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의병의 개념과 시기구분 / 한말 전기의병

몽유도원 2014. 1. 13. 09:37

제9권 한말 전기의병 / 제1장 의병의 개념과 시기구분

1. 의병의 개념

2. 한말 의병의 시기구분과 연구동향


1. 의병의 개념


한말 의병전쟁은 국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일제의 침략에 무력항쟁한 민족운동을 말한다. 갑오변란과 청일전쟁을 전후하여 일제의 군사적 위협은 노골화되어 나타났다. 이에 따라 1894년 이후 조선인들은 반침략을 시대적 과제로 인식하게 되었으며 의병을 조직하여 국가와 민족을 수호하기 위한 피의 항쟁을 전개한 것이다. 따라서 의병전쟁은 한민족의 반침략 투쟁이며 아울러 국권침탈 이후 독립전쟁을 일으키게 한 정신적·인적 토대가 된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는 실로 크다.

의병이란 맥켄지가『The Fight For Freedom』에서 ‘Righteous Army’라고 표현하고 있듯이 ‘정의를 위해 일어난 군대’라는 뜻이다. 그러나 한말 의병은 이와 같은 개념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한 것 같다. 한말 의병의 의義는 정의와 충의의 의義이며 동시에 ‘군신유의君臣有義’의 의義이다. 즉 한말 의병은 정의심과 충의정신에 입각하여 개화정권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동시에 조선에 대한 침략 야욕을 드러내고 있는 일본을 구축하기 위해 반침략 구국항쟁을 전개하였으니 의병전쟁은 민족주의운동으로 발전될 수 있었다. 비록 의병이 초기단계에는 유학자가 중심이 되어 반침략 반개화 항쟁을 전개하였으나 점차 민족의 위기가 심화되면서 여기에 농민·포수·보부상, 그리고 동학교도까지 의병에 합세하여 민족적 대항전을 전개해 간 것이다. 후기의병의 경우에는 척사사상보다 반개화론과 특히 반봉건 이념이 강하게 나타난다. 의병을 민중운동사의 측면에서도 평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와 같이 의병이란 충의정신에 입각하여 외적의 침략에 대항하여 자발적으로 무장항쟁한 군사집단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즉 의병을 규정하는 첫번째 요인은 그 주요이념이 주자학 사상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의병은 임진의병에서 비롯되었다 할 수 있다. 동학농민군의 제2차 봉기에서 항일운동의 성격이 보인다. 하지만 이를 ‘의병적’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역사적 개념으로 의병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비록 동학농민군들이 자신들을 충의군이라고도 불렀을지라도 동학의 배일排日 이념은 동학사상에서 찾아야 할 것이며, 반봉건적 사회개혁 또는 혁명운동의 차원에서 그 의의를 평가해야 할 것이다.

의병의 개념을 규정하는 두번째 요건으로 그 투쟁의 중심대상이 외세라는 점이다. 1894~1895년간 동학농민전쟁이 전개될 때 동학농민군에 대항하기 위하여 일부 지역에서는 민군을 편성하였다. 갑오의려甲午義旅 일명 儒會軍라 불리는 이 민군은 자신들을 의병이라고도 불렀다. 안중근安重根의 공초를 보면 그의 조부가 의병장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바로 갑오의려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갑오의려는 관군 또는 일본군과 연합하여 동학농민군과 항쟁하였으니 항쟁의 대상이 외세가 아닌 동학군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들 역시 의병과도 구분된다. 민란에 참여한 세력 역시 그러하다. 이들 중에 일부가 비록 충의군적인 성격을 띠었다 하더라도 투쟁대상이 관군이었으니 이들 역시 의병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이처럼 의병의 개념을 분명히 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의병적 성격’ 또는 단순히 ‘정의의 군대’ 라는 ‘일반적 개념으로서의 의병’과 임란

과 한말 외세의 침략에 주자학 사상의 충의정신에 기초하여 무장투쟁한 ‘역사적 개념으로서의 의병’과는 구별해야 할 것이다.


2. 한말 의병의 시기구분과 연구동향


한말 의병에 대한 연구가 해방 후 시작되면서 의병사의 체계화를 위한 시기구분은 여러 갈래로 시도되었다. 그간 제기된 시기구분법으로는 2시기 구분법, 3시기 구분법, 4시기 구분법 등이 있다. 위 구분은 시간의 원근, 봉기원인의 차이, 참여층의 변화에 따른 의병부대의 성격 차이 등을 기준으로 시도되었다고 할 수 있다.

2시기 구분법은 갑오 을미의병을 전기의병, 을사 정미의병을 후기의병으로 구분하는 것으로, 주로 시간의 원근과 주도세력의 성격의 차이로 나눈 것으로 보인다. 3시기 구분법은 그간 주로 이용되던 방법으로 의병연구의 효시라 할 수 있는 뒤바보의 「의병전」에서 비롯되었다. 註1) 이 3시기 구분법은 해방 이후 을미의병·을사의병·정미의병 등 간지를 사용한 분류법으로 일반화되었다. 4시기 구분법은 1970년 강재언姜在彦의 주장에서 비롯된다. 그는 ① 초기단계1895. 10~1896. 5 ② 재기단계1905. 4~1907. 7, ③ 고조단계1907. 8~1909. 10, ④ 퇴조단계1909. 10~1914로 구분하였다. 이 구분법은 1909년 일본군에 의한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이후 의병의 퇴조와 독립군으로의 전환과정을 별도의 한 단계로 파악한 구분법이다. 註2)

또한 이 구분법에 최근의 연구성과까지를 수용하여 ① 전기의병1894~1896, ② 중기의병1904~1907. 7, ③ 후기의병1907. 8~1909. 10 ④ 전환기의병1909. 11~1915의 4단계로 구분하기도 한다. 이 구분에서는 조선말 반일의병의 기점을 기존의 1895년 을미의병에서 1894년 갑오의병으로 고쳐 잡고 있으며, 의병의 하한을 1914년 대한독립의군부의 해체가 아닌 1915년 채응언의 체포로 잡고 있음이 주목된다. 註3)

의병사의 시기구분과 관련하여 북한의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에서 출간한『조선근대반일의병운동사』도 참고된다. 이 책은 저자를 밝히지 않아 분명하지는 않으나, 오길보·김관수 등 의병연구자들의 검토를 거쳐 1988년도 이전까지 북한 의병연구 성과를 체계화한 의병연구서로 보인다. 이 책에서는 의병의 단계를 ① 19세기 말 반일의병운동1895~1896, ② 20세기 초 반일의병운동1904~1914의 2단계로 구분하고 있다. 그중 제2단계는 다시 ① 반일의병운동의 재개1904~1905, ② 반일의병운동의 앙양1906~1907. 7, ③ 반일의병운동의 확대발전1907. 8~1909, ④ 일제의 조선강점을 전후한 시기 반일의병운동1910~1914의 4단계로 나누고 있다. 여기에서는 의병의 기점으로 1895년 7월 김원교金元喬가 평안도 상원에서 봉기한 상원의병을 잡고 있다. 동시에 1894년 안동의병에 대하여도 언급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북한의 연구에서는 1914년 김정환 의병의 유정리전투를 의병의 하한으로 잡고 있음이 우리의 연구와 다른 점이다. 註4)

한말 의병은 근대민족운동의 원형으로 중시되어 왔으며 동시에 후기 의병의 경우에는 평민의병장의 진출이 확대되면서 민중운동으로서도 주목되었다. 이에 따라서 의병사는 한국근대사에서 중요한 주제로 인식되어 왔으며 연구도 꾸준히 진행되었다.

의병에 관한 연구는 1960년대 들어 비로소 근대민족운동의 태동으로서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1970년대는 화서학파 가운데서도 특히 유인석의 의병활동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1980년대는 의병연구자가 전반적으로 증대하여 많은 연구성과가 산출되었다. 그러나 전기의병에 대한 이해 수준은 여전히 부족한 상태이다. 1990년대 들어서 전기의병에 대한 연구는 심층적으로 이루어졌다. 그간 연구가 요구되었던 유성의병·홍주의병·제천의병·진주의병·강릉의병·김산의병·나주의병 등 의진義陣에 관한 연구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의병장 개인 연구와 지역별로 편성되었던 의병진의 분석에만 매달려 왔음도 간과할 수 없다. 그 결과 의병장 개인의 행적이 위인화 되었으며, 의병진에 대한 연구가 지역사 연구에 도움을 준 것도 사실이지만, 지역 연고주의와 지역 우선주의를 부추긴 측면도 없지 않았다. 註5)

2000년대 의병 연구 역시 의병장과 의진 연구에 집중되어 왔다. 의진 연구 중에는 여전히 제천의진 연구가 많다. 태인·능주·영광 등 호남지역 의병, 예천·청송·안동·의성 등 영남의병, 그리고 북한지역 의병 연구가 있다. 의병장 중에는 유인석이 여전히 관심이 높은 인물임을 알게 해 준다. 이남규에 대한 연구가 발표되었으며, 최익현·신돌석·이강년·민용호·김도현·민긍호 등 이미 연구가 있는 인물에 대한 새로운 연구도 있으며, 김도화·이범윤·이세영·강기동·원용팔 등 비로소 밝혀진 인물도 있다. 註6)

최근의 연구에서 의병의 성격을 새로 규정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전기의병을 갑오변란, 을미사변, 단발령 외에 명성왕후의 국장, 갑오개혁, 아관파천 역시 봉기의 계기가 된 것으로 파악하고, 이에 따라 전기의병을 명성왕후 복수의병, 갑오개혁 반대의병, 단발반대 의병, 환궁운동의병 등 각기 성격이 다른 의병으로 파악하였다. 또한 전기의병은 지방의 양반유생이 중심이었으나, “어느 정도 중앙의 정치세력 심지어는 러시아공사와도 관련되어 있었다.”고 하면서 전기의병을 ‘정치적 목적을 가진 움직임’이었다고 전제하고 있다. 註7) 한편 전기의병에 일부의 정치적 복권을 기도한 정치가들이 재야유생들과 연계를 시도하고 의병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밀지密旨’가 역할을 한 점 등을 새롭게 밝혔다. 註8) 그러나 복권을 위한 일부의 ‘고종세력’의 역할을 지나치게 강조한 느낌이 있다. 註9)

의병내부의 갈등을 밝힌 연구도 나왔다. 註10) 즉 의진 지휘부의 이념간의 차이화서학파의 心說論爭 또는 안동의병의 屛虎是非와 지역간의 차이로 인한 상호간의 대립과 갈등이 의병진을 분열시켜 전력의 약화를 초래하였다는 것이다. 지휘부와 병사층간의 갈등도 지적하면서 이것이 을미의병의 취약점이었다고 비판하였는데, 이는 의병의 한계를 지적한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동안 자료의 부족으로 연구의 공백이었던 전기의병을 진압한 일본군의 실체를 밝힌 연구도 나왔다. 일본 방위청의 자료를 토대로 일본군의 편제와 규모를 밝히고 일본군과 의병과의 전투상황과 일본군에 의한 의병학살의 내용을 밝혔다. 註11) 일본 외교사료관에 소장된 의병관련 자료 중에서 일본공사와 경성·부산·인천·원산주재 일본영사들이 의병의 상황을 본국에 보낸 보고서도 번역, 간행되었는데 이 자료는 전기의병이 일본의 경제적 침탈에 타격을 준 것을 실증하고 있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註12) 이외에도 한말의병을 4단계로 구분하여 종합을 시도한 연구물 註13)과 경성의병과 대한협회 경성지회와의 관계, 또는 전북지역 의병과 동학의 관계를 비교 분석한 연구도 나왔다. 註14)

한편 일본에서 오랜만에 의병에 대한 연구물이 나왔다. 이 연구들은 그간 이용되지 않았던 일본 방위청 자료를 발굴하여 일본헌병대와 헌병보조원에 의한 의병 탄압의 실상을 밝혔다. 주차헌병대에 의한 의병 탄압의 실상을 구명하면서 특히 수비대가 자행한 의병과 주민에 대한 학살이 한국 내외의 비난을 받게 되자 일제가 헌병대를 파견하였으며, 註15)의병탄압에 나선 헌병보조원의 실상과 ‘심성心性’을 밝히기도 하였다. 註16)헌병보조원에 대하여는 이미 모집과 배치, 임무 그리고 그들의 밀정활동 등이 밝혀진 바 있다. 註17) 이에 비하여 해산군인이나 빈민들이 생활기반이 붕괴된 상태에서 ‘직업’으로서 헌병보조원이 되어 민족과 생존이라는 이중구조 속에서 고민하는 참담한 ‘심성’을 그려낸 점에서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했다고 본다.

한말 의병전쟁은 크게 전기, 중기, 후기의병으로 구분된다. 이 책에서는 전기의병을 중심으로 살펴보되, 우선 1894~1896년간에 전개된 전기의병의 봉기원인과 이념을 총체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사상적 배경으로 위정척사론의 시대변천에 다른 특성을 검토하여 의병투쟁을 위한 이론으로 기능한 점을 밝히고 의병병사층을 형성한 농민들 주장이 의병투쟁의 이념적 배경으로도 작용된 점을 설명하고자 한다. 이를 위하여 화서학파華西學派, 노사학파蘆沙學派, 남당학파南塘學派, 정재학파定齋學派의 사상적 특성과 주요 인물들의 행적을 검토하였다. 다음에 전기의병 봉기의 주요 원인으로 을미사변과 단발령 공포 외에 ‘갑오변란’과 ‘변복령’의 공포 역시 의병봉기의 또 다른 동인이 되었음을 검토하고자 한다.

전기의병의 대표적 사례로서 우선 안동의병과 상원의병, 그리고 을미사변 직후 첫 봉기인 유성의병을 살펴본다. 단발령 공포 후 봉기한 의병 중에서 제천의병·홍주의병·안동의병·김산의병·진주의병 등을 중심으로 전기의병의 전국적 확대과정을 살피고자 한다. 또한 의병들의 갑오경장에 대한 인식과 태도를 살펴 그들의 반개화 투쟁을 살피고자 한다. 아울러 의병을 진압한 일본군의 무기와 전투부대의 규모 및 배치상태는 물론 의병이 일본군과 항전한 내용을 일본정부측의 보고서를 중심으로 고찰하여 의병의 반침략성을 구명하고자 한다. 끝으로, 의병의 참여층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고 의병의 봉기 이념을 구명하여 의병 투쟁이 남긴 의의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註 1] 뒤바보, 「의병전」,『독립신문』 1920년 4월 27~5월 27일. ☞

[註 2] 강재언, 「반일의병운동의 역사적 전개」,『조선근대사연구』 일본평론사, 1970. ☞

[註 3] 조동걸,『한말의병전쟁』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9. ☞

[註 4]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조선근대반일의병운동사』 1988. ☞

[註 5] 의병연구에 대한 연구사적 검토는 다음의 글들이 참고된다. 

김상기, 「조선말 의병전쟁 연구의 현황과 문제」,『의병전쟁연구』하,지식산업사, 1990 ; 강길원, 「의병운동연구에 관한 쟁점과 과제」,『한민족독립운동사』12, 국사편찬위원회, 1993 ; 김상기, 「의병전쟁에 대한 연구성과와 과제」,『한국사론』25, 국사편찬위원회, 1995. ☞

[註 6] 권구훈, 「고광 이세영의 민족운동」,『건대사학』9, 건국대 사학회, 1997 ; 권영배, 「구한말 원용팔의 의병항쟁」,『우송조동걸선생정년기념논총』 우송 조동걸선생정년기념논총 간행위원회, 1997 ; 김도훈, 「한말 강기동의 의병활동과 그 성격」,『군사』35, 국방군사연구소, 1997 ; 김희곤, 「안동의병장 척암 김도화의 항일투쟁」,『역사교육논집』23·24, 역사교육학회, 1999. ☞

[註 7] 이상찬,『1896년 의병운동의 정치적 성격』 서울대박사학위논문, 1996 ; 이상찬, 「1896년 의병과 명성황후 지지세력의 동향」,『한국문화』20, 서울대 한국문화연구소, 1998. ☞

[註 8] 오영섭,『화서학파의 사상과 민족운동』 국학자료원, 1999 ; 오영섭, 「을미제천의병의 참여세력 분석」,『한국독립운동사연구』14,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0. ☞

[註 9] 조동걸, 「의병전쟁의 특징과 의의」,『한국사』43, 국사편찬위원회, 1997. ☞

[註 10] 권대웅, 「을미의병기 의병부대 내부의 갈등」,『국사관논총』90, 국사편찬위원회, 2000. ☞

[註 11] 김상기, 「전기의병의 일본군에 대한 항전」,『한국근현대사연구』20, 한국현대사연구회, 2002. ☞

[註 12] 김상기 편역,『일본외교사료관소장 한말의병자료』Ⅰ·Ⅱ,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1. ☞

[註 13] 국사편찬위원회, 「항일의병전쟁」,『한국사』43, 1997. ☞

[註 14] 박민영, 「1908년 경성의병의 편성과 대한협회 경성지회」,『한국근현대사연구』4, 한국근현대사연구회, 1996 ; 이강오, 「구한말 의병의 전북지역 활동과 동학과의 관계」,『향토사연구』8, 한국향토사연구전국협의회, 1996. ☞

[註 15] 이승희, 「日本軍の丁未義兵鎭壓過程における憲兵隊擡頭問題」,『文學硏究論集』15, 明治大, 2001. ☞

[註 16] 신창우, 「憲兵補助員制度の治安維持政策的意味とその實態」,『朝鮮史硏究會論文集』39, 2001. ☞

[註 17] 권구훈, 「일제 한국주차헌병대의 헌병보조원 연구」,『사학연구』55·56, 한국사학회, 199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