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식민지체제의 개편과 문화통치 / 1920년대 일제의 민족분열통치

몽유도원 2013. 7. 20. 21:19

제3장 식민지체제의 개편과 문화통치 

제1절 재등실 총독의 부임과 문화정치 공포 41 

1. 재등실 총독의 부임 41 

2. ‘문화정치’의 공포 43 

제2절 재등실의 통치 5대정강과 조선민족운동에 대한 대책 49 

1. 조선통치 5대정강 49 

2. 조선민족운동에 대한 대책 53 

제3절 일시동인과 차별철폐의 선전 59 

1. 제복과 차별대우 철폐의 선전 59 

2. 경찰제도의 전환과 확대 - 보통경찰제 및 고등경찰제 시행 62 

3. 형벌 시행 - 태형 폐지와 치안유지법의 운영 65 

제4절 문화정치 표방에 대한 열강의 반응 70 

1. 형벌·경찰제도 개혁과 영미의 반응 71 

2. 교육·지방제도 개혁과 영미의 반응 72 

3. 반일민족운동에 대한 영미의 견해 75 



1. 재등실 총독의 부임과 문화정치 공포


1. 재등실 총독의 부임


조선총독부체제가 출범한 이래 조선민족의 민족적 역량을 무시하고 위협과 공포로 완전 복종시켜 성공적으로 무단적 통치체제를 구축했다고 믿고 있었던 일제에게 3·1운동은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1912년에 착수하여 1918년에 완수한 토지조사사업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본격적인 식민지 지배체제를 시작하려 했던 일제는 전 민족적 항거에 부딪히자 이제까지의 통치정책과 구조를 재검토하여 수습하고 시급히 조선인의 독립운동을 진정시키지 않으면 안되었다. 


6월경에 들어와 3·1운동이 진정될 기미를 보이자 일제는 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 총독을 사임케하고 8월 12일자로 제3대 총독에 해군대장 출신의 재등실1919.8.12~1927.12.10을 임명하였다. 재등실 총독은 1927년 6월 20일부터 개최된 제네바 해군군비제한회의에 일본 전권위원 대표로 임명되어 제네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동년 4월부터 총독직을 떠나기까지 일본과 조선총독부의 입장에서 보면 ‘문화통치’를 성공적으로 이끈 총독이었다. 조선총독으로서의 통치 능력을 인정받았기에 그는 후일 일본 내각 총리대신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재등실이 제네바회의에 참석하는 동안에 그를 대신하여 임시총독대리로 육군대장 우원일성宇垣一成이 부임하여 6개월간 총독직을 대리하였다. 그러나 재등실은 제네바회의가 끝나고 귀환하자 바로 조선총독을 사임하였고 일본의 전중의일田中義一 내각은 예상과 달리 조선총독에 육군대장 산리반조山梨半造를 임명하여 그가 제4대 총독으로 부임하였다. 산리반조는 1927년 12월 10일에 총독으로 부임하여 1929년 8월 17일까지 약 1년 5개월간 재임하였다. 그는 신병을 이유로 사직하였으나 재임 중에 뇌물수뢰 사실이 폭로되자 형사피의자로 법정에서 재판을 받았다. 註1) 그의 후임으로 재등실이 1929년 8월 17일에 총독으로 재임명되어 부임하여 1931년 6월 17일 퇴관하기까지 다시 조선총독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이로 보면 재등실은 근 11년간 조선을 통치하였으며, 이는 35년간의 식민지통치 전기간 중 거의 1/3에 해당하는 기간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문화정치를 구상한 주체는 원경 내각의 구상이다. 원경 수상은 조선은 식민지가 아니고 내지의 연장으로 간주한다는 이른바 ‘내지연장주의內地延長主義’의 방침을 재등실 총독이 임명되기에 앞서 공표하고 註2) 조선관제 개변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제도면에서의 관제 개변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1919년 8월 12일 재등실을 조선총독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조선관제가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조선총독이 임명되었기 때문에 임명의 법적 근거는 구관제의 규정에 의해야 했으며, 그것은 바로 현역 육·해군대장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총독에 임명된 재등실은 당시 해군대장 예비역으로 군인신분이 아니었다. 해군대장 예비역인 재등실을 조선총독으로 임명한 후 그의 총독 취임에 즈음하여 현역에 복귀시키는 수속을 밟았던 것이다. 일본이 조선관제개혁 계획에 의해 무관총독제를 철폐하고자 했다면 재등실을 총독에 임명하기 위해 반드시 현역에 복귀시켜야 할 이유는 없었다. 註3) 그럼에도 원경 수상이 이러한 결정을 내리게 되는 과정에는 일본육군의 강렬한 반대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나름대로의 중도적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서 해군대장 출신의 재등실이 문관총독이 아니라는 점에서 군부의 불만을 해소시키고 한편 그가 육군이 아닌 해군출신이라는 점에서 육군의 독점을 어느 정도 억제한 조치였다고 할 수 있다. 문관도 총독으로 임용할 수 있는 제도 시행을 목전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퇴역한 예비역 군인을 현역에 복귀시킨 것은 군국주의자들의 불만을 잠재우는 나름의 묘책이었지 식민지조선의 입장은 고려되지 않았다. 


2. 문화정치의 공포


재등실 총독이 조선에 부임해 오기에 앞서 1919년 8월 20일에 칙령 제386호와 391호로 조선총독부 및 소속관서 관제개혁이 공포되었다. 관제개정의 주지主旨는 “일한병합日韓倂合의 본지本旨에 기초한 일시동인一視同仁”x 의 두고 있다고 전제하고 있다. 註4) 그리고 이전의 통치와 다른 관제개정의 요점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① 오로지 육·해군대장, 즉 무관으로만 임용하던 총독 임용자격의 제한을 철폐하였다. 조선총독은 앞으로는 문무관 모두가 임용할 수 있는 길을 연 것이다. 註5) 그리고 총독의 군수통수권에 대한 사항에서 구관제가 “총독은 천황에 직례直隸하고 위임의 범위 내에서 육·해군을 통솔하고 조선방위의 일을 관장한다”는 조항이 삭제되고 “총독은 안녕, 질서의 보지保持를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되면 조선에서 육·해군의 사령관에게 병력의 사용을 청구할 수 있다” 註6)는 조항을 두었다. 


② 1910년대 무력으로 위협했던 헌병경찰제도를 대신해 보통경찰관에 의한 경찰제도로 개정하였다. 종래에는 헌병이 경찰의 근본조직이 되고 독립관청으로 경무총감부를 두어 지방청에는 경찰권이 없었다. 그러나 관제개혁으로 총독부에 경무국을 두어 경찰의 중앙사무를 관장하도록 하였고, 지방 경찰사무는 각도 장관이 행사하도록 개정하였다. 


조선총독부의 관제개혁의 성격을 두고 ‘문치주의’와 ‘문화주의’를 운운하는 것은 이상의 두가지 개혁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리고 이제까지는 총독과 경무국장 아래 각부 장관이 있고 그 아래 국장을 두었으나 부장관직을 폐지하였고 각 국장으로 사무를 보도록 관제를 개혁하였다. 관제 개혁이 발표된 후 재등실 총독은 수야水野 정무총감과 함께 1919년 9월 1일에 부산에 도착하여 총독부 관료·군인·신문기자, 그리고 이완용李完用 등 출영인들의 환영을 받았다. 일제는 신라환으로 부산항에 입항한 재등실과 수야의 입국을 선전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평민적 면모를 강조하였다. 부산에서 1박을 한 다음날에 경성행 기차에 오른 총독은 수원에서 민간복장인 코트를 벗고 해군대장의 군복으로 갈아입고서 오후 5시에 남대문역에 도착하였다. 그의 도착을 알리는 17발의 예포가 울리는 가운데 재등실 부부는 기차에서 내려 마차로 갈아타고 남산에 위치한 조선총독부 관저로 출발하였다. 마차가 5~6보 정도 앞으로 전진했을 무렵 재등실 총독 부부가 탄 마차와 수야 정무총감 부부가 탄 마차 사이에 폭발물이 던져져 폭발하였다. 폭탄의 파편이 재등실의 검대劍帶와 마차 3곳에 커다란 탄흔을 남겼지만 재등실은 운좋게 부상을 입지 않았다. 하지만 재등실 일행을 출영하기 위해 역에 모인 당국 관계자와 재등실 일행을 취재하였던 기자와 구경하고 있던 관람자들 26명이 현장에서 파편으로 인해 부상을 입고 그 일대는 일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재등실 총독에게 폭탄을 던진 이는 러시아에 근거를 둔 독립군 단체인 대한노인동맹단大韓老人同盟團 단원이며 조선총독을 처단하기 위해 국내로 잠입해 들어온 64세의 노인 강우규姜宇奎였다. 註7) 부임 첫날 폭탄 세례를 받은 재등실은 앞으로 조선을 어떻게 통치할 것인가, 그리고 무엇을 우선할 것인가를 확실하게 학습하게 되었다. 


재등실은 부임한 다음날인 1919년 9월 3일 등청하여 총독부와 소속관서에 대해 새로운 시정방침을 훈시하였다. 이는 부임에 앞서 발표한 관제개혁의 취지와 동일했다. 그것은 일본인과 동등하게 조선인의 지위를 높이는 목표에 도달하는 즉 일시동인 註8)의 그날까지 조선에 문화통치를 실시 한다는 내용이었다. 註9) 


재등실과 조선귀족


재등실은 총독부 제2회의실에 고등관 일동을 소집한 후 “조선통치의 대방침은 명치 43년 일한병합 때에 하사된 명치천황의 조서” 註10)에 의거하고 있음을 분명히 밝혔다. 이는 3·1운동 이후 신시정의 통치방침 역시 강제병합 이래 실시된 조선통치의 기조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음을 단언한 것이다. 


한편 구체적 통치 방침이 세워지지는 않은 상태에서 이른바 ‘문화적 제도 혁신’이라는 차원에서 앞으로 조선통치는 문화통치로 변화할 것임을 훈시하였다. 註11) 훈시에서 관제개혁의 약속 내용을 보면 아래와 같이 정리할 수 있다. 


① 총독 무관제 철폐문관 출신 총독의 임명 가능 註12) 및 보통경찰제도 실시 

② 일본인과 조선인 간의 차별대우 철폐, 조선인 관리 임용과 대우 개선 도모 

③ 언론·집회·출판 등을 고려하여 민의의 창달 도모 

④ 교육·산업·교통·경찰·위생·사회 등의 행정을 배려하여 국민생활의 안정과 복리 도모 

⑤ 일본과 같은 지방자치제 실시를 위한 조사연구 착수 

⑥ 조선의 문화와 관습 존중 


1910년대 무단통치의 면면과 비교해 볼 때, 문화통치기에 조선총독부가 발표한 내정 방침과 통치개혁의 내용은 획기적인 변화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들은 식민지민의 불만을 일시적으로 무마하려한 대내외 선전용이자 표면적 약속에 불과한 기만적인 회유책으로 그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2. 재등실의 통치 5대정강과 조선민족운동에 대한 대책


1. 조선통치 5대정강


헌병경찰에 의한 공포정치로 충분히 조선을 지배할 수 있다는 인식은 3·1운동으로 인해 전면적인 궤도 수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시기에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재등실에게는 많은 과제가 주어졌다. 우선 3·1운동으로 인해 이반된 조선인의 민심을 조속히 수습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 ‘문화의 발달과 민력의 충실’이라는 기만적인 슬로건을 내걸어 조선인으로 하여금 이전과는 다른 통치를 조선총독부가 시행하려 한다는 믿음을 주어야 했다. 1910년대의 조선지배정책의 기본 골격을 유지하면서 조선인의 불만과 요구를 수용해 새롭게 통치정책을 수행해야 했던 조선총독부로서는 문화통치 그 시작부터가 모순의 출발이었다. 


‘내지연장주의’의 표방은 조선을 동화한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러면서 조선의 문화와 관습을 존중한다는 방침을 발표하여 점진적으로는 일본문화에 포섭하겠다고 하는 의지를 드러냈다. 문화통치에서 차별철폐를 최우선의 통치정책으로 내세우면서도 여전히 일본인과 조선인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고 있는 것에 대해 일본은 언제나 조선의 ‘시세’와 ‘민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하였다. 일본의 식민정책에 대해 민족운동계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차별을 강력히 항의하며 동시에 일본의 연장주의와 동화책을 거부하였다. 


재등실은 조선인을 ‘일시동인자’와 ‘불령행동자不逞行動者’로 구분하고 ‘과격분자들로부터 치안을 안정화’시키는 시정을 최우선으로 수행하였다. 그래서 천황의 일시동인의 정신을 받드는 선량한 민중을 애호하지만 국헌國憲에 반항하고 병합정신에 어긋나는 불령행동자에 대해서는 가차假借없이 추상열일秋霜烈日의 위엄威嚴으로써 취체取締  註13)할 것임을 밝히고, 「조선통치에 관한 5대정강」을 발표하였다. 


5대정강은 ① 치안유지, ② 교육의 보급·개선 ③ 산업개발, ④ 교통·위생의 정비, ⑤ 지방제도 개혁 등이다. 註14) 5대정강 중 재등실 총독이 최우선으로 한 치안유지는 ‘불령행동자’인 ‘과격분자들로부터 치안을 안정화’시키는 일이었다. 註15) 1910년대와 차이는 취체만이 아니라 ‘문화 창달’과 ‘민력 충실’을 앞세우는 온화한 민심수습책을 아울러 전개한 점이다. 


1910년대 무단통치기에 이미 갖추어진 정보망과 치안유지의 능력을 기반으로 1920년대 문화통치기의 통치는 겉과 속이 동일한 당근을 억지로 껍질만 다른 색깔로 바꾸고자 한 시도에 불과했다. 문화통치는 일본이 치안유지면에서 3·1운동과 같은 반일 독립을 주창하는 민중 봉기가 일어나지 않도록 예비하면서 1910년대 식민지 통치에서 드러난 한계, 예를 들면 정보기능을 더욱 확대하고 조선민중이 하나의 목소리를 가지고 대동단결하여 민족적 폭발력을 보이지 못하도록 분열하는 고도의 통치술을 발휘할 수 있도록 통치력을 보완하는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치안유지를 위하여 1920년 경찰관서의 수를 1919년의 736개소에서 2,746개소로 3.6배 증가시켰고, 경찰관은 6,387명에서 2만 134명으로 3.2배나 증가시켜 탄압과 감시를 강화했다. 그러나 3·1운동 이후 연일 국경지대에서는 독립운동 세력이 무장항일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만주·러시아 등지의 독립군들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국내로 진입해 게릴라 활동을 벌이며 경찰주재소를 파괴하고 일경을 살해하는 등 일제 식민통치를 위협하였다. 또한 중국 등지에서 잠입한 의열투사들은 조선총독부·종로경찰서 등 서울 한복판에 등장해 폭탄을 던지고 주요 식민통치기구를 공격하는 등 치열한 의열투쟁을 벌였다. 이처럼 국외의 독립운동 세력에 의해 총독부가 공격을 받자, 일제는 만주·연해주에 근거한 독립운동 세력의 근거지를 초토화시키고자 ‘훈춘사건’·‘연해주 4월참변’·‘간도참변’ 등을 연이어 일으켜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재외동포사회에 큰 타격을 입혔다. 학살과 방화·파괴가 일어나는 속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한인사회에 조선인민회朝鮮人民會와 보민회保民會 등 친일조직을 침투시킨 일제는 이들 친일조직을 앞세워 교육·산업 분야를 적극 지원하여 안정된 삶을 도모하고자 하는 동포사회의 환심을 사고자 공격적인 교화선전정책을 펼쳤다. 


임시정부와 독립운동계는 1919년 가을 미국서 열린 국제연맹 제1차 회의가 열리고 1920년 여름에 미국의원단의 조선방문 시기를 기해 국내에서 제2의 3·1운동을 일으키고, 1921년 말 워싱턴군축회의태평양회의 개최 등의 기회를 이용해 국제사회에 조선의 실상과 일제의 침탈 사실을 알리고자 노력했지만 무위에 그치고 말았다. 기대가 컸던 만큼 깊은 좌절을 맛보아야만 했던 독립운동계는 ‘정의’와 ‘인도’의 원칙에 의거한 세계개조가 이루어지리라는 기대와 달리, 이 세계는 여전히 사회진화론적 세계관에 지배되는 냉엄한 현실임을 직시하게 되었다. 이들은 국제사회에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고 판단하였다. 독립운동계는 항일투쟁의 강도를 높였지만 일본의 초강경 대응과 동포사회의 분열, 그리고 일제의 외교적 영향력의 발휘로 고립에 처하게 되면서 위기를 맞이했다. 


재등실의 국경순시


3·1운동을 성공적으로 진압한 일제는 경제 부분에서 산업의 개발을 내세우고 조선경제를 일본자본주의로 예속시키기 위한 여러 정책을 1910년대와는 다른 차원에서 전개하였다. 1920년 3월에 철폐된 회사령은 그 시작에 불과하였다. 조선인 자본가를 회유하여 일본 자본에 예속화시키는 한편 일본 자본을 적극적으로 조선에 진출시켰다. 일본의 관세법을 조선에 적용하여 조선의 관세제도를 폐지함으로써 조선경제를 완전히 일본자본주의의 부속물로 전환시켰다. 


한편 조선에서 생산된 쌀은 일본의 부족된 식량문제를 해결하고자 대량으로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1920년에 시작된 산미증식운동의 목적은 ① 내지 일본 본국의 식량문제 해결에 유용, ② 조선에서의 식량수요의 증가에 대비, ③ 아울러 조선농업경제의 향상, 조선경제의 진흥을 도모한다 고 내세웠으나 실제는 쌀소동에 의해 노정된 일본자본주의의 구조적인 모순을 회피하기 위하여 계획적으로 조선산 쌀의 수탈을 도모하는데 있었다. 동시에 산미증식을 위해 저수지 축조 등의 관개수리사업, 개간을 비롯한 토지개량사업 등 막대한 건설사업에 일본 자본을 투하함으로써 식민지에서 초과이윤을 획득하는 일거양득一擧兩得의 목적을 달성하였다. 註16) 


이로써 조선의 농민들은 산미수탈뿐만 아니라 새로운 수세=수리조합비의 부담으로 고통받았다. 수리관개사업에 투자된 일본자본의 원금과 이자를 지불하기 위해 조선농민을 수리조합에 강제적으로 가입시켜 종래에 없었던 부담을 강요하였다. 또한 조선농민에게 면화의 경작이 강제되고 증산이 요구되었고, 공동판매제도라는 것을 실시하여 조선농민의 자유판매를 금지하여 일본자본에 싼값에 판매되었다. 이리하여 일본 섬유산업을 값싼 원료를 조선에서 사들여서 이를 면직물을 비롯한 섬유제품으로 가공한 후 높은 가격으로 조선에 수출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 가내 수공업을 파괴하는 등 2중·3중의 식민지에 대한 착취를 자행하였다. 註17) 


2. 조선민족운동에 대한 대책


원경 수상은 「조선통치사견朝鮮統治私見」에서 말했듯이 조선을 완전 ‘동화’하려 한 정치적 의도는 조선통치기간 내내 일관되게 관철되었다. 그러나 정치적 필요 또는 정치적 정황의 전개에 따라 그때 그때 변화되어 식민통치에 적용했다. 특히 조선의 독립의식을 어떻게 하면 개량화의 길로 방향을 전환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였다. 일본은 국내외에서 당대 일본의 일급 지식인과 이론가들이 그럴듯한 논리를 전개하도록 부추기는 한편 친일파들에게는 민족주의적 여지를 남겨두도록 허용함으로써 일본의 통치가 조선의 전통과 문화를 존중하고 있는 양 민중 다수를 기만하였다. 


문화통치는 지식인들을 식민지배기구 안으로 끌어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그것은 일체의 제도적·법률적 보완과 행정적 유연성으로 무장하여 제도권 밖의 활동을 엄격히 규제함으로써 검열제도까지도 감수토록 만드는 역할을 했다. 빠른 시일 내에 조선인의 민심을 수습하고 독립운동을 억압하기 위한 대책 마련이 시급하였다. 이를 식민통치에 실현해야 했던 재등실의 고민 속에서 마련된 것이 「조선민족운동에 대한 대책」이다. 이 대책이 언제 작성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재등실의 부임 전후일 것으로 사료된다. 이 대책은 재등실만의 의견이라기보다는 당시 조선통치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일본 정계의 보편적 안이라고 할 수 있다. 註18) 


제국주의자가 식민지를 통치하는데 식민지인을 분열시키고 통치하는 것은 일반적인 지배 전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일제는 1910년대 이러한 원칙에 충실하지 않고 헌병경찰의 무력을 동원해 조선인을 무조건 굴종시키려고만 하였다. 조선인을 두려움에 빠트리고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면 일본의 하층 노예로 예속시킬 수 있기에 별다른 식민지배 전술이 필요 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3·1운동의 발발로 이러한 식민통치관은 여지없이 무너지게 되었고 자신들의 단순 지배 논리를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따라 일본제국주의는 식민통치의 원칙으로 돌아가 통치 전술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재등실 총독의 새로운 통치 전술은 「조선민족운동에 대한 대책」 註19)에 압축되어 있다. 그것은 조선의 중견인물로 하여금 식민통치의 지지층을 확보하고 이들을 민족운동에서 분리시키는 것이었다. 그럼으로서 3·1운동과 같은 전민족적이고 조직적인 독립운동으로 발전해 나가지 못하도록 대처하고, 나아가 조선을 영구히 일본의 식민지로 종속하고자 한 복안이었다. 이 대책에서 재등실은 친일파를 ‘민간심복자民間心腹者’라고 표현하였다. 그의 식민정책은 물리적 힘에 복종하는 조선인이 아니라 마음에서 복종하는 진정한 친일분자를 양성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8가지 대책안이 제시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당국의 태도방침을 철저하게 할 것 : 조선인 관리를 재조사·검토해서 다시 양부良否를 가려내어 상벌을 분명히 하고 관기를 숙정해서 일본에 절대 충성을 다하는 자를 관리로 굳히도록 한다. 

② 친일단체 조직의 필요 : 민간유지의 심복자로 일본과 같은 이상과 정신을 갖고 있는 조선인 한 사람 한 사람을 분명히 가려내기 위해 몸과 마음을 걸고 일을 해낼 중심적 친일인물을 물색해 귀족·양반·부호·실업가·교육가·종교가 등 각 계급과 사정에 따른 각종의 친일단체를 조직하여 얼마간의 편의와 원조를 주어 충분히 활동하도록 해 준다. 

③ 종교적 사회운동불교·기독교·잡교 : 각종 종교단체도 중앙집권화해서 그 최고지도자에 친일파를 앉히고 일본인 고문을 붙여 어용화시킨다. 註20) 

④ 인재육성 : 조선문제 해결의 요체는 친일인물을 많이 얻는 데에 있으므로 친일 민간인에게 편의와 원조를 주어 수재교육의 이름 아래 그들을 양성한다. 처음에는 소규모의 가정적 기숙사를 만들어 모범적인 학생을 수용해 감화·전도輔導시켜 일반 청년의 사상을 완화시킨다. 이는 청년들을 긴 안목에서 친일파 인재로 양성한다는 것이다. 

⑤ 유식자遊食者  註21)의 구제 : 일정한 직업 없이 무위도식하는 자와 양반·유생 가운데 일정한 직업이 없는 자에게 생활방도를 마련해 주는 대가로 온갖 선전에 동원하고 민정 정탐에 이들 유식자들을 이용한다. 

⑥ 일선日鮮 자본가 연계 : 민심의 과격화를 두려워하고 자위自衛의 길을 강구하는 조선인 부호와 일선융화의 길을 거두도록 이용하고 친일기관을 설치하며 자본가와 노동자, 지주 대 소작인의 대립관계를 인식시키고 조선개발과 조선 문제 해결에 끌어들여 매판화시켜 일본쪽으로 끌어들인다. 

⑦ 농촌지도 : 농민을 통제·조종하기 위해서 전국 각지에 유지가 이끄는 단체 ‘교풍회矯風會’·‘진흥회振興會’를 두게 하고, 이에 국유림의 일부를 불하해주는 한편 ‘입회권入會權일정한 산림·들에서 공동으로 여물·두엄용 풀과 시탄용 잡목을 잘라 거두는 권리’을 주어 회유·이용한다. 註22)

⑧ 선전기관 설치와 이용 : 이상의 목적을 철저하게 달성하기 위하여 『매일신보』와 같은 언론을 이용하여 당국은 조고자操觚者에 대해 때때로 방침을 보이고 비밀선전기관을 설치하며 유식자를 이용해 문서와 구설로 선전하고 불령선인을 매도한다. 


이상의 방법에 의해 친일파와 배일파와의 분별을 분명히 하였다. 배일파는 직간접으로 그 행동을 구속하는 방책을 집행하며, 친일파에 대해서는 사정이 허락하는 한 편의와 원조를 주도록 하였다. 재등실은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은 확실하게 탄압하지만 일제의 통치를 지지하고 협력하는 친일파들은 식민지 지배의 새로운 협조자·동조자로 양성하고자 하였다. 


1920년대 초 일제는 조선통치의 관점에서 조선인을 독립파獨立派·자치파自治派·현상파現狀派·중립파中立派 등으로 구분하고 이들 각자의 성향에 따른 통치 대책을 강구하였다. 일제가 내리고 있는 정의에 의하면, 독립파는 조선을 독립시키고 일본인들을 조선에서 구축하려는 자들이고, 자치파는 일전一轉하여 독립파가 될 수 있는 성향을 갖고 있지만 아직은 과격수단과 위험수단을 취하지 않는 자들을 일컫는다. 그리고 현상파는 일제 통치 아래서 권리와 행복을 구하고자 주로 참정권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자들이며, 끝으로 중립파는 어느 편에도 서지 않고 어떠한 견해도 표하지 않는 자들을 일컫는다. 이와 같이 조선인의 성향을 분류해 놓고 여러가지 선전책과 분열책·회유책을 동원해 조선인을 동화시킨다는 통치책을 강구했다. 


배일사상을 품고 독립운동을 목표로 활동하는 독립파들은 ‘불령분자不逞分子’로 규정하고 가차없이 탄압하는 강경책을 취하였다. 하지만 독립파 외의 자치파·중립파·현상파 註23)들은 강경책·유화책의 두 가지 통치술을 경우에 따라 적용하여 가능한 한 일본 세력권 내로 흡수시키고자 하였다. 식민지통치에 대해 저항하지 않고 보다 나은 경제적 처지와 정치적 입장만을 갖기 원하는 ‘순량順良한 조선인 신민臣民’들에게는 순종順從의 반대급부를 베풀었다. 나아가 이들을 적극적으로 회유하여 그들의 정체성을 친일로 경도되게 유도하여 민족진영으로부터 배척당하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동화주의에 감화된 이들을 동원하여 친일단체를 조직하도록 이면에서 조종·후원하면서 조선민중이 식민지통치에 열복悅服하고 있다고 선전함으로써 식민통치의 개발성과를 과시·선전하는데 동원했다. 


이처럼 조선인과 그들의 민족운동에 대해 탄압과 회유라는 이중적인 대응을 취한 조선총독부의 식민정책은 과거의 기득권을 그대로 유지하고자 했던 민족상층부와 생존의 기로에 선 하층의 조선인 사이에 동요를 일으켰다. 국외에서 연이어 일어난 연해주의 4월참변과 간도지역의 경신참변의 소식은 일제의 통치에 대한 전면적 대응이나 무력투쟁이 일본의 강경 탄압을 자초함으로써 독립운동의 역량을 분산시키느니, 먼저 독립을 준비할 수 있도록 실력을 키우고 축척한 것이 현명한 길이라는 쪽으로 경도되었다. 이러한 변화를 유도한 총독부는 각종 개혁위원회를 출범시키고 이른바 순량한 조선인의 민족적 요구를 들어주고 식민정책에 반영할 수 있는 양 유고諭告를 통한 총독부 시정책을 발표해 제도개혁과 정책변화를 추진해 나갈 것처럼 조선인을 기만하였다. 조선인이 전개한 문화운동을 관변문화운동으로 유도해 가기 위해 조선인의 여론을 수집했던 총독부는 그 여론을 총독부정책 수립에 반영하기보다는 식민지통치에 유용한 정보로 활용했을 뿐이다. 


3. 일시동인과 차별철폐의 선전


1. 제복과 차별대우 철폐의 선전


조선총독부는 강점 이래 ‘일시동인’의 정신을 강조했지만 식민지의 현실은 조선인과 일본인의 차별이 조장하였고 해를 거듭할수록 이러한 추세는 강도가 높아갔다. 문화통치를 앞세우고 차별철폐를 주창한 조선총독부에서는 조선인 문무관의 대우 개선과 조선인 관리의 서위敍位·서훈敍勳 자격 확장, 그동안 일본인만 임명하였던 공립학교장에 조선인 임용, 조선인 판검사의 권한 확대, 그리고 태형 폐지 등을 추진하겠다고 선전하였다. 그리고 은사恩赦  註24)라는 명칭 아래 ‘내선융화內鮮融和’를 위한 다양한 방도를 시도함으로써 조선인의 의사를 존중하며 통치한다는 내용이다. 조선총독부가 시행한 ‘내선융화책’은 일선 민족상호의 이해관계를 좁혀서 융화를 꾀하고 했다기보다는 실제로 조선인 상층 중견인을 일본화로 유도하여 민족계층으로부터 분리해 분열시킨다는 민족분열책으로 나타났다. 


내선융화의 방도로 제시된 사업은 조선인 군수의 일본 시찰과 일본사정 및 조선사정을 상호 소개할 것, 회의·강습 등에서 조선인과 일본인이 상호 열석列席할 것과 조선인 시찰자에 대한 편의 제공, 그리고 ‘민의를 창달’을 위해 지방유지를 초집招集하여 개혁의 취지를 전달·보급, 민정 시찰원을 파견하여 시정 전달, 한글신문 발행 허가, 중추원의 회의 및 회합을 실시, 도참여관을 초집할 것 등이었다. 이들 사업 모두는 조선인의 의사를 통치에 반영하겠다는 의도로 발표되었지만 실제로는 민족분열을 조장한 도구로 이용되었다. 


한편 조선인 차별대우를 철폐하겠다는 선전에 따라 조선인 관리의 봉급을 ‘고등관관등봉급령’, ‘판임관봉급령’에 적용하여 일본인과 같은 대우를 받게 하여 불만을 해소하겠다고 공포하였다. 그러나 실제 일본인은 식민지재근가봉植民地在勤加俸·숙사료宿舍料·은급재관년가산恩給在官年加算등 일본인 관료에게 한정된 특권이 실시되었다. 인본인 관료들은 5~6할 정도 ‘재근가봉제在勤加俸制’를 적용받아 조선인보다 1.5배를 더 받음으로써 민족 격차를 수반하는 봉급제도를 그대로 관철하였다. 대부분의 재한국 일본인 총독부 관료들의 조선 근무는 ‘파견’적 의미보다는 토착화한 재근在勤의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같은 학력과 자격을 갖은 조선인과 일본인 관료 사이에 봉급 격차의 유지는 일본인 관료에게 민족적 우월감을 양성해주는 토양이 되었고 ‘차별의 철쇄’의 약속을 어긴 것으로 인식되었다. 註25) 


조선인의 관리등용 범위를 넓힌다는 방침에 따라 일본인만으로 임명되었던 공립보통학교 교장에 조선인도 임용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고등관특별임용령’을 개정하여 지방청 과장급 등에도 조선인을 임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차별이 철폐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고등관 임용 조선인의 비율은 얼마일까? 1927년 말 통계에 의하면 총 321명 중 조선인으로서 임명된 사람은 총 22명이며, 전체 인원수의 6.8%로 註26)조선인 비율이 10%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강점 당시 제정된 ‘조선총독부재판소령’에 의하면 조선인 재판관은 민사에서는 원고와 피고 모두가 조선인인 사건의 경우와 형사에서는 피고인이 조선인인 사건에 한해서만 그 직무를 맡을 수 있었다. 1920년 3월 재판소령을 개정하고 조선인 판검사와 일본인 판검사 사이에 존재하는 권한 상의 차이를 없앴다. 이후로는 조선인 판검사가 일본인 또는 외국인 관계 사건에 대해서도 심리에 간여할 수 있도록 하였다. 註27) 그러나 법관 임용에서 조선인 출신자들은 차별받았다. 


문관총독의 임용 계획과 함께 무단통치적 공포감을 불식시키기 위해 마련한 대책이 식민지 관료 제복제도의 철폐 조치였다. 원경 내각의 각의 결정을 거쳐 조선총독부는 ‘소속관서직원복제 폐지의 건’ 註28)을 1920년 8월 31일자로 공포하여 직원 복제를 폐지하였다. 註29) 이것은 통감부시기부터 시작되어 약 13년 계속되었던 관료의 제복 착용을 폐지한 것이다. 관리의 제복착용 폐지 조치는 비번벌非藩閥 출신 정당에 의해 내각을 조각한 원경이 1919년 7월에 일본에서 이미 폐지한 바 있다. 평소 ‘평민재상’이라고 불리우는 만큼 번벌의 군사적·관료적 이미지와 차별화를 시도하였던 원경은 문화통치라는 통치방침의 전환을 꾀하고 있는 시점에서 총독부 관료만이 아니라 특히 교사들까지도 복제와 착검을 갖추고 강단에 서서, 수업을 하게 하는 것은 식민지인에게 지나친 공포감을 유발하는 행태였기 때문에 조선에서도 세관·감옥 등 일부 직을 제외하고 모든 관료의 제복은 폐지되었다. 註30) 새로운 시대와 통치방침의 변화를 시각적으로 연출하는데 성공하여 『경성일보』는 「금일부터 점점 제복 착검과 따로」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제복 폐지의 소식을 전하면서 “복장계에서도 일종의 데모크라시”라고 보도한 바 있다. 註31) 


2. 경찰제도의 전환과 확대 - 보통경찰제 및 고등경찰제 시행


조선총독부가 문화통치와 ‘신시정新施政’의 일대 혁신으로 꼽는 것은 경찰제도의 개혁이었다. 일제는 1910년 6월에 대한제국으로부터 경찰권을 빼앗아 ‘통감부경찰관관제’로 발포한 바 있다. 1910년 강점 후에는 ‘조선총독부경찰관서’로 개편되면서 헌병경찰의 통합제도를 시행하였다. 1910년대가 일제의 무단통치기라 불리우게 된 것은 헌병경찰제가 갖은 무단적 성격에 기인한 바 크다. 3·1운동이 일어나게 된 원인 중에서 헌병경찰제가 갖고 있는 폭력성이 지적되면서 헌병경찰제 폐지의 의견을 내고 보통경찰제도로 전환을 꾀한 이는 원경이었다. 註32) 


원경은 강제병합 후에 대한제국의 구 군인들을 보조헌병으로 채용해 비난받은 사실을 지적하면서 금일에 이러한 조치는 오히려 유해무익했음을 시인하고 註33) 헌병을 경찰관으로 대체하도록 관제를 개정한 것이다. 헌병경찰이 보통경찰에게 사무인계를 완료한 것은 1919년 11월에 이르러서야 가능하였다. 이로써 종래의 헌병경찰제는 완전 폐지되고 일반경찰제로 개혁되었다. 그러나 경찰 관련 예산의 증액과 함께 경찰력은 크게 강화되었다. 당시 조선에 주둔한 약 8,000명 정도의 헌병이 그대로 경찰로 흡수되었으며, 조선인으로 임명했던 순사보직은 폐지되었고 순사로 통일하여 일반경찰로 흡수되었다. 경부보警部補 이하 형사·순사에 이르는 하급경찰관이 대폭 증원되었고 경찰주재소·파출소 등이 증설되어 일반경찰의 수는 헌병경찰제 때보다 2,400명 정도 증원되었다. 


일제식민지통치 삽화


1부府·1시市와 군郡에 1경찰서, 1면面에 1주재소를 목표로 경찰이 증원되어 1,500명의 경관이 일본에서 전출되어 조선으로 건너왔다. 3,000명은 일본에서 신규로 모집되어 조선에 배치되어 4,500명의 일본 경관이 새로이 조선으로 건너온 셈이다. 註34) 한편 특별고등계형사特高刑事라는 사상 담당 경찰관이 수만 명으로 증원되어 애국지사와 사상범에 대한 사찰·체포·혹형酷刑을 자행하였고 헌병파출소 등 최일선의 조선인 감시기구도 증설되었다. 이로 보면 경찰기구와 인원은 대폭 증가하였고, 이로 인해 조선인의 기본적 인권은 1910년대보다 더욱 위협을 받게 되었다. 3·1운동 이후 증가된 경찰력을 정리하면 〈표 1〉과 같다. 


〈표 1〉3 .1운동 이후 경찰력의 증가
연차 경찰관서 경찰관
일본인 조선인 합계
1919 (제도 개정 전)1,8266,2538,25514,518
1919 (제도 개정 후)2,7618,2947,09815,392
19202,76110,5157,86118,376
19212,96012,6188,58220,750
19222,95912,1898,58220,771
19233,04912,1688,47920,647
19242,99911,1257,33318,458
19252,88111,1257,33318,458
19262,86311,1297,33318,462
19272,87911,1297,33318,462
19282,91511,3077,36318,670
19292,92611,987,41318,811
19302,926 7,41318,811
19312,93010,6018,16818,769
19322,94511,1668,16219,328
19332,97111,1668,16219,328
19343,02911,1498,17719,326
19352,97611,2328,17719,409
19362,99311,4628,26219,724
19373,03812,1618,48120,642
19383,12512,9858,79721,782
1943?14,7477,96822,715
출전 : 中塚明, 『朝鮮の民族運動と日本の朝鮮支配』, 109쪽에서 재인용.


사실 헌병경찰제에서 보통경찰제로 전환을 도모한 때는 1918년경이었다. 이러한 제도적 검토를 시작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조선총독부에서도 3·1운동 이전에 이미 조선의 정황이 위험 수위에 다다랐음을 감지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통치의 가장 우선을 ‘치안 강화’에 두고 있었던 장곡천호도는 헌병경찰제가 존속되도록 로비활동을 전개했지만, 1918년경 일본 정계에서도 무단통치를 전환해야 한다는 여론이 우세했다. 


3. 형벌 시행 - 태형 폐지와 치안유지법의 운영


강점 직후 조선총독부는 반일 조선인들을 강압적으로 붙잡아 들였으나 모두 수감할 수 없자, ‘조선태형령’을 제정·공포하고 봉건적 악법인 태형을 존속시켰다. 태형은 1894년 갑오개혁과 1895년 을미개혁 때에 근대적 법행정이 도입되면서 폐지되었으나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면서 태형을 부활시켰다. 1912년에 ‘조선형사령’ 註35)을 제정·공포하고 징역·구류 및 벌금형을 대신하여 태형을 형벌로 운영하였다. 단기의 자유형 또는 재산형에 비해 그 효력이 클 뿐 아니라 집행방법도 극히 간편하고 쉽다는 이유를 내세워 조선에서 운영하였다. 일본 내에도 없고 조선 내의 일본인에게도 집행하지 않는 오로지 조선인에게만 적용시킨 악법 중의 악법이었다. ‘조선태형령 시행규칙’은 봉건적인 태형의 법행정을 그래도 유지하였다. 註36) 태형은 비문명적이고 야만적인 형벌이었다. 형벌 도중에 사망자나 불구자가 되는 등 희생자가 속출했지만 일제는 행형비行刑費를 절약하는 한편 부족한 감옥 때문에 태형제도의 유지가 불가피하다는 이유로 1910년 내내 태형을 유지하였다. 


태형은 식민지 수탈정책을 수행하는 도구로도 악용되었다. 육지면 재배를 거부하는 농민에게 태형을 가하여 육지면 재배를 강요하기도 하였다. 1912년에는 총 수형 인원 가운데 태형의 비율이 20%이었으나 해마다 증가하여 1916년에는 46%에 달하였다. 1918년 이후 3년간 태형에 처해진 숫자는 재판에 회부된 자와 범죄 즉결 사건을 합하여 57,324명에 달하였다. 註37) 이처럼 태형은 1910년대 무단통치의 상징이었다.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태형은 그 진가를 발휘하였다. 각 지방 3·1운동의 주도자, 시위 가담자들 중에 실형을 받은 이들을 제외하고는 가담 여부에 따라 50에서 90에 이르는 태형을 받은 자들은 태형 도중, 또는 석방 후에 그 후유증으로 사망에 이르는 이들이 많았다. 


기독교 선교사들은 조선에서 태형제 피해의 잔혹함을 고발하였고 영국 등 구미제국들까지도 태형제 시행의 야만성을 공격하였다. 재조선 외국인들도 조선총독부 관제 중 긴요하게 개혁해야 할 것은 태형폐지라고 지목하고 조선총독부에 이를 촉구했다. 註38) 이와 같은 내외의 비판에 내몰리자 일본 내에서나 조선총독부 모두가 형행刑行상 태형의 존재는 제국통치에 지장을 준다고 판단하고 1920년 4월 1일 이후로 태형을 완전 폐지하였다. 註39) 


3·1운동 이후 안정되게 조선을 통치하기 위해 가장 우선할 조선총독부의 통치 방침은 ‘치안제일주의治安第一主義’이었다. 1907년 제정된 ‘보안법’으로 애국지사들의 독립운동을 탄압해 왔던 조선총독부는 3·1운동이 발발하자 보안법만으로는 법 적용에 한계를 깨닫고 형법 제77조의 ‘내란죄’ 법규를 적용하여 독립운동가들에게 최고 사형 또는 무기에 처하도록 조치한 바 있다. 그리고 1919년 4월 15일에 재빨리 ‘정치에 관한 범죄처벌의 건’ 이른바 ‘제령 제7호’을 제정하여 독립운동 탄압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였다. 그런데 192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일본 내의 ‘대정데모크라시’의 사회공간에서 공산주의 및 무정부주의 등 체제변혁운동이 만연해졌고 식민지 조선 내에서도 공산주의운동이 치열해지자, 일본은 제국주의 체제의 위협으로 받아들였다. 일제는 제국주의 타도와 공산혁명화를 주창하는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하기 위한 단호한 조치로써 치안유지법을 마련하였다. ‘치안유지법’은 1925년 5월에 보통선거법과 함께 제국의회에서 통과되어 성립되었다. 註40)치안유지법은 ‘국체 혹은 정체를 변혁하고 또는 사유재산제를 부인할’ 목적으로 결사를 조직하고 가입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하고, 그것을 위해 협의·선동·이익제공을 하는 자들을 중형으로 다스릴 수 있도록 함으로써 혁명운동을 뿌리째 근절시키고자 한 법안이었다. 공산주의자의 혁명운동이 가장 중요한 단속의 대상으로 상정되었다. 


치안유지법에 의해 송치되는 민족운동가


일본 제국의회에서 치안유지법은 보통선거법과 함께 통과되어 1928년에 일본에서는 제1회 보통선거가 치루어졌지만 조선에서는 보통선거는 시행되지 않은 채 치안유지법만 시행된 것이다. 여기에 기존의 치안유지법이 미흡하다고 인식하고 1928년 6월 29일, 의회의 심의가 필요없는 긴급 칙령의 형식으로 ‘치안유지법개정안’을 공포하면서 조선에서도 동시에 「치안유지법중 개정긴급칙령」을 발표하였다. 그 개정안을 보면 “조선의 독립을 달성하고자 함은 우리 제국 영토의 일부를 잠체潛切하여 그 통치권의 내용을 실질적으로 축소하여 침해시키려는 것이므로, 즉 치안유지법의 소위 국체변혁을 기도하는 것으로 해석함이 타당하다”라고 하여, 일본 내 공산주의자들과 무정부주의자들을 탄압했던 치안유지법이 식민지 조선에서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적용되는 탄압법으로 기능하였다. 조선인의 독립운동을 천황제를 부인하는 ‘국체변혁’ 註41)의 대역행위로 해석하고 전국민의 충성을 분열시키는 매우 심각하고 위협적인 상황으로 받아들였다. 註42) 


‘국체변혁’을 기도한 자의 처벌규정이 이전의 최고 징역 10년에서 ‘치안유지법개정안’에서는 사형과 무기징역으로 훨씬 강화되면서 독립운동가에게 최고 사형까지 선고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 


 

4. 문화정치 표방에 대한 열강의 반응


3·1운동은 제국주의의 식민지 통치가 근대화·문명화로 미화되고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 지배를 사회진화론에 의한 당연한 대세라고 여긴 제국주의 중심의 세계를 향해 정의와 인도, 약소민의 인권 문제를 제기해 주었다. 3·1운동 이후 영국과 미국 등의 신문·잡지에서 일본의 식민지 통치를 비판하는 기사들이 게재되었고 일본에 의해 일방적으로 선전된 조선사정과 다른 소식들이 속속 선교사들에 의해 전세계에 전파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역전시키기 위해 일본은 적극적인 홍보에 나섰고 자국 제국주의의 보호에 나선 영미는 식민통치의 개편을 일본과 영국에 시급히 요구하고 나섰다. 


제국주의 열강들은 ‘선의善意’로 가장된 식민지 개발주의의 정체가 일본의 비문명적 조선지배로 인해 민족독립운동이 여타 식민지에까지 파급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따라서 식민지 통치개편의 요구는 3·1운동과 같은 독립운동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조치해 주기를 요청한 것과 다름없다. 약소민 피지배민을 위한 인도주의가 아닌 제국주의자간의 문제 확대를 최소한으로 줄여 제국주의 상호간의 안녕질서를 유지하고자 한 충정忠情의 훈수인 것이다. 일본의 조선통치 개편은 미봉책이었으며 문화통치기에 통계수치를 증거로 들이대며 식민지 경제발전을 운운하며 조선과 세계를 기만한 위장통치술에 불과하였다. 문화통치기에 총독부관제 개편과 지방제도 개편, 그리고 교육개편 등은 1920년대 대표적인 문화통치 성과로 선전되었다. 


1. 형벌·경찰제도 개혁과 영미의 반응


재등실의 개편 성과가 실제 나타나지 않은 상태에서 미국과 영국 등 열강들은 문화정치 선언 이후 표면적으로 나타난 잔혹한 형벌의 폐지와 경찰 제도와 교육제도, 그리고 지방제도의 개편에 불과한 변화를 본국에 보고하는 연례보고서를 통해 높이 평가하였다. 註43) 3·1운동 탄압 때에 영국과 미국 양국은 잔혹한 형벌태형의 폐지와 경찰개혁을 일본에 요구하였다. 특히 3·1운동 때에 많은 만세시위자들을 태형으로 다스렸던 총독부는 징역범을 수용할 형무소를 확보할만한 재정적 여유가 없음을 이유를 들어 태형의 형벌을 그대로 유지해 왔다. 


영국과 미국에서는 태형은 야만적 형벌로 일본은 이미 폐지되었으나 조선인에게만 부과한 차별성을 지적하며 그 폐지를 여러 번 요구하였다. 외국의 신문들도 “일본이 시정을 강행할 때에 극히 잔인하고 야만적인 태형을 행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註44)라고 비난하였다. 이에 일본은 “원래 태형이라는 것은 조선 종래의 처벌법으로, 일본은 잠시 그것을 계속 채용하는데 불과하다. 그리하여 부패한 조선인의 겁략劫掠을 방지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되어 왔다” 註45)고 변명하였다. 또한 영국에서도 범인에게 태형을 선고하고 있음을 들어 “조선에서 잔인가혹하고 실로 야만적 처형으로 공격”되는 것에 불만을 표하였다. 아쉽지만 국제여론을 의식해 일제는 1920년 3월 태형을 폐지하였다. 이러한 조치에 대해 영국과 미국은 크게 환영하였다. 註46) 그외에도 보통경찰제의 실시와 경무총감부에서 총독부 직속의 경무국으로 경찰기구를 바꾼 점 등을 높이 평가하였다. 註47) 


1922년 재조선 영국 총영사의 연차보고서에서는 조선인을 향해 폭력을 휘둘렀던 경관을 재판하는 사례를 들어 “조선인을 다루는데 개선이 보여진다”고 보고하였다. 1920년대 후반으로 가면 조선인에게 가하는 고문에 관한 보고는 아예 사라지게 되었다 註48)고 보고하고 있다. 이러한 보고서는 대부분 일본의 일방적 선전책에 의거해 작성되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2. 교육·지방제도 개혁과 영미의 반응


재등실이 부임한 이후 성심을 기울인 대상은 외국인 선교사들이다. 3·1운동의 배후 세력으로까지 지목되었던 선교사들과 우호롭고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자 했던 재등실은 선교사들이 조선총독부 당국에 품고 있는 불만을 해결해 주고자 노력하였다. 그래서 1919년 당시 전문학교로 격하되고 종교교육도 금지되었던 미션스쿨들의 대우 개선을 꾀하고 제2차 조선교육령 실시를 기해 이전의 교육적 불만을 해소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교육개혁의 방향을 들여다 보면, 교육의 확충을 내세웠지만 본질은 점진적 동화책의 의도를 품고 한편으로 조선인을 일본인의 보조적 존재로서만 교육하고자 하는 교활함이 있었다. 註49) 1922년도에 영국 연차보고에서는 신 조선교육령의 공포를 ‘명확한 진보’로 평가하였고, 미국의 밀러R.S.Miller 총영사도 조선총독부의 교육개혁을 ‘진보’라고 평가하였다. 註50) 


밀러 총영사는 1923년 자신이 직접 작성한 「조선에서의 교육」이라는 보고서에서, 식민지교육문제를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① 물질적인 성장은 급속하지만 모랄의 성장에서는 시간이 걸린다. ② 학교 정비는 다액의 자금이 필요해 교육의 발전을 저해한다. ③ 고등교육은 현지민의 정치적 각성을 환기할 위험이 있으며 일본도 같은 문제에 직면해 있다고 보고하였다. 밀러 총영사 역시 식민지국가 관료로서 교육개혁이 갖고 있는 본래의 의미보다는 원활한 식민지 통치를 위한 보조 장치로 여기는 관점에 서있음을 보여준다. 註51)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영국은 조선에 자치를 부여할 것을 일본당국자에게 제안한 바 있다고 한다. 1920년 7월에 발표된 지방제도 개혁 註52) 당시 영국 총영사 레이는 “지방제도가 실제 어떻게 될까에 대해 말하는 것은 시기상조이다”라는 태도를 취하였으나 영국·미국 모두 일본이 조선에 자치권을 부여한 것으로 인식하였다. 미국의 밀러 총영사는 1923년에 시행된 제1, 2회 지방선거에 관한 보고에서도 자치문제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 1925년 11월에 경성일보 사장인 부도도정副島道正이 「조선통치의 근본의」 註53)라는 논설을 통해 조선의회의 설치와 조선인에게 자치를 줄 것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자, 밀러는 “전면적으로 동의한다”는 견해를 보고한 바 있다. 註54) 


재등실이 1929년 조선에 재부임하면서 조선에서 실시된 지방제도가 자치를 목표로 나가는 훈련 단계의 과정임을 내세워 1920년대 내내 조선인을 우롱했던 지방제도를 더 이상 그대로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1920년대 내내 아무런 의결권이 없이 자문기관으로만 운영해왔던 부협의회, 지정면평의회를 의결기관으로 하고 도평의회를 공선제선거권은 각 의원만 의결기관으로 확충한다는 내용의 지방제도 개혁이 1930년 12월에 와서야 이루어졌다. 이 역시도 기만적인 성격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며 현상을 크게 변화시킨 것은 없다 註55) 미국의 데이비스 총영사는 조선총독부의 지방개편을 ‘성장’이라고 표현했지만 선거권에 관한 납세제한 조건으로 대부분의 조선인의 정치참여를 막아버렸다고 비판하였다. 지방개편은 조선인의 자치 실험이고 개혁의 장래는 제도를 잘 행사할 수 있는 조선인의 능력과 이러한 조선인의 활동을 허용하는 일본의 도량에 달렸다고 보았다. 註56)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조선에서의 지방제도 개편에 대해 영국과 미국의 평가는 상당히 낙관적이었다. 그들의 견해는 조선의 식민지 실정을 고려하지 않고 일본의 선전홍보를 그대로 수용한 듯한 견해에 머물고 진실을 보지 않으려 했다. 


3. 반일민족운동에 대한 영미의 견해


미국과 영국의 관심을 끌었던 사건은 이른바 아펜젤러 사건3·1독립운동 1주년의 학교데모에 의한 미션스쿨의 교장 해임과 쇼우 사건이었다. 쇼우 사건의 주인공 죠오지 쇼우George L. Show는 영국 국적의 아일랜드인으로 압록강 대안의 중국령 안동에서 무역회사인 이륭양행怡隆洋行을 경영하였다. 그는 자신의 회사 내에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교통국交通局을 설치하도록 허용하고 독립운동가들에게 상해와 안동安東 사이의 선편을 제공하는 등 한국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그런 그가 일제로부터 독립운동을 원조하고 있다는 혐의를 받아오던 중 조선에 들어왔다가 여권 불소지의 용의로 체포되었다. 그의 신병 구속을 노리고 있던 조선총독부는 내란죄로 기소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영국은 쇼우의 체포에 대해 크게 반발하였고 영일관계가 흔들릴 것을 두려워 한 원경은 재등실과 총독부 간부들을 설득하여 협상을 벌이게 하였다. 그 결과 이듬해 쇼우는 안동에서 떠나는 것을 보석 조건으로 하여 예심 중인 1922년 3월에 석방되었다. 이 사건에 대해 영국의 연차보고에서는 1921년경부터 총독부의 ‘성의있는 대응’에 의해 관계가 양호하게 되었다고 보고하였다. 註57) 


조선총독부는 반일적이었던 선교사들과의 관계를 호전시키기 위해 유화정책으로 일관하였다. 1925년 조선신궁 진좌식 출석을 교회측에서 거부했을 때도 조선총독부는 이를 양해하며 선교사들의 환심을 샀다. 이러한 조선총독부의 우호적 노력으로 외국인들과의 관계는 순조로워졌다. 그러나 친일적으로 변모해 간 선교사들에 대한 조선인의 반구미反歐美 감정은 높아갔다. 註58) 재조선 영국 총영사의 연차보고서 중에는 1924년 영국영사관 폭파 미수 사건, 1926년 미국인 선교사의 조선인 폭행사건이나 구세군내 조선인 신자 제명 사건과 1929년 영국의 협력으로 상해에서 여운형이 체포된 사건 등을 소개하고 조선인들의 반발을 보고하였다. 註59) 서울 주재 영국 총영사인 레이 註60)는 1920년부터 1926년도까지 매년 「조선에 대한 연차보고」를 작성하여 본국에 보고하였는데, 그는 재등실의 ‘온건한 통치’와 구미인 선교사와의 관계 개선에 의해 이때까지 ‘불온한 상황을 계속하고 있던’ 조선도 ‘눈에 띠는 사건이 없는’ 안정을 향하고 있다는 인식으로 일관하고 있다. 註61) 이러한 인식은 정황인식을 정확히 분석한 판단이기보다는 조선총독부의 선전홍보를 그대로 수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영·미 총영사들의 보고서에는 일본인과 조선인의 차별이 부분적으로 철폐되고 있고 한글신문인 『동아일보』·『시대일보』·『조선일보』 등 창간으로 언론의 자유가 불완전하나마 인정되었다고 보았고, 그 결과 1922년경에는 3·1운동 이래 사회불안이 일응 해소되었다고 인식하였다. 물론 이러한 보고서에 기록된 내용이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판단에 머물고 있음을 인정했지만, 1921년 11월 12일에 미국에서 개최된 워싱턴회의 註62) 결과 조선인은 외국의 힘을 빌린 독립회복의 가능성이 사라져 일본 통치 이외에 선택권이 없게 되었다고 체념諦念하면서 독립회복을 위해 직접 행동할 가능성은 없다고 이해하였다. 


미국은 동아시아·태평양지역의 전후 처리문제를 놓고 철저한 자국 이익이라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민족자결주의가 약소민을 위한 도덕적 문제 제기가 아님은 알 수 있다. 독립운동세력은 조그만 가능성이라도 놓치지 않으려 미국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며 독립의 가능성을 여러모로 타진하였다. 따라서 가능성을 점쳐서 행동하기보다는 1%의 가능성이라도 잡고자 전력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미주 대한인국민회는 태평양회의위싱턴 군축회담에 참가 대표들에 대한 지원밖에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조선대표단 註63)은 10월 1일자로 미국대표단에 청원서를 보내어 조선대표단의 회의 출석권과 조선 문제 상정을 요청했으나 미국의 공식적 반응은 없었다. 註64) 워싱턴군축회의는 아무런 성과없이 1922년 2월 6일에 막을 내렸다. 

 

반면 모스크바에서 1922년 1월 21일부터 2월 2일까지 개최된 극동인민대표자대회는 총 52명의 조선인 대표단이 참석하였다. 대표자대회는 약소민족의 민족해방운동에 열렬한 지지를 표방하고 민족부르주아지와 민족통일전선 결성을 촉구하는 등 조선 문제에 깊은 관심을 표하고 독립운동 지원을 약속한 가운데 막을 내렸다. 이와 같은 정황이 전개되면서 미국에 희망을 걸었던 많은 젊은이들 중에는 조선의 독립 지원을 약속한 볼세비키에 동조하였고 독립의 가능성을 품고 공산주의에 경도된 자들이 많았다. 


미국은 기독교와 민주주의에 기초한 정의와 자유의 상징 국가로 인식되어 한국민들에게 끝없는 기대를 품게 했지만, 정치적으로 볼 때 조선인의 일방적 짝사랑이었다. 워싱턴회의가 완전 무위로 끝나버리자, 일본은 다방면의 선전홍보를 통해 적극적으로 독립의 가능성이 희박함을 광고하였다. 이러한 정국에서 민족주의운동계열은 일본과의 타협을 모색하였으며, 동화주의자들은 총독부의 후원을 받아 발호하였다. 이에 비해 노농정부의 사회주의 이념을 수용해 반일투쟁의 정신적 이념으로 무장한 청년층 중심의 반제비타협 노선이 영역을 확대해 나가며 민족분열상을 치열하게 드러내었다. 


이러한 상황이 전개되는 가운데 미·영 정부의 견해는 같은 제국주의 국가의 이해 측면에서 일본과 동일한 의식을 갖고 있었다. 이에 따라 이들 정부는 조선민중의 의사를 대변해 줄 수는 없었지만 조선에 체류하면서 체감한 분명한 사실은 조선인의 독립요구와 일제에 대한 좋지 않은 여론은 변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 점에서 언어해득율이나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의 혼인 수 비율이 증가하지 않고 있음을 들어, 일본은 동화에 고집하고 있으나 성과는 거의 오르지 않았다고 지적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註65) 


3·1운동과 같은 전민족적인 독립운동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항일운동은 간단없이 계속되었다. 미국의원단이 중국과 조선·일본을 방문하는 기간 중에 제2의 3·1운동을 일으키고자 도처에서 폭탄투척사건이 일어났다. 1920년에 발생한 일본군의 간도출병 사건에 대해서는 일본군 철병 다음해인 1921년의 연차보고에 의하면, 철병 후 현지의 상황은 평온하며 일본군이 발표한 출병 일본군 수와 조선인 사망자 수는 전면적으로 신용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조선총독부 발행의 영자신문 『서울프레스』에서 일본군의 행동을 옹호하고 변명 기사를 여러 차례 소개하는 등 일본의 입장을 옹호하는 태도를 보였다. 


영국 외무성에서는 일본측이 말하는 일본제국 신민의 보호와 중국측이 주장하는 중국의 주권 침해, 그 어느 쪽에 중점을 둘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면서 선교사의 보고를 어디까지 신용할 것인가를 판단하지 못하였다. 註66) 한편 외무성 극동국의 F. Ashton-Gwatkin이 1920년 12월에 작성한 「조선이나 그밖에 지역에서의 일본의 잔악행위에 관한 각서」에서는 조선을 중심으로 간도와 산동반도와 시베리아·대만·남양 등지에서의 일본군의 잔악행위 사례를 소개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영국정부는 영일동맹을 체결하고 있는 상황에서 매우 조심스럽게 일본문제를 언급하였다. 그러면서도 중국이나 시베리아로 침략해 들어오는 일본을 영국이 지원하고 있다고 각국이 인식하지 않을까를 염려하였다. 註67) 많은 조선인이 간도를 침략한 일본군에 의해 학살당하였지만 영국은 3·1운동의 때와 같이 일본정부에 직접적인 권고나 또는 조언은 행하지 않았다. 註68) 


식민지교육에 저항하며 조선인본위교육을 주창하는 학생들의 동맹휴교는 매년 발생하였다. 1923년에는 의열단에 의한 폭탄 테러 활동과 함께 공산주의의 지도를 받는 민중운동도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1926년에는 6·10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그해 12월 의열단원들이 국내로 잡입하여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폭파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상과 같이 항일운동이 여러 차례 발생하였지만 영미 총영사들의 연차보고에서는 직접행동의 수는 감소하고 미연의 적발·검거되는 일이 잦아 경찰의 활동이 교묘해지고 있음을 보고했다. 반제를 기치로 내걸은 공산주의자들이 관여한 사건들도 1920년대 전반을 통하여 증가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고 아울러 보고하였다. 


공산주의는 1921년 처음 조선에 소개될 때만 해도 청년학생들 사이에는 신사상으로 소개되었으나 1924년에 이르면 공산주의 사상과 조직이 학생층과 노동자층으로 침투해 들어가고 있었다. 공산주의운동 내에서도 ‘독립’을 목표로 고려공산당파와 국제공산주의의 방침을 따르는 친 볼세비키의 이르크츠크파로 양분되었고, 이들 양자는 후일 주도권 싸움으로 분열되어 갔다. 이들 학생의 동맹휴교와 공산주의운동 등에 대해 영국과 미국정부가 비판적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