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3·1운동 이후 조선총독부 통치에 대한 국외의 반응 / 국내외 정세와 조선통치안의 검토 / 1920년대 일제의 민족분열통치

몽유도원 2013. 7. 20. 21:10

제2장 국내외 정세와 조선통치안의 검토  

제2절 3·1운동 이후 조선총독부 통치에 대한 국외의 반응 26 

1.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26 

2. 미국·영국의 조선관 30 





2. 3·1운동 이후 조선총독부 통치에 대한 국외의 반응


1.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을사조약이 늑결된 이후부터 일본의 강제병합, 그리고 3·1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 조선인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일본의 조선침략 사실을 폭로하여 조선 문제를 국제사회에 제기하고자 했지만 구미 열강들은 일본의 조선 지배를 보장해 주는 방향으로 정세가 전개되어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침체에 빠진 국외 한인의 독립운동계는 3·1운동의 발발로 다시 한 번 전세계에 조선민의 독립을 호소하였으며 그 중심에 재미한인사회가 있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특히 상해에서 활동 중이던 독립운동 세력과 재미한인들은 분산된 독립운동의 역량을 결집시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3·1운동 발발 소식이 미주에 전달되자 가장 발 빠르게 움직인 한인단체는 대한인국민회이다. 중앙총회 임시협의회를 소집하고 “거룩한 3월 1일에 대한민족 전체를 단결한 조선독립국민단이 선언한 바, 조선독립선언서와 공약삼장을 동월동일에 대한인국민회가 선언함이오 결의함임을 선포하며 동시에 조선독립국민단 대표 33인원은 대한인국민회의 동일한 대표임을 공포”하였다. 그리고 3·1운동에 대한 후원방침을 밝히고 미주 각 지역 동포사회에 3·1운동의 소식을 전파했다. 


3·1운동의 소식에 큰 충격을 받은 미주 한인들은 파리강화회의에 대표 파견의 구체안을 논의하였다. 미주 한인들은 각자 역할을 분담하고 단결해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할 시기가 도래했다고 판단하고 독립운동의 구체적 실천방안을 마련했다. 註18) 이어 독립의연금 모금활동을 비롯한 구체적 활동에 들어갔다. 註19) 대한인국민회는 원동에서 장차 수립될 임시정부에 참여하고 이제까지 대한인국민회가 수행하였던 임시정부의 역할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일임하고자 했으며 그 사업의 일환으로 북미·하와이·멕시코 재류 동포의 인구 조사와 등록 사업에 착수하였다. 


한편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는 3월 24일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김규식 등 대표단 소요경비로 3,500달러를 송부했으며 3월 29일에는 중앙총회장 안창호의 명의로 윌슨 대통령과 미국·영국·프랑스·이탈리아·중국 등 5개국 대사에게 절대적 독립을 원하는 한인들의 의지와 김규식의 대표 출석권을 요구하는 전문을 보냈다. 註20) 그리고 중앙총회 전체대회에서 원동대표의 중국파견이 결의되어 대표로 선임된 안창호는 4월 5일 미주를 출발하여 호주·홍콩을 경유, 5월 25일에 상해에 도착하여 임시정부 국무총리 대리 겸 내무총장에 부임, 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이로써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교통신부인 파리위원부와 필라델피아 통신부는 대한인국민회의 재정지원을 받아 출범·활동하게 되었다. 


재미한인들은 서재필·이승만·정한경 등이 중심이 되어 1919년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필라델피아 리틀극장에서 개최된 제1차 한인회의First Korean Congress을 열고 여기서 채택된 6개의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동 결의문에서는 현 임시정부는 고매한 기독교인이며 고등교육을 받은 자로서 모두 민주정부의 원칙을 신봉하고 있는 사람들이 세운 정부이므로, 재미한인들은 도의적·물질적·육체적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 하며 우리의 투쟁 목표는 아시아 민주주의의 실현이며 희망은 기독교 신앙을 널리 전파하는 것이므로 이 호소가 미국민의 지지를 얻을 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일본국민에게 보내는 결의문에서는 일본 국민들이 지성있고 현명하다면 일본정부에게 국제 정의의 원칙과 진정한 민주주의 정신을 받아들이게 해야 하며 미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청원서에서는, “우리의 유일한 목표는 우리 민족을 위한 자결이라는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다시 얻어 기독교 민주주의라는 기본이념 아래 자유 국민으로서 성장하는 것”이라고 호소하였다. 이처럼 재미한인들은 동양에 민주주의와 기독교정신을 실현하기 위해서도 조선은 독립되어야 함을 호소한 것이다. 조선의 독립을 기독교정신의 실현에 연결하여 전세계 기독교들의 지원과 동정을 얻고자 하였다. 


3·1운동의 현장을 목격한 선교사들의 보고서에 조선의 독립운동 소식과 일본인들의 야만적 탄압상이 폭로되었는데 당시 미국 신문·잡지 등에 조선 관련 보도 기사가 9,000종에 달하였다고 한다. 재미한인 이민사회가 처음 형성될 때 한인들의 쉼터가 되어 준 곳은 교회였으며 여러 기독교단의 지원을 받아 건축된 한인교회는 한인커뮤니티를 이루는 중요한 거점이되었다. 교회에서 굳건한 신앙심과 근면함·애국심을 길렀고 이러한 면모는 재미 한인에 대한 사회적 평가를 높여주었다. 재미한인들은 자신들의 인종차별과 문화적 열등감 속에서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고귀한 투쟁을 전개하고 봉사와 희생의 존엄성을 갖고 높은 자긍심을 느꼈으며 이는 지속적인 독립운동의 후원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3·1운동에서 한국에 대한 일본의 비인도적인 탄압행위가 알려지고, 캘리포니아주에서 일본이민의 배척문제가 제기되면서 미주에 반일여론은 격화되었다. 더구나 파리강화조약에서 중국 산동성山東省지역의 이권을 일본에게 넘겨주기로 결정하자, 미의회와 언론은 일본이라는 나라는 식민지를 통치할 민족이 못된다고 공박하였다. 이번 조약은 ‘인류의 해방을 위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국의 정신에 정면 배치된다는 논리를 내세우며 반일여론을 선도했다. 미일의 대항관계는 태평양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해군확장경쟁을 촉진시키게 되었고 미국 내에서 배일排日이민문제가 재연되면서 일각에서는 미일전쟁의 가능성까지 거론되기도 하기도 하였다. 


4월 무렵에는 상해 임시정부를 비롯해 대한국민의회정부와 한성정부 등 임시정부에서도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여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을 지지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이에 대해 일제는 재미한인들의 통합을 파악하고 이들의 외교활동에 대한 미국정부의 반응과 움직임을 주목하여 대책을 마련하고자 고심했다. 3·1운동의 소식과 식민지 조선의 실정, 그리고 일제의 비인도적 식민통치 사실을 국제사회에 알렸던 이들은 기독교 선교사들이었다. 註21) 파리강화회의에 대한 민족적 염원은 조선인간에 ‘평화회의’라고 불렀던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그리고 ‘민족자결주의’도 조선인들은 문자 그대로 이해하고 민족자결 즉 독립에 희망을 걸었다. 그러나 파리강회회의가 끝나고 도래한 베르사유체제에서도 세계는 여전히 제국주의 열강들의 사회진화론적 힘의 관계가 지배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국제사회의 질서와 이해관계 속에 조선총독부는 적당히 편승하면서 개혁과 문화통치를 내세우며 제2의 3·1운동과 같은 민족봉기가 일어나지 않도록 조선인들의 비판과 요구를 경청하고 이를 시정해줄 것처럼 달래면서 1910년대와 기실 다름없는 식민지 동화정책을 수행해 나갔다. 


2. 미국·영국의 조선관


3·1운동은 일본만이 아니라 전세계의 제국주의 국가들에게 경종을 울렸다. 이에 놀란 일제와 영국·미국 등 제국주의 국가들은 통치정책의 전환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10년대 일제가 일방적으로 국제사회에 선전·홍보한 식민지 통치 미화론이 거짓 선전으로 드러나게 되면서 일본은 과거처럼 조선을 식민통치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일제의 조선통치에 대해 영국과 미국은 어떠한 견해와 입장을 갖고 있었으며 그것이 조선총독부의 식민통치에 어떠한 영향력을 발휘하였을까. 영국과 미국은 조선의 민족문제와 독립문제에 관심이 없었지만 3·1운동이 발발하자 일제에게 식민통치를 개혁할 것을 요청하고 압력을 가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최근 영국 외무성의 연차보고서Annual Report 註22)와 미국 영사 보고 註23)에 의거한 일제 식민지지배에 관한 연구 성과를 통해 새로운 사실에 접근할 수 있었다. 註24) 일본의 식민지지배에 대한 미국과 영국의 관심은 ‘정의’와 ‘인도’라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풍조 때문이 아니라 반제운동이 자신들의 식민지에까지 미치고 3·1운동의 정신이 전세계적으로 전파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3·1운동이 평정되어 식민지 통치를 안정시키려면 일본의 식민지 통치 개혁이 시급히 이루어져 반제운동이 진정되어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강제병합 후 영국은 일본의 조선 지배에 대하여 묵인하는 자세를 취하였으며 공식적으로 조선의 독립을 한번도 지지한 적이 없다. 註25) 영국은 당시 아일랜드와 인도를 식민지배하고 있었고 특히 인도에서는 1919년 4월에 1,000인 이상의 사상자를 낸 유명한 대량 학살 암리스타사건이 일어나 민족자결주의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3·1운동이 일어났을 당시 영국 총영사 레이A.H Lay는 휴가 중이었고 그를 대신하여 서울에 주재하고 있던 로이드 총영사 대리가 시시각각의 변화와, 날로 악화되는 조선 상황에 관한 보고를 본국에 타전하였다. 그러나 영국 정부에서는 조선 정세에 큰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나 제암리사건이 알려지자 이를 계기로 5월경부터 변화된 입장을 보여주였다. 즉 7월에 전 인도총독을 역임했던 외상 커즌E. Curzon은 진전사기珍田捨己 주영일본대사를 통하여 조선 ‘통치의 개선’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註26) 


영국은 3·1운동이 발발하자 이 운동이 발생하게 된 잠재적 요인으로 ① 일본인이 조선의 모든 분야, 즉 경제활동이나 행정 등을 독점하고 있는 점, ② 조선인에게 일본어를 강제한 점, ③ 동양척식주식회사로 대표되는 일본인의 입식入植 활동에 대한 조선인의 반발, ④ 재판의 불공정 등을 지적하였다. 이 문제에 대한 영국의 처방안으로는 ① 무관총독을 문민으로 교체하고, ② 얼마간의 자치를 용인할 것, ③ 조선어를 일본어와 동등하게 취급하고, ④ 언어·집회·출판의 자유를 용인해 줄 것을 일본에 요청하였다. 


나름대로 조선 문제에 처음으로 관심을 보인 것이다. 영국은 일본의 군·경찰에 의한 고문·학대 등의 인도상의 문제에 관심을 두다가 1920년 7~8월경에는 일본의 조선 통치에 대한 개편이 이루어져 조선의 상황이 대부분 개선되었다고 판단하고 있다. 註27) 일본의 문화정치에 대한 선전책을 그대로 수용했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조선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사람은 파리 통신국의 황기환이다. 그는 영국의회에 독립호소문을 보내고 영국인 민간이 중심이 되어 결성된 한국친우회와 활동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조선총독부는 영국에서의 황기환의 외교활동을 주목하고 무엇보다도 영국의 반응이 어떻게 나타나는지에 관심을 보였다. 註28) 


황기환은 1921년 6월에 런던으로 가서 영국의회에 일본의 침략을 비판하고 독립호소문를 제출하였다. 이 호소문에서는 1885년 9월 26일에 조선정부와 영국간의 우호통상조약이 체결되고 당시 영국이 조선의 독립을 인정했던 사실을 상기시켰다. 그는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호소하고 일본이 조선을 강제병합하고 집회의 자유, 언론의 자유, 출판의 자유를 박탈하고 정치범들에 대한 고문을 자행했음을 폭로했다. 그리고 3·1운동 과정에서 보여준 일본의 잔악한 진압과정과 피해상황, 3·1운동을 무마하기 위해 펼쳤던 일본의 개혁과 문화통치의 허구성을 폭로하였다. 특히 황기환은 일제의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와 제암리 대학살과 간도의 대학살을 폭로하여 전세계 기독교계에 조선의 구원을 도덕적으로 호소하였다. 제국주의의 당면 이익과 권리라는 관점에서 실제적인 문제를 앞세워 호소하기도 하였다. 註29) 곧 만주에서의 일본의 독점적인 제국주의 팽창을 경고하면서 “아시아에 있는 모든 서양 열강들의 이권에 치명적”이라고 하였다. 조선의 침략은 “일본의 공공연한 정책에 있어서 첫 단계에 불과할 뿐이고 다음 단계는 만주의 흡수, 그런 다음은 중국을 지배”할 것이라고 경고하며 은근히 영국을 자극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대미 외교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한 이들은 재미 한인들이다. 특히 재미한인의 통합단체인 대한인국민회는 미정부를 향해 1882년 ‘한미수호조약’을 준수하여 한국의 독립을 승인해 줄 것을 요구한 바 있다. 재미 한인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혹은 외교적 차원의 운동을 전개할 때마다 일본의 불법적인 한국병합과 한국인에 대한 만행을 폭로하고 미정부에 대해 1882년 체결한 ‘한미수호조약’의 성실한 이행을 촉구하였다. 


한편 국내에서 ‘한성정부’가 선포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이승만은 1919년 6월에 ‘대한공화국 대통령’이라는 명의를 사용하여 구한국과 수호조규를 체결했던 열강들에게 한국에서 새로운 공화정부의 탄생을 알리는 서한을 발송했다. 특히 이승만은 미국대통령 윌슨에게 보낸 서신에서 ‘조미수호조약’ 체결 이래 우호적인 양국관계를 다시 발전시킬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미국을 비롯한 열강들은 이승만 서신에 대하여 아무런 공식적 반응도 보이지 않았으며, 당시 미국정부는 조선 문제를 일본의 내정문제로 보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19세기에 들어와 미 대륙에 중국인과 일본인의 이민이 급증하였는데, 특히 일본인 이민의 증가는 백인노동자들을 자극하였다. 여기에 ‘황화론黃禍論’까지 가세해 캘리포니아에서는 일본인배척운동이 번져나갔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날 당시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위험시한 미국은 일본에 우호적이었으며 영국과 함께 일본의 승리를 배후에서 지원하였으나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대일여론은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이제 일본은 미국에 대한 군사적 위협자로서, 그리고 일본이민은 미 노동자들의 경제적 안정을 위협하는 일로 부각되어 1905년을 분기점으로 미·일 관계는 불화와 마찰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註30) 


이러한 정황이 가운데 일어난 사건이 전명운·장인환의사의 의거이다. 당시 공립협회 회원인 전명운과 대동보국회 회원인 장인환은 한국통감부 외교고문이었던 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 須知分, 1851~1908를 처단하였다. 註31) 사건 직후 전명운·장인환은 피체되어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미국인들은 ‘일본을 자유의 적賊’으로 보고 전명운·장인환 의거를 “장·전 양씨의 스테분을 포격함은 곧 자유전쟁이라”고 규정하고 정치적 사건이라 주장하던 재미 한인들의 여론에 동정적이었다. 註32) 사실 미국은 일본의 강제병합이 발표된 이래 영국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조선통치에 대해 이론異論을 제기한 적이 없다. 하지만 3·1운동이 미국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제창으로 인해 일어나게 된 것을 인식하고 있었던 미국으로서는 조선의 독립운동 세력들이 다방면에서 미국에 기대를 걸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파리강화회의가 열리고 있는 중에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의 자격으로 파리통신국을 개설하고, 전승국들을 접촉한 약소국은 조선인 독립운동가들뿐이었다. 


조선 통치의 정책 전환을 가져온 요인으로서 ‘내지연장주의’의 지론을 폈던 원경 수상이 조선에 통치개혁을 지시하고 재등실 총독을 부임시켜 문화통치를 실시하도록 조치한 배경에는 영국과 미국 등 열강들이 일본에 조선통치 개혁을 요청한 것과 일본의 발빠른 대응이 자리하고 있다. 3·1운동이 일어나게 된 중요 원인으로 미국대통령 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에 조선인들이 많은 기대를 걸고 있음을 주목했지만 조선의 독립을 지지하지는 않았다. 파리강화회의의 전승국 중에서 미국대표들은 조선의 독립운동에 대해 그나마 동정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미 국무성 당국은 서울총영사 버그홀즈L.A. Bergholz에게 “조선재주 미국 시민이 일본의 내정에 간섭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을 재삼 지시하였다. 註33) 그러나 제암리사건이 알려지고 일본군의 잔인한 3·1운동 진압 사실이 전해지면서 다소 변화가 일어나 미국 신문 특히 ‘황화론’의 입장에서 반일적인 기사와 논설을 게재했던 허스트W. R. Hearst 경영의 신문·잡지들에서 일본의 행위를 비난하는 기사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미 의회도 6월에 들어와 조선 문제를 취급하게 되었다. 


한편 미국의 롱B. Long 제3국무차관은 7월 초에 출연出渕 주미일본대사와 면담하는 중에 한국문제에 대한 의견과 일본군의 만행에 관한 설명을 요구하였다. 이 자리에서 주미 일본대사로부터 앞으로 조선 지배를 “자유롭게 한다”는 약속을 끌어내었다. 당시 이 회담에서 미국은 일본에 대한 내정간섭이 아닌 인도상의 문제임을 천명하였다. 이 회담이 있고 난 후 주미일본대사는 조선통치 개혁과 기독교도의 대우개선 등을 촉구하는 안을 원경 수상에게 보내었고, 원경도 조속히 장로교 기독교도연합회 동양위원회에 ‘통치의 개선’을 약속하는 전문을 보냈다. 그후 미국 기독교교도연합협의회에서 작성한 「조선에 관한 보고」는 미의회 상원에 상정되어 미국의회의사록에 수록되었다. 「조선에 관한 보고」는 인도상의 관점에서 일본의 행동이 지나침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이외에도 조선인의 독립염원을 담고 있는 「조선인 동정 결의」·「조선의 독립안」 등이 제출되었으나 부결되었다. 당시 미의회에 동시에 상정된 아일랜드 독립 지지안은 채택되었다. 


이상과 같이 3·1운동 당시 영국과 미국 정부가 일본에 대해 조선에서의 식민지 통치 개선을 요청하고, 미국보다는 영국 편에서 통치에 대한 구체적인 요구를 하고 있다는 점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조선에서의 민족운동·반식민지운동이 인접한 중국의 민족운동을 자극하고 또한 영국 식민지에까지 어떠한 형태로 파급되는 것에 신경을 곤두세웠을 것이다. 


3·1운동 당시 영국과 미국과 같은 열강들은 일본과 동일한 제국주의 국가이므로 결코 조선의 독립을 지지하지 않았다. 그러나 3·1운동의 잔혹한 탄압 소식이 전해지자 인권차원에서 일본의 독립운동 탄압을 비판하였으며 일본측에 식민지 통치에 대한 개선을 요청하였다. 註34) 그것은 자신들이 통치하는 식민지에 3·1운동과 같은 민족운동이 전파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이들 열강들은 조속한 시일내에 3·1운동이 진압되기를 열망하였고 일본제국주의가 3·1운동의 발발의 원인이 되는 조선인의 민족적 불만을 해소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