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북한지역 의병투쟁 / 전기의병의 확대 / 한말 전기의병

몽유도원 2014. 1. 16. 12:04

제9권 한말 전기의병 / 제4장 전기의병의 확대

1. 경기지역 의병

2. 강원지역 의병

3. 충청지역 의병

4. 경상지역 의병

5. 호남지역 의병투쟁

6. 북한지역 의병투쟁


6. 북한지역 의병투쟁


북한지역에서의 을미의병은 을미사변 직후에 강계에서 시작되었다. 1895년 11월 단발령 공포 직전 김이언金利彦이 만주의 삼도구三道溝에 거점을 두고 초산군 아전 출신 김봉현金奉鉉과 동학접주였던 김구金九 등과 함께 압록강 양안의 포수 300여 명을 모병하여 강계의진을 결성했다. 김이언은 국모의 시해에 항거하는 격문을 발표하고 압록강을 건너 고산진으로 쉽게 점령하고 이어서 강계읍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강계읍 입구인 인풍루 근방에 도착했을 때 내통한 장교의 배신으로 관군의 기습을 받아 혈전 끝에 패하고 말았다. 그후 김창수는 황해도로 남하하여 단발령이 내리자 의병을 계획하던 중에 치하포에서 왜인 토전양량土田讓亮을 처단하는 의거를 올렸다. 註290)

1896년에는 함흥·해주·의주 등 여러 지방에서 의병이 봉기하였다. 함흥지역에서는 평강 출신의 최문환崔文煥이 1896년 2월 함흥부를 점령하여 참서관 목유신睦裕信과 주사 피상국皮相國·홍병찬洪秉瓚을 처단하고 각지에 다음과 같은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나룻터의 주민은 사람을 신칙하여 해상을 왕래하는 왜적을 살펴서 접근치 못하게 하며, 만일 상륙하여 횡포하는 자가 있으면 즉각 달려와서 보고할 것이다. 註291)



함흥지역에서 의병은 특히 일본 상인의 경제적 수탈에 항거하여 일어난 특성을 띈다. 최문화부대는 민용호의 강릉의병 본진과 연합작전을 펴 9월 함흥을 재점령하기도 하였다. 해주에서는 포수들이 중심이 되어 거의하였다. 원래 이들은 동학군에 가담하여 이조현李祖鉉이 이끄는 친위대에 의해 체포·구금되어 있었다. 이들은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3월 20일 파옥하고 경무관 이경선李敬善 등을 처단하고 관찰사 이명선李鳴善을 감금한 후 거의하였다. 그러나 친위대의 반격으로 패산하였다.

의주에서는 유생 조상학趙尙學이 압록강을 넘나들며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외 문화군 의병들은 군청을 습격하여 군수 홍재준洪在駿을 구금하고, 장연군에서는 의병 11명이 체포되어 희생당하기도 하였다. 평산의 유생들은 의병봉기를 계획하다가 유인석이 의병장에 추대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유치경·유태환·신학희 등은 제천의병에 참여하였으며, 수안의 유생 송상규도 의병을 계획하다가 제천의병에 참여하였다. 이처럼 북한지역의 의병항전은 반개화주의적이면서 근왕적인 특성을 갖고 있기는 하나 남한지역에 비해 해주의 포수군이나 함흥부에서와 같이 반침략성이 두드러진다.

이상과 같이 전기의병은 국수보복과 단발령 철회 등의 구호 아래 남한지역을 중심으로 크게 확대되었다. 이들의 주장과 철저한 무장투쟁은 전국적으로 파문을 일으켰으며 위정자와 일제침략군에게 큰 위협을 주었다. 결국 고종은 단발령을 철회시켰으며 아관파천을 단행하여 일제의 침략행위에 대한 반대의사를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전기의병 봉기항쟁도


아관파천 직후 김홍집·어윤중 등 개화파 관리들은 처단되었으며 침략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되던 개화정책은 비판되어 실효를 보지 못하였다. 또한 1896년 10월경을 기하여 전기의병은 표면적으로 해산되었지만 이들의 일부는 제천의병과 강릉의병에서 볼 수 있듯이 끝까지 고종의 해산조칙을 거절하고 만주로 들어가 재기의 항전을 준비하였다. 또 이들의 일부는 영학당·활빈당 세력으로 재편되어 반개화·반침략·반봉건투쟁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다수의 의병장들은 1905년 을사늑약을 전후하여 의병의 기치를 다시 세우고 민족수호를 위한 항일투쟁을 재개하였다.

[註 290] 김구,『백범일지』; 金亨鎭,『路程略記』참조. ☞

[註 291] 조동걸,『한말의병전쟁』, 독립기념관, 1989, 50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