으로 삼아 전열을 정비하였으며, 정운경을 전군장으로 삼아 청풍의 북창나루를 지키게 하고 신지수로 강령의 좁은 목을 막고 장익환은 단양경계를 지키게 하였다. 이인영의 원주의병과 이강년의 문경의병이 제천의병에 합세한 것이 이 무렵이었다. 註99) 이강년은 유인석의 거의 소식에 분격하여 고향인 문경에서 거의한 후 안동관찰사 김석중을 처단하는 등 전과

를 올렸으며, 3월 12일음 1월 29일그동안 서신을 통하여 연합의진의 구성을 계획하던 유인석을 찾아서 막료의 예를 올리는 한편 사제의 의를 맺었다. 그는 이때부터 제천의병의 유격장으로 임명되어 수안보·단양·음성 등지에서 유격전을 펴 전과를 올렸다. 註100)

한편 이강년 외에도 영춘에서 권호선이 포수를 거느리고 왔으며, 이명로가 이끄는 횡성의병이 합류하였다. 그리고 원주초모총독 김사정과 김사두 등이 3월 17일음 2월 4일 원주지방에서 군사를 초모해 오게되자 제천의병은 연합의진의 모습을 갖추고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다. 註101) 이후 제천 본진을 근거로 하여 충주부 일대에서 항쟁을 계속하였다. 3월 18일에는 일본의 가흥수비대와 교전하였는데 이때 의병의 수가 2,000여 명에 달했다. 註102) 한편 영남소모장으로 출동한 서상렬은 안동·예안·풍기·예천·영천·봉화·순화 등지를 돌며 군사를 초모하였으며, 이곳 7읍의 맹주로 추대되었다. 그는 이어 군사를 이끌고 예천으로 들어가 의병초모를 방해한 예천군수 유인형을 처단하였다. 註103)

그러나 이때 평민 출신 의병장 김백선의 처형사건이 일어났다. 김백선은 제천의병의 선봉장으로 많은 공을 세운 바 있다. 그가 이끄는 부대가 3월 27일 가흥전투에서 일본군수비대를 괴멸시키고 진지를 공격할 때 본부에 요청한 원군이 오지 않아 점령에 실패하고 회진하였다. 이때 원군을 보내지 않은 것을 탓하며 중군장 안승우에 대항하는 등 군기를 문란시켰다는 것이 그를 처형한 죄목이었다. 註104)

김백선의 처형은 의병병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의진을 동요시켜 끝내는 전력의 약화를 초래한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그의 신분은 평민이었으며 지평포군 400여 명을 이끌고 이춘영과 함께 의진에 참여한 이래 충주성 전투를 위시하여 여러 전투에서 선봉장으로 많은 전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註105) 따라서 포군을 비롯한 평민 출신의 의병들은 이러한 조처에 불만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의 처형 후 그를 추종하는 일부

병사들이 군진에서 이탈하는 사건이 발생하였음은 이를 말해준다. 그의 종사 민의식은 김백선 처형 직후 달아났다. 그리고 4월 1일 아장 서석화 등이 김백선의 시체를 호송하여 지평으로 가서 김백선 아들과 함께 민의식 휘하에 들어갔으며 이들은 다시 5월 하순 강릉의 민용호부대에 들어갔다. 註106)

제천의병 측에서는 의병 결성의 초기 단계에서 지평의진이 패한 후 다수의 의병들이 민용호의 꾀임으로 강릉의진에 들어간 것으로 알고 있었다. 註107) 따라서 이 사건은 제천의병과 강릉의병의 연합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비록 5월 17일음 4월 5일 민용호가 종사 김상우金尙祐를 보내 연합의 뜻을 전하는 공문을 보냈을 때 중군장 안승우가



즉시라도 만나 심정을 말하게 된다면 손을 잡고 슬픔과 즐거움을 같이 할 것이니 우리들 사이에 무슨 간격이 있으리오. 註108)



라고 말하였으나 그때까지 감정을 없앨 수는 없었다. 이미 이때는 제천의병이 관군의 총공격으로 패색이 짙던 시기이다. 이런 상황에 민용호로부터 연합제의는 거절되었다. 이와 같은 양 의진간의 연합실패는 의병세력의 약화를 초래하였으며 의병투쟁이 패퇴하게 되는 한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김백선 처형 다음날인 3월 28일 유인석은 평창군수 엄문환을 처형하였다. 엄문환은 아전 출신으로 동학농민군을 진압한 공로로 군수에 임명된 인물이다. 단발령이 공포되자 그는 솔선수범하여 단발한 다음 주민들에게 단발을 강요하여 유생들로부터 원성이 높았다. 그러한 그를 3월 24일음 2월 11일 중군장 안승우의 명으로 중군아장 이원하가 체포하였던 것이다. 註109) 3월 31일에는 이필희를 진동장으로 삼아 원주를 지키게 하였으며, 4월 6일에는 아래와 같이 제천 주위의 요로에 수성장을 임명하여 각기 그 지역을 장악하고 의병초모와 군수물자의 공급을 담당하게 하였다. 註110)



좌군장 우기정 : 박달령 수성장

우군장 안성해 : 족동 수성장

별 장원우규 : 연호 수성장

참 장한동직 : 단정 수성장

신지수, 이범직 : 강령 수성장



제천의병은 이와 같이 제천부근의 여러 지역을 파수하면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4월 7일에 의병은 충주 길목에서 수안보의 일군수비대를 요격, 1명을 전사케 하고 다수를 부상시키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 부대는 그날 오후 귀대할 때 또 의병의 공격을 받았다. 註111) 4월 초에는 죽산·음성의 윤의택尹義德·손영국孫永國부대가 합세하였으며 남한산성에서 남하한 김하락부대와 원주 이인영부대의 군사 민응서 등 30여 명이 합세하였으며 여안국呂安國 등 7명의 청국인이 의진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註112) 4월 19일에는 김사두金思斗를 중군 참모에 임명하는 등 전력강화를 위하여 노력했다. 여기에 또 후군장 신지수는 5월 4일 하소진에서 관군을 격파하고 5월 18일에는 신지수·원규상·이인영부대가 가흥의 일본군수비대를 공격하였다. 註113)

그러나 제천의병은 점차 수세에 몰렸다. 그 이유는 위에 든 김백선 처형사건도 지적할 수는 있겠으나 그보다는 관군과 일본군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김하락의 이천의병과 심진원이 이끄는 광주의병이 2월 하순경 남한산성에 입성하여 서울진공작전을 계획하는 등 위세를 떨친 바 있다. 이때 참령 장기렴이 이끄는 관군은 남한산성 전투에 전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3월 22일 남한산성이 함락된 후에는 장기렴이 이끄는 관군과 일본군이 그 여세를 몰아 제천의병을 공격목표로 삼고 제천으로 몰려든 것이다. 결국 5월 25일음 4월 13일제천의 남산 전투에서 중군장 안승우와 그의 제자인 종사 홍사구가 전사하고 그외 많은 병력을 잃었다. 註114) 제천의병은 즉각적인 반격을 가해 5월 26일 새벽 5시 30분 가흥의 수비대를 기습 공격하여 전신주를 무너뜨리고 일본군 다수를 부상케 하는 등의 전과를 세웠으며 註115) 그후에도 단양·풍기·영춘·음성·괴산 등지에서 잔여 의병을 수습하여 6월 8일 음성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제천의병은 우세한 화력과 전투력을 갖춘 관군과 일본군 연합부대의 총공세에 6월 10일 원주·충주·제천 등지에서 군사를 수습하여 서행을 결행하고 말았다.


5) 서행과 항일근거지 건설

서행이란 제천의병이 관군과 일군의 예봉을 피하여 강원도와 평안도 지역을 거쳐 요동에 이르기까지의 전투과정을 말한다. 유인석은 처음에는 거의보다는 ‘거수去守’의 길을 취하고자 하였음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1895년 10월 장담에서의 ‘처변에 관한 논의’가 있을 때 그는 먼저 ‘거수’를 택하였으니 국외로 나가 중화의 도를 수호함에 더 큰 의의를 두었기 때문이다. 안승우·이영춘 등이 지평에서 거의하여 제천에 의진을 옮겼을 때까지도 그는 제자 주용규와 함께 요동으로 들어가려고 행장을 꾸려놓고 있었다. 그러나 지평의진의 단양전투 패보를 듣고 문인 이정규에게



내 걸음이 비록 하루 이틀 더디더라도 차마 이러한 것을 보고는 그대로 갈수가 없다. 그대는 영남으로 가서 급히 경암敬庵 등 여러 사람을 불러오라. 註116)



라고 군사집결을 명령한 뒤 결국 거의에 참여하였다. 이와 같이 그는 ‘거수’에서 ‘거의’로 태도변화를 한 후 앞의 절에서 살펴보았듯이 제천의병의 총대장이 되어 적극적인 대일항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관군과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에 밀려 서행을 떠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서행은 처음부터 요동을 목표로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면 그를 비롯한 제천의병의 서행 과정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1896년 5월 25일음 4월 13일 제천전투에서 대진이 패한 후 유인석은 제천 부근의 지곡에서 의진을 수습하였다. 이때 모인 참모들의 면모를 보면 전군장 정운경, 좌군장 이희두, 우군중군 윤영훈, 별영장 이인영, 참진장 한동식 등이었다. 중군장 안승우는 전사하였으며 우군장 이강년은 참석하지 못하였다. 이때까지 본진에서는 이들의 생사조차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註117)

다음 날5월 26일 단양으로 진을 옮겼다. 이곳에서 유인석은 자살을 결심하기까지 하였으나 註118) 이때 이강년의 기병 수십 명과 소토장 서상렬, 장의장 이원하 부대를 만날 수 있었다. 5월 27일 비로소 안승우의 전사소식을 전해들었다. 5월 31일에는 풍기군수 권재기權在己의 권유로 부대를 풍기로 옮겼다. 註119) 권재기는 의병세력이 풍기지역에 의진을 옮기면 영남지역의 의병들이 대거 합세할 것이라고 권유한 것이다. 그러나 의진이 단양에서 조령을 넘어 풍기읍에 이르자 오히려 매복한 관군의 공격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권재기의 꼬임에 빠진 것이었다.

관군에 쫓긴 의병은 조령을 넘어 단양으로 향하고자 하였으나 단양에는 서울에서 내려온 장기렴부대가 진을 치고 있었다. 결국 제천의병은 그 예봉을 피하고자 소백산을 넘어 6월 1일 영춘에 도착하였으나 의진을 이탈하는 병사가 속출하였다. 이어 6월 3일에는 군사를 돌려 단양읍에 주둔하였으며 6월 4일 다시 수산壽山, 현 제천시 덕산면 수산으로 진을 옮겼다. 註120) 유인석의 서행은 이날 수산에서부터 결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유인석은 이처럼 군사들의 사기가 떨어짐을 보고 전각과 문묘에



소신 유인석은 나라의 원수를 갚고 성현의 도를 보존하기 위하여 의병을 일으켜 적을 치고 왜를 토벌코자 했으나 계획이 졸렬하고 힘이 다해 소위 개화병의 대장 장기렴에게 조용히 잡혀 죽습니다. 註121)



라고 제사를 올리고 자진하여 장기렴에게 체포당하려 하였다. 그러나 부하들이 세가지 안, 즉 ① 서북쪽으로 가 군사를 모집하여 재기하는 일, ② 중국으로 가 원세개의 지원을 받는 일, ③ 과거 제·로의 땅즉 요동지역에서 중화의 명맥을 잇는 일 註122)을 제시하며 만류함에 서행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때 서행은 위 세 안 중에서 제1안을 택하여 재기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6월 6일 충주에 도착하였다. 충주에 도착하기 전 우군장 이강년과 한어장 이형구가 장기렴부대를 공격하여 유인석의 길을 터 놓았으며 후군장 신지수는 본대를 호위하였다. 註123)

6월 8일 음성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괴산지역에서는 일본군과 음성의 지방병과 전투를 수행하여 다수의 사상자를 내게 하였으며 탄환 한 궤짝과 무기와 돈·재물 등을 노획할 수 있었다. 괴산전투의 승리는 공주지역 소모장이었던 정인설의 활약에 힘입은 바 컸다. 한편 충주군수 정기봉은 의병들에게 음식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제천의병은 청주와 공주 지방병의 공격과 우천관계로 화승총을 쏠 수 없게 되자 결국 6월 9일 충주로 후퇴하였다. 註124) 이와 같이 제천에서 풍기로 일단 후퇴한 후 단양읍-수산-충주-음성으로의 서행은 청주를 거쳐 호서지역의 요지인 공주를 점령하고자 한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충주의 장기렴부대와 음성전투에서 공주와 청주 지방병의 거센 공격으로 진로를 선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충주로 일단 후퇴한 제천의병은 적을 피하며 강원도 지역으로 진로를 수정하였다. 그리하여 6월 10일 원주에 도착하였다. 註125)이때 경기도 여주 일대에서 심상희 의병장이 임금의 선유를 받고 의병을 해산하였다. 註126) 이 소식을 들은 유인석은 격서를 보내 심상희를 책망하였으며 후군과 소모군의 본진에 합류를 명하고 제천을 거쳐 영월·평창·정선으로 이진하였다. 註127)

정부에서는 장기렴부대에 명하여 제천의병을 뒤쫓게 하였으며 또 한편으로는 선유사 정언조鄭彦朝를 보내 의병의 해산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유인석은 정언조를 오히려 꾸짖어 보내고 7월 3일음 5월 23일 정선에서 임금께 상소를 올렸다. 그는 이 상소에서 서행의 뜻과 의병해산령에 따르지 못함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 옛날 물든 것이 다시 새로와서 옛 법도를 회복시키는 실상이 없고 남은 적의 경계가 한창 급한데 의병해산령이 내리니,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의심스러움이 없지 않습니다. 선유사가 사방으로 나와 군사로 핍박하여 비도라 지목하고 위협하니 원통합니다. 이 어찌 우리 전하의 마음이겠는가. 신은 그윽히 한 일을 생각해 보건대 처음에는 소신이 있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고, 마침내는 목표가 있음에 갑자기 중지할 수 없은 즉, 오늘날 갑자기 중지하지 못하는 것은 옛날의 일어나지 않을 수 없던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십적十賊과 그의 무리들이 늘어서 있는 것도 전날과 같고, 왜놈의 병참이 연달아 있는 것도 전날과 같고, 복색을 고친 것도 전과 같고, 정삭正朔을 고친 것과 관제를 변한 것도 전날과 같고 주군州郡을 개혁한 것도 전날과 같기 때문입니다. 註128)



즉 그는 갑오경장에서 추진된 일체의 개화정책을 폐지하여 구제도를 회복시키지 못했음과 국내에 병참부대를 주둔시켜 침략정책을 수행하는 일본군을 물리치지 못하였음을 들어 의병을 해산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항일민족의식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유인석의 태도는 유생의병장들이 고종의 해산조칙을 받고 자진해산했으며, 그것이 ‘봉건유생’ 들의 골수에 밖힌 충군애국사상이

가져온 결과이며 이로 인해 의병투쟁이 중단되었다는 주장에 재고를 요구케 하는 것이다. 註129) 이는 같은 전기의병의 주요부대인 이천의병·홍주의병·강릉의병의 창의대장인 김하락·김복한·민용호 등이 전사 또는 체포, 그리고 유인석과 마찬가지로 해산조칙을 받고 이를 거절하고 의병활동을 계속한 것을 보아 더욱 그러하다. 상소를 올린 후 유인석은 종사 이조승을 서울로 파견하여 상소문의 전달여부와 정부의 정책 등을 탐지하고 군수품 조달을 신속히 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조승은 곧 서울로 올라가 민영규閔泳珪 등 고관을 만나 유인석의 지시를 수행하였다. 註130) 이 사실은 같은 해 2월 이조승의 형인 이주승을 서울로 파견했던 것과 함께 유인석의 임금에 대한 간곡한 호소와 기대를 알게 하며 아울러 의병세력이 정부의 정책 결정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7월 4일 중군장 원용석이 사퇴함에 중군아장 이원하李元廈를 중군장에 임명하고 7월 7일에는 의풍정倚風停에서 군사훈련을 시키기도 하였다. 7월 11일에는 강릉을 지나 대화大和에 도착하였다. 여기에서 유인석은 기호지역과 관서지역의 사대부들에게 「포고문」과 「통문」을 발표하여 의병을 지원해 줄 것을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다.



… 지금 재물로써 도와주면 궁색한 것을 근심하지 않겠으며, 집으로써 도와주면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는 원망이 없고, 몸으로써 도와주면 죽는다 해도 이름 없는 근심은 하지 않으리라. 도울 수 있는 물품을 의병에게 주어서 그 성공을 재촉하되 만약 성공하지 못하면 이는 의병의 죄이니, 그렇다면 무슨 유감이 있으리요. 때문에 이에 고하노니 앞에서 위로해 주고 뒤에서 격려해 주어 여러 음이 양을 없애지 못하게 해서 미양微陽이 반드시 회복하기를 기다리게 하라. 註131)

의진은 북상을 계속하여 7월 22일 춘천에 도착하였으며 24일에는 양구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대진의 앞길을 뚫고 가던 서상렬이 7월 22일 낭천狼川, 현 화천지역에서 관군의 계략에 빠져 급습을 당하고 전사하는 큰 손실을 당하였다. 이때 종사 김선이金仙伊가 서상렬을 보호하다가 따라 죽었으며 이들의 시신은 3개월 후 채주보蔡周輔가 겨우 수습하여 반장하였다. 註132)

7월 24일음 6월 15일에는 회양을 지났으며, 8월 4일에는 평강平康, 이어 8일에는 구당龜堂에 도착하였다. 다음날 유인석은 서북지방에서 관리들의 감시가 심하여 의병을 초모할 수 없다는 보고를 접하고 결국 국경을 넘기로 최종적인 결정을 보았다. 이에 따라 유인석은 이필희·유치경·송상규 등을 남경·천진·북경으로 먼저 보내어 청국정부에 군사지원을 청하도록 하였다. 註133) 8월 10일에는 함경도 안변, 14일에는 평안도의 양덕, 그리고 영흥·맹산·덕산·운산 등지를 지나, 8월 24일 국경지대인 초산楚山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의병을 추격하던 관군과 전투를 벌여 승전을 거둔 뒤 유인석은 의진을 수습하여 아성阿城에서 「재격백관문再檄百官文」을 발표하여 세족·공경대부와 사민들에게 자신이 당당한 소중화와 예의의 나라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의병을 일으켰음을 밝혔다. 註134)

한편 이에 앞서 이범직은 신지수와 함께 선발대를 이끌고 강을 건너 요동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곳 수장 왕무림王茂林이 의병에 핍박을 가해오자 이범직은 참모관 권기수權夔洙와 함께 본진의 길 안내를 위해 초산으로 되돌아 왔으나, 8월 24일 국경지대를 정찰하던 조승현趙承顯부대에 체포되어 권기수와 함께 살해당하였다. 註135) 바로 이날 유인석은 위의 격문을 발표하고 압록강을 건넜다. 240명으로 추정되는 제천의병은 요동으로 들어갔으나 파저강변현재, 渾江 사첨자沙尖子, 현 길림성 환인현 沙尖子鎭에서 회인현재懷仁縣宰 서본우徐本愚의 제지를 받았다. 처음에는 비적으로 의심받았으나 마침내 의병임을 알고 머물게 하였다. 그러나 청국은 일본과 이미 화약을 맺은 관계로 의병문제를 가볍게 처리할 수 없다고 하면서 귀국할 것을 종용하였다. 결국 8월 29일 의병들은 무장해제를 당하고 유인석과 원용정·유홍석 등 21명만이 심양으로 향하였으며 나머지 219명은 강제로 해산·귀국하였다. 註136)

심양에 도착한 유인석 일행은 현재縣宰 가원계賈元桂에게 군사지원을 요구하였으나, 역시 청국과 일본과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신하의 신분으로 외국과의 전쟁의 사단을 일으킬 수 없다고 요구를 거절하였다. 이로써 유인석은 청국의 원병 역시 기대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 원세개元世凱에게 가던 길을 돌려 결국 그해 음력 9월 서행의 마지막 방도인 제노齊魯간의 땅인 통화현 오도구에 들어갔다. 그는 이곳을 ‘복고제復古制, 척왜독립斥倭獨立’을 위한 근거지로 정하였으며 망국단望國壇을 만들어 참배하며 재기의 시기를 기다렸다. 註137) 그후 유인석은 회인현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1897년 8월 서상무徐相懋가 가지고 온 고종의 초유문을 받고 초산에 와 「진정대죄소陳情待罪疏」를 올렸다. 그리고 그해 10월 죄를 묻지 않겠다는 비답을 받고 춘천 가정리로 귀국하였다. 註138) 이로써 제천의 병의 전기의병투쟁은 일단락되었다.


제천의병 이동항쟁도(일자는 양력 표기임)

 

참고로 제천의병이 제천전투에서 패하여 수산에서 서행을 결정한 후, 국경을 건너 의병을 해산하고 통화현에 이르기까지 경로를 보면 앞의 이동항쟁도와 같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제천의병은 갑오변란과 변복령의 공포 그리고 청일전쟁의 발발과 같은 정치사회적인 사건이 계기가 되어 봉기하였다. 동시에 사상적 요인으로써 화서학파의 철저한 화이론을 들 수 있다. 유인석을 비롯하여 안승우·주용규·서상렬·이춘영·이범직 등이 비록 전투경험은 없었으나 스승인 이항로의 척사론을 실천에 옮겨 철저한 의병투쟁을 전개하였다. 제천의병의 거의이념은 존화양이론·국수보복론·개화망국론으로 요약된다. 제천의병은 이에 입각하여 단발반대와 폐비조칙 철회 그리고 침략세력 배척을 이루기 위하여 일제침략군과 개화파 관료집단에 투쟁하였다. 또한 제천의병은 연합의진으로서 의의가 크다. 제천의병은 처음에 지평의병이 근간이 되었으나, 유인석이 총수로 추대되면서 이강년의 문경의병, 심상희의 원주의병, 이인영의 의병부대가 합세하여 연합의진을 편성하였다. 이와 같이 인근의 부대와 연합한 제천의병은 충청북도는 물론 인접한 경상도 북부지역, 강원도 원주·춘천지역, 경기도 이천·양평·여주지역, 충청남도 천안지역까지 장악하였다. 개화파 관리로 알려진 충주관찰사 김규식, 단양군수 권숙, 청풍군수 서상기, 예천군수 유인형, 천안군수 김병숙, 평창군수 엄문환 등이 이때 처단되었으니 제천의병의 큰 성과로 평가된다.

그러나 제천의병은 학파와 지역성을 극복하지는 못했다. 제천의병은 연합의진의 결성을 시행한 점은 평가되지만, 영남지역이나 강원지역 등 다른 지역 의병과 연합은 이룰 수 없었다. 즉 서상렬을 영남지역 소모장으로 파견하여 안동·풍기 일대에서 의병초모활동을 벌이도록 하였음에도 김도화·김도현 세력의 안동의병과는 결국 연합하지 못하였다. 이소응의 춘천의병과도 연합하지 못한 채 이소응만이 단신으로 제천의병에 합세하였을 뿐이다. 또한 민용호의 강릉의진과는 오히려 반목과 대립의 양상을 나타내기까지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은 제천의병이 아직은 학파적·지역적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였음을 말해준다.

또한 제천의병은 지휘부와 병사간의 갈등을 초래하여 전투력의 집중력을 약화시켰다. 의병진의 구성에 있어 지휘부는 양반 유생이 중심이었으며 병사층에는 포수·농민·부상·동학농민 등 평민이 중심이었다. 반면에 의병병사들은 양반유생들의 거의이념과 궤를 같이 하면서 그외에 농민적 요구인 봉건적 요소의 철폐와 농민생활의 지위의 향상을 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전투의 실질세력으로 활약하였음에도 의병장들은 이들의 요구를 대변 또는 약속해주지 못했다. 그 결과 의병의 군사력은 약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의병지휘부를 이룬 유생들이 비록 위와 같은 신분적 제한점이 있다 하더라도 이들은 충군애국사상에 입각하여 철저한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중군장 안승우를 비롯하여 다수의 유생의병들이 장렬한 전사를 하였음은 이를 말해준다. 또한 제천의병은 요동으로 망명하면서까지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또 제천의병은 단양·충주 등 중부지역의 관아와 일본군 수비대를 주목표로 하여 항쟁했다. 제천의병은 개화파 집단과 일본제국주의 침략군에 대항하여 반개화·반침략 투쟁을 수행한 점에서 민족운동사상 차지하는 의의가 크다 할 수 있다.


2. 홍주의병


1) 향회와 의진의 결성

홍주의병은 1895년 4월 광천에서 안창식의 거의 시도에서부터 비롯되어 을미사변과 단발령 공포로 격화·확대되었다. 홍주군 화성에 거주하는 안창식은 1895년 4월 23일 김옥균·박영효 등 개화파들의 일련의 정치개혁을 반역행위로 인식하고, 보령군 광천으로 가서 임정학林廷學등과 함께 시장상인들을 동원하여 거의 계획을 추진하고자 하였다. 註139)

이 시기는 을미변복령이 내려진 직후이다. 1895년 3월 29일 정부에서는 관민 모두 두루마기周衣의 색깔을 흑색으로 통일하게 하였다. 안창식은 이를 선왕의 문물이 무너진 것으로 보았으며, 거의하여 이를 성토하고자 한 것이다. 비록 이들의 활동은 1894년 8월 안동의 서상철과 같은 직접적인 반일의병투쟁으로 발전되는 못하였으나 개화파들의 변복령에 대한 지방유생들의 대응양태를 알게 해 준다.

이와 같은 거의 계획은 점차 구체화되어 갔다. 1895년 5월 22일 박창로가 외사촌형인 안창식을 찾아와 장곡현 청양군 대치면 장곡리의 거의 계획을 알려주고 동참을 권유하였다. 다음날5월 23일 둘은 장곡에 가서 정산에 사는 이봉학李鳳學, 호 雙翠, 본관 신평을 만났으나 선달 이공렬李公烈의 잘못으로 부여와 홍산의 인물들은 정혜사현 청양군 장평면 칠갑산 내에 모이게 되었다. 註140) 이들은 6월 3일 봉수산성에서 만나기로 일정을 변경하였다. 6월 2일 이들은 박창로 집에서 회합하였다. 안창식安昌植·이세영李世永·이봉학·정제기鄭濟驥·정영덕鄭盈德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함께 모여 답답한 마음을 우국시로 풀고자 하였다. 註141)이 시에서 이들은 자신들이 고을을 빛내야 할 인물이라는 소명의식과 책임감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으며, 한민족이 중국의 문화를 받아들였으나 오히려 이를 빛냈다고 하여 문화민족임을 자부하고 있다. 그러나 국가의 형편은 밝지 않다고 비감한 심정을 토로하면서 “차라리 세속의 흐름을 따라 친구의 굳은 우정 논할 것인가”라 하여 자신들의 모임을 단순히 우정의 도모만을 위한 회합으로는 도저히 만족할 수 없음을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들은 서로의 뜻을 확인한 후 6월 9일 청양장터에서 거의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당일 집결한 인물로는 안창식·박창로뿐이었다. 註142) 거의의 뜻을 민간에까지 전파·이해시키는데는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물론 이상의 모병과정에서 지방유생들의 국가위기에 대한 대응 태도를 알 수는 있다.

그로부터 2개월여 후인 8월 20일, 국모가 시해당한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이 비참한 소식에 접한 이들은 9월 하순 이세영 집에서 재집결하였다. 이세영·박창로·정제기·송병직·조병고·김정하 등이 그들이다. 앞으로의 군사활동에 대한 원칙을 재확인하였으며, 군사모집·무기수집 등의 구체적인 행동개시에 들어갔다. 안창식은 복석봉卜石峰·박공회朴公晦·윤화중尹華中 등과 모임을 갖느라 직접 참여하지는 못하였으나, 10월 2일 하매의 정제기를 방문하고 무기와 군사모집에 관한 일을 협의하는 등 실질적으로 활동하였다. 註143) 이들의 거의계획과 추진은 11월 15일 단발령이 공포된 후 더 구체화되어 갔다. 이들은 지금까지 비밀리에 추진해 오던 일제침략군과 매국적 개화파와의 일전을 결행하기 위한 의병투쟁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하였다. 이를 위한 향회 실시는 홍주의병사에서 주목되는 사건이다. 오래전부터 기병의 뜻을 불태워 오던 안창식은 청양유생 채광묵蔡光默과 함께 1895년 11월 28일 화성의 강변에 사는 이인영李麟榮 집에서 ‘향회’를 실시한 것이다. 註144) 향회란 지방유생들이 지역의 공사公事와 역원役員선출 등의 중대사를 협의 의결함은 물론, 사족들의 ‘일향지배一鄕支配’를 실현하기 위하여 향풍을 규정하는 기관을 말한다. 유생들은 25~30세 이상의 성혼한 자 중에서 엄격한 심사를 거쳐 향안에 등재될 수 있었는데, 이 향안에 등재된 유생들이 중심이 되어 향회를 실시한 것으로 보인다. 註145) 잘 알려져 있다시피 향안 등재자격 중 가장 중요한 사항은 신분 문제였다. 즉 삼향三鄕, 6조 : 부·조부·증조·외조·고조·처부 중에 수군水軍·향손鄕孫서얼이 있거나 자신에게 허물이 없어야 하였다. 註146)

이 향회에는 100여 명에 이르는 홍주일대 유생들이 참석하였으며, 군사활동을 결의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180여 명의 민병을 모집하여 다음날 안병찬과 채광묵이 이 부대를 인솔하여 홍주성에 제일 처음 입성하였다. 안병찬은 먼저 관찰사에게 의리정신을 들어 거의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였으며, 다음날 그는 다시 관찰사에게 부민을 단발시킬 수 없음을 내부에 건의할 것을 요구하였다. 註147) 이날 예산유생 이근주李根周도 임승주林承周·임한주林翰周 등 선비들의 연명을 받아 관찰사에게 서신을 보내어 단발을 반대하였다. 그 내용이 매우 강개하고 통박하였다고 한다. 註148)

12월 1일 저녁에는 정산과 청양의 이봉학·이세영·김정하 등 수백 명이 나그네 또는 장사군으로 가장하고 성안에 들어와 숨었다. 註149) 12월 2일, 안병찬의 척숙 박창로가 사민 수백 명을, 청양의 선비 이창서李彰緖가 청양군수 정인희의 명령을 받아 수백 명을 인솔하고 각각 홍주부에 집결하였다. 여기에 안병찬·채광묵의 민병 180명이 대기하고 있었으니 그 군세는 홍주부를 위압하기에 충분하였다. 註150)

이 지방유생들의 민병세력에 김복한·이설·홍건 등의 전직 고관들이 합세하였으므로 그 기세가 더욱 치솟았다. 전직 고관들은 이미 관찰사 이승우를 만나 의리정신을 들어 여러 차례 거의할 것을 권유한 바 있다. 김복한의 경우는 안병찬·이봉학·이상린 등 지방유생들과 비밀히 연락을 취하여 거의를 권유·고무시켜 왔다. 그리하여 12월 2일 수백 명의 민병이 관아에 집결하였을 때 김복한 등은 지도자로서 역할을 수행하였다. 즉 김복한은 홍건 등과 함께,



우선 거사하기에 앞서서 강호선姜浩善·함인학咸仁鶴 두 역적의 목을 베어 높이 걸어서 관찰사의 뜻을 굳혀야 한다. 註151)



고 지시하였다.

이 지시에 민병들이 경무청을 부수고 강·함 둘을 동문 밖으로 끌어내어 결박·구타하기에 이르렀다. 관찰사는 이들을 살려줄 것을 호소하고 결국 거의에 참여할 것을 승복하였다. 註152) 이어 ‘존화복수尊華復讎’의 기를 세우고 거의방략을 협의하였다. 그 방략은 다음과 같다. 註153)



① 현사 초빙, ② 각포各浦의 방곡, ③ 열읍에 관문關文과 격문 발송, ④ 의용병 초모, ⑤ 공주부 선공先攻



다음날 홍주부 내에 창의소를 설치하고 김복한이 수석으로 추대되었다. 김복한은 홍주부 관할 22군과 홍주군내 27면에 통문을 띄워 각 고을 대표들은 집을 순회하며 노약자와 독자를 빼고 각 가구에 한 사람씩 응모하기를 청했다. 註154) 집집마다 이를 피하지 않고 의로움에 죽을 것을 맹세하고 자진 응모하였다. 註155) 한편 관찰사 이승우는 숭정 연호를 사용하여 ‘홍주목사 겸창의 대장’이란 이름으로 절제사에게 관내에 명령을 내려 당일로 군사를 모집하여 오게 하였으며 註156)이설을 불러 장계 및 각국 공사관에 조회하는 격문을 작성토록 하였다. 註157)

창의소에는 김복한과 이설·안병찬·이상린이 잔류하였으며, 의병초모와 산성수리를 위하여 다음과 같은 인사를 파견하였다. 註158)



송병직 : 서북부(북면) 소모관

채광묵·이창서 : 동남부(남면) 소모관

이세영·이봉학·이병승 : 공주절제사

조의현·박창로·정제기 : 임존산성 수리



이로써 1895~1896년의 홍주의병은 비로소 그 진용을 갖추었으니 이 기병이 성립하기까지는 1895년 4월부터 8개월에 가까운 준비과정이 필요했던 것이다. 청양군수 정인희는 창의소를 별도로 청양읍내에 설치하고 홍주부에 연락을 취하여 포군 500명과 화포火砲 1천 자루를 관찰사에게 요청하였다. 註159) 비록 홍주부로부터 이를 지원받지는 못하였지만 현직 관리로서의 정인희의 기병은 홍주의병사상 주목되기에 충분


홍성 조양문


하다. 그러나 창의소를 설치한 후 하루만인 12월 4일 관찰사 이승우는 배반하고 말았다. 그는 처음부터 의리에 따라 죽을 마음이 없었다. 유생들의 권유와 위협에 마지 못해 거의에 참여하였으나 실패를 두려워하였다. 이때 전승지 송언증宋彦曾, 아전 이주승李周承·이종응李鍾應·박봉흠朴鳳欽·최학연崔學淵 그리고 강호선·함인학의 중지요청은 관찰사의 거의의 뜻을 번복시키고 말았다. 註160) 그는 김복한과 이설을 불러들여 “문석봉이 비록 패하였지만 그래도 몇 백명을 모아보기는 하였는데 나는 어찌하여 한 사람도 모아보지 못하고 이 지경에 이르렀느냐.”고 하면서 동지였던 이들의 구류 명령을 내렸다. 이어 홍건·안병찬·이상린·송병직·임승주 등 총 23명을 구금하였다. 註161) 이 소식을 듣고 서산군수 성하영成夏永이 거느린 군사 수백 명은 해미에서, 남양부사 남백희南百熙의 수군 수백 명은 서해상에서, 대흥군수 이창세李昌世의 군사 수백 명은 홍주군 경내에서, 전승지 김병억金炳億의 군사 100여 명은 홍주 서문 밖에서 모두 회군하고 말았다.

체포 구금된 안병찬은 구차하게 살아 뭇 소인들로부터 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머리를 온전히 하여 죽는 것이 낫다고 칼로 목을 찔러 자결을 기도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이설은 안병찬을 위한 만사를 짓기까지 하였다. 註162) 임승주의 극진한 간호로 이튿날 새벽에 깨어난 안병찬은 문종이를 찢어서 목에서 난 피로 혈시를 지어 이승우에게 보냈다. 註163)

12월 7일 서울에서 신우균申羽均이 군사 250명을 이끌고 내려와 김복한 등으로부터 진술서를 받았다. 12월 30일 수감자 23명은 결박당한 채 서울로 압송되었다. 80~90여 명의 순검에 의해 압송되어가던 이들은 1896년 1월 1일 신례원에 도착하였다. 이때 이승우는 아관파천과 김홍집의 처형소식을 듣고 이들을 다시 홍주감옥에 구금시켰다. 집권세력의 붕괴에 사태의 추이를 주시하고자 한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김복한·이설·홍건·안병찬·송병직·이상린이상 홍주6의사 이외의 17명은 모두 무죄 석방되었다. 이때 동문현 조양문위에는 “천지에 면목없는 승우, 일월같이 빛나는 6군자” 註164)라는 글이 나붙었다. 이들 17명 중 안창식·임한주와 같은 인사 외에 이승우의 신임을 받던 註165) 주사 이종응 같은 이가 포함되었다. 이승우의 책실비서이었으며 영장을 역임하여 비교적 관리들간의 갈등에 밝은 홍건은 그의 체포는 경무관 강호선이 이승우를 모함하기 위한 것이라 하였다. 註166) 사실 중앙에서는 관찰사가 의병을 일으킨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뿐 아니라 그후 청양·대흥·홍산·정산의 군수들이 면직 또는 징계를 받은 것은 모두 의병과의 관련혐의를 받은 때문이다. 註167)

1월 12일 김복한 등 6명을 압송하라는 법부의 훈령에 신례원1월 14일, 수원1월 16일을 거쳐 1월 17일 서울에 도착하여 한성재판소에 이송되었다. 이 시기는 유인석 등이 제천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키는 등 각 지방에서 의병활동이 활발한 때이었다. 또한 김홍집 등에 대한 재판도 종결되지 않아 이들에 대한 재판이 지연되었다. 2월 8일 남로선유사 신기선申箕善은 이 사건을 조속히 처리할 것을 정부에 건의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서울에 온 지 한 달이 지난 2월 23일 고등재판소 재판장 이범진이 이들을 불러 공초를 하였으며 25일 오시午時에 선고를 하였다. 註168)



김복한 : 유배 10년

홍건·이상린·송병직·안병찬 : 징역 3년

이설 : 장 60



이날 밤 자정 판사 김교헌金敎獻은 이들을 불러들여 임금의 특지에 따라 전원 사면 석방시켰다. 이들이 홍주로 귀향함에 이승우는 이미 관찰사의 직을 떠나 있었다. 이설은 귀향한 즉시 한원진의 묘소에 제문을 바쳤으며 김복한은 보령의 산속인 길현吉峴으로 이사하여 후학을 지도하였다. 註169)


2) 의병의 재기

이와 같이 이승우의 배반으로 1895~1896년의 홍주의병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홍주지역 유생들은 오랫동안 준비했던 의병투쟁의 기회를 그대로 포기하지는 않았다. 의병의 재기를 시도한 것이다.

우선 이근주는 이 소식을 듣고 자진하여 구금당하려 하였으나 노모 때문에 형들에게 붙잡혀 중지되었다. 그러나 그는 서산·태안 방면으로 가 의병을 모집하던 중 의병장들의 석방소식을 듣고 중지하였다. 그후 청양으로 수사水使 조의현趙儀顯을 찾아 거의하려고 계획하였으나 수사마저 체포되어 뜻을 펴지 못하고 말았다. 註170) 그는 1910년 국치를 당하여는 왜놈의 백성이 될 수 없다고 자결, 순국하였다. 1910년 9월 23일의 일이었다. 백형 근하根夏의 회갑연을 치르고 난 며칠 후 선산 묘소에 가서 ‘존화양이尊華攘夷 척사부정斥邪扶正’이란 8자를 써놓고 자결한 것이다. 註171)

안창식은 관찰사의 소행과 더욱이 장자인 안병찬의 자결 기도소식을 듣고 의병의 재기를 시도하였다. 12월 6일 주위에 연락하여 창리현 청양군 화성면 창말 앞 주점에 집결토록 하였다. 그러나 집결한 향병은 겨우 10여 명에 불과하였다. 註172)

청양군수 정인희는 12월 6일 정산읍에 진을 치고 분연히 일어났다. 12월 7일 공주를 향해 진격하였으며, 공주부의 구완희具完喜부대와 치열한 전투를 정산 철마정 일대에서 벌였다. 공주부에서는 홍주의병의 소식을 듣고 정부에 친위대와 무기 탄약 등의 지원을 요청하여 대비하였다. 註173)결국 정인희부대는 패하고 말았다. 註174) 정인희부대에는 그가 이끄는 청양 관내의 군인 외에, 홍주성전투에 참여하였던 다수의 유생의병이 보인다. 이세영·김정하·이병승 등이 그들로 홍주부 관군에 체포되지 않고 의병을 재기하여 투쟁을 전개한 것이다. 이들은 정산의 철마정 전투에서 패퇴한 후 각기 흩어졌다. 김정하는 관동지방으로 피했다가 다시 서울로 이주하여 살았다. 이때 그는 한성재판소 감옥에 수감된 안병찬을 1896년 2월 4일음 면회하고 주육을 넣어 주었던 것이다. 註175)

이세영은 홀로 홍산으로 빠져나가 재기를 준비하였다. 1896년 2월 아관파천 후 그는 남포에서 의병을 다시 일으켰다. 이때 같이 거의한 인사에는 황재현黃載顯·이관李寬·김홍제金弘濟 등이 있다. 註176) 이 거의 역시 성공을 보지 못하고 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세영 등 홍주지역 유생들의 끈질긴 항쟁의 모습을 알 수 있다. 특히 여기에서 황재현의 참가는 의미하는 바가 크다.

황재현1848~1903, 본관 장수은 1878년 무과에 합격하여 선전관에 올랐으며 註177) 1881년 이만손李晩孫등의 영남만인소에 이어 충청도 대표로 홍시중洪時中과 함께 척사소를 올렸던 장본인이다. 그는『조선책략』을 불태울 것을 비롯한 시무책을 주청하여 다른 상소자들과 함께 전라도 지도에 유배되었다. 註178) 그는 귀양에서 풀려나와 1894년 동학농민전쟁시는 동학군을 진압하기도 하였다. 註179) 그가 늦게나마 1895~1896년 홍주의병에 충무공의 후손 이세영과 함께 남포전투에 참여한 것이다. 황재현의 의병 참여는 홍주의병의 척사적 성격을 더 강하게 드러내준다. 또한 신사척사운동에 참여한 그가 15년이나 지난 1896년 의병 대열에 참여하였다는 사실은 의병투쟁을 위정척사운동의 발전적 전이로서 이해하게 해주는 전거를 제공해 주기도 한다.

1895~1896년 홍주의병의 기인은 같은 시기 다른 지역의 의병봉기에서 볼 수 있듯이 갑오변란·을미사변 등 일제의 침략정책과 을미변복령·단발령 등과 같은 개화파의 전통풍속 파괴정책 등의 추진에 대한 반대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더 근원적인 요인으로 동일한 학통성·혈연성·향토성 등을 특징으로 하는 홍주문화권 내의 사상적 측면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즉 홍주의병의 사상적 기반은 기호 관동지방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쳤던 화서학파의 척사사상의 영향은 극히 미약하다는 점이다. 오히려 이항로보다 1세기 앞선 17·18세기 기호유림의 종장이라 할 수 있는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의 사상적 영향이 지배적이었다. 임한주가 자신을 포함한 김복한 등을 ‘당문南塘學派’이라 표현하고 있음은 이를 단적으로 알려준다. 비록 1세기 이상의 시차가 있으나 남당의 절의정신과 이단론이 이들에게 영향을 끼쳐 의병봉기가 가능하도록 하는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이는 ‘조선 말’이라고 하는 제국주의 세력의 각축장으로 화한 시대적 상황에 조선 후기 주자학적 의식구조가 근대사회에서 민족수호의 논리로 변형되어 의병투쟁이라는 모습으로 표출되어 나타났음을 알려준다. 지금까지 한원진의 학통은 단절된 것으로 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검토의 결과 한원진을 비롯한 호서지역 유림들에 대한 사상적 재평가가 요구된다.

홍주의병의 주도층에는 남당학파라 할 수 있는 김복한·이설·임한주 등과 비관료 출신으로 재지유생층인 안창식·안병찬 부자를 비롯하여 박창로·채광묵·이세영 등의 두 집단이 있다. 이 두 집단은 신분의 차이, 당파의 노소, 학파의 차이 등 여러 요인을 포기 잠재시키고 민족생존권 회복운동인 의병투쟁에 적극 동참한 것이다. 일반 병사층에는 일부의 유생 외에 농민·상인보부상인·관포수 등 평민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보부상층이 참여한 것은 초기 단계에서 관찰사를 비롯한 관리층이 참여한 영향도 있을 것이다. 동학농민군의 의병참여 사실은 찾기 어려웠다. 농민군이 유회군과 적대관계였던 것을 생각하면 동참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1895~1896년의 홍주의병은 ① 민병모집단계, ② 향회실시와 홍주성 점령단계, ③ 재기의 단계 등 3단계로 추진되었다. 특히 제3단계는 아직까지 소개되지 않았던 사실들로, 홍주의병이 이승우의 배반으로 끝나고 말았다는 기존의 주장을 수정토록 하는 것이며 홍주의병의 끈질긴 항쟁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실이다. 1895~1896년의 홍주의병은 이세영의 남포전투 패배를 끝으로 재기에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첫째, 관찰사 이승우의 배신이며, 또한 의병장들이 이승우의 기회주의적 태도를 간파하지 못하고 그를 과신한 때문이었다. 물론 이승우를 포함한 일부 현직 관료들의 소아적 태도는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둘째, 무기·전략전술·지휘체계의 미비를 들 수 있다. 청양군수 정인희의 화포와 포군지원 요청을 홍주부에서는 제공해 줄 수가 없었다. 전략전술 역시 부족하였다. 의병진 결성 후 홍주성을 무방비로 비운 것이 패인이었음을 볼 때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비교적 군사문제에 밝은 정인희·황재현·이세영 등의 재봉기가 있었으나 이미 대세가 기운 후였다. 지휘계통이 정비되지 못한 면도 있다. 지휘부인 창의소에는 창의대장으로 이승우가 있었으며, 또 한편으로 의병들은 김복한을 영수로 추대하였다. 더욱이 이 두 지휘자는 상호 협조가 없었다. 오히려 이승우는 김복한을 체포·구속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와 같이 주자학 정신이 깔려 있는 홍주문화권 내의 의병투쟁은 반개화·반제국의 특성을 띠고 있다. 반면 주도층의 주자학적 성격과 이로 인한 동학농민군의 의병참여가 구조적으로 차단되어 있던 점에서 반봉건적 성격은 찾기가 어렵다. 이는 일정한 한계로 지적될 수 있다. 그러나 홍주의병은 대의관에 입각하여 ‘거수去守’나 ‘자정自靖’이 아닌 ‘거의소청擧義掃淸’의 적극적인 태도로 반제국투쟁을 전개한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또한 1895~1896년간 전개된 홍주의병의 민족보전의 투쟁정신은 홍주일대의 유생층을 비롯한 농민층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켜 주어 대규모 항일투쟁인 1906년의 홍주성전투를 가능하도록 한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는 재조명이 요구된다.

[註 44] 유인석, 「乙未毁服時立言」,『소의신편』권4, 132~133쪽. ☞

[註 45] 이정규,『항재집』권16, 16쪽. ☞

[註 46] 이정규,『항재집』권16, 16~17쪽. ☞

[註 47] 이정규, 「하사안공유사」,『항재집』권16-遺事. ☞

[註 48] 박정수, 「하사안공을미창의사실」,『독립운동사자료집』 1, 350~351쪽. 

갑오년 6월에 공(안승우)이 문인 洪思九와 함께 제천 白蓮寺에서 避暑하고 있었다.그달 25일 밤에 흉적 朴泳孝·徐光範·徐載弼이 왜인을 이끌고 밖에서 들어와 金弘集·魚允中·兪吉濬·趙羲淵·金嘉鎭·李充用·李完用·朴定陽과 내응, 경각의 사이에 적병이 대궐 안에 밀어 닥쳤다. 임금을 협박하고 옛 제도를 모조리 배척하여 위로 종묘제향과 조정 관제, 아래로 인민의 의복과 행사까지 한결같이 오랑캐의 습속을 따르게 하였다. 公이 듣고 통곡하며 산에서 내려와 의병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였으나 호응하는 자가 없었다.” ☞

[註 49] 이정규, 「안하사전」,『독립운동사자료집『 1, 190~191쪽 ; 이정규의『독립운동사자료집』1, 17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지팡이 끝에 기를 달고 적을 꾸짖다가 죽는 것이 오히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보다 나으며, 그것은 또한 후세에 대의를 펼 수도 있는 것이다. ☞

[註 50] 이정규, 「槐隱李公遺事」,『항재집』권16-遺事. ☞

[註 51] 필자 미상,『의병사시말』. ☞

[註 52]『의병사시말』·『육의사열전』의 「이괴은전」에 의하면, 김백선이 맹영재를 찾아가 “이런 큰 변을 당하여 나라의 신민이 된 자는 대소 귀천을 막론하고 마땅히 죽음을 걸고 적을 무찔러 살아서는 옳은 사람이 되고, 죽어서는 옳은 귀신이 되어야 하겠거늘, 하물며 당장에 병부를 찬 인신으로서 위로 임금의 치욕을 급히 씻지 못하고 아래로 창생의 죽음을 근심하지 않는다면 고을에 수령은 두어서 무엇하느냐.” 면서 동헌에서 총을 부셔버리고 집으로 돌아와 칼을 갈며 자결하려고까지 생각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육의사열전』보다『의병사시말』의 내용이 일자별로 기록되어 있고 내용도 사실적이다. ☞

[註 53] 이정규, 「이괴은전」,『독립운동사자료집』1, 181쪽. ☞

[註 54] 필자 미상,『의병사시말』. ☞

[註 55] 김응수에 대하여는 아직 확인이 안된다. 이춘영의 장인으로 보인다. 만수암 역시 아직 확인이 안된다.『종의록』18~19쪽에 의하면, 안승우가 판서 김세기에게 연락을 취하여 군사를 먹일 것을 준비하게 하고 만나자고 했는데 김세기는 도망갔다는 기록이 있다. ☞

[註 56] 지평의병의 봉기일은 11월 28일로 보는 것이 옳을 듯 하다. 이춘영이 김백선에게 11월 26일 거사하기로 한 바 있으나, 이때는 안승우가 도착하지 않은 때였다. 「이공괴은전」에는 11월 29일 거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어 하루의 차이가 있으나, 「하사안공을미창의사실」의 기록을 따르기로 한다. ☞

[註 57] 이정규,『육의사열전』 17·19쪽. ☞

[註 58]『동경조일신문』1896년 1월 29일 「賊徒蜂起」. ☞

[註 59]『동경조일신문』1896년 1월 21일 전보 「暴徒鎭壓」. ☞

[註 60]『시사신문』1896년 1월 19일 전보 「朝鮮原州郡に暴徒蜂起」. ☞

[註 61] 지평의병이 제천에 입성한 일자는 12월 3일로 보인다(박정수,「하사안공을미창의사실」, 355쪽).『종의록』에 의하면, 11월 27일이라고 되어 있으나(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 1, 19쪽), 이때는 아직 거사를 하기도 전이다. 또한 제천에 입성한 후에 지평의병에 참여한 장익환의 일기에서도 12월 4일자에 “道田에 사는 宋之永이 내방하여 아버님에게 말하기를 ‘내가 제천에 갔었는데 엊저녁에 지평의병이 졸지에 제천읍에 이르니 제천군수는 도망가고 그 성세가 굉장하다. 자네가 전일 나에게 말한 통지서를 보낸 일은 이와 더불어 상응하니 실로 聲氣之感을 어찌 믿지 않으리오’라고 했다.”라 하여 12월 3일 저녁때 지평의병이 제천읍을 점령했음을 알려준다. ☞

[註 62] 박정수,『독립운동사자료집』 1, 355~356쪽. ☞

[註 63] 이정규, 「육의사열전」,『독립운동사자료집』1, 171쪽. ☞

[註 64] 이정규, 「종의록」,『독립운동사자료집』1, 171쪽. ☞

[註 65] 격문은 입암 주용규가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다』의병사시말』과『하사안공을미창의사실』 356쪽). 또한 12월 3일 이 격문을 발표한 의병장은 이필희로 봄이 타당할 것이다. 유인석은 아직 의병장에 추대되지 않았으며, 제천의 이정규 집에서 주용규와 함께 만주로 떠날 채비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다만, 유인석이 12월 20일 대장에 추대된 뒤에 이 격문은 유인석의 이름으로 다시 발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

[註 66]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창의견문록」,『독립운동사자료집』 1, 87~88쪽. ☞

[註 67]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하사안공을미창의사실』 358쪽. ☞

[註 68] 이정규,『육의사열전』; 張忠植,『乙年日記』을미년 12월 초8일자. ☞

[註 69] 김상기 편역, 「재조선공사의 보고」,『한말의병자료』 1, 2001, 2~3쪽. ☞

[註 70]『동경조일신문』1896년 2월 14일 「丹陽小戰」. ☞

[註 71] 장충식,『을년일기』을미년 12월 초9일자. ☞

[註 72] 이정규,『독립운동사자료집』1, 21~22쪽. ☞

[註 73] 이정규,『독립운동사자료집』1 참조. ☞

[註 74] 유인석, 「檄告八道列邑」,『소의신편』 1~2쪽. ☞

[註 75] 이정규,『독립운동사자료집』1, 24~25쪽. ☞

[註 76] 박정수, 「하사안공을미창의사실」,『독립운동사자료집』1, 368쪽. ☞

[註 77] 이정규,『독립운동사자료집』1, 28~29쪽. ☞

[註 78] 이정규,『독립운동사자료집』1, 31쪽. ☞

[註 79]『동경조일신문』1896년 2월 26일 「朝鮮時事」. ☞

[註 80] 이정규,『독립운동사자료집』1, 30쪽. ☞

[註 81] 유인석, 「격고내외백관」,『의암집』권1. ☞

[註 82] 이정규,『독립운동사자료집』1, 31쪽. ☞

[註 83] 이정규,『독립운동사자료집』1, 32쪽. ☞

[註 84] 이조승, 「西行日記」,『湖西義兵事蹟』 (필사본). ☞

[註 85] 이조승,『호서의병사적』 32~33쪽. ☞

[註 86]『동경조일신문』1896년 2월 25일 「忠州の暴徒」 ;『시사신문』1896년 2월 25일 「忠州暴民の襲來」. ☞

[註 87] 이정규,『독립운동사자료집』1, 33~34쪽. ☞

[註 88] 이조승, 「西行日記略序」,『호서의병사적』. ☞

[註 89]『동경조일신문』1896년 3월 13일 「戰鬪二所」. ☞

[註 90]『明治二十七八年役 第5師團陣中日誌』권15, 1896년 2월 18·20일자, 1194·1198쪽. 

충주성 점령시의 제천의병 수는 위 자료에서 1천명으로 보고되었다. 그러나 위 자료 2월 18일자의 부산 伊津野千里 수비대장이 大本營에 보낸 보고서에서는 “충주는 17일 오후 5천 명의 폭도로부터 점령되어”라고 제천의병을 5천여 명이라고 보고하였다. ☞

[註 91]『명치27,8년역 제5사단진중일지』권15, 1896년 2월 28일자, 1208쪽. ☞

[註 92]『명치27,8년역 제5사단진중일지』권15, 1896년 3월 2일자, 1211쪽. ☞

[註 93]『명치27,8년역 제5사단진중일지』권15, 1896년 3월 4일자. ☞

[註 94]『명치27,8년역 제5사단진중일지』권15, 1896년 3월 6일자, 1212쪽. ☞

[註 95] 전중 대위는 1894년 9월 중위로 이천수비대장을 맡고 있었다. 이때는 대위로 진급하여 장호원수비대장을 맡고 있다가 충주성전투에 참전하였다. ☞

[註 96]『명치27,8년역 제5사단진중일지』권15, 1896년 3월 6일~7일자, 1212~1213쪽. 

김상기 편역, 「公제50호, 忠州府 暴徒 潰走의 件 報告」,『한말의병자료』2, 76쪽에 의하면, 부산영사 加藤이 외무차관에게 보고하기를 “暴徒의 사망자가 58명이고 우리 부상자는 하사 이하 9명입니다.”라고 의병의 사망자를 58명이라고 보고하고 있어『진중일지』의 기록과 다름을 볼 수 있다. ☞

[註 97]『명치27,8년역 제5사단진중일지』권15, 1896년 3월 9일자, 1215쪽. ☞

[註 98]『명치27,8년역 제5사단진중일지』권15, 1896년 3월 7일자, 1214~1215쪽. 

이때 충주성 전투에 참여한 보병대위 三宅武義(勳5等雙光旭日章, 年金100圓)를 비롯하여 중위 荻原弘同(勳6等瑞寶章, 金150원), 소위 酒井鶴太郞(勳6等單光旭日章, 金150원) 등에게는 1895년 12월 청일전쟁의 수훈으로 훈장과 연금이 수여된 것이 확인된다. ☞

[註 99] 이정규,『독립운동사자료집』1, 36쪽. ☞

[註 100] 이정규, 「雲崗李公行狀」,『항재집』권15-行狀. ☞

[註 101] 이정규의『종의록』 장충식의『을년일기』 박정수의『하사안공을미창의사실』등을 참조하여 이 시기를 전후한 제천의병의 편제표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제천의병의 편제표」 

창의대장 : 유인석 

중군장 : 李春永(安承禹 李元廈 元容錫) 

전군장 : 安承禹(洪大錫, 李正儀) 

후군장 : 申芝秀 (元容錫, 兪致慶) 

선봉장 : 金伯善(金龍俊)좌군장 : 禹冀鼎(鄭遠謨) 

우군장 : 安成海(元奎常, 李康秊)중군종사 : 吳命春 

중군군사 : 趙駿敎중군참장 : 韓東直 

중군참모 : 金思斗중군아장 : 李元廈 

소모장 : 徐相烈, 李範稷, 鄭寅卨유격장 : 李康年 

유격중군 : 尹基榮조련장 : 安成海 

분의장 : 李熙斗좌익장 : 禹弼圭 

우익장 : 尹聖鎬 

별진장 : 元友珪 좌선봉 : 金龍俊 

진동장; 李弼熙한어장 : 李馨九 

운량감 : 李弼根(崔炳軾 李範稷)운향감 : 李範稷 

군기감 : 禹憲榮 (柳海鵬)장의장 : 李元廈 

전어수령 : 李鎬承 

참모 : 李肇承 鄭彦朝 尹鼎燮 權珌洙 朱庸奎 李直應 朴胄淳 宋 

종사 : 趙奭增 朱永燮 李世熙 洪思九 

총재서무 : 柳洪錫 鄭源 沈英燮 洪璇杓 元容正 元容八 鄭華鎔 權寅洙 李起振 

兪致三 李福漢 金龍浩 金華桓 李炳善 裵是綱羅時雲 

장서기 : 李秉會장재용 : 金永祿 

장빈객 : 張忠植단양수성중군 : 洪祐範 

영춘수성장 : 申肯休 元道常 

단양수성장 : 金炳璜(단양군수) 沈羲慶 

청풍수성장 : 李建龍(靑風郡守 朴宗恒)제천수성장 : 李敏政 

충주수성장 : 元道常원주수성장 : 金炳大(具哲祖) 

영월수성장 : 朴齋肪여주수성장 : 沈相禧(여주의병장) 

지평수성장 : 安鍾燁정선수성장 : 李福永 

( ) 안은 후임자임 ☞

[註 102] 박정수, 「하사안공을미창의사실」,『독립운동사자료집』1, 391쪽. ☞

[註 103]『시사신보』1896년 3월 24일 「可興の暴徒大敗」. ☞

[註 104] 박정수,『독립운동사자료집』1, 408쪽 ; 이정규, 「종의록」,『독립운동사자료집』1, 43~45쪽. ☞

[註 105] 구완회, 「1896년 제천의병의 가흥전투와 김백선」,『조선사연구』4, 1995. ☞

[註 106] 박정수,『독립운동사자료집』1, 408·414쪽. ☞

[註 107] 박정수,『독립운동사자료집』1, 352쪽 ; 박민영, 「민용호의 강릉의병 항전에 관한 연구」,『한국민족운동사연구』5, 41쪽. ☞

[註 108] 박정수,『독립운동사자료집』1, 458쪽. ☞

[註 109] 박정수,『독립운동사자료집』1, 409쪽. ☞

[註 110] 박정수,『독립운동사자료집』1, 417쪽. ☞

[註 111]『동경조일신문』1896년 4월 12일 「可興情報」. ☞

[註 112] 박정수,『독립운동사자료집』1, 453~454쪽. ☞

[註 113] 박정수,『독립운동사자료집』1, 423·448·459쪽. ☞

[註 114] 박정수,『독립운동사자료집』1, 456~466쪽. ☞

[註 115]『동경조일신문』1896년 6월 19일 「可興匪徒」. ☞

[註 116] 이정규,『독립운동사자료집』1, 20쪽. ☞

[註 117] 박정수, 「의암유선생서행대략」,『독립운동사자료집』1, 483~484쪽. ☞

[註 118] 이조승,『호서의병사적』참조. ☞

[註 119] 박정수,『독립운동사자료집』1, 484~488쪽. ☞

[註 120] 박정수,『독립운동사자료집』1, 488~495쪽. ☞

[註 121] 박정수,『독립운동사자료집』1, 495~496쪽. ☞

[註 122] 박정수,『독립운동사자료집』1, 496쪽. ☞

[註 123] 박정수,『독립운동사자료집』1, 497~498쪽. ☞

[註 124] 박정수,『독립운동사자료집』1, 499~500쪽. ☞

[註 125] 박정수,『독립운동사자료집』1, 501쪽. ☞

[註 126]『고종실록』권34, 건양 원년 2월 29일조. ☞

[註 127] 박정수,『독립운동사자료집』1, 502~503쪽. ☞

[註 128] 박정수,『독립운동사자료집』1, 506~510쪽 ; 유인석, 「西行時在旌善上疏」,『의암집』권4-疏. ☞

[註 129] 이종현,『근대조선역사』 일송정, 1988, 206쪽. ☞

[註 130] 이조승,『湖西義兵事蹟』. ☞

[註 131] 이조승, 「送畿湖通文」,『호서의병사적』; 박정수, 「毅庵柳先生西行大略」,『독립운동사자료집』1. ☞

[註 132] 박정수, 「의암유선생서행대략」,『독립운동사자료집』1, 533~534쪽 ; 이정규, 「敬庵徐公遺事」,『항재집』권16-遺事. ☞

[註 133] 박정수, 「의암유선생서행대략」,『독립운동사자료집』1, 539쪽. ☞

[註 134] 유인석, 「재격백관문」,『의암집』권45-檄. ☞

[註 135] 이정규, 「육의사열전」,『독립운동사자료집』1, 202~204쪽. ☞

[註 136] 원용정, 「卜隱」,『昭義新編』권8, 244쪽. 그 중 21명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柳弘錫(畏堂) 尹鼎燮(梅澗) 尹陽燮(小白) 

金永錄(充齋) 吳寅泳(忠齋) 朴貞洙(悔堂) 

鄭雲慶(松雪) 安愼模 金華植 

具然庠 李 金 

車甲東 元容正(恕庵) 宋煥國 

通辭 : 趙鳳烈 겸인 : 金演敎 

僕夫 : 李致壽 崔春興 金石麟 沈禹春 ☞

[註 137] 이정규, 「의암선생행장」,『항재집』권15-行狀. ☞

[註 138] 유인석, 「因召命入疆至楚山陳情待罪疏」,『의암집』권6-疏. ☞

[註 139] 안창식,『간호일기』1894년 4월 23일자 ; 임한주,『홍양기사』 259쪽. ☞

[註 140] 안창식,『간호일기』. ☞

[註 141] 안창식,『간호일기』. ☞

[註 142] 안창식,『간호일기』. ☞

[註 143] 안창식,『간호일기』. ☞

[註 144] 안창식,『간호일기』1895년 11월 28일자 ; 안병찬,『規堂日記』. ☞

[註 145] 김인걸, 「조선후기 향안의 성격변화와 재지사족」,『김철준박사화갑기념사학논총』 지식산업사, 1983, 531~532쪽. ☞

[註 146] 김호일, 「조선후기 향안에 관한 일고찰」,『한국사학』9,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7, 225~228쪽. ☞

[註 147] 안병찬,『규당일기』. ☞

[註 148] 임한주,『홍양기사』 260쪽. ☞

[註 149] 안창식,『간호일기』1895년 12월 1일자. ☞

[註 150] 안병찬,『규당일기』 1895년 12월 2일자. ☞

[註 151] 임한주,『홍양기사』 261~263쪽 ; 안병찬,『규당일기』. ☞

[註 152] 임한주,『홍양기사』 261~263쪽. ☞

[註 153] 홍건,『乙坎日記』 1895년 12월 2일자. ☞

[註 154] 임한주,『홍양기사』 263쪽 ; 김복한, 「지산연보」,『지산집』권15. ☞

[註 155] 임한주,『홍양기사』 263쪽. ☞

[註 156] 이승우(辛丑生, 자 復汝, 호 石耘, 본관 全州)는 梅山 洪直弼의 문인으로 보인다』華島淵源圖』참조). ☞

[註 157] 임한주,『홍양기사』 263쪽. ☞

[註 158] 임한주,『홍양기사』 263쪽 ; 洪楗,『을감일기』. ☞

[註 159] 임한주,『홍양기사』 263쪽. ☞

[註 160] 임한주,『홍양기사』 264~265쪽 ; 김복한,『지산집』권6-잡저 ; 홍건,『을감일기』1895년 12월 4일자. ☞

[註 161] 임한주,『홍양기사』 280쪽. ☞

[註 162] 임한주,『홍양기사』 271~275쪽. ☞

[註 163] 홍건,『을감일기』 1895년 12월 26일자 ; 임한주,『홍양기사』 268쪽. ☞

[註 164] 홍양사출판위원회,『홍양사』 32쪽. ☞

[註 165] 임한주,『홍양기사』 271~275쪽. ☞

[註 166] 홍건,『을감일기』 1895년 12월 26일. ☞

[註 167]『동경조일신문』1896년 2월 4일 朝鮮時事 「洪州敵起」. ☞

[註 168] 임한주,『홍양기사』 277~278쪽. ☞

[註 169] 임한주,『홍양기사』 280~282쪽. ☞

[註 170] 홍양사출판위원회, 「李根周」,『홍양사』. ☞

[註 171] 홍양사출판위원회, 「李根周」,『홍양사』. ☞

[註 172] 안창식,『간호일기』1895년 12월 6일자. ☞

[註 173]『동경조일신문』1896년 2월 1일 조선시사 「洪州敵起」. ☞

[註 174] 안창식,『간호일기』1895년 12월 7일자. ☞

[註 175] 안병찬,『규당일기』 1896년 2월 4일자. ☞

[註 176] 홍양사출판위원회, 「李世永」,『홍양사』; 윤석봉,『希堂集』. ☞

[註 177]『長水黃氏胡安公派譜』권3, 265쪽(黃載顯의 증손인 黃台淵씨 제공, 충남 보령군 웅천면 거주). ☞

[註 178]『承政院日記』고종 18년(辛巳) 3월 22일자. ☞

[註 179] 황태연씨 증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