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내선일체의 정치홍보 강화와 선전활동 / 1920년대 일제의 민족분열통치

몽유도원 2013. 7. 20. 21:42

제4장 내선일체의 정치홍보 강화와 선전활동 

제1절 조선총독부의 조사 및 선전활동 83 

1. 조선총독부의 조사활동 83 

2. 대내외 정치선전 및 정보수집 활동 87 

1) 일본시찰단 파견과 운영 88 

2) 조선정보위원회의 설치와 활동사진반 운영 100 

3) 정보휘찬 시리즈의 간행 103 

4) 관동대지진 이후 ‘ 내선융화 ’ 선전 강화 107 

제2절 민간 정보수집과 여론 조성 112 

1. 내선융화의 선전과 식민지 현실 113 

2. 민간 일본인을 통한 선전활동 115 

3. 동광회의 활동 121 

4. 조선사정기밀통신의 운영 123 

제3절 조선총독부의 유교정책과 사회교화운동 127 

1. 경학원의 장악 129 

2. 지방향교의 변화와 분열 132 

3. 향교의 사회교화사업 135 

4. 친일유교단체의 결성과 교화사업 138 

5. 친일유림단체 대동사문회와 유도진흥회 141 



1. 조선총독부의 조사 및 선전활동


1. 조선총독부의 조사활동


조선인의 강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친일세력을 앞장세워 조선인 스스로 합방을 청원했기에 병합하였다고 내외에 선전하였던 일본은 강제 병탄에 성공한 이후에도 선전공작을 멈추지 않았다. 1910년대 일제는 헌병경찰을 동원한 무단통치로 조선인을 굴종시켰지만 국제사회를 향해서는 총독부의 시정을 문명과 개발로 과장하면서 조선을 근대화로 이끌었다고 선전하였다. 강점 이래 조선총독부는 조선 지배의 정당성을 주창하며 봉건시대의 조선의 구관 조사작업에 착수하였다. 조선 지배를 합리화하고 식민지 동화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근거를 마련하기 위한 조사활동을 벌였다. 註1) 극렬한 항일운동을 누르고 무력을 앞세워 조선을 식민통치하고 있지만 완전 동화시키는 과정은 점진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를 위해 조선 고유의 구관습과 법제를 조사·연구한 바 있다. 


식민지에 대한 기초조사사업을 위해 취조국을 두고 “① 행정상 각반의 시설에 자료를 제공하고, ② 사법재판의 준칙이 될 만한 관습을 제시하고, ③ 조선인에게 적합한 법제의 기초를 확립하기 위해 조선 전토에 걸쳐 각지의 관습을 조사하고 또 전적典籍을 섭렵하여 제도 및 관습의 연원”을 밝히는 업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註2) 특히 조선관습의 조사를 위해서 조선인 학자 30여 명을 대거 충원하였다. 그리고 이어 법률취조위원회가 따로 구성되어 식민법제 작성에 돌입했다. 이로써 취조국은 주로 관습 및 제도조사를 담당하면서 식민지 법제의 기초자료를 제공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조선의 제도와 구관에 대한 조사에 착수한 註3) 취조국은 구관제도 조사사업, 규장각 도서 정리, 대전회통 번역사업 등의 업무를 수행하다가 1912년 3월 18일에 조선민사령·조선형사령이 공포된 직후에 폐지되었다. 


1912년 3월 27일 조선총독부 관제개정 때 관방 직속의 참사관실이 부설되면서 註4) 기존 취조국 관제에 있었던 “법령의 입안 및 심의” 항목이 삭제되고 조선의 제도 및 구관舊慣 조사업무는 참사관실로 이관되었다. 그러다가 1915년 4월 30일 칙령 제62호로 중추원관제中樞院官制가 개정되면서 구관 및 제도에 관한 조사 업무는 5월 1일부터 구관제도조사는 중추원 소관 업무가 되었다. 註5) 본격적인 구관조사는 3·1운동이 일어난 후에 와서야 착수되었다. 


전통시대 조선에 관한 조사사업은 조선의 역사와 전통을 이해하고자 한 것이 목적이 아니라 조선을 영구히 식민통치하기 위한 당위성을 관습과 역사에서 근거를 찾고자 하였다. 그것은 미개하고 악한 존재인 조선을 버리고, 문명하고 선한 존재인 일본과 ‘일시동인一視同仁’의 목표를 향하여 전진해 나가는 것이 조선통치의 목표이자 이유로 선전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자기 합리화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일본 우대는 상대적으로 근거없는 조선 멸시관을 일본인들에게 심어주었다. 


조선 식민화의 과정은 침략과 파괴가 아닌 구제불능의 조선을 일본이 구해준 시혜施惠로 인식하도록 유도하였다. ‘일시동인’의 동화사업을 비판하고 저항하는 조선인은 어리석고 우둔한 자들로 내몰고 철저히 취체를 가했다. ‘내선융화’와 ‘일시동인’의 가치는 새로운 일본화로 나가는 길이며 동시에 조선민족문화말살의 길과 동일시하였다. 그래서 ‘신일본주의자’들이 빠르게 민족운동계에서 외면당하게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민족분열을 가속화하였다. 

 

관제개정 후 중추원 직원


재등실은 부임한 후 가능한 한 조선의 문화와 구관을 존중한다는 입장을 표명하였고, 조선총독부는 시정개선 일환으로 본격적인 사회·문화 조사활동을 시작하였다. 1921년 4월부터 조선의 관습과 사회·문화 실태 조사를 위한 새로운 계획을 수립하고 6월부터 조사에 착수했다. 향후 6개년을 1기로 잡고 조선의 제도와 관습, 마을 등에 대한 조사와 각 도내 대표 부락 선정 등의 작업을 시작하면서, ‘일선동조日鮮同祖’의 역사적 근거를 찾기위해 조선과 일본 양 민족의 동원同源·동조同祖에 관한 조사와 양 민족의 과거 교류하고 교통한 역사 조사에 주력하였다. 이 일을 수행하기 위해 19명의 조사위원이 임명되었는데, 이중 조선인은 6인이었다. 중추원은 조선총독부에서 의도하는대로 제도와 풍속에 관한 조사항목을 정하여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편찬사업에 착수하였다. 註6) 


구관조사사업은 통치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역사적 근거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목적을 갖고 있으나 대민적으로는 총독부가 조선의 문화와 구관을 존중하고 있다는 증거로서 선전·홍보되었다. 1910년대에는 각 분야에서 적절한 식민정책을 수립하기 위한 기초조사에 치중했다면, 3·1운동 이후 ‘문화정치기’에는 신문·잡지, 또는 조사자료집 발간 등을 매체로 삼아 선전홍보활동에 적극적으로 매진한 사실을 꼽을 수 있다. 조선총독부 통치의 모든 분야에서의 성과를 통계적으로 제시하고 이를 내외에 과시하였으며 조선통치의 발전 논리로 선전하였다. 


2. 대내외 정치선전 및 정보수집 활동


조선총독부는 문화통치를 선언하면서 조선의 전통과 문화를 존중하고 민심을 통치이념에 반영한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나 이면에서 조선 문화의 열등성을 부각시키고 이른바 ‘선진문명=일본문화’라는 도식화된 인식을 확산시켜 조선문화의 정체성을 일본화日本化로 전이轉移시키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조선총독부는 각종 조사·심의 기관의 위원회를 두고 여기에 민간인을 참여시켜 ‘민의’를 존중하고 민간의 여론과 비판을 수용하여 통치정책을 수행하고 있는 듯한 모양을 갖추고 선전에 나섰다. 이들 각종 위원회에 민간인으로 재조선 일본인들이 참여했으며 조선인 경우는 믿을 만한 친일분자가 아니면 절대 선임될 수 없었다. 1920년 초에 조직된 교육조사위원회·교과서조사위원회·정보조사위원회 등 각종 조사위원회의 위원에는 “민간에서 학식 경험있는 자 수명을 위원으로 위촉”한다고 했지만 그들 대부분은 총독부 관계의 관료들이었다. 이들에 의해 수집되는 여론이란 총독부의 주문 사항을 둔갑해 내놓은 것에 불과하였다. 


한편 조선총독부는 총독부 시정을 주지시킨다는 목적으로 일본시찰단을 구성하여 일본에 파견하였고, 각 지방마다 순회 강연회와 강습회를 열어 계몽운동을 펼쳤다. 뿐만 아니라 활동사진 상영, 각종 인쇄물과 홍보엽서들을 제작·반포하였다. 1910년대에는 조선총독부에서 자체적인 조사활동을 벌이고 이를 기초된 고안된 통치에 반영하는 수준이었으나 문화정치기에는 관제개혁을 시행하고 그리고 통치 효과를 거두기보다는 민중을 대상으로 한 선전홍보를 우선하였다. 


문화정치기에 재등실은 3·1운동 이후 적극적인 사회교화사업을 전개하여 불안한 시정을 회복하고 조선인의 환심을 얻고자 노력하였다. 사회교화 내지는 사회구제사업으로 독립운동가들의 항일투쟁 의지를 약화시키고 과격화를 막을 수 있다고 보다고 보았다. 그러나 사회교화사업은 다방면에서 전개되어 그 범위가 너무 방대하지만 이를 개략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일본시찰단 파견과 운영


재등실은 「조선민족운동의 대책」에서 밝히고 있듯이 조선통치를 안정되게 하려면 사회 중견층을 친일세력으로 포섭하고 그들을 이용하여 사회의 안정망을 구축해야 했는데, 1910년대 병합과정에서 일본에 협력한 양반 상층부의 친일파들은 조선민중에게 완전 권위를 상실했기에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었다. 이미 반민족친일 인물들로 주목받아 민족운동계에서 반역자로 낙인찍힌 이들은 조선총독부의 ‘신시정’을 뒷받침해 줄 수 없었다. 註7) 그래서 조선 내에서 영향력 있는 이들을 빠른 시일 내에 친일세력으로 포섭하는 방법은 시찰단을 구성하고 일본 본토로 파견해서 교화하는 것이다. 


조선의 중견인물을 선발하여 일본시찰단을 구성하여 파견하는 일은 1910년대부터 운영되어왔으므로 새로울 것이 없는 사업이었다. 다만 1920년대 일본시찰단의 파견 註8)은 ‘문화정치’라는 새로운 지배정책이 수립되고 그 이면에서 동화정책이 강화되어 가면서 1910년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여러 직무에 종사하는 이들이 일본시찰을 다녀왔다. 註9) 그런데 1920년대에는 중앙·지방의 언론기관과 행정기관, 각종 금융기관, 각 지방의 산업기관, 그리고 각 종교단체·청년단체·교육단체·사회사업기관·관변단체 등에서 선발되었고 직종도 다양해졌다. 註10) 일본시찰단 운영 예산은 총독부 및 각 도와 군의 지방사업비의 사회사업비나 사회구제비 예산에서 일본시찰 항목을 편성해 운영하는 등 조선총독부의 전격적인 지원을 받았다. 註11) 


3·1운동에서 조선 민중의 힘을 경험한 일본은 사회 일반 대중의 두터운 지지를 필요로 했다. 과거 상층 친일분자의 경우는 정치적 목적과 정치적 반대급부를 제공하는 것만으로 그들의 지지를 끌어낼 수 있었지만, 일반 대중의 경우는 감정적 변수가 많기 때문에 친일세력으로 끌어들이는 데는 좀더 정치한 기술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일본시찰의 과정은 교묘하게 장치된 프로그램에 의해 진행되었다. 일반 중견층의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일본의 근대화된 사회시설을 직접 돌아보게 하고 상대적으로 뒤떨어진 조선과 비교함으로써, 일본의 근대화를 동경하여 감성적인 민족독립의식을 갖기보다 현재 조선에 필요한 것은 물질문명의 발전이 우선한다고 교화시키고 조선민족의 비전을 전망하는 민족적 감성을 자극하고자 했다. 


1920년대 일본시찰단 파견의 주최는 언론기관과 행정기관, 산업관련 단체와 종교관련 단체, 사회사업기관, 교육기관, 그리고 관변단체 등이었다. 註12) 그중 실무적 시찰의 필요에 의해 파견된 경우를 제외하고 식민지통치의 안전망을 넓히기 위한 필요에서 청년·교원·군수 등으로 그룹화한 시찰단이 파견되었다. 이들 시찰단은 일본의 농업·공업·교육계와 토목·위생·사회구조·군촌郡村의 시설들을 돌아보았고, 조선으로 돌아오면 면구동面區洞 별로 분담하여 강연회나 간담회를 열었다. 조선총독부에서는 이 과정을 활동사진에 담아 홍보영화를 제작하여 지방민들에게 상영토록 하여 일본시찰의 경험을 공유하게 하였다. 또한 시찰 감상문을 언론매체에 소개하여 시찰 효과를 극대화하였다. 註13) 감상문 혹은 여행기로 소개되는 대부분의 내용은 일본의 시세에 감탄을 보내고 조선의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내용들이 주를 이루었다. 註14) 일본의 식민지 통치는 수탈이 아닌 조선을 근대화·문명화의 길로 이끌어 준다는 의식을 심어주고 일본을 닮고 따르는 길만이 자신들의 사명이라 인식하게 함으로써 민족주의자가 아닌 동화주의자로서 중견세력을 육성하였다. 


1920년 초의 일본시찰단은 주로 일본에서 열리는 박람회를 견학하는 프로그램이었다. 註15) 그러나 시찰단은 단순 관광적 성격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고 註16) 일본의 발전과 우수성을 과시하며 조선의 열등감을 자극하는 차별을 조장하게 하는 분위기에 대한 비판이 있었다. 이에 따라 1923년 이후는 일본 내의 사회시설·모범농촌·우량조합·청년회(단)을 방문하고 산업시설과 행정사무 등을 시찰하여 좀더 식민통치에 필요한 실무화를 극대화하는 목적으로 운영되었다. 


1920년 5월에 청년시찰단이 구성되어 일본을 시찰을 하였는데, 註17) 이것은 민족운동계에서 청년운동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던 시대적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문화통치 선언과 함께 조선총독부가 어느 정도 결사의 자유를 보장해주자 1920년 초에 전국적으로 청년단체가 우후죽순으로 결성되자 조선총독부는 긴장하였다. 3·1운동으로 청년층의 사상이 ‘악화’되었다고 판단한 조선총독부는 청년들이 과격사상에 경도되지 않도록 지도하면서 체제에 순응하도록 통제하고자 하였다. 각 지방에서 불길처럼 일어나는 청년회 조직의 활동 수위를 조절하여 문화운동과 수양운동으로 유도하는 한편 민족 청년들의 청년운동의 청년회를 사회교화의 장으로 전환시켜감은 조선총독부 체제통치의 성공 여부를 가름해주는 바로미터가 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강압적인 통제보다는 청년들을 ‘순화’시켜야 할 방법을 모색하는 가운데 적극적으로 청년층의 일본시찰이 장려되었던 것이다. 


한편 사회교화사업을 담당하는 이들을 중심으로 한 시찰단이 구성되어 일본을 시찰하기도 하였다. 1923년 조선사회사업연구회 註18)의 전조선청년단 간부들로 구성된 시찰단은 조선총독부가 적극 지원한 대표적인 시찰단이었다. 註19) 이 시찰단은 사회교화사업을 담당하는 도道 이사관, 부府 이사관 및 촉탁들로 구성되어 일본 농촌을 시찰하였다. 


1924년 5월에 전남에서 조직된 시찰단은 부면 직원·청년·유림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연령이 30세 이하인 자로서 인물 우수, 사상 온건, 또 착실하여 시세時勢를 양해諒解하는 지방청년 중견자로서 지도자가 될 만한 자세가 되고 가급적 보통학교 이상 졸업자로서 국어일본어를 할 수 있는 자 중에서 이제까지 일본시찰을 한 일이 없고 신체가 건강하여 장도여행을 감당할 만한 자” 註20)로 선발되었다. 여기서 ‘시세를 양해’하는 자들이란 조선총독부의 통치방침에 협조하고 순응하는 자들로서 민족적 양심에 동요하지 않는 확실한 식민지통치의 협조자로 만들고자 하였다. 


교육을 담당하는 교원들은 조선총독부의 일본시찰단 파견 목적에 부합하는 주대상이었다. 조선인 교원들은 위험 세력이 될 수 있는 잠재적인 존재임이 3·1운동의 과정에서 드러났다. 민족의식으로 무장된 교사들은 일본의 통치 자체를 위협할 수 있는 존재이므로 식민통치에 우선하는 회유 교화 대상이었다. 註21) 


동경역에 도착한 여교사 내지시찰단(1921)


조선인을 교원으로 임명해 교육을 담당케 하는 일은 마땅치 않지만 그렇다고 일정한 교원자격을 갖고 있는 이들을 교육계에서 무조건 배제할 수는 없었다. 교사가 되는 단계는 사범학교를 입학할 때부터 인성검증을 받고 교육을 받으면서 단련되고, 교사에 임명되어서도 사상악화를 방지하고 재교육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음으로써 철저한 식민교육의 첨병이 되도록 하였다. 개인의 신상을 충분히 파악한다 해도 사상까지를 완벽하게 검증할 수 없기 때문에 조선인 교원에게 국민교육을 맡긴다는 것은 불안하고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교원시찰단은 다른 시찰단보다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교원시찰단은 1918년부터 시작되었지만 註22) 1920년에 들어와 본격화되었다. 1922년까지 3개년 동안 여자교원시찰단을 비롯해 20개의 교원시찰단이 파견되어 일본의 교육문화 시설들을 돌아보았다. 


일본시찰단은 구성원 중 조선인 군수 역시 주요 대상이었다. 1910년대 상층 귀족층의 친일화를 집중적으로 수행했다면 1920년대에는 이른바 식민지배의 중간층을 조선총독부의 지지층으로 회유하는데 열중하였다. 군수들은 대부분 일본인이었으나 조선인으로 군수가 된 이들도 있었다. 국민협회의 민원식은 구한말 이래로 군수직을 맡은 자인데, 강점 이후에도 군수직을 유지하였다. 그는 일찍이 일본시찰을 경험한 바 있는데 그 영향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철저한 친일분자가 되었다. 이러한 사례를 통해 일제는 일본시찰의 효과를 과대평가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군수시찰단이 파견될 때는 조선총독부의 활동사진반이 수행하여 일반 시찰의 과정과 일본 문물을 사진, 혹은 동영상으로 촬영해 귀국한 후 선전영화로 제작하여 일반 대중을 상대로 상영하였다. 註23) 당시로서는 첨단기기라 할 수 있는 활동사진의 상영은 민간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하였다. 1920년 9월 2일 재등실은 군수시찰단의 일본시찰에 대한 활동사진을 각 도지사를 초대한 자리에서 관람하고 일반에게도 관람케 하라고 지시하였다. 註24) 활동사진은 당시 20여 개소에서 상영되었으며 약 10만 명 이상이 관람하였다. 註25) 


내선융화를 도모하는 선전홍보 활동은 조선에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이는 일본 내의 조선 여론이 악화된다면 식민정책을 수행하는 조선총독을 비롯한 관료들 모두가 식민지 경영에서 어려움에 직면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사정」 註26)을 담은 동영상 등이 일본에서 상연되었고 일본인들에게 조선을 이해시키는 방편으로 삼았다. 1920년 5월부터 6월에는 동경·대판·명고옥 등지에서도 「조선 사정 소개」라는 제목으로 일본인들을 상대로 활동사진을 상영한 바 있다. 註27) 이렇게 하여 식민지 조선인에게는 일본의 발전을 선전하여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였고, 일본에서는 조선의 사정을 이해시켜 조선총독부가 일본 내의 긍정적 여론를 등에 업고 안정적으로 통치하고자 했다. 


강연과 활동사진이라는 매개를 이용하여 조선사정을 이해시키려는 노력은 관동대지진 이후에 더욱 활발해졌다. 1924년에는 한 번도 조선을 소개하지 않은 일본 동북지방으로 진출하여 강연과 활동사진을 통해 조선사정을 소개하였다. 당시 일본인의 조선관은 편견으로 가득하였고 특히 관동대지진 때 인식된 오해와 편견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한 사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 사람들은 내지를 이해하지 않고 있다며 입버릇처럼 말하면서 내지인들은 조선을 이해하지 않고 있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특히 이번에 순회한 지방은 고래 조선과 교섭이 없어 한층 그 감이 강하였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조선을 아직도 이국이라 생각하고 조선은 미개한 토지이고 산에는 나무가 한 그루도 없고 거기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모두 무취미한 사람들이다. … 조선인은 위험하다. … 조선이라는 2자를 들으면 어쩐지 불쾌감이 생긴다. … 조선인은 친하기 어려운 민족이다. … 내지인에 비하여 일단 낮은 단계에 있는 사람이다. …” 註28) 


이러한 일본인의 조선관은 조선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유포하고 조장한 소문이지만 일본인에게는 왜곡된 조선인관으로 자리 잡게 만들었다. 이 부정적이고 불균형적인 조선인관은 3·1운동 이후 조선총독부가 문화통치의 제일 정신으로 내세운 ‘내선융화’가 진정성이 없는 허상의 선전문구에 불과했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조선총독부는 일본제국주의와 조선민중 사이의 간극을 줄이고 이해시킨다는 명분하에 일본 각지에서 강연회와 활동사진 시사회를 공회당이나 극장, 또는 학교 등을 빌려 성황리에 개최하였다. 활동사진을 보고난 후에 관객을 대상으로 강연회를 갖거나 활동사진을 본 감상문을 제출하도록 하였다. 선대仙臺의 제1·2여학교와 황정荒町 소학교의 상급반 학생들에게 받은 감상문은 마치 합의나 한 것처럼 내용이 유사하였다. 즉 이전에는 미개한 조선에는 산물도 없고 사람들은 불결하며 민도는 낮아 조선인은 긴 곰방대 연초를 피우며 엿과 인삼을 파는 사람이라고 경시하였고, 조선에 대한 지식은 교과서의 한 두 항에 지나지 않아 거의 조선에 대한 지식이 없었으나 강연회와 활동사진을 보고는 이전과 다른 조선관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감상문에 적힌 특종의 내용을 통해 당시 상연된 활동사진의 내용을 유추해 보면, 대부분은 조선의 발전상을 보여주면서 총독부의 통치를 과시하고 조선 고유의 문화에서 ‘일시동인’·‘내선일체’의 장면과 사례를 소개한 것이다. 註29) 감상문 중 주목되는 내용으로는 “불령선인이 일어나는 것은 내지인이 나쁘기 때문이다”·“이반離反하려 하는 동포조선인를 동화하고 화합해 가는 것은 우리들의 양어깨에 짊어진 중대한 임무이며 사명이다”, “조선은 옛부터 우리나라에 공헌했던 나라이며 우리들은 크게 감사하며 이 민족과 따뜻한 교류를 맺고 싶다” 註30)라고 하는 내용도 보여진다.


유림단 내지시찰단


 이 정도의 감상문이 나오도록 유도했다면 어느 정도 조선총독부의 의도대로 성공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로 보면 조선총독부가 조선인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일본인을 대상으로 교화활동을 펼쳤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의 전개가 불가피했던 것은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양 민족간의 감정이 악화되었고, 이는 조선총독부의 통치안정에도 심각한 불안을 초래할 것이라는 자구책에 의한 것이었다. 


1925년 가을, 일본시찰단 일원의 기행문을 보면, 시찰단 일행이 광도현 내의 오吳 진수부에 도착하자 당시 진수부 장관이 나와 환영해 주었으며 여행지마다 관민 모두가 호의를 배풀어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오吳 진수부에서는 구축함을 타고 오吳를 시찰하였고 비행기와 잠수함까지 출동하는 등 실전의 일부를 관람하였다. 당시 사찰단 참여 일행의 면면은 알 수 없으나 시찰단원에게 군국주의 일본의 군사력을 은근히 과시하였다.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때면 도처에서 관민합동의 환영회를 열어 극진히 예우하여 감동을 주었다. 당시 시찰단이 방문했던 여러 곳 중에서 주목되는 곳이 두 곳이 있다. 먼저 대판 내선협회회內鮮協和會의 방문기이다. 


내선협의회는 관동대지진 때 동경에서 조선인 학살이 자행되자 재일조선인들에 대한 ‘보호구제사업保護救濟事業’을 표방하며 결성된 단체이다. 대판에는 동경보다 학생수는 적었으나 많은 조선인 노동자들이 거주하였다. 註31) 내선협화회는 이들을 대상으로 학교·직업소개소·공동숙박소·순회진료소 등을 경영해 좋은 성적을 올리고 있다고 선전하였다. 이들 시설의 설비비로는 10만원 정도의 비용이 필요한데, 대판 유력 방면에 의뢰하여 기부금을 모금하였다. 숙사 운영은 대판부大阪府로부터 매년 1만원과 조선총독부로부터 매년 1만원을 지원받고 그밖에 기금은 이자와 공동숙박소의 수입으로 충당하였다. 註32) 이러한 내선협화회의 활동을 “실로 암초의 밝은 등불”이라고 칭송하였다. 다른 한 곳은 풍기豊崎에 소재한 직업소개소 방문 경험을 소개하였다. 시찰단이 직업소개소에 병설된 진료소와 숙박소를 방문하고 목격한 것은 일 나가지 않고 자거나 쉬고 있는 조선의 청년들이었다. 청년들에게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가를 묻자 “죽지 못해 살고 있다”는 비통한 답을 듣는다. 이에 대해 필자는 확신도 없이 일본으로 건너와 곤궁한 생활을 하는 조선인들이 많다며 이들의 실상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대판에서 제일 두려운 것은 우리 동포인 조선인이다. 무엇 때문인가 하면 아무 생각없이 건너와 밥도 먹지 못하고 마침내 불량분자에게 감염되어 진면목으로 직업에 종사하며 간신히 자신의 생활을 지탱하고 있는 조선인을 향하여 불쑥 생활비를 빼앗으려 하고 응하지 않으면 매양 폭력을 사용하려서로 상조 상규하지 않으면 안되는 조선인 동지가 도리어 서로 반목하는 자가 많고 경찰관헌도 손들고 조선인동지의 범죄가 철저하게 취체되지 않아 분량분자가 더욱 발호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장탄식을 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註33) 


그리고 일정 중에 기옥현埼玉縣 입간군入間君의 고려촌高麗村을 방문하였다. 이 고려촌은 666년 고구려가 멸망하자 왕족인 약광若光과 고구려 유민들이 일본으로 건너와 세운 마을로 고구려인의 후예들이 살고 있는 촌으로 알려졌다. 시찰단 일행은 이 곳의 촌장과 소학교 교장의 안내를 받고 약광을 모시는 고려신사와 고려왕묘에 참배하였다. 고려촌 방문의 감상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촌민은 농업이 주이며 양잠도 상당히 성하여 1년에 생산액이 25만원에 달하고 있으며 빈부의 차이도 심하지 않아 진정 평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으니 정말로 축복이 아닐 수 없다. 3천여 년 전에 유리하던 민족의 후예는 어느 정도 진보하고 있는데 고국에 거주하고 있는 우리들은 이제까지 무엇을 했는가하며 부끄러움을 감당할 수 없는 바다. 註34) 


이처럼 시찰단의 일정 중에는 은근히 일본의 국력을 과시하는 반면 생존을 위해 일본에 무작정 이주한 조선인 노동자들의 암담한 현실을 투영시켰다. 일본 내에 소재한 조선 관련 역사의 자취를 돌아보는 코스를 통해 일본은 모범적이며 미풍양속의 나라라는 긍정적 이미지로 각인되는 한편, 조선은 미개하고 열등한 존재임을 부각시켰다. 결국 시찰단은 ‘일본의 조선통치는 대세’라는 의식을 심어주는 과정으로 프로그램화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시찰을 마친 후에는 ‘선진문명’ 단계인 일본에 대한 인식을 확고히 하고 ‘우매’한 조선 민중에게 널리 전파하며 총독부가 지도하는 ‘미풍양속’ 진작운동과 농사개량 등 농촌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던 것이다. 註35) 일본시찰 프로그램을 이수한 시찰단원들은 대부분이 사회의 중견으로 활동해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는 이들이기에 시찰을 다녀온 이후의 사회활동을 추적한다면 시찰단의 교화적 효과가 어느 정도인지 파악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2) 조선정보위원회의 설치와 활동사진반 운영 


조선총독부는 1920년 11월 20일 조선정보위원회 규정조선총독부 훈령 제 59호을 제정하여 조선총독부 관방 서무부 문서과에 정보계를 두고 조선정보위원회朝鮮情報委員會라는 비공식 부서를 설치하였다. 정보위원회 규정에 따르면 “조선사정을 내외 및 외국에, 일본 사정을 조선에 소개하고 시정의 진상과 시정방침의 주지, 보급을 도모” 註36)하며 ‘제국’ 일본이 식민지 지배정책을 재편성하는 과정에서 식민 본국인 일본과 조선을 포함한 식민지인, 그리고 유럽 등의 제3국에 대해 자국의 식민지 지배정책의 실상을 자신들이 의도한 바대로 전달하고자 한 목적에 의해 설치되었다. 註37) 정보위원회의 위원장은 정무총감이 맡았고 각 위원들은 조선총독부 관료들 중에서 선정·임명하였다. 註38) 조선인으로는 유일하게 이종국李鍾國  註39)이 정보위원으로 임명되어 활약하였다. 


일본 식민통치는 조선을 문명개화로 이끌고 근대화 발전과 동양평화에 기여하고 있으며 조선인도 일본통치를 은혜롭게 여기고 환영하고 있다는 선전하였다. 그러나 3·1운동은 전세계에 조선인의 처절한 독립항쟁의 의지를 보여주었으며 조선인의 평화적 시위을 무차별 발포로 탄압한 일본은 문명국에서 야만적인 폭력 국가로 전락하였다. 국제사회에 문명국으로서의 이미지를 내세워 식민지 통치를 미화하였다. 일본은 국제적으로 잘 관리해 온 이미지에 큰 손상을 입게 되었다. 일본은 이를 만회하고자 국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조선인 독립운동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이를 근절시키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고자 기초자료 수집과 선전활동을 정보위원회를 두게 된 것이다. 


일제는 총독부 관제 개편의 실행으로 조선인들의 불만을 어느정도 해소시키고 그 통치 효력이 과시적으로 어떻게 나타나게 될 것인가에 대해 전망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다만 조선에서 더 이상의 무단통치는 폐기되고 문화정치를 시행할 것임을 조선민중과 국외 한인사회, 그리고 국제사회에 공포하고 앞으로 통치의 변화 전망과 변모될 모습에 대해서만 선전·홍보하는데 열중하였다. 주목되는 것은 일본의 사정을 조선에 알리고 일본에는 조선 사정을 알리겠다는 선전이다. 일본의 앞선 근대화의 발전을 조선에 선전하며, 미개하고 근대화에 뒤쳐진 조선은 일본을 배우고 익혀 문명화에 노력하고 일본은 조선을 어떻게 해서든지 일본의 수준으로 끌어올려주고자 하는 역사적 책무를 갖고 있다고 공포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민족모순과 식민지 통치의 부조리 앞에서는 이를 덮어버리고 문제에 직면하지 않았다. 


일본의 통치를 받고 있는 조선의 사정을 미개에서 벗어난 발전과 문명의 이미지로 치장, 내외에 선전하는데 더 열의를 쏟음으로써 과거의 무단통치의 이미지를 극복하고자 했다. 註40) 이를 위해 조선정보위원회는 당시로서는 첨단기기라 할 수 있는 활동사진기를 동원하여 선전활동에 활용하였다. 이들 사업을 수행하기 위해 총독부 관방에는 활동사진반活動寫眞班을 별도로 설치하였다. 활동사진반에서는 주로 국내 전 지역에 총독부에서 기획, 제작한 각종의 교화영화들을 상영하는 일을 맡았다. 註41) 1920년 5월부터 6월 사이에서 동경·대판·명고옥 등지에서 「조선 사정 소개」라는 제목의 활동사진을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상영하였다. 註42) 활동사진들은 주로 조선총독부의 ‘내선융화책’과 동화정책을 선전하는 내용인데, 이를 통해 식민지 조선인에게는 일본사정을 이해시키고, 일본인에게는 조선의 사정을 이해시키는데 주요한 방편이 되었다. 


1922년 10월, 서무부 문서과의 정보계와 통계과의 업무가 통합되면서 새로이 조사과라는 부서가 신설되었는데, 이때부터 조선정보위원회의 업무는 신설된 조사과에서 담당하게 되었다. 註43) 이에 따라 조선정보위원회의 주요 업무인 시정선전 업무와 정보수집 업무가 분리되면서 정보의 조사 업무와 통계 업무가 별도 고유의 업무로 독립하게 되었다. 이것은 조사 방면의 업무가 전문화되고 중요시 되었음을 반영하고 있다. 조선정보위원회는 1924년 12월에 폐지되었다. 설치에서 폐지하기까지 약 4년간 활동하였다. 註44) 이 기간동안 조선정보위원회는 선전 잡지 및 정보 관련 소책자의 발행과 활동사진 상영, 그밖에 강습회·강연회의 개최, 대한민국임시정부을 포함한 조선인의 해외 독립운동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는 업무를 맡아 활약하였다. 


3) 정보휘찬 시리즈의 간행 


조선정보위원회에서 수집된 정보들은 『정보휘찬情報彙纂』이라는 시리즈 註45)로 간행되었다. 『정보휘찬』에 소개된 정보의 원 자료들은 조선총독부의 대외정책 수립과 선전활동에 긴요한 정보를 제공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정보휘찬』의 내용은 대부분 재외 조선인의 언론활동과 독립운동의 동향을 분석한 것들이다. 공개가 가능한 것만 『정보휘찬』에 게재되어 회 


정보휘찬 표지


람하고 그밖의 기밀정보들은 별도로 취급, 활용했으리라 본다. 『정보휘찬』에는 미국의 배일排日문제와 그 동향, 재미 한인사회의 규모, 조선인협회대한인국민회 註46)의 조직과 이승만·서재필·노백린·김규식·윤병구 등 미주에서 활동하는 애국지사들의 동향과 3·1독립운동이 발발하여 국외 한인사회로 전파되어가는 과정들을 분석하였다. 특히 『정보휘찬』 5호에서는 영국·미국에서 전개되는 조선인 독립운동의 동향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파악하고자 노력하였다. 


일본인 산상욱山上昶  註47)은 영·미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독립운동에 대해 강연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운동가들이 미국과 영국을 대상으로 한 선전활동의 경과, 註48) 외교주의와 무단주의로 갈라진 독립운동계의 파벌 註49)과 그들의 활동 상황, 그리고 임시정부의 대한적십자회 조직과 간호부 양성, 워싱턴 한국친우회와 대한인국민회의 활동들을 보고하였다. 註50) 


또한 1921년 1월 30일자 런던통신을 인용해 영국의 한국친우회 활동과 조선인들의 선전활동을 소개하고 영국에서 조선에 대해 공명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분석하였다. 註51) 그리고 영국 한국친우회가 설립된 이래 영국 내에서 조선문제에 대한 반응이 어떻게 전개될 지 불투명한 형세를 우려 註52)하면서 적당한 대응책을 강구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역시 런던통신을 인용하여 영국을 상대로 한 조선인 독립운동의 정황과 맥켄지F. A. Mckenzie가 저술한 『Korea’s Fight for Freedom』이 출판되어 영국 국민에게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상황, 그리고 영국 한인친우회 조직과 그 외에 미국 의회에서 거론되고 있는 조선독립에 관한 여러 제안들과 그 진행사항들을 소개하였다. 


『정보휘찬』 6호 「조선부활의 경황朝鮮復活の梗槪」는 신흥우가 1919년 10월경에 집필하여 1920년에 뉴욕과 런던에서 간행한 『The Rebirth of Korea』의 내용을 소개한 것이다. 그 내용은 신흥우가 3·1운동 발발 직후인 4월 말경 미국으로 건너가 10월에 미국 동부 각 교육기관의 초청을 받아 여러 차례 조선문제에 관해 강연했던 내용이다. 註53) 『정보휘찬』 10호 「포와재류조선인 일반 상황1923. 2」은 하와이 한인사회에 대한 보고서이다. 조선인 인구수와 사진결혼의 실태, 귀국자들의 정황과 조선인들의 생활 경제와 교육·종교 등의 실태를 조사보고한 것이다. 그리고 통계자료를 제시하며 조선인의 낙후성과 범죄율을 강조하고 註54) 미국관청에 고용된 조선인의 명단 註55)과 하와이 교민단과 기관지 『국민보國民報』, 조선독립단대조선독립단과 기관지 『태평양시사太平洋時事』, 그리고 대한인부인구제회 등의 하와이 조선인 독립운동 결사단체들을 소개·보고하였다. 『정보휘찬』 11호 『조선인의 사상朝鮮人の思想』은 경성복심법원판사인 빈포무웅杉浦武雄이 3·1운동이 일어나게 된 배경과 그 성격을 고찰하고 앞으로 일어날 수는 있는 독립운동의 문제를 검토한 의견서이다. 그는 일본이 조선을 병합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거론하면서 “조선반도는 일본을 겨누고 있는 단총이다”라며 일본 국가의 생존과 동양평화를 위해 조선을 병합했다고 주창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오늘날 일본 우익들의 역사관으로 그대로 계승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註56) 


4) 관동대지진 이후 ‘내선융화’ 선전 강화 


1923년 9월 1일 발생한 관동대지진은 진도 7.9를 기록한 초대형의 지진이었다. 이 지진으로 동경 일대에 사망자 99,375명, 부상자 133,071명, 행방불명 42,890명의 피해가 있었다. 관동대지진은 오랫동안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에 누적되어온 모순관계를 단숨에 수면 위에 떠올리게 해준 사건이었다. 강점 이래 기만적인 ‘일시동인’과 ‘내선융화’로 조선인과 일본인 관계를 묶어 융합시키고자 했으나 근대 조·일 관계는 쉽게 융화될 수 없는 역사를 안고 있다. 강점 이래 일제는 무단통치로 조선인을 물리적으로 굴복시켰지만 내심으로 조선인의 반격과 보복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경계하고 두려워하였다. 


1923년의 관동대지진은 3·1운동의 불길이 진화되어 어느 정도 통치에 안정기반이 조성되었다고 안심하고 있던 차에 발생하였으며, 내선융화의 본질이 얼마나 진정성이 없는 허구였는지를 보여주었다. 관동대지진을 통해 조선인은 일본인의 잔혹성과 이중성을 재삼 확인하였다. 대지진 당시 동경 시내에 유지들과 자경단, 그리고 일본 재향군인 등에 의해 각자의 생명 재산을 보호하라는 명령이 내려지자 제일 먼저 공격 대상이 된 이들은 재일조선인들이었다. 겉으로는 일본인들에게 순정적으로 복종하지만 혼란을 틈타 일본의 전복을 꾀하는 잠재적 불온세력으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조선인에 대한 두려움과 경계는 관동대지진 당시 유포된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조선인이 각지에서 방화하였다’, ‘폭탄을 소지하고 석유를 뿌리는 자가 있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낳았으며 공포의 두려움은 순식간에 번져나갔다. 시국이 불안해지자 자신들의 불안한 공포심리를 조선인을 대상으로 폭발시키는 부조리한 일본인의 심리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註57) 조선총독부의 일시동인·내선융화는 조선인·일본인 어느 누구도 다른 차원에서 내심 원치 않았는지도 모른다. 


재일조선인들이 일본인들의 학살을 피해 조선으로 돌아오자 불안했던 것은 총독부 당국이었다. 조선인 학살 소식이 전해지면서 일본을 향한 적대감이 높아가자 조선총독부는 매우 난감한 입장이 되었다. 내선융화·차별철폐의 시정을 펼친다고 누누이 선전했지만 그것은 조선인의 정체성을 없애고 일방적으로 일본인화하려는 억지에 불과했지 일본인으로서의 노력은 부재하였다. 식민지 조선인을 차별·멸시하면서 한편으로는 조선인을 두려워하는 이중적인 조선인관은 지독한 편견을 키워갔지만 일제는 일본인의 조선인관을 그대로 방치하였다. 조선을 식민지화하는 과정에서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조선인은 저급의 민족성을 갖고 있는 미개한 조선이어야 했다. 그러나 관동대지진은 이러한 편견을 그대로 방치해서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사태를 불러올지도 모르고 내선융화는 커녕 조선지배마저도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엄습했다. 관동대지진 이후 조선총독부는 일본인 상대의 내선융화 선전활동도 적극 전개하였다. 1924년에 조선총독부는 동경 시내 86개소와 부府 아래 20개소의 마을을 방문하고 아동들에게 내선융화에 관한 강연회를 열었다. 관동대지진이 안정된 후에도 여론 조사에서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고 믿는 아동들이 많았다. 註58) 


활동사진반은 1920년 4월에 설치된 이래 1924년 12월에 사무분장 개정과 함께 내무국 사회과로 업무가 이관되었다. 활동사진반에서 제작한 시사 및 기록 영화들은 관동대지진 이후 일본 각지에서 조선의 사정을 소개하고 註59) 조선총독부의 ‘내선융화책’과 동화정책을 선전하는 내용들이다. 이들 영화 중에는 다른 관청이나 공공단체의 의뢰를 받아 촬영된 선전영화들이 있다. 註60) 조선을 소개한 영화는 박람회나 공진회 때에 상영하거나 일본에서 매년 조선으로 오는 각종의 시찰단들이 짧은 여행 기간에 조선 현지를 모두를 시찰할 수 없자, 이를 사진으로 제작하여 관람하도록 조치하였다. 


1925년 말 조선총독부 사회과에는 237권 20만 척尺의 선전영화가 소장되어 있었다. 이들 영화는 총독부·총독관저·정무총감관저·조선호텔·경성구락부와 기타 학교 등지에서 상영되었다. 註61) 1925년도에 선전영화의 영사개항을 보면, 2월부터 3월에 걸쳐 동경을 중심으로 한 정치단체에서, 3월부터 4월에는 대판박람회와 웅본熊本공진회에서, 그리고 11월부터 12월에 북육 3현과 궁진방면에서 모두 75회 정도 상영하였고 야외에서 영사할 때는 1회에 5천여 명의 관람객이 모여들었다. 


한편 일본에서 온 시찰단을 대상으로 경성에서 영사된 횟수는 26회이고, 경성 시내 혹은 근교에서 사회교화의 방면에서 전용하거나 다른 방면과 혼용하여 영사한 횟수는 91회 정도로, 모두 192회 정도 영사映寫되었다. 이는 1924년 중에 공개한 영사횟수가 123회인 것과 비교해 보면 69회 증가하였다. 조선총독부는 관청이나 공공단체에서 조선을 소개하고 사회교화·학술연구 등에 사용할 목적으로 선전영화 대부 신청을 하면 관람료를 절대 징수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대출해 주었다. 1926년경에 와서는 일본 내의 각 부현 등지에서 선전영화 대부 신청이 격증하였다고 한다. 註62) 


이처럼 관동대지진은 조선인이 일본인에 대해 품고 있는 민족적 감정보다도 일본인이 조선인에 대해 품고 있는 편견이 더 심각하였고 이러한 편견이 얼마나 무서운 사태를 몰고올 수 있나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1920년대에 이어 1930년대에 제작된 영화들도 주로 내선융화·내선일체를 소재로 한 교화영화들이다. 조선사회사업협회에서는 「활동사진필름추천규정」을 마련하고 사회교화상 유익하다고 인정되는 영화를 우량영화로 추천하여 보급하는 일을 맡기도 하였다. 1930년 5월 9일에 추천된 우량영화는 「新精神の如し」 註63)으로 전형적인 신파조의 ‘내선융화’ 정신을 고취하는 영화였다. 


2. 민간 정보수집과 여론 조성


조선총독부의 조선통치를 이해하려면 재조선 일본인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이들 재조선 일본인들은 여러 유형의 인물들로 분류될 수 있다. 그들이 종사하는 업종에 따라 보면, 조선에서 토착화한 일본 상인과 이민자들, 조선총독부 및 지방관청에서 근무하는 관료와 교사들, 그리고 조선에서 정치적 욕구를 달성하고자 하는 언론·학자들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이들은 경우에 따라, 시간에 따라 업종이 겹치기도 한다. 문제는 이들 재조선 일본인들은 본국 일본의 식민정책과 혹은 조선총독부와도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것이다. 조선총독부가 조선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본국의 이해에 따라 통치방침을 정할 때 가장 민감하게 반응했던 이들이 재조선일본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정으로 1920년대 조선에서 간행된 책들은 조선총독부 발간, 그리고 조선총독부의 외각을 이루고 있는 민간 신문 및 출판사들, 혹은 조선총독부의 요청을 받고 여론 형성을 이해 동원된 이들이다, 

 

1. 내선융화의 선전과 식민지 현실


재등실 총독이 부임한 후 발표한 시정방침 중에 이른바 내선인 차별철폐 문제는 이식된 재조선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에서 일상으로 일어나는 문제와 관리의 대우와 임용문제 등 사회전반에서 제기되었다. 병합 당시 발표된 일본 천황 조서의 ‘일시동인’에 근거해 모든 제도 개편에는 ‘내선융화’를 고취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내선융화’는 조선인 일본인간 쌍방의 소통과 융화를 의도하지 않고 조선인에게만 일방적 일본동화를 강요하였다. 이처럼 일제의 조선통치에는 ‘조선’은 고려되지 않았다. 1910년 이전부터 유포되어 온 식민지관은 시정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새로이 왜곡된 조선관이 부가되었다. 그 결과 1923년 관동대지진이 일어나자 일본인들의 왜곡된 조선관의 빗나간 효력은 재일본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상상을 초월할 만행으로 나타났다. 


일제의 내선융화의 실현은 조선인들 스스로가 자신의 존재를 일본인과는 평등한 존재가 될 수 없을 정도의 저급하고 열등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일본의 지배를 숙명적으로 받아들여 식민지 통치에 복종하고 순응하도록 교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조선과 일본 사이에 오랜 감정의 역사가 놓여 있었다. 전근대사회로부터 임진왜란 등의 전쟁과 왜구의 침략 등으로 일본에 대한 적대감정이 내재해 있었고 일본보다 우수한 전통문화를 갖고 있다고 하는 문화적 자부심, 그리고 일본과는 다른 역사문화를 갖고 있어 이른바 문명국과 미개국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동화의 관계를 이룰 수 없다. 


1920년대 조선총독부는 자치론이나 참정론 등을 띄우며 식민지지배의 완충지대를 만들어 친일분자들을 결집시키고자 했으나 조선의 민중은 직업적 독립운동계만이 아닌 일반인들도 절대 독립의 입장을 버리지 않았다. 민족운동의 가면을 쓰고 자치운동과 참정운동으로 벌였던 이들을 반민족주의자로 간주하고 민족운동계에 축출해 버림으로써 그들이 민족주의자로 행세하지 못하도록 담을 쌓았다. 


〈표 3〉조선인과 일본인의 통혼 통계
연도 통혼수 비고
1919년말65쌍 
1920년말85쌍 
1921년말124쌍 
1922년말227쌍 
1923년말245쌍 
1924년말360쌍― 일본인과 조선인 부인 125쌍
― 조선인과 일본인 부인 203쌍
― 조선인으로 일본인 사위 23쌍
― 일본인으로 조선인 사위 9쌍


내선융화와 정치선전을 강화하기 위해 일본이 취한 정책 중에 하나가 조선과 일본인 통혼의 권장이었다. 1920년 4월 28일 대한제국 황태자 이은李垠과 일본의 이본궁梨本宮 방자方子가 동경에서 혼례식을 올림을 시작으로 조선인과 일본인의 결혼은 내선융화의 모범적 사례로 선전되었다. 註64) 1921년 6월 7일자로 조선총독부령 제99호로써 「조선인과 일본인간의 혼인 민적수속에 관한 건」 註65)을 발포하고 공통법 제3조와 호적법 제42조와 함께 7월 1일부터 시행함으로써 조선인과 일본인의 혼인에 따른 법적 절차에 아무런 문제가 없게 조치하였다. 


조선총독부는 매년 통혼 통계를 신문·잡지 등에 실어 선전하였다. 1924년 12월 말의 통계를 보면 일본인과 조선인이 결혼한 배우자는 총 360쌍이었지만, 註66) 1924년 말 이후 통계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진정한 동화는 양민족이 통혼하는데 있다며 조선인과 일본인간의 통혼을 장려했다. 그러나 민족 감정의 골이 깊어지면서 통혼을 통한 내선융화운동은 별다른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2. 민간 일본인을 통한 선전활동


1920년대 문화통치기에 조선인을 내세워 총독부의 통치 선전에 동원하고 있음은 앞서 살펴본 바 있다. 그러나 조선인을 다방면에서 이용했지만 ‘믿을 수는 없는 존재’라는 불안감은 지워지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이민족의 주변인일 수밖에 없음은 위기상황에서 더욱 분명하게 들어나게 되고 그것은 관동대지진 때 증명되었다. 


조선총독부의 통치를 책임진 재등실의 고민은 양국의 국민을 내선융화로 묶어 통치하고자 해도 도저히 ‘내선융화’를 이룰 수 없는 점과 통치의 목표인 동화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조선인의 일본화가 꾀하고 있지만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또한 재조선 일본인들과 본국 일본인들의 이해의 간극을 좁혀 조선총독부 통치의 안정적 지지 기반을 확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런 점에서 조선통치관의 이상을 함께 하면서 조선총독부 통치에 적절한 자문과 조선사정에 관한 정보를 줄 수 있는 후원자를 필요로 하였다. 


그리고 재조선 일본인 중에는 본국에서 개인적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거나 인정받지 못하여 주변인에 머물러 있다가 조선이라는 미개척지의 ‘블루오션’을 발견하고 조선에 뛰어든 자들이 있다. 많은 이들이 조선의 관한 천박한 지식을 갖고 편견으로 가득찬 식민지시관을 유포하면서 일제의 식민통치의 당위성을 확보하고자 했던 이들이 있었고, 또 다른 부류로서는 조선을 연구하고 조선 전문가로 자처하면서 식민지 조선문제 해결를 일생의 과업으로 삼고 헌신하고자 한 이들도 있었다. 자신의 사상과 관점에서 조선을 재단하며 모든 가치를 일본의 팽창을 위해 몰입해 간 이들 중 대표적 인물이 세정조細井肇, 1886.2.10~1934.10.19이다. 


세정조는 조선총독부의 통치정책에 협력하며 언론인이며 문필가·조선연구가로 활약하였다. 특히 조선에 관한 많은 고서와 연구서를 간행한 그는 조선통을 자처하며 어용 언론인이며 문필가로서 행적을 보여주었다. 註67) 1908년 조선에 건너온 세정은 한국통감부 체신관리국의 고용되었으나 위험파괴 사상을 품은 자라고 지목되어 해고된 적이 있다. 이후 내전양평內田良平이 경영하는 경성 일한전보통신사와 조선일일신문사에 근무하며 흑룡회 인사들과 교류하며, 흑룡회에서 진행하고 있던 ‘일한합병운동日韓合邦運動’에 참여하였다. 강제병합 후인 1910년 10월에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했던 국지겸양菊地謙讓과 대판 조일신문기자이며 후일 경성상공회의소를 창립한 대촌우지승大村友之丞·청류강태랑靑柳綱太郞 등과 함께 조선연구회朝鮮硏究會를 창설하였다. 


세정이 경성에서 위험분자로 지목되어 활동에 제약을 받게되자 일본으로 돌아가 조선연구회 동경지부를 열었다. 1912년 『동경조일신문』 기자로 활동하면서 1913년에 ‘노동과 국가사勞動と國家’를 설립하였고 월간신문 『노동과 국가勞動と國家社』를 발행하였다. 이 신문을 통해 그는 국가사회주의를 주장했으나 조선에 대해 편견으로 가득찬 수필을 기고하기도 하였다. 1916년 보통선거기성동맹회에 참가하여 보통선거제도 실현운동을 벌였으며, 1918년에 조일신문사가 번벌내각 정부에 대해 비판적 태도에서 유화적 태도로 변하자 이를 비판하고 동료들과 함께 집단 퇴사하였다. 


조선에서 3·1운동이 일어난 소식을 듣고 세정은 1919년 4월 27일부터 7월 13일에 걸쳐 조선과 중국을 두루 여행하고 일본으로 돌아왔다. 그때 그는 “일생의 사명이 이때 확실히 지시되었음을 통감하고 굳게 조선문제 해결에 일신을 받칠 것을 결의하였다”고 한다. 그는 ‘일한병합’은 많은 조선인이 찬의 아래 이루어진 것이며 조선인이 병합에 반대하는 것은 이름을 파는 행위로 폄하하였다. 그리고 안중근과 이재명 의사는 공명을 얻고자 시비를 가리지 않고 암살을 감행한 광열자로 몰았다. 그의 저서에 그려지는 조선인은 인의예지가 없는 이들로서 민족성이 악惡하다고 보는 지독한 편견과 천시관에 사로잡혀 있다. 註68) 


1919년 12월부터 1920년 1월에 조선을 방문하고 일본으로 돌아간 세정은 동경에 조선회관을 설립하고 조선문제에 대한 강연회를 열면서 여론을 조성하고자 했지만 대중적 지지를 얻지 못하고 실패하고 말았다. 그후 세정은 조선 관련 서적을 간행하는 출판사를 만들고자 계획하고 대정사공大庭柌公의 협력을 얻어 1920년 3월에 자유토구사自由討究社를 설립, 사장에 취임하였다. 자유토구사는 본사를 동경에 두고 지사를 서울에 두었으며, 세정은 동경과 서울을 왕래하면서 조선문제 팜프렛과 『선만의 경영鮮滿の經營』1921 등을 집필·출판하였다. 또한 자유토구사에서는 새로운 눈으로 고서를 읽는다는 명분을 앞세워 조선의 고사고서古事古書를 발굴하여 번역·간행하는 사업을 시작하여 註69) 『통속조선문고通俗朝鮮文庫』 전 12권을 간행하였다. 이곳에서 출판되는 책의 간행비는 조선총독부의 기밀비에서 지원되었다. 註70) 『통속조선문고』의 서문에서 그 간행 목적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금일에 조선문제의 시야를 장백산맥 남으로 한정하는 것은 단연코 인정할 수 없다. 조선문제는 바로 미국·중국·러시아 3국에게 영향을 미치는 세계적 문제가 되었다. 이 세계적 환시 앞에 서서 세계적 시련에 응해야 하는 일본과 일본인은 반도에서 새로이 부속한 1천7백만의 자매를 어떻게 취급하느냐가 일본의 국운민명國運民命을 좌우할 중대한 수수께끼가 아닐까. 註71) 


이로 보면 세정의 활동은 학문적 관심이 아닌 정치논리를 개발하는데 있음을 알 수 있다. 위기에 빠진 조국 일본을 구하고 해외 팽창이라는 국가적 대계를 이룩하기 위해 조선인은 어느 정도로 취급해야 할 것인가가 그의 고민이었던 것이다. 


이는 일본의 영광을 드높이기 위해 타국을 멸시하는 식민사관에 다름아니다. 3·1운동 이후 그의 저서에서는 조선총독부의 통치에 대해 ‘애정’어린 비판을 하였으며, 연설에서는 진정한 내선일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문화적 경제적으로 일가一家가 되어야 한다고 주창하기도 하였다. 조선문제의 해결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닌 백년간의 현안이라 인식하였다. 그리고 그가 제시한 조선문제 해결안은 일본인들이 인격적으로 성숙해져 조선인의 자발적 존경을 받아야 한다는 추상적 대안이었다. 註72) 그의 관심은 강점 이래 끊임없이 강조하고 주창되어 온 ‘내선융화’로의 길을 고민한 것이 아니라 조선인을 어떠한 선에서 대우하고 취급해야만 일본의 국운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까를 고민하였다. 즉 조선에 대한 이해보다는 조선인의 부정적인 면을 부각해 악선전함으로써 식민지 피지배민으로의 위치로 묶어 두고자 한데 목적을 두었다. 註73) 


세정이 1920년 4월 26일자로 재등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은 과격사상을 방지하기 위한 대책으로 유교의 진수를 문화적으로 설명하는 저술에 착수하고 있다고 전하였다. 그 책의 제목을 『조선문화의 연구』라고 하든가 『동양문명의 정수』라고 하고 조선문으로 하여 조선인에게 읽히고자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재등실에게 6개월간 매달 200엔의 원조를 요청·지원받았는데, 원조금은 재등실이 1931년 총독을 사직한 후에도 개인적으로 계속 지급하였다. 그가 의견서나 서한을 통해 재등실에게 권한 조선문제 대책은 첫째 조선독립운동을 파괴하기 위한 대책, 둘째로는 친일단체를 육성하기 위한 대책, 세째는 조선총독부의 시정 선전을 강화하기 위한 대책이었다. 註74) 세정이 권한 조선독립운동의 파괴책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대상으로 하였다. 이장로·이혁노 형제를 이용하여 임시정부의 철거 분산을 수행하게 할 것과 친일단체 육성을 위하여 조선회관의 설립할 것, 註75) 친일단체의 이용과 친일조선인의 보호 등에 대해 여러 차례 진언하였다. 한편 1921년 9월 16일자로 재등실에게 보내는 서한에서는 “국민협회를 이용하여 ‘신일본주의’의 견지에서 독립론의 망령된 언설을 부수고, 국민협회 자신으로 하여금 구한국의 추하고 약하고 열등함을 고백시켜 독립이 이미 수백년 전에 아마도 3천년 이전에 조선 건국과 함께 독립을 잃어온 사실을 세계적으로 공포시키는 일이 각하의 급무입니다” 註76)며 진언하였다. 민원식과 국민협회의 행보를 통해 세정조라는 인물이 재등실의 조선통치정책 수립과 시행에 직접적 관련을 갖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국민협회를 이용한 민족분열책에는 큰 영향력을 발휘했음을 알 수 있다. 


세정은 많은 책을 저술, 발간했으나 대표작은 1921년 12월에 발간된 『선만의 경영 - 조선문제의 근본해결鮮滿の經營 - 朝鮮問題の根本解決』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관련 출판 활동을 하면서 정치운동에도 참여해 1922년 동광회를 결성하였고 조선총지부가 설치되었을 때, 연락계 교섭위원으로 임명되어 활약하였다. 세정은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으로 오인되어 살해당할뻔한 체험을 하게 되면서 대중 강연 활동에 뛰어들어 문부성 촉탁의 신분으로 조선총독부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1923년부터 1924년 가을까지 256회의 강연을 개최한 바 있다. 이 무렵 자유토구사는 문을 닫았지만 그후에도 여러 차례 조선을 방문하며 조선에 관한 책과 논문을 집필하였다. 1927년에는 제네바 군축회담이 열었을 때 전권대사로 참가한 재등실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註77) 조선의 고전고서를 섭렵하여 ‘조선통’을 자처하면서 조선인의 단점과 결점을 찾아내는데 혈안이 되어 조선은 독립할 자격이 없다고 매도하고 일본의 조선통치를 극찬한 그의 배후에는 재등실과 조선총독부가 자리하고 있었다. 


3. 동광회의 활동


내선일체의 이상을 표방하며 민간단체로 결성된 대표적인 것은 동광회同光會이다. 1920년 12월 일본 동경에서 두산만頭山滿·내전양평內田良平 등 일본의 극우단체 흑룡회黑龍會 간부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되었다. 동광회는 1921년 5월 15일 서울 거주 일본인과 조선인들을 끌어들여 동광회 조선지부를 출범시켰다. 註78) 동광회는 앞서 1921년 2월 3일에 발기인 300명이 모인 가운데 동광회 총지부가 설치하는 모임을 갖고 박영효朴泳孝와 장석주張錫周를 각각 회장과 부회장에 앉히고, ‘동양민족 공통의 문화개발’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유림세력을 끌어들일 계획을 갖고 출범했다. 그러나 사정이 여의치 못하자 친일파 이희간李喜侃을 조선총지부장에 임명하였다. 동광회 조선총지부는 각도에 지부를 두고 통감부시대에 군수와 군서기를 지낸 친일파와 유림의 낙오자를 불러모아 조직하였다. 동경의 동광회 본부는 2회에 걸쳐저 동광회 시찰단을 한국에 파견하여 『조선통치의 현상』이라는 보고서를 발표하고 재등실 총독의 식민정책의 실정을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동광회 보고서에 기록한 내용은 “현재 황해·평안 양도 지방에서는 불평선인들이 횡행하고 관직에 나간 조선인은 인민과 총독부 사이에 끼어 진퇴양난에 빠져 군수 또는 면장 등이 사임 신청을 하는 자가 적지 않고 반항위해를 가하는 자가 빈출하고 인심이 악화되어 작년 독립운동3·1운동이전보다도 심해진 상태이고, 註79) “현재 조선은 실로 극단적인 속박정치로써 간신히 표면적으로는 고요함을 유지하고 있고”, “표면 소위 문화정치를 표방하면서 전의 헌병수가 전도에 1만 3천에 불과했으나 현재는 경찰 수가 2만 이상이 그에 대신하고 있다” 註80)고 하여, 조선총독부의 통치를 비판하였다. 


동광회는 3·1운동 관련자 석방운동을 전개하기도 하고 연방聯邦 청원과 조선의회朝鮮議會의 설립, 부제府制 시행 등을 주창 註81)하였다. 동광회 조선 지부의 조선내정 독립운동은 어찌보면 반조선총독부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듯하지만 절대 독립을 고수하는 민족운동계의 강한 비판을 받았다. 1921년 10월 22일에 동광회 조선지부에서는 조선내정독립기성회를 별도로 조직하고 제45차 일본의회1921년 12월 24일 개원에 ‘내정독립청원서’를 제출하였다. 그리고 1922년 10월 18일에는 일본 중의원 의원인 황천오랑荒川五郞을 조선에 초빙하고 환영회를 대대적으로 열었고, 이를 계기로 내정독립의 지방자치운동을 전개하려다가 청년층의 반발로 환영 회의장이 난장판으로 변하는 소동을 일으켰다. 註82) 그 여파로 동광회 조선지부는 10월 27일 해산을 선언 註83)하기에 이르렀다. 


일본 내 동광회 회원들과 총독부, 그리고 조선인간에 의견 조율이 제대로 조정되지 않는 가운데 반대여론에 부딪히자 동광회의 참정·자치운동은 중단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1924년에 들어와 동화주의자들만으로 조직을 정비해 재출범한 동광회는 이희간을 동경에 파견해 조선의회 설치운동을 재개하였다. 註84) 


4. 조선사정기밀통신의 운영 


1920년대에는 재등실의 문화통치에 편승하여 이른바 조선의 사정을 일반에게 소개한다는 목적을 갖고 간행된 서적들이 많다. 그중 간행 주최가 표기되지 않은 『조선사정기밀통신朝鮮事情機密通信』이라는 소책자가 그것이다. 제1호1924년 12월 15일와 제2호1925년 2월 1일만을 확인할 수 있는데, 註85) 언제까지 발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조선정보위원회가 1924년 12월에 폐지없으나 그동안 구축된 통신망은 민간차원에서 그대로 유지하며 정보를 공유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왜냐하면 이 통신망을 『조선사정기밀통신』이 운영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정보위원회가 주로 국내외에 항일독립운동을 하는 조선인들의 움직임과 조선사정의 정보를 수집했다면, 조선사정기밀통신은 자발적인 회원 참여라는 형태로 조선사정에 관한 정보를 수집·분석해 조선총독부에 제공함으로써 식민지 통치에 협조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사정기밀통신』 제2호에 게재된 규정에 의하면 ① 회원간의 기밀통신機密通信, ② 비문서秘文書, ③ 연구자료 제공 등의 3가지 사업을 수행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기밀통신은 조선 이면의 사정을 통신하고 친전서면親展書面  註86)으로써 보도하는데, 중요 문제일 경우는 매일이라도 통신하도록 하였다. 비문서는 조선통치의 좋은 점과 나쁜 점, 그리고 총독부 사업의 허실에 관해 엄정히 비판하고 역시 친전서면으로써 보도하였다. 그리고 연구자료의 제공은 조선인의 민족성을 연구하는데 적절한 고사고서故事古書, 조선문제를 다룬 근간의 논저 등 발간물을 제4종 우편으로 회원들에게 무료 증정한다고 하였다. 註87) 


『조선사정기밀통신』이 나오기까지의 사정을 살펴본 “조선문제의 해결 여하는 바로 우리의 국운國運의 소장消長에 관계있는데, 자신들이 조선문제를 제기할 때마다 무시되고 조선사정은 영국의 식민지사정과는 다름에도 불구하고 영국에 비유하여 일본과 조선 관계를 논단하는 오류를 범해 왔다”고 지적하면서 “일천칠백만 신동포조선인의 이해휴척利害休戚이 전 별환別寰 천지에 한각유망閑却遺忘되니 이것이 바로 국가의 대환大患”이라며 “조선전도 통신망 완성을 위해 다수의 인원과 자비資費를 요한다” 註88)는 취지를 밝히고 있다. 


민간 정보통신망은 조선정보위원회가 폐지하였다. 민간의 정보망을 그대로 유지하여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는 한편 재조선 일본인들에게 의무감과 함께 총독부 통치에 참여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심어주고, 동시에 조선통치에 대한 위기감의 긴장을 조성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총독부 통치에 비판적이거나 반대하기보다는 일본 국운과 국가 대환의 공동 운명을 지고 있는 자들로서 의식을 공유하고 조선통치의 여론을 안정적으로 통일하고자 하는 정치적 목적을 갖고 있었다고 판단된다. 



『조선사정기밀통신』 제1~2호에 게재된 내용은 재외 공산주의자들의 조직과 운동, 미국의 후원을 받고 있는 독립군단의 활동, 재외조선인의 동향과 국경지역의 독립운동 상황, 좌경단체의 등장과 그들의 동향, 각지의 농민 소작쟁의 형세와 기타 조선의 사회상 등에 대해 보고하고 있다. 註89) 이 외에도 일본통치정책에 관한 외국인들의 평론 내용 등에 대해서도 소개하고 있다. 『조선사정기밀통신』에 게재된 「조선에서 유행하는 은어」 註90)에서는 세간에 풍자되는 ‘은어隱語’ 註91)들과 통치자들을 일컫는 ‘상용은어’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것들은 1920년대 조선총독부의 문화통치에 대한 일반 여론과 조선인의 풍자적인 정치의식을 보여주고 있어 흥미롭다. 이를 정리하면 위의 〈표 4〉와 같다. 


〈표 4〉1925년대 상용 은어
총독부직함 은어 총독부직함 은어
총독천관天官 내지인 순사대돈大豚 , 큰 돼지
군사령과인관人官 면장면관面官
도지사사관師官 군수
재무부장의관義官 헌병대장부관父官
헌병사령관지관地官 분대장사자獅子, 사자
경무국장군관君官 헌병졸대우大牛, 큰 소
내무부장인관仁官 친일파雉, 꿩
헌병보소우小牛, 작은 소 권총계각鷄脚, 닭다리
수비대장대호大虎, 큰호랑이 (총)탄鼠, 쥐
경찰서장兎, 토끼 분견소장狼, 이리
조선인순사소돈小豚, 작은 돼지 면서기기관記官
경찰부장예관禮官 밀정狐, 여우
군서기鳩, 비들기 총환독사毒蛇, 독사
병졸소호小虎, 작은 호랑이   


1920년대 조선인에게 조선총독부는 공포의 대상이기도 했지만, 그 허구성과 기만성으로 인해 조롱의 대상이기도 했다. 조선지배정책 중에서 조선총독부가 우선시한 것이 치안의 안정이었기 때문에 문화통치 이면에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탄압과 민족분열통치는 그 어떤 통치시대보다도 극렬하였다. 따라서 1920년대 ‘문화정치’란 조선인들에게는 기만의 상징시대가 되었다. 당시 민간에서는 사내정의 총독시대를 일컫어 ‘선정善意의 악정惡政’이라 표현한데 비해, 재등실 총독시대를 ‘악의惡意의 악정惡政’이라고 비방 註92)한 것을 통해서도 1920년대 조선총독부의 성격을 알 수 있다. 



3. 조선총독부의 유교정책과 사회교화운동


1910년대 무단통치기는 결사가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유일하게 활동이 가능한 조직은 종교일 수밖에 없었다. 3·1운동 때 종교계를 대표한 민족대표들이 초기 단계에서 지도적 역할을 담당하고 조직을 동원한 사실을 목도한 조선총독부는 어떻게든 종교계를 장악해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그리고 일본의 국가 신도神道를 조선에 유입하고 이를 통해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주입하고자 병합과 함께 신사정책을 수립하여 각 지역에 관립 신사 건립을 기획하였다. 일본의 건국신인 천조대신天照大神과 명치천황明治天皇을 제신祭神으로 둔 조선신사 건설에 착수하였으며 5년간의 건설공사 끝에 1926년 조선신궁이 건립되었다. 註93) 해마다 일본의 국경일이나 제일祭日에 조선인에게도 참배를 강요하였으나 조선인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1920년대 신사정책은 소극적으로 전개되었다. 註94) 


그외에도 조선총독부는 불교계의 장악을 위해 조선불교의 분열과 분쟁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30본산의 주지를 불러 주지총회를 개최하고 1922년에 불교계를 통합할 새로운 중앙통일기관 註95)으로 재단법인 조선불교종무원朝鮮佛敎敎務院을 신설하였다. 모든 조선불교 사찰을 여기에 가입시켜 통제하고자 하였으나 경남 지역의 합천 해인사와 양산 통도사, 동래 범어사 등은 강압적인 가입에 반발하여 거부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註96) 


1920년대 문화통치기 조선총독부의 기독교정책은 우호정책으로 일관하였다. 3·1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과정에서 저질러진 일제의 식민지배의 잔혹상이 선교사들에 의해 전세계에 폭로되자, 일제는 선교사들이 배후에서 사대주의 정신이 강한 조선인을 부추겨서 3·1운동이 일어났고 진단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선교사들의 견해가 국제사회의 여론으로 직결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어떻게서든지 선교사와의 관계를 원활히 유지하기위해 선교사들의 의견을 청취하기도 하고 종교문제가 발생하면 저자세로 문제 해결에 성의껏 나서서 선교사들의 신뢰를 얻고자 하였다. 원경 수상도 「조선통치의 사견」에서 선교사들에 대해 오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의사소통에 심혈을 기울일 것을 요구한 바 있었다. 


뿐만아니라 1920년대 문화통치기 동안 조선총독부는 사회교화사업과 사회구제사업 등을 다방면에서 펼쳤다. 일제 통치에 대한 조선인의 저항을 희석시키고 사전에 예방하는데 이들 만큼 효과적인 사업은 없었다. 그러나 사회교화사업은 사업의 범위가 광범위하여 다루지 않고 본절에서는 조선총독부가 사상통제와 사회교화를 위해 펼친 사업 중에 유교와 유림층을 대상으로 펼친 사회교화사업만을 대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 경학원의 장악 


조선총독부는 병합과 함께 성균관을 폐지하고 경학원을 설립하고 지방의 향교를 장악해 갔다. 조선총독부가 유교정책에 심혈을 기울인 것은 일본의 국권침탈에 저항하여 항일의병투쟁을 전개하고 강점 소식에 목숨마저 버리며 극렬 저항한 유림들의 뿌리 깊은 유교사상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총독부의 유교 고립화정책은 유력 유림들을 경학원과 향교에서 내몰아버리는 일로 시작하였다. 조선총독부에 의해 정통유림들은 제도권에서 완전히 소외당한 동안 그 틈새를 친일유림과 부패유림들이 매우면서 유림의 권위는 몰락하였다. 이로 인해 191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유교사상과 유림층은 점차 조선 사회에서 그 지도력을 잃어갔다. 그럼에도 통치의 주체가 바뀐 시세에서 유교의 충효사상은 조선통치에 충분히 이용할 가치가 있는 전통사상이었다. 이제 조선총독부는 유교진흥이라는 기만적 구호마저 내던지고 일본의 신도神道를 유교儒敎와 연결시켜 보급하는데 열성을 보였다. 신도야말로 유학과 일치하고 일본의 고유정신이라는 자부하며 이른바 ‘대화혼大和魂’과 ‘무사도武士道’까지도 공자에서 비롯되었다며 유학을 황민화에 직결시켰다. 註97) 


3·1운동이 일어나자 조선의 유림계는 이를 계기로 큰 반성을 하게 되었다. 기독교·천도교·불교계가 독립선언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데 비해 유교계는 시세를 읽지 못하였고 민족의 3·1독립선언에 참여하지 못한 것을 통탄하였다. 註98) 친일유림을 제외하고 의병운동 이후 광복운동에 다시 나선 전국 유림들은 광복운동에 선구가 되고자 분주히 연락하여 파리 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고 국제 여론을 확대시켜 독립을 인정받고자 하는 계획을 세웠다. 여기에 일본의 제도권 유학에 포섭된 경학원 대제학 김윤식과 부제학 이용직도 3·1운동 직후인 3월 28일에 「대일본장서大日本長書」라고 하는 독립청원서를 조선총독과 일본내각 총리대신에게 제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註99) 그리고 일반 유림들 중 많은 이들이 지방의 3·1운동 확산에 기여하였고 3·1운동 이후 독립운동단체를 조직하여 활약하다 일경에 체포되기도 하였다. 註100) 


앞서 기술한 재등실이 취임하면서 만든 「조선민족운동에 대한 대책」에도 조선통치의 성패는 “친일적인 인물의 확보”에 있으며 몸과 마음을 다바쳐 일을 해낼 핵심적 친일인물을 골라 귀족·양반·유림·부호·실업가·교육가·종교가 등에 침투시켜 얼마간의 편의와 원조를 주고 친일단체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여기서 귀족·양반·유림들이야말로 유학교육을 받은 조선의 상층부를 이루는 이들이다. 


석존재에 참가한 총독과 정무총감


3·1운동 이후 진행된 조선총독부 사무개정을 통해 1910년대 경학원과 향교에 관한 사무를 총독부 관장에서 경학원은 학무국 학무과로, 향교 

재산에 관한 서무는 내무부 학무과로 각각 이관하였다. 註101) 그리고 경학원에서 정규적으로 시행하던 강연회도 중지시켰다. 그것은 중앙의 강연회 보다는 경학원 강사를 향촌사회에 파견하여 총독부 시정선전과 지방 교화에 주력하게 하는 일이 시급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재등실은 경학원 직원과 각도 강사를 상견하는 자리에서 총독부의 시정이 일반에 보급되는데 더욱 철저를 기할 것을 당부하였다. 註102) 지방 향교직원들은 지방 교화사업의 진행과 유림층의 동향을 자세히 보고하였다. 경학원 강사의 지방강연이 활발해지면서 이들 강연회 강사들을 예우하기 위한 규정 개정이루어지기도 하였다. 註103) 


유교를 통해 내선일체를 실현한다는 취지에서 일본의 유학자와 상호 이해융화를 도모한다는 내용으로 교류사업이 진행되기도 하였다. 동경사문회東京斯文會 인사들을 경학원에 초빙하여 석전재에 참열케 하고 첨향례를 행했을 뿐만 아니라 국내의 대동사문회大東斯文會와 유도진흥회儒道振興會 등 친일유림단체들과의 교류도 주선되었다. 특히 3·1운동 후 중단했던 강연회를 속개하여 1922년 9월 추계석전제가 끝나고 바로 동경사문회의 총무 복부우지길服部宇之吉이 「지천명설知天命說」이란 강제講題로 강연한 것을 시작으로 1923년 추계석전이 있은 후인 제37회 경학원 강연회부터는 동경사문회 인사와 경성제대 교수 등 주로 일본인 연사들이 강연하였다. 註104) 


경학원 직원과 강사 일동은 일본 황실의 상제나 황실 행사에 반드시 참열했으며 1925년 이후 조선신궁에 참배하고 진좌제鎭座祭에도 참가하였다. 


2. 지방향교의 변화와 분열 


총독부가 중점을 두고 진행시킨 사업은 지방의 유림들을 친일분자로 육성하며 향교를 통해 식민지교화사업을 활발히 전개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1924년 일본 황태자 가례식과 1928년 소화 천황 즉위식 등 일본 황실 행사 후에 조선의 문묘종사文廟從祀 선현先賢 18위位를 추장한다는 명목으로 그 본손가本孫家에 제료祭料를 지급하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이때에는 도지사·내무국장·철도부장·학무국장·전매국장·감찰관·참여관·법무국장·산림부장 등의 총독부 고위관리들이 직접 본손가를 찾아가 최고 750원에서 최저 10원까지의 현금을 주는 전달식을 가졌으며, 이 전달식에는 자손子孫·성손姓孫·관공리·유림·학생들이 최고 1,500명까지 동원되어 성대하게 치루어졌다. 註105) 


총독부에서 문화통치를 표방하자 유림계에서는 조선총독부에 향교재산을 향교에 환부시켜 유교진흥에 몰두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하였다. 이러한 요구는 향교가 전통 유림들에 의해 다시 장악될 수도 있다고 판단한 조선총독부에서는 이들 요구를 어떻게 수용해 갈 것인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총독부 당국은 일단 유림계의 요구를 수용해줄듯 여론을 풍기며 총독부 의도에 맞게 1920년 6월에 새로운 향교재산관리 규정 註106)을 마련하였다. 그것은 이전의 향교 수입은 보통학교 설립 비용에 전용되었으나 이제는 조선총독부가 벌이는 각종 교화사업에 들어가는 비용으로 전용하도록 조정한 것이다. 이어 총독의 훈령 註107)을 발하여 각도의 지사·부윤·군수·도사島司 등은 유교를 이용하여 총독부의 식민지통치에 순응하도록 하는 지방교화진흥 자원에 힘쓸 것을 지시하였다. 註108) 과거 관공립 보통학교 설립 경비로 전용되던 향교재산 중 지출내역인 관공립 학교비는 1920년 향교재산관리규칙 개정으로 이제는 문묘 향교비용과 지방교화사업 지원금으로만 원용援用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개정이 이루어지게 된 것은 폭발적으로 요구되는 학교 시설 확충 예산을 향교재산에만 의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별도의 재원책을 마련해야 했으며, 지방 향교의 재산은 3·1운동 이후 거세진 향촌사회 일반 민중의 민족운동을 차단하고 청장년층으로 번져가는 사회주의사상과 독립운동의 기운을 억제하기 위해 좀더 적극적인 교화사업에 집중할 필요에서 지방 교화사업에 전용하도록 조치한 것이다. 1920년 이후에는 향교재산을 담보로 하여 도지사·군수들의 주도하에 친일유림단체가 정책적으로 조직되었다. 


한편 총독부에서는 1923년 4월 21일자로 ‘지방문묘직원地方文廟職員에 관한 건’ 註109)을 발표하여 향교직원들의 임면任免에 유림이 일체 관여하지 못하고 관청에서 관장하도록 만들었다. 註110) 이렇게 되자 향교의 직원들은 유림적 소양과는 관계없이 총독부나 군청의 지시에 충실히 따르는 친일분자들이 임명되었다. 1923년 9월 11일에 거행된 개성향교 추기석전제에서 새로이 취임한 사성司成 최기현崔基鉉이라는 자는 제향 때에 순한문으로 축문祝文하던 것을 일본말로 바꾸자고 주장하여 물의를 일으킨 바 있었다. 註111) 


3. 향교의 사회교화사업 


향교도 경학원과 마찬가지로 춘추春秋 양계兩季에 문묘 향사를 거행하는 일이 가장 주사업이었지만 3·1운동 이후 향교는 사회교화사업장으로 변모하였다. 총독부에서는 사회교화사업을 원활하게 진행하고자 향교 재산의 수입과 지출 관리를 전문적으로 맡을 장의掌議라는 직책을 새로이 만들었다. 유림들 사이에 향교의 재산관리를 넘겨받으려는 요구가 3·1운동 이후 강력히 요청되자, 조선총독부에서는 ‘향교재산관리규정’을 새로이 개정하면서 장의제도 두는 것을 대책안으로 구상한 바 있다. 향교재산관리규정의 개정과 함께 1920년 9월 14일 강원도령 제16호의 ‘장의에 관한 규정’의 마련을 시작으로 각도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장의 선거와 정원·임기 등에 대해 규정하였다. 장의는 명예직이며 원칙적으로 유림 중에서 선출하도록 했으며 부윤 또는 군수가 도지사의 인가를 얻어 해임할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 註112) 장의는 군수와 면장들이 참석한 가운데 선거로써 선출되었지만 어떤 경우에는 군청에서 일방적으로 임명되기도 하였는데, 당시 정황을 『동아일보』에서는 「단천端川-향교란 것을 근거로 유림회를 무대삼는 요물妖物들은 별별기괴別別奇怪한 활계극滑稽劇 각금 연출演出」이라는 머리가사를 통해 향교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잡음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양두羊頭를 봉掛하고 구육狗肉을 매賣한 격으로 학술강습이란 교육기관을 계영計營한다는 미명하美名下에서 무슨 첩지貼紙인지 암매暗賣하야 교육비에 충당한다고 가칭假稱하고 사복私腹을 채우랴다가 경찰에 검속 … 그들은 일향세력一向勢力에 추종하며 관관官觀에 아부하야 농촌형제農村兄弟로 하야곰 농락弄絡이 무쌍無雙하엿다. 최금最今에 이르러 소위 장의선거掌議選擧란 대과大科를 보이게 되자 신성神聖한 교육기관을 지배한다는 학무회學務會의 명칭名稱을 유림회儒林會라 개칭하야 가지고 이번 장의선거전掌議選擧戰에 대활동大活動을 하였다 한다. 註113) 


각 향교 장의회掌議會에서는 재산세입세출예산을 편성하고 집행하는 임무를 부여받았으나 모든 것은 반드시 총독의 허가를 얻어야 했기 때문에 자율적 권한은 없는 셈이다. 장의회 역시도 회의의 의장은 군청 군수가 맡아 실질적으로 군수가 총독부의 지시를 받고 향교재산권을 관리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장의를 선출하여 이들이 예산을 편성하고 시행하는 것처럼 정하여 마치 향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사회교화사업이 유림 스스로 펼치는 자발적인 운동인 것처럼 영색令色했지만 실상 장의회는 형식적인 허수아비와 같은 존재에 불과했다. 따라서 유림층에서 향교재산을 관장하지 못함으로써 사실상 총독부의 향교재산 환부 조치는 유명무실한 것이었다. 


향교의 세출 명목은 주로 향교보수비·제향비·관광비·교화비 註114)이며 대부분 군수들이 형식적인 장의회를 거쳐 이들 비용을 향교수입금에서 지출하였다. 당시 교육진흥운동에 크게 고무된 각 지방 향교의 유림과 청년회에서는 향교내에 강습소를 개설하고 학교교육을 받지 못하는 아동들에게 교육을 실시하거나 중등교육기관으로 진학하지 못하는 조선인에게 면학의 기회를 부여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군청 당국은 고루한 유림층과 결탁하여 향교를 이용한 교육운동을 반대하였으며 향교재산에서의 교육비 지출을 거부하였다. 그리고 이면에서 향교의 재산권과 교육장으로 장악한 후 향교재산을 내선융화 동화사업에 지출되도록 유도하였다. 註115) 


이외에도 총독부의 시정방침에 따라 친일유림이나 인사들로 구성된 일본시찰단의 시찰보조비를 지불하고 교화사업과 선전사업의 일환으로 지출된 활동사진기비, 그리고 친일유림단체에 대한 보조비, 교화 연설회 개최비, 그리고 조선총독부의 선전 전단 인쇄 배부비, 선행 표창비 등등 조선총독부 주관의 교화사업을 수행하는데 향교재산을 낭비하였다. 註116) 이같은 풍조를 언론에서도 비판하였다. 


“유생의 아유阿諛를 구하고 석일昔日과 여如히 재산의 소모消耗를 진부陳腐한 유생의 어육대酒肉代로 지불支拂하라 함인가 …” 註117) 


이 뿐만 아니라 향교 중심의 친일 유림단체가 벌리는 교화사업 역시 향교재산에 의해 재정적으로 뒷받침되었다. 그들의 교화사업이란 백일장·강연회 등을 개최하는 것이었다. 향교 재산이 다시 향교로 돌아왔지만 이미 친일유림과 그 단체들이 향교를 장악하고 있는 차에 그 재산의 소용처란 일반 총독부 교화사업 내용과 큰 차이가 없었고 다만 유교라는 미명을 쓰고 지출되었던 것이다. 


4. 친일유교단체의 결성과 교화사업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정책과 통치를 반대하고 저항하는 유림석학들을 시세에 뒤떨어진 자들이며 공허한 설로 신교육과 법령을 반대한다고 비난 註118)하고 여론을 일으켜 이들의 사회적 영향력을 떨어뜨리려 하였다. 그렇지만 간단히 유림세력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은 조선의 유교 전통의 뿌리가 그만큼 깊어 향촌사회에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가 전통의 지방 향촌사회를 총독부의 신통치 안으로 끌여들이고 이를 재편한다면 조선은 안정된 식민체제를 구축하게 되는 것이므로 어떤 수단을 사용하던 유림층을 총독부 통치에 협력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註119) 


조선총독부는 『매일신보』를 통하여 전국 유림들에게 일본 통치의 이른바 ‘신사업·신문화’에 동참하기를 촉구하는 사설을 수시로 실었고, 부일 부패유림들을 선각자라고 부추기면서 이들 친일화된 유림들로 하여금 “양풍良風을 조장助長하며 폐습弊習을 교정矯正하야써 문화의 진운進運을 조助하라”는 명분을 앞세워 조선총독의 시정방침을 선전·홍보하는데 동원하였다. 통치 초기 대부분의 유림들은 조선총독부의 이러한 작태를 무시했기 때문에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했지만 차츰 조선총독부가 동원한 어용유림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註120) 


조선총독부의 조선 유림정책 역시도 회유와 취체라고 두축으로 진행되었다. 일본을 침략 세력으로 규정하고 ‘정正’이 아닌 ‘사邪’의 존재로 보고 타협하지 않으려 한 정통 유림을 배제하고 자신들의 구미에 맞는 새로운 유림층을 창출하여 유교의 정치 이데올로기를 일본 통치에 활용하고자 한 것이다. 조선총독부에서는 유림 회유책으로 이른바 내지문명內地文明을 흡수한다는 명목 아래 유림들을 일본 시찰에 동원하였다. 이들 유림 모두가 유림이라는 계층적 범주에 들어가는 지, 혹은 자진해서 일본 관헌에 협력하며 사회 중진의 지위를 차지하고자 한 자들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註121) 어쨋든 조선총독부에서는 회유의 대상이든 또는 협력자에 대한 보상적 차원에서든 그들에게 일본 시찰의 기회를 주어 확실한 친일세력으로 포섭하고자 했다. 경도京都의 도산어릉桃山御陵을 참배 註122)하도록 유도하여 유학자로서가 아닌 일본의 충실한 신민으로 자처하도록 분위기를 잡고 유교의 정신을 살리되 충성의 대상은 더 이상 조선이 아닌 일본과 일본 천황이라는 이데올로기 전환을 성공적으로 이루고자 하였다. 


3·1운동 이후 조직된 유림단체는 대동사문회·대동유림회大東儒林會·유도진흥회·유도대동회儒道大同會·명륜회明倫會·유도천명회儒道闡明會·유도창명회儒道彰明會·유림회·유림계·모성회慕聖會·모성계慕聖契·유교협성회儒敎協成會·유교부식회儒敎扶植會·유교대도회儒敎大道會·구례유생양반회求禮儒生兩班會·유림연합회儒林聯合會·조선유림도연합회朝鮮儒林道聯合會·평양대동유림회平壤大同儒林會 등등 그 이름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우후죽순처럼 각 지방에서 조직되었다. 여기 유림단체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의 면면은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들 유림조직들은 향교를 중심으로 조직되었고 그 향교가 관헌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향교 중심의 유림단은 조선총독부의 관할권 안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유림단체들은 자발적으로 조직되었다기보다 군수 등의 주도하에서 조직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각지에서 조직된 유림회에 가입하는 사람들은 입회만 하면 양반이 되는 줄 알고 유림회에서 발행하는 첩지를 받거나 심지어 첩지를 돈주고 사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유림회에서 선발된 장의들은 유교적 교양과는 상관 없이 임명되었고 註123) 장의로서 공로가 있으면 면장으로 추천되는 사례가 있자 장의의 첩지를 받으려는 자들이 유림회로 몰려들었다고 한다. 註124) 


총독부에서는 이들 친일 유림단원들에게 일본을 시찰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 일본의 발전상만을 시찰하도록 하여 뒤떨어진 조선과 비교하도록 함으로써 유림들의 자발적인 친일을 유도하였다.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온 유림단들은 여타 총독부 조종의 교화운동단체인 민풍진흥회民風振興會·청년회·금융조합 등의 결사와 함께 교화운동에 동원되어 유교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이 ‘실질강건實質剛健·근검저축勤儉貯蓄·시간여행時間勵行·공과속납公課速納·청결상미淸潔尙美’ 등의 풍조를 조성하는 풍속개량운동 註125)과 이른바 ‘내선융화內鮮融和’운동 註126)에도 동원되었다. 한편 친일 유림단체들에게 향교재산을 이용하여 주로 청년층을 대상으로 한 강연회를 개최하거나 강습소 및 학교를 경영하도록 하면서 식민지 교화사업과 교육에도 동원하였다. 


5. 친일유림단체 대동사문회와 유도진흥회 


3·1운동이 있은 후 당시 경성통신사 사장으로 있던 대원장부大恒丈夫 등이 알선 註127)으로 1919년 11월 16일에 정동구락부貞洞俱樂部 지부에서 대동문화사라는 단체의 발기총회가 있었다. 대동문화사는 “덕성을 함양하여 윤리를 존중하고 친목을 도모하며 근검을 행하고 애경哀慶을 문하며 환난患難을 구救하고 지식을 교환하며 사업을 진흥하고 법률의 범위 내에서 동포의 권리를 신장伸長하고 행복을 증진하기로 목적” 註128)으로 한다는 규약을 발포하였다. 일단 일반 단체로 성립은 되었지만 조직 구성이 이루어지지 않다가 1920년 1월 25일에 종로 태화관에서 2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대동사문회라는 명칭으로 창립되었다. 註129) 이때 발기식에서 총독부 학무국장과 학무과장이 축사를 하였다. 본회에는 중추원 참의 어윤적魚允迪과 일진회 간부였던 이범철李範喆·김정기金正基가 대표로, 그리고 총독부 경무국 정보위원 대원장부가 고문에 임명되었다. 발기인으로 참여한 인사는 친일유림 26명이었다. 註130) 대동사문회 회원 중에는 중추원 참의로 임명되는 사례가 많아 관변적 성격이 짙다. 註131) 


대동사문회는 ‘4천년 내 숭배되어 온 공자교의 재홍, 도덕부식, 유림장려’ 註132)를 위하여 조직되었다고 내세우고 있지만 각 부서의 사업사항을 보면 유교본래의 사업보다는 총독부의 통치에 적응할 수 있는 교양을 키우는 연구사업과 아울러 사회교화사업을 보조하는 제사업을 전개하였다. 註133) 당시 회관은 경성 낙원동 248번지에 정하고 경성을 중심으로 각지에 지회를 조직하였으며 각도 군지부에 전사典事를 선정, 임명하여 지방회 업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註134) 그리고 1920년 4월에 최영년崔永年이 편집 겸 발행인으로 『대동사문회회보』가 창간되었다. 한편 대동사문회는 중추원 부찬 어윤적과 송지헌이 일본 시찰을 마치고 돌아온 후 동경사문회와 연락을 갖고 이른바 유교의 ‘내선융화’를 내세웠으며 윤용구尹用求를 회장으로, 어윤적을 총무로 하여 새로이 조직을 개편하면서는 재정상 총독부의 후원과 보조를 더욱 잘 받을 수 있었다. 註135) 


유도진흥회는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온 경북 유생들이 경북 도참여관의 조종을 받아 고안해서 註136) 1920년 1월 16일에 경성구락부에서 경성의 유림과 경상남북도 유림 88명이 모여 발기총회를 갖고 결성되었다. 註137) 


조선유교회 창립식


초대회장에는 김영한金永漢이 선발되었고 1921년 제2회 정기총회에서는 회장 박제빈朴齊斌, 부회장 윤희구尹喜求, 장의장 정진홍鄭鎭弘, 총무 윤필구尹弼求, 이사 정봉시鄭鳳時·김영한·권순구權純九·서광전徐光前·최강崔岡·김진한金鎭漢·정인욱鄭寅昱·홍우숭洪祐崇 등 당대 경학원이었다. 註138) 회원 중 김영한·정진홍·윤필구·김한목金漢睦 4인은 중추원 참의였다. 유도진흥의 대표 김영한이 조선총독에게 보낸 「조선유도진흥회경과상황보고서」에 의하면 총독부 내무국에서 본회 성립을 위해 수백엔을 보조한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는 재정적 어려움과 각 부·군·도에까지 세력을 확대하는 문제와 동일 성격의 대동사문회와의 경쟁의 어려움을 총독에게 호소하면서 총독이 유도진흥회의 총재, 정무총감이 부총재, 총독부 각 국장을 고문으로 추대하고자 한다면서 그 동의를 간절히 구하고 있다. 註139) 유도진홍회는 자발적으로 완전한 총독부 어용기구로써 자처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도진흥회는 “유도儒道의 진흥을 도모하고 퇴폐頹廢한 도의道義의 번장繁張을 기도하고 세도世道의 진운進運에 공헌貢獻” 註140)하고자 한다는 목표를 내걸었지만 조선총독부를 위하여 모험까지 감행한 정치결사였다. 조선총독부 내무국은 당초 유도진흥회를 이용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유생 출신과 내통을 시도하고, 임시정부를 내부에서 분열시켜 와해시키고자 이면에서 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당시 경무국 정보위원 국지겸양菊池謙讓이 조종하고 경무국에 지도를 받고 협력한 친일단체였다고 한다. 註141) 


유도진흥회의 취의서 및 회칙에 의하면 “국헌을 존중히 여기고 국법에 순종하며 백성의 복리를 염두에 둘 것”, “세상 돌아감에 뒤지지 않도록 평상시 대국을 눈여기고 경거불온輕擧不穩한 행동을 삼가며 일반 민중의 모범이 되도록 힘써” 註142) 등을 운운하며 노골적으로 총독통치에 협력하는 단체의 취지를 분명히 하였다. 


전국 각지에는 유도진흥회 지부가 조직되었다. 경남지부를 비롯하여 경기도 양주·남양·장단, 충남의 서산·예산·천안·아산, 함남의 안변·영흥군 등지에 지부가 설치되었고 그후 1920년대를 통해 많은 곳에 지부가 설치되었다. 이들 유도진흥회 지부는 총독부와 지방관청, 그리고 향교재산에서 재정적 보조를 받았다. 註143) 지회가 각 지방에서 설치될 때는 각 지방 군수와 면장들이 주도하였고 註144)일본인 도지사·부윤·지방 행정관리부장·헌병대장·경시 등까지도 참석 註145)하는 등 관주도官主導로 조직되었으며 공히 순량한 신민으로서 총독부 통치에 순응하는 인간을 육성하기 위한 교화사업과 교육에 동원되었다. 註146) 유도진흥회는 회지로써 1921년 2월부터 『유도儒道』를 간행하였다. 


이상으로 볼 때 대동사문회와 유도진흥회는 상당한 세력을 얻은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註147) 이들 단체는 1920년 이후 경학원의 춘추석전재에 유림대표로서 참열하여 첨향례添香禮를 행하였다. 그외에도 친일유림단체로서 경학원 강사 장석주張錫周 주도로 결성된 유도대동회 註148)와 1920년 9월에 창립된 인도공의소人道公議所, 註149) 1921년에 강원도 지역에서 창립된 유도천명회儒道闡明會, 註150) 1922년 3월 26일에 전남 광주 도청에서 창립총회를 갖고 조직된 전라도 지역 유도창명회 註151) 등이 활약이 두드려졌다. 


1922년 1월 10일에는 이들 단일 유림단체들의 유림연합대회가 경성부에서 조직된 바 있으며, 註152) 1922년 11월 14일에는 경성에서 전조선유림대회가 개최되기도 하였다. 전조선유림대회는 새로운 유림단을 신설할 계획을 수립하고 대회 선언서를 통해 총독통치에 충실히 지켜나갈 것을 노골적으로 결의하기도 하였다. 註153) 


이상에서 검토한 바와 같이 총독부는 여러 부유腐儒들을 끌어들여 친일 유림단체를 조직하고 전래의 유교정신과 유교교화정책을 현 총독부 식민지통치에 그대로 접합하여 사회운동화 시킴으로써 유교를 이용한 민족분열이라는 효과와 함께 식민지 통치책의 당위성을 유교사상과 조직에서 얻고자 하였다. 그러나 신실한 유림들의 참여없이 부유들만의 모임으로 전락하였다. 당시의 이러한 상황을 세정조는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대동사문회·유교진흥회에 이르러서는 계명구도鷄鳴狗盜의 부유腐儒를 일당一堂에 모으는 것 이상의 것이 아님으로써 진개성망眞個聲望한 유자儒者는 산택山澤에 은일隱逸하여 나오지 않고 예를 들면 충남 예산면 예산리의 권비權泌과 같은 부父는 판서의 영직榮職을 지냈지만 오늘날 영락零落한 지경에 있으며 유류儒流 및 독립파 청년단에게 중망重望있는 선골仙骨을 띤 유자이지만 이러한 종種의 인물은 금일 대동사문회 조직에는 회동하지 않는다. 註154) 


 부패유림 역시도 친일유교단체를 이용하여 출세하고 한낱 가치없는 지위에 연연하는데만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조선총독부의 유교정책으로 일부 정통유학자들이 아쉽게도 친일유학자로 변모하기도 했으나 대부분은 친일정치가들과 직업적인 친일분자들이 동원되었다. 유교에 관한 모든 것을 장악한 조선총독부는 이들 친일유림들에게 유력한 지위를 부여하고 우대하면서 이들이 조선유교계의 대표인양 내세워 일제의 충견忠犬으로 이용하였던 것이다. 


이상으로 보면 조선총독부가 진정 의도한 대로 식민지교화사업의 효과는 거두지 못하고 대부분은 지속적인 활동을 하지 못한 채 흐지부지 되고 말았던 것이다. 註155) 그러나 민족 내부에서 오랜 역사 속에서 향촌사회를 지도했던 유교는 한낱 쉽게 ‘변절’하는 자기 분열의 모습으로 민중에게 각인되어 권위에 대한 깊은 불신감을 키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