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전기의병의 개시 / 한말 전기의병

몽유도원 2014. 1. 13. 10:41

 제9권 한말 전기의병 / 제3장 전기의병의 개시

1. 유림세력의 의병 준비

2. 1894년 안동의병의 봉기

3. 상원의병의 봉기

4. 유성의병의 전개


1. 유림세력의 의병 준비


조선 말 위정척사론은 주자학의 척이단과 화이론에 근간을 두고 있다. 이 위정척사론은 동양적 세계관에 의해 서구 제국주의 세계관을 극복하려는 논리로써 제국주의 침략에 저항하고자 하는 실천성을 머금고 있다. 초기의 구체적인 행동양태는 상소가 중심이었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정책이 노골화하면서 ‘척왜양창의’를 부르짖으며 항일의병이라는 직접적인 무력투쟁의 노선을 택하였다.

이 항일의병투쟁이 언제부터 전개되었는가. 즉 한국근대 항일의병의 기점은 언제부터인가? 그동안 을미사변과 단발령 이후 유생층이 중심이 되어 주로 남한지역에서 봉기한 을미의병을 최초의 의병으로 알아 왔음이 사실이다. 註1) 또한 을미의병의 기점으로는 1895년 9월 대전의 유성에서 ‘국수보복國讐報復’의 기치를 들고 봉기한 문석봉文錫鳳의병이라고 설명되었다. 註2) 그러나 을미사변 이전에 이미 반침략·반개화의 성격을 띤 항일의병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에서 청일전쟁이 전개되던 상황에서 민중은 일제의 군용전신선을 절단하여 일제의 전쟁 수행을 저지하였다. 갑오변란이 일어나자 유생을 중심으로 각지에서 의병 봉기의 조짐이 커져 갔다. 항일의병은 을미사변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1894년 7~9월에 일어난 안동의병과 1895년 7~8월 평안도 상원에서 봉기한 상원의병을 들 수 있다. 이 의병봉기의 직접적 계기는 1894년 6월 21일의 갑오변란, 이후 취해진 일련의 개화정책, 청일전쟁 발발 등이 주요 원인이었다. 한국 민중은 이를 국가와 민족의 위기로 인식하고 항일의병을 일으켰다.

일본군이 경복궁을 공격 점령한 갑오변란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유인석·노응규·김복한·이설 등 유림들에게 ‘변란’으로 받아들여졌으며, 민족 존망의 위기의식으로 인식되었다. 한편 지평의 안승우安承禹, 홍주의 안창식安昌植, 안동의 서상철徐相轍, 평안도 상원의 김원교金元喬 등은 직접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한 점에서 주목된다. 그중에서 지평·홍주의 경우에는 비록 모병단계에서 끝났으나, 안동·상원의 경우에는 본격적인 항일의병투쟁을 전개하였다. 이 절에서는 지평·홍주에서 모병활동에 대하여 검토하기로 하며, 안동·상원의 경우는 장을 달리하여 갑오의병의 구체적 사례로 구명하고자 한다.

안승우의 모병활동은 그의 고향인 경기도 지평에서 1894년 여름 전개되었다. 그는 일본병이 경상도 진영에서 서울을 향해 진입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저지하고자 의병을 초모하여 7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이 마침 그 지역에 들어와 활동하므로 미리 누설되어 일을 그르칠 것을 염려하여 중지하고 말았다. 안승우는 경기도 지평현 상동면에서 출생하여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고제인 성재省齋유중교柳重敎를 스승으로 화서문하에 입문한 척사계열의 유생이다. 그는 ‘국수보복’과 단발령 철회를 목적으로 을미년 11월 28일(음) 지평에서 이춘영李春永 등과 거의하였다. 단양전투에서 승리한 후 그는 12월 20일 경 의암 유인석을 제천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전군장·중군장으로 의병전을 수행 중 1896년 4월 제천전투에서 순국한 을미의병장 중 대표적인 인물이다. 註3)

비록 그의 모병활동이 중지되어 구체적인 군사활동을 전개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으나, 그의 모병활동에서 우선 갑오변란을 전후한 시기의 유림세력의 동향을 알 수 있다. 그의 모병활동은 1년여 후 재봉기한 을미의병전쟁을 위한 준비작업이었다.

한편 홍주에서의 모병활동은 보다 구체적으로 전개되었다. 지금까지 홍주지역 의병은 단발령 공포 직후인 을미년 12월 초 김복한을 대장으로 삼아 홍주6의사인 이설李偰·안병찬安炳瓚·송병직宋秉稷·홍건洪楗·이상린李相麟과 안창식安昌植·임승주林承周 등이 중심이 되어 의병의 기치를 든 것이 그 시초로 알려져 왔다. 註4)

그러나 안창식의『간호일기艮湖日記』 註5)에 의하면 이미 을미사변 전인 1895년 4월에 의병을 일으키려는 모병활동을 구체적으로 전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에 의하면 박영효朴泳孝 등 개화파를 흉적으로 파악하면서 그들에 의해 의관과 문물이 바뀜을 통탄하는 중화주의에 입각한 반개화주의이념에 의거하여 모병활동을 함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영효는 본래 임오년갑신년의 잘못-필자의 흉도김옥균·홍영식·서재필·서광범 등과 함께 5적이라 일컬어졌는데 왜국으로 도망갔었다. 몽유의 은총이 있었던 것을 생각하지 않고 방자한 태도로 환국하여 모든 정령을 자기들이 스스로 규감하였다. 그리하여 심지어는 임금을 위협하기까지 하니 그네들의 반역의 형상이 분명히 드러났다. 의관은 중화의 제도를 바꾸어서 조정관리는 금은답포를 입고 사서인士庶人은 금은두루마기를 입었다. 조정에 임하는 사람들 중에는 간간 삭발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선왕의 의관과 문물이 일조에 바뀌었으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은가. 그러한데도 조정에 가득찬 진신縉紳들과 야에 있는 사람들 중에 한 사람도 거의 성토하는 이 없으니 내가 비록 용렬하고 천루하다고 해도 답답하고 끓어오르는 마음을 금치 못하여 4월 20일 광천에 가서 한두 동지들과 시중을 달리는 노릇을 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임위원廷學이 만류하여 이루지 못하고 중지하였다. 註6)



안창식은 개화파들이 강제로 고종황제를 위협하여 의제를 비롯한 문물제도를 변경함에 이를 성토하고자 의병을 일으키고자 하였다. 그는 4월 20일 광천시장에 가서 의병을 모집하려 했으나 임정학이 만류하여 중지하고 말았다.

안창식의 모병활동 중지 후 1개월여 후인 5월 23일 그의 외사촌인 박창로가 찾아와 거의 계획을 전해주었다. 박창로 등은 이미 5월 24일 장곡에서 취회할 것을 계획하고 안창식의 동참을 권유하러 왔다. 다음날 장곡에 가니 정산에 사는 쌍취雙翠 이봉학李鳳學이 “오늘의 회합은 선달 이공렬李公烈이 잘못 지휘하여 부여와 홍산의 여러 동지들이 먼저 정혜사定慧寺에 가서 기다리고 있다.”고 전함에 6월 3일 봉수산성에서 재기할 것을 약속하였다. 6월 2일 박창로 집에서 안창식·박창로·이봉학·이세영李世永·정제기鄭濟驥·정영덕鄭盈德 등이 모여 우국시를 짓고 다시 6월 9일 청양의 장대場垈에서 거의하기로 계획을 변경했다. 그러나 6월 9일 이곳에 참석한 자는 안창식·박창로 뿐이었다. 이처럼 1895년 4~6월간에 있었던 홍주에서 모병운동은 결국 군사활동으로 발전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은 을미사변 후에 재개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같은 해 음력 9월 안창식·박창로·이세영 외에 송병직宋秉稷·조병고趙秉皐·김정하金正河·정제기 등은 의병초모와 무기수집에 관한 일을 추진시켰다. 이들이 홍주 을미의병시 주요 활동을 함은 물론이다.

이와 같이 홍주에서 의병은 을미년 4월부터 민간에서 유생들을 중심으로 그 조짐이 나타난다. 비록 즉각적인 항일의병투쟁으로 발전하지는 못하였지만, 1895년 12월 초 김복한·이설 등과 결합하여 의병항쟁으로 결실을 맺게 된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한편 위에 든 상원·안동·지평·홍주 이외에 철원지역에서 홍범도洪範圖 부대의 의병활동이 있었다. 홍범도는 후기의병 투쟁기 함경도 일대에서 포수를 거느리고 활발한 의병활동을 전개한 인물로 유명하다. 그는 1894년 철원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1930년대에 소비에트정부에 제출한 것으로 보이는 그의 이력서에 기록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1894년 철원의 죽촌竹村에서 300여 명의 무리를 모아 일본침략군과 대항”하고자 하였다. 註7) 그가 “반일 반봉건의식에 눈을 뜬 것은 갑오농민전쟁 때였음”은 이미 지적된 바 있다. 註8) 의병을 봉기한 주요 이유는 갑오변란과 동학농민전쟁의 영향이라고 생각된다. 비록 위 사실 이외의 의병투쟁 내용에 대하여 알 수 없음이 아쉬우나, 1894년에 의병봉기를 실천에 옮겼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또 한편 김세일의『소설 홍범도』에서도 “철원의 보개산에서 의병투쟁을 하였다.” 註9)라고 기록하여 위 자료의 내용을 보충해 준다.

[註 1] 신석호, 「한말 의병의 개황」,『사총』1, 고려대사학회, 1955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항일의병사』 1970 ; 윤병석, 「항일의병」,『한국사』19, 국사편찬위원회, 1976 ; 조동걸,『의병들의 항쟁』 민족문화협회, 1980 ; 이광린, 「의병의 봉기」,『한국사강좌-근대편』 일조각, 1981. ☞

[註 2] 김상기, 「한말 을미의병운동의 기점에 대한 소고-문석봉의 회덕의병을 중심으로-」,『한국민족운동사연구』 2, 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 1988 ; 김상기, 「조선말 문석봉의 유성의병」, 『역사학보』 134·135, 역사학회, 1992. ☞

[註 3] 박정수, 「下沙安公乙未倡義事實」,『독립운동사자료집』1, 350~351쪽. ☞

[註 4] 임한주,『홍양기사』 263쪽. ☞

[註 5] 안창식은 청양군 화성 출신으로 홍주의병에 참여한 유생이다. 그의 의병활동기록인『간호일기』가 그의 고손인 安璇永(현, 충남 청양군 청양읍내 거주)이 소장하고 있다(송용재 편,『홍주의병실록』 1986). ☞

[註 6] 송용재 편,『홍주의병실록』 161쪽. ☞

[註 7]『레닌기치』1989년 4월 11일 「적위병 및 붉은 빠르티잔의 이력서」 제056065호 참조(송우혜 선생 제공). ☞

[註 8] 강덕상, 「義兵大將 洪範圖の生涯」,『朝鮮獨立運動の群像』 1984. ☞

[註 9] 김세일,『소설 홍범도』 제3문학사, 1989, 106~125쪽. ☞


2. 1894년 안동의병의 봉기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공포되자 안동지역의 유림들은 항일의병을 일으켰다. 1896년 1월의 김도화金道和·권세연權世淵·이상오李尙五·권대일權玳一·김흥락金興洛·유지호柳止浩 등의 의병봉기가 그것이다. 그러나 안동지역에서의 의병은 유생 서상철 등 유림세력에 의해 이보다 1년 6개월 전인 1894년 7월에 시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서상철 등에 의한 안동기병에 대하여 주목하고 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동학농민군의 활동으로 이해하기도 하였다. 이유는 갑오년 당시 일본관리들이 항일투쟁을 전개하던 동학농민군과 구별하지 못하고 한결 같이 동학세력으로 파악한 때문으로 보여진다. 즉『구한국외교문서-일안』에 의하면 「안동동도安東東徒의 일정찰대습격日偵察隊襲擊사건과 파병소무派兵剿撫및 구호요구」와 「경상지방 동도의 소멸요구와 안동동도 서상철 격문의 정열呈閱」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서상철부대를 ‘동도’로서 파악하였다. 이것은 외무대신 김윤식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일본공사로부터 이 부대에 대한 보고를 받고 이 세력을 ‘영남동학’으로 파악했다. 註10)

일본군의 보고서에 의하면, 서상철부대를 ‘의병’이라고 호칭하고 있어 주목된다. 일본군 제5사단 중로병참감 본부에서 작성한 『진중일지陣中日誌』가 바로 그것이다. 이에 의하면



이번 불온한 원인은 안동의 서모서상철을 말함-필자주라는 자는 전에 경성에서 고관으로, 이 자는 일본은 조선에 다른 마음이 있기 때문에 의병을 일으켜 일본인을 타양打攘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사방에 격문을 발함에 기인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안동의 서모는 적의 거괴巨魁로 주의해야 한다. 註11)



라고 하여 서상철을 서울에서 고관을 지낸 이로 파악하고 있으며, 그가 일본인을 물리치고자 격문을 사방에 발하였으며, 그가 일으킨 부대를 ‘의병’이라고 일컫고 있다.

일본 언론에서도 점차 이들을 ‘위동학당僞東學黨’ 또는 ‘유사동학당類似東學黨’이라 하여 동학세력과는 구별하였다. 더욱이『동경조일신문東京朝日新聞』1894년 10월 23일 잡보란에서는 10월 17일 ‘부산통신’을 인용하여 「위동학당은 폭민이다」라는 제목하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요즘 경상·충청 2도 부근에서 일어난 위동학당혹은 유사동학당이라 칭하는 것은 일본이 청국을 토벌함을 불만으로 여겨 일어난 일종의 사대당事大黨으로서, 저 전라도를 근거로 한 진정한 동학당과는 같지 않다. 병참부에서는 단순히 이를 폭민暴民이라 간주하고 있기 때문에 전보에서 동학당 수령이라 함은 전혀 폭민의 두목임에 지나지 않는다. 註12)

여기에서 안동세력은 전라도의 동학과는 그 성격이 다름을 분명히 말하면서 이들을 폭민으로서 사대당이라고 표현하고 있어 동학과의 성격상 차이를 알려주고 있다.

이와 같이 일본의 외교문서에는 서상철을 ‘동도’로, 일본군 보고서는 ‘의병’ 등으로 엇갈린 보고를 하고 있다. 그러나 여러 자료를 종합할 때 서상철은 동학교도가 아닌 유생 의병장으로 보인다.

우선 경상도 예천 유생으로 을미의병시 예천의병장으로 추대되었던 나암羅巖 박주대朴周大는 그가 편찬한『나암수록』에서 서상철을 ‘공주유생’이라 하였다. 註13)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 역시 서상철이 유생이며 그가 이끄는 세력이 의병임을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다.



호남호서의 잘못-필자 유사儒士 거의擧義건에 대한 통문이 오다(음력 1894.7.14). 서상철 본읍예안-필자 향교에 오다. 언사가 바르고 의로움이 굳건했다. 그러나 임금의 군사 모으는 명이 없이 선비 스스로 기의起義하였으니 조정에 죄를 얻을까 두렵다(음력 1894. 7. 20). 註14)



이만도는 퇴계 이황의 후손으로 단발령 공포 후 예안에서 의병을 일으켜 그 대장이 되었으며, 경술국치에 단식하여 순사한 유학자이다. 유학자인 그 역시 서상철을 ‘유사’라 하고 있으며, 서상철이 예안향교에 나타나 주민들에게 거의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였음을 말하면서 “말이 바르고 의로움이 굳건하다.”고 하여 그의 태도에 경의를 표하고 있다. 단지 임금의 명이 없이 기의함을 염려하였다. 이와 같이 이만도의 눈을 통하여 유생인 서상철의 안동에서의 거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서상렬의 문집인『경암집敬菴集』과『대구서씨세보大丘徐氏世譜』·『장담강록長潭講錄』등에 따르면 서상철1859~1932의 자는 자유子由, 호는 경은敬殷이며, 본관은 달성으로 서울에서 태어났으나 제천의 청풍으로 이거하여 살았음이 확인된다. 그는 1860년 서성徐渻의 9대손인 호순浩淳의 장자로 태어났고, 큰집인 국보國輔의 장자로 입양되었다. 이로써 제천의병 소모장 서상렬과는 6촌간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서상렬을 따라 제천의 청풍으로 이거하여 거주하면서 화서학파의 도맥을 승계한 유중교의 문하에서 수학한 것으로 보인다. 註15) 이 사실은 유중교가 제천의 장담에서 강학을 실시한 기록인『장담강록』에 잘 나타난다. 이에 의하면 1889년 11월 하순 실시한 강회에서 서상철이『맹자』의 양혜왕편梁惠王篇소상장沼上章을 강학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때 서상철의 인적사항을 “자유子由, 경신생庚申生, 달성인達城人, 청풍거주淸風居住”라고 기록하였다. 1891년 3월 25일 강회에서도 ‘대학경일장大學經一章’을 강했다. 한편 1891년 9월 27일 유중교가 ‘주인主人’의 자격으로 실시한 향음례에도 ‘관청위觀廳位’로 참석했음이 확인된다. 註16) 이와 같이 서상철이 서상렬을 통하여 성재 유중교의 문인이 됨으로써 그의 학문적 연원이 화서학파에 닿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서상철 본인도 역시 한인석韓麟錫·이경재李罄載·한수동韓守東등 동지들과 발표한 격문에서 자신을 ‘호서충의湖西忠義 서상철’이라 표현하였다. 격문의 맨끝에서 “금월 25일 일제히 안동부의 명륜당으로 오시어 적도를 토벌할 기일을 약속해 주시면”이라고 하여 기병장소로써 안동부의 명륜당을 지정하고 있다. 1894년 동학농민군의 침입에 각 지방에서는 유생이 중심이 되어 의려를 조직하여 이들을 물리쳤음을 볼 때 동학농민군이 향교에서 기병하자고 약속할 수가 없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안동세력은 주도자 서상철이 유생이었으며 거의 장소를 향교로 정하였다. 예안향교에서 의병참여를 권유하는 모임을 하였으며, 격문에는 유교주의적 충의정신이 배어 있는 점 등으로 보아 동학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안동세력은 갑오변란과 청일전쟁 발발을 국가와 민족의 위기로 인식한 유생층이 중심이 되어, 일본군과 정부군에 저항한 반침략·반개화의 성격을 강하게 띤 의병이었다.


1. 봉기 원인과 이념

서상철이 안동에서 기병한 이유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우선 안동이 유교의 영향이 강하고 척사론에 근거한 반침략적 성격이 강한 지역이기 때문에 의병초모와 의병봉기에 유리한 것으로 생각된다. 달성서씨인 그가 안동을 중심으로 한 경상도지역이 그의 영향력이 미칠 수 있는 지역으로 생각했다. 당시 충청도지역은 동학세력이 널리 퍼져 있어 일본수비대로부터 감시받고 있었다. 따라서 산간지대이며 유학적 전통이 강한 안동지역에서 봉기를 계획한 것은 아닌가 한다.

서상철 등이 기의한 원인은 갑오변란에 대한 저항에 있었다. 그는 격문에서 기의한 원인遠因으로 임진왜란을 들고 있으며, 병자년 강제로 체결한 조약을 다음 원인으로 생각했다. 직접적인 이유는 1894년 6월 21일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을 핍박한 갑오변란에 있다고 말하였다.



우리 주상을 위협하고 백관을 핍박한 것과 호위병을 몰아내고 무기고를 약탈한 것은 신민들도 너무나 슬퍼하여 차마 말할 수가 없습니다. … 변란이 일어난 지 한 달이 지났으나 아직까지도 소문 한번 내지 못하고 조용하기만 하니 이것이 어찌 우리 열성조들이 5백년 동안 아름답게 길러온 의리라 하겠습니까. 이 삼천리 강토에서 관을 쓰고 허리띠를 두르고 사는 마을에 혈기를 가진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단 말입니까 …. 註17)



이와 같이 갑오변란이 직접적 계기가 되어 봉기한 안동의병은 국왕의 체통을 세우고 민족을 보전하고자 하는, 즉 충의정신을 기반으로 하는 존화양이론에 기병의 주요 이념이 있었다. 격문에서 볼 수 있듯이 서상철은 고종이 핍박을 당하고 민족이 누란의 위기에 처함을 통분하여 전국 8도의 충의 정신이 있는 양반유생은 물론 평민까지 모두 거의에 동참하여 왜적을 토벌할 것을 호소하였다.

한편 이들은 청나라를 이용하여 일본군을 물리치고자 하였다. 청나라 군사가 인천항에 포진하여 있고 소사에서는 청일간 전투가 벌어지고 있음에 이 기회에 기병하여 일본세력을 한반도로부터 축출하고자 했다. 반면 청에 대한 태도에는 청을 중화를 지배한 종주국으로 보면서 청을 배반할 수 없다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천하대세를 논해 보건대 대청국은 백년동안 중화를 지배한 종주국으로 우리 종사가 섬기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배반하는 것은 상서롭지 못한 일이니 어찌 의리에 밝다고 하겠습니까. … 청병 만 명이 현재 인천항에 포진하여 있고 또 소사에서 전투를 치르고 있으니, 이것은 일대 쾌거입니다. 註18)

이러한 격문의 내용을 보고 일본 언론에서는 이 세력을 ‘사대당’으로 파악했다. 이처럼 서상철의 격문을 보면 중화주의에서 탈피하지 못한 한계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청나라를 이용하여 일본세력을 물리치고자 하는 외교수단으로써 중화주의라고 볼 수 있다.


2. 봉기과정

서상철은 한인석·이경재·한수동 등과 더불어 선림점사仙林店舍에서 격문을 각지에 발송하는 것으로부터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격문은 경상도·충청도를 중심으로 널리 전파되었던 듯하다. 경상도 예천유생 박주대의『나암수록』에 격문의 내용이 실려 있으며, 예안유생 이만도 역시 8월 14일음 7월 14일 예안지역에 격문이 도착하였음을 그의『향산일기』에 기록해 놓고 있다. 이 격문을 일본군도 입수하였다. 재부산 일본총영사 실전의문室田義文은 9월 28일 이 격문을 대조大鳥 일본공사에게 보고하고, 일본공사는 이를 다시 조선정부에 보고하였다. 충청도감사 역시 이를 입수하여 중앙에 보고했다.『충청도관초』에 의하면 1894년 10월 5일음 9월 7일에 이 격문을 보고하였다. 이 격문이 언제 작성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격문이 안동과 인접해 있는 이만도의 고향인 예안에 도달한 것이 8월 14일인 것으로 보아 그때를 전후하여 작성되어 전달된 것으로 보인다.

서상철은 격문을 발송하고 직접 의병초모를 위해 각지를 순회한 것으로 보인다. 8월 20일에 예안향교에 나타나 8월 25일 안동향교에서 거의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이를 추측할 수 있다. 계획했던 8월 25일의 거사는 대구에서 파견된 200여 명의 관군에 의하여 강제로 해산되었다. 註19) 이만도는 이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7월, 음력) 25일 양暘 안동의 모임은 감영에 의해 정지되었다 한다. 註20)



안동향교에서의 거의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서상철 등은 비밀리에 동지를 초모하여 9월 초 안동 일대에 의병을 모집하여 상주의 태봉에 있는 일본병참부대를 공격 목표로 삼았다. 서상철은 청풍 일대에서 전투를 수행한 것으로 보이며, 그후 일본군의 정보 보고에 의하면 서울로 잠입한 것을 탐지되었으나 그후의 행적은 확인이 안 된다. 註21)

[註 10] 김상기,『한말의병연구』 일조각, 1997, 105~109쪽. ☞

[註 11] 제5사단 중로 병참감 본부,『陣中日誌』 1894년 9월 26일자(일본방위청 도서실자료 『제1군 일청전역 진중일지 M27-15』 142쪽). ☞

[註 12]『동경조일신문』1894년 10월 23일 「僞東學黨ハ暴民なり」. ☞

[註 13] 박주대, 「湖西忠義徐相轍布告文」,『나암수록』3책. ☞

[註 14] 이만도,『향산일기』1894년 7월 14·20일자. ☞

[註 15]『大丘徐氏世譜』 (己未原譜) 참조. ☞

[註 16]『長潭講錄』한국학중앙연구원 도서관), 1889년 11월 하순(유중교 참석), 1891년 3월 25일(유중교 참석), 1891년 9월 27일 향음례(김상기,『한말의병연구』 부록 ; 徐相烈, 「搬移堤川長潭記」,『敬菴集』권1-雜著 참조). ☞

[註 17] 국사편찬위원회, 「東學黨에 관한 件, 京第87號, 安東亂民巨魁徐相轍의 檄文入手送付」,『駐韓日本公使館記錄』; 고려대출판부, 「제3187호, 〈慶尙東徒의 剿滅要求와 安東東徒 徐相轍檄文의 呈閱〉,『舊韓國外交文書(日案 3)』. ☞

[註 18] 고려대출판부, 「제3187호, 경상동도의 초멸요구와 안동동도 서상철격문의 정열」,『구한국외교문서(일안 3)』. ☞

[註 19] 국사편찬위원회, 「京제87호」,『주한일본공사관기록』1, 1986, 123쪽. ☞

[註 20] 이만도,『향산일기』1894년 7월 25일자. ☞

[註 21] 제5사단 중로 병참감 본부,『陣中日誌』 ☞


3. 상원의병의 봉기


1. 봉기 원인과 이념

1895년 7~8월 평안도 상원군에서 병기를 든 민중이 의병을 일으켜 관아를 공격하였다. 주도자는 관리 출신으로 알려진 김원교였으며 그외에 해산군인·산포수·동학세력까지 참여하고 있었다. 김원교를 중심한 상원세력이 기병한 이유는 1894년 8월에 봉기를 시도했던 안동의병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갑오변란에 대한 저항이었다. 이들이 발표한 다음의 격문 내용은 이러한 사실을 잘 알려준다.



… 군사를 거느려 궁궐을 침범하여 임금을 핍박하고 보기寶器를 탈취하여 법제를 고치면서 재상과 장군을 물리치고 군기軍器를 탈취하여, 우리나라로 하여금 임금을 없게 하고 나라를 없게 하니, 만국 개화의 법이라는 것이 이런 것인가! 이는 개화가 아니라 곧 역적의 매국함이요 왜놈들의 멸국하려 함이라. …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가슴이 칼로 베어지는 듯하다. 이 때문에 분루를 뿌려 의사를 규합하고 잠시 이곳에 머물러 하늘의 군사를 기다려, 먼저 요적을 소탕하고 다음에 생민을 구제하여 아국을 맑게 한즉 어찌 위에서 말한 바가 그르겠는가. 註22)



이와 같은 봉기원인은 안동의병의 경우와 같은 것으로 동학농민군의 제2차 봉기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고 있음도 주지의 사실이다. 전봉준의 공초에 의하면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범한 사건에 항거하여 그 책임을 묻고자 봉기하였음을 밝혔다. 註23)

갑오변란과 그 직후 전개된 청일전쟁에 대하여 유생층과 동학농민군을 중심한 민중세력이 민족과 국가를 위기상태로 보는 시국관을 공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반침략·반개화의 이념을 실천에 옮긴 점에서 크게 평가받아 마땅하다. 반면 일본군에 의해 점령된 궁궐 안에서 개화파 관리들은 친일정권을 조직하여 민중세력을 탄압하고 일련의 개화정책을 강행해 나간 점에서 대조적이다.

상원의병의 또 다른 봉기원인으로는 갑오변란 후 친일정권에 의하여 취해진 일련의 제도개혁에 대한 반대였다. 그중에서 지방제도의 개혁과 지방병의 해산이 봉기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1895년 5월 26일양 6월 18일 정부에서는 목·부·군·현 제도를 폐지하고 전국의 지방제도를 개편하였다. 이 제도개혁은 일본인 내무고문 재등수일랑齋藤修一郞이 중심이 되어 기존의 행정구역을 가볍게 통폐합했다. 註24) 이에 따라 인정·풍속·이해관계를 같이 하는 한 마을이라는 동

질성이 없어질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이러한 제도개혁은 지방제도의 공백과 혼란을 초래하는 요인이었다. 특히 개혁을 추진하던 박영효가 반역혐의로 일본에 망명함에 개혁이 제대로 실행되지 못하고 중지되고 말았다. 이에 지방에 따라 신구제도가 혼재하여 그 폐해가 심했으며 분요紛擾 또한 많았다. 註25) 더욱이 제도개편에 따라 타의로 면직된 관리들의 불만도 비등하였다. 일본 언론에서 상원의병 봉기를 ‘구관리의 실로失路와 실망에 분기奮起’ 註26)했다고 기록하고 있음은 바로 이를 말한다고 하겠다.

다음에 지방병 해산으로 실직된 지방군인이 대거 이 상원의병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재령군수의 보고에서 “적당 중에 평양부 해산 병정 많다.” 註27)고 지적하고 있음은 이를 말해준다. 지방병 해산은 본래 1895년 윤 5월 20일 실시하려 했으나 지방병 반란을 염려하여 일시 연기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7월 15일양 9월 3일 결국 해산시켰다. 일본 언론에서도 이를 무모한 경거라고 다음과 같이 염려하였다.



중앙정부의 위망威望은 거의 경성 문밖을 넘어 일보도 지방에 미치지 못하고 비도匪徒 지방에 산만散滿하여 오직 폭발의 시기만을 엿본다고 하는 위급한 때에 당하여 갑자기 종래의 지방병을 해방하여 이에 대신할 신병제도 아직 정비되지 않았는데 만약 해방병사가 하루아침에 직업을 잃은 원한을 정부에 돌리고 혹은 목전의 기갈에 몰려 난민과 결합하여 각지에서 폭발하기에 이른다면 지금의 조선정부라는 것은 여하히 이를 진무할 것인가. … 지방병 해산은 무모한 경거輕擧이다. 註28)

결국 7월 15일 강제로 해산된 평양부 소속의 구군인들이 하루아침에 직업을 잃고 정부와 일제에 그 원한을 품게 되었다. 이때 김원교세력이 자신의 세력권이라 할 수 있는 상원에서 기병함에 상원으로 이동하여 합류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7월 22일 상원관아를 공격하는데 산포수세력과 함께 주요 전투요원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김원교 등이 상원의병을 봉기한 이유는 무엇인가. 아울러 이들이 갖고 있던 의식은 어떠한 것이었으며, 지향한 사회체제는 어떤 모습이었는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이들은 친일적인 개화정책을 비판하였다. 이들은 격문에서



지금 왜놈의 소위 개화라는 것은 이를 개화라 말할 수 있는가. 소위 개화라는 것은 문물을 열고 무리를 순화시켜 피아 서로 기쁘게 하여 본래 서로 잔해함이 없게 하는 것이거늘, … 우리나라로 하여금 임금을 없게 하고 나라를 없게 하니, 만국 개화의 법이라는 것이 이런 것인가! 이는 개화가 아니라 곧 역적의 매국함이요 왜놈들의 멸국滅國하려 함이라. 註29)



라고 하여 개화를 ‘문물을 열고 무리를 순화시켜 피아 서로 기쁘게 하여 본래 서로 잔해함이 없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이 점에서 처음부터 개화를 전면 부정하며 봉건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성향이 강한 남부지역 유생의 태도와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의 개화를 빙자한 침략정책을 예리하게 비판하면서 관리들의 개화정책을 매국행위로 파악할 만큼 현실 상황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이들은 개화파 관리와 일본세력을 구축하기 위해 봉기하였다. 이들은 “한성 13만 가구 중에 한 명의 충신도 없는 것”을 한탄하

면서 자신들이 충신이 되고자 자처하였다. 이들은 임금을 모시는 신하들이 오히려 일본의 신하가 되어 비천한 생명을 연명해 감을 통탄했다. 또한 이들은 관리집단과 일본군을 ‘요적夭敵’이라 표현하면서 이 요적을 물리쳐 백성을 도탄에서 구제하고 국가와 민족을 굳건하게 함을 투쟁의 목표로 삼았다. 단 이들이 지향했던 사회의 모습에 대하여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그것은 요적을 소탕하는 것이 우선 큰 과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격문에서



먼저 요적을 소탕하고 다음에 생민을 구제하여 아국을 맑게 한즉 어찌 위에서 말한 바가 그르겠는가. 註30)



라고 하고 있음을 보아 적어도 백성이 중심이 되는, 그리고 백성을 위한 사회의 모습을 그린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한편 이들은 청국의 군사를 ‘하늘의 군사’ 또는 ‘거가車駕’라고 표현하는 등 사대관을 탈피하지 못한 한계를 지닌다. 격문에서도



이 때문에 분루를 뿌려 의사를 규합하고 잠시 이곳에 머물러 하늘의 군사를 기다려 … 이제 웅병 수백이 있으나 보잘 것 없는 소졸로 대적할 수 없으니 오로지 거가를 기다려 자웅을 겨루리라. 註31)



고 청국 군인을 ‘하늘의 군사’, ‘거가’라고 부르면서 이들의 원조를 바라고 있다. 해주관찰사도 이 사실을 입수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군부에 보낸 보고서에서 상원의병을 청국의 명을 받은 ‘청병淸兵의 전구前驅’라 보고한 사실에서 알 수 있다. 註32)

이와 같은 청국에 대한 태도는 안동의병의 경우에서도 나타났지만, 을미의병 이후에도 유림들이 청국 군사의 원조를 받아서라도 나라의 명맥을 연장하고자 청국에 호소하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그들의 태도는 의병세력의 취약성을 노출시키는 결과로 귀결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공동의 피해자인 청국의 힘을 빌어서라도 외세를 축출하고자 하는 강렬한 민족의식의 소산이라 여겨진다. 이를 청에 대한 사대라기보다는 외세를 이용하여 외세를 물리치고자 하는 외교정책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2. 참여세력과 봉기과정

1) 참여세력

상원의병의 의병장은 김원교이다. 그는 상원군수보다 높은 지위에 있던 관리 출신으로서 상원 일대에서 세력이 있었던 자라고 한다. 그러나 그의 가계나 학통은 자세하지 않다. 김원교가 이끄는 상원세력이 상원관아를 공격하는데 일반 병사로서 참가한 집단에는 평양부에서 해산된 지방군인과 산포수·동학농민군 등이 있다.

『동경조일신문』1895년 10월 2일자에서 “적당 중에 평양부 해산병정 있다.”고 함은 이를 말한다.『시사신보』에서도 “적당 중에 퇴병이 많다.”고 보도하였는데, 이 ‘퇴병’이 곧 해산된 군인으로 보인다.

1895년 5월 기존의 도·목·부의 지방제도를 23부 337군제로 개편하였다. 지방제도가 개편되면서 1895년 7월 25일양 9월 3일 지방병도 강

제로 해산되었다. 이들이 실직에 불만을 품고 관리집단에 항거하여 의병에 가담한 것이다. 산포수 참여는 외무아문의『외기』에서



지난번 군부에서 해서적정海西賊情을 기록하여 보냈는데 퇴병 및 산포수가 무리를 이루어 장수산성에 웅거하여 청병의 전구前驅라 성언聲言하니 지방제도가 정해지지 않은 이때에 진실로 큰 걱정이다. 註33)



라 하여 퇴병 외에 산포수가 참여하였음을 알려준다. 註34) 이들은 을미의병 이후에도 의병세력에 합류하여 전투요원으로서 그 활동이 두드러졌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산포수에 대한 연구는 아직 부족하여 그 실체를 밝히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들은 정부의 탐학에 눌려 지내던 하층민으로 자신들의 분을 풀고 봉건사회를 타파하여 보다 평등사회를 지향하고자 의병에 참여하는 계기였다. 산포수 집단은 동학농민군과 의병에 모두 참가한 사실에 근거하여 용병적인 성격이 강한 집단으로 파악하기도 하였다. 오히려 이 집단은 반봉건적 성격이 강한 평민 집단으로 보는 것이 어떤가 한다. 을미의병이 거의 해산된 1896년 6월 정부에서는 지방의 각군에 포수를 설치하는 법령을 시행했다. 이는 종래의 사포수를 관포수로 전환시켜 반봉건 민중세력의 저항을 저지시키려는 의도에서 시작되었다.

동학농민들은 반침략과 제세구민을 목표로 1894년에 봉건세력과 일제의 침략에 항쟁하였으나 결국 이 세력의 탄압에 의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동학세력은 각지에 은둔해 있었으며 상원의병의 동참요청을 수락하여 합류하였다. 이들은 상원세력이 재령의 장수산성을 점거한

이후에 동참했다. 이러한 사실은 상원봉기가 동학세력에 의해 시작된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한다. 김원교 등이 상원군에서 봉기를 개시한 후 황해도 수안·봉산·서흥·재령 등지를 경유하여 장수산성에 입성하면서 인근의 동학농민들에게 격문을 보내어 의병세력에 참여할 것을 요청하였다. 다음과 같은 안악군수와 재령군수의 보고 내용은 이를 분명하게 알려준다.



(안악군수 보고) 장수산에 도착하는 도중에 지난 겨울 동학당에 관여했던 자를 결집하여 산에 이른 자가 다수라 한다. 註35)

(재령군수 보고) 적당 중에 평양부 해산병정 있고, 그 부근의 동도괴수를 초집하다. 군비群匪측에서 향응하여 포성이 수십 리에 들린다. 註36)



장수산성에 입성한 대표적인 동학농민은 임종현林宗鉉·신석만辛錫滿·양영석梁永錫 등이었다. 임종현은 황해도 일대에서 활약한 동학접주이다. 註37) 그는 1894년 10월 농민전쟁에서 패퇴하여 해주성에 투항하였다. 해주부에서는 동학군병사는 모두 해방시켰으나 접주인 그는 성재식成載植·이용선李容善과 함께 투옥했다. 그가 언제 석방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김원교 세력의 요청에 평산에서 동학농민 80여 명을 모아 장수산성에 입성한 것으로 보인다. 신석만 역시 봉산군 봉의포鳳義包의 접주로서 각읍에 격문을 보내고 자신 역시 장수산성에 들어갔다. 양영석도 동학농민으로 재령의 하성방下聖坊 수동포壽東包 소속으로 서북로 화포영장火包營將이었다. 신석만이 그에게 격문을 보내어 1895년 9월 23일음 8월 5일 기포할 것을 전하였다.

이와 같은 동학세력 외에 평산군 북면 산성山城의 이중칠李仲七과 남면南面 궁위弓位의 오돌길吳突吉 등도 무리를 모아 봉기하여 장수산성 세력에 호응하였다. 이들은 동학이 아닌 일반 민중세력으로 보인다. 이는 같은 자료에서 임종현 등은 분명히 동학교도임을 말하면서 이들에 대하여는 비도라고 분리시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수산성에 입성한 세력 중에 여성이 포함되어 있음이 주목된다. 해주관찰사가 9월 22일음 8월 4일군부에 보고한 바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여성 1명이 있는데 대단히 힘이 강하다고 되어 있다.



적의 숫자는 총 82명으로 모두 백의를 입었다. 영장營將 1명은 아주 용감하여 홀로 진위鎭衛에 있어 잡인을 금했다. 또 여인 1명이 있어 역시 크게 용력이 있다 한다. 註38)



이와 같이 비록 봉기의 기치를 든 것은 관리 출신의 김원교이었지만, 봉기에 참여한 계층은 해산군인·동학교도·산포수·여성 등으로 상호 이념체계가 다른 여러 계층이 반침략·반개화를 공동의 투쟁목표로 결합하였다. 특히 여성과 동학교도가 참여한 것은 상원의병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유림세력에 주도된 을미의병을 중심한 다른 의병의 성격과 구별되는 것으로 보다 민중적 성격이 강함을 알려 준다. 갑오의병의 또 다른 사례인 안동의병의 경우와 달리 상원의병은 특히 민중적 성격을 띠었다. 이는 평안도·황해도라는 다분히 지역적 특성에 기인한다. 이곳은 이남지역에 비하여 유림의 기반이 약하였으며, 그 결과 기독교를 중심한 서학을 일찍 받아들여 평등사상이 비교적 널리 전파됨에서 기인하였다. 註39)


2) 봉기과정

(1) 상원관아 공격

상원의병의 의병장은 ‘상원군수보다 높은 직위를 역임한’ 김원교라는 전직관리였다. 그는 갑오변란과 그후 개화정책의 일환으로 취해진 일련의 제도개혁에 반대하여 기의하였다. 그가 왜 상원에서 봉기하였는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일본 언론에서 그를 ‘상원지역에서 세력이 있는 자’라고 보도하고 있듯이 아마도 상원지역이 그의 연고지였던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는 평양부에서 강제로 해산되어 실의에 빠져 있던 군인들과 하층민으로 봉건관리집단의 탐학에 시달림을 받아오던 산포수 집단과의 연합에 성공함으로써 항일의병투쟁을 본격적으로 전개할 수 있었다. 이 연합세력이 1895년 7월 22일양 9월 10일 밤에 상원관아를 공격한 것으로부터 상원의병은 시작되었다. 이 봉기에 참여한 인원수는 자료에 따라 다르나 상원관아를 공격한 수는 100~200여 명이며, 그후 5십봉에 둔집한 수는 600여 명에 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관아를 공격할 때 40여 명은 서양총을 휴대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들이 해산군인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들은 관아를 공격하여 무기·탄약·미곡·현금 등을 탈취하고 상원에서 동남쪽으로 약 50리 되는 5십봉이라고 하는 산에 둔집하였다.

평양부 서리관찰사는 곧 평양에 있는 일본식 교육을 받은 제3대대에 출병을 요청하였다. 제3대대는 이를 군부에 보고하여 군부로부터 7월 25일 출병명령을 받고 정병 100여 명으로 1개 소대를 편성하여 상원을 향해 출발하였다. 이 부대는 상원에 도착하기 이전에 도망병이 발생하

는 등 전투도 못해 보고 회군하고 말았다. 일본 언론에서는 이 부대를 ‘훈련이 부족한 겁장이’라고 혹평하고 있지만, 결과적으로 이들은 동료들이 포함되어 있는 상원의병과 전투를 회피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상원군수 역시 어은동에 있는 일본 병참수비대에 군사를 요청하였다. 이에 고정高井 병참감은 7월 24일 오후 3시 상원의병의 활동상황과 상원군수의 군사요청 사실을 삼포三浦 공사에게 보고하였다. 삼포는 군대를 출병시키는 것은 본국의 명령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우선 정찰대를 파견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평양에 있는 일본수비대에서는 정찰을 위하여 상원지역에 군대를 파견했다. 정부에서도 7월 29일양 9월 17일 각의를 열어 서울에 있는 훈련대 중의 1개 소대 파견을 결정하였다. 이 부대에 일본인 장교 1명도 참모로서 동행하도록 했다. 註40)


(2) 장수산성 점거

정부군과 일본군의 공격 소식에 상원의병은 황해도 재령군에 소재한 장수산성을 향하여 이동하였다. 이때 병력수는 앞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187명이었다. 7월 26일양 9월 14일 밤 상원을 출발하여 황해도 수안 방면으로 향했다. 27일 수안의 신적동에 도착하고, 28일에는 서흥령과 동현령을 넘어 황주 양촌에까지 진출하였다. 이때 소 5두를 빌려 무기와 재물을 날랐으며 산을 넘은 후 소를 돌려주었다.

황주 일대에서 일본군과 전투가 있었던 듯하다. 해주관찰사 이명선李鳴善이 군부에 보고한 바에 의하면 평양의 훈련대 병력과 일본정찰대의 공격소식에 의병부대는 상원을 떠나 황주지역을 이동하고 있을 때 일본정찰대와 전투가 벌어져 의병부대가 패하였다.

의병세력이 봉산군을 통과하여 장수산성에 도착한 것은 1895년 7월

30일양 9월 18일 석양 무렵이었다. 이때 입성한 무리는 80여 명이었다. 그런데 밤에 추종해 들어간 자는 셀 수 없다고 해주관찰사는 보고하였다. 이들은 흰옷을 입고 ‘청병의 전구’라 자칭하며 서양총 200여 정을 모아 말에 싣고 농성을 하기도 하였다. 장수산성은 해발 711m의 장수산에 고구려시대 축성한 산성으로 둘레 8,915척, 높이 9척이다. 산이 돌산으로 길이 막히고 험한 요새로 성 안에는 7개의 우물과 군창이 있었다. 이 성은 해주와 80리 떨어진 지점에 있어 해주 공격에 전략상 요충지였다. 註41)

그러면 이들은 상원에서 4일간의 장정을 거쳐 해주 방면으로 이동한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의병부대는 일본군과 정부군의 공격소식에 5십봉은 수비하기가 곤란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의 말한 바에 의하면 일본군 공격소식에 이곳은 머물 곳이 못 되니 속히 해주를 점령함만 못하다고 하며 총기 재물을 소 5두에 싣고 처자를 데리고 떠났다 함. 註42)



또한 이들은 평양에는 제3대대와 일본수비대가 주둔하고 있어 점령하기에 쉽지 않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 결과 비록 거리상으로 멀지만 산을 넘어 해주를 향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해주는 서해와 인접해 중국과 연결도 쉬울 것으로 판단하였다. 격문에 ‘청병의 전구’로 청의 군사를 기다린다는 언급이 있으며 봉산군의 동학접주 신석만이 동학농민군에게 보낸 격문에서 청병을 영접하기 위하여 장수산성에서 집결할 것을 지시했다. 물론 이들이 청과 접촉을


상원의병 이동항쟁도


하였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위와 같은 내용은 이들이 해주로 향함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들이 해주를 향한 또 다른 이유 중에 황해도 일대가 청일전쟁 중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었으며, 1895년 초까지 동학농민전쟁이 활발히 전개되었던 지역이었음을 들 수 있다. 상원세력은 이곳을 통과하면서 민중세력을 의병세력에 합류시켜 군세를 강화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상원세력이 장수산성에 들어가기 전 봉산·재령 등지를 통과하면서 그 지역의 동학접주들에게 연락을 취하여 이 거의에 참여할 것을 요청한 사실은 바로 이를 말해준다. 동학교도들은 이와 같은 의병의 요청에 바로 포성을 울리면서 향응하였으며 상호연락을 취하여 장수산성에 들어갔다.

우선 봉산군에서 봉의포의 접주인 신석만은 각포에 경통敬通 격문을 보내어 8월 5일양 9월 23일 내에 장수산성에서 기포하기로 하고 그는 먼저 산성에 들어갔다. 경통은 다음과 같다. 註43)

敬 通

右今爲敬通事 黃平兩道道人 淸兵迎接次 今初五日內 齊會于長壽山城 趨期起包入于山城爲乎乙事.

壽東包 西北路火包都營將 梁永錫氏前

年 月 日 鳳義包 接主 辛



8월 4일 해주관찰사의 보고에 의하면 8월 2일 약 100명의 적이 청홍색 기와 종고를 들고 산성에 들어갔다고 한다. 이들이 바로 동학세력이 아닌가 한다. 또한 8월 1일 보고에 의하면 평산군의 북면 안성의 이중칠과 남면 궁위의 오돌길 등이 무리를 결집시키고 있으며, 석현 등지에서는 동학접주 임종현이 무리 80여 명을 이끌고 봉산군의 도덕탄을 지나 남으로 향했다고 한다. 이들 역시 신석만세력과 마찬가지로 장수산상을 향해 진격한 것으로 보인다. 註44)

이와 같이 황해도 일대에서 동학교도를 중심한 민중세력을 규합한 김원교는 8월 6일양 9월 24일 ‘평안도 창의사 김’이란 이름으로 격문을 발표하여 ‘요적’과 결전할 것을 다짐하였으니 일종의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이 격문은 일본의『동경조일신문』10월 8일자,『동경일일신문』10월 9일자,『시사신보』10월 17일자 등에 모두 게재되었다. 註45)

김원교는 격문과 함께 산포수의 참여를 호소하는 방문을 발표하여 산포수의 참여를 유도하기도 하였다. 註46) 격문을 발표한 후 의병부대는 8월 10일 제천의식을 거행하고 8월 11일 바로 해주부를 공격할 계획이었다.

이와 같은 의병부대의 움직임에 해주관찰사는 군부에 무기를 청구하였으며, 군부에서는 강화부에 있는 무기 150정을 해주부에 보내도록 즉시 조치하였다. 외무대신 김윤식은 일본공사 삼포三浦에게 공문을 보내었다. 결국 해주부의 관군과 일본군이 연합하여 8월 12일양 9월 30일 장수산성을 포위하고 방화하는 가운데 공격을 감행하여 의병부대는 평안도 방면으로 패주하고 말았다. 이처럼 상원의병은 상원에서 4일간을 행군하여 장수산성에 입성한 지 12일 만에 다시 평안도지역으로 패산하였다. 김원교 등 주도자의 행방을 비롯하여 그후의 사정은 잘 알 수 없다.

의병부대를 패주시킨 후, 일본공사는 황주 일본병참부대의 보고내용을 근거로 8월 15일양 10월 3일 외무대신 김윤식에게 의병세력이 후퇴한 사실을 보고하였다. 註47) 또한 같은 날 삼포 공사는 위 사실을 일본외무대신 서원사西園寺에게 보고했다. 이는 일본의 한국정세에 대한 높은 관심도를 보여주는 증좌이다.

이와 같이 7월 22일 김원교를 중심한 유림집단이 주도하고 해산군인·산포수·동학교도들이 참가하여 상원관아의 공격으로부터 시작된 상원의병은 20일만에 결국 패산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들은 제도의 원상회복과 갑오변란이라는 일제 침략에 민중이 저항하여 나라의 위기를 구하고자 하였다. 이 항쟁이 을미의병으로 이어져 이후의 항일의병의 연원이 되고 있는 점에서 의의가 매우 크다.

[註 22]『동경조일신문』1895년 10월 8일 「長壽山暴匪檄文」, 1895년 10월 9일 「祥原の賊」 ;『시사신보』1895년 10월 17일 「黃海道匪徒の檄文」. ☞

[註 23] 국사편찬위원회, 「全琫準供草」,『동학난기록』하, 529쪽. 

문 : 다시 기포한 이유는? 

답 : 그후 들은즉, 귀국이 개화를 칭하고 처음부터 스스로 한마디 말도 없이 민간에 전포하고, 격서도 없이 병사를 거느려 도성에 들어가 밤중에 왕궁을 격파하여 주상을 놀라게 한 때문에 초야의 사민들이 충군애국의 마음으로 강개하지 않을 수 없어 의리를 규합하고 일본인과 접전하여 이 일을 묻고자 하였다. ☞

[註 24]『동경조일신문』1895년 1월 23일 「地方制度の改革」. ☞

[註 25]『동경조일신문』1895년 9월 22일 「地方兵の解放」. ☞

[註 26]『동경조일신문』1895년 9월 25일 「地方騷亂の情勢」. ☞

[註 27]『시사신보』1895년 10월 8일 「匪徒動靜の詳況」. ☞

[註 28]『동경조일신문』1895년 9월 22일 「地方兵の解放」. ☞

[註 29]『동경조일신문』1895년 10월 8일 「長壽山暴匪檄文」. ☞

[註 30]『동경조일신문』1895년 10월 8일 「장수산폭격비문」. ☞

[註 31]『동경조일신문』1895년 10월 8일 「장수산폭격비문」. ☞

[註 32]『동경조일신문』1895년 10월 8일 「長壽山亂徒」. ☞

[註 33] 외무아문,『外記』2, 1895년 8월 초9일자. ☞

[註 34] 국사편찬위원회, 「榜山砲文」,『주한일본공사관기록』4, 477~478쪽. ☞

[註 35]『시사신보』1895년 10월 8일 「匪徒動靜の詳況」. ☞

[註 36]『동경조일신문』1895년 10월 2일 「祥原暴徒の續報」. ☞

[註 37]『한국민중사자료대계』 1, 「임종현의 통문」, 545쪽. ☞

[註 38]『동경조일신문』 1895년 10월 8일 「長壽山の亂徒」. ☞

[註 39] 김상기,『한말의병연구』 123쪽. ☞

[註 40] 김상기,『한말의병연구』 127~129쪽. ☞

[註 41] 김상기,『한말의병연구』 130쪽. ☞

[註 42] 국사편찬위원회,『주한일본공사관기록』1895년 9월 19일 ;『시사신보』1895년 10월 1일 「祥原の暴徒別報」. ☞

[註 43]『동경조일신문』1895년 10월 8일 「長壽山の亂徒」. ☞

[註 44] 이강오의 『한국신흥종교사』에 의하면, 임종현이 청림교도로 나온다. ☞

[註 45] 상원의병의 격문을 앞에서 일부 인용하였으나, 여기에 이를 번역하여 참고로 삼기로 한다. 

“듣건대 갖옷을 갖추면 옷깃이 바르게 되는 것이니 옷깃이 바른 즉 두발이 가지런해진다하니, 악을 베는데 근본에까지 미치게 할 것이니 근본을 벤즉 악이 없어진다. 지금 왜놈의 개화라는 것은 이를 기쁘게 하여 본래 서로 잔해함이 없게 하는 것이거늘 군사를 거느려 궁궐을 침범하여 임금을 핍박하고 寶器를 탈취하고 법제를 고치면서 재상과 장군을 물리치고 軍器를 탈취하여 우리나라로 하여금 임금을 없게 하고 나라를 없게 하니, 만국 개화의 법이라는 것이 이런 것인가! 이는 개화가 아니라 곧 역적의 매국함이요 왜놈들의 멸국하려 함이라. 성인의 말씀에 열집되는 작은 고을에도 반드시 충신한 이가 있다고 하였는데 지금 살펴보건대 성인이 우리를 속이겠는가. 한성 13만 가구 중에 한 명의 충신한 이도 없는 것은 물론 5백년간을 대대로 벼슬하면서 무궁한 천은을 받아온 자들이, 반 개의 간을 뿌리고 쓸개를 드러내어 나라를 위하여 분을 씻으려 하는 자가 없이, 도리어 왜놈들에게 머리를 숙이며 역적들 에게 아첨하여 붙어서 애걸복걸하여 한자리를 얻어서 당장의 비천한 생명을 연장하게 되 면 스스로 잘한 일이라들 하니, 箕子가 다른 나라의 신복이 되지 않는다는 의리와, 초나라 장군의 斷頭 將軍이 될지언정 降將軍이 될 수 없다는 기개가 없음을 어찌 이런 양반이라는 자들에게 책망할 것이랴.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가슴이 칼로 베어지는 듯하다. 이 때문에 분루를 뿌려 의사를 규합하고 잠시 이곳에 머물러 하늘의 군사(淸兵)를 기다려 먼저 요적을 소탕하고 다음에 생민을 구제하여 아국을 맑게 한즉 어찌 위에서 말한 바가 그르겠는가. 국운이 불행하여 이 의로움으로 적을 토벌한 의거가 있음에 蘇雙의 두루 구함이 있지 않고 吳桂가 들어옴에 미치니 美人(임금)을 바라봄에 어찌 통곡 단장하지 않겠는가. 지금 뜨거운 물과 불에 빠질 위기에 처하여 나라를 위하여 산 말을 바치고 싸움터에 주검을 남기고자 하니 위로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고 아래로 殷의 比干의 충정에 떨어지지 않는다. 몸이 재상의 자리에 거하여 나라의 존망을 뜬구름같이 보고 의로움의 유무를 헌신짝으로 보아 오합의 무리를 모아 의사를 토벌하고자 하니 왜놈에게는 충신이언마는 국가에 있어 장차 무엇이 되려고 하는가. 단지 살아서 국가의 역신이 될 뿐 아니라 죽어서 선조의 역손이 될지니 얼마나 개탄스런가. 이제 웅병 수백이 있으나 보잘 것 없는 소졸로 대적할 수 없으니 오로지 車駕를 기다려 자웅을 겨루리라. 

을미 8월 초 6일 平安道 彰義士 金 ☞

[註 46] 국사편찬위원회, 「榜山砲文」,『주한일본공사관기록』4, 477~478쪽. ☞

[註 47] 고려대출판부, 「제3828호, 海州官兵의 長壽山城賊擊退通報」,『구한국외교문서(일안 3)』. ☞


4. 유성의병의 전개


1895년 8월 20일 명성왕후가 일제에 의해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발생하였다. 일제의 만행에 조선인의 분노는 드디어 폭발하기에 이르렀다. 더구나 친일내각과 일제가 이 사건에 대해 책임을 부인하고 명성왕후에 대해 폐비조치를 내리자, 분노한 국민감정이 폭발하였다. 폐비조칙이 공포된 1895년 8월 23일부터 9월 사이에 창의소 고시문이나 복수토적을 외치는 고시문, 혹은 왕비시해의 주범이 일본인이라는 내용의 각종 방들이 서울 도성 안에 나붙고, 지방 각지에서 의병의 조짐이 거세어져 갔다.

드디어 을미사변이 일어난 지 1개월이 안되어 ‘국수보복’을 기치로 한 항일의병이 유성에서 문석봉이 기치를 들면서 시작되었다. 그동안 문석봉文錫鳳의 의병활동에 관하여는 실행에 옮겨지지 못한 의병의 전단계에 불과한 것으로 취급되기도 하였다. 최근 문석봉의 구체적인 항일투쟁 사실을 실증하고 아울러 봉기 장소도『매천야록』에 기록된 ‘보은’이 아닌 대전의 유성이었음이 밝혀졌다. 註48)


1. 의병진의 결성

문석봉1851~1896은 자 이필而弼, 호는 의산義山, 본관은 남평이다. 그는 경북 현풍 출신으로 무과에 급제하고 1894년 진잠현감으로 부임하면서 충청지역과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해 11월에는 양호소모사로 임명되어 동학농민군을 진압하여 인근의 유림들이 선정비를 세워주었다. 그는 1895년 2월 ‘토왜죄’로 공주부에 구속되었다. 공주의 관병에게 신식훈련을 시킨 것은 의병을 일으켜 ‘토왜’하려 한다는 고발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함께 체포된 인물로는 전도사前都事 조상희趙相熙와 공주의 선비 김문주金文柱, 연산의 선비 조익중趙益仲 등이었다. 이중에 김문주는 문석봉이 을미사변 직후 유성에서 거의할 때 선봉장을 맡았던 인물이다. 그는 6월 21일 석방되기는 하였으나 이는 그가 본격적인 의병투쟁을 전개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문석봉은 석방된 지 조금 지난 8월에 명성왕후의 시해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는 이 사건을 ‘천고에 없는 강상綱常의 대변’이라고 통분하였으며 국모의 복수를 위하여 의병을 일으켜 흉적을 토벌하고자 하였다. 그는 의병을 일으키기 전인 9월 초 서울에 올라가 을미사변 직후의 분위기를 파악하였다. 이는 여러 인사들을 만나 봉기의 뜻을 밝히고 동조세력을 확보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 송근수宋近洙·신응조申應朝는 적극적으로 문석봉의 뜻에 찬동했다. 민영환 역시 문석봉의 뜻을 듣고 환도 한 자루를 풀어주며 격려했다. 註49)

한편 을미사변시 훈련대 제2대대장으로 일본군의 만행을 방조한 우범선禹範善을 살해한 인물로 잘 알려진 고영근高永根과도 서울에서 만난 것으로 보인다. 고영근은 문석봉이 봉기하기 직전인 9월 13일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어 거의를 격려하였다.



신민臣民이 녹祿을 받지 못함에 이런 대변大變을 만나니 너른 하늘 아래 누가 통곡치 않으리오. 지난번 뵙고 난 후 혼자 원통함만 품고 있을 뿐이더니 이번 편지에 계율의 뜻이 강개하고 명확하니 한편으로 무릎을 칠듯이 탄복할 뿐입니다. 성은을 모두 같이 받고 감히 명령을 따르지 않음은 하나는 국모의 원수를 갚고자 함이요, 또 하나는 신민의 원한을 설욕하고자 함입니다. 원컨대 영감께서는 현명하고 어진 선비를 모아 거의의 참뜻을 믿게 하여 대사大事를 이루기를 축원합니다. 註50)



과천의 집에서 편지를 받은 문석봉은 9월 18일양 11월 4일 충청도 유성으로 내려가 의기를 들었다. 註51) 죽음을 결심하고 국모시해 1개월 후에 결연히 ‘국수보복’을 위해 몸을 일으킨 것이다. 註52) 문석봉은 이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토로하고 있다.



… 국모조변國母遭變 후에 5백년 식록食祿을 받은 교목세신喬木世臣이 백천이 아니건마는 어찌 한두 명의 동지도 없단 말인가. 한 달을 기다려도 한 사람도 창기하는 자 없어… 사람이 한 번 죽을 것을 판단하기는 진실로 어려우니 밤낮으로 생각하고 헤아려 마음속에 ‘사死’자字를 결심하고 의심이 없은 연후에 처자와 영결하고 기신起身하였다. 註53)


문석봉에게 의병을 권유한 고영근의 편지

 

문석봉은 9월 18일 창의한 후 대장이 되어 유성의병의 지휘부를 다음과 같이 조직하였다. 註54)



선봉先鋒 : 김문주金文柱

중군中軍 : 오형덕吳亨德

군향軍餉 : 송도순宋道淳



김문주는 공주 출신의 유학幼學으로 문석봉과는 소모군 때부터 참모사로 동고동락했으며, 지난 2월 1차 의병 때도 같이 거의를 공모하여 체포되었던 동지였다. 오형덕은 옥천 출신의 유학으로 역시 문석봉이 양호소모사로 재직시 휘하에서 중군장으로 참여하였던 인물이다. 여기에 회덕의 사족 송도순이 군향으로 참여했다. 송도순1858~1918은 송준길宋浚吉의 10대손으로 고종 11년1874 증광문과에 급제한 후 1893년 이조참판을 역임하였으며, 1894년 봄 사헌부 대사헌과 승정원 도승지에 제수되었으나 이를 받지 않고 낙향한 인물이다. 註55) 그는 의병진의 군량을 책임진 것이다. 그의 참여는 송시열의 8대손으로 전 좌의정인 송근수의 참여와 함께 회덕송씨들의 문석봉의병에 대한 재정적 지원과 군사활동에 대한 묵인 또는 협조의 사실을 의미한다.

한편 프랑스 외방전교회 조선교구장 뮈텔주교Mutel, Gustav charles Marie, 1854~1933도 이들의 활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자신의 일기에 기록하고 있어 신빙성을 높여준다.



문석봉을 도운 사람들의 선두에는 두 송씨가 있는데, 한 명은 송정승이고, 다른 하나는 송참판이라 불린다. 註56)



송도순의 후손이 소장하고 있는 자료 중에서 이를 증거할 수 있는 직접적인 자료는 찾을 수 없으나,『은진송씨문헌록』에서 송도순이 외가외조부: 민영달인 여흥에서 태어났으며, 註57) “명성황후가 해를 입자 곧 통분痛憤하고 창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으며 원수를 토벌하여 복수하지 못하였음을 한탄하였다.” 註58)라고 기록한 사실에서 그의 참여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을사늑약 체결과 경술국치에 송근수의 조카인 송병선宋秉璿·병순秉珣 형제가 순국한 사실로 보아 회덕지역 인사들의 문석봉의병과 관련 가능성은 매우 높다. 이들 외에 문석봉의병에 참여한 인사로 진사 김종률金鍾律과 영장 최은동崔殷東, 그리고 김성의金成義 등이 확인된다.

김성의1861~1925는 병자호란 때 척화파인 송애松崖 김경여의 후손으로 문석봉의 제의에 의병에 참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중심이 되어 회덕·대전·진잠·유성일대에서 의병을 초모하여 유성에서 기병하기에 이르렀다. 송병관이 찬한 「김성의묘갈명」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문석봉과 김성의의 관계를 알려주고 있다.



오호라. 이는 고종사랑궁내부주사故從仕郞宮內府主事송운금공松雲金公의 묘이다. 공이 갑자甲子(1924)년 중국으로 가 을축乙丑년,1925 7월 17일 봉천에서 병사하였다. … 이에 앞서 을미년 국모가 시해당하는 ‘곤령坤寧의 변變’이 일어나 흉역凶逆이 내외에 있어 한 사람도 감히 토적복수를 말하는 이가 없더니 문석봉이 소모召募의 명을 몰래 띠고 와서 공의 형제들이 지절志節이 있음을 알고 와서 거의를 모의하였다. 드디어 향정鄕丁을 규합하여 목숨을 돌보지 않고 원수를 갚을 것을 맹서했으나, 정비整備가 되기 전에 적신賊臣이 임금의 령令을 빙자하여 의병을 비적이라 하여 체포하고 해산시켰으니 원통하다. 註59)



이에 의하면 문석봉이 거의하기 이전 김성의를 찾아왔던 것으로 보인다. 김성의는 그와 함께 의병을 모아 의병투쟁을 전개하였으나 정부군에 의해 부대가 해산되고 말았다. 김성의는 피신하여 대전 상괴리에서 은거생활을 하였으며, 1924년 중국으로 일제의 감시를 피해갔으나 봉천에서 병사하였다. 그의 시신은 죽은 지 15년만인 1940년에 고향으로 모셔졌다. 한편 김성의의 둘째 아들인 김직원金直源과 당질인 김정철金正哲은 대전 인동시장에서의 3·1운동을 주도하였다. 註60)

의병의 일반병사층 참여는 확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양호소모사로 근무할 때 휘하에 있던 인물들이 다수 참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가 옥중에서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충청도에 가서 사민과 함께 거의하여”라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위에 든 선비들 외에 기타 일반 민들이 참여한 것으로 생각된다. 소모진에 일부 선비들이 참여한 것으로 보아 일반병사들의 참여가능성은 커진다. 다른 의병에서처럼 보부상이나 포수들의 참여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아직 나타나지 않는다. 또한 동학교도의 참여사실도 확인하기 어려우나 문석봉이 소모사로 재직하여 동학군을 진압한 관계로 그들의 참여 가능성은 희박하다.

문석봉은 지휘부를 조직한 후 통문을 각지에 발송하였다. 그는 통문에서 을미사변을 천고에 없는 대변으로 규정하고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 사직을 건져야 할 것을 호소하였다. 통문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통유通諭할 일은, 성모聖母께서 해를 입으신 것은 실로 천고에 없는 대변입니다. 일찍이 복수를 하지 않고 참아 이 적들과 어찌 한 하늘에서 더불어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감히 욕되게 사는 것보다 영광되게 죽고자 하는 마음으로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고자 합니다. 아, 우리나라 누구인들 신하가 아니며 누가 복수를 원하지 않으리오 같이 일어나 대의로서 흉당을 멸망시키고 사직을 건지는 것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을미 9월 일 註61)


2. 봉기 이념

문석봉이 의병을 일으킨 이유는 자신이 임진의병장의 후예라는 자각과 부친의 ‘기우뇌락氣宇磊落’한 성품을 이어받아 열혈한 기질을 타고난 그의 성품에도 그 일단을 찾을 수 있다. 또한 정치 사회적 요인들이 주요한 이유로 지적되어야 한다. 여기에서는 그의 의병봉기의 이념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註62)

첫째, 문석봉의 의병봉기의 중요한 이념은 다른 을미의병과 마찬가지로 ‘국수보복론’에서 찾을 수 있겠다. 그는 명성왕후가 시해된 을미사변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거의하기 직전 친구인 엄진섭嚴鎭燮에게 자식들을 부탁하며 보낸 편지에서 그는 시해사건을 ‘천고에 없는 강상의 대변’이라고 통분하였다.



… 성모聖母께서 변을 만남은 실로 천고에 없는 강상의 대변大變이고 신하로서 모두 통분하는 바이다. 그러나 아직도 복수를 하지 못하니 뜨거운 피가 뱃속에 가득 차 그대로 참을 수 없어 처자와 영결하고 대의를 일으켜 흉적을 토벌하고자 미아迷兒 영정永井을 형께 보내 부탁하니 살펴주기 바라오. 註63)



문석봉의 이러한 국수보복론은 ‘주욕신사主辱臣死’의 절의정신에서 연유하였다. 그가 거의 후 체포되어 대구부에 갇히게 되었을 때 옥중에서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거의가 이러한 ‘주욕신사’의 절의정신을 지키고, 동시에 국모의 원수를 갚고자 하였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註64) 또한 그는 을미사변을 ‘국치’로 인식하였으며 신하로서 그 원수를 갚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의리라고 인식하였다. 이러한 그의 의병정신은 근왕사상에 철저한 면을 보여준다.


유성의병장 문석봉


둘째, 척왜론 역시 문석봉의 의병봉기의 주요 이념이라 할 수 있다. 그가 1895년 2월 체포된 죄명이 ‘토왜죄’였다. 그는 이때 경무사 이윤용李允用과 가진 공초에서 “태조 이래 5백년간 내려 온 조종사직을 어찌 쉽게 두 손을 들어 오랑캐에게 바친단 말인가.”라고 하면서 오랑캐 일본을 물리쳐 국망을 막아야 함을 피력하였다. 그의 척왜론이 어느 시점에서부터 확립되었는지 분명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위 공초의 “벌일본伐日本토멸갑신4흉사討滅甲申四凶事”라는 갑신정변에 대한 태도로 보아 33세인 1884년 이전이었다. 그는 무과에 급제한 후 관리로 근무하면서 정부에 의한 일련의 개화정책이 일본의 조종에 의해 이루어짐을 목도하였을 것이다. 특히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일본군의 위압적이고 무자비한 진압, 거기에 비해 조선정부의 나약함을 보고 그의 척왜론은 강화되는 동시에 국모시해를 당하여 그는 항일의병투쟁을 전개하였다.

셋째, 문석봉은 반개화론에 입각하여 의병을 봉기하였다. 문석봉은 비록 무인으로 발신하였으나 항상 문文에 뜻을 두었으며, ‘사도斯道’의 멸망을 막기 위해 ‘영파재映波齋’를 지어 후학에게 한학을 교육했던 적도 있다. 그는 관리로 있으면서도 정부의 개화정책에 따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좋은 예로 그가 양호소모사로 재직 중에 옛 관복을 입었으며, 이 일로 관찰사 박제순朴齊純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질책을 당하였다.



…민간에서 흑의黑衣를 보면 달려가 숨는 것이 실정이나, 그대가 지금 흑의를 입지 않았은 즉 달아나 숨지 않을 것이니 어떻게 위무하고 겸하여 따르게 할 것인가. 註65)



또한 그는 시 「술지述志」에서 “동방에 다시 옛 의관을 회복할 길 없네”라 하며 개화정권이 의복제도를 변개하고자 한 변복령을 탄식하고 있다.

문석봉은 단발령에 대하여도 완강히 반대하였다. 다음과 같은 그의 시 「삭발시작削髮時作」은 그의 이러한 면을 잘 보여준다.

저 강속에 떠 있는 적선賊船이여

누가 부모가 없고 누가 하늘이 없으리오

끝내 절의에 의지하고 의리에 의지함을 알건만

중이 되고자 함이 아니오 신선이 되고자 함이 아닐진대

죽음 이외의 것을 논변함은 가볍고도 쉬우니

삶을 구하는 원망만이 하늘에 가득하고

명주明珠(영웅 : 필자 주)가 오랫동안 적막하고 남해가 완악頑惡케 되니

한 나그네 무슨 마음으로 옛날을 회복하랴. 註66)



이 시는 단발령을 듣고 삶의 의욕까지 잃은 듯한 자신의 심정을 읊은 것이다. 또한 자신이 목숨을 내던져 영웅이 될 것임을 은연 중에 암시하는 부분이다.


3. 공주부 공격

문석봉은 공격의 목표를 공주부 관아로 잡았다. 그는 공주관아를 선점하여 무기의 열세를 ‘지리의 이점’으로 메우고자 하였다. 문석봉은 부대를 편성한 후 우선 회덕현을 급습했다. 이는 무기를 탈취하고자 한 때문이었으며, 그의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회덕현의 무기고를 공격한 정확한 일자를 알 수 없으나, 10월 20일양 12월 6일 탈취한 무기로 무장한 300여 명의 의병이 유성 장대리에 진군하였다. 이곳에서 의병부대는 “아당에 드는 자는 살 것이요 들지 않는 자는 죽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주민의 의병 합류를 요구했다. 이들은 다음날 오전에 진잠으로 들어가

군수 이세경李世卿을 만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세경은 의병의 동태를 관찰사에게 보고하는 등 협조를 거부하였다.

진잠에 입성한 지 일주일 후인 10월 28일 문석봉의병은 공암현 공주군 반포면 공암리을 거쳐 공주를 향해 진격하였다. 공주부 관찰사 이종원李鍾元은 전중군 백낙완白樂浣과 이인 찰방 구완희具完喜에게 각각 100명씩 이끌고 가 대응케 하였다. 의병부대는 이들과 공주 와야동현 공주시 소학동에서 일전을 겨루었다. 그러나 의병은 매복해 있던 관군에 패하고 말았다. 註67)

공주인 이단석李丹石은 그의 「시문기時聞記」에서 이때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28일 갑자기 의병 수천이 대전 유성에서 공암에 이르러 읍부로 치달려갔다. 지나는 촌락마다 소동이 일어났으나 잠시 후 날이 어두워지며 퇴거하여 해산하였다. 혹은 왕촌旺村공주군 계룡면 상왕동에서 내흥령乃興嶺을 지나 본동에 온 자가 수십 명이다. 그 연유를 들은즉 중궁전中宮殿의 복수를 하고자 하는 뜻이며 개화로 인해 해를 입었으나 지금 관리가 된자 모두 개화하는 사람들이라 거의했다는 것이다. 병사들이 싸움에 익숙치 못하고 병기가 예리하지 못하여 관군에 패한 바 되었다. 의병을 창기한 자는 경인京人 문소모文召募이다. 註68)



이에 의하면 의병이 10월 28일 공암을 지나 공주부로 향하였으며, 그날 저녁 때 해산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구한국관보舊韓國官報』에 의하면 정부는 문석봉의병이 해산된 사실을 11월 8일양 12월 23일 오후 3시에 전보로 보고받았다. 이로 보아 10월 28일 전투 이후에도 10여 일간 의병활동은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문석봉은 패산 후 중군 오형덕 등과 함께 경상도 고령·초계 등지에서 재봉기를 준비하였다. 문석봉은 우선 고령현감에게 원조를 요청하고, 이어 감역 윤희순尹羲淳으로부터 군자금 지원의 약속을 받기도 하였다. 초계군수 신태철申泰哲은 “관에서 상금 만금萬金을 그대들에게 걸고 있으니 잠시 숨어 후일을 도모하시오.”라고 이들의 안위를 걱정해 주기도 하였다. 결국 고령현감 조모의 고변으로 순검 서윤묵徐潤默·정인원鄭仁源·이효진李孝鎭 등에 의해 체포되어 대구부에 구금되고 말았으니, 12월 24일의 일이었다. 정부에서는 이들 3명의 순검에게 갑종상으로 6원씩을 상금으로 주었다. 註69)

대구부 감옥에 갇힌 문석봉은 11월 25일 경무관 장규원張圭遠으로부터 공초를 받았다. 이 자리에서 그는 그간의 경과와 심정을 다음과 같이 비장하게 토해 놓았다.



본인은 작년 양호소모사가 되었다. 금년 2월 김재수의 무고로 서울 경무청에 체포되어 구금중 다행히 신원되어 6월 21일 출옥하였다. 8월 19일 성모께서 해를 당하시니 실로 천지에 일찍 없었던 초유의 대변인 즉 어찌 국가의 신민으로 와신상담하여 그 원수를 갚고자 할 뿐 아니라 진실로 올바른 인륜을 가진 자라면 천하만국이 누가 함께 적을 토벌하고 죽이지 않겠는가. 본인이 충의의 마음으로 처자와 영결하고 의병을 일으킬 것을 맹세하고 우리 성모의 옥체에 손을 댄 역적을 조사하여 북궐아래 현륙하고 그 살을 포뜨고 그 간을 헤쳐서 만분의 일의 분함이라도 씻고자 맹세하였거늘 국운國運인지 신운身運인지 마침내 여기에 이르렀다. 마땅히 일사보국一死報國할 것이니 속히 죽여 많이 묻는 수고로움을 하지말라. 註70) 3일 후인 11월 28일에는 관찰사 이중하李重夏의 공초를 받았다. 문석봉은 관찰사의 불의를 통렬히 논박하였으며 거의한 큰 뜻을 의연히 역설하였다.

문석봉의 의병투쟁에 대한 의지는 열렬했다. 옥고를 치르면서 몸이 극도로 쇠약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재봉기를 시도한 것이다. 그는 1896년 봄 영장 최은동, 중군장 오형덕과 함께 파옥·탈출하여 과천에 올라왔으나 이미 문석봉의 집은 일본병에 의해 불태워져 있었다. 다행히 그의 가족은 이강오李康吾 집에서 숨겨주어 무사할 수 있었다.

문석봉은 4월 서울에 들어와 정계의 요로들과 접촉을 시도하였다. 이어 원주로 내려가 ‘도지휘’가 되어 각도 의병장들에게 통문을 돌리기도 하였다. 이때를 전후하여 유인석의 제천의병과도 연락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불행히 문석봉은 병에 걸려 8월 12일 현풍으로 귀환하였으며, 결국 11월 19일 밤에 46세의 일기로 병사하고 말아 거의의 목표를 끝내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참고로 유성에서 거의하여 대구부에 체포되기까지와 탈출하여 원주에서 재기하기까지 유성의병의 행로를 정리하면 그림과 같다.


유성의병 이동도


이처럼 문석봉은 개화정권의 구조적 모순과 제국주의 세력의 무력적 침략을 극복하지 못하고 말았으나 그의 의병투쟁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의의를 가지고 있다.

첫째, 문석봉의병의 항일투쟁이 2차에 걸쳐 준비 또는 실천되었다. 문석봉의병이 ‘거의의 뜻만을 선포한 을미의병의 전단계’라는 설명은 부정되어야 마땅하다.

둘째, 문석봉의병의 기병시기와 기병장소 역시 재검토되어야 한다.『의산유고』를 비롯한 여러 자료에서 문석봉이 1895년 9월 18일 ‘공주의 유성’에서 의병을 일으켰음을 분명히 알려준다. 따라서『매천야록』에 근거하는 ‘보은기병설’은 ‘유성’에서 기병한 것으로 수정되어야 한다.

셋째, 유성의병은 송근수·신응조 등 중신들의 찬동과 협조 속에서 성립될 수 있었다. 이는 다른 의병부대에서 보이지 않는 유성의병의 특성이다. 또한 군향 송도순은 동춘당 송준길의 후손으로 송근수의 협조 사실과 함께 회덕지역 인사들의 유성의병과 관련성을 짐작케 해준다. 유성의병은 향촌세력의 지지기반 위에서 반침략 항일의병을 전개하였음을 알려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넷째, 문석봉은 한미한 선비의 집안에서 태어나 평민의 생활을 영위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뚜렷한 사승관계도 보이지 않는 등 ‘학통성’도 약하다. 따라서 그는 단발령 공포 후 거의한 유인석 등과 같이 ‘존화양이론’에 철저한 척사유생이라고 하기는 힘들다. 이로 보아 유성의병은 척사적 성격보다는 ‘주욕신사’의 근왕적 성격이 강한 면을 보여준다.

[註 48] 김상기, 「조선말 문석봉의 유성의병」, 『역사학보』 134·135, 역사학회, 1992. ☞

[註 49] 이때 민영환이 문석봉에게 준 다음의 시가 있다. 

일월이 밝고 천지가 바로서고 

충의가 빛나고 군신의 의가 분명한데 

그대의 이 말을 듣고 喬木世臣된 것이 부끄럽네(文永井, 「家狀」, 『義山遺稿』권4). ☞

[註 50] 문영정, 「書」,『의산유고』권1. ☞

[註 51] 문영정,『의산유고』권4 부록의 「家狀」·「行狀」, 「傳」에서 문석봉이 ‘유성’장터에서 기병하였음을 알려준다. ☞

[註 52] 문영정,『의산유고』권4 부록-「가장」·「행장」. ☞

[註 53]『의산수록』을미년분), 「大邱警務署 再招」. ☞

[註 54] 문영정,『의산유고』권4 부록-「가장」·「행장」. ☞

[註 55] 「은진송씨대동보」 24편 「同春堂文正公派」, 1966. ☞

[註 56] 『뮈텔주교일기』권1, 433~434쪽. ☞

[註 57] 송도순의 외조부인 閔泳達은 1894년 호조판서, 1895년 내부대신을 역임하다가 을미사변에 사직하고 합방후 일제의 남작 작위를 거절한 인물이다(정교,『대한계년사』; 大村友之丞,『朝鮮貴族列傳』참조). ☞

[註 58] 송낙빈, 「豊南公道淳行狀」,『恩津宋氏文獻錄』 회상사, 1972. ☞

[註 59] 송병관, 「宮內府主事松雲金公墓碣銘」(庚辰年),『克齋集』. 김성의의 묘는 충남 연기군 동면 응암리에 위치하고 있다. ☞

[註 60] 김상기, 「대전지역 항일독립운동의 사상적 배경과 전개」,『대전문화』6, 1997, 140쪽. ☞

[註 61] 문영정, 「通文-倡義時通列邑文」,『의산유고』권2. ☞

[註 62] 김상기,『한말의병연구』 176~181쪽. ☞

[註 63] 문영정, 「書-‘與嚴鎭燮’」,『의산유고』권1. ☞

[註 64] 문영정, 「書-‘獄中寄家兒永井’(大邱囚時)」,『의산유고』권1. 

글을 번역하여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일찍이 너희들과 영결하였으나 매번 길에서 긴머리를 한 동자를 보면 너희 형제 생각이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부자간의 인륜의 정이 아닌가 한다. 내가 그때 충청도에 가서 士民과 함께 거의하여 국모의 원수를 갚고자 하였으나 같이 일을 한 진잠현감 李逆子의 고변으로 공주에서 낭패한 지경에 빠졌었다. 지금 홀연히 돌이켜 생각하니 그것은 필부들의 조그만 의리에 불과한 것이더라. 국모의 원수를 갚지 못하면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없어 필마로 남으로 내려와 복수를 꾀할 것을 맹서했으나 또 고령현감 曺逆子의 고변으로 11월 24일 체포되어 대구감옥에 갇혔으니 한스럽고 분함이 죽고 싶을 뿐이다. 지금 억지로 실날같은 목숨을 보전하려는 나의 마음을 혹 하늘이 가상히 여겨 다시 복수의 날이 있을 것인가. 만약 뜻대로 안되면 마땅히 일사보국할 뿐이니 너희 형제는 시장에서 구걸하더라도 살기를 도모하여 君父의 원수를 갚기를 바란다. 설혹 굶어 죽더라도 또한 神에게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애비는 ‘主辱臣死’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죽고, 자식은 굶어서 죽더라도 어찌 군자가 적국의 곡식을 먹지 않는다는 절개에 해가 되겠는가. 너희들이 굶어 죽어도 나 또한 부끄럽지 않다. 그러나 너희 형제는 12살, 9살인 즉 어떤 이유로 살았고 어떤 이유로 죽었는지 혹 알지 모르나, 永星과 永底는 3살, 1살에 불과하니 살고 죽는 이유를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이다. ☞

[註 65] 문영정, 「서」,『의산유고』권1. ☞

[註 66]『의산수록』 (을미년분), ‘削髮時作’. ☞

[註 67] 백낙완,『남정록』편집부,『한국학보』74, 일지사, 1994, 204쪽). ☞

[註 68] 이단석, 「時聞記」(필사본), 1895년 10월 28일자(규장각소장). ☞

[註 69] 김상기,『한말의병연구』 172~175쪽. ☞

[註 70]『의산수록』 (을미년분), 「大邱警務署 初招」.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