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전기의병의 배경 / 한말 전기의병

몽유도원 2014. 1. 13. 10:28

제9권 한말 전기의병 / 제2장 전기의병의 배경

1. 갑오변란과 을미사변

2. 변복령과 단발령 공포

3. 위정척사론과 학파의 형성



1. 갑오변란과 을미사변


1. 갑오변란

1884년 10월 갑신정변의 실패는 조선 내에서 개화파의 실각을 가져왔다. 이를 두고 일본 지식층 일각에서는 자의적인 평가를 시도하였다. 그들은 갑신정변을 일본의 지원하에 시도된 조선의 근대화운동으로 간주하여 갑신정변의 실패는 곧 조선이 ‘반개화국半開化國’임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폄하하기 시작했다. 한편 일본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에 대한 청의 간섭을 배제하기 위한 적극적인 침략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런 배경에서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발발하였고, 조선정부는 진압을 위하여 청에 군사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일본은 조선을 무력으로 침략하기 위한 절호의 기회로 단정하여 대병력을 출동시켰다.

일본은 청군이 조선에 진주하자 ‘일본공사관 및 거류민 보호’라는 구실을 내세워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였다. 이는 청세력을 조선에서 물리치고 나아가 조선을 대륙침략의 전진기지로 확보하려는 정책이었다. 註1) 이들은 서울에 위협적인 군대를 주둔시켜 놓고 1894년 5월 중순 이후 조선정부에 내정개혁을 제의하였다. 6월 8일양 7월 10일 개최된 노인정회담에서 대조규개大鳥圭介 일본공사는 총 5조 26개항의 이른바 「내정개혁방안강목」을 제시했다. 정부는 이를 내정간섭이라 하여 거절함은 물론, 불법 진주한 일본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가운데 일본군의 철수 후 조선이 독자적으로 개혁을 추진할 것임을 밝혔다. 결국 조선정부는 6월 11일양 7월 13일 교정청校正廳을 설치하여 동학농민군이 제시한 폐정개혁안의 일부를 받아들여 정치개혁을 추진하였다.

이와 같은 조선정부의 결의를 일제는 큰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일제는 6월 19일 조선이 청과 조약을 파기할 것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이를 거절했다. 결국 일제는 조선의 단호한 반대에 조선을 외교적인 방법으로 속국화하려는 시도가 실패하였다고 보았다. 註2) 이후 일제의 행동은 이미 계획한 바대로 ‘개전開戰’을 실천에 옮겼다. 청과 조선을 무력 침공한다는 일본 내각의 결정을 일본언론에서도 보도하고 있으며, 단지 조선에서 개전의 빌미를 만드는 것만 남아 있다고 보았다. 註3) 일제는 먼저 조선의 경복궁을 공격 목표로 삼았다. 6월 21일 경복궁을 무력으로 침범한 갑오변란甲午變亂이 바로 그 사건이다.

일본군은 이른바 “조선왕궁에 대한 위협적 운동 계획” 註4)이라는 치밀한 계획하에 경복궁에 대한 무력 침범을 감행하였다. 일본군 혼성여단 주력부대는 5월 19일양 6월 22일 조선정부의 제1차 절교서 접수와 동시에 인천으로부터 서울에 침입하여 남산 왜성대에 6문의 포대를 설치했다. 5월 23일에는 용산의 1개 대대와 산포山砲중대가 남대문으로 들어가 행군·시위하게 하였다. 이어 5월 26일 대조규개 공사는 일본외무대신 육오종광陸奧宗光에게 조선의 왕궁을 포위할 것을 건의하였다.

일본군은 6월 20일부터 이에 필요한 작전을 준비하였다. 20일 밤 10시경 일본공사관에서 대조규개 공사와 삼촌준衫村濬 서기관 그리고 대도大島 소장을 비롯하여 복조福鳥 중좌와 장강長岡·상원上原·신납新納·도변渡邊 소좌 등은 작전을 숙의했다. 註5) 이에 따라 일본 혼성군 제11연대 제1대대장 일호一戶는 20일 오후 7시 각 중대장들을 집합시켜, 21일 새벽 2시에 작전을 개시토록 명령하였다. 명령의 취지는 우선 동대문과 광희문光熙門 그리고 동북문을 점령하고 일본거류지를 척후하는 한편, 새벽 4시에 왜성대에 집결하여 공사를 호위하고 경복궁으로 진입하라는 것이었다. 註6)

한편 대조 공사는 21일 0시 30분 혼성여단에게 계획대로 작전을 실행할 것을 지시하였다. 현지 지휘관인 보병 제21연대장 무전수산武田秀山중좌는 새벽 2시 30분 금정今井 중위를 남대문에, 그리고 내만乃萬 소위를 서대문에 파견하여 일본군대가 성문을 통과하는데 장애가 없도록 조처하였다. 새벽 3시경부터 계획대로 행동을 개시하여 제5중대로 하여금 경복궁을 공격하게 하였다. 신납 소좌는 작전이 종료된 직후 이때의 궁성침범사실 및 조선군과의 전투결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일본 대본영大本營에 보고했다.



오늘 새벽 3시경부터 용산주재 아병我兵을 모두 성내에 들여 모든 문에 1소대씩 배치하여 지키게 하고 5중대로 하여금 궁성에 들어가게 했다. 그 외의 병사는 시내를 순시하게 하였다. 5중대가 궁궐에 도착함에 영추문迎秋門의 병사들이 이에 저항하여 4시 40분경부터 상호간에 발포하여 20여 분 후 바로 아병이 궁성을 장악하였다. 양측 사상자수는 한병韓兵 사망 10여 명, 아병 사망 2명 부상 2명임. 註7)


1894년 6월 21일 일본군이 무력 침범한 영추문

 

경복궁 시위대는 강병으로 알려졌던 기병箕兵인 평양병 중에서 선발된 500여 명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시위대는 최초의 피격지점인 창화문에서 일본군을 격퇴시키고 있었다. 그러자 일본군 제21연대 제5중대는 경비가 소홀한 영추문을 공격하여 21일 새벽 5시경 경복궁을 점령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궁궐을 수비 중이던 조선병사 17명이 전사하였으니, 이들이야말로 반침략 항일투쟁사의 첫 희생자였다고 할 수 있다. 일본군은 건청궁에 있는 고종을 협박하여 전투중지 명령을 내리게 하였다. 그때 전투 중이던 조선시위대는 이 명령을 받고 “모두 통곡하며 총통을 부수고 군복을 찢어버리고” 경복궁으로부터 탈출하였다고 한다. 註8)

이와 같이 경복궁을 무력 점거한 일제는 자신들의 무력행사를 은폐하기 위하여 대원군을 유인·입궐시켰다. 대원군의 등장은 곧 민씨정권의 몰락을 의미하였다. 명성왕후를 비롯하여 민영준閔泳駿·민영소閔泳韶 등 민씨일가는 궁을 빠져나가거나 정동의 외국인 집으로 피신하였다. 다음날인 6월 22일 일제는 고종으로 하여금 정무와 군무를 임시로 대원군에게 위임토록 조치했다. 註9) 이는 고종의 대권을 박탈하고 친일적인 조선정부를 수립하려는 의도에서였다. 23일에 일제는 조선군의 무장을 강제로 해제시키고 무기와 탄약을 몰수하여 이틀에 걸쳐 용산의 일본병영으로 수송하였다. 註10) 이와 같이 일본군이 경복궁을 강점한 상태에서 개화파에 의해 친일정권이 수립되었다.

척사유생들은 갑오변란을 침략행위로 단정하여 곧 반침략투쟁을 개시하였으며 동시에 갑오변란 직후 조직된 김홍집내각을 친일내각이라고 비판·배척하였다. 이러한 징후는 갑오변란을 전후하여 서울지역에서 나타났다. 註11) 그러나 보다 구체적인 움직임은 갑오변란이 일어난 지 1개월여 후인 7월 말에 안동에서 나타났다. 공주유생 서상철 등이 안동지역에서 일으킨 의병이 그것이다. 이 의병 거의의 직접적인 동기는 갑오변란에서 찾을 수 있다. 그들은 격문에서 거의의 배경으로 임진왜란을 들고 있으며 병자호란 때의 치욕을 다른 원인遠因으로 언급했다. 직접적인 거의 이유는 다음과 같이 1894년 6월 21일 경복궁을 불법 점령하고 고종을 핍박한 갑오변란을 꼽았다.



우리 주상主上을 위협하고 백관을 핍박한 것과 호위병을 몰아내고 무기고를 약탈한 것은 신민으로서 너무나 슬퍼 차마 말할 수조차 없다. … 변란變亂이 일어난 지 한 달이 지났으나 아직까지도 소문 한 번 내지 못하고 조용하기만 하니 이것이 어찌 우리 열성조가 5백년 동안 아름답게 길러온 의리라 하겠는가. 이 삼천리 강토에서 관을 쓰고 허리띠를 두르고 사는 마을에 혈기를 가진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단 말인가. 註12)



을미사변 이전 1895년 7월 봉기한 김원교金元喬의 상원의병의 경우에서도 봉기의 원인은 갑오변란에 있었다. 이들이 발표한 격문 내용에 그 사실이 잘 나타나 있다.



군사를 거느려 궁궐을 침범하여 임금을 핍박하고 보기寶器를 탈취하여 법제를 고치면서 재상과 장군을 물리치고 군기를 탈취하여, 우리나라로 하여금 임금을 없게 하고 나라를 없게 하니 만국 개화의 법이라는 것이 이런 것인가. 이는 개화가 아니라 곧 역적의 매국함이요 왜놈들의 멸국하려 함이라. …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가슴이 칼로 베어지는 듯하다. 이 때문에 분루를 뿌려 의사를 규합하고 잠시 이곳에 머물러 하늘의 군사를 기다려 먼저 요망한 적을 소탈하고 다음에 생민을 구제하여 아국을 맑게 한즉 어찌 위에서 말한 바가 그르겠는가. 註13)



이와 같이 갑오변란은 척사유생들에게 망국에 대한 구국의식을 느끼게 하여 반개화·반침략 의병 봉기의 도화선이 되었다. 갑오변란을 망국의 위기로 자각한 점에서는 을미의병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을미의병의 상징적 인물인 유인석柳麟錫은 격문에서 “마침내 갑오년 6월 20일 밤에 이르러 우리 조선 삼천리강토가 없어졌도다.”라고 통분하였다. 註14) 또한 제천의병 중군장 안승우安承禹는 1894년 여름에 처음 의병을 일으킬 것을 계획했다. 그가 갑오변란과 갑오경장에 반대하여 거의하였음을 다음의 격문을 보면 알 수있다.



갑오년 6월에 공公이 문인門人 홍사구洪思九와 함께 제천 백련사白蓮寺에서 피서避暑하고 있었다. 그 달 25일 밤에 흉적 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서재필徐載弼이 왜인을 이끌고 들어와 김홍집金弘集·어윤중魚允中·유길준兪吉濬·조희연趙羲淵·김가진金嘉鎭·이윤용李允用·이완용李完用·박정양朴定陽과 내응하여, 순식간에 적병이 대궐 안에 밀어 닥쳤다. 임금을 협박하고 옛 제도를 모조리 배척하여 위로 종묘 제향과 조정 관제, 아래로 인민의 의복과 행사까지 한결같이 오랑캐 습속을 따르게 하였다. 공이 듣고 통곡하며 산에서 내려와 의병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였으나 호응하는 자가 없었다. 註15)



1896년 2월 진주에서 거의한 노응규盧應奎도 그의 「병인소丙寅疏」에서 갑오변란을 ‘6월의 변’이라 표현하면서 거의의 원인으로 꼽았다. 註16) 한편 홍주의병의 총수 김복한金福漢은 이 사건을 계기로 승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자정自靖하였다. 註17) 그는 을미의병투쟁 후 체포되어 진술한 공초에서 갑오변란 이후로는 시골에 들어가 죽으려 했다고 술회하고 있다. 註18) 이설李偰역시 갑오변란에 충격을 받아 우부승지의 직을 사직하고 고향인 홍주로 낙향한 다음 의병봉기를 위한 채비를 하였다. 註19)

이외에도 갑오변란에 통분하여 관직을 버리거나 벼슬에 뜻을 잃고 낙향하여 은거한 유학자는 일일이 열거하기 어렵다. 이러한 인물들은 대체로 의병을 일으켜 반개화 반침략투쟁을 전개하였다. 그 가운데 황청일黃淸一과 정운경鄭雲慶의 활동이 또한 주목된다. 황청일은 갑오변란 이후 벼슬에 뜻을 잃고 강릉지방에 은거하다가 1906년 삼척에서 신돌석申乭石과 함께 의병투쟁에 나선 끝에 피체되어 7년의 유배형을 받았다. 제천의병의 전군장으로 활약한 정운경 역시 갑오변란 직후 낙향하여 은거중 의병에 참여하였다. 홍주의병에 참여한 이세영李世永이 1907년에 남긴 「송운행적松雲行蹟」에서는 1894년 이후 정운경의 행적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갑오년 이후 그는 세상사에 뜻이 없어 영춘永春 서쪽에 우거寓居하면서 문을 닫고 밖에 나오지 않았다. 간혹 기분이 울적할 때에는 운림수석雲林水石사이에서 미친 듯 노래 부르고 술 취하여 통곡했다. 그의 깨끗하고 높은 절개를 다른 사람은 도저히 따를 수가 없었다. 註20)



이상과 같이 갑오변란은 유림을 비롯한 조선인 지식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들은 이 사건을 ‘대변란’ 또는 ‘망국’의 시작으로 인식하였던 것이다. 갑오변란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전봉준全琫準이 영도한 동학농민군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전봉준 공초에 의하면 전봉준 등이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범한 사건에 항거하여 그 책임을 묻고자 재봉기하였다.”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결국 이상의 사실로써 의식있는 유생들과 동학농민군을 중심한 농민세력은 갑오변란 직후 전개된 청일전쟁을 민족과 국가의 위기로 파악하

는 시국관을 공유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이 이러한 반침략 이념을 실천에 옮긴 점은 높이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한편 일제는 갑오변란을 기하여 조선왕궁을 장악한 뒤 친일적인 김홍집내각을 수립한 다음 개혁을 추진케 하였으며, 또 곧이어 청일전쟁을 도발하였다. 따라서 갑오변란은 일제가 추진한 조선 식민지화의 서곡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갑오변란은 이처럼 조선과 동아시아의 세력판도에 큰 변화를 초래한 대사건이라 할 수 있다.

갑오변란 이후 경복궁을 점령한 일제는 국왕을 유폐시키고 그 대신 대원군을 추대하였다. 註21) 동시에 민영준·민영규閔泳奎·민영익閔泳翊·심상훈沈相薰 등 민씨 일파를 체포하거나 국외로 추방하였다. 반면에 유배 중이던 김윤식金允植·신기선申箕善·이도재李道宰·윤웅렬尹雄烈 등을 석방시킴과 동시에 이들을 중심으로 새 정권의 수립을 기도하였다. 그 결과 수립된 것이 군국기무처이다. 1894년 6월 25일 설치된 이 기구는 초정부적인 입법기능을 담당하였다. 총재에 김홍집이, 박정양·김가진·유길준·김윤식 등 17명이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설치된 다음날 제1차 회의를 개최하여 관제를 의결하고 고종의 재가까지 얻었다. 이어 6월 28일에는 근대국가의 내각제도를 모방한 의정부관제를 공포하여 정치제도의 개편을 단행하였다. 이후 군국기무처에서 3개월간에 걸쳐 심의 의결한 법규가 200여 건에 달하였으니 이 법규들은 김가진·유길준·안경수 등이 구제도를 원칙으로 하여 근대법치국가의 내각제도를 참작하여 제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법규들은 노인정회담에서 일제가 제시하였던 「내정개혁방안강목」에서 나타난 바 대조 일본공사와 삼촌 서기관의 의도 및 지도의 범위를 벗어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2. 을미사변

1895년 8월 20일 명성왕후가 일제에 의해 시해당한 을미사변이 발생하였다. 일제는 갑오변란 이후 조선을 장악하고 개화를 구실로 한 침략정책을 수행 중 삼국간섭을 계기로 조선에서의 우월권이 러시아에 의해 저지당하였다. 조선정부에서도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막는 친러정책을 수립하게 되자 일제의 조선지배 정책은 타격을 입게 되었다. 따라서 일본정부에서는 친러정책의 핵심 인물인 명성왕후를 제거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국제적 범죄행위로 조선을 식민지화 하려는 침략행위의 일환으로 취해진 것이 분명하다.

지금까지 명성왕후 시해의 주모자에 대하여 여러 주장이 있으나, 명성왕후 시해 계획은 정상형井上馨이 주한전권공사로 재임시에 구상된 것으로 보이며, 이 계획에 따라 시해를 총지휘한 자는 정상형 후임인 삼포오루三浦梧樓 공사였다. 註22)

정상형은 1895년 5월 조선에 대한 새로운 정책을 협의하기 위해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자신의 후임으로 예비역 육군중장 삼포오루를 천거하였다. 8월 17일 조선공사에 임명된 삼포오루는 9월 1일에 부임하였다. 삼포오루는 주한일본공사관 서기관인 삼촌준와 궁내부 고문관 강본岡本 등을 참모로 하여 7월 하순경부터 구체적인 계획을 모의한 것으로 보인다.

1895년 8월 20일 새벽 일본공사의 지시에 따라 일본군은 경복궁을 침입하였다. 명성왕후 시해에 참여한 주 세력은 일본군 제18대대 병력이었다. 그중 제1중대는 새벽 2시 용산방면으로 행군하여 대원군 일행을 만나 대원군을 호위하고 입궐하였으며, 제2중대는 백목白木 중위와 무영武永 소위로 하여금 경복궁의 북문을, 제3중대는 광화문을 넘어 궁궐에 침입하였다. 한편 서울에 주재하던 일본 민간인도 동원되었다. 그중에 한성신문사 직원들은 공덕리로 가 대원군을 옹립하고 왕궁에 들어가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註23) 한편 시위대 연대장 홍계훈은 긴급사태를 군부대신 안경수에게 보고한 다음 부대를 이끌고 광화문으로 달려갔으나, 일본군에 의해 피살되고 말았다.

이와 같이 왕궁을 무력으로 점령한 일본군은 왕의 처소인 건청궁을 포위하고 명성왕후를 찾아내 시해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를 저지하던 궁내부대신 이경직이 피살되었으며 명성왕후와 용모가 비슷한 3~4명의 궁녀들도 피살되었다. 고종은 말할 수 없는 모욕을 당하였으며 왕태자는 일격을 맞고 기절하였다. 미국공사 알렌은 명성왕후가 시해당한 상황을 현장에 있던 궁녀들의 증언을 토대로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궁녀의 이야기로는 소란한 사태에 놀란 궁녀들이 왕비의 방으로 몰려들었는데, 궁내부 대신 이경직도 그리로 달려왔다. 일본인 몇 명이 이 방으로 쳐들어 왔고, 이경직이 왕비의 앞을 가로 막았지만, 일본인 폭도의 칼에 맞고 살해되었다. 공포에 질린 왕비가 자신은 단지 거기를 찾아 온 방문객일 뿐이라고 말했으나, 다른 궁녀들도 모두 같은 말을 하자 한 일본인 흉한이 왕비를 내동댕이치고, 구둣발로 가슴을 세 번이나 내리찍고는 칼로 찔렀다. 세 명의 다른 궁녀들도 동시에 살해되었다. 세 명의 궁녀는 왕비와 비슷한 용모 때문에 왕비 시해를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살인자들에 의해 함께 살해되었음이 틀림없다. 註24)

『North China Herald』지의 1895년 10월 25일자에서는 명성왕후 시해 장면을 다음과 같이 더욱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건청궁乾淸宮의 앞뒷문을 통해 일본군의 엄호 아래 침입해 들어온 민간복장의 일본인들은 한 무리의 조선군 복장을 한 군인들과 함께 일본군 장교와 사병들이 경비를 서 주었다. 그들은 곧장 왕과 왕비의 처소로 가서 몇몇은 왕과 왕태자의 측근 인물들을 붙잡았고, 다른 자들은 왕비의 침실로 향하였다. 이미 궁내에 있던 궁내부 대신 이경직李耕稙은 서둘러 왕비에게 급보를 알렸고, 왕비와 궁녀들이 잠자리에서 뛰쳐나와 달아나 숨으려 하던 순간이었다. 그때 살해범들이 달려 들어오자 궁내부 대신은 왕비를 보호하고자 그의 두팔을 벌려 왕비의 앞을 가로막아섰다. 살해범들 중의 하나가 왕비를 식별하고자 손에 왕비의 사진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지만 그의 보호행위는 살해범들에게 (왕비를 식별케 한) 단서를 제공하였다. 궁내부 대신은 그들의 칼날에 양팔목을 잘리는 등 중상을 입고 쓰러져 피를 흘리며 죽었다. 왕비는 뜰 아래로 뛰어갔지만 붙잡혀 넘어뜨려졌고, 살해범은 수차례 왕비의 가슴을 내리 짓밟으며 칼로 거듭 왕비를 찔렀다. 분명히 실수가 없도록 해치우기 위해 왕비와 용모가 비슷한 여러 궁녀들도 살해되고 있었는데, 그때 여시의女侍醫가 앞으로 나서 손수건으로 왕비의 어안御顔을 가렸다. 한둘의 시신이 숲에서 불태워졌지만, 나머지 시신은 궁궐 밖으로 옮겨졌다. 註25)



한편 박은식은 1920년 상해에서『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서술하면서 명성왕후가 일본 낭인들에 의해 시해당한 장면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명성왕후 국장 장면


8월 20일 새벽, 일병이 총을 쏘며 광화문에 들어오다 아위병我衛兵이 항거하여 약간의 살상자가 났으나 막아내지 못하다. 연대장 홍계훈이 꾸짖었으나 곧 피살되다. 일병이 곧 내전에 들어오다. 일본사관의 지휘로 정렬하여 각 문을 지켜 자객을 돕게 하다. 자객 수십명이 칼을 들고 전殿에 올라 뛰고 소리지르며 전하의 어깨와 팔을 끌어당기기도 하고 전하의 측면을 향해 총을 쏘기도 하다. 어전에서 궁인이 끌리고 난타당하였으며 궁내대신 이경직은 피살되다. 태자의 두발을 끌어 관과 신을 벗기었으며 칼로 찌를 듯이 위협하여 왕후의 소재를 힐문하였다. 이때 외국인 士巴津이 호위를 위해 어정에 있음에 누차 힐문당하였으나 끝내 알려주지 않아 거의 그 목숨이 위태하였다. 자객들이 각 방을 모두 수색하여 끝내 왕후를 시해하고 비단이불로 싸 송판에 올려 녹원의 수풀 속으로 옮겨 장작을 쌓고 석유를 뿌려 불태우다. 註26)

너무나 비참한 왕후의 시해소식을 접한 조선인은 일제와 친일정권에 대하여 적개심이 솟구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일제는 자신들의 책임을 일체 부인했으며 친일내각도 오히려 폐비조칙을 내려 왕비 시해를 정당화시켰다. 註27)이러한 처사에 조선인의 분노는 드디어 폭발하기에 이르렀다.

8월 30일에는 전참판 이건창李建昌·홍승헌洪承憲·정원하鄭元夏 등이 연명하여 왕후의 폐위에 반대하며 국모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으며, 영흥부사 이남규李南珪 역시 폐비조칙에 사직 상소를 올려 명성왕후의 복위와 거족적인 토적운동을 일으킬 것을 주장하였다. 註28)

의병항쟁의 확대는 명성왕후의 시해와 그 이틀 후에 공포된 폐비조칙이 직접적인 촉발 원인이 되었다. 폐비조칙이 공포되던 1895년 8월 23일 서울에서는 창의소 고시문이 나붙었으며, 註29) 9월 초에는 지방에도 ‘왕후의 폐서인에 신하된 자로서 복수토적復讐討賊의 의거가 없는가’ 註30) 라는 내용의 고시문이 나돌았다. 같은 해 9월 중순 서울의 종로에는 8월 20일의 왕비시해는 훈련대가 아닌 일본인의 소행임을 알리며 일본인에 대해 적개심을 품은 내용의 방이 붙었다. 註31) 원주지방에서는 사림들이 모여 거의의 뜻을 드높이는가 하면 구월산에서도 명성왕후 시해의 죄상을 성토하는 집단이 있었다. 註32)

한편 안동에서는 8도의 의병을 모집하여 일본인을 격퇴해야 한다는 격문이 게시되었으며 이를 안동부 관찰사가 수거하여 내부에 보고하기까지 이르렀다 한다.『동경조일신문』은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근래 지방에는 아무도 모르게 격문을 전달하는 자 있다. 그중에는 8도의 의병을 모집하여 일본인을 몰아내야 한다는 무례한 문자가 있다. 수일 전에도 안동부 관찰사의 손으로 그 격문이 차압되어 내부에 보내어졌다. 내부에서는 일본인의 손에 전해질 것을 염려하여 깊이 이를 비밀로 하고 있다. 註33)



이와 같이 을미사변 직후부터 서울을 비롯하여 안동·원주·구월산 등 각지에서 방과 격문 또는 고시문이 전파되는가 하면 직접적인 거의토적의 움직임이 일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9월 18일 문석봉文錫鳳은 유성에서 ‘국수보복國讐報復’을 기치로 하여 의병을 봉기하여 공주부를 공격하여 을미의병의 효시를 이루었음을 볼 때, 을미사변은 의병투쟁의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註 1]『일본외교문서』27, 「朝鮮國內政改革に關する件(1), 제406호, 1894년 7월 24일」. ☞

[註 2]『동경조일신문』1894년 7월 21일 잡보 「淸韓に對する外交上の道絶つ」. ☞

[註 3]『동경조일신문』1894년 7월 21일 잡보 「開戰の期」. ☞

[註 4] 中塚明,『日淸戰史』박맹수 역,『1894년, 경복궁을 점령하다』 푸른역사, 2002, 66~70쪽). ☞

[註 5] 박종근,『日淸戰爭と朝鮮』 靑木書店, 1982, 50~51쪽. ☞

[註 6] 박종근,『日淸戰爭と朝鮮』 51쪽. ☞

[註 7] 일본대본영 편, 「日韓兵の衝突」,『戰史編纂準備書類』60. ☞

[註 8] 황현,『매천야록』 국사편찬위원회, 1955, 146쪽. ☞

[註 9]『일성록』1894년 6월 22일조 참조. ☞

[註 10]『동경조일신문』1894년 7월 31일 「韓國軍器の精銳」. 이에 의하면 한국군의 무기는 예상외로 정예의 것이었다.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한국군을 무장 해제시키고 조사한 바에 따르면, 야포 1문, 산포 4문, 속사포 11문, 구식포 9문, 프랑스식 소총 4~500정이 있는 등 근대 장비가 다수 있었다. ☞

[註 11]『동경조일신문』1894년 7월 25일 「天囚居士入韓錄」. ☞

[註 12] 국사편찬위원회, 「동학당에 관한 건, 京第87號 安東難民巨頭 徐相轍의 檄文入手送付」,『주한일본공사관기록』; 고려대출판부, 「제3197호 慶尙東徒의 소삭滅要求와 安東東徒徐相轍檄文의 呈閱」,『구한국외교문서(일안 3)』. ☞

[註 13]『동경조일신문』1895년 10월 8일 「長壽山暴匪檄文」 ;『시사신보』1895년 10월 17일 「黃海道匪徒の檄文」 ;『동경일일신문』1895년 10월 9일 「祥原の賊」. ☞

[註 14] 유인석, 「檄告八道列邑」,『소의신편』권 1. ☞

[註 15] 이정규, 「安下沙傳」,『六義士列傳』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2, 1971, 189~190쪽). ☞

[註 16] 노응규, 「丙寅疏」,『愼庵集抄』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3, 1971, 892쪽). ☞

[註 17] 송상도, 「金福漢」,『驥驢隨筆』 국사편찬위원회, 1955, 43쪽. ☞

[註 18] 임한주, 「洪陽紀事」,『독립운동사자료집』2, 278쪽. ☞

[註 19] 김복한, 「復庵李公墓誌銘」,『志山集』권10. ☞

[註 20] 정운경, 「同遊錄」,『독립운동사자료집』3, 575쪽. ☞

[註 21] 나카츠라 아키라 교수는 『일청전사』초안의 내용을 토대로 당시 고종은 사실상 ‘포로’가 되었다고 파악하고 있다(박맹수 역,『1894년, 경복궁을 점령하다』 74~82쪽). ☞

[註 22] 박종근, 「三浦公使の赴任と閔妃殺害事件」,『日淸戰爭と朝鮮』; 이민원, 「민비시해의 배경과 구도」,『명성황후 시해사건』 민음사, 1992, 71~84쪽. ☞

[註 23] 박종근,『日淸戰爭と朝鮮』. ☞

[註 24] Allen to Olney. No.156,Seoul,Oct.10,1895,”Tai Won Khun Revolution,”DUSMK(이민원, 「민비시해의 배경과 구도」,『명성황후 시해사건』에서 재인용). ☞

[註 25] 이민원, 「민비시해의 배경과 구도」,『명성황후 시해사건』참조. ☞

[註 26] 박은식,『한국독립운동지혈사』 유신사, 1920, 7~8쪽. ☞

[註 27]『고종실록』고종 32년 을미 8월 22일조. ☞

[註 28] 황현,『매천야록』고종 32년 8월 4일자. ☞

[註 29]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항일의병사』 1970, 147쪽. ☞

[註 30] 이만도,『향산일기』 국사편찬위원회, 1985, 671쪽. ☞

[註 31]『동경조일신문』1895년 11월 23일 「朝鮮時事(11월 12일 경성발), 不穩の揭榜」. ☞

[註 32] 이만도,『향산일기』1895년 9월 19일자 참조. ☞

[註 33]『동경조일신문』1895년 11월 23일 「不穩の揭榜」. ☞


2. 변복령과 단발령 공포


1. 변복령 공포

조선 말 의복제도는 수차에 걸친 개정을 거쳐 점차 서양식 복제로 바뀌어 갔다. 이 의복제도 개정은 유생들의 전통적인 문화인식에 충격을 가져와 반일의병 봉기에 또 다른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 글에서는 이 의복제도 개정을 ‘변복령變服令’이라 부르고자 한다. 물론 이를 개화지식인의 입장에서 사회풍속개량의 일환으로 추진된 ‘의제개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척사유생층을 비롯한 다수의 조선인은 풍속을 ‘변개’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예조에서도 1884년 6월 의복개정의 내용을 담은 법령을 「사복변제절목」이라 하여 발표하였다. 여기에서 정부측에서도 ‘의제개혁’ 측면보다는 ‘변복’으로 파악한 측면이 강함을 볼 수 있다.

정부에 의하여 변복조칙이 내려진 것은 고종 21년1884 5월 반포된 ‘갑신변복령’이 처음이다. “조복朝服·제복祭服·상례복喪禮服은 선성先聖의 유제이므로 고칠 수 없지만, 사복私服은 시의에 따라 적당히 변경할 수 있으므로 당상의 시복時服인 홍단령紅團領은 입지 말고 간편한 흑단령黑團領으로 고쳐 착용토록 할 것”이 그 골자이다. 註34) 이때 예조에서는 위에서 소개한 「사복변제절목」을 발표하여 일반국민들에게 ‘착수의窄袖衣, 좁은 소매의 옷’의 착용을 강요하였다. 註35)

이와 같은 갑신변복령은 반포 즉시 맹렬한 반대에 부딪쳐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우선 조정 대신들이 이에 반발하고 나섰다. 홍순목洪淳穆·김병국金炳國·김병덕金炳德 등의 시원임대신들은 5월 26일 연명상소를 올려 공복에 ‘반령착수盤領窄袖’ 즉, 둥근 깃에 좁은 소매를 착용하는 것은 선왕의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므로 이를 폐지할 것을 주청하였다. 봉조하 이유원李裕元도 조복의 색깔을 전래의 홍색에서 흑색으로 바꾸는 것은 오랑캐의 제도를 쫓는 일이므로 절대로 불가하다고 상소하였다. 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유생들이 상소를 올려 변복령을 철회해 줄 것을 강력히 요청하고 나섰다. 이때 절의의 학자로 이름 높던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도 상소에서



아, 우리나라의 공사의제公私衣制가 삼고의 법제에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는 실로 중화 왕조의 법제이니 어찌 선왕의 법복이 아니리요. 註36)



라고 하여 선왕의 법복을 훼손한 변복령을 철회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밖에도 송근수宋近洙·박성양朴性陽·김낙현金洛鉉·이인명李寅命·김흥락金興洛·신응조申應朝 등 조야의 중망있는 인물들이 변복령에 반발하여 항소抗訴를 연달아 올렸다.

한편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고제高弟인 성재省齋 유중교柳重敎는 화서학파의 위정척사·존화양이론의 기반 위에서 갑신변복령을 다음과 같이 맹렬히 비난하고 있다.



이처럼 선왕의 법복을 훼손함은 이제夷制를 쫓는 것이다. 춘추의 법에 한 가지 일에라도 오랑캐의 제도가 있으면 곧 오랑캐가 된다고 했거늘 오늘날 오랑캐의 법도를 수용함은 한 가지 일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급작히 법복을 헐어서 오랑캐의 제도를 쫓았도다. … 복희 이래로 전승되어 오던 화하華夏일맥이 이로써 끊어졌도다. 아, 슬프도다. 註37)



변복령에 대한 유중교의 이와 같은 극단적인 반응은 화서학파의 공통된 사상적 기반에서 출발하고 있는 만큼 ‘선왕의 법복’을 수호하는 문제는 이들에게 절실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갑신변복령이 있은 지 10년 뒤인 1894년 9월의 갑오경장 때 의복제도의 개정문제는 다시금 제기되었다. 군국기무처에서



조관朝官의 의복제도를 간이화하여 공식복제는 사모紗帽에 둥근 깃, 좁은 소매옷, 띠를 두른다. 평상복은 검은 갓 ·답호 , 관복 예복에 입는 소매없는 옷·사대絲帶, 허리끈로 하며, 사서인士庶人의 복제는 검은 옷·두루마기·사대로 한다. 註38)



는 내용의 의제개정 의안을 상정·의결하였다. 같은 해 12월에는 칙령 제17호를 반포하여 관복을 더욱 간소화시키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1895년부터 조신의 대례복에는 흑단령을 입게 하고 입궐시의 통상예복으로 흑색 두루마기와 답호를 입고 사모와 목화木靴를 착용하게 하였

다. 註39) 10년 전 사복으로 착용케 했던 두루마기가 이제는 입궐시의 통상예복으로 바뀌어지고 말았다. 註40)

1895년 3월에는 칙령 제67호로 공사예복을 다시 개정하였다. 공사예복에서 답호의 착용을 금하였고 입궐 때에만 사모·목화·사대를 착용케 하였으며 또한 관민이 다 같이 흑색의 두루마기를 입도록 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을미변복령의 요체로 일반인도 검은 옷을 입도록 조처한 이유는 첫째 의제상으로라도 관민을 구별하지 않기 위해서이고, 둘째는 편의를 도모하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을미변복령은 의병봉기의 직접적인 한 동인으로 작용하였다. 이 점은 을미의병장 유인석이 을미변복령이 반포된 뒤 다음과 같이 절규하고 있는 것으로도 입증된다.



오호라, 애통하다. 4천년 화하정맥華夏正脈과 2천년 공맹대도孔孟大道와 조선 5백년 예악전형禮樂典型과 가가수십세家家數十世 관상법도冠裳法度가 여기서 단절되었도다. 이제 글 읽는 선비는 어떻게 처신해야 옳겠는가. … 이것은 천지天地성현聖賢 선왕先王 부조父祖에 죄를 지은 것이니 살아서 장차 어찌하리요. 이제 성토하다 죽고 거의하다 죽으리니 선왕의 도를 수호하다 죽는 것은 선비의 의리이다. 註41)



한편 최익현崔益鉉도 을미변복령이 내리자 「청토역복의제소請討逆復衣制疏」를 올려 의제를 바꾸는 것이 불가함을 역설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대체로 의복이란 선왕들이 오랑캐와 중화를 분별하고 귀천을 나타내도록 한 것입니다. 우리나라 의복 제도가 비록 다 옛법에 맞는 것은 아니나, 이는 중화문물이 보존된 바이며 우리의 풍속을 볼 수 있는 바로서 선왕 선정들이 일찍이 강론하여 밝혀 준수해 온 것이며 천하만국이 우러러 사모하며 찬탄해 온 것입니다. 전하는 어찌하여 한결 같이 역적들의 모의를 따라서 국법을 변경하고 혼란시켜 당당한 소중화로 하여금 이적의 풍속을 따라 금수가 되게 하십니까. 註42)



요컨대 전통적인 의복제도, 곧 선왕의 법복을 조선의 문화적 긍지의 한 척도로 인식하고 있던 수구적 지식인들은 변복령 반포를 심각한 정체성의 위기로 받아들였다. 그들에게 있어 복제의 개정은 인류의 지선극미한 전통적 가치관을 송두리째 절멸시키는 것을 의미했다. 특히 ‘음사陰邪’로 상징되는 흑색 복제를 채택한데 대해서 더욱 반발했다. 그리하여 이 변복령은 곧이어 전개되는 의병의 중요한 동인으로 작용하였다.


2. 단발령 공포

김홍집내각은 을미사변이 있은 지 불과 3개월이 지난 1895년 11월 15일 단발령을 공포하였다. 그 조칙은 다음과 같다.



짐朕이 발髮을 단斷하여 신민臣民에게 고告하노니 너희는 짐의 의意를 극례克禮하여 만국萬國으로 병존井存하는 대업大業을 성成케하라. 註43)



이때 내세운 단발의 명분은 ‘위생에 이롭고 작업에 편리하기 때문’


단발령 지령문

 


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교 윤리가 일반백성들의 생활에 깊이 뿌리 내린 조선사회에서 상투는 곧 인륜의 기본인 효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므로 단발령이 공포되자 유생들은 이것을 신체적 박해로 더 나아가 인륜의 파멸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그 반감은 절정에 달하였다.

황현黃玹은 이때 상황을『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여 비극적인 역사의 모습을 전해주고 있다.



단발령이 내려지자 곡성이 하늘을 진동하고 사람마다 분노하여 죽음을 무릅써 형세가 당장에라도 변이 생길 것만 같았다. 일제는 군인을 배치시켜 엄히 지키고 경무사警務使 허진은 순검을 인솔하고 칼을 차고 길을 막아 행인을 만나는대로 문득 머리를 잘랐다. 또한 인가에 들어가 수색하여 찾아내었으므로 깊이 숨지 않고서는 면할 수가 없었다. 서울에 왔던 자들도 상투가 잘려 이를 주워 주머니에 넣고 통곡하며 도성을 빠져나갔다. 무릇 단발 당하는 자들은 머리가 정연히 단발되지 못해 상투만 잘리고 머리카락은 늘어져 마치 장발승長髮僧같았다. 註44)

단발령은 을미변복령이 내려진 직후부터 백성들간에 소문으로 떠돌고 있었다. 황현이 “주의周衣를 입는 법을 시행한 이래 단발에 대한 이야기가 점차 나돌았다.” 註45)고 한 점이나, 유인석이 ‘훼복毁服’ 즉 변복이 단행된 직후에 ‘훼형毁形’ 즉 단발을 예상한 점 註46) 등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단발령 공포는 백성들의 뜻과는 배치되는 일부 매판관리 집단에 의한 자의적 조치였다. 학부대신 이도재李道宰마저도 단발령이 공포된 직후 사직상소를 올리고 단발령을 철회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펴 단발령이 사회적 문화적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일방적 처사임을 비난하였다.



단발에 대하여는 다른 의견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단군, 기자 이래로 편발의 풍속이 변하여 상투를 틀게 되었고 이를 지키는 것을 큰 일로 삼아 왔는데, 지금 만일 하루 아침에 머리를 깎는다면 4천년 전통의 풍습을 변개하기 어렵고 만백성의 동요를 예측할 수 없는 일이니, 이것이 격동하여 난리의 명분이 되지 않을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 진실로 나라에 이롭기만 하다면 신이 어찌 감히 한줌의 머리털을 아껴 나라를 위하는 일을 도모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여러번 생각해 보아도 그 이로움은 찾을 수 없고 당장 해로움만 보이니 감히 이를 덮고서 겉으로만 따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註47)



또한 정계에서 은퇴한 원로 특진관 김병시金炳始도 이때 단발령 철회를 호소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에서 그는 단발령이 일제의 사주를

받은 부일파들의 소행임을 지적하고 있다. 註48)

단발령에 대한 재야 유생들의 반향은 더욱 커 극단적인 위기의식에 사로잡혀 단호한 행동을 보이고 있다. 그중에서도 단발령이 반포된 다음 날로 의병투쟁의 기치를 들고 울분을 토로한 이천의병장 김하락金河洛은 재야유생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또한 유인석은 이러한 단발령에 대하여 화이론적 가치관에 입각해 아래와 같이 통박하였다.



천지간 화이강상華夷綱常과 예의대도禮儀大道는 반드시 인신人身에 있으니, 이 몸이 중화가 되고 오랑캐가 됨은 상투를 트는 것과 전통복식에 달려 있다. 이 상투와 전통복식의 유지 여부에 따라 중화와 오랑캐, 사람과 짐승이 구별되며, 강상대도의 보존여부가 결정되니 … 머리는 만 번이라도 갈라질지언정 상투는 한 번도 잘릴 수 없고 몸은 만 번이라도 찢길지언정 복식의 전통은 한 번이라도 훼손될 수 없다. 註49)



여기서 그는 상투와 전통복식의 수호여부에 따라 중화와 오랑캐, 사람과 짐승이 결판난다고 보았으므로 결국 이는 개화와 수구의 문제로 귀착된다 하겠다. 즉 상투와 전통복식이 중화와 사람을 상징하고 수구와 자주를 의미한데 비해 삭발변복은 오랑캐와 짐승을 상징하고 개화와 예속을 의미하는 것이다.

요컨대 유교통념 사회에서 단발령은 한민족의 문화적 자존의 표상이던 상투를 제거함으로 전국민의 울분을 자아냈다. 강요된 단발령은 결과적으로 정치·사회·문화의 제 영역에 걸쳐 큰 혼란을 야기시켰다. 그리하여 단발강요에 대한 반감은 개화 그 자체를 증오하는 감정으로 발전하였고, 이것은 또 일본화로 받아들여져 반일의식으로 연결될 수가 있었다. 즉 유생들은 개화를 상징하는 단발령을 인륜을 파괴하여 문명인을 야만인으로 전락케 하는 처사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 결과 전통질서를 수호하려는 유생들은 반침략 반개화의 의병을 봉기하여 이를 회복하고자 한 것이다.

[註 34]『고종실록』권21, 고종21년 윤5월 24~25일조. ☞

[註 35]『고종실록』권21, 고종 21년 갑신 6월 3일조. ☞

[註 36] 송병선, 「辭大司憲仍請勿改衣制疏」,『淵齋集』권4, 龍洞書院(영인본). ☞

[註 37] 유중교, 「甲申變服令後示書社諸子」,『省齋集』권34. ☞

[註 38]『고종실록』권31, 고종31년 6월 28일조. ☞

[註 39]『고종실록』권31, 고종31년 12월 16일조. ☞

[註 40] 김미자, 「개화기의 복식」,『한국의 복식』 한국문화재보호협회, 1982, 408쪽. ☞

[註 41] 유인석, 「乙未毁服時立言」,『소의신편』권4. ☞

[註 42] 최익현,『면암집』1, 민족문화추진회 국역본, 140쪽. ☞

[註 43]『구한국관보』개국 504년 11월 15일자. ☞

[註 44] 황현,『매천야록』 191쪽. ☞

[註 45] 황현,『매천야록』 191쪽. ☞

[註 46] 유인석, 「答李文仲根元書」,『의암집』권4, 134쪽. ☞

[註 47] 황현,『매천야록』 192쪽. ☞

[註 48]『고종실록』권33, 건양 원년 1월 6일조. ☞

[註 49] 유인석,『소의신편』 117쪽. ☞


3. 위정척사론과 학파의 형성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은 1860년대 시작되어 이후 의병봉기를 가능토록 한 사상적 요인으로 크게 작용하였다. 위정척사론은 조선조 지배이념인 주자학 사상과 그 질서를 지키고 반주자학적 체계를 이단시하여 부정하는 사상적 체계를 말한다. 선초 이래 위정척사론에 의하여 배척된 이단의 대상은 불교 도교 등 주자학이 아닌 사상체계였으나 근대에 들어서 특히 서학·양물洋物·왜倭가 주요 배척대상이 되었다.

위정척사론에 기반한 위정척사운동은 1866년 병인양요를 전후하여 서양세력의 침략이 노골화하자 지방 유생인 이항로李恒老·기정진奇正鎭등이 상소를 통하여 서양의 침투를 비판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시기 유학자들은 ‘위정’이면 ‘척사’는 뒤따르는 것으로 인식하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그 결과 외양책外攘策보다는 내수책內守策을 강조하였다. 이항로의 ① 존체통尊體統, ② 개언론開言路, ③ 선무비繕武備, ④ 용덕인用德人과 기정진의 ① 연병練兵, ② 구언求言, ③ 결인심結人心 은 대표적 내수책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이 동시에 외양책으로 척사론을 주장하였는데, 이들의 척사론은 양학洋學과 양물배척론이라 할 수 있다. 양학 전파는 주자학 질서를 흩뜨려 풍속을 금수화하며, 양물 보급은 서양의 경제적 예속을 가져옴을 지적하여 이를 배척한 것이다.

이항로·기정진의 위정척사운동은 이후 화서학파華西學派·노사학파蘆沙學派를 형성케 하였으며, 이 학파를 중심으로 조선 말 민족운동의 전형적 형태인 의병투쟁을 일으킨 의병지도자가 출현하였다. 이항로의 제자 김평묵·유중교·최익현·양헌수의 위정척사운동·의병투쟁, 유인석과 그의 문인 안승우安承禹·서상렬徐相烈등의 제천의병진 결성 후의 의병투쟁, 노사학파로는 기우만奇宇萬과 기삼연奇參衍의 장성·광주 일대에서 의병투쟁은 대표적 예이다.

위정척사운동은 병자수호조약 체결을 전후하여 재개되었다. 당시 척사론의 특징은 왜양일체론倭洋一體論이라 할 수 있다. 조선은 이제까지 교린의 대상이었던 왜를 명치유신을 전후하여 서양화한 왜로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불평등조약인 「조일수호조규」가 강제로 체결되자 정치 경제적 위기의식을 느낀 유생들은 배척의 대상을 양洋에서 왜倭로 바꾸어 인식하게 되었다. 최익현의 「지부복궐척화의소持斧伏闕斥和議疏」는 이 시기 척사론의 대표적 성격을 알려준다. 그는 경복궁에 나아가 일본과의 화의에 대해 ‘5불가론’을 피력하면서 왜가 서양의 앞잡이가 되었다고 지적하면서 일본과 통상조약을 반대하였다. 註52)

1881년 위정척사운동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김홍집이 일본에서 들여온 황준헌黃遵憲의『조선책략朝鮮策略』이 원인이 되어 유생들이 전국적인 규모로 상소를 올린 것이다. 유생들은『조선책략』의 내용 중에 기독교와 천주교의 구분은 유교에 주륙朱陸이 있는 것과 같으며 러시아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하여 “친중국親中國 결일본結日本 연미국聯美國” 해야 한다는 ‘친일적·친미적’ 외교정책이 담겨져 있는 것을 비판하면서 복합상소나 집단적인 상소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의 주장은 이념적으로 이전보다 더욱 강한 ‘척왜양일체론’에 기반하고 있었다. 이만손·홍재학·홍시중·황재현 등의 상소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註53) 1884년의 변복령에 대하여도 유생들은 강력한 항의 상소를 올렸다. 송병선·송근수·신응조·유중교 등의 상소가 그 예이다. 이 시기의 위정척사운동은 정부의 개화정책에 대한 강력한 비판의 의미를 담고 있으며 동시에 지방유생들이 이념적으로 재무장한 성격을 띠기도 하였다.

한편 지방 유생들의 위정척사운동은 1894년의 갑오변란과 1895년의 을미사변·변복령·단발령이 공포되면서 일정하게 변화해간다. 이 시기 국내외적인 정세변화는 유생들로 하여금 위정보다는 척사를 우선하도록 강요하였다. 척사의 대상도 왜가 중심이 되었으며, 유생들은 전통적인 상소운동을 의병투쟁으로 전환시켜 나갔다. 이것은 추상적이고 원거리에 있는 서학이나 서양이 아닌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일제의 침략을 물리치고자 한 것이며, 유생들은 개화를 곧 왜화로 인식하는 태도를 확고히 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1894년 이후의 위정척사운동이 반침략 반개화 특성을 띠는 원인은 일제의 제국주의 침략과 이에 종속된 개화파의 반주자학적 정책에서 연유하고 있다. 즉 1894년 6월의 갑오변란과 청일전쟁 발발은 유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워주어 반침략투쟁을 전개하도록 고무하였으며 개화파의 변복령과 단발령 공포 등 주자학 질서를 혼란 내지는 파멸시키려는 일련의 개화정책은 반개화 투쟁을 유도하였다.

위정척사론자들이 이 시기에 접어들어서 일본과의 무력투쟁을 전개한 것은 행동양태의 큰 변화였다. 이는 정치·사회적 여러 요인 외에 유생들의 일정한 전투경험 내지는 자신들의 잠재력을 의식한 결과라고 보여진다. 유생들은 농민전쟁시 유회군儒會軍을 편성하여 농민군과 싸운 전투경험이 있다. 홍주의병의 지도자 안병찬安炳瓚·이세영李世永등이 유회군을 편성하여 홍주목사 이승우와 함께 홍주성을 동학농민군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는데 성공하였으며 이 전투편제는 홍주의병 봉기 때 활용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동학농민전쟁시 전투요원의 조직과 실전을 쌓은 유생들은 농민과 용병적 성격을 띠기도 하였던 포수 등을 동원하여 민족과 국가 그리고 주자학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의병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다.

이러한 위정척사계 인물들의 사상을 보수유림의 기존가치를 고수하려 한 탓으로 배타적·폐쇄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보수반동의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하거나, 註54) 민족발전의 논리체계이기보다는 복고적이고 감정적 관념론이라고 그 한계성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註55) 물론 이들이 복고적이고 보수적인 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은 민족의 위기에 직면하자 적극적으로 현실에 참여하여 그에 따라 척사운동 나아가 항일의병투쟁을 전개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의식과 행동 속에 일부 논자가 주장하듯이 권력장악을 목적으로 한 면은 드러나지 않는다. 또한 개화·척사 중 어느 한쪽만이 민족 발전을 위한 논리체계라고 이들에게 강요함은 현실적으로 무리라고 생각된다. 오히려 이항로·기정진 등 척사론자들은 일본과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 의도를 간파하고 있었으며 그 대처방안으로 내수책과 적극적인 주전론을 제기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그들의 척사론은 비록 시대적 제약으로 인한 위와 같은 한계를 지적할 수는 있지만 국난극복을 위한 자주의식의 토대 위에서 적극적인 무력투쟁을 전개하였다는 점에서 근대 민족주의의 태동으로서의 의의가 있을 것이다.

다음에 의병봉기에 사상적으로 뿐만 아니라 직접 거의에 참여한 학파 중 화서학파·정재학파定齋學派·남당학파南塘學派·노사학파에 대하여 그 중심 사상과 주요 인물들의 척사운동을 알아보고자 한다.


1. 화서학파

조선 말기 제국주의 세력의 정치·경제적 침략에 대해 재지유생들은 주자학 질서를 수호하고자 하는 위정척사운동과 민족의 생존권 회복을 위한 반침략 의병투쟁을 주도하였다. 그중에서 이항로1762~1868, 호 화서, 자 이술而述, 본관 벽진碧珍, 초명 광로光老는 당시 국론을 주도하여간 대표적 척사론자였다. 그는 제국주의세력의 침략에 대항하여 철저한 존화양이론에 입각한 위정척사운동을 전개하였다. 더욱이 그는 많은 제자를 양성하여 조선 말기 사상계의 대표적인 학파를 형성케 하였다. 이 학파를 화서학파라고 하며 제천의병은 이들에 의해 주도되고 전개된 대표적인 의병활동이었다.

이항로의 경우에 뚜렷한 사승관계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의 문인인 김평묵이 정리한 「화서연보華西年譜」에서도 ‘불유사승不由師承’이라 밝히고 있듯이 독자적으로 학문체계를 정립한 성리학자로 알려지고 있다. 註56) 물론 그에게 직`간접으로 영향을 준 학자들이 있었음을 간과할 수는 없다.


대표적 척사론자 화서 이항로


그는 어려서 부친 이회장李晦章으로부터 한학을 수학하였다. 이회장은 임종주任宗周의 문인으로 알려진다. 그는 부친의 철저한 교육으로 6살 때에는 「천황지황변天皇地皇辯」을 지을 수 있었으며, 9살 때는 이미 그의 평생의 지론인 주리론에 대해 일정한 기틀을 잡을 수가 있었다. 註57) 그는 16세 되던 1777년 부친의 명을 받고 서울로 임종주의 아들인 임로任魯, 1755~1828, 호 영서거사潁西居士, 자 득녀得汝, 본관 풍천를 찾아갔다. 임로는 유기론을 주장한 임성주任聖周1711~1788, 호 녹문鹿門, 자 중사仲思, 본관 풍천의 문인이기도 하였다. 이항로는 21살 때 지평의 이우신?~1822, 호 죽촌竹村·문원文原·睡山, 자 익지益之, 본관 덕산을 배알하고 의리의 요체를 들었다. 「화서연보」에는 이우신을 이항로의 외경의 벗으로만 기록하고 있으나, 윤영선尹榮善이 작성한『조선유교연원도朝鮮儒敎淵源圖』는 이항로를 이우신의 문인으로 단정하고 있다.

또한 강효석의『전고대방典故大方』에서도 이항로를 이우신의 문인에 포함시키고 있다. 註58) 이로 보아 이항로 학맥은 비록 철저한 사승관계는 아니더라도 부친 이회장과 임로를 통하여 그리고 이우신과 관계를 통하여 그 연원이 송시열에까지 닿아 있음을 볼 수 있다. 이항로는 우암 송시열을 주자와 동일선상에 놓고 존숭하였다.

이항로의 주자학적 우주관은 오히려 퇴계의 이기호발설을 받아들여 주리론적 경향을 띠고 있다. 즉 이항로는 이기설에서 주리론적 이기이원론을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이기는 결코 대등한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즉 이理는 주인으로서 존귀한 것이고, 기氣는 객으로서 비천한 것이라는 이주기객론理主氣客論과 이존기비론理尊氣卑論을 주장했다. 반대로 기가 주가 되면 천하가 어지러워 위태롭게 된다는 것이다.

이항로는 비록 임로와 이우신의 가르침을 받았으나 그들의 주요한 이념이라 할 수 있는 주기론적 우주관은 받아들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 결과 그의 고제인 김평묵이 스승의 연보를 작성하면서 ‘불유사승’이라 기록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이항로의 주리론은 19세기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에 직면해 있는 시대상황에서 민족의 보존 논리로서 전개 발전된 이론이라 할 수 있다. 즉 조선은 문화적 우위로서 양陽이며 서양은 물리적 우위로서 음陰이니 이주기객理主氣客의 상태를 유지하여야 천하가 안정될 수 있을 것으로 인식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주리론은 위정척사론으로 구체화되었다. 그는 서양의 문화는 이단 중에서도 인륜을 어지럽혀 중화를 파괴하는 가장 해로운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는 척사를 위하여는 우선 위정을 충실히 해야 한다는 인식하에 내수론을 강조하였다. 한편 이항로는 척사론으로 양학과 양물배척론을 주장하였다. 양학의 전파는 주자학적 사회질서를 흩트려 풍속을 금수화하며 양물의 보급은 서양의 경제적 예속을 가져옴을 지적 배척한 것이다. 註59)

그의 내수외양론 중에서도 특히 주목되는 것은 의려책義旅策이다. 그는 병인양요 때 서구열강의 무력침공에 직면하여 일부 조야의 문호개방

주장에 대해 「사동부승지겸진소회소辭同副承旨兼陳所懷疏」에서 다음과 같은 주전론과 의려책을 주장하였다.



오늘날 국론이 크게 둘로 나뉘어 있으니, 양적洋賊과 싸워야 한다는 주장은 우리 편 주장이고, 서양과 화친을 주장하는 것을 적의 편이다. 이쪽을 따르면 우리 전통문화가 보존될 것이나, 적의 편을 따르면 금수의 지경에 빠질 것이다. 8도 내 각각 인망있는 사람을 하나씩 뽑아 소사召使라 칭하고, 그에게 위권威權과 존총尊寵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충성스럽고 기절있는 사람을 수습하여 의려義旅를 만들게 한 다음 그 의려를 관군과 함께 서로 응원케 하여 적이 오면 절충어모折衝禦侮하여 왕실을 보호하고 적이 물러가면 이륜彛倫을 받들어 사교를 종식케 한다면, 전화위복의 기회가 거기서 얻어질 것이다. … 원컨대 현명한 적임자를 찾아 사악한 무리를 물리치고 근검절약하여 민력을 튼튼히 하며 장수를 뽑고 병사를 훈련시켜 무비를 닦고 병농합일로써 군식을 족하게 하고 … 註60)



위 글에서 이항로는 적극적인 병농합일의 의려책을 제안하였다. 이는 후일 의병투쟁을 일으킬 수 있는 실천성을 머금은 이론이라 할 수 있다. 병인양요시 그의 문인인 양헌수梁憲洙의 활약, 전기의병 이후 다수의 의병장이 화서학파에서 배출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이러한 의식과 무관하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이항로의 강력한 척사정신은 그의 제자들에게 계승되어 화서학파가 형성되었다. 이 화서학파에서 조선 말 민족운동의 전형적 형태인 위정척사운동과 의병투쟁을 주도한 다수의 인물이 등장하였다. 김평묵·유중교·최익현·유인석·안승우·이강년·이춘영·주용규·서상렬·이소응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화서학파의 주요 문인을 중심으로 그 계보를 보면 다음과 같다.



화서학파의 주요 문인 현황

화서문인 : 김평묵重菴 유중교省齋 최익현勉菴 박문일朴文一, 雲庵 박문오朴文五, 誠庵 이근원李根元, 錦溪 유인석毅菴 장회진張會鎭, 東雲 이준李埈, 槐園 유기일柳基一, 龍溪 양헌수荷渠 홍재구洪在龜, 遜志

중암문인重菴門人: 홍재구 유기일 유인석 노정섭盧正燮, 蓮谷 이소응李昭應, 習齋

면암문인勉菴門人: 노응규盧應奎, 愼菴 임병찬林炳瓚, 遯軒 전수용全垂鎔, 海山 윤긍주尹競周, 顧堂

성재문인省齋門人: 유인석 유중악柳重岳, 恒窩 이소응 김영록金永綠, 充齋 노정섭 신지수申芝秀, 靈三 이범직李範稷, 釣庵 이필희李弼熙, 實谷 안승우下沙 주용규朱庸奎, 立庵 서상열敬庵 유홍석柳弘錫, 畏堂 이근원李根元오인영吳寅泳, 忠齋

의암문인毅菴門人: 안승우 서상열 신지수 이필희 이범직 박정수朴貞洙, 悔堂 이정규李正奎, 恒齋 백삼규白三圭, 溫堂 이강년雲崗 이춘영槐隱 홍사구 이주승李胄承, 徽菴 이조승李肇承, 寬毅齋 원규상元奎常, 玉坡 정화용鄭華鎔원용석元容錫, 이명 元容八 三戒 원용정元容正, 恕庵 최열崔烈이규현李奎顯, 廣庵 어중선魚中善오인영 배시강裵是綱주현삼朱鉉三이진응李晉應유치경兪致慶



화서학파 중에서도 의암 유인석을 중심으로 한 이소응·안승우·서상렬·주용규·이범직·이강년 등 유중교 문인들이 주도한 제천의병항전은 특히 두드러진다. 그중에서 제천의병장 유인석에 관하여 그의 사상과 척사운동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유인석은 화서학파의 종장인 이항로와 김평묵·유중교로부터 화서학파 척사론의 요체를 전수받은 유학자이며 그 사상을 실천에 옮긴 의병장이다. 그의 호는 의암毅菴, 자는 여성汝聖으로 강원도 춘성군 남면 하정리에서 고흥유씨 중곤重坤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4세 때 족숙 유중선柳重善의 양자로 들어간 그는 비로소 본격적인 학문을 수학할 수 있었다. 양가의 증조부인 유영오柳榮五, 1777~1818, 호는 栗里가 이항로와는 교분이 있는 사이여서 곧 화서문하에 입문하게 되었다. 또한 입양을 계기로 그는 화서의 고제 유중교와는 족숙의 관계를 맺게 되었다.

유인석은 이항로 이하 두 고제인 김평묵과 유중교를 차례로 스승으로 모시면서 화서학파의 존화양이론을 철저히 계승하였다. 그의 사상 중 핵심은 송시열에 의해 주창된 ‘소중화론小中華論’이라 하겠다. 그가 1913년 요동에서 작성한『우주문답宇宙問答』에서는 「소중화론」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조선은 당요唐堯의 시대에 나라를 시작했고 도산塗山의 회맹會盟을 함께 했으며, 기자가 동래東來한 후, 임금이 되어 구주九疇를 펴 보였고, 팔조八條의 가르침을 베풀어서 소중화가 되었다. 이로부터 대를 이어 오던 중 다소 쇠퇴하여 오랑캐의 영향을 받았으나, 고려 말에 이르러 정포은鄭圃隱 선생이 원명元明의 교체기를 당하여 오랑캐를 물리치고 의를 존중할 것을 주장하여 원을 물리치고 명을 섬길 것을 의논했다. … 중화를 높이고 이적夷賊을 물리침은 천지의 떳떳한 법도를 다하는 것이니 서로 전수하고 또 남명南明의 삼황제를 받들어 정통으로 하고 영력 연호를 썼다. 이에 중국이 망한 후에 사천년의 화하일맥華夏一脈이 조선에 있게 되고, 이천년 공맹의 남긴 법도가 조선에 있지 않음이 없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소중화의 실상이 확연하다는 것이다. 註61)

즉 중국과 조선은 각기 삼황과 단군 그리고 기자의 정통을 이어 중화와 소중화의 맥을 계승해오다가 명이 망한 후 그 화맥이 중국에서는 없어지고 조선에만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화華’라는 것은 주자학 중심의 ‘중화문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주자학을 신봉하지 않는 ‘왜양倭洋’은 곧바로 ‘이夷’로서 격퇴시켜야 할 대상으로 보았다.

그러나 유인석의 이 소중화론은 우주의 중심이 화맥을 계승한 조선에 있다는 민족지상주의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소중화’는 절대로 ‘중화’가 될 수 없다고 인식하였다. 중국의 경우는 ‘대중화’라 하여 ‘소중화’와 구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인석의 ‘소중화론’에서는 당시 유생들의 공통된 인식이기도 하지만 단군보다는 기자를 ‘은사殷師’라 하여 더 비중을 두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에 그의 ‘소중화론’ 더 나아가 척사론의 취약점이 보인다.

유인석은 철저한 반개화주의자였다. 개화란 본래 ‘문명화’라는 선의의 개념으로 파악되었다. 그러나 이 용어는 일본으로 파견한 유학생이 귀국한 뒤 특히 1890년대 개화파 관리들에 의해 사용되면서 주자학을 신봉하던 유생들에게 ‘개화’는 곧 ‘왜화’ 또는 ‘망국’의 의미로 파악되었다. 유인석 역시 그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는 개화파들에 의한 외국과의 통상이 망국의 근원이 된다고 논파하였다. 그리고 의병의 목적은 남의 노예가 되는 수치를 면하고자 함에 있음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아! 원통하다. 뉘 알았으랴, 외국과 통상한다는 꾀가 실로 망국의 근본이 될 것을, 문을 열고 도적을 받아들이어 소위 세신世臣이란 것들은 달갑게 왜적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데 목숨을 바치니, 인仁을 이루려는 이 선비들은 남의 노예가 되는 수치를 면하자는 것이었다. 註62)

또한 1894년 이래 개화파에 의한 정삭正朔·복식·관제·주군州郡 개혁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갑오경장을 필두로 변복령과 단발령 등을 망국적 반민족적 행위로 인식하였다. 이러한 인식하에 그는 제천의진을 결성하고 친일적인 개화파 관리인 단양군수 권숙權潚과 청풍군수 서상기徐相耆, 충주관찰사 김규식金奎植, 평창군수 엄문환嚴文煥, 그리고 천안군수 김병숙金炳肅 등을 처단했다.

이항로 문하에서 이와 같은 존화양이론을 수학한 유인석은 보수유림의 전형적인 운동형태인 위정척사운동과 의병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는 1866년 25살 때 스승 이항로를 따라 상경하여 척화소를 올리는데 참여하여 그의 척사론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하였다. 1876년 불평등조약이 강제로 체결되기 직전 그는 스승 유중교·김평묵 등 화서문인 50인과 함께 「복합유생척양소伏閤儒生斥洋疏」를 올렸다. 이 50인의 병자연명유소는 이항로의 병인년 상소 이후 화서학파에 의한 최초의 집단적인 정치운동으로 개항의 부당성을 항의 상소한 것이다. 이 연명유소는 김평묵이 작성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註63) 왜양일체론이 주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왜는 서양의 앞잡이라며 이는 왜가 서양과 결합하여 양선을 타고 양포 등 양기를 사용하고 있음을 보아 알 수 있다는 것이다고 하였다.

한편 그는 1893년 충북 제천의 장담長潭, 현 충북 제원군 봉양면 공전리 장담으로 이사하여 ‘장담서사長潭書社’를 열고 화서학파의 도맥 보존과 후진 양성에 힘썼다. 註64) 이곳에서 그는 문인 사우들과 윤5월 2일부터 거의 직전까지『사서삼경四書三經』·『근사록近思錄』·『소학小學』·『동몽선습童蒙先習』·『화서아언華西雅言』·『격몽요결擊蒙要訣』 주자朱子·정자程子·중암·성재의 글을 내용으로 한 강회를 실시하였다. 이 강회는 매월 상·중·하순에 실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유인석 문인이 중심이 되어 참석자 수는 적을 때는 8~9명, 많을 때는 50여 명에 이르기도 하였다. 그리고 한 달에 2~3회 정기적으로 장담서사에 모여 화서학파의 요체라 할 수 있는 ‘존양론尊攘論’과 의리정신을 논하였다. 강회 의장은 유인석 자신이 맡아『대학大學』·『역학易學』·『송자기축봉사존양조宋子己丑封事尊攘條』·『주자무오당의서朱子戊午黨議序』·『주자행궁편전朱子行宮便殿』·『주자왕매계문집서朱子王梅溪文集序』등을 강론하였다. 유인석이 참석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문인들 스스로 강회를 실시하였다.

강회에는 일반적으로 ‘빈장賓長’을 두었는데, 의당毅堂 박세화朴世和가 빈장으로 강회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박세화1834~1910는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의 문인인 이사현李思峴에게 수학하였으며 독자적인 학풍을 형성한 이른바 의당학파의 종장이다. 그는 1886년 충주로 이사한 뒤에는 1891년에 유중교를 초빙하여 향음례를 실시하였을 정도로 화서학파 인물과과 자주 교유하였다. 박세화는 1893년에 청풍으로 다시 이거하였으며 이즈음 유인석의 초청을 받고 장담강회에 참석하였던 것이다. 그는 빈장으로 참석하여『근사록』「박복剝復」 절을 강론하였다. 그는 또한 1896년에는 제천의진에 제자 윤응선尹膺善을 보내어 의병에 동참케 하였으며 1905년 을사늑약 체결소식을 듣고 의병을 일으켰으나 청풍에서 체포되었다. 결국 그는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게 되자 단식하여 자결하였다. 註65) 그의 이와 같은 실천적 위정척사 정신은 장담강회를 통하여 의암문인들에게도 이어져 제천의진 형성에 정신적인 뒷받침이 되었다.

한편 이 강회 빈장으로 화서학파 주용규·신지수·원용석 등 중암과 성재문하에서 유인석과 동문수학한 유생들이 초빙되었다. 그리고 빈 또

는 ‘제생諸生’의 대표로 서상렬이 참석하였음을 볼 수 있다. 이들이 1894년 변복령과 갑오변란, 1895년의 을미사변과 단발령 공포 등에 제천의진을 결성하고 이후의 의병활동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인 인물들이었다.


2. 정재학파

안동지역에서 을미의병을 주도한 인물은 퇴계 이황을 종장으로 삼고 있는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의 문인 중에서 다수 배출되었다.

유치명1777~1861, 호 정재, 자 誠伯, 본관 전주은 퇴계의 학통을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갈암葛菴 이현일李玄逸 -밀암密庵 이재李栽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훈재塤齋 남한조南漢朝로 이어받은 유학자이다. 그는 안동의 소호蘇湖에서 이상정의 외증손으로 태어나 어려서는 종증조부인 유장원柳長源에게 수학하였으며, 21세 되던 1797년 상주에 살던 이상정의 고제인 남한조 문하에서 수학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29세 되던 1805년 별시문과에 급제한 후 관계에 진출하여 대사간에 이어 1853년에는 병조참판에 임명되었다. 그는 이처럼 안팎으로 이상정의 성리설을 계승하여 이理를 활물活物로 보고 이理의 자발적自發的 동정動靜에 의하여 기氣가 동정할 수 있다고 보았다. 註66)

유치명의 문인을 알려주는 자료로『만우정약안晩愚亭約案』이 있다.『만우정약안』은 1857년 작성한 문인록으로 309명의 인물이 실려있다. 이중에는 전주유씨가 128명, 의성김씨가 54명으로 전체의 59%를 차지할 정도로 두 성씨가 중심이 된 것을 알 수 있다. 註67)

이 글에서는 이들을 정재학파라 명명하고 이들 중에서 김흥락金興洛·김도화金道和·권세연權世淵을 비롯하여 안동의병에 참여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행적을 살펴보고자 한다. 註68)


정재학파의 계보


유치명의 고제자로 김흥락이 있다. 김흥락1827~1899, 자 繼孟, 호 西山, 본관 의성은 안동의 금계金溪, 검제마을에서 학봉 김성일의 11대 종손으로 태어나 어려서 재종숙 김진룡金鎭龍에게 수학하고 19세 때에 유치명의 문하에 들어가 경학을 수학하였다. 41세 때에 일천逸薦으로 인릉참봉仁陵參奉에 제수되고 그후에 경상도사·사헌부 지평·승정원 우부승지·영해부사 등에 연이어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는 만년에 서산재西山齋를 짓고 학문을 닦으며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으니, 그의 제자로는 위에 든 바와 같이 당세의 여러 거유가 있다.

김흥락은 1894년 8월 정부에서 내린 영해부사직을 사직하면서 “섬 오랑캐를 끌어들여 내홍內訌을 일으키고 대궐의 변란을 일으켜 관제를 바꾸었으며, 토비土匪가 사방에서 일어나고 기이한 말이 나라에 가득차 세상에 퍼지니 어찌 신하된 자로서 차마 들을 수 있는 것이 있겠습니까.”라고 아뢰고, 이어서 권세가를 멀리 하고 현인을 임명할 것과 부역을 경감시키고, 유학을 숭상할 일, 검약하여 재정을 절약할 일 등의 내수책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이 내수를 하면 국가의 원기가 복원되어 ‘외사外邪’, 외부의 사학이나 사교를 말함는 스스로 쫓겨 갈 것으로 보았다. 註69)

그는 을미사변의 소식을 듣고 복수할 일을 꾀하였으며, 단발령 후 통문을 각지에 발송하고 거의를 실천하고자 하였다. 당시 안동지역 유림계의 거두였던 그는 노령의 나이로 직접 의병에 참여하여 투쟁할 수는 없었으나 의병 봉기를 적극 지원하였으며 권세연 대장 체제 때에도 유지호와 함께 직접 대장소에 나가 있었으며, 예안 하계下溪 출신의 문인 이운호1872년생, 본관 진성, 호 亨應를 권세연 의병장 아래에서 좌익장으로 활동하게 하기도 하였다. 註70) 또한 그는 동문 후배인 김도화가 의병장에 추대된 후에는 지휘장指揮將으로 의병활동에 참여하기까지 하였다. 註71)

김도화1825~1912, 호 拓菴, 자 達民, 본관 의성는 1825년 안동의 일직면 구미동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25세 때인 1849년헌종 15년 유치명의 문하에 나아가 『중용』을 비롯한 경학을 수학했다. 1861년철종 12년 유치명이 죽은 후에는 문집을 감교勘校하고 간행하는데 정성을 다하였다. 부모의 뜻에 따라 과거에 응시하기는 하였으나 과거의 문란과 혼탁함을 보고 과거를 포기하고 주자·퇴계학에 전념하였다. 1893년 의금부도사를 제수받았으며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반포되자 72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의병장에 추대되어 평생 탐구해 온 성리학적 의리론을 실천에 옮겨 안동의병을 이끌었다. 註72)

그는 창의하면서 「창의진정소倡義陳情疏」를 올려 자신의 뜻을 고종에게 전했다. 여기에서 그는 “8월의 궁위지변宮衛之變은 이릉二陵의 참화慘禍보다 더 심하고 11월의 단발령은 만관灣關의 원파遠播보다도 심합니다.” 註73)라 하여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분기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또한 그는 1896년 8월 파병 후 올린 글에서 파병의 부당성을 적으면서 일본과 친일내각에 대해 적개심에 찬 어조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아! 저 왜놈이란 오랑캐는 아국이 만세를 두고 반드시 갚아야 할 원수입니다. 열성列聖이래로 와신상담臥薪嘗膽의 뜻을 일찍이 하루라도 잊은 적이 없사온대 근년에 와서 적신과 임금을 업신여기는 무리가 왜적의 매와 개가 되어 왜군을 불러들여 대궐을 범하고 우리의 종기宗器를 옮기어 빼앗고, 우리 임금을 협박하여 열성조의 전장문물을 일체 없애고, 선왕의 의관제도를 함부로 혁폐革廢하여 온 나라 신민臣民을 금수의 나라로 섞어 넣었습니다. 또한 흉역한 이들은 이것으로도 부족하여 8월에 궁위망극지변宮衛罔極之變이, 겨울에는 궁궐의 법에 씻기 어려운 굴욕이 있었습니다. 나라의 신하된 자는 제 몸과 처자를 보호하는 것만을 일삼고 만 번이라도 죽어서 나라의 은혜를 갚아야 할 도리를 생각하지 않으며, 방백 수령은 오로지 의병을 해산시키는 것을 급무로 삼으면서 왜적의 우두머리 보호를 상책으로 삼으니 이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註74)



김도화는 이어서 조정의 간신배와 왜적이 있는 한 의병을 해산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명성왕후 시해의 진상규명 책임자를 분명히 밝힐 것, 그리고 이런 국가적 수치와 굴욕을 해결하지 않고는 의병을 해산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권세연1836~1899, 자 祖源, 호 澹窩·星臺은 안동권씨 삼의곡파三宜谷派로 삼의곡 석충碩忠의 10대손이다. 헌종 2년 봉화 유곡酉谷, 실에서 출생하여 어려서는 족부인 권승하權承夏, 호 杞泉와 권연하權璉夏, 호 頣齋에게 사사했으며, 20세 때인 1855년 유치명 문하에 나아가 수학하였다. 유치명 사후에는 김흥락·긍암肯菴 이돈우李敦禹·신암愼菴 이만의李晩懿·복재復齋 강건姜楗 등을 선배로 모시고 향음주례를 행하면서 향풍을 진작하였다. 그는 동학농민군의 봉기와 일본군에 의한 을미사변을 접하고 내수외양을 근본으로 하는 척사론을 정립했다. 단발령 공포 후에는 안동의병 대장으로 추대되어 항일의병전을 주도하였다. 註75)

그는 우선 격문을 띄워 거의의 뜻을 밝히고 인근 사민들의 참여를 호소하였다. “안동창의대장은 눈물을 삼키며 격문을 띄웁니다.”로 시작되는 격문에서 그는 “천지가 위치를 정했으니 중화와 오랑캐의 한계는 벗어날 수 없고, 춘추가 엄연히 있으니 난적의 죄는 도망갈 수 없습니다.”라 하여 ‘존화양이尊華攘夷’와 ‘춘추春秋’의 정신으로 거의하였음을 밝혔다. 또한 그는



저 왜놈들은 계급으로 말하면 2백년 동안 우리에게 조공을 바치던 나라요, 원수로 말하면 4백년 동안 우리가 이를 갈던 적이니, 설사 성의와 호의로 우리에게 화친和親을 청한다 해도 오히려 그 놈들을 죽여 없애고만 싶고 똑바로 보기도 싫은데 감히 방자하게 간사한 꾀를 부려 까닭없이 트집을 잡는 것입니다. 그래서 망명한 역적과 결탁하고 무뢰배를 종용하며, 한 가지 기술의 장점을 과장하여 우리 용기를 좌절시키고 5영五營의 군사를 억압하여 우리 수족을 놀릴 수 없게 하며, 우리 임금을 협박하고 우리 대신을 죽이고, 연호年號를 황제의 예로 쓰게 한 것은 중국과 이간을 붙이자는 수작이요, 재정을 내어 구제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백성을 우롱하는 데 불과하며, 열성列聖의 헌장憲章을 함부로 고치고, 선왕의 법복法服을 강제로 무너뜨리며, 악독한 손길이 대궐 안에 뻗치니 신자臣者로서 차마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머리깍는 칼이 도마에 올랐으니 고금에 이런 변이 없을 것입니다. 어찌 생각인들 했겠습니까. 작지 않은 나라가 한 번 싸워 보지도 못하고 위태롭게 될 줄을. 저 개와 양 같은 외국 놈의 침략은 실로 극히 흉악한 역적 놈들의 내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광서光緖 21년 12월 일 창의대장 권세연 註76)



라고 하여 일본을 ‘왜추倭酋’라 표현하며 4백년의 원수인 그들이 약간의 기술을 익혀 임금을 위협하며 우리의 제도와 전통 관습을 왜화倭化시키고 심지어는 단발마저 감행하는 만행을 저질렀음과 저들의 침략으로 나라가 위태롭게 됨을 통탄하였다. 그는 또한 “지금 오랑캐를 물리치고 적을 토벌하는 일攘夷討賊에 누가 목숨을 버리고 의를 택하지 않겠습니까. … 살아서 보람이 없다면 어찌 죽을 자리에서 죽는 것만 하겠습니까.”라 하여 ‘척왜론斥倭論’과 ‘사생취의捨生取義’의 정신으로 거의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유지호柳止鎬, 1825~1904, 자 元佐, 호 洗山, 본관 전주는 유치명의 아들로서 부친한테 한학을 직접 배웠다. 그는 신창·연천·장기 등지의 현감과 돈녕부 도정을 역임하였다. 1896년 단발령 공포 후 이 일로 안동관찰사 김석중한테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그후 안동의병의 계획과 추진에 깊이 관여하였다. 註77)

김양진金養鎭, 1829~1901, 자 正伯, 호 愚軒, 본관 의성은 14세 때인 1842년 유치명의 문하에 들어갔다. 그는 1870년 임천서원臨川書院의 복향을 주청하는 상소를 올려 횡성으로 유배된 바 있으며 1895년 12월 안동의병 거의시에는 호계서원虎溪書院의 회원으로 통문 작성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註78)

이들 외에도 안동의병에 참여한 정재학파 인물로는 김흥락의 제자인 이운호와 수곡 출신의 유연박 , 1844~1925, 자 景深, 본관 전주·이상희李相羲1858~1932, 자 萬初, 호 石洲, 본관 固城, 이명 相龍·유창식柳昌植 등이 있으며, 김도화의 문인인 유인식 등 다수이다. 이들 중 이상룡·유인식과 같이 을미의병 때에 참여하기는 하였으나 후기에 가서는 협동학교를 세워 교육운동을 전개하는 등 계몽운동가로 전환한 이도 있다. 또한 이상룡·이봉희 형제 등 여러 인물들은 1910년 망국 후에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註79) 유필영柳必永, 1841~1924, 자 景達, 호 西坡, 본관 전주·권상익權相翊·유연박을 비롯한 다수의 인사는 1919년 3·1운동 직후 전개된 파리장서운동에 적극 참가하는 등 민족운동의 동량으로 활약하였다. 註80)

영남지역에서 전기의병장은 정재 유치명 이외에도 성재性齋 허전許傳의 문인 중에서 다수 배출되었다.

허전1797~1886, 호 성재, 자 而老, 본관 양천은 경기도 포천 출신으로, 1835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우부승지와 병조참의를 역임하였다. 그는 황덕길의 문인으로 성호학파의 계승자가 되었다. 즉 그는 안정복을 통하여 성호의 학통에 접하고, 이익을 통하여 퇴계의 학통에 접하여 기호인으로서 퇴계의 영남학파로 분류되는 인물이다. 허전은 기호의 남인학자로 영남학파 중에서 유치명과 함께 학문적으로 쌍벽을 이루어 많은 문인을 배출하였다. 방산舫山 허훈許薰, 1836~1907은 그중에 대표적인 학자로 29살 때 허전의 문하에 나가 실학·경학·예학을 수학하였다. 그는 동생인 왕산旺山 허위許蔿, 1855~1908와 성산性山 허겸1851~1939의 의병활동을 전 재산을 털어 지원하였으며, 자신은 은둔하여 학문에만 힘썼다. 註81) 그의 문하에서 진주의병장 노응규盧應奎가 수학하기도 하였다.


3. 남당학파

조선 말 을미의병시 기호·관동지역에서 거의한 의병장은 유인석을 비롯하여 화서 이항로의 문인이 중심이었다. 이들은 화서의 척사론에 크게 영향을 받아 ‘거의토적擧義討賊’을 기치로 하여 의병 봉기를 결행하였다. 그러나 홍주의병은 같은 기호지방이면서 그 사상적 연원이 다르다. 즉 조선후기 기호학파의 종장이라 할 수 있는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 1682~1751, 자 德沼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비록 한원진이 이설李偰, 1850~1906·김복한金福漢, 1860~1924·임한주林翰周, 1871~1954보다 1세기 이상 앞선 17·18세기의 인물이지만, 그의 사상은 19세기 말기에 동향의 후학들이 의병봉기를 결심하는 데에 영향을 끼쳤다.

한원진은 주기파인 율곡계통의 기호학파에 속하므로 율곡의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을 사상적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기포리설氣包理說을 주장하였다. 한원진은 권상하의 고제인 ‘강문8학사江門八學士’ 중에서도 이간李柬과 함께 뛰어난 학자였으며, 조선후기 기호학파의 양분을 초래한 호락논쟁湖洛論爭을 일으킨 장본인이며, 호론湖論의 주창자이다. 그의 주장을 추종한 인물로는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 1681~1767·매봉梅峰 최징후崔徵厚·한간寒澗 김한록金漢祿·봉암鳳巖 채지홍蔡之洪 등이 있었다. 이들이 호서지역에 거주하였기 때문에 이들의 주장은 호론이라 불리어 이간 등이 주장한 낙론洛論과 대립하였다. 註82)

호론이란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중심으로 한다. 즉 한원진은 주리론으로써 만물의 근원을 논하면 인과 물의 성이 고루 갖추어져 성은 이理만으로 되어있지 않고 약간의 기氣가 배합된 것이며, 기의 제약으로 인과 물의 성이 같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더 나아가 그는 인간의 지혜로움과 어리석음·어짐과 못남의 구별이 있는 것도 기의 청탁淸濁·미악美惡의 구분이 있는 때문이라고 하였다. 註83) 이와 같은 인물성이론은 한원진의 사상을 유교와 불교, 사람과 짐승, 중화와 오랑캐의 구별을 엄격하게 하는 이단론으로 발전케 하였다.

한편 한원진의 학문과 사상은 주자·율곡의 심법학心法學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우암尤庵의 ‘직直’의 심학心學을 계승·발전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원진은 심학의 요체를 설명하면서 도체道體는 직直으로 종宗을 삼는다고 논하고 있다. 註84) 한원진의 동학인 윤봉구가 작성한 「남당한공행장南塘韓公行狀」에서 “그의 심법은 직을 주主로 삼았으며, 덕행德行은 온공溫恭


홍주의병장 김복한


을 본本으로 삼았다.” 註85)라고 기록하고 있음은 그의 직直철학을 잘 알려주고 있다. 직철학은 충의정신을 강조하게 된다고 본다. 이와 같은 이단론과 직철학이 동향의 후배들에게 전수되어 생사를 초월하여 의병을 일으키도록 한 것이다. 그 대표적 인물로서는 김복한과 이설을 들 수 있다.

김복한1860~1924, 호 志山, 자 元五, 본관 안동은 홍주군 조휘곡朝暉谷, 현 홍성읍 소향리에서 김봉진金鳳鎭의 장자로 태어났다. 모친은 연안이씨였으니 바로 이설의 고모이다. 그는 6·7세 무렵 부모를 여의었으나 종족宗族인 김민근金民根의 훈육과 치산治産 덕분에 학업을 닦을 수 있었다. 그는 문충공文忠公 김상용金尙容, 1561~1631의 12대손이 된다. 김상용은 바로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형으로 병자호란 때 우의정으로 왕족을 시종하고 강화도에 피란 중 강화성 함락 당시 순절한 인물이다. 이들 형제의 절의정신과 척화정신은 그의 의병정신으로 이어진 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의병봉기의 주요 이념인 존화양이론의 기반은 한원진의 성리론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한원진의 사상이 그에게 직접 영향을 끼친 바도 있겠으나, 이돈필·이설과 같은 유학자들의 가르침을 통하여 전수받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복한은 12세 때인 1871년 신미양요로 척사론이 비등할 때에 덕산 출신의 유학자 농은農隱 이돈필李敦弼의 사사를 받기 시작했다. 이돈필1834~1902, 자 輔卿, 본관 함양은 선조조宣祖朝에 대사간과 이조참판을 지낸 이효원의 후손이다. 註86) 이돈필의 부친은 성균진사 이달서李達緖이다. 그의 증조는 이건운李建運이니 한원진의 사숙문인 정혁신鄭赫臣, 1719~1793의 문인이다. 이돈필은 이와 같은 유학자 집안에서 출생하여 엄격한 훈육을 받았다. 그의 증조가 한원진의 문인인 것을 보아 한원진의 학통이 그에게까지 이어졌을 것을 상정함은 무리는 아니다. 이돈필은 김복한에게 주로 과문科文을 교수한 듯하다. 이설은 이돈필을 지조가 굳고 마음이 청민淸敏하다고 말하고 있다. 註87) 「지산연보」에서도 그를 “성품이 경개耿介하고 식견이 깊고 넓다.” 註88)라고 평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이와 같은 이돈필의 성품이 김복한의 의식형성에 일정한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김복한은 15세 되던 1874년부터는 그의 내종형 이설의 가르침을 받았다. 후에 이들은 앞뒤를 다투어 관직에 진퇴하고 홍주의병에 동참하였으니 평생동지라 할 수 있다. 이설 역시 후술하듯이 한원진의 사숙문인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한원진을 추존하였다.

이와 같이 한원진의 사상을 직·간접으로 전수받은 김복한은 한원진을 주자에 버금가는 선생으로 존모하였으며, 전우田愚에게 보낸 서한에서 한원진이야말로 율곡과 우암을 잇는 군자임을 역설하였다. 註89) 그의 둘째 아들 노동魯東 역시 김복한이 한원진을 ‘완벽한 도학道學의 대가’로 존신하면서 도의를 연구하고 밝혔다고 발문을 쓰고 있다. 註90) 그가 말년인 1921년 노동을 한원진의 묘에 보내 제문을 바치게 하였으며, 그 ‘고묘문告墓文’

에서 “성리설을 밝힌 공이 공자·주자와 더불어 우주간 3인이라 할 것이다.” 註91)라고 밝힌 사실에서도 김복한이 한원진을 얼마나 존숭했는지를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이 제문에서 그는,



선생한원진-필자이 인수人獸·유불儒佛·화이華夷의 구분이 없음을 심히 걱정하고 통탄하셨는데, 지금에 이르러 징험되고 있다. 註92)



고 말하고 있다. 이는 그가 한원진의 이단론에서 영향을 받았음을 실토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김복한은 기호유림의 정통인 한원진의 학통을 잇고 있으며 그의 절의정신에 크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 학통은 정혁신-이건운-이돈필 그리고 이설 등을 통하여 이어지고 있다.

김복한의 사상은 절의정신과 척사론에 입각한 화이론이 그 핵심을 이룬다 할 수 있다. 김복한은 주자의 강목을 특히 탐독하였다. 그가 단발령 공포 직후 이승우에게 거의를 권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공은 옛날 송중후宋衆候 유숭劉崇의 일을 알지 않는가. 왕망을 토벌하고자 하여 수 백명 군사로 완현을 공격하다가 들어가지 못하고 죽었다. 그러나 주자의 강목綱目에서 오히려 칭찬하였으니 인생이란 결국 죽기 마련인데 무엇이 겁나서 이러는가. 註93)



김복한은 12월 2일 다시 이승우에게 “당태종이 천하를 얻기 위하여 죄없는 진양령晉陽令을 베어 종묘사직과 중화의 명맥을 이었다.” 註94)라고 대의관에 입각하여 그를 설득하여 결국 의병에 참여토록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김복한의 사실은 이설의 김복한에 대한 만사輓詞에서 “만년을 내린 화이전통이 그대 한 사람 힘입어 지켜지도다.” 註95)고 한 대목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한편 임한주는 김복한 등 자신을 ‘당문塘門’으로 자처하고 있다. 그는 김복한의 제문에서 1895년 이후 30년간 ‘위정척사론’을 높이 세웠다고 김복한의 학문적 성격을 평하였다. 註96) 이와 같은 사상적 기반 위에서 김복한은 33세 때 문과에 급제한 뒤, 중앙관직을 두루 역임하다가 1894년 6월 갑오변란 후 승지직을 사직하고 낙향하여 홍주의병을 일으켰다.

이설은 인조반정의 정사공신靖社功臣 이귀李貴의 10대 후손이다. 그는 김복한의 내종으로 당색은 노론이었으며 결성군 화산化山에서 세거하였다. 1822년에 복시, 1888년에 알성과, 다음해는 전시에 급제하여 1894년 승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1894년 3월의 ‘변복령’, 6월의 갑오변란 등 일련의 개화정책과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여 사직소를 올리고 고향인 홍주부 결성군에 낙향하였다. 註97) 그후 그는 홍주의병에 참여하였다.

이설 역시 한원진의 학통을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우선 인적으로는 이설의 선대 신재新齋 이도중李度中이 곧 한원진의 문인이었다. 이설은 기정진奇正鎭이 「납량사의納凉私議」를 지어 율곡의 이기설을 비판한 것에 분개하여 김복한 등과 함께 통문을 작성하여 문인들에게 돌리기까지 하였다. 또한 최익현이 기정진의 주장을 변호하였다 하여 최익현을 배척하였다. 註98) 이설의 율곡에 대한 추존은 율곡을 주자의 설을 계승한 한국 유림의 대표적 존재로서 파악한 것이며, 율곡의 학통이 한원진으로 이어지는 데에 따른 추존이다. 김복한은 「복암이공묘지명復菴李公墓誌銘」에서 이설을 ‘율노당노栗老塘老의 충신’이라 평하고 있는 사실에서도 이를 여실히 알 수 있다. 註99) 이와 같이 한원진의 학문적 영향을 받은 이설의 사상적 특성 역시 화이론과 절의 정신이 강한 것으로 보인다.

이설은 거의 후 관찰사 이승우의 변심으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뒤이어 국왕의 특명으로 사면·석방되어 고향에 돌아온 그는 먼저 한원진 묘소에 찾아가 제문을 올렸다. 제문에서 이설은 도맥道脈이 공자에서 주자로 이어졌으나 주자 이후에는 우리 조선으로 옮아와 조정암趙靜菴-이퇴계李退溪-이율곡李栗谷-송우암宋尤庵-한남당韓南塘으로 이어짐을 계통적으로 설명하였다. 한원진이 말한 유석불과 화이의 분별이 없어졌음을 통탄하고 있다. 이는 한원진의 화이론을 이설이 계승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설은 또한 ‘왜양일체론’을 주장하였다. 그에 의하면 왜는 양洋의 앞잡이이며 우리의 ‘원수’임을 삼척동자라도 알고 있다고 하였으며, 왜와 수호하는 것은 매국행위라는 철저한 척사론을 피력하였다. 註100) 이와 같이 한원진의 사상은 이설의 의식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와 같이 홍주의병의 사상적 특성은 주자학의 의리관과 척사론에 입각한 화이론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한원진의 사상이 의병 주도자들에게 영향을 끼쳐 의병투쟁의 사상적 연원이 되었다. 김복한·이설을 중심한 유생집단을 이 글에서는 ‘남당학파’라 하여 홍주의병의 봉기 요인 이해에 도움을 주고자 한다.


4. 노사학파

노사학파는 노사蘆沙 기정진의 학문적 영향을 받은 문인들을 지칭한다. 기정진1798~1879, 자 大中, 본관 행주은 정조 22년 참판 재우在祐와 안동권씨 사이에서 전북 순창군 복흥면 구수동현재의 복흥동 대방리 금방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부터『효경孝經』·『격몽요결擊蒙要訣』등을 배웠는데, 10살에는 사서를 통독하였다. 그는 34살 때인 1831년 사마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다음해 강릉참봉을 제수 받고 그후에는 현릉참봉·사옹원주부·전설사별제典設司別提·평안도도사·무장현감·사헌부장령·호조참의·공조참판·호조참판 등이 제수되었지만 취임하지는 않았다.

그가 관리의 길을 멀리하고 순수한 학자로 한 평생을 보냈지만, 현실에 무관심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민생 문제와 외환外患에 대하여는 자신의 경세론을 분명히 밝혔다. 이것은 그가 생존했던 18~19세기가 국내외적으로 시련이 잇달았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그가 14살 되던 1811년 홍경래난이 일어난 것을 위시하여 1862년에는 임술민란이 일어나 전라도 지역만 해도 장흥·순천·함평·고산·강진·익산·부안·금구 등 각지에서 지방관과 이서吏胥나 토호들의 농민 수탈에 항거하는 민란이 일어났다. 강학과 저술활동에만 전념하던 그는 65세 때 이 민란을 지켜보고 장문의 「임술의책壬戌擬策」을 지어 민란의 원인이 삼정의 문란에 있다고 지적하고 그 대책을 피력하였다. 또한 그는 당시의 지배층이던 사대부들이 도탄에 빠진 농민들을 약탈하는 것은 외국의 도적과 다름없다고 비판했다. 註101)

그는 1866년에는 「병인소丙寅疏」를 올렸다. 1866년은 대원군이 쇄국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던 시기였으나, 대외적으로는 서양의 무력적 위협과 서양문물이 저변에 침투되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외세의 침투에 대하여 기정진은 그 대응책을 상소의 방법으로 임금에게 주청하였다. 「병인소」는 병인양요 직전에 올린 상소로 그의 현실참여의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주요 내용은 외침에 대한 방비책으로 6개 항목에 걸쳐 개국의 불가함을 주청한 것이다. 즉 ① 외침으로 인한 민심의 동요를 막고 민심을 하나로 모으기 위하여 먼저 조정의 계책을 세워야 하며廟策不可不先定, ② 외국인과 접촉에 대비하여 대답할 내용을 먼저 익혀두었다가 연해 지방의 관원들로 하여금 가지고 있게 하며先修辭令, ③ 외침을 예상하여 지세를 이용할 수 있도록 수륙의 지형을 미리 살펴두며審地形, ④ 군부와 병기를 재정비하여 병사의 훈련을 기하고鍊兵, ⑤ 천하에 불필요한 사람이 없듯이 이용하지 못할 방책은 없으니 방책을 널리 수집하며求言, ⑥ 기강을 확립하고 인심을 결합시킬 수 있는 내정개혁을 서둘러 외양外攘의 근본을 이룩할 것汲汲內修以爲外攘之本 등으로 그의 내수외양책內修外攘策의 요체가 담겨 있다. 註102)

기정진은 조선조 성리학의 6대가의 하나로 꼽을 정도로 대성한 학자였다. 그의 학문은 뚜렷한 스승이 없이 이루어진 점에서 독특한 성격을 지닌다. 그의 5대조 기정익奇挺翼이 송시열의 문인이니 그는 가학으로 기호학파를 잇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는 유리론의 관점에서 서술한 「납량사의」에서 율곡의 이기론氣發理承一途說마저 부정하였다. 그의 사후 이 사실이 밝혀졌으며, 이 일로 기호계열의 연재학파·남당학파·간재학파艮齋學派로부터 심한 비판을 받았다. 그의 성리학의 주요 이론은 이일원론理一元論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사단과 칠정이 퇴계처럼 호발互發한다거나, 율곡처럼 기발氣發만 인정하는 이원적이 아니라 기발인 동시에 이발이라 하여 일원적으로 해석하였다. 註103) 그는 이와 기를 대립적인 것으로 파악하지 않고 이 속에 기가 포함되는 것으로 보아 유이론적唯理論的 관점을 주장하였다. 이처럼 그는 이理만으로 우주론 내지는 존재론을 풀어가고 있다. 그는 이러한 입장에서 19세기 중엽 외세의 침략에 대한 대응책으로 존화양이론의 척사론을 제시하였다. 기정진의 이와 같은 위정척사론은 그의 사후 문도들에게 계승되어 척사적인 노사학파를 형성한 것이다.

노사학파에는 위정척사운동과 의병투쟁을 주도한 인물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조성가趙成家·이최선李最善·정재규鄭載圭·기우만奇宇萬·오준선吳駿善·공학원孔學源·남정우南廷瑀·기삼연奇參衍 등이 그들이다. 이중에 석전石田 이최선1825~1883은 15살에 노사 문하에 들어가 40년 동안 학문을 닦은 노사학파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최선은 순조 25년1825 전주이씨 양령대군의 후예인 규형奎亨과 상산김씨商山金氏 사이에서 담양의 장전長田, 현재의 전남 담양군 창평면 장화리에서 태어났다. 35세 때인 1859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864년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관계에는 진출하지 않았다. 그는 스승인 기정진과 마찬가지로 삼남지방의 민란과 병인양요와 같은 내우외환에 처하여 자신의 경세론을 분명히 밝혔다. 그는 임술민란에 처하여 「삼정책三政策」을 제출하여 민란의 원인이 삼정의 문란에 있음을 정부에 밝혔다. 이어 그는 ①이치를 밝혀明理, ② 성학에 힘쓰고勉聖學, ③ 언론을 개방하며開言路, ④ 인재 선발을 엄격히 하여嚴科程, ⑤ 현명한 인재를 얻어야 함得賢人을 주장하였다. 또한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전라도 일대에 격문을 돌려 의병을 모집하여 이들을 거느리고 상경한 바도 있다. 이미 프랑스군이 격퇴된 것을 알고 그는 준비한 군자금을 순무사 이경하李景夏에게 전달하고 귀향하였으니 위정척사론에 기반한 자신의 학문을 실천에 옮겼다 할 것이다. 註104)

노백헌老栢軒 정재규1843~1911는 경남 합천군 쌍백에서 초계정씨 방훈邦勳의 아들로 태어나 22살 되던 1864년 장성에 있던 기정진을 찾아가 문하생이 되었다. 그는 기정진의 학문을 철저히 계승하였다. 그가 지은 「납량사의기의변納凉私議記疑辨」1903과 「외필변猥筆辨」1904은 기호계열의 전우나 김복한의 성리설을 스승을 대신하여 비판한 것으로 유명하다. 註105)그는 척사론에도 철저하였다. 1881년 김홍집이 황준헌의『조선책략』을 조정에 제출하자, 성균관에 성토를 호소하는 글을 보냈으며, 자신은 척사소를 올려 이를 비판하고자 했다. 미처 올려지지 못한 이 상소문에서 그는 조선이 왜와 서양을 끌어들임은 고식지계에 불과한 것으로 이의 불가함을 주장하였다. 그는 1894년 갑오변란 이후 친일내각에 의해 이른바 경장이라는 구호 아래 개화정책이 펼쳐지자 관찰사 조병호趙秉鎬에게 의병을 촉구하는 서한을 보냈다. 이와 같이 민족의 위기의식을 절감하고 있던 그는 을미사변 이후에 호남 유림들에게 서한을 보내 거의를 촉구하는 한편 조성도 등과 거의를 밀의하였다. 註106)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남정우 등과 함께 최익현을 찾아가 거의를 도모하였으나 최익현이 대마도에 유배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註107)

기우만1846~1916의 자는 회일會一이요, 호는 송사松沙이다. 본관은 행주이니 기정진의 손자이다. 25세 때 사마시에 합격하고 37세 때인 1882년 익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는 않았다. 그는 일찍이 가학을 계승하여 ‘문유文儒’로 추대되었다. 그의 학문은 척사론에 기반한 만큼 위정척사운동과 의병투쟁에 적극적이었다. 그는 1895년 동학농민전쟁이 끝난 후 나주에서 동학농민군 토평비를 세우게 됨에 비문을 지어 척사론에 입각하여 반동학론을 분명히 밝혔다. 을미사변과 단발령 공포는 그의 척사의식을 더욱 드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을미소」와 「병신소」는 이때 올린 글이다. 이 상소에서 그는 명성왕후를 시해한 원수를 갚고 단발령 취소를 주청하였다. 옛 법전과 제도를 복구할 것을 요구하였으며, 개화라는 것은 난신적자들이 부르짖는 말로 이들의 행위는 임금을 속이고 나라를 위험에 빠뜨리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註108)

기우만은 1896년 3월 광주향교에서 항일의병의 기치를 들어 호남창의군의 총수가 되었다. 5월에는 장성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켰으나 군사행동으로 발전시키지 못하였다. 1908년 2월 순천 조계산의 암자에서 동지·문인들과 재거사를 도모하였으나 고종의 강제퇴위 소식을 듣고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1909년 그는『호남의사열전湖南義士列傳』을 저술하였다. 목적은 그가 채 이루지 못한 ‘토왜’의 뜻을 글로써 표현하여 그 정신을 영속시키려는 의지의 소산이었다.

노사학파의 문인 중에서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기삼연이 있다. 기삼연1851~1908은 전남 장성군 황룡면에서 진사 기봉진奇鳳進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경로景魯, 호는 성재省齋이다. 8살부터 재종숙인 기정진의 문하에서 경서와 병서를 수학하였다. 그는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토왜복수討賊復讐’하고자 기우만 등과 함께 거의하였다. 이때 그는 상소에서 국왕이 민심을 모으고 군사를 훈련시켜 외적을 물리쳐야 함을 주청했다. 그리고 자신이 거의함은 일제의 주구 노릇을 하는 친일 역신들을 몰아내 국정을 안정시키고자 함이니 국왕과 민족을 위한 뜻임을 피력하였다. 註109) 그러나 의병장 기우만이 신기선이 가져온 국왕의 선유문을 받고 의진을 해산하기에 이르렀다. 기삼연은 이 선유는 임금의 본심이 아니

고 적의 협박 때문이라고 하며 의진의 해산을 반대하고 의병의 재기를 도모하였으나 전주진위대에 의해 체포되어 서울의 평리원옥에서 옥고를 치루었다. 기삼연은 1907년 수록산에서 거의하고 호남창의회맹소 대장에 추대되었다. 그는 격문을 돌려 호남 인사들의 의병 참여를 호소하였으며 적에게 부역하는 자의 처단 및 재산 몰수를 경고하였다. 註110) 이후 그는 고창·광주·장성·담양 등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수행하여 다수의 전과를 거두었으나 1908년 정월 초하루 순창에서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註111)

[註 50] 이항로, 「辭同副承旨兼陳所懷疏」,『일성록』병인 3년 9월 12일자. ☞

[註 51] 기정진, 「丙寅疏 一」,『일성록』병인 3년 8월 15일자. ☞

[註 52] 최익현, 「持斧伏闕斥和議疏」,『일성록』병자 13년 정월 23일자. ☞

[註 53] 황재현·홍시중, 「斥邪疏」,『일성록』신사 18년 3월 23일자. ☞

[註 54] 이이화, 「척사위정론의 비판적 검토」,『한국사연구』18, 한국사연구회, 1977. ☞

[註 55] 진덕규, 「척사위정론의 민족주의적 비판인식」,『한국문화연구논총』31, 이화여대, 1978. ☞

[註 56] 이항로, 「行狀 年譜」,『화서집』-부록 권8~9 ; 현상윤,『조선유학사』 민중서관, 1949, 376~380쪽. ☞

[註 57] 이항로, 「행장 년보」,『화서집』-부록 권8~9. ☞

[註 58] 강효석,『전고대방』권3. ☞

[註 59] 이항로, 「辭工曹參判三疏」,『화서집』권3-疏. ☞

[註 60] 이항로, 「辭同副承旨兼陳所懷疏」,『일성록』병인년 9월 12일자. ☞

[註 61] 유인석, 「小中華論」,『의암집』권15-宇宙問答. ☞

[註 62] 유인석, 「檄告內外百官」,『소의신편』 국사편찬위원회, 1975, 2~4쪽. ☞

[註 63] 권오영, 「김평묵의 척사론과 연명유소」,『한국학보』55, 일지사, 1989. ☞

[註 64] 이정규, 「安下沙傳」,『六義士列傳』. ☞

[註 65] 금장태·고광직,『속 유학근백년』 여강출판사, 1989, 125~136쪽. ☞

[註 66] 김흥락, 「定齋柳先生行狀」,『西山先生文集』권22-行狀. ☞

[註 67]『晩愚亭約案』한국학중앙연구원 도서관 소장, 마이크로필름 35-6411-1). ☞

[註 68] 금장태, 「한말 일제하 한국성리학파의 사상계보와 문헌에 관한 연구」,『철학사상의 제문제』3,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5. ☞

[註 69] 김흥락, 「辭興海府使疏」,『서산선생문집』권2-疏. ☞

[註 70] 김도현, 「碧山先生倡義顚末」,『독립운동사자료집』2, 17쪽. ☞

[註 71] 권상익, 「西山先生行狀」,『西山先生文集』-부록 2 ; 이만도, 「墓碣銘」, 『향산일기』; 「輔仁稧帖」,『西山全集』-附錄 ; 유정기, 「해제-서산선생의 생애와 학문-」,『서산전집』 서산전집간행회, 1982. ☞

[註 72] 김흥락, 「墓碣銘」, 『拓菴先生文集』-附錄 2 ; 洪羲欽, 「敍傳」·「及門錄」,『西山先生文集』-附錄 2. ☞

[註 73] 김도화, 「倡義陳情疏」,『척암선생별집』권1-疏. ☞

[註 74] 김도화, 「罷兵後自明疏」,『척암선생별집』권1. ☞

[註 75] 권상규, 「遺事」,『星臺先生文集』-附錄(權肅 제공, 서울 강북구 수유동 거주). ☞

[註 76] 권세연, 「안동격문」,『독립운동사자료집』2, 1972 ; 권세연, 「창의격문」(권숙 소장). ☞

[註 77] 유정호, 「洗山公家狀」, 『坪山世蹟』권4(한국학중앙연구원도서관 소장). ☞

[註 78] 김도화, 「愚軒行狀」,『愚軒文集』권10-行狀 ; 유지호, 「愚軒墓碣銘」, 『坪山世蹟』권4. ☞

[註 79] 조동걸, 「안동유림의 도만경위와 독립운동상의 성향」,『대구사학』15·16, 대구사학회, 1978. ☞

[註 80] 김동섭,『유림단독립운동실기』; 허선도, 「3·1운동과 유림계」,『3·1운동 50주년기념논문집』 동아일보사, 1969 ; 남부희,『유림의 독립운동사연구』 범조사, 1994. ☞

[註 81] 이우성, 「성재전집 해제」,『허전전집』1, 아세아문화사, 1974. ☞

[註 82] 배종호,『한국유학의 과제와 전개』2, 범학, 1980. ☞

[註 83] 현상윤,『조선유학사』 280~283쪽 ; 김길환,『조선조유학사상연구』 일지사, 1981, 208~212쪽. ☞

[註 84] 김길환,『조선조유학사상연구』 208~215쪽. ☞

[註 85] 윤봉구, 「南塘韓公行狀」(한국학중앙연구원 도서관, 마이크로필름 참조). ☞

[註 86] 김복한, 「農隱李公敦弼墓誌銘」,『지산집』권12-墓誌. ☞

[註 87] 이설, 「代人祭農隱李公文」,『복암사집』祭文(1902). ☞

[註 88]『志山年譜』신미년조) 참조 ; 김복한, 「祭農隱李公文」,『지산집』권6-祭文. ☞

[註 89] 김복한, 「與田艮齋」, 『지산집』권3-書. ☞

[註 90] 김노동, 「跋」,『지산집』권15. ☞

[註 91] 김복한, 「고남당선생묘문」,『지산집』권7. ☞

[註 92] 김복한, 「고남당선생묘문」,『지산집』권7. ☞

[註 93] 임한주,『洪陽紀事』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2, 258쪽). ☞

[註 94] 임한주,『독립운동사자료집』2, 262쪽. ☞

[註 95] 임한주,『독립운동사자료집』2, 269쪽. ☞

[註 96] 임한주, 「祭文」,『지산집』권15. ☞

[註 97] 송상도, 「李偰條」,『기려수필』. ☞

[註 98] 이설, 「통문」,『복암사집』. ☞

[註 99] 김복한, 「復菴李公墓誌銘」,『지산집』권12-墓誌. ☞

[註 100] 이설, 「凝上斥洋倭疏」,『복암사집』권13. ☞

[註 101] 기정진, 「壬戌擬策」,『노사집』권3-疏. ☞

[註 102] 기정진, 「병인소」,『노사집』권3-疏. ☞

[註 103] 금장태, 「한말 일제하 한국성리학파의 사상계보와 문헌에 관한 연구」,『철학사상의 제문제』3 참조. ☞

[註 104] 금장태, 「한말 일제하 한국성리학파의 사상계보와 문헌에 관한 연구」. ☞

[註 105] 정재규,『老栢軒集』권6-雜著. ☞

[註 106] 정재규, 「與湖南諸公」,『노백헌집』권26-書. ☞

[註 107] 금장태,『유학근백년』 박영사, 1984. ☞

[註 108] 기우만, 「丙寅疏」,『송사집』권2-疏. ☞

[註 109] 기삼연, 「上疏文」,『성재기삼연선생전』 한국문화사, 1990. ☞

[註 110] 기삼연, 「檄書文」,『성재기삼연선생전』참조. ☞

[註 111] 기삼연의 의병 활동에 대하여는 강길원의 「성재 기삼연의 항일투쟁」,『한민족독립운동사논총』 수촌박영석교수화갑기념논총간행위원회, 1991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