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자치·참정권운동과 민족분열책 / 자치·참정권운동의 전개와 민족분열정책 / 1920년대 일제의 민족분열통치

몽유도원 2013. 7. 21. 21:52

제6장 자치·참정권운동의 전개와 민족분열정책 

제1절 자치·참정권운동과 민족분열책 203 

1. 자치운동의 연원 203 

2. 지방제도 개정과 지방자치운동 207 

3. 참정권운동과 조선의회 설치운동 211 

4. 자치운동을 이용한 민족분열책 215 

제2절 일제의 민족분열책과 민족운동의 분화 225 

1. 교육진흥운동과 조선총독부의 분열책 225 

1) 조선교육회의 교육진흥운동 225 

2) 관변 조선교육회 설립과 운영 228 

2. 친일세력육성과 민족개량주의 출현 231 

3. 각파유지연맹의 결성과 친일단체의 연대 237 

4. 1920년대 민족운동의 분화 242 



1. 자치·참정권운동과 민족분열책 


1. 자치운동의 연원 


3·1운동 이후 조선총독부는 ‘내선일체’와 ‘내지연장주의’를 조선통치의 근본으로 한다고 선언했으나 이를 원활히 수행할만한 인력과 제도를 갖추지 못한 채 통치는 시작되었다. 재등 총독의 부임 후에도 여전히 치안이 안정되지 못하자 독립운동의 기세를 무마하고자 “조선인을 국정에 참여시켜 책임을 느끼게 해야만 모국일본-필자에 대한 신뢰를 두터이 할 수 있다” 註1)며 조선인에게 참정권을 부여하고 지방자치제를 실시할 것처럼 분위기를 잡아갔다. 


취임한 지 얼마 안 되어 재등실 총독은 조선 각도에서 45명의 유지들을 조선총독부로 초대하였다. 이 자리에서 시정방침을 강연하고 앞으로 총독부 통치에 대한 조선인의 희망사항을 제출하도록 요구하였다. 그 자리에서 제출된 19개조의 사항 중에 제1조가 “지방자치제 실시를 위한 면회面會·부회府會 양회를 설립하라”는 요구였다. 註2) 19개조의 희망 사항 중에 시세의 여론을 반영한 내용도 있지만 제1조는 다분히 총독부의 유도에 따른 요구였을 것으로 사료된다. 註3) 조선총독부는 민심 회유라는 면에서 이러한 회동을 마련했으나 재조선 일본인들 역시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넓히기 위해서 지방자치제의 실현을 간절히 원하였다. 재조선재 일본인으로는 농민·상민·공민들과 자본가·관료·교육자들이 있었는데 이중 총독 관료로 복무하는 이들과 교육자들은 일본 내에서도 엘리트층에 속하는 자들로 조선을 일본에 완전 동화시키는 것을 자신의 의무와 책임으로 여기는 이들도 많았다. 註4) 


총독부에서는 지방개편에 앞서 민간에 참정론參政論·자치론自治論·일선무차별론日鮮無差別論·일선연방론日鮮聯邦論 등의 다양한 논의를 흘려서 조선인의 반응을 떠보았다. 그러나 조선민중의 열화와 같은 독립 주장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기대할 만큼의 성과를 얻을 수 없었다. 조선에 자치권을 부여할 것처럼 운운했지만 일본 내에서도 조선인은 동화할 수 없는 위험한 존재이므로 자치권을 주는 것은 위험하다고 보는 여론이 지배적이었다. 註5)새로이 부임한 재등실 총독이나 수야 정무총감 등은 통치 당사자로서 난감한 부분이기도 했지만 본국의 방침인 내지연장주의는 ‘동화’의 또 다른 표현이므로 대부분의 총독부 관료들에게 하달된 조선총독부의 통치 방침은 독립은 물론 절대로 조선자치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註6) 


3·1운동이 일어나자 조선의 참정 문제를 처음 제기한 자들은 일본 내 정우회政友會 소속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민족차별의 문제가 통치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보고 ‘내지연장주의’를 이용하여 민족차별의 불만을 무마하고자 하였다. 조선인에게 참정권을 부여하여 조선인이 제국신민으로서 책무를 느끼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을 편 정우회의 다목구미차랑多木久米次郞 외에 4인은 1920년 2월 2일에 재조선 일본인과 조선인에게 참정권을 부여해 달라는 건의안을 일본의회에 제출한 바 있다. 註7) 한편 재조선 일본인들, 특히 상공업에 종사하는 일본인들 중에는 조선에서 자신들의 권익을 지키고 영향력을 확대해 가는 방편으로 참정론을 주장하였다. 


1910년대 식민지 체제에서 이미 타협의 길에 들어선 이른바 ‘현상파’로 분류된 자들에게도 참정권과 자치권의 부여는 귀가 솔깃해지는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내지연장주의’ 방침에 따라 조선에서 중의원 선거법의 시행을 일본의회에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했지만 사실상 조선과 일본 모두에서 반대에 부딪혔다. 그럼에도 이들은 매년 일본 의회에 건의서를 올리는 활동만으로도 문화정치가 베푼 유화책의 여유를 누리었다. 또한 이들은 조선총독부의 자문기구에 불과한 중추원의 위치와 존재 의미에 의문을 제기하고 실제로 총독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기구의 출현을 요구하였다. 이들은 “조선인이 진실로 일본제국에 동화하여 일본제국과 합체함으로써 마음에서부터 존망存亡을 함께” 註8) 하려면 조선에서도 의원을 선거하여 제국의회에 참여시킬 것을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일부 부일배의 견해가 민족운동의 이름으로 확대되어가자 독립운동계에서는 1919년 10월 초부터 참정운동·자치운동에 대한 냉험한 비판을 가하고 절대 독립의 입장을 거듭 천명하였다. 참정·자치운동을 운운하는 이들과 일선무차별론과 일선연방론 등을 주창하는 이들에 대해 독립운동의 근간을 흔들어 버리는 ‘백괴百鬼’들이라고 규정하였다. 註9) 


자치운동의 논의는 재등 총독이 조선에 부임하기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박승빈朴勝彬·이기찬李基燦 등 수명의 인사들이 우좌미승부宇佐美勝夫, 총독부 내무국장의 수족이 되어 일본으로 건너가 급하게 일본 정부를 상대로 자치운동을 벌인 바 있다. 註10) 그러나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의 기세가 등등한 상황에서 자치니 참정이니 하는 언급조차도 조선 내에서 용납되지 않자 자치운동은 사그라졌다. 註11) 

 

2. 지방제도 개정과 지방자치운동


독립운동의 급격한 전파를 막고자 참정권 획득의 가능성을 민족운동계에 띄우면서 여론의 추이를 지켜보았던 재등실은 강력한 민족적 저항에 부딪히자 1920년 7월 29일을 기해 지방제도 개정을 발표하였다. 註12) 지방제도 개정의 주요 내용은 “① 부·면에 자문기관인 부·면협의회를 둘 것, ② 도 지방비의 자문기관인 도평의의회道評議會를 둘 것, ③ 조선인 보통교육을 위해 부군도에 학교비제도學校費制度를 설치하고 그 자문기관으로 학교비평의회學校費評議會를 둘 것, ④ 일본인 교육비를 위한 기관인 학교조합평의회學校組合評議會를 둘 것” 註13) 등이다. 


지방제도 개정의 기만성은 부·면협의회 의원을 선출하기 위해 제정된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가질 수 있는 자격 요건을 명시한 내용에서도 찾을 수 있다. 각 평의회와 협의회원을 선출하는 유권자 자격은 ‘25세 이상의 남자이며 연액 5원 이상의 세금을 납부하는 자’ 註14)로 규정하였는데, 그 당시 재조선 일본인들의 대부분은 연액 5원 이상의 부세를 낼 수 있는 경제적 처지를 갖고 있었지만 지방세·부세·면부과금·학교비 등에서 연액 5원 이상을 낼 수 있는 조선인은 일부 유력자를 제외하고는 드물었다. 註15) 인구비율로 따져보면, 호수가 많은 조선인보다는 호수가 휠씬 못미치는 일본인에게 더 많은 선거권이 주어짐과 동시에 대부분의 조선인에게는 선거권이 주어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註16) 


조선총독부는 지방제도 개정을 마치고 “민의창달을 도모하고 인민의 지방정치 참여의 단서를 열었다” 註17)고 자찬하며 앞으로의 완전한 지방자치제 실시로 나가기 위한 첫 단계라는 점을 힘주어 강조하였다. 그리고 지방선거를 마친 후에는 ‘선거미담選擧美談’이라며 협의회 및 평의회의원으로 당선된 일본인들이 조선인 유권자의 표를 얻어 지방의원에 당선되었으며 이는 ‘내선융화’의 좋은 사례라고 소개하였다. 註18) 지방의원에 당선된 일본인 대부분은 강제병합 전부터 조선에 거주한 자들로, 거의 조선에 토착화한 인물들이다. 이들은 조선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지위에 올라서기를 기대하고 의원이 되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가 의도한 지방제도 개정에서 ‘자치’는 조선 자치가 아닌 지방자치에 한정한 것이며, 그나마 그 자치는 자문 이상의 권한을 부여하지 않는 명예직에 불과하였다. 조선총독부 통치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의결권과 같은 실제적인 권한을 절대 부여할 생각이 없었다. 그럼에도 조선총독부에서는 현재는 미완성이지만 언젠가는 완전한 지방자치로 나갈 수 있다고 선전·회유하였다. 평의원과 협의회원에 당선된 조선인들이 총독부의 기만적인 지방제도 개정의 의미를 깨닫고 있었는지는 모르나 지방차치가 완전히 주어지는 그 날을 꿈꾸며 조선총독부에 열열한 협조자요, 든든한 원조자가 되었다. 그러나 1920년 내내 자치의 권한은 주어지지 않았다. 


지방제도 개정 1년을 맞아 조선총독부는 일본인 유력자들과 박영효·이완용·송병준 등 친일파를 동원하여 지방제도 실시 성과를 대대적으로 선전하였다. 실제로 도·부·면 자문기관 운영에 불과한 지방제도를 마련하고는 아직은 2천만 민중 대부분이 구습舊習을 타파하지 못하고 있어 자치제도를 실시할 단계가 아니라면서 과도적인 과정의 제도로서 안출案出되었다고 변명하였다. 조선인이 훈련단계를 잘 이겨내면 일본과 동일한 제도를 시행할 것 註19)이며 조만간 조선에 자치제도가 실시될 것처럼 풍선을 띄웠다. 註20) 총독부의 선전책에 호도된 조선인 중에는 독립을 당장 쟁취하지 못할 바에야 자치제도를 실시하여 독립을 준비해야 한다는 이른바 ‘자치파’를 출현시키게 되었다. 


경성부협의회 회원들은 1924년 4월 15~16일 양일에 거쳐 전선공직자연합간담회全鮮公職者聯合懇談會라는 것을 개최하고 부협의회를 자문기구가 아닌 협의기구로 개정해 줄 것을 촉구하면서 자치제와 중의원의원 선거법의 시행을 결의 註21)하였다. 다시 자치운동을 공식적으로 재개한 것이다. 경성부협의 회원들은 대개가 경성상업회의소 회원들이었다. 공동의 이해관계를 갖고 있던 이들은 조선에서 자신들의 상업 활동과 이익 추구를 안정적으로 보장받고자 참정권 및 자치운동을 전개하면서 한편 민심을 회유하고자 했다. 註22) 전선공직자연합간담회에서는 전선공직자대회로 모임을 개편한 후 1924년 8월에 갑자구락부甲子俱樂部라는 상설기구를 두고, 여기서 자치운동만을 전담토록 조치하였다. 註23) 갑자구락부는 1925년 2월과 1926년 1월 구락부원을 일본에 파견해 일본의회를 비롯한 각 방면에 자치·청원운동을 전개한 바 있다. 1926년 6월에 열린 임시대회에서 ① 귀족원령을 개정, 조선귀족들에게 일본귀족과 동일한 권리 실행, ② 조선사정에 적합한 중의원 선거자격과 선거방법의 법규 제정, ③ 조선구관朝鮮舊慣에 준거한 지방자치제 제정 등의 3가지 안건을 결의해서 이를 총독부 당국에 진언하기도 하였다. 註24) 


자치운동과 참정권운동에 동원된 직업적 친일분자들은 참정권과 자치가 조선에 이루어지게 되면 자신들이 상당한 관위官位를 차지할 수 있다고 망상하였다. 하지만 조선총독부는 실제 자치나 참정권을 주고자 할 의도가 없었기에 선전에만 동원되고 언제나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자치 실현 약속의 약발이 떨어져가자 조선총독부에서는 1925년 11월 말에 조선총독부의 어용기관지 『경성일보』 사장 부도도정副島道正이 자치론을 제기하는 것으로 다시금 논쟁에 불을 붙였다. 註25) 이로 인해 민간에서 총독부 방침 여부에 관한 의혹이 불거지자 총독부에서는 서둘러 총독부 의견과는 관계없다고 공식 부인하고 나섰다. 그러나 재조선 일본인과 자치파들 사이에서 자치제를 둘러싼 찬반 공방을 전개하게 하는데 성공하였다. 조선총독부에서는 이를 통해 조선의 여론을 살피고 자치제 실시에 관한 안을 만들어 본국과 협의에 들어갔다. 


자치제 논의로 분열된 민족운동계가 민족단일협동전선체인 신간회를 출범시키고 타협주의를 배격하는 정치운동을 전개하자 1927년 봄에 총독부가 직접 나서서 귀족원·중의원 양원에 자치제 실시에 대한 청원서를 제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귀족원·중의원 모두에서 총독부의 안은 채택되지 않았으며 그해 12월 재등실이 조선총독에서 사임되면서 자치제 논의는 다시 유보되었다. 


3. 참정권운동과 조선의회 설치운동 


‘자치운동’과 함께 ‘참정권운동’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일부 일본인들 사이에서 조선에 참정권을 부여하지 않으면 일본제국이 감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위협론을 무기로 조선의회 설치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지지육삼랑持地六三郞·시내원충웅矢內原忠雄·길야작조吉野作造 등은 모두 조선의회 설치론을 주창한 이들이다. 이들의 조선의회 설치론은 일본 제국주의의 군사적·관료적 지배에 대한 비판적 성격이 있지만 제국주의의 지배 자체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오히려 제국주의 지배를 팽창하여 연장하는데 기여하는 논의였다. 註26) 오로지 ‘절대독립’만을 요구하는 조선인의 여론에 맞서 자신의 권리를 확보하고 영향력을 발휘하고자 했던 재조선 일본인들은 조선총독부의 시정을 비판하는 듯 했지만, 조선인을 앞장세워 이면에서 조종하며 참정권의 목표를 성취하고자 하였다. 조선인으로서 참정권운동을 전개한 대표적 인물이 민원식閔元植  註27)이다. 당시 정계에서 주로 ‘자치파’로 분류되는 자들이 식민지 체제에 안주해서 자신들의 지위와 명예를 높이고자 하는 자 註28)들이라 한다면, “일본 통치 아래서 조선인의 권리와 행복을 구하려는 자”들은 ‘현상파’로 분류되었다. 민원식과 같은 부류들이 대표적인 현상파이다. 


민원식은 1920년 1월 18일에 ‘국민협회國民協會를 결성하고 ‘신일본주의’를 제창하면서 조선의회 설치를 주장하였다. 국민협회 명의로 2월 5일에 100여 명이 서명한 중의원선거법 시행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일본 중의원 의장에게 올렸다. 註29) 이어 6월에도 600여 명이 연서한 청원서를 일본 귀족원·중의원 양원에 제출하였다. 1921년 2월에는 3,000여 명이 연서한 청원서를 갖고 제43회 일본의회에 제출하려고 일본에 건너갔다가 2월 16일에 동경역 제국호텔에서 유학생 양근환梁根煥의 습격을 받고 사망하였다. 註30) 


참정권운동을 주도하였던 민원식 장례식 광경


민원식의 사망은 내외 정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일제는 민원식과 같은 협조자의 죽음을 깊이 애도한 반면 독립운동계에서는 독립운동의 방해자를 처단한 의거로서 소개되었다. 민족적 의지와 달리 일제에 조종당하던 자치·참정권운동은 민원식의 처단으로 급격히 사라졌다. 


그럼에도 참정권운동을 멈추지 않은 자들 참정권 주장의 배경에는 본국 정부에 대해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고 영향력을 발휘하고자 했던 재조선 일본인들이 있었다. 대표적인 결사는 동광회同光會이다. 조선에서 참정권운동을 전개하다가 민족운동계의 강한 반발로 잠정 해체했었던 동광회 조선지부는 1924년에 들어와 동화주의자들만으로 조직을 정비해 재출범하면서 이희간李喜侃을 동경에 파견하고 조선의회 설치운동을 재개하였다. 註31) 


한편 1924년 4월에는 경제계에서 활동하는 일본인들 註32)과 박영효朴泳孝·이재극李載克 등이 참여하여 내선인 유지간에 내선융화를 도모한다는 취지로 동민회를 결성하였다. 동민회는 3,000명의 회원을 거느리며 대구에 지부까지 둘 정도로 세력을 키우고 참정권운동과 선전교화운동을 전개하였다. 註33) 이들 외에도 1923년 11월 21일에 사회개조·내선융화를 목적으로 결성된 혁신당革新黨에서도 자치제를 주창하였고, ‘내선 양 민족의 공존공영’이라는 취지로 평양에서 결성된 대동동지회大東同志會는 3,000명의 회원을 거느리고 자치운동을 벌였다. 註34) 민원식이 처단당한 후 잠시 위축되었던 국민협회國民協會에서도 1924년 7월 김명준 이하 3명이 일본으로 건너가 10,700명이 연서한 참정권 부여를 요구하는 「건백서建白書」를 일본의회에 제출하였다. 註35) 이들은 자신들의 활동을 ‘내선인합동정치운동’이라 명명했지만 사실상 동화운동에 동원된 것에 불과하였다. 


1924년에 들어오면서부터 민립대학설립운동과 물산장려운동 등 교육·산업 방면의 민족주의운동이 소정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시들해지자, 사회주의사상·계급운동자들은 반제운동의 기치를 내걸고 민족운동계의 퇴영적이며 소극적인 면모를 맹렬히 비판하고 나섰다. 각 운동권 내의 갈등과 민족분열상이 치열해지는 틈새를 타고 자치파·현상파들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4. 자치운동을 이용한 민족분열책 


조선인의 독립의지가 3·1운동 때와 같이 전민족 단일의 저항을 일으키지 않도록 조선총독부는 민족 내부에 실력양운동이니 자치론이니 참정론이니 하는 다양한 논의를 전개시키고 여러 정치적 분출구를 만들어 김빼기 전략을 취하였다. 조선인을 참여시켜 조선인의 논의를 존중해준다는 명분 아래, 기실은 조선인의 정치적 성향도 파악하며 민족내부에 갈등을 조장하였다. 이로 보면 국외의 독립운동가들에 의해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실력양성운동을 제외하고 국내에서 전개된 자치와 참정권운동, 그리고 문화운동의 이면에서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민족운동의 완급과 방향을 조종하고 있었다. 


조선인의 실력양성운동 중에 1920년대 전개된 문화운동은 민족운동계는 물론이고 식민지 통치 당국인 조선총독부와 동화주의자들이 조선 민중을 상대로 경쟁적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문화운동’ 그 자체가 민족운동 혹은 민족주의운동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예를 들면 독립의 전단계 준비로써 자치제 실현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고 지방자치제의 실현 그 자체를 목표로 했다면 민족운동의 범주에 넣을 수 없을 것이다. 


민족운동계에서는 자치론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을까. 1923년 가을, 동아일보 계열과 천도교 신파가 중심이 되어 자치론을 검토하였고, 이들에 의해 1924년 1월 중순에 연정회를 조직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 움직임을 포착한 이들에 의해 반대 여론이 불같이 일어나자 조직 결성은 무산되고 말았다. 이 소동의 시작은 이광수가 『동아일보』에 5회1924. 1. 2~6에 걸쳐 「민족적 경륜」을 연재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글에는 “조선 내에서 허하는 범위 내에서 일대 정치적 결사를 조직하여 이 결사로 하여금 당면한 민족적 권리와 이익을 옹호하고 장래 구원한 정치운동의 기초를 만들게 할 것”이라 하여, 총독부 법률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정치적 결사를 위하여 실력양성할 것을 주장하였다. 


실력양성운동을 전개한 이들은 일제가 조성한 ‘문화정치’의 무대를 충분히 활용하고자 한 나름의 포석을 깔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풍미했던 개조론의 흐름에 편승하였고, 이전의 민족운동을 반성하면서 민족이 나락으로 빠진 원인을 제국주의 침략에서 찾기보다는 민족내부의 책임으로 돌려 민족성을 개조할 것을 논한 민족개조론을 발표하여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민족적 경륜」이 연재된 직후부터 민족운동계는 유력 민족단체인 연정회를 조직하기 위한 모임이 이루어졌지만 조선노농총동맹과 조선청년총동맹이 나서서 타협적 민족운동에 대한 반대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였으며 『동아일보』 불매운동으로까지 발전하였다. 구체적 결사를 결성하기도 전에 연정회 조직은 타협주의 자치운동으로 낙인찍히면서 더 이상의 진전을 보지 못하고 중단되었다. 조선총독부에서는 이광수가 「민족적 경륜」 집필에 앞서 1923년 3월과 10월 걸쳐 두 차례나 북경으로 가서 안창호를 만나 자치문제를 협의했다고 선전하였다. 조선총독부는 민족의 추앙을 받고 있는 지도자 안창호를 자신들이 벌이는 자치운동의 협력자로 포섭하고자 했다. 註36) 


자치제와 관련된 신문기사


안창호가 북경에서 이광수를 만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알려진 대로 3월은 안창호가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하고 여기에 전념하고 있던 터라 북경에 갈 수 없는 시기였고, 10월은 이상촌건설을 위해 만주 등지를 시찰하고 있었을 때였다. 그러나 안창호와 이광수 양인의 북경 만남의 일시는 1924년 4월 8일로 확인된다. 註37) 북경에서 이광수가 면담을 요청하는 전보를 상해로 보내자 안창호가 북경으로 가서 이광수를 만나 회견한 후 이광수를 천진까지 배웅하였다. 당시 북경 회견은 동아일보사 주관의 재외동포위문회에서 모금한 자금 1,700원을 안창호에게 전달하는 명목으로 이루어졌다. 이때 만남에서 안창호와 이광수는 여러 가지 의론을 나누었으나 자세한 회견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다. 註38) 


총독부 기록에 의하면, 자치론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고 하며 안창호가 수양동맹회1922년 2월 12일 서울에서 결성와 동우구락부1923년 1월 26일 평양에서 결성 양 단체가 “흥사단과 동일한 주의·목적의 결사이므로 양자를 합동해 결사의 확대 강화를 도모하라”고 이광수에게 지시했다고 한다. 註39) 『재등실문서齋藤實文書』에 기록된 대로라면 안창호는 자치론에 경도된 실력양성론자·민족개량주의자라고 단정할 수 있다. 그러나 안창호는 3·1운동 이후 자치론과 참정권론이 대두될 때인 1922년 강제병합기념일을 기해 『독립신문』 지상을 통해 문화운동과 실력준비를 주장하는 이들을 비판하고 독립운동의 방법은 문화운동이나 실력준비에 있지 않고 오로지 혁명의 유일한 수단은 ‘파괴’에 있을 뿐이라고 단언한 바 있다. 실력준비와 문화운동의 방략 역시 독립운동의 중요한 일부분이지만 식민지 조선에서는 해외에서와는 달리 문화운동과 실력준비운동을 논하는 것은 공담이요 허언일 뿐이며, 군중의 심리를 ‘착란錯亂’케 하여 그 위험이 “자치운동자나 내정독립운동자보다 심하도다” 註40)라며, 국내에서 전개된 자치운동·내정독립운동·문화운동 모두들 비판하였다. 안창호는 그외에도 상해에서 여러 차례 공식석상과 『독립신문』을 통해 자치운동을 단호히 비판하였음에도 총독부에서는 국외 독립운동세력의 대부격인 안창호가 마치 자치론자인 것처럼 의도적으로 유포하였다. 


1926년 6·10만세운동이 일어난 후 총독부가 다시금 자치운동의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을 때, 안창호는 미국에서 돌아와 침체에 빠진 임시정부를 살리고 유일독립당 결성을 위한 연설회를 7월 8일 상해 삼일당三一堂에서 개최한 바 있다. 이날 「대혁명당을 조직하자, 임시정부를 유지하자」 註41)라는 연제의 연설에서 안창호는 자치나 참정은 “우리 민족을 영멸永滅시키자는 계획”이라고 설파하고, 일본인과 일본화한 조선인들이 토지와 경제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이 주장하는 자치는 결국 그들만의 내정자치를 통해 일본의 착취를 영원히 보전하려는 행위라며 정확한 시대인식을 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독립의 준비단계로서의 자치론’을 주장하는 자들마저도 어리석은 자들이라 비판하였다. 註42) 


이처럼 안창호는 일관되게 절대 독립만이 유일한 민족혁명의 길임을 천명했으나 안창호를 자치론·참정권론자로 몰기 위한 총독부의 음모적 시도는 간단없이 계속되었다. 안창호의 연설이 있고난 지 2개월 9일만에 만주 길림 일본총영사관에서 입수한 한국재생동맹회韓國再生同盟會라는 단체 명의로 「흥사단 수령 안창호 성토」라는 그 성토문에는 안창호를 “지방열 고취자, 사기꾼이며, 폭동 파괴 반대자, 자치·참정운동자, 비열한 타협주의자”로 매도하였다. 註43) 한국재생동맹회라는 정체 불명 단체가 안창호를 매도한 행위는 일제의 민족분열공작에 의해 자행된 것으로 보인다. 


총독부의 문화운동 공세와 사회주의자들의 계급운동으로 민족운동계가 분열로 치닫자 독립운동 진영에서는 새로운 국면 전환을 위해 유일당운동을 전개하였다. 국내에서는 유력한 민족운동 단체 조직을 위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1925년 9월 15일에 일본과 구미지역에서 유학하고 학계와 언론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던 인사들에 의해 조선사정조사연구회朝鮮事情調査硏究會가 출범하였다. 註44) 이 단체는 민족주의의 대표적 결사가 되고자 하였다. 조선사정조사연구회는 “조선에는 조선의 역사가 있고 독특한 민족성이 있어서 저와 같이 조선민족을 자멸로 유도되지 않게 함으로써 능히 그 가부를 연구하고 그 장점을 잡아 민족정신의 보전에 노력하고자 한다” 註45)는 취지를 내세우고 법제·재정·금융·교육·상업·교통·공업·농업 등의 각 분야에 대한 문화학술활동을 통해 민족운동의 이론적 지도를 유도하여 민족운동계를 통합시키고자 시도하였다. 그러나 학술운동을 통해 유력한 민족운동 단체를 조직해 보고자 하는 시도는 민족운동계 내부의 사상적 편차와 현실운동 방향에 대한 견해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해체되고 말았다. 註46) 


1926년 6·10만세운동이 민족운동계를 자극하며 항일운동의 기운이 거세지자 총독부는 지방의회를 통해 지역유력자들을 지방지배의 하위파트너로 삼아 통치의 안정을 기하고자 전열을 가다듬었다. 완전한 지방자치제를 실시할 예정이라는 조선총독부의 선전 의도에 휩싸인 일부 민족주의자들은 1926년 10월 초순 이래 여러 차례 회합하며 거듭 자치론에 대한 의견을 교환한 바 있다. 註47) 이들의 회합은 총독부가 조만간 시행에 들어갈 자치제 운영에 대비한 준비적 성격이 강하였다. 민족운동계와 총독부와 사이에서 연락책으로 활동한 이는 아부충가阿部充家였다. 민족운동계의 반발로 좌절된 연정회 조직운동을 다시금 부활하여 자치운동을 재개하고자 하는 움직임으로 판단한 조선일보계의 안재홍은 김준연 등과 함께 조선민흥회朝鮮民興會에 이 진상을 통보하였다. 조선민흥회는 1926년 9월 물산장려회를 주도한 민족주의자들과 서울청년회계의 사회주의자들이 결합·창립한 협동전선체였다. 조선민흥회의 명제세明濟世 등은 회원들과 모여 대책을 논의하고 최린을 찾아가 자치운동 단체를 조직하면 방관하지 않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러자 당초 10월 13일에 열기로 한 준비회의격인 시사간담회가 14일로 연기되었고 회의 당일에도 회합 장소인 명월관에 민흥회와 전진회前進會  註48)의 회원 여러 명이 진을 치고 방해함으로써 연정회 결성 시도는 또다시 좌절되고 말았다. 註49) 


자치론에 대한 반대여론이 일어나는 속에서 1927년 1월 19일 안재홍을 비롯한 부르주아민족주의 좌파계 인물들과 사회주의자들은 비타협주의를 표방한 민족단일연합전선체로서 신간회를 결성하였다. 신간회는 비타협민족주의 입장을 고수하고 정치투쟁을 임무로 하면서 논란이 분분했던 민족운동의 정체성을 재정비하고 민족운동의 주도권을 잡아나가자 자치제 논의는 일단 소멸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에서는 ‘내선합동內鮮合同’의 명분을 내걸고 친일세력들을 동원해 어떻게든 자치·참정권운동의 불씨를 되살리고자 하였다. 


1927년 11월 24일에 국민협회·갑자구락부·동민회 등 일전의 각파유지연맹各派維持聯盟에 참여한 7개 단체가 평양의 대동동지회 간부들을 초빙한 가운데 서울에서 시국간담회를 개최하고 사상선도·금융조합 개혁·한일공학 문제 등을 토로하면서 은근히 참정운동의 방침을 결의하였다. 註50) 여기에 친일파들만이 아니라 재조선 일본인들도 측면에서 총독부의 자치·참정권운동을 지원하고 나섰다. 재조선 일본인들은 1920년 초부터 자치론을 펼치면서 조선 내의 여론 조성에 열을 올렸지만 성과를 올리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자치운동 재개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고 1926년 1월에 중앙조선협회中央朝鮮協會  註51)를 결성하였다. 중앙조선협회는 1920년 초부터 자치운동을 전개했던 일본인과 총독부 관료출신, 이전에 총독부 관변단체에서 활약했던 이들에 의해 “조선에 관한 정치 경제 기타 시사문제 등을 연구조사 註52)하는 기관”임을 자처하였다. 중앙조선협회는 서울과 동경에서 인적·조직적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1920년대 중반 이후부터 1930년대 말까지 내선융화·신조선 건설·자치운동 등을 전개하였다. 이처럼 총독부에서는 민족운동계의 악화된 여론에도 불구하고 상관하지 않고 조선 내에 자치파를 확대시켜 독립운동 세력의 확대에 대치하고자 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경주하였다. 


1929년 2월에는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 직접 경성·평양·대구·부산 등 주요 지역에서 자치제를 실시해 줄 것을 요구하는 건의서를 일본 중의원衆議院에 제출하여 여론의 주목을 끌었다. 특히 1929년 9월에 발발한 광주학생운동이 조선 전역은 물론 국외로까지 전파되자 식민지 통치의 위기에 직면한 조선총독부에서는 자치론의 카드를 다시 내밀었다. 그러나 여전히 일본인 간에는 조선의회의 설치를 반대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들의 반대 이유는 1920년 지방제도 개정에 앞서 조사했을 때와 내용상 큰 차이가 없다. 조선의회 설치 불가 사유는 조선인은 제국의 진정한 국민이 될 수 없기에 믿을 수 없고, 병역의 의무를 지지 않고 있으며, 민도民度가 낮아 아직은 의회 대표자를 선거하기 위한 정치적 훈련이 안되었다는 것이다. 註53)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1920년대 내내 논란이 되어온 조선에서의 참정권과 지방자치제는 논란에 그쳤을 뿐 그 실천운동조차 일어나지 않은 채, 1930년 12월에 지방제도를 개정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註54) 그러나 개정된 지방제도 역시 1920년에 개정된 지방제도와 그 내용에서 큰 차이가 없다. 그 결과 1931년에 시행된 도·부·군·면 각 의원 선거에서도 변함없이 부세 연액 5원 이상 납부자에게만 유권자 자격을 줌으로써 재조선 일본인이 여전히 지방선거에서 우세한 입장을 고수하였고 註55) 조선인의 정치적 처지는 별반 진전되지 못하였다. 1920년대 내내 통치상 위기가 닥칠 때마다 조선인을 우롱하며 약속했던 지방자치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애초에 조선총독부 통치방침에 조선자치는 물론이요 지방자치마저도 조선에 실시할 의도가 없었던 것이다. 


1920년대 논쟁이 된 자치운동은 민족운동의 분열을 가져온 주체였지만 민족주의운동 진영에서는 논의에 그쳤을 뿐 한 번도 자치운동을 실시한 바 없다. 자치론은 일제에 의해 조종된 친일분자들과 재조선 거주 일본인, 일본 내 정치가들이 주도했다. 1920년 내내 이 문제를 민족운동계에서 논쟁을 불러일으키고자 의도되었으나 거부당하였고 일본 국회에 청원서를 올리는 차원에서 중단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자치제 실현이라는 공론空論으로 조선총독부는 조선 민중을 기만하였고 실체도 없는 자치론 논란을 벌여 민족운동 내부에 갈등을 일으키는데 어느 정도 성공하였다.